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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부

3일 初三日 장석(丈席)께서 비록 허락하지 않았지만 친히 행록(行錄)을 상고하여 자세하게 논평하였는데, 편차(篇次)가 뒤죽박죽이고 지운 글자가 꽤 있어서 긴요하지 않은 뜻이 있는 듯하였다. 이에 교정(校正)을 청했더니 《돈학집(遯壑集)》9)을 내보이시며, "이것은 바로 충강공(忠剛公, 송간(宋侃))의 왕복 서간인데, 비록 몇 편에 불과하나 오히려 행록 한 권보다 낫네."라고 말씀하셨다. 대략 산정(刪正)10)은 하였으나 아직 허락을 받지 못하였으니 걱정스럽다. 丈席雖爲不許, 親考行錄, 仔細評論, 以篇次之渾雜, 文字之頗鎖, 似有不緊之意。 故請以校正, 則出示《遯壑集》曰: "此是忠剛公往復書, 則雖數篇猶勝於行錄一卷云云。" 而略爲正刪, 然尙未蒙許, 悶悶。 둔학집(遯壑集) 조선 전기의 문신 송경원(宋慶元, 1419~1510)의 시문집으로 상·하 2권 1책이다. 1826년(순조26)에 초간본이 나왔고, 1921년에 중간본이 나왔다. 중간본의 책머리에 1920년에 쓴 김영한의 중간서문과 1826년에 쓴 송치규의 〈돈학실적서(遯壑實蹟序)〉가 있고, 책 끝에 윤태일의 발문과 송증헌의 중간발문이 있다. 상편에 시·서·논·기 등과 하편에 전·가장·행장·묘지 등이 실려 있다. 산정(刪正) 글의 쓸데없는 자구를 없애고 다듬어서 글을 잘 정리하는 것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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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일 初八日 ○아침 전에 주관(主官)이 직접 살펴보려고 올라왔기에 뒤를 따라 이씨 무덤으로 갔다. 주관의 말하던 중에 "이미 송씨 산소의 백호(白虎) 안에 있으니 이가(李哥)가 산송에 지겠다."하고 갔다. 그러므로 나는 일행과 경순, 종륜 두 일가와 함께 읍으로 왔다. 어제 측량한 읍리(邑吏) 김진홍(金鎭洪)에게 물으니, 도형기(圖形記, 지적도와 유사)에 결과를 적어두었다고 하였다. 과연 베껴서 나오니, 관청의 판결 내용에 "송씨 측 선산은 곧 용호(龍虎)가 수호하는 땅 7리를 분할하여 준다. 이씨 측 고조부 무덤은 비록 장례를 지낸 지 오래되었을지라도 보수(步數)32)의 원근을 막론하고, 송씨 산소의 백호 내에 있으니, 송리(訟理)로 헤아려보면 구금해야 마땅하거늘, 송사가 변하여 지금 송사를 일으켰으니, 오히려 늦었다고 본다. 이씨 측이 송사에 패소한 것으로 치부한다."라고 되어있었다. 경순과 종륜 두 일가는 다시 관아로 들어가서 무덤을 파서 이장할 날짜를 다짐(考音)33) 받으려고 읍내에 남아있었다. 나는 일행과 같이 출발하여 서울로 향하였다. 지아미(芝娥眉) 고개34)에 이르러 요기를 하고, 올항(兀項)에 이르러 유숙하였다. ○朝前, 主官親審次上來, 隨後往李塚。 主官言內"旣是宋氏山所白虎內, 則李哥落訟。"云而去。 故余與同行及敬純、鍾崙兩宗。 偕來邑中。 昨日尺量邑吏金鎭洪問之, 則題課於圖形記云矣。 果爲謄出, 而題內"宋班先山, 卽畵給七里守護之地也。 而李班高祖塚, 雖葬在年久, 毋論步數遠近, 是在宋山白虎之內, 揆以訟理, 在所當禁是去乙, 訟變今始起訟, 尙云晩矣。 李班置諸落科事"。 敬純、鍾崙兩宗, 更入官庭, 掘移日納考音次, 留在邑中。 余與同行發向京行。 抵芝娥眉峴療飢, 抵兀項留宿。 보수(步數) 남의 무덤의 용호(龍虎) 이내에는 무덤을 쓸 수 없다는 규정이 있다. 다짐(考音) 백성이 관부에 제출한 소장ㆍ청원서ㆍ진정서에 대하여 관부에서 써 주는 판결문이나 처결문을 말한다. 지아미(芝娥眉) 고개 전라북도 익산시 여산면의 북쪽으로 3km쯤 되는 곳에 있는 고개로 '지애미 고개'라고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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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일 初九日 ○새벽에 출발하였다. 밤새 내린 비로 길이 진창이 되어 행보가 몹시 힘겨웠다. 사교(沙橋)35) 객점에 이르러 무열 씨와 심형을 전당(錢塘)의 상철(相喆) 집으로 보내고, 나는 다른 일행과 거기서 밥을 먹고 출발하였다. 마고평(馬古坪)에 이르니 진창길이 아주 힘들었다. 초포(草浦)36) 객점에 이르러 잠시 쉬었다. 거사(去思) 주막에 이르러 유숙하였다. 점심 무렵 길에서 무열 씨가 먼저 〈계룡산(鷄龍山)〉 시를 다음과 같이 읊었다.금계를 부르고 용이 나타나는 산(山號金鷄與見龍)요순시대의 구물이 진객에게 드러났네(唐虞舊物露眞客)서쪽엔 금강이 띠처럼 둘러 있으니(西望錦水環如帶)올라가 선령을 한번 만나고 싶구나(上有仙靈願一逢)내가 다음과 같이 차운하였다.계룡이라 부르는 들쭉날쭉 높은 산이 있는데(有山高齾號鷄龍)늘 안개가 감싸고 있어 그 위용을 분별하지 못하네(常護烟霞不辨容)봉우리 늘어서고 물이 돌아가는 건 우연이 아니고(峯列水回非偶爾)하늘의 법칙과 땅의 축이 서로 조화롭게 만나서라네(乾經坤軸好相逢)오서 객이 다음과 같이 차운하였다.닭 머리가 늘어선 듯 용이 엎드린 듯이(列似鷄頭伏似龍)하늘이 아름다움을 산의 위용에 다 주었네(天將佳錫盡山容)흰 구름 푸른 이내 낀 기이한 절경이 많으니(白雲靑靄多奇絶)이곳에 사는 신선을 나는 만나고 싶네(這處仙人我欲逢) ○曉發。 夜雨泥濘, 行步甚艱。 抵沙橋店, 送武說氏及心泂於錢塘相喆家, 余則他同行仍朝飯發程。 至馬古坪, 則泥路極難。 抵草浦店暫憩。 抵去思幕留宿。 午間路上, 武說氏先吟《鷄龍山》韻曰: "山號金鷄與見龍, 唐、虞舊物露眞客。 西望錦水環如帶, 上有仙靈願一逢。" 余次曰: "有山高齾號鷄龍, 常護烟霞不辨容。 峯列水回非偶爾, 乾經坤軸好相逢。" 烏栖客次曰: "列似鷄頭伏似龍, 天將佳錫盡山容。 白雲靑靄多奇絶, 這處仙人我欲逢。" 사교(沙橋) 충청남도 논산시 부적면 신교리이다. 초포(草浦) 충청남도 논산시 광석면 항월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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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일 二十四日 아침부터 가랑비가 내렸다. 장석 댁에서 아침을 마련해 주어 매우 감사하였다. 아침을 먹은 뒤 추수할 무렵에 다시 오겠다 아뢰고 그대로 하직(下直)하였다. 비를 무릅쓰고 행장을 꾸려 출발한 것은 비가 심하게 올 것 같지 않았기 때문이었는데, 몇 리를 채 못 가서 큰비가 내렸다. 비를 맞으며 20리까지 갔으나 비가 멈추지 않아 멀리 갈 수 없기에 그대로 머물렀다. 自朝微雨。 朝飯丈席宅備給, 可感可感。 食後以秋成更來告白, 仍下直。 冒雨治發者, 以雨意之似不大端故矣。 行未數里雨大注, 冒雨至二十里, 以雨勢之不止, 不得遠行, 仍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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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일 二十日 아침 전에 문대(文大)씨와 종친들이 찾아와서 만났다. 아침을 먹은 뒤에 길을 나서 구룡정(九龍亭)에 들렀다. 잠시 이야기를 나눈 뒤 길을 나서 과역(過驛) 시장 근처에 이르러 점심을 먹었다. 대곡(大谷)의 형님과 천노(千奴)를 만나 집안 소식을 처음 들었는데, 증아(曾兒)가 순종(唇腫, 입술이 붓는 것)이 아주 심하다고 하였다. 그 말을 들으니 걱정스러운 마음을 견딜 수가 없어 그길로 동행하여 집으로 돌아왔다. 朝前文大氏與諸宗來見。 食後發程, 入九龍亭。 暫敍後登程, 抵過驛市邊中火。 逢大谷兄主及千奴, 始聞家信, 則曾兒以唇腫大端云。 聞不勝悶慮, 仍爲同行歸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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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일 初三日 오촌(鰲村) 동방록(同房錄)송석년 무술생 수이 여산 사람 흥양에 거주송흠영 임술생 자량 은진 사람 회덕에 거주정현석 갑인생 군범 광주 사람 임천에 거주정재팔 계해생 순거 의성 사람 용담에 거주금석로 병진생 영수 봉성 사람 옥천에 거주 鰲村同房錄宋錫年 戊戌 壽而 礪山人 居興陽宋欽悅 壬戌 子良 恩津人 居懷德鄭玄錫 甲寅 君範 光州人 居林川丁載八 癸亥 舜擧 義城人 居龍潭琴錫老 丙辰 永叟 鳳城人 居沃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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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일 十四日 날씨가 조금 풀렸다. 식후에 청파(靑坡) 상원(尙元)의 집에 가서 흥양(興陽)의 제태(祭駄, 제수(祭需)를 실은 짐바리) 하인으로 온 자를 보고자 하였는데 없다고 하니, 괴이하다. 감기가 가는 곳마다 크게 기승을 부리니 중도에 아파 눕는다 해도 어찌할 수 없는 일이 아니겠는가. 오늘 한성부(漢城府)2)에서 초보(抄報, 뽑아 보고함)하였다. 오부(五部)3)에서 죽은 자가 4만 8000여 명이라고 하는데, 남쪽 소식을 전혀 들을 수 없어 답답한 심정을 이루 말할 수 없다. 日氣稍解。 食後往靑坡 尙元家, 欲見興陽祭駄下人來者而無之云, 可怪。 感氣到處熾盛, 無奈中路痛臥而然耶? 今日自漢城府抄報, 死亡於五部者, 乃爲四萬八千餘名云, 而南中消息, 寂然無聞, 悶菀不可言。 한성부(漢城府) 조선왕조 수도의 행정구역 또는 조선왕조 수도를 관할하는 관청의 명칭이다. 오부(五部) 조선 시대 한성부에 설치한 중(中)·동(東)·남(南)·서(西)·북(北)의 부의 종5품 아문으로 오부 관내에 거주하는 사람들의 위법 사항과 교량·도로·반화(頒火, 매년 병조에서 써 오던 불씨를 버리고 새로운 불씨를 만들던 의식)·금화(禁火)·가대타량(家垈打量, 집터 측량), 그리고 사람이 죽으면 검시하는 일 등을 관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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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일 十五日 온화하고 청명하다. 오늘은 바로 기일(忌日)이다. 마음이 안 좋은 것이 이루 말할 수 없이 심하다. 아침을 먹은 뒤에 경욱(景旭)과 냉동(冷洞)의 김 찰방(金察訪) 집에 가서 잠시 이야기를 나누고, 거문고 소리를 들으며 노닐다가 월암(月巖)에 가서 심 도정(沈都正)을 만나 한참 동안 머물며 이야기하고 왔다. 溫和淸明。 今日則卽忌日也。 心懷之惡, 不堪言不堪言。 食後與景旭, 往冷洞 金察訪家暫話, 聽琴而遊, 因往月巖見沈都正, 移時留話而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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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일 二十七日 주동(注洞)에 가서 잠시 이야기를 나누었다. 오는 길에 종현(鍾峴) 갑산(甲山)의 집에 들렀으나 주인은 보지 못하고, 이 도사(李都事)가 그의 집안 하인[家僮]을 거느리고 있는 것을 보았다. 장흥동(長興洞)으로 들어가 이 충주(李忠州)를 만나고 왔다. 往注洞暫話。 來路入鍾峴 甲山家, 不見主人, 因見李都事率其家僮。 入長興洞見李忠州而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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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일 二十九日 돈 4냥을 기지(器之)에게 빌려 왔다. 錢四兩貸來於器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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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十二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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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일 初五日 아침을 먹은 뒤에 길을 나서 금곡(金谷) 이 생원(李生員) 집에 이르러 잠시 이야기를 나누었다. 귀정(歸亭) 앞길에서 우연히 조 석사(趙碩士)를 만나 곧바로 조생(趙甥)의 서간(書簡)을 전하고 나서 서둘러 석곡(石谷) 시장가에 이르니 사헌(士憲)이 기다리고 있는 지 오래였다. 그대로 석곡(石谷) 박가(朴哥)의 점막(店幕)에 머물렀다. 대개 서울 사람 김성삼(金聖三)을 기다리려는 것이었는데 종일토록 오지 않으니 한탄스럽다. 食後登程, 至金谷 李生員家暫話。 至歸亭前路, 偶逢趙碩士, 卽傳趙甥書簡, 急到石谷市邊, 士憲留待已久矣。 仍留石谷 朴哥店幕, 盖欲留待京人金聖三故也, 終日不來, 可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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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일 初六日 일찍 출발하여 불우치(不憂峙)에 이르러 아침을 먹었다. 곡성(谷城) 이천(離川)에서 점심을 먹고 말에게 꼴을 먹였다. 창화점(昌和店)에 이른 뒤에 남성(南省) 방생(房生) 집을 찾아갈 때 말이 석교(石橋)에서 떨어져 짐바리가 모두 젖었으므로 몹시 화가 났다. 도리산(道里山) 방생의 집에 이르러 유숙하면서 성산(聲山) 기지(器之)의 병 소식을 들었으니 매우 염려스럽다. 早發至不憂峙朝飯。 谷城 離川中火秣馬。 至昌和店後, 尋入南省 房生家之際, 馬落石橋, 所駄卜物盡濕, 可憤可憤。 至道里山 房生家留宿, 聞聲山 器之病報, 極可慮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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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일 十六日 사근천(沙斤川)에 이르러 점심을 먹었다. 진흙탕에 길을 나서 시흥(始興) 읍내에서 묵었다. 至沙斤川中火。 汚路作行, 宿始興邑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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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일 十七日 주인이 마필을 사고자 하는 뜻이 있었으므로 새벽에 매매를 하였다. 노량(露梁)까지 걸어서 육사묘(六死墓)2)를 배알하였는데, 단지 성(成)·박(朴)·이(李)·유(兪) 네 선생의 표갈(表碣)만 있고, 하(河)·류(柳) 두 선생의 묘에 표석(表石)이 없어3) 자세히 알 수 없으니, 한탄스럽다. 다만 묘의 모습이 무너져서 겨우 몇 줌의 배토(杯土)만이 무덤을 덮고 있는데, 사초를 개수하고 영축(營築)할 사람이 없었다. 삼가 생각건대, 육신(六臣)의 절의는 만고토록 세울 강상(綱常)이라 할 만한데도 수호할 사람이 없어 장차 매몰되어 징험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으니, 길 가는 사람들의 탄식과 지사(志士)들의 눈물을 어찌 다 말할 수 있겠는가.나루터에 이르러 앞다투어 강을 건널 때 멀리 언덕 위를 바라보니 팔아 버린 말이 나루에 와서 서 있었는데, 이는 필시 물리려는 계책인 것이다. 선공(船工)을 재촉하여 급히 강을 건넜다. 우연히 사두(沙頭)에서 고마(雇馬)를 얻어 짐을 싣고 말을 타고서 채찍을 재촉하여 청파(靑坡) 송상원(宋尙源)의 집에 이르렀다. 얼마 지나지 않아 말을 끌고 찾아와서 곤란한 말을 하고 도로 물렸다. 아침을 먹은 뒤에 차동(車洞)의 팔선(八仙) 집에서 머물러 있다가 동행하여 들어가 영감(令監)을 만났는데, 온 집안이 무탈하였다. 曉頭主者有願買馬匹之意, 故因爲買賣。 徒步至露梁, 拜謁六臣墓, 只有成、朴、李、兪四先生表碣, 河、柳兩先生之墓無表石, 不得詳知, 可歎。 但墓貌崩頹, 僅有數杯土封域, 而無人改莎營築。 竊念六臣之節, 可謂綱常萬古, 而守護無人, 將至於埋沒無徵之境, 行路之咨嗟, 志士之隕涕, 曷可勝言? 至津頭, 爭先渡江之際, 遙見岸上, 所賣之馬, 來立津頭, 必是欲退之計也。 催促船工, 急急渡江。 偶於沙頭得雇馬, 駄而騎之, 催鞭至靑坡 宋尙源家矣。 不移時持馬來訪, 困說還退矣。 朝飯後, 至車洞 八仙家住着, 同行入見令監, 擧家姑無恙矣。 육사묘(六死墓) 1456년(세조2) 단종 복위운동(端宗復位運動)을 하다가 순절한 사육신묘(死六臣墓)로, 서울 동작구 노량진에 있다. 사육신은 '성삼문·하위지·이개·유성원·박팽년·유응부' 등 여섯 명의 충신을 일컫는 말이다. 이들은 함께 거사를 계획했던 김질의 배신으로 체포되어 가혹한 고문을 당한 뒤 죽음을 당했지만, 숙종 대에 이르러 복권되었다. 하(河)·류(柳)……없어 하위지(河緯地)와 유성원(柳誠源)을 말한다. 사육신묘는 원래 박팽년(朴彭年)·유응부(兪應孚)·이개(李塏)·성삼문(成三問)의 묘만 있었고, 하위지(河緯地)와 유성원(柳誠源)의 묘는 없었는데, 서울시에서 1977~1978년까지 사육신 묘역의 정화 공사를 할 때, 하위지와 유성원의 가묘(假墓)를 추봉(追封)하여 사육신의 묘를 모두 갖추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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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일 十五日 이른 아침 잠에서 깨기도 전에 영감(令監)이 일어나라고 하여서 옷깃을 끌고 올라갔더니, 김 동지가 생일이라 하여 술과 음식을 성대하게 갖추어 가지고 왔다. 함께 먹고 마시다가 문득 절구 한 수를 읊어 하례하였다.인생 칠십은 예로부터 드물었다며5)(人生七十古來稀)두 공부6) 시 속에 부러움과 감탄 자아냈네(工部詩辭艶歎唏)더구나 우리 영감 장수의 복록 더하시니(況我令公增壽福)뜰 가득 채색 찬란한 노래자의 옷이로세7)(滿庭斑爛摠萊衣)인하여 역대의 일을 이야기하다가 파하였다. 早朝未起, 令監要起, 故牽衣上去, 則金同知以其壽日, 盛具酒饌而來, 同與飮啖, 猝吟一絶以賀曰: "人生七十古來稀, 工部詩辭艶歎唏。 況我令公增壽福, 滿庭斑爛摠萊衣。" 因穩話歷代事而罷。 인생……드물었다며 두보의 〈곡강(曲江)〉 시에 나오는 구절을 가리킨다. "퇴청해서는 날마다 봄옷을 전당잡히고, 강나루에서 실컷 취해 돌아오네. 술빚은 가는 곳마다 있어도, 인생의 칠십은 예로부터 드물다네.[朝回日日典春衣, 每日江頭盡醉歸. 酒債尋常行處有, 人生七十古來稀.]"라고 읊었다. 두 공부 공부(工部)는 검교 공부 원외랑(檢校工部員外郞)을 지낸 두보(杜甫, 712~770)의 별칭이다. 두보는 70세까지 살지는 못하고 59세에 세상을 떠났다. 노래자의 옷이로세 원문의 '내의(萊衣)'는 노래자(老萊子)의 옷이라는 말이다. 춘추 시대 초(楚)나라 사람인 노래자는 효성으로 어버이를 섬기어, 일흔 살의 나이에도 색동옷을 입고 어린아이의 놀이를 하며 어버이를 기쁘게 하였다고 한다. 《小學 稽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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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일 初三日 다시 들어가 알현하니 며칠 머무는 것이 좋겠다고 하시기에 옷깃을 여미고서, "어찌 감히 분부대로 하지 않겠습니까?"라고 답하였다. 그리고 《격몽요결(擊蒙要訣)》을 가지고 앞으로 가서 배움을 청하였더니, 장석(丈席)이 말씀하시기를, "옛날에 중봉(重峯) 조선생(趙先生)57)이 항상 《격몽요결(擊蒙要訣)》과 관솔58)을 가지고 다니면서 길을 가던 중이라도 만약 배움을 요청하는 사람이 있으면, 그 관솔로 불을 밝혀 가르치기를 게을리하지 않았었네. 내가 비록 남의 스승이 될 만한 사람은 아니지만 어찌 한 마디 가르침을 아끼겠는가?"라고 하셨다. 이어 교수(敎授)가 되어 은미한 말과 심오한 뜻으로 사람의 마음을 환하게 통하게 하셨다. 잠깐이나마 가르침을 받아도 마치 봄바람 속에 있는 듯한데, 더구나 오랫동안 직접 가르침을 받은 이들은 어떠하겠는가. 행랑으로 나와 세 군자와 함께 머물렀다. 更爲入謁, 則以數日留連爲可云, 斂袵而對曰: "敢不依敎?" 而持擊蒙要訣, 進前請業, 則丈席曰: "昔重峯 趙先生, 常載要訣與明松而行, 雖行路之中, 若有請業之人, 燃其明松, 敎之不倦, 則余雖無爲人之師, 何靳一敎乎?" 仍爲敎授, 微辭奧旨, 令人心神, 豁然貫通。 暫時薰陶, 如在春風中, 而況於親炙之久者乎? 出來廊底, 與三君子同留。 중봉(重峰) 조선생(趙先生) 조헌(趙憲, 1544~1592)으로, 본관은 배천(白川), 자는 여식(汝式), 호는 중봉 또는 후율(後栗)이며, 시호는 문열(文烈)이다. 임진왜란 때 의병장으로 활동하다 금산전투(錦山戰鬪) 때 전사하였다. 이이(李珥)와 성혼(成渾)에게 배웠고 '기발이승일도설(氣發理乘一途說)'을 지지하여 이이의 학문을 계승 발전시켰다. 저서에 《중봉집》이 있다. 관솔 송진이 많이 엉긴 소나무의 가지나 옹이로, 불이 잘 붙으므로 예전에는 여기에 불을 붙여 등불 대신 이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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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일 初六日 아침을 또 준비해 주니 부담스러운 마음을 금할 길이 없어서 편치 않다는 뜻을 누차 말씀드렸더니 또한 그러지 않아도 된다고 말씀하시었다. 저녁을 먹은 뒤에 제군(諸君)들과 함께 사랑에 들어가서 한참 동안 이야기를 나누다가, 나는 먼저 나왔다. 금 석사(琴碩士)가 밤이 깊은 뒤에 나와서 말하기를, "요청한 문자의 초고를 보여 주어서 보고 왔습니다."라고 하였다. 기대하던 차에 이처럼 반가운 소식을 들으니 매우 기쁘고 다행스러웠다. 朝飯又備給, 不勝不安, 故以不安之意, 累次陳達, 則亦以不然之意言及耳。 夕飯後, 與諸君入去舍廊, 移時奉話, 余則先出矣。 琴碩士深夜後出來而言曰: "所請文字記草出示, 故見而來矣。 " 企待之餘, 聞此喜消息, 忻幸忻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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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일 十一日 ○새벽에 출발하여 덕평(德坪)39)에 이르자 막 동이 텄다. 천안(天安) 도리치(道理峙)40)에 이르러 아침을 먹었다. 직산(稷山)41) 삼거리에 이르러 점심을 먹었다. 홍경(洪景) 객점에 이르러 유숙하였다. 새벽에 출발할 때 무열 씨가 먼저 다음과 같이 읊었다.집 남쪽 새벽닭 소리 귓전 가득 들리는데(屋南晨鷄滿耳聽)동녘에 아직 해는 뜨지 않고 별만 반짝이네(東猶不出啓明星)승려가 등불을 가지고 앞길을 재촉하니(有僧持燭催前路)앞에 펼쳐진 수많은 산은 푸르름을 갈아놓은 듯하네(當面群山只磨靑)내가 다음과 같이 차운하였다.금계가 한 차례 우니 객이 먼저 듣고(金鷄一唱客先聽)길 안내 등불을 켜니 완전히 별처럼 보이네(指路點燈完似星)오르락내리락 산길의 어둠 속에서는(低仰山蹊冥色裏)연장자가 젊은 소년에 미치지 못하네(大年不及少年靑)오서 객이 다음과 같이 차운하였다.나그네 가장 먼저 새벽닭 소리 듣고 일어나니(旅客最先曉鷄聽)구름 낀 하늘에 비가 오려나 별이 보이지 않네(雲天欲雨未看星)승려는 등불로 길을 안내하며 여행길을 재촉하고(僧燈指路催行李)그림처럼 아름다운 수많은 산은 푸르스름하네(活畵群山影裏靑) ○曉發, 抵德坪始開東矣。 抵天安道理峙朝飯。 抵稷山三巨里中火。 抵洪景店留宿。 曉發時, 武說氏先吟曰: "屋南晨鷄滿耳聽, 東猶不出啓明星。 有僧持燭催前路, 當面群山只磨靑。" 余次曰: "金鷄一唱客先聽, 指路點燈完似星。 低仰山蹊冥色裏, 大年不及少年靑。" 烏栖客次曰: "旅客最先曉鷄聽, 雲天欲雨未看星。 僧燈指路催行李, 活畵群山影裏靑。" 덕평(德坪) 충청남도 논산시 부적면 덕평리이다. 도리치(道理峙) 천안 남쪽에서 공주로 통하는 고갯길이다. 직산(稷山) 충청남도 천안시 서북구 직산읍이다.

상세정보
저자 :
(편저자)
유형 :
고전적
유형분류 :
사부

5일 初五日 이(李)와 공(孔) 두 사람이 찾아와서 연회하는 날을 다시 택하고 이조 낭청에게 가서 고하였는데, 조카 호(豪)가 약고개[藥峴]12)의 이랑(吏郞) 집을 전후로 왕래하였다. 서간(書簡)과 연길지(涓吉紙)를 청배(靑排)의 김아(金兒)에게 써주고 급히 내려 보냈는데, 내일 새벽에 행장을 꾸려 출발하려던 참이기 때문이다. 李、孔兩人來見, 以宴日更擇, 往告吏郞, 而豪姪前後往來於藥峴 吏郞家。 書給書簡及涓吉紙於靑排 金兒, 急走下送, 而將以明日曉頭治發。 약고개[藥峴] 지금의 서울시 중구 중림동(中林洞)에 위치한, 만리동(萬里洞) 입구에서 충정로(忠正路) 3가로 넘어가는 고개의 이름으로, 서대문 밖에 있었다. 이곳에 약초를 재배하는 밭이 있던 데서 유래된 이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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