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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四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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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일 初四日 일찍 출발하여 이천(泥川) 중저(中底) 주막에 이르러 임실의 한용(韓瑢)을 만나 잠시 이야기를 나누고 아침을 먹었다. 화성읍(華城邑)에 이르러 점심을 먹었다. 갈산(葛山) 어귀에서 어떤 한 사람이 부르기에 돌아보니 바로 남원(南原)의 현대(顯大) 이문욱(李文旭)이었다. 이어 말에서 내려 잠시 이야기를 나누다가 문욱에게 말을 타게 했다. 과천(果川) 읍내에 이르러 잠시 쉬다가 남태령(南泰嶺)10) 아래에 이르러 당동(唐洞) 신준(申俊) 종형제를 만났는데, 과거에 응시하였다가 낙방하고 고향에 내려가는 길이었다. 잠시 이야기를 나누다가 피차의 갈 길이 바쁘기에 집에 편지를 써서 보내지는 못하고, 단지 무사히 올라왔다는 소식만 말로 전하고 서로 헤어졌다.고개를 넘을 때 동행하는 마상객(馬上客)에게 살고 있는 곳과 성명을 물었더니, 한 사람은 충청도 문의(文義)11)의 덕지(德地)에 사는 범석(範錫) 오성홍(吳聖洪)이며, 또 한 사람은 금구(金溝) 백일(白日)에 사는 위팔(渭八) 강원달(姜元達)이라 하였다. 이에 통성명을 하고 보니 오 석사도 오촌(鰲村)으로 들어가는 집안사람이었다. 나중에 서로 찾아가기로 약속하고서 그대로 동행하였다. 승방(僧房) 주막에 이르러 임실(任實) 동행과 두 길손은 뒤쳐지고, 나는 길을 재촉하여 나루터에 이르러 즉시 나루를 건넜다.저녁에 청파(靑坡)의 박영대(朴永大) 집에 이르니 낙안 형님이 오늘 오전에 먼저 들어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또한 무사히 올라왔으니 다행스럽고 다행스러웠다. 주인 내외(內外) 모두 별 탈이 없고, 동향(同鄕)에서 함께 온 이들도 별 탈 없이 올라와 성안으로 들어갔다고 하였는데, 즉시 얼굴을 보지 못한 것이 한탄스러울 뿐이다. 그대로 묵었다. 110리를 갔다. 밤에 비가 내렸다. 早發抵泥川 中底酒幕, 逢任實 韓瑢, 暫話朝飯。 抵華城邑中火。 抵葛山前, 有一人呼之故顧見, 則乃南原 李顯大 文旭也, 仍爲下馬暫話, 使文旭騎馬, 至果川邑內暫憩, 至南泰嶺下, 逢唐洞 申俊從兄弟, 以落榜擧子下鄕人也。 暫話彼此行色忙迫, 故不得付書於家中, 只以無事上來之意, 口傳相分。 越嶺之際, 與同行以馬上客, 問其所居與姓名, 則一則忠淸道 文義 德地居吳範錫 聖洪也, 一則金溝 白日居姜渭八 元達也。 仍爲通姓名, 吳碩士亦爲入鰲村門庭之人也。 有後日相訪之約, 仍爲同行。 抵僧房酒幕, 任實同行與二客落後, 余則促行抵津頭, 卽爲越津。 暮抵靑坡 朴永大家, 則樂安兄主, 今日午前先爲入來留待矣。 亦爲無事上來, 幸幸。 主人內外俱無故, 同鄕同行, 亦爲無故上來, 入去城內云, 不卽相面, 可歎耳。 仍爲留宿。 行百十里。 夜雨。 남태령(南泰嶺) 서울에서 과천을 지나 수원으로 가던 길로서 삼남대로의 첫 번째 큰 고개이다. 이 고개의 원래 이름은 호현(狐峴 여우재)이다. 정조대왕이 사도세자 묘를 참배하러 가는 도중에 이 고개 이름을 물었을 때 '여우고개'라는 이름을 거명하지 못했는데, 과천 아전이 '남태령'이라고 대답하였다고 하여 '남태령'으로 개명되었다고 한다. 문의(文義) 충청북도 청주시 상당구 문의면(구 청원군 문의면) 지역의 옛 지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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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일 十六日 동틀 녘 표진(表津)을 건너 천평(泉坪)에 이르렀다. 아침을 먹은 뒤에 상중(喪中)인 차규진(車奎眞)이 그 선조를 운암사우(雲巖祠宇)에 제향(祭享)하는 일 때문에 마침 그 서원에 왔다가 곧바로 찾아와서 만났다. 나와 화옥(華玉)에게 그 서원에 가자고 하더니 술과 안주를 내왔다. 오후에 우산(牛山)에 화옥을 보냈는데 섭섭한 마음이 없지 않았다. 이날 오후에 눈이 내렸다. 平明越表津到泉坪。 朝飯後, 車哀 奎眞以其先祖雲巖祠宇祭享事, 適來其院, 卽爲來見。 要去余與華玉於其院, 進酒肴。 午後送華玉於牛山, 不無悵然之懷矣。 是日午後雨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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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일 初吉 아침 전에 길을 나서 치등(峙登) 주막에 이르러 아침을 먹었다. 은진(恩津) 삼거리에 이르러 점심을 먹은 다음, 길을 나서 몇 리를 채 못 가서 앞에 큰 내를 만났다. 내를 건널 때에 김노(金奴)가 발을 헛디뎌 등에 짊어졌던 짐이 반이나 물에 떠내려가 버렸다. 가까스로 천변으로 나와 손으로 젖은 옷을 짜서 볕에 말리고 행낭(行囊)에 있던 남은 바지로 갈아입었으니, 그간의 실상을 이루 다 말할 수가 없다. 간신히 연산(連山) 중개태(中開泰)에 이르러서 묵었다. 50리를 갔다. 朝前發程, 抵峙登酒幕朝飯。 抵恩津三巨里中火, 仍爲發行, 未數里前當大川。 越川之時, 金奴失足, 背上負卜爲水半流。 艱出川邊, 笮手燎衣, 而換着行橐之留袴, 其間實狀, 不可盡詳。 艱抵連山 中開泰留宿。 行五十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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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일 二十日 일찍 출발하여 삼례에 이르러 아침을 먹고, 부내(府內)에 들어가 점심을 먹었다. 한여해(韓汝海)를 만나 영문(營門)에 소장을 올리는 일로 동행했던 사람을 몹시 기다렸다. 예조에 제출할 소장을 옷 보따리 속에 넣어 두었기 때문이었는데, 날이 저물 무렵 강문명(姜文明) 부자가 그의 일가 사람과 짐을 지고 왔다. 문서를 가지고 급히 남문(南門) 밖 주막에 가서 서장(書狀)의 초본을 썼으나 날이 저물었기 때문에 영(營)에 제출하지 못하고 서문(西門) 밖에 가서 강(姜)과 함께 머물렀다. 早發抵參禮朝飯, 入府內午飯。 逢韓汝海, 以呈營門事, 苦待同行者, 禮曹呈狀入衣褓中故也。 日暮時, 姜文明父子與其一家人, 負卜而來, 故持文書, 急往南門外酒幕書狀草, 而以日暮之致, 不得呈營, 往西門外, 與姜也同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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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일 二十二日 일찍 출발하여 여해와 신곡(新谷)의 종인(宗人) 연규(延奎)씨의 집에 들어가 아침을 먹었다. 여해가 나의 양식이 떨어졌다고 주인에게 말하였더니, 돈 한 냥을 내주었는데, 양식이 떨어진 끝이라 매우 감사하였다. 곧바로 출발하여 도마교(逃馬橋)42) 근처에 이르러서 여해와 작별하였다. 이어 곽평중(郭平仲), 평당(坪塘)의 종인 연영(延英)과 함께 굴암(屈岩)43)에 이르러 점심을 먹었다. 평당(坪塘)44) 주막에 이르러 평중(平仲)과 작별하고 연영(延英)과 그 집에 들어가 묵었다. 50리를 갔다. 早發與汝海入新谷宗人延奎氏家朝飯。 汝海以吾絶粮之由言及主人, 則以一兩錢出給, 絶粮之餘, 多感多感。 卽發至逃馬橋邊, 與汝海作別。 仍與郭平仲 坪塘宗人延英, 至屈岩午飯。 抵坪塘酒幕, 與平仲作別, 與延英入其家留宿。 行五十里。 도마교(逃馬橋) 전라북도 임실군 임실읍에서 내려온 시내에 놓인 나무다리로, 말이 건너다녔다 하여 도마교(道馬橋)라고 했다. 굴암(屈岩) 전라북도 무주군 부남면에 있는 마을 이름이다. 평당(坪塘) 전라북도 임실군 오수면에 있는 마을 이름이다. 앞들이 넓고 연못이 있다 하여 지형을 따라 들땡이라고 부르다가 한자로 '평당(坪塘)'이라 고쳐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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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일 十五日 새벽밥을 먹고 길을 나섰다. 곡성(谷城) 읍내에 이르러 말에게 꼴을 먹이고, 유치(㹨峙)에 이르러 요기하였다. 석곡(石谷) 박가(朴哥)의 집에 도착하였으나 흥양(興陽) 아객(衙客)의 행상(行喪)이 먼저 도착하여 함께 머무를 수 없었으므로 다른 여막으로 옮겼다. 흥양(興陽)의 마부들이 모두 와서 만났는데, 천노(千奴)와 오노(五奴)가 이미 출발하여 올라갔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래서 한창 속으로 답답해하고 있던 즈음에 오노가 서울에서 뒤따라 도착하였으니 매우 기쁘고 다행스럽다. 한천(寒泉) 형님과 나주(羅州) 형님이 상(喪)을 당했다는 소식을 처음 듣고 애통해하던 중에 집안의 안부를 대략 들었는데, 저들이 출발할 때에 가속(家屬, 처·첩을 말함)이 한창 병을 앓고 있어 아직 완쾌되지 않았다고 하니, 여전히 걱정스럽다. 曉飯作行。 至谷城邑內秣馬, 至㹨峙療飢。 到石谷 朴哥家, 則興陽 衙客行喪先到, 不得同留, 故移入他幕。 興陽 馬夫輩皆來見, 聞知千奴 五奴已爲發行上去, 故方爲訝菀之際, 五奴自京跟到, 喜幸喜幸。 始聞寒泉兄主羅州兄主喪奇, 痛悼中略聞家間安否。 渠輩發行時, 家屬方痛, 未出場云, 猶爲悶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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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일 二十七日 ○아침 일찍 출발하여 오수(獒樹)17)에 이르러 아침을 먹었다. 무열씨가 먼저 다음과 같이 읊었다.장정 몇 리마다 단정18)으로 이어져 있어(長亭幾里短亭連)명을 전하는 파발이 하늘에서 온 듯하네(傳命置郵若自天)돌아보건대 이 역참 이름에는 의미가 있으니(顧此驛名應有意)회남왕의 개 짖는 소리 들리던 옛 신선이라네19)(淮南聞吠舊時仙)내가 다음과 같이 차운하였다.역참이 장정과 단정으로 실로 서로 이어져 있으니(郵亭長短信相連)가는 길이 하늘에 올라가는 것처럼 힘들다 말게(莫謂行難若上天)웃으며 객점 여인 불러 문득 길을 묻노니(笑喚店娥俄問路)혹시 영주(瀛州)20) 바다 먼 데서 오는 배를 아는가(倘知瀛海遠來船)내가 먼저 평당의 송필동 씨 집으로 가니 주인은 없고, 어린 주인만 있었다. 그래서 곧바로 출발하여 평당 객점으로 왔다. 일행이 이 주막에서 기다리기로 한 약속 때문이었다. 일행이 없었으므로 머뭇거리고 있던 터에 마침 한 소년을 만났다. 필동 씨 소식을 물으니 아까 계곡(桂谷)에서 돌아왔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소년을 시켜 오라고 기별하였다. 잠시 이야기를 나눠보니, 이미 족보에 들어갈 명단은 겨우 마쳤지만, 노자가 아직 마련되지 않아 때맞춰 올려보내지 못하였고, 또 여산의 시조 묘소 가까운 곳에 투장(偸葬)한 묘로 인해 송사가 일어나 서울에서 통문이 내려왔기에 전주에다 상의하여 6일 날 여산의 제각에서 종회를 하기로 했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이미 이 기별을 듣고는 인사의 도리상 그대로 갈 수가 없었다. 일행과 상의해볼 생각으로 빨리 재촉해 갔는데 일행은 두치(斗峙)21)를 넘었다. 그래서 간신히 굴암 주점에 이르러 일행과 만나 상의하였다. 그대로 이 주막에서 묵었다. ○早發, 抵獒樹朝飯。 武說氏先吟曰: "長亭幾里短亭連, 傳命置郵若自天。 顧此驛名應有意, 淮南聞吠舊時仙。" 余次曰: "郵亭長短信相連, 莫謂行難若上天。 笑喚店娥俄問路, 倘知瀛海遠來船。" 余則先行坪塘宋必東氏家, 則主人不在, 只有少主。 故卽發出, 來坪塘酒店。 以同行留待此幕爲約矣。 同行不在, 故逗遛之際, 適逢一少年。 問必東氏消息, 則俄自桂谷還來云。 故使少年通奇要來。 暫話, 則旣單才畢, 而以路貰之尙未辦備, 趁未上送, 且礪山始祖山所至近處, 偸葬起訟事, 京中通文下來, 故自全州相議來, 而初六日, 宗會于礪山祭閣云。 故旣聞此奇, 則人事道理, 不可前進。 與同行相議之意, 急急促往, 則同行已越斗峙。 故艱抵屈岩酒店, 逢同行與之相議。 仍留此幕。 오수(獒樹) 전라북도 임실군 오수면이다. 장정(長亭) …… 단정(短亭) 행인들의 휴게소로서, 5리(里)마다 단정을 설치하고 10리마다 장정을 설치하였다. 회남왕(淮南王) …… 신선이라네 회남왕 유안(劉安)이 도술(道術)을 좋아하여 그의 문하에 항상 방사(方士) 수천 명이 있었다. 훗날 팔공(八公)이라 일컫는 여덟 명의 방사가 유안에게 신선술을 가르쳐서 온 집안이 신선이 되어 승천하였다. 그런데 그들이 단약을 만들었던 그릇이 남아 있어 집에서 기르던 개와 닭이 그 그릇에 남아 있는 단약을 먹고는 역시 모두 신선이 되어 승천하여 천상에서 닭 우는 소리가 들리고 구름 속에서 개 짖는 소리가 들렸다고 한다. 《神仙傳 劉安》 영주(瀛州) 흥양(興陽, 전라남도 고흥)의 옛 지명이다. 진시황이 불사약을 구하러 사신을 보냈다는 선경을 의미하는데, 고흥 팔영산에는 서복(徐福)이 찾아온 전설이 남아있다. 두치(斗峙) 전라북도 임실과 오수를 잇는 고개로 '말재'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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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五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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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일 二十四日 ○동이 틀 무렵 출발하여 낙수(洛水)2) 객점에 이르러 아침을 먹었다. 낙수교(洛水橋)를 건너며 절구 1수를 다음과 같이 읊었다.집 떠난 지 삼일 만에(移發三之日)행차가 낙수교에 다다랐네(行臨洛水橋)물 깊이를 익숙히 아는 길이라(慣知深淺路)역장(驛長)을 굳이 부르지 않았네(亭長不須招)무열 씨가 다음과 같이 차운하였다.나라의 교화 덕분에 사람들 강 건널 걱정 없으니(人無病涉賴邦敎)시월에 완성된 도강3)이 바로 이 다리라네(十月徒杠卽此橋)낙수로 향하는 우리 행차가 같은 날 건너니(向洛吾行同日渡)뱃사공을 부르는4) 수고를 하지 않아도 되네(不勞舟子也招招)심형(心泂)이 다음과 같이 차운하였다.행차가 낙수 가에 이르니(行到洛之上)긴 시내에 짧은 다리가 놓여있네(長川浮短橋)오는 길에는 물소리가 세차(來路水聲立)뱃사공을 부를 수가 없네(舟人不可招)제호(霽浩)가 다음과 같이 차운하였다.이곳은 서울 가는 노정이라(此去京城路)푸른 구름이 낙교에 비추네(靑雲映洛橋)큰 시내 우리가 건너기 편해(大川吾利涉)뱃사공을 부리지 않았네(舟子不招招)광청(廣淸)5) 객점에 이르러 잠시 쉰 후, 먼저 출발하여 귀정(歸亭)6)에 들러 조정화(趙廷燁)의 궤연에 조문하였다. 잠시 외종 형수를 뵙고 곧바로 출발하였다. 석곡(石谷)7)에 이르러 일행을 만나, 요기를 하였다. 율정(栗亭)8)에 이르러 길에서 고창진(高昌鎭) 부자를 만나 잠시 얘기를 나누었다. 용계(龍溪)9) 객점에 이르렀다. 어제 광청 객점을 지나며 무열 씨가 먼저 다음과 같이 읊었다.손을 잡고 떠난 먼 여행길 광청에 이르도록(携手長程到廣淸)지리지에 나온 강과 이름난 산을 보며 지났네(閱過水誌與山名)다만 족보 일로 인해 서울 가는 날이기에(徒緣譜事之京日)몸이 고달픈 건 생각지 않고 걸어서 가네(不計身勞作步行)내가 차운하여 다음과 같이 읊었다.한 줄기 장강은 넓고도 맑으니(一派長江廣又淸)지금도 옛날 남겨진 이름으로 불리네(至今稱說古遺名)막힌 길을 긴 다리를 통해 건너니(長橋以濟不通路)오가는 유람객이 머물지 않고 가네(來去遊人莫住行) ○平明發程, 抵洛水店朝飯。 渡洛水橋, 吟一絶曰: "移發三之日, 行臨洛水橋。 慣知深淺路, 亭長不須招。" 武說氏次曰: "人無病涉賴邦敎, 十月徒杠卽此橋。 向洛吾行同日渡, 不勞舟子也招招。" 心泂次曰: "行到洛之上, 長川浮短橋。 來路水聲立, 舟人不可招。" 霽浩次曰: "此去京城路, 靑雲映洛橋。 大川吾利涉, 舟子不招招。" 抵廣淸店暫憩後, 先行入歸亭, 吊趙廷燁几筵。 暫見外從嫂, 卽發。 抵石谷逢同行, 仍爲療飢。 抵栗亭, 路上逢高昌鎭父子暫話。 抵龍溪店。 昨日過廣淸店, 武說氏先吟曰: "携手長程到廣淸, 閱過水誌與山名。 徒緣譜事之京日, 不計身勞作步行。" 余次曰: "一派長江廣又淸, 至今稱說古遺名。 長橋以濟不通路。 來去遊人莫住行。" 낙수(洛水) 전라남도 순천시 송광면 낙수리이다. 옛날 낙수역(洛水驛)이라는 역참이 있었다. 도강(徒杠) 걸어서 건너는 다리이다. 《맹자》 〈이루 하(離婁下)〉에, 자산(子産)이 자신의 수레로 강에서 백성들을 건네주자, 맹자가 "은혜로우나 정치를 하는 법을 모른다. 11월에 도강이 이루어지고 12월에 여량이 이루어지면 백성들이 물 건너는 것을 힘들어하지 않는다.[惠而不知爲政. 歲十一月 徒杠成, 十二月輿梁成, 民未病涉也. ]"라고 하였다. 뱃사공을 부르는 《시경》 〈포유고엽(匏有苦葉)〉에, "손짓하며 부르는 뱃사공에게 남들은 건너도 나는 건너지 않노라. 남은 건너도 나는 건너지 않음은, 나는 내 짝을 기다려서이다.[招招舟子, 人涉卬否. 人涉卬否, 卬須我友. ]" 하였다. 광청(廣淸) 전라남도 순천시 주암면 창촌리 부근으로 추정된다. 귀정(歸亭) 순천시 주암면 마전리에 있던 영귀정(詠歸亭)으로 보인다. 삼탄(三灘) 조태망(趙泰望 1678~?)이 지은 별업이다. 석곡(石谷) 전라남도 곡성군 석곡면 석곡리이다. 율정(栗亭) 전라남도 곡성군 곡성읍 학정리 율정 마을이다. 용계(龍溪) 전라남도 곡성군 오산면 용계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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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일 二十五日 ○새벽에 출발하여 불로치(不老峙)10)에 이르러 나와 심형과 오서 객은 농소막(農所幕)11)의 송진형(宋鎭亨) 집에 들러 아침을 먹었다. 서울 보청(譜廳)12)에 쓸 경비로 8냥을 우리 일행에게 납입하였다. 곧바로 출발하여 묘치(猫峙)13)를 넘어 곡성(谷城) 읍내에 이르니 일행은 먼저 갔다. 그래서 그대로 요기를 하고 서둘러 나루터로 가서 순자강(蓴子江)14)을 건너 일행을 만났다. 창화역(昌華驛) 주점에 이르러 일행 중 송재화(宋再華)는 먼저 가고, 나, 무열 씨, 심형, 오서(烏拪) 객(客)은 도산(道山)15)의 족손(族孫) 일호(一浩) 집으로 들어가 유숙하였다. 주인 부자는 명전(名錢)16) 2냥을 우리 일행에게 냈다. ○曉發, 抵不老峙, 余與心泂及烏栖客, 入農所幕宋鎭亨家朝飯。 以八兩錢京譜廳所用次, 納于行中。 卽發, 越猫峙, 抵谷城邑內, 則同行先行。 故仍爲療飢, 促往津頭, 利涉蓴子江, 逢同行。 抵昌華驛酒店, 同行中宋再華先行, 余與武說氏心泂及烏拪客, 入道山族孫一浩家留宿。 主人父子名錢二兩入于行中。 불로치(不老峙) 전라남도 곡성군 삼기면에 있던 고개이다. 농소막(農所幕) 전라남도 곡성군 삼기면에 있는 마을이었다. 보청(譜廳) 족보를 만들기 위해 임시로 설치한 사무소를 말한다. 묘치(猫峙) 전라남도 곡성군 삼기면에서 곡성읍으로 가는 고개로 '괘재'라고도 부른다. 순자강(蓴子江) 전라남도 곡성 일대를 흐르는 섬진강의 옛 이름이다. 도산(道山) 전라북도 고창군 고창읍 도산리이다. 명전(名錢) 족보를 간행할 때 종중 남자 이름에 매긴 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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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일 二十一日 동이 틀 무렵에 출제(出題)하였는데, 시제는 바로 '일취월장 학유집희우광명(日就月將學有緝煕于光明)'8)이었다. 간신히 글을 지어 차필(借筆)9)하여 시권을 제출하고 먼저 시험장을 나왔다. 동대문 밖에 이르러 구경하고 궁으로 돌아와서 곧바로 차동(車洞) 주인집으로 돌아왔다. 平明出題, 卽日就月將, 學有緝熙光明也。 僅構借筆納卷, 先爲出場。 至東大門外, 觀光還宮, 卽還車洞主人家。 일취월장 학유집희우광명(日就月將學有緝煕于光明) 날로 나아가며 달로 진전하여 학문을 계속 궁구하고 연마하여 광명한 경지에 이르게 한다는 말이다. 《詩經 周頌 敬之》 차필(借筆) 남에게 대신 글씨를 쓰게 하는 것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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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일 十九日 갈 길이 바쁜 탓에 일찍 출발하여 두루 살피지 못하고, 다만 용두각(龍頭閣)만을 보았는데 그 구조가 기묘하였다. 다시 출발하여 하류천(下柳川)47)에 이르러 아침을 먹고, 오산(烏山)에 이르러 점심을 먹었다. 소사(素沙)에 도착하여 묵었다. 80리를 갔다. 早發以行忙之致, 不能周觀, 而但見龍頭閣, 則制甚奇妙。 移發至下柳川朝飯, 抵烏山中火。 到素沙留宿。 行八十里。 하류천(下柳川) 수원시 권선구 세류동에 있는 아랫버드내 마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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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일 二十日 일찍 출발하여 실음소(失音所)에 이르러 아침을 먹었다. 직산(稷山, 천안 옛 지명) 삼거리에 이르러 길에서 장달소(張達紹)를 만났다. 그가 집에서 온 편지를 전했는데, 집안에 별 탈 없는 것이 다행스럽고, 집을 떠난 지 30일 만에 소식을 듣게 되니 몹시 기뻤다. 잠깐 이야기를 나누다가 작별하여 천안읍(天安邑) 어귀에 이르러 점심을 먹었다. 김제역촌(金堤驛村)48)의 주막에 이르러 회덕(懷德)의 노차(路次)49)를 묻고, 이어 소로(小路)로 길을 잡아 고동령(高東嶺)을 넘어 전의(全義) 읍내에 이르러 묵었다. 90리를 갔다. 早發至失音所朝飯。 抵稷山三巨理, 路上逢張達紹。 乃給家信, 而家中別無故幸喜, 離家三十日, 始見消息忻喜。 暫話作別, 抵天安邑前中火。 到金堤驛村酒幕, 問懷德路次, 仍爲小路作行, 越高東嶺, 抵全義邑內留宿。 行九十里。 김제역촌(金堤驛村) 충청남도 연기군 소정면 대곡리 역말마을이다. 노차(路次) 길 가는 중 잠시 쉬기 위해 길가에 마련하는 임시 거처를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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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일 十九日 첫닭이 울자 상인과 동행하여 서령(西嶺)에 이르니 동이 트기 시작하였다. 벌교(筏橋)에 이르러 아침을 먹고, 사촌(社村)에 들어가 요기하였다. 용전(龍田)의 무안(茂安) 댁에 이르러 묵었다. 50리를 갔다. 鷄初鳴, 與商賈同行抵西嶺, 則始開東矣。 抵筏橋朝飯, 入社村療飢。 抵龍田 茂安宅留宿。 行五十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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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일 十七日 아침을 먹고 일찍 출발할 때 눈이 내렸다. 이에 눈을 맞으며 유치(峙)에 이르러 점심을 먹었다. 눈이 너무 많이 내려 지척을 분간할 수 없기에 가까스로 영귀정(咏歸亭)에 이르러 묵었다. 80리를 갔다. 仍朝飯早發時雪作, 仍爲冒雪, 抵峙中火。 大雪作咫尺不辨, 艱抵咏歸亭留宿。 行八十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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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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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일 十八日 밤에 눈이 내렸다. 아침을 먹고 길을 나서 원동(院洞)의 이상룡(李尙龍) 집에 들렀더니 주인 부자(父子)가 한사코 붙잡았지만, 갈 길이 바쁘기 때문에 머물지 못하고 길을 나섰다. 낙수(洛水)에 이르러 점심을 먹고, 미태정(米太亭)에 이르러 묵었다. 60리를 갔다. 夜雪。 仍朝飯發程, 入院洞 李尙龍氏家, 則主人父子堅挽, 而以行忙不得留發程。 抵洛水中火, 抵米太亭留宿。 行六十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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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일 初八日 아침 전에 임실 종인(宗人) 연영(延英)이 찾아왔는데, 기쁜 나머지 절구 한 수를 읊었다.천 리 먼 길에서 백대의 친척 만나(千里相逢百代親)처음 만나 기쁜 마음은 천륜에서 나온 것이리(逢初心喜自天倫)더구나 또 이번 길에 고락을 함께하니(況又今行同甘苦)그 누가 우리 세 사람의 깊은 정 만하랴(深情其孰我三人)남원(南原)의 문욱(文旭)도 찾아왔다. 이에 아침을 먹고 나서 문욱은 용산(龍山)으로 가고, 나는 낙안 형님, 임실(任實) 종인(宗人)과 묘동(廟洞)에 임실(任實) 사관(舍館)에 갔다. 한용(韓溶)과 잠시 이야기를 나눈 뒤에 한우(韓友)와 진사 오우상(吳羽常) 집에 가서 예조에 소장 올릴 일을 논의하였는데, 실기(實記) 제장(製狀)을 보겠다고 하여 실기(實記) 한 권을 그의 집에 남겨 두었다. 잠시 이야기를 나눈 뒤에 남계(南溪) 정민채(丁敏采)의 안부(安否)를 물었더니, 서간(書簡)을 가지고 왔는데 다른 곳에서 오는 바람에 가져오지 못했다고 하였다. 내일 가지고 다시 오는 것이 어떻겠냐고 하니 답하기를, "내일 다시 오겠습니다."라고 하였다.곧바로 출발하여 신 승지(愼承旨) 집에 가서 잠시 이야기를 나눈 뒤에 종묘동(宗廟洞)의 조 지사(趙知事) 집에 갔다. 보성(寶城)의 종인(宗人) 귀환(龜煥)을 찾아가 잠시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그의 형 두환(斗煥)이 어제 도성에 들어왔다고 하기에 곧바로 만나 예조에 올리는 일을 말하였더니 그도 좋다고 하였다. 나는, "들어가는 것이 적지 않다는데 빚을 얻을 길이 없으니 여기에서 만약 주선할 방도가 있으면 변통하는 것이 좋겠습니다."라고 하였다. 그길로 성균관으로 가서 관인을 찍은 다음 날이 저물어서야 주인집에 돌아오니 오위장이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박인수(朴寅洙)도 와서 함께 묵었다. 朝前任實宗人延英來見, 忻喜之餘, 吟一絶曰: "千里相逢百代親, 逢初心喜自天倫。 況又今行同甘苦, 深情其孰我三人。 " 南原 文旭亦來。 仍朝飯, 文旭往龍山, 余則與樂安兄主及任實宗人, 往廟洞 任實舍館。 與韓溶暫話後, 與韓友往吳進士 羽常家, 論其呈禮曹事。 見實記製狀之意, 置實記一卷於其家, 暫話後, 問南溪 丁敏采安否, 故書簡持來, 而自他處來到, 故未袖而來, 則明日袖, 而更來如何。 答曰: "明日更來而出。" 卽發入愼承旨家, 暫話後, 往宗廟洞 趙知事家。 訪寶城宗人龜煥暫敍, 則其兄斗煥, 昨日入城云, 故卽爲相面, 說及呈禮曹事, 則亦曰好矣。 余曰: "所入不小, 而得債之道無路, 自此若有周旋之道, 則變通爲可。" 仍往成均館打印, 乘暮還主人家, 則五衛將來待矣。 朴寅洙亦來同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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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일 初六日 오후에 임실의 여해(汝梅)와 종인(宗人) 연영(延英)이 찾아왔기에 예조에 소장 올리는 일을 부탁하였더니 대답하기를, "들어가는 바가 없지 않으니 미리 변통하여 가겠습니다."라고 하였다. 낙안(樂安) 형님과 차동(車洞)12)의 민치항(閔致恒) 집에 가서 그 형제와 잠시 격조했던 회포를 풀고는 실기(實紀) 한 권을 주었다. 이어 서소문(西小門) 밖 이희(李)의 집으로 갔더니, 기쁘게 맞이하고 정성스레 대접하여 옛일을 회상하며 상심하는 기운이 많이 있었는데, 주인이나 객이나 마찬가지였다. 잠시 회포를 푼 뒤에 참봉(參奉) 우종렴(禹宗濂) 집에 가서 잠깐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신(申)과 박(朴) 두 벗은 모두 별 탈이 없었다. 그길로 정 진사(丁進士)가 머물고 있는 사관(舍館)으로 갔더니, 동행했던 이들 모두 아무 병 없이 올라왔고 서울에 들어온 뒤로 처음 만나니 그 기쁨을 어찌 다 헤아릴 수 있겠는가.잠시 쉰 뒤에 남대문 안 경주인(京主人) 집에 가서 김계한(金啓漢)·김이준(金履俊) 부자를 찾아가 만났다. 또한 서울에 들어온 뒤에 처음 본 것이다. 잠시 쉰 뒤에 그대로 약고개[藥峴]의 송 오위장(宋五衛將, 송인서(宋璘瑞)) 집에 가서 잠시 이야기를 나누었다. 여러 해 동안 오래도록 격조했던 끝에 보는 것이니 그 기쁨을 어찌 말로 다하겠는가. 잠시 이야기를 나눈 뒤에 저물녘에 주인집으로 돌아왔다. 午後任實 汝梅與宗延英來訪, 故托以呈禮曹之事, 則答曰: "不無所入, 而預爲變通而去。" 與樂安兄主, 往車洞 閔致恒家, 與其兄弟, 暫敍阻懷, 仍給實紀一卷。 仍往西小門外李家, 則忻迎款待, 多有感古傷心之氣, 主客一般。 暫敍後, 往禹參奉 宗濂家暫敍, 而申、朴兩友皆無故。 仍往丁進士舍館, 則同行皆無病上來, 而入京後初面也, 其喜可斗。 暫憩後, 往南大門內京主人家, 訪見金啓漢、金履俊父子, 亦爲入京後初見也。 暫憩後, 仍往藥峴 宋五衛將家暫敍, 累年久阻之餘, 其喜可言。 暫敍後, 乘暮出來主人家。 차동(車洞) 서울특별시 중구 의주로1가・순화동에 걸쳐 있던 마을로서, 수렛골을 한자명으로 표기한 데서 마을 이름이 유래하였다. 추모동이라고도 하였는데, 이는 조선 숙종의 계비 인현왕후가 태어난 터에 비석을 세우고 그를 추모했던 데서 붙여진 지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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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일 二十六日 새벽에 바로 행상(行喪)48)하여 그대로 호행(護行)하였는데, 장지에 이르니 이조동(吏曹洞) 뒤의 가장 높은 봉우리가 서남(西南)으로 끝없이 확 트여 있어 보통 사람의 안목과 식견으로는 알 수가 없었다. 사시(巳時)에 하관(下棺)하고 그길로 유둔(油芚) 시장 근처로 가니, 내가 내려왔다는 기별을 듣고 노소(老少)의 문원(門員)들이 모두 와서 모여 있었다. 이야기를 나누고 나서 서울에서 썼던 돈 100여 냥을 각파(各派)에 나누어 기록하였다.오후에 역소(役所)로 돌아와 제사를 지낸 뒤에 즉시 반혼(返魂)49)49) 반혼(返魂) : 장례 후에 신주를 모시고 원래 살던 집으로 돌아오는 의례를 말한다. 이를 '반우(返虞)', '흉제(凶祭)'라고도 한다.하고 곧바로 초우(初虞)50)를 지냈다. 지정(池亭)에서 머물렀다. 曉卽行喪, 仍爲護行, 而及至葬所, 則吏曹洞後最高峯, 西南滉瀁無涯, 以凡眼姑未可知也。 巳時下棺, 仍行油屯市邊, 則老少門員, 聞余下來之奇皆來會, 相與敍話後, 分錄京中所用百餘兩錢於各派。 午後還來役所, 行祭後, 仍卽返魂, 卽行初虞, 留池亭。 행상(行喪) 시신을 상여에 실어서 산소로 나르는 일을 말한다. 초우(初虞) 산소(山所)에서 장례(葬禮)를 끝내고 집에 돌아와 지내는 제사를 말한다. 혼령(魂靈)을 위안(慰安)하기 위해 장사 당일을 넘기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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