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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일 十三日 아침을 먹은 뒤에 비가 올 기색이 잠시 멈추기에 즉시 길을 떠났다. 차령(車嶺)에 이르자 비가 세차게 쏟아져 어쩔 수 없이 원터에서 머물렀다. 朝飯後雨意乍止, 卽爲發程。 至車嶺雨大作, 不得已留院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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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일 十四日 비가 개지 않았지만 곧바로 길을 나섰다. 천안(天安) 읍내(邑內)에 이르러 점심을 먹고, 실음소(失音所)에 이르러 묵었다. 雨雖不霽, 卽爲發程。 至天安邑內中火, 至失音所留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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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23년(계미) 1823年(癸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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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三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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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일 二十九日 아침 전에 비가 바로 그쳤다. 아침을 먹은 뒤에 홍주(洪州)의 종인(宗人)인 해주(海柱), 하주(廈柱)와 산소에 올라가 성묘한 뒤에 산지기 집으로 내려와 음복하는 자리에 참석하고, 전주(全州)의 고용인을 내려 보냈다. 제종들과 산지기의 집에서 머물렀는데, 노복의 발병이 어떠한지 알 수가 없어서 마음이 매우 답답하였다. 저녁때에 김노(金奴)가 발을 싸매고 들어왔기에 다급히 발병에 대해 물으니 조금 차도가 있어 부르튼 발로 올라왔다고 하였다. 매우 염려스럽던 중에 종과 주인이 만났으니, 그 사이의 기쁨을 말로 형용할 수가 없었다. 朝前雨乃止。 食後與洪州宗人海柱 厦柱, 上山所省拜後, 下來山直家, 參飮福班, 而下送全州雇人。 與諸宗留山直家, 未知奴者之足疾如何, 故心甚悶悶矣。 夕時金奴裹足入來, 故急問足疾, 則小有差勢, 繭足上來云。 深慮之中, 奴主相面, 其間忻喜, 不可容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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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일 十三日 밤에 내리던 비가 그치지 않아서 늦게야 비를 맞으며 길을 떠났다. 우연히 세마(貰馬)를 얻어 노구암(老狗巖)에 이르러 말에게 꼴을 먹이고 아침을 먹었다. 굴암(窟巖)에 이르러 화옥(華玉)을 막중(幕中)에 기다리게 하고 읍내로 들어갔다. 곧바로 주관(主官)을 만나고 나서 화옥을 오게 하여 함께 머물렀다. 夜雨不止, 晩後冒雨登程。 偶得貰馬, 至老狗巖, 秣馬朝飯。 至窟巖, 留華玉於幕中, 往邑內, 卽見主官, 因要華玉同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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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일 十四日 서둘러 밥을 먹고 길에 올랐다. 야당(野塘)에 이르러 우연히 김득성(金得成)의 아우를 만나 비로소 흥양(興陽)의 소식을 들었다. 그 말을 타고 오수(獒樹)에 이르러 곧장 증산(甑山)에 와서 말에게 꼴을 먹이고 요기하였다. 비가 계속 쏟아지니 한참을 머물며 쉰 뒤에 비를 맞으며 길을 떠났다. 원산(圓山) 방 서방(房書房) 집에 이르러 묵었다. 의복이 비에 다 젖었다. 促飯登程。 至野塘, 偶逢金得成之弟, 始聞興陽消息。 大槩騎其馬, 至獒樹, 直來甑山, 秣馬療飢。 雨作連注, 移時留歇後, 冒雨作行, 至圓山 房書房家留宿。 衣服眞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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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일 二十五日 아침을 먹은 뒤에 선자지(扇子紙) 2속(束), 죽청지(竹淸紙) 2속, 황필(黃筆) 1단(單), 장지(壯紙) 1속을 샀다. 길을 나서 오수(獒樹)에 이르러 점심을 먹고, 야당(野塘)에 이르러 묵었다. 50리를 갔다. 임실(任實) 땅이다. 朝飯後, 貿扇子紙二束, 竹淸紙二束, 黃筆一單, 壯紙一束。 發程至獒樹中火, 抵野塘留宿。 行五十里。 任實地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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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일 二十八日 새벽에 출발하여 능측(陵側)에 이르러 아침을 먹었다. 여산(礪山)에 이르러 시조(始祖) 산소(山所)에 들어가 성묘한 뒤에 내려왔다. 산지기 집에서 점심을 먹었는데, 산지기 김복손(金福孫)이 술을 사 와서 올렸다. 이어 점심을 먹은 뒤에 길을 나서 소로(小路)로 들어가 기용(機舂)을 지났다. 호동(狐洞) 주점에 이르러 묵었다. 70리를 갔다. 연산(連山)6) 땅이다. 曉發至陵側朝飯。 至礪山入始祖山, 所省拜後下來。 山直家仍爲中火, 山直者金福孫 沽酒以進。 仍爲午飯後發程, 入小路歷機舂, 抵狐洞酒店留宿。 行七十里。 連山地也。 연산(連山) 충청남도 논산 지역의 옛 지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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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일 二十日 ○일찍 출발하여 칠원(柒原)에서 아침을 먹고, 오매(烏梅)에 이르러 점심을 먹었다. 중도에서 절구 한 수를 읊었다.가는 곳마다 풍광은 면면이 처음 보는 곳인데(到這風烟面面初)밝고 수려한 산수에 인후한 마을8) 자리하였네(山明水麗里仁居)지팡이 끝에 하늘로 솟구치는 솔개의 그림자 날고(杖頭飛影凌天鳶)다리 아래 물 만난 물고기 맘껏 헤엄치네(橋下浮沈率性魚)사원(士原)이 다음과 같이 차운하였다.북두의 번화한 서울은 처음 와보는데(北斗京華生面初)상자가 당시에 이곳에 터를 잡고 살았네(向子當年卜此居)객점의 여인 술값 요구할 줄만 아니(店娥但知酒索錢)호남 길손은 고기 없는 밥상에9) 한숨만 쉬네(湖客惟恨食無魚)여옥(汝玉)이 다음과 같이 차운하였다.만나는 이들마다 객사에서 처음 보는데(面目無非逆旅初)산천 속에 이런 선비도 살고 있었구나(山川有是士夫居)옆 사람은 무슨 생각에 앞길을 재촉하는 걸까(傍人底意催前路)아마도 화성의 문 닫힐까 염려하는 것이리(恐或華城鎖鑰魚)자윤(子胤)이 다음과 같이 차운하였다.우리 세 사람 이러한 장관 처음 보는데(年維三人壯觀初)나라의 기내 천리 땅 거처하는 곳도 넓구나(千里邦畿亦廣居)간간이 꽃과 주막에 술과 고기까지 있으니(往往花壚兼酒肉)북쪽에서 어찌 남방의 물고기를 부러워하리(北來何羨南方魚)대황교(大皇橋)에서 잠시 쉬었다가 이어 출발하였다. 또 절구 한 수를 읊었다.버들이 어둠 속으로 묻히려는데 서쪽 하늘 붉게 타오르고(柳欲藏陰烈洞西)소나무는 폭포소리 들으며 맑은 시내에 드리우네(松能聽瀑倒淸溪)석양이 질 무렵 화성에 다다르니(夕陽歸路華城到)지주 같은 푸른 산 먼 듯 가까운 듯하네(一柱靑山遠近齊)사원(士元)이 다음과 같이 차운하였다.서쪽 가는 길에 왕성이 어디에 있는가 묻노라(王城何在問路西)모습을 바꾼 산하에 굽이굽이 시냇물 흐르네(換面山河曲曲溪)은택을 입은 수양버들 좌우로 휘늘어져 있고(被恩垂柳左右分)찌는 더위에 고달픈 길손들 앞뒤로 나란하네(惱熱行客先後齊)율지(聿之)가 다음과 같이 차운하였다.지팡이 짚고 다리에 오니 해는 이미 저물어(杖策橋邊日已西)나는 갓끈을 씻으려 맑은 시내를 건너네(我纓欲濯渡淸溪)그 속의 고운 풍광 어떠한가 묻노라면(箇中光景問如何)양 언덕에 버들과 느티나무 일색이라오(兩岸柳槐一色齊)여옥(汝玉)이 다음과 같이 차운하였다.궁중 버들 그늘은 동쪽으로 해 그림자는 서쪽으로(御柳陰東日影西)산악에 조회10)하니 시내에 다 함께 모였여라(朝宗山嶽會同溪)기자 현인 이후 명이의 나라11)(箕賢以後明夷國)해내의 밥 짓는 연기처럼 아홉 점의 운무인 듯하네12)(環海人烟九點齊)사윤(士胤)이 다음과 같이 차운하였다.산은 동쪽으로 그늘지고 해는 서쪽으로 지니(山自東陰日自西)꽃을 찾아 버들을 따라 맑은 시내를 지나네(訪花隨柳過淸溪)말을 타다 걷다 하는데 마치 하늘 길 가는 듯(或騎或步如天道)다만 흠인 건 인생과 같지 않는 것일 뿐이라(只欠人生不與齊)내원(乃元)이 다음과 같이 차운하였다.화성 길에 들어서니 날이 이미 저물어(路入華城日已西)파릇파릇한 버들가지 대황 시냇가에 늘어졌네(靑靑楊柳大皇溪)고향산천 점차 멀어지고 왕성이 가까우니(家山漸遠王城近)동남의 연나라 조나라인 듯하여 크게 웃어보네(高笑東南燕趙齊)저녁에 화성 북문 밖에 이르러 묵었다. 80리를 갔다. 여옥이 절구 한 수를 읊었다.누대와 성곽의 반은 도성에 있구나(樓臺城郭半京華)겹겹이 연달아 몇 만의 집들이 즐비하네(匝匝連連幾萬家)행궁13)이 여기에 머물렀는지 알고 싶었는데(欲識行宮留在此)휘휘 늘어진 수양버들 길 어긋남이 없구나(依依楊柳路無差) ○早發抵柒原朝飯, 抵烏梅中火。 路中吟一絶曰: "到這風烟面面初, 山明水麗里仁居。 杖頭飛影凌天鳶, 橋下浮沈率性魚。" 士原次曰: "北斗京華生面初, 何子當年卜此居。 店娥但知酒索錢, 湖客惟恨食無魚。" 汝玉次曰: "面目無非逆旅初, 山川有是士夫居。 傍人底意催前路, 恐或華城鎖鑰魚。" 子胤次曰: "年維三人壯觀初, 千里邦畿亦廣居。 往往花壚兼酒肉, 北來何羨南方魚。" 抵大皇橋, 小憩後仍發。 又吟一絶曰: "柳欲藏陰烈洞西, 松能聽瀑倒淸溪。 夕陽歸路華城到, 一柱靑山遠近齊。" 士元次曰: "王城何在問路西, 換面山河曲曲溪。 被恩垂柳左右分, 惱熱行客先後齊。" 聿之次曰: "杖策橋邊日已西, 我纓欲濯渡淸溪。 箇中光景問如何, 兩岸柳槐一色齊。" 汝玉次曰: "御柳陰東日影西, 朝宗山嶽會同溪。 箕賢以後明夷國, 環海人烟九點齊。" 士胤次曰: "山自東陰日自西, 訪花隨柳過淸溪。 或騎或步如天道, 只欠人生不與齊。" 乃元次曰: "路入華城日已西, 靑靑楊柳大皇溪。 家山漸遠王城近, 高笑東南燕趙齊。" 暮抵華城北門外留宿。 行八十里。 汝玉吟一絶曰: "樓臺城郭半京華, 匝匝連連幾萬家。 欲識行宮留在此, 依依楊柳路無差。" 인후한 마을 원문의 '이인(里仁)'은 인후(仁厚)한 풍속이 있는 마을로, 《논어》 〈이인(里仁)〉에 공자가 "이인이 아름다우니, 가려서 어진 곳에 살지 않으면 어찌 지혜롭다 할 수 있으리오.[里仁爲美, 擇不處仁, 焉得知.]"라고 하였다. 밥상엔……없으니 전국 시대 제(齊)나라 풍환(馮驩)이 맹상군(孟嘗君)의 식객(食客)이 되었을 때, 밥상에 고기반찬이 없자 장검의 칼자루〔長鋏〕를 두드리면서 "장검이여 돌아가자, 밥상에 고기가 없으니.[長鋏歸來乎, 食無魚.]"라고 노래했다는 고사가 있다. 《戰國策 齊策4》 조회 원문의 '조종(朝宗)'은 고례(古禮)에 제후가 천자를 봄에 찾아뵙는 것을 조(朝)라 하고, 가을에 찾아뵙는 것을 종(宗)이라 하며, 《시경》 소아(小雅) 면수(沔水)에, "넘실대며 흐르는 저 물이여, 바다에 조종하도다.[沔彼流水 朝宗于海]" 하였다. 기자……나라 '명이(明夷)'는 동방의 일출지역인 한반도를 지칭한다. 기자(箕子)가, 은(殷)나라가 무도(無道)할 때 밝음을 감추어 화를 면하였고, 마침내 동방으로 와서 도를 전하였고 한다. 《주역》의 〈명이괘(明夷卦) 육오(六五)〉에 "육오는 기자가 밝음을 감춤이니, 곧게 지킴이 이롭다.[六五 箕子之明夷 利貞]"라고 하였는데, 이는 기자가 조선에 이주한 사실을 기록한 가장 이른 문헌 자료이다. 《史記 卷38 宋微子世家》 아홉 점 운무인 듯하네 높은 하늘 위에서 바라보이는 세상이 아홉 점의 운무(雲霧)처럼 작게 보인다는 말이다. 당나라 이하(李賀)의 시 〈몽천(夢天)〉에 "중국을 멀리 바라보니 아홉 점의 연기 같고, 한 웅덩이 바닷물도 한 잔 물을 쏟아부은 듯하네.[遙望齊州九點煙, 一泓海水杯中瀉.]"라는 구절이 있다. 행궁(行宮) 임금이 대궐을 떠나서 머무는 곳으로, 행재조(行在所)와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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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일 二十六日 ○오전에 비가 왔다. 오후에 동행과 우 참봉의 집으로 옮겨 머물렀다. ○午前雨。 午後同行移留於禹參奉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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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일 二十九日 ○주인집에서 머물렀다. ○留主人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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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일 初五日 ○밥을 먹기 전에 율지(聿之)와 함께 정동으로 가서 잠시 얘기를 하고 돌아왔다. 밥을 먹은 뒤 낙동(洛洞)으로 가 참판 이광문(李光文)24)을 만나려고 하였다. 그 집 문 앞에서 참판의 아들 이 진사를 만나서 그의 부친이 집에 계신지 물으니, 오늘 제관(祭官) 일 때문에 수원에 갔다고 하였다. 그래서 아랫집에 들러 참판 이광정(李光貞)을 만나 잠시 얘기를 나누었다. 용동으로 와 잠시 얘기를 나눈 뒤에 율지, 영규(榮奎)와 함께 회동(晦洞)25)의 장성 현감(長城縣監)을 지낸 송운재(宋雲載)26) 집으로 갔는데 송 장성27)이 집에 없었다. 다만 그 재종(再從, 6촌)과 잠시 얘기를 나누고 완북(完北, 전주 북문)의 송민수(宋民洙)의 서간을 전한 뒤에 그길로 나왔다. 송지순(宋持淳) 집을 찾아가 잠시 얘기를 나누고 나왔다. 오는 길에 가랑비를 만나 주인집으로 돌아왔다. ○食前, 與聿之往貞洞, 暫話而來。 食後, 往洛洞欲見李參判光文。 至其門外, 逢參判之子進士, 問其大人有無, 則以今日祭官, 往水原云。 故入下家, 見李參判光貞暫話。 來龍洞暫話 後, 與聿之及榮奎往晦洞宋長城雲載家, 則長城不在。 只與其再從暫話, 傳完北宋民洙書簡後, 仍爲出來。 尋宋持淳家, 暫話後出來。 中路逢微雨, 還來主人家。 이광문(李光文) 1778~1838. 자는 경박(景博), 호는 소화(小華). 본관은 우봉(牛峰)이다. 증조는 이재(李縡)이며, 부친은 아버지는 호조 참판 이채(李采)이다. 1801년(순조 1) 사마시에 합격하여 진사가 되고, 1807년 식년 문과에 별과로 급제하였다. 그 뒤 승정원주서(承政院注書)와 예문관검열에 이어, 전라감사 등 내ㆍ외직을 두루 거쳐 이조판서에 이르렀다. 회동(晦洞) 서울 중구 충무로4가・인현동1가・인현동2가에 걸쳐 있던 마을이다. 송운재(宋雲載) 1760~?. 자는 치회(稺會)이고, 본관은 여산(礪山)이며, 거주지는 서울이다. 1789년 식년시에 합격한 후 장성 부사, 전주 판관 등을 역임하였다. 송 장성 성(姓) 뒤에다 직책을 붙이는 방식인데, 지방 현감을 지낸 경우, 그 지명을 붙여 직책을 대신하였으며, 성을 빼고 지명만 써서 표현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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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일 十三日 아침 전에 주인을 데리고 가서 이 찰방(李察訪)을 만나 "어떻게든 주선하여 사또[使道]를 뵙게 해 주십시오."라고 누누이 간청을 하였다. 찰방이, "이때 마침 강등을 당하였으니 영문(營門)에 청탁하는 것이 피차가 어떠하겠습니까."라고 하였는데, 형편상 그러할 것 같았다. 문장(文章)을 청하는 일도 훗날에 하자고 하기에 내년 봄을 기다렸다가 다시 오겠다 약속하고 즉시 주인집으로 돌아왔다.아침을 먹고 길을 나서 종이를 사려고 지방(紙房)에 들어갔으나 사사로이 팔 수 없다고 하기에 그냥 나와 출발하였다. 노고암(老酒岩) 주막에 이르러 점심을 먹었다. 소로(小路)로 들어가 어렵게 임실(任實) 방곡(房谷) 송연규(宋延奎)의 집을 찾아가 묵었다. 50리를 갔다. 朝前率主人往見李察訪, 而曰: "某條周旋, 入謁使道之意。" 累累懇請, 則察訪曰: "此時適當貶時, 于謁營門, 彼此如何。"云, 勢似然矣。 請文事亦以後日爲言云云, 故待明春, 更來爲約, 卽爲出來主人家。 仍朝飯發程, 而以買紙次入紙房, 則不能私賣云, 故旋發。 抵老姑岩酒幕中火。 入小路, 艱尋任實 房谷 宋延奎家留宿。 行五十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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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일 二十日 밥을 먹은 후에 민 상사(閔上舍)와 여러 동접(同接)들과 함께 성균관에 들어갔다. 점심을 먹고 나서 이소(二所)7)의 과거 시험장에 들어가니 시험장은 협소한데 사자(士子)들이 너무 많아 세 곳으로 통설하기에 이르렀다. 노숙하며 밤을 새웠다. 食後與閔上舍及諸同接, 入成均館。 中火後, 因入二所場中, 則場中狹少, 士子甚多, 至以三所通設矣。 夜間經宿露處。 이소(二所) 문과 초시와 회시 때의 시험장의 하나로, 시험장을 각각 둘로 나누어 제1시험장은 일소(一所), 제2시험장은 이소(二所)라고 불렀다. 일소는 예조에, 이소는 성균관에 설치하였다. 《無名子集 文稿 册14 記丙戌別試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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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일 十六日 일찍 출발하여 야당(野黨)의 송계천(宋啓天) 집에 이르렀다. 마침 신안의 석사 한용(韓溶)과 다른 두 사람을 만나 잠시 이야기를 나누다가 아침을 먹고 길을 나섰다. 사동(蛇洞)에 이르러 점심을 먹었다. 소로(小路)로 들어가 큰 고개 하나를 넘어 어렵사리 도산(道山)의 족질인 필흥(弼興) 집을 찾아가서 묵었다. 70리를 갔다. 早發抵野塘 宋啓天家, 適逢新安 韓碩士 溶與他二人暫敍。 仍朝飯發程。 抵蛇洞中火。 入小路, 越一大嶺, 艱尋訪道山族姪弼興家留宿。 行七十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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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일 初一日 바람이 불지 않아 그다지 춥지는 않았다. 몸의 병이 비록 쾌차되지는 않았지만 점차 회복될 기미가 있으니 다행이다. 저녁에 눈보라가 크게 일어났다. 흥양(興陽)의 호장(戶長) 설리(薛吏)가 가서(家書)를 받아서 인사하고 떠났다. 또 한기(寒氣)가 들어 이불을 끌어안은 채 날을 보냈다. 無風不甚寒烈。 身病雖不快差, 漸有蘇完之機, 可幸。 夕間風雪大作。 興陽 戶長 薛吏受家書, 仍爲辭去。 又爲寒粟擁衾度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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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일 初六日 아침을 먹기 전에 박 진사(朴進士)가 반궁(泮宮)에서 찾아왔는데, 몹시 아팠던 곡절을 자세히 말해주었으니 그 위태로움이 심하였다. 다만 각각의 병으로 인사를 살피지 못하여 생사를 모르고 있다가 지금 얼굴을 마주하니 기쁘고 다행스러운 마음을 이루 말할 수 없다. 朝前朴進士, 自泮宮來見, 而備說其大痛之由, 危凜甚矣。 但各病不省, 不知存沒矣, 今而相面, 喜幸不可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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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일 初八日 아침을 먹기 전에 몹시 추웠다. 다만 날씨가 매우 맑아서 일단 기록해 두었다. 아침을 먹은 뒤에 청파(靑坡) 상원(尙元)의 집에 가서 잠시 이야기를 나누다가 왔는데, 그 집안사람 모두가 현재 앓고 있다고 하였다. 朝前甚寒烈, 而但日氣甚淸烈姑記之。 食後往靑坡 尙元家, 暫話而來, 其家擧皆方痛云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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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일 晦日 아침을 먹은 뒤에 빗줄기가 약간 누그러졌기에 길을 나서 정오에 오촌(鰲村)으로 들어갔다. 장석(丈席)을 들어가 뵙고 그 내부인(內夫人)의 상(喪)을 위로한 뒤 물러나 상제(喪制)7)에게도 또한 위로하였다. 장석(丈席)의 건강이 근래에 더욱 악화되어 몇 년 사이에 모습이 더욱 쇠약해지니 걱정스러웠다.잠시 쉬고 나서 행랑으로 나와 점심을 먹은 뒤에 실기(實記) 한 권과 가지고 온 약간의 물건을 드렸다. 장석(丈席)이 먼저 세충사(世忠祠)8)에 관한 일을 말씀하셨다. 지난번 흥양(興陽)의 송원(宋)이 왔을 때 한 말이 있었는데, 육(六)자를 세자(世字)로 고치라는 뜻의 편지였다고 하였다. 내가 "출발하기 며칠 전에 편지를 살펴보았습니다."라고 답하자 장석께서, "다른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육충사(六忠祠)로 하지 않는 것이 좋겠네."라고 하셨다. 그러므로 "하교하신 대로 시행하겠습니다."라고 하였다. 그대로 묵었다.저녁을 먹은 뒤에 임실(任實) 종인 두 사람도 왔다. 행랑에 한 객이 머물고 있기에 거주하는 곳을 물었더니 같은 도에 사는 광양(光陽)의 박정일(朴楨一)이라 하였다. 그를 만난 반가움은 다른 사람을 만난 반가움과 달리 더욱 컸다. 그대로 함께 머물렀다. 30리를 갔다. 食後雨勢稍歇, 故發程午時入鰲村, 入謁丈席, 致慰其內夫人喪, 退與喪人亦致慰, 丈席氣候近以添重, 數年之間, 衰象漸甚悶悶。 暫憩後, 出來廊底, 午飯後, 入納實記一卷與持來略干物。 丈席先言以世忠祠之事, 頃者興陽 宋來到, 有云云說話, 以六字改世字之意折簡矣, 故余答曰: "臨發前數日奉覽矣。" 丈席曰: "與人相話, 不可以六忠祠爲可"云, 故答曰: "依敎施行矣。" 仍爲留宿。 夕飯後, 任實宗二人亦來。 廊底留一客, 故問其所居, 則乃同道光陽 朴楨一也。 其喜與他有別, 幸幸。 仍爲同留。 行三十里。 상제(喪制) 부모나 조부모가 세상을 떠나 상중에 있는 사람을 말한다. 세충사(世忠祠) 전라남도 고흥군 대서면 화산리에 여산송씨 송간(宋侃)을 주벽으로 송대립(宋大立), 송심(宋諶), 김시습(金時習) 등 11위를 향사하는 사우(祠宇)인 서동사(西洞祠)의 이전 명칭으로, 1785년 최초 건립 당시 운곡사라는 이름으로 창건되었다. 이후 1796년 송간의 유거지인 동강면 마륜리 서대동에 운곡사 강당을 옮겨 세충사로 개칭하였으며, 1801년(순조1) 송건, 송순례, 송희립을 추배하여 일문 육충사(一門 六忠祠)라 이름하였다. 이후 1833년 세충사, 1846년(헌종12)에 매월당 김시습을 함께 봉안하면서 서동사로 칭하였고, 1868년 서원철폐령 때 훼철되었다가 1956년 지금의 자리에 다시 지으면서 재동서원(齋洞書院)이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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