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간기록문화
통합검색플랫폼

기관별 검색

검색 범위 지정 후 검색어를 넣지 않고 검색버튼을 클릭하면 분류 내 전체 자료를 볼 수 있습니다

전체 으로 검색된 결과 56403건입니다.

정렬갯수
저자 :
(편저자)
유형 :
고전적
유형분류 :
사부

10일 初十日 공주(公州)의 신막(新幕)에 이르러 점심을 먹고 정천(定川)에서 묵었다. 해가 남아있는 동안 이성(尼城)에 갈 수는 있지만 전주의 마부 때문에 이곳 신막에 머물려는 것이다. 至公州 新幕中火 留宿於定川。 日力則可往尼城, 而全州 馬夫故, 欲留於此幕故也。

상세정보
저자 :
(편저자)
유형 :
고전적
유형분류 :
사부

윤9월 閏九月

상세정보
저자 :
(편저자)
유형 :
고전적
유형분류 :
사부

18일 十八日 ○송흠준(宋欽俊), 박광승(朴光昇)이 동구 밖까지 나와 작별하였다. 밀목치를 넘어 신도(新都)를 지나 연산(連山) 읍 앞에 이르렀다. 요기 차 한 주막에 들어가니 주막 안이 몹시 북적거리고 어수선하였다. 그 연고를 물으니, 이 읍의 향회(鄕會)28)가 열려, 유향(儒鄕)29)과 이교(吏校)30)가 많이 모였다고 하였다. 술과 안주와 떡과 국을 얻어먹고 곧바로 출발하였다. 밤이 되어 전당(錢塘)에 도착하였다. 어젯밤 서원에 머무를 때 박광승이 《동학원(東學院)》 시축을 꺼내 보여 주었다. 원운은 송 생원의 시로 다음과 같다.땅이 감추고 하늘이 아끼는 몇 이랑 언덕에(地秘天慳數畝邱)청산은 우뚝 서 있고 물은 유유히 흘러가네(靑山屹立水長流)드디어 열두 선생의 사당을 완성하였으니(終成十二先生廟)나무에서 이는 바람 소리 만고토록 유장하리(樹得風聲萬古悠)평생토록 부지런히 우러렀는데31)(平生勤仰止)오늘 저녁 다행히 바람대로 되었네(今夕幸望依)도학은 푸른 산처럼 우뚝 서 있고(道學靑山立)순수한 충정은 밝은 해처럼 빛나네(精忠白日輝)매월당의 풍모는 감개가 무량하고(梅翁風感慨)세조의 뜻은 깊고 은미하였네(光廟旨深微)일 년 만에 황폐해진 곳을 수리하니(一載修荒廢)우리가 귀의할 곳이 만들어졌네(吾徒有所歸)내가 다음과 같이 차운하였다.동학사를 새로이 이 언덕에 세우니(東學新祠闢此邱)앞 시내 굽이굽이 반드시 동으로 흐르네(前川萬折必東流)우리 또한 충신의 후예로서(而吾亦是忠賢後)지금 조정에 망배하니 만감이 아득하네(望拜今朝百感悠)동학이라는 이름의 마을이 있으니(有洞名東學)이곳에 제각(祭閣)과 사당이 지어졌네(此間閣廟依)충혼은 위 아래가 같으니(忠魂同上下)화려한 제도 아울러 밝게 빛나네(華制幷光輝)우리 선조 배향하지 못한 게 한이니(恨未吾先配)도리어 뜻이 미약했음을 참담히 느끼네(還慚感意微)오늘의 행차에 충분한 뜻이 있으니(今行餘意在)졸구를 읊고서 돌아가네(拙句詠而歸)이찬이 다음과 같이 차운하였다.벼랑을 끼고 시내와 이어진 옛 언덕을 찾으니(拚壁緣溪訪古邱)깎아지른 제각과 사당이 푸른 시내를 굽어보네(巍然閣廟俯淸溪)오늘에 와서 임금과 신하가 일체가 될 즈음(于今一體君臣際)뜻있는 선비의 천추 감회가 아련히 배가되네(志士千秋感倍悠)오늘 계룡산 골짜기에(是日鷄山洞)임금과 신하가 의지한 곳 있네(君臣有所依)서교32)의 피는 붉게 남아 있고(西橋血有赤)동봉33)의 달은 더욱 밝게 빛나네(東峯月更輝)충절은 밝은 해를 관통하였고(忠節貫白日)충혼각엔 자미가 빙 둘러있네(魂閣繞紫微)만약 우리 선조를 배향하면(若配吾先祖)영령이 저절로 돌아오리라(英靈自越歸) ○與宋欽俊、朴光昇出洞口外作別。 越密木峙, 歷新都, 至連山邑前。 療飢次入一幕, 則幕中頗煩撓。 故問其故, 則此邑鄕會云, 而儒鄕及吏校多會云。 酒肴及餠羹得食, 卽爲發程。 乘夜得達錢塘。 昨夜留院時, 朴光昇出見《東學院》韻軸。 而元韻卽宋生員韻。 "地秘天慳數畝邱, 靑山屹立水長流。 終成十二先生廟, 樹得風聲萬古悠。" "平生勤仰止, 今夕幸望依。 道學靑山立, 精忠白日輝。 梅翁風感慨, 光廟旨深微。 一載修荒廢, 吾徒有所歸。" 余拙次曰: "東學新祠闢此邱, 前川萬折必東流。 而吾亦是忠賢後, 望拜今朝百感悠。" "有洞名東學, 此間閣廟依。 忠魂同上下, 華制幷光輝。 恨未吾先配, 還慚感意微。 今行餘意在, 拙句詠而歸。" 而贊次曰: "拚壁緣溪訪古邱, 巍然閣廟俯淸溪。 于今一體君臣際, 志士千秋感倍悠。" "是日鷄山洞, 君臣有所依。 西橋血有赤, 東峯月更輝。 忠節貫白日, 魂閣繞紫微。 若配吾先祖, 英靈自越歸。" 향회(鄕會) 지방에 거주하는 사족이 중심이 되어 운영한 지방자치회이다. 사족이 향안(鄕案)을 기반으로 향촌에 대한 지배를 실현하기 위한 장치로서 구성하여 운영하였다. 유향(儒鄕) 유생(儒生)과 향청(鄕廳)의 직원을 이른 말이다. 이교(吏校) 관아의 하급관리인 이서와 군교를 합하여 이르는 말이다. 평생토록 …… 우러렀는데 존경할 만한 선현(先賢)을 사모할 때 쓰는 표현이다. 《시경(詩經)》 소아(小雅) 차할(車舝)에 "저 높은 산봉우리 우러러보며, 큰길을 향해 나아가노라.[高山仰止, 景行行止. ]"라는 말이 나온다. 서교 서재(西齋) 송간(宋侃)을 가리킨다. 동봉 매월당(梅月堂) 김시습(金時習)을 가리킨다.

상세정보
저자 :
(편저자)
유형 :
고전적
유형분류 :
사부

통문을 붙이다 附通文 동학(東學) 첨존(僉尊) 집사(執事)41)연산(連山) 김생(金生)의 문안 편지서리 내리는 계절 여러분의 안부 매우 건강하고 평안하시다니 우러러 위로되고 간절히 그리는 마음 각별합니다. 저는 병으로 외딴 시골에 칩거하여 스스로 소식을 단절하고 지냅니다. 사우의 회의 석상에서 돈암서원(遯巖書院)의 통문을 살펴보고, 또 송 사문(宋斯文)이 소매에 넣어 직접 가져온 서재(西齋) 송 선생(宋先生)42)의 절의(節義) 관련 문적을 보고, 저도 모르게 감격하여 머리털이 쭈뼛해졌습니다. -결락- 강상(綱常)을 부지하고, 우주에 동량(棟樑)이 되는 것 -결락- 아닙니다. 또 듣기로 매월당 김 선생(김시습(金時習))도 아울러 제향한다고 하던데, 모두 사림의 성대한 일이자 국가가 포장(褒獎)하는 전장(典章) …… -결락- 여러분의 논의 …… . 그 의를 주창했던 곳에 유적이 아직 남아 있으니 오히려 예전에 경황이 없었던 것이 개탄스럽습니다. 하물며 오늘날 누군들 공경하고 우러르지 않겠습니까. 두 선생의 높은 절의와 대의는 모두 하나로 귀결되니 오늘날 아울러 제사 지내는 일은 다 병이(秉彝, 떳떳한 도리)에서 나온 논의입니다. 여러분의 생각은 어떤지 모르겠습니다. 송구하기 그지없습니다. 나머지는 병이 들어 대신 쓰게 하여 이만 줄입니다. 살펴주십시오. 삼가 글월 올립니다.신묘년 10월 10일 진사 재말(齋末) 김기욱(金箕熤) 東學 僉尊 執事連山 金生 候書伏惟霜令僉齋5)候, 萬衛安勝, 仰慰溸區區, 不用常品。 齋末病蟄窮巷, 聞問自絶。 於士友會議之席, 謹按遯院通章, 且見宋斯文袖來西齋宋先生節義文蹟, 自不覺激肝而堅髮矣。 【缺】 扶持乎綱常、棟樑乎宇宙者, 非斯【缺】 。 又聞梅月堂金先生幷侑云。 儘是士林之盛擧, 國家褒奬之典章, 【缺】 諸公之議, 於其首義之地, 遺蹟尙存, 則猶有慨於前日之未遑。 而況於今者, 孰不欽仰乎! 兩先生卓節大義, 同歸一揆, 則今日幷侑之擧, 盡出於秉彛之論。 猶未知僉意之如何? 不勝悚悚。 餘病倩不備。 伏惟僉照。 謹上6)狀。辛卯十月十日。 進士齋末金箕熤。 집사(執事) 높은 사람에게 보내는 편지 겉봉의 택호(宅號) 밑에, 그를 모시고 있는 사람이 받아서 전하여 달라는 뜻으로 쓰는 말이다. 송 선생(宋先生) 송간(宋侃)이다. 조선 전기의 충신으로 생몰년은 미상이다. 호는 서재(西齋)이며, 시호는 충강(忠剛)이다. 세종ㆍ문종ㆍ단종의 3조를 섬겨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이르렀다. 단종의 왕명을 받아 돌아오는 길에 왕이 영월에 갇혀 있다는 소식을 듣고 찾아가 복명하였다. 단종 사후 산속에 들어가 3년상을 마치고 은둔하였다. 齋 저본에는 '齊'로 되어있으나 문맥에 따라 '齋'로 수정하였다. 上 저본에는 '下'로 되어있으나 다수 용례와 문맥에 따라 '上'으로 수정하였다.

상세정보
저자 :
(편저자)
유형 :
고전적
유형분류 :
사부

1832년(임진) 1832年(壬辰)

상세정보
저자 :
(편저자)
유형 :
고전적
유형분류 :
사부

12일 十二日 일찍 출발하여 광주(廣州) 삼거리(三巨里)에서 아침을 먹고, 엔구뷔 주막에 이르러 점심을 먹었다. 서빙고진(西氷庫津)에 이르러 간신히 청파(靑坡) 박후근(朴厚根)의 집을 어렵사리 찾아가서 묵었다. 60리를 갔다. 후근은 흥양(興陽) 문등(門登) 사람인데 이곳에서 살고 있었다. 早發至廣州三巨里朝飯, 抵엔구뷔酒幕中火。 抵西氷庫津, 艱尋靑坡 朴厚根家留宿。 行六十里。 厚根卽興陽 門登之人, 居此地也。

상세정보
저자 :
(편저자)
유형 :
고전적
유형분류 :
사부

11일 十一日 아침을 먹고 새벽에 출발하였다. 은진(恩津) 삼거리(三巨里) 주막에 이르러 시내를 건널 때에 대석(臺石)이 얼어 있어 있는 바람에 발이 미끄러져 물에 빠졌는데, 물이 무릎 위까지 차올라 옷이 모두 젖어버렸다. 겨우 냇가로 나왔으나 땅도 얼어 있었다. 이런 혹한에 해도 뜨기 전에 이런 변고를 만났으니, 어찌하여 이번 길에 나와 노복으로 하여금 왕래함에 이처럼 낭패의 지경에 이르게 한단 말인가. 간신히 1리를 갔는데, 젖은 옷이 굳어가고 발이 너무 시려서 걸을 수 없기에 버선을 벗으려고 하니 손가락이 굳어 벗을 수가 없었다. 노복을 시켜 간신히 벗고 얼어버린 버선을 새 버선으로 바꾸어 신었으니, 행로의 어려운 실상을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시암(杮岩) 주점에 이르러 잠시 쉬었다가 요기를 하고 전주 삼례(參禮)에 이르러 묵었다. 90리를 갔다. 仍朝飯曉發, 抵恩津三巨里酒幕後。 越川之際, 臺石凍滑, 失足立水, 水過膝上, 衣下盡濕。 才出川邊, 卽地旋凍, 當此極寒, 朝前逢此變, 如何此行使我奴主往來, 致敗至於此境耶?艱行一里, 濕衣堅動, 脚足甚寒, 不能行步, 故欲脫襪子, 則指直不得脫。 使奴者艱脫, 凍襪換着新襪, 則行路之艱狀, 不可言。 抵杮岩酒店, 暫憩療飢, 抵全州 參禮留宿。 行九十里。

상세정보
저자 :
(편저자)
유형 :
고전적
유형분류 :
사부

12일 十二日 새벽에 출발하여 용산교(龍山橋)에 이르러 아침을 먹고 부내(府內)의 장영손(張永孫) 집에 도착하였다. 잠시 쉰 뒤에 서산서원(西山書院)60)에 가서 최수일(崔洙一)을 만났다. 대개 오촌(鰲村)에서 서로 작별할 때, 내려가는 길에 찾아가겠다는 약속이 있었기 때문이니, 그 기쁨을 어찌 다 말할 수 있겠는가.주인집으로 돌아와 저녁을 먹은 뒤에 주인을 데리고 가서 이 찰방을 만났더니, 사또(使道)가 감기에 걸린 데다 온갖 업무로 복잡하여 뵐 수 없다고 하였다. 그리고 지난번에 두고 간 책자를 사또께 드렸더니 사또가 한 편을 다 열람하시고는, "일찍이 《장릉지(莊陵誌)》를 교정(校正)한 적이 있다."했다고 하였다. 《서재실기(西齋實記)》를 두고 전에 남겨 둔 책자(冊子, 《서재행록(西齋行錄)》을 말함)는 가지고 나와 주인집에서 묵었다. 曉發抵龍山橋朝飯, 得達府內 張永孫家。 小憩後, 往西山書院, 訪見崔洙一。 蓋鰲村相別時, 有下去路尋訪之約故也, 其忻喜何可盡言? 還來主人家, 夕飯後, 率主人往見李察訪, 則使道非但感氣, 百務多端, 不得見謁云, 而頃留冊子, 納于使道, 則使道盡覽一篇, 而曰: "曾已校正於《莊陵誌》"云矣。 留《西齋實記》, 前留冊子, 則持而出來, 主人家留宿。 서산서원(西山書院) 조선 인조(仁祖) 때 전주(全州)에 건립한 사우(祠宇)로, 최양(崔瀁)·최덕지(崔德之)·송영구(宋英耉)·이계맹(李繼孟)·이흥발(李興浡)·이기발(李起浡) 등을 배향하였다.

상세정보
저자 :
(편저자)
유형 :
고전적
유형분류 :
사부

27일 二十七日 눈이 내려 다시 추웠다. 병 또한 점점 차도가 있으니 다행이다. 시득(時得)을 반궁(泮宮)에 보내어 박 진사(朴進士)의 소식을 물으니 또한 감기 때문에 크게 아프다고 하였다. 雪還寒。 病亦漸差, 可幸。 送時得於泮中, 問朴進士消息, 則亦以感氣大痛云。

상세정보
저자 :
(편저자)
유형 :
고전적
유형분류 :
사부

28일 二十八日 추웠다. 일전에 이 선달(李先達)이 송도에서 객사했다고 들었는데, 참담하고 또 참담한 일이다. 올해의 독감은 전에 없던 것으로 사망자가 계속 생기는데, 양서(兩西)의 경우는 길이 막혀 끊길 정도이다. 경성(京城)에도 일시에 크게 번져 길 위에 간간이 쓰러져 죽은 시체가 있고 집집마다 아프지 않은 사람이 없다. 늙고 쇠약하면 반드시 죽음에 이르는 병증이 남쪽 지방은 어떠한지 모르겠으나, 아마 아직 내려가지 않았을 뿐이다. 寒。 日前聞李先達, 客死於松都云, 慘矣。 慘矣慘矣。 今年毒感, 前古所無, 死亡相繼, 至於兩西, 則行路阻絶。 京城亦一時大熾, 道上間有僵屍, 家家戶戶, 無人不痛。 老殘必死之症, 未知南中則何如, 而應未及下去耳。

상세정보
저자 :
(편저자)
유형 :
고전적
유형분류 :
사부

14일 十四日 오전에 종이를 사고 즉시 출발하여 두곡(杜谷)에 이르러 묵었다. 20리를 갔다. 午前買紙, 卽發抵杜谷留宿。 行二十里。

상세정보
저자 :
(편저자)
유형 :
고전적
유형분류 :
사부

15일 十五日 밤에 눈이 내렸다. 새벽에 출발하여 임실(任實) 읍내에 이르러 아침을 먹었다. 고개를 넘어 간신히 현동(玄洞) 송기렴(宋基濂)의 집을 찾아갔으나 기렴은 출타하여 만나지 못하고, 그 아들 전(椣)과 잠시 이야기를 나누다가 《돈학문적(遯壑文蹟)》을 보고자 하였다. 그 문적이 모두 신안서원(新安書院)61)에 있다고 하므로 신안서원(新安書院)에 이르렀다.신실(神室)은 동서로 나누어 만들었는데, 서실(西室)은 주부자(朱夫子)의 영정(影幀)을 걸어 쌍창(雙窓)으로 여닫게 되어 있고, 동실은 돈학(遯壑) 송경원(宋慶元, 1419~1510)·신재(新齋) 한호겸(韓好謙, 1535~1579)·만회당(晩晦堂) 한필성(韓必聖, 1625~1691)·홍운정(鴻雲亭) 한명유(韓鳴愈)·거묵당(巨墨堂) 송시태(宋時態) 등 6현의 영정이 봉안되어 있다.신실(神室)은 새로 만들어 깨끗하였지만 서원의 사당은 아직 모양을 갖추지 못하고 있으니, 어진 이를 사모하는 도리가 매우 개탄스럽고 애석하였다. 참배하고 봉심(奉審)한 뒤에, 송연영(宋延英)과 한원택(韓元宅)에게 요구하여 문적(文蹟)을 보여 달라고 하였더니, 전주의 이 생원(李生員)이 지난번에 가지고 갔다고 하였다. 문적을 볼 수 없으니, 한탄스러울 따름이었다. 그대로 길을 나서 대곡(大谷)의 송낙철(宋洛哲) 집에 이르러 묵었다. 20리를 갔다. 夜雪。 曉發抵任實邑內朝飯, 越嶺艱尋玄洞 宋基濂家, 則基濂出他, 不得相面, 只與其子椣暫敍, 欲見《遯壑文蹟》矣。 其文蹟盡在新安書院云, 故抵新安書院, 則神室分作東西, 而西室則掛朱夫子影幀, 以雙窓開閉, 東室則宋遯壑、韓新齋、晩晦堂、鴻雲亭、宋巨墨堂六賢妥靈之所也。 神室則新創鮮明, 而院貌尙未成樣, 其於慕賢之道, 甚爲慨惜。 參謁奉審後, 要宋延英及韓元宅, 欲見文蹟, 則全州 李生員, 頃來持去云, 故不得尋見, 可歎耳。 仍爲發程, 抵大谷 宋洛哲家留宿。 行二十里。 신안서원(新安書院) 전라북도 임실군 임실읍 신안리에 있는 서원으로, 1588년(선조21)에 신재(新齋) 한호겸(韓好謙)의 문하들이 스승을 위해 세웠으며, 정유재란으로 불탄 것을 1669년(현종10)에 다시 복립하였다. 처음에는 이서(李舒, 1332~1410)와 한호겸만을 봉안하였으나, 1788년(정조12)에 사림들의 결의에 따라 돈학(遯壑) 송경원(宋慶元), 만회당(晩晦堂) 한필성(韓必聖), 홍운정(鴻雲亭) 한명유(韓鳴愈), 거묵당(距墨堂) 송시태(宋時態)를 추가로 배향하였다. 훗날 김수(金洙)·강백진(康伯珍)을 추가하여 모두 8현을 배향하였다.

상세정보
저자 :
(편저자)
유형 :
고전적
유형분류 :
사부

23일 二十三日 10관(貫)의 동(銅)을 사수(士洙)에게 보냈다. 送十貫銅於士洙。

상세정보
저자 :
(편저자)
유형 :
고전적
유형분류 :
사부

24일 二十四日

상세정보
저자 :
(편저자)
유형 :
고전적
유형분류 :
사부

19일 十九日 새벽에 출발하여 노성(魯城)38) 읍내에 이르러 아침을 먹었다. 황화정(皇華亭)39)에 이르러 점심을 먹었다. 치등(峙登) 주막 어귀에 이르러 나는 성묘하기 위해 시조의 묘소에 들어갔다. 동행은 먼저 능측(陵側)으로 가기로 약속하였기 때문에 성묘한 뒤 성묘록(省墓錄)에 이름을 쓰고 급히 능측으로 갔다. 동행이 오지 않아서 몹시 기다리던 중에 날이 저어서야 강(姜)과 송(宋) 두 벗이 왔다. 다른 동행은 마병(馬病)으로 오지 못해서, 두 벗과 묵었다. 100리를 갔다. 曉發抵魯城邑內朝飯。 抵皇華亭午飯。 至峙登酒幕前, 余則省墓次, 入始祖墓所, 同行則先行約以陵側, 故省墓後, 書名《省墓錄》, 急往陵側, 則同行不來, 故苦待中, 暮時姜、宋兩友來。 他同行則以馬病不來, 只與兩友留宿。 行百里。 노성(魯城) 충청남도 논산 지역의 옛 지명이다. 지명 유래는 이산현의 지형이 공자가 탄생한 중국 노나라 이구산(尼丘山)의 지형과 비슷하다 하여 '노'(魯)자를 따고 이산(尼山)의 성을 상징하는 '성'자를 따서 노성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전한다. 황화정(皇華亭) 지금의 충남 논산시 연무읍 고내리에 해당한다. 조선 시대에는 충청도 땅이 아니라 전라도 여산읍(익산의 옛 지명) 소속이었는데, 임금으로부터 전라도관찰사로 제수받으면 충청도와 전라도의 경계 지역인 여산 황화정에서 신·구 임무교대식인 교귀식(交龜式)을 치르고 전주 조경묘에 숙배(肅拜)하는 것이 순서였다. 때로는 활터로도 이용했으며 현재는 비석만 남아 있다.

상세정보
저자 :
(편저자)
유형 :
고전적
유형분류 :
사부

24일 二十四日 일찍 출발하여 묘치(峙)5)에 이르러 아침을 먹고, 주포(周浦) 주막에 이르러 점심을 먹었다. 남원 읍내에 이르러 묵었다. 70리를 갔다. 早發至峙朝飯, 抵周浦幕中火。 抵南原邑內留宿。 行七十里。 묘치(猫峙) 전라남도 곡성군 삼기면과 곡성읍 경계에 있는 고개로 '괘재(고양이재)'라고도 부른다.

상세정보
저자 :
(편저자)
유형 :
고전적
유형분류 :
사부

27일 二十七日 아침 전에 다시 비장소(裨將所)로 갔으나 찰방이 선화당(宣化堂)으로 들어갔기 때문에 만나지 못하였다. 김노(金奴)는 발을 치료하기 위해 그대로 주인집에 머물렀다. 김방업(金房業)과 이별할 때 방업이 말하기를, "제가 도모한 일이 만약 성사된다면 오래 머무를 것이고 성사되지 않는다면 내일 내려갈 것입니다."라고 하였다.아침 전에 사람을 사서 짐을 지우고 어쩔 수 없이 길을 나서지만, 객지에서 종과 주인이 서로 헤어지게 되어 심난한 마음을 가누기가 어려웠다. 이에 출발하여 용산교(龍山橋)에 이르러 아침을 먹고, 통천등(通泉登)에 이르러 점심을 먹었다. 저녁에 여산(礪山)의 산지기 집에 도착하였다. 이날 종과 주인이 서로 떨어져서 이곳에 이른 것은 내일 시조(始祖) 산소(山所)에서 있을 동지향사(冬至享祀)에 참석하려고 했기 때문이다. 제종(諸宗)들과 산지기의 집에서 머물렀다. 朝前更往裨將所, 則察訪入去宣化堂, 故不見。 金奴則治療次, 仍留主人家。 與金房業相別之際, 房業曰: "吾之所營事, 若成則久留, 不成則明日下去云矣。" 食前雇人負卜, 不得已發程, 客中奴主相分, 憒亂心懷, 難可堪抑。 仍發抵龍山橋朝飯, 抵通泉登中火。 暮抵礪山山直家。 是日奴主相離, 得達此處者, 欲參明日冬至享祀於始祖山所故也。 與諸宗留山直家。

상세정보
저자 :
(편저자)
유형 :
고전적
유형분류 :
사부

28일 二十八日 새벽부터 눈비가 오더니 정오까지 그치지 않았다. 달리 우구(雨具)가 없으니 묘정(墓庭)의 제례를 행하기가 매우 어려워서 오후에 부득이 산지기 집을 청소하였다. 저물녘 예를 행할 때에 나에게 축(祝)을 하라고 하여서 외람되이 그 예를 담당하였는데, 이는 실로 어찌할 수 없는 임시방편에서 나온 것이지만 오히려 행해지지 않는 것보다 낫지 않겠는가. 온종일 비가 내리고 밤새도록 그치지 않았다. 自曉雨雪, 至午不止。 別無雨具, 墓庭祀禮, 極爲難行, 故午後不得已灑掃山直家。 至暮時, 仍爲行禮時, 以余爲祝, 故冒當其禮, 而寔出於不得之權道, 猶愈於不行耶。 終日其雨, 達夜不止。

상세정보
저자 :
(편저자)
유형 :
고전적
유형분류 :
사부

18일 十八日 새벽에 출발하여 덕평(德平)35)에 이르러 아침을 먹고, 모로원(慕露院)36)에 이르러 점심을 먹었다. 판치(板峙)37) 아래 소월(小越)에 이르러 묵었다. 110리를 갔다. 曉發抵德平朝飯, 抵慕露院午飯。 抵板峙下小越留宿。 行百十里。 덕평(德平) 충청도 청주목(淸州牧)과 전의현(全義縣)의 경계에 있었던 마을 이름이다. 지금의 충청남도 연기군(燕歧郡) 전의면(全義面) 소정리(小井里)와 운당리(雲堂里) 지역에 해당한다. 모로원(慕露院) 충청남도 공주시 정안면 상용리 양달 마을에 있었던 역원(驛院)이다. 《동국여지승람》에 따르면, 공주에서 북쪽으로 10킬로미터쯤 떨어진 곳에 있었다고 하며, 원래 명칭은 '모로원(毛老院)이다. 판치(板峙) 충청남도 공주시 계룡면 봉면리에 있는 고개 이름이다.

상세정보
저자 :
(편저자)
유형 :
고전적
유형분류 :
사부

22일 二十二日 눈이 내렸다. 雪。

상세정보
56403건입니다.
/2821
상단이동 버튼 하단이동 버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