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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일 二十四日 맑았다. 이른 새벽에 사람을 고용해 우산(牛山)1)의 안덕로(安德老) 집에 보내 서간(書簡)을 전하게 하고 돌아오는 편을 기다렸다가 길에 올랐는데, 날이 이미 저물었다. 천평(泉坪)2)에 이르러 묵었다. 노잣돈 1냥이 들어왔다. 이날 30리 길을 갔다. 晴。 凌晨雇人, 送牛山 安德老家傳書簡, 待回便上程, 日已晩矣。 至泉坪留宿。 路資錢一兩入。 是日行三十里。 우산(牛山) 전라남도 순천시 송광면 우산리이다. 천평(泉坪) 전라남도 순천시 주암면 천평마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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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일 二十五日 맑았다. 일찌감치 밥을 먹은 뒤에 길을 나서 궁호(弓湖)에 이르러 허척(許戚)을 위문하였다. 이날은 바로 허척(許戚)의 길례일(吉禮日)이다. 술잔을 올리고 잠시 쉬었다가 서둘러 정자로 돌아왔다. 잠시 사희(士希)와 생질녀를 만났는데, 생질녀가 끌어안고 큰 소리로 통곡하니 그 마음이 서글펐다. 석곡(石谷)에 이르러 말에게 꼴을 먹이고 점심을 먹은 다음, 동막(東幕)에 이르러 묵었다. 이날 60리 길을 갔다. 晴。 早飯後上程, 至弓湖吊許戚, 是日卽許戚吉禮日也。 進酒盃暫休, 催歸亭。 暫見士希及甥姪女, 甥姪女抱之大哭, 其情慽矣。 至石谷秣馬中火, 到東幕留宿。 是日行六十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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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일 二十一日 매우 추웠다. 윤생이 또 왔으므로 함께 청배(靑排)에 가서 상원(尙元)을 보고 왔다. 極寒。 尹生又來, 故同往靑排, 見尙元而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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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일 卄七日 풍설(風雪)이 매우 심했다. 말이 먹으려 들지 않기에 걸어서 오수(獒樹)에 이르렀다. 화옥(華玉)이 오지 않았는데, 행인(行人)들의 말을 전해 들으니 전석치(磚石峙)에서 머물며 기다린다고 하여서 인편을 통해 기별을 부치고 그대로 오수(獒樹)에 머물렀다. 風雪極惡。 以馬之不食, 徒步至獒樹, 則華玉不來, 而傳聞行人之言, 則留待於磚石峙云, 故因便付奇, 因留獒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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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일 二十九日 이른 아침에 잠자리에서 일어나기도 전에 김이록(金履祿)이 찾아와서 만나고 갔다. 아침을 먹은 뒤에 창동(倉洞)에 가서 박 참의(朴參議)를 만나고, 이어 주동(鑄洞)에 가서 한참 동안 이야기를 나누다가 다시 죽동(竹洞)으로 가서 사수(士壽)를 만나보았다. 돌아오는 길에 명동(明洞)의 순창(淳昌) 집에 들렀으나, 진사(進士)가 없었으므로 곧장 나와서 잠깐 곽교(廓橋)의 주서(注書) 집에 들렀다가 이야기를 조금 나누다가 왔다. 早朝未起, 金履祿來見而去。 食後往倉洞見朴參議, 因往鑄洞, 移時相話, 轉向竹洞見士壽。 來路入明洞 淳昌家, 則進士不在, 故卽爲出來, 暫入廓橋 注書家, 小話而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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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일 初一日 아침을 먹은 뒤에 송현(松峴)의 안 교리(安校理) 집에 갔더니 화옥(華玉)이 벌써 도착해 있었는데, 전에 이미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기로 약속했기 때문이다. 이어 안현(安峴)에 가서 예판(禮判)을 만나 잠시 이야기를 나눈 뒤에 다시 호동(壺洞)으로 향하여 박 상인(朴喪人)을 만나고, 지나는 길에 진 판관(陳判官)을 잠깐 만났다. 또 유동(楡洞)에 가서 석사(碩士) 유자일(兪子一)을 만나고, 조점(趙店)에 갔더니 화옥도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이에 함께 요기하고 왔다. 食後往松峴 安校理家, 則華玉已來到, 盖前已有約會話矣。 因往安峴見禮判, 小話後, 轉向壺洞見朴喪人, 歷路暫見陳判官。 又往楡洞見兪碩士 子一, 又往趙店, 則華玉亦來待矣。 因與療飢而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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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일 十二日 또 몹시 추웠다. 병세가 조금도 변동이 없고 추운 날씨가 또 이와 같으니 이를 장차 어찌해야 할지 모르겠다. 고을 사내가 가는 편에 향서(鄕書)를 부쳤다. 이(李)와 배(裵) 두 사람이 또 찾아와 보고는 곁을 떠나기 어려워하고 측은해 하는 기색이 많았다. 참으로 감사하게도 민 남평(閔南平)이 찾아와서 보고 갔으며, 특히 백건(伯健)은 하루에 두 번 안부를 묻기도 하며 오지 않은 날이 없었다. 이와 같이 몹시 추운 때에 왕래하던 사람도 끊기기 마련인데, 매번 가엽게 여기는 기색으로 찾아와서 안부를 묻고 가니 지극히 감사한 일이었다. 又爲極寒。 病勢小無變動, 日寒又如此, 此將奈何? 付鄕書於邑漢去便, 李、裵兩人又爲來見, 多有難離惻然之色。 多感閔南平來見而去, 惟伯健則一日或再問, 無日不來。 如此極寒, 絶無往來之人, 每以矜閔之色, 來問而去, 極感極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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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일 十三日 추웠다. 병세가 점점 위중해졌다. 보는 사람들은 변고를 당할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나도 어찌할 도리가 없으니, 이것이 참으로 운명이라 한들 어찌하겠는가. 다만 천노(千奴)를 보내 버린 한 가지 일만이 마음속에 원통하게 맺혀 있다. 사람이 죽은 뒤에는 만사가 모두 재가 되겠지만, 다만 우둔한 자식 하나가 생계를 꾸려 가지 못하게 될까 이것이 한스러울 뿐이다. 송동(宋洞)의 종인(宗人)과 향객(鄕客)이 두서너 번 찾아와서 보고 갔다. 寒。 病勢漸重, 觀者意其逢變, 吾亦末由, 此眞命也, 奈何? 但送奴一事, 寃結心頭。 人生身後, 則萬事皆灰, 而但愚魯一子, 使不得料生, 是所恨也。 宋洞宗人及鄕客數三來見而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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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일 十三日 동틀 무렵 출발하여 노복과 말을 영변(寧邊)의 주인집으로 먼저 보내고는 시종 혼(混)과 대동루(大同樓)에 올라 두루 살펴본 뒤에 이어서 연광정(練光亭)54)에 올랐다. 사방 벽에 걸린 제영시(題咏詩)가 선배들의 저술(著述)이 아닌 것이 없었는데, 그 풍 중에 "긴 성벽 한 면55)에는 넘실넘실 흐르는 물이요, 큰 들판 동쪽 언저리에 점점이 솟아 있는 산이로세. [長城一面溶溶水, 大野東頭點點山.]56)라는 시구는 참으로 그림으로 그려낸 듯하였는데, 큰 글자로 새겨 두 기둥에 붙여 놓았다. 마침내 절구 한 수를 읊었다.하루에 서쪽으로 백 리 길 달려왔건만(一日西驅百里餘)단군 기자 묵은 자취 이미 페허가 되었네(檀箕陳跡已丘墟)높다란 성은 천년을 흘렀고(高城閱劫千年後)넓은 벌판엔 시월 초순의 서리가 내렸네(大野經霜十月初)얼어붙은 먼 포구에 돛 그림자 차갑고(遠浦氷生帆影冷)물에 비친 장림의 언덕 풍경 멀도다(長林水落岸容疏)고요히 기댄 난간 옆으로 강물은 흘러가는데(欄頭靜倚江聲立)빼어난 경치 졸필로 다 형용하기 어렵구나(勝槩遍難拙筆書)다시 성 위의 영명사(永明寺) 부벽루(浮碧樓)에 올라가 모란봉(牧丹峯)과 을밀대(乙密臺)를 보고, 능라도(凌羅島)와 백운탄(白雲灘)이 보았다. 마침내 성 바깥쪽으로 강을 따라 내려오는데 석벽이 우뚝 솟아 있고, 가운데에 '청류벽(淸流壁)'이라 새겨져 있었다. 큰 강을 굽어보니 길이가 10리 남짓 되었다. 장도문(長渡門)을 통해 성안으로 들어가니 여염집이 즐비하여 송도보다 나았는데, 대개 그 내룡(來龍)57)이 매우 완만하여 한 곳도 높은 봉우리가 없고 모두 평지행룡(平地行龍)58)의 지세였다. 영주인 집에서 아침을 먹고 부벽루에서 〈삼연(三淵)〉59)의 시에 차운하였다.평양이 좋다는 말 예전부터 들었노니(昔聞平壤好)하루아침의 유람 하늘이 빌려준 것이라(天借一朝遊)산세는 황량한 벌판을 담아내더니(山勢容荒野)물빛은 높은 누각에게 양보하였네(水光讓高樓)누대에 머물며 을밀을 불러보고(臺留招乙密)우뚝한 벼랑에 서서 맑은 강물을 굽어보네(壁立俯淸流)기이한 경치 따로 있노니(別有奇觀處)텅 빈 강의 달빛 배를 가득 채우네(江空月滿舟)칠성문(七星門)60)에서 나와 채 1리(里)를 못 가 송림 안 기자묘(箕子墓)61)로 들어갔다. 묘 앞에 작은 비각(碑刻)이 세워져 있고, 기자묘 좌우에는 각각 두 석인(石人)을 세웠다. 묘 뒤에는 작은 돌을 세워 두었으니, 이것이 바로 용미(龍尾)임을 알 수 있다. 마침내 뒤 기슭에서 큰길로 나와 순안(順安)까지 50리를 갔다. 말에게 꼴을 먹이고 길을 나서 청치천점(晴雉川店)에 이르러 묵었다. 이날 60리를 갔다. 平明離發, 先送奴馬於寧邊主人家, 遂與混傔, 上大同樓周觀後, 因上練光亭。 四壁題咏, 無非前輩著述, 而其風則所謂, "長城西面溶溶水 大野東頭點點山。" 一句眞畵出矣, 以大字刻之, 付兩柱之中矣。 遂吟一律, "一日西驅百里餘, 檀箕陳跡已丘墟。 高城閱劫千年後, 大野經霜十月初。 遠浦氷生帆影冷, 長林水落岸容疏。 欄頭靜倚江聲立, 勝槩遍難拙筆書。" 自城上又上永明寺、浮碧樓, 見牧丹峯、乙密臺望, 見凌羅島、白雲灘。 遂自城外沿江而下, 石碧斗起, 中刻淸流壁, 俯臨大江, 長可十里餘。 自長渡門, 入見城中, 閭閻櫛比, 優勝松都, 而盖其來龍甚婉嫩, 無一處高峯, 都是平地行龍矣。 朝飯於營主人家, 於浮碧樓, 次三淵韻, "昔聞平壤好, 天借一朝遊。 山勢容荒野, 水光讓高樓。 臺留招乙密, 壁立俯淸流。 別有奇觀處, 江空月滿舟。" 出自七星門, 未滿一里餘, 自松林中, 入箕子墓。 墓前立小碑刻, 箕子墓左右, 各立兩石人, 墓後立小石, 是知爲龍尾也。 遂自後麓出大路, 至順安五十里。 秣馬登程, 至晴雉川店留宿。 是日行六十五里。 연광정(練光亭) 대동강변 덕바위(德巖)에 있는 정자로 고구려 때 세워진 이래 여러 차례 중수되었다. 장방형 평면의 누정 두 채가 ㄱ자 모양으로 붙은 형태다. 관서8경의 하나로 꼽힐 만큼 풍치가 빼어나다. 긴 성벽 한 면 저본의 '西'는 '一'의 오기로 보고 고쳐서 번역하였다. 이 글귀는 연광정의 서쪽 주련에 쓰인 고려 때 장원(壯元) 김황원(金黃元, 1045~1117)의 <부벽루시(浮碧樓詩)>이다. 김황원이 부벽루(浮碧樓)에 올랐다가 이전 사람들의 제영(題詠)들을 취하여 모두 불살라 버리고 이 한 연(聯)을 얻었는데, 날이 다하도록 잇지를 못하자 통곡하며 내려왔다고 한다. 김황원(金黃元, 1045~1117)이 부벽루에서 보는 황홀한 절경을 "긴 성벽 한쪽 면에는 늠실늠실 강물이요(長城一面溶溶水), 넓은 벌 동쪽 끝으로는 띄엄띄엄 산들일세(大野東頭點點山)"라고 시를 써내려 가다가 다음 시구가 떠오르지 않아 한심스러워서 통곡하며 붓대를 꺾고 말았다는 이야기가 전해온다. 부벽루의 승경을 보고 지은 미완성의 시 두 연이 연광정 주련에 원문과 번역문으로 걸려 있다. 내룡(來龍) 산맥이 시작되는 곳을 가리키는 풍수 용어이다. 평지행룡(平地行龍) 행룡(行龍)은 풍수지리에서, 높고 낮은 산이 멀리 뻗어 나간 산맥을 이르는 말이다. 삼연(三淵) 김창흡(金昌翕, 1653~1722)의 호이다.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자익(子益)이다. 김수항(金壽恒)의 셋째 아들로 김창집(金昌集)과 김창협(金昌協)의 동생이다. 형 창협과 함께 성리학과 문장으로 널리 이름을 떨쳤다. 1689년(숙종15) 기사환국(己巳換局) 때 아버지가 진도의 배소(配所)에서 사사되자 형들과 함께 경기도 영평(永平)에 은거하였다. 문집에 《삼연집》, 저서에 《심양일기(瀋陽日記)》, 《문취(文趣)》 등이 있다. 칠성문(七星門) 평양 모란봉(牧丹峯)에 있는 성문으로, 전형적인 고구려성이다. 현재의 문루는 조선 숙종대에 개수한 것이다. 을밀대(乙密臺) 쪽에서 등성이를 타고 남쪽으로 내려오는 성벽과 만수대에서 북쪽으로 뻗은 성벽을 어긋나게 쌓고, 그 두 성벽 사이에 가로세워 성문을 세웠다. 기자묘(箕子墓) 고대 기자 조선의 시조인 기자(箕子)의 묘로, 평양시 기림리(箕林里)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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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일 十五日 밤을 새고 닭이 울 무렵에 눈이 비로소 개었는데 호랑이의 피해가 많은 곳이어서 일찍 출발하지 못하였다. 행인들이 모두 말하기를, "중원(中原)의 호랑이가 강을 건너와 안주(安州) 경내에서 죽인 사람의 수가 5~60명에 이른다."라고 하였다. 먼동이 틀 무렵 길을 떠나 안주 읍내에 이르러 말에게 꼴을 먹이고 요기를 한 다음, 백상루(百祥樓)62)에 올랐다. 백상루는 성의 서쪽께에서 청천강(晴川江)과 안주성 안의 천만 호 집들을 굽어보고 있으니, 참으로 빼어난 모습이었다. 마침내 절구 한 수를 지었다.서쪽 변방 빼어난 경관 참으로 끝이 없어(西塞奇觀儘不窮)안주에서 또 백상루의 풍광 얻었어라(安州又得百祥樓)청천강은 난간을 휘감고 넘실넘실 흘러가고(晴川繞檻鳴濤漲)묘향산은 난간에 임하여 자욱한 안개 떠 있네(香嶽臨軒積氣浮)부벽루 아래로 시원스레 툭 트여 거침이 없고(爽豁不居浮碧下)월파루 끝은 웅장하고 드높음 독차지하였네(雄高剩占月波頭)전생 인연에 행여 이런 강산 있었던가(夙緣倘有江山否)우리 동방 최고의 명승지 맘껏 보았도다(看盡吾東最勝區)망일문(望日門)으로 나와 청천강을 건너 수종점(樹宗店)까지 60리를 가서 아침을 먹었는데, 날이 이미 저물어서 그대로 묵었다. 達夜鷄鳴時, 雪始霽, 而虎患大盛, 不得早發。 行人皆言, "中原之虎, 渡江而來, 安州一境殺人, 迨五六十命"云。 開東登程, 至安州邑內, 秣馬療飢, 遂上百祥樓。 樓臨城西, 俯壓晴川江, 及城中千萬家, 儘勝區也。 遂吟一律, "西塞奇觀儘不窮, 安州又得百祥樓。 晴川繞檻鳴濤漲, 香嶽臨軒積氣浮。 爽豁不居浮碧下, 雄高剩占月波頭。 夙緣倘有江山否, 看盡吾東最勝區。" 自望日門出, 渡晴川江, 至樹宗店六十里朝飯, 日已夕矣, 因留宿焉。 백상루(百祥樓) 평안남도 안주군 안주읍에 있는 고려 시대의 누정으로 청천강이 한눈에 내려다 보이는 언덕 위에 있다. 백상루란 이름은 여기서 백 가지 아름다운 경치를 다 볼 수 있다는 데서 유래된 것이라 하는데, 예로부터 관서팔경 중 으뜸으로 꼽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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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일 十七日 대아(大衙)에 머물렀다. 폭설이 내리고 몹시 추웠다. 留大衙。 大雪極寒。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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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부

18일 十八日 오늘은 바로 약산(藥山)65)의 서장대(西將臺)66)에서 성조(城操, 성에서 하는 군사훈련)하는 날이다. 일단 천주사(天柱寺)67)로 들어가 잠시 쉬면서 추위를 피한 뒤, 채찍을 재촉하여 서장대로 올라갔다. 서장대는 약산(藥山)의 제일봉(第一峯) 서쪽에 있는데, 평안도 전역을 높이 누르고 있고 그 터가 매우 견고하여 철옹(鉄瓮)이라는 호칭에 딱 들어맞았다. 시력(視力)이 비록 미치지 못하지만 저 땅의 산천이 지척에 있는 듯하고, 북쪽으로는 묘향산(妙香山)68)을 바라보고 서쪽으로는 청천(晴川)을 내려다보았다. 가없이 너른 들판은 무릎 아래에 펼쳐져 있고 뭇 봉우리는 첩첩히 쌓여 마치 돌을 포개 놓은 것 같았다. 이날 3천 병마를 거느리고 성 위에 도열하여 종일토록 무예를 연마하였다. 마침내 율시 한 수를 읊었다.관서에서 일찍 약산이 명성을 드날렸으니(西關夙擅藥山名)기모69)가 남긴 정채 귀신의 도끼로 이루어진 것이리(氣母留精鬼斧成)넓은 벌판에 그 누가 천 자나 우뚝 서는 것을 다투랴(大野誰爭千尺立)끝없는 하늘에 만년토록 혼자서 지탱하였네(長天獨任萬年撑)형세는 제일가는 금성탕지70)의 요충지이며(形便第一金湯地)보루와 장벽71)은 둘도 없는 철옹성이라(保障無雙鉄瓮城)성상은 변방을 향한 근심 잊지 못하여(聖主邊憂猶不忘)태평 시대에도 군대를 단련시키네(太平時節鍊軍兵)밤 2경에 호령하고 횃불을 들어 올리니 멀리서 보면 화성(火城)과 같았다. 잠시 뒤 불이 꺼지자 파진(罷陳)하였다. 영감(令監)과 모든 사람들이 내려갔는데, 나는 서운사(捿雲寺)에 가서 묵었다. 是日卽藥山西將臺城操日也。 先行入天柱寺, 暫憩禦寒。 遂催鞭上西將臺, 則臺在於藥山第一峯之西, 而高壓平安一道, 其基址甚固, 鉄瓮之號, 眞得題語也。 眼力雖不及, 而彼地山川, 如對咫尺, 北望香山, 西瞰晴川。 大野無邊膝下, 羣峯磊磊, 若累石之狀。 是日率三千兵馬, 羅列城頭, 終日鍊武。 遂吟一律, "西關夙擅藥山名, 氣毋留精鬼斧成。 大野誰爭千尺立, 長天獨任萬年撑。 形便第一金湯地, 保障無雙鉄瓮城。 聖主邊憂猶不忘, 太平時節鍊軍兵。" 夜二更, 號令擧火, 遠若火城。 稍間掩火, 因罷陳, 令監及諸人皆下去, 而余則往留於捿雲寺。 약산(藥山) 조선 태종실록에는 "약산은 사방이 높고 험하고 바위들이 깎은 듯이 서 있어 하늘이 만든 성이라고 일컬으며, 의주와 삭주, 강계 등 여러 고을 중에서 군사를 모으기에 적당한 곳"으로 기록돼 있다. 서장대(西將臺) 장수가 올라서서 지휘할 수 있도록 산성 서쪽에 높이 만든 대를 이르던 말이다. 천주사(天柱寺) 평안북도 영변군 영변읍 약산 동대(東臺)의 동남쪽에 있는 절이다. 1684년(숙종10) 창건하였으며, 1722년(경종2) 중수하였다. 진달래가 온 산을 덮는 봄철에는 약산동대와 천주사가 꽃구름 속에 떠 있는 듯하다 하여 예로부터 관서팔경의 하나로 불렸다. 묘향산(妙香山) 묘향산은 원래 영변군에 속해 있었는데, 지금은 향산군(香山郡)으로 분할되었다. 주봉은 비로봉(毘盧峰)이다. 기암과 괴봉 등 명승풍치가 둘레 160km나 되는 넓은 지역에 펼쳐져 있다. 원래 연주(延州) 고을에 속한 산이라는 뜻에서 '연주산'이라고도 하고 바위들이 유달리 희고 정갈하다는 의미에서 '태백산'으로도 불렸는데, 산세가 기묘하고 수려하여 아름다울 뿐만 아니라 특히 누운 향나무가 많아 사철 그윽한 향기를 풍기는 산이라 하여 11세기부터 묘향산이라 하였다. 기모 기모(氣母)는 만물을 생성하는 근본이라는 의미이다. 장자(莊子) <대종사(大宗師)>에 "복희(伏羲)가 자연의 대도(大道)를 터득하여 기모(氣母)를 가지게 되었다.[伏戱得之, 以襲氣母.]"라 하였는데, 그 주석에 '기모'는 '원기(元氣)'라고 하였다. 《남명집(南冥集)》 <원천부(原泉賦)> 금성탕지 원문의 '금탕(金湯)'은 금성탕지(金城湯池)의 준말이다. 금으로 조성한 성과 끓는 물이 흐르는 해자라는 뜻으로, 견고한 성지를 말한다. 《한서》 권45 〈괴통전(蒯通傳)〉에 "반드시 성을 고수하려면 모두 금성과 탕지로 만들어야 공격할 수 없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보루와 장벽 원문의 '보장(保障)'은 적의 접근을 막기 위해 돌이나 흙 등으로 만든 견고한 보루와 장벽을 말한다. 춘추 전국 시대 조(趙)나라 간자앙(簡子鞅)이 윤탁(尹鐸)이라는 사람으로 하여금 진양(晉陽)을 다스리게 하자 윤탁이 "세금을 많이 거둘까요, 보장(保障)이 되게 할까요?"라고 물으니 간자(簡子)가 보장이 되게 하라고 답한 고사가 있다. 《十九史略通攷 卷1 春秋戰國時代》 《通鑑節要 卷1 周紀 威烈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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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일 二十日 아주 늦게 길을 떠나 여성령(呂星嶺)을 넘어 창고에서 묵었다. 이날 60리를 갔다. 最晩發程, 踰呂星嶺, 宿於倉。 是日行六十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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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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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부

5일 初五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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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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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부

7일 初七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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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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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부

8일 初八日 주동에 가서 한참을 이야기하다가 왔다. 往鑄洞, 移時談話而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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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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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부

9일 初九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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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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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부

14일 十四日 아침을 먹은 뒤에 주동(鑄洞)에 가서 종일 이야기를 나누다가 왔다. 흥양(興陽)의 지자(持者)가 내려간다는 말을 듣고 그 편에 집으로 편지를 부쳤다. 食後往鑄洞, 終日談話而來。 聞興陽 持者下去, 便付家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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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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謹賡【北營君子亭三營試射韻曁南漢駐蹕韻閏八月念一日及九月十八日】 瑞日蔥籠寶繖紅淸時觀德屬秋中烏號百發無虛箭畵鼓聲中動色楓漢江爲塹漢山墉天險金湯繞幾重百粵當年興復地一拳只麽會稽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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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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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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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부

29일 卄九日 꼭두새벽에 길을 나서 부내(府內)에 이르러 아침을 먹고 삼례(參禮)에 이르러 묵었다. 이날 우연히 절구 한 수를 읊어 용성(龍城)의 석사(碩士) 장계회(張啓晦)에게 주었는데, 대개 오수(獒樹)에서부터 동행하였기 때문이다.객사에서 만난 백면서생(逆旅相逢白面郞)용성 걸사의 성씨 당당도 하여라(龍城杰士姓堂堂)천 리 길 동행하며 나랏길 구경하였는데(千里同行觀國路)그대는 호두3)의 향기 지닌 사람이구려(高名抉許虎頭香)만마동(萬馬洞)4)에서 율시 한 수를 읊었다.만마를 어느 해에 지나갔던가(萬馬何年過)야윈 말 타고 이날을 증명해 보네(羸驂此日證)깊은 골짜기라 하늘이 작아 보이고(洞深天爲小)개간된 산이라 길이 평평하네(山闢路因平)촌락은 벼랑 따라 늘어져 있고(村落緣崖仄)사천은 눈으로 뒤덮여 더욱 맑네(沙川助雪淸)고인 냇물에 산 기운은 빼어나니(水渟山氣秀)통하는 곳에 완영이 자리하였네(通處是完營) 曉頭登程, 至府內朝飯, 至參禮留宿。 是日偶吟一絶, 贈龍城 張碩士 啓晦, 盖自獒樹同行故也。 "逆旅相逢白面郞, 龍城杰士姓堂堂。 千里同行觀國路, 高名抉許虎頭香。" 於萬馬洞吟一律曰, "萬馬何年過? 羸驂此日証。 洞深天爲小, 山闢路因平。 村落緣崖仄, 沙川助雪淸。 水渟山氣秀, 通處是完營。" 호두 호두(虎頭)는 당당하고 위엄이 있는 귀인의 상을 말한다. 후한(後漢) 때 관상 보는 사람이 반초(班超)를 보고 말하기를 "그대는 제비의 턱이고 범의 머리인지라 날아서 고기를 먹을 것이니, 이는 만리후에 봉해질 상이다.[燕頷虎頭, 飛而食肉, 此萬里侯相也.]"라고 하였는데, 그 후에 과연 그 말대로 서역(西域)을 평정하고 정원후(定遠侯)에 봉해졌다. 만마동(萬馬洞) 현재 전북 완주군 남관으로, 남원에서 전주로 들어가는 길목으로, 만마관(萬馬關)이 있어서 유래한 이름이다. 이로 인하여 전주천을 만마탄(萬馬灘)이라고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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