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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부

9일 初九日 폭설이 내렸다. 의금부에 가서 잠시 의막(依幕)에 머물다가 그대로 예조에 갔는데, 원행(園幸, 능원(陵園)에 거둥)하는 판하(判下)4)가 매우 바빴기 때문에 잠시 서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오는 길에 전동(典洞)의 이 승지(李承旨) 집에 들렀으나, 승지가 대궐에 들어갔기 때문에 만나지 못했다. 곧바로 의막(依幕)으로 와서 한참 동안 머물러 기다리다가 끝내 풀어 주라는 전지(傳旨)가 없었으므로 즉시 나왔다. 大雪。 往禁府暫留依幕, 因往禮曹, 以園幸之判下甚紛忙, 故暫與立談。 來路入典洞李承旨家, 則以承旨詣闕, 故不得相見。 卽來依幕, 移時留待, 終無放釋傳旨, 故卽爲出來。 판하(判下) 소청(訴請) 또는 죄인의 처벌 등에 관하여 임금이 판결하여 명을 내리는 결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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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부

10일 初十日 이른 아침에 흥양(興陽)의 본댁(本宅)에 갔는데, 사랑은 모두 봉하여 닫혀 있고 인적이 없이 고요하였으므로 하인을 불러 물어보았더니, 온 집안 식구들이 벽제(碧蹄)로 갔다고 하기에 즉시 내려왔다. 얼마 뒤에 영감이 풀려났다. 早朝往興陽本宅, 則舍廊盡封閉, 而寂無人跡, 故呼僮問之, 則渾眷往碧蹄云, 故卽爲下來。 移時餘令監蒙放出來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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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일 二十七日 아침을 먹은 뒤에 박 상사(朴上舍)가 와서 만났다. 함께 한림(翰林) 이 흥양(李興陽)의 집에 가서 잠시 이야기를 나누고 돌아와 필운대(弼雲臺)에 대한 율시 한 수를 추가로 지었다.애써 백척의 필운대에 올라(强登臺百尺)종일토록 꽃그늘에 앉았네(終日坐花陰)붉은 꽃잎은 이슬을 머금어 영롱하고(含露丹鬚淨)진홍의 색채는 바람을 시기하여 더욱 짙네(妬風絳色深)사람들은 시냇가에 옹기종기 앉아있고(芳磎人簇簇)나무들은 화려한 거리에 빽빽하게 서 있네(綺陌樹林林)금년 봄날의 농사 만족스러우니(春事今年足)벗들과 함께 곳곳을 찾아다니네(携朋處處尋) 食後朴上舍來見, 因與同往翰林 李興陽家, 暫話而來, 追作弼雲臺一律, "强登臺百尺, 終日坐花陰。 含露丹鬚淨, 妬風絳色深。 芳磎人簇簇, 綺陌樹林林。 春事今年足, 携朋處處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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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일 初九日 공생(孔生) 두 사람이 찾아와서 만나고 석아(錫兒)의 편지를 전하고 갔다. 오후부터 눈이 오다가 비가 내렸다. 병세가 점점 위중해지는데 간병(看病)할 사람이 없으니, 비록 하루아침에 죽게 되더라도 어떻게 알 수 있겠는가. 천노(千奴)는 애초에 내려 보내려고 했던 것이 아니었다. 사람이 스스로 편하고자 하는 말로 인하여 내려 보낸 것이었는데, 이처럼 뜻밖의 위급한 병이 생겼으니, 이를 장차 어찌한단 말인가. 孔生兩人來見, 傳兒書而去。 自午後雪作而雨下。 病勢漸重, 看病無人, 雖一朝奄然, 何以知之? 千奴初不欲下送矣。 因人自便之言下送, 而有此意外危病, 此將奈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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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일 初十日 몹시 추웠다. 정형교(井陘橋)의 김 주부(金主簿)에게 진맥(趁脈)하여 병을 살펴보라고 하였더니, "금년의 감기(減氣)가 매번 이와 같은데 아직 확실하게 알지 못하니 5~6의 약봉(藥封)을 사용하여 오늘 저녁에 달여 쓰십시오."라고 하므로 즉시 지어 와서 기다렸다. 이생과 배생 두 사람이 만나보고 갔다. 極寒。 要井陘橋 金主簿, 趁脈看病, 則"今年減氣, 每每如此, 而尙未的知, 使用五六藥封, 今夕煎用"云, 故卽爲製來以待。 李、裵兩生來見而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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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일 初四日 일찍 송현(松峴)29)으로 가서 안 교리(安校理)를 조문하고, 그길로 민 진사 집에 갔더니 부재중이었다. 그래서 예조에 갔는데 안리(安吏)는 궐에 들어가서 만나지 못했다. 다시 호동(壺洞)30)으로 갔으나 자직(子直)이 선산에 성묘를 가서 만나지 못하고, 그 아들만 보고서 돌아왔다. 다시 예조에 들어가 안리(安吏)를 만났는데, 다시 의논할 일이 전혀 없을 것이라고 하니 가탄스럽다. 곧바로 나와 버렸다. 早往松峴, 吊安校理, 因往閔進士家, 則不在, 故往禮曹, 則安吏入闕不遇。 轉往壺洞則子直作楸行未遇, 只見其子, 因爲回來。 更入禮曹見安吏, 則決無更議之擧云, 可歎。 卽爲出來。 송현(松峴) 종로구 중학동 한국일보사와 건너편 종로문화원 사이에 있던 고개로서, 소나무가 울창하여 솔재라 하고 한자명으로 송현이라고 하였다. 호동(壺洞) 종로구 원남동에 있던 마을로서, 황참의다리 동북쪽에 있는데 모양이 호리병과 같던 데서 마을 이름이 유래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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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일 卄六日 새벽에 일어나 말에게 꼴을 먹였으나 말이 먹지 않아 일찍 출발하지 못하고, 아침을 먹은 뒤에 여정을 시작하여 원천(源川)1)에 이르렀다. 화옥(華玉)과 헤어질 때 나는 원천(源川)으로 향하고, 화옥(華玉)은 수종(水宗)으로 향하여 내일 오수(獒樹)에서 모이기로 약속하였다. 천천히 걸어 주포(周浦)의 여막(旅幕)에 이르러 말에게 꼴을 먹이는데 전혀 먹지 않으니 괴이하고 걱정스럽다. 즉시 길을 나서 10여 리를 가다가 우연히 매형 제언씨(濟彦氏)와 노우(盧友, 노씨 성의 벗)를 만나 도중에서 잠시 이야기를 나누고 함께 내려와 고룡서원(古龍書院)2)에 머물렀다. 曉起秣馬, 則鬣者不食, 故不得早發, 因爲朝飯後啓行, 至源川。 與華玉分路, 余向源川, 華玉向水宗, 約以明日會于獒樹。 緩行至周浦旅幕, 秣馬則全不食, 可怪可慮。 卽爲登程行十餘里, 偶逢妹兄濟彦氏及盧友, 暫話路次, 同爲下來, 留古龍書院。 원천(源川) 원문은 '□川'인데, 결락된 1자는 여정의 동선으로 보았을 때 다음 도착지인 '원천(源川)'으로 보고 고쳐서 번역하였다. 고룡서원(古龍書院) 전라북도 남원시에 있는 '창주서원(滄洲書院)'을 말한다. 옥계(玉溪) 노진(盧禛, 1518~1578)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하였는데, 정유재란으로 대부분 소실되고 사우(祠宇)만 보존되어오다가 1600(선조33)년에 '창주(滄洲)'라 사액되어 '창주서원'으로 개칭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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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부

8일 初八日 이른 새벽에 말에게 꼴을 먹이고 길을 나서 10리 임진강에 이르니 날이 비로소 밝았다. 말 위에서 시 한 절구를 읊었다.파평관 밖 새벽 닭 우는 소리에(坡平館外聽晨鷄)첫 새벽 찬 서리 밟고 십리 길 갔네(冥踏寒霜十里蹊)채찍질하며 곧장 임진강을 건너는데(鳴鞭直渡臨津水)고개 돌려 고향 바라보니 시야가 아득하네(回首鄕關望眼迷)또 한 수를 읊었다.왕성을 보장37)하는 백 리 고을(保障王城百里州)서쪽 경기에 진을 쳐 거대한 요새로세38)(西畿鎭作大咽喉)하늘은 뜻이 있어 기이한 형세 늘어놓았는데(天應有意排奇勢)땅은 어찌 무심히 명승지를 묻는가(地豈無心問勝區)어지러운 세상엔 산하가 나라의 보배요(世亂山河爲國寶)화평한 시절엔 풍물이 사람을 노닐게 하네(時和風物供人遊)긴 강은 참호요 바위는 성가퀴가 되니(長江爲塹巖爲堞)북쪽 오랑캐 황금 채찍 던지지 못하노라(北虜金鞭不敢投)동파(東坡)를 지나 장단(長端)에 이르렀다. 대개 그 산천의 기세가 매우 밝고 고와서 우리나라에서 가장 경치가 뛰어난 고장이니 정승 집안의 분묘가 곳곳에 있었다. 덕수(德水)39)와 도라(道羅),40) 진봉(進鳳)41)의 산을 바라보니, 여러 백악이 모두 완만하고 부드러워 사랑스러웠다. 멀리 송악산(松嶽山)을 바라보니 웅려하고 삼엄하여 하늘을 찌를 기세가 삼각산에 미치지는 못하지만 장대하고 원대한 기운은 나은 듯하였다. 오산(烏山)에 이르니 안개가 주막에서 50리까지 짙게 깔려 있었다.아침을 먹고 말에게 꼴을 먹인 다음 판문(板門) 취적교(吹笛橋)와 탁타교(橐駞橋)를 건너 남대문으로 들어갔다. 인가가 즐비하였으나 집들이 매우 좁았다. 주막집에 들어가 탁주 한 사발을 마시고 바로 만월대(滿月臺)42)에 올랐는데, 그 무너진 담과 부서진 주춧돌 등 보이는 것마다 온통 황량하였다. 마침내 절구 한 수를 읊었다.오백년 전 고려의 궁궐 만월대에(五百前朝滿月臺)풀 시든 저물녘 멀리서 지팡이 짚고 왔네(夕陽衰草遠笻來)백마 타고 주나라로 조회 가는 길 아니지만(雖非白馬朝周路)가던 길 멈추고 옛 슬픔에 젖어보네(留作行人感古哀)채찍을 재촉하여 청석동(靑石洞)43)에 이르러 묵었다. 이날 100리를 갔다. 凌晨秣馬登程, 至十里臨津江, 日始開東矣。 馬上口占一絶, "坡平館外聽晨鷄, 冥踏寒霜十里蹊。 鳴鞭直渡臨津水, 回首鄕關望眼迷。" 又吟一律, "保障王城百里州, 西畿鎭作大咽喉。 天應有意排奇勢, 地豈無心問勝區。 世亂山河爲國寶, 時和風物供人遊。 長江爲塹巖爲堞, 北虜金鞭不敢投。" 過東坡, 至長端。 盖其山川氣勢, 極甚明麗, 爲吾東之第一勝鄕, 相家墳墓, 處處有之。 望見德水、道羅、進鳳, 諸白岳諸婉軟, 可愛。 遙見松嶽, 雄麗森嚴, 其揷天氣勢, 似不及三角, 而長遠之氣似勝矣。 至烏山, 交烟撥所幕五十里。 朝飯秣馬, 過板門, 至吹笛橋橐駞橋, 入南大門。 人家雖擳比, 而但其家舍制度, 甚狹窄矣。 入酒家飮一盃濁醪, 直上滿月臺, 見其類垣敗礎, 滿目荒凉矣。 遂吟一絶, "五百前朝滿月臺, 夕陽衰草遠笻來。 雖非白馬朝周路, 留作行人感古哀。" 催鞭至靑石洞留宿。 是日行百里。 보장 '보장(保障)'은 국가를 보위(保衛)하는 성벽이나 기반이 되는 지역이란 뜻으로, 위정자가 백성을 잘 보호함으로써 백성들이 국가를 위해 목숨을 바쳐 든든한 울타리로 삼을 수 있게 하는 공적을 가리킨다. 거대한 요새로세 원문의 '인후(咽喉)'는 목구멍과 같은 곳으로, 매우 중요한 요새(要塞)의 땅인 요충지를 말한다. 덕수(德水) 강원도 평창군 방림면과 대화면에 걸쳐 있는 덕수산을 말한다. 도라(道羅) 옛 장단군 중서면(中西面), 진남면(津南面)에 있는 도라산을 말한다. 임진강을 경계로 북한지역이며 고려 왕조의 수도 개경(開京)과 이웃하는 곳에 위치해 고려문화권에 속한 지역이다. 도라산에 대한 명칭은 《신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동국여지리(東國輿地志)》등의 문헌상에는 '都羅山'으로 표기되어 있으나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에는 '道羅山'으로 표기되어 있다. 도라산과 관련된 구전 기록에, 고려 충렬왕이 때때로 이 산에 올라가 놀이를 즐겼는데 그 때마다 꼭 궁인(宮人) 무비(無比)를 데리고 갔으므로 사람들은 무비를 가리켜 '도라산(都羅山)'이라 불렀다고 한다. 진봉(進鳳) 개성의 동남쪽에 있는 진봉산을 말한다. 저본의 '封'은 '鳳'의 오기로 보고 고쳐서 번역하였다. 만월대(滿月臺) 경기도 개성시 송악산(松嶽山)에 있는 고려 시대의 궁궐터이다. 919년(태조2) 정월에 태조가 송악산 남쪽 기슭에 도읍을 정하고 궁궐을 창건한 이래 1361년(공민왕10) 홍건적의 침입으로 소실될 때까지 고려 왕들의 주된 거처였다. 청석동(靑石洞) 황해도 금천군(金川郡) 고동면(古東面)에 있는 청석골[靑石峴]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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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부

10일 初十日 이른 새벽에 길을 나섰다. 소교점(燒橋店)·안성발소(安城撥所)·차령(車嶺)·세교(細橋)·병풍암(屛風巖)을 지나 서흥(瑞興, 황해도 중북부에 있는 군) 읍내까지 50리를 갔다. 아침을 먹고 말에게 꼴을 먹이며 그 평원의 넓은 들판을 살펴보니 논은 한 뙈기도 없고 온통 밭이었다. 남중(南中, 호남) 사람의 소견으로 말하자면, 만들어 놓은 논이 곳곳에 있긴 하지만 애초에 수답(水畓)이 없다는 것은, 아마도 그 밭에서 나오는 것이 논보다 낫기 때문일 것이다.서흥읍은 민가가 빽빽이 늘어서 있었다. 경기(京畿)에서부터 지나온 고을은 송도(松都)를 빼고는 작은 고을이 아닌 곳이 없었는데, 이 서흥읍은 매우 큰 고을이었다. 북쪽에 있는 산성은 그 둘레와 터가 평산(平山)의 태백성(太白城)에 비해서는 자못 웅장했으나, 송도(松都)의 대흥산성(大興山城)47)에는 미치지 못하였다. 이름은 태양(太陽)이라고 했다. 말에게 꼴을 먹인 뒤에 수월점(水越店)·차령(車嶺)·서산발소(西山撥所)·흥수원(興水院)·검수(黔數) 등 40리를 가서 묵었다. 이날 90리를 갔다.대개 산천의 기세가 장파(長坡)에 크게 미치지 못하였는데, 혹 산세(山勢)가 좌우로 서로 이어지고 둘러쌓여 물이 흐르는 곳이 없었으니 매우 괴이하다. 그 가운데 움푹 파인 구멍이 있어 빗물이 쏟아지면 반드시 그 구멍으로 새니 괴이하고도 괴이하였다. 凌晨上程。 過燒橋店、安城撥所、車嶺、細橋、屛風巖, 至瑞興邑內五十里。 朝飯秣馬, 觀其平原曠野, 無一片水田, 皆是田也。 以南中所見言之, 則作畓處處有之, 而初無水畓者, 盖其田之所出, 勝於畓故也。 瑞之爲邑, 閭閻擳比。 自畿至此所過之邑, 惟松都外無非殘邑, 而此邑則極雄府也。 北有山城, 其周回基址, 比於平山之太白, 頗雄壯, 而不及松都之大興, 名謂太陽云矣。 秣馬後, 過水越店、車嶺、西山撥所、興水院、黔數四十里留宿。 是日行九十里。 盖山川氣勢, 太不及長坡, 或有山勢左右相連回抱, 無水流之處, 甚可怪也。 其中空陷有穴, 天水所注, 必漏其穴, 可怪可怪。 대흥산성(大興山城) 개성부(開城府)의 천마산(天磨山)과 성거산(聖居山) 중간에 있는 석축(石築) 산성으로 1676년(숙종2)에 축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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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일 十一日 닭이 울 때 길을 나서 함녕(咸寧)까지 20리를 갔다. 동쪽 하늘에 먼동이 트기 시작했지만 비가 내린데다가 홍 첨지의 말이 복통이 있었으므로 막소에서 조금 쉬었다. 비는 개지 않았으나 말의 병에 조금 차도가 있어 길을 떠났다. 봉산(鳳山) 10리에 이르러 아침을 먹고 말에게 꼴을 먹였다. 여러 방법으로 말을 치료했으나 끝내는 나아질 기세가 없으므로 결국 홍 첨지는 뒤쳐지고 말았다.이에 시종 혼(混)과 길을 나섰더니 찬바람이 강하게 불어 간신히 동선령(洞仙嶺)48)을 넘었다. 조남발소(鳥南撥所)에 이르러 국수와 떡을 사 먹었는데, 봉산(鳳山)이 그것으로 유명했기 때문이다. 황주(黃州) 읍내까지 10여 리를 가서 묵었다. 날도 저물었지만 바람이 차고 길이 얼어붙어서 앞으로 나아갈 수가 없었다.조남(鳥南) 객점에 이르니 또한 명승지였다. 두 산이 서로 마주보고 있는 것이 엄연히 석문(石門)이 되었는데, 바위의 형상은 층층이 바둑돌을 쌓아 놓은 듯하였고, 박계(朴桂)49)로 지탱한 듯 중천에 높이 솟아 있으니 참으로 기이하고 절묘한 곳이었다. 절구 한 수를 읊었다.찬비 개니 세찬 바람 불어오고(冷雨初晴風力緊)동선령 위에 눈이 흩날리네(洞仙嶺上雪浮浮)밤낮없이 서도50) 길 떠나 얻은 것 무엇이런가(日夜西征何所得)묘향산 풍물을 비단 주머니51)에 담았노라(香山風物錦橐捉)조남산성(鳥南山城)에서 또 한 수를 읊었다. 시는 다음과 같다.열성조 서쪽 변방 근심 예사롭지 않아(列聖西憂不等閑)동선령 아래에 겹겹의 관문 만들었네(洞仙嶺下設重關)산성의 초목 몇 겁이 지났던가(山城草木何年劫)초막살이 형편 풍년에도 고달프도다(峽戶生涯樂歲艱)정갈한 솔떡은 진귀한 맛을 뽐내고(精白松餻誇異味)맑고 단 차조술은 쇠한 얼굴 따뜻하게 하네(淸甘秫酒煖衰顔)서툰 시 낭랑히 읊조리며 홀홀히 떠나니(浪吟拙句忽忽去)정겨운 풍경 나 돌아오기를 기다리리(風景多情待我還) 鷄鳴登程, 至咸寧二十里。 天始開東, 而雨作且洪馬腹痛, 故小歇幕所。 雨雖不霽, 馬病小差, 離發到鳳山十里, 朝飯秣馬。 多方治馬, 而終無差勢, 洪遂落後。 遂與混傔登程, 則寒風大作, 艱辛踰洞仙嶺。 至鳥南撥所, 買食麵餠, 盖鳳山之有名故也。 至黃州邑內四十里留宿。 日力雖暮, 而風寒冷凍, 無前進之路。 至鳥南之店, 亦名勝之地。 兩山相拱, 儼作石門, 而石狀疊積如累碁, 如撑朴桂, 高揷半天, 信奇絶處也。 吟一絶, "冷雨初晴風力緊, 洞仙嶺上雪浮浮。 日夜西征何所得, 香山風物錦橐捉。" 鳥南山城又吟一律, "列聖西憂不等閑, 洞仙嶺下設重關。 山城草木何年劫, 峽戶生涯樂歲艱。 精白松餻誇異味, 淸甘秫酒煖衰顔。 浪吟拙句忽忽去, 風景多情待我還。" 동선령(洞仙嶺) 현재의 황해북도 사리원시, 황주군, 봉산군과의 분기점에 위치한 고개로 정방산(正方山)의 동남쪽에 있는 험준한 요새이며 서북의 관문이다. 옛날에 신선이 내린 고개라 하여 '동선령'이라 한다. 박계(朴桂) 밀가루나 쌀가루를 반죽해서 네모진 모양으로 납작하게 빚어 바싹 말린 뒤에 기름에 튀겨 꿀을 바르고 그 위에 튀밥이나 깨고물을 앞뒤에 입힌 유밀과(油蜜果)를 말한다. 서도 서도(西道)는 서관(西關)으로, 황해도와 평안도를 통칭하는 말이다. 묘향산……주머니 보관할 만한 가치가 있는 훌륭한 시를 비유한다. 원문의 '금탁(錦槖)'은 금낭(錦囊)과 같은 말로 시를 적어서 넣는 비단 주머니이다. 당(唐)나라의 시인인 이하(李賀)가 날마다 명승지를 다니면서 해(奚)라는 어린 종에게 비단 주머니[錦囊]를 지고 따르게 하여 시를 짓는 즉시 주머니에 담았던 고사에서 유래하였다. 《新唐書 卷203 文藝列傳下 李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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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일 二十二日 매우 추웠다. 極寒。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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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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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일 二十三日 또 추웠다. 又寒。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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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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御製北營君子亭駐蹕三廳試射【閏八月二十一日】 五雲齊上萬旗紅觀射和門日正中水色山光爭入畵且敎黃菊暎丹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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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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御製南漢駐蹕【仁陵酌獻禮後獻陵歷謁仍幸南漢山城九月十八日】 天府金湯壯我墉二陵佳氣翠重重鳴呼丙子年間事恨殺昗山第一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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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일 二十四日 추웠다. 寒。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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雒行述懷【四月二十八日辛酉曉發莘磯朝飯淸溪洞舊李文一家午飯飛鵝店夕宿榜鼓橋店】 四年家食太疎慵轉覺華毛減舊容魚魯欲分嗟易老狼燕何在杏難封吟邊白酒三椽屋夢裏靑綾五夜鍾百鳥東風如有識喚人春睡理枯筇【右自光州向長城】自笑南坡脚不慵靑袍獵獵帶春容長途赤漢恒何健樂歲黃壚此可封曉月離家歌一闋午陰携友酒三鍾逍遙異境情緣否坐點溪山憩短笻【右念九朝點巖午軍令橋夕聯珠院】榜鼓橋頭睡起慵朝凉雙屐劇從容木城籠翠村如失蘆嶺刪靑石不封雨劫回凹溪百斛春光飜覆畝千鍾無情一宿寥寥店白酒烏魚挽客笻【右五初吉朝大橋午院坪夕豆粥街】盍朝聲裏起余慵歸却春眠整理容紫錦桐花猶有信靑錢荷葉又開封林間孤屋遙疑石嶺下寒泉或聽鍾斷隴泥沙迷澁路無端悵念舊行笻【右初二朝有成街午筒井夕芝巖峴】狂吟低仰午征慵偪窄詩囊苦未容百濟遺墟無戰伐三韓古野有疆封入煙萬落繁華錯王迹千年淑氣鍾可笑堂堂金馬客榴花五月曳孤笻【右初三朝楮橋午新橋夕魯城邑外】淋漓朝雨更添慵如斗孤棲剩得容礙眼花山蒼霧罨關心草浦赤泥封使君府北聆晨角彌勒庵前近午鍾默數西湖多少堠今宵何處可停笻【右初四朝敬天午錦江夕石坪】賣眼迢迢放步慵風流不減昔時容粧梳鷄峀雲千髻裁割態津錦一封往跡迷茫北門棹前游怊悵古庵鍾疲驢短鬣俱安在草草相隨數尺笻【右初五朝廣亭午金蹄驛夕富土里】靑天上嶺少無慵快洗身家老大容五十年餘猶曰壯三千里外可求封緣貧不賣恒留劒待槌方鳴自有鍾宿氣顚狂重午節據床招酒坐支笻【右初六朝時廩所午可川夕振威外】往往蓬顚太慢慵長途習熟笑能容溫王城跡峰雲逗麻督兵塵野草封秧水遠村浮似艇松風古寺遞爲鍾禿頭游賞猶無已多少黃泥又染笻【右初七朝梧山午水原北外夕蘆山】午天詩步十分慵到得名區更改容梧野寒雲懷舜狩華堤老柳見堯封寥寥杏店春如磬澹澹荷塘水自鍾夢裏情塵終未袪苦酸千里獨扶笻【右初八朝果川午水淸街夕道積洞】曉色驚寒破一慵麥風吹浪點秋容千磨危石蒼何瘦百練纖沙素未封詩老不衰餘氣鼓美人難忘舊情鍾支離十日棲棲跡妥帖今宵可放笻【去夜宿南大門外道積洞朴哥食店浹旬登途欲忘勞苦信口走草樂鍾酒鍾雜鎈通韻行役之餘未暇繩削只俟後從來者分析改正而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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和李雅獻夏咏筆三十二韻【李而徵獻夏示余以筆詩三十二韻卽其祖故承旨明淵與金尙書相休布衣時戱爲聯句者而▣徵追步其韻凡四疊要余和之韻旣硬而且嫌剽竊辭以不能屢回强索終不能辭乃爲二疊以索其請兼呈申侍郞韋史錫▣金令公晩齋世均黃學士怡山鍾顯丁巳冬十月日也】 尖奴賤亦貴古來人莫間尼絶獲何尤班投涉太嫚氏族中山出庭戶三江環彊記該今昔專任備夙晏頭肖將軍起氣奪丈夫覵稱子鮑結交封仰禹錫宦坐免牛馬裾動兼鶴鳧骭端友白面託名公黑頭辨縳髻脣投膠傳皮枉受轘麝煤新契敦猩鞋舊劫幻獨立儼如雙峙婉似丱和刀狎吏掾代銊誅凶纂得意偏宜藤托身或處薍健槊喩能善削峰見是贋恒不離房闥遠可通梯棧聖蒼混沌坡禿素盲聾謾坡帖羊幾換張簇龍可豢鮮衣畵容吮臨鏡粧娥肦佳譽鼠鬚吟窮相鷄距訕玉笋繃初裹金蓉房未綻江夢增藻思杜法防蠹患騷屋短耒在硯田荒草鏟白戰寸鐵無墨墨輕甲擐隨時行且藏適用急而縵史橐附若蠅書巢借如鷃示朝狐秉直題院馬記諫亂草錯鬪蛇斜行序飛雁楷脚摭柿葉詩腹披藜莧羲之木八分白也花一瓣休粮虞氣疲餙華蔡步慢拔毛擧世利濡首平生慣更添玉蟾蜍幽趣山上澗代繩拮太上刻衡禹無間贊揚惟乃休尊寵寧或嫚湯沐膠州割表封管城環族周支分聃相齊名並晏訛亥三豕校昧丁一豹覵脫穎嗤趙价免冠謝蔡宦墨廚役蒼頭書圃種玄骭喜揖長鬚拂善斷隻手辦肇跡中山獵往事東郭轘詩架峰巒尖史垣波濤幻硏是硎其鍔閣乃弁於丱艸檄驚兎脫裁函冥鴻纂粧髻削芙蓉衣毳此菼薍磔肉蘇吟工畵餠米搨贗顔筋勁秋韝韋髮老雲棧抹窓畵鴉戱打屛點蠅謾摹鶴能奪胎屠豨卽悅豢貽彤賦妹孌繪素描倩盼習性固喜銳計壽奈招訕長杠黑雨驟大椽朱華綻學陣軍可歸代耕貧不患李篆和璧鏤籕文岐石鏟抽舌袞銊炳衛身甲冑擐落紙紅燁爛蘸水雲糺縵賤貴分鷄鶩小大鎈鵬鷃露頂張何顚正心柳能諫食墨靈似龜刷字活如鴈藻繢贊黼黻卉譜評鬱莧易床滴朱點法筵櫬香瓣往塵書得失庶績攷勤慢武人時亦請石友曰相慣逢時作黑頭靑鞋驀山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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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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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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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부

1일 初一日 날씨가 매우 화창하다. 오늘 대가가 환궁하는 날이다. 병으로 감히 볼 수는 없으나 그 행차6)를 상상할 수 있었는데, 환궁이 평안하였으니 매우 다행이다. 지난번 집에 연달아 편지를 보내어 천노를 그믐 전에 올라오게 하였는데, 정월이 이미 다 지나갔는데도 전혀 소식이 없어 답답한 마음을 말로 다 할 수가 없다. 어쩌면 집 아이가 나의 병 소식을 듣고 천노와 함께 오려고 하기 때문에 이처럼 지체되는 것이 아닐까? 아니면 어찌하여 그렇게 소식이 없겠는가? 日氣甚淸和。 今日大駕回鑾之日也。 病雖不敢望, 其淸蹕可想, 回鑾安穩, 㑀幸㑀幸。 前次連書於家, 使千奴晦前上來, 而正月已盡, 杳無消息, 鬱鬱之懷, 不可言。 無乃家兒聞吾病奇, 與之偕來, 故如是遲滯耶? 何爲而然耶? 행차 원문의 '청필(淸蹕)'은 임금이 행차할 때 길을 깨끗이 쓸고 통행하는 사람을 비키게 하는 것으로, 곧 임금의 행차를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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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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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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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부

25일 二十五日 해가 뜨자 과장을 나와 다시 반촌(泮村)30)에 들어갔다. 또 그날 신시(申時) 무렵에 월근문(月覲門)31)으로 들어가서 좌정하고 장원봉(壯元峰)32)에서 밤을 새웠다. 日出出場, 復入泮村。 又其日申時量, 入月覲門坐定, 壯元峰達夜。 반촌(泮村) 현재 서울특별시 종로구 명륜동 성균관대학교 앞의 일대이다. 성균관을 '반궁(泮宮)'이라고도 하는데, 반촌은 여기에서 나온 말로, 성균관(成均館) 사역인들이 거주하는 성균관 인근 동네이다. 이들 사역인들은 성균관에서 문묘(文廟) 수직(守直), 관원 사환(使喚), 관생의 식사 제공 등을 담당하였으므로, 입역(立役)이 편한 성균관 주변에 모여 살게 되었다. 월근문(月覲門) 월근문은 1779년(정조3)에 창경궁의 정문인 홍화문(弘化門) 북쪽에 조성한 창경궁의 동북부 궁장(宮墻)에 설치된 문이다 장원봉(壯元峰) 창경궁 근처의 언덕을 미화하여 표현한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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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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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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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부

26일 二十六日 출제한 "문무 겸비한 길보여.[文武吉甫]"33)를 지어 올렸는데, 오늘은 바로 알성일(謁聖日)34)이다. 날이 저물었을 때 출방(出榜)하였고 과장(科場)에서 나와 즉시 차동(車洞)으로 와서 묵었다. 出題製進"文武吉甫", 是日乃謁聖日也。 日暮時出榜, 出場卽來車洞留宿。 문무 겸비한 길보(吉甫)여 《시경》 〈유월(六月)〉에 나오는 구절로, "잠깐 험윤을 정벌하여 태원에 이르도다. 문무 겸비한 길보여, 만방이 법으로 삼도다.[薄伐玁狁, 至于大原. 文武吉甫, 萬邦爲憲.]" 하였다. 이 시는 주(周)나라 왕실이 쇠미해진 틈을 타서 험윤(玁狁)이 서울까지 쳐들어오자 선왕(宣王)이 윤길보(尹吉甫)에게 험윤을 정벌하도록 명하여, 윤길보가 군대를 거느리고 가서 공을 세우고 돌아왔다는 내용이다. 알성일(謁聖日) 임금이 문묘에 참배하는 날을 말한다. 《일성록》 정조 18년 갑인(1794) 2월 26일(갑신)의 기사에, "춘당대(春塘臺)에 나아가 알성시 문무과를 시취하였다."라는 기록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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