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翼陵秋夕享役【八月十五日】 硬黃梁稻爛垂頭極目長郊一色稠市上千塵空費日城西十里始知秋霜華照髩人何老節物關心歲不留溫藉煙花今夜月秫醪松餠憶南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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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 元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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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98년(무오) 1798年(戊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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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九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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上領閤荷屋金相公啓【十一月二十八日】 伏以四面攝屩久切越視之嘆雙手擎函敢齊沐之悃北斗仰止中心寫兮伏念小人草莽外蹤葑菲下體三十年矻矻於經史易致事物之迀疎一千里棲棲於道塗難免妻子之凍餒肇發軔無有知者而分館不幸誤之獨僑上深夜相逢一人之積毁銷骨覆盆裏太陽不照半生之潦倒傷心腸一日而九迴窘幅之恨曷極指二旬又五屈釋褐之年亦多嗟羈旅如渴如飢待調升不日不月與知舊不齒身名落下幾層對族戚何顔志氣此前半減降何遲於時雨坐惜旱因之枯苗吹不盡於好風竚望迷津之慈筏矧今大有慶之會政是同人樂之時曁草木而皆榮擧仰一視之澤棄樗櫟而不顧那無獨漏之嬚十秋之風霜支離嗟何時可已九天之雨露誕渙幸斯世適丁自憐聽雷之蟄虫願作向陽之花木小草非曰遠志敢望茅茹之彙征喬木自有繁陰竊擬蔦蘿之仰托贊棫榛於花囿儘是作人之昌辰貯蔘朮於醫籠伊誰成美之君子伏惟相公閤下泰世瑞鳳需時元龜爲股爲肱正値堯日亭午之屛之翰允叶周嶽生申傳承德門之盛規施恩於不報對揚熙朝之休命立賢也無方玆當二五位遭逢益勤八九分思想擁馬而瞻不欲捨方切加額之私尺蠖之屈以求伸詎緩跂足之望導湮宣鬱庶見大政之更張補劓息黙以圖餘生之未畢伏望特紆極如溺之眷俾遂枉者直之休則謹當銘鏤肺肝奉承警咳執鞭爲御恒慕齊相之風啣珠以酬敢忘隋侯之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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燕賀【幷識】 聖上十年己未春正月二十日卽潁漁金尙書萱堂貞敬夫人愼氏晬甲之辰而於潁樵尙書亦生庭之慶也尙書弟季位兼文武憲是百辟國家倚若砥柱士庶仰若山斗夫人之純▣非徒一室之慶彼行路人亦所攢祝況震休於兩尙書受知有素自謂不後於人矣縱欲無賀烏得已乎係之以詩曰惠風和煦春甕盎壽域煙花畵有狀最是吉祥君子室南枸北梗動高唱西河老僊人間在六十一年坐無恙晩福漸與年俱大如川方至未可量膝下怡婉兩尙書凞代聯武早蜚颺瑞鳳祥獜參化囿昇平有跡萬目仰百辟之憲文且武濟濟上卿與上將戎壇仗銊鞱鈴整文苑秉筆波濤壯溯源推本詩善頌毋道坤厚有素養十稔墨張仁山屋參連粉擣也勉强德門受報如影響箕疇鍚福九曰嚮北堂萱草還舊春日長可愛舒以暢餙喜華佩環一闈秩秩獻壽萃少長藹藹需雲動簾幙烹龍爲灸玉爲釀獜脯擘來麻姑床蟠桃摘取金母帳賀語絡繹騰萬口翩翩客燕主人訪肯艶丹鼎飛昇天不羡白衣超作相但祝堂上龜蓮壽年年似今身康旺佇看兒孫森似竹鷰停鵠跱好相向定應雙着老萊脤繞膝長做兒啼樣與國同休喬木家際會重宸又震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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宣陵瑞陽享役紀行【前期二日五月初三日發行】 雨色歸空鳥語濃小輿如屋劇從容離離半熟千疇麥颯颯微凉十里松歲久迷蹤笻下石天開慣面馬前峰湫塵巷北棲棲客忽見燈江一洗胸【右過栗峴自南門七里】官舟平穩坐胡床水氣連天五月凉草色雨邊村黯黯鳥聲林外路蒼蒼淸眸乍拭憐孤店白鬢重過悵十霜堪笑此行王事賴梢工不似舊尋常【右渡西氷湖自栗峴五里】背水孤村掩綠楊沙田麥穗過身長魚懸層架猶變浦犬吠疎籬卽外鄕杜宇前宵酬冷節榴花此日賦瑞陽回頭一舍江南去稍慰三年遠客腸【右過沙坪店自西氷湖越江相望】野酒醇醲峽蔌香開懷不妨坐康莊嶠音錯雜穿南路店色麤疎落下方莽蒼斧聲應伐木軟菁針樣或分秧二陵松柏知相近日午山僮袛候忙【右憩彦九非自沙坪五里】前游悵憶月中盃萬木濃陰復踏來山幕欲隨巫島泛洞門爲納漢江開荷塘日煖靑錢出板殿雲開貝葉堆惟有老禪堪共語爐香半日斷纖埃【右遊奉恩寺自彦九非十里有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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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일 初一日 일찍 예조로 갔더니 다시 논의한 일이 있어 정동관(鄭東觀)25)을 응교(應校)로 삼고 한광식(韓光植)26)을 사인(舍人)으로 삼았다고 했다. 그러므로 급히 주동(鑄洞)으로 가서 응교에게 청탁하는 서간을 써서 전송하게 하였다. 돌아와 이르기를, "이미 조영국(趙榮國)27)과 김준용(金俊龍)28) 두 사람의 시호는 의논하였으나 나머지 사람은 하지 않았다."라고 하니 가탄스럽다. 早往禮曹, 則有更議之擧, 以鄭東觀爲應校, 韓光植爲舍人云, 故急往鑄洞, 得請簡於應校, 送傳於闕內, 則回云, "已以趙榮國、金俊龍二人議諡, 餘人不爲。" 可歎。 정동관(鄭東觀) 1762~1809. 1783년(정조7) 21세에 친시(親試) 병과(丙科)에 합격하였다. 《일성록》의 기록을 보면, 1792년(정조16) 9월 29일에 응교에 임명되었다 하였고, 12월과 이듬해 3~4월의 기록에도 응교로 삼는다는 기록이 보인다. 한광식(韓光植) 1729∼1800. 본관은 청주, 자는 일지(一之), 호는 일재(一齋)이다. 1762년(영조38)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였으며. 1777년(정조1) 증광문과별시에서 급제하였다. 부수찬·수찬·의정부 검상·승지 역임하였으며, 경종대왕수정실록(景宗大王修正實錄)의 오류를 바로잡고 수정·편찬하는 데 참여하였다. 조영국(趙榮國) 1698~1760. 본관은 양주(楊州), 자는 군경(君慶). 호는 월호(月湖), 시호(諡號)는 정헌(靖憲)이다. 영조(英祖) 경술(庚戌)년에 문과(文科)에 오르고 벼슬이 이조판서(吏曹判書)에 이르렀다. 김준용(金俊龍) 1586~1642. 본관은 원주(原州), 자는 수부(秀夫)이다. 광해군 원년(1609) 무과에 급제한 뒤 여러 관직을 거쳐 전라도 병마절도사에 재임하던 중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병사를 이끌고 광교산에 이르러 격전을 벌인 끝에 청과의 전투에서 대승을 거두었다. 세상을 떠난 후 영의정으로 추증되었으며 충숙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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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일 二十九日 닭이 울 때부터 눈이 내려 한 자가 넘게 쌓이더니, 아침을 먹을 때가 되어서야 눈이 그쳤다. 이에 아침을 먹은 다음 오수(獒樹)의 천변(川邊)에 이르러 우연히 도화(道化)의 김이록(金履祿)을 만나서 동행하였다. 사곡(蛇谷)에 이르렀는데 말을 먹이는 도구가 없으므로 증산(甑山)의 주막 사내를 찾아갔으나, 모두 다 아파 누워서는 계속 거절하였다. 결국 사망당점(事亡唐店)까지 70리를 가서 간신히 말에게 꼴을 먹이고 요기를 하였다. 날이 이미 저물었으므로 채찍을 재촉하여 주포(周浦)까지 10리를 가서 묵었다. 自鷄鳴時雪下深尺雪, 朝飯時始霽, 故因爲朝飯, 至獒樹川邊, 偶逢道化 金生 履祿, 因與同行。 至蛇谷, 無秣馬之具, 前進甑山幕漢, 盡皆痛臥, 揮却不已, 故遂至事亡唐店七十里, 艱辛秣馬療飢。 日已夕矣, 催鞭至周浦十里留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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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일 二十五日 일찍 주동(注洞)에 갔으나 보지 못하고 오는 길에 청배의 상원 집에 들렀다. 마침 흥양(興陽) 사람이 왔기에 집에 보낼 편지를 부치고 왔다. 早往注洞不見, 而回路入靑排 尙元家。 興陽之人適來, 自其處付家書而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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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일 十七日 새벽녘에 아침을 먹고 낙안(樂安) 읍내에 이르러 약노(若老) 씨를 만난 다음 곧바로 길을 나서 유점(鍮店) 주막에 이르러 점심을 먹었다. 천평(泉坪)2)에 이르니 이미 해가 저물었다. 이날 70리를 갔다. 曉頭朝飯, 至樂安邑內, 見若老氏, 卽爲上程, 至鍮店酒幕中火。 至泉坪, 已黃昏矣。 是日行七十里。 천평(泉坪) 전라남도 순천시 주암면에 있는 천평마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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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일 十八日 일찍 밥을 먹고 길을 나서 영정(咏亭)에 이르러 잠시 이야기를 나누었는데,3) 그 모습이 너무 가련해서 차마 볼 수 없을 정도였다. 즉시 길을 돌려 지신천변(智申川邊)에 이르러 언갑(彦甲)을 만나 길에서 옷 보따리를 전해 주었다. 채찍을 재촉하여 용계(龍溪)4)에 이르러 점심을 먹고 나니 해가 이미 저물었다. 동막(東幕)마을5) 어귀에서 최장선(崔長善)과 박성헌(朴成憲)을 만나 잠시 이야기를 나눈 뒤에 채찍을 재촉하여 역동(驛洞)에 이르니 이미 해가 지고 어스름할 때였는데, 마구간이 없었기 때문에 어둠을 무릅쓰고 곡성(谷城) 읍내에 이르러 묵었다. 이날 60리를 갔다. 早飯登程, 至咏亭暫話, 而見其景象, 極爲可憐, 寧不忍見。 卽爲回程, 至智申川邊, 逢彦甲, 路中傳給其衣褓。 促鞭至龍溪中火, 日已夕矣。 至東幕村前, 逢崔長善、朴成憲, 立談後, 促鞭至驛洞, 已黃昏時分, 而無馬廐, 故冒昏至谷城邑內留宿。 是日行六十里。 영정(咏亭)에……나누었는데 영정은 영귀정(詠歸亭)으로 순천시 주암면의 영귀마을에 있다. 이곳에 사매(舍妹)가 살고 있었는데 당시 온 가족이 병을 앓아 고통 받고 있어 이에 대한 이야기를 사매와 나누며 마음 아파한 것 같다. 용계(龍溪) 전라남도 곡성군 오산면 용계리이다. 동막(東幕)마을 전라남도 곡성군 오곡면 서계리를 말한다. 서계리는 읍의 제일 위쪽에 있다하여 동막(東幕) 마을이라 하였는데, 서쪽에 계곡이 있다하여 서계리로 바뀌었다. 동막은 마을 서편의 형제봉(兄弟峰)이 동쪽을 향하여 장막을 쳐 놓은 듯한 형국이라는 데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한편으로는 지형이 형제장군이 군막을 치고 동쪽을 바라보고 있는 형국이라 하여 유래 되었다 전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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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일 二十八日 동틀 무렵에 출발하여 전주(全州) 부내(府內) 주인집에 이르니 관가의 내행(內行)이 행차하여 머무르고 있었다. 또 성주(城主)가 막 들어왔기 때문에 매우 시끌벅적하였다. 그래서 남문(南門) 밖 강진(康津) 집 여막(旅幕)으로 나가 잠시 말에게 꼴을 먹이고 아침을 먹었다. 노고암(老古巖)까지 70리를 가서 말에게 꼴을 먹이고 오후에 임실(任實)의 굴암(窟巖)까지 30리를 돌아가서 묵었다. 開東發行, 至全州府內主人家, 則官家內行次來留。 且城主方入來, 故極爲紛聒, 故出南門外康津家旅幕, 暫爲秣馬朝飯。 至老古巖七十里秣馬, 午後至任實 窟巖回三十里留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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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일 十一日 ○아침 전에 백운동(白雲洞)30)에 갔는데, 사서(司書) 이인필(李寅弼)은 광주(廣州)로 출타하여 그 조카 이정하(李正夏)하고만 작별하였다. 호정동(瓠井洞)으로 내려와 김병기(金秉耆)를 조문하고, 오면서 창정동(昌井洞)의 권중건(權中建) 집에 들러 잠시 이야기를 나누었다. 돌아오는 길에 삼청동(三淸洞)31)에 들러 이병하(李秉夏) 숙질(叔姪)을 조문하였다. 오면서 장생전교(長生殿橋)32)의 생원 이장구(李章九) 집에 들러 《장릉사보(莊陵史補)》33)를 보고, 충강공(忠剛公)34) 사적(事蹟)을 베껴서 왔다. 밥을 먹은 뒤 용동에 갔다가 오후에 돌아왔다. ○朝前, 往白雲洞, 則李司書寅弼出去廣州, 只與其姪正夏作別。 下來瓠井洞吊金秉耆, 來入昌井洞權中建家暫話。 來路入三淸洞, 吊李秉夏叔侄。 來入長生殿橋李生員章九家, 見《莊陵史譜1)》, 謄忠剛公事蹟而來。 食後, 往龍洞, 午後還來。 백운동(白雲洞) 서울시 종로구 청운동에 있던 마을로서, 항상 흰 구름이 떠 있는 명승지인 데서 마을 이름이 유래되었다. 삼청동(三淸洞) 서울시 종로구의 중앙부에 있는 동이다. 지명은 도교의 태청(太淸)ㆍ상청(上淸)ㆍ옥청(玉淸)의 3위(位)를 모신 삼청전(三淸殿)이 있었던 데서 유래하였다. 장생전교(長生殿橋) 서울시 종로구 연건동과 이화동 사이에 있던 다리이다. 조선 시대 궁중에서 사람이 죽었을 때 필요한 관곽(棺槨)의 제작과 수선을 담당하던 관청인 장생전(長生殿) 앞에 이 다리가 놓여 있었으므로 '장생전 다리'라고 불렀다. 장경교(長慶橋), 장교(長橋) 등으로도 불렀다. 장릉사보(莊陵史補) 1796년(정조 20) 왕명으로 단종에 관한 사적을 모아 편찬한 책이다. 앞서 1791년 5월 왕명으로 이의봉(李義鳳)과 윤광보(尹光普) 등이 편집한 것을, 1796년 5월 왕명에 따라 이서구(李書九)ㆍ이의준(李義駿)ㆍ윤광보 등이 다시 교정하고, 정족산 사고(鼎足山史庫)의 실록을 참고하여 보고된 별단(別單)을 참조하여 이서구가 최종적으로 《장릉지(莊陵誌)》 9권 3책을 완성하여 바쳤다. 찬진 당시에는 서명을 '장릉지'라 했으나 '장릉사보'로 바뀐 것은 기존 《장릉지》와 구별하기 위한 것으로 추정된다. 충강공(忠剛公) 송간(宋侃, 1405~1480)이다. 호는 서재(西齋)이며, 본관은 여산(礪山)이다. 세종ㆍ문종ㆍ단종의 3조를 섬겨 벼슬이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이르렀다. 단종이 영월로 쫓겨갔다는 소식을 듣고 고향으로 돌아가 두문불출하다가 단종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자 깊은 산 속에 들어가 3년상을 마치고, 전라남도 고흥군 동강면 마륜리에서 은거하였다. 補 저본의 '譜'는 사료에 근거하여 '補'로 수정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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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일 十三日 ○아침 먹기 전에 자윤(子允)과 계성사(啓聖祠)35)로 가서 김팔주(金八柱)를 만나 한참 동안 이야기를 나누었다. 작별하고, 경모궁(景慕宮)36)으로 내려와 수문장(守門將) 장인원(張仁源)이 출번(出番, 당직 근무를 마치고 나옴)했는지를 물으니 아침 일찍 출번하였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곧바로 파천동(波川洞) 그의 집으로 갔는데, 밥을 먹고 출타한 터라 만나지 못해 몹시 아쉬웠다. 이 사람은 홍원(洪原)37) 사람이다. 무침교(無沈橋)38)의 진사 송현재(宋顯載) 집에 찾아갔는데, 마침 출타하여 만나지 못하였다. 돌아오는 길에 회동의 송 장성을 만나 전주 북문의 송민수 서간에 답장을 받고자 한다고 말하니, 공교롭게 몸이 아파서 답장을 쓰지 못했다고 하였다. 그대로 작별하였다. 송지순의 집으로 내려와 작별한 뒤에 낙동(洛洞)의 구백(舊伯) 이광문 집으로 와, 잠시 만나고 나서 작별하였다. 용동으로 오니 자윤이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개간소(開刊所)의 여러 사람과 작별하고 주인집으로 돌아왔다.아침을 먹은 뒤에 정동으로 가서 잠시 이야기를 나누었다. 오는 길에 확교(確橋)39)의 송 판서 집에 들렀으나, 송 판서가 출타하여 작별할 수 없었다. 다만 그 아들 송지학(宋持學)과 작별하고 나와 주인집으로 왔다. 차동(車洞)40)으로 가서 민 석사와 작별하고 오니 공서이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오후에 정동의 석사 이혜길이 찾아와 이야기를 나누다가 날이 저무는 바람에 출발하지 못하고 그대로 머물렀다. 그러므로 저녁을 먹고 난 뒤 정동에 와서 묵으라고 간절히 부탁하고 갔다. 저녁을 먹은 후 정동으로 갔다. 밤에 비가 내렸다. ○朝前, 與子允往啓聖祠, 見金八柱, 移時談話。 仍爲作別, 下來景慕宮, 問張守門將仁源出番與否, 則早朝出番云。 故直向波川洞其家, 則食後出他, 故仍爲不見, 悵悵。 此人卽洪原人也。 尋往無沈橋宋進士顯載家, 則適出他不見, 來路入晦洞見宋長城, 以完北宋民洙書簡受答爲言, 則適以身病不爲修答云。 仍爲作別。 下來宋持淳家, 作別後, 來洛洞舊伯李光文家, 暫見後, 仍爲作別。 而來龍洞, 則子允來待矣。 與開刊所諸人作別, 來主人家。 朝飯後, 往貞洞暫話。 來入確橋宋判書家, 判書適出他, 不得作別。 只與其子持學作別, 出來主人家。 往車洞與閔碩士, 作別而來, 則公瑞來待矣。 午後貞洞李碩士惠吉來訪談話, 以日暮之致, 不得發程, 仍留。 故夕飯後, 來留貞洞之意, 懇托而去。 夕食後, 往貞洞。 夜雨。 계성사(啓聖祠) 서울시 문묘(文廟) 안에 공자(孔子) 등 다섯 성현의 아버지를 모신 사당이다. 경모궁(景慕宮) 서울시 종로구 창덕궁에 있는 사도세자(思悼世子)와 그의 비(妃) 헌경왕후(獻敬王后)의 사당이다. '경모전(景慕殿)'이라고도 했다 홍원(洪原) 함경남도(咸鏡南道)의 남부해안 중앙에 위치하는 군이다. 무침교(無沈橋) 서울시 중구 예관동과 충무로5가 부근에 있던 다리이다. 청계천의 지류인 묵사동천(墨寺洞川)에 있던 다리로 '물에 잠기지 않는 다리'라는 의미이다. 김정호의 <대동지지>와 <수선총도> 및 <슈션전도>에는 이 다리 이름이 '상무침교'로 표기되어 있다. 따라서 무침교와 상무침교를 혼용해서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일명 '무침다리' 혹은 무침교를 줄여서 '침교'라고도 불렀다. 확교(確橋) 서울시 중구 서소문동과 신창동(새창골) 북쪽에 있던 다리이다. 1966년 발간된 ≪한국지명총람≫에 의하면 이 고을에 학다리가 있어 마을 이름이 학교동(鶴橋洞)이 되었다고 하며, 일명 확교(確橋)라고도 불렀다. 차동(車洞) 중구 의주로1가ㆍ순화동에 걸쳐 있던 마을로서, 수렛골을 한자명으로 표기한 데서 마을 이름이 유래되었다. '추모동'이라고도 하였는데, 이는 조선 숙종의 계비 인현왕후가 태어난 터에 비석을 세우고 그를 추모했던 데서 붙여진 지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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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일 十四日 ○아침에 나와 주인집으로 돌아왔다. 애초 일찌감치 출발할 예정이었으나 궂은 날씨 탓에 그대로 아침을 먹었다. 종일 비가 그치지 않았다. 오랜 가뭄 끝에 이렇게 단비가 내리니 매우 기쁘고 다행이다. ○朝出, 來主人家。 初以早發爲定矣, 以雨戱之致, 仍朝飯。 終日雨不止。 久旱之餘, 得此好雨, 忻幸忻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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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일 二十日 ○아침 먹기 전에 들어가 장석(丈席)을 뵈었다. 일행이 장석을 만나고자 하였으므로 먼저 얼굴을 돌려 나왔다. 아침을 먹은 뒤에 일행과 들어가 장석을 뵙고 한참 동안 이야기를 나누었다. 여옥이 《충열록(忠烈錄)》 1권을 드렸다. 그길로 하직하고 나와 출발하였다. 신탄(新灘) 저자 주변에 이르러 기주(欺酒)를 사서 먹었다. 신탄을 건너 유성(油城) 저자 주변에 이르러 점심을 먹었다. 성전(星田)52)의 집성사(集成祠)53)에 들러 참배를 하고 봉심(奉審, 사당을 살핌)을 하였다. 곧 주부자(朱夫子)와 송우암(宋尤菴) 두 선생의 영정이었다. 주부자의 영정 위에는 '문공 회암 주선생 진상(文公晦菴朱先生眞像)'이라고 쓰여 있었다. 우암의 영정 위에는 '문정공 우암 송선생 진상(文正公尤菴宋先生眞像)'이라고 쓰여 있었다. 봉심하고 난 뒤에 강당으로 나와 잠시 쉬고 나서 출발하였다. 산정령(散亭嶺)을 넘어 척후(尺後) 주막에 이르러 유숙하였다. 50리를 갔다. 절구 1수를 다음과 같이 읊었다.천 리 먼 노정을 멀다 않고 찾아오니(千里長程不遠尋)선연히 남은 영정이 예나 지금이나 같네(分明遺像古猶今)종종걸음으로 뜰을 지나 참배하니 비루한 마음 없어지고(趨庭瞻拜消鄙吝)저절로 천추토록 경외하는 마음이 생기네(自發千秋敬畏心) ○朝前, 入謁丈席。 同行欲見丈席, 故先爲旋容出來。 朝飯後, 與同行入謁, 移時談話。 汝玉納《忠烈錄》一卷。 仍爲下直而出來, 發程。 至新灘市邊, 買欺酒以食。 越新灘, 抵油城市邊午飯。 歷入星田集成祠, 參謁奉審。 卽朱夫子、宋尤菴兩先生畵像。 如朱夫子影幀上, 書文公晦菴朱先生眞像;尤菴影幀上, 書文正公尤菴宋先生眞像。 奉審後出來講堂, 暫憩後登程。 越散亭嶺, 抵尺後酒店留宿。 行五十里。 吟一絶曰: "千里長程不遠尋, 分明遺像古猶今, 趨庭瞻拜消鄙吝, 自發千秋敬畏心。" 성전(星田) 대전시 유성구 학하동 별밭 마을이다. 집성사(集成祠) 선조 혹은 선현의 신주나 영정을 모셔두고 배향하는 곳으로 사당, 사우라고 한다. 고려말 주자학이 도입되면서 향촌 교화 정책의 일환으로 건립되었다. 특히 중국 남송 때의 유학자 주희를 모시는 사당이 많이 건립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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宣武祠享役【皇明楊經略鎬邢尙書价妥靈所初稱生祠堂云九月十二日中丁】 苾苾蕉黃雜茘丹風泉遺響九秋寒千回水接神宗廟一脈山連大報壇寶墨鏤恩雲漢宇穹碑紀績孝廉官傷心往昔紅羅月流炤空梁漠漠看【楊鎬進士出身故稱孝廉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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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일 初四日 맑았다. 일찍 밥을 먹은 뒤에 차동(車洞)에 가서 비로소 황해 감사[海伯]의 기별이 있었다는 것을 알았다. 이날 몹시 추웠다. 晴。 早飯後往車洞, 始知海伯之奇。 是日極寒。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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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일 初五日 추웠다. 아침을 먹은 뒤에 주동(注洞)에 가서 종인(宗人)들을 만나고 날이 저문 뒤에 나왔다. 寒。 食後往注洞見諸宗, 日暮後出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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