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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부

6일 初六日 바로 한식일(寒食日)38)이다. 객지살이 중의 한식이라 마음이 갑절이나 근심스럽다. 백건(伯健)이 만나자고 하기에 잠깐 근동(芹洞)39)에 갔더니 술과 떡을 대접하였다. 한참 동안 이야기를 나눈 뒤에 고령(高嶺)에 올라왔다. 화류(花柳)를 보고 싶었는데 아직은 꽃 소식이 까마득하였다. 내려와서 차동(車洞)으로 곧장 왔다. 卽寒食日也。 客中冷節, 懷思倍切悶悶。 伯健要見, 故暫往芹洞, 則饋以酒餠矣。 移時談話後, 上登高嶺, 欲觀花柳, 而尙杳然矣。 卽爲下來, 直來車洞。 한식일(寒食日) 원문의 '냉절(冷節)'은 한식(寒食)을 달리 이르는 말이다. 근동(芹洞) 중구 을지로5가에 있던 마을로서, 미나리를 재배하는 논이 넓게 자리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 지역을 미나릿골로 불렀으며, 이를 한자명으로 표기한 데서 마을 이름이 유래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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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일 十二日 아침을 먹은 뒤에 전동(磚洞)으로 갔으나, 이조 판서가 궐내로 들어가 또 만나지 못했다. 곧장 안현(安峴)에 가서 예조판서를 만나보고, 다시 예조로 갔는데 안리(安吏)를 만나지 못하여 곧바로 경모궁(景慕宮)으로 향했다. 사람을 시켜 화옥(華玉)을 오라고 하여 도포(道袍)로 갈아입도록 하고, 호동(壺洞)으로 가서 진 판관(陳判官)을 만났다. 또 호동(壺洞)으로 가서 박 곡성(朴谷城)에게 조문하였다. 또 죽동(竹洞)으로 향하였으나 사수를 만나지 못하고 왔다. 食後往磚洞, 則吏判入闕內又未見。 直往安峴見禮判, 轉往禮曹, 則不見安吏, 直向景慕宮。 使人要華玉, 換着服道袍, 往壺洞見陳判官。 又向壺洞, 吊朴谷城。 又向竹洞, 不遇士洙而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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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일 初二日 추웠다. 닭이 울자 길을 나서 진위(振威)에서 점심을 먹었다. 대개 길이 빙판이 아닌 곳이 없어서 말이 발을 잘 딛지 못하여 열 번 넘어지고 아홉 번 거꾸러지며 가까스로 주막에 이르렀으니, 그 추위와 고통을 이루 다 말할 수가 없다. 그저께 공주(公州) 길 위에서 오언 절구를 읊었다.해가 떨어진 공산 길에(落日公山路)밥 짓는 연기 눈 속에 피어오르네(炊烟傍雪起)서로 돌아보며 왔던 길을 헤아려 보니(相顧計前程)덕평까지 삼십 리 길이었네(德坪三十里)유천점(柳川店)에 이르러 묵었다. 이날 90리를 갔다. 寒。 鷄鳴登程, 至振威中火, 盖路上無非氷坡, 馬不着足, 十顚九倒, 艱辛入幕, 其寒苦不可言。 再昨公州路上, 口吟五絶曰: "落日公山路, 炊烟傍雪起。 相顧計前程, 德坪三十里。" 至柳川店留宿。 是日行九十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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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일 十七日 정시(庭試)를 보는 날이다. 꼭두새벽에 동접(同接)들과 과장에 들어가려고 관문(關門) 밖에 갔더니, 날이 밝기 전이라서 연달아 매달아 놓은 등(燈)이 하나의 큰 장관이었다. 이어 성균관 아래 집춘문(集春門)71)으로 가서 간신히 문에 들어서니 동이 트기 시작했다. 과거보는 유생들이 모인 것은 봄에 열린 과거에 견주어 못하지 않았다.진시(辰時)가 되어 출제(出題)되었다. 표제(表題)는, '주(周) 나라 신하들이 하례하였는데, 우(虞)와 예(芮)가 송사하러 왔다가 국경에 들어오는 날에 밭갈이를 하는 자가 밭을 양보하고 길 가는 자가 길을 양보하자 물러나 다투던 밭을 한전(閑田)으로 삼았다는 것을 두고 의작(擬作)하라[擬周群臣賀虞芮來訟入境之日耕者讓畔行者讓路退以所爭之田爲閒田]'72)였다. 그런데 우리 동접들뿐만 아니라 과장 안의 거의 절반이 백지를 내고 나왔다. 우리도 백지를 내고 저물녘에 나왔다. 오는 길에 차동 우 참봉(禹參奉)의 집에 들어가 잠시 이야기를 나누다가 주인집으로 나왔다. 乃庭試日也。 曉頭與同接入場次, 往關門外, 則日未明, 而接接懸燈, 一大壯觀也。 仍往成均館下集春門, 艱辛入門, 始開東矣。 科儒之會, 比春科不下矣。 辰時良出題, 而乃表題題則'擬周群臣賀虞芮來訟入境之日耕者讓畔行者讓路退以所爭之田爲閒田' 而非但吾接也, 場中居半, 曳白而出, 吾亦曳白, 乘暮出來。 來路入車洞 禹參奉家暫話, 出來主人家。 집춘문(集春門) 창경궁 동북쪽 담장에 있는 궁문으로, 문묘가 마주 바라보이는 곳에 있다. 《동국여지비고》에 의하면 이 문은 후원의 동문으로, 태학(太學) 서쪽 반교(泮橋)와 제일 가까워 역대 임금들이 태학으로 나갈 때에는 이 문을 경유하였다고 한다. 주(周) 나라……의작하라 주 문왕(周文王)이 서백(西伯)이 되어 덕을 쌓자 사방에서 귀의하였는데, 그때 우(虞)와 예(芮) 두 나라에서 서로 국경의 전답을 다투어 오래도록 결정하지 못하였다. 이에 판결을 받고자 주 문왕을 찾아가게 되었는데, 가는 도중에 주나라 백성들이 밭두둑을 서로 양보하고 행인들이 어른에게 길을 양보하는 광경을 보고 크게 감화되어 그 길로 돌아와 다투던 전답을 묵히고 평화스럽게 지냈다는 고사를 가리킨다. 《詩經 大雅 緜》 《史略 卷1 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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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일 二十一日 정 진사(丁進士)가 오늘 내려간다고 말하였는데, 나는 정장(呈狀) 때문에 동행하지 못하여 아쉬웠다. 이른 아침에 대묘동(大廟洞)에 가서 공서(公瑞)와 그 아들 참(參)을 만나서 돈 문제를 상의하였는데, 다만 20관뿐이라 했다. 돈을 가지고 예조 직방(直房) 앞의 술집으로 가서 안인성(安寅成)을 기다렸다. 한참 지나도 오지 않아서 그 까닭을 물었더니 예조 본부에 일이 있어서 현재 본부에 있다기에 급히 갔다. 안리(安吏)와 함께 직방(直房)으로 와서 정장(呈狀)을 찾아보았더니, 제사(題辭)가 과연 뜻대로 되어 있어 다행스러웠다. 이어 약간의 물건을 주고 급히 대묘동(大廟洞)으로 가서 공서와 내일 동행하기로 약속하였다.회동(晦洞)76)에 갔더니 여산(礪山) 제각(祭閣)에 관한 일로 통문(通文)을 주어서 가지고 왔다. 오는 길에 차동(車洞)의 이희(李) 집에 들렀으나 주인이 부재중이라서 작별하지 못하였다. 민치항(閔致恒)의 집에 들러 작별 인사한 다음, 그의 아우 민치명(閔致明) 집에 들어갔으나 마침 출타하여 작별하지 못하였으니, 한탄스럽다.저녁에 주인집에 이르니 공서가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저녁밥을 먹은 뒤에 명생(明生, 명두엽(明斗燁))도 와서 그대로 함께 묵었다. 대개 내일 동행하여 고향에 내려가려고 했기 때문이다. 丁進士今日下去爲言, 而余則以呈狀之致, 不得同行, 欠事欠事。 早朝往大廟洞, 見公瑞與其子參, 以錢相議, 只以二十貫云, 故持去禮曹 直房前酒家, 待安寅成矣。 稍久不來, 故問其故, 則有事於禮曹本府, 方在本府云, 故急往。 與安吏偕來直房, 推尋呈狀, 則題辭果爲如意, 可幸。 仍給略干物, 急往大廟洞, 與公瑞約以明日同行。 往晦洞, 則以礪山祭閣事通文以給, 故持來。 來路入車洞 李家, 則主人不在, 不得作別。 入閔致恒家, 仍爲作別。 入其弟致明家, 適出他, 不得作別, 可歎耳。 暮抵主人家, 則公瑞來待矣。 夕飯後, 明生亦來, 仍爲同宿。 盖明日同行, 下鄕之意也。 회동(晦洞) 서울특별시 중구 충무로4가・인현동1가・인현동2가에 걸쳐 있던 마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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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일 三十日 곡성(谷城) 역곡(驛谷)에 이르러 말에게 꼴을 먹이고 요기하였다. 천평(泉坪)에 이르러 묵었다. 至谷城驛谷, 秣馬療飢。 至泉坪留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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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五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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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일 初一日 새벽밥을 먹은 뒤에 길을 떠나 소령(疏嶺)에 이르러 말에게 꼴을 먹였다. 재동(齋洞)에 이르자 날이 이미 어두워졌다. 曉食後發行, 至疏嶺秣馬。 至齋洞, 日已昏黑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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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일 初二日 정오 무렵에 들어왔다. 午間入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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貞陵寒食祀官述懷【二月二十六日】 東風吹客夢郭外拂朝衣石上黃梅潑松間黑鼠飛磬聲僧寺近泉色俗塵稀顧我今非昨淸閒坐忘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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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일 二十六日 박 상사(朴上舍)가 반촌(泮村)에서 찾아왔다. 사헌(士憲)과 지환(之煥)이 찾아와서 만났다. 朴上舍自泮村來見。 士憲及之煥來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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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일 初一日 주동(鑄洞)에 갔다 왔다. 往鑄洞而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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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일 初二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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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일 初三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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崇政殿受誓戒後述懷【十二月二十八日○來正月初六日上詣太廟上冊寶于純祖室兼行春享大祭】 兩餘三鼓夜微溫冉冉天香泛九閽月珮璆▣崇政殿星燈爆爛建明門十年散跡今司直一夕空銜又執尊悵念鴻臚疇昔唱此身還似夢中魂【純祖甲午崇政殿應榜故尾句及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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貞陵正朝享役路中述懷【十二月二十九日八疊】 雪意溶溶雨色稠滑泥如海僕夫愁小輿歸去何珍重足擬龍驤萬斛舟惠化門尖石磴斜東郊極目但平沙寒天尙有陽春氣往往鳴泉雪水多秋宵月墜過塵忙十里桃源一夢場磵路如今重理屐水流山寂悵漁郞夾澗懸崖百室村松陰柏影近黃昏銀花白餠丁丁打送歲郊人樂事存洞門迎候兩紅衣典祀郞官稍有威數月重來顔面熟寒暄不妨話微微支離梅雪漢濱天旅食明朝又五年去去年來何事業綠抱奔走古松邊望燎歸來短燭殘蒙戎襖子不勝寒無人持勸廜㢝酒飮福盃中强自寬湖山南望白雲濱壟梓村桑夢裏春陵下送迎猶可慰冠裳聚似里鄕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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太廟春享大祭第九室享役【辛酉正月六日兼行純祖室上冊寶隨駕】 金冠兼玉佩肅肅序千宮進退皆中矩香煙遶畵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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上左閤心庵趙相公啓【十一月十三日】 伏以惄焉我中心行失途而周覽仰之若北斗跪敷袵以陳辭敢訟血寃庶蒙體念伏念小人南土疎迹下里凡音埋頭於章句間其敢曰一二有穫染脚於名利末于嗟乎五十無聞竊自喜桂殿之入門實不料枳途於分館獨木之危適値毁由一人而興寸草之心難裁仕爲兩親而屈前輩焉多由是終與玉署而相齊今時則大不然便成鐵限之難越念升庸在所靡已故旅游不厭苦辛槐院皆雋選乎恐未敢質藝閣亦超調矣嗟獨何辜生長之山川不移尙傳八平章世業居停之日月何久空慙一借大身家猗聖上遐不作人而化中元無棄物上天普洽豈雨露之偏私前星繼明曁草木而皆樂使枉者直自有更張之規願言則懷那無向壁之歎烈烈乎如飢如渴倀倀然經歲經年繁華之春易爲常思向陽之木吹噓之風何在願作登茵之花何日夜忘之以待成美之君子如時雨化者伊誰尙德哉若人伏惟相公閤下人物權衡鴻匠繩墨兼西廳之文學茅茹彙征貯東閤之賢良桃李盡在馬空冀野擬伯樂之一過鳳鳴岐岡慕元聖之三吐肆將二十五年支離之恨庸敷十二時靡解之衷旣陸旣優幸際千一辰霈澤何取何舍徒羡二三子翶翔刮垢而磨瑕方仰厚德之一視策蹇而礪鈍莫曰餘生之數奇伏望特施大冶之工俾遂欹器之正則謹當不負所擧惟命是從執經問難長侍弟子之列結草圖報敢諼知己之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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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일 二十三日 날이 채 밝기 전에 길을 나섰는데, 새벽안개가 자욱하여 지척을 분간할 수 없을 정도였으니 마치 가랑비가 내리는 것처럼 옷이 다 젖어버렸다. 40리를 가서 인주원(仁周院)12)에 이르자 겨우 안개가 그치기 시작했다. 원터[院垈]13)에서 아침을 먹고 50리를 가서 말에게 꼴을 먹인 다음 길에 올랐다. 두어 마장(馬場)도 못가서 우연히 주동(鑄洞) 종인(宗人)을 만나, 시호(諡號)가 아직 명이 내려지지 않았다는 소식을 들었다. 천안(天安) 삼거리(三渠里)14)객점에서 묵었다. 이날 90리를 갔다. 대개 흉년의 긴 노정이다 보니 애초에 동행이 없어서 마음이 매우 답답하였는데, 이 석사(李碩士)와 나란히 말을 타고, 또 녹도(鹿島)에서 온 경한(京漢)을 만나 여정을 함께하게 되어 매우 기뻤다. 未明登道, 而曉霧彌天, 不辨咫尺, 若細雨狀, 衣服盡濕。 行四十里, 至仁周院, 晩霞始霽矣。 朝飯院垈, 五十里程也, 秣馬登程, 不過數馬場, 忽逢鑄洞宗人, 聞知諡號之尙不命下至。 天安三渠里店留宿。 是日行九十里。 盖險歲長程, 初無同行, 故心切鬱鬱矣, 旣與李碩士聯鞭, 又逢京漢之自鹿島來者, 同與行役, 可喜可喜。 인주원(仁周院) 충청남도 공주군 정안면 인주원 마을이다. 원터[院垈] 충청남도 천안시 광덕면 원덕리에 있는 마을로, 조선조 때 원집이 있었다. 파발 제도가 잘 갖춰졌던 조선 시대에는 서울을 중심으로, 각 지방으로 향하는 주요 도로에 약 12km 정도마다 역을 두고 공용 여행자의 편의를 최대한 도모했다. 이러한 편의 시설이 있는 마을에는 '관터[館基]' '관말[館村]' '원터[院里, 院垈, 院村, 院洞], 역말[驛村, 驛里]등의 이름이 붙였다. 천안삼거리(天安三渠里) 천안시의 동남구 삼룡동에 위치하여 조선 시대에 삼남대로(三南大路)의 분기점이었던 삼거리로, 길손을 재워주는 원과 주막이 즐비하였다. 《신증동국여지승람》(천안)에는 고을 남쪽 6리에 삼기원(三岐院)이 있다고 하였는데, 이 삼거리를 말한다. 지금의 삼룡동(三龍洞) 지명도 1914년 이 삼거리와 용마산의 머리글자를 따서 만든 이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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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일 二十四日 새벽에 길을 나서 성환(成歡)15)까지 40리를 가서 아침을 먹고 말에게 꼴을 먹였다. 갈원(葛院)16)에 이르자 비가 내렸는데, 크게 쏟아질 것 같지 않아서 채찍을 재촉하여 희도치(希道峙)에 이르렀다. 대개 이때부터 비가 그치지 않고 내리니 말 세 마리가 나란히 갈 수 없어 이 석사가 먼저 갔다. 고개(古介)에 이르러서는 녹도의 하인이 뒤처져 두어 마장 떨어졌고, 우리 일행은 가장 뒤처져 1리쯤 더 떨어졌다.멀리서 보니 이 석사가 말에서 내려 두서너 사람과 비를 맞고 서 있기에 길에서 아는 사람을 만나 이야기를 주고받는 것이라 생각하였다. 채찍을 재촉하여 가는데, 녹도의 하인이 또한 그곳에 당도하여 즉시 그 자들을 추격하는 모습이 보였다. 한 사람은 달아나 산에 오르고 한 사람은 달아나 짐을 내려놓으며 창황히 바삐 움직이니 비로소 도적놈이라는 것을 알았다. 서둘러 가보니 본래 이들은 세 놈으로, 두 놈은 이미 달아나고 한 놈은 아직도 맞서 버티면서 서로 옷을 잡고 싸우기를 그치지 않았다. 우리 세 사람이 뒤미처 도착하자 그도 생각하지 못한 터라 비로소 스스로 기가 꺾이는 모양새였다. 이에 함께 동행하여 서둘러 진위(振威, 경기도 평택의 옛 지명) 읍내에 이르렀다. 비가 쏟아질 것 같아 주막에 들어가 편히 쉬었다. 그 사이에 위태로웠던 상황이야 이루 다 말할 수가 없다. 이날 90리를 갔다. 啓明登程, 至成歡四十里, 朝飯秣馬。 至葛院雨作, 而似無大注之意, 故促鞭至希道峙。 盖是時雨下不息, 三馬不得聯轡, 李碩士最先行。 至古介, 鹿島下人落後數馬場, 吾行最落後一里許矣。 遙見李碩士下馬, 與數三人, 立於雨中, 故意謂路逢相知人與之酬酢。 促鞭前進之際, 見鹿島下人, 亦當於其處, 卽以左右追擊, 一人走之上山, 一人走之下擔, 倉黃奔走, 始知爲賊漢。 促行當之, 則本是三漢, 二漢已走, 一漢猶與相拒, 互執衣襟, 爭閧不止。 及吾三人追至, 則渠亦出其不意, 始有自沮之態。 因與同行, 促至振威邑內。 雨下如注, 入幕安歇。 其間危凜之狀不可言。 是日行九十里。 성환(成歡) 천안시 서북부에 있는 읍 이름이다. 성환읍 성환리에 성환역(成歡驛)이 있었다. 갈원(葛院) 충청북도 청원군 남이면 갈원리로, 옛 관원들이 묵어가던 숙소가 있던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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