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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돈영(李敦榮) 등 격문(檄文) 초(抄) 고문서-서간통고류-격문 사회-조직/운영-격문 전남도청(2020년 구입 의병자료) (재)한국학호남진흥원 1866년 병인양요(丙寅洋擾) 발발 때 이돈영(李敦榮) 등이 의병 참여를 촉구하기 위해 전주이씨(全州李氏) 제종(諸宗)에게 보낸 통문 2편의 초본(抄本)이다. 1866년 병인양요(丙寅洋擾) 발발 때 이돈영(李敦榮) 등이 의병 참여를 촉구하기 위해 전주이씨(全州李氏) 제종(諸宗)에게 보낸 통문 2편의 초본(抄本)이다. 첫 번째 통문은 병인년(1866) 9월에 판종정경(判宗正卿) 이돈영(李敦榮) 외 12명이 의병 참여를 독려하기 위해 전주이씨 제종에게 보낸 것이다. 통문의 상단에서는 예부터 국가에 치란(治亂)이 있는 것은 자연스러운 이치와 같아서 잠깐 겪은 위기에 불과했다면 근일의 양이(洋夷, 병인양요(丙寅洋擾))가 국경에 침범한 일은 예부터 없었던 일대 변괴(變怪)라고 하며 병인양요의 위험성을 알렸다. 이어 우리나라는 단군(檀君)과 기자(箕子)의 유풍을 세습하고 논맹(論孟)의 유훈을 외고 예악과 문물은 중화(中華)를 따르는 천하 만방에 떳떳함이 있는 나라인데, 저 양이들이 창궐(猖獗)하여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저들을 전멸시켜야 한다고 의기(義氣)를 고취 시켰다. 게다가 우리 전주이씨 제종은 왕실의 후손으로서 임금께서 한 집안과 같이 돈독하게 대해주시는 은혜를 입었으며 흥선대원군께서도 친목과 은택을 내리시어 감복을 받고 있으니, 바로 이때가 은혜를 보답할 시기라고 하며 의병 참여를 촉구했다. 이어 전주이씨 제종께서 일심으로 협력해서 방책을 진달하여 적을 막고 섬멸할 대책을 모색하자고 하면서, 만일 신하 3천명이 일심이 된다면 큰 공훈이 된다고 하였다. 저 양이들이 비록 강하더라도 한 마음으로 맞선다면 어려울 것이 없을 것이니 갖자 의기(義氣)를 높여 함께 국사(國事)에 힘쓰기를 바랐다. 통문의 주요 내용이 끝나고, 작성된 시기인 '丙寅九月日'과 발신인인 이돈영 외 12명의 명단이 표기되었다. 또 추가로 의병에 참여코자 하는 이들의 명단을 작성하여 보내면 곧바로 종친부(宗親府)에 모여 상세히 살펴 별도로 처분할 것이라고 덧붙인 내용이 등사되었다. 두 번째 통문은 전(前) 참지(參知) 이윤수(李潤壽) 등 14명이 의병 참여를 촉구하면서 전주이씨 제종에게 보낸 것이다. 군신(君臣) 관계는 부자(父子) 관계와 같아서 아버지가 위급하면 아들이 보호해주고 아들이 위기에 놓이면 아버지가 막아주는 것이라는 말로 통문을 시작했다. 전주이씨 종파(宗派)는 임금에 대해 공적으로는 군신의 관계이지만 사적으로는 종족이라고 하면서 의병 참여를 독려했다. 게다가 전주이씨 제종은 ?선원보(璿源譜)?에 종인으로 입적되어서 여러 혜택을 받고 있으며, 우리 임금이 등극한 이후로는 지극한 은혜를 받았기에 전주이씨 제종은 양이의 침범으로 위기에 놓인 종묘와 사직을 위해 몸소 의기(義氣)를 실천할 때라고 독려했다. 이 통문 하단에 호남(湖南)에 대해 언급한 내용이 나온다. 호남은 풍패(灃沛, 임금의 본관이 있는 곳)의 고을로, 논맹의 풍습이 깊어 임진왜란에 진신(縉紳)과 장보(章甫) 등이 일제히 의병에 참여하여 전장으로 나서기도 하고 군량미를 보내주기도 하는 등 큰 절개를 세워 아직도 모범이 되고 있다고 하였다. 이를 모범으로 하여 전주이씨 제종은 이 통문을 들은 즉시 지체하지 말고 한결같이 임진년(1592)의 예에 따라 병사를 모집하거나 군량미를 모아 이 난리를 말끔하게 이겨내어 종사(宗社)를 안정시켜 조종(祖宗)이 길러주신 은혜에 보답하여 신민의 치욕을 씻자고 하였다. 이어 적성 시기인 '丙寅九月十日'이 표기되어 있고 발신인인 이윤수 외 14명의 명단이 표기되었고, 주의할 사항을 조목별로 정리하였다. 조목을 보면 다음과 같다. 이 일은 의기를 모아 거행하는 일이기 때문에 억지로 하지 말 것, 각 읍에 도유사(都有司)를 뽑고, 유사(有司)의 명첩(名帖)을 먼저 책으로 만들어 보낼 것, 양이의 강화도 침범은 매우 위급한 사안이기 때문에 시일에 늦지 말 것, 종친들이 먼저 효유(曉諭) 하여 나서되, 성씨를 논하지 말고 모두 함께 일에 참여하도록 할 것, 이 통문을 등사하여 속히 여러 읍에 전달하여서 한 읍도 지체되는 일이 없도록 하고, 순상(巡相)에게도 이 통문 내용을 직접 전해 거행하여 흥선대원군의 분부를 받들 것이라는 내용이 보인다. 이윤수(李潤壽, 1802~1871)로,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치오(致五), 호는 오소(吾巢)이다. 이이박(李以鎛)의 아들이며 전라도 운봉(雲峰)에서 살았다. 병인양요 때 병조 참지로 있으면서 치밀한 작전을 세워 큰 공을 세웠다. 당시 섭정하던 흥선대원군이 '호남 제1 재상'이라고 칭송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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不聞信滿月矣如干得失姑舍涯角分離隔年思想使人難堪雖百倍加意自謂自强而有時不能定情世上事雖知無兩便之道而於是乎知益難矣每念古人之立功立事者何嘗係戀之私有如此而人情則同抑或其無也耶是未可知也會日已過的奇不到風說虛傳不一或云汝免參榜或云退日在今月二日或云今月不得結梢無指的是亦泄泄也但得失付天無喪吾良心其非本源修分耶此則前書雖累累益加勉也世間名利分上易生虛慾致人葛藤都由于此雖心身求之免不得以心守之豈無陽間也今也意必得失已辦矣幸而得參不足可喜不幸失之不足爲阻惟以優之裕哉爲立定法辭色間幾微色勿露焉免參則前頭修去事皆如向言做去不然則今過周年一番返面更圖其非道理耶雖然外此久有大關事此事亦結末然後可以起身謚事今月間果開座成命否亦甚支離奈何傳聞近來都市且有許多風波未知果然而亦憂慮處家中近皆無故遠途而得家信無故二字足矣允弘間遭其承重喪舜□親葬以今十人云前月玉果金明五向傳書否今月二日郵便書亦得見否今聞栢亭曺友入京付此此是今年來苐七矣也聖範在京所求者果何事而近聞有許多狼狽似非虛傳豈非自取狼狽乎此人也不能自謀其身致此譏笑耶譏笑猶餘事今則免於禍敗而間間尋見否愛之憎之若遠水之不及近火此亦奈何可歎而已近聞柿里書到而汝之所看事無及云是亦非人情也下邨生邨栗洞兩族叔念間又發去云今番事若差過則成均學徒一座更圖無失時可也而延諡時還家更去爲料焉本官姑不出來而近則吾門事頗用意云詩會以喪葬之碍退于今念六日爲之耳漁岩金室以産後證不健而來到見無見證耳他不一一辛丑三月望父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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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1년 이승학(李承鶴) 간찰(簡札) 2 고문서-서간통고류-서간 개인-생활-서간 辛丑三月卄五日 父 辛丑三月卄五日 李承鶴 李光秀 전남도청(2020년 구입 의병자료) (재)한국학호남진흥원 1901년 3월에 이승학(李承鶴)이 아들 이광수(李光秀)에게 관직에 오른 것을 축하하고 여러 가지 당부를 전한 간찰. 1901년 3월에 이승학(李承鶴)이 아들 이광수(李光秀)에게 관직에 오른 것을 축하하고 여러 가지 당부를 전한 편지이다. 지난번 우체국으로 보낸 편지를 받았는지 물어보고 이전의 편지의 전달 여부를 확인하고, 고부(古阜) 편으로 부친 편지가 지체되어 이제 도착했다고 하면서 편지의 전달 여부를 근심하며 편지 서두를 채웠다. 이어 성균관에서 과거 시험 급제 정보를 담은 전방(傳榜)을 받으면서 겪은 일을 적었다. 전방을 든 자가 후한 보상을 기대했으나 3민(緡)을 내어 주자 실망했다는 말과 그 내막 등을 상세히 전한 내용이 보인다. 그리고 고생하며 과거 시험을 통과했다는 사실을 알았다는 말과 함께 출방(出榜) 되었는지를 확인하며 합격에 대한 기쁨을 전했다. 이어 앞으로 관직 살이 하면서 명심할 것에 대해 조언했다. 가장 우선할 것은 임금을 섬기는 의리를 마음에 명백하게 세우는 것이고, 처세할 때는 자세하게 살펴야 하며, 노상에 다닐 때는 용렬하게 하지도 말고 완강하게 하지 말고 화순(和順)으로 중도에 맞게 하도록 당부했다. 또 아들에게 비서랑(秘書郞)이 되기를 바란다고 하면서 기미를 보고 기회를 잘 잡으라고 하며 '농(隴)을 평정하니 다시 촉(蜀)을 바라게 된다'는 등롱망촉(登壟望蜀)의 고사를 인용하며 아들의 벼슬자리에 대한 기대를 표했다. 이어 본인은 노상에 있고 아들은 서울에 있어서 서로의 상황을 잘 알 수 없어 울적하지만, 이 또한 형세이니 너무 조바심내지 말라고 하였다. 이승학은 이 당시 문중 일로 북도(北道) 길에 있으면서 서울에 있는 아들과 편지로 소식을 전하고 있었다. 이승학은 편지에서 노상에서 지내는 기간을 한 달로 잡고 있지만 앞으로 일정은 잘 알 수 없다고 알렸다. 이승학은 시좌(諡座)의 설행 및 의정부 교체에 관한 내용 등에 묻고 재차 서울 생활을 걱정하고 당부한 내용을 이어갔다. 서울에서 사용할 비용으로 백전(白錢) 300냥을 보내는데 부족한 것은 서울에서 환전하여 쓰라는 내용 등을 전하고, 벼슬길에 쓸 관복(官服)과 교자(轎子) 등을 갖췄는지를 걱정했다. 덧붙이기를 돈을 낭비하지도 말고 부족하다고 상심하지도 말라고 했다. 하촌(下邨) 편으로 편지를 보낸다는 말로 편지를 끝마쳤다. 이승학(1857∼1928)의 본관은 전주(全州)로, 양녕대군(讓寧大君)의 후손이며, 자는 자화(子和), 호는 청고(靑皋)이다. 전남 담양(潭陽) 장전리(長田里)에서 출생하였다. 아버지는 기정진(奇正鎭)의 문인인 진사 이최선(李最善)이고, 이승학 본인도 기정진의 문하에서 배웠다. 을미사변(乙未事變) 때 팔도에 격문을 보내어 의병을 일으키기도 했다. 문집으로 ?청고집(靑皋集)? 4권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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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복규(張復圭) 간찰(簡札) 1 고문서-서간통고류-서간 개인-생활-서간 卽 侍生 張復圭 卽 張復圭 李進士宅 전남도청(2020년 구입 의병자료) (재)한국학호남진흥원 창평군수(昌平郡守) 장복규(張復圭)가 이진사(李進士)댁에 소송(訴訟)의 진행 상황을 전한 간찰. 창평군수(昌平郡守) 장복규(張復圭)가 이진사댁에 소송(訴訟)의 진행 상황을 전한 편지이다. 편지는 간단히 안부를 묻는 말로 시작해 곧바로 본론을 얘기했다. 말씀하신 일은 그 대강을 파악해보니 그 애매모호함이 있다는 것을 알고서, 오늘 상대방을 다시 불러서 그 사정을 알아보았다고 하였다. 상대방 김씨(金氏)라는 자가 '자신이 스스로 물린 것이 아니라 장전댁(長田宅)이 스스로 물린 것'이라고 주장하기에 우선 물러나 기다리라고 하고 풀어주었다고 전했다는 것이다. 위 편지 내용으로 보건대 이진사댁과 김씨가 환퇴(還退) 등의 일로 소송을 벌였는데, 이 소송의 판결자인 창평군수가 이 일로 이승학에게 편지를 보내 일의 상황을 전한 것으로 보인다. 편지의 수신인은 진사(進士) 이최선(李最善) 댁을 책임지고 있는 장남 이승학(李承鶴)을 이른 듯하다. 또 편지를 쓴 날짜에 '卽'으로만 표기되어 있어서 편지가 쓰인 연도와 일자를 알 수 없다. 이 편지는 장복규가 창평군수를 맡았던 1905년 1월에서 1907년 3월 사이에 쓴 것으로 보인다. 장복규(1869~?)의 본관은 인동(仁同), 자(字)는 공삼(公三)이고 호(號)는 학운(鶴雲)이며, 금구(金溝, 현 김제) 출신이다. 1885년 진사(進士)가 되었고, 궁내부주사(宮內府主事)와 창평군수 등을 역임했다. 1905년 1월에 창평군수로 발령받아 1907년 3월에 면직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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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皮封]謹再拜上書伏不審漢回氣體候萬安反旆利稅否伏溸區區生重省姑安私幸何達就白古風例旣承盛諾敢此昻請此回便 惠擲之地伏望餘謹不備伏惟尊照上狀丁卯三月二十一日侍生林三澤再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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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0년 이승학(李承鶴) 간찰(簡札) 고문서-서간통고류-서간 개인-생활-서간 庚戌八月八日 父 庚戌八月八日 李承鶴 李光秀 전남도청(2020년 구입 의병자료) (재)한국학호남진흥원 1910년 8월에 이승학(李承鶴)이 아들 이광수(李光秀)에게 경술국치(庚戌國恥)의 슬픔을 표하고 속히 귀향토록 독려하는 내용을 전한 간찰. 1910년 8월에 이승학(李承鶴)이 아들 이광수(李光秀)에게 경술국치(庚戌國恥)의 슬픔을 표하고 속히 귀향토록 독려하는 내용을 전한 편지이다. 경술국치(庚戌國恥), 즉 대한제국이 일본에 합병되자 이승학은 의지할 곳도 원망할 곳도 없는 현실에 절망했다. 그는 하늘이 무심히 우리나라에 죄준 것을 원망하며 거리의 사람들은 미친 듯하고 취한 듯이 안정되지 않았다고 하였다. 이런 상황은 차라리 죽는 것이 낫지만 그렇게 하지 못하고 있다고 하며 이제 어디를 의지하여 살아야 하느냐며 한탄을 쏟아냈다. 이어 아들에게 서울 생활을 정리하고 귀향하라고 독려한 말을 길에 늘려놓았다. 그는 이광수가 서울에 산 십 년 동안 얻은 것으로 무엇을 할 수 있겠냐며 탄식하고, 지금 상황은 눈으로 차마 볼 수 없고 귀로 차마 들을 수 없으니 다시 무슨 희망이 있겠느냐고 하였다. 또 아들이 귀향해야 하는 다섯 가지를 들었는데, '너의 아버지가 늙었으니 돌아와 봉양해야 하고, 너의 아들이 장성했으니 돌아와 가르쳐야 하며, 너의 부인이 원망하니 돌아와 위로해 주어야 하며, 가산(家産)이 줄어들었으니 돌아와 수습해야 하며 향리 사람들이 비웃나니 돌아와 은거해야 한다'는 것이다. 게다가 거류(去留)는 무관하게 되었고 국가의 계책을 영위하는 것도 무익하게 되었다고 하며 거듭 귀향을 재촉했으며, 앞서 말한 다섯 가지의 의무를 저버리고 서울에서 시류를 좇아 사는 것은 천한 장부(丈夫)가 된다고 하면서 서울 생활에 연연하지 말고 돌아오도록 했다. 지금 처한 시대는 「귀거래사(歸去來辭)」를 읽고, 「반초은시(反招隱詩)」를 노래할 때이니 다른 일은 도모하지 말라고 당부했다. 무엇보다 지금은 입이 있어도 말을 할 수 없고 해는 저무는데 길은 먼 형세라고 하며 송나라 주희(朱熹)가 말한 애통함을 참고 원한을 가슴에 새겨 절박한 마음을 갖는다는 뜻의 '인통함언박부득이(忍痛含怨迫不得已)'라는 여덟 글자를 명심할 때라고 하였다. 편지 말미의 내용을 보면 이승학이 왜 그토록 아들의 귀향을 원했는지가 드러난다. 이승학은 아들에게 처음부터 기신(起身) 하는 것은 어렵고 여의치도 않아서 공연히 검사(檢事)만 당하게 된다고 이른다. 이 말의 의도를 보았을 때 아들 이광수가 섣불리 의병에 참여할 것을 근심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실제 이광수는 을사조약(乙巳條約) 체결 이후 나인영(羅寅永) 등과 같이 유신회(維新會)를 조직하여 을사 5적(박제순, 이지용, 이근택, 이완용, 권중현)을 암살할 계획을 세우다가 일본군에 붙잡혀 진도(珍島)로 유배되기도 하였다. 편지는 세 장의 편지지에 나누어 내용이 기록되어 있으며, 마지막 장 배면에 추신을 적었는데, 편지의 전달에 관한 내용이다. 이승학(1857∼1928)의 본관은 전주(全州)로, 양녕대군(讓寧大君)의 후손이며, 자는 자화(子和), 호는 청고(靑皋)이다. 전남 담양(潭陽) 장전리(長田里)에서 출생하였다. 아버지는 기정진(奇正鎭)의 문인인 진사 이최선(李最善)이고, 이승학 본인도 기정진의 문하에서 배웠다. 을미사변(乙未事變) 때 팔도에 격문을 보내어 의병을 일으키기도 했다. 문집으로 ?청고집(靑皋集)? 4권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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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묘년 임정규(林廷圭) 간찰(簡札) 고문서-서간통고류-서간 개인-생활-서간 丁卯三月卄一日 弟 林廷圭 丁卯三月卄一日 林廷圭 전남도청(2020년 구입 의병자료) (재)한국학호남진흥원 정묘년 3월에 임정규(林廷圭)가 수신인의 아들과 헤어지면서 안부를 전한 편지이다. 정묘년 3월에 임정규(林廷圭)가 수신인의 아들과 헤어지면서 안부를 전한 편지이다. 엊그제 작별하여 마음이 아직도 서글프다는 말로 편지를 시작하고, 상대방의 안부를 물었다. 분란을 겪은 후에 형제들과 지내는 생활은 어떠신지, 가족들은 두루 좋으신지 여쭈었다. 본인은 이전과 다름없이 지내고 있다고 간단히 덧붙이고, 상대방 아들에 대해 전했다. 윤랑(允郞, 상대방 아들)은 모든 일에 숙달(夙達)하니 크게 전망이 있을 것이니 사랑할만하고 축하할 만하다고 칭찬했다. 그리고 갑자기 윤랑과 작별하게 되어 매우 슬프다고 하며 편지를 끝마쳤다. 헤어지는 윤랑 편에 안부 인사 편지를 보낸 것으로 보인다. ?고종실록(高宗實錄)?에 기록된 임정규라면, 그는 장성(長城) 출신으로 1900년 4월에 전라남도 양무위원(全羅南道量務委員)을 맡은 인물이며, 편지에 적힌 정묘년은 1927년으로 보아야 한다. 또 이 편지가 이승학(李承鶴) 가문으로 온 것이라면 수신인은 이승학을 가능성이 크고, 윤랑은 이광수(李光秀)가 될 것이다. 이광수(1873~1953)의 호는 옥산(玉山), 자(字)는 미중(美中)이다. 부인 죽산안씨와의 사이에 외아들 혁(爀)을 두었다. 노사학파의 일원인 송사(松沙) 기우만(奇宇萬)의 문인이다. 1900년에 경의문대(經義問對)로 성균관박사(成均館博士)로 되었으며, 계몽운동가인 양한묵(梁漢黙) 등과 교유하면서 신학문에 뜻을 두고 개화(開化)에 앞장섰다가 송사에게 파문(破門)을 당하기도 했다. 일제의 강제 병합을 목격하고 고향에 돌아와 후학을 양성하며 여생을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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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皮封]謹拜候狀昨日拜別尙庸伏悵不審勞攘之餘靖棣體還護萬重寶閤均休昻溸區區且祝弟依劣而已 允郞凡事夙達大有前望可愛可賀而遽爾賦別甚悵甚悵餘謹不備伏惟尊照 上狀丁卯三月廿一日弟林廷圭拜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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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백보(任百寶) 간찰(簡札) 고문서-서간통고류-서간 개인-생활-서간 庚二月十三 記下 任百寶 庚二月十三 任百寶 李進士宅 전남도청(2020년 구입 의병자료) (재)한국학호남진흥원 임백헌(任百憲)이 이진사댁(李進仕宅)에 스승의 상사(喪事) 등에 묻고 여러 가지 소식을 전한 내용의 간찰. 임백헌(任百憲)이 이진사댁(李進仕宅)에 스승의 상사(喪事) 등에 묻고 여러 가지 소식을 전한 내용의 편지이다. 해를 넘기도록 소식을 듣지 못해 서글플 즈음에 보내주신 편지를 받고 요사이 안부가 좋으시다는 것을 듣게 되어 위로된다고 하며 편지를 열었다. 이어 스승님의 상(喪)은 유문(儒門)의 불행이라며 안타까운 마음을 전하고, 소산(小山, 노사 문인 문순헌(文淳憲) 추정)의 이장(移葬)이 정해졌느냐고 묻고 자신은 멀리 있어 듣지 못했다고 전했다. 이 단락에서 말한 스승은 노사(蘆沙) 기정진(奇正鎭, 1798~1879) 선생을 이른다. 그는 조선 성리학의 6대가(大家) 중의 한 명으로 꼽힐 정도로 성리학에 조예가 깊었으며, 위정척사파(衛正斥邪派)의 정신적 지주였다. 호남을 비롯한 영남에까지 그를 따르는 수백 명의 문인이 있었다. 대표적인 저술로 「납량사의(納凉私議)」, 「이통설(理通說)」, 「외필(猥筆)」 등이 있으며, 문집으로 ?노사집(蘆沙集)?이 있다. 편지는 임백헌 자신의 안부와 여러 가지 소식을 전한 내용으로 이어졌다. 자신은 그간에 금영(錦營, 충청 감영)으로 갔다가 열흘 만에 돌아왔는데, 그사이에 감기를 얻어 여러 날을 고생하다가 지금은 비록 머리 빗고 낯을 씻는 정도는 되지만 아직도 얼얼하다며 건강이 좋지 않음을 전했다. 또 동생이 이질(痢疾)에 걸려 상태가 좋지 않아서 근심이라는 내용, 금영을 다녀오고 병의 증상이 심해져서 염려가 깊다는 내용, 지금 임기 날짜를 다 채워 상쾌한 마음이 든다는 내용, 과거(科擧) 일자가 완화군(完和君)의 장례 때문에 미뤄질 것이라는 소문이 있으나 공문(公文)에 있지 않으니 길에서 떠도는 소문일 것이라는 내용, 도목정사(都目政事)에서 받은 점수에 관한 내용 등이 보인다. 완화군은 고종(高宗)의 서장자(庶長子)로, 고종의 총애를 받았으며 할아버지인 흥선대원군이 세자로 책봉하려 했으나 명성황후의 견제로 이루어지지 못하였다. 1880년 병을 얻어 13세의 어린 나이로 요절하였고, 사후에 완친왕(完親王)으로 추존되었다. 편지가 쓰인 날짜에 '庚二月十三'으로 쓰여서 연도가 불분명하나 편지 내용으로 보아 간지로 표기된 '庚'은 경진년(庚辰年)인 1880년으로 짐작된다. 수신인 이진사는 이최선(李最善)을 말하는데, 그가 진사(進士)에 올랐기 때문에 이최선의 집을 이진사댁으로 불렀다. 이최선과 그의 아들 이승학(李承鶴)이 모두 기정진 선생의 제자였기 때문에 이 편지가 이최선에게 보낸 것인지, 이승학에게 보낸 것인지는 명확하지 않다. 임백헌의 본관은 풍천(豐川)으로, 1873년 인제현감(麟蹄縣監)을 맡았고, 1875년에는 창평현령(昌平縣令)에 제수되었으며, 1880년에는 면천군수(沔川郡守)에 임명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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寄光兒四朔間不見面不見一字書悠悠此心汝何以軆得近寒重省安過否今秋讀葩經卒業而又尊閣尙書乎在他秩乎所得者幾卷書乃範諸友同處乎壽萬日課九紹亦來留而課讀否俱爲愈愈無斁夫古今人之稱讀書好者汝知以何事何等物曰尋章句摘喜詞而已乎此外又知有無限好處乎吾之望汝者不在多言汝欲恢洪先世勤艱之基業則常食息間勉勉孜孜百事從實上做去久之用力自遠於食色之外然後庶覺寸進不然則終始悠泛矣吾復何望也人之用心也在父師長者之側則雖慵懶夫稍知收拾獨處則任其所之此所以孟子求放心先之大學之誠意中庸之謹獨是也蔽一言曰眞實地頭步耳汝之自點檢汝父在家時同乎異乎若辦得于此則吾何憂也欲言不能盡因下沙便略此庚寅臘月十八父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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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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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1년 이승학(李承鶴) 간찰(簡札) 1 고문서-서간통고류-서간 개인-생활-서간 辛卯五月卄八日 父 辛卯五月卄八日 李承鶴 李光秀 전남도청(2020년 구입 의병자료) (재)한국학호남진흥원 1891년 5월에 이승학(李承鶴)이 아들 이광수(李光秀)에게 공부를 독려하고 여러 가지 집안일을 당부한 내용의 간찰. 1891년 5월에 이승학(李承鶴)이 아들 이광수(李光秀)에게 공부를 독려하고 여러 가지 집안일을 당부한 내용의 편지이다. 더위가 심해지는데 가족들의 생활은 어떠한지를 물으면서 편지 서두를 채웠다. 이어 이승학은 아들의 공부를 독려하는 말을 전했다. 과작(課作)은 빠뜨리고 있지 않은지, 몇 사람과 같이 학문을 연마하는지, 마음으로 헤아려 보았을 때 작년보다 학문의 진척은 있었는지를 물었다. 또 과작(科作)은 작은 재주이지만 이 또한 힘쓰지 않으면 얻는 바가 없다고 하며 과작에 힘쓰라고 당부했다. 이어 입지(立志)의 중요성에 관해 얘기했다. 입지에도 크고 작음이 있고 정밀하고 거침의 차이가 있는 것은 스스로 어떻게 기약했는지의 여부 때문이라는 것이다. 입지에 이어 기질에 끌려 다니지 않도록 경계한 말도 보인다. 이승학은 기를 위주로 하는 것은 큰 병통이라고 하면서 사람이 기를 통솔하지 못하면 튼튼한 기둥을 세울 수 없다고 하면서 이승학 본인은 이를 잘하지 못한 것이 병통이라고 하면서 아들에게 잘 염두에 두도록 당부했다. 이어 서울살이 하는 이승학 본인의 생활을 전했다. 이승학은 예전과 같이 무료하게 지내면서도 분주함을 면하지 못하고 있어 한편으론 우습고 한편으론 서글프다고 마음을 표했다. 감시(監試)과 회시(會試)는 이미 지나갔으며, 인근 군(郡)에서 창평(昌平)에 사는 정형[鄭氏]이 참석했는데 낙방하여 안타깝다고 하였다. 이후 과거 시험 일정에 대해 알리면서 불안한 심정도 함께 드러냈다. 이어 집안일에 대한 걱정과 당부를 적었다. 서울은 장맛비가 내리는데 남쪽은 가뭄이 심하다고 하니 무슨 일인지 알 수 없다고 하며 걱정하는 말을 남기기도 했다. 지난번 편지에서 언급한 일 등은 잘 처리되고 있는지를 묻고 자신의 귀가를 기다려 처리하라고 당부했다. 또 내형(內兄)은 그믐 전에 도착하기로 약속했는데 지켜질지 모르겠다고 말하고, 안씨(安氏) 집안 형제들과 조석으로 함께 지내고 있어 위로된다는 말을 남기며 편지를 끝마쳤다. 이승학(1857∼1928)의 본관은 전주(全州)로, 양녕대군(讓寧大君)의 후손이며, 자는 자화(子和), 호는 청고(靑皋)이다. 전남 담양(潭陽) 장전리(長田里)에서 출생하였다. 아버지는 기정진(奇正鎭)의 문인인 진사 이최선(李最善)이고, 이승학 본인도 기정진의 문하에서 배웠다. 을미사변(乙未事變) 때 팔도에 격문을 보내어 의병을 일으키기도 했다. 문집으로 ?청고집(靑皋集)? 4권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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多少事臨帋又復如此甚矣精神之錯亂也卽日漸熱母主氣力萬康家中俱免何而身狀安吉課作無闕而與幾人同硏否汝須自料胸中今年所讀與所作與往年有異則是分寸有進也不然則終是舊樣人也科作雖是末技不專用意則又無所得況外此而有大於此者乎大抵人之初發軔曰立志而立志亦有大小精粗之不同者以其自期之如何耳又人之主氣者是大病痛而人不充是氣者無以撑柱此七尺之驅如吾之半生病是餒也着念念此中旅屑依遣而日事頗無聊而又不免奔忙自笑自憐而已監會已過鄭兄之山外可歎近郡則昌平鄭氏參一人云耳會日必以退定十七爲之漸且迫頭更何意想吾之所望無乃捕風而免不得奈何都下可謂成霖而每聞南來人傳說魃憂特甚未知近復如何所作畢移否向去兩書中事區處之方皆如書中指封待吾去時也內兄晦前來到爲約而未知踐約否也安兄昆季晨夕相從頗慰擾擾不一一辛卯五月卄八日父欠判重告歸付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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聞喜後去念日付郵便書相夜晦可抵其前書皆免浮沈否古阜便來書念二得見必滯一旬於郡邊也羣疑盡釋而上庠書中若傳榜而以厚償如托然旣後相聞故但給三緡來人以失望而去矣大抵傳榜今雖聞知吾亦初不以急傳爲言然過後思之有不然者矣南人之以初事不識裏許者皆然而設有所費急送伴主人使閭里如前呼唱可也而今旣後矣見書知科時經許多勤苦而至於八日之久而出榜耶束立拔擢之境但以天數而參之此可爲一快事今也汝之身已許於國矣苐一事君之義明白立柱於心頭處世之方詳審出脚於路下無作碌碌無作硬硬務以和順適中焉北道行果亦如意已發去而來往必爲一朔未知間至如何也祕書郞若爲之是所望者而凡事先知幾微無失時卽可及也登壟望蜀人情皆然近日在京在道未得的知是菀而雖爲形役勿爲勞神吾嘗客遊自驗比在家時猶專一在家則百務撞着時或擾中在外則惟一條路看所事保身而已古人之途學知所以然也汝亦驗此否諡座近或設行耶日前見新聞知議政之間遞而又下敦諭則必復出仕出仕之日似成而又未知如何耶此事期必結末然後還家而終若差遲則去留姑亦難矣苐觀下回焉家中近如前而吾病近以眩氣益甚不止亦苦哉詩會明日爲之而客擾姑未知多少耳白錢參百兩換送付之汝寬族使傳之又有不足者自京得用或下換用之而玉果金明五處又用幾許否此去錢每百十二兩式加捧自此區送則又有些利而姑亦未及奈何衣服趁爲製着明五便何時到泊乎官服與轎子等屬皆辦得乎餘外事但勿浪費當用處亦得用焉人事之擾惱每以用不足之致然丈夫在有身豈以此至於傷心乎有無間以安字過耳水到渠成不須預慮下邨行以來明發去云近日所見者必傳之他不一一辛丑三月卄五父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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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皮封]長田李進士宅回納隣吏上謝伏拜審靜體候萬安仰慰仰慰示事謹悉而槪知其曖昧矣今日更招尤可見情耳金事渠非自退實自長田宅自退云故退待之意姑爲放送耳餘不備上狀禮卽傳侍生張復圭拜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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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복규(張復圭) 간찰(簡札) 2 고문서-서간통고류-서간 개인-생활-서간 卽 侍生 張復圭 卽 張復圭 李進士宅 전남도청(2020년 구입 의병자료) (재)한국학호남진흥원 창평군수(昌平郡守) 장복규(張復圭)가 이진사(李進士)댁에 의병(義兵) 등에 관한 사실을 확인하여 전달한 간찰. 창평군수(昌平郡守) 장복규(張復圭)가 이진사댁에 의병(義兵) 등에 관한 사실을 확인하여 전달한 편지이다. 먼저 파병 소식에 관한 내용을 전하기를, 어제 관사(觀使, 관찰사)의 편지에서 이르기를 군부(軍部)에서 전훈(電訓)으로 곡성(谷城) 등지에 병사를 파병했는데, 30여 명이 군의 객점에서 점심을 먹고 저녁에 옥과(玉果)쪽으로 떠났다는 것이다. 이어 의병의 행군 소식을 알렸다. 어제저녁 오경(五更)에 곡성에 보고된 내용에서 듣기를, 의병이 곡성으로 들어와 유숙(留宿)했다가 다음 날 남원(南原)으로 향하려고 했으나 그 지역에 군인들이 길을 막고 있다는 것을 듣고 순창(淳昌)으로 향했다는 것이다. 군인과 의병에 관해 전달한 내용은 직접 목격한 것이기 때문에 아마도 헛말은 아닐 것이라고 덧붙이기도 했다. 근래 들리는 유언비어에 대해서도 확인해 주었다. 담양읍(潭陽邑)에 일본 헌병 3명이 그제 들어와서 숨었다는 말은 낭설(浪說)이며, 전주의 병사가 내려갔다고 것은 관사의 편지에서 확인했다고 전했다. 영산포 뱃길이 끊겼다는 말도 모두 낭설이라고 추신으로 덧붙이기도 하였다. 편지의 수신인은 진사(進士) 이최선(李最善) 댁을 책임지고 있는 장남 이승학(李承鶴)을 이른 듯하다. 또 편지를 쓴 날짜에 '卽'으로만 표기되어 있어서 편지가 쓰인 연도와 일자를 알 수 없다. 이 편지는 장복규가 창평군수를 맡았던 1905년 1월에서 1907년 3월 사이에 쓴 것인데, 의병 등의 내용으로 보았을 때 을사늑약이 체결된 1905년 11월 이후에 작성된 것으로 추측된다. 편지는 피봉 하나와 편지지 두 장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두 장의 편지지에 내용을 연속하여 기록하여 날짜와 발신인은 뒷장에 표기했고, 추신의 내용은 앞 장에 기록했다. 장복규(1869~?)의 본관은 인동(仁同), 자(字)는 공삼(公三)이고 호(號)는 학운(鶴雲)이며, 금구(金溝, 현 김제) 출신이다. 1885년 진사(進士)가 되었고, 궁내부주사(宮內府主事)와 창평군수 등을 역임했다. 1905년 1월에 창평군수로 발령받아 1907년 3월에 면직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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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皮封]長田侍座回納鳴陽吏上謝伏拜審侍體候萬甯伏慰且荷昨日果有觀使書因軍部電訓派兵于谷城等地而三十餘名午站於此郡店夕間發向玉果耳昨夜五更谷城報告使留宿於郡底詳聞則義兵入谷城留宿翌日欲向南原聞該地有兵丁之遮道還向淳昌此是目擊也似非虛語耳潭陽邑日憲兵三名再昨日入去而遁去之說浪說耳觀使書中完兵亦下來云耳餘不備上謝候卽□侍生張復圭榮浦船路之絶皆浪說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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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皮封]李進士宅回納隣客謹謝候經年阻候瞻悵際切伏拜惠狀謹審比來春暢體事萬旺何等仰慰而丈席喪事儒門不幸也小山緬禮定於何處在於郡之漠未聞志耳記下間作錦營之行挾旬往還路得寒疾多日叫苦矣今雖梳洗尙此圉圉而聞家弟痢報而錦行則病情本是疸症又添痰漸元氣澌脫澹語也厭食也不無深慮悶鬱見今瓜期已熟月內否擬賦歸浩然之氣是爲爽然也科日或云因於完和君襄禮退行然其無公文可謂塗說也都政云卅之爲之別無可觀處耳餘留不備謝上庚二月十三記下任百寶二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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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백헌(任百憲) 간찰(簡札) 고문서-서간통고류-서간 개인-생활-서간 卽 記下 任百憲 卽 任百憲 李進士宅 전남도청(2020년 구입 의병자료) (재)한국학호남진흥원 임백헌(任百憲)이 이진사댁(李進仕宅)에 시약(試藥) 등에 관한 부탁 등을 전한 내용의 간찰. 임백헌(任百憲)이 이진사댁(李進仕宅)에 시약(試藥) 등에 관한 부탁 등을 전한 내용의 편지이다. 호우(好雨)가 개고 덥고 습해지는 시기에 상대방을 그리워하던 중에 보내주신 편지를 받고 요사이 생활이 두루 좋다는 것을 알고 위로가 되었다는 말로 편지를 시작했다. 이어 본인은 예전과 같은 일들로 고민이 많다고 전했다. 이어 지금 낙하(洛下, 한양)에 평소 친한 벗들이 둘러앉아 시약(試藥) 중인데 자리의 사람들의 말이 정밀하지 않고 믿음도 없으며, 돌아가는 동정을 보니 마땅히 좋지 않다고 하며, 저를 위해 소개해 주기를 간절히 요청했다. 이 구절에서 '나를 위해 소개해 달라'는 말은 무엇을 소개해 달라고 하는 것인지 명확하지 않다. 편지에서 계속 이르기를, 이제 전교(專敎)해 주시니 매우 감사하지만 일의 사정이 좋지 않으니 어찌할지 모르겠다고 속상함을 드러내기도 했다. 이 단락의 '일의 사정' 역시 불분명하다. 또 임백헌은 병증이 나아지는 별다른 기미가 없다고 하며 이 같은 사정을 헤아려서 통기(通奇) 해주도록 부탁했다. 편지가 쓰인 날짜에 '卽'으로만 표기되어서 연도가 불분명하다. 수신인 이진사는 이최선(李最善)을 말하는 것인지, 그의 아들 이승학(李承鶴)을 지칭한 것인지 알 수 없다. 임백헌의 본관은 풍천(豐川)으로, 1873년 인제현감(麟蹄縣監)을 맡았고, 1875년에는 창평현령(昌平縣令)에 제수되었으며, 1880년에는 면천군수(沔川郡守)에 임명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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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0년 이승학(李承鶴) 간찰(簡札) 3 고문서-서간통고류-서간 개인-생활-서간 庚寅臘月十八 父 寄光兒 庚寅臘月十八 李承鶴 李光秀 전남도청(2020년 구입 의병자료) (재)한국학호남진흥원 1890년 12월에 이승학(李承鶴)이 아들 이광수(李光秀)에게 경학(經學)의 진척과 학문을 독려하는 내용을 전한 간찰. 1890년 12월에 이승학(李承鶴)이 아들 이광수(李光秀)에게 경학(經學)의 진척과 학문을 독려하는 내용을 전한 편지이다. 편지 서두에는 그리움을 표하고 안부를 묻는 내용을 적었다. 넉 달 동안 서울에 있으면서 얼굴도 보지 못하고 편지도 받지 못해 그리움이 깊다고 전하며 할머니와 어머니를 모시면서 사는 생활은 어떠하며, 경서(經書) 공부에 대한 진척을 상세히 물었다. ?시경(詩經)?은 다 마쳤는지, 그 책을 마쳤다면 ?상서(尙書)?를 읽고 있는지, 아니면 다른 책을 읽고 있는지, 그동안 몇 권이나 독파했는지를 물었다. 또 동무들과도 함께 공부하면서 모범이 되고 있는지 물으며 학문을 독려했다. 이어 독서의 즐거움과 중요성에 대해 논하며 재차 학문에 힘쓰기를 바란 내용이 보인다. 독서는 무한한 즐거움이라고 하면서 선대가 이뤄놓은 것을 넓히고 짧은 시간도 낭비하지 말고 힘쓴다면 모든 일이 실상을 따라 나아갈 것이라고 하였다. 이 같은 마음가짐으로 오랫동안 행하다 보면 식색(食色)과 같은 욕망을 좇는 삶에서 멀어져 조금씩 진보가 될 것이고, 이렇게 하지 않으면 유유범범(悠悠泛泛) 하여 이룬 것이 없을 것이라고 하며 학문에 힘쓰도록 하였다. 또 사람은 아버지나 스승, 어른이 옆에 있을 때는 게으름을 피우지 않으나 홀로 있을 때는 그렇게 하지 않는 것이 일반적이기에, 맹자(孟子)가 구방심(求放心)을 말했고, ?대학(大學)?에서 성의(誠意)를 강조했으며, ?중용(中庸)?에서 근독(謹獨)의 중요성을 표했다는 것이다. 경학(經學)에서 이른 이 말들을 한마디로 하자면 '진실한 자리'라고 하면서 아버지가 곁에 없는 지금을 경계하고 점검하라고 당부했다. 장성(長城) 하사(下沙) 편으로 편지를 붙인다고 말을 덧붙이며 편지를 마쳤다. 이승학(1857∼1928)의 본관은 전주(全州)로, 양녕대군(讓寧大君)의 후손이며, 자는 자화(子和), 호는 청고(靑皋)이다. 전남 담양(潭陽) 장전리(長田里)에서 출생하였다. 아버지는 기정진(奇正鎭)의 문인인 진사 이최선(李最善)이고, 이승학 본인도 기정진의 문하에서 배웠다. 을미사변(乙未事變) 때 팔도에 격문을 보내어 의병을 일으키기도 했다. 문집으로 ?청고집(靑皋集)? 4권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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