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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유년 박예환(朴禮煥) 등 소지(所志) 고문서-소차계장류-소지류 법제-소송/판결/공증-소지류 丁酉十月日 西二上面化民 朴禮煥 等 3名 城主 丁酉十月日 朴禮煥 綾州牧使 使[着押] [綾州牧使之印] 1顆(7.0x7.0) 전남도청(2019년 구입 의병자료) (재)한국학호남진흥원 정유년 박예환(朴禮煥) 등 3명이 능주목사(綾州牧使)에게 올린 소지. 정유년 10월에 화민(化民) 박예환(朴禮煥) 등 3명이 능주목사(綾州牧使)에게 올린 소지(所志)이다. 문서에서 박예환 등은 자신을 화민(化民)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화민은 자신이 사는 고장의 수령이나 조상의 산소가 있는 고장의 수령에게 일컫는 자칭이다. 문서에 따르면 능주목 서이상면(西二上面)에 사는 박예환, 박재경(朴在璟), 박재호(朴在浩)는 자신들의 9대조 찰방공(察訪公)과 8대조 감찰공(監察公)의 묘소가 서일면(西一面) 월곡(月谷) 안산(案山)에 있어 수백 년 간 산지기를 두고 금양(禁養)하였다. 이달(10월) 7일 밤 산 아래 사는 민치만(閔致萬)이 사인(査人) 홍씨의 무덤을 선산 청룡등(靑龍嶝)에서 가까운 거리에 투장하자 자신들이 이를 알고 소송할 뜻을 비치니 민치만이 스스로 이달 29일에 굴거(掘去)하겠다고 하였으니 이후 이 땅에 타인이 범장(犯葬)하는 일이 없도록 관에서 입지(立旨)를 성급(成給)해 주기를 요청하였다. 이와 같은 요청에 능주목사는 다른 사람이 뫼를 쓰지 못하게 금하는 땅에 장례를 치르는 자가 있으면 송변(訟卞)하라는 처분을 내렸다. 소지(所志)는 관부(官府)에 올리는 소장(訴狀)·청원서·진정서. 발괄〔白活〕이라고도 한다. 소지는 당시 사람들의 생활 가운데 일어난 일 중에서 관부의 결정과 도움을 필요로 하는 모든 종류의 민원에 관한 문서이므로 그 내용은 아주 다양하다. 또한 소지는 소지를 올린 사람들의 이해관계와 직결된 것이었기 때문에 그 가문에서 소중히 보관해, 현존하는 고문서 가운데 토지문기(土地文記) 다음으로 많은 양을 차지하고 있다. 소지를 수령이나 관계 관부에 올리면 해당관원은 소지의 내용을 살펴본 뒤 그 소지에 대한 판결을 내리게 되는데, 이를 '뎨김〔題音〕' 또는 '제사(題辭)'라고 한다. 뎨김은 소지의 왼쪽 아래 여백에 쓰며, 그 여백이 모자라면 뒷면에 계속해서 쓰기도 하고 별지를 붙여쓰기도 하였다. 뎨김을 적은 소지는 그 소지를 올린 사람에게 돌려주어 그 판결에 대한 증거자료로서 소중히 보관하도록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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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42년 최익동(崔益東) 등 상서(上書) 고문서-소차계장류-소지류 법제-소송/판결/공증-소지류 壬寅二月日 幼學 崔益東 等 47名 使道主 壬寅二月日 [1842] 崔益東 使道主 巡使[着押] [마패(馬五)인]1顆(8.5, 원형) 전남도청(2019년 구입 의병자료) (재)한국학호남진흥원 1842년(헌종 8)에 최익동(崔益東) 등 47명이 순사또(巡相)에게 이지항(李止衖)의 효행을 표창해 주길 청하는 상서(上書). 1842년(헌종8) 2월에 최익동(崔益東) 등 47명이 순사또(巡相)에게 이지항(李止衖)의 효행에 대하여 표창해 주길 청하며 올린 상서(上書)이다. 최익동 등 나주 유생 47명이 본 고을의 효자 이지항(李止衖, 개명전 李止公)의 정유재란 때 효행 사실을 서술하며 순사또(巡相)께서 공의(公議)를 널리 취하여 임금께 알려 포상의 은전을 받을 수 있도록 요청하는 것이다. 나주 유생들이 이 문서를 올린 이유는 이지항은 산룡 양산숙(梁山璹) 형제 및 유영ㆍ나덕현과 더불어 일대(一代)에 명인(名人)으로 도내 유생들의 천거로 다른 이들은 포상의 은전[褒典]을 얻었으나 이공만이 혼자 빠졌고, 또한 그 자손이 영세하고 집안이 한미하여 선조의 효행을 주장하지 못하고 있어 이를 애석하게 여겨서라고 하였다. 그는 어머니를 모시는데 정성을 다하였으며 정유재란 때 어머니를 업고 금성(錦城) 산중으로 피신하였는데 왜적들이 산에 들어와 살육을 일삼으며 어머니를 해하려고 하자 자신의 몸으로 어머니를 보호하였다 한다. 이와 같은 요청에 순사또(巡相)는 탁월한 행실이 매우 의로우니 마땅히 헤아려서 등문(登聞)하겠다는 처분을 내렸다. 이 문서에 등장하는 주인공 이지항(李止衖)은 본관이 함평으로 나주 출신이다. 아버지는 이유회(李惟誨, 1534~1603), 형은 이지득(李止得), 종형은 이지효(李止孝, 1553~1613)이다. 아버지 이유회는 자는 헌가(獻可), 호는 호암(蒿巖) 고봉 기대승의 문하로 학행이 두루 미처 삼남 여러 서원의 원장을 지냈다. 형 이지득(李止得, 1555~1594)의 자는 덕보(德甫)로 나주시 다시면 영동리 초동에서 태어났다. 1584년(선조 17) 별천(別薦)으로 겸사복(兼司僕) 내승(內乘)이 되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 임금이 파천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군량을 모아 행재소에 가서 남으로 내려오기를 청하고 돌아왔다. 1594년(선조 27)에 사재를 털어 군량미로 공급하였고, 장경홍(張景弘)ㆍ장경남(張景男) 형제와 의병을 모아 활동하다가 흥양포(興陽浦) 전투에서 순절하였다. 1892년(고종 29) 충신정려(忠臣旌閭)가 내리고 병조참의에 증직되었다. 상서(上書)는 조선시대 민원서(民願書)인 소지류(所志類)로 그 서식은 다른 소지류와 약간 다르다. 이 문서는 관찰사·수령·암행어사 등에게 올리며, 그 내용은 산송(山訟)과 효행(孝行)·탁행(卓行)의 정려(旌閭)를 위한 것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인원이 많은 경우는 연명하여 올리기도 한다. 이 상서는 전래되고 있는 것이 많으며, 시대는 대개 조선 중기 이후에서 말기까지의 것이 대부분이다. 상서를 접수한 관찰사나 수령은 이를 검토하고 그 처분을 문서의 좌편 하단의 여백에 써놓는다. 이것을 제음(題音) 또는 제사(題辭)라 한다. 이와 같이, 처분한 내용을 써서 상서를 올린 사람에게 돌려준다. 그러나 수령에게 1차 올려서 일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2차, 3차 계속 올리며, 그래도 해결되지 않으면 관찰사에게 올리게 된다. 이러한 상서는 당시의 사회사정을 연구하는 데 도움이 되는 자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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西二上面化民朴禮煥朴在璟朴在浩右謹言伏以民等九代祖察訪公八代祖監察公墳墓在於西一面月谷案山而數百年入山直禁養矣今月初七日夜山下村居閔致萬渠矣査人洪塚民之先山靑龍嶝至近之處偸葬是乎所民等相訟之意據俚是非則同致萬自知當禁之地是遣今月二十九日掘去是乎尼日後勿爲他人犯葬之意立 旨成給千萬望良只爲行下向敎是事城主 處分丁酉十月日使[着押](題辭)當禁之地有營葬者訟卞事十月十日[官印] 1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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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축년 박경혁(朴慶赫) 등 소지(所志) 고문서-소차계장류-소지류 법제-소송/판결/공증-소지류 癸丑正月日 西二化民 朴慶赫 等 3名 城主 癸丑正月日 朴慶赫 綾州牧使 使[着押] [綾州牧使之印] 8顆(7.0x7.0) 전남도청(2019년 구입 의병자료) (재)한국학호남진흥원 계축년 박경혁(朴慶赫) 등이 능주목사(綾州牧使)에게 올린 소지(所志). 계축년 정월에 화민(化民) 박경혁(朴慶赫) 등이 능주목사(綾州牧使)에게 올린 소지(所志)이다. 문서에서 박경혁 등은 자신을 화민(化民)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화민은 자신이 사는 고장의 수령이나 조상의 산소가 있는 고장의 수령에게 일컫는 자칭이다. 능주목 서이면(西二面)에 사는 박경혁, 박경집(朴慶潗), 박경연(朴慶淵) 등은 자신들의 8ㆍ9대조 산소가 서일면(西一面) 월곡(月谷)에 있는데, 산 아래 상ㆍ하ㆍ좌ㆍ우 광자(光字) 진지(陳地)를 재작년인 무신년에 이증제(李曾齊)에게서 매득(買得)하여 산지기를 두고 금양(禁養)하였다. 그런데 산 아랫마을에 사는 우연(右延)이라는 자가 맨 아래 기슭에 있는 고총(古塚)을 자신의 할아버지 무덤[祖墓]이라고 하며 그 위에 있는 자신들의 진지(陳地)를 점점 범삭(犯削)하거나 기경(起耕)하여 그 땅을 거의 취하고자 하는데 자신들은 사는 곳이 멀어 이 일을 막을 수 없으니 이 자가 다시는 침범할 수 없도록 처벌해 달라고 요청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요청에 능주목사는 면임(面任)에게 형지(形止)를 적간(摘奸)한 후에 금치(禁致)를 시행하라는 처분을 내렸다. 또 2월 15일에는 적간(摘奸) 시 공평하게 경계를 정하여 각 수계(守界)내에서 뒤에 분규가 없도록 시행하라고 하였다. 소지(所志)는 관부(官府)에 올리는 소장(訴狀)·청원서·진정서. 발괄〔白活〕이라고도 한다. 소지는 당시 사람들의 생활 가운데 일어난 일 중에서 관부의 결정과 도움을 필요로 하는 모든 종류의 민원에 관한 문서이므로 그 내용은 아주 다양하다. 또한 소지는 소지를 올린 사람들의 이해관계와 직결된 것이었기 때문에 그 가문에서 소중히 보관해, 현존하는 고문서 가운데 토지문기(土地文記) 다음으로 많은 양을 차지하고 있다. 소지를 수령이나 관계 관부에 올리면 해당관원은 소지의 내용을 살펴본 뒤 그 소지에 대한 판결을 내리게 되는데, 이를 '뎨김〔題音〕' 또는 '제사(題辭)'라고 한다. 뎨김은 소지의 왼쪽 아래 여백에 쓰며, 그 여백이 모자라면 뒷면에 계속해서 쓰기도 하고 별지를 붙여쓰기도 하였다. 뎨김을 적은 소지는 그 소지를 올린 사람에게 돌려주어 그 판결에 대한 증거자료로서 소중히 보관하도록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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西二化民朴慶赫朴慶潗朴慶淵等右謹言伏以民等八九代山所在於西一月谷而山下上下左右光子陳地再去戊申年分成文記買得於李曾齊處入山直禁養矣山下村居右延爲名者以最下麓古塚指謂渠矣祖墓是如其上民之陳地稍稍犯削或起耕其土或刈取其草而民等所居相左不能種種禁斷則此漢無厭之心將不知至於何境玆以緣由仰訴伏乞參商敎是後兩班山所有文券陳地乙不復侵犯之意同右延處嚴明行下爲只爲行下向敎是事城主 處分癸丑正月 日使[着押](題辭)他葬丘墓咫尺之地犯境刈草極爲無據形止摘奸後果如狀辭爲飭禁致向事卄日 面任摘奸時公平定界是如兩隻?已對造細告則各守界內俾無日後紛紜之弊宜爲向事二月十五日背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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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신년 박명환(朴明煥) 등 소지(所志) 고문서-소차계장류-소지류 법제-소송/판결/공증-소지류 庚申八月日 道莊面壁池洞居 化民 朴明煥 等 3名 城主 庚申八月日 朴明煥 使[着押] [綾州牧之印] 1顆(7.0x7.0) 전남도청(2019년 구입 의병자료) (재)한국학호남진흥원 경신년에 박명환(朴明煥) 등 3명이 능주목사(綾州牧使)에게 올린 소지(所志). 경신년 8월에 화민(化民) 박명환(朴明煥) 등 3명이 능주목사(綾州牧使)에게 올린 소지(所志)이다. 문서에서 박명환 등은 자신을 화민(化民)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화민은 자신이 사는 고장의 수령이나 조상의 산소가 있는 고장의 수령에게 일컫는 자칭이다. 소지의 내용에 따르면 능주목 도장면(道莊面) 벽지동(壁池洞)에 사는 박명환, 박재두(朴在斗), 박형진(朴亨鎭)은 자신들의 7대조 감찰공(監察公)의 산소가 대곡면(大谷面) 모산촌(茅山村) 뒤 기슭에 있어 수백 년 동안 이곳을 금양(禁養)하는 땅으로 지켜오고 있었다. 을사년에 산 아랫마을에 사는 민두용(閔斗用)이 자신들 땅의 송추(松楸)를 함부로 베어가자 관에 소장을 올려 이후에 침작(侵斫)하지 않겠다는 뜻을 수기(手記)로 작성하여 받았다. 그럼에도 민두용(閔斗用)이 약속을 어기고 다시 송추(松楸)를 작벌(斫伐)하였으니 그를 잡아다가 투작송추(偸斫松楸)의 죄(罪)를 엄히 처벌해 달라고 하였다. 이에 능주목사는 장민(狀民: 소지를 올린 사람)에게 민두용(閔斗用)을 기어이 잡아 오라는 처분을 내렸다. 소지(所志)는 관부(官府)에 올리는 소장(訴狀)·청원서·진정서. 발괄〔白活〕이라고도 한다. 소지는 당시 사람들의 생활 가운데 일어난 일 중에서 관부의 결정과 도움을 필요로 하는 모든 종류의 민원에 관한 문서이므로 그 내용은 아주 다양하다. 또한 소지는 소지를 올린 사람들의 이해관계와 직결된 것이었기 때문에 그 가문에서 소중히 보관해, 현존하는 고문서 가운데 토지문기(土地文記) 다음으로 많은 양을 차지하고 있다. 소지를 수령이나 관계 관부에 올리면 해당관원은 소지의 내용을 살펴본 뒤 그 소지에 대한 판결을 내리게 되는데, 이를 '뎨김〔題音〕' 또는 '제사(題辭)'라고 한다. 뎨김은 소지의 왼쪽 아래 여백에 쓰며, 그 여백이 모자라면 뒷면에 계속해서 쓰기도 하고 별지를 붙여쓰기도 하였다. 뎨김을 적은 소지는 그 소지를 올린 사람에게 돌려주어 그 판결에 대한 증거자료로서 소중히 보관하도록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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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오년 박세장(朴世章) 등 소지(所志) 고문서-소차계장류-소지류 법제-소송/판결/공증-소지류 戊午十一月日 靈巖居前海南朴世章 等 2名 兼城主 戊午十一月日 朴世章 兼城主 ▣▣[着押] □…□ 3顆(6.0x6.0) 전남도청(2019년 구입 의병자료) (재)한국학호남진흥원 무자년에 박세장(朴世章) 등이 겸성주(兼城主)에게 올린 소지(所志). 무자년 11월에 박세장(朴世章) 등이 겸성주(兼城主)에게 올린 소지(所志)이다. 소지 내용에 따르면 영암에 사는 박세장과 능주에 사는 출신(出身:과거급제자) 박태빈(朴泰彬)은 능주(綾州) 서일면(西一面) 월곡촌(月谷村) 뒤에 자신들의 선산이 있는데, 자신들은 서이면(西二面)이나 영암(靈巖)에 거주하고 있다고 하였다. 지난달에 월곡에 살고 있는 양거익(梁居益)이 동생, 아들, 조카 삼장(三葬)을 자신들의 증조(曾祖) 무덤 가까운 곳에 투장(偸葬)을 하였다고 하면서 양거익으로 하여금 기한을 정해놓고 투장한 무덤을 파서 옮기도록 처벌해 달라고 요청하였다. 이에 겸성주(兼城主)는 같은달 30일에 양거익이 사대부가의 산소 가까운 곳에 몰래 투장한 것은 매우 놀라운 죄이므로 적간척량(摘奸尺量)하여 처치하라는 처분을 유향소(留鄕所)로 내렸다. 소지(所志)는 관부(官府)에 올리는 소장(訴狀)·청원서·진정서. 발괄〔白活〕이라고도 한다. 소지는 당시 사람들의 생활 가운데 일어난 일 중에서 관부의 결정과 도움을 필요로 하는 모든 종류의 민원에 관한 문서이므로 그 내용은 아주 다양하다. 또한 소지는 소지를 올린 사람들의 이해관계와 직결된 것이었기 때문에 그 가문에서 소중히 보관해, 현존하는 고문서 가운데 토지문기(土地文記) 다음으로 많은 양을 차지하고 있다. 소지를 수령이나 관계 관부에 올리면 해당관원은 소지의 내용을 살펴본 뒤 그 소지에 대한 판결을 내리게 되는데, 이를 '뎨김〔題音〕' 또는 '제사(題辭)'라고 한다. 뎨김은 소지의 왼쪽 아래 여백에 쓰며, 그 여백이 모자라면 뒷면에 계속해서 쓰기도 하고 별지를 붙여쓰기도 하였다. 뎨김을 적은 소지는 그 소지를 올린 사람에게 돌려주어 그 판결에 대한 증거자료로서 소중히 보관하도록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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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上書于▣相閤下伏以本州之忠臣孝子不爲不多而或有褒揚而㫌閭者或泯▣▣無傳者姑不可一一枚擧而其中故孝子李止公改名止衖與梁山龍山璹兄弟及柳瑛羅德顯竝爲一代名人爲道內章甫之所薦俱得褒典而李公獨漏而無傳者以其子孫之零替家勢之殘微未能周章之致也豈不爲士林之所可慨惜者乎玆以齊聲臚報伏顚勿以久遠而置之勿以循例而視之 另加垂察而採納焉大抵李公以簪纓世族名宦顯爵連綿累代而其考諱惟誨早登司馬仍廢科業出入奇高峯門下以學行遍經三南諸書院之長而宣廟朝以春坊官累徵不赴混跡山林號稱蒿巖盖李公之至孝有得於庭訓而然也公生才髫齡遭外艱服喪哀毁之禮無異大人之皆稱歎奉母之節盡心竭誠少不離側遠近日益嗟服丁酉島夷之亂三南魚肉父子相失夫妻難保鳥竄鼠伏各自圖生而公負其母氏避入錦城山中城陷之日倭奴遍山殺掠甚急以兵欲害母氏公素病蹇脚蹣跚伏地哀乞代命翼蔽其母身被鋒刃流血淋漓倭奴憐而問之曰汝是何人之垂涕而答曰前兵曹參判李宗仁之曾孫司僕正李止得之弟也倭奴相顧起敬曰祖乃兄曾爲我國之所讐而實是汝國之忠臣汝且至誠救母不避鋒鏑求忠孝門正謂此也乃給米帛又書話孝子給母粮六字令公佩之曰若遇後至者出示之云云而去公奉母還家賊又大至母氏病重不能運步公負而迯避遇賊賊徒引兵擊之公之一肩一足俱斷而猶以身覆其母賊徒一釼俱害嗚呼公之兄止得以司僕小宦剰納天兵粮米一百十二石九斗五升赤豆一石而竟死賊鋒公之從兄止孝以湖西水使竪功立節 贈刑曹判書㫌閭褒忠則一門之內學行忠孝便成箕裘以公之偉行盛孝徒載邑誌將爲百年之泯沒則可謂聖代之欠典更伏願 閤下博採公議轉達 天陛俾蒙節惠之褒則不勝風化之幸甚使道主 處分壬寅二月 日幼學 崔益東 柳漢澤 洪在淵 柳宗魯 崔世赫 金天澤 金相羽崔斗建 羅學臣 鄭來祖 金壹明 李唐 洪千榮 崔光哲張齊甲 李希重 柳希和 崔斗元 金時輔 李希文鄭枰 李景淵 李希發 金昌彦 張齊文 羅漢五 李時培鄭昌祚 李壽五 柳天榮 李希仁 金弼明 李養根李儒聖 高德興 林一夏 李光植 李希薰 金昌元李希赫 柳漢弼 裵碩燦 李國顯 柳德文 李光祚吳敬相 鄭彦宅 等巡使 封?[着押](題辭)卓絶之行以甚義歎從當商量登聞向事卄三[馬牌印] 1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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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3년 이연(李溎) 등 상서(上書) 고문서-소차계장류-소지류 법제-소송/판결/공증-소지류 癸亥八月日 化民幼學李溎 等 43名 城主 癸亥八月日 [1863] 李溎 羅州牧使 使[着押] □…□ 3顆(7.0x7.0) 전남도청(2019년 구입 의병자료) (재)한국학호남진흥원 1863년(철종14)에 이연(李溎) 등 43명이 나주목사(羅州牧使)에게 이지득(李止得)의 충절을 표창해 주길 청하는 상서(上書). 1863년(철종14) 8월에 화민(化民) 유생(儒生) 이연(李溎) 등 43명이 나주목사(羅州牧使)에게 이지득(李止得)의 충절을 표창해 주길 청하며 올린 상서이다. 이 문서에서 이연 등은 자신을 화민(化民)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화민은 자신이 사는 고장의 수령이나 조상의 산소가 있는 고장의 수령에게 일컫는 자칭이다. 나주 유생 43명은 임진왜란 때 의병으로 활약하다 순절한 이지득(李止得)의 충절 사실을 서술하면서 지난달(7월) 20일 사이에 도내 유림들이 순사또(巡使道)에게 상서를 올려 그 처분을 받은 영제(營題)를 점련하여 다시 올리니 이공(李公)의 충절에 대한 포상의 은전이 완결될 수 있도록 요청하는 것이다. 당시 나주목사는 송정희(宋正熙)로 1863년 7월 3일에 제수되어 1864년 4월 12일까지 재임하였다가 파직되고, 6월에 다시 재임되어 1865년 6월까지 근무하였다. 이와 같은 요청에 나주목사는 이공(李公)이 아직까지 포양(褒揚)되지 않은 것은 매우 흠이 되는 일이나 오래된 일이므로 갑자기 전보(轉報)하기가 어렵다는 처분을 내렸다. 이지득(李止得)의 충절 포상을 요청하는 문서는 이 외에도 1781년, 18세기 후반 기계상(奇繼商) 등의 상서가 남아있다. 이지득(李止得, 1555~1594)의 자는 덕보(德甫), 본관은 함평, 함풍군 극명(克明)의 후손이며, 아버지는 이유회(李惟誨)이다. 나주시 다시면 영동리 초동에서 태어났다. 1584년(선조 17) 별천(別薦)으로 겸사복(兼司僕) 내승(內乘)이 되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 임금이 파천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군량을 모아 행재소에 가서 남으로 내려오기를 청하고 돌아왔다. 1594년(선조 27)에 사재를 털어 군량미로 공급하였고, 장경홍(張景弘)ㆍ장경남(張景男) 형제와 의병을 모아 활동하다가 흥양포(興陽浦) 전투에서 순절하였다. 1892년(고종 29) 충신정려(忠臣旌閭)가 내리고 병조참의에 증직되었다. 현재 나주시 다시면 영동리 초동마을에 이지득의 정려각인 포충각(褒忠閣)이 있다. 상서(上書)는 조선시대 민원서(民願書)인 소지류(所志類)로 그 서식은 다른 소지류와 약간 다르다. 이 문서는 관찰사·수령·암행어사 등에게 올리며, 그 내용은 산송(山訟)과 효행(孝行)·탁행(卓行)의 정려(旌閭)를 위한 것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인원이 많은 경우는 연명하여 올리기도 한다. 이 상서는 전래되고 있는 것이 많으며, 시대는 대개 조선 중기 이후에서 말기까지의 것이 대부분이다. 상서를 접수한 관찰사나 수령은 이를 검토하고 그 처분을 문서의 좌편 하단의 여백에 써놓는다. 이것을 제음(題音) 또는 제사(題辭)라 한다. 이와 같이, 처분한 내용을 써서 상서를 올린 사람에게 돌려준다. 그러나 수령에게 1차 올려서 일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2차, 3차 계속 올리며, 그래도 해결되지 않으면 관찰사에게 올리게 된다. 이러한 상서는 당시의 사회사정을 연구하는 데 도움이 되는 자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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道莊面壁池洞居化民朴明煥朴在斗朴亨鎭右謹言伏以民之七代祖監察公墳墓在於大谷面茅山村後麓而所謂禁養編小定限界守護者數百餘年山下村居閔斗用爲名人去乙巳年分偸斫民之限界內松楸是去乙民卽爲呈 官奉 題音將爲捉上則同斗用自知昧法日後更不侵斫之意成手記累累哀乞乙民謂以山下之人姑忍憤鬱而許之矣不意今者同斗用忘手票越限界禁養松楸亦任意斫伐則民之先山無餘地矣數百年守護之心更安在難以私力措處故玆敢仰訴伏乞參商敎是後同斗用捉致 法庭偸斫松楸之罪臆奪限界之罪依律洞繩以爲日後更無如許之弊千萬祝手行下向敎是事城主 處分庚申八月日使[着押](題辭)閔斗用期於捉待事十六日 狀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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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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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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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간통고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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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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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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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5년 오준선(吳駿善) 간찰(簡札) 고문서-서간통고류-서간 개인-생활-서간 乙卯十月二十五日 吳駿善 乙卯十月二十五日 吳駿善 전남도청(2019년 구입 의병자료) (재)한국학호남진흥원 1915년 10월 25일 오준선(吳駿善)이 보내는 간찰. 1915년 10월 25일 오준선(吳駿善)이 보내는 답장편지이다. 편지 내용을 보면 상대방의 아들이 찾아와 편지를 전해주니 위로되고 매우 감사함을 이를 데 없다고 하면서 근래 추위에 건강하시다니 다행이라며 안부인사를 전하였다. 이어서 자신은 하늘에 잘못을 얻어 근래 상을 당해 차마 말 할 수 없는 지경이며 입산의 계획은 단순히 결신(潔身)을 하기 위함이 아니라고 하였다. 또 상대방이 과장(過葬)이라니 도리어 서운함과 부끄러움이 깊고 질병으로 인해 나아가 안부를 살필 수 없어 더욱 송구스럽다는 마음을 전하며 나머지는 어지러움이 심하여 편지를 마친다고 하였다. 오준선(吳駿善, 1851~1931)의 자는 덕행(德行), 호는 후석(後石), 본관은 나주이다. 아버지는 오항규(吳恒圭)이며, 생부는 오하규(吳夏圭)이다. 노사 기정진의 제자로서 방대한 저술을 남긴 한말의 유학자이다. 그는 1910년 망국(亡國) 직후 일제가 양반을 회유하기 위해 지급한 이른바 은사금(恩賜金)을 거부한 것으로 유명하다. 의병에 직접 가담하지는 않았으나 훗날 의병전(義兵傳)을 저술하였다. 1910년 나라가 망하자 성리학적 도와 의리를 지키려는 노선을 지향하였다. 그는 자신의 뜻을 후세에 전하기 위해 용진정사(聳珍精舍)를 짓고서 후학양성에 매진하여 6백여 명의 제자를 배출하였다. 유집으로 ?후석유고(後石遺稿)? 25권 13책이 있는데, 1934년에 간행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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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사(李進士) 간찰피봉(簡札皮封) 고문서-서간통고류-서간 개인-생활-서간 長田謹候書 齋洞 洪都事 李進士宅 洪都事 전남도청(2020년 구입 의병자료) (재)한국학호남진흥원 담양 장전의 李進士宅에서 洪都事에게 보낸 간찰의 피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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舍弟奉今初吉淵洞去書卽到否栢洞族叔繼卽下去則諸般此中事伏聞之矣春又晩鄕思尤自不禁也卽日慈候無損省狀安過諸節俱無故耶惠需憧憧舍兄旅節依前而梁奇兩兄尙今同處可叔氏亦安耳永珍日前入來卽見而卜軍尙不來到故無傳書而今明間入到云矣永珍處所付條貳首云卽覓而果如是耶亦爲害也換錢事未知卽尋於諸處耶過期不來南望苦待使人難堪客況甚苦其間發程在道耶尙未發耶大二首自此區處而三者無欠則亦自此區劃計而每鄭氏邊爲言而無一毫私情甚是薄俗此事究竟後卽爲下去過夏于家爲料矣今番出脚都無好況不利奈何龍國兄下去云故付此數字傳于龍臺則卽抵云故忙草如是何日入抵耶不拕長辛卯三月卄六日舍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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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1년 이승학(李承鶴) 간찰(簡札) 고문서-서간통고류-서간 개인-생활-서간 辛卯五月卄日 舍兄 寄舍弟 辛卯五月卄日 李承鶴 舍弟 전남도청(2020년 구입 의병자료) (재)한국학호남진흥원 1891년에 이승학(李承鶴)이 동생에게 안부와 과거를 준비하는 서울의 생활에 대해 전한 내용의 간찰. 1891년 5월에 이승학(李承鶴)이 동생에게 보낸 간찰이다. 동생은 이승학이 서울에 있는 동안 집안일을 맡고 있었던 동생 이승구(李承龜, 1860~1942)를 지칭한 듯하다. 이승학은 편지 머리에서 편지의 전달 여부를 전했다. 광주(光州)의 인편에 편지를 보냈는데 담양(潭陽) 백동(栢洞)의 족숙(族叔)으로 마침 편지가 도착했다며 기쁜 심정을 드러냈다. 이어 가족들의 안부를 물으면서 아들 광수(光秀)의 공부를 점검했다. 편지는 이승학의 서울살이로 이어진다. 과거 시험을 준비하며 지루하고 고통스럽게 보내는 생활과 과거 날짜 등을 자세히 전하는 모습이 눈에 띈다. 또 편지에 정형(鄭兄)이나 김희안(金喜晏) 등 이승학과 관련된 인물들에 대해 언급하면서 이승학이 동생에게 자세한 본인의 상황을 알려 주고 있는데, 이러한 점에서 이승학 형제간의 깊은 관계를 짐작할 수 있다. 그리고 편지 말미에 남은 얘기는 별지(別紙)에 썼다고 했는데, 본 편지에서도 제법 길게 얘기했는데도 또 자세히 얘기했다는 점에서 이승학이 집안일을 상세히 단속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승학(1857∼1928)은 양녕대군(讓寧大君)의 후손이며, 전남 담양(潭陽) 장전리(長田里)에서 출생하였다. 아버지는 기정진(奇正鎭)의 문인인 진사 이최선(李最善)이고, 이승학 본인도 기정진의 문하에서 배웠다. 을미사변(乙未事變) 때 팔도에 격문을 보내어 의병을 일으키기도 했다. 문집으로 ?청고집(靑皋集)? 4권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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寄兒書欲作家書意萬重古人先知否數旬來大聲免何奇室與林叔俱蘇耶更無繼痛否父在道以是爲慮而已路中事同行甚多無事抵達而自靑陽等地逶路他書必詳矣吾門大事初不出吾料而已與諸公畫宵相確者此也桃台終難挑却入京日齊進相議外若專恃而冷落莫甚至再至三然後庶有解惑之望事若自此解得則甚無事而且不知末梢如何但行中所畏者異日生硬也台來聞則近日有奉專管勑旨云而究其裏面則卽未安之敎也北邨所聞也宗正院卿時始通謁而近封完順君酬酌之隥如前冀想必自桃洞有通矣請見文蹟已有宿諾而不卽尋覓未知何故也然自桃洞上言則吾常上聞云云姑不知裏許也行中之議每多相左甚是可慮且各派人尙無來到果川則數員來修人事而已意其中不無武備細作者人心果難測而桃台指吾爲首魁云云傍人亦有怵之以禍福然吾爲吾事未嘗有所動矣大抵伸雪與否亦云在天果川派聞有家乘分間以此就疑面質則無是云云矣今旬墓祀日則各派必來而常有作定辦斷矣右說皆先見而言也吾行遲逮姑不指的家中事須與汝諸父十分着念勿至狼狽也此中朝夕待食姑無見憂然本自手赤而來些用頗艱且名錢中百餘金按常心來畢境自此區別則此數家中常預備而待之可也見今無可措手苐待水到渠來初無他下北山條妥帖否昌倅終如前執一難必奈何竹田下手否爲先計推過收捧花租勿失時鄭門數次進拜而姑不聞明言見今昨色薰門耳光述在攄以便上書而逢其京主聞其搬移定山果然而今月內爲之云耳沙曲姑不去而日間將爲之計眩甚不一一己亥陽月二日父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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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0년 이승학(李承鶴) 간찰(簡札) 고문서-서간통고류-서간 개인-생활-서간 庚子至月卄七日 父 庚子至月卄七日 李承鶴 李光秀 전남도청(2020년 구입 의병자료) (재)한국학호남진흥원 1900년 11월에 이승학(李承鶴)이 아들 이광수(李光秀)에게 편지 전달의 문제를 상세히 알리고 여러 가지 소식 등을 전한 내용의 간찰. 1900년 11월에 이승학(李承鶴)이 아들 이광수(李光秀)에게 편지 전달의 문제를 상세히 알리고 여러 가지 소식 등을 전한 내용의 편지이다. 편지 상단에는 최근 오고 간 편지를 확인하고 그동안 잘못 전달되거나 위작(僞作) 편지가 왔다는 내용 등을 자세히 적었다. 이달 십 일 사이에 우체국으로 보낸 편지는 받았는지, 근래에는 다른 편지를 쓴 적이 없는지 묻고, 지난번에 네가 그믐쯤에 편지를 보냈다고 하는데 아직 오지 않았다는 말을 전했다. 또 본군(本郡)의 수리(首吏, 향리의 우두머리) 편에 윤달 8월에 편지를 보냈는데 9월에 보았느냐고 묻고 그 편지 이후 9월에 편지를 보냈는데 부쳤다는 말은 들었으나 답장을 보지 못했다는 말을 하였다. 이렇듯 편지의 전달이 문제가 계속되자 이승학은 편지 전달자로 보이는 경홍(景弘)을 만나 그 연유를 물어 확인하여 편지가 잘못 전달되고 있다는 것을 확인했다고 알렸다. 소산(小山) 측으로 보낸 편지와 백동(栢洞) 편으로 보낸 편지에 대한 답장도 문제가 생겼다고 하면서 중간에 다른 곡절이 있었는지 아니면 아들이 잘못하여 그렇게 된 것인지를 확인하면서 믿을 만한 곳으로 보내야 한다고 당부했다. 게다가 경지(敬之) 편으로 보내온 답장은 봉투가 열린 채 왔고, 월평(月坪)의 김장수(金長水)가 전해준 편지는 위작(僞作)이었다고 탄식했다. 이 편지를 보면 일부는 아들의 필적이 맞으나 다른 사람의 필적이 들어있다고 하면서 어떻게 이런 일이 발생했는지 모르겠다고 하며 아들의 부주의함을 탓하였다. 이승학은 아들이 세인(世人)들의 구설을 받고 있지 않은지 걱정하기도 하면서 '아들에 대해서는 아버지가 가장 잘 안다'는 말이 있는데 어떻게 아들을 다 알 수 있겠느냐며 걱정하는 한편, 인심이 효박(淆薄)하고 변괴(變怪)가 여러 가지로 발생한다고 하며 윤리와 강상(綱常)이 무너지고 있는 현실을 통탄하기도 했다. 또 연평(延平) 이귀(李貴)와 연양(延陽) 이시백(李時白) 부자(父子)의 예와 같이 서로를 알아주는 부자지간이 되기를 기약해야 한다고 당부했다. 이어 그간 이승학이 겪은 여러 가지 소식을 전했다. 본관(本官)이 행한 수접례(酬接禮)와 회사례(回謝禮)에서 겪은 일, 남찰(南察)이 갑자기 떠나 작별하지 못했다는 내용, 새로 부임한 관찰사(觀察使)가 그믐 전에 영(營)에 간다고 하는데 혹시 찾아뵐지 묻는 내용, 난세에서 영달(榮達)을 구하는 것보다는 성명(性命)을 온전히 하는 일이 우선이라는 내용, 문중의 일은 대종(大宗)에서 맡아 할 것이라는 내용, 서당계(書堂契)가 문제가 많으니 차라리 분파(分破)하는 것이 낫다는 내용 등 이승학에게 있었던 일과 당부할 일을 낱낱이 알렸다. 또 위정척사(衛正斥邪) 의식을 지닌 인물 등의 근황을 전한 내용도 확인된다. 여름에 사문(斯文) 박정수(朴貞洙)가 의암(義庵) 유인석(柳麟錫)이 지은 서찰을 보여 주었다고 전했다. 유인석은 요동(遼東)에서 ?동국풍화록(東國風化錄)?을 지어 발행할 계획이라고 하였는데, 이승학은 그 책에서 충(忠), 효(孝), 열(烈), 도덕(道德), 절의(節義), 사업(事業)의 내용을 다루는 것은 좋지만 지나치게 방대하게 하면 마무리가 잘 될지 걱정이고 이를 따르는 자가 있을지 우려된다고 밝혔다. 또 호서(湖西)의 송병직(宋秉稷)이 ?존화록(尊華錄)?을 엮는다고 했는데, 일전에 평동(平洞) 대감의 친척인 무주(茂朱) 이승덕(李承德)이 3책을 가지고 왔다고 전했다. 아들 이광수가 준비하는 과거 시험에 관한 내용이 보인다. 이광수는 1901년 경의문대(經義問對)로 선발되어 성균관(成均館) 박사(博士)가 되었다. 경의문대는 갑오개혁 이후로 만든 시험 제도로, 성균관 대사성이 문제를 내어 각 도(道)에 하달함으로써 관찰사로 하여금 전국의 유생에게 그에 대한 문대(問對)를 해 올리도록 하고, 그중에서 일정한 수를 뽑아 한성에 소집하여 재차 시험을 치고 최종 합격자에게 직함을 주는 제도이다. 이승학은 편지에서 시험이 아직도 미뤄지고 있느냐고 걱정하면서도 만일 성균관 박사가 된다면 제왕묘(帝王庙)를 청하는 상소를 올리라고 요청하면서 합격에 대한 믿음을 드러내기도 했다. 또 시험을 통과해 관리가 되었을 때 처신할 도리에 대한 조언도 덧붙였다. 당시 이승학의 시대 인식을 볼 수 있는 구절도 편지에서 확인된다. 이승학은 이 세상에 살면서 당대의 일을 알지 못하는 것은 농아(聾啞)와 같다고 하며 현실문제에 관심을 기울이라고 하였다. 지금 해외 신문을 보면 괴탄(怪誕)하다고 하며 그 대략을 보면 남북(南北)의 풍속이 다르고 동서가 숭상하는 것이 다르다고 하였다. 지금 서울 상황은 이러한 모습들이라고 하면서 아들에게 외물(外物)에 끌려 다니지 않도록 하고 때에 맞게 성찰하도록 당부했다. 이 외에도 문중 사람들과 관련된 일이나 편지의 전달 여부 등을 적은 내용이 상세히 적혀 있다. 남평(南平)에서 돈을 빌려 달라고 요구하였으나 이는 공전(公錢)이기 때문에 난감하다는 내용, 소산(小山)의 일은 마치 땅에 떨어진 지푸라기를 줍는 것처럼 쉬운 일인데도 어찌 이렇게 늦어지고 있는지 알 수 없다고 아쉬움을 토로한 내용, 영변찰(寜邊察) 쪽으로 편지를 썼는지, 경재(耕齋) 집안으로 자주 편지를 보내고 있는지, 완순군(完順君) 이재완(李載完)에게 신경을 쓰고 있는지 확인한 내용 등이 보인다. 또 족보의 판각 여부를 묻고 족보를 부록(簿錄)할 수 있으면 적어서 알려달라고 한 내용, 150냥에 대한 것은 장수 집안과 의견이 다르다고 내용, 이씨(李氏) 친우 편으로 편지를 부친다는 내용 등이 실렸다. 이승학(1857∼1928)의 본관은 전주(全州)로, 양녕대군(讓寧大君)의 후손이며, 자는 자화(子和), 호는 청고(靑皋)이다. 전남 담양(潭陽) 장전리(長田里)에서 출생하였다. 아버지는 기정진(奇正鎭)의 문인인 진사 이최선(李最善)이고, 이승학 본인도 기정진의 문하에서 배웠다. 을미사변(乙未事變) 때 팔도에 격문을 보내어 의병을 일으키기도 했다. 문집으로 ?청고집(靑皋集)? 4권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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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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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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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간통고류

1899년 이승학(李承鶴) 간찰(簡札) 4 고문서-서간통고류-서간 개인-생활-서간 己亥陽月二日 父 寄家兒 己亥陽月二日 李承鶴 [李光秀] 전남도청(2020년 구입 의병자료) (재)한국학호남진흥원 ?고종실록(高宗實錄)? 전주이씨추성수파중중 편, ?전주이씨추성수파보(全州李氏秋城守派譜)?, 낭주인쇄사, 1990 이승학, ?청고집(靑皐集)? 1899년 10월에 이승학(李承鶴)이 아들 이광수(李光秀)에게 ?선원보(璿源譜)? 편찬과 관련된 문중 일과 집안일에 대한 당부를 전한 내용의 간찰. 1899년 10월에 이승학(李承鶴)이 아들 이광수(李光秀)에게 ?선원보(璿源譜)? 편찬과 관련된 문중 일과 집안일에 대한 당부를 전한 내용의 편지이다. 집안에 편지를 쓰려는 마음은 간절한데 그러지 못하고 있다는 말로 편지를 열고, 집안 식구들의 안부를 두루 물었다. 특히 기씨(奇氏)에게 시집간 딸과 임씨(林氏)에게 시집간 누이의 건강을 물어 확인한 것이 눈에 띈다. 이어 이승학은 자신의 안부와 현재 진행되고 있는 ?선원보?와 관련된 문중 문제를 자세히 전했다. 자신은 객지에서 지내고 있으나 동행하는 사람이 많아 무사하다고 하며 이번 행차와 관련된 내용을 상세히 적었다. 문중 일은 애초에 나의 짐작대로 되지 않았지만 이미 문중 어른들과 밤낮으로 상의하여 확정했는데, 도동(桃洞) 대감과 의견이 일치를 보지 않아 우선 서울로 가서 문중 사람들과 상의한 후에나 의혹이 풀릴 것이라고 하였다. 만일 그때 의혹이 풀린다면 별 탈이 없겠지만 과연 어떻게 결말이 날는지는 알 수 없다고 걱정했다. 또 근래 ?선원보? 담당자로 완순군(完順君) 종정원경(宗正院卿) 이재완(李載完)이 정해졌는데, 이 사람을 통해 수작(酬酌)해 볼 수 있겠다고 하였다. 이외에 족보와 관련하여 여러 가지 의견이 분분한 상황 등을 상세히 전함으로써 가문 일에 대해 아들이 알도록 하였다. 이승학이 언급한 문중 일은 ?선원보? 편찬에서 빚어진 계승문제를 말한 것으로 보인다. 당시 고종의 명으로 왕실 족보를 만들게 되었는데, 이재완(李載完)이 주도하였다. 이때 이승학 가문이 속한 양녕 대군(讓寧大君) 계열의 예민한 문제가 대두되었다. 이미 만들어진 ?선원가현록(璿源加現錄)?에서 양녕 대군 이제(李禔)의 아래에 '순성군(順城君) 이개(李?)의 첩(妾)의 맏아들 오천군(烏川君) 이사종(李嗣宗)'이라고 기재되어 있고, ?선원속보(璿源續譜)?에는 오천군 이사종의 기사 옆에 주석(註釋)을 달기를, '어머니인 연일 정씨(延日鄭氏)는 참의(參議) 정종성(鄭宗誠)의 서녀(庶女)이다.'라고 기재되어 있다는 것이다. 오천군 후손들은 나라의 문헌과 개인 문헌들을 통해 연일 정씨가 서녀라는 사실은 잘못된 것이라고 주장했다. 정종성의 아들 정보(鄭保)가 사육신 사건에 연루되어 온 집안이 모두 반역자로 몰리자 순성군의 처도 첩으로 강등(降等)되었다는 것이다. 옛 ?선원록(璿源錄)』에 순성군이 연일 정씨에게 정식으로 장가들었으며, 또 순성군은 첫 부인 신씨(申氏)와 같은 산기슭에 따로 장사지내고, 후실인 정씨는 순성군과 함께 나란히 쌍무덤으로 장사지냈다고 씌어 있으니 정씨가 순성군의 첩이 아니라는 것은 의심할 바 없다는 것이다. 때문에 연일 정씨 소생인 오천군이 정식 계승자임은 의심할 바가 없음을 분명히 하고자 했다. 이승학을 포함한 양녕 대군 계열 사람들은 연일 정씨가 정식 처(妻)라는 것을 분명히 하여 문중의 정체성을 분명히 하고자 한 것으로 보인다. 편지 하단에는 세세한 집안일에 대한 당부가 실렸다. 본인은 언제 집에 돌아갈지 알 수 없으니 제부(諸父)들과 상의하여 처리하여 낭패가 없도록 하라는 말을 시작으로, 명전(名錢)을 구할 방도에 관한 내용, 창평(昌平) 수령에 관한 내용, 죽전(竹田) 문제, 정씨(鄭氏)가에 관한 일, 경주인(京主人)에 관해 묻는 내용 등을 두루 묻고 당부했다. 이승학(1857∼1928)의 본관은 전주(全州)로, 양녕대군(讓寧大君)의 후손이며, 자는 자화(子和), 호는 청고(靑皋)이다. 전남 담양(潭陽) 장전리(長田里)에서 출생하였다. 아버지는 기정진(奇正鎭)의 문인인 진사 이최선(李最善)이고, 이승학 본인도 기정진의 문하에서 배웠다. 을미사변(乙未事變) 때 팔도에 격문을 보내어 의병을 일으키기도 했다. 문집으로 ?청고집(靑皋集)? 4권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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敬之來槪聞月初信□初去亦知此信矣旬間郵局付書計日可抵得見否近無他付字耶順道而見此晦更發云而更不來矣本郡首吏處閏八付來書九月念間得見其後九月之去又聞有付書云而終不得見今念間本官回謝時見景弘問其由則初若徜怳終云不持來此何故也其時小山則有傳書而汝不及知耶抑有中間委折耶大抵書尺往來審其信實而傳之可也汝不知昨冬吾自京付栢洞書終不得見而中間搔匿乎近者敬之便書雖無緊說話亦開見傳之可怪也人心之多岐也月坪金長水近又抵書于吾橫說竪說皆云汝之常報而又幷裹汝之九月間書送來開見則原幅是汝之筆而但道在京源源與別離之懷而已所謂下方非汝之手跡而不知何人造此僞跡添入於其中也見此則吾心已爽然而非汝之所用明矣然汝何不知中間有此委折而使此汝父之病困者坐受一時憂慮也此則汝之不明也所謂夾錄曰侍下人事恐其有知於本家貽憂于親堂云云則是豈汝之所言乎非汝之所爲吾已知之且驗筆跡與紙樣與原幅相去遠矣吾答以此由且汝書還送使之藏棄雖有卞官當以此相質云云矣都不知誰所作奸而汝則在其間徒取世人之許多唇舌是可歎憤語曰知子莫如父然吾安能知汝也今之世人心淆薄變怪百出不知倫綱爲何等事者在在然矣此所爲夷狄禽獸之域而世不可爲矣然吾於汝應有所見者故勸汝出世矣我國之前賢李延陽獨稱父子知己可謂五百年來惟一而已所以見稱於世矣今吾雖不以此望於汝汝以此自期則吾家其庶幾乎然延平延陽亦何嘗規矩中人也本官來此酬接禮卑辭遜莫此爲甚而及其念間回謝傲禮冷落醴亦不設可知張倉之沮之也南察忽此遞歸昨聞發去而未及作別矣新察晦前上營云或圖進拜耶雖不欲求聞達於諸候苟全惟命於亂世之道亦復奈何門事已爲究結自大門專辦書堂契破碎皆從一邊之願也究厥裏許沒風色豈有如此之甚者大略亦爲之何爲也以楚越肝膽欲作盟誓得乎不如分破之爲逾故耳到今尙以我作服中釘此亦沮戱之一端然吾何求於平原吾何畏彼而乞援也猶恐自强不得而氣色甚慘憺耳夫以今年事論之彼不知根本之祖先而安知枝葉之宗族乎以此推之都無事矣今月病臥客擾轉甚良苦夏間原州朴斯文貞洙持毅菴簡通來傳見在遼上欲爲東國風化錄而發也凡係忠孝烈道德節義事業皆可收入而但此事浩大終不得成又無肯從者耳因朴斯文聞湖西宋斯文秉稷方主尊華錄成冊云云日昨茂朱李斯文承德持三冊來傳其人則平洞台至親其書則自勝國至今凡尊華儒道文字近世義筆始末犂然載錄矣又有請助于門中貳拾兩文區處耳合試間已爲之否尙此遷延乎果如來書而無疑則不得不觀其結梢而此亦鷄肋去留兩難而限歲期於歸家爲料焉博士若爲之則請建帝王庙疏呈納可也旣許身於國而發靷之初苐一舛立論莫如此等之明白着在肚裏諸宰之可不可有不足計較也生此處不識當今之務亦與聾啞一般而今之海外新聞徒是怪誕不經喪吾聰明而已知不知無足關重但驗擧槪南北殊俗東西異尙可也見今洛下滿目皆是汝能久留此免於外物之誘否時時省察焉南平請貸近因達中回見書則此皆公錢歲內還報則許給云云吾豈請貸公錢耶春間狼狽從可知矣如此先諾後悔者是豈道理從今吾欲結舌而亦甚歎恨而已小山事如拾地芥何至此緩云耶寜邊察許又上書否汝旣受知深盡吾誠可矣耕齋家數數付書否完順君前向書必意其吾使汝爲之樣到今思之不諒多矣頻接如前否平洞數進否長水家云云夾錄誰所爲探之區處焉此月不甚寒爲汝旅況幸矣常念加護也譜事今至登板乎亦過支離留京日簿錄爲之乎自汝入京凡得用於譜所者幾許亦錄示焉長水家春間條一百五十兩汝云加計錢而彼云邊錢亦相左何也東里李友今在付此庚子至月卄七日父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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