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최선(李最善) 묘갈명(墓碣銘) 고문서-시문류-묘문 개인-전기-묘문 전남도청(2020년 구입 의병자료) (재)한국학호남진흥원 이건창(李建昌)이 저술한 한 말 유학자 석전(石田) 이최선(李最善)의 묘갈명(墓碣銘). 이건창(李建昌)이 저술한 한 말 유학자 석전(石田) 이최선(李最善)의 묘갈명(墓碣銘)이다. 묘갈명 첫머리에는 철종(哲宗) 말기에 석전(石田, 1825~1883) 선생이 상소(上疏)로 삼정책(三政策)을 진달(陳達)한 배경과 그 삼정책의 대략적인 내용이 소개되었다. 그 대략은 '정치는 스스로 행해지는 것이 아니라 인재를 얻어 행하는 것'이라고 하며 인재 선발의 중요성을 강조한 내용이 나온다. 그러나 이 상소를 본 담양부사(潭陽府使)가 문장에 꺼리는 기색이 없다고 하여 올리지 않자, 선비들이 삼정책을 아무도 알지 못했다는 내용도 함께 실었다. 이어 이건창은 양이(洋夷)가 침입해온 1866년 병인양요가 발생하자 석전 선생께서 호남의 종친들에게 격문을 돌려 의병을 모아 서울에 도착한 내용 등을 언급하며 도(道)에 마땅하고 시(時)에 걸맞다고 칭찬했다. 이어 석전 선생의 성품을 기술하면서 '뜻이 크고 기개가 있으면서 기지(氣智)롭다'고 하며 친부(親父)의 면례(緬禮) 때 향리(鄕吏)와 묘소 문제를 슬기롭게 처리한 일화를 상세히 소개했다. 또 석전의 인품을 알 수 있는 몇 개의 일화 등을 덧붙였다. 묘갈명 중간에 이건창이 석전 선생의 묘갈명을 짓게 된 배경이 나온다. 석전의 아들 이승학(李承鶴)이 가장(家狀)을 가지고 와서 이건창에게 묘갈명을 부탁하였는데, 가장에 석전의 효성과 경사(敬師)로부터 고아와 과부를 두루 보살펴주는 일에까지 자세히 기록되어 있었다고 칭찬한 내용이 나온다. 이건창은 이 가장을 바탕으로 묘갈명을 작성했던 것으로 보인다. 묘갈명은 석전의 사승 관계로 이어진다. 호남(湖南)은 노사(蘆沙) 기정진(奇正鎭) 선생으로 인해 학문이 번창했는데 석전이 노사 선생을 40여 년 동안 예율(禮律)로써 스승을 모셨으며, 스승도 석전을 매우 중히 여겼다고 기술했다. 이어 석전 선생의 가계를 소개하였다. 양녕대군(讓寧大君)의 증손인 이산부정(伊山副正) 사성(嗣盛)의 제3자인 추성수(秋城守) 이서(李緖)가 담양에 입향(入鄕) 하면서 세거(世居)했다는 것과 석전의 증조(曾祖)에서 자손 대에 이르기까지 낱낱이 실었다. 석전 선생이 관직 이력과 묘소, 명문(銘文)을 넣어 묘갈명을 끝마쳤다. 석전 이최선의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낙유(樂裕), 호는 석전경인(石田耕人)이다. 1838년 기정진(奇正鎭)의 문하에 들어가 수학하였다. 1858년 증광시에 급제하였으며, 1861년 삼정(三政)에 관한 구언(求言)이 있어 「삼정책(三政策)」을 지어 올렸으나, 조정에 전달되지 못하였다. 1873년 문과에 응시하였으나 과거의 폐단을 보고 출사(出仕)를 단념하였다. 기정진의 주리설(主理說)을 계승하여 척사위정(斥邪爲政)의 정신에 투철하였으며, 조선왕조의 정통성을 옹호하고 외세를 철저하게 배격하였다. 문집으로 ?석전집(石田集)? 4권 2책이 있다. 이건창(李建昌, 1852~1898)의 본관은 전주(全州)로, 조선 2대 왕인 정종의 아들인 덕천군(德泉君)의 후손이며, 병인양요(丙寅洋擾) 때 순절한 이시원(李是遠)의 손자이다. 자는 봉조(鳳朝), 호는 영재(寧齋), 명미당(明美堂)이다. 1866년 별시 문과(別試文科)에 급제하였다. 1874년에 서장관(書狀官)으로 청(淸)나라에 가서 여러 문장가와 교유하여 문장으로 이름을 떨쳤고, 강위(姜瑋) · 김택영(金澤榮) · 황현(黃玹) 등과 교분이 두터웠다. 충청우도 암행어사(忠淸右道暗行御史), 승지 등의 벼슬을 했으며, 1896년 해주부 관찰사에 제수되었으나 사양하다가 고군산도로 유배되었다. 그 뒤 고향인 강화에 내려가서 서울과는 발길을 끊고 지내다가 2년 뒤에 47세로 세상을 떠났다. 대표적인 저술로 ?당의통략(黨議通略)?이 있으며, 문집으로 ?명미당집(明美堂集)?을 남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