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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22년 광주목(光州牧) 입안(立案) 고문서-증빙류-입안 법제-소송/판결/공증-입안 天啓二年三月初吳日 牧使 守直僧 太令智 天啓二年三月初吳日 光州牧使 太令智 牧使[着押] 光州牧之印 3顆(7.0x7.0) 전남도청(2019년 구입 의병자료) (재)한국학호남진흥원 1622년 3월에 광주목사가 포충사(褒忠祠) 수직승(守直僧) 태령지(太令智)에게 발급해 준 입안(立案). 1622년(광해군 14) 3월 초5일에 광주목사가 포충사(褒忠祠) 수직승(守直僧) 태령지(太令智)에게 발급해 준 입안(立案)이다. 입안에 따르면 광주목사는 포충사 수직승 태령지에게 본 고을의 승역(僧役) 및 기타 잡역을 영구히 면제해 주도록 하는 입안을 발급해 주었다. 당시 광주목사는 박유장(朴有章)으로 1622년부터 1623년까지 근무하였다. 이 밖에 포충사와 관련하여 1614년 광주목 입안, 1627년 광산현 입안, 1633년 토지매매명문이 있다. 포충사는 의병장 고경명(高敬命, 1533~1592)과 고종후(高從厚, 1554~1593)·고인후(高因厚, 1561~1592) 3부자와 유팽로(柳彭老, 1544~1592), 안영(安瑛, 1564∼1592) 등 5위를 배향한 사우이다. 1601년(선조 34) 호남 유생들이 광주 제봉산(霽峯山) 아래에 사당을 건립했고, 1603년(선조 36)에 박지효(朴之孝) 등 문인과 후손들이 사액을 청해 '포충(褒忠)'이란 액호를 받았다. 포충사는 사액 사당으로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의 서원 철폐 때에도 장성의 필암서원과 함께 훼철되지 않았던 사우이다. 입안(立案)은 관에서 발급한 일종의 공증서(公證書)이다. 조선시대에는 가옥이나 토지 및 노비 등을 매매하거나 양자(養子)를 들일 때 원칙상 관에 신고하여 공증을 받아야 했는데 이때 관에서 발급한 공증서가 바로 입안이다. 이외에 효자와 열녀 및 충신에게 정려를 내어줄 때 그리고 백성들이 청원한 사실을 공증해 줄 때에도 이를 발급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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天啓二年三月初五日立案右立案爲勿侵事褒忠祠守直僧太令智▣等乙本鄕僧役及其他雜役永永減除爲遣後考次以合行立案者牧師[着押][光州牧之印] 3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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萬曆四十二年八月二十一日光州牧立案右立案相考事節呈鄕校堂長有司牌呈內節該經亂以後校中書籍板蕩他無辦出之際本鄕僧法融依他例願納冊紙九十卷爲有去等本鄕僧役及僧軍抄發等事乙一切減除次以立案成給爲白只爲文報是沙餘良況旀同僧法融亦方住褒忠祠側書齋是如爲昆惟是褒忠祠自上賜額之地分叱不喩同祠無一口奴婢仍于守護灑掃之事乙專委於法融爲有去等本鄕僧一應之役及僧軍抄發等事寺刹除役乙幷以蠲除爲去乎如或有意外侵責之患爲去等持此立案這這告官向事合行立案者行牧師[着押][光州牧之印] 5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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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27년 광산현(光山縣) 입안(立案) 고문서-증빙류-입안 법제-소송/판결/공증-입안 天啓七年八月日 光山縣 [褒忠詞書院] 天啓七年八月日 光山縣 [褒忠詞書院] 行官[着押] 光州牧之印5顆(7.0x7.0) 전남도청(2019년 구입 의병자료) (재)한국학호남진흥원 1627년 8월에 광산현(光山縣)에서 발급한 입안(立案). 1627년(인조 5) 8월에 광산현(光山縣)에서 발급한 입안(立案)이다. 입안 내용에 따르면 광산현감은 친족간에 일어난 토지분규에 대해 이미 결급하였으나 소송대상자인 양녀(良女) 수금(守今)과 말덕(唜德)이 모두 이 판결에 대해 부당하다고 말하므로 소송의 대상 토지인 정회(丁會) 몫의 전답 7곳을 법에 따라 속공(屬公)하여 포충사 서원(褒忠祠書院)에 영구히 소속되도록 하는 입안을 발급하였다. 포충사에 속공된 토지는 논 16두락(斗落) 37복(卜), 밭 16두락(斗落) 43복(卜)이다. 문서의 작성지인 광산현은 원래 광주목(光州牧)이었으나 인조대 불미스러운 일로 인해 일시적으로 광산현으로 강등되었다. 당시 광산현감은 이유달(李惟達)로 1626년부터 1630년까지 근무하였다. 이 밖에 포충사 관련한 문서로는 1614년 광주목 입안, 1622년 광주목 입안, 1633년 토지매매명문이 있다. 포충사는 의병장 고경명(高敬命, 1533~1592)과 고종후(高從厚, 1554~1593)·고인후(高因厚, 1561~1592) 3부자와 유팽로(柳彭老, 1544~1592), 안영(安瑛, 1564∼1592) 등 5위를 배향한 사우이다. 1601년(선조 34) 호남 유생들이 광주 제봉산(霽峯山) 아래에 사당을 건립했고, 1603년(선조 36)에 박지효(朴之孝) 등 문인과 후손들이 사액을 청해 '포충(褒忠)'이란 액호를 받았다. 포충사는 사액 사당으로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의 서원 철폐 때에도 장성의 필암서원과 함께 훼철되지 않았던 사우이다. 입안(立案)은 관에서 발급한 일종의 공증서(公證書)이다. 조선시대에는 가옥이나 토지 및 노비 등을 매매하거나 양자(養子)를 들일 때 원칙상 관에 신고하여 공증을 받아야 했는데 이때 관에서 발급한 공증서가 바로 입안이다. 이외에 효자와 열녀 및 충신에게 정려를 내어줄 때 그리고 백성들이 청원한 사실을 공증해 줄 때에도 이를 발급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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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5년 김치홍(金致弘) 준호구(準戶口) 고문서-증빙류-호적 사회-인구/호적-호적 乙酉式 幼學 金致弘 牧使 乙酉式 金致弘 羅州牧 牧使[押] 周挾無改印(흑색, 21.3×5.9), □…□(7.5×7.5) 전남도청(2020년 구입 의병자료) (재)한국학호남진흥원 HIKS_C001_02_A00007_001 1885년에 金致弘(72세)이 羅州牧에 제출한 準戶口. *가족사항 : 妻 晉州河氏(72세) *추기: 九統一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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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8년 김치홍(金致弘) 준호구(準戶口) 고문서-증빙류-호적 사회-인구/호적-호적 戊子式 幼學 金致弘 牧使 戊子式 金致弘 羅州牧 牧使[押] 周挾無改印(흑색, 21.0×5.9), □…□(7.5×7.5) 전남도청(2020년 구입 의병자료) (재)한국학호남진흥원 HIKS_C001_02_A00007_001 1888년에 金致弘(75세)이 羅州牧에 제출한 準戶口. *가족사항 : 妻 晉州河氏(75세) *추기: 二十七統五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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天啓七年八月日光山縣立案右立案爲屬公事節到付縣接良女守今使議送據良女唜德果相訟爲如乎田畓幷七庫所必于守今曾祖父梁柳守已於是喩良置其矣祖母延玉其婦丁會等多人乙已爲分衿爲有如何丁會身(然)後其父柳守率養其姪女唜德丁會已於傳係云則在家一一爲從祖父衿付田畓而難可應推是探唜德段置梁叔家姪女以一家同居事段一族等皆云其的實爲良置傳係文記失火稱云只納一丈立案而所不氣論其梁家傳得辭說何可段信乎永葬祭祀時設或看護是如爲良置同居姪女永非分外之事而況一族朴之則等招也所示分明見甚是如言說爲去等更何可以此決給乎從祖父相訟間已於以家今旣不當決給而異文奏侍養田畓乙唜德又不當應得則兩邊旨爲不當爲案以上項丁會衿付田畓幷七庫段依法屬公爲良結報使書目內依所報施行向事回送是乎等用良同田畓庫如後錄褒忠祠書院良中永爲屬公爲遣復禁▣...以合行立案者行官[着押]後丁會衿付屬公食字畓九斗落只十七卜六束又卞 秃山別字畓三斗落只九卜七束同字畓二斗落只六卜三束代字畓一斗落只三卜四束闕字田八斗落只二十六卜九束 所書玉字田三斗落只十二卜七束化字田五升落只三卜四束 示九山印 已上七庫[官印 5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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戊子式第一戶幼學金致弘年七十五甲戌本金海父學生 允儉祖學生 鳳垕曾祖學生 重哲外祖學生 鄭致成 本慶州妻河氏齡六十六甲戌 籍晉州父學生 順三祖學生 文淑曾祖學生 良海外祖學生 金尙玉本金海賤口奴元禮故牧使[着押][周挾無改印] 1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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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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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1년 김치홍(金致弘) 준호구(準戶口) 고문서-증빙류-호적 사회-인구/호적-호적 辛卯式 幼學 金致弘 牧使 辛卯式 金致弘 羅州牧 牧使[押] 周挾無改印(흑색, 21.3×5.9), □…□(7.5×7.5) 전남도청(2020년 구입 의병자료) (재)한국학호남진흥원 HIKS_C001_02_A00007_001 1891년에 金致弘(78세)이 羅州牧에 제출한 準戶口. *가족사항 : 妻 晉州河氏(78세) *추기: 二十九統五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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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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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빙류

辛卯式第 一戶幼學金致弘年七十五甲戌本金海父學生 允儉祖學生 鳳垕曾祖學生 重哲外助學生 鄭致成 本慶州妻河氏齡六十六甲戌 籍晉州父學生 順三祖學生 文淑曾祖學生 良海外祖學生 金尙玉 本金海賤口奴元禮故牧使[着押][周挾無改印] 1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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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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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문류

무술년(戊戌年) 박해룡(朴海龍) 모숭재기(慕崇齋記) 고문서-시문류-기 교육/문화-문학/저술-기 戊戌二月淸明節 朴海龍 戊戌二月淸明節 [1958] 전남도청(2019년 구입 의병자료) (재)한국학호남진흥원 무술년 2월에 박해룡(朴海龍)이 쓴 김해김씨 묘재(墓齋) 모숭재(慕崇齋)의 기문(記文). 무술년 2월 청명절에 응강(凝江) 박해룡(朴海龍)이 쓴 김해김씨 묘재(墓齋)인 모숭재(慕崇齋)의 기문(記文)이다. 모숭재는 저술자 박해룡의 고우(故友)인 김해김씨 김경식(金景煶)의 할아버지 백은(栢隱) 김해연(金海淵)의 묘재이다. 문서에는 기(記)를 작성하게 된 연유, 김해김씨 가계 내력, 김해연(金海淵)의 행적 등이 기록되어 있다. 기문의 내용에 따르면 월아산(月牙山) 금선봉(琴仙峰) 아래 지곡산(芝谷山)에 통덕랑 백은(栢隱) 김공(金公) 해연(海淵, 자는 정여(晶汝))과 배우자 진주 강씨(晉州 姜氏)의 무덤이 있다. 하루는 김씨 제군자(諸君子)들이 선대의 무덤이 상곡(上谷)에 있은 지 지금 거의 수백 년이 되었는데도 아직까지 묘재(墓齋)가 없는 것은 자신들의 책임이라고 하면서 조상을 받드는 도리에 힘쓰지 않을 수 없다고 하였다. 이에 지난 무자년에 이르러 묘재의 역(役)을 마치고 고우(故友) 김경식(金景煶)이 와서 자신의 할아버지의 묘실을 완성하였으니 그것에 관해 기록해 주기를 청하였다. 그러나 사양하며 응하지 못하고 있던 중 불행히도 김경식이 갑자기 죽게 되었는데, 지금 그 아들 기수(基守)와 그 친족 기옥(基玉)이 소매에 백은유사(栢隱遺事)를 가지고 와서 두세 번 간청하니 그 뜻이 매우 근실하였다고 하였다. 대개 얻지 못하여도 그치지 않았으며, 이미 그 아버지의 청을 져버렸는데, 차마 그 아들의 효성을 져 버릴 수 없었다고 하면서 기문을 쓰게 된 연유를 적었다. 김해김씨는 금관가락(金官駕洛)의 후예로 모암공(慕庵公) 김극일(金克一)은 부모를 섬김에 지극한 효를 다하였으며 사시(私諡)가 절효(節孝)이다. 모암공의 여섯 아들 중 넷째 김순(金順)은 진사공으로 5대조이고, 고조는 백망(伯望)이며, 증조 용필(甬弼)은 문과에 급제하여 황산찰방을 지냈고, 조부 원복(原福)은 청송부사(靑松府使)를 지냈다. 아버지는 휘(輝)이고 어머니는 월성 최씨(月城 崔氏)이다. 을미년에 태어나 성품이 효렴공직(孝廉恭直)하고 일찍부터 집안에서 학문을 익히고 시예(詩禮)를 복습하였다. 임진왜란 때 백동(柏洞, 경남 진주시 금산면)으로 피신하였다가 난리가 평정되자 산수가 맑아 거주하게 되었다고 한다. 戊巳년의 화(禍)를 깊이 경계하며 충효근검(忠孝勤儉) 4글자를 잠언으로 썼다고 한다. 자식들에게 선조의 묘소가 청도에 있으니 그곳을 잘 돌보라는 말을 남기고 광해 임자(1612)일에 78세로 돌아가셨다. 백동에서 살기 시작하는 것은 할아버지 김해연으로부터 비롯되어 재실을 짓는데 후손들이 각자 일을 분담하여 맡은 바 업무에 정성을 다해 무사히 완료되었음을 서술하였다. 김씨 제군자께서는 절효선생 모암공이 부모를 사모하던 마음으로 조상을 사모하는 마음으로 삼았으니, 세세자손이 그 사모함이 오래되고 온화하구나라고 하면서 선조에서 받은 것이 있으므로 능히 자손에게 줄 바가 있다고 하였다. 앵산(鶯山)이 이지러지지 않음과 같이 존중하고, 유천(柳川)이 마르지 않음과 같이 그리워하며 모숭의 편액이 영원히 사라지지 않고 무궁하기를 기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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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광수(李光秀) 시(詩) 1 고문서-시문류-시 교육/문화-문학/저술-시 湖南晩生 李光秀 李光秀 전남도청(2020년 구입 의병자료) (재)한국학호남진흥원 이광수(李光秀)가 일본 동경(東京)에 외교사절단으로 다녀온 누군가를 위해 지은 7언 율시(律詩)와 시서(詩序)이다. 이광수(李光秀)가 일본 동경(東京)에 외교사절단으로 다녀온 누군가를 위해 지은 7언 율시(律詩) 한 편과 시서(詩序)이다. 대한제국(大韓帝國) 시기 고종의 명령으로 외교 업무를 무사히 마치고 온 지인에게 빗을 선물하면서 바친 시이다. 수신인에 대한 기록은 보이지 않으나 대한제국이 1897년 10월 12일부터 1910년 8월 29까지 존재했다는 것을 근거로 보자면 이 시기 외교사절을 맡았던 인물로 추정할 수 있다. 시를 여는 기구(起句)에서는 황제의 명으로 동경(東京)으로 사신 나간 형께서 의연히 관대(冠帶)를 잘 정돈하여 명예를 실추시키지 않아서, 사해(四海)의 생령(生靈)이 나라가 있는 줄 알게 되었으니 일가(一家)의 충효(忠孝) 있는 자들이 누가 형(兄)과 같겠냐며 찬탄한 내용이 담겼다. 다음 시구는 사신을 맡은 형은 장년(壯年)에 이미 강회(江淮)의 뜻을 품고 있었으니 이에 두터운 신망을 얻을 수 있었다는 것이다. 마지막 구절에서는 이광수 같은 천하의 헝크러진 쑥대머리 사람도 머리털을 보호하고자 하는 은미한 뜻으로 작은 빗을 올린다는 내용으로, 빗을 선물한 진정한 의미를 잘 전달하였다. 율시와 함께 적힌 서문(序文)은 빗을 선물한 의도가 담겨 있다. 죽하 대인(竹下大人)은 일본으로 사신을 다녀와서도 개화에 물들지 않고 모발을 잘 지켜왔다는 것이다. 머리칼 하나 보존하고 그렇지 않은 것이 몸을 보존하는 것과 무슨 관계가 있겠느냐마는 진실로 그 의리에서는 중차대한 것이라고 하였다. 이 세상에서 그 누가 머리칼을 지킨 의리가 하늘과 땅처럼 현격히 다르다는 것을 알겠느냐고 하였다. 그렇기에 죽하 대인은 배운 것을 저버리지 않고 외국으로 사신을 나가서도 임금의 명령을 욕되게 하지 않았다고 평할 만하니, 감히 이 빗을 드려 나의 이 마음을 시로 읊었다고 하였다. 이광수(1873~1953)의 호는 옥산(玉山), 자(字)는 미중(美中)이다. 부인 죽산안씨와의 사이에 외아들 혁(爀)을 두었다. 노사학파의 일원인 송사(松沙) 기우만(奇宇萬)의 문인이다. 1900년에 경의문대(經義問對)로 성균관박사(成均館博士)로 되었으며, 계몽운동가인 양한묵(梁漢黙) 등과 교유하면서 신학문에 뜻을 두고 개화(開化)에 앞장섰다가 송사에게 파문(破門)을 당하기도 했다. 일제의 강제 병합을 목격하고 고향에 돌아와 후학을 양성하며 여생을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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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광수(李光秀) 시(詩) 2 고문서-시문류-시 교육/문화-문학/저술-시 玉山 李光秀 李光秀 전남도청(2020년 구입 의병자료) (재)한국학호남진흥원 이광수(李光秀)가 송덕용(宋德用)을 방문하면서 지은 칠언절구(七言絶句)의 차운시(次韻詩). 이광수(李光秀)가 과재(果齋) 송덕용(宋德用)을 방문하면서 지은 칠언절구(七言絶句)의 차운시(次韻詩) 한 편이다. 문서 첫머리는 시 제목인 '과재형을 방문하고 대인(大人, 상대방 아버지)이 남긴 벽산정(壁山亭) 원시(原詩)에 삼가 차운하다'라는 구절이 적혔다. 대인은 송덕용의 아버지인 송소환(宋邵煥)이다. 시를 보면, 벽산정은 벽산(碧山) 머리에 있는데, 온 사방이 연기에 둘러싸여 있는 중에도 한 구역에서 그윽함을 자랑하고 있다는 것이 앞 구절의 내용이다. 이어 일찍부터 다른 책력의 조짐을 먼저 아시고 꽃과 잎만을 가지고 춘추(春秋)를 기억했다는 것으로 구성되었다. 이광수는 지인 송덕용 선생을 방문하고 부친의 풍모가 담긴 정자를 보고 또 그 시에 담긴 예지력을 찬탄하여 시를 차운한 것으로 보인다. 예견한 혼란한 시대를 송소환 선생께서 지금의 혼란을 예견하셨다고 찬탄한 내용으로 보인다. 시문 몇 개의 글자를 수정한 흔적으로 보아 완성되지 않은 초본(初本)임을 알 수 있다. 문서는 오염 흔적이 많고 상단 일부는 결락 된 상태이다. 또 문장 배면에 종이를 덧대어 보수한 흔적도 보인다. 송덕용(1864~1932)의 자는 태원(兌爰)이고, 호는 과재(果齋)이며, 초명은 송헌용(宋憲用)이다. 본관은 은진(恩津)이다. 증조부는 송유함(宋有涵)이고, 조부는 송두극(宋斗極)이며, 부친은 송소환(宋邵煥)이다. 심석(心石) 송병순(宋秉珣, 1839∼1912)과 백헌(柏軒) 정재규(鄭載圭, 1843∼1911)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저서로 시문집인 ?과재문집(果齋文集)』이 있다. 이광수(1873~1953)의 호는 옥산(玉山), 자(字)는 미중(美中)이다. 부인 죽산안씨와의 사이에 외아들 혁(爀)을 두었다. 노사학파의 일원인 송사(松沙) 기우만(奇宇萬)의 문인이다. 1900년에 경의문대(經義問對)로 성균관박사(成均館博士)로 되었으며, 계몽운동가인 양한묵(梁漢黙) 등과 교유하면서 신학문에 뜻을 두고 개화(開化)에 앞장섰다가 송사에게 파문(破門)을 당하기도 했다. 일제의 강제 병합을 목격하고 고향에 돌아와 후학을 양성하며 여생을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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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학(李承鶴) 등 시(詩) 고문서-시문류-시 교육/문화-문학/저술-시 李承鶴 전남도청(2020년 구입 의병자료) (재)한국학호남진흥원 李承鶴 등 10인이 지은 春夜聯句와 7언시 詩軸. 시축 첫 머리는 李承鶴과 李光秀를 포함한 10명이 지은 聯句詩가 있는데, 각 연구마다 지은 사람이 표기, *7언 절구시와 7언 율시 각각에 시인의 號가 표기, 마지막에는 다시 李承鶴 등 11인이 지인 연구시가 있음 *상태: 시 중간 중간에 글자를 지우고 수정한 흔적이 많음, 시들의 필체가 차이를 보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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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학(李承鶴) 시(詩) 고문서-시문류-시 교육/문화-문학/저술-시 靑皐生 戱呈 李承鶴 雲藍 전남도청(2020년 구입 의병자료) (재)한국학호남진흥원 이승학(李承鶴)이 동학(同學)인 운람(雲籃)에게 준 송별시(送別詩). 이승학(李承鶴)이 동학(同學)인 운람(雲籃)에게 준 송별시(送別詩)이다. '서울로 떠나는 운람을 송별하며'라는 제목의 칠언절구(七言絶句) 시이다. 앞 구절은 '동강(東岡)을 오래도록 지키는 것이 어렵다는 것을 아니, 서풍(西風)이 부는 천 리 길에 운람을 송별한다'는 내용이다. 동강은 보통 은거지나 고향을 뜻하며, 서풍은 가을바람과 수도라는 두 가지 의미가 있다. 따라서 이 구절은 고향을 저버리고 가을바람이 부는 계절에 서울로 떠나는 동강에 대한 서운한 마음을 담은 것이다. 뒤 구절은 '원망하는 북산(北山)의 학과 원숭이를 돌아보지 말고 속히 종남산(終南山)으로 가라'는 내용이다. 이 구절은 고사를 인용하여 마음을 표한 것이다. 중국 남조(南朝) 시대의 문인 공치규(孔稚圭, 447~501)가 지은 「북산이문(北山移文)」에서 은거를 그만두고 벼슬하러 떠났던 주옹(周顒)을 나무라며 "혜초 장막 텅 비어 밤의 학이 원망하고, 산인이 떠나가니 새벽 원숭이가 놀라더라."라고 하였다. 또 '종남산'은 원래 중국의 수도였던 장안(長安)의 산의 이름이었기 때문에 우리나라에서 서울의 별칭으로 쓰여 왔다. 이 같은 고사를 써서 이승학은 고향에 있는 친구들의 서운함은 돌아보지 말고 속히 서울로 들어가라는 격려의 의미를 담았다. 여기서 운람은 노사(蘆沙) 기정진(奇正鎭) 선생의 문인이기도 한 정봉현(鄭鳳鉉, 1852~1918)을 지칭한 듯하다. 정봉현의 자는 동국(東國) 또는 언국(彦國)이고, 호는 운람(雲籃)이다. 본관은 하동(河東)이며, 곡성군(谷城郡) 포평리(蒲坪里) 출신이다. 문집에 ?운람집(雲籃集)?이 전한다. 이승학(1857∼1928)의 본관은 전주(全州)로, 양녕대군의 후손이며, 자는 자화(子和), 호는 청고(靑皋)이다. 전남 담양 장전리(長田里)에서 출생하였다. 아버지는 기정진(奇正鎭)의 문인인 진사 이최선(李最善)이고, 이승학 본인도 기정진의 문하에서 배웠다. 아들 이광수(李光秀)는 송사(松沙) 기우만(奇宇萬)의 제자이다. 을미사변(乙未事變) 때 팔도에 격문을 보내어 의병을 일으키기도 했다. 문집으로 ?청고집(靑皋集)? 4권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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