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술년(戊戌年) 박해룡(朴海龍) 모숭재기(慕崇齋記) 고문서-시문류-기 교육/문화-문학/저술-기 戊戌二月淸明節 朴海龍 戊戌二月淸明節 [1958] 전남도청(2019년 구입 의병자료) (재)한국학호남진흥원 무술년 2월에 박해룡(朴海龍)이 쓴 김해김씨 묘재(墓齋) 모숭재(慕崇齋)의 기문(記文). 무술년 2월 청명절에 응강(凝江) 박해룡(朴海龍)이 쓴 김해김씨 묘재(墓齋)인 모숭재(慕崇齋)의 기문(記文)이다. 모숭재는 저술자 박해룡의 고우(故友)인 김해김씨 김경식(金景煶)의 할아버지 백은(栢隱) 김해연(金海淵)의 묘재이다. 문서에는 기(記)를 작성하게 된 연유, 김해김씨 가계 내력, 김해연(金海淵)의 행적 등이 기록되어 있다. 기문의 내용에 따르면 월아산(月牙山) 금선봉(琴仙峰) 아래 지곡산(芝谷山)에 통덕랑 백은(栢隱) 김공(金公) 해연(海淵, 자는 정여(晶汝))과 배우자 진주 강씨(晉州 姜氏)의 무덤이 있다. 하루는 김씨 제군자(諸君子)들이 선대의 무덤이 상곡(上谷)에 있은 지 지금 거의 수백 년이 되었는데도 아직까지 묘재(墓齋)가 없는 것은 자신들의 책임이라고 하면서 조상을 받드는 도리에 힘쓰지 않을 수 없다고 하였다. 이에 지난 무자년에 이르러 묘재의 역(役)을 마치고 고우(故友) 김경식(金景煶)이 와서 자신의 할아버지의 묘실을 완성하였으니 그것에 관해 기록해 주기를 청하였다. 그러나 사양하며 응하지 못하고 있던 중 불행히도 김경식이 갑자기 죽게 되었는데, 지금 그 아들 기수(基守)와 그 친족 기옥(基玉)이 소매에 백은유사(栢隱遺事)를 가지고 와서 두세 번 간청하니 그 뜻이 매우 근실하였다고 하였다. 대개 얻지 못하여도 그치지 않았으며, 이미 그 아버지의 청을 져버렸는데, 차마 그 아들의 효성을 져 버릴 수 없었다고 하면서 기문을 쓰게 된 연유를 적었다. 김해김씨는 금관가락(金官駕洛)의 후예로 모암공(慕庵公) 김극일(金克一)은 부모를 섬김에 지극한 효를 다하였으며 사시(私諡)가 절효(節孝)이다. 모암공의 여섯 아들 중 넷째 김순(金順)은 진사공으로 5대조이고, 고조는 백망(伯望)이며, 증조 용필(甬弼)은 문과에 급제하여 황산찰방을 지냈고, 조부 원복(原福)은 청송부사(靑松府使)를 지냈다. 아버지는 휘(輝)이고 어머니는 월성 최씨(月城 崔氏)이다. 을미년에 태어나 성품이 효렴공직(孝廉恭直)하고 일찍부터 집안에서 학문을 익히고 시예(詩禮)를 복습하였다. 임진왜란 때 백동(柏洞, 경남 진주시 금산면)으로 피신하였다가 난리가 평정되자 산수가 맑아 거주하게 되었다고 한다. 戊巳년의 화(禍)를 깊이 경계하며 충효근검(忠孝勤儉) 4글자를 잠언으로 썼다고 한다. 자식들에게 선조의 묘소가 청도에 있으니 그곳을 잘 돌보라는 말을 남기고 광해 임자(1612)일에 78세로 돌아가셨다. 백동에서 살기 시작하는 것은 할아버지 김해연으로부터 비롯되어 재실을 짓는데 후손들이 각자 일을 분담하여 맡은 바 업무에 정성을 다해 무사히 완료되었음을 서술하였다. 김씨 제군자께서는 절효선생 모암공이 부모를 사모하던 마음으로 조상을 사모하는 마음으로 삼았으니, 세세자손이 그 사모함이 오래되고 온화하구나라고 하면서 선조에서 받은 것이 있으므로 능히 자손에게 줄 바가 있다고 하였다. 앵산(鶯山)이 이지러지지 않음과 같이 존중하고, 유천(柳川)이 마르지 않음과 같이 그리워하며 모숭의 편액이 영원히 사라지지 않고 무궁하기를 기원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