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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3년 기중도(奇重度) 간찰(簡札) 1 고문서-서간통고류-서간 개인-생활-서간 癸巳八月四日 戚從 奇重度 玉山 癸巳八月四日 奇重度 李光秀 전남도청(2020년 구입 의병자료) (재)한국학호남진흥원 1893년 8월에 기중도(奇重度)가 인척(姻戚)인 이광수(李光秀)에게 화순 물염정(勿染亭) 적벽(赤壁) 모임을 알리고 함께하기를 요청하면서 보낸 간찰. 1893년 8월에 기중도(奇重度)가 인척(姻戚)인 이광수(李光秀)에게 화순 물염정(勿染亭) 적벽(赤壁) 모임을 알리고 함께하기를 요청하면서 보낸 편지이다. 멀리 객지에 계시는 이광수의 아버지 이승학의 안부를 먼저 묻고 이어 조부모님과 부모님을 모시는 이광수의 안부를 확인하면서 편지를 열었다. 이어 기중도 자신의 안부를 전하기를, 여름 동안 신열(身熱)과 두통이 들고, 온몸에 차가운 땀이 나는 증상인 폭설(暴泄)을 앓았는데, 아이들도 모두 이 병을 앓았다고 하며 그간의 상태를 알렸다. 지금은 날씨가 서늘해져 생기가 조금 안정되어 산수를 유람할 계획이라고 전했다. 유람은 화순(和順)의 물염정 적벽을 출발점으로 하려고 하는데, 이때 구동(龜東)과 흠재(欽齋)도 함께 거동하여 소동파(蘇東坡)가 즐긴 적벽의 아름다움을 감상하기로 했다고 전했다. 기중도는 이광수가 훨훨 날 수 있는 날개옷을 가진 신선이라고 칭찬하며 상순(上旬) 쯤에 신선의 집에 도착할 것이라고 하고, 우리를 위해 술 몇 섬을 빚어 놓고 집을 깨끗이 청소해서 맞이해 줄 수 있느냐고 물으며 초청해 달라고 부탁했다. 자리를 함께하여 편히 누워 맘껏 마시며 20년 묵은 근심을 씻겨내자고 하였다. 남은 얘기는 직접 얼굴을 대하고 풀자는 말로 편지를 끝마쳤다. 이광수(1873~1953)의 호는 옥산(玉山), 자(字)는 미중(美中)이다. 부인 죽산안씨(竹山安氏)와의 사이에 외아들 혁(爀, 1898~1977)을 두었다. 노사학파의 일원인 송사(松沙) 기우만(奇宇萬)의 문인이다. 1900년에 경의문대(經義問對)로 성균관박사(成均館博士)로 되었으며, 계몽운동가인 양한묵(梁漢黙) 등과 교유하면서 신학문에 뜻을 두고 개화(開化)에 앞장섰다가 송사에게 파문(破門)을 당하기도 했다. 일제의 강제 병합을 목격하고 고향에 돌아와 후학을 양성하며 여생을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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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皮封]玉山 重省案將命者沙戚候函涯角欲言之恐却聞人心和氣伏問大人先生遠候神相重省經軆加飡自愛戚從侍奉如昨而自家送三夏身熱頭痛邊近經暴泄入水一升其出千派恨不用此腹於曩時龜疇吾輩擧患一腹刳不得奈何今則天時新涼生意少存欲理江山之筇而勿染赤壁是初路頭龜東欽齋是二客之從余豈獨專美於東坡而已乎吾賢亦有翩?之羽衣則於我今幸也進逍遙仙廬似在上旬那時爲我釀酒數石淨掃室堂否當偃臥痛飮滌盡二十年姤穢之千曲愁腸矣萬留對敍不備候禮癸巳八月四日戚從奇重度拜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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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3년 기응도(奇應度) 간찰(簡札) 2 고문서-서간통고류-서간 개인-생활-서간 癸巳八月十三日 弟 奇應度 癸巳八月十三日 奇應度 李光秀 전남도청(2020년 구입 의병자료) (재)한국학호남진흥원 1893년 8월에 기응도(奇應度)가 인척(姻戚) 이광수(李光秀)에게 화순 물염정(勿染亭) 적벽(赤壁) 모임에 동참할 것을 요청한 내용의 간찰. 1893년 8월에 기응도(奇應度)가 인척(姻戚) 이광수(李光秀)에게 화순 물염정(勿染亭) 적벽(赤壁) 모임에 동참할 것을 요청한 내용의 편지이다. 초 4일에 우봉(牛峯) 안씨(安氏) 친구 편에 편지를 보냈는데, 잘 전달되었는지 알 수 없다며 답답한 마음을 표했다. 이어 요사이 부모님을 모시고 공부하는 생활은 어떠한지 묻고, 이광수에 대한 그리움 마음을 전했다. 갈대의 흰 이슬 맺힌 가을날 그리움이 싹트고, 창에 비친 달빛이 하얗게 흘러들 때 누워서 멀리 담양에 사는 미중(美仲, 이광수의 자(字))을 떠올린다고 하며 그리움을 시적으로 표현했다. 계속해서 유람에 대한 생각을 전하고 함께 할 것을 독려했다. 처음에 금재(欽齋)와 구동(龜東)과 함께 먼저 이광수 집을 방문해서 능성(綾城, 현재 화순)을 관광하려 계획을 세웠고, 황룡의 중동(中洞)에 사는 김씨(金氏) 형과 사방의 학자들도 함께 움직이려 했다는 것이다. 본래 저쪽 편 사람이 아닌데도 다행히 태평성세를 만나 비록 재주도 학식도 없지만, 어찌 한 번의 거동도 없겠으며, 또 오랜 병중 생활을 털어내고 유람을 하는 것은 적막을 지키고 마음만 상하게 하는 것보다는 나을 듯 하다고 하였다. 그곳에서 정답게 만나 많은 술을 마시고, 제비를 뽑아 시문(詩文)을 겨루며 호로(呼盧)와 악삭(握槊) 같은 투전 놀이도 하다 보면 더욱 호해(湖海)의 기상을 얻고 간담을 키우게 될 것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지석(池石)과 해망(海望) 사이에서 머뭇거리다가 마침내 이행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며 안타까운 마음을 전했다. 이광수(1873~1953)의 호는 옥산(玉山), 자(字)는 미중(美中)이다. 부인 죽산안씨(竹山安氏)와의 사이에 외아들 혁(爀, 1898~1977)을 두었다. 노사학파의 일원인 송사(松沙) 기우만(奇宇萬)의 문인이다. 1900년에 경의문대(經義問對)로 성균관박사(成均館博士)로 되었으며, 계몽운동가인 양한묵(梁漢黙) 등과 교유하면서 신학문에 뜻을 두고 개화(開化)에 앞장섰다가 송사에게 파문(破門)을 당하기도 했다. 일제의 강제 병합을 목격하고 고향에 돌아와 후학을 양성하며 여생을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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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皮封]玉山侍經案入納執齋戚拜候書哉生牛峯安友便付書轉達否亦不知浮沈惘然惘然更伏請比者侍學軆珍重增福蒹葭白露所懷伊誰每窓月流素伏枕呼美仲美仲不答驚而思之美仲乃遙遙秋南洲初意同欽齋龜東先叩高軒酙酌賢從其間必綾城觀光中洞金兄亦以是起去四方學者次第發動處子無耻於斯可見應也本非彼邊人而幸生 聖明之世雖無才無學豈無一番擧趾且久病餘疎暢却勝守寂傷神然則握手丁甯在那地先卜多買樽罍分籌鬪白呼盧握槊益得湖海氣麤肝膽躑躅池石海望間竟不知作何狀便匆不備上癸巳八月十三日弟奇應度拜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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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8년 이승학(李承鶴) 간찰(簡札) 고문서-서간통고류-서간 개인-생활-서간 戊戌陽月十九日 宗下 承鶴 戊戌陽月十九日 李承鶴 宗人 전남도청(2020년 구입 의병자료) (재)한국학호남진흥원 1898년 10월에 李承鶴이 宗人에게 전한 간찰.딸의 혼사와 손자를 얻은 일 등의 안부를 전한 내용, 물가 상승으로 고민이라는 내용, 買田에 관한 내용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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省禮向晤尙慰尙慰自後便風頻仍比來稍間仰惟小春制候省餘萬相大衙氣力康旺溯祝區區宗下去月末經次女昏翌日晦夜得一經厄之餘可謂奇幸而産婦之餘證至今爲慮不淺苦㦖難喩末妹之昏又以臘月初捐吉而抖擻沒量奈何今聞北報國有急奇未知信的與否而漆憂方殷奈之何哉頃也貿來物常時時價太高尙今立置而每疋頭不過四兩皆是瀯浦靑木所用云云計其都數之爲害則近二百云今所謂迃儒物情如是而欺人之習若是無良耶此爲何以區處耶卽欲更進商確而事多路左亦未容易矣何以則爲好耶買田云云此近土價亦係時變如此則難以下手故雖有興成不欲勸之以此諒之如何適聞有小山便暫候不備謹狀禮戊戌陽月十九日宗下承鶴拜手大衙上候姑未及矣此意或可仰達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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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학(李承鶴) 간찰(簡札) 1 고문서-서간통고류-서간 개인-생활-서간 元月卄九日 承鶴 岡搆 族案 元月卄九日 李承鶴 宗人 전남도청(2020년 구입 의병자료) (재)한국학호남진흥원 이승학(李承鶴)이 족인(族人)에게 안부와 산송(山訟)에 관한 내용을 전한 간찰. 1월에 이승학이 족인(族人)에게 안부와 산송(山訟)에 관한 내용 등을 전한 편지이다. 수신자인 족인이 정확히 누군지는 알 수 없는데, 편지 서두에 '헌구(憲搆)'라는 표현이 있는 것으로 미뤄 나라에 구속된 족인이 아닌지 의심된다. 그러나 편지에 간지가 기록되지 않아서 이 시기가 한 말(韓末)인지 일본 강점기 때인지 알 수 없으나 후자일 경우 헌병에게 구속된 것을 의미할 것이다. 편지 본문에서는 지난번 윤홍(允弘)의 편지를 받고 그간의 사정을 알았다는 내용과 객지 생활의 안부를 물었다. 그간에 족숙(族叔)께서 종숙모(從叔母)의 상을 당했다고 들어 이승학이 분곡(奔哭)하고 상을 치르고자 하는데 4일 만에 장례를 치를 계획이라고 전했다. 또 오산(鰲山)의 산송(山訟)과 관련된 내용을 편지에 자세히 알렸다. 여기서 오산은 장성(長城)을 가리킨다. 오산의 서씨(徐氏) 성(姓)을 가진 상민과 산송을 하고 있는데, 산의 도형(圖形)이 아직 만들어지지 않았는데 서씨라는 자가 출타를 핑계 삼아 피하고 있으며 양반들을 함부로 하고 있다고 전하면서 이는 명백한 일인데도 기필하기가 어렵다고 토로했다. 이어 이승학 본인과 필암서원(筆巖書院)이 나서서 상법을 따르게 한다고 하였다. 여러 가지 사정은 이승학의 아들이 직접 편지로 알려 드릴 것이라고 하면서 마무리했다. 이승학(1857∼1928)의 본관은 전주(全州)로, 양녕대군(讓寧大君)의 후손이며, 자는 자화(子和), 호는 청고(靑皋)이다. 전남 담양(潭陽) 장전리(長田里)에서 출생하였다. 아버지는 기정진(奇正鎭)의 문인인 진사 이최선(李最善)이고, 이승학 본인도 기정진의 문하에서 배웠다. 을미사변(乙未事變) 때 팔도에 격문을 보내어 의병을 일으키기도 했다. 문집으로 ?청고집(靑皋集)? 4권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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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0년 이승학(李承鶴) 간찰(簡札) 고문서-서간통고류-서간 개인-생활-서간 庚子三月旣望 李承鶴 庚子三月旣望 李承鶴 徐承旨 전남도청(2020년 구입 의병자료) (재)한국학호남진흥원 1900년에 이승학(李承鶴)이 서승지(徐承旨)에게 현재 있는 곳을 묻고 아들을 부탁하는 내용을 전한 간찰. 1900년 3월에 이승학(李承鶴)이 서승지(徐承旨)에게 보낸 간찰이다. 수신인은 승지(承旨) 벼슬을 한 서씨(徐氏)인데, 누구인지 알 수 없으나 간찰에서 '동경(同庚)'이라는 표현한 것으로 보았을 때 이승학과 동갑인 친구로 보인다. 편지 서두에는 서승지의 안부를 묻고 현재 서울에 있는지, 아니면 고향에 있는지 알 길이 없어 답답하니 알려달라고 전한 내용이다. 이어 이승학 자신의 안부를 전했다. 본인은 작년에 서승지와 작별한 후에 병 때문에 곧바로 고향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한 달여간 몸져누워 고생하다가 귀향했다고 하였다. 이어 선사(先事)의 일은 이치와 형세에 따라 처하는 형편이 달라 곤란하다는 점을 전했다. 여기서 말하는 선사가 구체적으로 무엇을 말하는지는 알 수 없으나 이승학의 아버지 이최선(李最善)과 관련된 것인지, 아니면 족보 편찬과 관련된 일인지 알 수 없다. 편지 끝에는 이승학이 아들을 서승지에게 부탁하는 내용이 보인다. 아들이 독서와 작문에 대해서는 알지만, 세상 물정에는 익숙하지 못하니 서승지께서 잘 지도해 달라고 부탁했다. 이승학이 부탁한 아들은 그의 장남 광수(光秀)인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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寄舍弟書潭邑去書龍石便書常先後入去矣丁春今又發去雖無他說話使人陸續可慰在家之情而吾之族屑家信久隔其菀陶如何哉卽日衰事斗劇萱堂氣力無損省履一如眷屬安過否南望瞻懸令人叫菀吾之曾遊□多矣三朔曠遊非事乎凡事之窘艱寒苦之迫人日甚一自功利之交戰不曰無之吾不欲屑屑則能矣但隨分而已日前會園隨例呈券歸之山外宜當而攀龍者十五人皆極公云耳壽弟之武解已參或庶幾望之武亦至公入格者二十六人亦歸落莫矣只恨家運身數之不足奈何春科鱗疊不得不苐須觀光則行期如前書所指耳其間家事之周旋亦如前言着念圖之也留此之費亦如前言圖送庶免狼狽須早圖之也衣服亦如是與細至商議也遠遊者之事本自若是家中勿怪湯力也卽今揣料鄕事公納方急何以區處妹昏此歲內有可行之處耶綾城云云至於如何泄泄而已近日所留卽前書所言主而晉州河宣傳日間入來頗相孚亦卽其本主也慰喜洪多隣叔氏見今住泊不遠間而舍館尙未的定畢竟將合而姑未及者有磨鍊耳餘外細瑣有難筆免漏萬不具庚寅至月晦舍兄書龍石去卜有冠一立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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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皮封]長田 李光秀回鑑數日之阻如年如月卽拜惠訊仰荷仰荷而此歲只剩兩箇夜南來遠人慷慨之極尤逈異時卽審慰侍體兄旺也弟斷欲叩之者巧緣塞感未能遂意而今始得趁床乃小晦也猶怕其寒不敢謝門悚歎奈何新元則須萬一之遮路期欲晉拜矣以備前日所託件如何如何餘惟祝不備迓新 兄休謝上弟金寅圭拜拜小除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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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3년 김재한(金在漢) 간찰(簡札) 고문서-서간통고류-서간 개인-생활-서간 癸酉梧秋念七 服弟 金在漢 癸酉梧秋念七 金在漢 李光秀 전남도청(2020년 구입 의병자료) (재)한국학호남진흥원 1933년 7월에 김재한(金在漢)이 이광수(李光秀)에게 안부를 전하고 두문동서원(杜門洞書院)에 선조가 배향된 일에 대해 감사의 마음을 전한 간찰. 1933년 7월에 김재한(金在漢)이이광수(李光秀)에게 안부를 전하고 두문동서원(杜門洞書院)에 선조가 배향된 일에 대해 감사의 마음을 전한 편지이다. 피봉을 통해 개성부 숭양서원(崧陽書院) 안에 있는 두문동서원 창건사무소(刱建事務所)에서 근무하는 이광수에게 전북 남원의 두동면 영촌마을에 사는 김재한이 보낸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여름에 서로 길이 어긋나서 만나지 못해 아쉬웠는데, 보내준 편지로 안부를 확인하게 되어 위로되었다는 말로 편지를 시작했다. 보내준 편지는 청량함이 가득한데다가 금강산의 기운까지 가지고 있다고 하며 얘기를 이어갔다. 예전에 김재한 본인도 금강산을 유람한 적이 있었는데, 자신은 속인의 눈으로 보았으나 이광수는 신선의 안목을 지녔기 때문에 그 산의 진수(眞髓)를 얻었을 것이라고 하였다. 또 기성(箕城, 평양)과 송경(松京, 개성)의 풍물을 두루 보고서 옛날을 회상하고 지금을 슬퍼하는 마음이 더욱 절절하지는 않았는지 물어, 자신이 느낀 서글픈 마음을 드러내기도 했다. 편지는 두문동서원과 관련된 내용으로 이어졌다. 김재한의 선조께서 개성의 표절사(表節祠)에 배향되셨는데, 서원철폐령(書院撤廢令)으로 이 사우가 훼철되어 한이 되었는데, 새로 서원을 신설한다고 하니 어찌 분주히 이 일을 따르지 않겠느냐며 감사의 마음을 전했다. 그리고 이광수가 서원을 건립하는 과정에서 보인 정중한 태도는 현인을 위하는 정성과 그 후손을 대우해 주시는 깊은 마음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하고, 어찌 이 일을 관례대로만 할 수 있겠느냐며 직접 뵙고 감사함을 전하겠다고 하였다. 지금 자신은 다리에 부종이 생겨 고통을 호소하고 있는데, 점차 호전되면 일간에 찾아뵐 계획이라고 전하며 넓은 마음으로 헤아려 줄 것을 부탁하며 편지를 마쳤다. 두문동서원에 배향된 김재한의 선조는 김충한(金沖漢)이다. 그는 고려 때 문신으로,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통경(通卿), 호는 수은당(樹隱堂)이다. 고려말 봉익대부(奉翊大夫) 예의판서(禮儀判書)를 지냈다. 남원군 송동면(松洞面) 두신리(杜新里)에 신도비(神道碑)와 세거비(世居碑)가 있으며, 송동면 두곡리(杜谷里) 두남사(杜南祠)에 배향(配享)되었다. 표절사는 두문동 72현의 위패를 모신 서원이다. 고려가 운이 다하고 조선이 건국되자, 김충한을 위시한 임선미(林先味) 등 70여 명이 벼슬을 버리고 개성 만수산(萬壽山)으로 들어가 나오지 않았는데, 세인은 이들을 두문동 72현이라 하였다. 1740년 영조가 개성을 행행(行幸)할 때 두문동의 유래를 듣고 비석을 세워 주었으며, 1783년에 정조가 개성에 표절사를 세워 추모하였다. 1822년 개성유수(開城留守) 오한원(吳翰源)이 요청으로 김충한을 두문동의 표절사에 추가로 배향하였다. 이 사우는 1864년 흥선대원군의 서원훼철령으로 폐지되었다가 1935년 유림에 의해 신설되어 두문동서원으로 명명했다. 이 편지로 두문동서원은 개성의 숭양서원(崧陽書院)에 사무소를 두고 창건했다는 것과 이광수가 설립과 관련된 일을 맡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광수(1873~1953)의 호는 옥산(玉山), 자(字)는 미중(美中)이다. 부인 죽산안씨(竹山安氏)와의 사이에 외아들 혁(爀, 1898~1977)을 두었다. 노사학파의 일원인 송사(松沙) 기우만(奇宇萬)의 문인이다. 1900년에 경의문대(經義問對)로 성균관박사(成均館博士)로 되었으며, 계몽운동가인 양한묵(梁漢黙) 등과 교유하면서 신학문에 뜻을 두고 개화(開化)에 앞장섰다가 송사에게 파문(破門)을 당하기도 했다. 일제의 강제 병합을 목격하고 고향에 돌아와 후학을 양성하며 여생을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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憲搆 旅案昨見抵允弘書略聞時中動靜慰可知也夜來旅節一如都事丈同留否馳溯無已族叔間遭從叔母喪事自邑奔哭治喪將以來三日疾葬計而昨又聞鰲山圖形不爲徐漢以今前出他稱托而退且論報停止將以明日狎上云云彼隻昨夜有故如是云而明事亦難必若然則吾與筆巖從常去矣都事丈其前姑留勿動之矣飭告爲好諸般說兒書必盡之不疊暫此不宣元月卄九日 服從鶴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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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皮封]潭陽 長田 本第李進士宅入納草洞留 上平書父主前 上白是七月七日三川高參奉便上書未及於十三日下書中未知緣何滯留卽其轉達否伏未審氣軆候一向萬安大小家太平伏慕區區不任下誠之至子入此月以來歸覲伏計而又未果凡事都不入料也世路至此仕宦不足貴入於民團社會有爲事業則此是好目的而經濟硏究會快爲成立於共衆大事業也於私計大利益也而此會成立後反面以來者至于今日姑不組織晦初間可以完成見此而起則九日前似可反面耳雲老日前使還而別無可聞首揆不在他早晩未可知也心台近日來親誼益篤語無所不到月前悶窮而語曰以吾一言之薦可以圖君之宰諒爲之也答曰此首相下豈可屈首乎厚意雖感其於義之不可何窃爲待後日而不敢從也曰善觀其辭色則雖有驚聽敬示之意於身分何益古來淸寒良以此也削令朝野同然而日就於削想不强迫若不强迫則姑爲保髮伏計似不能久保也璿譜到卽納府改張以來適有新安洞金友便付送而所費葉十五兩使之覓去耳季叔晦初間先於不肖而下去伏計以此下諒伏望餘不備上白是戊申八月二十一日子光秀上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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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8년 이광수(李光秀) 간찰(簡札) 고문서-서간통고류-서간 개인-생활-서간 戊申十一月初八日 子 光秀 父主前 上白是 戊申十一月初八日 李光秀 李承鶴 전남도청(2020년 구입 의병자료) (재)한국학호남진흥원 1908년 11월에 이광수(李光秀)가 아버지 이승학(李承鶴)께 안부와 여러 가지 소식을 전한 간찰. 1908년 11월에 이광수(李光秀)가 아버지 이승학(李承鶴)께 안부와 여러 가지 소식을 전한 편지이다. 먼저 창평군(昌平郡)의 거원(擧員, 과거에 응시하는 인원) 편으로 편지를 받아 안부를 알게 되어 다행이라고 전하고 아버지와 식구들의 안부를 두루 물으며 편지를 열었다. 이어 본인의 안부 및 조정과 관련된 소식을 알렸다. 자신이 맡은 일이 기포(飢飽)와 관련된 것이라 아직도 집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이 일을 지루하게 처리하고 있다고 하고, 직을 내려놓고 돌아가고 싶은 마음 간절하다고 하였다. 이어 양원(陽園) 신기선(申箕善)과 관련된 사항에 대해 언급했다. 즉 회의의 총재(摠裁)인 신기선과 간동(諫洞, 현 서울시 종로구 사간동 일원) 대감의 말은 헛된 것이 아닌 믿을 만한 것이라고 하는 등 조정에서 일어나는 갈등을 논한 구절이 보이나 사건이나 이름 등이 생략되어 있어서 구체적인 내용을 확인할 수 없다. 이어 이광수는 과거 시험과 관련된 담양군(潭陽郡)과 창평군(昌平郡)의 갈등에 대해 대략적으로 언급하며 자기 생각을 전했다. 창평군(昌平郡) 거원(擧員, 과거에 응시하는 인원)들이 하방(下房, 곁채)으로 옮겨와 머물고 있다는 사실을 알리고 이들의 시험과 관직의 주선 문제, 고향의 중론(衆論)이 모이지 않고 있다는 내용, 담양과 창평 사이의 갈등이 있다는 내용, 우리 전주이씨 가문의 뜻은 모두 창평군에 있다는 내용, 아버지 이승학과 소파(小坡)ㆍ죽오(竹塢) 숙부 사이의 감정이 있다는 내용, 시비를 다투지 말고 담양과 창평을 각자 인정해 달라는 내용 등이 보인다. 이 편지 내용으로 보았을 때 국가가 주체하는 시험에서 지역 배분에 대한 갈등이 있었던 듯하나 자세한 내용을 파악하기 어렵다. 편지 끝에 교사를 구하고 있으나 월급이 30원이라 떠나지 못하고 있으니 날을 헤아려 내려가는 것이 좋겠다는 말을 하였다. 추신으로 ?지지(地誌)? 상ㆍ하권, ?사략(史略)? 단권, ?옥편(玉篇)? 단권을 살펴서 받아주시라는 말을 덧붙였다. 이광수(1873~1953)의 호는 옥산(玉山), 자(字)는 미중(美中)이다. 부인 죽산안씨(竹山安氏)와의 사이에 외아들 혁(爀, 1898~1977)을 두었다. 노사학파의 일원인 송사(松沙) 기우만(奇宇萬)의 문인이다. 1900년에 경의문대(經義問對)로 성균관박사(成均館博士)로 되었으며, 계몽운동가인 양한묵(梁漢黙) 등과 교유하면서 신학문에 뜻을 두고 개화(開化)에 앞장섰다가 송사에게 파문(破門)을 당하기도 했다. 일제의 강제 병합을 목격하고 고향에 돌아와 후학을 양성하며 여생을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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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皮封]開城府 崧陽書院內 杜門洞祠院刱建事務所內李博士光秀氏旅鑒南原社洞面嶺邨里金在漢夏間路下馮行巖途而返玉山之駕發龍湖已有日矣抑想弟未忘紅塵 兄獨動靑山而然歟只自咄咄而已謂外拜承大緘滿幅淸凉帶來金剛氣味昔年我亦遊此山只以俗眼觀今兄以仙眼視仙山拔得來眞髓後之遊此山者得無憾於 玉山耶自箕城歷覽松京風物感古愴今之懷尤切於胸襟否 敎意謹悉而在弟則爲先一款亦在其中然顧此漢於此等事以不參斷厥案久矣此鄙先祖表節祠七賢之一也自掇享後爲後仍者孰不齎恨今於新設之享有何輕重而奔走於下風哉但 尊敎之鄭重一出於爲賢之誠一出於家我之深則弟豈敢以尺紙例辞而不躬進攄蘊哉方以足瘇叫?差完似在日間來初發程爲計幸須亮俟如何餘敬頌旅安兼乞靑眼癸酉梧秋念七服弟金在漢二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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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응도(奇應度) 간찰(簡札) 고문서-서간통고류-서간 개인-생활-서간 復之卄八日 弟 奇應度 玉山山房讀書榥 復之卄八日 奇應度 李光秀 전남도청(2020년 구입 의병자료) (재)한국학호남진흥원 모년 11월에 기응도(奇應度)가 인척(姻戚) 이광수(李光秀)에게 안부를 전하고 내년 3월의 만남을 기약한 내용의 간찰. 모년 11월에 기응도(奇應度)가 인척(姻戚) 이광수(李光秀)에게 안부를 전하고 내년 3월의 만남을 기약한 내용의 편지이다. 한 달 전 하인이 가져온 편지로 그간에 편지가 잘 전달되었다는 것을 확인했다는 말로 편지를 시작했다. 이어 기응도 본인의 안부를 전하기를, 자신은 집으로 돌아와 차를 다려 마시며 날을 보내고 있는데, 매번 눈이 개고 새벽달이 밝을 때 형이 준 시(詩)를 읽다가, '지금 세상에서 지사(志士)의 눈물이 그치지 않는다'라는 구절에 이르면 울음이 그치지 않는다고 하면서 그리운 마음을 전했다. 어느 때나 이광수가 거처하는 매오당(梅五堂)에서 마음껏 술 마시며 놀 수 있느냐고 하며 만남을 고대하기도 했다. 또 다른 사람에게 전해 듣기를, 이광수가 요사이 은거하는 동지 6~7명과 함께 산방(山房)에서 고인의 책 천만 권을 읽고 있으며, 때때로 담양(潭陽)의 빼어난 명산을 소요하고 계시다고 하는데, 장성(長城) 하사(河沙)에 사는 기원직(奇元直)이 함께하지 못함이 한이 되진 않느냐며 함께 어울리고자 하는 간절한 마음을 전했다. 이광수에 대한 그리움으로 좋은 술 만곡(萬斛)을 먹어도 더운 배 속을 채울 수 없다고 하며 재차 만남을 기원하는 뜻을 전하며, 내년 봄 3월에 봄풀이 우거지고 강 버들 가늘어지면 한번 만나자고 청했다. 이광수에게 약속을 어기지 말라고 당부하고 자신은 날마다 이 만남을 고대하고 있을 것이라고 하고서 눈 내리는 추위 속에서 독서 하며 아프지 말라고 염려하였다. 이광수(1873~1953)의 호는 옥산(玉山), 자(字)는 미중(美中)이다. 부인 죽산안씨(竹山安氏)와의 사이에 외아들 혁(爀, 1898~1977)을 두었다. 노사학파의 일원인 송사(松沙) 기우만(奇宇萬)의 문인이다. 1900년에 경의문대(經義問對)로 성균관박사(成均館博士)로 되었으며, 계몽운동가인 양한묵(梁漢黙) 등과 교유하면서 신학문에 뜻을 두고 개화(開化)에 앞장섰다가 송사에게 파문(破門)을 당하기도 했다. 일제의 강제 병합을 목격하고 고향에 돌아와 후학을 양성하며 여생을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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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6년 장복규(張復圭) 간찰(簡札) 고문서-서간통고류-서간 개인-생활-서간 丙午三月五日 生 張復圭 李進士宅 丙午三月五日 張復圭 李進士 전남도청(2020년 구입 의병자료) (재)한국학호남진흥원 1906년 3월에 창평군수(昌平郡守) 장복규(張復圭)가 담양 장전(長田) 이진사(李進士) 댁에 신문과 채급전(債給錢)의 일에 관해 전한 간찰. 1906년 3월에 창평군수(昌平郡守) 장복규(張復圭)가 담양 장전(長田) 이진사(李進士) 댁에 신문과 채급(債給錢)의 일에 관해 전한 편지이다. 여기서 이진사는 이최선(李最善)을 말하는데, 그가 진사(進士)에 올랐기 때문에 이최선의 집을 이진사댁으로 불렀다. 이 시기 이진사 댁의 가장(家長)이 이승학(李承鶴)이였기에 수신인은 이승학으로 짐작된다. 편지 앞부분은 신문에 관한 것으로, 신문 몇 장이 왔는데 어제 다른 사람에게 빌려주어 돌려받지 못했다는 내용이다. 장복규가 이승학에 신문을 빌려 준 적이 있는데, 편지를 보내 돌라달라는 말을 하여 이렇게 답변한 듯하다. 이어 모씨(某氏)의 채급전과 관련된 내용이 적혔다. 모씨의 일과 빌려준 돈[債給錢]은 다른 일인데, 이승학 같은 고명(高明)께서 어찌 돌려받으려[推還] 하느냐고 하고, 붙잡아 들인 곳에서 그가 곧바로 두 가지 일에 대해 말할 것이기에 해결 방도도 있을 것이라고 하며, 신경 쓰지 말라고 달랬다. 아마도 이승학이 모씨와 갈등을 빚자 창평군수인 장복규가 중간에서 중재하면서 이러한 편지를 보낸 듯하다. 장복규(1869~?)의 본관은 인동(仁同), 자(字)는 공삼(公三)이고 호(號)는 학운(鶴雲)이며, 금구(金溝, 현 김제) 출신이다. 1885년 진사(進士)가 되었고, 궁내부주사(宮內府主事)와 창평군수 등을 역임했다. 1905년 1월에 창평군수로 발령받아 1907년 3월에 면직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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全南 潭陽 長田李進士宅 入納京草洞留 上平書新安洞便付上父主前 上白是本郡擧員便伏承下書伏審從近消息伏幸萬萬伏未審日又多氣軆候一向萬安大小家太平伏慕區區不任下誠之至子所看事飢飽有關故尙此未歸而此事支離雖欲罷歸今亦爲之云所可信者會之摠裁陽園與諫洞台之言有實也事非虛也但物從彼處來而恐彼之食言然交涉鄭重似可有終耳爲先涯過之道極艱邀學徒四人於舍廊徒苦無益也本郡擧員來留他處矣昨日移館于下房族黨與鄕黨但是不妨而但來事雖有善周旋已登官報似難飜覆則不如無事然旣有鄕中衆論則爲三面人道理內雖有不干涉之意外難反對但是王民爲潭爲昌無關去留而非吾意則含默爲上觀衆議則鄕攻可推而以吾李之心皆有昌平故似是紛藤父主與小坡竹塢叔主尤有感情自今以後不是不非伏望望潭可還則爲潭民昌可集則爲昌民而已敎師方求而但月給以三十円不去自校中指數視來爲好耳餘不備上白是戊申十一月初八日子光秀上白地誌上下卷史略單卷玉篇單卷考納伏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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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8년 이광수(李光秀) 간찰(簡札) 고문서-서간통고류-서간 개인-생활-서간 戊申八月二十一日 子 光秀 父 李承鶴 戊申八月二十一日 李光秀 李承鶴 전남도청(2020년 구입 의병자료) (재)한국학호남진흥원 1908년 8월에 이광수(李光秀)가 아버지 이승학(李承鶴)께 여러 가지 서울 소식과 안부를 전한 간찰. 1908년 8월에 이광수(李光秀)가 아버지 이승학(李承鶴)에게 여러 가지 서울 소식과 안부를 전한 편지이다. 이광수가 서울 초동(草洞, 현재 서울시 중구 초동)에 머물면서 담양 본가에 계신 아버지께 편지를 부쳤다는 것을 피봉에서 확인할 수 있다. 피봉에서 담양 본가를 '이진사댁(李進士宅)'이라고 쓴 까닭은 이광수의 조부인 이최선(李最善)이 진사(進士) 시험에 합격했기 때문이다. 편지에선 먼저 7월 7일에 창평(昌平)의 삼천리(三川里) 고참봉(高參奉) 편에 편지를 올렸는데, 아버지께서 보내주신 13일 편지에는 그 내용이 언급되지 않았다고 하면서 무슨 연유인지 알 수 없다며 편지의 전달되었는지 확인했다. 이승학과 그 아들 광수의 편지에서 항상 편지 전달 여부를 확인하곤 했는데, 당시 인편으로 편지가 전해지는 과정에서 문제가 자주 발생하였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이어 이광수는 가족들의 안부를 두루 묻고 이달 귀가할 계획이었으나 이루지 못했다고 하고서 모든 일이 뜻대로 되지 않는다며 탄식했다. 계속해서 이광수는 서울 상황을 두루 아버지께 알려 드렸다. 지금은 벼슬하는 것이 귀한 대접을 받지 못하고 오히려 민간 회사에 들어가 사업을 하는 것을 바라고 있다는 내용과 경제연구회(經濟硏究會)를 세워 이익을 추구한다는 내용, 운노(雲老)와 심재(心齋) 이도재(李道宰) 선생과 관련된 조정 소식 등이 실렸다. 또 단발령(斷髮令)과 왕실 족보인 ?선원보(璿源譜)?에 대한 사항도 적었다. 단별령은 조정이나 재야나 같은 상황일 것이라고 하면서, 아마도 단발령을 강하게 규제하지 않을 듯하나 종국에는 단발할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당시 정치 분위기와 자기 생각을 전했다. ?선원보(璿源譜)?의 개장본을 신안동(新安洞) 김씨(金氏) 친우 편에 부쳤는데, 엽전 15냥을 주고 찾아갈 수 있다고 하였다. 끝으로 막내 숙부께서 그믐이나 초순에 저보다 먼저 집으로 돌아갈 계획이라는 말을 덧붙였다. 이광수(1873~1953)의 호는 옥산(玉山), 자(字)는 미중(美中)이다. 부인 죽산안씨(竹山安氏)와의 사이에 외아들 혁(爀, 1898~1977)을 두었다. 노사학파의 일원인 송사(松沙) 기우만(奇宇萬)의 문인이다. 1900년에 경의문대(經義問對)로 성균관박사(成均館博士)로 되었으며, 계몽운동가인 양한묵(梁漢黙) 등과 교유하면서 신학문에 뜻을 두고 개화(開化)에 앞장섰다가 송사에게 파문(破門)을 당하기도 했다. 일제의 강제 병합을 목격하고 고향에 돌아와 후학을 양성하며 여생을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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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皮封]李進士宅長田侍座回納昌吏上謝緘伏審侍體候萬安伏慰伏慰新聞幾張來到而昨日借於人姑不來耳某事與債給錢有異以尊執高明何如是推還耶捉入之場彼必直說兩事有所如何矣幸忘之若何餘不備上謝候丙午三月五日付生張復圭拜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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