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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환(李箕煥) 만사(輓詞) 고문서-시문류-만사 종교/풍속-관혼상제-만사 李箕煥 李殷弼 李箕煥 김제 만경 전주이씨가 전북대학교 한국학자료센터 이기환(李箕煥)이 이은필(李殷弼)의 죽음을 슬퍼하며 지은 만사(輓詞). 이기환(李箕煥)이 이은필(李殷弼)의 죽음을 슬퍼하며 지은 만사(輓詞)이다. 만사는 죽은 사람이 살았을 때의 공덕(公德)을 기리고, 그를 좋은 곳으로 인도한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만사에서의 '만(輓)'은 끈다는 의미인데, 이는 망자의 상여(喪輿)가 장지(葬地)로 나갈 때 만사를 앞세워 인도하게 한다는 의미에서 비롯된 말이다. 만사는 어떤 정형화된 형태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오언절구(五言絶句)와 오언율시(五言律詩) 또는 칠언절구(七言絶句)나 칠언율시(七言律詩)로 쓰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간혹 고시체(古詩體)를 본떠서 장문(長文)의 시(詩)의 짓거나 혹은 4자체(字體)로 쓰는 경우도 있다. 이 만사는 글자의 수로 보아 고시체의 장문의 시였다. 위에서 만사의 대상자를 이은필이라고 밝혔지만, 사실 이를 알아내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대부분의 만사가 그러하듯, 이 만사에서도 만사의 주인공 이름을 직접 거론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이 만사와 함께 묶어져 있던 115건의 만사의 그 어디에서도 이은필의 이름은 보이지 않고 있는 실정이었다. 따라서 위의 만사등 중에서, 만사 작성자 스스로가 이은필의 친척이라고 적은 것을 모은 후, 그 사람에 대한 정보를 토대로 이은필을 알아낼 수 있었다. 이은필(李殷弼)은 본관이 전주(全州)였으며, 1891년(고종 28)에 실시한 신묘식년시(辛卯式年試)의 생원시(生員試)에 합격하였다. 당시 그의 나이 불과 17세였다. 이후 문과(文科)에는 급제하지는 않았지만, 대한제국관원이력서에 따르면 그는 영릉참봉(寧陵參奉), 영희전참봉(永禧殿參奉), 의릉참봉(懿陵參奉), 원구단사제서참봉(圜丘壇祠祭署參奉),목릉참봉(穆陵參奉), 경릉참봉(景陵參奉) 등을 지낸 것으로 나온다. 그런데 이은필의 거주지와 관련하여 궁금한 점이 있다. 신묘식년시 사마방목(司馬榜目)에 의하면 그의 거주지는 서울이었다. 그러나 조사과정에서 확인한 이은필의 거주지는 서울이 아니라 충청도 제천(堤川)이었다. 그렇다면 이은필은, 소과 합격 당시에는 서울에 살았지만 나중에 충청도로 이주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듯하다. 아니면 소과 합격 당시의 실제 거주지도 제천이었을 가능성도 있다. 조선시대에의 과거는 그것이 문과든, 무과든, 소과든 관계없이 본향(本鄕)만이 아니라 삼향(三鄕), 즉 본향, 처향(妻鄕), 외향(外鄕)에서 시험을 치를 수 있었고, 시권(試券)이나 방목에도 역시 시험을 치른 곳을 적도록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이은필에게 서울은 처향이나 외향이었을 가능성이 얼마든지 있었던 것이다. 궁금한 점은 또 있다. 이 만사를 접한 장소는 충청도가 아니라 전라도 김제였다. 그러니까 만사들이 원래는 충청도에 있다가 김제로 오게 되었다는 이야기인데, 그 이유는 알 수가 없다. 다만 이인필의 후손 누군가 김제로 이주하면서 본 만사들을 가지고 온 것이 아닐까 하는 막연한 추측을 할 뿐이다. 이은필은 생원시에 합격한 뒤에 능참봉을 지냈을 뿐이지만, 그가 죽었을 때 전국 각지의 유림들이 다투어 만시(輓詩)를 보낸 것으로 미루어 볼 때 유학자(儒學者)로서 상당한 명망을 누린 인물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는 광복 이후 어느 땐가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한편, 만사를 지은 이기환은 유학자로, 이은필의 족질(族姪)이다.○ 원문 텍스트 惟公宿德長吾門主樹處護一邨如侄戇愚運則喜向人踈 邈更加恩春秋霜露陪從感日夕琴書睦誼論何意今朝乎栽訣 黃童白叟淚哀呑又絶百感徒傷二月花平生愛家意何賖人 間萬事今如許悄對寒阡落口科 族侄箕煥 再拜哭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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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필추(金必追) 만사(輓詞) 고문서-시문류-만사 종교/풍속-관혼상제-만사 金必追 李殷弼 金必追 김제 만경 전주이씨가 전북대학교 한국학자료센터 김필추(金必追)가 이은필(李殷弼)의 죽음을 슬퍼하며 지은 만사(輓詞). 김필추(金必追)가 이은필(李殷弼)의 죽음을 슬퍼하며 지은 만사(輓詞)이다. 만사는 죽은 사람이 살았을 때의 공덕(公德)을 기리고, 그를 좋은 곳으로 인도한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만사에서의 '만(輓)'은 끈다는 의미인데, 이는 망자의 상여(喪輿)가 장지(葬地)로 나갈 때 만사를 앞세워 인도하게 한다는 의미에서 비롯된 말이다. 만사는 어떤 정형화된 형태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오언절구(五言絶句)와 오언율시(五言律詩) 또는 칠언절구(七言絶句)나 칠언율시(七言律詩)로 쓰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간혹 고시체(古詩體)를 본떠서 장문(長文)의 시(詩)의 짓거나 혹은 4자체(字體)로 쓰는 경우도 있다. 이 만사는 글자의 수로 보아 고시체의 장문의 시였다. 위에서 만사의 대상자를 이은필이라고 밝혔지만, 사실 이를 알아내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대부분의 만사가 그러하듯, 이 만사에서도 만사의 주인공 이름을 직접 거론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이 만사와 함께 묶어져 있던 115건의 만사의 그 어디에서도 이은필의 이름은 보이지 않고 있는 실정이었다. 따라서 위의 만사등 중에서, 만사 작성자 스스로가 이은필의 친척이라고 적은 것을 모은 후, 그 사람에 대한 정보를 토대로 이은필을 알아낼 수 있었다. 이은필(李殷弼)은 본관이 전주(全州)였으며, 1891년(고종 28)에 실시한 신묘식년시(辛卯式年試)의 생원시(生員試)에 합격하였다. 당시 그의 나이 불과 17세였다. 이후 문과(文科)에는 급제하지는 않았지만, 대한제국관원이력서에 따르면 그는 영릉참봉(寧陵參奉), 영희전참봉(永禧殿參奉), 의릉참봉(懿陵參奉), 원구단사제서참봉(圜丘壇祠祭署參奉),목릉참봉(穆陵參奉), 경릉참봉(景陵參奉) 등을 지낸 것으로 나온다. 그런데 이은필의 거주지와 관련하여 궁금한 점이 있다. 신묘식년시 사마방목(司馬榜目)에 의하면 그의 거주지는 서울이었다. 그러나 조사과정에서 확인한 이은필의 거주지는 서울이 아니라 충청도 제천(堤川)이었다. 그렇다면 이은필은, 소과 합격 당시에는 서울에 살았지만 나중에 충청도로 이주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듯하다. 아니면 소과 합격 당시의 실제 거주지도 제천이었을 가능성도 있다. 조선시대에의 과거는 그것이 문과든, 무과든, 소과든 관계없이 본향(本鄕)만이 아니라 삼향(三鄕), 즉 본향, 처향(妻鄕), 외향(外鄕)에서 시험을 치를 수 있었고, 시권(試券)이나 방목에도 역시 시험을 치른 곳을 적도록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이은필에게 서울은 처향이나 외향이었을 가능성이 얼마든지 있었던 것이다. 궁금한 점은 또 있다. 이 만사를 접한 장소는 충청도가 아니라 전라도 김제였다. 그러니까 만사들이 원래는 충청도에 있다가 김제로 오게 되었다는 이야기인데, 그 이유는 알 수가 없다. 다만 이인필의 후손 누군가 김제로 이주하면서 본 만사들을 가지고 온 것이 아닐까 하는 막연한 추측을 할 뿐이다. 이은필은 생원시에 합격한 뒤에 능참봉을 지냈을 뿐이지만, 그가 죽었을 때 전국 각지의 유림들이 다투어 만시(輓詩)를 보낸 것으로 미루어 볼 때 유학자(儒學者)로서 상당한 명망을 누린 인물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는 광복 이후 어느 땐가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한편, 만사를 지은 김필추는 유학자로, 경주(慶州)의 후인이다.○ 원문 텍스트 杏花 哀哉惟公生於世八十有八而顔赧聞乎一域者果不仁能如是耶仁者壽之說亦不 證矣况家亦不貧而隣里敦睦孰能不稱擧哉然而春回爲吉一枝零 橋一花春暮貧餘寬綿綿如隴雲不絶可聲此生楓樹哀暮以 一章誄說遠慶幽谷公眞釋靈還鄕矣 慶州后人 金必熙 謹再拜輓哭 楓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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入文四千兩以三千五百兩畓價除七兩八戔六分縮小除實在文四百九十二兩一戔四分三千兩捧留票還送孝權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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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도>光緖十四年戊子</연도>三月二十三日 前明文右明文事勢不得已伏在<지명>扶北二道松串</지명>前坪禽字畓四斗落所耕九負三束㐣價折錢文貳拾捌兩依數捧上是遣舊文記他畓並付故以新文一張右人前永永放賣爲去乎日後若有異談則持此文記告 官卞正事畓主 幼學 <인명>安達守</인명>[着名]證筆 幼學 <인명>朴文一</인명>[着名]畓主言內不賣云故價文七兩加給則合三十伍兩(背面)<인명>金昌文</인명>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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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춘실(全春實) 만사(輓詞) 고문서-시문류-만사 종교/풍속-관혼상제-만사 전춘실 李殷弼 김제 만경 전주이씨가 전북대학교 한국학자료센터 전춘실(全春實)이 이은필(李殷弼)의 죽음을 슬퍼하며 지은 만사(輓詞) 전춘실(全春實)이 이은필(李殷弼)의 죽음을 슬퍼하며 지은 만사(輓詞)이다. 만사는 죽은 사람이 살았을 때의 공덕(公德)을 기리고, 그를 좋은 곳으로 인도한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만사에서의 '만(輓)'은 끈다는 의미인데, 이는 망자의 상여(喪輿)가 장지(葬地)로 나갈 때 만사를 앞세워 인도하게 한다는 의미에서 비롯된 말이다. 만사는 어떤 정형화된 형태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오언절구(五言絶句)와 오언율시(五言律詩) 또는 칠언절구(七言絶句)나 칠언율시(七言律詩)로 쓰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간혹 고시체(古詩體)를 본떠서 장문(長文)의 시(詩)의 짓거나 혹은 4자체(字體)로 쓰는 경우도 있다. 위에서 만사의 대상자를 이은필이라고 밝혔지만, 사실 이를 알아내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대부분의 만사가 그러하듯, 이 만사에서도 만사의 주인공 이름을 직접 거론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이 만사와 함께 묶어져 있던 115건의 만사의 그 어디에서도 이은필의 이름은 보이지 않고 있는 실정이었다. 따라서 위의 만사들 중에서, 만사 작성자 스스로가 이은필의 친척이라고 적은 것을 모은 후, 그 사람에 대한 정보를 토대로 이은필을 알아낼 수 있었다. 이은필(李殷弼)은 본관이 전주(全州)였으며, 1891년(고종 28)에 실시한 신묘식년시(辛卯式年試)의 생원시(生員試)에 합격하였다. 당시 그의 나이 불과 17세였다. 이후 문과(文科)에는 급제하지는 않았지만, 대한제국관원이력서에 따르면 그는 영릉참봉(寧陵參奉), 영희전참봉(永禧殿參奉), 의릉참봉(懿陵參奉), 원구단사제서참봉(圜丘壇祠祭署參奉), 목릉참봉(穆陵參奉), 경릉참봉(景陵參奉) 등을 지낸 것으로 나온다. 그런데 이은필의 거주지와 관련하여 궁금한 점이 있다. 신묘식년시 사마방목(司馬榜目)에 의하면 그의 거주지는 서울이었다. 그러나 조사과정에서 확인한 이은필의 거주지는 서울이 아니라 충청도 제천(堤川)이었다. 그렇다면 이은필은, 소과 합격 당시에는 서울에 살았지만 나중에 충청도로 이주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듯하다. 아니면 소과 합격 당시의 실제 거주지도 제천이었을 가능성도 있다. 조선시대에의 과거는 그것이 문과든, 무과든, 소과든 관계없이 본향(本鄕)만이 아니라 삼향(三鄕), 즉 본향, 처향(妻鄕), 외향(外鄕)에서 시험을 치를 수 있었고, 시권(試券)이나 방목에도 역시 시험을 치른 곳을 적도록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이은필에게 서울은 처향이나 외향이었을 가능성이 얼마든지 있었던 것이다. 궁금한 점은 또 있다. 이 만사를 접한 장소는 충청도가 아니라 전라도 김제였다. 그러니까 만사들이 원래는 충청도에 있다가 김제로 오게 되었다는 이야기인데, 그 이유는 알 수가 없다. 다만 이은필의 후손 누군가 김제로 이주하면서 본 만사들을 가지고 온 것이 아닐까 하는 막연한 추측을 할 뿐이다. 이은필은 생원시에 합격한 뒤에 능참봉을 지냈을 뿐이지만, 그가 죽었을 때 전국 각지의 유림들이 다투어 만시(輓詩)를 보낸 것으로 미루어 볼 때 유학자(儒學者)로서 상당한 명망을 누린 인물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는 광복 이후 어느 땐가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한편, 만사를 지은 전춘실은 정선(旌善)전씨의 후손이었다.○ 원문 텍스트 河 接人寬厚秉心仁稀壽於焉七十春可惜天恩惟貴爵自成花樹敍常 倫衣冠無復盘遊地日月難留永逝辰袞胤孝心能繼述黃臺千 載議靈神 旌善后人 全春實 謹拜哭輓 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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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원섭(金爰燮) 만사(輓詞) 고문서-시문류-만사 종교/풍속-관혼상제-만사 金爰燮 李殷弼 金爰燮 김제 만경 전주이씨가 전북대학교 한국학자료센터 김원섭(金爰燮)이 이은필(李殷弼)의 죽음을 슬퍼하며 지은 만사(輓詞). 김원섭(金爰燮)이 이은필(李殷弼)의 죽음을 슬퍼하며 지은 만사(輓詞)이다. 만사는 죽은 사람이 살았을 때의 공덕(公德)을 기리고, 그를 좋은 곳으로 인도한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만사에서의 '만(輓)'은 끈다는 의미인데, 이는 망자의 상여(喪輿)가 장지(葬地)로 나갈 때 만사를 앞세워 인도하게 한다는 의미에서 비롯된 말이다. 만사는 어떤 정형화된 형태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오언절구(五言絶句)와 오언율시(五言律詩) 또는 칠언절구(七言絶句)나 칠언율시(七言律詩)로 쓰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간혹 고시체(古詩體)를 본떠서 장문(長文)의 시(詩)의 짓거나 혹은 4자체(字體)로 쓰는 경우도 있다. 이 만사는 글자의 수로 보아 고시체의 장문의 시였다. 위에서 만사의 대상자를 이은필이라고 밝혔지만, 사실 이를 알아내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대부분의 만사가 그러하듯, 이 만사에서도 만사의 주인공 이름을 직접 거론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이 만사와 함께 묶어져 있던 115건의 만사의 그 어디에서도 이은필의 이름은 보이지 않고 있는 실정이었다. 따라서 위의 만사등 중에서, 만사 작성자 스스로가 이은필의 친척이라고 적은 것을 모은 후, 그 사람에 대한 정보를 토대로 이은필을 알아낼 수 있었다. 이은필(李殷弼)은 본관이 전주(全州)였으며, 1891년(고종 28)에 실시한 신묘식년시(辛卯式年試)의 생원시(生員試)에 합격하였다. 당시 그의 나이 불과 17세였다. 이후 문과(文科)에는 급제하지는 않았지만, 대한제국관원이력서에 따르면 그는 영릉참봉(寧陵參奉), 영희전참봉(永禧殿參奉), 의릉참봉(懿陵參奉), 원구단사제서참봉(圜丘壇祠祭署參奉),목릉참봉(穆陵參奉), 경릉참봉(景陵參奉) 등을 지낸 것으로 나온다. 그런데 이은필의 거주지와 관련하여 궁금한 점이 있다. 신묘식년시 사마방목(司馬榜目)에 의하면 그의 거주지는 서울이었다. 그러나 조사과정에서 확인한 이은필의 거주지는 서울이 아니라 충청도 제천(堤川)이었다. 그렇다면 이은필은, 소과 합격 당시에는 서울에 살았지만 나중에 충청도로 이주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듯하다. 아니면 소과 합격 당시의 실제 거주지도 제천이었을 가능성도 있다. 조선시대에의 과거는 그것이 문과든, 무과든, 소과든 관계없이 본향(本鄕)만이 아니라 삼향(三鄕), 즉 본향, 처향(妻鄕), 외향(外鄕)에서 시험을 치를 수 있었고, 시권(試券)이나 방목에도 역시 시험을 치른 곳을 적도록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이은필에게 서울은 처향이나 외향이었을 가능성이 얼마든지 있었던 것이다. 궁금한 점은 또 있다. 이 만사를 접한 장소는 충청도가 아니라 전라도 김제였다. 그러니까 만사들이 원래는 충청도에 있다가 김제로 오게 되었다는 이야기인데, 그 이유는 알 수가 없다. 다만 이인필의 후손 누군가 김제로 이주하면서 본 만사들을 가지고 온 것이 아닐까 하는 막연한 추측을 할 뿐이다. 이은필은 생원시에 합격한 뒤에 능참봉을 지냈을 뿐이지만, 그가 죽었을 때 전국 각지의 유림들이 다투어 만시(輓詩)를 보낸 것으로 미루어 볼 때 유학자(儒學者)로서 상당한 명망을 누린 인물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는 광복 이후 어느 땐가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한편, 만사를 지은 김원섭은 유학자로, 본인을 소생(小生)이라고 지극히 겸손한 표현을 쓴 김해(金海)의 후인이다.○ 원문 텍스트 稟性南極老人星漁樵共付七十年人間未作靑雲客 上何從白髮仙蘭庭別子無邊恨荊室令妻不盡緣爲 惜別泉臺路更杷丹旗送可憐 金海后人 小生金爰燮 謹再拜哭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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廣寒宮聞紫雲樂歸製霓裳羽衣曲 詩 六月 朴仁弼 機池年來厭聽秋風曲落水寒聲夜雨霽句天舊夢問秦王洞庭淸遊想軒帝銀橋萬里御風下雲裏希音落塵世風流天子好聲樂新曲梨園摠自製凉州短關耳徒聒仙枕遨遊夢自逝虹橋道士導我去廣寒宮中杳茫際星冠月佩列天衢大樂洋洋塵差除淸音怳惚帝予簫妙舞高低仙女袂開元日月太平帝天樂聲中羽化勢渢渢大響黙聽罷節秦分明異凡例春風歸坐繡領宮璇月蒼蒼紫雲翳猉獜寶帶摺而記左右伶官論仔細霓裳畓畓月中翻羽衣飄飄雲外揭淸音嬌舞異俗世樂府初傳新法制楊妑怳若素女態月裏瑤宮粧寶䯻三卽如坐上淸界庶幾心中擬萬歲秦㮨玉簫響短長楚臺神雲影迢遰人間天上一般樂太虛浮雲含笑㖒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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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년(某年) 종말(宗末) 서간(書簡) 고문서-서간통고류-서간 개인-생활-서간 宗末 朴佐郞 남원 수지 죽산박씨가 남원 수지 죽산박씨가 종말(宗末)이라고 자신을 지칭한 종인이 박용호(朴龍祜)에게 보낸 서간(書簡). 종말(宗末)이라고 자신을 지칭한 종인(宗人)이 박용호(朴龍祜)에게 보낸 서간(書簡)이다. 벼슬살이하는 상대방의 안부를 묻고 자신은 날마다 일로 바쁘고 병은 또 억지로 하기 어렵다고 하였다. 연석(筵席)에 출입하는 절차는 남이 지시해주는 바가 아니니, 다만 무리를 따라 나아가거나 물러나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하였다. 당시 박용호는 이조좌랑(吏曹佐郎)으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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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년(某年) 호곡(好谷) 서간(書簡) 고문서-서간통고류-서간 개인-생활-서간 好谷 黃生員 남원 수지 죽산박씨가 남원 수지 죽산박씨가 호곡(好谷)에서 황생원(黃生員)에게 보낸 서간(書簡). 호곡(好谷)에서 황생원(黃生員)에게 보낸 서간(書簡)이다. 보내준 편지를 받고 조리 중인 상대방이 편안함을 알았다며 자신은 부모님이 그런대로 지내시니 다행이라고 하였다. 환곡을 받아들이는 일로 날마다 힘들다며 상대방이 보내준 것은 백붕(百朋)을 준 것과 다름없다며 감사하였다. 편지의 일부만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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廣寒宮聞紫雲樂歸製霓裳羽衣曲 詩 六月 朴仁弼 機池雲象衣裳花象容太眞笑擧紅羅袂瑤池盛宴問周王洞庭淸遊夢軒帶三郞來自上淸界天籟洋洋舞袖曳風流天子好仙樂新曲梨園摠自製凉州短關厭俗態上林寒風問蟬蛻銀橋道士引我步廣寒宮中遊遠逝渢渢大樂動天衢月佩星冠列次第凌虛香步桂花陰戞雲淸音銀水際開元花鳥太平帶初見三淸仙樂制猉獜寶帶扌+習而記鄙奏分明異塵世龍袍歸坐繡領宮璇月蒼蒼紫雲翳昇平樂府曲新傳催喚伶官論仔細霓裳畓畓月中翻羽衣飄飄雲外揭秋風舊曲且莫奏落葉蕭蕭鳴玉砌依然坐我紫淸宮太虛浮雲含笑睇遊仙枕上未了債帝子欣然擬萬歲秦樓玉簫響高低楚臺神雲影迢遰香亭不遠白玉樓天樂聲中羽花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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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56년 박동승(朴東乘) 예조계후입안(禮曹繼後立案) 고문서-증빙류-입안 법제-소송/판결/공증-입안 咸豊六年正月上四日 行判書 李 朴進浩 咸豊六年正月上四日 行判書 李 서울 종로구 [官印] 15개 8.0*8.0(정방형) 적색 15개 남원 금지 밀양박씨가 남원 금지 밀양박씨가 1856년(철종 7) 정월 4일에 박태호(朴泰浩)의 후사(後嗣)로 박동승(朴東乘)을 삼는 일에 대하여 예조(禮曹)에서 국왕의 재결을 받아 발급해 준 계후입안(繼後立案)이다. 1856년(철종 7) 정월 4일에 예조(禮曹)에서 발급한 계후입안(繼後立案)이다. 행용인현감(行龍仁縣監) 박태호(朴泰浩)는 적처(嫡妻)와 첩(妾)에게서 후사 없이 죽었다. 그 뒤 광주(廣州)에 거주하는 진사(進士) 박진호(朴進浩)가 예조에 소지(所志)를 올려 박태호의 8촌 동생으로 남원(南原)에 거주하는 박상원(朴相源)의 아들 박동승(朴東乘)을 박태호의 후사로 삼아 대를 잇게 허락해 달라고 청원하였다. 양가(兩家)에서는 족친들이 서로 모여 상의를 한 끝에 박동승을 후사로 삼기로 정하였으나, 마침 양가의 부모가 모두 죽었기 때문에 관례대로 예사(禮斜)를 발급받을 수 있는 형편이 아니었다. 이에 문장(門長) 박진호가 예조에 소지를 올려 입안(立案)을 받고자 하였다. 예조에서는 사리를 따져 초기(草記)하고 임금에게서 재가를 받아, 이를 허가하는 입안을 발급하였다. 입안은 개인이 청원한 사실에 대하여 관(官)에서 이를 확인하여 공증해 주는 문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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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7년 황도여(黃道汝) 방매(放賣)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 고문서-명문문기류-토지매매명문 경제-매매/교역-토지매매명문 光緖三年丁丑二月初九日 黃道汝 光緖三年丁丑二月初九日 黃道汝 전북 부안군 [着名] 3개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1877년(고종 14) 2월 초9일 황도여(黃道汝)가 부안현(扶安縣) 하서면(下西面) 신기리(新基里)에 있는 논을 팔면서 작성한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 1877년(고종 14) 2월 초9일 황도여(黃道汝)가 부안현(扶安縣) 하서면(下西面) 신기리(新基里)에 있는 논을 팔면서 작성한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이다. 황도여는 흉년(凶年)이 들어 살아갈 방법이 없어 부득이하게 논을 팔게 되었다. 보통 명문(明文)에서는 땅을 파는 이유를 가계가 어렵거나, 장례비용이 없거나, 흉년이 들거나, 다른 땅이나 집을 사려는 등 다양하고 구체적으로 기재하였다. 매매의 대상이 된 토지는 부안현 하서면 신기리 전평(前坪) 중자답(中字畓) 4두락지(斗落只)이며 부수(負數)로는 6부(負) 5속(束)인 곳이다. 방매(放賣) 가격은 30냥이다. 조선 시대에는 토지의 면적을 표기할 때 수확량, 파종량, 경작시간 등을 기준으로 산출하여 기재하였다. 수확량을 기준으로 했을 때는 결(結), 부(負,卜) 속(束) 등의 단위를 사용하였고, 파종량을 기준으로 했을 때는 두락지(斗落只), 승낙지(升落只) 등을 사용했다. 또한, 경작시간을 기준으로 한 면적 단위는 기일경(幾日耕) 등이 있다. 이 문서에는 파종량과 수확량을 기준으로 면적을 표기하였다. 매도인(賣渡人) 황도여는 자신이 가지고 있던 구문기(舊文記) 1장(丈)과 새로 작성한 문서 1장을 매수인(買受人)에게 넘겨주었다. 신문기(新文記)에 '영영방매(永永放賣)'라고 적어 영구히 소유권을 넘겨준다는 점을 밝히고 있으며, 차후에 시비가 생기면 이 문서를 가지고 증빙하라고 하였다. 거래참여자에 대한 사항은 문서의 맨 마지막에 기록하였다. 이 거래에는 답(畓)의 주인 유학(幼學) 황도여, 증인(證人)은 유학 김치일(金致鎰), 필집(筆執)으로는 유학 김소성(金少成)참여하여 서명하였다. 이 문서가 소장된 부안 선은동전주이씨가에는 19세기 초부터 20세기 초까지 작성되었던 명문 5백여 점이 전하고 있어서 이 가문이 당시에 경제적으로 상당한 기반을 축적하였음을 알 수 있다. 명문뿐만 아니라 산송(山訟) 관련 소지(所志)도 다수 소장되어 있다. 한편 이 가문의 것으로 추정되는 호적문서 31건이 호남권 한국학자료센터의 고문서DB로 구축되어 있어서 작성연대가 간지로만 적혀 있는 명문과 소지의 정확한 작성연대를 파악하는데 상당한 도움을 얻을 수 있다. 호적문서는 1801년부터 1888년까지 부안 동도면 선은동에서 계속 작성되었는데, 여기에 기재된 호주들의 이름은 이양호(李養灝), 이양락(李養洛), 이양순(李養淳), 이양식(李養湜), 이익용(李翼容), 이겸용(李謙容), 이규함(李圭咸), 이규정(李奎井) 등이다.

상세정보
저자 :
(편저자)
유형 :
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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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문문기류

<연도>道光二十四年甲辰</연도>十二月初九日 前明文右明文事段切有要用處自己買得伏在<지명>一道面定只堤</지명>下深字畓拾貳斗落只所耕三十五負八束庫果又二負四束庫乙折價錢文壹百柒拾兩依數捧上爲遣本文他五丈並以右人前永永放賣爲去乎日後若有異談是去等以此文記告 官卞正事畓主<인명>辛寬一</인명>[着名]證人幼學<인명>崔煌</인명>[着名]筆執幼學<인명>尹相台</인명>[着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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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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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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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문문기류

1843년 신관일(辛寬一)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 고문서-명문문기류-토지매매명문 경제-매매/교역-토지매매명문 道光貳拾參年癸卯十一月初六日 辛寬億 辛寬一 道光貳拾參年癸卯十一月初六日 辛寬億 전북 부안군 [着名] 3개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1843년(헌종 9)11월 6일에 유학(幼學) 신관억(辛寬億)이 부안현(扶安縣) 일도면(一道面)에 있는 논을 신관일(辛寬一)에게 팔면서 작성한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 1843년(헌종 9) 11월 6일에 유학(幼學) 신관억(辛寬億)이 부안현(扶安縣) 일도면(一道面)에 있는 논을 신관일(辛寬一)에게 팔면서 작성한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이다. 신관억은 긴요하게 돈을 사용할 일이 있어서 선대로부터 물려받은 부안현 일도면 정지제(定只堤) 아래 심자답(深字畓) 12마지기, 부수(負數)로는 35부 8속과 2부 4속이 되는 곳을 신관일에게 182냥에 팔았다. 매매 당시 구문기 4장을 매입자에게 건네주면서 나중에 자손들이 이 논을 두고 여러 말이 있으면 이 문서를 관(官)에 고하여 바로잡으라고 하였다. 거래 당시 논 주인 신관억과 필집(筆執)으로 유학 김홍역(金洪說) 증인(證人)으로 유학 김원묵(金源黙) 등 3인이 참여하여 함께 서명하였다. 이 문서가 소장된 부안의 선은동 전주이씨가에는 19세기 초부터 20세기 초까지 작성되었던 명문 5백여 점이 전하고 있어서 이 가문이 당시에 경제적으로 상당한 기반을 축적하였음을 알 수 있다. 명문 뿐만 아니라 산송(山訟) 관련 소지(所志)도 다수 소장되어 있다. 한편 이 가문의 것으로 추정되는 호적문서 31건이 호남권 한국학자료센터의 고문서DB로 구축되어 있어서 작성연대가 간지로만 적혀 있는 명문과 소지의 정확한 작성연대를 파악하는데 상당한 도움을 얻을 수 있다. 호적문서는 1801년부터 1888년까지 부안 동도면 선은동에서 계속 작성되었는데, 여기에 기재된 호주들의 이름은 이양호(李養灝), 이양락(李養洛), 이양순(李養淳), 이양식(李養湜), 이익용(李翼容), 이겸용(李謙容), 이규함(李圭咸), 이규정(李奎井) 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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