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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4년 권병택(權秉澤) 수표(手標) 1 고문서-증빙류-수표 경제-회계/금융-수표 甲戌三月初九日 權秉澤 李奎炫 甲戌三月初九日 權秉澤 전북 부안군 [署押] 1개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1874년(고종 11) 3월 초9일에 권병택(權秉澤)이 오는 10월까지 이장(移葬)하겠다고 약속하면서 이규현(李奎鉉)에게 작성해 준 수표(手標). 1874년(고종 11) 3월 초9일에 권병택(權秉澤)이 오는 10월까지 이장(移葬)하겠다고 약속하면서 이규현(李奎鉉)에게 작성해 준 수표(手標)이다. 권병택은 부모의 묘를 함양군(咸陽郡) 백전리(栢田里) 대방촌(大方村) 뒤에 있는 이규현의 고조(高祖)의 산소가 있는 곳에 옮겨 썼다. 당초 입장(入葬)할 때에도 나중에 이장하려고 했지만 이규현이 쫓아와 남의 선산에 쓴 무덤을 파내가라고 독촉하자 오는 10월에 이장하겠다고 약속하면서 이 수기를 작성하여 이규현에게 주었다. 그러나 관련문서 "1874년 권병택(權秉澤) 수표(手標) 2"에 따르면 권병택은 이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그 해 10월이 되어도 권병택이 이장을 하지 않자, 이규현은 다시 권병택에게 무덤을 파가라고 독촉했다. 이에 권병택은 내년 10월까지는 꼭 이장하겠다고 약속하는 수기(手記)를 다시 작성하여 이씨측에 넘겨 주었다. 이 문서에서 나오는 이규현(李奎炫)은 사마방목(司馬榜目)에 따르면, 1849년(헌종 15)에 식년시 진사시에 합격한 진사(進士)였다. 생원을 진사로 부른 것으로 보인다. 합격 당시 그의 거주지가 연안(延安)으로 되어 있지만, 실제 거주지는 부안이었다. 그는 오랫동안 부안현(扶安縣) 동도면(東道面) 선은동(仙隱洞)에 살았던 전주이씨(全州李氏) 문중의 일원이었다. 그러나 그보다 훨씬 전에는 이들 전주이씨 선대의 세거지는 함양군 대방촌이었다. 한편 이 수기가 소장된 부안의 선은동 전주이씨가에는 산송(山訟) 관련 소지(所志)가 다수 소장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19세기 초부터 20세기 초까지 작성되었던 명문 5백여 점이 전하고 있어서 이 가문이 당시에 경제적으로 상당한 기반을 축적하였음을 알 수 있다. 한편 이 가문의 것으로 추정되는 호적문서 31건이 호남권 한국학자료센터의 고문서DB로 구축되어 있어서 작성연대가 간지로만 적혀 있는 명문과 소지의 정확한 작성연대를 파악하는데 상당한 도움을 얻을 수 있다. 호적문서는 1801년부터 1888년까지 부안 동도면 선은동에서 계속 작성되었는데, 여기에 기재된 호주들의 이름은 이양호(李養灝), 이양락(李養洛), 이양순(李養淳), 이양식(李養湜), 이익용(李翼容), 이겸용(李謙容), 이규함(李圭咸), 이규정(李奎井) 등이다. 한편, 이 문서에는 작성연대가 갑술년으로만 나오지만, 이규현의 사마시 합격년도와 관련문서를 통하여 갑술년을 1874년으로 추정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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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도>壬午</연도>十月十八日三道宗錢分給記奴<인명>小礼丹</인명> 六兩奴<인명>小改春</인명> 六兩七戔五令伯 一兩<인명>盧生員</인명> 三兩<인명>許汝長</인명> 四兩該三道宗稧錢分排收<지명>扶安</지명>宗人三兩用來秋時祭日並本利四兩五戔持來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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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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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문문기류

<인명>奎彩</인명><인명>奎七</인명><인명>相善</인명> 宗中一不禁用事<연도>己卯</연도>十月十八日秋講行時並本利捧上錢七十兩果正租三十一斗五升也三道宗人七兩式頃下餘錢五十兩畓三斗落價頃下實在租三十一斗五升永五處分給事來按有司<인명>俊汝</인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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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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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도>戊戌</연도>二月卄七日<지명>定只堤</지명>下畓價柒仟兩內肆仟兩上參仟兩捧留印票主 <인명>李聚五</인명>[着名]此亦中新舊文推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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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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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문류

松山明水麗玉川陽降我地仙卽午堂延壽百年南極老積陰永世後昆昌一般風致胸襟月千首詞源牙顂香鸞鶴飄然何處去萬古靑山淚滿裳 <지명>丹城</지명>后人<인명>禹潤碩</인명> 謹再拜痛哭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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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준(李成俊) 만사(輓詞) 고문서-시문류-만사 종교/풍속-관혼상제-만사 이성준 李殷弼 김제 만경 전주이씨가 전북대학교 한국학자료센터 이성준(李成俊)이 이은필(李殷弼)의 죽음을 슬퍼하며 지은 만사(輓詞) 이성준(李成俊)이 이은필(李殷弼)의 죽음을 슬퍼하며 지은 만사(輓詞)이다. 만사는 죽은 사람이 살았을 때의 공덕(公德)을 기리고, 그를 좋은 곳으로 인도한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만사에서의 '만(輓)'은 끈다는 의미인데, 이는 망자의 상여(喪輿)가 장지(葬地)로 나갈 때 만사를 앞세워 인도하게 한다는 의미에서 비롯된 말이다. 만사는 어떤 정형화된 형태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오언절구(五言絶句)와 오언율시(五言律詩) 또는 칠언절구(七言絶句)나 칠언율시(七言律詩)로 쓰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간혹 고시체(古詩體)를 본떠서 장문(長文)의 시(詩)의 짓거나 혹은 4자체(字體)로 쓰는 경우도 있다. 위에서 만사의 대상자를 이은필이라고 밝혔지만, 사실 이를 알아내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대부분의 만사가 그러하듯, 이 만사에서도 만사의 주인공 이름을 직접 거론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이 만사와 함께 묶어져 있던 115건의 만사의 그 어디에서도 이은필의 이름은 보이지 않고 있는 실정이었다. 따라서 위의 만사들 중에서, 만사 작성자 스스로가 이은필의 친척이라고 적은 것을 모은 후, 그 사람에 대한 정보를 토대로 이은필을 알아낼 수 있었다. 이은필(李殷弼)은 본관이 전주(全州)였으며, 1891년(고종 28)에 실시한 신묘식년시(辛卯式年試)의 생원시(生員試)에 합격하였다. 당시 그의 나이 불과 17세였다. 이후 문과(文科)에는 급제하지는 않았지만, 대한제국관원이력서에 따르면 그는 영릉참봉(寧陵參奉), 영희전참봉(永禧殿參奉), 의릉참봉(懿陵參奉), 원구단사제서참봉(圜丘壇祠祭署參奉), 목릉참봉(穆陵參奉), 경릉참봉(景陵參奉) 등을 지낸 것으로 나온다. 그런데 이은필의 거주지와 관련하여 궁금한 점이 있다. 신묘식년시 사마방목(司馬榜目)에 의하면 그의 거주지는 서울이었다. 그러나 조사과정에서 확인한 이은필의 거주지는 서울이 아니라 충청도 제천(堤川)이었다. 그렇다면 이은필은, 소과 합격 당시에는 서울에 살았지만 나중에 충청도로 이주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듯하다. 아니면 소과 합격 당시의 실제 거주지도 제천이었을 가능성도 있다. 조선시대에의 과거는 그것이 문과든, 무과든, 소과든 관계없이 본향(本鄕)만이 아니라 삼향(三鄕), 즉 본향, 처향(妻鄕), 외향(外鄕)에서 시험을 치를 수 있었고, 시권(試券)이나 방목에도 역시 시험을 치른 곳을 적도록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이은필에게 서울은 처향이나 외향이었을 가능성이 얼마든지 있었던 것이다. 궁금한 점은 또 있다. 이 만사를 접한 장소는 충청도가 아니라 전라도 김제였다. 그러니까 만사들이 원래는 충청도에 있다가 김제로 오게 되었다는 이야기인데, 그 이유는 알 수가 없다. 다만 이은필의 후손 누군가 김제로 이주하면서 본 만사들을 가지고 온 것이 아닐까 하는 막연한 추측을 할 뿐이다. 이은필은 생원시에 합격한 뒤에 능참봉을 지냈을 뿐이지만, 그가 죽었을 때 전국 각지의 유림들이 다투어 만시(輓詩)를 보낸 것으로 미루어 볼 때 유학자(儒學者)로서 상당한 명망을 누린 인물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는 광복 이후 어느 땐가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한편, 만사를 지은 이성준은 자신을 정하생(情下生)이라고 표현하고 있는데, 이는 정의가 두터운 사이에 자신을 낮추어 이르는 말이다.○ 원문 텍스트 死生有數必乎天來作杜翁去作仙驛馬蕭蕭春色帶江鴻漠漠夕陽憐 家諭戶誦令孫託典籍禮文允玉傳舊宅遺風何處見高山流正依然 情下生李成俊 謹拜哭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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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연기(金蓮基) 만사(輓詞) 고문서-시문류-만사 종교/풍속-관혼상제-만사 金蓮基 李殷弼 金蓮基 김제 만경 전주이씨가 전북대학교 한국학자료센터 김연기(金蓮基)가 이은필(李殷弼)의 죽음을 슬퍼하며 지은 만사(輓詞). 김연기(金蓮基)가 이은필(李殷弼)의 죽음을 슬퍼하며 지은 만사(輓詞)이다. 만사는 죽은 사람이 살았을 때의 공덕(公德)을 기리고, 그를 좋은 곳으로 인도한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만사에서의 '만(輓)'은 끈다는 의미인데, 이는 망자의 상여(喪輿)가 장지(葬地)로 나갈 때 만사를 앞세워 인도하게 한다는 의미에서 비롯된 말이다. 만사는 어떤 정형화된 형태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오언절구(五言絶句)와 오언율시(五言律詩) 또는 칠언절구(七言絶句)나 칠언율시(七言律詩)로 쓰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간혹 고시체(古詩體)를 본떠서 장문(長文)의 시(詩)의 짓거나 혹은 4자체(字體)로 쓰는 경우도 있다. 이 만사는 글자의 수로 보아 고시체의 장문의 시였다. 위에서 만사의 대상자를 이은필이라고 밝혔지만, 사실 이를 알아내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대부분의 만사가 그러하듯, 이 만사에서도 만사의 주인공 이름을 직접 거론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이 만사와 함께 묶어져 있던 115건의 만사의 그 어디에서도 이은필의 이름은 보이지 않고 있는 실정이었다. 따라서 위의 만사등 중에서, 만사 작성자 스스로가 이은필의 친척이라고 적은 것을 모은 후, 그 사람에 대한 정보를 토대로 이은필을 알아낼 수 있었다. 이은필(李殷弼)은 본관이 전주(全州)였으며, 1891년(고종 28)에 실시한 신묘식년시(辛卯式年試)의 생원시(生員試)에 합격하였다. 당시 그의 나이 불과 17세였다. 이후 문과(文科)에는 급제하지는 않았지만, 대한제국관원이력서에 따르면 그는 영릉참봉(寧陵參奉), 영희전참봉(永禧殿參奉), 의릉참봉(懿陵參奉), 원구단사제서참봉(圜丘壇祠祭署參奉),목릉참봉(穆陵參奉), 경릉참봉(景陵參奉) 등을 지낸 것으로 나온다. 그런데 이은필의 거주지와 관련하여 궁금한 점이 있다. 신묘식년시 사마방목(司馬榜目)에 의하면 그의 거주지는 서울이었다. 그러나 조사과정에서 확인한 이은필의 거주지는 서울이 아니라 충청도 제천(堤川)이었다. 그렇다면 이은필은, 소과 합격 당시에는 서울에 살았지만 나중에 충청도로 이주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듯하다. 아니면 소과 합격 당시의 실제 거주지도 제천이었을 가능성도 있다. 조선시대에의 과거는 그것이 문과든, 무과든, 소과든 관계없이 본향(本鄕)만이 아니라 삼향(三鄕), 즉 본향, 처향(妻鄕), 외향(外鄕)에서 시험을 치를 수 있었고, 시권(試券)이나 방목에도 역시 시험을 치른 곳을 적도록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이은필에게 서울은 처향이나 외향이었을 가능성이 얼마든지 있었던 것이다. 궁금한 점은 또 있다. 이 만사를 접한 장소는 충청도가 아니라 전라도 김제였다. 그러니까 만사들이 원래는 충청도에 있다가 김제로 오게 되었다는 이야기인데, 그 이유는 알 수가 없다. 다만 이인필의 후손 누군가 김제로 이주하면서 본 만사들을 가지고 온 것이 아닐까 하는 막연한 추측을 할 뿐이다. 이은필은 생원시에 합격한 뒤에 능참봉을 지냈을 뿐이지만, 그가 죽었을 때 전국 각지의 유림들이 다투어 만시(輓詩)를 보낸 것으로 미루어 볼 때 유학자(儒學者)로서 상당한 명망을 누린 인물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는 광복 이후 어느 땐가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한편, 만사를 지은 김연기는 유학자로, 김해(金海)의 후인이다.○ 원문 텍스트 海山是月送神仙一夢遼隔窩背天惟公小富由勤一業與 我親交稱忘年是覺浮生生有限孰有此逝逝堪憐七旬 餘歲星南老升子桐孫永世傳 金海后人 金蓮基 謹拜 哭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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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명>任文淑</인명> 十三斗落一石十斗<인명>任殷淑</인명> 正穀 十三斗 十八斗落<인명>任道日</인명><인명>任世京</인명><인명>任道英</인명> 十三斗落一石<인명>任昌杋</인명><인명>劉乃元</인명> 十三斗落 二石五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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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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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문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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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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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문류

박경필(朴敬弼) 만사(輓詞) 고문서-시문류-만사 종교/풍속-관혼상제-만사 박경필 李殷弼 김제 만경 전주이씨가 전북대학교 한국학자료센터 박경필(朴敬弼)이 이은필(李殷弼)의 죽음을 슬퍼하며 지은 만사(輓詞) 박경필(朴敬弼)이 이은필(李殷弼)의 죽음을 슬퍼하며 지은 만사(輓詞)이다. 만사는 죽은 사람이 살았을 때의 공덕(公德)을 기리고, 그를 좋은 곳으로 인도한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만사에서의 '만(輓)'은 끈다는 의미인데, 이는 망자의 상여(喪輿)가 장지(葬地)로 나갈 때 만사를 앞세워 인도하게 한다는 의미에서 비롯된 말이다. 만사는 어떤 정형화된 형태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오언절구(五言絶句)와 오언율시(五言律詩) 또는 칠언절구(七言絶句)나 칠언율시(七言律詩)로 쓰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간혹 고시체(古詩體)를 본떠서 장문(長文)의 시(詩)의 짓거나 혹은 4자체(字體)로 쓰는 경우도 있다. 위에서 만사의 대상자를 이은필이라고 밝혔지만, 사실 이를 알아내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대부분의 만사가 그러하듯, 이 만사에서도 만사의 주인공 이름을 직접 거론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이 만사와 함께 묶어져 있던 115건의 만사의 그 어디에서도 이은필의 이름은 보이지 않고 있는 실정이었다. 따라서 위의 만사들 중에서, 만사 작성자 스스로가 이은필의 친척이라고 적은 것을 모은 후, 그 사람에 대한 정보를 토대로 이은필을 알아낼 수 있었다. 이은필(李殷弼)은 본관이 전주(全州)였으며, 1891년(고종 28)에 실시한 신묘식년시(辛卯式年試)의 생원시(生員試)에 합격하였다. 당시 그의 나이 불과 17세였다. 이후 문과(文科)에는 급제하지는 않았지만, 대한제국관원이력서에 따르면 그는 영릉참봉(寧陵參奉), 영희전참봉(永禧殿參奉), 의릉참봉(懿陵參奉), 원구단사제서참봉(圜丘壇祠祭署參奉), 목릉참봉(穆陵參奉), 경릉참봉(景陵參奉) 등을 지낸 것으로 나온다. 그런데 이은필의 거주지와 관련하여 궁금한 점이 있다. 신묘식년시 사마방목(司馬榜目)에 의하면 그의 거주지는 서울이었다. 그러나 조사과정에서 확인한 이은필의 거주지는 서울이 아니라 충청도 제천(堤川)이었다. 그렇다면 이은필은, 소과 합격 당시에는 서울에 살았지만 나중에 충청도로 이주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듯하다. 아니면 소과 합격 당시의 실제 거주지도 제천이었을 가능성도 있다. 조선시대에의 과거는 그것이 문과든, 무과든, 소과든 관계없이 본향(本鄕)만이 아니라 삼향(三鄕), 즉 본향, 처향(妻鄕), 외향(外鄕)에서 시험을 치를 수 있었고, 시권(試券)이나 방목에도 역시 시험을 치른 곳을 적도록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이은필에게 서울은 처향이나 외향이었을 가능성이 얼마든지 있었던 것이다. 궁금한 점은 또 있다. 이 만사를 접한 장소는 충청도가 아니라 전라도 김제였다. 그러니까 만사들이 원래는 충청도에 있다가 김제로 오게 되었다는 이야기인데, 그 이유는 알 수가 없다. 다만 이은필의 후손 누군가 김제로 이주하면서 본 만사들을 가지고 온 것이 아닐까 하는 막연한 추측을 할 뿐이다. 이은필은 생원시에 합격한 뒤에 능참봉을 지냈을 뿐이지만, 그가 죽었을 때 전국 각지의 유림들이 다투어 만시(輓詩)를 보낸 것으로 미루어 볼 때 유학자(儒學者)로서 상당한 명망을 누린 인물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는 광복 이후 어느 땐가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한편, 만사를 지은 박경필은 반성(潘城)박씨의 후손이었다.○ 원문 텍스트 松 島川華閥舊関東情契平生與我同南極至今應益壽北邙從古別無雄靑{毛+云}事業相傳世 白首仙綠羽化翁薛鳳筍龍人所羡公家餘慶繼無窮 潘城后人朴敬弼謹再拜 哭輓 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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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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첩관통보류

機池上有司稟目爲行下事本坊士人朴東禎乃乙亥大無餘戶番時番名橫入者也鄕有儒會所之狀坊有上有司之稟目竟承頉番之題矣其時該色抑何所見稱以依施頉番云是遣渠矣累次所呈狀與儒狀坊稟一並仍置於其矣文書櫃在中云故以無識之致同文{案/乙}不推來矣其時城主謝歸之後東禎之番更出則同東禎羞人瞻聆其年番錢暗地擔當是遣同文{案/乙}這這推尋是乎則已入於其時該色李春永身死後遺失中云故更聒官庭極涉猥越逐年暗當者亦以無識之致而番亦甘受然顧厥先業則非但不肖累名可恃是㫆又東禎之姪仁錫橫入番名者亦以其叔之故也其叔當番其侄又番則哀彼東禎乃是番民之家不是簪纓之族而大抵東禎本以密城君後裔淸州大族我東美門恭孝公之十一代孫也訥齋公之九代孫也江叟先生其八世祖也棄窩先生其四世祖也而其前後文蹟與世譜昭昭可見者也幸我城主亦向已參商矣自棄窩于今四世于玆土科聲間寂班名世守然家力本窮農業自修便是常人樣故本坊面任之瞞報良以是也叔侄番名之俱侵亦以是也其四祖則無顯官之班而其高祖之棄窩之孫者烏可有番名乎玆以鄕內齊顙之發通本坊者慨此橫侵從公議雪寃之致也民亦上有司名色者實是齊憤之餘不可含嘿故如是累陳以稟爲去乎細細洞燭同番名特爲頉下俾此殘班堇守先業之地謹冒昧以稟癸未十一月日上有司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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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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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간통고류

1833년 홍석모(洪錫謨) 서간(書簡) 고문서-서간통고류-서간 개인-생활-서간 九月念一日 錫謨 朴 正言宅 九月念一日 洪錫謨 남원 수지 죽산박씨가 남원 수지 죽산박씨가 1833년(순조 33) 9월 21일 홍석모(洪錫謨)가 박용호(朴龍祜)에게 보낸 서간(書簡). 1833년(순조 33) 9월 21일 홍석모(洪錫謨)가 박용호(朴龍祜)에게 보낸 서간(書簡)이다. 조섭 중인 상대방은 병이 나아가고 있는지 묻고 자신은 여전하나 재정(災政) 때문에 힘들다고 하였다. 판여(板輿 홍석모의 아버지) 행차가 이달 16일 떠났다고 하였다. 별지(別紙)를 본 뒤에 널리 알려 무정하다는 책망을 면하게 해달라고 하였다. 당시 홍석모는 남원 부사였고, 그의 아버지는 홍희준(洪羲俊)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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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형 :
고문서
유형분류 :
서간통고류

1862년 한태홍(韓泰弘) 서간(書簡) 고문서-서간통고류-서간 개인-생활-서간 壬戌元月念四日 韓泰弘 壬戌元月念四日 韓泰弘 남원 수지 죽산박씨가 남원 수지 죽산박씨가 1862년(철종 13) 1월 24일 한태홍(韓泰弘)이 보낸 서간(書簡). 1862년(철종 13) 1월 24일 한태홍(韓泰弘)이 보낸 서간(書簡)이다. 새해가 된 이후로 소식을 듣지 못해 그리워하던 중 편지를 받으니 얼굴을 마주한 것 같다며 시탕(侍湯)하는 상대방의 안부를 묻고 자신은 부모님이 그런대로 지내시니 다행이라고 하였다. 지나간 일은 만나지 않느니만 못하다며 한가한 틈에 방문할 계획이며 조카가 병으로 고생하고 있다고 답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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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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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유형분류 :
교령류

1851년 박진원(朴振元) 차첩(差帖) 고문서-교령류-차첩 정치/행정-임면-차첩 辛亥 府使 閑良朴振元 辛亥 1851 府使 전북 남원시 [署押] 7.0*7.0(정방형) 적색 3개 남원 금지 밀양박씨가 남원 금지 밀양박씨가 1851년(철종 2) 8월에 남원부사(南原府使)가 박진원(朴振元)에게 내려 준 차첩(差帖) 1851년(철종 2) 8월에 남원부사(南原府使)가 박진원(朴振元)에게 내려 준 차첩(差帖)이다. 차첩은 직사는 있지만 녹봉이 전해져 있지 않은 관직자를 임명할 때 내려 주는 문서를 말한다. 차첩에는 국왕의 결재(決裁)를 받아 임명하는 구전(口傳) 차첩과 국왕의 결재 없이 관아(官衙) 장(長)의 직권(職權)으로 임명하는 관장(官長) 차첩이 있었는데, 본 차첩은 후자에 속한다. 본 차첩의 내용은 박진원을 속오군(束伍軍) 右部(우부) 우사(右司)의 파총(把摠)으로 임명한다는 것이었다. 속오군이란 주지하는 바와 같이 임진왜란 이후 편성된 외방 군대를 말한다. 양반과 상민(常民), 아전(衙前), 노비 등으로 편성된 군대로서, 일종의 예비군의 성격을 띠고 있었는데, 각 외방의 주민은 대부분 속오군으로 편성되어, 평상시에는 농사와 무예 훈련을 하다가 전쟁이 일어났을 때는 소집되어 국가 방어에 동원되었다. 박진원에게 주어진 파총은 종5품에 해당하는 무관직이었다. 각 외방의 속오군은 좌부와 우부로 구분되고, 각 부 안에 좌사와 우사가 있었는데, 속오군은 영장(營將)이 최고 지휘관이고 그 밑에 천총(千摠), 그 밑에 파총(把摠), 그 밑에 초관(哨官)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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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형 :
고문서
유형분류 :
명문문기류

<연도>光緖十三年丙戌</연도>三月十八日 前明文右明文事段切有緊用處<지명>下西頓池</지명>前後捧〖坪〗拾貳斗五升落只 所耕二十七負四束㐣折價錢文伍拾五兩依數捧上是遣舊文記十丈幷以新文記一丈右人前永永放賣爲去乎日後若有他說是去等以此明文告 官憑考事畓主 <지명>金堤</지명> <인명>千順執</인명>[着名]證人 <인명>李士卞</인명>[着名]筆執 <인명>金成有</인명>[着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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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편저자)
유형 :
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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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문문기류

<연도>同治九年庚午</연도>十二月初十日<인명>李生員奎煥</인명>前明文右明文事以要用所致自己買得伏在<지명>一道鳳凰</지명>後馬頃坪㭗字畓三斗落只所耕七負三束㐣価折錢文貳拾柒兩依數捧上是遣旧文記三丈新文一丈右人前永永放賣爲去乎日後若有異端則持此文記憑考事畓主 閑良 <인명>崔成龍</인명> 喪不着證人 幼學 <인명>田仁豊</인명>[着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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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6년 천순집(千順執) 방매(放賣)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 고문서-명문문기류-토지매매명문 경제-매매/교역-토지매매명문 光緖十三年丙戌三月十八日 千順執 光緖十三年丙戌三月十八日 千順執 전북 부안군 [着名] 3개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1886년(고종 23) 3월 18일에 천순집(千順執)이 부안현(扶安縣) 하서면(下西面) 돈지(頓池)에 있는 논을 팔면서 작성한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 1886년(고종 23) 3월 18일에 천순집(千順執)이 부안현(扶安縣) 하서면(下西面) 돈지(頓池)에 있는 논을 팔면서 작성한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이다. 김제(金堤)에 사는 천순집이 논을 파는 이유는 '절유긴용(切有緊用)'이라 하여 긴히 돈을 쓸 곳이 있어서라고 밝히고 있다. 보통 명문(明文)에서는 땅을 파는 이유를 가계가 어렵거나, 장례비용이 없거나, 흉년이 들거나, 다른 땅이나 집을 사려는 등 다양하고 구체적으로 기재하였다. 매매의 대상이 된 토지는 부안현 하서면 돈지에 있는 논 12두(斗) 5승락지(升落只)로 부수(負數)로는 27부(負) 4속(束)인 곳이며, 방매(放賣) 가격은 55냥이다. 조선 시대에는 토지의 면적을 표기할 때 수확량, 파종량, 경작시간 등을 기준으로 산출하여 기재하였다. 수확량을 기준으로 했을 때는 결(結), 부(負,卜) 속(束) 등의 단위를 사용하였고, 파종량을 기준으로 했을 때는 두락지(斗落只), 승낙지(升落只) 등을 사용했다. 또한, 경작시간을 기준으로 한 면적 단위는 기일경(幾日耕) 등이 있다. 이 문서에는 파종량과 수확량을 기준으로 면적을 표기하였다. 매도인(賣渡人) 천순집은 새로 작성한 문서 1장(丈)과 자신이 가지고 있던 구문기(舊文記) 10장을 매수인(買受人)에게 넘겨주었다. 신문기(新文記)에 '영영방매(永永放賣)'라고 적어 영구히 소유권을 넘겨준다는 점을 밝히고 있으며, 차후에 시비가 생기면 이 문서를 관(官)에 가져가 증빙하라고 하였다. 거래참여자에 대한 사항은 문서의 마지막에 기록하였다. 이 거래에는 논의 주인 천순집과 증인(證人)으로 이사변(李士卞), 필집(筆執)으로는 김서유(金成有)가 참여하여 서명하였다. 그리고 이 문서가 작성된 병술년(丙戌年)은 1886년으로 광서(光緖) 13년이 아니라 광서(光緖) 12년이다. 여기에서는 간지를 기준으로 하여 작성연대를 추정하였다. 이 문서가 소장된 부안 선은동전주이씨가에는 19세기 초부터 20세기 초까지 작성되었던 명문 5백여 점이 전하고 있어서 이 가문이 당시에 경제적으로 상당한 기반을 축적하였음을 알 수 있다. 명문뿐만 아니라 산송(山訟) 관련 소지(所志)도 다수 소장되어 있다. 한편 이 가문의 것으로 추정되는 호적문서 31건이 호남권 한국학자료센터의 고문서DB로 구축되어 있어서 작성연대가 간지로만 적혀 있는 명문과 소지의 정확한 작성연대를 파악하는데 상당한 도움을 얻을 수 있다. 호적문서는 1801년부터 1888년까지 부안 동도면 선은동에서 계속 작성되었는데, 여기에 기재된 호주들의 이름은 이양호(李養灝), 이양락(李養洛), 이양순(李養淳), 이양식(李養湜), 이익용(李翼容), 이겸용(李謙容), 이규함(李圭咸), 이규정(李奎井) 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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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도길(柳道吉) 만사(輓詞) 고문서-시문류-만사 종교/풍속-관혼상제-만사 柳道吉 李殷弼 柳道吉 김제 만경 전주이씨가 전북대학교 한국학자료센터 유도길(柳道吉)이 이은필(李殷弼)의 죽음을 슬퍼하며 지은 만사(輓詞). 유도길(柳道吉)이 이은필(李殷弼)의 죽음을 슬퍼하며 지은 만사(輓詞)이다. 만사는 죽은 사람이 살았을 때의 공덕(公德)을 기리고, 그를 좋은 곳으로 인도한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만장에서의 '만(輓)'은 끈다는 의미인데, 이는 망자의 상여(喪輿)가 장지(葬地)로 나갈 때 만장을 앞세워 인도하게 한다는 의미에서 비롯된 말이다. 만사는 어떤 정형화된 형태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오언절구(五言絶句)와 오언율시(五言律詩) 또는 칠언절구(七言絶句)나 칠언율시(七言律詩)로 쓰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간혹 고시체(古詩體)를 본떠서 장문(長文)의 시(詩)의 짓거나 혹은 4자체(字體)로 쓰는 예도 있다. 이 만사는 글자의 수로 보아 칠언절구였다. 위에서 만사의 대상자를 이은필이라고 밝혔지만, 사실 이를 알아내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대부분의 만사가 그러하듯, 이 만사에서도 만사의 주인공 이름을 직접 거론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뿐만 아니라 이 만사와 함께 묶어져 있던 115건의 만사의 그 어디에서도 이은필의 이름은 보이지 않고 있었다. 따라서 위의 만사 등 중에서, 만사 작성자 스스로가 이은필의 친척이라고 적은 것을 모은 후, 그 사람에 대한 정보를 토대로 이은필을 알아낼 수 있었다. 이은필(李殷弼)은 본관이 전주(全州)였으며, 1891년(고종 28)에 실시한 신묘식년시(辛卯式年試)의 생원시(生員試)에 합격하였다. 당시 그의 나이 불과 17세였다. 이후 문과(文科)에는 급제하지는 않았지만, 대한제국관원이력서에 따르면 그는 영릉참봉(寧陵參奉), 영희전참봉(永禧殿參奉), 의릉참봉(懿陵參奉), 원구단사제서참봉(圜丘壇祠祭署參奉), 목릉참봉(穆陵參奉), 경릉참봉(景陵參奉) 등을 지낸 것으로 나온다. 그런데 이은필의 거주지와 관련하여 궁금한 점이 있다. 신묘식년시 사마방목(司馬榜目)에 의하면 그의 거주지는 서울이었다. 그러나 조사과정에서 확인한 이은필의 거주지는 서울이 아니라 충청북도 제천(堤川)이었다. 그렇다면 이은필은, 소과 합격 당시에는 서울에 살았지만, 나중에 충청도로 이주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듯하다. 아니면 소과 합격 당시의 실제 거주지도 제천이었을 가능성도 있다. 조선 시대의 과거는 그것이 문과든, 무과든, 소과든 관계없이 본향(本鄕)만이 아니라 삼향(三鄕), 즉 본향, 처향(妻鄕), 외향(外鄕)에서 시험을 치를 수 있었고, 시권(試券)이나 방목에도 역시 시험을 치른 곳을 적게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이은필에게 서울은 처향이나 외향이었을 가능성이 얼마든지 있었다. 궁금한 점은 또 있다. 이 만사를 접한 장소는 충청도가 아니라 전라북도 김제였다. 그러니까 만사들이 원래는 충청도에 있다가 김제로 오게 되었다는 이야기인데, 그 이유는 알 수가 없다. 다만 이은필의 후손 누군가 김제로 이주하면서 본 만사들을 가지고 온 것이 아닐까 하는 막연한 추측을 할 뿐이다. 이은필은 생원시에 합격한 뒤에 능참봉을 지냈을 뿐이지만, 그가 죽었을 때 전국 각지의 유림이 다투어 만시(輓詩)를 보낸 것으로 미루어 볼 때 유학자(儒學者)로서 상당한 명망을 누린 인물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는 광복 이후 어느 땐가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한편, 만장을 지은 유도길은 유학자로, 본관은 전주(全州)이다. 그는 자신을 후인(后人)이라고 적고 있는데, 후인이란 상대방보다 나이가 어린 사람이 자신을 낮추어 이르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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