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간기록문화
통합검색플랫폼

기관별 검색

검색 범위 지정 후 검색어를 넣지 않고 검색버튼을 클릭하면 분류 내 전체 자료를 볼 수 있습니다

전체 으로 검색된 결과 56403건입니다.

정렬갯수
저자 :
(편저자)
유형 :
고문서
유형분류 :
시문류

梅同隣厚誼又同年况是晩來相病憐玉樹重嶊多逆理搖絃先斷誤眞緣丹金歲暮無靈地白玉樓成有詔天追想舊交吾獨在蕭蕭鬂髮淚潜然五絶午堂一處士遠別溪南里落月滿空樑依俙顔色似 鈴平后人<인명>尹龜鎭</인명> 謹拜哭輓竹

상세정보
저자 :
(편저자)
유형 :
고문서
유형분류 :
시문류

이서익(李瑞翼) 만사(輓詞) 고문서-시문류-만사 종교/풍속-관혼상제-만사 李瑞翼 李殷弼 李瑞翼 김제 만경 전주이씨가 전북대학교 한국학자료센터 이서익(李瑞翼)이 이은필(李殷弼)의 죽음을 슬퍼하며 지은 만사(輓詞). 이서익(李瑞翼)이 이은필(李殷弼)의 죽음을 슬퍼하며 지은 만사(輓詞)이다. 만사는 죽은 사람이 살았을 때의 공덕(公德)을 기리고, 그를 좋은 곳으로 인도한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만장에서의 '만(輓)'은 끈다는 의미인데, 이는 망자의 상여(喪輿)가 장지(葬地)로 나갈 때 만장을 앞세워 인도하게 한다는 의미에서 비롯된 말이다. 만사는 어떤 정형화된 형태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오언절구(五言絶句)와 오언율시(五言律詩) 또는 칠언절구(七言絶句)나 칠언율시(七言律詩)로 쓰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간혹 고시체(古詩體)를 본떠서 장문(長文)의 시(詩)의 짓거나 혹은 4자체(字體)로 쓰는 예도 있다. 이 만사는 글자의 수로 보아 칠언율시이다. 위에서 만사의 대상자를 이은필이라고 밝혔지만, 사실 이를 알아내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대부분의 만사가 그러하듯, 이 만사에서도 만사의 주인공 이름을 직접 거론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뿐만 아니라 이 만사와 함께 묶어져 있던 115건의 만사의 그 어디에서도 이은필의 이름은 보이지 않고 있었다. 따라서 위의 만사 등 중에서, 만사 작성자 스스로가 이은필의 친척이라고 적은 것을 모은 후, 그 사람에 대한 정보를 토대로 이은필을 알아낼 수 있었다. 이은필(李殷弼)은 본관이 전주(全州)였으며, 1891년(고종 28)에 실시한 신묘식년시(辛卯式年試)의 생원시(生員試)에 합격하였다. 당시 그의 나이 불과 17세였다. 이후 문과(文科)에는 급제하지는 않았지만, 대한제국관원이력서에 따르면 그는 영릉참봉(寧陵參奉), 영희전참봉(永禧殿參奉), 의릉참봉(懿陵參奉), 원구단사제서참봉(圜丘壇祠祭署參奉), 목릉참봉(穆陵參奉), 경릉참봉(景陵參奉) 등을 지낸 것으로 나온다. 그런데 이은필의 거주지와 관련하여 궁금한 점이 있다. 신묘식년시 사마방목(司馬榜目)에 의하면 그의 거주지는 서울이었다. 그러나 조사과정에서 확인한 이은필의 거주지는 서울이 아니라 충청북도 제천(堤川)이었다. 그렇다면 이은필은, 소과 합격 당시에는 서울에 살았지만, 나중에 충청도로 이주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듯하다. 아니면 소과 합격 당시의 실제 거주지도 제천이었을 가능성도 있다. 조선 시대의 과거는 그것이 문과든, 무과든, 소과든 관계없이 본향(本鄕)만이 아니라 삼향(三鄕), 즉 본향, 처향(妻鄕), 외향(外鄕)에서 시험을 치를 수 있었고, 시권(試券)이나 방목에도 역시 시험을 치른 곳을 적게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이은필에게 서울은 처향이나 외향이었을 가능성이 얼마든지 있었다. 궁금한 점은 또 있다. 이 만사를 접한 장소는 충청도가 아니라 전라북도 김제였다. 그러니까 만사들이 원래는 충청도에 있다가 김제로 오게 되었다는 이야기인데, 그 이유는 알 수가 없다. 다만 이은필의 후손 누군가 김제로 이주하면서 본 만사들을 가지고 온 것이 아닐까 하는 막연한 추측을 할 뿐이다. 이은필은 생원시에 합격한 뒤에 능참봉을 지냈을 뿐이지만, 그가 죽었을 때 전국 각지의 유림이 다투어 만시(輓詩)를 보낸 것으로 미루어 볼 때 유학자(儒學者)로서 상당한 명망을 누린 인물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는 광복 이후 어느 땐가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한편, 만장을 지은 이서익은 유학자로, 본관은 완산(完山)이다. 그는 자신을 후인(后人)이라고 적고 있는데, 후인이란 상대방보다 나이가 어린 사람이 자신을 낮추어 이르는 말을 의미한다.

상세정보
저자 :
(편저자)
유형 :
고문서
유형분류 :
시문류

松忽聞公去淚汪然泡沫風灯堪可憐仁厚家聲終有地流傳世德積於天歸山琴瑟三從斷泣血衰麻二子賢莫向泉臺岐路惡轉尋蓬島伴群仙 <지명>完山</지명>后人生 <인명>李瑞翼</인명> 謹再拜痛哭竹

상세정보
저자 :
(편저자)
유형 :
고문서
유형분류 :
시문류

우윤석(禹潤碩) 만사(輓詞) 고문서-시문류-만사 종교/풍속-관혼상제-만사 禹潤碩 李殷弼 禹潤碩 김제 만경 전주이씨가 전북대학교 한국학자료센터 우윤석(禹潤碩)이 이은필(李殷弼)의 죽음을 슬퍼하며 지은 만사(輓詞). 우윤석(禹潤碩)이 이은필(李殷弼)의 죽음을 슬퍼하며 지은 만사(輓詞)이다. 만사는 죽은 사람이 살았을 때의 공덕(公德)을 기리고, 그를 좋은 곳으로 인도한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만장에서의 '만(輓)'은 끈다는 의미인데, 이는 망자의 상여(喪輿)가 장지(葬地)로 나갈 때 만장을 앞세워 인도하게 한다는 의미에서 비롯된 말이다. 만사는 어떤 정형화된 형태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오언절구(五言絶句)와 오언율시(五言律詩) 또는 칠언절구(七言絶句)나 칠언율시(七言律詩)로 쓰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간혹 고시체(古詩體)를 본떠서 장문(長文)의 시(詩)의 짓거나 혹은 4자체(字體)로 쓰는 예도 있다. 이 만사는 글자의 수로 보아 칠언율시이다. 위에서 만사의 대상자를 이은필이라고 밝혔지만, 사실 이를 알아내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대부분의 만사가 그러하듯, 이 만사에서도 만사의 주인공 이름을 직접 거론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뿐만 아니라 이 만사와 함께 묶어져 있던 115건의 만사의 그 어디에서도 이은필의 이름은 보이지 않고 있었다. 따라서 위의 만사 등 중에서, 만사 작성자 스스로가 이은필의 친척이라고 적은 것을 모은 후, 그 사람에 대한 정보를 토대로 이은필을 알아낼 수 있었다. 이은필(李殷弼)은 본관이 전주(全州)였으며, 1891년(고종 28)에 실시한 신묘식년시(辛卯式年試)의 생원시(生員試)에 합격하였다. 당시 그의 나이 불과 17세였다. 이후 문과(文科)에는 급제하지는 않았지만, 대한제국관원이력서에 따르면 그는 영릉참봉(寧陵參奉), 영희전참봉(永禧殿參奉), 의릉참봉(懿陵參奉), 원구단사제서참봉(圜丘壇祠祭署參奉), 목릉참봉(穆陵參奉), 경릉참봉(景陵參奉) 등을 지낸 것으로 나온다. 그런데 이은필의 거주지와 관련하여 궁금한 점이 있다. 신묘식년시 사마방목(司馬榜目)에 의하면 그의 거주지는 서울이었다. 그러나 조사과정에서 확인한 이은필의 거주지는 서울이 아니라 충청북도 제천(堤川)이었다. 그렇다면 이은필은, 소과 합격 당시에는 서울에 살았지만, 나중에 충청도로 이주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듯하다. 아니면 소과 합격 당시의 실제 거주지도 제천이었을 가능성도 있다. 조선 시대의 과거는 그것이 문과든, 무과든, 소과든 관계없이 본향(本鄕)만이 아니라 삼향(三鄕), 즉 본향, 처향(妻鄕), 외향(外鄕)에서 시험을 치를 수 있었고, 시권(試券)이나 방목에도 역시 시험을 치른 곳을 적게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이은필에게 서울은 처향이나 외향이었을 가능성이 얼마든지 있었다. 궁금한 점은 또 있다. 이 만사를 접한 장소는 충청도가 아니라 전라북도 김제였다. 그러니까 만사들이 원래는 충청도에 있다가 김제로 오게 되었다는 이야기인데, 그 이유는 알 수가 없다. 다만 이은필의 후손 누군가 김제로 이주하면서 본 만사들을 가지고 온 것이 아닐까 하는 막연한 추측을 할 뿐이다. 이은필은 생원시에 합격한 뒤에 능참봉을 지냈을 뿐이지만, 그가 죽었을 때 전국 각지의 유림이 다투어 만시(輓詩)를 보낸 것으로 미루어 볼 때 유학자(儒學者)로서 상당한 명망을 누린 인물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는 광복 이후 어느 땐가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한편, 만장을 지은 우윤석은 유학자로, 본관은 단성(丹城)이다. 그는 자신을 후인(后人)이라고 적고 있는데, 후인이란 상대방보다 나이가 어린 사람이 자신을 낮추어 이르는 말을 의미한다.

상세정보
저자 :
(편저자)
유형 :
고문서
유형분류 :
증빙류

在<지명>上東中里</지명>後坪太田一斗五升落所耕三束㐣典執於右人前錢文捌兩以每朔五分例得用而限十月晦內幷本利備報之意如是成票爲去乎若至限則右㐣永永次持爲乎乙事票主 <인명>金聖彦</인명>[着名]舊文記㱏張易置印

상세정보
저자 :
(편저자)
유형 :
고문서
유형분류 :
명문문기류

1808년 정계봉(鄭季奉) 산지매매명문(山地賣買明文) 고문서-명문문기류-토지매매명문 경제-매매/교역-토지매매명문 전북 남원시 남원 금지 밀양박씨가 남원 금지 밀양박씨가 1808년(순조 8) 2월 13일에 정계동(鄭季東)이 노(奴) 얼손(旕孫)의 상전으로부터 산지를 매입하면서 받은 명문(明文) 1808년(순조 8) 2월 13일에 정계동(鄭季東)이 노(奴) 얼손(旕孫)의 상전으로부터 산지를 매입하면서 받은 명문(明文)이다. 정계동은 위 상전댁의 선대 유지 동편 기슭 길가 옆에 있는 분묘의 산지를 매입하고자 상전댁에 간청하였다. 정계동으로서는 망부(亡父)의 유언을 받들고자 한 것이어서 그만큼 절실하였다. 이에 상전댁은 사방의 경계를 다음과 같이 정하였다. 북쪽으로는 횡로(橫路)를 마주하고, 동남쪽으로는 다른 사람이 쓴 두 개의 무덤 옆까지를 경계로 하며, 서쪽으로는 기슭의 반절을 경계로 한다고 하였다. 그리고 네 곳 경계에 돌을 세우고 이랑을 만들어 표시한 다음에 10냥을 받고 매입자에게 산지를 넘겨주었다. 그러면서도 이후에는 부친의 무덤 외에 다시 이곳에 무덤을 쓰지 않겠다는 내용을 명문에 삽입하였다. 그러나 이 문서에는 거래된 산지의 구체적인 위치는 쓰여져 있지 않다. 아마 남원의 경내로 추정된다. 그리고 산주가 문서를 직접 작성하고 서명까지 하였지만, 성명은 기재하지 않았다. 대신 부리고 있는 종 얼손이 오른쪽 손가락을 그려 서명을 대신하였다.

상세정보
저자 :
(편저자)
유형 :
고문서
유형분류 :
명문문기류

1824년 박인필(朴仁弼) 산지매매명문(山地賣買明文) 고문서-명문문기류-토지매매명문 경제-매매/교역-토지매매명문 전북 남원시 남원 금지 밀양박씨가 남원 금지 밀양박씨가 1824년(순조 24) 8월 25일에 박인필이 기지방 미곡원에 있는 산지를 정천석으로부터 매입하면서 받은 명문 1824년(순조 24) 8월 25일에 박인필(朴仁弼)이 기지방(機池坊) 미곡원(薇谷員)에 있는 산지를 정천석(鄭千石)으로부터 매입하면서 받은 명문이다. 정천석은 위의 산지에 선산이 있어서 오랫동안 금양해 왔는데, 박인필이 친산(親山)을 쓰기 위하여 산지를 팔아달라고 부탁하자 25냥을 받고 팔았다. 거래가 된 산지의 위치는 친산이 들어설 자리의 고총(古塚)이 있는 산등성이의 동편 사이 계곡에서 서편까지를 경계로 하였다. 정천석은 자신이 가지고 있던 구문기에 해당 산지를 표시하여 박인필에게 넘겨주었다. 증인으로 황상언(黃相彦)과 김인복(黃相彦)이 산지두 정천석과 함께 거래에 참여하여 서명하였으며, 유학 양필주(梁必舟)가 문서를 작성하고 서명하였다.

상세정보
저자 :
(편저자)
유형 :
고문서
유형분류 :
서간통고류

황겹(黃?) 서간(書簡) 고문서-서간통고류-서간 개인-생활-서간 黃? 黃? 남원 수지 죽산박씨가 남원 수지 죽산박씨가 황겹(黃?)이 박용호(朴龍祜)에게 보낸 서간(書簡). 황겹(黃?)이 박용호(朴龍祜)에게 보낸 서간(書簡)이다. 벼슬을 하고 있는 상대방의 간찰을 받고 위로가 되었다며 기복인(朞服人)인 자신은 선영(先塋)에 일이 있어 어제 도(都)에 들어왔으며 수일 뒤에 관청으로 돌아갈 것이라고 하였다.

상세정보
저자 :
(편저자)
유형 :
고문서
유형분류 :
서간통고류

1833년 유광호(柳光浩) 서간(書簡) 고문서-서간통고류-서간 개인-생활-서간 癸巳元月十九日 柳光浩 朴文川 調案執事 癸巳元月十九日 柳光浩 남원 수지 죽산박씨가 남원 수지 죽산박씨가 1833년(순조 33) 1월 19일 유광호(柳光浩)가 보낸 서간(書簡). 1833년(순조 33) 1월 19일 유광호(柳光浩)가 보낸 서간(書簡)이다. 년전(年前) 1월에 상대방의 방문을 받고 지금까지 위로가 되었는데 벌써 새해가 되었다며 새해를 맞아 복 받고 경사가 많기를 바란다고 하였다. 객(客)을 통해서 상대방의 건강이 좋지 않다는 말을 전해 듣고 염려되었다며 자신은 독감으로 두어 달 아팠다고 하였다. 자신의 아들은 섣달 정사(政事)에서 승자(陞資)되었다고 하였다. 유광호의 아들은 유억(柳億)으로 전라남도 구례군(求禮郡) 토지면(土旨面) 오미리(五美里) 운조루(雲鳥樓)에서 태어났다.

상세정보
저자 :
(편저자)
유형 :
고문서
유형분류 :
시문류

김철기(金喆起) 만사(輓詞) 고문서-시문류-만사 종교/풍속-관혼상제-만사 金喆起 李殷弼 金喆起 김제 만경 전주이씨가 전북대학교 한국학자료센터 김철기(金喆起)가 이은필(李殷弼)의 죽음을 슬퍼하며 지은 만사(輓詞). 김철기(金喆起)가 이은필(李殷弼) 죽음을 슬퍼하며 지은 만사(輓詞)이다. 만사는 죽은 사람이 살았을 때의 공덕(公德)을 기리고, 그를 좋은 곳으로 인도한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만장에서의 '만(輓)'은 끈다는 의미인데, 이는 망자의 상여(喪輿)가 장지(葬地)로 나갈 때 만장을 앞세워 인도하게 한다는 의미에서 비롯된 말이다. 만사는 어떤 정형화된 형태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오언절구(五言絶句)와 오언율시(五言律詩) 또는 칠언절구(七言絶句)나 칠언율시(七言律詩)로 쓰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간혹 고시체(古詩體)를 본떠서 장문(長文)의 시(詩)의 짓거나 혹은 4자체(字體)로 쓰는 예도 있다. 이 만사는 글자의 수로 보아 칠언율시이다. 위에서 만사의 대상자를 이은필이라고 밝혔지만, 사실 이를 알아내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대부분의 만사가 그러하듯, 이 만사에서도 만사의 주인공 이름을 직접 거론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뿐만 아니라 이 만사와 함께 묶어져 있던 115건의 만사의 그 어디에서도 이은필의 이름은 보이지 않고 있었다. 따라서 위의 만사 등 중에서, 만사 작성자 스스로가 이은필의 친척이라고 적은 것을 모은 후, 그 사람에 대한 정보를 토대로 이은필을 알아낼 수 있었다. 이은필(李殷弼)은 본관이 전주(全州)였으며, 1891년(고종 28)에 실시한 신묘식년시(辛卯式年試)의 생원시(生員試)에 합격하였다. 당시 그의 나이 불과 17세였다. 이후 문과(文科)에는 급제하지는 않았지만, 대한제국관원이력서에 따르면 그는 영릉참봉(寧陵參奉), 영희전참봉(永禧殿參奉), 의릉참봉(懿陵參奉), 원구단사제서참봉(圜丘壇祠祭署參奉), 목릉참봉(穆陵參奉), 경릉참봉(景陵參奉) 등을 지낸 것으로 나온다. 그런데 이은필의 거주지와 관련하여 궁금한 점이 있다. 신묘식년시 사마방목(司馬榜目)에 의하면 그의 거주지는 서울이었다. 그러나 조사과정에서 확인한 이은필의 거주지는 서울이 아니라 충청북도 제천(堤川)이었다. 그렇다면 이은필은, 소과 합격 당시에는 서울에 살았지만, 나중에 충청도로 이주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듯하다. 아니면 소과 합격 당시의 실제 거주지도 제천이었을 가능성도 있다. 조선 시대의 과거는 그것이 문과든, 무과든, 소과든 관계없이 본향(本鄕)만이 아니라 삼향(三鄕), 즉 본향, 처향(妻鄕), 외향(外鄕)에서 시험을 치를 수 있었고, 시권(試券)이나 방목에도 역시 시험을 치른 곳을 적게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이은필에게 서울은 처향이나 외향이었을 가능성이 얼마든지 있었다. 궁금한 점은 또 있다. 이 만사를 접한 장소는 충청도가 아니라 전라북도 김제였다. 그러니까 만사들이 원래는 충청도에 있다가 김제로 오게 되었다는 이야기인데, 그 이유는 알 수가 없다. 다만 이은필의 후손 누군가 김제로 이주하면서 본 만사들을 가지고 온 것이 아닐까 하는 막연한 추측을 할 뿐이다. 이은필은 생원시에 합격한 뒤에 능참봉을 지냈을 뿐이지만, 그가 죽었을 때 전국 각지의 유림이 다투어 만시(輓詩)를 보낸 것으로 미루어 볼 때 유학자(儒學者)로서 상당한 명망을 누린 인물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는 광복 이후 어느 땐가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한편, 만장을 지은 김철기는 유학자로, 본관은 강릉(江陵)이다. 그는 자신을 계하생(契下生)이라고 적고 있는데, 계하생이란 함께 맺은 계(契)의 계원(契員) 중 나이가 어린 사람이 웃어른을 대하여 자기를 낮추어 가리키는 말을 의미한다. 계하생이라고 하였으니 김철기는 망자보다 나이가 어린 사람임이 분명하다. 그러나 그 계의 명칭이나 그 계의 목적이 무엇이었는지는 알 수 없다.

상세정보
저자 :
(편저자)
유형 :
고문서
유형분류 :
시문류

상세정보
저자 :
(편저자)
유형 :
고문서
유형분류 :
시문류

상세정보
저자 :
(편저자)
유형 :
고문서
유형분류 :
시문류

이극환(李極煥) 만사(輓詞) 고문서-시문류-만사 종교/풍속-관혼상제-만사 이극환 李殷弼 김제 만경 전주이씨가 전북대학교 한국학자료센터 이극환(李極煥)이 이은필(李殷弼)의 죽음을 슬퍼하며 지은 만사(輓詞) 이극환(李極煥)이 이은필(李殷弼)의 죽음을 슬퍼하며 지은 만사(輓詞)이다. 만사는 죽은 사람이 살았을 때의 공덕(公德)을 기리고, 그를 좋은 곳으로 인도한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만사에서의 '만(輓)'은 끈다는 의미인데, 이는 망자의 상여(喪輿)가 장지(葬地)로 나갈 때 만사를 앞세워 인도하게 한다는 의미에서 비롯된 말이다. 만사는 어떤 정형화된 형태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오언절구(五言絶句)와 오언율시(五言律詩) 또는 칠언절구(七言絶句)나 칠언율시(七言律詩)로 쓰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간혹 고시체(古詩體)를 본떠서 장문(長文)의 시(詩)의 짓거나 혹은 4자체(字體)로 쓰는 경우도 있다. 위에서 만사의 대상자를 이은필이라고 밝혔지만, 사실 이를 알아내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대부분의 만사가 그러하듯, 이 만사에서도 만사의 주인공 이름을 직접 거론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이 만사와 함께 묶어져 있던 115건의 만사의 그 어디에서도 이은필의 이름은 보이지 않고 있는 실정이었다. 따라서 위의 만사들 중에서, 만사 작성자 스스로가 이은필의 친척이라고 적은 것을 모은 후, 그 사람에 대한 정보를 토대로 이은필을 알아낼 수 있었다. 이은필(李殷弼)은 본관이 전주(全州)였으며, 1891년(고종 28)에 실시한 신묘식년시(辛卯式年試)의 생원시(生員試)에 합격하였다. 당시 그의 나이 불과 17세였다. 이후 문과(文科)에는 급제하지는 않았지만, 대한제국관원이력서에 따르면 그는 영릉참봉(寧陵參奉), 영희전참봉(永禧殿參奉), 의릉참봉(懿陵參奉), 원구단사제서참봉(圜丘壇祠祭署參奉), 목릉참봉(穆陵參奉), 경릉참봉(景陵參奉) 등을 지낸 것으로 나온다. 그런데 이은필의 거주지와 관련하여 궁금한 점이 있다. 신묘식년시 사마방목(司馬榜目)에 의하면 그의 거주지는 서울이었다. 그러나 조사과정에서 확인한 이은필의 거주지는 서울이 아니라 충청도 제천(堤川)이었다. 그렇다면 이은필은, 소과 합격 당시에는 서울에 살았지만 나중에 충청도로 이주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듯하다. 아니면 소과 합격 당시의 실제 거주지도 제천이었을 가능성도 있다. 조선시대에의 과거는 그것이 문과든, 무과든, 소과든 관계없이 본향(本鄕)만이 아니라 삼향(三鄕), 즉 본향, 처향(妻鄕), 외향(外鄕)에서 시험을 치를 수 있었고, 시권(試券)이나 방목에도 역시 시험을 치른 곳을 적도록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이은필에게 서울은 처향이나 외향이었을 가능성이 얼마든지 있었던 것이다. 궁금한 점은 또 있다. 이 만사를 접한 장소는 충청도가 아니라 전라도 김제였다. 그러니까 만사들이 원래는 충청도에 있다가 김제로 오게 되었다는 이야기인데, 그 이유는 알 수가 없다. 다만 이은필의 후손 누군가 김제로 이주하면서 본 만사들을 가지고 온 것이 아닐까 하는 막연한 추측을 할 뿐이다. 이은필은 생원시에 합격한 뒤에 능참봉을 지냈을 뿐이지만, 그가 죽었을 때 전국 각지의 유림들이 다투어 만시(輓詩)를 보낸 것으로 미루어 볼 때 유학자(儒學者)로서 상당한 명망을 누린 인물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는 광복 이후 어느 땐가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한편, 만사를 지은 이극환은 망자의 족질(族姪)이었다. 족질이란 성과 본이 같은 한 일가로서 동종(同宗)·유복친(有服親) 안에 들지 않는 조카 뻘 항렬 정도 되는 사람을 일컫는 말이다.○ 원문 텍스트 竹 敦睦吾宗自有名每逢安樂好相迎家門不意 胡爲病隣里凄然晩哭聲一死一生皆定理百 回百壽亦無情{艹+韱}歌類曲靑山路四顧彷徨睡 豈成 族姪 極煥 謹再拜 哭輓 松

상세정보
저자 :
(편저자)
유형 :
고문서
유형분류 :
시문류

최돈철 만사(輓詞) 고문서-시문류-만사 종교/풍속-관혼상제-만사 崔燉轍 李殷弼 崔燉轍 김제 만경 전주이씨가 전북대학교 한국학자료센터 최돈철(崔燉轍)이 이은필(李殷弼)의 죽음을 슬퍼하며 지은 만사(輓詞). 최돈철(崔燉轍)이 이은필(李殷弼)의 죽음을 슬퍼하며 지은 만사(輓詞)이다. 만사는 죽은 사람이 살았을 때의 공덕(公德)을 기리고, 그를 좋은 곳으로 인도한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만사에서의 '만(輓)'은 끈다는 의미인데, 이는 망자의 상여(喪輿)가 장지(葬地)로 나갈 때 만사를 앞세워 인도하게 한다는 의미에서 비롯된 말이다. 만사는 어떤 정형화된 형태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오언절구(五言絶句)와 오언율시(五言律詩) 또는 칠언절구(七言絶句)나 칠언율시(七言律詩)로 쓰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간혹 고시체(古詩體)를 본떠서 장문(長文)의 시(詩)의 짓거나 혹은 4자체(字體)로 쓰는 경우도 있다. 이 만사는 글자의 수로 보아 고시체의 장문의 시였다. 위에서 만사의 대상자를 이은필이라고 밝혔지만, 사실 이를 알아내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대부분의 만사가 그러하듯, 이 만사에서도 만사의 주인공 이름을 직접 거론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이 만사와 함께 묶어져 있던 115건의 만사의 그 어디에서도 이은필의 이름은 보이지 않고 있는 실정이었다. 따라서 위의 만사등 중에서, 만사 작성자 스스로가 이은필의 친척이라고 적은 것을 모은 후, 그 사람에 대한 정보를 토대로 이은필을 알아낼 수 있었다. 이은필(李殷弼)은 본관이 전주(全州)였으며, 1891년(고종 28)에 실시한 신묘식년시(辛卯式年試)의 생원시(生員試)에 합격하였다. 당시 그의 나이 불과 17세였다. 이후 문과(文科)에는 급제하지는 않았지만, 대한제국관원이력서에 따르면 그는 영릉참봉(寧陵參奉), 영희전참봉(永禧殿參奉), 의릉참봉(懿陵參奉), 원구단사제서참봉(圜丘壇祠祭署參奉),목릉참봉(穆陵參奉), 경릉참봉(景陵參奉) 등을 지낸 것으로 나온다. 그런데 이은필의 거주지와 관련하여 궁금한 점이 있다. 신묘식년시 사마방목(司馬榜目)에 의하면 그의 거주지는 서울이었다. 그러나 조사과정에서 확인한 이은필의 거주지는 서울이 아니라 충청도 제천(堤川)이었다. 그렇다면 이은필은, 소과 합격 당시에는 서울에 살았지만 나중에 충청도로 이주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듯하다. 아니면 소과 합격 당시의 실제 거주지도 제천이었을 가능성도 있다. 조선시대에의 과거는 그것이 문과든, 무과든, 소과든 관계없이 본향(本鄕)만이 아니라 삼향(三鄕), 즉 본향, 처향(妻鄕), 외향(外鄕)에서 시험을 치를 수 있었고, 시권(試券)이나 방목에도 역시 시험을 치른 곳을 적도록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이은필에게 서울은 처향이나 외향이었을 가능성이 얼마든지 있었던 것이다. 궁금한 점은 또 있다. 이 만사를 접한 장소는 충청도가 아니라 전라도 김제였다. 그러니까 만사들이 원래는 충청도에 있다가 김제로 오게 되었다는 이야기인데, 그 이유는 알 수가 없다. 다만 이인필의 후손 누군가 김제로 이주하면서 본 만사들을 가지고 온 것이 아닐까 하는 막연한 추측을 할 뿐이다. 이은필은 생원시에 합격한 뒤에 능참봉을 지냈을 뿐이지만, 그가 죽었을 때 전국 각지의 유림들이 다투어 만시(輓詩)를 보낸 것으로 미루어 볼 때 유학자(儒學者)로서 상당한 명망을 누린 인물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는 광복 이후 어느 땐가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한편, 만사를 지은 최돈철은 유학자로, 임영(臨瀛)의 후인이다.○ 원문 텍스트 八十二年頌太樂福於美者見於兄原?早離還客 夢家珠有賴是歡情世坐其願楊州篤天上許多李白鯀老 草皆入泉坮路吾且從客作此行 臨瀛 崔燉轍 謹拜 哭輓

상세정보
저자 :
(편저자)
유형 :
고문서
유형분류 :
시문류

상세정보
저자 :
(편저자)
유형 :
고문서
유형분류 :
시문류

권병국(權炳國) 만사(輓詞) 고문서-시문류-만사 종교/풍속-관혼상제-만사 권병국 李殷弼 김제 만경 전주이씨가 전북대학교 한국학자료센터 권병국(權炳國)이 이은필(李殷弼)의 죽음을 슬퍼하며 지은 만사(輓詞) 권병국(權炳國)이 이은필(李殷弼)의 죽음을 슬퍼하며 지은 만사(輓詞)이다. 만사는 죽은 사람이 살았을 때의 공덕(公德)을 기리고, 그를 좋은 곳으로 인도한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만사에서의 '만(輓)'은 끈다는 의미인데, 이는 망자의 상여(喪輿)가 장지(葬地)로 나갈 때 만사를 앞세워 인도하게 한다는 의미에서 비롯된 말이다. 만사는 어떤 정형화된 형태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오언절구(五言絶句)와 오언율시(五言律詩) 또는 칠언절구(七言絶句)나 칠언율시(七言律詩)로 쓰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간혹 고시체(古詩體)를 본떠서 장문(長文)의 시(詩)의 짓거나 혹은 4자체(字體)로 쓰는 경우도 있다. 위에서 만사의 대상자를 이은필이라고 밝혔지만, 사실 이를 알아내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대부분의 만사가 그러하듯, 이 만사에서도 만사의 주인공 이름을 직접 거론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이 만사와 함께 묶어져 있던 115건의 만사의 그 어디에서도 이은필의 이름은 보이지 않고 있는 실정이었다. 따라서 위의 만사들 중에서, 만사 작성자 스스로가 이은필의 친척이라고 적은 것을 모은 후, 그 사람에 대한 정보를 토대로 이은필을 알아낼 수 있었다. 이은필(李殷弼)은 본관이 전주(全州)였으며, 1891년(고종 28)에 실시한 신묘식년시(辛卯式年試)의 생원시(生員試)에 합격하였다. 당시 그의 나이 불과 17세였다. 이후 문과(文科)에는 급제하지는 않았지만, 대한제국관원이력서에 따르면 그는 영릉참봉(寧陵參奉), 영희전참봉(永禧殿參奉), 의릉참봉(懿陵參奉), 원구단사제서참봉(圜丘壇祠祭署參奉), 목릉참봉(穆陵參奉), 경릉참봉(景陵參奉) 등을 지낸 것으로 나온다. 그런데 이은필의 거주지와 관련하여 궁금한 점이 있다. 신묘식년시 사마방목(司馬榜目)에 의하면 그의 거주지는 서울이었다. 그러나 조사과정에서 확인한 이은필의 거주지는 서울이 아니라 충청도 제천(堤川)이었다. 그렇다면 이은필은, 소과 합격 당시에는 서울에 살았지만 나중에 충청도로 이주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듯하다. 아니면 소과 합격 당시의 실제 거주지도 제천이었을 가능성도 있다. 조선시대에의 과거는 그것이 문과든, 무과든, 소과든 관계없이 본향(本鄕)만이 아니라 삼향(三鄕), 즉 본향, 처향(妻鄕), 외향(外鄕)에서 시험을 치를 수 있었고, 시권(試券)이나 방목에도 역시 시험을 치른 곳을 적도록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이은필에게 서울은 처향이나 외향이었을 가능성이 얼마든지 있었던 것이다. 궁금한 점은 또 있다. 이 만사를 접한 장소는 충청도가 아니라 전라도 김제였다. 그러니까 만사들이 원래는 충청도에 있다가 김제로 오게 되었다는 이야기인데, 그 이유는 알 수가 없다. 다만 이은필의 후손 누군가 김제로 이주하면서 본 만사들을 가지고 온 것이 아닐까 하는 막연한 추측을 할 뿐이다. 이은필은 생원시에 합격한 뒤에 능참봉을 지냈을 뿐이지만, 그가 죽었을 때 전국 각지의 유림들이 다투어 만시(輓詩)를 보낸 것으로 미루어 볼 때 유학자(儒學者)로서 상당한 명망을 누린 인물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는 광복 이후 어느 땐가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한편, 만사를 지은 권병국은 화산(花山), 곧 안동(安東)권씨의 후손이었다.○ 원문 텍스트 松 孝悌元來是性眞享年八十二今辰夜從譖闥六珈樂 春向芳蘭三朶新學生無愧閻羅府令德應聞上帝隣 東風殘雪靑山路薤露歌中哭萬人 花山后人權炳國 再拜 哭輓 竹

상세정보
저자 :
(편저자)
유형 :
고문서
유형분류 :
시문류

상세정보
저자 :
(편저자)
유형 :
고문서
유형분류 :
명문문기류

1870년 생원(生員) 이규환(李奎煥)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 고문서-명문문기류-토지매매명문 경제-매매/교역-토지매매명문 同治九年庚午十二月初十日 閑良 崔成龍 李生員奎煥 同治九年庚午十二月初十日 閑良 崔成龍 전북 부안군 [着名] 1개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1870년(고종 7) 12월 초10일에 한량(閑良) 최성룡(崔成龍)이 생원(生員) 이규환(李奎煥)에게 논을 팔면서 작성한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 1870년(고종 7) 12월 초10일에 한량(閑良) 최성룡(崔成龍)이 생원(生員) 이규환(李奎煥)에게 논을 팔면서 작성한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이다. 최성룡은 긴히 돈을 쓸 데가 있어서 자신이 매득하여 경작해 왔던 논을 최성룡에게 팔았다. 매매의 대상이 된 토지는 부안현(扶安縣) 일도면(一道面) 봉황리(鳳凰里)의 뒤쪽에 있는 마경평(馬頃坪)의 울자답(㭗字畓) 3두락지이며 부수(負數)로는 7부 3속인 곳이며, 방매 가격은 27냥이다. 매도인 최성룡은 새로 작성한 매매문서와 자신이 가지고 있던 구문기 3장을 매수인 이규환에게 넘겨주었다. 문서의 끝에는 만일 뒷날 이 거래에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이 있으면 이 문서를 가지고 증빙하라고 하였다. 이 문기에 토지소재지로 명기된 일도면 봉황리는 오늘날 부안군 동진면의 면소재지인 봉황리에 해당하는 지역이다. 거래 당시 최성룡은 상중(喪中)이어서 문서에 서명하지 않았다. 증인으로는 유학(幼學) 전인풍(田仁豊)이 참여하고 서명하였다. 매입자인 이규환은 생원으로 기재되어 있지만, 현존하는 사마방목(司馬榜目)에서는 그의 이름을 확인할 수 없다. 이 문서가 소장된 부안의 선은동 전주이씨가에는 19세기 초부터 20세기 초까지 작성되었던 명문 5백여 점이 전하고 있어서 이 가문이 당시에 경제적으로 상당한 기반을 축적하였음을 알 수 있다. 명문 뿐만 아니라 산송(山訟) 관련 소지(所志)도 다수 소장되어 있다. 한편 이 가문의 것으로 추정되는 호적문서 31건이 호남권 한국학자료센터의 고문서DB로 구축되어 있어서 작성연대가 간지로만 적혀 있는 명문과 소지의 정확한 작성연대를 파악하는데 상당한 도움을 얻을 수 있다. 호적문서는 1801년부터 1888년까지 부안현 동도면 선은동에서 계속 작성되었는데, 여기에 기재된 호주들의 이름은 이양호(李養灝), 이양락(李養洛), 이양순(李養淳), 이양식(李養湜), 이익용(李翼容), 이겸용(李謙容), 이규함(李圭咸), 이규정(李奎井) 등이다. 매입자 이규환(李奎煥)은 호남권 한국학자료센터에서 구축한 고문서DB의 "1879년 이규정(李奎井) 호구단자(戶口單子)"에서 호주 이규정(李奎井)의 동생으로 나온다. 그는 당시 41세로 처 청주한씨(淸州韓氏)(34)와 함께 형의 집에서 살고 있었다.

상세정보
저자 :
(편저자)
유형 :
고문서
유형분류 :
명문문기류

<연도>道光二十七年丁未</연도>十二月二十五日 前明文右明文事段以要用所致自己買得伏在<지명>扶北</지명>八作㭗字畓三斗落只所畊七負五束庫叱價折錢文拾㱏兩依數捧上爲遣右人前本文記一丈並以永永放賣爲去乎日後若有相左之端持此憑考事畓主 幼學 <인명>金永一</인명>[着名]證筆 閒良 <인명>朴用伊</인명>[着名](背面)<지명>仙洞</지명> <인명>崔錫龍</인명>三斗落 <지명>仙洞</지명> <인명>崔錫龍</인명> 十五日

상세정보
저자 :
(편저자)
유형 :
고문서
유형분류 :
증빙류

<인명>李 生員</인명>前手標右手標段當初入葬於<지명>大方</지명>非爲永窆暫爲權厝故昨年仍爲求山路爲移葬之際執事數員以其 先山當禁昨年十月分來臨爲言移窆故以今年十月移葬之意成手記以奉矣仍不卜地方在求山故勢不得已以來年十月內移窆之意如是成手記以爲日後憑考事手記主<인명>權秉澤</인명><연도>甲戌</연도>十月二十日

상세정보
56403건입니다.
/2821
상단이동 버튼 하단이동 버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