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52년 유학(幼學) 김종댁(金從宅) 등 상서(上書) 고문서-소차계장류-소지류 국왕/왕실-보고-상서 壬子正月 幼學金從宅韓鋈等 城主 壬子正月 전북 남원시 [署押] 1개, [官印] 3개 6.5*6.5(정방형) 적색 3개 남원 금지 밀양박씨가 남원 금지 밀양박씨가 1852년(철종 3) 정월에 전라도(全羅道) 유학(幼學) 김종댁(金從宅)을 비롯한 37명의 도내(道內) 유생들이 남원부사(南原府使)에게 올린 상서이다. 1852년(철종 3) 정월에 전라도(全羅道) 유학(幼學) 김종댁(金從宅)을 비롯한 37명의 도내(道內) 유생들이 남원(南原) 기지방(機池坊)에 사는 효자(孝子) 박정환(朴正煥)의 처 청풍김씨(淸風金氏)의 효열(孝烈)을 감영(監營)에 알려 포양(褒揚)의 특전을 내리게 해달라면서 남원부사(南原府使)에게 올린 상서이다. 청풍김씨는 좌리공신(佐理功臣) 호조판서(戶曹判書)를 지낸 월천군(月川君) 문평공(文平公) 김길통(金吉通)의 14세손으로, 일찍부터 부모를 잘 섬겼다. 부모가 하고자 하는 바를 미리 알아서 정성껏 받들어 모셔서 마을에서 그녀의 효행을 찬탄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밀양박씨(密陽朴氏) 강수공(江叟公)의 9대손인 박정환에게 시집을 와서는 병든 시부모를 정성껏 봉양하였다. 남편 박정환이 갑자기 역병에 걸려 고생하다가 결국에는 고질병이 되어 3년 동안 병석에 누어 있을 때에는 지극정성으로 남편을 병간하였다. 백방으로 구한 약들이 효과가 없자, 밤낮으로 하늘에 기도를 올리며 자기를 대신 데려가라고 빌었다. 급기야는 자신의 손가락을 베어 흐르는 피를 남편에게 마시게 하자, 죽을 지경에 놓였던 남편에게 소생의 기운이 돌았다. 그러자 김씨는 자신의 넓적다리를 베어 며칠을 계속 달여 남편에게 드렸다. 그러자 남편이 점차 회생하게 되었다. 이에 전라도 각 지역의 유생들이 공의(公議)를 모아 손가락을 베어 남편에게 드리는 한 가지 일도 드문 일인데 연거푸 넓적다리를 베어 남편을 살리는 일은 세상에 보기 드문 일이 아닐 수 없다고 칭찬하면서, 이와 같은 김씨의 효열(孝烈)을 포양하고자 하는 유생들의 공의(公議)를 수령이 잘 살피시고, 이같은 사실을 감영(監營)을 통해 조정에 알려 포양(褒揚)의 특전을 받게 해달라고 요청하였다. 이에 대하여 부사는 기왕에 이미 제사(題辭)를 내렸으니 중론(衆論)을 기다리는게 마땅하다고 하였다. 청풍김씨의 남편 박정환은 소자(小字) 박인필(朴仁弼)로도 불리웠는데, 그 역시 효행으로 여러번 지방유림들로부터 포양(褒揚)의 천거를 받을만큼 뛰어난 효자였다. 이 문서가 소장된 남원의 밀양박씨 문중에는 박인필이 작성했던 시권(試券)이 3장 전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