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52년 진사(進士) 노석승(盧錫升) 등 상서(上書) 고문서-소차계장류-소지류 국왕/왕실-보고-상서 壬子四月 進士盧錫升朴正烈幼學高時雍等 巡相 壬子四月 전북 남원시 [署押] 1개, [官印] 3개 8.0*8.0(정방형) 적색 3개 남원 금지 밀양박씨가 남원 금지 밀양박씨가 1852년(철종 3) 4월에 전라도(全羅道) 진사(進士) 노석승(盧錫升)을 비롯한 32명의 도내(道內) 유생들이 순상(巡相)에게 올린 상서이다. 1852년(철종 3) 4월에 전라도(全羅道) 진사(進士) 노석승(盧錫升)을 비롯한 32명의 도내(道內) 유생들이 남원(南原) 기지방(機池坊)에 사는 효자(孝子) 박정환(朴正煥)과 그의 처 청풍김씨(淸風金氏)의 효열(孝烈)을 조정에 알려 포양(褒揚)의 특전을 내리게 해달라면서 순상(巡相)에게 올린 상서이다. 밀양박씨(密陽朴氏) 강수공(江叟公)의 9대손인 박정환은 충효(忠孝)의 가문에서 태어나 어려서부터 가법(家法)을 준수하면서 부모의 뜻을 어기지 않았기 때문에 박효자(朴孝子)로 칭송을 받았다. 그의 부친이 학질에 걸려 여러 해 동안 병석에 앓아 눕게 되자 어린 나이임에도 밤낮으로 시탕(侍湯)을 하며 정성껏 병간을 하였다. 병이 위독해지자 자신의 오른쪽 넓적다리를 베어 불에 구어 잘게 나누어 부친에게 먹여 마침내 회복하기에 이르렀다. 이에 마을사람들이 모두 그의 효행에 하늘이 감동한 것이라고 칭찬하였다. 뒤에 모친이 괴질에 걸려 숨이 끊어질 지경에 이르렀을 때에는 손가락을 잘라 그 피를 마시게 하여 소생케 하였다. 그의 부모가 모두 아들의 효행에 힘입어 천수(天壽)를 누릴 수 있게 되었다. 이와 같은 그의 효행으로 여러번 지방유림들로부터 포양(褒揚)의 천거를 받았다. 박정환의 처 청풍김씨(淸風金氏)는 좌리공신(佐理功臣) 호조판서(戶曹判書)를 지낸 월천군(月川君) 문평공(文平公) 김길통(金吉通)의 14세손으로, 부덕(婦德)이 뛰어난 여인이었다. 박씨가문에 시집와서는 병석에 계신 시부모를 정성껏 봉양하였으며, 남편 박정환이 갑자기 고황(膏肓)으로 여러 해 병석에 누어 있을 때 지극정성으로 남편을 병간하였다. 이에 전라도 각 지역의 유생들이 공의(公議)를 모아 이들 두 부부의 효열(孝烈)을 조정에 널리 알려 포양(褒揚)의 특전을 받게 해달라면서 순상(巡相)에게 상서를 올렸다. 순상은 이에 대하여 그 행적이 참으로 가상하기는 한 일이지만, 조정에 포향을 상신하는 일은 중요한 일이니 서둘러 처리할 수 없다는 제음(題音)을 내렸다. 박정환은 소자(小字) 박인필(朴仁弼)로도 불리웠는데, 이 문서가 소장된 남원의 밀양박씨 문중에는 박인필이 작성했던 시권(試券)이 3장 전하고 있다. 문과에 급제하지 못했고, 생원 진사시에 합격한 기록도 찾아볼 수 없지만, 박인필이 효자일 뿐만 아니라 학문에도 상당한 노력을 기울였던 인재라는 것을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