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11년 박용호(朴龍祜) 첩(帖) 고문서-교령류-차첩 정치/행정-임면-차첩 嘉慶十六年九月初八日 吏曹判書 朴龍祜 嘉慶十六年九月初八日 吏曹判書 서울시 종로구 [署押] 1개 8.0*8.0 1개(적색, 정방형) 남원 수지 죽산박씨가 남원 수지 죽산박씨가 1811년(순조 11) 9월 초8일에 이조(吏曺)에서 종사랑(從仕郎) 박용호(朴龍祜)를 권지승문원부정자(權知承文院副正字)로 임명하면서 내린 첩. 1811년(순조 11) 9월 초8일에 이조(吏曺)에서 국왕의 구두지시[口傳]에 따라 문과에 새로 급제한 종사랑(從仕郎) 박용호(朴龍祜)를 권지승문원부정자(權知承文院副正字)로 임명하면서 내린 첩이다. 박용호는 바로 전년인 1810년(순조 10)에 33세의 나이로 식년문과(式年文科)에 급제한 뒤에 정9품의 문관 품계인 종사랑(從仕郎)의 자품만을 지니고 있었는데, 이때에 와서 관직에 임명된 것이다. 당시 국왕의 구두지시를 전달한 사람은 동부승지(同副承旨) 안정선(安廷善)이었다. 당시 박용호가 지녔던 관직의 이름에 붙은 권지(權知)는 오늘날의 시보(試補)나 인턴 또는 수습, 견습과 유사한 제도이다. 즉 어떤 관직에 정식으로 임명되기 전에 실제로 그 일에 종사하여 익히는 일 또는 그러한 직책을 가리킨다. 조선시대에는 문과 급제자의 경우 승문원(承文院), 성균관(成均館), 교서관(校書館) 등 세 곳 중의 어느 하나에 배치되었는데, 박용호의 경우 문과에 급제한 뒤에 승문원의 종9품 말단관직인 부정자(副正字)에 권지로 배치되었던 것이다. 박용호는 1778년(정조 2)생으로 본관은 죽산(竹山)이며 자(字)는 문여(文汝)로, 남원(南原) 출신이다. 한편 문서의 배면(背面)에는 '吏吏 李基黙'라고 적혀 있다. '이이'는 고신을 작성하는 이조의 서리로, 흔히 단골, 단골서리, 단골리로 불리웠다. 즉 박용호의 교첩을 직접 작성한 사람은 이기묵이었다. 이조와 병조에서 인사를 담당하는 이들 정색서리(政色書吏)들은 지방 양반들과 돈독한 관계를 맺었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첩(帖)은 크게 두 가지로 구분되는데, 그 하나는 임명장이며 또 다른 하나는 명령서이다. 전자는, 중앙 관아와 지방 감영(監營)에서 7품 이하의 관원을 임명할 때 그리고 수령이 속관(屬官) 즉 품관(品冠)이나 향리(鄕里) 등을 임명하거나 또는 그 고을 유림들을 제관(祭官)으로 임명할 때 발급하였다. 후자는 감사(監司)나 수령이 하급 관원이나 속관들에게 명령을 내릴 때 발급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