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13년 박용호(朴龍祜) 교첩(敎牒) 고문서-교령류-고신 정치/행정-임면-고신 嘉慶十八年十二月十三日 吏曹判書 朴龍祜 嘉慶十八年十二月十三日 吏曹判書 서울시 종로구 [署押] 1개 8.0*8.0 1개(적색, 정방형) 남원 수지 죽산박씨가 남원 수지 죽산박씨가 1813년(순조 13) 12월 13일에 이조(吏曺)에서 왕명(王命)을 받아 선교랑(宣敎郎) 박용호(朴龍祜)에게 발급한 교첩(敎牒). 1813년(순조 13) 12월 13일에 이조(吏曺)에서 왕명(王命)을 받아 선교랑(宣敎郎) 박용호(朴龍祜)에게 발급한 교첩(敎牒)이다. 이때 박용호는 승훈랑(承訓郎)으로 승급되었다. 선교랑은 문신 종6품 상계(上階)의 품계이며, 승훈랑은 문신 정6품 하계(下階)의 품계이므로 1단계 승급된 셈이다. 이 때 자품이 승급된 이유를 교첩의 본문에 "徽陵別檢癸十二別加"라고 밝히고 있다. 당시 휘릉(徽陵) 별검(別檢)의 관직에 있던 박용호가 계유년, 즉 이 해 1813년 12월에 있었던 별가(別加)의 혜택을 받아 승진되었다는 의미이다. 별가는 국가의 경사나 큰 행사 뒤에 백관에 대하여 베풀어지던 은전인데, 주로 품계를 더하여 주는 은전을 가르킨다. 휘릉은 제16대 인조(仁祖)의 계비(繼妃) 장렬왕후(莊烈王后) 조씨(趙氏)의 능이다. 별검은 정8품 또는 종8품의 관직으로 무록관(無祿官)이다. 박용호는 1778년(정조 2)생으로 본관은 죽산(竹山)이며 자(字)는 문여(文汝)로, 남원(南原) 출신이다. 1810년(순조 10)에 33세의 나이로 식년문과(式年文科)에 급제하였다. 한편 문서의 배면(背面)에는 '吏吏 李基黙'라고 적혀 있다. '이이'는 고신을 작성하는 이조의 서리로, 흔히 단골, 단골서리, 단골리로 불리웠다. 즉 박용호의 교첩을 직접 작성한 사람은 이기묵이었다. 이조와 병조에서 인사를 담당하는 이들 정색서리(政色書吏)들은 지방 양반들과 돈독한 관계를 맺었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교첩은 5품 이하의 관원에게 이조나 병조에서 발급하는 임명장이다. 4품 이상의 관원에게 국왕이 직접 발급하는 임명장은 교지(敎旨)라고 불리웠다. 교첩은 대간(臺諫)의 인사비토권이라고 할 수 있는 서경(署經)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국왕이 관직을 임명하더라도 5품 이하 관직의 경우 대간이 서경을 해야 비로서 그 인사가 효력을 발휘하였다. 국왕의 자의적인 인사권을 견제하기 위한 제도적인 장치인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