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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문문기류

1821년 노(奴) 정쇠(丁金) 패지(牌旨) 고문서-명문문기류-배지 경제-매매/교역-배지 辛巳十一月二十五日 上典 李 奴丁金 辛巳十一月二十五日 上典 李 전북 부안군 [着名] 1개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1821년(순조 4) 11월 25일에 상전(上典) 이씨(李氏)가 자신의 논을 대신 팔아달라면서 노(奴) 정쇠(丁金)에게 써준 패지(牌旨). 1821년(순조 4) 11월 25일에 상전(上典) 이씨(李氏)가 노(奴) 정쇠(丁金)에게 자신을 대신하여 시가대로 논을 방매하라면서 작성해 준 패지(牌旨)이다. 패지는 '배지' 또는 '패자'라고도 하였다. 일종의 위임장이다. 주로 전답 등을 매매할 때 상전이 자신의 노비에게 해당 매매 행위를 대행하도록 시키면서 작성해 주었다. 이때 정쇠가 매매를 위임받은 논은 천동(泉洞)의 언자답(言字畓) 4부(負), 같은 언자답 5부(負) 1속(束), 같은 언자답 2부(負) 등 세 곳의 논 4두락이었다. 매입자가 있을 경우 시가대로 팔기로 하여 문서를 작성하되, 본문기(本文記)는 다른 논의 문기에 같이 붙어 있기 때문에 지급할 수 없다는 단서를 달라고 하였다. 상전은 긴히 돈을 끌 데가 있어서 이 논을 판다고 매매 사유를 적었다. 논이 위치한 천동은 부안현 하서면 천동으로, 지금의 부안군 부령면 서외리 하서면 석상리에 해당하는 지역이다. 상전 이씨는 부안현 동도면 선은리에 대대로 살았던 전주이씨가의 일원으로 추정된다. 이 문서가 소장된 부안의 선은동 전주이씨가에는 19세기 초부터 20세기 초까지 작성되었던 명문 5백여 점이 전하고 있어서 이 가문이 당시에 경제적으로 상당한 기반을 축적하였음을 알 수 있다. 명문 뿐만 아니라 산송(山訟) 관련 소지(所志)도 다수 소장되어 있다. 한편 이 가문의 것으로 추정되는 호적문서 31건이 호남권 한국학자료센터의 고문서DB로 구축되어 있어서 작성연대가 간지로만 적혀 있는 명문과 소지의 정확한 작성연대를 파악하는데 상당한 도움을 얻을 수 있다. 호적문서는 1801년부터 1888년까지 부안현 동도면 선은동에서 계속 작성되었는데, 여기에 기재된 호주들의 이름은 이양호(李養灝), 이양락(李養洛), 이양순(李養淳), 이양식(李養湜), 이익용(李翼容), 이겸용(李謙容), 이규함(李圭咸), 이규정(李奎井) 등이다. 한편 조선시대에는 매매행위를 대신하기 위하여 작성된 위의 패지 이외에, 궁방에서 수세(收稅) 등의 목적으로 발급한 도서패자(圖書牌子), 관아에서 발급한 관패자(官牌子), 서원이나 문중에서 발급한 패자 등 다양한 용도의 패지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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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빙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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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차계장류

1822년 남원(南原) 기지방(機池坊) 유학(幼學) 원복철(元復哲) 등 상서(上書) 1 고문서-소차계장류-소지류 국왕/왕실-보고-상서 壬午五月 機池坊化民元復哲金壽甲等 城主 壬午五月 전북 남원시 [署押] 1개, [官印] 1개 7.0*7.0(정방형) 적색 1개 남원 금지 밀양박씨가 남원 금지 밀양박씨가 1822년(순조 22) 5월에 남원(南原) 기지방(機池坊)에 사는 유학(幼學) 원복철(元復哲) 등 56명이 남원부사(南原府使)에게 올린 상서(上書). 1822년(순조 22) 5월에 남원(南原) 기지방(機池坊)에 사는 유학(幼學) 원복철(元復哲) 등 56명이 기지방 삼리(三里)에 사는 동몽(童蒙) 박인필(朴仁弼)의 효행을 윗 관사에 알려 포양(褒揚)을 받을 수 있도록 해달라면서 남원부사(南原府使)에게 올린 상서(上書)이다. 밀양박씨(密陽朴氏) 강수공(江叟公)의 9대손인 박인필은 충효(忠孝)의 가문에서 태어나 일찍부터 효심이 깊었다. 부친이 알 수 없는 병으로 수년 동안 병석에 있었으나 증세가 악화되어 온몸이 부풀어 오르고 사지가 마비되었는가 하면 가래와 기침으로 목구멍이 막혀 꼼짝도 할 수 없는 지경이 되었다. 박인필은 백방으로 약을 구했으나 효과가 없었다. 급기야 부친이 사경을 헤매게 되자 박인필은 밤낮으로 하늘에 기도를 올리며 자기를 대신 데려가라고 빌었다. 급기야는 자신의 넓적다리를 베어 불에 구은 다음에 부친에게는 참새구이라고 속여서 드시게 하였다. 그러자 사경에 이르렀던 그의 부친이 점차 회복하게 되었다. 박인필의 나이 불과 17세였다. 모두가 하늘이 그의 효성에 감동한 것이라고 하였다. 또 이 달 초에는 단독증(丹毒症)으로 온몸이 부풀어 올라 사람들이 모두 체념하고 있었는데, 박인필은 변함없이 모친의 병간을 지극 정성으로 하여 마침내 차도가 있게 되었다. 남원의 유생들은 어린 박인필의 효행이 세상에서 사라져서는 안되기에 공의(公議)를 모아 성주에게 상서를 올리니, 이러한 박인필의 행적을 위에 알려 포양의 특전을 받을 수 있도록 해달라고 간청하였다. 남원부사는 이에 대해 참으로 가상하다면서 널리 의견을 모아달라는 제사(題辭)를 내렸다. 박인필의 효행과 관련한 상서는 이 문서 외에도 몇 건이 더 전하고 있는데, 이에 따르면 박인필은 박정환(朴正煥)의 소자(小字)이다. 또 박인필 뿐만 아니라 그의 처 청풍김씨(淸風金氏)도 효열(孝烈)로 이름이 높아 여러 차례 지방 유림들이 포양(褒揚)을 청하는 상서를 관에 올리기도 하였다. 이 문서가 소장된 남원의 밀양박씨 문중에는 박인필이 작성했던 시권(試券)이 3장 전하고 있다. 문과에 급제하지 못했고, 생원 진사시에 합격한 기록도 찾아볼 수 없지만, 박인필이 효자일 뿐만 아니라 학문에도 상당한 노력을 기울였던 인재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남원 기지방의 유생들은 같은 해 9월에도 거의 같은 내용의 상서를 남원부사(南原府使)에게 올렸다. "1822년 남원(南原) 기지방(機池坊) 유학(幼學) 원복철(元復哲) 등 상서(上書) 2"가 바로 그것이다. 한편 이 문서에는 작성연대를 임오년으로만 적고 있는데, 문서의 소장처인 남원의 밀양박씨 문중에서는 이를 1882년으로 추정하여 문서에 연필로 그렇게 써놓았다. 이뿐만이 아니라, 위 박인필(朴仁弼)의 효행과 관련하여 작성된 상서들이 모두 이 시기를 전후하여 작성된 것으로 추정하였다. 그러나 위 임오년은 1882년이 아니라 1822년으로 추정되며, 효행 관련 문서들도 대부분 이 시기에서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은 시기에 작성된 것으로 보인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위 박인필(朴仁弼)이 부친의 친산(親山)을 쓰기 위하여 1824년에 산지를 매입하였고("1824년 박인필(朴仁弼) 산지매매명문(山地賣買明文)" 참조), 효행 관련 통문이나 상서들이 17세 동몽(童蒙) 박인필을 언급하고 있다. 즉 부친이 죽기 직전의 박인필이 동몽으로 어린 나이였고, 그 시기를 명문에서는 도광 4년으로 명기하고 있는 점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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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차계장류

1822년 남원(南原) 유학(幼學) 최준(崔濬) 등 상서(上書) 고문서-소차계장류-소지류 국왕/왕실-보고-상서 壬午十月 境內化民幼學崔濬梁復軫等 城主 壬午十月 전북 남원시 [署押] 1개, [官印] 3개 7.0*7.0(정방형) 적색 3개 남원 금지 밀양박씨가 남원 금지 밀양박씨가 1822년(순조 22) 10월에 남원(南原)에 사는 유학(幼學) 최준(崔濬) 등 28명이 남원부사(南原府使)에게 올린 상서(上書). 1822년(순조 22) 10월에 남원(南原)에 사는 유학(幼學) 최준(崔濬) 등 28명이 남원 기지방(機池坊)에 사는 동몽(童蒙) 박인필(朴仁弼)의 효행을 조정에 알려 그의 아름다운 행적이 없어지지 않고 널리 알려질 수 있도록 해달라면서 남원부사(南原府使)에게 올린 상서(上書)이다. 밀양박씨(密陽朴氏) 강수공(江叟公)의 9대손인 박인필은 충효(忠孝)의 가문에서 태어나 일찍부터 효심이 깊었다. 부친이 알 수 없는 병으로 수년 동안 병석에 있었으나 증세가 악화되어 온몸이 부풀어 오르고 사지가 마비되었는가 하면 가래와 기침으로 목구멍이 막혀 꼼짝도 할 수 없는 지경이 되었다. 박인필은 백방으로 약을 구했으나 효과가 없었다. 급기야 부친이 사경을 헤매게 되자 박인필은 밤낮으로 하늘에 기도를 올리며 자기를 대신 데려가라고 빌었다. 급기야는 자신의 넓적다리를 베어 불에 구은 다음에 부친에게는 참새구이라고 속여서 드시게 하였다. 그러자 사경에 이르렀던 그의 부친이 점차 회복하게 되었다. 박인필의 나이 불과 17세였다. 모두가 하늘이 그의 효성에 감동한 것이라고 하였다. 또 이 해 여름에는 모친이 괴질에 걸려 갑자기 사경을 헤매었는데, 박인필은 백방으로 약을 구하였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손가락을 잘라 그 피를 모친에게 마시게 하여 마침내 소생케 하였다. 남원의 유생들은 어린 박인필의 효행이 세상에서 사라져서는 안되기에 공의(公議)를 모아 성주에게 상서를 올리니, 이러한 박인필의 행적을 위에 알려 포양의 특전을 받을 수 있도록 해달라고 간청하였다. 남원부사는 이에 대해 참으로 가상하다면서 포양지전이 있어야 마땅하다는 제사(題辭)를 내렸다. 박인필의 효행과 관련한 상서는 이 문서 외에도 몇 건이 더 전하고 있는데, 이에 따르면 박인필은 박정환(朴正煥)의 소자(小字)이다. 또 박인필뿐만 아니라 그의 처 청풍김씨(淸風金氏)도 효열(孝烈)로 이름이 높아 여러 차례 지방 유림들이 포양(褒揚)을 청하는 상서를 관에 올리기도 하였다. 이 문서가 소장된 남원의 밀양박씨 문중에는 박인필이 작성했던 시권(試券)이 3장 전하고 있다. 문과에 급제하지 못했고, 생원 진사시에 합격한 기록도 찾아볼 수 없지만, 박인필이 효자일 뿐만 아니라 학문에도 상당한 노력을 기울였던 인재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남원의 유생들은 이 상서 외에도 박인필의 효행과 관련하여 여러 차례 남원부사와 순상(巡相), 그리고 암행어사 등에게 상서를 올렸었다. 한편 이 문서에는 작성연대를 임오년으로만 적고 있는데, 문서의 소장처인 남원의 밀양박씨 문중에서는 이를 1882년으로 추정하여 문서에 연필로 그렇게 써놓았다. 이뿐만이 아니라, 위 박인필(朴仁弼)의 효행과 관련하여 작성된 상서들이 모두 이 시기를 전후하여 작성된 것으로 추정하였다. 그러나 위 임오년은 1882년이 아니라 1822년으로 추정되며, 효행 관련 문서들도 대부분 이 시기에서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은 시기에 작성된 것으로 보인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위 박인필(朴仁弼)이 부친의 친산(親山)을 쓰기 위하여 1824년에 산지를 매입하였고("1824년 박인필(朴仁弼) 산지매매명문(山地賣買明文)" 참조), 효행 관련 통문이나 상서들이 17세 동몽(童蒙) 박인필을 언급하고 있다. 즉 부친이 죽기 직전의 박인필이 동몽으로 어린 나이였고, 그 시기를 명문에서는 도광 4년으로 명기하고 있는 점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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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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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령류

敎旨淑夫人金氏贈貞夫人者咸豐五年十二月二十六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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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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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간통고류

1822년 남원(南原) 견소곡(見所谷) 유학(幼學) 이광식(李光植) 등 통문(通文) 초(抄) 고문서-서간통고류-통문 사회-조직/운영-통문 壬午三月初六日 李光植 申光斗 李鎭坤 等 機池 僉尊 壬午三月初六日 전북 남원시 남원 금지 밀양박씨가 남원 금지 밀양박씨가 1822년(순조 22) 3월 초6일에 남원(南原) 견소곡(見所谷)에 사는 유학(幼學) 이광식(李光植) 등 5인이 기지방(機池坊)의 유생들에게 보낸 통문(通文)의 초(抄) 1822년(순조 22) 3월 초6일에 남원(南原) 견소곡(見所谷)에 사는 유학(幼學) 이광식(李光植) 등 5인이 남원 기지방(機池坊)에 사는 박인필(朴仁弼)의 효행을 널리 알려 포양(褒揚)을 받을 수 있도록 공의(公議)를 모우자면서 기지방의 유생들에게 보낸 통문(通文)의 초안이다. 밀양박씨(密陽朴氏) 강수공(江叟公)의 9대손인 박인필은 나이 17세 때 부친이 고질병으로 어쩔 수 없는 지경에 이르게 되자 자신의 넓적다리를 잘라서 달여 드시게 하였더니 쾌차하였다고 한다. 그 뒤에 어머니도 병이 깊어 구할 도리가 없게 되자, 박인필은 이번에는 자신의 손가락을 잘라 피를 마시게 하여 처음처럼 회복하였다. 남원의 유생들은 이 모두가 하늘이 박인필의 효행에 감동한 것이 틀림없다고 지적하면서, 이에 발문(發文)하여 공의(公議)를 모아 효자 박인필이 포양을 받을 수 있도록 하자고 하였다. 이광식과 함께 통문을 작성하는데 참여한 사람은 신광두(申光斗), 이진곤(李鎭坤), 이지위(李之韡), 박혁(朴革) 등이다. 견소곡은 오늘날 남원시 대강면에 해당하는 곳이며, 기지방은 남원시 금지면에 해당하는 곳이다. 이 문서가 소장된 남원의 밀양박씨 문중에는 박인필이 작성했던 시권(試券)이 3장 전하고 있다. 문과에 급제하지 못했고, 생원 진사시에 합격한 기록도 찾아볼 수 없지만, 박인필이 효자일 뿐만 아니라 학문에도 상당한 노력을 기울였던 인재라는 것을 알 수 있다. 한편 이 문서에는 작성연대를 임오년으로만 적고 있는데, 박인필(朴仁弼)이 부친의 친산(親山)을 쓰기 위하여 1824년에 산지를 매입하였던 점("1824년 박인필(朴仁弼) 산지매매명문(山地賣買明文)" 참조)을 고려하여 이를 1822년으로 추정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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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유형분류 :
서간통고류

1825년 이헌승(李憲承) 서간(書簡) 고문서-서간통고류-서간 개인-생활-서간 乙酉 九月二日 憲承 朴 文川宅 乙酉 九月二日 李憲承 남원 수지 죽산박씨가 남원 수지 죽산박씨가 1825년(순조 25) 9월 2일에 이헌승(李憲承)이 박용호(朴龍祜)에게 보낸 서간(書簡). 1825년(순조 25) 9월 2일에 이헌승(李憲承)이 박용호(朴龍祜)에게 보낸 서간(書簡)이다. 편지를 받고 무사히 서울에 갔음을 알았다며 연로(沿路)에서 낭패를 보았을 거라고 하였다. 자신은 상중의 슬픔이 덜어지지 않는다며 환향(還鄕)이 조금 늦어진다고 하였다. 먼저 편지를 보내 주어 위로가 된다며 현재 자신은 운봉(雲峯) 복검(覆檢)을 하고 있다고 하였다. 이헌승은 당시 남원 부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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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유형분류 :
시문류

김인진(金麟振) 만사(輓詞) 고문서-시문류-만사 종교/풍속-관혼상제-만사 金麟振 李殷弼 金麟振 김제 만경 전주이씨가 전북대학교 한국학자료센터 김인진(金麟振)이 이은필(李殷弼)의 죽음을 슬퍼하며 지은 만사(輓詞). 김인진(金麟振)이 이은필(李殷弼)의 죽음을 슬퍼하며 지은 만사(輓詞)이다. 만사는 죽은 사람이 살았을 때의 공덕(公德)을 기리고, 그를 좋은 곳으로 인도한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만사에서의 '만(輓)'은 끈다는 의미인데, 이는 망자의 상여(喪輿)가 장지(葬地)로 나갈 때 만사를 앞세워 인도하게 한다는 의미에서 비롯된 말이다. 만사는 어떤 정형화된 형태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오언절구(五言絶句)와 오언율시(五言律詩) 또는 칠언절구(七言絶句)나 칠언율시(七言律詩)로 쓰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간혹 고시체(古詩體)를 본떠서 장문(長文)의 시(詩)의 짓거나 혹은 4자체(字體)로 쓰는 경우도 있다. 이 만사는 글자의 수로 보아 고시체의 장문시이다. 위에서 만사의 대상자를 이은필이라고 밝혔지만, 사실 이를 알아내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대부분의 만사가 그러하듯, 이 만사에서도 만사의 주인공 이름을 직접 거론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이 만사와 함께 묶어져 있던 115건의 만사의 그 어디에서도 이은필의 이름은 보이지 않고 있는 실정이었다. 따라서 위의 만사등 중에서, 만사 작성자 스스로가 이은필의 친척이라고 적은 것을 모은 후, 그 사람에 대한 정보를 토대로 이은필을 알아낼 수 있었다. 이은필(李殷弼)은 본관이 전주(全州)였으며, 1891년(고종 28)에 실시한 신묘식년시(辛卯式年試)의 생원시(生員試)에 합격하였다. 당시 그의 나이 불과 17세였다. 이후 문과(文科)에는 급제하지는 않았지만, 대한제국관원이력서에 따르면 그는 영릉참봉(寧陵參奉), 영희전참봉(永禧殿參奉), 의릉참봉(懿陵參奉), 원구단사제서참봉(圜丘壇祠祭署參奉),목릉참봉(穆陵參奉), 경릉참봉(景陵參奉) 등을 지낸 것으로 나온다. 그런데 이은필의 거주지와 관련하여 궁금한 점이 있다. 신묘식년시 사마방목(司馬榜目)에 의하면 그의 거주지는 서울이었다. 그러나 조사과정에서 확인한 이은필의 거주지는 서울이 아니라 충청도 제천(堤川)이었다. 그렇다면 이은필은, 소과 합격 당시에는 서울에 살았지만 나중에 충청도로 이주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듯하다. 아니면 소과 합격 당시의 실제 거주지도 제천이었을 가능성도 있다. 조선시대에의 과거는 그것이 문과든, 무과든, 소과든 관계없이 본향(本鄕)만이 아니라 삼향(三鄕), 즉 본향, 처향(妻鄕), 외향(外鄕)에서 시험을 치를 수 있었고, 시권(試券)이나 방목에도 역시 시험을 치른 곳을 적도록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이은필에게 서울은 처향이나 외향이었을 가능성이 얼마든지 있었던 것이다. 궁금한 점은 또 있다. 이 만사를 접한 장소는 충청도가 아니라 전라도 김제였다. 그러니까 만사들이 원래는 충청도에 있다가 김제로 오게 되었다는 이야기인데, 그 이유는 알 수가 없다. 다만 이인필의 후손 누군가 김제로 이주하면서 본 만사들을 가지고 온 것이 아닐까 하는 막연한 추측을 할 뿐이다. 이은필은 생원시에 합격한 뒤에 능참봉을 지냈을 뿐이지만, 그가 죽었을 때 전국 각지의 유림들이 다투어 만시(輓詩)를 보낸 것으로 미루어 볼 때 유학자(儒學者)로서 상당한 명망을 누린 인물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는 광복 이후 어느 땐가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한편, 만사를 지은 김인진은 유학자로, 임영(臨瀛)의 후인이다.○ 원문 텍스트 爲輓哀詞欲斷裏當時齒德孰如 公詩禮儀兼傳舊業子孫勤 儉繼先功烟露忽減瀛州上風月多閑鏡水東儀容從此無 聞處契事有誰啓後蒙 臨瀛后 契下生 金麟振 謹再拜哭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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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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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차계장류

1859년 남원(南原) 기지방(機池坊) 유학(幼學) 방환귀(房煥貴) 등 등장(等狀) 고문서-소차계장류-소지류 법제-소송/판결/공증-소지류 己未三月 機池坊居民房煥貴元世五等 城主 己未三月 전북 남원시 남원 금지 밀양박씨가 남원 금지 밀양박씨가 1859년(철종 10) 3월에 남원(南原) 기지방(機池坊)에 사는 유학(幼學) 방환귀(房煥貴) 등 17명이 남원부사(南原府使)에게 올린 등장(等狀) 1859년(철종 10) 3월에 남원(南原) 기지방(機池坊)에 사는 유학(幼學) 방환귀(房煥貴) 등 17명이 남원부사(南原府使)에게 올린 등장(等狀)이다. 이들은 이 등장에서, 효자 박인필(朴仁弼)이 감영(監營)에서 포양(褒揚)의 제사(題辭)을 받아 여러 해 동안 연조(烟租)를 면제 받아 왔었으나, 이번에 억울하게도 그 특전에서 제외되었다고 탄원하고, 관련 증명 문서를 점련하여 올리니 다시 연역(烟役)에서 제외시켜달라고 하였다. 그러나 이 문서에 제사(題辭)가 없는 점으로 미루어 볼 때 관에 제출된 것으로는 보이지 않는다. 관련문서에 따르면, 밀양박씨(密陽朴氏) 강수공(江叟公)의 9대손인 박인필은 충효(忠孝)의 가문에서 태어나 일찍부터 효심이 깊었다. 부친이 알 수 없는 병으로 수년 동안 병석에 있었으나 증세가 악화되어 온몸이 부풀어 오르고 사지가 마비되었는가 하면 가래와 기침으로 목구멍이 막혀 꼼짝도 할 수 없는 지경이 되었다. 박인필은 백방으로 약을 구했으나 효과가 없었다. 급기야 부친이 사경을 헤매게 되자 박인필은 밤낮으로 하늘에 기도를 올리며 자기를 대신 데려가라고 빌었다. 급기야는 자신의 넓적다리를 베어 불에 구은 다음에 부친에게는 참새구이라고 속여서 드시게 하였다. 그러자 사경에 이르렀던 그의 부친이 점차 회복하게 되었다. 박인필의 나이 불과 17세였다. 모두가 하늘이 그의 효성에 감동한 것이라고 하였다. 또 그 달 모친이 괴질에 걸려 갑자기 사경을 헤매었는데, 박인필은 백방으로 약을 구하였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손가락을 잘라 그 피를 모친에게 마시게 하여 마침내 소생케 하였다. 남원의 유생들을 포함하여 전라도내의 유생들이 여러 차례 이처럼 어린 박인필의 지극한 효행을 포양하여 줄 것을 청하는 상서를 올렸다. 박인필은 박정환(朴正煥)의 소자(小字)이다. 또 박인필 뿐만 아니라 그의 처 청풍김씨(淸風金氏)도 효열(孝烈)로 이름이 높아 여러 차례 지방 유림들이 포양(褒揚)을 청하는 상서를 관에 올리기도 하였다. 이 문서가 소장된 남원의 밀양박씨 문중에는 박인필이 작성했던 시권(試券)이 3장 전하고 있다. 문과에 급제하지 못했고, 생원 진사시에 합격한 기록도 찾아볼 수 없지만, 박인필이 효자일 뿐만 아니라 학문에도 상당한 노력을 기울였던 인재라는 것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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秋懷 忘却氣衰年又高 載瞻黃葉白頭搔古稀七十今焉過 老去尋常自以遨堪可獨行還踽踽 何須與世共滔滔庭除葡蔓多秋病 使我心傷醉濁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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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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偶吟 物我旣同天地妙 森然自在不相離視猶未見誠難測 寂若無爲發有爲也能成物能收物 實是乾坤造化機此理於人元稟得 可看一本萬殊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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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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自警 丹心臺上丹心翁 自保丹心方寸中莫謂丹心無所用 丹心亦在飭修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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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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次錦山水心臺趙重峯先生祠宇重修韻 【二首】 先生遺迹昭然明 當亂秉忠擧義聲依舊水心臺宛在 臨風對月見眞情忠烈昭昭日月明 事功不啻繼家聲至今猶有餘風在 多士慕昻各盡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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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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讀論語 聖人敎誨何其切 可見升堂七十賢由已爲仁三月久 誠心好學是顔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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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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讀中庸 初學讀來理會難 無形無影說多端中閒萬事終爲一 窮到心融方可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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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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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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病中吟 終宵不寐待晨明 肯數雞鳴一二聲深祟應無將效日 可憐難狀病夫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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次柳觀雨雙流亭韻 【柳氏先世有合澗亭】 山雲深處水無邊 合澗堂高兩岸前松翠歌淸驚鶴夢 滄浪曲歇穏鷗眠牀罇留客頻傾月 門柳成林更帶烟寶子仁孫先業繼 家聲應與此亭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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敬次曺【毅坤】東塢亭韻 論水評山占此岡 箇中意味十分長登城聽鳥雲生背 臨水觀魚月在傍晩酌芳罇時摘菊 老裁煖服早栽桑床書幾卷琴三尺 不下春城錦繡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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孚禴齋晩眺 陟彼南岡最極頭 欲窮千里更登樓許多風月無量在 縱有文章不盡收歷歷晴川飛去鷺 茫茫湖海泛來鷗中流急水無人渡 可惜回船不自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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敬次李一齋講磨齋韻 院址築壇盛禮行 年年吉日祀先生至今多士尊崇地 有是肖孫感慕情七寶山靑眞面好 兩塘水綠本源淸餘風藹菀開來學 建此新齋揭美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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