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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부

2일(경신) 二日 庚申 맑음. 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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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일(신유) 三日 辛酉 맑음. 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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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일(임술) 四日 壬戌 맑음. 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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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일(신사) 十九日 辛巳 맑고 바람. 못자리를 만들도록 했다. 陽而風。命秧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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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부

20일(임오) 二十日 壬午 오늘은 입하(立夏)이다. 지곡(芝谷)의 정상원(鄭象源)・정종원(鄭琮源) 종형제가 경양(景陽)의 김영후(金永厚)와 함께 위문차 방문해주었다. 오후에는 함께 동행하여 지곡의 녹실(綠室)54) 어르신 댁에 도착했다. 〈지평공행장(持平公行狀)〉을 보여주어 그로 인해 기록한다.〈고(故) 통훈대부(通訓大夫) 사헌부(司憲府)지평(持平), 오천(烏川) 정재건(鄭在楗)55) 행장(行狀)〉공의 이름은 재건(在楗)56)이고 자는 계주(啓周)인데, 본조 경술년(1910) 9월 4일에 살고 있는 옥과의 집에서 순절했다. 대개 이때에 섬 오랑캐가 창양(搶攘, 몹시 어수선함)하여 우리나라를 도둑질함에 8도가 윤상(淪喪, 모두 망함)하고 종묘사직이 폐허가 되었다. 이에 구신(舊臣) 중에는 의리에 죽은 자가 거의 12~13명이었지만, 척촌의 비수를 가지고 목을 찔러 자살을 맹세함으로서 뜨거운 풍모와 늠름한 기운이 천지에 가득하게 한 것은 유독 충정공(忠貞公) 민영환(閔永煥)57)과 공 두 사람뿐이었다.공의 성은 정(鄭)으로, 영일인(迎日人)이다. 먼 조상은 이름이 균지(均之)인데, 고려에서 벼슬하여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 문하시랑(門下侍郞) 평장사(平章事)를 지냈다. 후대에 도 고관대작이 대대로 이어져 석학이 끊이지 않았으니, 3대를 전하여 문정(文貞)이 나왔고 2대를 전하여 정숙(貞肅)이 나왔으며, 또 4대를 전하여 문청(文淸)에 이르렀다. 문청은 곧 송강(松江) 선생이며, 선생의 8대 뒤에 공이 태어났다.문정은 이름이 사도(思道)이고, 고려 말의 명신으로 충실 근면하고 절의가 있었으며, 익찬공신(翊贊功臣) 정당문학(政堂文學) 진현관대제학(進賢館大提學)에 올랐다. 오천군(烏川君) 정숙은 이름이 연(淵)으로, 우리 태종(太宗)・세종(世宗) 양조(兩朝)에 이르러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함으로서 벼슬하여 정헌대부(正憲大夫) 병조판서(兵曺判書)가 되었고 의정부 좌의정(議政府左議政)에 증직되었다. 문청은 이름이 철(澈)로, 목릉(穆陵, 선조) 때 서인(西人)의 영수(嶺袖)가 되어 관직이 좌의정(左議政)에 올랐고, 광국(光國)・평난(平難)의 두 공훈으로 책록되어 인성부원군(寅城府院君)에 봉해졌다.증조의 이름은 취하(就河)58)로, 영조 무오년(1738)에 사마 양시에 합격했고 호가 이간재(易簡齋)이다. 휘 검(檢)과 휘 최환(最煥)은 그의 할아버지와 아버지인데, 두 분 모두 덕을 숨기고 벼슬하지 않았다. 어머니는 부안 김씨 덕감(德鑑)의 딸로, 여행(女行)이 있었으며, 헌종(憲宗) 계묘년(1843) 5월 25일에 공을 낳았다.공은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영특함이 보통 사람보다 뛰어나서 6~7세에 큰형과 작은 형의 글 읽는 소리를 듣고 곁에서 기억하여 암송했는데 한 글자도 착오가 없었다. 8세 때는 ≪소학(小學)≫에 통달해서 아버지 설송(雪松)공은 그가 원대한 그릇이 될 것임을 알고 기특하게 여겼다.이 해에 어머니 상을 당했는데 애훼(哀毁)59)함이 성인과 같았다. 어머니를 잃고 큰형수 고씨(高氏)에게 맡겨져서 길러졌는데, 그를 섬기기를 어머니처럼 하여 종신토록 쇠해지지 않았다. 무진년(1868)에 설송공이 죽자 집상(執喪) 예를 다하였고 최질(衰絰, 상복)을 몸에서 벗지 않았다.이보다 앞서 아버지의 명령으로 7경을 공부해서 과거에 응시했지만 누차 떨어졌었다. 상복을 벗자[外除]60) 마침내 서울로 가서 성균관에 나가서 수십 년 동안 가난을 겪으면서 거친 나물만 먹었다. 사람들은 그 고통을 견디지 못하는데 공은 그것에 처한 것을 편안하게 여겨 조금도 어려워하는 낯빛이 없이 독서를 더욱 부지런히 하였으니, 그 심지(心志)가 돈독함이 어려서부터 이미 그러한 것이었다.무자년(1888) 식년시(式年試)에 병과로 뽑혔고, 임진년(1892)에 부사과(副司果)에 제수되었으며, 9월에 성균관전적(成均館典籍)으로 승진, 계사년(1893)에 통훈대부(通訓大夫) 사헌부 지평(司憲府持平)으로 옮겼으니, 대개 이것이 공이 지내온 관직의 선후이다.공은 벼슬에 급급(汲汲)한 뜻이 없어 권세를 쫓지도 않았고 부탁하거나 머뭇거리지 않았다. 서울[長安]이 바다와 같아 거마(車馬) 소리가 떠들썩하였지만, 문을 닫아걸고 자취를 숨겨서 고요하기가 한사(寒士)와 같았다. 만년에는 낙척(落拓)하여 향리(鄕里)로 돌아와서는 아이들을 가르치면서 경전공부에 힘쓰고, 가동에게 일과를 주어 농사일에 힘쓰며, 세간(世間)의 일체 영욕(榮辱)에 대해서는 처음부터 그 마음을 두지 않았다.사람들이 혹 기신(起身)하기를 권하면 곧 웃으면서 말하기를, "난(亂)을 만나 황야로 은거하는 것은 옛날에도 또한 그런 사람들이 있었으니, 내게 무슨 서운함이 있겠는가?"라고 하고, 굳게 누워 다시 나아가지 않았다. 선조 문청공(文淸公)61)의 충청우국지심(忠淸憂國之心)을 사모하여 그 당의 편액을 '소송(小松)'이라 하였다.기유년(1909) 봄에 군(郡)이 폐지되어 학교[鄕校]를 장차 철거하려고 하자,62) 공이 유생들을 모아놓고 개연(慨然)하여 이르기를, "국세(國勢)가 이에 이르러 부자묘(夫子廟)가 철거되니, 무릇 우리 고을 사람은 누구인들 통한(痛恨)하지 않겠는가? 내가 마땅히 봉소(封疏) 하리라."라고 하고 죽음으로써 기약하고 상소문을 이루었으나 마침내 일을 이루지 못하고 끝나게 되었다.임종한 날에는 의관을 바르게 하여 묘(墓)에 참배하고, 친우들을 방문하여 태연자약하게 담소하면서 근심하는 얼굴빛이 하나도 없었다. 집에 돌아와서는 집안사람들에게 닭을 잡아 점심 반찬을 만들게 하고 처자(妻子)와 함께 즐겁게 먹고 밖으로 나가니, 사람들이 의심하지 않았는데, 날이 저물도록 돌아오지 않자 집안사람들이 비로소 놀라 급하게 찾아다녔다. 곧 사랑채의 고요하고 후미진 곳에 깨끗하게 소제하고 단정하게 앉아서 손칼[手刀]로 자인(自刃)하여63) 피가 흘러 몸을 적신 채 조용히 의리를 위해 목숨을 버려 얼굴 모습이 살아있는 듯 하니, 보는 사람들이 모두 휘둥그레지며 혀를 차면서 큰소리로 "충신이로다. 충신이로다."라고 말하였다. 부고가 나가자 원근(遠近)에서 들은 자들이 공을 아는 사람이나 모르는 사람이나 어진 사람이나 불초(不肖)한 사람이나 가릴 것 없이 모두 친척을 애도하듯이 탄식하며 눈물을 흘렸다.그 유서(遺書)에 이르기를, "망국(亡國)의 신하가 구차하게 사는 것은 의리상 옳지 않다. 나는 명치(明治)64)의 세상에 존재하지 않기로 맹세하였으므로 9월 4일에 칼을 품고 죽는다."라고 하였다. 또 이르기를 "사람이 세상에 태어나서 당연히 죽어야 할 때 죽는 것은 죽었으나 죽은 것이 아니다. 너희들은 나의 죽음 때문에 마음 흔들리지 말고, 부지런히 주경야독하고, 우애를 더욱 두터이 하여 나의 가르침에 부응하도록 하여라."라고 하였다. 또 "나라를 위해 순절(殉節)하는 것은 신하의 직임이오. 내가 죽은 후 모름지기 세 아들을 잘 이끌어서 우리 집안을 잘 보존하도록 하시오."라고 했으니, 이것은 부인과 자식들에게 남긴 것이다.향년 68세로, 12일 모갑(某甲)에 본현 약천(藥川)65)의 진좌(辰坐, 동남쪽을 등진 방향) 언덕에 첫째 부인 배씨(裴氏) 묘와 같은 언덕의 십수보(十數步) 떨어진 곳에 따로 장사지냈으니, 유명(遺命)에 따른 것이다.공은 두 번 장가를 들었으니, 첫째 부인인 성주 배씨(星主裴氏)는 규현(奎賢)의 딸로 일찍 죽고 1녀를 두었다. 이 딸은 울산 김모씨에게 출가했다. 재취인 풍천 노씨(豊川盧氏)는 광태(光泰)의 딸로 옥계(玉溪) 진(稹)66)의 후손이다. 3남 1녀를 낳았는데, 장남 덕(氵悳)은 경주인(慶州人) 김모의 딸에게 장가들었고, 숙(潚)은 서산인(瑞山人) 유영구(柳永耉)의 딸에게 장가들었으며, 중부(仲父)에게 출계하였다. 익(瀷)은 양천인(陽川人) 허극(許極)의 딸에게 장가들었다. 딸은 죽산인(竹山人) 박해창(朴海昌)에게 시집갔는데 문과에 급제하고 비서랑(秘書郞)을 지낸 사람이다.아! 공께서는 품성이 순후(純厚)하고 용모가 단중(端重)하였으며, 사람을 대할 때는 화순하고, 아랫사람을 부릴 때는 너그럽게 하였다. 비록 종이나 여대(輿臺, 하인)라고 할지라도 먼저 은혜롭게 하고 뒤에 잘못을 말했는데, 고구정녕하게 하며 급하게 말하거나 엄한 기색이 없었고 회초리로 때리지도 않았다.그러나 강직하고 방정한 몸가짐과 확고부동한 뜻은 분육(賁育)67)도 그 용맹함을 잃었고, 저양(雎陽)68)도 그 절조를 잃었으며, 문산(文山)69)도 그 충을 잃을 정도이다. 그러니 저 은혜를 저버리고 나라는 팔아먹고 적을 위해 주인에게 짖어댄 자들은 마음이 떨리고 쓸개가 찢어지며 부끄러워서 얼굴이 사색이 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한자(韓子, 한유)가 말하길, "백이와 숙제가 없었다면 어지럽히는 신하와 해치는 자들이 후세에도 계속하여 나왔을 것이다."라고 했는데, 공과 같은 사람이 이런 사람의 짝이 되지 않겠는가? 오호라, 아름답구나!삼가 임자년(1912) 봄에 족인 정해만(鄭海晩)70)이 찬술하다. 是日立夏也。芝谷鄭象源・琮源從兄弟。 與景陽金永厚。 慰問次枉臨。午後同爲作伴。 到芝谷綠室丈宅。 示以〈持平公行狀〉。 因以記之。故通訓大夫 司憲府持平 烏川鄭公 行狀。公諱再健。 字啓周。 本朝。 庚戌九月四日。 殉節于所居玉果之私室。蓋是時島酋搶攘。 竊我邦國。 八域淪喪。 宗社邱墟。舊臣之死於義者。 殆十二三。 而持尺寸之匕。 誓心穴頸。 烈風凜氣。 充塞乎天地。 獨閔忠貞永煥及公二人而已。公姓鄭。 迎日人。遠祖。 諱均之。 仕麗。 金紫光祿大夫。 門下侍郞。 平章事。自後世襲冠冕。 名碩不替。 三傳而爲文貞。 再傳而貞肅。 又四傳而至文淸。文淸卽松江先生也。 先生之後八世而公生焉。文貞諱思道。 麗季名臣。 忠勤節義。 翊贊功臣。 政堂文學。 進賢館大提學。烏川君貞肅。 諱淵。 曁我太宗世宗兩朝。 以司馬筮仕。 正憲大夫。 兵曺判書。 贈議政府左議政。文淸諱澈。 穆陵時爲西人嶺袖。 官左議政。 策光國・平難二勳。 封寅城府院君。曾祖諱就河。 英廟戊午司馬兩試。 號易簡齋。諱檢。 諱最煥。 祖若考也。 兩世皆隱德不仕。妣扶安金氏德鑑之女。 有女行。 癸卯五月二十五日生公。公幼而聰穎絶凡。 兒六七歲時。 聞伯仲讀書。 從傍記誦。 無一字錯誤。八歲而通小學。 考雪松公。 知其爲遠大器。 奇之。是年丁母夫人憂。 哀毁如成人。失怙託邱嫂高氏鞠焉。 事之如慈母。 終身不衰。戊辰雪松公卒。 執喪盡禮。 衰絰不離身。先是以親命。 治七經。 屢屈不第。外除遂赴京。 就齋數十年喫貧。 藜莧苜蓿。人不堪其苦。 公處之晏如。少無難色。 讀書愈勤。 其心志之篤。 從少已然。戊子式擢丙科。 壬辰授副司果。 九月陞成均館典籍。 癸巳遷通訓大夫司憲府持平。 蓋公之歷官先後也。公仕䆠無汲汲意。 不趍權勢。 囁囑趦趄。長安如海。 車馬喧闐。 而閉戶歛跡。 寥寥如寒士也。晩年落拓歸鄕里。 敎兒而劬經傳。 課僮而勤畎畝。世間一切榮辱。 初不嬰其心。人或勸起。 則笑曰。 "遭亂遜荒。 古亦有人。 於我何憾?" 因堅臥不復出。慕先祖文淸公忠淸憂國之心。 扁其堂曰'小松'。己酉春。 郡廢而學校將毁。 公會儒生。 慨然謂曰。 "國勢至此。 夫子廟撤。 凡我鄕人。 孰不痛恨? 吾當封疏。" 期以身斃疏成。 而遂無事乃已。臨終一日。 正衣謁墓。 歷訪親友。 談笑自若。 一無戚戚容。及歸。 命家人殺鷄爲午饍。 共妻子食盡歡而出。 人不以爲恠。及暮不歸。 家人始驚遑索之。 卽於廊舍靜僻䖏。 淨掃端坐。 手刀自刃。 血淋淋濺身。 從容就義。 顔貌如生。 見者皆瞿然。 吐舌嘖嘖謂曰。 "忠臣忠臣。" 訃出。 遠近聞者。 無知不知賢不肖。 莫不咨嗟涕洟如悲親戚。其遺書曰。 "亡國之臣。 義不可以苟生。吾誓不在明治之世。 故九月四日。 伏釼而死。" 又曰 "人生於世。 死於當死。 死而不死。汝等勿以我死動念。 勤苦耕讀。 友愛加隆。 以副我訓。" 又曰 "爲國殉節。 臣子之職也。我死後。 須導率三子。 保我家室。" 此遺夫人諸子者也。享年六十八。 十二日。 某甲。 葬于本懸藥川之負辰原。 與元配裴氏墓同岡。 異窆十數步近。 遺命也。公凡再娶。 星主裴氏奎賢女。 早沒有一女。 適蔚山金某。豊川盧氏光泰女。 玉溪稹後也。生三男一女。 長氵悳娶慶州金某女。 潚娶瑞山柳永耉女。 出后仲父。 瀷娶陽川許極女。女適竹山朴海昌。 文秘書郞。噫! 公性質純厚。 風儀端重。 對人以和。 御下以寬。雖婢僕輿臺。 先恩後誨。 諄諄然。 無疾言遽色。 捶楚不加焉。然剛方之操。 牢確之志。 賁育失其勇。 睢陽失其節。 文山失其忠。彼負恩賣國。 爲賊吠主者。 能不心戰膽裂。 而忸怩面死土色乎? 韓子曰。 "微二子。 亂臣賊子。 接跡於後世。" 如公者。 非若人之儔也歟! 嗚呼韙哉! 謹狀。壬子春。 族 鄭海晩。 撰。 녹실(綠室) 정해만(鄭海晩, ?~1913)의 호이다. 자는 성보(成甫), 본관은 영일(迎日)이다. 정철(鄭澈)의 후손으로, 아버지는 해춘(海春)이며, 담양군 남면 지곡리에서 살았다. 정재건(鄭在楗, 1843~1910) 자는 계주(啓周), 호는 소송(小松), 본관은 영일(迎日)이다. 1888년 식년 문과에 급제한 이후 전적(典籍), 지평(持平), 정언(正言) 등을 역임하고, 시국이 혼란해짐을 보고 사직하여 고향에서 학문에 전념하고 있다가, 1910년 한일합병이 되자, 나라의 운명을 한탄하고 자결하였다. 健은 楗으로 바로 잡는다. 민영환(閔泳煥, 1861~1905) 자는 문약(文若)이고, 호는 계정(桂庭)이며, 본관은 여흥(驪興)이다. 1878년 문과에 장원급제하였으며, 21세에 성균관 대사성이 되었다. 1896년 특명전권공사로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2세의 대관식(戴冠式)에 참석한 것을 시작으로 서구 선진국의 외교관으로 활동하면서 신문명을 눈으로 체험하였다.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양력 11월 30일 자결하였다. 시호는 충정(忠正)이다. 저서로 ≪해천추범(海天秋帆)≫, ≪사구속초(使歐續草)≫, ≪천일책(千一策)≫ 등이 있다. 취하(就河) 정취하(鄭就河, 1691~1759)로, 자는 회원(會源), 호는 이간재(易簡齋), 본관은 영일(迎日)이다. 송강(松江) 정철(鄭澈)의 5대손이며, 삼연(三淵) 김창흡(金昌翕)과 친교가 있었다. 애훼(哀毁) 부모상을 당하여 몹시 슬퍼해서 몸이 허약해진 것을 말한다. 외제(外除) 외면으로만 상복을 벗고 속으로는 아직 슬픔이 없어지지 않는다는 뜻이다. 부모의 상에 상기를 마치면 외제한다.(≪예기(禮記)≫ 〈잡기 하(雜記下)〉) 문청공(文淸公) 문청공(文淸公)은 정철(鄭澈, 1536~1593)의 시호이다. 정철의 자는 계함(季涵), 호는 송강(松江), 본관은 연일(延日)이다. 아버지는 돈녕부 판관(敦寧府判官) 정유침(鄭惟沈)으로, 서울 장의동(藏義洞, 지금의 종로구 청운동)에서 태어났다. 1551년 을사사화에 관련되어 유배되었던 아버지가 풀려나자 할아버지의 산소가 있는 전라도(全羅道) 담양(潭陽) 창평(昌平) 당지산(唐旨山) 아래로 이주하였다. 정철은 과거에 급제할 때까지 10여년을 이곳에서 보내면서, 임억령(林億齡)・양응정(梁應鼎)・김인후(金麟厚)・송순(宋純)・기대승(奇大升) 등에게 학문을 배웠다. 작품으로는 〈성산별곡(星山別曲)〉・〈관동별곡(關東別曲)〉・〈사미인곡(思美人曲)〉・〈속미인곡(續美人曲)〉 등 4편의 가사와 시조 107수가 전한다. 기유(己酉)년 …… 하자 1908년에 옥과현을 폐지하고 창평군에 합하였다. 그 뒤 1914년에 다시 곡성군에 이속되었다. 손칼로 자인하여 정재건은 1910년 황현(黃玹)의 자결 소식을 듣고, "선비는 마땅히 이와 같이 하여야 한다."라고 말하고 유서를 남기고 자결하였다고 한다. 정재건이 자결할 때 사용한 칼은 독립기념관에 보관되어 있다. 명치(明治) 일본의 연호로, 1868~1912년에 사용하였다. 약천(藥川) 곡성군 입면 약천리를 말한다. 옥계(玉溪) 진(稹) 노진(盧稹, 1518~1578)을 말한다. 자는 자응(子膺), 호는 옥계(玉溪)・칙암(則庵), 본관은 풍천(豊川)이다. 1546년(명종 1)에 문과에 급제하여 지평(持平)・형조 참의・병조 판서・이조 판서 등을 역임하였으며, 시호는 문효(文孝)이다. 분육(賁育) 춘추전국시대 용사(勇士)로, 맹분(孟賁)과 하육(夏育)의 이름이다. 저양(雎陽) 당나라 현종(玄宗) 때 저양태수(雎陽太守)를 지낸 허원(許遠)을 말한다. 안녹산(安祿山)의 난에 장순(張巡)과 함께 저양성을 지키다가 몇 달을 포위당했으며 결국 성이 함락되어 함께 사로잡혀 굴복하지 않고 죽었다. 문산(文山) 문천상(文天祥)을 말함. 송(宋)나라 말엽의 충신(忠臣)으로, 자는 송서(宋瑞), 호는 문산(文山), 시호(諡號)는 충렬(忠烈)이다. 수도 임안(臨安)이 원(元)에 함락된 뒤에도 단종(端宗)을 받들고 근왕군(勤王軍)을 일으켜 원군(元軍)과 싸우다가 잡혀 죽었다. 정해만(鄭海晩, ?~1913) 자는 성보(成甫), 호는 녹실(綠室), 본관은 영일(迎日)이다. 정철(鄭澈)의 후손으로, 아버지는 해춘(海春)이며, 담양군 남면 지곡리에서 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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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일(갑신) 二十二日 甲申 맑고 바람. 오전에 녹실(綠室)에 들어가 고경(古經)을 토론하고 오후에 돌아왔다. 참봉과 더불어 잠깐 말을 주고받으며, 세속이 어지러워지는 것을 걱정하는 말을 하고 파했다. 고두강(高斗綱)72) - 자는 천경(天卿)이다 - 의 ≪회과당유고(悔過堂遺稿)≫를 보았는데, 장계(藏溪) -성명은 오이정(吳以井)73)이며 자는 명중(明仲)이다- 가 그를 추회(追懷)하면서 수필을 적은 것이 있어서 이에 그것을 기록한다.나의 벗 고천경(高天卿)은 인품이 매우 높고 쇄락하여 마치 얼음으로 만든 병에 비치는 가을 달과 같았고, 세상맛에 대해서는 담담한 것 같아서 물욕이 침범하지 못했다. 일찍이 나와 더불어 색욕을 논할 때 곧 이르길, '남녀 음양의 도는 다만 조화가 생생하는 묘일뿐이니, 어찌 여기에 정(情)을 해당시킬 수 있을 것인가?'라고 말했다. 내가 그것을 듣고 나도 모르게 가슴이 트여 마치 천 길이나 되는 구덩이 속에서 벗어난 것 같았다. 다른 무리들에게서 이와 같은 말을 들을 수 있는 것이 아닐 뿐만 아니라, 이미 이것에 대해서 철저히 알게 되었다.일찍이 임오년 여름에 나와 천경이 대자암(大慈庵)74)에 있으면서 ≪계몽(啓蒙)≫75)을 읽고 있었는데, 천경이 나에게 이르길, "그대는 음양이 하나의 기(氣)라는 묘리를 아는가?"라고 물어서 내가 "그렇다."라고 대답하였다. 그랬더니 천경이 "다만 이처럼 경솔하게 응대하여 말하는 것은 옳지 않네. 모름지기 굴(屈)한 것은 음이 되고 편[伸] 것은 양이 되는 것은 단지 하나의 기가 굴신 왕복한 것일 뿐, 특별히 두 개의 기가 있어서 양이 되고 음이 되는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하네."라고 하였다. 그 소견의 뛰어남이 이와 같았는데도 성취함이 없이 죽었으니, 한탄스러움을 이길 수 없도다. 陽而風。午前入綠室。 討論古經。 午後還。與參奉暫爲酬酌。 憂世俗之似是亂。 眞話而罷。看悔過堂【姓高字天卿】遺稿。 至藏溪【姓吳。 名以井。 字明仲】追懷隨錄。 因以記之。吾友高天卿。 人品甚高灑落。 如氷壺秋月。其於世味。 淡淡如也。 不爲物欲之所侵屈。嘗與余論色欲。 乃曰'男女陰陽之道。 只是造化生生之竗。 豈可當情於此?'云云。余聞之。 不覺爽然。 若超出於千仞坑塹中。 不是他徒說得如此。 已於此處透了。曾在壬午夏。 余與天卿。 在大慈庵。 讀啓蒙。 天卿謂余曰。 "君知陰陽一氣之竗?" 答曰。 "然。" 天卿曰。 "不可只如此草草應對說將去。須得屈而爲陰伸而爲陽。 只是一氣之屈伸往復而已。 非別有二氣爲陰爲陽者。" 其所見之超詣類如此。 而不克有成就而死。 可勝歎哉! 고두강(高斗綱, 1614~1643) 자는 천경(天卿), 호는 회과(悔過), 본관은 제주(濟州)이다. 고경명(高敬命)의 증손으로, 아버지는 부천(傅川)이다. 오이정(吳以井, 1619~1655) 자는 명중(明仲), 호는 장계(藏溪), 본관은 나주(羅州)이다. 아버지는 희도(希道)이며, 어머니는 순천김씨(順天金氏) 복흥(復興)의 딸이다. 정홍명(鄭弘溟)의 문인이다. 1639년(인조 17) 사마 양과(司馬兩科)에 합격하고, 1640년 고두강(高斗綱)・정한(鄭漢)을 찾아 산사로 가서 함께 ≪주역≫을 강론하였다. 1650년(효종 1) 태학(太學)에 들어가 이듬해 정시(庭試)에 응하였으나 자급(資級)이 없다는 이유로 낙방하자 고향으로 돌아가 학문에 전력하였다. 유고로 ≪장계유고≫ 1책이 있다. 대자암(大慈庵) 담양군 창평면 용수리의 상월정(上月亭)이 있던 자리가 원래 대자암 터라고 한다. 대자암은 고려 때 세워진 절인데 조선 초에 폐사된 것으로 보이며, 1457년 언양인(彦陽人) 김자수(金自修)가 벼슬을 사임하고 고향인 이곳에 돌아와 이곳에 상월정을 창건하여 손자사위인 함평이씨(咸平李氏) 이경(李儆)에게 양도하였고, 그 후 이경(李儆)은 사위 고인후(高因厚)에게 다시 양도하여 주었다고 한다. 계몽(啓蒙) ≪역학계몽(易學啓蒙)≫을 말함. 주희(朱熹)가 초학자를 위해 지은 ≪주역≫의 해설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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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일(병술) 二十四日 丙戌 맑음. 집에 돌아옴. 陽。還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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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일(무자) 二十六日 戊子 맑음. 두 손자를 돌보았다. 陽。護二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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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일(신해) 二十一日 辛亥 맑음. 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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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일(임자) 二十二日 壬子 맑음. 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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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일(갑인) 二十四日 甲寅 맑음. 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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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일(병진) 二十六 丙辰 입추(立秋). 맑음. 황충을 잡았다. 立秋。陽。捕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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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일(계해) 五日 癸亥 맑음. 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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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일(기축) 三日 己丑 맑음. 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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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일(경인) 四日 庚寅 흐리고 비. 陰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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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일(신묘) 五日 辛卯 맑음. 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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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일(정축) 二十一日 丁丑 눈이 오고 추웠다. 어린아이를 가르쳤다. 雪寒。敎小兒。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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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일(무인) 二十二日 戊寅 약간 맑음. 주인 책상 위에 새 책자 한권이 있기에 내가 물어보니 주인이 말하길, "이것은 무장(茂長)13) 암치(巖峙)14)에 사는 강대직(姜大直)15)의 선조(先祖)인 수사(水使)의 ≪물기재집(勿欺齋集)≫16)이다."라고 하면서 보여주었다. 내 생각에 그 수사는 곧 수륙대장(水陸大將)인데, '물기(勿欺)'로써 호를 삼은 것은 반드시 '임금을 섬김에 있어 속이지 않고, 범(犯)하지 않는다'는 뜻을 위주로 하여 칭한 것이리라.책을 열어 봉심(奉審)하였는데, 곧 심석장(心石丈) 송병순(宋秉珣)17)씨가 책머리에 서문을 한 것이다. 여기에 증전(曾傳, 대학)에서 말한 '무자기(無自欺)'18)라는 것으로 학문을 하는 관건(關鍵)의 첫머리로 삼았으니, 내가 속으로 그것을 의심하였다.그러나 돌이켜 생각하니 비로소 나의 견해가 천박함을 알았다. 나는 항상 '무자기(毋自欺)' 세 글자를 성의(誠意)의 공부로 여기면서 '물기야(勿欺也)'19)라는 것이 성의 공부에서 나온 것인 줄을 알지 못하였다. 때문에 이러한 의심이 있었던 것인데, 의심이 풀리게 된 나머지에 공경히 전편을 읽어보니, 강수사는 참으로 수사 중에 도를 아는 자로다. 수사의 휘는 응환(膺煥)20)이다. 陽微。主人案上有新冊子一卷。余問則主曰。 "此乃茂長巖峙姜大直先祖水使 ≪勿欺齋集≫。" 因出示之。余意。 其水使卽水陸大將。 而以勿欺爲號。 則必以事君勿欺也。 以犯之意。 爲主而称之矣。開卷奉審。 則心石丈宋秉珣氏序以弁卷。 以曾傳所云'無自欺'者。 爲學之關鍵爲首。 則余竊疑之。反而思之。 始覺余之所見。 淺也。余常以'毋自欺'三字。 爲誠意之工夫。 而不知'勿欺也'者。 自誠意上得來也。故有此疑。 而疑釋之餘。 敬讀全篇。 則姜水使。 眞水使中知道乎。水使諱膺煥。 무장(茂長) 전라북도 고창군 무장면이다. 무장(茂長)은 무송(茂松)과 장사(長沙)가 합쳐진 지명으로, 고창현과 흥덕현을 합쳐서 고창군을 이루고 있다. 암치(巖峙) 전라북도 고창군 성송면 암치리를 말한다. 강대직(姜大直, 1886~1930) 호는 이온재(而溫齋)이며, 본관은 진주(晉州)이다. 강희맹(姜希孟)의 후손으로, 경상좌수사를 역임한 물기재(勿欺齋) 강응환(姜膺煥)의 후손이다. 고창군 성송면 암치리에서 태어났으며, 1914년 독립의군부 종사관의 칙지(勅旨)를 받고, 이때부터 비밀 결사 독립운동 활동을 시작하여 주로 상해임시정부에 보내는 군자금 모금 운동을 하였고, 1919년 사종형 강대식(姜大湜)과 함께 암치 보통학교를 설립하였으며, 고창 고등보통학교를 설립할 때는 평의원으로 참여하여 재단 형성에 큰 공을 세웠다. 물기재집(勿欺齊集) 1912년에 강응환의 후손 강대직(姜大直)이 편집・간행하였다. 권두에 송병순(宋秉珣)의 서문, 권말에 기우만(奇宇萬)・강천수(姜天秀) 등의 발문이 있다. 권1에 시 61수, 가(歌) 2편, 권2에 전문(箋文) 10편, 장계(狀啓) 4편, 서(書) 5편, 기(記) 3편, 잡저 15편, 부록에 장계 7편, 유서(諭書) 2편 및 잡저 등이 수록되어 있다. 송병순(宋秉珣, 1839~1912) 자는 동옥(東玉), 호는 심석재(心石齋)이며 본관은 은진(恩津)이다. 송시열(宋時烈)의 9세손으로 종형인 송병선(宋秉璿)과 함께 큰아버지 송달수의 문하에서 성리학과 예학을 공부하였다. 1865년(고종 2) 서원철폐령이 내려 만동묘가 헐리게 되자 반대 상소를 올렸다. 1910년 경술국치를 당하여 투신자살을 시도했으나 실패하였다. 1912년 일제가 회유책으로 경학원(經學院) 강사에 임명하였으나 이를 거절하고, 유서를 남긴 뒤 독약을 먹고 자결하였다. 저서로는 15권의 문집과 ≪독서만집(讀書漫錄)≫, ≪학문삼요(學問三要)≫ 등이 있다. 무자기(無自欺) ≪대학장구≫ 〈성의장(誠意章)〉에 "그 뜻을 참되게 한다는 것은 스스로 속이지 않는다는 말이다. [所謂誠其意者, 毋自欺也]"라는 구절이 나온다. 물기(勿欺) 자기의 속마음을 속이지 않는다는 말이다. 자로(子路)가 임금님 섬기는 도리를 묻자, 공자가 "자기를 속이지 말고 임금님 앞에서도 바른말을 하라.[勿欺也而犯之]"라고 충고한 말이 ≪논어≫ 〈헌문(憲問)〉에 나온다. 강응환(姜膺煥, 1735~1795) 자는 명서(命瑞), 호는 물기재(勿欺齋), 본관은 진주(晉州)이다. 강희맹(姜希孟)의 9세손으로 전라도 무송(茂松, 지금의 고창(高敞))에서 태어났다. 문과에 합격하여, 창성부사(昌城府使)・동래부사 등을 지냈다. ≪물기재집≫ 2권 1책이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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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일(기묘) 二十三日 己卯 맑음. 미풍이 불고 추움. 陽。微風寒。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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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일(신사) 二十五日 辛巳 맑음.〈물기재(勿欺齋)의 동지하전(冬至賀箋)22)〉삼가 생각건대, 천년 만에 황하가 맑아지는 운수를 붙잡아 자극(紫極, 왕궁)에 응류(凝旒)하고, 칠일 만에 양이 회복하는 아름다움을 맞이하여 황종이 협률합니다.[黃鐘叶律]23) 산과 같이 만수무강하길 축원하니,24) 이에 천지의 마음을 보겠습니다.삼가 생각건대, 주상전하께서는 오묘한 도를 재성(財成)하시니,25) 공은 천지의 화육에 참여합니다. 은혜가 팔도에 미치니 침소에 드는 시간[丙枕]26)에도 내년을 도모하느라 잠 못 이루시고, 양궁의 뜻 기쁘게 이으니 갑관(甲觀)27)에서 상서로운 그림자를 살필 수 있습니다. 이에 우레가 진동하는 때[동지]를 맞이하여 더욱 월항(月恒, 달이 항상 뜨는) 아름다움을 받으소서.삼가 생각건대 신은 외람되게 남쪽 지방을 안찰하느라 북극을 향해 절을 올릴 뿐, 지금 양이 돌아오는 때를 맞이하여서도 성변(星弁, 벼슬아치)28)의 반열에 모일 수 없습니다. 부끄럽게 아득한 품계에 있을지라도 거의 바다를 막는 정성을 다하겠습니다. 신은 하늘같은 성상을 우러러 뵈옴에 간절하고 황공한 지극한 마음 이길 수 없습니다.〈정조하전(正朝賀箋)〉삼가 생각건대 자뢰하여 시작하고 생겨나니[資始資生]29) 천지와 덕을 나란히 하였고, 1월 1일에 산과 언덕처럼 만년을 사시기를 송축합니다. 전각에 봄이 생기니 바다 귀퉁이에서도 기쁨이 넘칩니다.삼가 생각건대 주상전하께서는 천하에 광명을 비추시니 해가 중천에 떠 있는 것 같고, 선기옥형을 살펴 칠정을 고르게 하시니,30) 바람은 고르고 비는 순조롭습니다. 자극(紫極)에 만수를 이끌어오니 해와 달이 항상 떠오르듯 하고, 이에 삼양이 다시 돌아오니, 모든 뭇 사람이 서로 기뻐합니다.삼가 생각건대 신은 외람되이 남쪽 변경을 맡고 있지만 정성은 북극성에 매달려 있고, 구중에 하례를 드리고자 하나 무신의 대열에도 설 수 없습니다. 이에 천리 밖에서 전(箋)을 바치며 오변(鰲抃, 몹시 기뻐함)의 정성을 대신합니다. 신은 하늘과 같은 성상을 우러름에 간절하고 황공한 마음 금할 수 없습니다. 陽。勿欺齋 冬至賀箋。伏以。 拊千載河淸之運。 紫極凝旒。迓七日陽來之休。 黃鐘叶律。祝岡陵壽。 見天地心。恭惟主上殿下。 道妙財成。 功參位育。恩覃八域。 丙枕軫嗣歲之圖。歡承兩宮。 甲觀考瑞旭之影。玆當雷奮之會。 益膺月恒之休。伏念臣忝按南維。 拜辭北極。時値陽復。 縱阻會星弁之班。職愧瞑陛。 庶彈控海防之悃。臣無任望天仰聖。 激切屛營之至。正朝賀箋。伏以。 資始資生。 侔一德於天地。元月元日。 頌萬年於岡陵。殿角春生。 海隅歡溢。恭惟主上殿下。 光天之下。 如日方中。齊七政於玉衡。 風調雨順。延萬壽於紫極。 日恒月升。逮玆三陽之載回。 擧切群情之胥悅。伏念臣職忝南閫。 誠懸北宸。獻賀九重。 縱阻虎拜之列。奉箋千里。 用替鰲抃之忱。臣無任望天仰聖。 激切屛營之至。 동지하전(冬至賀箋) 동지에 임금께 하례를 올리는 글이다. 황종이 협률합니다 동짓달이 되었음을 뜻한다. 황종(黃鍾)은 12율(律)의 첫 번째 율로 11월에 해당하는데, 일양의 기운이 처음 회복되는 동지가 되면 그 율관(律管) 속의 재가 풀썩 일어나며 반응한다고 한다. 십이율관(十二律管)을 1년의 열두 달에 배합(配合)하는 것을 협률(協律)이라 한다. 산과 …… 축원하니 만수무강을 축원할 때 쓰는 표현이다. ≪시경≫ 〈소아(小雅)・천보(天保)〉에 "산과 같고 언덕과 같으며, 산등성이와 같고 큰 언덕과 같다.[如山如阜, 如岡如陵.]"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재성하시니 ≪주역≫ 〈태괘(泰卦)〉 상(象)에 "하늘과 땅이 사귐이 태(泰)이니, 임금이 이것을 보고, 천지(天地)의 도(道)를 재성(財成)하고 천지의 의(宜)를 보상(輔相)하여 백성을 돕는다."라고 하였다. 재성은 임금이 천지가 교태(交泰)하는 도를 체득하여 잘 마름질하여 통치의 방법을 완성한다는 뜻이다. 침소에 드는 시간[丙枕] 하룻밤을 갑・을・병・정・무의 다섯으로 나눈 셋째 시각. 즉 밤 12시로, 임금이 잠자리에 드는 것을 말한다. 갑관(甲觀) 세자가 탄생한 내전(內殿). 한(漢)나라 효성 황제(孝成皇帝)가 원제(元帝)의 태자(太子)로서 갑관(甲觀)에서 탄생하였다는 고사(故事)에서 나온 말이다. 성변(星弁) 솔기를 오색 구슬로 장식하여 별처럼 빛나는 관을 가리킨다. ≪시경≫ 〈위풍(衛風)·기욱(淇奧)〉에 위 무공(衛武公)을 칭송하면서 "고깔에 장식한 오색 구슬이 별처럼 빛난다.[會弁如星]"고 하였다. 자뢰하여 …… 생겨나니[資始資生] ≪주역≫ 〈건괘(乾卦)〉 단사(彖辭)에, "위대하다, 건원(乾元)이여. 만물이 이를 자뢰하여 시작하나니, 이에 하늘을 통괄하도다.[大哉乾元, 萬物資始, 乃統天.]" 하였고, 〈곤괘(坤卦)〉 단사(彖辭)에, "지극하다, 곤원(坤元)이여. 만물이 이를 자뢰하여 생기나니, 이에 하늘을 순히 받들도다.[至哉坤元, 萬物資生, 乃順承天.]"라고 하였다. 주자의 본의(本義)에 의하면, 원(元)은 크다는 뜻이고 시작한다는 뜻이다. 선기옥형을 …… 하시니 순임금이 제위(帝位)에 올라 첫 번째 한 일로, 선기옥형(璿璣玉衡)이라는 천체 관측기를 살펴서 칠정(七政), 즉 금(金), 목(木), 수(水), 화(火), 토(土) 오성(五星)과 해, 달의 운행을 실제와 맞추어 백성들이 농사의 때를 잃지 않게 하였다.(≪서경≫ 〈순전(舜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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