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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六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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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일(신축) 十二日 辛丑 본 고을 향시(鄕市, 시장)에서 소를 팔았다. 賣牛本鄕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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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일(임인) 十三日 壬寅 맑음. 소를 사러 옥과 시장에 갔다가 돌아왔다. 陽。買牛次。 臨玉果市而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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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일(계묘) 十四日 癸卯 맑음. 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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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일(병오) 十七日 丙午 맑음. 신촌(新村)을 갔다. 陽。作新村之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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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일(임술) 四日 壬戌 흐림. 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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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일(계해) 五日 癸亥 흐림. 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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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일(을축) 七日 乙丑 흐림. 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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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일(정해) 二十四日 丁亥 잠깐 맑은 후 흐림. 오후에는 찬바람이 살랑살랑 불었다. 채소를 파종하고 울타리를 쳤다. 乍陽後陰。午後冷風颯颯。種菜又結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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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五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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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일(임술) 初一日 壬戌 밤에 비가 내렸다. 잠깐 맑다가 흐려지고, 정오에 이르러서는 다시 잠깐 비가 내렸다. 夜雨。乍晴而陰。 至午復乍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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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일(계해) 初二日 癸亥 흐림. 비가 오려고 하다가 오지 않아서 사람들이 부족하다고 생각했다. 陰。欲雨而未雨。 民以爲不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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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일(갑자) 初三日 甲子 맑음. 〈사산부자묘서(泗山夫子廟序)〉를 지었다.대저 부자(夫子, 공자)의 사당은 한 세대, 한 나라, 한 가문, 한 사람만의 사당이 아니고 실로 천하만국, 만 세대, 모든 사람의 무강(無疆)한 사당이다. 그 상(象)은 간괘(艮卦)에서 취하여 만물이 시작과 끝이 있게 하고, 그 덕은 췌괘(萃卦)에서 취하여 하나같이 무리의 마음을 우러르니, 그 도덕이 이보다 성대한 것이 없다.대개 부자는 천지와 그 덕이 합하고, 일월과 그 밝음이 합하며, 사시와 그 차례를 합하고, 귀신과 그 길흉을 합한다. 하늘에 앞서서 일을 행할 때에는 하늘이 이를 어기지 못하고, 하늘보다 뒤에 행할 때에는 하늘의 때를 받들게 될 것이다.[先天而天不違, 後天而奉天時]120) 그 처신에 있어서는 온량공검양(溫諒恭儉讓)121)하여 그것을 얻으셨으니, 나는 말을 하지 않고자 한다[予欲無言]122)는 경지에 이르렀다. 그의 기상은 우러르면 더욱 높아지고 뚫으려고 하면 더욱 견고해지고 바라보면 앞에 있는 것 같다가 홀연히 뒤에 있으니,123) 지나가는 곳마다 감화되고 있는 곳마다 신묘해지는 데에 이르렀다.124)그의 책임은 지극히 크고 무거워 당시에 홀로 선왕의 계천입극(繼天立極)125)을 취하고, 전수심법(傳授心法)126)의 요언(要言)을 후세에 고하여 도통의 전통을 드리웠다. 음양(陰陽)・도기(道器)・계선(繼善)・성성(成性)의 설을 갖추어 의리의 강령을 드러냈고, 인의성경(仁義誠敬)을 발하고 하늘과 사람이 하나의 이치로 통한다는 묘리를 드러냈으며, 법을 돈독히 하고 가르침을 펼쳐서 천질(天秩)127)의 학문을 세우셨다.위로는 복희(伏羲)128)로부터 주공(周公)에 이르기까지 행적을 역력히 다 기술하였고, 하도낙서(河圖洛書)의 문(文)에 있어서도 천지인(天地人) 삼재(三才)의 도가 일치하고 틈이 없는 이치를 밝게 발명하여 후세에 보여주고는 총괄해서 말하기를, '우리 도는 하나로 꿸 수 있다.'고 하였다. 이후로부터는 성현의 자질이 있는 사람이 세대를 걸러 나온다면 그 심법 전수의 은미함을 자연히 묵계하게 될 것이니, 우리 부자(夫子)께서 전하는 바의 뜻이다.무릇 천리(天理)의 바름을 말하는 것은 모두 우리 부자의 서술에 근원을 두고 나온 것이며, 무릇 천리의 공정함을 행하는 것은 모두 우리 부자가 경계를 드리운 것에 근본을 두고 나온 것이다. 그러므로 억조(億兆) 백성의 군사(君師)로 삼아 그로 하여금 다스리고 가르치게 하여,129) 그 본연의 병이지성(秉彜之性, 천성)을 회복할 수 있었다.그러한 후에 임금은 임금답고 신하는 신하답고, 아버지는 아버지답고 아들은 아들답고, 형은 형답고 아우는 아우답고, 남편은 남편답고 부인은 부인다워졌다. 상하가 화목하여 위로는 이륜(彜倫)이 밝아지고 아래로 교화가 행해졌다. 풍속은 기약하지 않아도 스스로 아름다워지니, 그 덕은 오래될수록 더욱 빛이 났다. 바람과 비가 이르는 곳마다 서리와 이슬이 내리는 곳마다 해와 달이 비추는 곳마다 그 은택을 입지 않은 곳이 없으니, 무릇 혈기(血氣)를 가진 무리들이 존경하고 친애하며 사모하지 않음이 없어 공자께서 돌아가시고 세상에 없어도 잊지 못하기까지[沒世不忘]130) 된 것은 그 타고난 천성이 하늘이 다하도록 잘못됨이 없어서이다. 그래서 후대의 현철(賢哲)과 왕자(王者)가 반드시 사당을 세우고 정성스럽게 배향함은 조금이나마 근본에 보답하고자 해서였다. 그런데 그 얼마나 다행스럽게도 우리나라의 운이 문명(文明)을 회복하게 되어 안문성공(安文成公)131)과 김문안공(金文安公)132)이 중국에 갔다가 돌아오자 부자(夫子)의 도가 동쪽으로 와서 사문(斯文)133)이 크게 밝혀지고 어질고 현명한 사람들이 배출되어 전장 문물(典章文物)이 중화에 비견하게 되고 지극한 이치가 이에 보존되어 만세토록 지금과 같게 되었는가?아! 어찌하여 왜곡된 견해를 지닌 자잘한 무리들이 와언(訛言)과 피행(詖行)으로써 저속한 말로 백성들을 회유하여 모두들 '내가 성인이다'라고 말하는가?134) 장구의 무리들[章句之徒]135)이 큰 근본을 알지 못하면서 그 글을 윤색하였으니, 근원이 없는 물이고 뿌리가 없는 나무이다. 어찌 오래 가겠는가? 마침내 나라를 그릇되게 하리라. 이것은 비단 어제오늘 일이 아니라 옛날부터 있어 왔으니, 그 전하는 바의 글이 옳은 듯하나 진리를 크게 어지럽혔다. 오호라! 시운이 고르지 않고 인심은 예측할 수 없어 이랬다 저랬다 변덕을 부리니[二三其德]136), 도(道)를 배반하고 신(神)을 기만하였다. 신명이란 무엇인가? 천명에 짝함이137) 일정하지 않다.이때 삼군자(三君子)가 뒤늦게 측은히 여겨서 석채례(釋菜禮)138)를 처음으로 행하니 곧 사문(師門)을 계승한 것이다. 언진(彦鎭)은 천성이 순효하고 학원(學源)은 학행(學行)이 다른 사람들보다 뛰어나며, 언원(彦源)은 의견이 탁월한데, 한마음으로 협력하여 사수지간(泗洙之間)139)에 부자의 사당을 창건하였다. 자손 형제와 친척들[群昭群穆]140)이 자연히 복응하여 자산을 기울여 성금을 내었다. 소문이 이르자마자 서민들이 자식처럼 와서141) 터를 닦고 낙성식을 도왔다. 새로운 사당이 휘황하게 빛나자 명공(名公, 유명하거나 뛰어난 재상)과 석유(碩儒)142)가 글을 전해왔고, 노성의 궐리[魯城之闕里]143)에서 영정(影幀)을 모시고 와서 여기에 봉안하니, 밝은 영령이 양양(洋洋)하여 좌우에 있는 듯 하고, 사람들도 싫어함이 없었다[無射於人斯]144). 재명성복(齊明盛服)145)하고 석채례를 올리니 성대하게 많은 선비들이 모여들었다.하물며 회랑과 당(堂)을 세워 강학의 장소로 삼음에 있어서랴? 실로 유림들이 우러르며 의탁할 곳이다. 그러니 삼군자는 다만 선조를 사모하여 효성스러운 것만이 아니다. 또한 도통을 잃어버린 것을 근심하고 그 전하는 뜻을 잘 계승하였으니, 그 풍화에 있어서는 크게 공이 있는 것이다.나 영찬은 갱장(羹墻)146)의 사모함이 더욱 깊어서 듣자마자 곧바로 달려가 뵙고 물러나서 당에 들어갔다. 당의 편액은 '사산재(泗山齋)'로, 외람되게도 감히 서문을 쓴다. 본래의 자질이 문장하는 사람이 아니지만 대략 선진(先進)들이 전하는 말로 집성하니, 후진들이 보고 느끼길 기다릴 따름이다. 陽。題〈泗山夫子廟序〉。夫夫子廟。 非一代一國一家一人之廟。 而實天下萬國万世群生無疆之廟也。其象取艮。 終始萬物。 其德取萃。 仰一衆心。 以其道德。 莫此爲盛也。蓋夫子與天地合其德。 與日月合其明。 與四時合其序。 與鬼神合其吉凶。先天而天不違。 後天而奉天時。其處己也。 溫諒恭儉讓而得之。 至於我欲無言。其氣像也。 仰之彌高。 鑽之彌堅。 瞻之在前。 忽焉在後。 至於過化存神。其任至大。 其責亦重。 於時。 獨取先王繼天立極。 傳授心法之要言。 詔後世而垂道統之緖。備陰陽道器繼善成性之說。 以著義理之綱領。 發仁義誠敬。 著天人一理之妙。 敦典敷敎立天秩之學。上自伏羲。 以至於周公。 所行之跡。 歷歷盡述。 而其於河洛之文。 天地人三才。 吻合無間之理。 昭昭發明。 以示來世。 而摠言之曰。 '吾道一以貫之。' 自是之後。 聖賢之資。 間世而出。 則其心之術之微。 自然黙契。 吾夫子所傳之意。凡所言天理之正者。 皆原於吾夫子所述中流出。 凡所行天理之公者。 皆本乎吾夫子垂戒上得來。以爲億兆之君師。 使之治而敎之。 以復其本然秉彜之性。然後君君臣臣。 父父子子。 兄兄弟弟。 夫夫婦婦。 上下和睦。 彜倫明于上。 敎化行於下。風俗不期而自美。 則其德悠久而愈光。其於風雨所至。 霜露所墜。 日月所照。 無不知被其澤。 而凡所血氣之類。 莫不尊親而思慕之。 至於沒世不忘。 以其秉彛之極天罔墜。是以後賢後王。 必建庿誠享。 以其報本之萬一。 而何幸吾邦運復文明。 安文成․金文安兩公。 聘中國以歸。 夫子道東。 斯文大闡。 仁賢輩出。 典章文物。 侔擬中華。 至理斯存。 萬世同今。噫! 何曲見之誚流。 以訛言詖行。 卑卑諭民。 俱曰予聖。章句之徒。 不識大本。 潤色其書。 無源之水。 無根之木。何可長也? 卒而誤國。然此非但今日事。 自古有之。 其所傳之書似是。 而大亂眞矣。嗚呼! 時運不齊。 人心不測。 二三其德。 背道慢神。神明維何? 配命不常。於時。 三君子追惻其心。 經始釋菜之禮。 乃師門之嗣也。彦鎭天性純孝。 學源學行超凡。 彦源意見卓越。 同心協力。 刱建夫子庿于泗洙之間。子姓兄弟。 群昭群穆。 自然服膺。 傾資産而出金。聲聞卽曁。 庶民子來。 載基載落。新宮煌煌然後。 名公碩孺傳文。 魯城之闕里。 奉安影幀于玆。 明靈洋洋。 如在左右。 而無射於人斯。齊明盛服。 以承釋菜。 多士濟濟。況乎于廊于堂以爲講學之所乎? 實孺林宗仰依歸之地也。然則三君子。 非但慕先孝誠而己。亦善繼憂道統之失其傳之志。 而其於風化。 大有功焉。永粲。 羹墻之慕彌深。 聞卽趍謁。 退下入堂。堂扁泗山齋。 猥敢作序。 本質不文。 略以先進所傳之言輯成。 以俟後進觀感云爾。 하늘에 …… 것이다 ≪주역≫ 〈건괘〉 문언(文言)의 말이다. 온량공검양(溫諒恭儉讓) ≪논어≫ 〈학이(學而)〉에 "자공이 말하였다. '선생님께서는 온순하고 어질고 공손하고 검소하고 겸양하여 이것을 얻으셨으니 선생님의 구하심은 타인이 구하는 것과는 다를 것이다.'[子貢曰, 夫子溫良恭儉讓以得之, 夫子之求之也, 其諸異乎人之求之與!]"라고 하였다. 나는 …… 한다 ≪논어≫ 〈양화(陽貨)〉에 "공자가 '나는 아무 말을 않고자 한다.'라고 하니, 자공(子貢)이 '스승님께서 말씀하지 않으시면 저희들이 어떻게 도를 전해 받습니까.'라고 하였다. 이에 공자가 '하늘이 말을 하였던가. 사시가 운행하고 만물이 생장하나니, 하늘이 언제 말을 하였던가.'라고 하였다.[子曰, 予欲無言. 子貢曰, 子如不言, 則小子何述焉. 子曰, 天何言哉. 四時行焉, 百物生焉. 天何言哉.]"라는 내용이 나온다. 그의 …… 있으니 ≪논어≫ 〈자한〉에서 안연(顔淵)이 공자의 도에 대해서 탄식하기를 "우러러볼수록 더욱 높고 뚫을수록 더욱 견고하며, 바라보매 앞에 있더니 홀연히 뒤에 있다.[仰之彌高, 鑽之彌堅, 瞻之在前, 忽焉在後.]"라고 하였다. 지나는 …… 이르렀다 ≪맹자≫ 〈진심 상(盡心上)〉에 "군자는 지나는 곳마다 교화가 되며 머물러 있는 데마다 신묘하게 변화되기 때문에 상하가 천지와 함께 유행하니, 어찌 보탬이 작다고 하겠는가.[夫君子所過者化, 所存者神, 上下與天地同流, 豈曰小補之哉?]"라고 하였다. 계천입극(繼天立極) 성인이 하늘의 뜻을 이어받아 표준을 세운다는 뜻으로, 주희(朱熹)의 ≪중용장구 서≫와 ≪대학장구 서≫에 나오는 말이다. 전수 심법(傳授心法) 요・순・우가 전수한 심법. ≪서경≫ 〈대우모(大禹謨)〉의 '인심유위(人心惟危), 도심유미(道心惟微), 유정유일(惟精惟一), 윤집궐중(允執厥中)'이 여기에 해당된다. 천질(天秩) 하늘의 차례라는 뜻으로, ≪서경≫ 〈고요모(皐陶謨)〉에 보인다. 채침(蔡沈)의 주(註)에 따르면, 질(秩)은 존비(尊卑)・귀천(貴賤) 등 높고 낮은 등급의 품질(品秩)이라 하였다. 복희(伏羲) 상고시대(上古時代) 삼황(三皇) 중의 한 명인데, 문자를 만들고 처음 팔괘를 그렸다고 한다. 억조(億兆) …… 하여 주희(朱熹)의 ≪대학장구≫ 서문에 "하늘이 반드시 그에게 명하여 억조 백성의 군사가 되게 하여 다스리고 가르치게 하였다.[天必命之, 以爲億兆之君師, 使之治而敎之.]"라는 말이 나온다. 세상에 …… 못하기까지[沒世不忘] ≪대학장구≫ 전 3장에, "≪시경≫에 '아아, 선왕(先王)을 잊을 수 없네.'라고 하였는데, 후대(後代) 군자들은 선왕의 현덕(賢德)을 기리고 선왕이 친애했던 이들을 친애하며, 후대 백성들은 선왕이 내려 준 안락한 생활을 즐기고 선왕이 베푼 이로운 은택을 누리고 있다. 이런 까닭에 그분들이 돌아가신 뒤에도 잊지 못하는 것이다.[詩云, 於戲! 前王不忘. 君子賢其賢而親其親, 小人樂其樂而利其利, 此以沒世不忘也.]"라고 한 데에서 온 것이다. 안문성공(安文成公) 안향(安珦, 1243~1306)을 말한다. 안향의 자는 사온(士蘊), 호는 회헌(晦軒)이며 본관은 순흥(順興)이다. 경상북도 흥주(興州, 지금의 경상북도 영주시 풍기) 출신. 1289년 11월에 왕과 공주(원나라)를 호종하고, 원나라에 가서 주자서(朱子書)를 손수 베끼고 공자와 주자의 화상(畵像)을 그려 가지고 이듬해 돌아왔으며, 1297년 12월에 집 뒤에 정사(精舍)를 짓고, 공자와 주자의 화상을 모셨다. 김문안공(金文安公) 김문정(金文鼎)을 말한다. 1303년(충렬왕 29)에 국학학정(國學學正)으로서 원나라에 가서 선성 10철의 화상과 문묘의 제기와 악기, 육경(六經)과 제자(諸子)의 서적 등을 가지고 돌아왔다. 사문(斯文) 유도(儒道)를 가리키는 말이다. ≪논어≫ 〈자한(子罕)〉에 공자가 "문왕(文王)이 이미 별세하였으니, 문(文)이 이 몸에 있지 않겠는가. 하늘이 장차 '이 문[斯文]'을 없애려 하였다면 내가 이 문에 참여할 수 없었을 것이다.[文王旣沒, 文不在玆乎? 天之將喪斯文也, 後死者不得與於斯文也.]" 하였는데, 주자(朱子)의 집주(集註)에 "문은 도(道)가 표면에 드러난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후로 유도를 대칭하는 말로 쓰였으며, 유학자를 직접 지칭하기도 한다. 모두 …… 말하는가 ≪시경≫ 〈소아(小雅)・정월(正月)〉에 "모두 내가 성인이다 하니 누가 까마귀의 암놈과 수놈을 알겠는가?[俱曰予聖, 誰知烏之雌雄?]"라고 하였는데, 까마귀의 암놈・수놈을 가려내기 어려운 것과 마찬가지로 시비를 분간하기 어려움을 말한 것이다. 장구의 무리들[章句之徒] 장구(章句)의 해석에만 치우쳐 대의(大義)에는 통하지 않는 학문을 하는 사람들을 의미한다. 이랬다 …… 부리니[二三其德] ≪시경≫ 〈위풍(衛風)・맹(氓)〉에 "그 남자는 확고한 신념이 없어서, 자꾸만 이랬다저랬다 한다.[士也罔極, 二三其德]"라는 말이 있고, ≪시경≫ 〈백화(白華)〉에 "원앙이 어량에 있으니, 그 왼쪽 날개를 접었도다. 그대가 선량하지 못하여, 이랬다저랬다 변덕을 부리도다.[駌鴦在梁, 戢其左翼, 之子無良, 二三其德.]"라는 말이 나온다. 천명에 짝함이 ≪시경(詩經)≫ 〈대아(大雅)·문왕(文王)〉에 "길이 천명에 짝함이 스스로 많은 복을 구하는 길이다.[永言配命, 自求多福]"라 하였다. 석채례(釋菜禮) 마름[蘋藻] 등 채소로 선사(先師)를 제사하는 예이다. ≪예기≫ 월령(月令)에 "그달 첫째 정일(丁日)에 악정(樂正)에게 명하여 춤을 익히고 석채한다." 하였다. (舍菜와 같은 말, 옛날에 학자(學者)가 학교에 들어가서 마름풀 등을 가지고 선성(先聖)과 선사(先師)에게 제사를 지냈으므로 이렇게 말한다.) 사수지간(泗洙之間) 원래 사수(泗洙)는 산동성(山東省)의 두 강인 사수(泗水)와 수수(洙水)로, 공자가 이 근처에서 제자들을 가르쳤으므로 공자의 학문, 즉 유학(儒學)을 의미한다. 그러나 여기서는 '사수지간(泗洙之間)에 부자묘를 창건했다'고 했으므로 공학원 등이 공자의 사당을 세운 곳을 뜻한다. 친척들[群昭群穆] 소목(昭穆)은 사당(祠堂)에서 신주(神主)를 모시는 차례로 왼쪽 줄의 소(昭), 오른쪽 줄의 목을 통틀어 일컫는 말이다. 여러 소(昭)와 여러 목(穆)이므로 친척들을 의미한다. 서민들이 자식처럼 와서 백성들이 즐거워하여 자발적으로 부응하였다는 뜻이다. ≪시경≫ 〈대아(大雅)·영대(靈臺)〉에 "서민들이 일을 하는지라 하루가 되지 않아 완성되도다. 빨리 짓지 말라고 하여도 서민들이 자식처럼 오도다.[庶民攻之, 不日成之. 經始勿亟, 庶民子來.]"라고 하였는데, 주희의 주에 "민심이 즐거워하여 자식이 어버이 일에 달려오듯이 하여 부르지 않아도 스스로 온 것이다.[民心樂之, 如子趣父事, 不召自來也.]"라고 하였다. ≪맹자≫ 〈양혜왕 상(梁惠王上)〉에도 같은 내용이 있다. 석유(碩孺) 이름난 유학자를 말한다. 일기에 '석유(碩孺)'라고 잘못쓴 것을 바로잡았다. 노성의 궐리 노성궐리사(魯城闕里祠)를 말한 것으로, 충청남도 논산시 노성면 교촌리에 있는 공자의 유상(遺像)을 봉안한 영당(影堂)이다. 공자(孔子)가 탄생한 '궐리촌'에서 유래된 이름이다. 사람들도 싫어함이 없었다[無射於人斯] ≪시경≫ 〈주송(周頌)〉의 청묘편(淸廟篇)에 문왕의 덕을 성대하게 일컬어서 "드러나지 아니할까 떠받들지 아니할까, 사람에게 미움을 받음이 없으시도다.[不顯不承, 無射於人斯.]"라는 구절이 있다. 재명성복(齊明盛服) 재계(齋戒)를 하여 심신을 정결하게 하고 성대하게 의관을 갖추어 입는다는 뜻으로, ≪중용장구≫에 "재명 성복하여 제사를 받든다.[齊明盛服 以承祭祀]"는 말이 나온다. 갱장(羹墻) 죽은 사람에 대한 간절한 추모의 정을 말한다. 요(堯) 임금이 죽은 뒤에 순(舜)이 3년 동안 사모하는 정을 이기지 못한 나머지, 밥을 먹을 때에는 요 임금의 얼굴이 국그릇 속[羹中]에 비치는 듯하고, 앉아 있을 때는 담장[墻]에 요 임금의 그림자가 어른거리는 듯했다는 고사가 있다.(≪후한서(後漢書)・이두열전(李杜列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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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일(을축) 初四日 乙丑 맑음. 옥과(玉果) 화면(火面)147)의 가지봉(柯支峰) 중록 오좌향자(午坐向子)148)에 자리한 어머니 산소에 성묘를 갔다. 신안동(新安洞)을 지나가면서 인재(忍齋) 김인식(金璘植)을 방문하고, 주영묵(朱永默)의 집에 들어갔다. 점심을 먹은 후 친산에 가서 성묘를 하고 가곡(柯谷)리의 박진식(朴鎭植) 집에서 유숙했다. 이감역(李監役)과 신득우(申得雨)를 방문하고, 이어서 김익신(金益信)을 방문하려다가 잘못하여 김능신(金能信)의 집에 들어갔는데, 곧 김익신의 형님 집이다. 돌아오는 길에는 청단리(靑丹里)를 지나며 제갈하백(諸葛夏帛)149)을 방문했는데 보지 못했고, 연화동(蓮花洞)150)을 지나면서 족장(族長)인 재순(在舜)씨를 방문하였다.집으로 돌아오는 도중에 새로 세운 비석이 하나 있어서 보니, 곧 '여규화 시혜물망비(呂奎華施惠勿望碑)' -금팔동(金八洞)151)의 호세(戶稅)를 대신 납부하여 궁함을 구휼해 주었으니 두터운 은혜를 잊기 어려워 비석에 새겨 공덕을 칭송한다.[戶金八洞遞納恤窮, 惠厚難忘勒碑頌功]-였다. 陽。玉果火面。 柯支峰中麓午坐向子。 先妣山省楸之行。過新安洞。 訪忍齋金璘植。 入朱永默家。午飯後。 向親山省楸。 留宿柯谷朴鎭植家。訪李監役申得雨。 轉訪金益信。 誤入金能信家。 乃益信舍伯家也。回路。 過靑丹里。 訪諸葛夏帛。 未見而過蓮花洞。 訪族長在舜氏。 還巢。中路。 有一新碑。 見之。 乃呂奎華施惠勿望碑【戶金八洞遞納恤窮。 惠厚難忘勒碑頌功】。 화면(火面) 원래 화면은 옥과현의 한 면이었으나 1912년 당시에는 창평군에 속해있었다. 현재는 곡성군 오산면에 해당된다. 오좌향자(午坐向子) 정남쪽을 등진 방향을 말한다. 제갈하백(諸葛夏帛, 1855~1918) 자는 세량(細凉), 호는 담녕(澹寧), 본관은 남양(南陽)이다. 곡성군 오산면 청단리에서 살았으며, 노사(蘆沙) 기정진(奇正鎭) 문하에서 수업하였다. 연재(淵齋) 송병선(宋秉璿), 운람(雲藍) 정봉현(鄭鳳鉉), 박운창(朴雲牕), 김계운(金溪雲) 등의 문하에서도 두루 노닐었다. 유집으로 ≪담녕집(澹寧集)≫이 있다. 연화동(蓮花洞) 현재 곡성군 오산면 연화리에 해당된다. 금팔동(金八洞) 창평군 장남면(현재 담양군 수북면 황금리)에 금구동(金九洞)이 있는데, 이곳이 아닌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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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일(병인) 初五日 丙寅 맑은 후 흐림. 先陽後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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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일(무인) 十八日 戊寅 맑음. 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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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일(기묘) 十九日 己卯 맑음. 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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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일(무술) 十四日 戊戌 맑음. 집으로 돌아왔다. 陽。還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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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일(기해) 十五日 己亥 맑음. 아침에 일전에 지은 〈녹실을 곡하는 글(哭綠室文)〉을 기록하였다.〈녹실선생을 곡하는 글〉(哭綠室先生文)오호라, 선생이시여.(嗚呼先生)타고난 자태는 순수하시고,(天姿純粹)기상은 준수하셨으며,(氣宇俊秀)덕업은 높고 넓었고,(德業崇曠)문장은 온축된 것을 펼치셨습니다.(文章暢發)처신함은 또한 공손하셨으며,(處己也恭)남을 때할 때는 공경으로서 하였으니,(接物以敬)세상에서 추중하는 바가(世所推重)태산북두를 우러르는 것과 같습니다.(望若山斗)천박한 소견의 말학이(淺見末學)무엇을 알겠습니까.(何以知識)난이 오니 따르고,(亂來追從)조용히 계합하였을 뿐입니다.(契合從容)청천에서 탁족할 때는(濯足晴川)공이 먼저고 저는 뒤였으며,(公先我後)반석에서 술을 두고 부를 때는(招酒盤石)공은 권하고 저는 마셨습니다.(公勸我飮)제가 이단을 걱정하여(我憂異端)천하가 바뀐다고 하자,(以易天下)공께서는 말씀하시길 하늘의 운은(公言天運)비태와 박복61)이 있다고 하셨습니다.(否泰剝復)제가 보신명철하는 방법과(我問保身)기미를 아는 것에 대해 묻자,(明哲知幾)공께서는 자취를 숨겨 드러내지 않고,(公誨遯跡)괄낭검덕62)하라고 가르쳤습니다.(括囊儉德)평소의 행함을 들어보면,(聞其素履)뜻이 확고한 잠룡이시고,63)(確乎潛龍)모든 논의하셨던 것은(凡所論議)시귀(蓍龜)64)처럼 믿음직스러웠습니다.(信如蓍龜)무릎을 맞대고 아홉 달을 지내니,(促膝九朔)은혜는 부형과 같고,(恩如父兄)헤어진 지 5년이나 되었으니,(分手五載)의분은 사우와 같습니다.(義分師友)봄 정월 보름 사이에(春正望間)깨우쳐주시는 말이 자상하시더니,(誨語諄諄)가을 칠월 보름에(秋七望日)선가(仙駕)65)타고 어디로 가신 것입니까.(仙駕焉歸)질의는 누구에게 할 것이며,(質疑有誰)질문은 또 누구에게 할 것입니까.(問難復誰)살아서는 하늘을 순히 섬기고 죽어서는 편안하셨으니,66)(存順歿寧)공으로서는 부끄럼이 없으시겠으나(公則無愧)세상이 어지럽고 도는 없어졌으니,(世亂道喪)저는 어디로 가야 합니까.(我安適歸)초상 때는 빈소에도 임하지 못했고,(喪不臨殯)장례 때는 상여끈도 잡지 못했습니다.(葬未執紼)유명 사이가 멀리 떨어졌으니,(幽明逈隔)어떻게 다시 볼 수 있겠습니까.(何以復見)길거리에서 부고를 받고,(訃言街路)애통하여 목이 막혔는데,(痛鬱塞哽)궤연에 와서 곡하니,(來哭几筵)눈물이 옷깃에 가득합니다.(涕淚滿襟)생각하면 보이는 것 같다가도,(思而如見)들으려 하면 소리가 없으니,(聽而無聲)아, 애통합니다.(嗚呼痛矣)그러나 어떻게 하겠습니까.(爲之奈何)손 닦고 한 잔 술 올리니,(盥手一酌)영혼께서는 감응하여 이르소서.(靈其感格) 陽。朝記日前所制哭綠室文。〈哭綠室先生文〉嗚呼先生.天姿純粹。氣宇俊秀。德業崇曠。文章暢發.處己也恭。接物以敬。世所推重。望若山斗.淺見末學。何以知識.亂來追從。契合從容.濯足晴川。公先我後。招酒盤石。公勸我飮.我憂異端。以易天下。公言天運。否泰剝復.我問保身。明哲知幾。公誨遯跡。括囊儉德.聞其素履。確乎潛龍。凡所論議。信如蓍龜.促膝九朔。恩如父兄。分手五載。義分師友.春正望間。誨語諄諄。秋七望日。仙駕焉歸.質疑有誰。問難復誰.存順歿寧。公則無愧。世亂道喪。我安適歸.喪不臨殯。葬未執紼.幽明逈隔。何以復見.訃言街路。痛鬱塞哽。來哭几筵。涕淚滿襟.思而如見。聽而無聲。嗚呼痛矣.爲之奈何.盥手一酌。靈其感格. 비태와 박복 모두 주역의 괘 이름으로, 자연이 순환하고 치란(治亂)이 소장(消長)하며, 군자와 소인이 진퇴(進退)하는 이치를 담고 있다. 괄낭검덕(括囊儉德) 괄낭무구(括囊无咎)와 검덕피난(儉德辟難)을 합친 말이다. ≪주역≫ 〈곤괘〉 육사(六四)에는 "주머니를 묶으면 허물도 없고 명예도 없다.[括囊, 无咎, 无譽.]"라고 하였고, 비괘(否卦)의 상(象)에는 "덕을 검약하여 난을 피한다.[儉德辟難]"라고 하였다. 뜻이 …… 잠룡이시고 ≪주역(周易)≫ 〈건괘(乾卦)·문언(文言)〉에 "좋은 세상을 만나면 도(道)를 행하고 좋지 않은 세상을 만나면 은둔하여 그 뜻이 확고하여 빼앗을 수 없는 것이 잠겨 있는 용이다.[樂則行之, 憂則違之, 確乎其不可拔, 潛龍也.]"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시귀(蓍龜) 점을 칠 때 쓰는 시초(蓍草)와 거북으로, 국가에서 그처럼 믿고서 의지할 수 있는 원로를 비유할 때 쓰는 표현이다. 선가(仙駕) 사람이 죽어 신선이 되어 타고 간다는 수레로, 죽음을 비유하는 말이다. 살아서…… 편안하셨으니 송(宋)나라 때 유학자 장재(張載)의 서명(西銘)에 나오는 '살아서는 순리대로 섬길 것이고 죽어서는 편안하리라.[存吾順事, 沒吾寧也]'라는 말을 줄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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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일(경자) 十六日 庚子 맑음. 성묘를 갔다가 날이 저물어서 집에 돌아왔다. 객지생활을 하고 있는 홍익후(洪翊厚) 덕인(德仁)67)을 만나 손우당(遜愚堂)68)의 행실에 대해 들었다."대명천지에 집 없는 나그네요, 태백산중에 머리칼 있는 중이로구나."라는 구절을 두곡(斗谷, 홍우정)69)에게 주었으며70), 동춘선생(同春先生, 송준길)71)은 "태백산중에 세상을 피한 선비요, 대명천지에 정절 지키는 사람이로다."라는 구절을 지어 공에게 주었다고 한다. 陽。作省墓之行。 日夕還巢。遇客居洪翊厚德仁。 聞遜愚堂行實。 '大明天地無家客。 太白山中有髮僧'之句。 贈斗谷。 同春先生。 以'太白山中遯世士。 大明天地守貞人'之句。 贈公云。 홍익후(洪翊厚) 덕인(德仁) 홍익후는 이름이고, 덕인은 그의 자이다. 본 일기에서는 이름 뒤에 자를 붙였다. 손우당(遜愚堂) 홍석(洪錫, 1604~1680)을 말함. 자는 공서(公敍), 호는 손우당, 본관은 남양이다. 잠은(潛隱) 강흡(姜恰), 각금당(覺今堂) 심장세(沈長世), 포옹(抱翁) 정양(鄭瀁), 두곡(杜谷) 홍우정(洪宇定) 등과 함께 태백오현 중의 한 사람이다. 병자난 이후 봉화마을에 들어와 살았다. 두곡(斗谷) 홍우정(洪宇定)을 말함. 자는 정이(靜而), 본관은 남양(南陽)이다. 병진년(1616)에 진사에 입격하고, 계유년(1633)에 사재감 직장(司宰監直長)에 제수되었다. 병자호란 이후 북쪽으로 돌아갈 마음이 없어 문수산(文殊山)아래 두곡천(杜谷泉) 곁에 작은 암자를 짓고서 옥류암(玉溜庵)이라는 편액을 걸고, 이로 말미암아 '두곡기인(杜谷畸人)'이라고 자호하였다. 대명천지에 …… 주었으며 김매순(金邁淳)의 ≪대산집≫ 〈두곡홍공행장(杜谷洪公行狀)〉에는 이 시구를 두곡이 지었다고 나온다. 동춘선생(同春先生) 송준길(宋浚吉, 1606~1672)을 말함. 자는 명보(明甫), 호는 동춘당(同春堂), 본관은 은진(恩津)이다. 아버지는 영천군수를 지낸 송이창(宋爾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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