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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현대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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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약서

1922년 이병석(李秉錫) 계약서(契約書) 고문서-명문문기류-계약서 경제-매매/교역-계약서 大正十一年壬戌閏五月二十五日 李秉錫 大正十一年壬戌閏五月二十五日 李秉錫 전북 남원시 [印] 1개 1.0*1.0 1개(적색, 원형) 남원 보절 전주이씨가 남원 보절 전주이씨가 1922년 윤 5월 25일에 이병석(李秉錫)이 백미(白米)를 빌리면서 작성한 계약서(契約書). 1922년 윤 5월 25일에 이병석(李秉錫)이 작성한 계약서(契約書)이다. 이병석은 백미(白米) 1석(石)을 빌리면서 이자는 4리(利)를 주기로 하고 기한은 10월 그믐까지 이자와 함께 갚기로 하였다. 문서 말미에 도장을 유실하여 지장으로 날인하였다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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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현대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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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약서

1916년 김백현(金白鉉) 계약서(契約書) 고문서-명문문기류-계약서 경제-매매/교역-계약서 大正五年 契約主 金白鉉 大正五年 金白鉉 전북 남원시 [章] 1.0*1.0 1개(적색, 원형) 남원 보절 전주이씨가 남원 보절 전주이씨가 1916년 1월 23일 김백현(金白鉉)이 작성한 계약서(契約書) 1916년 1월 23일 김백현(金白鉉)이 작성한 계약서(契約書)이다. 김백현이 보절면(宝節面) 내황리(內黃里) 복산평(伏山坪)에 있는 2부(負) 5속(五)에 대한 소작료(小作料)를 2-3년 동안 지주에게 지급하지 못한 것을 어떻게 처리하겠다는 내용이다. 그간 밀린 전체 소작료가 얼마나 되는지 정확한 액수는 나와 있지 않은데, 김백현은 이 부분을 내년, 즉 1917년 2월 초까지 갚겠다고 약속하면서, 본 계약서를 써 준 것이다. 소작료는 원래 곡물로 갚게 되어 있으나 이를 돈으로 환산한다는 내용도 들어 있다. 한편 김백현이라는 이름은 김도삼(金道三)을 개명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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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현대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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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빙류

1924년 이금강산(李金剛山) 보절공립보통학교(寶節公立普通學校) 1학년 수업증서(修業證書) 고문서-증빙류-증서 교육/문화-근대교육-졸업장 大正十三年三月卄七日 寶節公立普通學校 李金剛山 大正十三年三月卄七日 寶節公立普通學校 李金剛山 전북 남원시 3.5*3.5 1개(적색, 정방형) 남원 보절 전주이씨가 남원 보절 전주이씨가 1924년 3월에 남원(南原)의 보절공립보통학교(寶節公立普通學校)에서 이금강산(李金剛山)에게 발급한 1학년 수업증서(修業證書). 1924년 3월 27일에 남원(南原)의 보절공립보통학교(寶節公立普通學校)에서 이금강산(李金剛山)에게 발급한 1학년 수업증서(修業證書)이다. 1학년의 전과정의 수료하였음을 증명하는 수료증명서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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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현대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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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약서

1922년 이필수(李弼洙) 계약서(契約書) 고문서-명문문기류-계약서 경제-매매/교역-계약서 大正十一年 李弼洙 大正十一年 李弼洙 전북 남원시 [印] 1.0*1.0 1개(적색, 원형) 남원 보절 전주이씨가 남원 보절 전주이씨가 1922년 7월 14일 이필수(李弼洙)가 써 준 계약서 1922년 7월 14일 이필수(李弼洙)가 써 준 계약서(契約書)이다. 이필수가 쌀 3두(斗)에 해당하는 돈 24량(兩)을 빌리면서 작성한 문서이다. 먹고 살 쌀이 없어서 파용한 것인데, 하지만 누구에게 써 준 것인지, 다시 말해서 이필수에게 쌀을 빌려 준 사람이 누구였는지는 밝혀져 있지 않은 실정이다. 한편 이필수는 이 쌀을 오는 9월 회내(晦內)까지 상환하기로 하였다. 본 계약서를 작성하고부터 두 달이 지난 시점이었다. 하지만 이필수는 이 약속을 제대로 지키지 못한 듯하다. 그 점은 문서 마지막에 나오는 "전십사량계해삼월칠일상(錢十四兩癸亥三月七日上)"이라는 표현으로 알 수가 있다. 이는 14량을 계해년(癸亥年) 3월 7일에 갚았다는 내용이다. 계해년이라면 1922년, 즉 본 계약서를 작성한 이듬해가 된다. 따라서 이필수는 갚아야 하는 24량 가운데, 본 계약서에서 약속한 날에는 10량을 상환하였고, 나머지 14량은 이듬해에 갚았다는 사실을 알 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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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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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부

14일(갑진) 十四日 甲辰 [내용없음] [내용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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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형 :
고전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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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부

남파선생집(南坡先生集) 8권 3책 南坡集 南坡先生集 고서-집부-별집류 교육/문화-문학/저술-문집 문집 표점영인 南坡先生集 [1898] 李僖錫 목활자본 『남파집(南坡集)』 3 有界 10行20字 註雙行 한자 上下內向2葉花紋魚 전남대학교도서관_불명처2 전남대학교도서관 1898년(광무 2)에 간행한 남파(南坡) 이희석(李僖錫, 1804∼1889)의 문집, 8권 3책(목활자본)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그의 손자 이선원(李善遠)이 편찬하였다. 『남파선생집(南坡先生集)』 해제 1. 생애와 사상 이희석(李僖錫, 1804∼1889)의 자는 효일(孝一)이고, 호는 남파거사(南坡居士)이며, 본관은 인천(仁川)이다. 시조인 휘(諱) 문화(文和)는 정희왕비(貞僖王妃)의 외조부로 의정부 찬성(議政府贊成)을 지냈으며, 시호는 공도(恭度)이다. 이문화는 집안이 벌열(閥閱)이 되는 것을 경계하여 아들 6명을 모두 지방으로 내려 보냈다. 이때부터 장흥(長興)에 인천이씨가 거주하게 되었다. 청강(淸江) 휘 승(昇, 1556~1628)은 문장과 행의(行義)가 있어 호남으로 내려온 인천이씨의 현조(顯祖)가 되었다. 문집으로 『청강유집(淸江遺集)』이 전한다. 청강 이승을 추모하기 위해 장흥의 인천이씨는 영석재(永錫齋, 전라남도 문화재 제69호)를 설립하였다. 고조부는 휘 윤덕(潤德), 증조부는 휘 복현(復顯), 조부는 휘 능계(能啓), 부친은 휘 중집(重楫)이다. 부친은 천성이 배우기를 좋아하였으나 집안이 가난하여 공부에 전력하지 못하였기에 자식 교육에 더욱 힘을 쏟았다. 모친은 평강채씨(平康蔡氏)로, 채석후(蔡錫垕)의 딸이다. 이희석은 1804년(순조 4) 5월 15일 전남 장흥군 용산면 접정리 청적(聽笛)마을에서 태어났다. 타고난 재주가 걸출하고 성격이 꼿꼿하고 호걸스러운 모습을 가지고 있어 이름만 듣고 만난 적이 없던 사람도 우연히 만나면 단번에 남파를 알아볼 정도였다. 사람들과 교유할 적에 구차히 영합하지 않았고 평소 불의한 사람과는 애초에 스스로 교분을 맺으려고 하지 않았다. 그러나 후배나 어린 학생이 질의하면 온화한 기색으로 자상히 알려주었다. 10세를 전후로 문리가 통달하여 제자백가 등을 남김없이 두루 통했는데, 사서와 오경에 더욱 공력을 다해 주소(註疏)가 아무리 많은 글도 자기 말처럼 외웠다. 이희석은 노사 문하에 나아가 스승의 말을 듣고 스승의 덕을 보자 마치 시원스럽게 물이 아래로 흐르는 것 같아 의귀처(依歸處)로 삼아 자신의 학업을 마칠 수 있을 것이라 여겼다. 이희석은 노사 기정진보다 여섯 살 적었는데, 기정진은 이희석을 벗으로 대우했고, 그는 스승으로 받들었다. 1851년(철종 2) 홍수로 전토를 잃고 장흥에서 나주 사호(沙湖, 현 광주광역시 광산구 사호동)로 이거하였다. 기정진의 거주지 근처로 옮긴 것이다. 이때부터 기정진의 거처에서 매달 29일은 숙식을 하며 강학에 열중하였다. 1879년 기정진 사후에 다시 장흥으로 거처를 옮긴 것으로 보인다. 1880년(고종 17) 77세 되던 해에 진사시(進士試)에 응시하여 합격하였다. 또 조정에서 고령이라고 하여 특별히 통정대부(通政大夫)에 가자(加資)하였다. 이에 대해 이희석은 임종 전에 하신 어버이 말씀이 귓가에 뚜렷이 남아 저버릴 수 없어 죽기 전에 과거에 응시했다고 소회를 밝혔다. 고향에 돌아와 어버이 묘소에 가서 고유(告由)만 했을 뿐 당상관(堂上官)의 비단 관복과 옥관자(玉貫子)를 몸에 걸치지 않았다. 1889년(고종 26) 7월 17일에 묵동(墨洞) 우사(寓舍)에서 세상을 떠났다. 장흥 천관산 수정암(水晶菴) 선영에 장사하였다. 부인은 광산김씨로 김상희(金相禧)의 딸이다. 슬하에 1남 2녀가 있는데 아들은 인호(麟浩)이고, 첫째 딸은 낭주최씨(朗州崔氏) 최면식(崔冕植), 둘째 딸은 철원주씨(鐵原周氏) 주방일(周邦一)에게 시집갔다. 큰딸과 아들 인호는 안타깝게도 이희석보다 먼저 세상을 떠났다. 인호는 2남 3녀를 두었는데, 아들은 선원(善遠)과 학근(學根)이다. 둘째 아들 학근은 인천이씨 족보에 학원(學遠)으로 실려 있다. 선원이 이희석의 유고를 수집, 문집 간행을 주도하였다. 이희석은 시(詩)에 뛰어났는데, 『남파집』에는 성리설이 거의 없는 점이 특징이다. 기우만의 행장에서 이희석이 직접 언급한 문장에 관한 의견을 다음과 같이 남기고 있다. "새롭고 기이함을 좋아하고 화려한 문장을 숭상하는 것은 문장가의 큰 병통이다. 글을 지을 때는 우임금의 치수(治水)처럼 일삼은 바가 없이 자연스러운 형세를 따를 뿐이다. 만일 부화(浮華)한 표현에만 마음을 쓰고 남을 기쁘게 하는 데 힘쓴다면 부인이나 여자가 용모를 치장하는 정도의 기량에 불과하니 나는 이렇게 하지 않겠다." 산수 유람과 기행에 관한 시와 글이 많은 것은 노사학파의 문인에게서 나타나는 하나의 특징 중 하나이다. 이희석 역시 문집 안에 다양한 지역을 유람하며 남긴 시문이 있고, 특히 「원유록」은 여행하며 지은 시문을 종합한 것으로서 이희석의 산수에 관한 사상의 일면을 살필 수 있다. 2. 문집 구성과 내용 『남파집(南坡集)』은 남파(南坡) 이희석(李僖錫)의 문집으로 8권 3책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1898년(광무 2) 전남 장흥군 용산면 어산리에 있는 인천이씨 재실인 영석재(永錫齋)에서 손자 이선원(李善遠)에 의해 목활자본으로 간행되었다. 책별로 권두에 차례가 있고, 시가 권1에 140제 247수, 권2에 129제 193수, 총 369제 440수가 있다. 권3에는 서 34편, 권4에 잡저 9편, 권5에 서(序) 9편, 기(記) 12편, 발(跋) 6편이 있다. 권6에는 행장 3편, 묘지명 1편, 제문 7편이 있으며, 권7에는 「원유속록후서(遠遊續錄後序)」와 「원유록(遠遊錄)」이 실려 있다. 권8은 부록으로 남파의 행장과 전, 묘지명, 발문, 후서 등이 수록되어 있다. 권1과 권2에 수록된 한시 440수는 스승인 노사 기정진과 그 문인, 친족이나 친구, 그리고 동향의 장흥위씨(長興魏氏)들과 주고받은 시가 많다. 기정진(奇正鎭), 기우만(奇宇萬), 기양연(奇亮衍), 김평묵(金平黙), 조의곤(曺毅坤), 오상봉(吳相鳳), 김한섭(金漢燮), 김영택(金永澤), 안달삼(安達三), 소치(小癡) 허련(許鍊) 등 많은 인물에게 준 시들이 있어 그의 교유관계를 보여준다. 유람시가 많은 분량은 차지하고 있는데, 이들 시에서 그가 추구하였던 인지지락(仁智之樂)의 면모를 확인할 수 있다. 장흥 인근에 있는 천관산, 제암산, 월출산 등 산천을 두루 유람하였다. 천관산에 올라 쓴 시 「유관산(遊冠山)」과 청산도와 거금도, 진도 등지에서 바다를 보며 읊은 「고금도(古今島)」, 「등고금도가마치망한라산(登古今島駕馬峙望漢拏山)」이 있다. 또 합천 삼가 남명(南冥) 조식(曺植)의 강학처인 뇌룡정(雷龍亭)을 방문하여 조식의 시에 차운하였다. 주변의 풍광에 자신의 감정을 담은 「사인정풍영계회(舍人亭風詠契會)」, 「장천재수창(長川齋酬唱)」 등은 대표적인 장편시이다. 「자민(自憫)」, 「초도음(初度吟)」 등은 자신을 돌아보며 불우한 인생에 대한 회한과 학문 성취의 한계를 표현한 시이다. 「학문(學問)」, 「감회(感懷)」, 「도통탄(道統歎)」 등 설리적(說理的) 시도 있다. 「독좌(獨坐)」와 「유회(幽懷)」는 은일 생활의 고독을 읊은 것이며, 「애국음(愛菊吟)」과 「조일대국(朝日對菊)」은 도연명의 전원 취미를 본받아 국화를 사랑하는 마음을 읊은 시이다. 이밖에 「석별(惜別)과 「억추려(憶秋旅)」 등은 친구와의 우정을 생각하며 만나지 못하는 아쉬움을 표현하고 있다. 그 중 「하사좌상증조천관안행오(下沙座上贈朝天館安行五)」는 제주도에서 노사에게 공부하러 온 안달삼(安達三)에게 준 오언고시로 면암 최익현이 제주도 유배 중에 이 시를 처음 보았다고 『남파집』 발문에서 그 인연을 소개하였다. 병인양요 때인 1866년(고종 3) 10월, 이희석이 장성에 있을 때 출전(出戰)하려고 가는 고제홍(高濟洪)에게 감격하며 써준 시 「고중범부의지행(高仲範赴義之行)」과 서양의 이양선 소식을 듣고 탄식을 하는 시 「문양선소식발탄(聞洋船消息發嘆)」 등은 그의 현실 인식을 잘 보여준 시이다. 권3에는 서(書) 34편이 실려 있다. 스승인 기정진에게 올린 편지와 자식과 친족 동생에게 보낸 편지, 고향의 벗 김대원(金大源), 사돈 최득수(崔得洙), 영남의 동문 조성가(趙性家), 이항로의 문인 김평묵 외 장흥부사로 부임했던 한치조(韓致肇), 이학래(李鶴來), 송기로(宋綺老) 등과 주고받은 편지로 안부를 묻는 내용이 대부분이다. 김대원에게 보낸 편지는 김대원 아들이 먼저 세상을 떠난 것에 대한 위로를 보냈고, 최득수의 경우 최득수의 며느리이자 이희석의 딸이 세상을 떠난 것에 대한 소회를 적었다. 권4는 잡저(雜著)이다. 「거려설(蘧廬說)」은 이희석이 만년에 고향으로 돌아와 지은 작품이다. 거려(蘧廬)는 누추한 여관이란 뜻이다. 이희석은 30세 이전에는 어버이가 살던 집에서 살다가 30세 이후에는 어산(語山) 묵촌(墨村)에 살았고, 그 후에는 장성, 나주에서 살다가 10여 년 후에 다시 고향으로 돌아왔다. 「회갑설(回甲說)」은 회갑을 사치스럽게 할 것이 아니라 낳고 길러주신 부모님의 노고를 생각하고 효도의 의미를 돌이켜보는 날이어야 한다는 취지로 쓴 글이다. 「거긍설(去矜說)」은 자랑과 과시를 의미하는 '긍(矜)'자로 재능과 과시의 상관 관계를 언급하면서 자랑하는 마음을 없애고 좋은 독서를 해야 한다고 논설하고 있다. 「거긍설」에서 양웅(揚雄)의 "책을 좋아해도 중니(仲尼; 공자)에게 구하지 않으면 책 가게일 뿐이고, 말을 좋아하여도 중니에게 보이지 않으면 자질구레한 말일 뿐이다."라는 구절과 사상채(謝上蔡)가 이천(伊川) 선생과 작별한 지 1년 만에 찾아가 뵈었는데 이천 선생이 "무슨 공부를 하였는가?" 하고 묻자, 사씨가 "다만 '긍(矜; 자랑하고 과시하는 마음)' 자(字)를 없애려 하였습니다."라는 일화를 인용하였다. 「정설증영석재제생(貞說贈永錫齋諸生)」은 이희석이 『주역』의 원형이정(元亨利貞) 중 정(貞)을 가지고 영석재(永錫齋) 여러 학생에게 당부한 글이다. 『주역』 곤괘(坤卦)에서 '정(貞)'의 의미와 영석재가 위치한 풍수지리적 환경을 연관하여 논하면서 '정(貞)'의 자세로 노력해 공부하라는 취지가 담겨있다. 「김민수기실(金敏受記實)」은 흉년에 마을과 친척들을 구제한 김영택(金永澤)의 공로가 알려져 수령 윤용(尹墉)과 관찰사 이돈상(李敦相)이 조정에 알린 사실 등을 기록한 글이다. 「설계(舌誡)」는 온몸에 병이 들었는데 그중 혀를 잘못 놀려 말을 함부로 하는 병이 가장 큰 병이라는 논의를 편 글이다. 주자의 '이렇게 하는 것이 병통이라는 것을 알았다면, 이렇게 하지 않는 것이 약이다.[若知如此是病 則不如此是藥]'라는 말을 인용하여 끝맺었다. 「의석서(擬惜誓)」는 『초사(楚辭)』 중 하나인 「석서(惜誓)」를 본떠 자신을 경계한 의고문(擬古文)이다. 「의주군신하궁인작관저시(擬周群臣賀宮人作關雎詩)」는 주나라 신하들이 관저시(關雎詩)를 쓴 궁인에게 경하하는 모습을 전문(箋文) 형식으로 쓴 글이다. 「선왕고부군신천록(先王考府君新阡錄)」은 부친의 묘소를 이장한 경위를 소상히 밝히며 후손을 경책한 글이다. 권5에는 서(序) 9편, 기(記) 12편, 발(跋) 6편이 실려 있다. 「사호이택서(沙湖移宅序)」는 이희석이 1851년 여름 대홍수를 만나 전토(田土)를 잃고 금성(錦城; 나주) 사호(沙湖)로 이사하게 된 경위를 『주역』의 논리를 발려와 기록한 글이다. 「애국서(愛菊序)」는 국화를 좋아하는 마음은 도연명 못지않다며 도연명을 경앙(景仰)하는 마음을 드러낸 글이다. 「지운서(止雲序)」는 이희석의 벗 김경현(金擎鉉)의 호인 '지운(止雲)'에 대해 써준 글이다. 김경현의 자는 국민(國敏), 호는 지운(止雲), 본관은 영광(靈光)이다. 이리저리 떠도는 구름의 속성을 언급하며 정자(程子)의 「정성서(定性書)」와 『주역』 「간괘(艮卦)」 단사(彖辭)의 말을 인용하여, 공자가 말한 출처(出處) 역시 여기에서 벗어나지 않음을 피력하였다. 「가암서(可菴序)」는 김영하(金永夏)의 호인 '가암(可菴)'의 '가(可)'자에 관해 썼고, 「묵헌서(黙軒序)」는 박인환(朴寅煥)의 자호(自號)인 '묵헌(黙軒)'의 '묵(黙)'자에 대해 썼으며, 「죽사서(竹史序)」는 둘째 사위 주운지(周雲之)의 자호인 죽사(竹史)에 대해 의미를 부여하고 당부한 글이다. 그 밖에 「묵헌김공유집서(默軒金公遺集序)」는 해남 출신으로 사헌부 장령을 지낸 묵헌 김재일(金載一, 1749~1817)의 시문집의 서문이고, 「묵와위공유고서(默窩魏公遺稿序)」는 장흥 위수택(魏守澤)의 유고집 서문이다. 「영보동계서(永保洞契序)」는 이규호(李圭浩)를 대신해서 지은 글이다. 영보동계는 영암 덕진면 영보동에서 연촌(烟村) 최덕지(崔德之, 1384~1455)의 내외 후손을 중심으로 결성된 계인데, 세월이 흐르면서 유명무실해졌다가 당시 수령의 도움으로 다시 동약(洞約)이 정해져 이를 기념한 글이다. 기(記)는 12편인데 「율정공비음기(栗亭公碑陰記)」는 선조 율정공 이두(李斗)의 비문 뒷면에 쓴 글이다. 율정공 이두의 자는 천추(天樞), 호는 율정, 또는 장춘오(藏春塢)이다. 율정공은 장흥에 내려와서 자제와 문하생과 강학만 하고 벼슬을 하지 않았다. 그의 글은 병란으로 인해 없어져 1573년(선조 6)에 쓴 족보의 서문 1편만 남아있다. 「연원중수기(淵院重修記)」는 노봉(老峯) 민정중(閔鼎重)과 둔촌(屯村) 민유중(閔維重)의 위패를 모신 연곡서원(淵谷書院, 현 전남 장흥군 장흥읍 원도리)이 대원군에 의해 훼철된 뒤에 다시 중수한 사실을 쓴 글이다. 「덕암재기(德巖齋記)」와 「낙영재기(樂英齋記)」는 모두 장흥에 있는 강학처에 관한 글이다. 장흥 묵촌의 덕암재는 이희석의 장흥 묵촌 친족들이 자제들의 공부를 위해 설립한 글방이고, 낙영재는 장흥 용산면에 있는 용강사(龍岡祠)의 강당으로 월산재(月山齋)와 더불어 우수(愚叟) 김상범(金尙範)의 5, 6대손이 세운 것이다. 그밖에 「송석당기(松石堂記)」, 「도곡서실기(道谷書室記)」, 「최씨용호정기(崔氏龍湖亭記)」, 「금구열녀정씨정려기(金溝烈女鄭氏旌閭記)」, 「노원기(鹵園記)」, 「화봉기(華峯記)」, 「유관산기(遊冠山記)」, 「유사산기(遊獅山記)」가 있다. 「노원기(鹵園記)」는 바닷가에 살던 김경여(金景汝)라는 사람에게 '노원(鹵園)'이라는 호를 지어주면서 그 의미를 부연 설명한 글이다. 특히 「유관산기」과 「유사산기」는 유람을 좋아했던 이희석이 천관산과 사자산을 유람하고 쓴 글로 문학적 필치를 잘 보여주는 작품이다. 발문은 6편이 실려 있는데, 족조 이적(李績)에 관한 「족조퇴옹공비문발(族祖退翁公碑文跋)」이 있고, 「영모재유집서발(永慕齋遺集序跋)」, 「서양성재선효자언행록후(書養性齋宣孝子言行錄後)」, 「서고씨삼효문기후(書高氏三孝門記後)」, 「서경주최씨효열록후(書慶州崔氏孝烈錄後)」, 「서영천굴결사기후(書靈泉窟結社記後)」가 있다. 그중 「영모재유집서발」은 1875년(고종 12) 1월 18일 삼가(三嘉)에 사는 친족 이양년(李亮年)과 이붕석(李鵬錫)이 영모재 문집 관련 일로 방문하자 써준 글이다. 「서경주최씨효열록후」는 판서 오준영(吳俊泳)을, 「서영천굴결사기후」는 무산도호부사(茂山都護府使) 고제환(高濟煥)을 대신해서 지어준 글이다. 권6에는 행장 3편, 묘지명 1편, 제문 7편이 실려 있다. 「삼종대부초당처사공행장(三從大父草堂處士公行狀)」은 이희석이 8세 때 『사략(史略)』을 배웠던 이상계(李商啓)의 행장이다. 이희석이 노사 기정진에게 부탁하였으나 근거할 만한 글이 없어 감히 행장을 쓰지 못하고 사양하면서 집안사람들이 사실을 모아 기록하라고 권유하였다는 내용이 보인다. 「소암처사위공행장(素菴處士魏公行狀)」은 위영우(魏榮禹)의 생애를, 「반천거사염공행장(磻泉居士廉公行狀)」은 염한기(廉翰琪)의 생애를 기록한 글이다. 행장 3편 모두 장흥에 거처했던 인물들이다. 묘지명은 부친 이중집(李重楫)에 대한 묘지명이 있으며 스승 기정진의 제문 2편과 기장일(奇章一), 도곡처사(道谷處士) 송종운(宋鍾雲) 제문이 있다. 그리고 「용산기우문(蓉山祈雨文)」은 기우제에 관한 글이고, 「제당산문(祭堂山文)」은 가뭄에 병충해 제거를 기원하는 글이고, 「축호문(逐虎文)」은 산신령에게 호랑이를 물리치게 해달라는 기원문이다. 「축호문」은 장흥부사 신석유(申錫裕)를 대신하여 쓴 글이다. 권7에 실린 『원유록(遠遊錄)』은 이희석이 1866년(고종 3) 3월 2일부터 6월 15일까지 약 4개월간의 여행기록이다. 「원유속록후서(遠遊續錄後序)」에 의하면, 원래 1858년(철종 9) 기문현(奇文鉉), 기봉진(奇鳳鎭)과 함께 수개월 동안 관서(關西) 유람을 하고 돌아오던 중 칠원(漆原)에서 쉬다가, 마침 그곳에서 만난 김녹휴(金錄休)가 관동(關東) 유람을 청하였다. 이희석은 즉시 승낙하였지만, 기봉진이 내년 봄에 가자고 하고서는 끝내 아무런 말이 없어 결국 무위에 그쳤다. 그러던 중 1866년(고종 3) 3월 고종의 가례(嘉禮)로 인한 증광시에 응시하기 위하여 한양으로 왔다가 김회현(金會鉉)과 함께 강화도를 유람하고, 한양으로 다시 들어온 뒤 김우(金玗)와 함께 세 사람이 금강산을 다녀오고, 다시 한양으로 와서 김회현과 함께 영서(嶺西)를 따라 남으로 내려가 조령을 넘어서 영남을 거쳐 집으로 돌아왔다. 권7 마지막 부분에는 이희석이 경유지와 거리를 기록해 두었다. 장흥 남면에서 출발, 한양, 강화(정족산성, 마니산), 한양 동대문, 금강산 장안사, 마하연, 유점사, 신계사, 총석정, 금성(金城), 창도(昌道), 원주, 조령, 대구, 합천 삼가, 진주 월횡(月橫), 하동, 구례 간전, 순천, 장흥 남면 묵촌까지 3,360리에 달하는 긴 거리이다. 그는 가는 곳곳마다 자신이 보고 느낀 것을 기록하고 많은 시문을 남겼다. 그 중 「성단음(星壇吟)」, 「정양사음(正陽寺吟)」, 「마하연음(摩訶衍吟)」 등은 문학적으로 뛰어난 작품이 실려 있다. 또한 「산림학자변(山林學者辨)」, 「조성하순소등비로변(趙成夏舜韶登毗盧辨)」, 「삼신산설(三神山說)」과 같은 논변문(論辨文)도 실려 있는데, 그 중 「산림학자변」은 산림(山林)이라는 용어와 의미 등을 사적(史的)으로 서술하였으며, 오늘날에 산림이 붕당의 희생양이 되어 위로는 공로를 펼치지 못하고 아래로는 은택을 미치지 못함을 한탄하였다. 그리고 「조성하순소등비로변」은 도동(桃洞)에서 이희석이 조성하(趙成夏, 1845~1881)의 『금강록(金剛錄)』을 보고, 동행했던 중들에게 지난해 조성하가 비로봉에 올라간 경위에 대해 듣고 느낀 점을 기록한 글이다. 조성하의 본관은 풍양, 자는 순소(舜韶), 호는 소하(小荷)이다. 병조판서 조병준(趙秉駿)의 아들로 조병귀(趙秉龜)에게 입양되었으며, 신정왕후(神貞王后) 조씨(趙氏)의 친정 조카이다. 편서로 『금강산기(金剛山記)』가 전해오는데, 이것이 이희석이 언급한 『금강록』일 것이다. 영남 지역에서는 주로 자신의 친족들이 와서 안내하거나 도움을 주어서 영남 여행을 계속할 수 있었다. 합천 삼가에서는 선조 이문화(李文和)를 모신 서계서원(西溪書院), 남명 조식의 강학처인 삼가 토동(兎洞)의 뇌룡정(雷龍亭)을 방문하였으며, 하동 월횡에서는 10여 일간 머무르면서 하달홍(河達弘, 1809~1877)과 동문인 조성가(趙性家, 1824∼1904) 등과 함께 시문을 주고받았다. 이희석과 조성가가 서로 창화(唱和)하며 지은 28운의 연구(聯句) 「여월재연구(與月齋聯句)」가 있는데, 특히 하달홍은 이를 기념하며 「파월연구서(坡月聯句序)」를 써주었다. 하달홍은 금강산의 뛰어난 절경과 여행 중 들었던 이야기가 여기에 다 실려 있을 정도로 빼어난 작품이라고 칭하였다. 「원유록」을 보면, 강화도 기록에는 '추보(追補)'라는 작은 글자가 종종 보인다. 아마 문집을 편집할 당시 『원유록』 원편이 있었는데, 편집하면서 관련된 내용을 추가하고 해당 내용 끝에 '추보'라고 써놓았던 것으로 보인다. 또 인명이나 지명에 세주(細註)를 달아 내용의 이해를 돕고 있다. 권8은 이희석의 생애와 문집 출간에 관한 각종 기록이 수록되어 있다. 기우만(奇宇萬)이 지은 행장을 비롯하여 기삼연(奇參衍)의 「남파이선생전(南坡李先生傳)」, 이승욱(李承旭)이 지은 묘지명, 그리고 김평묵(金平默), 최익현(崔益鉉), 송기로(宋綺老), 조성가(趙性家)로부터 받은 문집 발문 및 후서(後敍)가 실려 있다. 마지막 부분에 실린 삼종손(三從孫; 칠촌 조카의 아들) 이주원(李周遠)의 발문에 의하면, 이선원(李善遠) 등이 선조 이희석 문집을 출간하지 못해 한스럽게 여기다가 1898년(광무 2) 『인천이씨장흥파세보(仁川李氏長興派世譜)』를 출간하면서 집안 종형제인 이대원(李大遠)·이정원(李正遠) 등과 발간에 대해 논의하여 『남파집』을 함께 출간하였다. 『남파집』 맨 마지막 장에 '장흥부 어산(語山) 영석재에서 시간(始刊)'라는 기록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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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애선생문집(石崖先生文集) 6卷 3冊 石崖先生文集 石崖先生文集 고서-집부-별집류 교육/문화-문학/저술-문집 문집 표점영인 石崖先生文集 [1964] 洪鳳周 石版本 3 有界 11行24字 한자 上下向2葉花紋魚尾 남평 도래 풍산홍씨 석애문중 (재)한국학호남진흥원 홍봉주(洪鳳周:1725∼1796)의 시문집. 6권 3책의 석인본으로 1904년 5대손인 홍복희(洪復熹)·홍석희(洪錫熹) 등이 편집, 간행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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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화(書畵) 고문서-기타-서화 교육/문화-예술-서화 고흥 고흥류씨 류탁 후손가 (재)한국학호남진흥원 懷古望山河라고 쓴 遺墨 懷古望山河라고 쓴 遺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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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담집(春潭集) 10卷 5冊 春潭集 고서-집부-별집류 교육/문화-문학/저술-문집 문집 표점영인 春潭文集 奇東準 5 有界 10行20字 한자 上下向2葉花紋魚尾 미상 전남대학교도서관 조선 말기의 학자 기동준(奇東準, 1860~1918의 시문집. 10권 5책의 석인본으로 1966년에 아들 기근섭(奇近燮)이 편집, 간행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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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와유고(弦窩遺稿) 16卷 8冊 弦窩遺稿 弦窩遺稿 고서-집부-별집류 교육/문화-문학/저술-문집 문집 표점영인 弦窩遺稿 高光善 8 有界 12行28字 한자 上下向1葉花紋魚尾 미상 전남대학교도서관 근대의 학자 고광선(高光善, 1855~1934)의 시문집. 1962년 박하형(朴夏炯) 등 문인들이 편집·간행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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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하집(松下集) 5卷 2冊 松下集 松下集 고서-집부-별집류 교육/문화-문학/저술-문집 문집 표점영인 松下集 [1909] 安國楨 木活字本 2 有界 10行22字, 한자 內向二葉花紋魚尾 미상 국립중앙도서관 1909년 아들 安昌燮이 간행한 安國禎의 시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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卷之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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與高進士 今年水患。何處非險津無柁也。懸懸之情。於斯冞極。仰維秋令。奉老棣節。矧翔萬綏。令胤日長讀字。日日新新歟。仰溯且祝。無任慥慥。弟惡濕之病。與人同而夙病不瘳。惟我獨然。無庸把玩。而惟家累依本分耳。若言年事。則此地雖凶。他處則豊云。豈不愈於人皆瘠而我獨肥歟。兄餘力看字。頗似得力矣。今夏果閱幾卷。消遣世慮歟。能知其味。則天下無限好事。皆在此矣。勉旃趲進若何。子剛夏工。似不浪度。方歸省言別。甚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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與李起巖 拜面幾時。愈久愈懷。安得不然也。伏維冬令。經體衛道萬寧。庭下亨貞怡愉。尊門僉節勻謐。先府先生文集刊役。誠意所格。告功廣布。不待問而已卜矣。切念立志篤厚。老而彌工。繹微旨而覺後學。自有己所獨知之眞樂矣。每爲之歛衽。恨不對挹。弟二竪愈粘。雙鬢滿霜。不得掩醜。呵呵憐憐。斯文不幸。鄙族松沙翁奄棄後學。安倣之痛。儒林同然。玆同封訃車以呈耳。春間付簡于令族溪雲。令兄便以叩寒暄矣。未拜惠復。抑喬沈而然歟。甚鬱甚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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與李景瞻【斗鎬】 昨冬之拜。舊誼新契。漸入蔗境。但兩箇白首。豈是別離之時歟。耿耿之懷。無日不徘徊於嶺雲之表。伏請春仲。經體萬旺。寶覃勻休。仰禱之忱。如水東注。第及門錄刊役。天相斯文。必利成。而吾兄之誠意。十百于人。顧此愚獃。亦知感鏤。而贊誦不已。世弟。素是馬卿身勢。添病於自那回路。累入鬼關。今始復出陽界。有何好說話。昻提於崇聽歟。惟舜在觀姪。免他見警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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月夕鼎坐 楊朱何日泣岐分。望望田家不見雲。林下有亭論止水。將吾心事說夫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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謹次李癡軒【中稙】寄韻 溪分洙泗至今流。諸子飲河幾處留。也識癡軒先會得。襟懷活潑掃眉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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贈高春亭崔梅巢 一束生蒭駒未縶。雪山高格又寒梅。離亭爲說庭前菊。九日黃花泛酒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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姜君元直。贈以五七二絶。不可無報。故強爾傚嚬 刮青頻促膝。求道又能言。仁宅知何處。耕桑卽古村。一簣加功九仞山。康莊前路在斯間。行行必得多般趣。第待春風領略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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宣政殿 培根以後達其枝。標準斯文立勿旗。物外無營同活水。世間有累亂纖絲。工程悔失靑年日。志氣當堅白髮時。最是田家傳古俗。四隣秧事不須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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