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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간통고류

1994년 김경수(金敬洙) 통문(通文) 고문서-서간통고류-통문 孔子誕降二千五百四十五年甲戌月日 成均館長 金敬洙 康津鄕校典校及鄕儒 僉員貴下 孔子誕降二千五百四十五年甲戌月日 金敬洙 康津鄕校 강진 군자서원 한국학호남진흥원 HIKS_B001_01_A00032_001 1994년에 성균관장 김경수(金敬洙)가 강진향교(康津鄕校)의 전교(典校)와 향유(鄕儒)들에게 보낸 답통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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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정사(杏亭祠) 도사의(道祀儀)로 승격성균관(成均館) 완문(完文)행정사 도사의성균관 완문답통(答通)이 글은 통문에 회답하기 위한 것이다. 지금 귀향의 유장(儒狀)을 살펴보았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강진의 현치(縣治) 북쪽 작천면(鵲川面) 군자리(君子里) 행정동(杏亭洞)에 행정사(杏亭祠)가 있는데, 이는 곧 강진의 망족(望族) 양산 김씨(梁山金氏) 삼현(三賢)에게 제사 지내는 곳입니다. 김씨의 선조 가운데 유항재(有恒齋) 선생 량(亮)이 있었는데, 중종(中宗) 때의 어진 신하였습니다. 어릴 적부터 학문에 뜻을 두어서 당대 석유(碩儒) 이 청련공(李靑蓮公)1)·백 옥봉공(白玉峰公)2)·최 고죽공(崔孤竹公)3) 등의 제현들과 함께 도의로 교유하며 자주 상종하여 성리학(性理學)을 토론하였고, 손에서 『심경(心經)』·『근사록(近思錄)』을 놓지 않았으며 세상의 이욕과 욕망에는 담담하였습니다. 일찍이 사마시에 입격하고 음직으로 직장(直長)으로 출사하였으나 또한 달가워하지 않았습니다. 만년에는 학업이 확충되고 행의가 드러났으며, 곤궁함을 굳게 지키고 가난을 편안히 여겨 조금도 방탕하고 사치한 마음이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유항재라는 호를 지은 것입니다. 이에 향인(鄕人) 중에 감화하지 않은 사람이 없었으며, 그가 기거하던 곳을 '군자리'라고 명명하였는데, 지금도 그 이름으로 부르고 있습니다.게다가 선생의 증손 절효공(節孝公) 호광(好光)과 행정공(杏亭公) 신광(伸光)이 있는데, 이들은 모두 하늘에서 내린 효자입니다. 모친의 병환에 메추리 두 마리를 잡아서 올렸더니 위증(危症)이 한 달도 되지 않아 정상으로 회복되었습니다. 이에 향인들은 그 효성이 감응한 것이라고 칭송하였습니다. 절효공은 갑자년 이괄(李适)의 난에 저탄(猪灘)의 전투에서 순직하였고, 행정공은 병자호란 때 남한산성에서 임금을 호송한 공적을 올렸는데, 단서 철권(丹書鐵券)에 모두 일등으로 올랐습니다. 위대하고도 아름답도다! 한 가문에서 삼대에 걸쳐 삼현으로 세대를 이어 함께 빛났으니, 이 어찌 세상에 드문 일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니 이 사당을 설립한 유래가 오래되었다 하겠습니다. 지난 가경(嘉慶) 기사년(1809)에 처음으로 창립되고 고종(高宗) 무진년(1868)에 이르러 훼철되었다가 지난 임인년(1962)에 다시 설립되어 향사의(鄕祀儀)로 지금까지 제사를 모시고 있습니다."생각건대, 선생의 도덕과 문장이 두 공의 충효·절의와 함께 이토록 탁월하고 남다르니 고상한 유풍이 세상에 전해진 것이 남주(南州)에 더욱 가득하다. 마땅히 도사의(道祀儀)로 제사 지내는 것이 옳은데, 지금도 향사의로 그친 것은 참으로 애석해할 만한 일이다. 그런데 지금 귀향의 유론(儒論)이 일치하고 이 사당의 향사를 도사의로 승격하고 제사를 지낼 계획을 세웠다고 하니 얼마나 다행인가. 이러한 소식을 들으니 감탄해 마지않는다. 대체로 어진 이를 추모하고 후인을 일깨우는 것은 사림의 책무이다. 내가 태학의 직임을 맡고 있으니, 이처럼 성대한 일에 어찌 찬동하지 않겠는가. 오직 바라건대, 여러 유림들이 서둘러 이 일을 마쳐서 천추의 땅에 풍화를 수립한다면 매우 다행이겠다.공자 탄강일 2545년 갑술년(1994) 모월 모일에 성균관장 김경수강진향교(康津鄕校) 전교(典校) 및 향유(鄕儒) 여러 회원에게 이 청련공(李靑蓮公) 이후백(李後白, 1520~1578)을 말한다. 본관은 연안(延安), 자는 계진(季眞), 호는 청련(靑蓮), 시호는 문청(文淸)이다. 1555년에 문과에 급제하였고 이후 이조 판서에 올랐으며 청백리에 녹선되었다. 함안(咸安)의 문회서원(文會書院)에 제향되었고, 저서로는 『청련집(靑蓮集)』이 있다. 백 옥봉공(白玉峰公) 백광훈(白玉峰, 1537~1582)을 말한다. 본관은 해미(海美), 자는 창경(彰卿), 호는 옥봉이다. 저서로는 『옥봉집(玉峯集)』이 있다. 최 고죽공(崔孤竹公) 최경창(崔慶昌, 1539~1583)을 말한다. 본관은 해주(海州), 자는 가운(嘉運), 호는 고죽(孤竹)이다. 1568년에 문과에 급제한 뒤, 북평사(北評事), 정언, 영광 군수(靈光郡守), 대동도 찰방(大同道察訪), 종성 부사(鍾城府使) 등을 역임했다. 저서로는 『고죽유고(孤竹遺稿)』가 있다. 杏亭祠道祀儀昇格成均館 完文杏亭祠道祀儀成均館完文答通右文爲答通事 今按貴鄕儒狀 則康津治北鵲川面君子里杏亭洞有曰杏亭祠 卽康津望族梁山金氏三賢尸祝之所也金氏之先有曰有恒齋先生諱亮 中廟賢臣自幼有志學問與當世碩儒李靑蓮公白玉峰公崔孤竹公等諸賢爲道義交源源相從 討論性理之學 手不釋心經近思錄 於世利紛華淡泊如也 早登司馬 以蔭仕出爲直長 亦不屑焉 晩年學業擴充行義彪著 固窮安貧 少無放{忄+辟}〖辟〗奢侈之心 故有號有恒齋 鄕人莫不感化 而因其所居 曰君子里云 至今猶以其名稱之矣 况復有先生曾孫節孝公諱好光杏亭公諱伸光俱以出天之孝母患得雙鶉而進之 危症不月而復常 鄕人稱其孝感焉 乃節孝公則甲子适亂殉身於猪灘之戰 杏亭公則丙子胡亂效績於南漢之扈 丹書鐵券俱參一等 偉歟休哉 一門三代三賢聯世幷耀 是豈非爲世所稀者哉蓋此祠設立由來則久矣 越在嘉慶己巳始創 而至于高宗戊辰見毁 往在壬寅復設 以鄕祀儀奉祭 而至于今者也 竊念先生之道德文章與兩公之忠孝節義如彼卓異 其高尙遺風 播傳于世 彌滿于 南州 當以道祀儀祭之爲可 尙今以鄕祀儀止之者實可惜事也 何幸今者貴鄕儒論詢同 而此祠亨祀 以道祀儀躋序奉祀爲計云 聞之感歎無已 蓋慕賢牗後 士林之責務也 余責在首善之地 如斯盛擧 豈不贊同哉 惟冀僉儒林亟竣此事 以樹風化於千秋之地幸甚耳孔子誕降二千五百四十五年甲戌 月 日[成均館印]成均館長 金敬洙 [成均館長之印]康津鄕校 典校及鄕儒僉員 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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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편저자)
유형 :
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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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간통고류

유장(儒狀)이 글은 소장을 올리기 위한 것입니다. 강진의 현치 북쪽 작천면 군자리 행정동에 행정사가 있는데, 이는 곧 강진의 망족 양산 김씨 삼현을 제사 지내는 곳입니다. 김씨의 선조 가운데 유항재 선생 량이 있었는데, 중종 때의 어진 신하였습니다. 어릴 적부터 학문에 뜻을 두어 당대 석유 이 청련공·백 옥봉공·최 고죽공 등의 제현들과 함께 도의로 교유하며 자주 상종하여 성리설을 토론하였습니다. 평소 담박한 것을 편안히 여겨 손에서 『심경』·『근사록』을 놓지 않았고 세상의 이욕과 욕망에는 담담하였습니다. 일찍이 사마시에 입격하고 음직으로 내자시 직장에 나아갔으나 또한 달가워하지 않았습니다. 만년에는 학업이 확충되고 행의가 드러나며 곤궁함을 굳게 지키고 가난을 편안히 여겨 조금도 방탕하고 사치한 마음이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유항재 선생이라는 호를 지은 것입니다. 이에 중에 감화하지 않은 사람이 없었으며, 그가 기거하던 곳을 '군자리'라고 명명하였는데, 지금도 그 이름으로 부르고 있습니다.대개 강진은 외지고 먼 곳에 있어 성대한 명성을 지닌 인물들이 본래 기호(畿湖)보다 뒤떨어졌는데, 선생이 학문을 창도한 이래로 훌륭한 선비들이 많이 배출되었습니다. 게다가 선생의 증손 절효공 호광과 행정공 신광이 있는데, 이들은 모두 하늘에서 내린 효자입니다. 모친의 병환에 메추리 두 마리를 잡아서 올렸더니, 위증이 한 달도 되지 않아 정상으로 회복되었습니다. 이에 향인들은 그 효성이 감응한 것이라며 칭송하였습니다. 절효공은 갑자년 이괄의 난에 저탄의 전투에서 순직하였고, 행정공은 병자호란 때 남한산성에서 임금을 호종한 공적을 올렸는데, 단서 철권에 모두 일등으로 올랐습니다. 위대하고도 아름답도다! 한 가문에서 삼대에 걸쳐 삼현으로 세대를 이어 함께 빛났으니, 이 어찌 세상에 드문 일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니 이 사당을 설립한 유래가 오래되었다 하겠습니다. 지난 가경 기사년(1809)에 처음으로 창립되고 고종 무진년(1868)에 이르러 훼철되었다가 지난 임인년(1962)에 다시 설립되어 향사의로 지금까지 제사를 모시고 있습니다.아! 선생의 도덕과 문장이 두 공의 충효·절의와 함께 이토록 탁월하고 남다르니, 마땅히 도사의로 제사 지내는 것이 옳은데 한갓 향사의로 제사 지내는 것은 어째서인가. 예로부터 선유들도 이와 관련하여 여러 차례 거론하였지만, 일이 중대하고 힘이 부족하여 시간만 지체하고 겨를이 없었으니, 이것이 후대 유생들이 억울해한 까닭입니다. 하지만 이제 사당이 일신되어 강당과 재실이 온전히 갖추어졌고 포주(庖廚)가 그럭저럭 충분해졌으니, 먼 곳에서 오는 선비들을 보내고 맞이하는 일에는 별도로 상관할 것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들은 이 사당의 제전을 도사의로 승격하여 제사를 모실 계획을 세웠고 공론도 한군데로 모아졌습니다. 그러나 이 일은 중대한 일이므로 마음대로 행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성균관장 경좌(經座) 아래에 우러러 고합니다. 삼가 바라건대, 저희가 지금 하는 이 일의 사유를 분명히 살피시고 서둘러 아름다운 승낙을 내려서 천추의 땅에 풍습을 교화할 수 있게 하기를 우러러 마지않습니다.공자 탄강 2545년 갑술년(1994) 모월 모일강진향교(康津鄕校) 전교(典校) 김중환(金重煥)·강진유도회지부장(康津儒道會支部長) 박현수(朴賢洙) 儒狀右文爲上狀事 康津治北鵲川面君子里杏亭洞有曰杏亭祠 卽康津望族梁山金氏三賢尸祝之所也金氏之先有曰有恒齋先生諱亮 中廟賢臣自幼有志學問與當世碩儒李靑蓮公白玉峰公崔孤竹公等諸賢爲道義交 源源相從 討論性理之說 平居恬素手不釋心經近思錄 於世利紛華澹泊如也 早登司馬 以蔭仕至內資寺直長 亦不屑焉 晩年學業擴充行義彪著 固窮安貧 少無放辟奢侈之心 故有號有恒齋先生 鄕人莫不感化 而因名其所居 曰君子里 至今猶以其名稱之矣 蓋康津僻在遐陬盛名文物素遜於畿湖 自先生倡學 彬彬縫腋之士多出焉 况復有先生曾孫節孝公諱好光杏亭公諱伸光俱以出天之孝慈患得雙鶉而進之 危症不月而復常 鄕人稱其孝感焉 乃節孝公則甲子适亂殉身於猪灘之戰 杏亭公則丙子胡亂效績於南漢之扈 丹書鐵券俱參一等 偉歟休哉 一門三世三賢聯世幷耀 是豈非爲世所稀者歟 蓋此祠設立由來則久矣 越在嘉慶己巳始創 而至于高宗戊辰見毁 往在壬寅復設 以鄕祀儀祭之 而至干今者矣嗚呼 先生之道德文章與兩公之忠孝節義如彼卓異 當以道祀儀祭之爲可徒其以鄕祀儀祭之者何也 自昔先儒亦因此 而屢有擧論 事巨力綿 而因循未遑者 是所以後儒抑鬱之者也 然而今則祠貌一新 講堂及齋室具全 庖廚稍足 遠來章甫送迎之節別無所關矣故于玆鄙等此祠祭典以道祀儀躋序奉祀爲計 而公論歸一矣 然此事重要 而非擅行之事 故玆以仰告于成均館長經座下伏願明察 鄙等今日此擧之由 而亟賜嘉諾以使風化於千秋之地仰望不己耳孔夫子誕降二千五百四十五年甲戌 月 日康津鄕校 典校 金重煥 [康津鄕校典校之印][金重煥]康津儒道會支部長 朴賢洙 [康津儒道會支部長印][朴賢洙]

상세정보
저자 :
(편저자)
유형 :
고문서
유형분류 :
서간통고류

성균관 통장(通章)이 글은 두루 통고하여 알리는 것입니다. 귀 문의 시조 이하 12대조의 제단을 설치하고 제향하기로 하였고 사단사적비(祠壇事蹟碑)를 건립하고 제사를 지내고자 한 것은 지극히 선조를 사모하는 정성에서 나온 것입니다. 다음의 비명을 짓는다.양산 김씨 양산군(梁山君) 이하 12대 사단사적비명(祀壇事蹟碑銘) 【서문 병기】강진 김문(金門)의 중환(重煥) 군은 사리에 밝은 글을 읽는 선비이다. 나와는 만년에 친분이 있어 정이 친형제와 같았다. 하루는 그 선대의 가장(家狀)과 가첩(家牒)을 가지고 내가 있는 서석(瑞石)의 임시거처에 찾아와 안부 인사를 마치고는 눈물을 줄줄 흘리며 말하였다. "우리 여한열선조(麗韓列先祖)의 소목(昭穆), 관직, 사행(事行)은 자세하게 실려 전해지고 있으나, 다만 배위(配位), 묘소(墓所)는 전래하는 것이 없습니다. 이 모두가 가문이 쇠퇴하고 복이 박한 소치입니다. 그러므로 수백 년 동안 제사를 받들지 못하여 우로(雨露)가 젖고 상설(霜雪)이 내리면 슬프고 두려운 마음과 풍수지탄(風樹之歎)의 느낌을 견디지 못하여 통한이 쌓인 지가 오래되었습니다. 올가을 종회(宗會)에서 문의(問議)가 벼락과 같이 일제히 일어나서 시조 이하 12대의 제단을 설치하고 제향하기로 결의하고 추진위원회를 구성하여 제단의 장소는 우리 선사(先祠)인 행정사(杏亭祠) 뒷산 야등(冶嶝) 간좌원(艮坐原)에 점정(占定)하고 경진년(2000) 4월을 기한으로 하여 제단 설치하는 일을 준공하기로 하였습니다. 하지만 한미한 가문의 쇠잔한 족속으로서 일이 중대하고 힘이 부족한 것이 몹시 걱정되고 두렵습니다. 감히 청하건대, 우리 어른께서 한마디 말씀을 내려 우리 열선조의 사적을 글로 지어 윤색하시고 천명하여 주시면 쇠잔한 가문의 큰 다행일 것입니다."내 사람됨이 보잘것없고 글재주도 없어서 감히 금석문자에 착수하기 어려워 사양하였다. 하지만 요청이 더욱 정성스럽기에 사양하지 못하고 가장과 가첩을 살펴보고 삼가 쓴다.양산 김씨의 시조인 연(衍)은 호가 의춘당(宜春堂)이니 고려 혜종조(惠宗朝)에 통사 사인(通事舍人)으로 양산군(梁山郡)에 봉작되어 득관조(得貫祖)가 되었다. 그 아들 지(贄)는 경종조(景宗朝)에 급사(給事)로 한림원을 겸직하였다. 그 아들 맹(猛)은 목종 무술년(998)년에 등제하여 좌습유를 역임하였고, 현종 병진년(1016)년에 중추 직학사에 제수되어 사절로 송나라에 조회를 받들고 이부시랑을 거처 중추사 태자소부에 이르렀다. 을축년(1025)년에 봉작되어 식읍 300호를 하사받았고, 참지정사에 제수되어 같은 해 12월에 세상을 떠났다. 문종조(文宗朝)에 태자태사 문하시중에 증직되어 문정공(文定公)으로 시호를 받았고, 충남 천원군 대홍리(大弘里) 홍경사(弘慶寺)의 비갈(碑碣)-국보(國寶) 7호-에 공의 공적이 등재되어 있다.그 아들 덕부(德符)는 문종 경술년(1070)년에 태자 빈객을 거처 임술년(1082)년에 좌복야에 제수되고 같은 해 6월에 세상을 떠났다. 그 아들 여흥(余興)은 평장사이고 시호는 문익공(文益公)이다. 그 아들 종(琮)은 인종조에 관직이 문하시중에 이르렀는데 정중부(鄭仲夫)의 난에 양주(良州)로 종적을 감추었다. 그 아들 의성(義成)은 고종조에 문하시랑 상서령에 이르렀고, 그 아들 이범(理範)은 원종조(元宗朝)에 신호위 중랑장(神虎衛中郞將)에 올랐으니 사절로 송나라에 다녀왔다. 그 아들 징(徵)은 녹사참군(錄事參軍)에 올랐고, 아내는 허씨(許氏)이다. 그 아들 희영(希盈)은 충정왕조(忠定王朝)에 우군만호에 이르렀고, 그 아들 효안(孝安)은 그 아들이 신분이 귀해진 연고로 자헌대부에 추증되었다. 그 아들 치현(致賢)은 조선 연산군 병진년(1496)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삼사(三司)를 거쳐 황해 감사에 제수되었다. 그 아들 자정(自禎)은 통덕랑에 올랐고 사업과 행적은 전해진 것이 없으며, 아내는 도강 김씨(道康金氏)이며 강진 입향조이다. 묘는 강진읍(康津邑) 송현리(松峴里)에 있는 것으로 기록되었으나 실전되었다.금번에 양산 김문(金門)이 시조인 양산군을 비롯하여 강진 입향조까지 13대의 제단을 설치하고 제향하고자 하였다. 그 가첩을 살펴보면, 명공(名功), 거경(巨卿)과 벼슬아치가 고려와 조선의 양조(兩朝)에 배출되어 삼한의 이름난 가문과 번화한 벌족이었는데, 지금에 이르러서는 먼 고을에 사는 반쪽 양반과 한미한 족속으로 일컬어지고 있으니 참으로 비통하고 한탄할 만하다. 옛일을 생각하고 지금을 슬퍼할 뿐이다.후손 중에 현달한 인물을 대략 거론하면, 명장(命璋)은 호조 참판에 이르렀다. 량(亮)은 진사에 이르렀는데 이 청련(李靑蓮)·백 옥봉(白玉峰)·최 고죽(崔孤竹)·임 석천(林石川)과 도의로 교유하였고 행정사(杏亭祠)에 배향되었다. 영(昶)은 문과로 능주 목사가 되었고 응호(應虎)는 천문 습독관(天文習讀官)에 올랐고 응인(應寅)은 문과로 홍문관 교리가 되었다. 응표(應彪)는 내자시 직장에 올랐고 응린(應麟)은 전주 판관에 올랐다. 경선(景善)은 호조 참판에 올랐고 수남(秀男)은 한성부윤에 이르렀다. 택선(宅善)은 성균관 진사에 올랐고 안선(安善)은 중추부사에 올랐으며 지현(知鉉)은 무과로 어모장군 부사과에 올랐다. 호광(好光)은 무과로 갑자년 이괄의 난에 참전하다 순절하였으니, 녹권이 있고 행정사에 배향되었다. 신광(伸光)은 무과로 인묘조 삼란(三亂)에서 전쟁의 공적을 많이 세워 일등의 공훈에 오르고 행정사에 배향되었다.아, 남은 경사가 있는 곳에는 문무 관헌(文武官憲)이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지만 위와 같이 개괄한다. 슬프다, 천하의 이치가 밝게 드러나고 감추어지며 낮이 되기도 하고 밤이 되기도 하는데 이 모두 음양이 성하고 쇠퇴한 정리(定理)이니, 이는 사람의 지력으로 미치지 못한다. 이제 양산씨는 양(陽)과 밝음이 돌아왔으니, 13대 사단을 영원토록 수호하고 제사를 받들어 선조를 계승하여 후손에게 복을 끼치게 하고 조상을 높이고 일족을 화목하게 하는 데 정성과 노력을 바친다면, 앞날이 창대할 것은 첨윤(詹尹)1)에게 점치지 않아도 알 수 있을 것이다. 이어서 명사(銘詞)를 쓴다.천 길의 흙도 능히 양옥(良玉) 빛을 못 가리고,만 길의 물도 능히 명주 빛을 못 가리네.양산씨가 이제 와서 밝게 빛나 꽃이 피네.13대 단위를 설치하는 것을 양산씨에게서 보았구나.거창한 추원(追遠) 사업을 다른 가문에서는 못 보아라.하늘이 상서로움을 내려 후예들이 창대하리.기묘년(1999)년 12월 일에 유주(儒州) 류한상(柳漢相)이 삼가 짓고,양산 김철순(金哲淳)이 삼가 쓰다.이상은 양산 김씨 대종회(大宗會)에 공경히 회답한다.경진년(2000)년 4월 일에 성균관장 최창규(崔昌圭) 첨윤(詹尹) 초(楚)나라 때의 태복(太卜) 정첨윤(鄭詹尹)을 말한다. 그는 점을 잘 치기로 유명하여 굴원(屈原)이 자신의 진퇴를 알아보려고 찾아간 일이 있다.(『楚辭』 「卜居」) 成均館通章右文通諭之事는 貴門始祖以下十二代祖를 設壇設享키로 하고 祠壇事蹟碑를 建立香火를 받들고저함은 至極한 慕先之誠으로 다음의梁山金氏梁山君以下十二代祀壇事蹟碑銘幷序康津金門의 重煥君은 事理에 밝은讀書士이다 與余로 晩契가 있어 情若弟兄인데 日에 그先代의 家狀과家牒을 가지고 漢相을 瑞石僑居에찾아 寒暄禮畢에 泫然이 말하기를우리 麗韓列先祖의 昭穆과 官職과事行은 昭詳이 載傳되여 있으나 但配位와 墓所는 無傳이오니 이 모두가 門衰祚薄의 所致이외다 그러므로 數百年 동안에 香火를 받들지 못하여 雨露가 젖으고 霜雪이 내리면悽愴怵惕의 마음과 風樹의 느낌을이기지 못하여 痛恨이 쌓여옴이 오래였습니다 今秋宗會에서 問議가雷同齊發되여 始祖以下十二代를設壇設享하기로 決議하고 推進委員會를 構成하여 壇所는 우리 先祠인 杏亭祠後麓冶嶝艮坐原에 占定하고 限庚辰四月하여 壇役을 竣工키로 하오나 寒門殘族으로 事巨力綿이 憂惧莫甚이외다 敢請하오니吾丈의 一言으로 우리 列先祖의 事蹟을 文而潤之하시와 闡明하여 주시면 殘門의 幸甚이 莫大하겠습니다 한다내人微文拙로 敢히 金石文字에 犯手堪當키 어려워 辭讓하나 請益勤故로 辭不獲하고 家狀과 家牒을 按驗하여 삼가 쓰노니 梁山金氏의 鼻祖인 諱衍은 號宜春堂이니 高麗惠宗朝에 通事舍人으로 梁山君에 封爵되여 得貫祖이고 그 아들諱贄는景宗朝給事로 翰林院을 兼職하고그 아들諱猛은 穆宗戊戌九九八年에 登第하여 左拾遺를 歷任하고 顯宗丙辰一○一六年에 中樞直學士에 除授되여 使節로 奉朝于宋하고吏部侍郞을 거처 中樞使太子少傅에 이르고 己丑一○二五年에 封爵되어 食邑三百戶를 下賜받았고 參知政事에 除授되여 同年十二月에卒하고 文宗朝에 太子太師門下侍中에 贈職되여 文定公으로 賜諡되고 忠南天原郡大弘里弘慶寺의 碑碣國寶七號에 公의 功蹟이 登載되있다 그 아들 諱德符는 文宗庚戌一○七○年에 太子賓客卷을 거처 壬戌一○八二年에 左僕射에 除授되고同年六月에 卒하다 그아들諱余興은 平章事이고 諡는 文益公이다 그子諱琮은 仁宗朝에 官門下侍中인데 鄭仲夫의 亂에 良州로 遯跡하다그아들諱義成은 高宗朝에 門下侍郞尙書令이고 그아들諱理範은 元宗朝에 神虎衛中郞將이니 使節로如于宋하고 그아들諱徵은 錄事參軍이고 配는許氏이다 그아들諱希盈은 忠定王朝에 右軍萬戶이고 그子諱孝安은 以子貴로 贈資憲大夫하고 그아들諱致賢은 朝鮮燕山丙辰一四九六年에 文科에及第하여三司를 거처 黃海監司에 除授되고그아들諱自禎은 通德郞이고 事行無傳이요 配는道康金氏이니 康津入鄕祖이다 墓는康津邑松峴里로記錄되였으나 失傳되다 今番에 梁山金門이 始祖인 梁山君을 비롯하여 康津入鄕祖까지 十三代를 設壇設享케 되었다 그家牒을 보건대 名功巨卿과 圭組冠冕이 麗韓兩朝에輩出되어 三韓의 名門華閥인데 이제와서 遐鄕의 片班寒族으로 稱詡되고 있으니 참으로 可悲也可歎也이요 感古傷今할 뿐이다 後孫에 顯達한 이를 略擧하면 諱命璋은 戶曹參判이오 諱亮은 進士인데 李靑蓮崔孤竹白玉峯林石川과 道義交가있었고 享于杏亭祠하다 諱昶은 文科로 綾州牧吏이고 諱應虎는 天文習讀官이고 諱應寅은 文科로 弘文館敎理이고 諱應彪는 內資寺直長이요 諱應麟은 全州判官이다 諱景善은 戶曹參判이고 諱秀男은 漢城府尹이요 諱宅善은 成均進士이고諱安善은 中樞府事이요 諱知鉉은武科로 禦侮將軍副司果이다 諱好光은 武科로 甲子适亂에 參戰殉節하니 有錄券하고 配食杏亭祠하다諱伸光은 武科로 仁廟朝三亂에 多立戰績하여 參勳一等하고 配食杏亭祠하다 噫라 餘慶所在에 文武官憲이 車載斗量이오나 槪括如右하다 슲으다 天下의 理致가 有明有晦하고 有晝有夜하니 이 모두 陰陽盛衰의 定理이니 이는 사람의 智力으로 不及한 바이다 이제 梁山氏는 陽과 明이 돌아왔으니 十三代祀壇을永世토록 守護하고 香火받들어 承先裕後하고 崇祖穆族에 殫誠竭力한다면 앞날의 昌大할 것은 詹尹에게 占하지 않아도 可히 알 수 있으리로다이어 銘詞를 쓰노니千길의 흙도 能히良玉빛을 못 가리고萬丈의 물도 能히明珠빛을 못 가리네梁山氏 이제 와서光華이뤄 꽃이 피네十三代 壇位 設定梁山氏에 보았구나巨創한 追遠 事業他門에는 못 보아라하늘이 降祥하사後裔들이 昌大하리歲己卯之蜡月 日儒州 柳漢相 謹譔梁山 金哲淳 謹書右梁山金氏大宗會에 敬答합니다歲庚辰二千年四月 日成均館長 崔昌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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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정사묘정비건립(杏亭祠廟庭碑建立) 청원문(請願文)우리 양산김씨대종회(梁山金氏大宗會)에서는 삼가 이 글을 성균관장님께 올립니다. 우리 행정사는 순조 경진년에 당시 태학관(太學館)과 여러 고을의 향교의 통장(通章)을 받아 창건한 곳으로, 우리 양산 김씨 선조이신 유항재(有恒齋) 량(亮)·절효공(節孝公) 호광(好光)·행정공(杏亭公) 신광(伸光) 삼위(三位)를 일실(一室)에 향사하였습니다. 그러다가 고종 경진년(1880)에 훼철령에 따라 폐쇄되었지만 이후에 다시 설립된 뒤 향사하고 있습니다. 유항재 선생의 크고 높은 학덕과 절효·행정 두 공께서 충·효를 겸비하여 진무영국원종일등공신녹권(振武寧國原從一等功臣錄券)을 받은 행의를 흠모하여 다음의 비명을 짓습니다.행정사묘정비명 【서문 병기】도가 땅에 떨어지지 않아 인륜이 넘어지는 것을 붙잡아 일으켰고, 하늘이 사문(斯文)을 망하지 않게 하였기에 묘우(廟宇)가 빛나는 것을 보았다. 공손히 상고해 보건대, 여기 행정사는 김 유항재(金有恒齋)·김 절효(金節孝)·김 행정(金杏亭) 세 선생을 모신 사당으로 유항재 선생은 출생 때부터 기이한 조짐을 보였다. 어머니가 무후(武侯, 제갈량(諸葛亮))가 나타나는 꿈을 꾼 뒤에 선생이 태어나서 선생의 이름을 량이라고 지었다. 타고난 자질이 영민하고 성품이 순수하여 부모를 섬기는 데 정성을 다하였고 자제를 가르치되 엄격하게 하셨다. 어릴 적부터 학문에 뜻을 두고 청련(靑蓮) 이후백(李後白)·고죽(孤竹) 최경창(崔慶昌)·옥봉(玉峰) 백광훈(白光勳) 같은 명사 석학들과 종유하면서 날마다 강석에서 성리의 학설을 토론하고 『심경(心經)』·『근사록(近思錄)』을 손에서 놓지 않고 강마하였으며, 언제나 침착하고 마음이 담박하여 세상의 명리와 화려하고 사치한 것에는 욕심이 없었다.일찍이 사마시에 참방하여 음사로서 차례로 올라가 내자시 직장에 이르렀으나, 벼슬에 연연하지 않고 낙향하여 이청련·최고죽 등과 함께 공부하였던 박산(博山)의 이순당(邇順堂)에서 후학들을 계도하는 한편 위기(爲己)의 학문에 더욱 정진하였으니 행의가 드러나고 언제나 한결같아서 세상에서 유항재 선생이라 하였다.인조 2년 갑자년(1624)에 이괄(李适)이 병란을 일으키자 선생의 증손 김호광(金好光)이 분연히 일어나서 금남군(錦南君) 정충신(鄭忠信)의 막하에 종군하여 저탄(猪灘)에서 싸우다가 군량이 떨어지자 여기저기 주선하여 쌀을 모아 먹었으며, 싸움터에 나가 적을 꾸짖고 적진에 뛰어들어 힘을 다해 싸우다가 적에게 결박되었다. 이괄의 무리가 동참을 종용하자 호통치며 "신하는 충절을 위해 죽는 것이 떳떳한 일인데, 너희 역적들은 부끄럽지도 않으냐!" 하고 꾸짖다가 적들에게 난자를 당하여 장렬하게 죽었으니 당시 나이는 24세였다. 이듬해 7월 26일에 김류(金瑬) 등과 함께 진무원종일등공신(振武原從一等功臣)으로 책록되었는데, 공은 효자로서도 이름나서 절효공(節孝公)이라 하였다.그의 아우 김신광(金伸光)도 타고난 효자로 남다른 공적이 있었고 이괄의 난에서는 17세의 소년으로 형을 따라 정충신(鄭忠信)의 막하에 들어가 저탄에서의 싸움과 경도(京都) 수복 등 많은 공을 쌓았다. 병자호란에서는 인조대왕이 남한산성으로 몽진하실 때 겸사복(兼司僕)의 벼슬을 띠고 호종하였다. 인조 22년 갑신년에는 심기원(沈器遠) 등의 역모를 미연에 막은 공으로 영국원종일등공신(寧國原從一等功臣)에 책록되어 녹권을 받았고, 박천·희천·충주·영천의 수령을 역임하면서 애민선정(愛民善政)을 베풀어 도처에 송덕비가 세워졌다. 만년에는 고향으로 내려와 은행나무 아래에 정자를 짓고 망북정(望北亭)이라고 하였으니, 사람들이 공의 호를 행정(杏亭)이라 하였다.아, 사람이 충과 효를 겸하기는 지극히 어려운데, 양산 김씨의 삼현(三賢)이 이토록 우뚝하니 모두가 함께 제향하여 남국의 토기(土氣)를 진작시키는 것이 합당하다. 순조 9년 기사년(1809)에 유림에서 발의하자 이론이 없었고 여러 고을의 유림이 메아리처럼 호응하니 강진군 작천면 군자리 행정에 사우를 세워 향사를 지내왔다. 이제 그 묘정비를 세우려고 원임 류한상(柳漢相)과 임원 정길태(丁吉泰)·공련웅(孔鍊雄), 본손 철순(哲淳)·중환(重煥) 군이 나를 찾아와 글을 청하였는데, 나는 그 재목이 아니라며 거듭 사양하다가 간략히 서술하고 이어서 명을 쓴다.명사 석학들과 종유하던 유항재 선생 마음이 맑아서 물욕을 멀리했네.학문에 정진하니 행의는 따라 드높았고 만사에 자강하여 종시 한결같았네.절효공이 의리를 떨쳐 역적을 꾸짖다가 죽음이 오히려 영원한 삶 되었어라.슬프다, 오직 공은 힘이 부족하여 잡혔어도 당당한 그 지조 꺾이지 않았었네.행정공이 뒤를 이어 삼란에 공이 높았고 거쳐 간 고을마다 송덕비 빛이 났도다.묘정비(廟庭碑)를 세워 후손과 많은 선비가 본받도록 우러러 고합니다. 관장님께서는 김씨 삼대 절행의 탁월함을 가상히 여겨 그 행적이 민몰되지 않도록 해주시면 무척 다행이겠습니다. 삼가 외람됨을 무릅쓰고 청합니다.신사년 12월 일 서기 2001년 양산김씨대종회장 김중환(金重煥)성균관장 좌하께杏亭祠廟庭碑建立 請願文우리梁山金氏大宗會에서는 삼가 이글을 成均館長任게 올리나이다 우리杏亭祠는 純祖庚辰에 當時太學館과列郡鄕校의 通章을 받아 創建 우리梁山金氏先祖이신 有恒齋諱亮節孝公諱好光幸亭公諱伸光三位를 一室에亨祀하여오다가 高宗庚辰毁撤令에따라 閉鎖되었으나 그後復設享祀하고있습니다 有恒齋先生의크고높은學德과節孝杏亭兩公게서 忠孝를 兼備하셔 振武寧國原從一等功臣錄券을 받은 行義를 欽慕하여 다음과 같이杏亭祠廟亭碑銘 幷序道가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니 人倫이넘어지는 것을 붙잡아 이르켰고 하늘이 斯文을 亡하지 않게 하였기에 廟宇가 빛나는 것을 보겠다 恭遜히 詳考하건데 여기杏亭祠는 金有恒齋金節孝金杏亭세先生을 모신祠宇로서 有恒先生은出生時부터 奇異한 조짐이 있어서 어머니가 武侯를 現夢하시고 태어나니 이름을 亮이라 하였거니와 天資가英敏하고 稟質이純粹하여 父母를 섬김에 精誠을 다하고 子弟를 가르치되 嚴하게하였다 少時적부터學問에뜻을두고李靑蓮後白崔孤竹慶昌白玉峯光勳같은名士碩儒들과從遊하면서날마다講席에서 性理의學說을討論하고 心經近思錄을손에서 놓지않고 講磨하였으며 언제나沈着하고마음이淡泊하여世上의名利와華麗하고奢侈한것에는慾心이없었다일찍이司馬試에參榜하여蔭士로서차례로올라가內資寺直長에이르렀으나 벼슬에연연하지아니하시고落鄕하여 어릴때李靑蓮崔孤竹등과함께공부하였든博山의邇順堂에서 後學들을啓導하는한편 爲己의學問에더욱精進하니 行義가드러났고 언제나한결같으매 世上에서有恒先生이라하였다仁朝二年甲子에李适이兵亂을이르킴에先生의曾孫金好光이奮然히이러나 錦南君鄭忠信의幕下에從軍하여猪灘에서 싸우다가 軍糧이 떨어지자 여기저기周旋하여 쌀을모아먹였으며 싸움터에나가 賊을꾸짓고 敵陣에뛰어들어힘을다해 싸우다가 賊에게 結縛되었는데 李适의 무리가 同參을종용하자 호통치며 臣子는忠節을위해 죽는 것이 떳떳한 일이거늘 너희逆賊들은부끄럽지도 않느냐하고꾸짓다가 賊들에게 亂刺當하여 壯烈하壯烈하게죽으니 當時의 나이는二十四歲였다 이듬해 七月二十六日金瑬등과함께 振武原從一等功臣으로 策錄되었거니와 公은孝子로서도 이름나서 節孝公이라하였다그의 아우 金伸光도出天의孝로異蹟이있었고 李适의亂에는 十七歲의 少年으로 兄을따라 鄭忠信의幕下에들어가 猪灘에서의싸움과 京都收復등에많은功을쌓았다 丙子胡亂에는 仁祖大王이南漢山城으로蒙塵하심에兼司僕의 벼슬을띠고 扈從하였고 仁祖二十二年甲申에는 沈器遠등의 逆謀를未然에막은功으로 寧國原從一等功臣에策錄되여 錄券을받았으며博川煕川忠州永川의守令을歷任하면서 愛民善政을배풀어 到處에頌德碑가새워젔다 晩年에는 故鄕으로내려와 은행나무아래亭子를짖고이름을望北亭이라 하니 사람들이 公의 號를 杏亭이라 하였다嗚呼라 사람이 忠과孝를 兼하기는 至極히 어려운 바이거늘 梁山金氏의 三賢이저토록卓然하니 一體同享하여南國의士氣를 振作시킴이 合當하다하고 純祖九年己巳에 儒林에서 發議하자 異論이없었고 列郡의儒林들이響應하니 康津郡鵲川面君子里杏亭에祠宇를새워 享祀하여왔다 이제 그廟宇碑를새우려고 院任柳漢相과任員丁吉泰孔鍊雄本孫哲淳重煥甫가나를 찾아와 글을 請하매 나는 그材木이아니라고 거듭辭讓하다가 簡略히敍述하고 이어서 銘을 하니名士碩儒들과從遊하던有恒先生마음이 맑아서 物慾을 멀리했네 學問에 精進하니 行義는따라드높았고萬事에自强하여 終始한결같았네節孝公이奮義하여 逆賊을꾸짖다가죽음이 오히려永遠한 삶되었어라슲으다 오직공은 힘이 부처잡혔어도堂堂한 그志操꺾이지 않았었네 杏亭公이 뒤를 이어 三亂에功이높았고거처가신고을마다 頌德碑빛이난다의廟庭碑를새워 後孫과多士들이본받고저仰告하오니 館長任게서는金氏三世節行의卓越함을嘉賞히여기사 그行蹟이泯沒되지않도록하여주시면幸甚이겠습니다 삼가외람함을무릅쓰고 청하옵니다辛巳年十二月 日 西紀二千一年梁山金氏大宗會長[梁山金氏大宗會之印]金重煥成均館長座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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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4년 김중환(金重煥) 등 유장(儒狀) 고문서-서간통고류-통문 孔夫子誕降二千五百四十五年甲戌月日 康津鄕校典校 金重煥, 康津儒道會支部長 朴賢洙 成均館長經座下 孔夫子誕降二千五百四十五年甲戌月日 金重煥 朴賢洙 成均館長 강진 군자서원 한국학호남진흥원 HIKS_B001_01_A00032_001 1994년에 강진향교전교(康津鄕校典校) 김중환(金重煥)과 강진유도회지부장(康津儒道會支部長) 박현수(朴賢洙)가 성균관장에게 보낸 진정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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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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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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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 최창규(崔昌圭) 통문(通文) 고문서-서간통고류-통문 歲庚辰二千年四月日 成均館長 崔昌圭 梁山金氏大宗會 歲庚辰二千年四月日 崔昌圭 梁山金氏門會 강진 군자서원 한국학호남진흥원 HIKS_B001_01_A00036_001 2000년에 성균관장 최창규(崔昌圭)가 양산김씨대종회(梁山金氏大宗會)에 보낸 답통서(答通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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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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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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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년 김중환(金重煥) 청원문(請願文) 고문서-서간통고류-통문 辛巳年十二月日西紀二千一年 梁山金氏大宗會長 金重煥 成均館長座下 辛巳年十二月日西紀二千一年 金重煥 成均館長 강진 군자서원 한국학호남진흥원 HIKS_B001_01_A00036_001 2001년에 양산김씨대종회장(梁山金氏大宗會長) 김중환(金重煥)이 성균관장에게 보낸 청원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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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년 최창규(崔昌圭) 통문(通文) 고문서-서간통고류-통문 辛巳年西紀二千一年十二月日 成均館長 崔昌圭 梁山金氏大宗會 辛巳年西紀二千一年十二月日 崔昌圭 梁山金氏門會 강진 군자서원 한국학호남진흥원 HIKS_B001_01_A00036_001 2001년에 성균관장 최창규(崔昌圭)가 양산김씨대종회(梁山金氏大宗會)에 보낸 답통서(答通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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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정사묘정비문(杏亭祠廟亭碑文) 성균관 통장(成均館通章)성균관 통장이 글은 회유(回諭)하는 것이다. 귀 사우에 배향한 유항재 선생의 크고 넓은 학문과 밝게 나타난 덕행, 그 증손 절효공이 갑자년 이괄의 난에서 24세에 순국하여 하사받은 진무원종일등공신녹권, 행정공의 병자호란 때 남한산성에 호종의 공과 심기원(沈器遠) 등의 역모를 막은 공으로 받은 영국원종일등공신녹권 등의 공적은 연대가 점차 멀어질수록 우러러 사모하는 마음은 더욱 새로워진다. 이에 다음과 같이 비문을 짓는다.행정사묘정비명(杏亭祠廟亭碑銘) 【서문 병기】도가 땅에 떨어지지 않아 인륜이 넘어지는 것을 붙잡아 일으켰고, 하늘이 사문(斯文)을 망하지 않게 하였기에 묘우(廟宇)가 빛나는 것을 보았다. 공손히 상고해 보건대, 여기 행정사는 김 유항재(金有恒齋)·김 절효(金節孝)·김 행정(金杏亭) 세 선생을 모신 사당으로 유항재 선생은 출생 때부터 기이한 조짐을 보였다. 어머니가 무후(武侯, 제갈량(諸葛亮))가 나타나는 꿈을 꾼 뒤에 선생이 태어나서 선생의 이름을 량이라고 지었다. 타고난 자질이 영민하고 성품이 순수하여 부모를 섬기는 데 정성을 다하였고 자제를 가르치되 엄격하게 하셨다. 어릴 적부터 학문에 뜻을 두고 청련(靑蓮) 이후백(李後白)·고죽(孤竹) 최경창(崔慶昌)·옥봉(玉峰) 백광훈(白光勳) 같은 명사 석학들과 종유하면서 날마다 강석에서 성리의 학설을 토론하고 『심경(心經)』·『근사록(近思錄)』을 손에서 놓지 않고 강마하였으며, 언제나 침착하고 마음이 담박하여 세상의 명리와 화려하고 사치한 것에는 욕심이 없었다.일찍이 사마시에 참방하여 음사로서 차례로 올라가 내자시 직장에 이르렀으나, 벼슬에 연연하지 않고 낙향하여 이청련·최고죽 등과 함께 공부하였던 박산(博山)의 이순당(邇順堂)에서 후학들을 계도하는 한편 위기(爲己)의 학문에 더욱 정진하였으니 행의가 드러나고 언제나 한결같아서 세상에서 유항재 선생이라 하였다.인조 2년 갑자년(1624)에 이괄(李适)이 병란을 일으키자 선생의 증손 김호광(金好光)이 분연히 일어나서 금남군(錦南君) 정충신(鄭忠信)의 막하에 종군하여 저탄(猪灘)에서 싸우다가 군량이 떨어지자 여기저기 주선하여 쌀을 모아 먹었으며, 싸움터에 나가 적을 꾸짖고 적진에 뛰어들어 힘을 다해 싸우다가 적에게 결박되었다. 이괄의 무리가 동참을 종용하자 호통치며 "신하는 충절을 위해 죽는 것이 떳떳한 일인데, 너희 역적들은 부끄럽지도 않으냐!" 하고 꾸짖다가 적들에게 난자를 당하여 장렬하게 죽었으니 당시 나이는 24세였다. 이듬해 7월 26일에 김류(金瑬) 등과 함께 진무원종일등공신(振武原從一等功臣)으로 책록되었는데, 공은 효자로서도 이름나서 절효공(節孝公)이라 하였다.그의 아우 김신광(金伸光)도 타고난 효자로 남다른 공적이 있었고 이괄의 난에서는 17세의 소년으로 형을 따라 정충신(鄭忠信)의 막하에 들어가 저탄에서의 싸움과 경도(京都) 수복 등 많은 공을 쌓았다. 병자호란에서는 인조대왕이 남한산성으로 몽진하실 때 겸사복(兼司僕)의 벼슬을 띠고 호종하였다. 인조 22년 갑신년에는 심기원(沈器遠) 등의 역모를 미연에 막은 공으로 영국원종일등공신(寧國原從一等功臣)에 책록되어 녹권을 받았고, 박천·희천·충주·영천의 수령을 역임하면서 애민선정(愛民善政)을 베풀어 도처에 송덕비가 세워졌다. 만년에는 고향으로 내려와 은행나무 아래에 정자를 짓고 망북정(望北亭)이라고 하였으니, 사람들이 공의 호를 행정(杏亭)이라 하였다.아, 사람이 충과 효를 겸하기는 지극히 어려운데, 양산 김씨의 삼현(三賢)이 이토록 우뚝하니 모두가 함께 제향하여 남국의 토기(土氣)를 진작시키는 것이 합당하다. 순조 9년 기사년(1809)에 유림에서 발의하자 이론이 없었고 여러 고을의 유림이 메아리처럼 호응하니 강진군 작천면 군자리 행정에 사우를 세워 향사를 지내왔다. 이제 그 묘정비를 세우려고 원임 류한상(柳漢相)과 임원 정길태(丁吉泰)·공련웅(孔鍊雄), 본손 철순(哲淳)·중환(重煥) 군이 나를 찾아와 글을 청하였는데, 나는 그 재목이 아니라며 거듭 사양하다가 간략히 서술하고 이어서 명을 쓴다.명사 석학들과 종유하던 유항재 선생 마음이 맑아서 물욕을 멀리했네.학문에 정진하니 행의는 따라 드높았고 만사에 자강하여 종시 한결같았네.절효공이 의리를 떨쳐 역적을 꾸짖다가 죽음이 오히려 영원한 삶 되었어라.슬프다, 오직 공은 힘이 부족하여 잡혔어도 당당한 그 지조 꺾이지 않았었네.행정공이 뒤를 이어 삼란에 공이 높았고 거쳐 간 고을마다 송덕비 빛이 났도다.행정사묘정비를 세워서 이와 같은 학행과 충성과 효성이 세상에 널리 알려지도록 하는 것이 어찌 우리 사림들의 책무가 아니리오. 오직 원하노니, 여러 후손과 많은 선비가 본받고 교화되면 몹시 다행이겠다.이상은 양산 김씨 대종회에 공경히 회답하였습니다.신사년 서기 2001년 12월 모일에 성균관장 최창규(崔昌圭)양산 김씨 대종회 귀중에 成均館通章右回諭하는 것은 貴祠宇에配享하신有恒齋선생의 크고넓은學問과밝게나타난德行그孫節孝公의甲子李适의亂에서二十四歲에殉國하사받은振武原從一等功臣錄卷과杏亭公의丙子胡亂때南漢山城에扈從의功과沈器遠等의 逆謀를막은功으로받은寧國原從一等功臣錄券等의功蹟은年代가점차멀어질수록 우러러思慕하는마음은 더욱새로워집니다이때 다음 碑文과 같이杏亭祠廟亭碑銘 幷序道가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니 人倫이넘어지는 것을 붙잡아 이르켰고 하늘이 斯文을 亡하지 않게 하였기에 廟宇가 빛나는 것을 보겠다 恭遜히 詳考하건데 여기杏亭祠는 金有恒齋金節孝金杏亭세先生을 모신祠宇로서 有恒先生은出生時부터 奇異한 조짐이 있어서 어머니가 武侯를 現夢하시고 태어나니 이름을 亮이라 하였거니와 天資가英敏하고 稟質이純粹하여 父母를 섬김에 精誠을 다하고 子弟를 가르치되 嚴하게하였다 少時적부터 學問에뜻을두고李靑蓮後白崔孤竹慶昌白玉峯光勳같은名士碩儒들과從遊하면서날마다講席에서 性理의學說을討論하고 心經近思錄을손에서 놓지않고 講磨하였으며 언제나沈着하고 마음이淡泊하여世上의名利와華麗하고奢侈한것에는慾心이없었다일찍이司馬試에參榜하여蔭士로서차례로올라가內資寺直長에이르렀으나 벼슬에연연하지아니하시고 落鄕하여 어릴때李靑蓮崔孤竹등과함께공부하였든 博山의邇順堂에서 後學들을啓導하는한편 爲己의學問에더욱精進하니 行義가드러났고 언제나한결같으매 世上에서有恒先生이라하였다仁朝二年甲子에李适이兵亂을이르킴에先生의曾孫金好光이奮然히이러나 錦南君鄭忠信의幕下에從軍하여猪灘에서 싸우다가 軍糧이 떨어지자 여기저기周旋하여 쌀을모아먹였으며 싸움터에나가 賊을꾸짓고 敵陣에뛰어들어힘을다해 싸우다가 賊에게 結縛되었는데 李适의 무리가 同參을종용하자 호통치며 臣子는忠節을위해 죽는 것이 떳떳한 일이거늘 너희逆賊들은부끄럽지도 않느냐하고꾸짓다가 賊들에게 亂刺當하여 壯烈하게죽으니 當時의 나이는二十四歲였다 이듬해 七月二十六日金瑬등과함께 振武原從一等功臣으로 策錄되었거니와 公은孝子로서도 이름나서 節孝公이라하였다그의 아우 金伸光도出天의孝로異蹟이있었고 李适의亂에는 十七歲의 少年으로 兄을따라 鄭忠信의幕下에들어가 猪灘에서의싸움과 京都收復등에많은功을쌓았다 丙子胡亂에는 仁祖大王이南漢山城으로蒙塵하심에兼司僕의 벼슬을띠고 扈從하였고 仁祖二十二年甲申에는 沈器遠등의 逆謀를未然에막은功으로 寧國原從一等功臣에策錄되여 錄券을받았으며博川煕川忠州永川의守令을歷任하면서 愛民善政을배풀어 到處에頌德碑가새워젔다 晩年에는 故鄕으로내려와 은행나무아래亭子를짖고 이름을望北亭이라 하니 사람들이 公의 號를 杏亭이라 하였다嗚呼라 사람이 忠과孝를 兼하기는 至極히 어려운 바이거늘 梁山金氏의 三賢이저토록卓然하니 一體同享하여南國의士氣를 振作시킴이 合當하다하고 純祖九年己巳에 儒林에서 發議하자 異論이없었고 列郡의儒林들이響應하니 康津郡鵲川面君子里杏亭에祠宇를새워 享祀하여왔다 이제 그廟宇碑를새우려고 院任柳漢相과任員丁吉泰孔鍊雄本孫哲淳重煥甫가나를 찾아와 글을 請하매 나는 그材木이아니라고 거듭辭讓하다가 簡略히敍述하고 이어서 銘을 하니名士碩儒들과從遊하던有恒先生마음이 맑아서 物慾을 멀리했네 學問에 精進하니 行義는따라드높았고萬事에自强하여 終始한결같았네節孝公이奮義하여 逆賊을꾸짖다가죽음이 오히려永遠한 삶되었어라슲으다 오직공은 힘이 부처잡혔어도堂堂한 그志操꺾이지 않았었네 杏亭公이 뒤를 이어 三亂에功이높았고거처가신고을마다 頌德碑빛이난다杏亭祠廟庭碑를새워서 이같은學行과忠誠과孝誠이 世上에널리알려지도록하는 것은 어찌우리士林들의責務가않이리오오즉願하노니 여러後孫과多士들이본받고敎化되면 幸甚이겠나이다右는梁山金氏大宗會敬答합니다辛巳年 西紀二千一年 十二月 日成均館長崔昌圭[成均館長之印]梁山金氏大宗會 貴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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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문충식(文忠植) 등 통문(通文) 고문서-서간통고류-통문 檀君紀元四千三百四十一年戊子蜡月日 幼學 文忠植 等 15人 康津鄕校 儒林 僉座下 檀君紀元四千三百四十一年戊子蜡月日 文忠植 康津鄕校 儒林 강진 군자서원 한국학호남진흥원 HIKS_B001_01_A00038_001 2008년에 유학(幼學) 문충식(文忠植) 등 15명이 강진향교(康津鄕校) 유림(儒林)들에게 보낸 통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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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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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간통고류

공경히 통지합니다.이 글은 공경히 통지하는 것입니다. 『예기(禮記)』에 "처음으로 학교를 세운 자는 반드시 선사에게 석전례(釋奠禮)를 드린다."라고 하였습니다. 범문정공(范文正公, 범중엄(范仲淹))의 고소의숙(姑蘇義塾)과 주신재(周愼齋, 주세붕(周世鵬))의 백운서원(白雲書院)이 모두 어진 유자들로 천추에 밝게 빛났던 까닭은 참으로 이 때문입니다. 본 면에는 군자서원(君子書院) 행정사(杏亭祠)가 있습니다. 양산 사람 김 선생은 휘가 량(亮), 자가 명중(明仲), 호가 유항재(有恒齋)로 문정공 맹(猛)의 후손이고 좌랑 명규(命珪)의 아들입니다. 선조조에 내자시 직장에 제수되었지만 나아가지 않고 어버이를 지극한 효성으로 섬겼습니다. 문장과 도학이 뛰어나서 당시 이름난 석학 이 청련(李靑蓮)·최 고죽(崔孤竹)·백 옥봉(白玉峰)·임 석천(林石川)·기 고봉(奇高峯) 등 여러 공과 날마다 종유하며 경의(經義)를 강마하여 세상에서 중망을 받았습니다.또한 그 증손 호가 절효(節孝)인 호광(好光)은 인조 때 이괄의 변란에 의병을 일으켜서 난리를 진압하다가 끝내 순국하여 진무원종일등(振武原從一等)에 녹훈되었습니다. 그 아우 신광(伸光)은 자가 원숙(願叔)이고 호가 행정입니다. 그는 인조 때 세 변란에서 여러 차례 전공을 세웠고, 병자호란 때는 많은 공훈을 세워서 관직이 충주 목사에 이르렀고 영국원종일등(寧國原從一等)의 공훈에 책록되었습니다. 군자서원 행정사는 이 세 현인을 제향하는 곳입니다. 서원과 사우의 명칭은 지명을 따라 뜻한 것입니다. 마을은 군자리이고 동은 행정동입니다. 유항재 공의 깊은 학식과 높은 식견, 행정공의 위대한 공훈과 절의는 참으로 한 고장의 종주가 됩니다. 그런데 군자리라는 명칭과 행정동이라는 호칭이 만일 진실된 것이 아니라면 명칭과 호칭에 드러나 어찌 리와 동에까지 미쳤겠습니까.가만히 생각해 보건대, 유학을 숭상하고 도를 중시하는 것은 나라의 떳떳한 법이고 사당을 건립하고 제사를 지내는 것은 사림의 공의입니다. 군자서원은 지난 순조 20년 경진년(1820)에 본 고을의 사론이 제향하자는 뜻으로 엄준히 발의하여 당우가 모두 완성되었습니다. 또한 고종 무진년(1868) 당우가 훼철되었을 때는 제단을 설치하고 제사를 지내다가 이후에 매우 다행스럽게도 경자년(1900)에 본손의 정성과 노력, 도내의 사림과 유생이 함께 유통(儒通)을 계획하여 여러 고을의 향교와 성균관의 회통을 얻어 겨우 신실(神室)을 복원하고 '행정사'라 편액한 이후로는 서원을 복원할 겨를이 없어 후손들이 한탄하고 사림이 탄식한 지 몇 년이 되었습니다.이에 요사이 후손들이 정성을 다하여 재물을 모았지만 살림은 가난하고 후손은 잔약하며 사업은 거대한데 힘은 부족하여 막대한 경비를 마련할 길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유사가 고생스럽게도 여러 차례 관아에 보고하고 요로(要路)에 청원하였습니다. 매우 다행스럽게도 정부의 지원금을 얻어 방책을 계획하고 중건을 도모하여 당 하나에 재실이 두 개가 되었으니, 당은 의춘당(宜春堂)이라고 하고 동재는 애일재(愛日齋)라고 하고 서재는 망신재(忘身齋)라고 하였습니다. 또 관리사무실과 부속건물을 건립하여 '군자서원'이라고 총칭하였습니다. 한편으로는 선비들이 읍양(揖讓)하고 장수(藏修)하는 장소가 되고 한편으로는 후손들이 만년토록 갱장(羹墻)하는 당실(堂室)이 되었습니다. 그 규모와 시설은 거대하게 갖추어져서 건물은 새롭게 모습을 바꾸고 산천은 더욱 빛이 납니다. 애석하게도 예스럽지 않고 은전은 아직 받지 못했지만 이전 모습을 다시 볼 수 있으니, 명실공히 복원되었다고 할 만합니다.훌륭하고 성대합니다. 참으로 자손으로서 추모하는 정성을 펼칠 뿐만 아니라 유자의 관을 쓰고 유자의 옷을 입은 자 누군들 흠모하고 탄복하여 제사를 받들지 않겠습니까. 노나라의 글 읽는 소리가 오히려 풍진 속에서 다시 들릴 것이고, 우리 도의 한 줄기 양맥(陽脈)이 다시 밝아지는 소식이 앞으로 이곳에서 그 조짐이 나타날 것입니다. 이처럼 서원의 명칭이 복원된다면 진실로 사문(斯文)의 큰 다행일 것입니다. 저희는 본 서원의 말학(末學) 출신으로 머리를 들고 어깨를 곧추세우는 거사를 이에 감히 우러러 청합니다. 여러 군자께서는 더욱 실지를 밝혀서 명칭을 회복하고 현판을 변경해 주기를 몹시 바랍니다.이상은 강진향교 유림 여러 좌하께 공경히 통지하였습니다.단군 기원전 4341년(2008) 무자 12월 모일에 문충식(文忠植)·김권수(金權洙)·마옥남(馬玉南)·박병채(朴炳埰)·김용근(金容根)·김영수(金永壽)·김재익(金在益)·김상열(金相烈)·김권묵(金權黙)·장의수(張義秀)·이근성(李銀性)·김용두(金容斗)·김원선(金元善)·김국현(金國鉉)·김득환(金得煥) 등이 재배합니다.뎨김 : 이 통문을 살펴보니, 군자서원의 시설과 규모가 확장되어 장수유식(藏修遊息)하는 서원의 모양새에 합당하니, 명호(名號)에 따라 편액을 변경하는 것이 마땅하다.21일에 전교(典校) 윤기복(尹奇奉) 敬通右文爲敬通事 記曰始立學者必釋奠于先師 所以范文正公之姑蘇義塾周愼齋之白雲書院俱以賢儒炳然千秋 良由以也 本面君子書院杏亭祠則梁山人金先生諱亮字明仲號有恒齋文正公諱猛后佐郞諱命珪之子 宣祖朝除召 而內資寺直長不就 事親至孝 文章道學當時名碩李靑蓮崔孤竹白玉峰林石川奇高峯諸公日常從遊 講磨經義 推重于世 且其曾孫好光號杏亭〔節孝〕仁庙适變仗義撥亂 身竟殉國 振武原從一等勳 其弟伸光李亭字願叔號節孝〔杏亭〕仁庙三亂 屢立戰功 丙胡亂多有勳勞 官至忠州牧使 策錄寧國原從一等勳之三賢尸祝之所也 院祠而名 則因地而義也 里曰君子 洞曰杏亭 有恒齋公之邃學高識杏亭公之偉勳節義實爲一鄕之宗主 而君子里之稱名 杏亭洞之傳號 若非實眞的 則表著于名號 豈及於里與洞也哉 窃念崇儒重道邦家之常典也 建祠腏籩士林之公議也 君子書院則去{迋/山} 純庙二十年庚辰本郡士論峻發以俎豆之意 堂宇俱成 以且丁高庙戊辰毁撤之際設壇之祭後何幸於庚子本孫之誠力 乃道內土林章甫協謀儒通 得列郡鄕校及成均館回通 只以纔復神室而扁云杏亭祠 以來未遑書院復設 雲仍之茹恨士林之齎咨 興歎有年矣 幸玆昨今子姓而鳩財于誠 蓽生孱孫事巨力絀 巨大經費辨出無路 有司賢榮 而累次告官 請願要路 何幸得政府支援金 指劃方畧圖以重建一堂兩齋 堂曰宜春 東曰愛日 西曰忘身 又有管理舍及附屬舍 總顔曰君子書院 一以爲士子揖讓藏修之所 一以爲後仍萬世羹墻之堂室 其規模施設宏且備矣 輪奐改觀 山川增色 惜哉不古 而未蒙恩典 舊貌更覩 可謂名實共而復元矣 猗歟盛哉 寔不翹爲雲仍者伸其追慕之誠 而冠儒服儒者孰不欽服 而裸將矣 魯城絃誦猶可復聞於風塵 而抑吾道一線陽脈重煕之消息將兆朕於此歟 如此書院之名復元 則實斯文之大幸矣 鄙等本書院末學出身 而翹首而聳肩之擧 玆敢仰請 僉君子益加覈實 復名改扁之地千萬幸甚右敬通于康津鄕校 儒林 僉座下檀君紀元四千三百四十一年戊子蜡月 日 幼學 文忠植[文忠植印] 金權洙[金權 洙印] 馬玉南[馬玉南印] 朴炳埰[朴炳埰印] 金容根[金容根印]金永壽[金永壽印] 金在益[金在 益印] 金相烈[金相烈] 金權黙[金權黙] 張義秀[張義秀]李銀性[李銀性] 金容斗[金容斗] 金元善[金元善印] 金國鉉[金國鉉印] 金得煥 等再拜觀此按狀 君子書院施設規模 廣敝藏修 宜合院貌名號改扁 宜當決向事卄一日 典校 尹奇奉[康津鄕校典校之印][皮封](前面) 康津鄕校 儒林僉座下(背面) 發揚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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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신두천(申斗千) 등 통문(通文) 고문서-서간통고류-통문 檀君紀元四千三百四十一年戊子十二月日 成均館儒道會全羅南道支部 會長 申斗千 等 24人 康津鄕校 儒林 僉座下 檀君紀元四千三百四十一年戊子十二月日 申斗千 康津鄕校 儒林 강진 군자서원 한국학호남진흥원 HIKS_B001_01_A00038_001 2008년에 성균관유도회전라남도지부회장(成均館儒道會全羅南道支部會長) 신두천(申斗千) 등 24명이 강진향교(康津鄕校) 유림(儒林)들에게 보낸 통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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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경히 통문에 대답합니다.이 글은 삼가 통문에 회답하기 위한 것입니다. 가만히 생각건대, 세대가 멀어지고 인재는 죽고 없으며 경전은 잔멸되고 교화는 해이해져 고을에는 선한 풍속이 없고 세상에는 어진 인재가 부족해졌습니다. 학문이 폐지되고 도가 사라지는 이러한 때, 귀 고을 군자서원의 성대한 사업 소식을 듣게 되었습니다. 한 줄기 햇빛이 마치 박괘(剝卦)가 소진되고 복괘(復卦)가 틈을 타는 것1) 같은 모습을 다시 보게 되었으니, 어찌 기쁘고 즐겁지 않겠습니까.유항재(有恒齋) 선생은 지극한 효성과 박식한 학문이 있고 절효(節孝) 김공은 충효(忠孝)와 덕행(德行)이 있으며 행정(杏亭) 김공은 충과 절개가 있었으니, 세 선생의 사업과 행적이 어찌 이리도 대단하단 말입니까. 긴 밤에 뜬 외로운 별이자 어두운 길거리를 밝히는 밝은 촛불과 같습니다. 지금 서원의 현판을 고쳐서 게시하는 일은 우리 도가 일어나는 신호탄이 되니 매우 가상합니다. 이러한 가상한 상황에서 어찌 다른 마음을 가질 수 있겠습니까.저희는 떳떳한 본성을 지녔으니, 어찌 흠모하여 마음이 동하지 않겠습니까. 이에 감히 한목소리로 찬양하여 우러러 통지합니다. 원하건대, 여러 존장께서는 심력을 다하여 한편으로는 어진 이를 존중하는 정성을 펼치고 한편으로는 학교를 일으킬 길을 열어서, 후생을 훈도하여 공자의 도를 진작시킴으로써 고집스럽고 꽉 막힌 자들로 하여금 귀의할 곳이 있게 한다면 해가 다시 뜬 날에 우리 도의 하늘에도 서광이 있으리니, 몹시 다행함을 견디지 못하겠습니다.이상은 강진향교 유림 여러분께 공경히 회답한 것입니다.단군 기원 4341년 무자 12월 모일에 성균관유도회 전라남도 본부회 회장 갑두천 외 수석 부회장 고흥 송종묵(宋鍾默)·부회장 순천 허동열(許同烈)·부회장 나주 박홍순(朴弘淳)·부회장 해남 김정진(金丁鎭)·부회장 곡성(谷城) 오기성(吳冀星)·부회장 강진 윤영봉(尹泳烽)·부회장 구례 정원진(鄭源晉)·부회장 보성 최두식(崔斗植)·부회장 여수 정수길(丁壽吉)·부회장 담양 최낙현(崔洛鉉)·부회장 무안 서삼종(徐三鍾)·감찰위원장 광주 이규연(李圭衍)·총무국장 광주 송태종(宋泰鍾)·나주 박영욱(朴榮昱)·감찰위원 영광 정태성(丁大聲)·감찰위원 화순 김재철(金在喆)·감찰위원 장성 이상용(李相鏞)·감찰위원 함평 이진행(李辰行)·감찰위원 장흥 위철량(魏哲良)·감찰위원 곡성 김형수(金亨洙)·상무위원 나주 정경도(鄭京燾)·상무위원 곡성 심상온(沈相溫)·상무위원 담양 박문수(朴文洙)·보성 송동일(孫東逸)·나주회장 나종수(羅鍾洙)·여수회장(麗水會長) 위계춘(魏啓春)·지도회장(智島會長) 임종석(任鍾錫)·남평회장(南平會長) 서상백(徐相栢)·돌산회장(突山會長) 황승우(黃承佑)·담양회장(潭陽會長) 노동춘(盧東椿)·순천회장(順天會長) 조연익(趙燕翼)·해남회장(海南會長) 이승민(李昌珉)·창평회장(昌平會長) 고우석(高祐錫)·낙안회장(樂安會長) 김홍철(金洪哲)·무안회장(務安會長) 김인섭(金仁燮)·화순회장(和順會長) 류기모(柳基謨)·강진회장(康津會長) 최재남(崔在南)·능주회장(綾州會長) 문병운(文炳云)·동부회장(同福會長) 김철수(金哲洙)·영광회장(靈光會長) 강도원(姜道遠)·곡성회장(谷城會長) 안재천(安在千)·옥과회장(玉果會長) 한규환(韓圭煥)·광양회장(光陽會長) 김순용(金順龍)·구례회장(求禮會長) 조규태(曺圭台)·영암회장(靈巖會長) 오태석(吳泰錫)·고흥회장(高興會長) 이정연(李楨連)·장흥회장(長興會長) 김한수(金漢洙)·진도회장(珍島會長) 조규준(曺圭駿)·완도회장(莞島會長) 추교희(秋敎希) 박괘가……것 음이 다한 뒤에 다시 양이 생겨나는 것을 말한다. 「박괘」는 다섯 개의 음효(陰爻) 위에 하나의 양효(陽爻)가 있는 형상으로, 음이 극성하여 양기가 모두 소멸될 위기에 처한 괘인데, 바로 다음에 다섯 음효의 아래 하나의 양효가 생성되는 「복괘」로 받는다. 정자는 「서괘전(序卦傳)」에서 "사물은 박진(剝盡)할 리가 없다. 그러므로 박(剝)이 지극하면 복(復)이 오고, 음(陰)이 지극하면 양(陽)이 생겨나기 마련이다."라고 해석하였다. 敬答通右文爲謹答通事 竊惟世遠人亡 經殘教弛 鄕無善俗 世乏良材 値此學廢道喪之日 承此 貴鄕君子書院今日盛擧之聞 抑有一線之陽如復見於剝盡復乘 曷不喜樂之哉 於戲 有恒齋金先生至孝博學也 節孝金公忠孝德行也杏亭金公維忠與節也 三先生事行何若是韙哉 長夜孤星昏衢明燭也 今者書院改扁以揭事則云將吾道作興信號彈的契機 而甚嘉尙者已 嘉尙之地何携貳之端乎 生等彝性攸在豈不欽艶而動靜也哉 玆敢同聲讚揚仰通 惟願 僉尊殫厥心力 一以伸尊賢之誠 一以啓興學之路 訓迪後生 以震孔道 使扞格塙埴者得有所依㱕 則再中之日將有光於吾道之天 不勝幸甚千萬右敬答于康津鄕校儒林 僉座下檀君紀元四千三百四十[儒道會全羅南道本部]一年戊子十二月 日城均舘儒道會全羅南道本部會會長 申斗千[甲斗千印]外首席副會長高興 宋鍾默 副會長順天 許同烈 副會長羅州 朴弘淳副會長海南 金丁鎭 副會長谷城 吳冀星 副會長康津 尹泳烽副會長求禮 鄭源晉 副會長寶城 崔斗植 副會長麗水 丁壽吉副會長潭陽 崔洛鉉 副會長務安 徐三鍾 監察委員長光州 李圭衍總務局長光州 宋泰鍾 羅州 朴榮昱 監察委員靈光 丁大聲監察委員和順 金在喆 監察委員 長城 李相鏞 監察委員 咸平李辰行監察委員長興魏哲良 監察委員谷城 金亨洙 常務委員羅州 鄭京燾常務委員谷城 沈相溫 常務委員潭陽 朴文洙 等 再拜 寶城 孫東逸羅州會長 羅鍾洙 麗水會長魏啓春 智島會長 任鍾錫南平會長 徐相栢 突山會長 黃承佑 潭陽會長 盧東椿順天會長 趙燕翼 海南會長 李昌珉 昌平會長 高祐錫樂安會長 金洪哲 務安會長 金仁燮 和順會長 柳基謨康津會長 崔在南 綾州會長 文炳云 同福會長 金哲洙 靈光會長 姜道遠 谷城會長 安在千 玉果會長 韓圭煥 光陽會長 金順龍 求禮會長 曺圭台 靈巖會長 吳泰錫 高興會長 李楨連 長興會長 金漢洙 珍島會長 曺圭駿 莞島會長 秋敎希[皮封](前面) 康津鄕校儒林 僉尊下(背面) 成均舘儒道會全羅南道本部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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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경히 통지합니다이 글은 공경히 통지하는 것입니다. 『정사(桯史)』에 "오산(吳山)에 오원사(伍員祠)가 있는데, 편액이 시장을 내려다보고 있어 도읍 사람들이 공경히 섬겼다."라고 합니다.1) 본 군의 군자서원은 그 제도가 남강(南康)의 백록동서원(白鹿洞書院)을 본받아 또한 그러합니다. 유항재(有恒齋) 김량 선생은 선조조에 내자시 직장에 제수되었는데도 나아가지 않고 은거하며 어버이를 지극한 효성으로 섬겼고, 문장과 도학이 뛰어나 당대의 이름난 석학 이 청련(李靑蓮)·최 고죽(崔孤竹)·백 옥봉(白玉峰)·임 석천(林石川)·기 고봉(奇高峯) 등 여러 공과 함께 도의로 교유하고 늘 경의(經義)를 강마하며 노닐어 세상에서 중망을 받았습니다. 또한 그 증손 호가 절효(節孝)인 호광(好光) 공은 인조 때 이괄의 변란에서 특별한 공로와 충훈이 밝게 책록되고 진무원종일등(振武原從一等)에 녹훈되었습니다. 그 아우 행정공(杏亭公) 신광(伸光)은 인조 때 세 변란에 여러 차례 공훈을 세워서 관직이 충주 목사에 이르렀고 영국원종일등(寧國原從一等)의 공훈에 책록되었습니다. 군자서원은 이 세 현인을 제향한 곳입니다. 서원과 사우의 명칭은 지명을 따라 뜻한 것입니다. 거처한 마을은 군자리이고 동은 행정동입니다. 유항재 공의 깊은 학식과 높은 식견, 행정공의 위대한 공훈과 절의는 참으로 한 고장의 종유(宗儒)가 됩니다. 그런데 군자리라는 명칭과 행정동이라는 호칭이 만일 진실된 것이 아니라면 명칭과 호칭에 드러나 어찌 리와 동에까지 미쳤겠습니까.본 서원과 사우는 지난 순조 20년 경진년(1820)에 사론이 제향하자는 뜻으로 엄준히 발의하여 당우가 모두 완성되었습니다. 또한 고종 무진년(1869)에 당우가 훼철되었을 때는 흠향하는 제단을 설치하고 제사를 지내다가 이후에 매우 다행스럽게도 경자년(1900)에 본손의 정성과 노력, 도내 사림과 유생이 함께 유통(儒通)을 도모하여 여러 고을의 향교와 성균관의 회통(回通)을 얻어 겨우 신실(神室) 3칸을 복원하고 '행정사'라 편액한 이후로는 서원을 복원할 겨를이 없어 후손들이 한탄하고 사림이 탄식한 지 몇 년이 되었습니다.이에 요사이 후손들이 정성을 다하여 재물을 모았지만 살림은 가난하고 후손은 잔약하며 사업은 거대한데 힘은 부족하여 막대한 경비를 마련할 길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유사가 관아에 보고하고 요로(要路)에 청원하였습니다. 매우 다행스럽게도 정부의 지원금을 얻어 방책을 계획하여 중건을 도모하여 한 당과 두 재실이 되었으니, 당은 의춘당(宜春堂)이라고 하고 동재는 애일재(愛日齋)라고 하고 서재는 망신재(忘身齋)라고 하였습니다. 또 관리사무실과 부속건물도 건립하여 완전히 본 모습을 갖추게 되었습니다. 한편으로는 선비들이 읍양(揖讓)하고 장수(藏修)하는 장소가 되고 한편으로는 후손들이 만년토록 갱장(羹墻)하는 당실(堂室)이 되었습니다. 그 규모와 시설은 거대하게 갖추어져서 건물은 우뚝 솟아 새롭게 모습을 바꾸고 산천은 더욱 빛이 납니다. 애석하게도 예스럽지 않고 은전은 아직 받지 못했지만 이전 모습을 다시 볼 수 있으니, 명실공히 복원되었다고 할 만합니다.훌륭하고 성대합니다. 참으로 자손으로서 추모하는 정성을 펼칠 뿐만 아니라 유자의 관을 쓰고 유자의 옷을 입은 자 누군들 흠모하고 탄복하여 제사를 받들지 않겠습니까. 노나라의 글 읽는 소리가 오히려 풍진 속에서 다시 들릴 것이고, 우리 도의 한 줄기 양맥(陽脈)이 다시 밝아지는 소식이 앞으로 이곳에서 그 조짐이 나타날 것입니다. 이처럼 서원의 명칭이 복원된다면 진실로 사문의 큰 다행일 것입니다. 저희는 외람되이 본 군의 모범이 되는 자리에서 복원 과정을 보고 느끼면서 기쁘고 감동한 나머지 머리를 들고 어깨를 곧추세우는 심정을 견디지 못해 묵묵히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감히 우러러 돌아가면서 통고합니다. 오직 바라건대, 여러 군자께서는 군자서원의 현판을 변경하는 일에 한목소리로 동참해 주기를 몹시 바랍니다.이상은 각 군의 향교 유림에게 공경히 통지한 것입니다.단군 기원 4341년(2008)에 무자 12월 일에 강진 향교 전교 윤기봉(尹奇奉)·유도회장 최재남(崔在南) 장의(掌議) 이국묵(李國黙)·박진규(朴鎭圭)·채영안(蔡永安)·회유(會儒) 이병재(李炳在)·고병태(高秉台)·김정진(金定鎭)·오문재(吳文在)·이성희(李星熙)·박봉주(朴奉柱)·고홍채(高洪彩)·박종상(朴宗相)·김광진(金廣鎭)·김진녕(金鎭寧)·김광진(金洸鎭)·김순도(金順涂)·윤영봉(尹泳烽)·김재량(金在亮)·김중기(金重基)·최소현(崔小炫)·김효현(金孝炫)·서길문(徐吉文)·김화배(金化培)·윤영돈(尹泳敦)·곽대유(郭大有)·박노생(朴魯生)·김용근(金容根)·정근식(鄭根植)·강성민(姜聲珉)·박종일(朴鍾一) 등이 재배합니다. 『정사(桯史)』에……합니다 정사(桯史)』「유온고(劉蘊古)」에 나오는 말이다. 敬通右文爲敬通事 桯史云 吳山有伍員祠 扁額瞰闤闠 都人敬事之 本郡君子書院則制倣南康之鹿洞 亦然有恒齋金先生諱亮 宣祖朝除拜 而內資寺直長不就 隱居事親至孝 文章道學當時名碩李靑蓮崔孤竹白玉峯林石川奇高峯諸公道義之交 常遊於講磨經義 推重于世 且其曾孫節孝公諱好光 仁庙适變奇功忠勳炳烺于策 振武原從一等勳 其弟杏亭公諱伸光 仁庙三亂多有勳勞 官至忠州牧使 策寧國原從一等勳之三賢妥靈之所也院祠之名則因地而義也 所居里曰君子 洞曰杏亭 洞之傳號〔有恒齋公〕之邃學高識杏亭公之偉勳節義實爲一鄕之宗儒 而君子里之稱名杏亭洞之傳號若非實眞的 則表著于名號豈及於里與洞也哉 本院祠則去{迋/山} 純庙庚辰士論峻發以俎豆之意 堂宇俱成 以且丁 高庙戊辰毁撤之際 設居歆之壇之祭後何幸於庚子本孫之誠力及道內士林章甫協謀儒通 得列郡鄕校及成均舘回通 只以纔復神室三間而扁云杏亭祠 以來未遑書院復設 雲仍之茹恨士林之齎咨興歎有年矣 幸玆昨今子姓而鳩財于誠 蓽生孱孫事巨力綿 巨大經費辨出無路 有司告官請願要路 何幸得政府支援金 指劃方畧 圖以重建 一堂兩齋 堂曰宜春 齋曰東則愛日 西曰忘身 又備管理舍及附屬舍 而完備 一以爲士子揖讓講習之所 一以爲後仍百世之羹墻堂室 其規模施設宏且備矣輪焉奐焉改觀 山川增色 惜哉不古 而未 蒙恩典 舊貌更覩 可謂名實共而復元矣 猗歟盛哉 寔不翹爲雲仍者伸其追慕之誠 而冠儒服儒者孰不欽服而裸將矣 又魯城之絃誦猶可復聞於風塵 而抑吾道一線陽脈重熙之消息將兆朕於此歟 如此書院之名復元則斯文之大幸矣 鄙等 忝在本郡首善之地 觀感而不勝欣感 翹首而聳肩之擧不可含嘿 故玆以輪告 惟願 僉君子書院之改扁同聲讚揚之地千萬幸甚右敬通于各郡鄕校儒林 僉座下檀君紀元四千三百四十一年戊子十二月 日[康津鄕校章] 康津鄕校 典校 尹奇奉儒道曾長 崔在南掌議 李國黙[李國黙] 朴鎭圭[朴鎭圭] 蔡永安[蔡永安]會儒 李炳在[李炳在印] 高秉台[高秉台] 金定鎭[金定鎭印] 吳文在[吳文在] 李星熙[吳文在] 朴奉柱[朴奉柱印] 高洪彩[高洪彩] 朴宗相[朴宗相] 金廣鎭[金廣鎭] 金鎭寧[金鎭寧印] 金洸鎭[金洸鎭]金順涂[金順涂] 尹泳烽[尹泳烽] 金在亮[金在亮印] 金重基[金重基印] 崔小炫[崔小炫] 金孝炫[金孝炫] 徐吉文 金化培[金化培印] 尹泳敦 郭大有[郭大有] 朴魯生金容根[金容根印] 鄭根植[鄭根植] 姜聲珉 朴鍾一[朴鍾一印] 等再拜[皮封](前面) 各郡鄕校儒林 僉座下(背面) 敬通 康津鄕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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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문에 공경히 회답합니다.이 글은 통문에 공경히 회답하기 위한 것입니다.가만히 생각건대, 『순자(荀子)』「부편(賦篇)」에 "명호(名號)가 아름답지 못하면 사나운 것과 이웃이 되네."라고 하였으니, 군자라는 이름에는 상호 간에 흠결이 없습니다. 지금 귀하의 통문을 살펴보건대, 군자서원은 순조 연간에 창건되어 유항재(有恒齋) 김 선생·절효공(節孝公) 김공·행정(杏亭) 김공의 세 위패를 모신 곳입니다. 고종 연간에 불행히도 철폐령을 당해 출입이 금지된 통에 잡초만 무성해져 선비들은 귀의할 곳을 잃고 학문은 강론되지 않은 채 단지 제단만 설치하여 제사를 지냈습니다.지난 경자년(1900)에 겨우 행정사를 복원하였고, 서원을 다시 설립하는 것이 사림들의 오랜 소원이자 자손들의 큰 바램이었습니다. 다행히 이전 모습으로 복원되고 칭호도 바람대로 변경되었으니, 앞으로 그 학문을 강마하고 그 도를 밝혀야 합니다. 이는 귀 고을의 성대한 일일 뿐만 아니라 우리 도와 사문의 큰 다행이기도 합니다. 저희는 소나무가 무성하면 잣나무가 기뻐하는 마음이니,1) 어찌 한목소리로 찬양하고 호응하지 않겠습니까. 원하건대, 여러 존자께서는 풍교(風敎)를 다지고 기강을 세워주기를 몹시 바랍니다.이상은 강진향교 유림 여러분께 답통한 것입니다.단군 기원 4341년(2008) 무자 12월 모일에 전주향교 전교 이호석(李湖錫)유도회장 정진용(鄭鎭用)·장의(掌議) 유옥균(劉玉均)·장의 조종희(趙完熙)·장의 김순곤(金順坤)·장의 김상철(金尙喆)·장의 원은석(元銀錫)·장의 이금산(李金山)·장의 임규열(林圭烈)·장의 류수철(柳守哲)·장의 전기섭(全基燮)·장의 김윤생(金潤生)·장의 김춘원(金椿源)·장의 최인열(崔寅㤠)·장의 김은중(金根重)·장의 최재춘(崔再春)·장의 서재업(徐在業)·장의 이대근(李大根)·장의 송동용(宋東勇)·장의 육엽(陸燁)·장의 김동련(金東鍊)·장의 김학철(金學喆)·장의 이제환(李濟換)·장의 심구남(沈九男)·장의 남관(南寬) ·장의 송순철(宋淳鐵)·장의 김승방(金勝芳)·장의 이세환(李世煥)·장의 김종석(金鍾錫)·장의 강주성(姜柱成)·장의 류종학(柳鍾學)·장의 강성수(姜成洙)·장의 정형근(鄭亨根)·장의 김인식(金仁植)·장의 류동희(柳東熙)·장의 김용화(金容禾)·장의 최형식(崔亨植)·장의 이현구(李鉉求)·장의 정소옥(鄭小玉)·장의 강문존(康文尊)·장의 정동준(鄭東俊)·장의 조춘근(趙春根) 소나무가……마음이니 상대의 일이 잘 풀리자 함께 기뻐하는 것을 뜻한다. 육기(陸機)의 「歎逝賦」에 "참으로 소나무가 무성하니 잣나무가 기뻐하고, 아, 지초가 불에 타니 혜초가 탄식하네.[信松茂而柏悅 嗟芝焚而蕙歎]"라고 한 데서 유래한 말이다.(『文選』 卷16) 敬答通右文爲敬答事 竊念荀子賦篇云名號不美 與暴爲鄰 君子爲名 交互無欠也 今按 貴通 君子書院 則純祖年間創建 有恒齋金先生節孝公金公杏亭金公三位妥侑之所 高宗年間不幸見廢令以禁 掬爲茂草 士失依歸 講不學 只以設壇以祭去往庚子僅復杏亭祠 復設書院 士林宿願子姓冀望幸玆舊貌復元 稱號改望 將欲講其學明其道 此不啻 貴鄕大盛事 吾道斯文大幸之事 鄙等松茂柏悅之心也 豈非同聲讚揚桴皷哉 惟願 僉尊以樹風敎立紀之地千萬幸甚右答通于康津鄕校 儒林 僉座下檀君紀元四千三百四十一年戈子臘月 日[全州鄕校之印]全州鄕校 典校 李湖錫[全州鄕校典校之印]儒道會長 鄭鎭用 掌議 劉玉均 掌議 趙完熙 掌議 金順坤 掌議 金尙喆 掌議 元銀錫 掌議 李金山 掌議 林圭烈 掌議 柳守哲掌議 全基燮 掌議 金潤生 掌議 金椿源 掌議 崔寅㤠 掌議 金根重 掌議 崔再春 掌議 徐在業 掌議 李大根 掌議 宋東勇 掌議 陸燁 掌議 金東鍊 掌議 金學喆 掌議 李濟換 掌議 沈九男 掌議 南寬 掌議 宋淳鐵 掌議 金勝芳 掌議 李世煥 掌議 金鍾錫 掌議 姜柱成 掌議 柳鍾學 掌議 姜成洙 掌議 鄭亨根 掌議 金仁植 掌議 柳東熙 掌議 金容禾 掌議 崔亨植 掌議 李鉉求 掌議 鄭小玉 掌議 康文尊 掌議 鄭東俊 掌議 趙春根[皮封](前面) 康津鄕校儒林 僉尊下(背面) 全州鄕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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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윤기봉(尹奇奉) 등 통문(通文) 고문서-서간통고류-통문 檀君紀元四千三百四十一年戊子十二月日 康津鄕校 典校 尹奇奉 等 29人 各郡鄕校 儒林 僉座下 檀君紀元四千三百四十一年戊子十二月日 尹奇奉 各郡鄕校 儒林 강진 군자서원 한국학호남진흥원 HIKS_B001_01_A00038_001 2008년에 강진향교(康津鄕校) 전교(典校) 윤기봉(尹奇奉) 등 29명이 각군향교(各郡鄕校) 유림(儒林)들에게 보낸 통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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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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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이상우(李相雨) 등 통문(通文) 고문서-서간통고류-통문 檀君紀元四千三百四十一年戊子蜡月日 南原鄕校 典校 李相雨 等 22人 康津鄕校 儒林 僉尊座下 檀君紀元四千三百四十一年戊子蜡月日 李相雨 康津鄕校 儒林 강진 군자서원 한국학호남진흥원 HIKS_B001_01_A00038_001 2008년에 남원향교(南原鄕校) 전교(典校) 이상우(李相雨) 등 22명이 강진향교(康津鄕校) 유림(儒林)들에게 보낸 통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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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문에 공경히 회답합니다.이 글은 공경히 아뢰기 위한 것입니다. 아, 서원의 존폐는 운수가 그렇게 만든 것이며, 서원의 부흥은 또한 세도의 존폐와 관계되니 도의에 달려 있습니다. 군자서원은 순조 경진년(1820)에 창설되었는데, 불행히도 고종 무진년(1869)에 철폐된 일은 온 나라와 온 도가 모두 함께 겪은 일이었습니다. 이에 선비들은 귀의할 곳을 잃어 학문이 강론되지 않고 예가 행해지지 않아 무성한 풀로 뒤덮여 황폐해졌으니, 길을 가던 사람들이 한탄하고 애석해한 지 오래되었습니다.지난 경자년(1900)에 겨우 행정사를 복원해서 단지 제향만 해왔습니다. 그러다가 다행히 최근에 서원의 시설이 완전히 복원되었습니다. 드러나고 묻힘은 때가 있는데 현판은 다시 새로워졌습니다. 장차 그 학문을 배우고 그 행적을 실천하고자 한다면 우리 도가 실행되어 사문이 박괘(剝卦)가 없어지고 복괘(復卦)가 틈을 타듯 성대한 일을 크게 일으킬 것이니, 누가 명칭을 회복하여 사모하는 심정을 불가하다고 말하겠습니까. 여러 존자께서는 군자서원으로 현판을 걸어서 풍성(風聲)을 수립할 수 있도록 해주기를 몹시 바랍니다.이상은 강진향교 유림 여러분께 공경히 회답한 것입니다.단군 서기 4341년(2008) 무자 12월 모일에 남원향교 전교 이상우·유도회장 김태곤(金太坤)·위성조합장(衛聖組合長) 이병용(李秉瑢)·양사재장(養士齋長) 이발도(李鉢壽)·충열사자(忠烈祠長) 태용섭(太用燮)·사무국장(事務局長) 김양현(金良炫)·의전장의(儀典掌議) 이기성(李起星)·교화장의(敎化掌議) 김두행(金斗幸)·재경장의(財經掌議) 조남훈(趙南勳)·섭외장의(涉外掌議) 김시열(金時烈)·연락장의(連絡掌議) 양택민(梁澤旻)·장의 이동열(李同烈)·장의 조두식(曹斗植)·장의 양용식(梁龍植)·장의 노동팔(盧東八)·다사(多士) 안진모(安珍模)·다사 오재승(吳在承)·다사 방사원(房仕源)·다사 최순진(崔淳珍)·다사 김영태(金永泰)·다사 한봉수(韓奉洙)·다사 조용석(趙庸奭) 敬回通右文爲敬復事 嗚呼 書院之興廢氣數使然也 復興亦關於世道之替隆也 而道義所在也 君子書院則創於 純庙庚辰 而不幸 高庙戊辰毁撤 圜國擧省統同之所遭也 士失依㱕 學不講而禮不行 荒草掬茂 行路嗟惜者年久 去庚子僅復杏亭祠 纔享以來 幸玆昨今書院施設完全復元 顯晦有時 扁更復新 將欲學其學 行其行之 實行吾道 斯文之剝復乘除 大興盛事 而孰曰不可復名 而慕誠哉 望須 僉尊爲之揭扁君子書院[南原鄕校儒會之印] 以樹風聲之地千萬幸甚右敬答于康津鄕校儒林 僉尊座下權君紀元四千三百四十一年戊子蜡月 日南原鄕校 典校 李相雨[南原鄕校典校印]典 校 李相雨[南原鄕校典校印] 儒道會長 金太坤 衛聖組合 李秉瑢 養士齋長 李鉢壽 忠烈 祠長 太用燮 事務局長 金良炫 儀典掌議 李起星 敎化掌議 金斗幸財經掌議 趙南勳 涉外掌議 金時烈 連絡掌議 梁澤旻 掌議 李同烈 掌議 曹斗植 掌議 梁龍植 掌議 盧東八多士 安珍模 多士 吳在承 多士 房仕源 多士 崔淳珍 多士 金永泰 多士 韓奉洙 多士 趙庸奭[皮封](前面) 康津鄕校儒林 僉尊下(背面) 南原鄕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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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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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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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간통고류

2008년 이호석(李湖錫) 등 통문(通文) 고문서-서간통고류-통문 檀君紀元四千三百四十一年戊子蜡月日 全州鄕校 典校 李湖錫 等 44人 康津鄕校 儒林 僉座下 檀君紀元四千三百四十一年戊子蜡月日 李湖錫 康津鄕校 儒林 강진 군자서원 한국학호남진흥원 HIKS_B001_01_A00038_001 2008년에 전주향교(全州鄕校) 전교(典校) 이호석(李湖錫) 등 44명이 강진향교(康津鄕校) 유림(儒林)들에게 보낸 통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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