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卷之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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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川明月 出自東山忽滿川。纈簾素影佯茶煙。盈虛一理能知否爲問當年赤壁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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仰巖落照 仰巖勝景帶斜暉。宿鳥投林兩兩飛。疑是畵圖飜石壁。三叉古路轉依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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濟浦歸帆 翩翩彩鷁順風來。春水生潮鏡面開。無事江樓還有事。前帆數盡後帆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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上外舅 間因便人徃來。伏探體候康健。大爲後生依仰。克愜微衷之區區。而繼以祝而壽而福者。食息不庴。外甥功服人。菲劣無庸仰達。而惟妻孥不言病耳。金生來此以後。讀了鄒經一卷。而以其才而計歲前日。則當加讀他卷。而卷帙之多。不如咀嚼之多。故使之再讀矣。言旋送別。極庸悵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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上外舅 伻人下疏。問此酷罰。感哀岡諭。伏審體候難老康寧。伏禱區區。長胤兄。薇垣淸選。非徒爲尊門賀。足使吾黨增輝。特被天恩隆重。則輸忠象魏。豈非職分事耶。艶欽。孤哀子。頑命不絶。終祥奄屆。叩叫痛霣。只欲無生而妻孥不言警。隣里亦似淨潔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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上外舅 日者下覆。俯誦仰思。是感是悚。伏審體候康寧。實孚下忱。外甥幸免他病。方迎姪女婿。凡節稱停耳。就白外甥。素荷辱敎。自謂入於大爐韝之化。而有疑必質。有懷必達。豈意向日上書。文短筆澁。辭不通暢。爲昧於俯鑑耶。蓋敬之爲義。不以聲音笑貌。則斯須之敬。合用於鄕人。而不合用於事之若賢師之地矣。渠之辭意。寔出於庸敬。而下責以捓揄套習。捓揄。是不敢施於敵已儕輩。而曷敢於外舅前乎。曾聞於大人先生。外稽阮內程朱。未之有也。渠雖不敏。願爲從事斯語而不得。伏歎伏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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答金吉仲【鎔璇】 屛伏窮山。與死爲隣。非圖惠幅入門。問我憐我。其非吉仲。何以得此。感感荷荷。病其欲蘇。矧惟窮蜡重省餘。讀履萬旺。諸節均慶。懸懸之至。克庸慰慰。姻末。支離一病。無今瘳之日。無乃蒲柳秋色歟。惟慰率下無見警耳。正初一顧之諾。預庸欣瀉。屈指苦竢耳。惠饋兩種。正合病胃。而非渠之美。卽吾吉仲之賜歟。但有瓜無瓊。還庸歎歎耳。餘惟希餞迓囿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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答金吉仲 窮歲懷想。另切于中。匪圖委疏。若是眷念。感感荷荷。頗若未曾有。矧維哀候。定省萬支。諸節均宜。懸溯之至。克愜願言。姻下。孤露餘感。於斯尤極。而昔者賤疾逐逐不去。有何嘉況。堪把玩者耶。但率下則依本分云耳。明正枉顧之示。當自我先慰。而倒承其惠歟。然而感其言。而屈指竢竢耳。第柑魚之惠。其感也不直在物。箇箇是情。柑非酸也。魚非多骨。足以解彭淵之五恨。但無物報謝。還庸怍怍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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答金吉仲 歲暮窮巷。頹然若塚中枯骨。何來一幅書。飄然入門起我警我。是乃吉仲不忘我耶。欣與感幷。罔知所以爲謝。恪惟玆者。重省餘。棣履承歡百福。各儀貞謐。爲慰十分。讀業能不負三冬足歟。書中不以示及還。若未爬之癢。盖日月不我與。及其靑春好光陰。倍自勉勵焉。拙向所謂。塚中枯骨。道得實際。無容更評。而惟慰眷免大何耳。明正一枉之示。預庸屈指苦竢。惠饋二種。其感也不直在物。擧此可知其老吾及人矣。但無瓊報瓜。還覺愧愧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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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오유고(東塢遺稿) 6권 2책 東塢集 東塢遺稿 고서-집부-별집류 교육/문화-문학/저술-문집 문집 표점영인 東塢遺稿 跋 : 崇楨後五己 跋 : 崇楨後五己 [1899] 曺毅坤 목활자본 『동오유고(東塢遺稿)』 2 有界 10行22字 한자 花口 上下向2葉花紋魚尾 전남대학교도서관_불명처2 전남대학교도서관 1889년에 간행한 동오(東塢) 조의곤(曺毅坤, 1832~1893)의 문집, 6권 2책(목활자본)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그의 아들 조석휴(曺錫休)가 편집하였다. 『 동오유고(東塢遺稿)』 해제 1. 생애와 사승·교유 조의곤(曺毅坤, 1832~1893)의 자는 사홍(士弘)이고, 호는 동오(東塢)이며, 본관은 창녕(昌寧)이다. 시조는 계룡(繼龍)이다. 선조 휘 침(琛) 때에 모양(牟陽, 전북 고창)으로 내려와 살면서 자손들이 세거하였다. 수계(壽階)로 가선대부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에 오른 5대조 휘 언징(彥徵)은 한익(漢翊)의 막내아들로 형조참판으로 추증된 휘 한명(漢明)의 양자로 들어갔다. 호는 삼오(三吾)이다. 고조의 휘는 수량(守亮), 증조의 휘는 영화(永華), 조부의 휘는 계성(啓聖)이다. 부친의 휘는 현위(炫瑋)이고, 모친은 죽산안씨(竹山安氏)로 안광영(安光暎)의 딸이다. 조의곤은 1832년(순조 32) 5월 6일 검암리(儉巖里, 현 전라북도 고창군 고창읍 월암리)에서 태어났다. 타고난 자질이 맑고 순수하였으며 기질이 총명하였고, 효도하고 우애하는 성품을 갖고 있었다. 어린 시절 마을 어른들이 아이들과 놀고 있는 의젓한 조의곤의 모습을 돌[石] 중의 옥(玉)과 같다고 해서 조의곤의 어릴 적 이름은 석(石)이었다. 1847년(헌종 13) 16세 때에 노사 기정진에게 집지(執贄)하고 이때부터 과거 공부를 마다하고 오로지 자신을 닦아 널리 경서를 공부하였다. 기정진이 평상시 말씀하신 여러 가지 가르침에 대해 "아무리 총명해도 둔한 붓보다 못하다.[聰明不如鈍筆]"라고 하며 모두 기록하였다. 이 기록은 문집을 발간할 적에 「강산차록(江山箚錄)」이라는 제목으로 권4에 수록되어 있다. 37세 때인 1868년(고종 5) 겨울에는 노사 기정진을 모시고 관암(觀庵)에서 유숙하면서 시를 짓기도 하였다. 1870년(고종 7)에는 기정진이 「동오기(東塢記)」를 지어주었다. 1876년(고종 13) 겨울 조의곤이 노사 선생을 담대헌(澹對軒)에서 모셨는데, 한밤중에 노사 선생이 일어나 꿈속의 일을 노래로 읊조리자 이를 듣고 조의곤은 "세상을 싫어하는 뜻을 밤에 노래로 드러내셨으니, 아마도 선생님이 장차 병환이 있겠구나."하고 종종걸음으로 급히 달려가 노사 선생을 뵈었다. 노사는 "그대는 어찌하여 늦게 왔는가. 어제저녁 꾸었던 꿈을 노래로 불렀으니, 이것이 바로 나의 명사(命詞)라네. 노래 한 구절을 지었으니 기억하게."라고 말하였다. 조의곤은 나오면서 비통해하며 "철인이 세상을 떠나면 나는 장차 어디로 가야 하는가!"라고 하였다. 46세 때인 1877년(고종 14)에 아버지가 위독해지자 걸음을 똑바로 걷지 못할 정도로 걱정하였으며, 약을 달이고 죽을 끓이는 일이나 요강을 비우고 옷을 세탁하는 일을 반드시 친히 행하였다. 그해 8월 19일에 부친이 세상을 떠났다. 1879년(고종 16) 스승 기정진이 세상을 떠나자 빈렴(殯斂)에서 장제(葬祭)까지 어버이를 여읜 것같이 지극정성을 다하였다. 가마(加麻)와 심상(心喪)을 면재(勉齋) 황간(黃榦)이 주자의 상제(喪制)에 행한 고사처럼 하였다. 그 후 행장을 챙겨 고향으로 가서 동오정[처음 전북 고창군 고창읍 석정리에 지었는데, 현재는 고창읍 월산리로 옮겼다.]을 짓고 은거하면서 강학 활동을 하였다. 고을에서 조의곤을 조정에 추천하려고 하였는데 그때마다 글을 보내 중지시켰고, 고을 수령이 조의곤을 만나자고 해도 병을 핑계로 사양하였다. 서제(庶弟) 하곤(河坤), 한곤(漢坤)에게는 성심껏 살림살이를 도왔을 뿐만 아니라 사소한 음식이나 물품도 반드시 나누었다. 1892년(고종 29) 12월 동문과 함께 노사 선생 고택에서 설을 쇠었다. 12월 29일이 노사 선생의 기일이기 때문이었다. 이것이 빌미가 되어 병이 들었다. 자식들이 소식을 듣고 귀가를 청하였지만, 조의곤이 "나는 선생 댁에서 죽어도 여한이 없다."라고 말했다. 그렇지만 이를 계기로 병이 더욱 심해져 1893년(고종 30) 1월 22일 인시(寅時) 석정(石汀)의 침소에서 세상을 떠났다. 향년 62세였다. 기우만이 곡하고 명정에 '동오처사(東塢處士)'라고 썼다. 3월 15일 장성부 북일면 금량동(金良洞) 선영에 장사 지냈다. 부인은 광산김씨로 김문순(金文珣)의 딸이다. 1남 1녀를 낳았는데, 아들은 석휴(錫休)이고, 딸은 고흥류씨 류윤석(柳允錫)에게 시집갔다. 조의곤은 위정(衛正)을 자기 임무로 삼고서 비록 초야에 있어도 나라를 걱정하는 마음을 잊지 않았다. 그리고 당시 학자들의 독서 방법을 지적하며 "지금 사람들의 독서는 모두 이해를 하지 않고 오로지 외우는 데만 힘을 쓴다. 비록 만권을 읽어도 우리 자신에게 무슨 이익이 되겠는가?"라고 하였다. 조의곤이 교유한 인물은 기기진(奇麒鎭), 기우만(奇宇萬, 1846~1916), 기양연(奇陽衍, 1827~1895), 기홍연(奇弘衍, 1828~1898), 이희석(李僖錫, 1804~1889), 안중섭(安重燮, 1808~1883), 김록휴(金祿休, 1827~1899), 한진석(韓晉錫, 1833~1909), 송영(宋暎), 박승양(朴升陽), 안달삼(安達三, 1837~?), 고제만(高濟萬, 1849~1914), 김재석(金在錫) 등과 영남의 노사 문인인 조성가(趙性家, 1824~1904), 민치완(閔致完, 1838~1911), 정재규(鄭載圭, 1843~1911), 최숙민(崔琡民, 1837~1904) 등이 있다. 2. 구성과 내용 『 동오유고(東塢遺稿)?는 조의곤(曺毅坤)의 문집으로 1899년에 아들 조석휴(曺錫休)가 편집하여 부록 2권을 포함하여 6권 2책의 목활자본으로 간행되었다. 권두에 기우만(奇宇萬)의 서문과 권말에 족자(族子) 조석일(曺錫一)의 발문이 있다. 권1에 시 82제 123수가 있고, 권2에 서(書) 39편이 있다. 권3에 제문 5편, 축문 5편, 잠(箴) 1편, 잡저(雜著) 5편, 서문(敍文) 1편, 기문 3편, 발문 2편이 있고, 권4에 「강산차록(江山箚錄)」 수록되어 있다. 부록 권1은 제문 7편, 만시 7편이 있고, 권2는 가장, 행장, 묘갈명이 수록되어 있다. 권1의 시는 지은 시기에 따라 편차(編次)되어 있고, 체제를 가리지 않고 실려 있다. 내용은 사우와 강회(講會)를 하며 읊은 시, 서로 만나 수창(酬唱)한 시, 이별하며 지어 준 시, 경물(景物)을 읊은 시, 제야(除夜)의 감회를 읊은 시, 만시(挽詩) 등이 있다. 그 가운데 「동오제경(東塢諸景)」 25수는 오언절구로, 동오정사(東塢精舍), 서봉신월(西峯新月), 매천소우(梅川疏雨) 등 동오(東塢)의 아름다운 경치와 한가한 정경을 그려내었다. 「경차도핵배운(敬次桃核盃韻)」 2수는 각각 오언절구와 칠언율시로 조의곤의 집안에 전해 내려와 보관되고 있는 15대조 청간공(淸㵎公) 조서(曺庶)가 사신으로 중국에 갔을 때 명나라 황제에게 하사받았던 도핵배(桃核盃)에 대한 작품이다. 조서는 1398년(태조 7) 명나라에 사신으로 가서 황제를 배알하고 공물(供物)을 줄여 달라고 요청하였다가 참소를 당해 수년간 금치국(金齒國)에 유배되었다. 그 후 명나라 황제는 강직한 충절에 탄복하여 사면해 주면서 복숭아 씨앗에 금과 은으로 상감(象嵌)해서 만든 도핵배(桃核杯)를 하사품으로 내려주었다. 청간공 조서의 현손이 바로 고창으로 입향한 조침(曺琛)이다. 권2에는 편지 39편이 실려 있다. 스승 노사 기정진을 비롯하여 족인(族人)과 사위 류윤석에게 보낸 것이 있다. 그 외 조성가, 이희석, 김녹휴, 안중섭, 기우만, 기양연, 안달삼 등 동문에게 보낸 안부 편지가 주를 이룬다. 「상노사선생서(上盧沙先生書)」는 1870년 노사가 지어준 「동오기」에 한 것과 1879년 노사의 병증에 관한 내용이다. 「여담양전씨간소(與潭陽田氏刊所)」는 고려말 두문동(杜門洞) 72현(賢) 중 삼은(三隱) 즉, 야은(壄隱) 전녹생(田祿生), 뇌은(耒隱) 전귀생(田貴生), 경은(耕隱) 전조생(田祖生) 삼 형제의 합집(合集) 문헌 발행본을 받고서 감사의 편지를 보낸 내용이다. 「답교회소(答校會所)」는 내용상 어떤 문집인지 알 수 없으나, 간행 유사 직책을 사양하는 답장이다. 권3에는 제문 5편, 축문 5편, 잠(箴) 1편, 잡저(雜著) 5편, 서(敍) 1편, 기(記) 3편, 발(跋) 2편이 수록되어 있다. 제문은 기우기(奇宇夔), 김기설(金箕說), 노사 기정진, 고제만, 안중섭에 대한 추모의 글이다. 기우기는 기우만의 큰 형이다. 신사년(1881, 고종 18)에 조의곤의 어린 시절 스승인 오천(鰲川) 고제만(高濟萬)에 대한 제문을 썼고, 계미년(1883, 고종 20)에는 안중섭에 대한 제문을 지었는데, 같은 고장에 살았던 회상과 늙은 나이에 과거 합격한 것에 관한 내용이 보인다. 안중섭의 자는 순화(舜華), 본관 죽산(竹山)이고, 거주지가 고창이다. 73세 때인 경진년(1880, 고종17) 진사시에 합격하였다. 축문 5편은 모두 기우제(祈雨祭) 때 지은 축문이다. 대상은 반등산(半登山), 성황단(城隍壇), 취령산(鷲靈山) 2수, 화실산(火失山)이다. 잠(箴)은 1편이 수록되어 있는데, 「부족외잠(不足畏箴)」이다. 조의곤이 40세 때 쓴 작품으로 4언으로 구성되어 있다. 조의곤이 40세 되던 해 전날 밤에 「사십제석(四十除夕韻)」시를 지어 스승인 기정진에게 보내자, 기정진이 「차조사홍사십제석운(次曺士弘四十除夕韻)」 시를 다음과 지어주었다. 칠십삼 년 세월이 물 따라 흘러가나니 七十三年逐水流 여생이 백척간두를 걷는 것과 흡사하더군 餘生一似步竿頭 무문(無聞)이라는 성인의 가르침 두려워 말고 無聞聖訓君休怕 부지런히 새봄을 잡고 지난 세월을 갚아보게 勤把新春贖舊秋 「부족외잠」은 스승이 시를 통해 알려준 무문(無聞)이라는 가르침을 받고서 스스로 경계로 삼기 위해 지은 것으로 보인다. '무문'과 '부족외(不足畏)'는 『 논어?에 "후생을 두렵게 여겨야 할 것이니, 앞으로 후생들이 지금의 나보다 못하리라고 어떻게 장담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40세나 50세가 되도록 세상에 알려지지 않는 사람이라면, 또한 두려워할 것이 없다고 하겠다.[後生可畏 焉知來者之不如今也 四十五十而無聞焉 斯亦不足畏也已]"라는 공자의 말에서 원용한 것이다. 잡저(雜著)에는 5편의 글이 실려 있다. 「지도론(止盜論)」은 조의곤의 우국 정신이 드러난 작품으로 당시 민란 등으로 발생했던 혼란과 도둑질을 중지시키는 방도에 관해 쓴 작품이다. 조정과 윗사람들의 솔선수범과 뇌물 금지, 폐단 제거, 비용 절감 등을 제시하고 있다. 「송족제병삼서행설(送族弟昞三西行說)」은 족제(族弟) 조풍곤(曺豊坤)이 서울로 가는데 외국인이 왕래하는 인천의 제물포를 지나니 조심해서 다녀오라며 전송하는 글이다. 「과눌설봉정기상사(寡訥說奉呈奇上舍)」는 기우만이 '과눌(寡訥)' 두 글자를 뽑아 글을 요청하여 쓴 글로 과언(寡言)과 눌언(訥言)의 격언이 실려 있다. 「서증족질석일(書贈族姪錫一)」은 조카 조석일(曺錫一)에게 『 노사집』 중 교훈이 되는 편지 내용 몇 가지를 뽑아서 써준 글이다. 「기몽설(記夢說)」은 기양연이 준 물고기를 연못에 방생했는데, 물고기가 꿈에 나와 서로 대화를 나눈 것을 기록한 글이다. 기문은 「삼석정기(三石亭記)」, 「동오기(東塢記)」, 「청사기(靑舍記)」 3편이 실려 있다. 「삼석정기」는 전북 순창군 복흥면 봉처리 화양(華陽) 마을 근처 신선산(神仙山)에다 기기진이 지었던 정자에 관한 기문이다. 기기진의 자는 원서(元瑞), 호는 삼석(三石)이다. 「동오기(東塢記)」는 스승의 초상을 치르고 귀향하여 마을의 동쪽 언덕 위에 동오정을 짓고서 지은 글이다. 「동오기」 바로 뒤에 경오년(1870, 고종7)에 미리 받아놓은 기정진의 기문 「선사소사기문(先師所賜記文)」이 실려 있다. 조의곤은 동오정에서 후진을 양성하고 학자들과 학문을 강론하였는데 후일 대원군이 현판을 써주기도 하였다. 동오정은 '동오정사'라고도 불렸는데 원래는 고창군 고창읍 석정리에 세워졌다가, 현재는 월산리에 있는데 최근에 옮겨진 것이다. 「청사기(靑舍記)」는 당나라 왕유(王維)의 「송원이사안서(送元二使安西)」의 시구 중 "객사에는 푸릇푸릇 버들 빛 싱그럽네.[客舍靑靑柳色新]"와 은나라 탕왕(湯王)의 「반명(盤銘)」에 "진실로 어느 날 새로워졌거든 나날이 새롭게 하고, 또 날마다 새롭게 하라.[苟日新日日新又日新]"의 '신(新)'을 연관 지어 반성과 수신의 의미를 부여하였다. 발문은 「조씨파보발(曺氏派譜跋)」과 「제외은재가훈시첩후(題畏隱齋家訓詩帖後)」 2편이 실려 있다. 권4 「강산차록(江山箚錄)」은 16세부터 노사 기정진에게 수학하면서 보고 들은 언행과 스승의 가르침, 고사(故事)와 고담(古談) 및 문답과 견문 등을 기록한 글이다. 내용상 네 가지 분류로 구성되어 있는데, 앞 17조까지는 기정진의 교훈과 답술(答述), 이후 28조는 문답 기록, 마지막 8조는 인물들의 시비와 득실에 대한 기록이다. 마지막 대목에서 언급된 인물은 기경연(奇慶衍), 최익현(崔益鉉), 홍시형(洪時衡), 홍만섭(洪萬燮), 기우만, 기양연, 이희석이다. 부록 권1은 제문과 만사로 구성되어 있다. 제문은 조석일(曺錫一), 기우만, 조성주(趙性宙), 기우근(奇宇根), 기경연(奇慶衍), 조홍승(曺洪承), 유윤석(柳允錫), 김준묵(金峻默), 기양연 등이 조의곤을 위해 쓴 제문이 실려 있다. 만사는 유기락(柳基洛), 유광희(柳光熙), 조성가(趙性家), 유지진(柳志晉), 정재규(鄭載圭), 이승환(李升煥), 최숙민(崔琡民)의 글이다. 부록 권2는 아들 조석휴(曺錫休)가 쓴 가장(家狀)과 기우만이 1896년(고종 건양 1)에 쓴 행장, 최익현이 쓴 묘갈명, 조석일(曺錫一)이 1899년(고종 광무 3) 2월에 쓴 발문이 실려 있다. 3. 세부목차 序(奇宇萬 1899) 卷 1 詩 : 新寓東塢以一絶詩寄江上諸友, 謹次三淵金先生四絶韻, 次睡雲亭重修韻, 戊辰冬至陪蘆沙先生留觀庵, 題南庵石泉, 東塢原韻, 春夜宿寒山偶題, 讀書南庵奉別觀庵留奇友晉錫宇蕃, 呈江上奇友晉錫, 四十除夕韻 附先師次韻, 辛未冬自沙上將歸覲爲雪所魔更留一日以詩贈諸益三首, 挽奇友章一宇虁, 次鄕人飮酒韻, 寄謝講會諸生, 奇閔都事致完匪所, 次北山朴丈鍾浩新居韻, 東塢諸景二十五首, 敬次桃核盃韻二首, 安君行五達三十年久要瀛海送別不能無贐以一絶詩奉呈聊寄紵縞之義, 謹次醉山朴丈福林新居, 奇晉士會一宇萬甫以長篇二十六句見贈步韻以寄, 奉次奇司果亮衍一鑑亭蓮池韻三絶, 次張友榮汝鉉三餞春詩, 挽姓名欠攷◎二首, 贈李斯文承鶴, 贈別李友日端升煥, 贈姜斯文馨秀, 挽柳丈桐庵志驥, 挽姜丈春坡寅會, 贈金禹範咸子潤遊山行, 追次丁斯文錦齋夜韻, 挽奇友晉錫, 戱呈族人羽瑞三絶, 謹次蘆沙先生回甲除夕韻, 贈柳甥允錫讀書, 步韻答金生峻黙, 贈讀書諸兒, 戱次月皐松沙次柳河東八十韻, 觀庵奉別李丈鳳燮, 送李慶運啓徵歸耽羅, 挽李上舍最善, 挽蘆沙先生, 庚辰五月十夜夢見故友章一相向而哭覺甚悵然舊懷如新成一絶詩記夢, 戱贈任致九, 挽金君穉奎, 庚辰歲除卽余五十除夕也孤露之生奄又哭寢此往四十時其感懷復如何用朱文公四十五十無聞韻續吟一絶以寓自警, 惺惺翁示以原韻請余賡和忘拙謹步以供一粲, 挽金友仲翼采衡, 辛巳暮春扶寧金君伯存鍾順講會于竺山佛宇歸路見訪以二絶詩示之彈指相別步韻追謝, 鄭友國彦在弼與同門諸友修契于文殊寺次四十除夕詩寄示而繼聞諸友有韻因其韻賡和奉呈聊發一笑, 送崔卿五宗衡歸茂山, 辛巳十二月二十九日先師二祥奄過與同門諸益守歲于月松臨別奉呈南坡李丈僖錫, 次琴書齋韻, 乙酉冬至宿黃龍奇友弘衍家主翁與櫟梅諸翁和杜工部至日韻囑余賡之忘拙走次, 悼安達三行五, 華南老人趙胤秀逢環當歸留與信宿臨別贈言, 次華南詞宗, 丙戌除夕與族人友生守歲于儉巖三從叔炫五第, 丁亥上元夜諸益來會, 挽金丈孝源, 贈齋中讀書二首, 次奇上舍麒鎭遊太白山黃池韻, 三石亭月夜追和李上舍喬應城樓題月, 追次喜懼堂韻, 寄奇上舍麒鎭匪所三首, 次鄭翁八狂詩, 追步奇上舍回甲韻, 沙上耕叟奇亮衍以古琴一與唐人所編譜六烏遺之蓋有意也然余素昧音律雖甚愛之奈手疎何三首, 贈宗人三隱翁, 謹次繼春園朴性弘韻, 戱題雙女, 溪隱翁柳樂淵以詩見贈步韻賡和, 採菊, 觀魚, 持月, 初雪, 題對月軒, 鷲棲彦會, 與月皐趙性家龍岡奇弘衍諸名勝留對月軒, 與月皐龍岡留鷲棲旬浹還到東岡, 自鷲棲抵東岡信宿還別, 挽卞丈文華 卷 2 書 : 上蘆沙先生書二, 與族弟子厚載坤二, 與族人羽瑞尹承, 答宗人都事斗煥, 與柳甥允錫與三答二, 答趙月皐性家, 與李南坡僖錫書, 答李太守東奭書, 上李太守載哲書二, 答安上舍重燮書答一與一, 與金莘湖祿休, 與奇松沙宇萬與六答二, 答奇上舍麒鎭答二與二, 答韓寢郞晉錫答二與一, 與奇沃溝亮衍二, 與安敬浩基舜, 答奇立夫宰, 答宋致遠暎, 答朴元淑升陽四, 與奇之日益얼, 與金文兼相晙, 答李慶運啓徵, 答金在璿基衡二, 與安行五達三, 與金大壽命鉉, 答羅儀伯壽宜, 答李士文奎魯, 與金禹範在錫, 與金仲心在沃, 答李日瑞升煥, 答柳悅卿志普, 答梁子克疇黙, 與金仲翼采衡, 與潭陽田氏刊所, 與鄭正言奎三喪側, 答校會所, 答尹宗檜, 答姓名欠攷, 家狀, 行狀(奇宇萬 撰, 1896년), 墓碣銘幷序(崔益鉉 撰) 跋(曺錫一 18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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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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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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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부

대곡유고(大谷遺稿) 6권 3책 大谷遺稿 大谷遺稿 고서-집부-별집류 교육/문화-문학/저술-문집 문집 표점영인 大谷遺稿 序: 上之三十八年歲次辛丑 序: 上之三十八年歲次辛丑 [1901] 金錫龜 목활자본 『대곡유고(大谷遺稿)』 3 10行22字 註雙行 한자 花口 內向2葉花紋魚尾 전남대학교도서관_불명처2 전남대학교도서관 1901년(광무 5)에 간행한 대곡 김석구(金錫龜, 1835∼1885)의 시문집, 6권 3책(목활자본)이며 김석구의 친족이자 영남의 노사학파 동문인 김현옥 등이 편찬하였다. 『대곡유고(大谷遺稿 』 해제 1. 생애 김석구(金錫龜, 1835∼1885)의 자는 경범(景範)이고, 호는 대곡이며, 본관은 김해이다. 6대조 재록(載祿) 때 남원으로 들어와 자손들이 대대로 그곳에서 살았다. 5대조의 휘는 석빈(碩彬), 고조의 휘는 수채(受彩), 증조의 휘는 정삼(鼎三), 조부의 휘는 재곤(再坤)이다. 부친은 국현(國賢)이며, 모친은 경주김씨로 김창운(金昌雲)의 딸이다. 1835년(헌종 1년) 2월에 전북 남원 세산리(細山里, 현 전북 남원시 송동면 세전리)에서 태어났다. 부친은 김석구의 뜻을 이뤄주기 위해 곡성(谷城)으로 이사하였다가 사문(師門)과 가까운 광주의 대치(大峙) 금곡(金谷 현 전남 담양군 대전면)으로 이거하였다. 이후 김석구는 스스로 호를 대곡이라고 하였다. 김석구의 부인은 경주이씨로, 이광순(李光淳)의 딸이고, 슬하에 아들 항순(恒淳) 하나를 두었다. 10세 전후로 이웃 동네 서당에서 『소학 』을 배웠는데 서당 선생이 옛사람의 행실을 오늘날 사람은 행할 수 없다는 말을 듣고 서당에 나가지 않았다. 아버지가 서당에 나가지 않은 일을 꾸짖자 서당에서 있었던 일을 아버지에게 말씀드렸더니, 아버지는 그가 원대한 일을 할 수 있다고 여기고 고을 내 훌륭한 선생에게 가서 공부하라고 했다. 이후 『맹자 』를 읽고 스스로 맹자가 되기를 기약하였다. 사람들에게 김맹자로 불렸다. 1852년(철종 3) 18세에 도를 구하는 데 뜻을 두고 기정진의 문하에 입문하였다. 이때부터 27년 동안 기정진에게 수학하면서 정재규(鄭載圭, 1843~1911)와 정의림(鄭義林, 1845~1910)과 가장 친하게 지내면서 성리설부터 일상생활의 예법에 이르기까지 연구하고 강론하였다. 1875년(고종 12) 10월 정재규, 정의림과 함께 이일분수(理一分殊)에 대한 기정진의 사상적 정수가 담긴 「납량사의(納凉私議)」를 받아 읽었다. 김석구는 「납량사의」에 대해 질의하여 열 가지 중 아홉은 옳다는 인정을 받을 정도로 기정진의 학문적 신뢰가 두터웠다. 1876년(고종 13) 4월에도 세 사람은 기정진을 찾아가 「태극도설(太極圖說)」과 「납량사의」를 강론하였다. 기정진 사후 1880년(고종 17) 정의림과 함께 기우만(奇宇萬, 1846~1916)에게 『답문류편 』의 간행을 논의하였다. 『답문류편 』은 정재규의 주도로 김현옥(金顯玉)의 교감을 거처 1887년(고종 24) 간행되었다. 그러나 김석구는 『답문류편 』의 간행을 보지 못하고 1885년(고종 22) 8월 8일 51세의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세상을 떠나기 직전 문병을 간 기우만에게 김석구는 모친상을 끝마치지 못하고 스승의 가르침에 부응하지 못한 점이 죄스럽다며 기우만에게는 가학(家學)에 힘쓰라 하고 스승의 도를 계승하라는 말을 정재규와 정의림에게 전해 달라는 유언을 남겼다. 김석구는 과거에 뜻을 두지 않았다. 노사 기정진이 김석구에게 언제 과거시험에 응시할 것이냐고 묻자 김석구는 치국평천하(治國平天下)의 도를 가슴속에 가지고 있지 않기에 과거를 볼 계획을 없다고 답변하였다. 기정진은 빙그레 웃으며 공자가 칠조개(漆雕開)에게 벼슬을 하라고 권했을 때 칠조개가 아직 벼슬을 감당할 자신이 없다고 한 답변과 비슷하다고 하면서 사군자(士君子)가 이러한 뜻이 없어서는 안 된다고 격려하였다. 김석구의 집안은 가난했지만, 부모님과 처자들까지 아무런 불평 없이 청빈한 삶에 만족했다. 기정진의 손자인 기우만이 쓴 김석구의 「행장(行狀)」에 "어떤 사람이 기정진에게 제자 가운데 스승이 될 만한 사람이 누구인가를 물으니, 기정진은 가난하면서도 독서를 좋아하고 조수(操守)가 있다며 김석구를 지칭하였다. 질문한 사람도 반드시 대곡(大谷)이 그런 사람이다."라고 할 정도였다. 최익현(崔益鉉)이 쓴 「대곡유고서」에서 김석구를 '노옹(蘆翁)의 적전(嫡傳)'이라고 극찬하였다. 기정진에게 「납량사의」를 전수 받은 것을 수제자로서의 학술상 위치를 주돈이(周敦頤)에게 「태극도설」을 전수(傳受)한 정명도와 정이천 형제에 비유하였다. 고산서원[현 전남 장성군 진원면 진원리 소재]에 처음에는 배향되지 못하였다. 처음 서원이 개설되면서 진행된 배향 인물 선정과정에서 배향되어야 할 인물 중 한 사람으로 거론되었지만 여러 사정으로 인해 문인 중 6인[이최선, 조의곤, 기우만, 조성가, 김녹휴, 정재규]만 선정되고 김석구와 정의림이 빠지게 되었다. 1983년 7월에 김석구와 정의림이 추배(追配)되어 현재는 8인의 제자가 배향되어 있다. 2. 문집 구성과 내용 『대곡유고(大谷遺稿) 』는 대곡 김석구의 시문집으로 6권 3책의 목활자본이다. 김석구의 친족이자 영남의 노사학파 동문인 김현옥이 김석구가 남긴 글을 모으고, 김석구의 아들 김항순(金恒淳)이 보관하던 유문을 편집하여 친족 김창우(金昌宇), 김창민(金昌珉), 문인 기동노(奇東老), 이학순(李學淳)과 함께 출간하면서 최익현에게 서문을 부탁하였다. 김항순은 최숙민에게 발문을 부탁하였다. 최익현이 서문을, 기우만이 「행장(行狀)」을, 정재규가 「묘지명」을, 정의림이 「전(傳)」을 짓고, 최숙민(崔琡民)이 발문을 찬술한 것으로 보아 그의 학문적 위치를 짐작할 수 있다. 권1은 시(詩)인데 모두 102제 113수가 수록되어 있다. 「우음(偶吟)」부터 「독좌(獨坐)」까지는 오언절구이고, 「상노사선생(上蘆沙先生)」부터 「경차하곡(敬次荷谷)」는 오언율시이다. 「근보기회일정동국연구(謹步奇會一鄭東國聯句)」, 「보월송제우연구(步月松諸友聯句)」는 연구시(聯句詩)이다. 「춘한(春閒)」부터 「우심(憂深)」까지는 칠언절구이고, 「성재여화기한서족형(惺齋餘話寄漢瑞族兄)」부터 마지막 작품 「우득능자(偶得能字)」까지는 칠언절구와 칠언율시가 섞여 있다. 김석구의 시는 제목이 2글자나 3글자~4글자로 짧은 것이 많고, 제목이 같은 시도 상당수 보인다. 내용 면에서 궁핍한 삶을 자족하면서 부족한 자신의 학문에 대한 나태함을 자책하고 면려하거나, 자연경관을 읊조리며 자연 속의 도를 추구하였으며 천리(天理)의 유행을 관조한 시가 많다. 「점운득사자(占韻得斜字)」,「야(夜)」, 「송풍(松風)」, 「즉사(卽事)」, 「청야(淸夜)」 등은 평범한 일상의 풍경에서 천리의 유행을 관조한 시이고, 「부앙(俯仰)」, 「우음(偶吟)」, 「관태허(觀太虛)」 등은 우주의 원리를 설명한 시이다. 「자고(自顧)」, 「자회(自悔)」, 「자탄음(自歎吟)」 등은 자신을 성찰하고 속절없이 흐르는 세월 속에서 진전이 없는 자신의 공부에 대해 반성한 시이다. 「지주(砥柱)」, 「대하(大河)」 등은 물을 보면서 그 가운데 느껴지는 굳건한 절조를 노래하고 있다. 「차정주윤증별(次鄭周允贈別)」, 「차정후윤정계방계합시(次鄭厚允鄭季方契合詩)」, 「차권자후증별(次權子厚贈別)」 「송종인풍오귀제천(送宗人豐五歸堤川)」 등은 정면규(鄭冕圭), 정재규, 권기덕(權基德), 김현옥 등 영남 노사학파 문인과의 교유가 긴밀하였음을 알 수 있는 시이다. 「상노사선생(上蘆沙先生)」 2수, 「탈쇄(脫灑)」 등은 스승 기정진에 관한 시인데 그 중 「탈쇄」라는 시는 김석구에게 특별한 사연이 있다. 스승 기정진에게 학문의 방법에 관해 묻자, 학문하는 방법은 이미 알고 있을 테니 답변할 필요가 없고 다만 '탈쇄'가 매우 어려워 달리 방법이 없으니 다만 스스로 힘쓰는 것밖에 없다고 답해주었다. 김석구의 질의와 기정진의 답변이 『대곡유고 』 권4 「사문문답(師門問答)」에 보인다. 기정진은 「탈쇄설(脫灑說)」을 지어 김석구에게 주었는데, 『노사집(蘆沙集) 』 권16 잡저 「탈쇄설-증김경범(贈金景範)-」이 실려 있다. 권2는 서(書) 49편, 서(序) 5편, 기(記) 2편, 발(跋) 1편, 제문(祭文) 4편으로 구성되어 있다. 서(書)에는 노사 기정진을 비롯하여 이곤수(李崑壽), 민기용, 김한섭(金漢燮), 정시림(鄭時林), 정재규, 정의림, 기우만, 오상봉(吳相鳳), 김한기(金漢驥), 정봉현(鄭鳳鉉), 오우인(吳愚仁), 정면규, 권운환, 진박(陳樸), 정학인(鄭學仁), 심노종(沈魯綜), 권기덕, 권형중(權衡仲), 김현옥, 김국택(金國澤), 김제휴(金濟休), 박준기(朴準基)에게 보낸 편지가 실려 있다. 첫 번째 편지는 스승인 기정진에게 올린 편지 1편과 기정진의 답서(答書)가 부록으로 수록되어 있다. 아마도 두 사람 간의 학문에 대한 문답이 「사문문답(師門問答)」으로 잡저(雜著)에 별도로 실려 있어서 서(書)에서는 1편만 실어놓은 것으로 보인다. 김석구의 편지 내용은 주자가 언급한 '두서(頭緖)'와 '입로(入路)'를 가지고 『성학십도 』의 10도(圖)와 『격몽요결 』의 10장(章)에 대입해 각각 그 의미를 서술하고, 원래 임금과 어린아이로 저술 목적 대상자가 각각 다르지만, 선후와 차례는 크게 다르지 않다는 자신의 견해에 대해 질의하였다. 기정진은 주자가 말한 '두서'와 '입로'의 의미를 설명하고 『성학십도 』나 『격몽요결 』은 시장에서 보물을 찾는 것처럼 막막하여 서로 같지 않다고 답하였다. 다음은 「상이심재(上李心齋)」, 「답이심재(答李心齋)」로, 심재 이곤수(李崑壽)에게 올린 편지 5편이 실려 있다. 첫 번째 편지는 자신의 근황과 어머니의 병환을 전하고 재작년 봄에 아들이 고을의 이씨 집안과 혼인을 했는데 기골은 장대하지만, 공부를 안 해서 걱정이라고 했다. 또 스승 기정진이 세상을 떠난 데에 깊은 애도를 표하였다. 그 밖의 편지에서는 독서 공부를 제대로 하지 못한 자신을 한탄하고 어진 사우(師友)의 도움을 받지 못하는 것에 대해 걱정하는 근황을 전하기도 하였다. 습관과 기질을 변화시키지 못한 자신을 탓하며 성현이 되는 공부에 도달하지 못하였다고 탄식하였다. 예전 김석구가 기정진에게 배운 가르침과 이곤수의 견해를 파악하며 학문에 도움을 청하였다. 이를테면 기정진은 범씨(范氏)의 학설이 주자가 호남(湖南) 제공(諸公)에게 보낸 편지에서 논한 '중화초설(中和初說)'의 의미라는 말을 소개하면서 자신의 견해를 밝히기도 하였다. 이 밖에 호남과 영남의 노사 문인들과 왕래한 편지를 수록하였는데, 강진에 사는 오남(吾南) 김한섭(金漢燮)에게는 부족한 재주로 학문을 궁구하지 못하고 존양(存養)·성찰(省察) 공부를 게을리하고 있으니, 가르침을 달라고 부탁하였다. 「여정월파(與鄭月坡)」 등 정시림에게 보낸 편지가 3편, 「여정일신계방(與鄭日新季方)」 정의림에게 보낸 편지 1편이 실려 있다. 「여정애산(與鄭艾山」 등 정재규에게 보낸 편지가 8편이 실려 있는데, 편지 중 정재규에게 보낸 편지가 가장 많다. 일상생활의 근황과 안부, 스승 기정진 사후 사문(斯文)에 대한 걱정, 또한 정재규가 편찬을 담당하고 있는 『답문류편(答問類編) 』을 비롯하여 스승의 문집 발간에 대한 의견을 주고받거나 성리설과 예학에 대해 문답으로 견해를 밝힌 내용 등이다. 송사 기우만에게 보낸 편지는 「여기송사회일(與寄松沙會一)」 1편이 실려 있는데, 어린 시절 스승 기정진을 뵐 때 남파(南坡) 이희석 어른이 '후생가외(後生可畏)'라고 칭찬해주었던 일화를 회상하면서 어느덧 50세가 된 자신의 현재 모습을 탄식하였다. 그리고 『논어 』 「위령공(衛靈公)」에 "군자로구나, 거백옥(蘧伯玉)이여! 나라에 도가 있으면 벼슬을 하고 나라에 도가 없으면 거두어 감출 수 있겠구나."라는 구절의 주석과 『춘추좌씨전 』 양공(襄公) 14년에 거백옥이 난리가 일어날까 걱정해서 가장 가까운 국경의 관문을 통해 나라를 빠져나갔다는 일화를 대조하여 거백옥의 출처관을 질의하였다. 「답권순경(答權舜卿)」 등 권운환에게 보낸 편지 5편이 실려 있다. 권운환이 자신의 학문을 높인 발언에 대해 부끄럽고 현재 기억력이 너무 감퇴하여 전혀 공부를 못하는 근황을 전하였다. 그리고 공부에 있어 속세의 마음을 떨쳐 버리고, 확고하게 도에 용감하게 나아가기 위해서는 오직 '강(剛)'해야 하는데, 강은 '지경(持敬)' 공부에 달려있다고 강조하였다. 먼저 이를 위한 경(敬) 공부는 마음을 주일(主一)해야 하니, 정자(程子)의 '정제엄숙(整齊嚴肅)' 4글자에 공력을 써야 한다고 하였다. 스승의 상(喪)에 조정에서 제관을 보내어 조문하여 임금의 은혜에 감사하다는 내용, 자신이 병에 걸려 고생하고 있다는 내용, 기우만이 막내 상을 당한 것에 대해 안타까운 심정을 전하기도 하였다. 마지막 실린 편지에는 김석구가 권운환에게 보낸 것으로 성현의 천만 권 책 내용은 모두 자기의 신상(身上)에 관계되기에 진실로 좋아하기를 추환(蒭豢)과 같이 해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추환은 맛있는 고기 음식을 뜻한다. 「답진중문(答陳仲文)」 2편이 실려 있는데, 첫 번째 편지는 진박에게 스승 사후 소상(小祥)이 어느덧 지났건만 슬픔은 갈수록 크다며 자신의 근황을 답하였다. 두 번째 편지는 진박이 자신이 과도하게 칭찬한 것에 대해 곤란하다는 말을 먼저 언급하고 나서 자질이 좋고 나이가 젊은 진박에게 큰 기대를 한다는 것으로 끝을 맺었다. 「답종인산석풍오(答宗人山石豊五)」는 김현옥에게 보낸 답장으로, 먼저 『답문류편 』을 베껴서 보내주어 감사하다는 내용과 제천의 민기용 어른에게 보낸 문록(文錄)이 전달되었다는 소식을 전하였다. 『노사집 』 간행에 대한 것과 자신이 학질이 들어 쇠약해진 상태를 전하고 있다. 이 밖에 정학인(鄭學仁), 심노종(沈魯綜) 등 같은 동문이나 박준기 등의 문인 등에게 보낸 편지가 있는데, 주로 안부를 묻거나 독서를 권면하는 내용이다. 서(序)는 총 5편으로 전송하거나 작별할 때 써준 송서(送序)이다. 첫 번째 「송김추사서(送金秋槎序)」는 영남에서 왔다가 떠나는 김추사(金秋槎)와 작별하면서 써준 글이다. 김추사는 김휘대(金輝大, 1803~1872)로, 본관은 예안(禮安), 자는 성망(聖望)이다. 향산(香山) 이만도(李晩燾, 1842~1910)의 친형인 이만교(李晩嶠)의 장인이다. 김석구는 김휘대를 고인(古人)의 풍모를 지닌 분이라고 칭하였다. 송서 내용 중 천운정(天雲亭)이 나오는데, 경북 영주군 이산면 석포리 안마마을에 있는 시내인 내성천 주위에 김륵(金玏, 1540~1616)이 세운 정자이다. 「송안행오서(送安行五序)」는 제주도에서 바다를 건너 공부하러 온 안행오(安行五)를 전송하며 써준 글이다. 행오는 안달삼(安達三)의 자(字)이다. 「송민장중호서(送閔丈仲浩序)」는 제천으로 가는 민기용에게 써준 글이다. 「봉별명동주인서(奉別明洞主人序)」는 명동주인(明洞主人) 집에서 머물다가 작별하며 써준 글이다. 다음으로 기문(記文)인데 「쌍괴당기(雙槐堂記)」는 쌍괴당(雙槐堂) 국태환(鞠台煥, 1846~1914)을 위해 지은 기문이다. 국태환의 자는 경삼(景三), 본관은 담양(潭陽)이다. 전라북도 완주군(完州郡) 비봉면(飛鳳面)에서 살았다. 회나무의 특성과 쌍괴당 선생이 천성을 잘 보존한 점이 비슷하다는 내용이다. 「호광재기(湖狂齋記)」는 호광자(湖狂子)와 취몽자(醉夢子)의 문답 대화를 설정하여 지은 우화(寓話) 형식의 기문이다. 다음 발문으로는 「서양정기우설후(書兩鄭奇遇說後)」 1편이 있는데, 영남의 정재규와 호남의 정의림이 같은 정(鄭)씨로, 마을 이름도 같은 묵동(墨洞)에서 똑같이 고인(古人)의 학문을 배우겠다고 기정진을 찾아온 사연이 기이하여 기정진이 가상하게 여겼다. 같은 것은 오랜 동문이라는 것밖에 없는 자신이 글을 지어주니 두 사람이 서로 면려하여 지극한 의미를 잊지 말라는 내용이다. 제문은 「제선사노사선생문(祭先師蘆沙先生文)」 3편과 「제김장여문(祭金章汝文)」 1편이 실려 있다. 「제선사노사선생문」은 기정진 사후 스승의 높은 도학과 행실을 마음 깊이 추모하는 제문이다. 그리고 「제김장여문」은 동문으로 선배인 김치희(金致熙)의 죽음을 슬퍼하는 제문이다. 김치희는 호는 애일당(愛日堂)이고, 본관은 광주이며, 거주지는 낙안(樂安)이다. 권3부터 권5까지는 잡저(雜著)이다. 권3은 「자경설(自警說)」이 실려 있다. 「자경설」은 김석구가 36세 때인 1870년(고종 7) 11월 6일에 쓴 글로, 18세부터 고인의 학문에 뜻을 두고 지금까지 십수 년을 공부하였지만 별다른 진척 없이 초심은 거의 사라져 버린 것을 자책하고 새로운 마음으로 공부할 각오를 다지며 쓴 글이다. 학문에 대한 면려, 자신의 처신과 언행, 자신의 마음가짐에 대한 경계하는 내용 외 김석구의 구체적인 학문 태도가 잘 나타나 있다. 그는 기질(氣質)을 변화시키는 것은 수기(修己) 공부에 있으며, 철저히 자기반성하고 그 반성을 통해서 새로운 학문의 경지로 나아갈 것을 언급하였다. 「자경설」은 『자경편(自警篇) 』이라는 이름으로, 대곡 김선생 금곡사(金谷祠) 유허비문 등 부록을 합하여 1988년 3월에 번역문(나갑주 번역)과 함께 발간되기도 하였다. 그만큼 「자경설」은 대곡 김석구의 삶의 자세와 사상을 잘 알려주는 자료이다. 권4는 「사문문답(師門問答)」으로 총 125개 문목(問目)에 대해 기정진이 답한 내용이다. 태극(太極)·동정(動靜)을 비롯하여 이기(理氣), 음양(陰陽), 도기(道器), 인심·도심, 미발과 이발, 인물성동이(人物性同異) 등 성리설을 비롯해서 상례(喪禮)나 제례(祭禮) 등 예학에 걸쳐 많은 내용이 수록되어 있다. 노사 기정진과 대곡 김석구의 성리학을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한 자료이다. 김석구는 노사 기정진의 제자들 가운데 특히 도학(道學)으로 스승의 인정을 받았고, 그가 질의한 성리학 질문들 대부분에 대해 기정진은 그의 정확함을 높이 평가하였다. 대체로 김석구의 성리설에 대한 견해는 기정진의 성리설을 계승하여 발전시킨 것이다. 아래 인용문은 「사문문답(師門問答)」의 맨 처음 대목이다. "(문) 김석구 : 태극이 동(動)하여 양(陽)을 낳고 정(靜)하여 음(陰)을 낳는다고 하니, 태극은 리이고 음양은 기입니다. 기는 동정하지만, 리는 동정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리가 동정이 있으므로 기가 동정이 있는 것이니, 태극에 동정이 있는 것은 천명이 주재한 것입니까? (답) 기정진 : 견해가 정밀하다." 권5는 「지구문답(知舊問答)」과 「사상어록(沙上語錄)」으로 구성되어 있다. 「지구문답」은 정재규, 정의림, 정시림 등 동문 간에 유학 전반에 관해 논한 자료로, 노사학파의 성리학이나 예학 등의 학문적 특성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자료라고 할 수 있다. 정재규와의 심성(心性), 이기(理氣), 상복(喪服)에 관한 논의가 가장 많고, 그다음은 정의림과 정시림 사이에 논한 내용도 수록되어 있다. 「사상어록」의 '사상'은 노사 기정진이 장성 황룡 강변 하사(下沙)에서 살았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인데, 1852년(철종 3) 기정진을 뵙고 수학하기 시작한 때부터 27년 동안 기정진에게서 성리학과 예학 등에 대해 문답하면서 가르침을 받았던 내용을 간략하게 적어 둔 것이다. 권6은 김석구의 글이 아니라 김석구와 관련된 스승과 동문의 글을 모은 것이다. 기정진이 지은 「탈쇄설(脫灑說)」은 제목만 있는데, 그 세주(細註)에 의하면, 『대곡유고 』 4권 13장에 실려 있어 6권에서는 생략했다고 설명하고 있다. 다음으로 기우만이 지은 「대곡기(大谷記)」가 있다. 김석구가 작은 골짜기에 은거하면서 스스로 호를 '대곡(大谷)'이라고 명명하자 그것을 소재로 삼아 지어 준 기문이다. 「정애산답권순경서(鄭艾山答權舜卿書)」는 정재규가 권운환에게 답한 편지로, 김석구의 문집을 편찬하기 위하여 기우만, 김현옥과 협력하자는 내용이다. 다음으로 김석구의 죽음을 애도하는 영․호남의 동문이나 제자들의 만사(挽辭)가 수록되어 있다. 만사를 쓴 인물은 이영수(李暎秀), 류도균(柳道均), 김정규(金正奎), 여봉섭(呂鳳燮), 문인 박준기(朴準基), 이진명(李鎭明), 기우만, 정면규, 정학인(鄭學仁), 정재규, 조용연(趙鏞淵), 정의림, 권기덕, 김현옥, 진박, 권운환, 이진만(李鎭萬), 문인 류인섭(柳寅燮), 문인 이학순 등이다. 다음으로는 기우만의 행장, 정재규의 묘지명, 정의림의 전(傳), 1895년(고종 32) 9월 9일에 쓴 최숙민의 발문, 그리고 맨 마지막에 문집 출간에 노력한 김창우가 1902년(광무 6) 3월에 쓴 글로 구성되어 있다. 3. 세부목차 序 : 崔益鉉 撰, 1901年 卷 1 詩 : 偶吟, 夜 偶吟, 春行, 淸夜, 偶題, 自顧, 占韻得斜字, 松風, 卽 物生, 無事, 雨後, 砥柱, 大河, 自悔四首, 月女, 少年, 悲奎燁, 有客, 送友人奇允左, 次鄭周允贈別, 聽蟬, 歲晏, 有感, 偶吟, 閑中, 悲判錫, 世事, 窮達, 時年三十二見鬢髮白莖, 次鄭厚允鄭季方契合詩, 隨石澗入洞中, 次權子厚贈別, 送宗人豊五四首, 上蘆沙先生, 閒吟, 靜觀, 上蘆沙先生, 冬至, 次何北山王魯齋迷途時, 俯仰, 偶吟, 偶吟, 獨坐, 挽崔上舍, 上心齋李先生, 吾生, 素志,脫灑, 有感, 敬次荷谷, 謹步奇鄭聯句, 步月松提友聯句, 春閒, 淸夜, 聽澗, 霧, 觀太虛, 所業未就, 縣燈, 幽居, 困字吟, 挽李公穉涵, 夜月, 慰寂, 客中逢晬日, 寄族兄漢瑞, 厖髮兒, 太山吟, 春行, 閒與, 憂深, 惺齋餘話寄漢瑞族兄, 我行, 三十書懷, 族生敬善昌宇有詩, 悔字吟, 閒中, 春晩, 暮春對雨, 謹次雙槐李丈壽席韻, 奉和宋友仲平, 閑民, 偶吟四首, 梧村月夜, 題西山精舍,憂深, 梧桐園與諸益吟, 山居, 答朴景有五難韻, 微凉, 感興二首, 無事, 自悟, 新元與諸益共賦, 歲暮吟, 下沙與諸益共賦, 肅字韻, 贈鄭友厚允, 偶得能字 卷 2 書 : 上蘆沙先生, 答閔鳳谷仲浩驥容, 與鄭月坡伯彦時林三, 答鄭日新季方義林, 上李心齋崑壽○五, 答金吾南致容漢燮, 與鄭艾山厚允載圭八, 與寄松沙會一字萬, 答吳止巢相鳳, 與鄭東國鳳鉉, 答鄭周允, 答陳仲文模二, 與沈致敎魯綜三, 答權衡仲, 答族丈觀湖, 答朴景有準墓, 與金樂三漢驥, 與吳愚仁, 答權舜卿雲煥五, 答鄭道麟學仁三, 答權子厚基德, 答宗人山石豊五顯玉, 答族兄漢瑞濟□二 序 : 送金秋槎序, 送安行五序, 送潬西南秀才序, 送閔丈仲浩序, 奉別明湖主人序 記 : 雙槐堂記, 湖狂齋記 跋 : 書兩鄭奇遇說後 祭文 : 祭先師蘆沙先生文三, 祭金章汝文 卷 3 雜著 : 自警篇 卷 4 雜著 : 師門問答 卷 5 雜著 : 知舊問答, 沙上語錄 卷 6 附錄 : 脫灑說, 大谷記, 鄭艾山答權舜卿書, 挽詞, 祭文, 行狀(奇宇萬), 墓誌銘(鄭載圭), 伝(鄭義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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첩관통보류

1903년 남원군수(南原郡守) 전령(傳令) 고문서-첩관통보류-전령 정치/행정-명령-전령 癸卯三月初九日 南原郡守 癸卯三月初九日 南原郡守 南原 全州李氏門中 전북 남원시 4.0*4.0 5개(적색, 정방형), 2.5*2.5 1개(적색, 정방형) 남원 보절 전주이씨가 남원 보절 전주이씨가 1903년 3월 9일에 남원군수(南原郡守)가 보낸 전령(傳令)이다. 1903년 3월 9일에 남원군수(南原郡守)의 전령(傳令)이다. 본방(本房)의 전 주사(主事) 이원창(李元暢)은 선원(璿源)의 화벌(華閥)로 선대에 높은 벼슬을 지냈고, 문민(文愍) 이정숙(李正叔), 용산(龍山) 이도(李燾), 낙재(樂齋) 이여재(李如梓)는 서원에 배향되었으며, 3공은 조정에서 포양(褒揚)하여 정려해 주었고, 그의 부친 교관공(敎官公)은 증직되었다. 그런데 평민처럼 잡역을 지게 되었으니 각종 연호(煙戶) 잡역(雜役)을 모두 침범치 말라는 전령이다. 문서에 작성연대가 계묘년으로만 나오지만, 남원의 수령이 현감이 아니라 군수로 나오는 것으로 미루어 1903년으로 추정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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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두섭(安斗燮) 만사(輓詞) 고문서-서간통고류-서간 개인-생활-서간 安斗燮 安斗燮 전북 남원시 남원 보절 전주이씨가 남원 보절 전주이씨가 죽계(竹溪) 안두섭(安斗燮)이 지은 만사(輓詞) 죽계(竹溪) 안두섭(安斗燮)이 지은 만사(輓詞)이다. 효성(孝誠)이 지극하여 향리(鄕里)에서 오복(五福)을 누린 인물로 칭송을 받은 고인을 추모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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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현대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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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약서

1921년 강성무(姜性武) 계약서(契約書) 고문서-명문문기류-계약서 경제-매매/교역-계약서 大正十年 姜性武 大正十年 姜性武 전북 남원시 [印] 3개 1.2*0.8 3개(적색, 타원형) 남원 보절 전주이씨가 남원 보절 전주이씨가 1921년 3월 18일에 강성무(姜性武)가 작성한 계약서(契約書) 1921년 3월 18일에 강성무(姜性武)가 작성한 계약서(契約書)이다. 계약 상대방은 정면하(鄭勉夏)였다. 강성무가 본 계약서를 작성한 이유는 그가 정면하에게 지급해야 하는 경신년(庚申年)의 이자 5두(斗)와 올해, 즉 1921년의 이자 7두 문제를 정확히 해 두기 위해서였다. 경신년은 작년(昨年), 그러니까 1920년이다. 여기에다가 강성무는 또 정면하로부터 13두를 차용하였다. 그리하여 전체는 미(米) 1석(石)이 되었는데, 이 1석을 금년 가을 추수 후에 갚는다는 취지로 본 계약서를 작성하게 된 것이다. 1석에 대한 이자는 4리로 한다고 하였는데, 4리라면 4승(升)이 되는 듯하다. 하지만 매월 그렇게 계산한다는 말인지 아니면 본 계약서를 작성하는 시점부터 가을 추수 후까지의 전체 이자가 그렇다는 말인지는 분명치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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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천(石川) 윤모(尹某) 서간(書簡) 고문서-서간통고류-서간 개인-생활-서간 尹石川老兄 尹 전북 남원시 남원 보절 전주이씨가 남원 보절 전주이씨가 석천(石川) 윤모(尹某)가 보낸 간찰. 석천(石川) 윤모(尹某)가 보낸 간찰이다. 갑자기 상대방의 편지가 오니 깊은 산방(山房)에서 얼마나 감사했겠느냐고 하였다. 고명(高明)한 상대방의 허자(虛字)의 묘(妙)에 영탄하였다며 어리석은 자신은 청량산(淸凉散)을 먹은 듯하다고 하였다. 살구꽃 피는 계절에 춘주(春酒)로 서로 즐기자고 하였으며 자신을 노형(老兄)이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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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현대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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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약서

1920년 박경칠(朴京七) 계약서(契約書) 고문서-명문문기류-계약서 경제-매매/교역-계약서 庚申 契約主 朴京七 庚申 朴京七 전북 남원시 [印] 1.3*0.8 3개(적색, 타원형) 남원 보절 전주이씨가 남원 보절 전주이씨가 1920년 음력 12월 27일에 박경칠(朴京七)이 작성한 계약서(契約書) 1920년 음력 12월 27일, 박경칠(朴京七)이 작성한 계약서(契約書)이다. 이전에 빌린 돈 60원을 농우(農牛)를 팔아서라도 갚아야 하나 형편 상 도저히 그렇지 못하고, 다음 해 1월 안으로 갚기로 하겠다는 내용이다. "농우를 팔아서라도"라고 한 말에서 당시 박경칠의 처지가 어떠하였는지를 짐작할 수 있을 것 같다. 박경칠은 자신이 이번 약속, 그러니까 내년 1월 안으로 돈을 갚지 못하면 농우를 팔아서 그 돈을 갚겠다는 약속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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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일 신묘 十日 辛卯 맑음. 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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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일 임진 十一日 壬辰 흐리다가 눈이 왔다. 陰而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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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일 을미 十四日 乙未 맑음. 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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