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85년 충훈부호남소청(忠勳府湖南疏廳) 통문(通文) 고문서-서간통고류-통문 忠勳府 湖南疏廳 古阜鄕校 1顆(墨印, 7.2×6.0) 광주 민종기 (재)한국학호남진흥원 HIKS_OD_F4006-01-232989 1885년 7월 충훈부 호남소청 창평 진사 박중희와 남원 고종주 등 전라도 열 아홉 지역 19인이 고부향교에 널리 공의를 모아서 장은필의 실행과 실효에 대해 다시 관에 아뢰어 순찰사에게 전보하고 임금께 계달하게 하여 이 뛰어난 효성이 사라지는 일이 없도록 포상의 은전을 입게 해 줄 것을 촉구한 통문 1885년(고종 22) 7월 충훈부 호남소청 창평 진사 박중희(朴仲熙)·남원 고종주(高宗柱) 등 전라도 열 아홉 지역 19인이 고부향교(古阜鄕校)에 널리 공의를 모아서 장은필의 실행(實行)과 실효(實孝)에 대해 다시 관에 아뢰어 순찰사에게 전보(轉報)하고 임금께 계달(啓達)하게 하여 이 뛰어난 효성이 사라지는 일이 없도록 포상(褒賞)의 은전을 입게 해 줄 것을 촉구한 통문이다. 교화를 세우고, 그 마을에 표하는 것은 하·은·주 때부터 이미 해왔던 일인데 하물며 지금 우리 나라 사람 중 타고난 효성과 뛰어난 행실로 고을에 천거되어 드러난 자가 있으니 사림이 일제히 포상해야 한다는 뜻을 드러냈다. 호남소청이 듣기로는 전라도 고부군에 사는 선비 정은필은 동래(東萊)에서 계출(系出)한 즉 이조판서로 임금께 하사받은 호 풍천(楓川) 수홍(守弘)의 후예로, 어렸을 때부터 품성이 순후(純厚)하여 일찍 가훈을 계승했다. 부모를 효성으로 섬겨 아침저녁으로 안부를 살피고, 부모의 뜻과 의식(衣食)을 봉양함에 정성을 다하였다. 부모상을 당하여서는 장례 절차와 곡하며 우는 애통함을 모두 『가례』를 따라 3년상을 마쳤다. 어진 명성이 전해진 곳에 곧 인리(仁里)를 이루니, 행인들이 그 동네를 가리켜 효자동(孝子洞)이라 하고, 사는 사람들이 그 문을 가리켜 효자문(孝子門)이라고 하였다. 이때문에 호남소청은 그가 타고난 순수한 효성이 아니라면 이 경지에 이를 수 없다고 여겼으며, 그와 한 지역에 살고 있어 이미 그의 실적을 귀에 익숙하게 듣고서 매우 감탄하며 존경하였다. 호남소청에서 지금 문헌공(文憲公) 고봉(高峯) 기대승(奇大升, 1527~1572), 문효공(文孝公) 옥계(玉溪) 노진(盧禛, 1518~1578), 문충공(文忠公) 사암(思菴) 박순(朴淳, 1523~1589), 문절공(文節公) 미암(眉巖) 유희춘(柳希春, 1513~1577), 문경공(文敬公) 일재(一齋) 이항(李恒, 1499~1576) 등 다섯 선생을 문묘에 배향할 것을 복합상소(伏閤上疏)하는 일로 모두 모였는데 이 일에 공의(公議)가 일제히 일어나 고부향교에 통문을 보내, 고부향교에서 널리 공의를 모아서 장은필의 실행(實行)과 실효(實孝)에 대해 다시 관에 아뢰어 순찰사에게 전보(轉報)하고 임금께 계달(啓達)하게 하여 이 뛰어난 효성이 사라지는 일이 없도록 포상(褒賞)의 은전을 입게 해 준다면 매우 다행이라는 뜻을 알렸다. 충훈부 호남소청 열 아홉 지역은 창평, 남원, 김제, 전주, 나주, 광주, 보성, 영광, 흥덕, 부안, 태인, 금구, 장성, 익산, 용담, 장수, 고산, 임실, 고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