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2년 류영의(柳永毅) 간찰(簡札) 고문서-서간통고류-서간 개인-생활-서간 壬午舊二月二十二日 族從 柳永毅 壬午舊二月二十二日 柳永毅 고흥 고흥류씨 류탁 후손가 (재)한국학호남진흥원 1942년 2월 22일에 族從 柳永毅가 족보 간행과 관련하여 집안 사람에게 보낸 간찰 1942년 2월 22일에 族從 柳永毅가 족보 간행과 관련하여 집안 사람에게 보낸 간찰이다. 이 편지는 수신자가 쓰여 있지 않아 알 수 없으나 연결문서인 편지봉투 겉면에 '高興郡 虎東里 柳野山丈 靜座'라도 쓰여 있어 柳重憲에게 보낸 것으로 짐작되나 정확하지는 않다. 野山은 류중헌(1873~1952)의 자이다. 삼가 꽃 피고 따뜻한 때에 체후가 萬旺하신지 안부를 묻고, 자신은 예전과 같이 그럭저럭 지낸다고 하였다. 이어서 譜事가 멈추었다고 하니 우리 가문의 큰 다행이라고 하면서 遺墟碑文 改草事는 고치면 고치고 멈추면 멈출 뿐 어찌 먼 길 왕래가 장애가 되겠느냐고 하고, 근로자는 德根과 晟인데 이 무슨 의리냐고 하였다. 다만 碑文을 쓴 錦城에 사는 石範이 文化인지 알지 못하고 泂舍人이 있으니 같은 이름으로 잘못 보고, 舍人을 기록하였다는데 자신은 믿지 않고 집으로 돌아왔고, 그 다음날 석범이 門老 某씨를 찾아가서 또 이 일을 門老에게 請하니 半許하며 永毅가 쓴 것은 그것을 보고 쓴 것이 아니다라고 말하였으며, 석범을 다시 찾아가 그에게 물으니 門老가 이러이러 改書를 청했다라고 하였다는 말을 전하였다. 자신은 다 믿을 수 없고, 석범이 自意로 오직 去揚里 永華씨와 함께 合謀하여 그런 것이며, 마침 가서 보니 곁에 도끼가 있어 즉시 碑面을 다듬고 그 이후에 자신에게 영화씨가 埋碑를 請하였다고 하니 영화씨가 시일을 미루고 여러 해동안 정하지 못했으므로 그런 것이니 이 잘못이 어디에 있습니까라고 한탄하였으며, 자신이 고향을 떠나 있던 중 鄕中 미담으로 이 일에 대해 물으면 사람들을 향해 얼굴을 들 수가 없었다고 하였다. 또 碑面에 그 文을 쓴 사람을 2명의 이름을 쓰는 것이 됩니까? 안됩니까? 묻고, 발간된 것에 자신의 이름이 빠졌는데 의논하지도 않고 간행하지 않았으며 다시 한마디도 없이 그것을 새기니 이 무슨 곡절이냐고 책망하였다. 그 時事를 믿을 수 없는 까닭으로 錦城 石範에게 물어보는 것이 어떠하겠냐고 하면서 碑文 拔去는 回示하여 주시기를 바란다고 하였다. 마지막에 추신으로 만약 拔去하지 않았다면 高興 五派는 1질의 책도 받지 않을 것이라고 강력한 의지를 표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