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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3) 書(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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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주윤【황규】에게 보냄 與鄭周允[冕圭] 봄철 무렵에 계남옹(溪南翁)1)의 아들과 조카가 찾아왔었지만 빨리 떠나는 바람에 문안 편지를 갖추지 못하였습니다. 뒤이어 소식을 모르는 채 1년이 지났습니다. 형의 체후는 동정이 어떠신지요? 곤괘(困卦)의 올바름2)과 비괘(否卦)의 형통함3)이 반드시 숨어 있다가 밝게 드러나) 스스로 위안을 얻을 수 있었으리라고 생각됩니다. 멀리서 우러러 흠모하는 마음 간절하기 그지없습니다. 아우는 쌓인 죄로 재앙이 남아 있어 이러한 불행을 만났으니 비통하고 부끄러워 차라리 죽고 싶은 심정입니다. 다만 아비 없는 어리고 연약한 두 손자가 눈앞에서 뛰놀고 재잘거리는 것으로 그럭저럭 근심을 잊고 있을 뿐입니다. 평소에 뜻했던 학업은 어물어물하다가 성취를 거두지 못하였고 조물주는 너그럽게 대하지 않아 늙을수록 더욱 기구하니 다시 어찌 여력(餘力)을 수습하여 보잘것없는 노년의 공효(功效)마저 기대할 수 있겠습니까. 동쪽으로 정운(停雲)4)을 바라보면 매번 형에게 달려가 하소연하고 싶지만 그러지를 못합니다. 세상은 상황이 날이 갈수록 심해지고 있으니 끝내 어디에 이르게 될지 예측할 수가 없습니다. 모름지기 시의(時義)에 맞는 거취에 대해서 아끼지 말고 제게 대략이나마 알려 주시면 어떻겠습니까. 春間。溪南翁子若姪之過。綠於速發。未修一字候儀。繼而漠然。寒暑改易。謹請兄體動止何若。困之貞。否之亨。想必有潛昭闇章。而可以自慰者。遠外馳仰。不任憧憧。弟積罪餘殃。遭此禍故悲霣慚作。寧欲溘然。只有藐孤兩孫。趨喏眼前。聊以自遣耳。平生志業。因循未就。而造物不貸。老益崎險。更安能策理餘力。以效葉楡萬一之收耶。東望停雲。每欲趨訴。而不可得也。時象風邑。日甚一日。畢竟稅泊有不可以預算。望須以時義去就。不惜槪及如何。 계남옹(溪南翁) 최숙문(崔琡民, 1837∼1905)의 호이다.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원칙(元則), 치장(稺章)이다. 기정진에게 수학하였고 저서로는 《계남집》이 있다. 곤괘(困卦)의 올바름 《주역(周易)》 곤괘(困卦) 괘사(卦辭)에, "곤괘는 형통하고 바르니 대인이기 때문에 길하고 허물이 없다."라고 하였다. 비괘(否卦)의 형통함 《주역》 비괘(否卦) 육이(六二)의 효사(爻辭)에 "육이는 품고 있는 것이 순히 받드는 것이니, 소인은 길하고 대인은 비색하여야 형통한다."라고 하였다. 정운(停雲) 도연명(陶淵明)이 친우를 생각하며 지은 〈정운(停雲)〉에 "뭉게뭉게 제자리에 서 있는 구름이요, 부슬부슬 제때에 내리는 비라.【靄靄停雲, 濛濛時雨.】"라는 말이 보인다. 《陶淵明集 卷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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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덕경【달환】에게 답함 答文德卿【達煥】 세상에 얽매였던 곳을 떠나 고요한 곳으로 나아가니 새로 마련한 집터가 한가롭고 자유스럽습니다. 더구나 가을을 틈타 서늘한 바람을 맞으며 오랜 세월 사귄 친구의 얼굴을 함께 대하였으니 위안이 되고 마음이 놓이는 것이 어떠하겠습니까. 돌아온 이래 벌써 두 달이 지났습니다. 형의 체후는 어떠신지 모르겠습니다. 부모님 또한 평온하신지요? 매양 소식을 듣고 싶은 마음이 절실합니다. 아우는 병세가 날로 심해져 바로 서산(西山)에 지는 해와 같으니 가련합니다. 아, 남은 날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참으로 마땅히 부지런히 노력하여 죽기 전에 좁은 소견이라도 얻기를 바라는 것이 어찌 지극한 소원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처지와 형편이 이와 같은 데다가 또다시 쓸쓸하고 적막하여 답답하고 의지할 곳도 없으니 어떠하겠습니까. 매양 세상일은 전부 쓸어버리고 형처럼 학식이 뛰어나고 견문이 넓은 또래들과 차분하게 서로 보고자 하지만 그렇게 할 수 없었습니다. 조물주가 평생에 걸쳐 곤궁했던 처지를 불쌍히 여기고 특별히 만년에 여지를 갖게 해주려는지 모르겠습니다. 우습습니다. 악(惡) 역시 이(理)가 주재(主宰)합니다. 이것이 저의 본의는 아니지만 자세히 말하자면 역시 얘기할만한 곡절(曲折)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발(發)하여 곧게 이루어진 것은 분명히 이(理)가 주재한 것이고 곧게 이루어지지 않은 것은 기(氣)가 이겼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위선(爲善)과 위악(爲惡)'의 분명한 경계입니다. 참으로 용납할 수 있는 다른 평설(評說)이 없습니다. 그러나 이(理)라는 것은 본래 사물을 주재하되 그렇지 않은 때가 없는 것입니다. 만약 위쪽의 반은 이가 주재하고 아래쪽의 반은 기가 주재한다면 그렇지 않은 때가 없다는 것이 어떻게 성립할 수 있겠습니까. 비유하자면, 물이 아래로 흐르는 것은 분명 이의 본연(本然)이지만 튀겨서 이마 위로 올라가게 하고 힘을 가하여 산에 있도록 하는 것을 본연이라고 하는 것은 옳지 못하며 또한 사리와 형세가 그렇게 되도록 한 것이 아니라고 할 수 없습니다. 맹자(孟子)는 작은 나라가 큰 나라에게 부림을 받고 약한 자가 강한 자에게 부림을 받는 것을 모두 하늘의 이치라고 보았고,5) 주자(朱子)는 기화의 성쇠와 인사의 치란을 상리(常理)라고 하였으니6) 이를 통해 살펴볼 수 있습니다. 하물며 선을 따르면 길하고 악을 따르면 흉하며,7) 천리를 따르면 여유가 있고 인욕을 따르면 위태로우니8) 이(理)가 주재하지 않는 경우가 없습니다. 이것은 이(理)에 나아가 깊이 탐구하여 말한 것입니다. 위의 한 조목과 각각 하나의 의미가 되기에 문제가 없습니다.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謝繫就靜。新寓蕭散。矧且乘秋溯涼。共對知舊積年之面。其慰豁之情。爲何如哉。歸來。月已再弦矣。未審兄體何如。惟憂亦平和否。每切願聞。弟病情日深。正是下山之日。可憐。嗚呼餘日幾何。固宜汲汲勉力。企得一管之見於未死之前。豈非至願。而身事如此。又復落落離索。無聊無賴。奈何。每欲掃却外事。與如兄年輩老宿之人。爲從容相觀計。而不可得。未知造物矜其平生蹇滯。而特許其晩年一副餘地耶。可呵。惡亦理爲之主宰。此非鄙之本意。而究言之。亦不無曲折可言處。發而直遂。固理之爲主。而其不直遂者。爲氣所勝故也。此是爲善爲惡八字界至也。固無他說之可容更評。然理者。是合下主宰物事而無時不然者也。今以上一半。理爲之主。下一半。氣爲之主。則烏在其無時不然者乎。比之水潤下。固理之本然。而其搏之以過顙。激之以在山。謂之本然則不可。而亦不可謂非理勢之使然也。孟子以小役大弱役强。同謂之天。朱子以氣化盛衰。人事治亂。謂理之常。此可考也。況惠迪吉。從逆凶。順理則裕。從欲惟危無非理爲之主也。此是就理上深探而究言之者也。與上一條自不妨各爲一義。如何如何。 맹자(孟子)는……보았고 《맹자》 〈이루 상〉에 "천하에 도가 있을 때에는 소덕(小德)이 대덕(大德)에게 부림을 당하고 소현(小賢)이 대현(大賢)에게 부림을 당하며, 천하에 도가 없을 때에는 나라가 작은 자가 나라가 큰 자에게 부림을 당하고 약자가 강자에게 부림을 당한다. 이 두 가지는 하늘(이치와 형세)이니, 하늘을 순종하는 자는 보존되고 하늘을 거스르는 자는 망한다."라고 하였다. 주자(朱子)는……하였으니 《맹자집주》 〈등문공 하(滕文公下)〉 제9장의 "천하에 사람이 살아온 지가 오래되었는데, 한 번 다스려지고 한 번 어지러웠다.【天下之生久矣, 一治一亂.】"라는 구절에 대한 주희(朱熹)의 주에, "한 번 다스려지고 한 번 어지러웠다는 것은 기화의 성쇠와 인사의 득실이 반복하여 서로 찾아오는 것이니, 이치의 떳떳함이다.【一治一亂, 氣化盛衰ㆍ人事得失, 反覆相尋, 理之常也.】"라는 내용이 보인다. 선을……흉하며 《서경》 〈대우모(大禹謨)〉의 "선을 따르면 길하고 악을 따르면 흉하다."라는 구절을 인용한 것이다. 천리를……위태로우니 정이(程頤)가 지은 〈사물잠(四勿箴)〉 가운데 동잠(動箴)에 '철인은 기미를 알아 생각할 때에 성실히 하고, 지사는 행실을 힘써 행함에 지조를 지킨다. 천리를 따르면 여유가 있고 인욕을 따르면 위험하니, 창졸간에도 능히 생각해서 전전긍긍하여 스스로 잡아 지키도록 하라. 습관이 성(性)과 더불어 이루어지면 성현과 함께 돌아가리라.【其動箴曰, 哲人知幾, 誠之於思, 志士勵行, 守之於爲. 順理則裕, 從欲惟危, 造次克念, 戰兢自持. 習與性成, 聖賢同歸.】"라고 한 내용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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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익중【봉환】에게 답함 答文翊中【鳳煥】 편지에서 하신 말씀은 잘 알겠습니다. 어리석은 사람이 생각하기에 이 회합(會合)을 마련하는 것은 한편으로는 강학(講學)을 위한 것이고 한편으로는 예를 익히기 위한 것입니다. 회원(會員)들의 마음이 모두가 성의에서 나올 수는 없다고 하더라도 그 뜻이 참으로 선(善)하고 그 거조(擧措)가 참으로 좋습니다. 마음이 정성스럽지 못하면 더욱 정성을 다하도록 권면하고 행동에 실효(實效)가 없으면 더욱 그 효과를 독려하여 바로잡고 경계하며 벗끼리 서로 연마하고 바로잡아 주어 거리낌 없이 멋대로 행동하는 데 이르지 않게 하면 됩니다. 고인(古人)이 이르기를, "명예를 좋아한다는 혐의를 피하면 선을 행할 길이 없다."9)라고 하였습니다. 어찌 명예를 좋아한다는 혐의 때문에 마땅히 해야 할 일까지 아울러 그만두겠습니까. 아우가 생각하기에도 예를 익히는 일은 의절이 매우 광대하여 갖가지 어려움이 있기 때문에 우선은 중지하였습니다. 강규(講規)는 학자들의 일상적인 일이기 때문에 여러 형에게 고하여 수일 동안 강규를 하려고 합니다. 지금 만약 강규에 관한 일까지 아울러 그만둔다면 한바탕 질펀하게 먹고 마시는 회합이 되지 않겠습니까. 만약 형의 말씀대로 10년에 한 번 행하고 5년에 한 번 행한다면 형세상 반드시 날이 갈수록 해이해지고 몇 년이 지나지 않아 자취도 없이 사라질 것입니다. 한서(漢瑞) 등 여러 벗과 충분히 상의하여 좋은 쪽으로 결론을 내기 바랍니다. 중양절(重陽節)을 맞아 술잔에 국화를 띄우는 일은 실로 듣기를 바라던 일입니다. 다만 이 몸이 그때에는 어느 곳에 있는 사람일지를 모를 뿐입니다. 示喩謹悉。以愚思之。此會之設。一則講業也。一則習禮也。會員之心。雖不能皆出於誠。而其意則固善。其擧則固好。心有不誠。則益勉其誠。行無實效。則益責其效。規警切磨。俾不至於漫浪之爲可也。古人曰避好名之嫌。則無爲善之路。夫豈以好名之嫌。而竝廢其所當爲者哉。弟意亦以爲習禮一事。其儀浩大。有難種種。故姑爲停止。至於講規。則此是學者日用平常事。故告于僉兄擬爲數日之計矣。今若竝與講規一事而廢之。則其不爲一場酒食流連之會耶。若依兄敎。十年一行。五年一行。則其勢必日涉頹弛。不過幾年。蕩然無有。願與漢瑞諸友爛商歸好也。重陽泛菊。實所願聞。但未知此身其時作何處人耳。 명예를……없다 송(宋)나라 때 범순인(范純仁)이 한 말이다. 범순인이 일찍이 간신 장돈(章惇)의 비위에 거슬려 영주(永州)로 폄출되었는데, 그 당시 눈병을 앓아 완전히 실명한 상태였다. 그런데도 그는 폄출 명령을 받고 기꺼운 표정으로 길에 올랐는데, 어떤 이가 명성을 가까이하는 짓이라고 하자, 이를 듣고 탄식하며 말하기를 "칠십의 나이에 두 눈이 모두 멀었으니, 만 리 길을 떠나는 것이 어찌 원하는 것이겠는가. 다만 임금을 사랑하는 구구한 나의 마음이 다하지 않아서일 따름이다. 만약 명성을 좋아한다는 혐의를 피하고자 한다면 선을 행할 길이 없을 것이다.【七十之年, 兩目俱喪, 萬里之行, 豈其欲哉? 但區區之愛君, 有懐不盡. 若避好名之嫌, 則無爲善之路矣.】"라고 하였다. 《宋史 卷314 范純仁列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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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갈명 墓碣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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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의위 연정 이공 묘지명 忠義衛蓮汀李公墓碣銘 공의 성은 이씨(李氏), 휘는 상후(相厚)193), 자는 성징(聖徵), 호는 연정(蓮汀)이다. 시호 양평공(襄平公) 휘 원계(元桂)인 완풍군(完豊君)의 후손이다. 양평공은 완산군(完山君)을 낳았으니, 시호는 양도공(襄度公), 휘는 천우(天祐)이다. 양도공은 여양군(驪陽君) 휘 굉(宏)을, 여양군은 월성군(月城君) 휘 명인(明仁)을, 월성군은 부사맹(副司猛) 휘 효상(孝常)을, 부사맹은 부사과(副司果) 휘 세원(世元)을, 부사과는 사마(司馬) 휘 학(鶴)을, 사마는 진사 휘 응종(應鍾)을, 진사는 휘 극조(克操)를, 극조는 충의위(忠義衛) 휘 전(腆)194)을 낳았다. 이분은 강수은 선생(姜睡隱先生)의 문인으로, 문학과 의로운 행의로 세상에서 추중을 받았으니 바로 공의 증조부이다. 조부는 충의위(忠義衛) 휘 형진(亨震)으로 집안의 가르침을 받아 문학과 행실로 이름이 났다. 부친은 휘 옹(滃)195)이니, 충의위이다. 모친은 장택 고씨(長澤高氏)로, 부회(傅誨)의 따님이다. 생부(生父)는 휘 집(濈)이며, 생모는 영광 정씨(靈光丁氏) 도(燾)의 따님으로, 숙묘(肅廟) 을묘년(1675, 숙종1) 1월 11일에 영광(靈光) 묘장리(畝長里)에서 공을 낳았다.기우(氣宇)가 의젓하며 재능과 성품이 남보다 뛰어났다. 일찍 아버지를 여의였기에 따라가려고 해도 미치지 못하는 슬픔을 깊이 가슴에 간직하여 아침저녁으로 사당에 참배하고 삭망(朔望)에는 산소를 참배하였는데 비바람이 치든 춥든 덥든 폐한 적이 없었다. 해마다 기일이 되고 봄가을 우로(雨露)가 내리면 애통하고 서글픈 마음에 마치 부친이 살아계신 듯한 정성을 다하였다. 지극한 효성으로 어머니를 섬겼는데 고기 잡고 나무하고 변변치 않은 음식이나마 정성을 다해 봉양하여 기쁘게 해드렸으며 공경하는 마음으로 삼가고 조심하였다. 평소 의관을 반드시 단정히 하고 용모를 반드시 삼갔는데 엄숙하고 숙연하여 보는 사람들이 공경하는 마음을 일으켰다. 사람을 대할 적에는 너그럽고 간이(簡易)하여 준엄하거나 기이한 행실이 있는 것을 보지 못했다. 그러나 의리와 시비의 근원에 대해서는 또 주저하거나 사정을 봐주는 일이 있지 않았다. 여러 경서에 통달하고 제자백가에 박식하여 체득하고 실천하며 발휘하고 확충하였다. 세상의 변화와 시상(時象)에 대해서는 그윽하고 깊으며 은미하고 소홀한 곳에 통달하지 않음이 없었지만 마치 모르는 듯이 항상 침묵을 지켰다. 찾아와 묻는 사람이 있으면 번번이 말하기를 "한쪽으로 치우친 지각은 곤충도 오히려 잘할 수 있으니, 이 어찌 귀할 것이 있겠는가. 성인은 먼저 아는 것을 지혜로 삼지 않고 사람이 지켜야 할 도리에 힘쓰는 것을 지혜로 삼았다."라고 하였다. 관직은 충의위(忠義衛)를 지냈으니 이는 선대의 음덕(蔭德)으로 인한 것이다. 어느 해 12월 29일에 졸하였다. 능주(綾州)의 남쪽의 한 방리(坊里) 연화봉(蓮花峯) 부간좌(負艮坐)의 언덕에 장사 지냈다. 배위(配位)는 이천 서씨(利川徐氏)로, 응상(應祥)의 따님이다. 묘소는 남평(南平) 철천(鐵川) 갑좌(甲坐)에 있다. 계비(繼妣)는 무송 유씨(茂松庾氏)로, 석량(碩良)의 따님이다. 묘소는 건위(乾位) 아래에 합장하였다. 후사가 없어 종부제(從父弟) 상회(相檜)의 아들 일훈(一薰)196)을 양자로 삼았고, 딸은 풍산(豊山) 홍찬동(洪贊東)에게 출가하였다.아, 공은 왕실 계통의 훌륭한 가문으로 문망(門望)과 명성은 세상에 자랑할 만하고 문학과 재능은 당시에 주선(周旋)할 수 있었으니, 전국 시대의 공자 가운데 제(齊)나라의 전문(田文), 조(趙)나라 조승(趙勝)197)과 같다고 하더라도 누가 불가하다고 하겠는가. 하지만 도리어 남쪽 변방의 적막한 물가에 광채를 감추고 자취를 거두어, 온포(縕袍)로 패옥(珮玉)을 대신하고 단출한 음식을 진수성찬처럼 여겨 아득히 초야에 은둔하며 한가로이 지내다가 생을 마감하였으니, 그 훌륭한 기품과 뛰어난 흥취는 먼 후대에도 옷깃을 여미게 할 것이다. 그 재주가 이처럼 높지만 덕으로써 거느리고, 그 지혜가 이처럼 밝지만 어리석음으로 지켰다. 사람이 지켜야 할 도리를 힘쓰는 것을 지혜로 삼고 먼저 아는 술수를 귀함으로 여기지 않았으니, 그 바른 학문은 속일 수 없을 것이다. 세상 사람들은 말단적인 참위(讖緯)나 술수(術數)에 분주하지만 스스로 터득한 자는 경계할 줄을 알 것이다.묘소에 오래도록 묘표가 없었는데, 6대손 이기백(李琪白)이 종친들과 도모하여 돌을 깎아 비석을 세우려 하면서 후면에 새길 글을 청하였다. 내가 감히 합당한 사람이 아니라고 사양하지 못하였다. 다음과 같이 명을 짓는다.하늘이 밝은 운수를 열어 天啓煕運천명이 이어지네. 寶籙綿綿공의 아들과 손자 公子公孫후손이 많고 많네. 冑支兟兟묘장리에 은거하여 畝長菟裘세상 위한 도모 빛났네. 世猷赫然고상하게 멀리 떠났으니 高尙遐擧밝은 시대 일민이었네. 昭代逸民연화산이 어디인가 蓮花何山해마다 봄풀이 자라네. 春草年年아, 너희 초동, 목동들아 嗟爾樵牧베지도 자르지도 말라. 勿蒸勿薪 公姓李。諱相垕。字聖徵。號蓮汀。完豊君諡襄平公諱元桂之後也。襄平生完山君諡襄度公諱天祐。襄度生驪陽君諱宏。驪陽生月城君諱明仁。月城生副司猛諱孝常。司猛生副司果諱世元。司果生司馬諱鶴。司馬生進士諱應鍾。進士生諱克操。克操生忠義衛諱㙉。以姜睡隱先生門人。文學行義。爲世推重。卽公之曾祖也。祖諱亨震忠義衛。服襲庭訓。文行著聞。考諱滃忠義衛。妣長澤高氏傅誨女。生考諱濈。妣靈光丁氏燾女。以肅廟乙卯正月十一日生公于靈光畝長里。氣宇疑重。才性過人。早喪所怙。深懷靡逮之痛。晨夕謁廟。朔望展墳。風雨寒暑。未嘗廢弛。歲序諱日之臨。春秋雨露之濡。哀傷感惻以盡如在之誠。事母至孝。漁樵菽水。怡愉洞屬。平居冠服必勅。容色必謹。儼然肅然。瞻者起敬。及至接人。寬弘簡易。不見有峻絶阻異之行。然於義利是非之原。又未有依違假借也。淹貫群經。博洽諸子。體認踐履。發揮展拓。至於世變時象。幽深微忽。無不通曉。而恒居沈默。若無所知也。人有來問者。輒曰。一偏知覺。昆蟲猶有能之。此奚足貴乎。聖人不以先知爲知。而以務民之義爲知也。官忠義衛。蓋其世蔭也。以某年十二月九日卒。葬綾州南一坊蓮花峯負艮之原。配利川徐氏應祥女。墓南平鐵川甲坐。系配茂松庾氏碩良女。墓祔乾位下。無嗣。取從父弟相檜子一薰爲後。一女適豊山洪贊東。嗚呼。公以璿派華冑。門望聲猷。足以誇張於世。文學才華。足以周旋於時。如列國公子齊之文趙之勝。誰謂不可。而乃能潛光斂迹於南荒寂寞之濱。以縕袍代珮玉。箪瓢視列鼎。邈然遐擧。優遊卒歲。其偉韻逸趣。百世之下。可以斂衽。其才若是高矣。而將之以德。其知若是明矣。而守之以愚。以務民之義爲知。不以先知之術爲貴。其學問之正。不可誣矣。世之營營於讖緯術數之末。而自以爲得者。可以知戒矣。墓久無表。六代孫琪白謀諸宗。伐石樹隧。請其所以刻諸陰面者。余不敢以非其人辭。銘曰。天啓煕運。寶籙綿綿。公子公孫。冑支兟兟。畝長菟裘。世猷赫然。高尙遐擧。昭代逸民。蓮花何山。春草年年。嗟爾樵牧。勿蒸勿薪。 상후(相厚) 《송사집(松沙集)》 권39 〈연정이공묘지명(蓮汀李公墓誌銘)〉에는 '厚'가 '垕'로 되어 있다. 전(腆) 《송사집(松沙集)》 권39 〈연정이공묘지명(蓮汀李公墓誌銘)〉에는 '㙉'으로 되어 있다. 옹(滃) 《송사집(松沙集)》 권39 〈연정이공묘지명(蓮汀李公墓誌銘)〉에는 '潝'으로 되어 있다. 일훈(一薰) 《송사집(松沙集)》 권39 〈연정이공묘지명(蓮汀李公墓誌銘)〉에는 '一'이 '日'로 되어 있다. 제(齊)나라의……조승(趙勝) 전국 시대 제(齊)나라의 맹상군(孟嘗君) 전문(田文), 위(魏)나라의 신릉군(信陵君) 위무기(魏無忌), 조(趙)나라의 평원군(平原君) 조승(趙勝), 초(楚)나라의 춘신군(春申君) 황헐(黃歇)이 모두 재상 지위에 있으면서 선비들을 좋아하여 문하에 식객 3천을 두었다. 《史記 孟嘗君列傳, 平原君虞卿列傳, 魏公子列傳, 春申君列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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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 호조 참판 경신암 오공 묘갈명 贈戶曹參判敬愼庵吳公墓碣銘 정(鄭)나라에 기근이 들자 자피(子皮)는 한 가구당 1종(鍾)의 곡식으로 구휼하였고,198) 송(宋)나라에 기근이 들자 자한(子罕)이 시행하였지만 이를 기록하지 않았으니,199) 군자가 말하기를 "정(鄭)나라의 한씨(罕氏)와 송(宋)나라의 악씨(樂氏)는 가장 마지막에 망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아, 옛날 선민(先民)이 의리를 귀하게 여기고 재물을 가볍게 여겼던 기풍이 먼 후대에 늠연히 사람으로 하여금 탄식을 자아내게 하네.우리 고장에 근고(近古)에 살았던 경신암(敬愼庵) 오공(吳公), 휘 만상(萬祥), 자 회일(會一)은 바로 또한 한씨(罕氏)와 악씨(樂氏)에 버금갈 것이다. 큰 흉년을 만나 곳간의 곡식을 모두 내놓아 구휼하였으니, 이 덕분에 살아난 사람이 매우 많다. 지금까지도 향리 사이에서 미담으로 자자하게 전해진다. 자손이 번성하고 문학이 뛰어났으니, 이른바 마지막에 망한다는 말이 어찌 오직 고인에게만 해당하겠는가.공은 성품이 효성스러워 평소 부모를 시봉(侍奉)함에 지물(志物)의 봉양200)에 빠뜨림이 없었다. 하루는 밖에서 취하여 돌아오자 그 부친이 매우 꾸짖었는데, 이후로는 한 모금의 술도 입에 대지 않았다. 부유한 집안에 생장하였지만 화려한 것을 좋아하지 않아 의관이 한사(寒士)와 같이 수수하였다.병자년(1876, 고종13) 9월 13일에 졸하니, 탄생한 해인 병신년(1836, 헌종2)으로부터 41년이 된다. 묘는 고을의 품평(品坪) 앞 몰니등(沒泥嶝) 병좌(丙坐)의 언덕으로 이장하였다.오씨(吳氏)는 관향이 보성(寶城)이니, 고려(高麗) 평장사(平章事) 연총(延寵)이 그 시조이다. 위대한 공훈과 높은 관작은 대대로 이어졌다. 중엽에 이르러 휘 방한(邦翰)이 있었으니, 임진년(1592, 선조25)에 순절(殉節)하여 병조 참판에 추증되었다. 증조 휘 세관(世觀)은 호조 참판에, 조부 휘 태유(泰有)는 사복시 정(司僕寺正)에 추증되었고, 부친 휘 석규(錫圭)는 좌승지에 추증되었다. 모친은 공주 이씨(公州李氏)로, 정후(政厚)의 따님이다. 공은 창녕 조씨(昌寧曺氏) 광엽(光葉)의 따님에게 장가들었는데, 유순하고 얌전하여 규문의 법도에 어긋남이 없었다. 모두 두 아들을 두었으니, 수남(壽南)과 수극(壽極)이다. 장자의 아들은 응조(應祚)이고, 차자의 아들은 경조(庚祚), 병조(秉祚)이다. 증손과 현손 이하는 다 기록하지 않는다. 증손 재홍(在鴻)은 나와 죽마고우로, 어느 날 그 조카 창호(昌鎬)를 시켜 지은 가장(家狀)을 지어 가지고 와서 묘갈명을 청하였다. 어찌 차마 사양하겠는가. 다음과 같이 명을 짓는다.검소함으로 자신의 몸가짐으로 삼았고 儉以持己은혜를 베풀어 남에게 미쳤네. 惠以及人남은 명성 많은 사람에게 전해지니 遺芳萬口남은 경사 천추에 영원하리라. 餘慶千春 鄭饑而子皮賙粟戶一鍾。宋饑而子罕施而不書。君子曰鄭之罕。宋之樂。其後亡者乎。噫。古昔先民。貴義輕財之風。百世之下。凜凜然令人興歎。吾鄕近古敬愼庵具公。諱萬祥。字會一。卽亦罕氏樂氏之流亞也。遭歲大無。傾囷恤匱。賴活甚衆。至今藉藉爲鄕里間美談。後嗣蕃衍。文學蔚然。所謂後亡者。豈惟古人爲然。公性孝。平居侍奉。志物無闕。一日自外醉歸。其大人切責之。自後勺飮不入口。生長富饒。不喜華靡。冠服蕭然如寒士。丙子九月十三日卒。距丙申懸弧爲四十一。墓移窆州之品坪前沒泥嶝丙坐原。吳氏貫寶城。麗朝平章事延寵。其鼻祖也。偉勳嵬爵。奕世相望。至中葉。有諱邦翰。壬辰立憧。贈兵曹參判。曾祖世觀。贈戶曹參判。祖泰有。贈司僕寺正。考錫圭。贈左承旨。妣公州李氏政垕女。公娶昌寧曺氏。光葉其考也。柔婉靜嘉。閫範無闕。擧二男曰壽南壽極。長房男應祚。次房男庚祚秉祚。曾玄以下不盡錄。曾孫在鴻。余竹馬舊交世。一日伻其從子昌鎬。以所著家狀。來請碣銘之文。嗚呼。豈忍辭哉。銘曰。儉以持已。惠以及人。遺芳萬口。餘慶千春。 정(鄭)나라에……구휼하였고 정(鄭)나라 자전(子展)이 죽고 아들 자피(子皮)가 부친을 이어 상경의 지위를 계승하였다. 당시 정나라에 기근이 들었는데 아직 보리가 익기 전이라 백성들이 고통을 받고 있었다. 자피는 자전의 명으로 백성들에게 가구당 1종(鐘)의 곡식을 나누어 주었다. 이 때문에 백성들의 마음을 얻은 한씨(罕氏)는 국정을 장악하여 늘 상경으로 있었다. 《春秋左氏傳 壤公29年》 송(宋)나라에……않았으니 송(宋)나라 사성(司城) 자한(子罕)이 자피(子皮)의 소식을 듣고 말하기를 "선한 사람을 가까이하는 것이 백성이 바라는 바이다."라고 하였다. 송나라에도 기근이 들자 자한은 평공에게 공실의 곡식을 백성들에게 빌려줄 것을 요청하고, 모든 대부에게 곡식을 빌려주게 하였다. 사성씨는 곡식을 빌려준 뒤에 기록하지 않았는데, 이는 백성들에게 돌려받을 뜻이 없었다는 말이다. 진(晉)나라의 숙향(叔向)이 이 말을 듣고 "정나라의 한씨와 송나라의 악씨는 아마도 가장 나중에 망할 것이다." 하였다.《春秋左氏傳 壤公 29年》 지물(志物)의 봉양 지(志)는 양지(養志)로 어버이의 뜻을 받들어 어버이를 즐겁게 하는 것을 말하고, 물(物)은 의복ㆍ음식 등으로 어버이를 봉양하는 것을 말하는데, 둘 다에 소홀함이 없었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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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편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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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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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부

증 통훈대부 사복시 정 경헌 홍공 묘갈명 贈通訓大夫司僕寺正敬軒洪公墓碣銘 공의 휘는 영환(永桓)이고, 자는 무경(武卿)이며, 경헌(敬軒)은 그의 호이다. 본관은 풍산(豊山)으로, 고려조(高麗朝)의 직학사(直學士) 경(慶)의 후손이다. 중엽에 휘 치(治)란 분이 있었으니, 학행으로 재랑(齋郞)에 제수되었다. 세상에서는 그를 일송(一松) 선생이라고 불렀다. 증조는 경고(景古)로, 덕을 숨긴 채 벼슬하지 않았다. 호는 침수정(枕潄亭)이고, 형조 참판에 추증되었다. 조부는 천규(天奎)이다. 부친은 이수(履洙)로, 효행으로 이름이 드러났다. 모친은 함풍 이씨(咸豊李氏)로, 두평(斗平)의 따님이다. 후비(後妣)는 진주 정씨(晉州鄭氏)로, 통덕랑(通德郞) 정최(鄭最)의 따님인데, 영묘(英廟) 기유년(1729, 영조5) 3월 2일에 우봉리(牛峯里)에서 공을 낳았다.순후하고 소박하며 신중하였고, 타고난 성품이 매우 순수하였다. 집이 가난하여 어버이를 봉양하기 위해 몸소 농사지으면서도 온화한 얼굴빛과 부드러운 용모를 잠시도 어김이 없었다. 어버이의 상을 당해서는 피눈물을 흘리며 지나치게 슬퍼하였으며 3년 동안 죽을 먹었다. 기일(忌日)이 되면 치재(致齋)를 극진히 하였으며 제기를 깨끗이 닦고 제수(祭需)를 장만하는 일은 반드시 직접 하였다. 세 아우와 낮에는 다정하게 마주 보며 밤에는 함께 잠을 잤다. 조용히 화락하게 지내며 일찍이 한마디 말에도 온화함을 잃은 적이 없었다. 머리가 하얗게 센 노년에 이르도록 한방에서 함께 지내고 먹었으며 분가(分家)하지 못하게 하였다.일찍이 말하기를 "'경(敬)' 한 글자는 배우는 자의 시작이자 끝이니, 잠시도 내 몸에서 떠나게 해선 안 된다."라고 하고, 마침내 재실(齋室)에 편액을 걸어 경계하고 반성하는 바탕으로 삼았다. 《소학(小學)》을 입신하는 터전으로 삼고 사서(四書)를 학문에 나아가는 지름길로 삼았으며, 정자(程子)와 주자(朱子)의 책까지도 탐구하고 연구하지 않음이 없었다. 그리하여 함양(涵養)하는 공부 가운데에서 체득하고 실천하는 데에서 미루어 확대하였다. 이 때문에 집에서나 고을에서나 일에 응하고 사람을 만날 적에 성대하게 자세하고 화평한 풍모가 있었다. 평생 깊이 스스로 명성을 감추고 남에게 자랑한 적이 없었으며 산림에서 한가하게 노닐다가 애오라지 생을 마감하였으니, 최상의 경지에서 덕을 수립하고 지극한 즐거움의 경지에서 노닌 것의 풍치와 격조를 대략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정종(正宗) 계축년(1793, 정조17) 9월 4일에 생을 마감하였다. 해하봉(海鰕峯)의 선영 오른쪽 언덕 사좌(已坐)에 장사 지냈다. 나중에 증손 홍필주(洪弼周)의 장수와 귀함으로 사복시 정에 추증되었다. 배위는 청주 한씨(淸州韓氏)로 숙인(淑人)에 추증되었으며, 명신(命新)의 따님으로 부덕(婦德)이 있었다. 공이 별세한 18년 뒤에 생을 마감하였다. 우봉촌(牛峯村) 뒤 남산(南山) 을좌(乙坐) 언덕에 장사 지냈다. 3남 1녀를 두었으니, 아들은 희찬(羲纘), 낙해(樂海), 백우(百禹)이고, 딸은 문혁진(文爀鎭)에게 출가하였다. 증손 이하는 다 기록하지 않는다.공의 현손 우방(祐邦)이 장차 제묘(題墓)201)하는 일을 하려고 한다며 나에게 그 후면에 기록할 글을 청하였다. 생각건대 미천하고 형편없는 사람이 실로 감당할 수 없지만, 교분이 소중하여 굳게 사양하기 어려운 점이 있었다. 다음과 같이 명을 짓는다.아, 이 넉 자의 봉분은 吁此四尺길한 분 묻힌 곳이네. 吉人之藏해하봉에 영령이 내려오니 鰕山降靈대대로 번창하리라. 永世厥昌 公諱永桓。字武卿。敬軒其號也。糸出豊山。麗朝直學士之慶後。中葉有諱治。以學行除齋郞。世稱一松先生。曾祖景古。隱德不仕。號枕潄亭。贈刑曹參判。祖天奎。考履洙。以孝著名。妣咸豊李氏斗平女。後妣晉州鄭氏通德郞最女。英廟已酉三月二日。生公于牛峯里。淳厚簡童。天稟甚粹。家貧養親。躬幹耕稼。怡色惋容。造次無違。及遭艱。泣血過毁。啜粥三年。遇忌日。極其致散。漑濯烹熟之節。必親爲之。與弟三人。晝則對床。夜則聯枕。從容湛樂。未嘗有一言失和。至老白首。一室同爨。不令析箸。嘗曰。敬之一字。是學者之成始成終。不可斯須去身。遂揭題齋顔。以爲警省之資。以小學爲立身田地。以四子爲進學蹊徑。至於程朱諸書。無不沈索硏究。體之於涵養之中。推之於踐履之際。是以其居家處鄕。應事接物。蔚然有慈詳豈弟之風。平生深自鞱晦。未嘗衒鬻於入。而婆娑邱林。聊以卒歲。其所以立於太上之門而遊於至樂之界者。風韻標致。槩可想也。正宗癸丑九月四日終。葬海鰕峯先隴右岡已坐。後以曾孫弼周壽貴。贈司僕寺正。配淸州韓氏贈淑人。命新女。有婦德。後公十八年而終。葬牛峯村後南山負乙之原。有三男一女。男羲纘。樂海。百禹。女文爀鎭。孫曾以下不盡錄。公玄孫祐邦。以將有題墓之役。請余誌其後。顧膚淺藐末。固不可以承當。而事契之重。有難牢讓。銘曰。吁此四尺。吉人之藏。鰕山降靈。永世厥昌。 제묘(題墓) 무덤에 죽은 자의 이름 등을 써서 표시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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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 통정대부 승정원 좌승지 외재 김공 묘갈명 贈通政大夫承政院左承旨畏齋金公墓碣銘 공의 휘는 예길(禮吉), 자는 성택(聖宅), 호는 외재(畏齋)이다. 김씨(金氏)는 세계(世系)가 김해(金海)에서 나왔으니, 바로 가락국(駕洛國) 수로왕(首露王)의 후예이다. 고려(高麗) 때에 이르러 훈벌(勳閥)이 찬란하였다. 휘 서(湑)란 분이 계셨으니, 우리 태종(太宗) 때 분릉군(盆陵君)에 봉해지고, 백동사(白洞祠)에 배향되었다. 3대를 전해 내려와 휘 준손(駿孫)은 아우 휘 기손(驥孫), 일손(馹孫)과 더불어 모두 문과에 급제하였으므로 '김씨삼주(金氏三珠)'라고 불렸는데, 홍문관 직제학을 지냈고, 연천군(燕川君)에 봉해졌다. 이분이 휘 대유(大有)를 낳았으니, 호가 삼족당(三足堂)이다. 기묘년(1519, 중종14) 현량과(賢良科)에 급제하였는데, 소인들이 권력을 장악한 것을 보고 물러나 운문(雲門)의 우연(愚淵)에 은거하였으니, 바로 공의 9대조이다. 증조는 삼휘(三徽)로, 호가 취상당(翠相堂)이다. 의로운 행실로 세상에 드러났으며,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였다. 조부는 덕항(德恒)으로 호가 매곡(梅谷)인데, 덕을 숨기고 벼슬하지 않았다. 부친은 술회(述會)로, 호가 죽와(竹窩)이고, 수문장(守門將)을 지냈으며, 가선대부에 추층되었다. 모친은 정부인(貞夫人) 의성 김씨(義城金氏)로, 참봉 중화(仲華)의 따님이다. 영종(英宗) 병자년(1756, 영조32) 1월 15일에 금릉(金陵)의 삼인리(三仁里) 옛집에서 공을 낳았다.공은 타고난 성품이 뛰어나고 재기(才氣)가 영특하여 육경(六經)에 통달하였고 제자백가를 두루 섭렵하였다. 견문은 넓고 시문은 뛰어났으며, 더욱이 예학(禮學)에 조예가 깊어 상변(常變), 길흉(吉凶), 절문(節文), 도수(度數)에 대해서 정밀하게 생각하고 깊이 분변하여 훤히 이해하지 않음이 없었다. 이 때문에 원근의 사우들이 예에 의심스러운 점이 있으면 번번이 공에게 가서 물은 다음 결정하였다. 양친을 효도로 섬기되 기쁜 마음으로 공경하고 삼갔으며 뜻을 받드는 일과 물질로 봉양하는 일을 모두 지극히 하였다. 상례를 거행할 적에는 매우 슬퍼하였고 한결같이 고례(古禮)를 따랐다. 형제 다섯 사람 모두 문장과 덕행이 있었고, 함께 단란하게 지냈다. 형과 아우가 날로 매진하여(며) 조용히 화락하고 즐겁게 지내 온화한 기운이 넘쳤다. 심지어 친척이나 벗을 대할 적에도 온화하고 인자하며 자애롭고 은혜로워 각각의 사람들에게 그 마음을 얻었으므로 향리에 어떤 사람이 혹시 잘못을 하면 번번이 "아무 공이 알게 하지 말라."라고 하였으니, 이처럼 존중 받았다.순묘(純廟) 계미년(1823, 순조23) 12월 15일에 졸하였다. 나중에 손자 재환(在煥)이 귀하게 되자 공은 통정대부(通政大夫) 승정원 좌승지에 추증되었다. 묘소는 암천방(唵川坊) 황곡리(黃谷里) 당산(堂山) 병좌(丙坐)의 언덕에 있다. 배위는 숙부인(淑夫人) 강릉 유씨(江陵劉氏)로,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 유치일(劉致一)의 따님인데, 부덕(婦德)이 지극하였다. 4남 1녀를 낳았으니, 아들은 은직(殷直), 취직(就直), 응직(應直), 자직(宇直)이고, 딸은 하동(河東) 정인대(鄭仁大)에게 출가하였다. 손자 재영(在瑛), 재호(在瑚), 재련(在璉), 재순(在珣)은 장남의 소생이고, 재달(在達), 재방(在邦), 재홍(在洪)은 차남의 소생이며, 재업(在業), 재선(在善), 재흠(在歆), 재민(在敏)은 셋째 아들의 소생이고, 재환(在煥)은 관직이 예조 참판으로 넷째 아들의 소생이다. 증손과 현손 이하는 기록하지 않는다.증손 찬석(璨錫)이 가장(家狀)을 가지고 와서 묘지명을 지어 주기를 청하기에 사양하지 못하였다. 다음과 같이 명을 짓는다.연천의 고가요 燕川古家삼족당의 어진 후손이네. 三足賢孫효우로 가업을 이었고 孝友箕裘시례는 연원이 있네. 詩禮淵源황곡리의 산기슭에 黃谷之麓넉 자의 무덤이 있네. 四尺斧堂자손들이 번성하여 螽斯兟兟남은 복록 정히 영원하리라. 餘祿正長 公諱禮吉。字聖宅。號畏齋。金氏系出金海。卽駕洛國首露王之后也。至麗朝。勳閥煒燁。有諱湑。我太宗朝封盆陵君。享于白洞祠。三傳諱駿孫。與弟諱驥孫馹孫。俱登文科。稱金氏三珠。官弘文直提學。封燕川君。是生諱大有。號三足堂。已卯登賢良科。見群小用事。退隱於雲門之愚淵。卽公之九世祖也。曾祖三徽。號翠柏堂。行義著世。中司馬。祖德恒。號梅谷。有隱德不仕。考述曾。號竹窩。官守門將。贈嘉善。妣貞夫人義城金氏。參奉仲華女。英宗丙子正月十五日。生公于金陵之三仁里舊第。公天稟挺邁。才氣穎異。淹貫六經。涉躐諸家。聞見宏博。詞華斐蔚。尤邃於禮學。常變吉凶。節文度數。精思深辨。無不昭晣。是以遠近士友。禮有所疑。輒就公咨決焉。孝事二親。怡愉洞屬。志物俱至。執喪哀毁。一遵古禮。兄弟五人。皆有文行。對床連榻。爾征我邁。從容湛樂。和氣融融。以至待族戚接朋友。溫仁慈惠。各得其心。閭里間。人或有過。則輒曰。勿使某公知之。其見重如此。純廟癸未十二月十五日卒。後以孫在煥貴。贈通政大夫承政院左承旨。墓唵川坊黃谷里堂山丙坐原。配淑夫人江陵劉氏。同知致一女。婦德備至。生四男一女。男殷直。就直。應直。宇直。女適河東鄭仁大。孫男在瑛。在瑚。在璉。在珣。長房出。在達。在邦。在洪。二房出。在業。在善。在歆。在敏。三房出。在煥。官禮參。四房出。曾玄以下不錄。曾孫璨錫。奉家狀。請爲隧道表銘之文。辭不獲已。銘曰。燕川古家。三足賢孫。孝友箕裘。詩禮淵源。黃谷之麓四尺斧堂。螽斯兟兟。餘祿正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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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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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부

가선대부 동지중추부사 손공 묘갈명 嘉善大夫同知中樞府事孫公墓碣銘 공의 휘는 시웅(始雄), 자는 미경(美卿), 호는 죽음(竹陰)이다. 손씨(孫氏)의 선조는 노(魯)나라 소공(昭公)이 망명길에 오를 때 기린을 타고 바다를 건너 동쪽으로 와서 구사(仇史)에 이르러 살았다고 한다. 후손 가운데 구례마(俱禮馬)가 있었으니, 신라(新羅) 태조(太祖)를 도와 모량부(牟梁部) 대인(大人)이 되었다. 훌륭한 공적과 높은 작위는 대대로 끊이지 않았다. 고려(高麗) 때 휘 빈(贇)이 있었으니, 밀성군(密城君)에 봉해져 자손들이 그대로 관향으로 삼았다. 휘 책(策)에 이르러 문과에 급제하고 목사(牧使)를 지냈다. 이분이 휘 계경(季敬)을 낳았다. 조선에 들어와서 그 백씨(伯氏) 휘 검경(儉敬)이 망복(罔僕)의 의리202)로 보성군(寶城郡)에 귀양 가는 것을 보고 공도 함께 남하하다가 부안(扶安)의 갈촌(葛村)에 정착하였다. 3대를 전해 내려와 휘 비장(比長)에 이르러 생원으로 문과에 급제하여 홍문관 제학이 되었고, 점필재(佔畢齋) 김 선생(金先生)과 더불어 85학사에 선발되었다. 금남(錦南) 최공 부(崔公溥)와 함께 하교를 받들어 《동국통감(東國通鑑)》을 편수하였으며, 연산군(燕山君) 때 벼슬에서 물러나 부안(扶安)에서 지냈다. 대대로 문학과 행실로 이름이 났다. 고조는 휘 근로(謹老)이고, 증조 휘 대남(大南)은 장악원 정(掌樂院正)에 추증되었으며, 조부 휘 우절(遇節)은 호조 참의에 추증되었다. 부친은 휘 일(逸)이니, 공조 참판을 지냈다. 배위는 정부인(貞夫人) 은진 송씨(恩津宋氏)로, 송후일(宋厚日)의 따님이다. 생부(生父)는 휘 이룡(以龍)으로, 가선대부에 추증되었다. 모친은 정부인 남평 반씨(南平潘氏)로, 반명환(潘明煥)의 따님이다. 현종(顯宗) 계축년(1673, 현종14) 10월 22일에 정동(井洞)의 사제(私第)에서 공을 낳았다.공은 타고난 성품이 순후하고 신중하였으며, 어려서부터 지극한 행실이 있었다. 집안이 본디 너무 가난하였으므로 고기 잡고 나무하며 밭 갈고 가축을 길러 온갖 일을 모두 직접 하였으며, 이것으로 어버이에게 맛있는 음식을 봉양하였다. 게다가 한가한 날에는 치웅(致雄)과 필웅(必雄) 두 아우와 함께 글방에 들어가 책상을 마주하고 공부에 매진하였다. 어버이의 병이 위독해지자 낮에는 병석을 떠나지 않고 밤에는 잠자리에 나아가지 않았으며 의원을 불러오고 약을 조제(調劑)하는 데 정성과 노력을 다하였다. 살아 있는 잉어가 여울에서 나오고 꿩이 뜰에 떨어지는 기이한 일이 있었는데, 사람들이 효성으로 하늘을 감동시켜 그러한 것이라고 하였다.연달아 소생(所生 친부모)과 소후(所後 양부모)의 상을 당해서는 한결같이 예제(禮制)를 준행하여 상례의 형식과 내용203)이 모두 지극하였다. 일찍이 가훈(家訓)을 지어 자손을 거듭 경계하였다. 그 가훈에 "부모에게 효도하고, 형제간에 우애 있고, 집안을 바르게 하고, 종친과 화목하게 지내며, 제사를 받들고, 혼인을 가려서 하고, 학문과 문장에 힘쓰고, 농사를 힘써 짓고, 장기와 바둑을 가까이하지 말고, 미신을 믿지 말라."라는 뜻으로 상세히 입설(立說)한 것이 몹시 정성스럽고 간곡하였으니, 그 좋은 계책과 훌륭한 가르침은 모두 가정을 꾸리는 자의 귀감이 될 만하였다. 죽수(竹樹)의 북쪽에 집을 짓고 죽음(竹陰)이라고 자호하였다. 자호와 연관된 시 한 편이 있는데 아래와 같다.비봉산 앞 대숲이 우거졌으니 飛鳳山前竹樹陰맑은 풍취는 백세 지나도록 변치 않네. 淸風百世不移心보배인 낭간204) 옥인 양 사랑스럽게 바라보고 看來愛有琅玕寶아침 해 뜨길 기다려 덕음을 보네. 留待朝陽覽德音이 시에서 그 뜻을 알 수 있다. 구용(九容)과 구사(九思)를 자리 오른쪽에 써서 늘 스스로 귀감으로 삼았으며, 《소학(小學)》과 《대학(大學)》을 평소 몸을 단속하는 근본으로 삼았다. 향리(鄕里)에서 여러 번 그 효성을 상위 관사에 천거하였다. 장수하였다는 이유로 가의대부(嘉義大夫)에 올라 3대가 추증되었다.경신년(1740, 영조16) 1월 6일에 세상을 떠났다. 한천(寒泉)의 모산(牟山) 뒤 갑좌(甲坐)의 언덕에 장사지냈다. 배위는 정부인(貞夫人) 순창 조씨(淳昌趙氏)로, 조사룡(趙士龍)의 따님이다. 규문의 법도에 어긋남이 없었다. 4남을 낳았으니, 첫째는 명신(命新), 둘째는 흥신(興新), 셋째는 항신(恒新), 넷째는 극신(克新)으로 중부(仲父)의 양자로 갔다. 손자 원효(元孝)는 장자의 소생이다. 생원 덕효(德孝), 찬효(贊孝)는 둘째의 소생이다. 순효(淳孝)는 셋째의 소생이다. 광효(光孝), 필효(必孝), 욱효(郁孝)는 넷째의 소생이다. 증손 이하는 다 기록하지 않는다.6세손 영렬(永烈)과 영모(永謨)가 가장(家狀)을 가지고 비석의 뒷면에 새길 글을 지어 달라고 청하였다. 다음과 같이 명을 짓는다.충강 가 忠江之上주산의 남쪽. 珠山之陽우뚝한 넉 자의 봉분 있으니 有崇四尺효자가 묻힌 곳일세. 孝子攸藏가훈 적은 책 한 권 家訓一書후손에게 남긴 계책 매우 창성하네. 貽謨孔彰후손이 번성하니 螽斯椒聊남은 복록 정히 영원하리라. 餘祿正長 公諱始雄。宇美卿。號竹陰。孫氏之先。在魯昭公出奔時。有曰承麟。浮海而東。至仇史居焉。後孫有曰俱禮馬。佐新羅太祖。爲牟梁剖大人。崇勳嵬爵。奕世不絶。至麗朝。有諱贇。封密城君。子孫乃貫焉。至諱策。文牧使。生諱季敬。入我朝。見其伯氏諱儉敬。以罔僕之義。謫寶城郡。公亦與之南下。止千扶安之葛村。三傳至諱比長。生員文科弘文提學。與佔畢齋金先生。選八十五學士。與錦南崔公溥奉敎修東國通鑑。燕山朝退休扶安。世著文行。高祖諱謹老。曾祖諱大南。贈掌樂院正。祖諱遇節。贈戶曹參議。考諱逸。工曹參判。配貞夫人恩津宋氏厚日女。生考諱以龍。贈嘉善大夫。妣貞夫人南平潘氏明煥女。顯宗癸丑十月二十二日。生公于井洞第。公天稟醇謹。幼有至行。家素貧甚。漁樵耕牧。凡百事役。無不躬親爲之。以供甘旨之養。更於暇日。與二弟致雄必雄。入塾對案。不廢課程。親有劇疾。晝不就席。夜不就枕。迎醫合藥。誠力俱至。有生鯉出灘。投雉墮庭之異。人謂孝感致然。連漕所生所後喪。一遵禮制。易戚備至。嘗著家訓。申戒子孫。其訓以孝於父母。友於兄弟。正閨閫。睦宗族。奉祭祀。擇婚姻。務學文。力農業。勿近博奕。勿用巫覡之意。縷縷立說。極其懇惻。其嘉謨良規。皆可以爲有家者之柯則。築室竹樹之陰。自號竹陰。因有詩曰。飛鳳山前竹樹陰。淸風百世不移心。看來愛有琅玕寶。留待朝陽覽德音。此可以見其志矣。書九容九思於座右。常自鏡考。以小學大學爲平生律身之本。鄕道累薦其孝於上司。以壽陞嘉義。追榮三世。庚辰正月六日考終。葬寒泉之牟山後甲坐原。配貞夫人淳昌趙氏士龍女。閫儀無闕。生四男。長命新。次興新。次恒新。次克新。出系仲父后。孫元孝長房出。德孝生員。贊孝二房出。淳孝三房出。光孝。必孝。郁孝。四房出。曾孫以下不盡錄。六世孫永烈永謨奉家狀。請爲文以識碑陰。銘曰。忠江之上。珠山之陽。有崇四尺。孝子攸藏。家訓一書。貽謨孔彰。螽斯椒聊。餘祿正長。 망복(罔僕)의 의리 망국의 신하로서 의리를 지켜 새 왕조의 신복(臣僕)이 되지 않으려는 절조를 말한다. 은(殷)나라가 망할 무렵 기자(箕子)가 "은나라가 망하더라도 나는 남의 신복이 되지 않으리라.[商其淪喪, 我罔爲臣僕.]"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書經 微子》 상례의 형식과 내용 원문은 '易戚인데, 상례가 형식과 내용의 측면에서 모두 훌륭하게 치러졌다는 의미이다. 《논어(論語)》 팔일(八佾)에 "상례는 형식적으로 잘하기보다는 차라리 슬퍼하는 마음이 가득해야 한다.[喪與其易也寧戚]"라고 한 데서 유래하였다. 낭간(琅玕) 중국에서 나는 경옥(硬玉)의 한 가지로, 어두운 녹색이나 청백색이 나는 반투명의 옥인데, 옛부터 장식에 많이 쓰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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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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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남 손공 묘갈명 石南孫公墓碣銘 공의 휘는 처상(處祥), 자는 사은(士隱), 호는 석남(石南)이다. 손씨(孫氏)는 세계(世系)가 밀양(密陽)에서 나왔는데, 다. 신라(新羅)부터 고려(高麗)에 이르기까지 대대로 이어졌다. 조선에 들어와 휘 책(策)이 있었으니, 문과에 급제하고 목사(牧使)를 지냈다. 현손 휘 비장(比長)에 이르러 문과에 급제하고, 홍문관 제학을 지냈다. 연산군(燕山君) 때 벼슬에서 물러나 부안(扶安)의 갈촌(葛村)에 은거하였는데, 공에게는 10대조가 된다. 고조는 휘 시웅(始雄)으로, 동지중추부사이고, 증조는 휘 흥신(興新)으로, 부호군(副護軍)이다. 조부는 휘 덕효(德孝)로, 진사이고, 부친은 휘 몽두(夢斗)이다. 모친은 남평 문씨(南平文氏)로, 문시규(文始奎)의 따님인데,부덕(婦德)이 지극하였다.공은 을축년(1805, 순조5) 3월 1일에 태어났다. 타고난 성품이 순후하고 기개가 빼어나고 도량이 넓었다. 서당에 나아가 공부하였는데, 번거롭게 훈장(訓長)이 감독하지 않아도 대여섯 번 이상을 송독(誦讀)하였다. 글을 짓고 글씨를 썼는데 글과 글씨는 보는 자들이 놀라고 기이하게 여길 정도의 수준이었다. 집안이 매우 가난하여 몸소 밭을 갈고 힘써 농사지어 변변치 않은 음식으로나마 어버이를 봉양하였다. 일하고 남은 힘이 있거나 고 한가한 날이면 두 아우와 함께 방을 쓸고 책상을 맞대어 토론하고 송독하였는데 공부하는 데 확실하게 과정이 있었다. 여러 번 향시(鄕試)에 합격하였지만 번번이 예부시(禮部試 대과)에는 합격하지 못했다. 그 대인(大人)이 경계하여 말하기를 "사람들이 과거에 응시하는 것은 대부분 부모를 영화롭게 하려는 계책이다. '나는 네가 나를 잘 봉양하는 것만 말할 뿐이지, 네가 나를 녹봉으로 봉양하는 것은 말하지 않는다.'라고 한 것은, 옛사람이 자식에게 경계한 말이 아니더냐.205) 내가 너희에게 바라는 것 또한 그러하니, 너희도 더 이상 서로 경쟁하는 곳에 마음을 허비하지 말라."라고 하니, 공이 마침내 문을 닫고 장막을 드리운 채 전심전력하여 자신의 수신(修身)을 위한 학문을 하고, 존심양성(存心養性)하며 연구하여 체득하고 실천함에 서로 그 힘을 쏟아 날로 깊은 경지에 나아갔다.배위(配位)는 고흥 유씨(高興柳氏)로, 유광인(柳光仁)의 따님인데, 규문의 법도에 어긋남이 없었다. 어느 날 공이 병환으로 목숨이 위태로워지자 유씨를 돌아보고 말하기를 "노친을 잘 봉양하며 어린아이들을 잘 키우고, 내가 죽는 것을 한스러워하지 말라."라고 하였는데, 말을 마치자 기절하였다. 유씨가 손가락을 깨물어 피를 내어서 공의 입에 흘려 넣어 소생하게 하였는데, 얼마 있다가 졸하였다. 유씨는 뒤따라 죽기로 맹세하고 전혀 마시지도 먹지도 않았다. 집안사람들이 극구 만류하면서 말하기를 "노친(老親)이 살아 계시고 아이들이 품 안에 있는데 다만 부군(父君)께서 임종 때 한 말을 생각하지 않으십니까."라고 하니, 유씨가 멍하니 한숨을 쉬고 말하기를 "나의 뜻을 따르기보다는 차라리 부군의 뜻을 따르는 것이 낫다."라고 하고 마침내 일어났다. 장례를 치른 뒤에 부지런히 집안 살림을 꾸리며 정성을 다해 시어른을 봉양하니, 향리에서 칭찬하여 효열부(孝烈婦)라고 일컬었다. 향리에서 추천하는 보고가 끊이지 않고 계속 이어졌다.공의 묘소는 호암면(虎巖面) 우비등(牛鼻嶝) 계좌(癸坐) 언덕에 있다. 부인이 세상을 떠나자 부군을 따라 죽으려 한 뜻에 따라 합장하였다. 인용(麟鏞)이라는 아들 하나가 있는데 군수를 지냈다. 손자는 참의관(參議官) 영렬(永烈), 진사인 영하(永夏), 그리고 영길(永吉), 영진(永鎭), 영실(永實)이다. 증손 이하는 다 기록하지 않는다.영렬이 가장(家狀)을 가지고 와서 묘갈명을 지어 주기를 청하였다. 나는 천하고 용렬한 데다 병으로 문장 짓는 것을 폐하여 감히 청에 응하지 못한 지 오래 되었지만 예전부터 서로 두터운 우의가 있었기에 차마 끝내 사양하지 못하였다. 다음과 같이 명을 짓는다.선 쌓고 의로움 행하였지만 積善行義오히려 덕을 감추었네. 尙絅晦根그 보답 누리지 않고 不食厥報후손에게 복을 남겼네. 垂裕後昆효자의 덕행 잘 전해주니 錫類式穀후손의 복 창성하리라 後祿以昌문암에 있는 무덤에 門巖斧堂해마다 늘 제향 올리네 歲事有常 公諱處祥。字士隱。號石南。孫氏系出密陽。自羅至麗。奕葉相承。入我朝。有諱策。文科。官牧使。至玄孫諱比長。文科官弘文提學。燕山朝。退休于扶安葛村。於公爲十世祖也。高祖諱始雄。同中樞。曾祖諱興新。副護軍。祖諱德孝。進士。考諱夢斗。妣南平文氏始奎女。壺儀備至。公以乙丑三月一日生。天稟醇厚。氣宇秀爽。就塾上學。不煩提督。而誦數甚勤。綴文揮毫。文與筆。見者驚異之。家貧甚。躬耕力穡以供菽水。以餘力暇日。與其二弟。掃室連榻。講討誦習。的有程曆。累中鄕解。輒屈禮部。其大人戒之曰。人之赴擧。多爲榮親計也。吾謂汝以善養。不謂汝以祿養。此非古人戒子語耶。吾之所望於汝者亦然。汝亦勿復費心於紛竸之間也。公遂杜門下帷。專心爲己。存養硏究。體認踐履。交致其力。日就邃密。配高興柳氏光仁女。閫範無闕。一日公屬疾幾危。顧柳氏曰。善養老親。善育稚孩。我死無恨。言訖而絶。柳氏血指注口。得甦數頃而卒。柳氏誓以下從。絶不飮食。家衆防之甚力。且曰。老親在堂。稚孩在懷。獨不念夫君臨沒之言乎。柳氏曠然太息曰。與其遂吾之志。不若遂夫之志也。遂起焉。視奠之餘。勤理家務。備盡忠養之節。隣里歎賞。稱以孝烈婦。鄕道剡報。續續不絶。公墓在虎巖面牛鼻嶝癸坐原。夫人之沒。從下從之意。爲之合封焉。有一男曰麟鏞。官郡守。孫男曰永烈。議官。曰永夏。進士。曰永吉。曰永鎭。曰永實。曾孫以下不盡錄。永烈抱家狀。請爲碣銘之文。余以淺劣。病廢鉛槧。其不敢承膺久矣。而在平昔相厚之義。有不忍終辭。銘曰。積善行義。尙絅晦根。不食厥報。垂裕後昆。錫類式穀。後祿以昌。門巖斧堂。歲事有常。 나는……아니더냐 정이(程頤)가 문인인 윤돈(尹焞)에게 "그대는 노모가 계시니, 과거를 보지 않을 수 없다." 하였다. 윤돈이 이 사실을 어머니에게 말씀드리자 그의 어머니는 "나는 네가 잘 봉양하는 것만 알지 녹봉으로 봉양하는 것은 알지 못한다.[吾知汝以善養, 不知汝以祿養.]" 하였다. 이후 윤돈은 종신토록 과거에 응시하지 않았다. 《宋史 道學列傳 尹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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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 통훈대부 군자감 정 청계 조공 묘갈명 贈通訓大夫軍資監正淸溪趙公墓碣銘 공의 휘는 옥생(玉生), 자는 국미(國美), 호는 청계(淸溪)이다. 조씨(趙氏)의 관향은 함안(咸安)으로, 고려(高麗) 때 평장사(平章事) 휘 정(鼎)이 그 시조이다. 세계(世系)의 중대(中代)에 이르러 휘 승숙(承肅)이란 분이 계셨으니, 세상에서는 덕곡(德谷) 선생이라고 하였다. 이분이 휘 종례(從禮)를 낳았는데, 종례의 호는 율정(栗亭)으로, 본조에 들어와 보문각 직제학(寶文閣直提學)을 지냈다. 3대가 전해 내려와 휘 임(琳)에 이르렀는데, 그의 호는 진재(愼齋)로, 대사성(大司成)을 지냈다. 휘 희광(希匡)에 이르러 참봉(參奉)을 지냈으며, 동복(同福)의 예곡(艾谷)에 우거하였는데, 이로 인하여 자손들이 이곳에 거주하게 되었다. 고조는 휘 인(仁)이니, 문학과 행실이 있었다. 증조는 휘 유보(惟寶)이니, 습독관(習讀官)을 지냈고, 조부는 휘 호(豪)이니, 내금위장(內禁衛將)을 지냈다. 부친은 휘 기벽(奇壁)이고, 모친은 삭녕 최씨(朔寧崔氏)로, 참봉 최인수(崔仁壽)의 따님이다.선묘(宣廟) 무신년(1608, 선조41) 8월 16일에 공은 예곡(艾谷)의 사제에서 태어났다. 일찍 고아가 되어 가난하였지만 어머니를 지극한 효성으로 섬겼다. 9세에 능성(綾城)의 산음리(山陰里)로 이사하여 살았다. 박공 영춘(朴公永春)과 이웃에 살았는데, 박공은 그가 명문가의 후손이라는 것을 알았고, 또 기골이 준수한 것을 보고 권유하여 학교에 들어가게 하고, 이어서 딸을 시집보냈다.공은 고생을 무릅쓰고 힘써 노력하여 전심으로 학문에 매진였고, 문학으로 명망이 당대에 떨쳤지만 명리(名利)를 다투는 과거 시험장과 벼슬을 구하는 방법에는 담담하였다. 일찍이 시속을 따라 사람들과 어울려 잇속에 머뭇거리면서 말을 더듬거리는 태도를 보이지 않았고, 오직 선을 쌓고 의를 행하며 후학들을 권장하여 정진(精進)시키는 것을 궁극적인 계책으로 삼았다. 거처하는 곳은 산이 높고 골짜기가 깊어 운림(雲林)이 창연(蒼然)하니, 사람과 땅이 잘 어울리고 정경(情境)206)이 서로 부합하여 한가롭게 소요하며 그윽이 감상하는 흥취를 극진히 하였으니, 실로 고인이 이른바 "영원히 이 즐거움을 잊지 않으려 맹세한다.[永矢不諼]"라는 뜻207)이 있었다. 장수하였다는 이유로 군자감 정(軍資監正)에 올랐다.기묘년(1699, 숙종25) 3월 13일에 졸하였으니, 향년 92세이다. 배위(配位)는 밀양 박씨(密陽朴氏)로, 박영춘(朴永春)의 따님이자, 판서 박사룡(朴駟龍)의 손녀인데, 부덕(婦德)이 있었다. 초장동(草庄洞) 경좌(庚坐)에 쌍분으로 장사 지냈다. 아들 셋을 낳았으니, 원규(元奎), 서규(瑞奎), 창규(昌奎)이다.연대가 더욱 멀어지고 문헌이 흩어지고 없어져 당시의 숨은 덕과 행실이 이 때문에 드러나지 않았으니, 어찌 자손의 한이 되지 않겠는가. 후손 익제(翼濟)가 가장(家狀)을 가지고 와서 비석의 후면에 기록할 글을 청하였다. 다음과 같이 명을 짓는다.산음리는 山陰之里여생을 보낸 곳이요. 杖屨是經초장동은 草庄之洞선생의 의복이 묻힌 곳이네. 衣履是藏지역의 명성 사람에 달렸으니 地逐人好정채가 은은하게 드러나네. 精采闇章자손이 잘 계승하였으니 子孫善述남은 복록 정히 영원하리 餘祿正長 公諱玉生。字國美。號淸溪。趙氏貫咸安。高麗平章事諱鼎。其始祖也。至中系有諱承肅。世稱德谷先生。生諱從禮。號栗亭。入我朝。寶文閣直提學。三傳至諱琳。號愼齋。大司成。至諱希匡。參奉。寓居同福之艾谷。子孫因居焉。高祖諱仁。有文行。曾祖諱惟寶。習讀。祖諱豪。內禁衛將。考諱奇壁。妣朔寧崔氏參奉仁壽女。宣廟戊申八月十六日。公生于艾谷第。早孤貧。事母至孝。九歲流寓綾城之山陰里。與朴公永春接隣。朴公知其爲名家遺裔。而且見其氣骨俊異。勸令就學。因以女妻之。公勤苦刻勵。一意征邁。文學聲望。擅於一時。而於聲利之場。干進之路。澹泊如也。未嘗隨俗混塵。有趑趄囁嚅之態。惟以積善行義。奬進後學。爲究竟計。所居山高谷邃。雲林蒼然。人地相得。境情交孚。婆娑徜徉。以盡其幽賞之趣者。實有古人所謂永矢不諼之意。以壽陞軍資監正。已卯三月十三日卒。得年九十二。配密陽朴氏永春女。判書駟龍孫。有婦德。葬草庄洞庚坐雙兆。生三男。元奎。瑞奎。昌奎。嗚呼。年代彌遠。文獻散逸。當日之隱德幽行。因以不暢。豈不爲子孫之恨。後孫翼濟以家狀。請爲文以識碑陰。銘曰。山陰之里。杖屨是經。草庄之洞。衣履是藏。地逐人好。精采闇章。子孫善述。餘祿正長。 정경(情境) 정(情)은 사물을 대하여 인식하는 사람의 주관적인 마음을 가리키고, 경(境)은 인식의 대상이 되는 외부의 객관적인 현상을 가리킨다. 영원히……뜻 《시경》〈위풍(衛風) 고반(考槃)〉에 "은사의 집이 시냇가에 있으니, 석인의 마음이 넉넉하도다. 홀로 자고 깨고 말을 하지만, 영원히 이 낙을 잊지 않으려 맹세하도다.[考槃在澗, 碩人之寬. 獨寐寤言, 永矢不諼.]"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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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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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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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생 김공 묘갈명 學生金公墓碣銘 금릉(金陵)의 연자천(燕子川) 가 아암동(兒巖洞)에 부자(負子 정남향) 향오(向午)에 우뚝한 넉 자의 봉분이 있으니, 바로 고(故) 학생(學生) 김공(金公)의 신과 옷이 묻힌 곳이다. 공의 휘는 필환(弼煥), 자는 공서(公瑞), 관향은 도강(道康)이다. 고(故) 광정대부(匡靖大夫) 문하평리(門下評理) 휘 을경(乙卿)이 그 시조인데, 문학(文學)과 관직으로 대대로 가문을 빛냈다. 고조는 선의(善疑), 증조는 익형(益兄), 조부는 명의(明義)이다. 부친은 유문(有文)이고, 모친은 통천 최씨(通川崔氏)로, 최일채(崔日彩)의 따님이다.공은 순조(純祖) 경진년(1820, 순조20)에 태어났는데, 용모가 뛰어나고, 성품이 자상하였다. 집이 가난하여 몸소 농사지어 양친을 효성으로 봉양하였는데, 사랑과 공경이 모두 지극하였고 지물(志物)의 봉양에 빠뜨림이 없었다. 상례를 거행할 적에는 너무나 슬퍼하면서도 한결같이 예제(禮制)를 따랐고, 삭망(朔望)에 묘소를 참배할 적에는 비바람이 몰아쳐도 그만두지 않았다. 평소 몸가짐에 규범이 있었으며, 집안을 다스리는 데에 법도가 있었다. 화려하고 아름다운 의복과 진귀한 물건은 집안에 들이지 않았다. 집안 내에 효성스럽고 성실한 가풍이 저절로 흥성하여 친척과 이웃까지도 기뻐하며 서로 뜻이 맞아 어울렸다. 이해를 따지고 서로 헐뜯는 일에 대해서는 아득히 듣지 못하는 듯이 하였지만, 의리와 사정(邪正), 물건을 주고받는 일에는 일찍이 조금도 주저하거나 구차한 뜻이 있지 않았다.갑신년(1824, 순조24) 윤5월 15일 생을 마감하였다. 배위(配位)는 청주 김씨(淸州金氏)로, 김귀갑(金貴甲)의 따님이다. 정숙하고 자애롭고 유순했으며 부덕(婦德)이 지극하였다. 공보다 3년 먼저 생을 마쳤는데, 묘는 같은 언덕에 있다. 2남 3녀를 낳았으니, 장자는 규상(奎庠), 차자는 규홍(奎洪)이다. 딸은 허일조(許一祚), 김한준(金漢俊), 양태한(梁泰漢)에게 출가하였다. 장자의 아들은 성진(成鎭)이고, 차자의 아들은 창진(昌鎭)이다.창진이 그 대인(大人)의 명으로 유장(遺狀)을 가지고 와서 묘갈명을 청하였다. 아, 나는 공이 살아 계실 때 직접 뵙지 못하였지만 후손을 통해 그 의로운 행실에 대해서 들은 지 오래되었다. 지난 일을 생각하고 감회에 잠기매 어찌 차마 사양하겠는가. 다음과 같이 명을 짓는다.효도와 우애로 입신하고 孝悌立身근검으로 가정 이루었네. 勤儉成家자손이 번성하니 子孫繩繩남은 음덕 매우 훌륭하네. 餘蔭孔嘉 金陵之燕子川上兒巖洞。有崇四尺負子向午者。卽故學生金公衣履之藏也。公諱弼煥。字公瑞。貫道康。故匡靖大夫門下評理諱乙卿。其始祖也。文學仕䆠。世代煒燁。高祖善疑。曾祖益兄。祖明義。考有文。妣通川崔氏曰彩女。公以純祖庚辰生。姿相奇偉。性氣慈詳。家貧躬耕。孝養二親。愛敬倶至。志物無闕。執喪過哀。一從禮制。朔望展墳。風雨不廢。平居。持身有則。御家有法。華美之服。珍怪之物。不入於家。一家之內。孝順勤慤之風。油然興行。以至族戚隣里。無不歡欣相得。有利害毁譽。漠然無聞焉。而於義利邪正。辭受取予。未嘗有一毫依違苟且之意。甲申閏五月十五日考終。配淸州金氏貴甲女。貞淑慈柔。婦德備至。先公三年而終。墓同原。生二男三女。長奎庠。次奎洪。女適許一祚金漢俊梁泰漢。長房男曰成鎭。次房男曰昌鎭。昌鎭以其大人命。奉遺狀。宋謁碣銘之文。嗚呼。余於公之在世。未得拜床。而因緣後承。得聞其行義久矣。緬古感今。豈忍辭諸。銘曰孝悌立身。勤儉成家。子孫繩繩。餘蔭孔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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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춘경【진호】에게 답함 答金春卿【震浩】 세월은 효자(孝子)를 위해 기다려주지 않아 예복을 길복(吉服)으로 바꾸어 입은 것이 이미 오래되었을 것이라 생각됩니다. 삼가 생각건대 지극한 마음으로 개확(慨廓)62)하셨으니 어떻게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 제가 친구의 말석에 있는 사람으로서 달려가 조문을 하는 예의를 갖추지도 못하였으니 이 무슨 이치이겠습니까? 실로 매우 부끄러운 일입니다. 하지만 큰 도량으로 살펴주시고, 남들과 같지 않음을 따지지 않고서 욕되게 편지를 보내주시어 아주 정성스러운 뜻을 보여주었습니다. 편지를 받고 감동하고 슬퍼서 어떻게 답장해야 할지도 몰랐습니다. 이어 어버이를 모시고 지내는 절선(節宣)63)이 편안하고 진중해짐을 알게 되었으니, 더욱 듣고 싶은 소식이었습니다. 용렬한 저는 몸이 쇠퇴하여 부탁을 받아들이기에 부족합니다. 삼가 생각건대 예전에 그곳의 사우(士友)들과 고흥(高興)과 낙안(樂安) 사이에서 강론하러 모인 적이 여러 차례였습니다. 그런데 세월이 하염없이 흘러 이미 40여 년이 되었습니다. 함께 따라 노닐던 사람들도 대부분 흩어지고 말았으니, 매번 그때를 떠올리면 매우 마음이 아파 견디기 어렵습니다. 그런데 오늘날에 또 나의 좌우(左右) 같이 어진 그곳의 사우들과 더불어 다시 예전 그날처럼 따라 노니는 즐거움을 도모할 줄을 어찌 알았겠습니까? 더없이 감격스럽습니다. 강회(講會)에 왕림(枉臨)하여주심을 미리 간절히 기뻐하며 기다리겠습니다. 日月不爲孝子留。而巾堂就吉。計已久矣。伏惟至情慨廓。何以堪支。忝在知舊之末。而竟闕匍匐之儀。此何事理。愧負實深。然而盛鑑大度。不較不猶。辱賜惠存。致意繾綣。執書感惻。不知所以爲答。因審侍省節宣安重。尤叶願聞。義林衰頹淟劣。無足奉煩。竊念頃年與貴中士友。講聚於興樂之間者。累矣。而苒苒歲月。已四十餘年矣。所與遊從擧皆零散。每不勝追傷之至ㅡ豈知今日又與貴中士友賢如吾左右。復圖遊從之樂如前日耶。尤用感感。講會枉臨。預切欣企。 개확(慨廓) 소상(小祥)과 대상(大祥)을 지낸 것을 말한다. 상을 당한 처음 어쩔 줄 모르는 마음을 '충충(充充)'이라 하고, 빈소(殯所)에 봉안한 다음 안타까워하는 마음을 '구구(瞿瞿)'라 하고, 소상 때 세월이 빠른 것을 탄식하는 마음을 '개(慨)'라 하고, 대상 때 정의(情意)가 허전한 것을 '확(廓)'이라고 한다. 《예기(禮記)》 〈단궁 상(檀弓上)〉 절선(節宣) 철에 따라 몸을 조심하는 것을 가리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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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백후【유묵】에게 답함 答梁伯厚【維黙】 길이 멀고 인편이 드문데 이번 편지는 어떻게 보내셨는지요. 깊이 돌보아주심을 삼가 알았으니 감사하기 한량이 없습니다. 오랜 객지 생활에서 돌아오지 못하고 또 이번 봄을 보내게 되었으니 나의 고향 동산과 친구들을 저버리는 뜻이 많습니다. 대저 이 몸이 이사【搬移】를 한 것은 비록 사계(私計)의 부득이함에서 나왔을 뿐이지만, 그대의 고을이 멀지 않으니 아침저녁으로 함께 종유하여 만년(晩年)에 의지할 곳으로 삼을 수 있겠다고 생각하였습니다. 하지만 풍랑이 그치지 않아 한 조각 부평초와 같은 배가 아직도 이처럼 흔들리고 있을 줄을 누가 알았겠습니까. 다만 생각건대 그대의 형제가 몸을 닦고 힘써 공부하면서 이미 자숙(自淑)한 다음에 또 가끔씩 편지를 보내주시어 객지에서 쓸쓸하게 지내는 나의 회포를 위로해주시니, 참으로 민망합니다. 구구한 이 몸의 일은 비록 마침내 어떤 상황이 될는지 알 수가 없으나, 만약 고향으로 돌아가서 집을 찾을 날이 있다면 마땅히 그대와 함께 오봉(五峯)의 물과 바위 사이를 소요하면서 서로 마주하고 글을 읽으면서 여생을 보낼 것입니다. 오직 백후(伯厚) 그대는 더욱 스스로를 경계하고 검칙(檢飭)하여 우리 두 사람이 처음부터 끝까지 예사롭게 사귈 뿐은 아니도록 하기를 바랍니다.도리(道理)는 천연적으로 본디 존재하는 것64)인데, 어찌 새로운 해석을 한다거나 새로운 해석을 할 수 없다는 말을 할 수가 있겠습니까. 다만 사람의 생각으로 특별한 입장에서 새로운 해석을 한다는 것입니다. 전문(傳文)은 증자(曾子)의 뜻을 그의 문인(門人)들이 기록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증자의 말씀에 특별히 '증자왈(曾子曰)'이라고 쓴 것일 뿐입니다. 路迃便稀。此書何從而至。仰認傾眷。感佩沒量。久客不歸。又此送春。其所以負我鄕園知舊之意。多矣。大抵此身搬移。雖出於私計之不得而已。惟是仁里不遠。謂可以朝夕相從。爲晩暮毗倚之地。誰知風浪未定。而一片萍帆。尙此搖搖哉。但念我友昆季躬修力學。旣以自淑又能種種寄聲。慰此羈泊寂寥之懷。可憒可憒。區區身事。雖不知竟作何狀。而若有還山尋巢之日。則當與我友逍遙相對於五峯水石之間。尋行數墨。以遺餘日也。惟伯厚益目警勅。無使吾兩人爲終始閒追逐也。道理是天然自有底。何嘗有解新不解新之可言。但人之意思特地解新。傳文是曾子之意。而門人記之。故於曾子之言。則特以曾子曰識之耳。 천연적으로 본디 존재하는 것 정자(程子; 정이(程頤))의 말로 《이정유서(二程遺書)》 권17에, "모든 사물에는 다 천연적으로 중(中)이 있어서 사람이 안배할 필요가 없다.【事事物物上皆天然有個中在那上, 不待人安排也.】"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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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회일에게 보냄 與奇會一 두 서생(書生)이 이미 돌아갔으니 누가 오늘 다시 노형(老兄)이 손수 쓴 서한을 볼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였겠습니까. 서글프면서도 위로가 되는 것을 말로 다 할 수 없습니다. 〈경부담판(京部談辨)〉56)을 삼가 읽어보았습니다. 공정하고 사심 없는 본성이 조금도 꺾이지 않았으며 엄밀하고 강직함이 가을 서리처럼 늠름하였습니다. 비록 쓰러질 듯 나약하여 죽을 날이 가까웠지만 한 올의 실 같은 선비의 기상이 죽지 않았습니다. 서한을 통해 형의 체후가 편안하지 못하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험난한 일을 두루 겪은 것이 이토록 오래되었으니 노쇠한 기력에 어찌 그렇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부디 가호(加護)하여 사문(斯文)이 다행스럽게 여기도록 하시기 바랍니다. 백수형(白水兄)의 병이 매우 위태롭다는 소식을 듣고 걱정이 치달아 마음을 진정할 수 없습니다. 요즈음은 덜하거나 심하거나 하는 증상이 또 어떤지 모르겠습니다. 달려가서 안부를 살피지 못하는 것이 한스럽습니다. 아우는 병이 거듭된 끝에 피곤하고 초췌한 것이 고질이 되었으니 아마도 다시는 평소 모습을 되찾지 못할 듯합니다만 어쩔 수 없는 상황을 어찌하겠습니까. 요즘 세상 소식은 근래 들은 바가 있습니까? 하늘이 내린 재앙을 거두려는 마음을 지녀 혹시 국운(國運)이 융성해지는 날이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굴삼려(屈三閭)가 말한 "오래 살아서 세상을 초탈하고자 한다."57)는 것이 애초에 요즘 제가 지닌 뜻이 아닌 적이 없습니다. 애산(艾山 정재규(鄭載圭)) 형은 서로 소식을 들었습니까? 얼마 전 돌아오는 길에 구동(龜洞 최익현(崔益鉉)이 살던 곳)으로 들어가 조문하였는데 한쪽 사람들의 시끄러운 의론을 그치게 하였습니까? 《면옹유고(勉翁遺稿)》는 한창 간행하려고 계획한 것은 과연 그리했는지요? 비문(碑文)의 정본(定本) 또한 얼마나 산삭(刪削)하여 간추렸는지 보셨습니까? 쌓인 회포가 산처럼 높지만 일일이 고하기 어렵습니다. 다만 날씨가 서늘해지거든 한 번 나아갈 계획입니다만 노정(路程)이 성부(城府)를 지나기가 매우 불편하니 어쩌겠습니까. 형이 때에 맞추어 체후를 잘 보전하기만 바랄 뿐입니다. 二生旣告返矣。誰謂今日得復見老兄手筆耶。悲慰不可言。京部談辨。謹已讀之。正大之情。不少沮撓。而嚴密剴直。凜如秋霜。雖靡靡孱弱。幾乎垂盡之日。而一縷士氣。爲不死矣。仍審兄候有不安之節。備經險難。至此之久。而衰老氣力。安得不然。千萬加護。以幸斯文。白水兄所愼。聞甚沈重。馳慮之至。不能定情。未知日間歇劇又何如。未能趨走相省。恨恨弟積病之餘。羸瘁成痼。恐不得復作平時人。勢也何爲。時耗近有所聞否。未知天心悔禍。而祚宋或有其日耶。屈三閭所謂長生度世者。未始非區區今日之意也。艾兄有相聞否。向日回程入吊龜洞。而有以破一邊嘵嘵之口耶。勉翁遺稿方營刊始。果然。而碑文定本。亦見其有多少刪畧耶。積懷如山。有難枚告。第待凉生。爲一造計。而但路過城府。極爲不便。奈何。只祝兄體爲時保重。 〈경부담판(京部談辦)〉 《송사선생문집(松沙先生文集)》 권12 〈잡저〉에 수록되어 있다. 오래……한다 이 내용은 주자가 유덕수(劉德修)에게 답한 편지의 "굴평(屈平)이 이미 지나간 것은 어쩔 수가 없고 앞으로의 일은 알지 못하니, 오래 살아 속세를 초탈하고자 하는 소원이 있었다.【屈平, 以往者不及, 來者未聞, 而有長生度世之願.】"라는 구절을 원용하였다. 《晦庵 續集 卷4 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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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순견10)【국정】에게 답함 答安舜見【國禎】 며칠 전 귀성(貴星 상대방의 심부름꾼)이 왔을 때 바쁘다 보니 답장을 보내지 못하였습니다. 요사이 날이 맑고 따뜻한데 상중(喪中)의 체후는 편안하시며, 일마다 성찰하고 이르는 곳마다 스스로 살피고 궁구하는 일로 눈앞에 닥친 응수(酬應)와 일상의 공부가 서로 배치되는 일은 없으십니까. 학자(學者)의 병통은 바로 이치와 일을 각각 둘로 구분하는 데 있으니, 이것은 자신을 채찍질하여 자신과 아주 가깝게 할 수 없는 병통입니다. 정자(程子)가 말하기를, "존심양성(存心養性)을 하지 못한다면 단지 말일 뿐이다."11)라고 하였으니, 이 말을 깊이 유념해야 합니다. 아우는 평소 남보다 모자란 자질에 꾸물대다가 때를 놓치는 일이 더해져 나이는 많아지고 기력은 쇠퇴한 채 온갖 일에 바빴습니다. 시인(詩人)이 말한 "내가 이럴 줄 알았더라면 차라리 태어나지 말 것을."12)라는 것이 시로 내 마음을 먼저 포착한 말입니다. 강생(姜生)의 문목(問目)에서 주해(註解) 운운한 조목의 말은 주서(朱書)에 보이는지요? 아우는 참으로 전날의 제 주장에 미진한 부분이 있다는 것을 알고 곧 "참되고 고요하다는 것은 이(理)의 측면에서 말한 것이고 미발(未發)은 심(心)의 측면에서 말한 것이다."라고 다시 바로잡았습니다. 지금 형의 말씀을 보니 더욱 의혹이 사라져 크게 감사하고 다행스러운 마음입니다. 혼백 운운한 것에 대해 말씀드리자면, 음양(陰陽)은 서로 그 속에 내재하여 본래 칼로 자르듯 음이 되고 양이 되는 이치가 없습니다. 혼(魂)은 양의 영(靈)이고 백(魄)은 음의 영이며, 혼은 발용(發用)을 위주로 하고 백은 수장(收藏)을 위주로 합니다. 이것은 큰 구분입니다. 그러나 수장처(收藏處)에 발용함이 있고 발용처에 수장함이 있습니다. 이것이 서로 내재하는 것입니다. 입이 맛을 알고 코가 냄새를 아는 것은 본래 백(魄)이지만 혼(魂)도 그 안에 있습니다. 이것은 마치 거울의 바탕이 본래 밝고 물의 표면이 본래 맑은 것은 백이지만 광채가 밝게 드러나고 사물을 만나면 반드시 비추는 것은 혼인 것과 같습니다. 어찌 칼로 자른 듯이 혼이 되고 백이 되는 이치가 있겠습니까. 다시 세세히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日者貴星之來。緣忙稽謝。卽日晴暄。孝候支迪。隨事省察。隨處體究。有以見眼前酬應與日用工夫。不相背馳否。學者之病。正在於理事各成兩截處。此是不能鞭辟切近之病。程子曰。若不能存養。只是說詁。此言當深念也。弟素以不逮之質。加以因循失時。年力衰替。百故鞅掌。詩人所謂知我如此。不如無生。實是先獲我心者也。姜生問目一條語註解云云見於朱書耶弟固知前日鄙說之有未盡處。旋復改之曰。眞而靜是理上說。未發是心上說。今見俯示。尢覺釋然。其感幸大矣。魂魄云云。夫陰陽互藏其宅。本無截然爲陰爲陽之理。魂者陽之靈。魄者陰之靈。魂主發用。魄主收藏此則大分也。然收藏處有發用。發用處有收藏。此則互藏也。口之知味。鼻之知臭。固魄也。而魂亦在其中。如鑑之地本明。水之面本淸者。魄也。而其光彩著見。遇物必照者。是魂也。豈有截然爲魂爲魄之理也。更望細思。 안순견 순견(舜見)은 안국정(安國禎, 1854∼1898)의 자이다. 본관은 죽산(竹山), 호는 송하(松下)이다. 기우만(奇宇萬)의 《송사집(松沙集)》 권38에 〈송하거사안공묘갈명(松下居士安公墓碣銘)〉이 실려 있다. 만약……뿐이다 정호(程顥)의 말로, 《이정유서(二程遺書)》 권1에 보이며, 《근사록(近思錄)》 권4 〈존양(存養)〉에도 채록되었다. 내가……것을 《시경(詩經)》 〈초지화(苕之華)〉에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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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덕랑 둔와 박공 묘갈명 通德郞遯窩朴公墓碣銘 숨은 덕행이 세상에 드러나지 않은 사람 가운데 그 공업이 그다지 기이하지 않고 그 명예가 그다지 특별하지 않지만, 선조가 공덕을 쌓아 누리지 않은 보답이 이따금 후세 자손 사이에 드러나기도 한다. 이 때문에 자손을 보고서 그 선조의 덕을 알 수 있는 것이다. 둔와(遯窩) 박공(朴公)은 태어나 많은 일을 당하고 온갖 어려움을 겪어 마침내 천관산(天冠山)으로 들어가 문을 닫고 독서하여 생도들을 가르치며 한가롭게 소요하다가 그대로 생을 마감하였다. 세상에는 실로 명성(名聲)을 얻지 못했는데도 알려지는 경우가 있으니, 더구나 여기에 나아가 그에 대한 사실이 존재함을 아는 경우야 말해서 무엇 하겠는가. 심지어 죽은 뒤에 자손이 더욱더 번성하여 문학과 관직으로 성대함이 뒤따라 우뚝이 남쪽 고을의 명가가 되었다. 이에 사람들이, 공이 쌓은 공덕의 실상에 탄복하였으니, 단연코 속일 수 없는 점이 있다.공의 휘는 만윤(萬潤), 자는 중실(仲實)이니, 세계는 밀성(密城)에서 나왔다. 고려(高麗) 때 밀성군(密城君) 휘 언부(彦孚), 은산군(銀山君) 휘 영균(永均), 밀성군(密城君) 휘 천경(天卿), 그리고 조선에 들어와서 문정공(文貞公) 휘 부(敷)는 모두 이름이 높이 드러난 선조이다. 문정공 아우의 셋째 아들은 윤리(允利)인데, 좌찬성(左贊成)으로 점필재(佔畢齋) 김 선생(金先生)의 뛰어난 제자이다. 찬성공의 5세손은 계문(啓文)인데, 군자감 정(軍資監正)으로, 처음 호남의 장흥(長興)에 거주하였는데, 바로 공의 고조이다. 증조 경립(景立)은 공조 참의이고, 조부 인적(仁績)은 한성부 좌윤(漢城府左尹)이며, 부친 세장(世章)은 동지중추부사이다. 모친은 정부인(貞夫人) 행주 기씨(幸州奇氏)로, 기수흥(奇壽興)의 따님이다. 영묘(英廟) 경술년(1730, 영조6)에 부(府)의 종정리(鍾亭里) 사제에서 공을 낳았고, 정묘(正廟) 신축년(1781, 정조5) 1월 20일에 생을 마감하였다. 남하면(南下面) 동촌(洞村) 뒤 술좌(戌坐) 언덕에 장사 지냈다. 배위(配位)는 분성 김씨(盆城金氏) 김덕해(金德海)의 따님이다. 모두 아들 셋을 두었으니, 이형(履亨), 이중(履重), 이덕(履德)이다. 손자 이하는 다 기록할 수 없다.현손(玄孫) 희원(凞元)이 내가 교유한 친분이 있다는 이유로 그 종제 희준(凞俊)을 보내 묘갈문을 지어 달라고 청하니, 감히 사양하지 못하였다. 다음과 같이 명을 짓는다.아름다운 나무는 뿌리 감추고210) 嘉木晦根좋은 옥은 광채 품고 있네. 良玉蘊光음덕에 대한 보답으로 不食之報후손이 번창하리라. 後錄彌昌 人有隱德而不需於世者。其功業不甚奇也。其聲稱不甚異也。而積累不食之報。往往發見於後嗣子孫之間。是以。觀乎子孫而其先德可知也。遯窩朴公。生丁多故。備經百艱。遂入天冠山中。杜門讀書。敎授生徒。婆娑徜徉。聊以卒世。世固有不得其名而知之。況進於此而識其實之所存哉。至於身後而螽斯椒聊。愈益蕃衍。文學科宦。從以蔚興。偉然爲南州之名家。於是而人服公積累之實。斷斷有不可誣者矣。公諱萬潤。字仲實。系出密城。麗朝密城君諱彦孚。銀山君諱永均。密城君諱天卿。入我朝。文貞公諱敷。皆其顯祖也。文貞弟三子曰允利。左贊成。佔畢齋金先生高弟。贊成五世孫曰啓文。軍資監正。始居湖之長興。卽公之高祖也。曾祖景立。工曹參議。祖仁績。漢城左尹。考世章。同中樞。妣貞夫人幸州奇氏壽興女。英廟庚戊。公生于府之鍾亭里第。正廟辛丑正月二十日考終。葬南下面洞村後戌坐原。配盆城金氏德海女。擧三男曰履亨履重履德。孫以下不能盡錄。玄孫凞元。以余有游從之舊。伻其從弟凞俊。謁碣銘之文。不敢辭。銘曰。嘉木晦根。良玉蘊光。不食之報。後錄彌昌。 아름다운……감추고 병산(屛山) 유자휘(劉子翬)가 주희의 자(字)를 원회(元晦)라 지어 주며 남긴 축사에 "나무는 뿌리를 감추어야 봄의 자태가 찬란히 펴지고, 사람은 몸을 감추어야 정신이 안에서 살찐다.[木晦於根, 春容燁敷; 人晦於身, 神明內腴.]"라고 하였다. 《屛山集 卷6 字朱熹祝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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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부

가선대부 행 전라도좌우후 조공 묘갈명 嘉善大夫行全羅道左虞侯趙公墓碣銘 아, 이곳은 고(故) 가선대부 행 전라도 좌우후 조공 휘 종성(鍾成), 자 문익(文益), 호 해은(海隱)의 옷과 신발이 묻힌 곳이다. 공은 태어나서 지극한 성품이 있었고, 양친을 효성으로 섬겨 구체(口體)의 봉양과 심지(心志)의 봉양을 위해서는 힘을 다해 주선해서 다 갖추어 드렸다. 병을 간호할 적에는 지극히 근심하여 팔을 휘저으며 걷지 않고, 웃을 때 잇몸을 드러내지 않았으며,211) 변이 단지 쓴지를 맛보아 병세에 대한 차도를 알아보았다. 이에 효성이 하늘에 감응하여 산 꿩이 뜰에 떨어지는 일이 있기까지 하였다. 상례를 거행할 적에는 지나치게 슬퍼하여 거의 목숨을 해칠 정도였고, 부친과 모친상에 모두 6년 동안 시묘살이를 하였다. 향리에서 안타까워하여 지속적으로 천거하였다.집안이 본래 너무나 가난하였는데, 공이 부지런하고 검소하여 재물을 모아 집안 살림을 일으켰다. 그러나 친족과 이웃의 가난하고 주린 사람을 구휼하는 일에 대해서는 아끼는 바가 없어 각각의 사람들에게 그 마음을 얻었다.순묘(純廟) 경인년(1830, 순조30) 11월 8일은 바로 그가 태어난 날이다. 정해년(1887, 고종24)에 의금부 도사에 제수되고, 경인년(1890)에 6품으로 올랐으며, 계사년(1893)에 전라도 좌우후(全羅道左虞侯)에 제수되고, 이해 가을에 통정대부에 올랐으며, 임인년(1902)에 가선대부에 올랐다. 관직에 있을 적에는 백성을 사랑하고 은혜를 베풀었으며, 힘써 폐단을 제거하였으니, 집집마다 칭송하여 갈수록 더욱 자자해졌다. 병오년(1906) 12월 28일에 집에서 별세하였으며, 현(縣)의 입암리(笠巖里) 해좌(亥坐) 언덕에 장사 지냈다.조씨(趙氏)의 본관은 한양(漢陽)이다. 고려(高麗) 때 첨의중서사(僉議中書事) 휘 지수(之壽)가 시조이다. 한천부원군(漢川府院君) 양절공(良節公) 휘 온(溫)이 중대의 현조(顯祖)이다. 증조는 참봉에 추증된 휘 사보(士普)이고, 조부는 휘 참봉에 추증된 휘 제채(濟采)이며, 부친은 공조 참판에 추증된 휘 인경(仁敬)이다. 모친은 정부인(貞夫人) 선산(善山) 임씨(林氏)로, 임상원(林相原)의 따님이다. 계비(系妣)는 정부인 전주 이씨(全州李氏)로, 이원도(李源道)의 따님이다. 공은 연안 차씨(延安車氏) 윤백(允伯)의 따님에게 장가들었다. 모두 2남 3녀를 두었으니, 기원(基元)은 전서(典書), 용원(龍元)은 주사(主事)이다. 사과(司果)인 경주(慶州) 김원영(金元永), 사과인 경주 김기활(金琪活), 임천(利川) 서선재(徐善才)가 사위이다. 장자의 아들은 병연(炳燕), 차자의 아들은 병선(炳善)이다.기원이 족인(族人) 병두(炳斗)를 보내 묘갈명을 청하였다. 나는 적합한 사람이 아니라는 이유로 사양하였지만 되지 않아 삼가 가장(家狀)에 의거하여 이상과 같이 기술하여 명을 짓는다.입암의 기슭에 笠巖之麓우뚝한 넉 자의 봉분이 있네. 有崇四尺효자가 묻혔으니 孝子之藏현인의 유택일세. 賢人攸宅지나는 사람 가리키고 行路指點초동이 공경할 줄 아네. 樵牧知敬봄가을로 제수 올리니 春秋苾芬자손들이 한없이 번성하네. 子孫繩繩 嗚呼。此故嘉善大夫行全羅道左虞侯趙公諱鍾成。字文益。號海隱衣履攸藏也。公生有至性。孝事兩親。凡口體之奉。心志之養。周旋竭蹶。無不畢給。侍疾致憂。不翔不矧。嘗糞甛苦。以試差劇。孝感攸至。至有山雉下庭。執喪過毁。幾於傷生。居盧墓側。前後六年。鄕里感傷。剡薦相續。家素貧甚。公勤儉積累。以起産業。然於族戚隣里周窮恤匱之節。無所係吝。各得其心。純廟庚寅十一月初八日。卽其寅降也。丁亥除禁府都事。庚寅陞六品。癸已拜全羅道左虞侯。秋陞通政。壬寅陞嘉善。其在官。愛民施惠。務祛敝瘼。家稱戶頌。久愈藉藉。丙午十二月二十八日考終于居第。葬縣之笠巖里亥坐原。趙氏本漢陽人。麗朝僉議中書事諱之壽爲始祖。漢川府院君良節公諱溫。其中系顯祖也。曾祖贈參奉諱士普。祖贈參奉諱濟采。考贈工曹參判諱仁敬。妣貞夫人善山林氏相原女。系妣貞夫人全州李氏源道女。公娶延安車氏允伯女。擧二男三女。曰基元典書。曰龍元主事。曰慶州金元永司果。曰慶州金琪浩司果。曰利川徐善才。長房男炳燕。次房男炳善也。基元伻其族人炳斗。來謁隧道之文。余以非其人辭不獲已。謹据狀而纂次之如右云爾。銘曰。笠巖之麓。有崇四尺。孝子之藏。賢人攸宅。行路指點。樵牧知敬。春秋芯芬。子孫繩繩。 팔을……않았으며 《소학》 〈명륜(明倫)〉에 "부모가 병환이 있으면 장성한 아들은 머리를 빗지 않으며, 다닐 때 팔을 벌리고 흔들어 대면서 활기차게 걷지 않으며,……웃되 잇몸이 보이도록 크게 웃지 않는다.[父母有疾, 冠者不櫛, 行不翔,……笑不至矧.]"라는 내용이 보인다. 본래 《예기》 〈곡례 상(曲禮上)〉의 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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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편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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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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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부

강정행【의형】에게 보냄 與姜正行【義馨】 상중에는 담제(禫祭)를 지내지 않는 것은 본래 관련된 글이 있지만, 자식의 상사(喪事)에 장례를 치른 뒤라면 담제를 지내지 않을 리가 없을 듯합니다. 자식【맏아들】을 위해 참최복을 하더라도 해관(解官 상기(喪期) 동안 벼슬에서 물러나는 것)을 하지 않으니78) 이것이 방증할 수 있는 하나의 증거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근거로 삼아 행할 수 있는 확실한 증거가 없어 마음이 편치 않다면 상이 있어 참여하지 못한다는 뜻으로 글을 지어 고유(告由)하고 가벼운 복을 입는 이에게 담제를 섭행하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이것은 근거가 없는 억설(臆說)이니 다시 예를 아는 사람에게 질정하여 행해야 합니다. 서모(庶母)에 대해 이미 동찬(同爨 한솥밥을 먹는 것)을 근거로 시마복(緦麻服)을 하니 정성을 다해 부모를 봉양하고 정성을 다해 상을 치르는 것이 어찌 동찬의 의리보다 못하겠습니까. 예는 인정에 근본하고 후하게 하는 쪽을 따르는 것이 옳다는 것이 이 경우를 이릅니다.【문】 제사를 지낼 즈음 집안에 비복(婢僕)의 상이 있거나 산부(産婦)가 있다면 제사를 그만둬야 합니까? 우복(愚伏 정경세(鄭經世))이 "예(禮)에 따르면 같은 집에 살면 신첩(臣妾)이라도 매장을 한 뒤 제사를 지낸다."79)라고 하였습니다. 이로써 보면 제사를 그만두는 것이 옳을 듯합니다.【답】 산부가 있다면 불결하므로 제사를 지내서는 안 됩니다. 구천(龜川)80)은 "비복의 상에는 매장을 한 뒤 제사를 지낸다."라고 하였습니다.【문】 산부가 있는 경우로 보자면, "처는 자식을 낳는 달이 되면 측실(側室)에 거처한다. 아이가 태어나면 남편은 사람을 시켜 날마다 두 번씩 묻게 한다. 남편이 재계(齋戒)하면 측실의 문에 들어가지 않는다."81)라고 하였으니, 산부가 있더라도 제사를 지내야 하는 것이 옳다고 하였습니다. 매장을 한 뒤에 제사를 지낸다면 월수를 계산하지 않고 정일(丁日)을 택해 제사를 지냅니까? 산부가 있더라도 제사를 지내야 한다면 측실이 없는 경우에는 할 수 없을 듯합니다.【답】 매장을 한 뒤에 제사를 지낸다는 것은 연제(練祭 소상제)와 상제(祥祭 대상제)를 가리킵니다. 기제(忌祭), 시제(時祭), 담제 등은 시기가 지나면 제사를 지내지 않습니다. 喪中無禫。固有其文。而子喪葬。後似無不禫之理。雖爲子復斬。而不解官。則此可爲旁照之一證。然旣無的證可據而行之。於心若末安。則以有喪不參之意。措辭告由。而使服輕者。攝而行禫如何。此是無據之臆說也。更質於識禮處而行之也。庶母旣以同爨而緦。則其殫誠養親。執喪玖誠。豈下於同爨之義乎。禮本人情。從厚爲得者。此之謂也。將祭而家內有婢僕之喪或産婦。則當廢祭乎。愚伏曰。禮同宮則雖臣妾。葬而後祭。以此觀之。廢之似當。有産婦則不潔。不可祭也。龜川曰。婢僕之喪。葬後而祭。至産婦。則妻將生子之月。居側室。子生。夫使人日再問之。夫若齊。則不入側室之門。雖有産婦。當祭之可也云。若葬後而祭。則不計其月。擇丁日而祭乎。雖有産婦。當祭之。則無側室者。似不可。葬而祭。練祥之謂。若忌祭時祭禫祭之類。過時則不祭。 자식【맏아들】을……않으니 《주자대전》 권62 〈답이회숙 5〉에서 이휘(李煇)가 묻기를 "장자를 위해서는 삼년복을 입고, 백부ㆍ숙부ㆍ형제를 위해서는 모두 기년복을 입는데 관직에 있는 자는 벼슬에서 물러나지 않고, 선비는 과거 응시를 허락하니, 공무(公務)를 볼 때와 과거에 응시할 때 길복을 입어야 하는지 최복을 입어야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만약 길복을 입어야 한다면 오복조(五服條)에 실려 있는 시기와 서로 어긋납니다.【爲長子三年及爲伯叔兄弟皆期服而不解官, 爲士者許赴擧, 不知當官與赴擧時, 還吉服耶? 衰服耶? 若須吉服, 則又與五服所載年月相戾矣.】"라고 하였다. 같은……지낸다 《예기》 〈잡기(雜記)〉에 보이며 원문은 다음과 같다. "부모의 상에 소상(小祥), 또는 대상(大祥) 제사를 지내려고 하는데 (떨어져 사는) 형제가 사망하면 빈(殯)이 끝나기를 기다린 뒤에 제사를 지낸다. 만일 같은 집에 사는 이가 사망하면 비록 사망한 이가 신첩(臣妾)과 같은 천한 신분이라고 해도 장례(葬禮)를 마친 뒤에 제사를 드린다.【父母之喪, 將祭, 而昆弟死, 旣殯而祭. 如同宮, 則雖臣妾, 葬而后祭.】" 구천(龜川) 이세필(李世弼, 1642∼1718)의 호이다. 이항복(李恒福)의 증손으로 송시열, 박세채의 문인이다. 해당 내용은 《구천선생유고(龜川先生遺稿)》 권32, 〈답권여유(答權汝柔)〉에 보인다. 처는……않는다 《예기(禮記)》 〈내칙(內則)〉에 내오는 말이다. "처는 자식을 낳으려고 할 때 해산달의 초하루가 되면 측실에 거처한다. 남편은 사람을 시켜서 매일 두 번씩 묻게 한다.……남편은 재계할 때라면 측실의 문을 들어가지 않는다.【妻將生子, 及月辰, 居側室, 夫使人日再問之.……夫齊則不入側室之門.】"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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