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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집의 소년을 한탄하며 歎人家少年 소년이 독서를 그치고 스승을 멀리 떠나 少年輟讀遠離師인간세상 거칠고 사나운 아이 되려하네 欲作人間傑驁兒불세출의 공명을 죽백231)에 기약하려고 不世功名期竹帛한 번 사는 목숨을 터럭처럼 여기누나 一生軀命視毫絲만리의 타지방으로 홀연히 달려가더니 忽奔萬里他方地천금의 가업232) 자산을 먼저 망쳤구나 先敗千金祖業資뜻이야 가상타 해도 계모가 졸렬하니 志則雖嘉謀則拙선을 부지런히 행하는 본원을 빠뜨렸네233) 本原闕却善孜孜 少年輟讀遠離師, 欲作人間傑驁兒.不世功名期竹帛, 一生軀命視毫絲.忽奔萬里他方地, 先敗千金祖業資.志則雖嘉謀則拙, 本原闕却善孜孜. 죽백(竹帛) 죽간(竹簡)과 포백(布帛)으로 역사책을 말한다. 가업 '조업(祖業)'은 조상 때부터 내려오는 가업을 말한다. 선을……빠뜨렸네 《맹자》 〈진심 상(盡心上)〉에 "새벽에 닭이 울자마자 일어나서 부지런히 선행을 힘쓰는 자는 순 임금의 무리요, 새벽에 닭이 울자마자 일어나서 부지런히 이익을 구하는 자는 도척(盜跖)의 무리이다. 순 임금과 도척의 구분을 알고자 한다면, 다름이 아니라 이익을 탐하고 선행을 좋아하는 그 사이에 있을 뿐이다.[雞鳴而起, 孶孶爲善者, 舜之徒也, 雞鳴而起, 孶孶爲利者, 跖之徒也. 欲知舜與跖之分, 無他, 利與善之間也.]"라고 한 말을 인용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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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덕윤의 자설 金德潤字說 김생(金生)이 이별하고 떠나간 지 여러 해가 되었는데, 하루는 관례를 치르고 찾아왔다. 내가 표덕(表德 자(字))을 무엇으로 했는지 묻자, "덕윤(德潤)입니다. 부친께서 명명해 주신 것입니다."라고 하니, 내가 말하였다. "의미가 있구나. 명명함이여. 의로운 방도로 가르쳤다고 이를 만하다. 마음에 부끄러움이 없어 몸이 항상 펴지고 느긋한 것은 덕이 몸을 윤택하게 해서이다. 양기가 만물을 기르듯 성대한 기운이 몸에 가득하고, 산처럼 의연하게 서며, 얼굴이 옥빛처럼 아름답고, 목소리가 종소리처럼 쟁쟁한 것은 덕이 몸을 윤택하게 해서이다. 덕이 맑게 얼굴에 드러나며 등에 가득하여 사체(四體)가 말하지 않아도 깨닫게 되는 것은 덕이 몸을 윤택하게 해서이다. 좌로 준승(準繩)이 되고 우로 규구(規矩)가 되어 거동과 용모가 예에 맞는 것은 덕이 몸을 윤택하게 해서이다. 진실로 존양성찰(存養省察)36)의 공부가 쌓여서 지극히 순수하고 완숙한 경지에 이른 자가 아니라면 어떻게 여기에 미칠 수 있겠는가?공자가 말하기를, '덕을 아는 사람이 드물다.'라고 하였는데, 대저 '덕' 한 글자를 어느 누가 모르겠는가마는 드물다고 말한 것은 어째서인가? 여기에 반드시 지극한 뜻이 담겨 있을 것이다. 모르겠네만 덕윤은 그 뜻을 알고 있는가? 부친께서 명명하신 것인데 모른다고 말해서야 되겠는가. 내 자신이 이름으로 삼은 것인데 모른다고 말해서야 되겠는가. 친구들이 부르는 것인데 실상도 없이 응답해서야 되겠는가. 반드시 '덕윤'의 실상이 있는 뒤에야 '덕윤'이라는 이름에 부응하고, 부친께서 명명하신 뜻을 저버리지 않을 수 있을 것이니, 나는 김생을 위해 두렵게 여기네." 金生別去有年。一日突弁而來。余問其表德云何。曰德潤。大人所命。余曰。有意哉命之也。可謂敎之以義方也。心無愧怍。體常敍泰者。德之潤身也。揚休山立。玉色金聲者。德之潤身也。粹面盎背。四體不言而喩者。德之潤身也。左準繩。右規矩。動容中禮者。德之潤身也。苟非存養省察積累純熟之至。何以及此。孔子曰。知德者鮮。夫德之一字。人孰不知而曰鮮何也。此必有至義存焉。未知德潤知之乎。大人所命。其可曰不知乎。吾身所名。其可曰不知乎。朋友所呼。其可曰無實而答之乎。必有德潤之實而後。可副德潤之名。而不負大人丈命之之意也。吾爲生懼焉。 존양성찰(存養省察) '존양'은 마음을 보존하여 성을 기르는 것[存心養性]을 말하며, '성찰'은 자신의 사욕을 살펴 막는 것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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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군 선경에게 주다 贈鄭君善敬 공자가 말하기를, "중도를 행하는 사람을 얻어서 함께할 수 없다면 반드시 광자(狂者)나 견자(狷者)와 함께할 것이다. 광자는 진취적이고, 견자는 하지 않는 바가 있다."라고 하였는데, 맹자가 이 말을 인용하여 칠편(七篇)37)의 끝에서 여러 성인이 도통을 전수한 말 앞에 써 놓았으니, 그 뜻이 심원하다. 성현이 사람을 가르치고자 하는 뜻과 도를 전수하고자 하는 마음이 매우 간절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가르칠 만한 인재가 있지 않다면 어떻게 할 수 있겠는가.정군(鄭君) 선경(善敬)은 자태와 국량이 진실로 일반 사람과 달랐으니, 호탕하고 씩씩하여 어디에 얽매이지 않았고, 불우한 상황에서도 짝할 자가 없을 정도로 빼어났으며, 훤칠하니 수레를 뒤엎는 말과 같은 기상이 있었다. 내가 일찍이 혼잣말로, '이러한 사람은 애초부터 옛적에 일컬었던 광자와 같은 부류의 선비로 자신을 알아주는 사람을 만나지 못하고 귀의할 곳이 없어 홀로 쓸쓸히 유유자적하게 지내는 사람이 아닌 적이 없으니 어찌 함께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그런데 어느덧 세월이 점점 흘러 풍상(風霜)을 겪고 군의 나이가 이미 40을 넘게 되자 들뜬 생각이 사라지고 진실한 마음이 드러나면서 슬픔과 회한이 더욱 절실해지고, 분발함이 더욱 지극해졌다. 이에 문을 닫아걸고 종적을 감춘 채 《 대학(大學)》 한 책에 침잠하여 곱씹은 지 이미 오래되었다.아, 자애롭고 착하며 온화하고 부드러운 성격은 좋은 사람이 아닌 적이 없지만 나아가 성취하는 데에 힘이 없으니, 이것이 성인께서 취하지 않고 유독 광자와 견자를 취하신 이유이다. 김군은 이미 마음을 굽히고 머리를 수그리며 여기에 종사하고 있으니, 과감하게 나아가는 힘은 두려움 없이 홀로 설 수 있을 것이며, 강인한 뜻은 만 명의 사내라도 빼앗지 못할 것이다. 옛사람 말에 이르기를, "진정한 대영웅은 전전긍긍(戰戰兢兢)한 가운데에서 나온다."라고 하였으니, 군은 힘쓰게나. 孔子曰。不得中行而與之。必也狂狷乎。狂者進取。狷者有所不爲。孟子引此語。而書之於七篇之終群聖傳統之前者。其旨遠矣哉。聖賢誨人之意。傳道之心。非不切至。而非有可敎之才。則將何以爲之。鄭君善敬姿相器局。固已異於人矣。而豪爽不羈。落拓不群。軒軒然有覂駕之氣。余嘗自語。以爲此未始非古所稱狂士之流亞。而踽踽不遇悠悠不歸者。豈不可借。旣而歲月侵尋。風霜荏苒。而君之年。已四十有餘矣。浮念銷歇。眞心呈露。悲悔轉切。奮發愈至於是社門斂迹。將大學一書。沈潛咀嚼。蓋已久矣。嗚乎。慈善溫柔的。未爲不是好人。而其於進就無力焉。此聖人所不取而獨取狂狷者也。今君旣已屈心低首。從事於斯。則其果敢之力。剛毅之志。必將有獨立不懼。萬夫莫奪者矣。古人語曰。眞正大英雄自戰戰兢兢中出來。君其勉乎哉。 칠편(七篇) 《맹자》의 별칭으로, 본래 〈양혜왕(梁惠王)〉, 〈공손추(公孫丑)〉, 〈등문공(滕文公)〉, 〈이루(離婁)〉, 〈만장(萬章)〉, 〈고자(告子)〉, 〈진심(盡心)〉의 7편으로 이루어져 있었기 때문에 이렇게 부른다. 후한(後漢)의 학자 조기(趙岐, 108~201)가 환제(桓帝) 때에 처음으로 주석을 내고, 매 편을 각각 상하(上下)로 나누어 총 14편으로 만든 이후로 오늘날 통용되고 있는 《맹자》는 모두 14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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存問原癸亥十一月 日行縣監趙[官印](皮封)單子 一道堂北中里金 碩士炳觀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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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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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차계장류

1845년 김재상(金載相) 소지(所志) 고문서-소차계장류-소지류 법제-소송/판결/공증-소지류 乙巳十一月 日 金載相 城主 乙巳十一月 日 金載相 扶安縣監 전라북도 부안군 동진면 [署押] 1개 7.0*7.0(정방형) 적색 부안 서외 김채상 후손가 부안 서외리 김채상 후손가 1845년(헌종 11) 11월에 부안현 일도면 당북하리에 사는 김재상이 부안현감에게 올린 산송 소지. 1845년(헌종 11) 11월에 부안현(扶安縣) 일도면(一道面) 당북하리(堂北下里)에 사는 김재상(金載相)이 부안현감(扶安縣監)에게 올린 산송 소지(山訟所志)이다. 신축년에 김재상의 친산(親山)에 누군가가 투장(偸葬)을 하여 그 뒤 5년 동안 김재상은 밤낮을 가리지 않고 투장자를 찾았으나 끝내 찾지 못했다. 그동안 여러 차례 관에 소지를 올려 "투장자를 잡아오면 대변(對卞)하겠다"라는 제음(題音)을 받고, 사방으로 투장자를 찾았지만, 그 종적이 묘연했다. 그리하여 김재상은 기왕에 관에 올렸던 소지를 함께 첩연(帖連)하여 다시 관에 소지를 올리면서, 부디 관에서 투총을 파내어 원통함을 풀어달라고 하소연하였다. 이에 대하여 부안현감은 만일 관에서 묘를 파내는 일은 법에 저촉된다는 제사를 내렸다. 이 문서는 그 전년, 즉 갑진년에 올린 소지와 그 내용이 거의 동일하다. 다만 작성연대가 을사년으로 되어 있을 뿐이다. 이 을사년은, 김재상이 여러 차례 시장(柴場)을 사면서 받은 명문(明文)들을 통해서 볼 때 1845년으로 추정된다. (1815년 김재상(金載相) 시장문기(柴場文記), 1831년 김재상(金載相) 시장문기(柴場文記), 1834년 김재상(金載相) 시장문기(柴場文記) 등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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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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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간통고류

積阻悵仰謹審此來冬令兄體萬旺閤度勻慶何等仰慰叶祝弟間以山訟事往在大田昨夜還捿幸免火刻耳第示意謹審而言念此事亦赬然無顔色吾輩之此世此等事每每如此憤歎奈何上告一節 兄須深諒爲之弟何有良策耶且不得同席以議亦不可以一筆斷言何以則好耶盧氏云云其侄尙無回答盧氏亦往釜山云出發已爲十餘日尙無消息甚爲訝鬱以似不可信用可歎世道之駭怪也餘在續后不備謹謝上十二月七日弟金永旭拜拜(皮封前面)全北益山郡朗山面石泉里宋淳轅 仁兄升啓(皮封後面)大邱府 明治町二丁目一五三 金永旭十二月七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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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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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차계장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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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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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간통고류

1863년 행부안현감(行扶安縣監) 조영하(趙榮夏) 존문단자(存問單子) 고문서-서간통고류-서간 개인-생활-서간 癸亥十一月 日 行縣監趙 金炳觀 癸亥十一月 日 1863 行縣監 趙 金炳觀 전라북도 부안군 7.0*7.0(정방형) 적색 부안 서외 김채상 후손가 부안 서외리 김채상 후손가 1863년(철종 14) 11월에 행부안현감이 부안현 일도면 당북중리에 사는 김병관에게 발급한 존문단자. 1863년(철종 14) 11월에 행부안현감(行扶安縣監)이 부안현(扶安縣) 일도면(一道面) 당북중리(堂北中里)에 사는 김병관(金炳觀)에게 발급한 존문단자(存問單子)이다. 존문이란 고을의 수령이 그 지방의 형편을 알아보기 위해 관할 지역의 백성을 방문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 단자는 행부안현감이 김병관의 집을 방문할 때 발급한 것이다. 이 문서에는 발급년대가 계해년으로만 되어 있는데, 김병관과 같은 부안에 살면서 가까운 혈연관계에 있었던 김병헌(金炳憲)이 주로 1800년대 중반에 활동하고 있었던 점을 고려할 때, 위의 계해년은 1863년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이를 뒷받침해 주는 것은 단자를 보낸 부안현감 조 아무개가 바로 이 시기에 부안현감으로 봉직했던 조영하(趙榮夏)의 성씨와 일치된다는 점이다. 수령안(守令案)에 따르면, 조영하는 1863년 10월에 부안에 부임하여 이듬해 6월 부모의 병환을 이유로 사퇴하였다. 조영하는 본관이 풍양(豐壤)으로 21세 때인 1850년(철종 1) 증광 진사시에 합격했으며, 1861년(철종 12)에 식년문과에 급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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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주의 공암414)을 지나며 過公州孔巖 고청봉 아래의 서고청415)이여 孤靑山下徐孤靑천년토록 누가 다시 선생 같을까 千載誰復如先生만인이 다퉈 말하면 이적을 전하니 萬口爭說傳異蹟인걸에는 원래 땅의 영기가 모였네 人傑元來鍾地靈학문 쌓여 옥을 간듯 공부 정밀했고 學積精工如磨玉의리 엄정해 못을 끊듯 분수 지켰네 義嚴守分若斬釘만일 우뚝하게 수립한 것이 없었다면 苟無樹立卓然者어찌 해와 별처럼 경앙하게 되었겠나 那致敬仰如日星더구나 좁은 나라 상벌416)의 풍조에서였으니 矧在褊邦尙閥風선생이 공정한 평가 받았음을 더욱 믿겠네 益信先生得公評이곳 지나며 풍도 듣고도 흥기하지 않으면 過此如不聞風起인심이 영명하지 못한 것이니 어찌하겠나 其柰人心未靈明 孤靑山下徐孤靑, 千載誰復如先生?萬口爭說傳異蹟, 人傑元來鍾地靈.學積精工如磨玉, 義嚴守分若斬釘.苟無樹立卓然者, 那致敬仰如日星?矧在褊邦尙閥風, 益信先生得公評.過此如不聞風起, 其柰人心未靈明? 공암(孔巖) 공주(公州) 계룡산(鷄龍山) 자락에 있는 지명이다. 서고청(徐孤靑) 고청은 서기(徐起, 1523~1591)의 호로, 계룡산(鷄龍山) 고청봉(孤靑峯) 아래 살았으므로 이렇게 자호(自號)한 것이다. 본관은 이천(利川), 자는 대가(待可), 호는 고청초로(孤靑樵老)ㆍ구당(龜堂)ㆍ이와(頤窩), 시호는 문목(文穆)이다. 서경덕(徐敬德)ㆍ이지함(李之菡) 등에게 사사하였고, 제자백가(諸子百家)와 기술 이론에도 통달하였다. 출신이 미천하였으나 아는 것이 많고 문장에 능하여 배우는 이들이 많이 찾아들었다. 지평(持平)에 추증되고, 공주(公州) 충현사(忠賢祠)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고청유고(孤靑遺稿)》가 있다. 상벌(尙閥) 문벌을 숭상하는 것을 말한다. 《類選 卷3下 人事篇4 治道門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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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월 십일 계모임 날 밤에 벗들과 남아서 창수하다 2수 九月十日契會夜 留諸益唱酬【二首】 푸른 하늘에는 흰 달이 뜨고 靑天來素月뜨락의 국화 누굴 위해 피었나 庭菊爲誰開난세엔 글로 모이는 일 드문데 亂世稀文會일 년 중에 가장 좋은 때라네 一年最好時오늘 밤 내내 함께 하길 사양치 말게 莫辭永今夕만날 기약은 기필하기 어렵다네 難可必前期돌아가면 교분은 도로 그칠 것이니 歸去交還息문을 나가도 갈 곳이 없으리라 出門靡所之우리들이 모인 곳에 吾人會合處이별 아쉬워 일부러 더디 가네 惜別故遲遲늙고 쇠하여 예전의 모습 아니고 衰暮非前日위태한 시국에 이때를 만났네 危難適此時막다른 길에 완적 같은 이 많은데207) 窮途多阮籍옛 곡조에 누가 종자기208)일까 古調孰鍾期도리어 부럽도다 가을 하늘의 기러기 却羡秋天鴈높이 날아가고 싶은 데로 가나니 高飛任所之 靑天來素月, 庭菊爲誰開?亂世稀文會, 一年最好時.莫辭永今夕, 難可必前期.歸去交還息, 出門靡所之.吾人會合處, 惜別故遲遲.衰暮非前日, 危難適此時.窮途多阮籍, 古調孰鍾期?却羡秋天鴈, 高飛任所之. 막다른……하고 완적(阮籍)은 진(晉)나라 때 죽림칠현(竹林七賢)의 한 사람이다. 음률에 밝아 비파를 잘 탔고 호방한 기상이 있었으며 노장(老莊)을 추숭하였다. 완적이 혼자서 수레를 타고 마음 내키는 대로 가다가 길이 막혀 더 이상 갈 수 없는 곳에 이르러서는 한바탕 통곡하고 돌아왔다고 한다. 《晉書 卷49 阮籍列傳》 종자기(鍾子期) 춘추 시대 초(楚)나라 사람으로 음률(音律)에 정통했다. 백아(伯牙)가 산수에 뜻을 두고 거문고를 탔는데, 종자기가 알아들었다. 종자기가 죽자 백아가 세상에 소리를 알아듣는 사람이 없다 하여 거문고 줄을 끊어 버리고 종신토록 거문고를 타지 않았다. 《淮南子 修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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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경립의 자에 대한 설 朴景立字說 사람이 학문에 종사하는 것은 집을 짓는 일과 서로 비슷하다. 용마루는 태극(太極)에 대비되고 귀퉁이를 마주하고 떠받치는 것은 사덕(四德)86)에 대비되고 서까래와 문설주가 종횡으로 채워져 있는 것은 3천 곡례(曲禮)87)에 대비된다. 먹줄, 수평기, 자는 용모와 행동거지를 점검 단속하는 것이고 벽에 회칠하고 무늬를 넣는 것은 문장(文章)이 드러나는 것이고 당(堂)에 오르고 방에 들어가는 것은 도(道)로 들어가는 단계이다. 여기에서 노래를 부르고 여기에 모이는 것은 거처의 편안함이고, 종묘(宗廟)와 백관(百官)의 아름다움은 자뢰(資賴)함의 깊음이며,88) 천하의 빈한한 선비를 크게 감싸주는 것은 은혜를 널리 베풀어 대중을 구제하는 것89)이다.그러나 먼저 알맞은 터를 제대로 분별할 수 없다면 많은 사물이 모두 똑바로 설 곳이 없게 되니 언제 눈앞에 높이 솟은 이 모습을 보겠는가. 반드시 탁 트이게 하여 막히거나 장애가 되는 우환을 없게 하고 다지고 쌓아서 기울거나 무너질 염려가 없게 해야 한다. 그런 다음에 하늘에서 비를 내리기 전에 계획을 하고 집을 지으며 길옆에 지나면서 전해주는 다른 말을 끊어 버리고 자신의 부친이 이미 다다른 법도를 생각한다면 넓은 집에 머무르고 바른 자리에 서게 되니90) 아득한 팔황(八荒 온세상)이 모두 내 문지방 안에 놓이게 된다.아, 기초가 있어도 서지 못하는 자가 많다. 하물며 기초도 없이 스스로 수립할 수 있겠는가. 학자가 만약 큰 뜻을 확정하여 성신(聖神)91)을 자기의 임무로 삼고 천지를 동체(同體)로 여기지 않는다면 허다한 공부를 장차 어디에서 수립할 수 있겠는가. 요컨대 학문은 반드시 먼저 기초를 갖추어야 하고 기초가 갖추어진 뒤에는 반드시 수립하는 것이 있어야 한다. 기초를 갖추고 수립하는 것이 있다면 또한 도에 가깝지 않겠는가.나의 벗 박준기(朴準基)가 자(字)를 경립(景立)이라고 하였으니 취한 뜻이 진실로 여기에 있다. 人之爲學。與建屋子相似。屋脊方太極。對隅支柱方四德。榱櫨居楔縱橫塡補方曲禮三千。繩墨準尺者。容儀之檢束也。塗墍繪畵者。文章之著見也。升堂入室者。入道之等位也。歌於斯聚於斯。居之安也。宗廟百官之美。資之深也。大庇天下寒士。博施濟衆也。然不先有以辨得其基。則許多物事。都無立定處。而何時眼前見此突兀哉。必須展之拓之。使無阻礙之患。杵之築之。使無傾頹之慮。然後迨天未雨。經之營之。絶道傍携貳之言。念闕考已底之法。則居廣居立正位。而茫茫入荒。皆在我闥矣。嗚呼。有基而不能立者多矣。況無基而能自樹立乎。學者苟不確定大志。以聖神爲已任。以天地爲同體。則多少大功夫。將何自而能樹立哉。要爲學必。先有其基。旣有其基。必要有其立。有基有立。其亦庶幾乎。吾友朴準基字以景立。其取義固在此矣。 사덕(四德) 원래는 《주역(周易)》에서 말한 천지자연의 네 가지 덕, 즉 원(元), 형(亨), 이(利), 정(貞)을 이르는데, 주자는 이를 사람 마음에 적용시켜 인(仁), 의(義), 예(禮), 지(智)를 성(性)의 사덕이라 하였다. 《朱子語類 卷6 四端義》 3천 곡례(曲禮) 《예기(禮記)》 〈예기(禮器)〉의 "경례가 3백 가지이고 곡례가 3천 가지인데, 그 정신은 하나이다.[經禮三百, 曲禮三千, 其致一也.]"에서 유래하였다. 자뢰(資賴)함의 깊음이며 맹자가 "군자가 깊이 나아가기를 도로써 함은 자득하고자 해서이니, 자득하면 처하는 것이 편안하고 처하는 것이 편안하면 자뢰(資賴)함이 깊고 자뢰함이 깊으면 좌우에서 취하여 쓰는 데에서 그 근원을 만나게 된다. 그러므로 군자는 자득하고자 하는 것이다."라고 한 말을 인용하였다. 《孟子 離婁下》 은혜를……것 《논어(論語)》 옹야(雍也)에 나오는 내용이다. 넓은……되니 넓은 집은 인(仁)을, 바른 자리는 예(禮)를 비유하는 비유하는 말이다. 맹자는 대장부를 말하면서 "천하의 넓은 집[仁]에 살며 천하의 바른 자리[禮]에 서며 천하의 큰 도[義]를 행하여, 뜻을 얻으면 백성들과 더불어 그 도를 행하며 뜻을 얻지 못하면 홀로 그 도를 행해서, 부귀로도 흔들 수 없으며 빈천해도 바꾸게 하지 못하며 위무로도 굽히게 할 수 없는, 이런 사람을 두고 대장부라고 한다."라고 하였다. 《孟子 滕文公下》 성신(聖神) 《맹자》 〈진심 하(盡心下)〉에 "크면서도 그 큼을 볼 수 없게 화할 수 있는 사람을 '성인(聖人)'이라 이르고, 지극히 신묘한 그 성스러움을 측량할 수 없는 사람을 '신인(神人)'이라 이른다."라는 내용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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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경함92)에게 써 보이다 書示黃景涵 성(性)은 도(道)의 형체(形體)이고 심(心)은 성(性)의 부곽(郛郭 성곽(城郭))이며 신(身)은 심(心)의 구우(區宇 구역(區域))이고 물(物)은 신(身)의 주거(舟車)이다.93) 이것은 형기(形氣)와 신리(神理)를 가지고 정밀함으로부터 조악함으로 나아가 말한 것이며 강절(康節 소옹(邵雍))이 이른 "기(氣)는 신(神)의 집이고 체(體)는 기(氣)의 집이다."94)라는 것이다. 이(理)는 형체가 없지만 성(性)이 감싸고 있으므로 형체(形體)라고 하고, 심(心)은 성(性)을 담고 있으므로 부곽이라고 하고, 신(身)은 심(心)을 담고 있으므로 구우라고 하고, 신(身)은 물(物)을 이용하여 물(物)을 움직일 수 있으므로 주거(舟車)라고 한다.그렇다면 부곽은 기(氣)의 정령(精靈)으로 말하는 것이고 구우는 사람의 육체를 가지고 말하는 것이니 그 정조(精粗)와 선후(先後)가 뚜렷하지 않겠는가. 주자(朱子)가 언급한 주재(主宰)와 부곽(郛郭)은 각각 별개의 설이니 연관 지어 보아서는 안 된다. 또한 노사 선사(蘆沙先師)의 기질설(氣質說)도 본래 이것 때문에 펼친 것이 아니다. 선사께서는 두 개의 기질이 잘못됨을 변별한 것이지, 어찌 일찍이 기질은 있지만 정령은 없다고 하셨는가. 부곽(郛郭)은 부곽일 뿐이지 어찌 부곽이 주재(主宰)와 묘용(妙用)의 뜻을 지녔겠는가. 부곽을 주재(主宰)로 여긴다면 저 세 번 신칙하고 다섯 번 명령하거나95), 잡았다 풀어주면서 기미에 따라 처리하는 사람은 또 주재자의 주재이겠는가. 만 리나 되는 성도 성이 스스로 굳건하지 못하고 7리짜리 곽(郭 외성(外城))도 곽(郭)이 스스로 지키지 못한다면 주재의 뜻이 어디에 있겠는가. 생각해보라. 끝내 조리가 없어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으면 일단 처중(處中)96)과 논의하라. 절충한 논의를 듣고자 한다. 性者道之形體。心者性之郛郭。身者心之區宇。物者身之舟車。此以形氣神理。而由精趨粗說。如康節所謂氣者神之宅。體者氣之宅也。理無形而性爲結窠故曰形體。心具性故曰郛郭。身具心故曰區宇。身藉於物而能運物故曰舟車。然則郛郭以氣之精爽而言。區宇以人之軀殼而言。其精粗先後。不其瞭然乎。朱子主宰及郛郭。各是一說。不可連累看。且蘆沙先師氣質說。本非爲此而發也。先師辨兩箇氣質之非。何嘗言有氣質而無精爽乎。郛郭只是郛郭安有以郛郭而有主宰妙用之義。若以郛郭爲主宰。則彼三申五令操縱合變之人。是又主宰之主宰乎。萬里之城。城不能自固。七里之郭。郭不能自守。則烏在其主宰之義乎。思之思之。終是不倫。未知以爲如何。且與處中講質焉。願聞折中之論。 황경함(黃景涵) 경함은 황철원(黃澈源, 1878∼1932)의 자이다. 호는 중헌(重軒)‧은구재(隱求齋)이다. 본관은 장수(長水)이다. 기정진(奇正鎭)의 제자인 정의림(鄭義林)과 정재규(鄭載圭)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외필변변(猥筆辨辨)〉‧〈납량사의기의변(納凉私議記疑辨)〉‧〈납량사의기의추록변(納凉私議記疑追錄辨)〉을 지어 간재(艮齋) 전우(田愚)의 성리설(性理說)을 논박하였다. 저서로 《중헌집(重軒集)》이 있다. 성(性)은……수레이다 소옹(邵雍)의 《격양집(擊壤集)》 〈자서(自序)〉에 나오는 말이다. 기(氣)는……집이다 소옹의 《황극경세서(皇極經世書)》에 나오는 말이다. 세 번……명령하거나 손자(孫子)가 오왕(吳王) 합려(闔閭) 앞에서 여자들을 부하로 삼아 시범을 보일 적에 "일단 약속을 정하여 선포한 다음에 부월을 설치해 놓고는 곧바로 세 번 명령하고 다섯 번 신칙하였다.[約束旣布, 乃設鈇鉞, 卽三令五申之.]"라는 말이 《사기(史記)》 권65 〈손자오기열전(孫子吳起列傳)〉에 나온다. 처중(處中) 양회락(梁會洛, 1862∼1935)을 가리키는 듯하다. 본관은 제주(濟州). 자는 처중(處仲), 호는 동계(東溪), 양팽손(梁彭孫)의 후손이다. 일신재(日新齋) 정의림(鄭義林)과 노백헌(老栢軒) 정재규(鄭載圭)의 문하에서 수업하였으며, 노사(蘆沙) 기정진(奇正鎭)의 《납량 사의(納凉私議)》와 《외필(猥筆)》 등을 마음속으로 터득하고, 주리론(主理論)을 발휘하고 천명하여 간재(艮齋) 전우(田愚)의 성사 심제설(性師心弟說)을 통렬히 반박하였다. 문집에 《동계당 유고(東溪堂遺稿)》 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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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여주에게 써 주다 書贈吳汝周 주자(朱子)가 이르기를, "사람이 학문을 하는 것은 단지 하려고 하는 것과 하려고 하지 않는 것의 다툼일 뿐이다."97)라고 하였다. 대체로 기품(氣稟)이 편벽되어 기호(嗜好)가 다르고 견문(見聞)에 얽매어서 추향(趨向)이 일치하지 않는다. 이 때문에 평생토록 독서를 해도 읽는 내용이 무슨 일인지를 모르는 사람이 많다. 교유(交遊)하는 이들 사이에서 말이 간혹 여기에 이르면 거리낌 없이 난폭하게 굴거나 반드시 멍하니 반성하지 못하여 인가하고 승낙하는 자가 대체로 적었다.병술년(1910, 순종4) 봄, 내가 오봉(五峯)에서 객지 생활을 할 때 오군 여주(吳君汝周)가 날마다 나를 찾아와 함께 어울렸다. 또한 "게으름을 피우다가 학문의 기회를 놓친 지 오래되었습니다. 지금부터는 간절히 이 일에 마음을 두고자 하니 경계가 되는 한 말씀 해주시기를 바랍니다."라고 하기에, 나는 "자네가 이미 하려고 하는 마음이 있으니 어찌 내 말이 필요하겠는가."라고 하였다. 그러나 경중(輕重)의 권도(權道)가 내면에 명확하지 않고 취사(取捨)의 분별이 외부에서 결정되지 않으면 길을 나섰다가 전도 착란(轉倒錯亂)되어 제대로 올라가지 못하고 중간에서 떨어지지 않는 자가 없었다. 이것을 여주(汝周)에게 알리지 않을 수 없다.무릇 부귀와 빈천은 사람의 일생에서 미리 정해진 분수이고 도덕과 인의(仁義)는 사람의 마음에 고유(固有)한 성(性)이다. 그렇다면 무엇이 중요하고 무엇이 가벼운가? 무엇이 추구할 수 있고 무엇이 추구할 수 없는가? 무엇을 추구해야 하고 무엇을 추구하지 말아야 하는가? 입각(立脚)98) 초기에 팔자타개처(八字打開處)99)를 헤아려 변별해야 한다. 이 단계를 지나서 나아가면 또 하나의 험난한 관문이 나타나 눈에 힘을 주어야 할 곳이 있으니 위기(爲己)와 위인(爲人)100)이 그것이다.일찍이 생각해보니, 하늘이 명하고 사람이 받은 모든 이치와 모든 법칙은 저절로 해야 하는 일인가, 외부의 사물을 쫓아 자기의 이익을 도모하는 일인가? 일상생활에서 이르는 곳마다 성찰하는 것을 놓치지 않는다면 본령(本領)이 수립된다. 이로 말미암아 정밀하고 투철하며 숙련되고 정통한 단계에 이르는 것은 곧 부지런히 힘쓰는 것에 달려있을 뿐이다. 맹자(孟子)가 "천하의 넓은 집[인(仁)]에 거처하며 천하의 바른 자리[예(禮)]에 서며 천하의 대도(大道)[의(義)]를 행하고 부귀가 마음을 방탕하게 하지 못하며 위무(威武)가 지조를 굽히게 할 수 없으며 빈천(貧賤)이 절개를 옮겨놓지 못한다."101)라고 하였다. 이와 같은 것이 비로소 남아 대장부의 일이다. 바라건대 여주(汝周)는 힘쓰거라! 朱子曰。人之爲學。只爭箇肯與不肯。蓋氣稟所偏。嗜好不同。見聞所拘。趨向不一。是以終身讀書。而不知是所讀爲何事者多。交遊之間語或及此。則非悍然不顧。必茫然不省。其印可而肯諾者蓋少矣。丙戌春。余客於五峯吳君汝周。日來相從。且曰。因循失學久矣。自今切欲留心此事。願賜一言警砭也。予曰子旣有肯可之意。何須於我言。然輕重之權。不明於內。取舍之分。不決於外。則未有不臨途顚錯半上落下者。此則不可不爲汝周告之。夫富貴貧賤。人生素定之分也。道德仁義。人心固有之性也。然則何者爲重。何者爲輕。何者可求。何者不可求。何者當求。何者不當求。立脚之初。所當商量辨別八字打開處。過此以往。又有一層重關猛着眼目處。如爲己爲人是也。試思天命人受。萬理萬法。是自然合做底事耶。是徇外自私底物耶。日用之間。隨處省察。不容放過。則本領立矣。由此而至於精透純熟。則在乎勉焉爾。孟子曰。居天下之廣居。立天下之正位。行天下之大道。富貴不能淫威武不能屈。貧賤不能移。如此方是男兒事。願汝周勉之。 사람이……뿐이다 《대학장구(大學章句)》 〈독해학법(讀大學法)〉에 나오는 내용이다. 입각(立脚) 어떤 경우에도 흔들리지 않고 몸을 의연히 지키는 것을 말한다. 팔자타개처(八字打開處) 팔자 모양의 형태로 문을 활짝 열어젖혀서 가려져 있던 앞산을 보여 주었다는 뜻으로, 조금도 숨김없이 분명하게 설명해 주는 것을 비유한 말이다. 주희의 편지에 "요즈음 《대학》을 보다가 이러한 뜻이 매우 분명하다는 것을 알았다. 성현이 이미 '팔(八)' 자가 벌어지듯 활짝 펼쳐 주었건만 사람들이 스스로 깨닫지 못하고서 오히려 밖으로 미친 듯이 치달리고 있다.[近日因看大學, 見得此意甚分明, 聖賢已是八字打開了. 但人自不領會, 却向外狂走耳.]"라고 하였다. 《晦庵集 卷35 與劉子澄》 위기(爲己)와 위인(爲人) 《논어(論語)》 〈헌문(憲問)〉에 "옛날의 학자들은 자신을 위한 학문을 하였는데, 오늘날의 학자들은 남에게 보여주기 위한 학문을 한다."라는 공자의 말이 보인다. 천하의……못한다 《맹자》 〈등문공 하(滕文公下)〉에 나오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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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경배의 자에 대한 설 吳景拜字說 사문(斯文) 오창호(吳昌鎬)가 관례(冠禮)를 치른 지 이미 오래되었다. 처음에는 자(字)가 여주(汝周)였는데 나중에 송사(松沙) 기장(奇丈)102)께서 경배(景拜)로 고쳤다. 대체로 《서경(書經)》의 "우(禹)가 고요(皐陶)의 좋은 말을 듣고는 절을 하였다."103)에서 뜻을 취한 것이다.시험삼아 한번 다른 사람에게서 이것을 징험해 보니, 귀에 거슬리는 말을 들으면 발끈하며 화를 내고 목소리를 높여 잘못되고 그릇된 일을 문식(文飾)한 뒤에야 그치지 않는 사람이 없다. 그렇지 않으면 억지로 분을 참으면서 겉으로는 받아들이는 듯하지만 실제로 마음속으로는 용납하지 않다. 이것은 모두가 성실하게 선(善)을 행하려는 마음이 없기 때문이다. 성실하게 선을 행하려는 마음이 있다면 미친 사람에게도 가려서 들을 만한 말이 있고 나무꾼에게도 물을 수 있다. 하물며 강직하게 간언(諫言)하고 보필(輔弼)하는 것이 마치 정문(頂門)에 침을 놓고 등에 채찍을 가하는 것과 같음에야 말할 나위가 있겠는가.사랑이 그치지 않으면 진실로 공경해야 하고 공경스러움이 그치지 않으면 진실로 절을 해야 한다. 겸허한 마음으로 뜻을 낮추고 온 마을에서 하는 말을 아울러 받아들이면 마을 전체의 훌륭한 선비가 되고, 온 나라에서 하는 말을 받아들이면 나라 전체의 훌륭한 선비가 되고, 천하에서 하는 말을 받아들이면 천하의 훌륭한 선비가 된다. 이것이 옛사람들이 백 번 절을 한 다음에 한마디 말을 듣고자 하고 천 리 먼 곳에서 가르침 하나를 구했던 까닭이다.아, 대우(大禹)는 성인이었건만 좋은 말을 들으면 절을 하였다. 하물며 그보다 못한 사람이야 말할 나위가 있겠는가. 원하건대 경배는 '좋은 말을 들으면 절을 한다.'라는 부적(符籍)을 학문 세계에 진입하는 나침판으로 삼아 부지런히 노력하고 착실히 법도를 지켜나가 천하의 선(善)이 모이고 빠트림이 없는 경지에 이르기를 바란다. 이것이 어찌 송사 장(松沙丈)께서 진중하게 이름을 정한 뜻이 아니겠는가. 吳斯文昌鎬。冠已久矣。表德初以汝周。後松沙奇丈改以景拜。蓋取書經禹拜昌言之義也。嘗驗之於人。聞有一言逆耳。無不勃然而怒。嘵嘵然。文其過餙其非而後已。不然則强意忍忿。外若容受而內實氷炭矣。此皆無誠實爲善之心故也。如有誠實爲善之心。則狂夫可擇。蒭蕘可詢。況强諫直輔。若針頂鞭肯之爲耶。愛之無已。固當敬之敬之無已。固當拜之。虛心遜志。兼受一鄕之言。則爲一鄕之善士。受一國之言。則爲一國之善士。受天下之言。則爲天下之善士。此古人所以乞一言於百拜之餘。求一敎於千里之遠者也。嗚呼。大禹聖人。猶拜昌言。況其下者乎。願景拜以拜昌言三字符。爲入學指南。勉勉循循。以至於集天下之善而無闕焉。則豈非松沙丈珍重命名之意耶。 송사(松沙) 기장(奇丈) 기우만(奇宇萬, 1846~1916)이다. 본관은 행주(幸州), 자는 회일(會一), 호는 송사(松沙)이다. 참봉을 지내 기 참봉으로 불렸으며, 호남의 거유(巨儒) 기정진(奇正鎭)의 손자로 그 학업을 이어받아 문유(文儒)로 추앙받았다. 우(禹)가……하였다 《서경》 〈고요모(皐陶謨)〉에 "우가 고요의 좋은 말을 듣고는 절하며 옳다고 하였다."라는 말이 나오고, 《맹자》 〈공손추 상(公孫丑上)〉에 "우는 좋은 말을 들으면 절을 하였다."라는 말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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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47년 김재상(金載相) 소지(所志) 고문서-소차계장류-소지류 법제-소송/판결/공증-소지류 丁未正月 日 金載相 城主 丁未正月 日 1847 金載相 扶安縣監 전라북도 부안군 동진면 6.8*6.8(정방형) 적색 부안 서외 김채상 후손가 부안 서외리 김채상 후손가 1847년(헌종 13) 정월에 부안현 일도면 당북하리에 사는 김재상이 부안현감에게 올린 산송 소지. 1847년(헌종 13) 정월에 부안현(扶安縣) 일도면(一道面) 당북하리(堂北下里)에 사는 김재상(金載相)이 부안현감(扶安縣監)에게 올린 산송 소지(山訟所志)이다. 이에 따르면, 지난 갑오년, 즉 13년 전인 1834년(순조 34)에 일도면 중방리(中方里)에 사는 박계삼(朴啓三)이라는 자의 형 박기준(朴基俊)이 밀린 상채(喪債)에다 세미(稅米)까지 납부할 방법이 없자 자기 소유의 시장(柴場)을 팔려고 했다. 때마침 그곳에 친산(親山)이 있던 김재상은 그 시장을 매입하여 송추(松楸)를 심어놓았다. 그런데 그 시장의 송추에 욕심이 있었던 박계삼은 그 송추를 환퇴(還退)하겠다면서 관에 소지를 올렸다. 이에 김재상이 박계삼을 찾아가서 그 연유를 물어보니, 소지를 올려 관으로부터 받았던 제사(題辭)는 보여주지 않은 채, 잠시 그대로 두고 후일을 기다려보자는 식으로 말하면서 전혀 송사할 의사가 없다고 하였다. 그러나 이를 믿을 수 없었던 김재상은 자신이 시장을 매입하면서 받았던 명문을 함께 첩련(帖連)하여 관에 소지를 올리면서, 위 박계삼을 잡아다가 조사하여 엄히 다스려달라고 호소하였다. 이에 대하여 관에서는 조사할 터이니 잡아오라는 제사를 내렸다. 이 문서에는 작성연대가 정미년으로만 적혀 있으나, 다행히도 김재상이 위의 시장(柴場)을 사면서 받은 명문(明文)이 전하고 있어서 이를 토대로 위의 정미년을 1847년으로 추정하였다. (1834년 김재상(金載相) 시장문기(柴場文記) 참조) 이 명문에는 박기준이 상채를 갚기 위하여 위의 시장을 7냥에 방매하였다는 내용이 실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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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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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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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4년 전라도(全羅道) 유생(儒生) 등장(等狀) 초(抄) 고문서-소차계장류-소지류 법제-소송/판결/공증-소지류 同治三年甲子八月 日 全羅道道內儒生 同治三年甲子八月 日 1864 全羅道道內儒生 부안 서외 김채상 후손가 부안 서외리 김채상 후손가 1864년(고종 1) 8월에 전라도의 유생들이 조정에 올리기 위하여 작성한 등장의 초안. 1864년(고종 1) 8월에 전라도의 유생들이 부안현(扶安縣)의 유생 김채상(金彩相)과 그의 동생 김우상(金祐相)의 처 밀양박씨(密陽朴氏)의 효열(孝烈)을 기려 그들에게 정려(旌閭)를 내려줄 것을 요청하기 위하여 조정에 올릴 예정으로 작성한 등장(等狀)의 초안이다. 문서의 첫 머리에 으레 나오기 마련인 소두(疏頭)의 이름도 비어 있으며, 끝에 나오는 연명인(聯名人)들도 적혀 있지 않다. 본문 또한 수정하고 첨삭한 부분들이 그대로 드러나 있어서 소장을 작성하면서 상당한 고심을 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 문서에 따르면 김채상은 부안김씨(扶安金氏) 김구(金坵)의 후손으로 어려서부터 부모에 대한 효성이 지극하여, 22세 때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고례(古禮)를 철저하게 지키며 상장례를 치뤘다. 그 뒤 혼자된 어머니가 위독하였을 때 오도조(五桃鳥)가 아니면 병이 낫기 어렵다는 의원의 말을 듣고 백방으로 이를 구하였으나 얻지 못했다. 때마침 꿈에서 한 늙은이가 나타나 변산 입암 아래를 찾아가면 새를 구할 수 있다고 말했다. 그가 그곳에 가서 보니, 과연 털이 얼룩달룩한 새 한 마리가 바위 아래 떨어져 있었다. 이를 구하여 약을 만들어 어머니에게 드렸더니 곧바로 효험이 있었다. 나이 51세 때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몸을 해칠 정도로 호곡하였으며, 매 삭망마다 눈비를 무릅쓰고 성묘를 했으며, 80세가 다되도록 성묘를 그만두지 않았다. 그가 아버지의 묘에 성묘하기 위하여 다녔던 길은 효자성묘로(孝子省墓路)로 불리웠다. 김채상의 동생 김우상의 처 밀양박씨 또한 효열(孝烈)로 이름이 높았다. 28세 때 남편이 병들자 자신의 손가락을 잘라 그 피를 남편이 마시게 하여 3일이나 목숨을 연장하였다. 남편이 죽자 곧바로 따라서 죽으려고 했으나 아무 곳도 의지할 데 없는 시어머니가 만류하자 마음을 바꿔 시어머니를 극진하게 모셨다. 시어머니가 죽자 3년을 하루같이 여묘살이를 하였다. 때마침 가뭄이 들었으나 박씨의 지극한 효성에 하늘이 감동한 듯 여묘 아래 한 자도 못되는 곳에서 물이 솟아나왔다. 사람들은 이 샘을 효열천(孝烈泉)이라고 불렀다. 박씨는 시어머니의 3년상을 치른 뒤 남편의 기일에 이르러 어린 조카를 선대의 제사를 받드는 후사(後嗣)로 정한 뒤에 마침내 자결하여 남편의 뒤를 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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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보탕446)을 준 가석에게 이천의 시를 차운하여 사례하다 謝可石贈大補湯用伊川韻 약을 주어 내 정신을 보양해준 그댈 흠모하며 感君投藥補吾神행여 삼려447)를 세상 처신의 법도로 삼으려 하네 儻擬三閭度世身배불리 먹으면 외려 은거 소원 이루기 어렵나니 飽喫猶難成晦願서산에서 먼저 은나라 백성이 굶주려 죽었다지448) 西山先作餓殷民 感君投藥補吾神, 儻擬三閭度世身.飽喫猶難成晦願, 西山先作餓殷民. 대보탕(大補湯) 마음과 몸의 활동력을 돕는 약을 말하는데, 숙지황(熟地黃)ㆍ백작약(白芍藥)ㆍ천궁(川芎)ㆍ당귀(當歸)ㆍ인삼ㆍ백출(白朮)ㆍ백복령(白茯笭)ㆍ감초ㆍ황기(黃芪)ㆍ육계(肉桂)를 넣어 만든다. 삼려(三閭) 전국 시대 초(楚)나라의 삼려대부(三閭大夫)를 지낸 굴원(屈原)을 말한다. 〈어부사(漁父辭)〉에 "굴원이 이미 쫓겨나 강호에 노닐며 못가에서 시를 읊조리고 다니는데 안색은 초췌하고 모습은 수척해 보였다.[屈原旣放, 遊於江潭, 行吟澤畔, 顔色憔悴, 形容枯槁.]"라고 하였다. 《詳說古文眞寶大全 後集 卷1》 서산(西山)에서……죽었다지 은(殷)나라 말기 고죽군(孤竹君)의 두 아들인 백이(伯夷)와 숙제(叔齊)의 고사를 말한다. 주 무왕(周武王)이 은나라를 정벌하자 주나라 곡식을 먹는 것을 수치로 여기고는, 서산(西山) 즉 수양산(首陽山)에 들어가서 채미가(采薇歌)를 부르며 고사리를 캐어 먹다가 굶어 죽은 고사가 전한다. 《史記 卷61 伯夷列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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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월 이십구일에 暮春小晦 종일토록 거센 바람 불어 너무도 무정한데 狂風盡日太無情남은 꽃마저 떨어져 한바탕 깨끗이 쓸어버렸네 飄落殘花一掃淸수심은 외로이 살게 되면 쉽사리 몰려들고 愁待索居容易集시는 참된 경지를 어기면 억지로 이루기 어렵네 詩違眞境强難成귀밑머리 성성하니 반백의 나이가 되었고 霜鬢星星年半白초당은 적막하고 밤은 깊어 삼경이로세 草堂寂寂夜三更천금도 도리어 좋은 날의 빚 갚기엔 적은데 千金還少良辰債또 돌아가는 봄날이 내일 아침으로 잡혔구나 又是春歸在翌朝 狂風盡日太無情, 飄落殘花一掃淸.愁待索居容易集, 詩違眞境强難成.霜鬢星星年半白, 草堂寂寂夜三更.千金還少良辰債, 又是春歸在翌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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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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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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뜻을 보이다 示志 원래 머리털은 부모가 남겨 준 것이나 元來頭髮是親遺분명히 중국의 제도가 또 여기에 있네 華制分明更在斯천하의 대방296)은 감히 어길 수 없으나 天下大防無敢越정수리의 한 움큼297)이 어찌 미미한 것이랴 頂中一撮豈其微백운고사298)는 지금 어디에 있는 것인가 白雲高士今何處화망건 선생299)은 함께 돌아갈 수 있으리라 畫網300)先生可與歸가을 달이 오랫동안 마음과 함께 비춰주니 秋月長時心共照외로운 넋은 백세토록 슬퍼할 필요 없겠네 孤魂百歲不須悲 元來頭髮是親遺, 華制分明更在斯.天下大防無敢越, 頂中一撮豈其微?白雲高士今何處? 畵綱先生可與歸.秋月長時心共照, 孤魂百歲不須悲. 대방(大防) 흘러넘치지 못하도록 막아주는 큰 제방(堤防)이라는 뜻으로, 사회를 유지하는 예법(禮法)을 일컫는다. 정수리의 한 움큼 상투를 말한다. 백운고사(白雲高士) 당(唐)나라 때 도사(道士)인 사마승정(司馬承禎)으로, 백운거사는 그의 호이다. 음양술수학에 심취했으며, 연단술을 익혔다. 문장과 글씨에도 뛰어났는데, 특히 전서를 잘 썼다고 한다. 진자앙(陳子昻), 이백(李白), 맹호연(孟浩然) 등과 교유하였다. 〈좌망론(坐忘論)〉 등을 지어 자신의 노장 철학을 피력하였으며, 불교에도 조예가 있어 '도선합일(道禪合一)'의 독특한 주장을 펼치기도 하였다. 《노자도덕경》의 정본을 만들었고, 저술로 《좌망론(坐忘論)》이 있다. 《唐書 卷196 司馬承禎列傳》 화망건 선생(畫網巾先生) 청(淸)나라 때 문학가인 대명세(戴名世)가 지은 《화망건선생전(畫網巾先生傳)》에 의하면 선생의 이름과 작위는 알 수 없으며 민족지사이다. 새로운 영(令)으로 치발(薙髮)하고 의관을 바꾸니, 망건(網巾)이 없어지자 머리에 망건을 그리고서 갓[冠]을 썼기에 사람들이 화망건이라 불렀다고 한다. 網 底本에는 "綱". 필사의 오류로 보아 수정. 아래도 이와 같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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