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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아241)를 면려하며 勉觀兒 공부를 함은 높은 산을 쌓는 것과 같으니 做工有若築高山차츰 쌓는데 어찌 잠시 쉴 틈이 있겠느냐 積累寧容息暫間끊어진 사문242)을 잇는 일은 양보 못하니 不讓斯文將繼絶누가 천운이 떠나 돌아오지 않는다고 하나 誰言天運去無還이름과 실질에서는 주객을 먼저 구분하고 名實最可分賓主마음과 입243)에서는 경중을 우선 분별해라 心口先須辨緊閒만약 집안의 명성이 너로 인해 커진다면 若使家聲由汝大훗날 덕분에 선친의 얼굴을 뵐 수 있으리 他時藉手拜先顔 做工有若築高山, 積累寧容息暫間.不讓斯文將繼絶, 誰言天運去無還.名實最可分賓主, 心口先須辨緊閒.若使家聲由汝大, 他時藉手拜先顔. 관아 김택술의 3남인 형관(炯觀)을 말한다. 사문(斯文) 유학을 가리킨다. 《논어》 〈자한(子罕)〉에서 공자가 광(匡) 땅에서 곤궁에 처했을 때, "하늘이 사문을 없애려 하지 않으시는 바에야, 광 땅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하겠는가.[天之未喪斯文也, 匡人其如予何?]"라고 한 데서 유래하였다. 마음과 입[心口] 마음으로 하는 공부와 입으로만 하는 공부를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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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3) 書(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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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도상34)【승정】에게 답함 答李道常【承鼎】 지난달 나아갔을 때 병환이 매우 위중하신 것을 알았지만 일시적이고 갑작스럽게 생긴 병이니 반드시 오래지 않아 일상을 회복할 것이고, 또 덕문(德門)이 여러 대에 쌓은 공덕으로 어찌 신명(神明)의 도움과 보살핌이 없겠는가 생각하였습니다. 염려는 절실했더라도 믿는 구석이 있었으니, 누가 오늘에 이르기까지 여전히 오래도록 낫지 않으시리라고 생각하였겠습니까. 이 병의 이 고통은 하루도 견디기 어렵건만 하물며 이렇게 석 달이라는 오랜 시간이야 말할 나위가 있겠습니까. 놀라 실색(失色)하여 즉시 달려가 문안하고 싶었지만 그러지 못하였습니다. 보내주신 편지는 참으로 기대하지 않았던 것이었습니다. 모진 고통으로 수고롭고 괴로운 가운데 어떻게 우생(友生)을 잊지 않고 이처럼 간절하게 마음을 쓰십니까. 편지를 쥐고 반복해서 보려니 감격에 겨운 눈물이 옷깃을 적십니다. 스스로 생각건대 이 천한 목숨은 떠돌아다니며 곤궁함과 외로움을 겪으면서 믿고 의지하는 것은 오직 벗이었습니다. 평생토록 종유한 문견(文見), 순견(舜見 안국정(安國禎)의 자)이 모두 이미 나를 버리고 저세사으로 떠났고 오늘에 이르러서는 형이 또 병에 걸리리라는 것을 어찌 알았겠습니까. 천지를 우러러 탄식하려니 쇠약한 몸의 창자가 끊어질 지경입니다. 그러나 중대한 병증(病證)은 날짜가 반드시 오래가는 법입니다. 아마도 짧은 기간에 효과를 바랄 수는 없을 것입니다. 모쪼록 마음을 편히 갖고 조리하면서 기다리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게다가 영랑(令郞)이 밤낮으로 시중을 들면서 잠시도 곁을 떠나지 않는다고 들었습니다. 어찌 정성과 효심이 이와 같은데 하늘이 돌보아주지 않는 경우가 있겠습니까. 간절한 마음으로 축원합니다. 前月進去時。見愼節雖甚沈重。而意謂一時無妄。必將不久復常。且以德門積累之餘。豈無神明扶佑者乎。爲慮雖切。而所恃者在。誰謂至於今日。而尙爾彌留耶。此病此苦。一日爲難。況此三朔之久耶。驚愕失色。卽欲趨走省之。而不可得也。一書之惠。眞望外也。痛楚勞惱之中。何以不忘一友生。而致意若是懇惻耶。執書反復。感淚沾衿。自惟賤命。流離窮獨。所恃惟友。豈知平生遊從如文見舜見皆。已棄我。而至今日。兄又告病耶。俯仰噓唏衰腸欲斷。然重證大病。爲日必久。恐不可責效於霎刻片隙之間。須安心攝理以待之。如何。況聞令郞晝夜扶持。暫不離側。安有誠孝如此。而天不見佑者乎。區區祈祝。 이도상(李道常) 도상은 이승정(李承鼎, 1856∼1899)의 자이다. 본관은 광주(光州)이고 호는 신암(莘菴)이다. 기우만(奇宇萬)의 《송사집(松沙集)》 권38에 〈신암이군묘갈명(莘菴李君墓碣銘)〉이 실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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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해심39)【회일】에게 보냄 與梁海心【會一】 옛날부터 위태로운 때를 만난 열사(烈士)가 어찌 한량이 있었겠습니까. 그러나 험난함과 괴로움을 두루 경험하기로야 누가 좌우(左右)와 같겠습니까. 소해문옥(蘇海文獄)도 이와 같았는지 모르겠습니다. 이윽고 하늘이 도와서 속박에서 풀려 고향으로 돌아와 문간에 기대어 간절히 기다리는 마음에 부합하였으니 소식을 듣고 감동하기에 충분하였습니다. 거듭 고초를 겪은 나머지 건강이 크게 손상되지 않으셨는지 모르겠습니다. 위로되고 그리운 마음이 절절하여 매우 견딜 수가 없습니다. 의림(義林)은 몇 년의 세월 사이에 재앙이 거듭 이르고 질병이 끊이지 않아 이에 얽매여 구차하게 지내면서 문밖을 나서지 못한 지 오래되었습니다. 이에 한 번 달려가서 문안을 여쭙는 도리를 갖추지 못하였으니 이것이 어찌 인정과 예법이겠습니까. 부끄럽고 송구스러울 뿐입니다. 지금은 제집에 몸을 붙이고 있는데 숙질(宿疾)이 아직 물러나지 않아 추위를 무릅쓰고 길을 나서기에는 힘이 미치지 못합니다. 결국 한 통의 서찰로 대신하여 근래의 안부를 여쭙습니다. 바라건대 너그러이 용서해 주실 수 있겠습니까. 自古烈士遭罹危會者。何限。而其備經險苦。孰有如左右。未知蘇海文獄亦如此否。旣而自天佑之。解桎還鄕以副倚閭無窮之忘。足令聞之者動情。未審積苦之餘體度不至有大損否。切切慰戀。殊不勝堪。義林年歲之間。禍故荐仍。疾病連綿。坐此淟忍。不出戶外久矣。玆未能一者趨走。以有相省之道。此豈情禮耶。愧悚而已。今則寄身窮齋。宿疾尙不退聽。觸寒作行。力所不逮。竟不免替修一書。以問近節。幸可恕諒否。 양해심 해심(海心)은 양회일(梁會一, 1856∼1908)의 자(字)이다. 양회일의 호는 행사(杏史)이며 전라남도 화순 출신이다. 화순 일대에서 의병을 일으키기로 하고 가산뿐만 아니라 친척의 토지까지 팔아 군자금을 조달해서 동지들을 불러 모았다. 그는 양열묵(梁烈默), 임노복 등과 더불어 국권을 회복하기 위해 고심하고 1906년 가을부터 창의를 준비하여 쌍산의소(雙山義所)를 결성해서 1907년 4월 능주(綾州), 화순(和順)을 차례로 공격하여 군아(郡衙)와 주재소(駐在所)를 점령하였다. 여세를 몰아 광주를 공격하려고 의병을 이끌고 행군하다가 판치(板峙, 현 너릿재) 전투에서 동지 5명과 함께 체포되어 지도(智島)에 유배되었고, 1907년 12월 특사로 석방되었다. 1908년에 다시 의거를 모색하다가 일본 경찰에게 체포되어 장흥경찰서에 구금되어 단식 중에 절명하였다. 1990년에 건국공로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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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안 부안김씨(扶安金氏) 장사택일지(葬事擇日紙) 15 고문서-치부기록류-택기 종교/풍속-민간신앙-택기 己丑 己丑 扶安金氏 門中 전라북도 부안군 부안 서외 김채상 후손가 부안 서외리 김채상 후손가 모년에 부안의 부안김씨가에서 작성된 장사택일지. 부안(扶安)의 부안김씨가(扶安金氏家)에서 작성된 장사택일지(葬事擇日紙)이다. 장사택일지는 지관(地官)이 장례 날짜와 시간을 선택하고 이를 문서로 작성하여 망자의 가족에게 건네준 것이다. 지관은 일시를 선택하면서 망자의 사주와 시신이 묻힐 장지, 무덤의 방향과 방위, 지세(地勢) 등을 고려했기 때문에 관련된 사항들이 문서에 자세하게 적혀 있다. 뿐만 아니라 하관 시 안될 사람들의 간지와 자손들의 간지가 적혀 있었다. 그리고 상주에 관한 정보도 실려 있다. 장사택일지는 통상 안장(安葬)의 날짜, 하관(下棺)의 시각, 개토(開土), 방금(放金), 혈심(穴深), 취토(取土), 납폐(納幣), 파빈(破殯), 발인(發引), 정상(停喪) 등의 시간과 방위를 기록하였다. 이처럼 장례를 치르면서 장지와 장례일을 신중하게 선택한 것은 그 선택이 자손의 화복과 연관되어 있다고 보는 풍수지리설의 영향이 크게 작용하였기 때문이다. 여기에 효(孝)를 강조하였던 조선왕조의 유교적 관습이 어우러지면서 뿌리깊은 관습으로 남게 되었다. 어떤 면에서 보면 조선시대의 예법은 중국보다도 훨씬 더 유교적이었으며 더 엄격하였다. 그 중 상제에 관한 것이 특히 심하였다. 조선 후기의 당쟁은 이 상제를 둘러싼 예송(禮訟)이었다고 해도 그리 틀린 말이 아니다. 부안김씨가에서 작성된 이 문서는 '건화명(乾化命)'으로 시작하고 있다. 장사택일지에서 망자는 남자와 여자를 구분하여 기록하였는데, 건곤(乾坤) 즉 하늘과 땅으로 달리 표시하였다. 건은 남자를, 곤은 여자를 각각 나타낸 것이다. 따라서 '건화명(乾化命)'으로 시작하는 이 문서의 망자는 남자임이 분명하다. 그는 경인생으로, 안장일은 기축년 10월 27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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己酉十二月十三日 手標右標事切有緊用故伏在中方里前坪穆字畓四斗落旧文一丈果同坪涑字畓三斗落旧文一丈典當是遣右人前錢伍拾兩以每朔五分例得用而限來年十月備報之意如是成標事標主幼學 字克和 金洛晋[着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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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안 부안김씨(扶安金氏) 장사택일지(葬事擇日紙) 14 고문서-치부기록류-택기 종교/풍속-민간신앙-택기 乙未 乙未 扶安金氏 門中 전라북도 부안군 부안 서외 김채상 후손가 부안 서외리 김채상 후손가 모년에 부안의 부안김씨가에서 작성된 장사택일지. 부안(扶安)의 부안김씨가(扶安金氏家)에서 작성된 장사택일지(葬事擇日紙)이다. 장사택일지는 지관(地官)이 장례 날짜와 시간을 선택하고 이를 문서로 작성하여 망자의 가족에게 건네준 것이다. 지관은 일시를 선택하면서 망자의 사주와 시신이 묻힐 장지, 무덤의 방향과 방위, 지세(地勢) 등을 고려했기 때문에 관련된 사항들이 문서에 자세하게 적혀 있다. 뿐만 아니라 하관 시 안될 사람들의 간지와 자손들의 간지가 적혀 있었다. 그리고 상주에 관한 정보도 실려 있다. 장사택일지는 통상 안장(安葬)의 날짜, 하관(下棺)의 시각, 개토(開土), 방금(放金), 혈심(穴深), 취토(取土), 납폐(納幣), 파빈(破殯), 발인(發引), 정상(停喪) 등의 시간과 방위를 기록하였다. 이처럼 장례를 치르면서 장지와 장례일을 신중하게 선택한 것은 그 선택이 자손의 화복과 연관되어 있다고 보는 풍수지리설의 영향이 크게 작용하였기 때문이다. 여기에 효(孝)를 강조하였던 조선왕조의 유교적 관습이 어우러지면서 뿌리깊은 관습으로 남게 되었다. 어떤 면에서 보면 조선시대의 예법은 중국보다도 훨씬 더 유교적이었으며 더 엄격하였다. 그 중 상제에 관한 것이 특히 심하였다. 조선 후기의 당쟁은 이 상제를 둘러싼 예송(禮訟)이었다고 해도 그리 틀린 말이 아니다. 부안김씨가에서 작성된 이 문서는 '곤화명(坤化命)'으로 시작하고 있다. 장사택일지에서 망자는 남자와 여자를 구분하여 기록하였는데, 건곤(乾坤) 즉 하늘과 땅으로 달리 표시하였다. 건은 남자를, 곤은 여자를 각각 나타낸 것이다. 따라서 '곤화명(坤化命)'으로 시작하는 이 문서의 망자는 여자임이 분명하다. 임진생으로, 안장일이 을미년 5월 초 7일이므로, 네 살 난 어린 계집아이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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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사의 기일에 홀로 앉아 밤을 세우며 2수 先師諱辰 獨坐達夜 【二首】 빈 당에서 닭 울 때까지 근심스레 앉으니 空堂悄坐達鷄鳴모기 침이 어지러이 찔러대 밤새 놀랐네 亂鑽蚊針終夜驚한가닥 마음의 향을 사르며 공경 다하니 一瓣心香多少敬후산이 옛날 증선생을 위한 것과 같다네499) 後山昔爲曾先生머나먼 북쪽 바라보며 곡배하고 돌아오니 北望迢迢哭拜歸눈물 흔적 이슬에 섞여 홑옷을 적시누나 淚痕和露滴單衣이웃 친구는 오지 않고 학동은 잠자는데 隣朋不到書童宿찌륵찌륵 벌레 소리가 내 슬픔을 돋구네 喞喞蟲聲助我悲 空堂悄坐達鷄鳴, 亂鑽蚊針終夜驚.一瓣心香多少敬, 後山昔爲曾先生.北望迢迢哭拜歸, 淚痕和露滴單衣.隣朋不到書童宿, 喞喞蟲聲助我悲. 한가닥 …… 같다네 '일판향(一瓣香)'은 불교의 선종에서 당(堂)을 열어 불법을 강할 때 한가닥 판향을 공경히 받들어 도법(道法)을 전수한다고 말한 데서 비롯된 말로, 이후에는 다른 사람을 사승하거나 흠앙한다는 뜻으로 주로 쓰인다. 북송(北宋) 진사도(陳師道)의 〈연국 문충공 집에서 육일당의 도서를 보고[觀兗國文忠公家六一堂圖書]〉라는 시에 "지난날 한가닥 판향을 올리었거니, 공경히 증남풍을 위한 것이네.[向來一瓣香, 敬爲曾南豐.]"라는 구절이 보인다. 증남풍은 증공(曾鞏)으로 진사도의 스승이었는데, 그가 별세하였으므로 와서 향을 사른 것이다. '후산(後山)'은 진사도(陳師道)의 호이다. 진사도가 증공을 위해서 그랬듯이 김택술이 자신의 스승인 전우(田愚)를 위해 심향을 사른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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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경대500)에서 포은 정 선생의 시에 차운하다 萬景臺 次圃隱鄭先生韻 층대의 바위 길이 중천에 비꼈는데 層臺石逕半天橫바람 타고 한 번 올라 숙원을 풀었네 一上乘風償夙情강상에 몇 곳이나 우리 땅이 남았던고 幾處江上餘我土관문 방어하려 당년에 이 성을 쌓았지 當年關防築玆城남아가 유람을 하니 되레 번뇌 많아져 男兒周覽還多惱세상사 헤아리니 늦게 났음을 느끼네 世事商量感晩生이전과 이후 사람이 서로 볼 수 없으나 前往後來相不見포옹의 높은 운치 누가 이보다 크리오 圃翁高韻孰能京 層臺石逕半天橫, 一上乘風償夙情.幾處江上餘我土, 當年關防築玆城.男兒周覽還多惱, 世事商量感晩生.前往後來相不見, 圃翁高韻孰能京. 만경대 전라북도 전주의 남고산성이 위치한 남고산에는 천경대, 만경대, 억경대 등 세 개의 봉우리가 있다. 이중 만경대 남쪽 바위 벼랑에는 고려말 정몽주가 남긴 우국시를 찾아볼 수 있다. 《전주시청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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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월 대보름 밤에 보름달을 보려 했으나 구름이 가려 보지 못하다 上元夕 欲看望月 雲蔽不見 기다리던 보름달 더디고 더뎌 먼 산을 보니 待月遲遲望遠岑동쪽 하늘에 홀연 구름 그늘에 가리었구나 東天忽見蔽雲陰산과 바다의 풍년 점치려는데 북쪽 남쪽 미정이고 朔南未定豊山海가뭄과 장마에 대응하는 적색 백색 어찌 알리오80) 赤白何知應旱霖경험 많은 유인은 한창 헤아려보고 經驗幽人方忖度걱정 큰 촌로는 괴로이 신음하구나 隱憂野老苦呻吟조금 있다가 차츰 밝은 빛이 드러나니 少焉稍稍明光露둥둥 울리는 농악 소리81) 기쁘게 듣네 喜聽鼕鼕社皷音 待月遲遲望遠岺, 東天忽見蔽雲陰.朔南未定豊山海, 赤白何知應旱霖.經驗幽人方忖度, 隱憂野老苦呻吟.少焉稍稍明光露, 喜聽鼕鼕杜皷音. 산과……알리오 대보름에는 달의 위치와 색깔로 그 해의 풍흉을 점치는데, 달이 구름에 가려 알 수가 없다는 뜻이다.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에 의하면 "달빛을 보고 점을 치는데, 달빛이 붉으면 가물 징조이고, 희면 장마가 질 징조이다. 또 달이 뜰 때의 형체, 달의 크기, 달의 출렁거림, 달이 뜨는 위치의 높낮이로 점을 친다."고 하였다. 그런가 하면 달빛이 진하면 풍년이 들고 흐리면 흉년이 든다고 점을 치기도 한다. 또 달이 남쪽으로 치우쳐 있으면 해변에 풍년이 들 징조이고, 북쪽으로 치우쳐 있으면 산촌에 풍년이 든다고 한다. 《한국민속대백과사전》 농악 소리[社皷音] 원문의 '사고(社鼓)'는 사일(社日)에 토신(土神)에게 지내던 제사에 연주하던 고악(鼓樂)인데, 농악소리를 말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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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옥의 자설 士沃字說 계옥(啓沃)은 고종(高宗)이 부열(傅說)에게 명한 말인데33), 지금 군이 '계(啓)'로 이름을 삼고, '옥(沃)'으로 자(字)를 삼았으니, '계옥' 두 글자는 군이 평생 짊어지고 가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계옥할 바를 깊이 생각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사자(四子)와 육경(六經)34)은 나의 마음을 계옥하는 요법 아닌 것이 없으니, 자신의 마음을 계옥하지도 못하고 다른 사람의 마음을 계옥하게 할 수 있는 자가 있겠는가. 거칠고 번거로운 일을 싫어하는 것은 나의 마음을 계옥하는 방법이 아니고, 지리멸렬하고 맛을 잃어버리는 것은 나의 마음을 계옥하는 방법이 아니니, 반드시 글자에서 그 뜻을 구하고 구절에서 그 뜻을 구하여 마음으로 이해하고 몸으로 체득하여 장중함과 공경함으로 보존하고, 젖어들고 노님으로 기른다면 이것이 나의 마음을 계옥하는 것에 거의 괜찮을 것이고, 앞으로 어떤 일을 만날 때에도 계옥하는 직임을 담당하여 장맛비로 삼게 하고 배와 노로 삼게 하는 것35)이 옛날에만 아름다움을 독차지하게 하지 않을 수 있을 것이다. 啓沃。是高宗命說之辭也。今君啓以名之。沃以字之。啓沃二字。是君平生所擔負也。然則可不深思其所以啓沃者哉。四子六經。無非啓沃吾心之要。不啓沃吾心。而能啓沃人之心者。有之乎。鹵莽厭煩。非所以啓沃吾心也。滅裂忘味。非所以啓沃吾心也。必須字求其義。句求其義。會之於心。體之於身。莊敬以存之。涵游以養之。則此其啓沃吾心者。庶乎其可。而前頭際遇。亦可以擔當啓沃之任。使霖雨舟楫。不至專美於古也。 계옥(啓沃)은……말인데 계옥은 정성을 다 바쳐 임금을 인도하며 보좌하는 것을 말하는 것으로, 은(殷)나라 고종이 부열을 재상으로 삼고 "그대의 마음을 열어 내 마음에 대도록 하라.[啓乃心, 沃朕心.]"라고 말한 데서 유래한 말이다. 《書經 說命上》 사자(四子)와 육경(六經) 사자는 사자서(四子書)의 준말로, 공자(孔子), 증자(曾子), 자사(子思), 맹자의 언행에 관계된 《논어》, 《대학》, 《중용》, 《맹자》를 가리키고, 육경은 유가(儒家)의 경전인 《시경》, 《서경》, 《주역》, 《예기(禮記)》, 《악기(樂記)》, 《춘추(春秋)》를 이른다. 장맛비로……것 은나라 고종이 부열에게 이르기를, "내가 만일 큰 냇물을 건넌다면 그대를 배와 노로 삼을 것이며, 만일 큰 가뭄이 들면 그대를 장맛비로 삼을 것이다.[若濟巨川, 用汝作舟楫; 若歲大旱, 用汝作霖雨.]"라고 한데서 유래한 말이다. 《書經 說命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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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저 雜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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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온의 자설 李士溫字說 이씨(李氏)의 아들 기휴(基休)가 관례를 치른 지 이미 오래되었는데, 어느 날 나에게 표덕(表德 자(字))을 물었다. 내가 삼가 생각건대, 천하의 사물은 기본을 먼저 세우지 않으면 용도를 베풀 곳이 없게 된다. 이 때문에 백색은 다섯 가지 채색의 기본이 되고, 단맛은 다섯 가지 맛의 기본이 되며, 씨를 뿌리는 것은 수확의 기본이 되고, 집터를 마련하는 것은 집을 짓는 기본이 된다.《시경》에 이르기를, "온후하고 온후하여 공손한 사람은 덕의 기본이 된다."27)라고 하였다. 온후하고 온후하다는 것은 또한 덕에 나아가는 기본이 되는데, 천지의 큰 덕을 '생(生)'이라 하고, 성인의 큰 덕을 '인(仁)'이라 하니, '생'과 '인'은 단지 온후한 뜻이다. 만약 항상 마음속에 있는 온후한 뜻을 보존할 수 있다면 드러날 때에 이르러 자연히 드러날 것이고, 강단(剛斷)할 때에 이르러 자연히 강단할 것이며, 수렴할 때에 이르러 자연히 수렴할 것이다. 그러므로 〈순전(舜典)〉에 이르길, "온후하고 공손하고 성실하고 독실하시다."28)라고 하였고, 《노론(魯論 논어(論語))》에 이르기를, "온후하고 어질고 공손하고 검소하고 겸양하셨다."29)라고 하였다. 또 말하기를, "온후하면서도 엄숙하셨다."30)라고 하였으며, 〈상송(商頌)〉에 이르기를, "아침저녁으로 온후하고 공손하여 일을 집행함에 정성스럽게 하였다."라고 하였다.예로부터 성인의 도를 칭송하여 서술한 자는 온후함을 우선으로 삼지 않은 적이 없었으니, 온후함이 덕의 기본이 되는 것이 분명하지 않는가. 내가 특별히 '온후하다'는 글자를 들어 기휴를 위해 자로 삼았으니, 사온은 힘쓰기를 바란다. 李氏子基休冠已久矣。一日問其表德於予。予竊念天下之物。基不先立。用無所施。是以白者五采之基。甘者五味之基。播者肯穫之基。堂者肯構之基。詩曰。溫溫恭人。維德之基。溫溫者亦進德之基也。天地之大德曰生。聖人之大德曰仁。生也仁也。只是溫厚底意思。若常存得溫厚意思在這裏。到宣著時。自然會宣著。到剛斷時。自然會剛斷。到收斂時。自然會收斂。故舜典曰。溫恭允塞。魯論曰。溫良恭儉讓。又曰。溫而厲。商頌曰。溫恭朝夕。執事有恪。自古稱述聖人之道者。無不以溫爲先。溫爲德之基者。不其較如乎。予特擧溫字。爲基休字之。願士溫勉之。 온순하고……된다 〈대아(大雅) 억(抑)〉에 보인다. 온화하고……독실하시다 순 임금의 덕을 표현한 말이다. 온순하고……겸양하셨다 자공(子貢)이 공자의 덕을 형용한 말로, 《논어》 〈학이(學而)〉에 보인다. 온화하면서도 엄숙하셨다 공자의 덕을 표현한 말로, 《논어》 〈술이(述而)〉에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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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차계장류

一道面堂北下里化民金載相右謹言切迫情由段近來偸葬之習已成痼弊去辛丑年良中奄遭親山之變至于今四年晝夜搜覓尙未捉得而這間再三呈訴則 題音內捉來偸葬者對卞事敎是故搜探四方終無形跡勢將末由前呈所志帖連仰訴爲去乎自 官掘移以雪幽明之寃千萬祝手爲白只爲行下向敎是事城主 處分甲辰二月 日官[署押](題辭)如有官掘之法則偸埋者豈有不見之理苟煩向事初九[官印][官印][官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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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저자)
유형 :
고문서
유형분류 :
소차계장류

1856년 김채상(金彩相) 소지(所志) 1 고문서-소차계장류-소지류 법제-소송/판결/공증-소지류 丙辰九月 日 金彩相 城主 丙辰九月 日 金彩相 扶安縣監 전라북도 부안군 동진면 [署押] 1개 6.0*6.0(정방형) 적색 부안 서외 김채상 후손가 부안 서외리 김채상 후손가 1856년(철종 7) 9월에 부안현 일도면 당북리에 사는 김채상이 부안현감에게 올린 산송 소지. 1856년(철종 7) 9월에 부안현(扶安縣) 일도면(一道面) 당북리(堂北里)에 사는 김채상(金彩相)이 부안현감(扶安縣監)에게 올린 산송 소지(山訟所志)이다. 이에 따르면, 부안현 하서면(下西面) 금광동(金光洞)에 사는 신태학(申泰學)이 지난 4월 부모의 산소를 쓰려고 산지를 구하던 김채상에게 좋은 산지가 있다며 접근하여 왔다. 김채상이 직접 가서 산지를 보니 산소로 쓰기에 적당하였지만 근처에 무덤이 있어서 거래를 그만두고자 하였다. 그러나 신태학이 그 무덤은 후손이 없는 자신의 족대모(族大母) 묘라면서 여러 가지로 회유하길래 김채상은 아무런 의심을 하지 않고 산지를 매입하였고, 그 뒤 여기에 부모의 묘를 썼다. 그러나 최근 뜻밖에도 무덤의 진짜 주인이 나타나서 김채상을 찾아와 이장을 해달라고 요구했다. 김채상은 이러한 저간의 사정을 설명하면서 이처럼 남의 산지를 몰래 판 신태학을 잡아다가 엄히 처벌하는 한편, 산지 값 10냥을 추급(推給)할 수 있도록 해달라고 부안현감에 탄원하였다. 그리고 관련 산지 문권도 소지와 함께 관에 제출하였다. 관에서는 신태학을 데려와 대기하라는 제사(題辭)를 내렸다. 이 문서에는 작성연대가 병진년으로만 적혀 있으나, 다행히도 김채상이 도광(道光) 26년, 즉 1846년(헌종 12)에 논을 매입하면서 받은 명문이 전하고 있어서, 위의 병진년을 1856년으로 추정하였다. (1846년 김채상(金彩相)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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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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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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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차계장류

一道面堂北里居化民金彩相右謹言切憤情由事欺人偸賣者世或有之而豈有如下西面金光洞居申泰學爲名人乎民爲親求山矣去四月良中同泰學言內有可葬之地而欲爲放賣云云故往視其地則似爲用山然而近有一塚之由嫌避欲罷則同泰學稱以渠之族大母無后山一無忌憚是如萬端慰言故信之無疑買得用山矣不意今者眞塚主來到困督故掘移親葬情理之痛迫夫復何言不勝憤枉山地文券帖連仰龥於孝理之下 洞燭敎是後同泰學捉致嚴治欺人偸賣之罪後山地價錢十兩卽爲推給使此殘民無至呼冤之地千萬泣祝行下向敎是事城主 處分丙辰九月 日官[署押](題辭)率待事持卅日[官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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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편저자)
유형 :
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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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차계장류

1844년 김재상(金載相) 소지(所志) 고문서-소차계장류-소지류 법제-소송/판결/공증-소지류 甲辰二月 日 金載相 城主 甲辰二月 日 金載相 扶安縣監 전라북도 부안군 동진면 [署押] 1개 6.5*6.5(정방형) 적색 부안 서외 김채상 후손가 부안 서외리 김채상 후손가 1844년(헌종 10) 2월에 부안현 일도면 당북하리에 사는 김재상이 부안현감에게 올린 산송 소지. 1844년(헌종 10) 2월에 부안현(扶安縣) 일도면(一道面) 당북하리(堂北下里)에 사는 김재상(金載相)이 부안현감(扶安縣監)에게 올린 산송 소지(山訟所志)이다. 신축년에 김재상의 친산(親山)에 누군가가 투장(偸葬)을 하여 그 뒤 4년 동안 김재상은 밤낮을 가리지 않고 투장자를 찾았으나 끝내 찾지 못했다. 그동안 2, 3차례 관에 소지를 올려 "투장자를 잡아오면 대변(對卞)하겠다"라는 제음(題音)을 받고, 사방으로 투장자를 찾았지만, 그 종적이 묘연했다. 그리하여 김재상은 기왕에 관에 올렸던 소지를 함께 첩연(帖連)하여 다시 관에 소지를 올리면서, 부디 관에서 투총을 파내어 원통함을 풀어달라고 하소연하였다. 이에 대하여 부안현감은 만일 관에서 묘를 파내는 법이 있다면 투장자가 어찌 알지 못할 리가 있겠는가라고 반문하면서 번거럽게 소를 올리지 말라는 제사를 내렸다. 김재상은 이듬해에도 같은 내용의 소지를 올렸으나 관으로부터 관굴(官掘)은 법에 저촉된다는 제사를 받았다. 이 문서에는 작성연대가 갑진년으로만 적혀 있으나, 다행히도 김재상이 여러 차례 시장(柴場)을 사면서 받은 명문(明文)들이 전하고 있어서 이를 토대로 위의 갑진년을 1844년으로 추정하였다. (1815년 김재상(金載相) 시장문기(柴場文記), 1831년 김재상(金載相) 시장문기(柴場文記), 1834년 김재상(金載相) 시장문기(柴場文記) 등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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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편저자)
유형 :
고전적
유형분류 :
집부

장마 끝에 달을 보니 마침 월식을 만났는데 때는 유두일203)이어서 積雨餘見月 適値月蝕 時則流頭 무더위 장마가 열흘 동안이나 이어졌다가 炎天積雨一旬長비로소 오늘 밤에야 보름달 됨을 보았네 始見今宵月入望박식204)하여 넋이 자라205) 도리어 놀라고 薄蝕旋驚生魄黑맑은 달빛이 좋은 때를 저버려 탄식하네 淸光堪歎負辰良깊은 시각에 나만이 끝내 잠 못 이루고 深更獨我終無寐몇 군데에선 유람객들 애가 끊어지려 하겠지 幾處遊人欲斷腸결계206)에서 온갖 인연은 대부분 이와 같으니 缺界萬緣多若此잘잘못을 가지고 부질없이 헤아리지 말게나 莫將得失謾商量 炎天積雨一旬長, 始見今宵月入望.薄蝕旋驚生魄黑, 淸光堪歎負辰良.深更獨我終無寐, 幾處遊人欲斷腸?缺界萬緣多若此, 莫將得失謾商量. 유두일(流頭日) 명절의 하나인 음력 6월 15일로, 이날에는 가족이나 가까운 사람들끼리 짝을 지어 맑은 시냇가나 폭포로 가서 머리를 감고 목욕을 한 뒤 준비한 음식을 나누어 먹음으로써 질병을 예방하고 더위를 물리친다고 한다. 특히 이날 동쪽으로 흐르는 물에 가서 머리를 감는 것은 동방이 청(靑)이라 양기(陽氣)가 가장 왕성한 곳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박식(薄蝕) 해와 달이 빛을 내지 못하는 것을 '박(薄)'이라 하고, 해와 달의 한쪽이 이지러지는 것을 '식(蝕)'이라 한다. 넋이 자라 원문의 '생백(生魄)'은 재생백(哉生魄)의 준말로, 달의 기망(旣望), 즉 음력 16일을 말한다. 백(魄)은 달의 어두운 부분으로, 16일 이후에는 백이 점점 자라난다. 결계(缺界) 결함이 있는 세상이라는 뜻으로 사바세계를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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