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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와 정공 묘지명 黙窩鄭公墓誌銘 정군 재한(鄭君在翰)과 이군 승우(李君承愚)는 모두 우리 고을의 선사(善士)이다. 두 사람은 대대로 한마을에 살면서 노년까지 서로 지켜 주며 의연히 도의지교(道義之交)를 맺었다. 어느 날 정군이 그 선대인(先大人) 묵와공(黙窩公)의 유사(遺事)와 가장(家狀)을 가지고 와서 묘지명을 지어 주기를 청하였다. 가장은 바로 이군이 지은 것이다. 이군은 선대부터 교분이 있던 집안의 자제로 배종(陪從)하며 출입한 지 오래되었을 뿐만이 아니니, 묵와(黙窩)의 행적을 자세히 아는 것이 이군만 한 이가 없다. 게다가 이군은 현명하여 필시 사사로운 정에 치우치지 않았을 것이니, 그 가장의 말은 실로 믿을 만할 텐데 어찌 나의 말이 필요 있겠는가. 그렇지만 교분으로 말하면 모두 벗이니, 이군이 사양하지 않은 것을 내가 어찌 유독 사양하겠는가.살피건대, 공의 휘는 백환(百煥), 자는 익서(益瑞), 호는 묵화(黙窩)이다. 하동 정씨(河東鄭氏)는 신라 때부터 고려에 이르기까지 우리나라의 거족(鉅族)이었다. 조선에는 휘 여해(汝諧)가 있는데, 경학과 문장, 덕행으로 세상에 이름이 알려졌고, 세상에서는 둔재(遯齋) 선생이라고 하였다. 고조는 휘가 인채(仁采), 호가 덕곡(德谷)인데, 지중추부사를 지냈다. 증조는 휘가 석(錫), 호가 반산(盤山)이다. 조부는 휘가 양무(陽武)이고, 부친은 휘가 의상(義相)이다. 모친은 청도 김씨(淸道金氏)로, 김상준(金相俊)의 따님이다. 계비(繼妣)는 김해 김씨(金海金氏)로, 아무개의 따님이다. 순묘(純廟) 기묘년(1819, 순조19) 7월 7일은 바로 공이 태어난 날이다.공은 어려서 어머니를 여의었다. 계비는 성격이 까탈스러워 어울리기 어려웠지만 공은 정성을 다해 잘 받들었으니, 비록 소 밑을 청소하는 일51)과 회초리를 맞는 고통도 마음에 담지 않고 얼굴에 드러내지 않았다. 그 대인(大人)이 매양 계비가 자애롭지 않은 것을 우려하였는데, 공이 울면서 간하기를 "자식이 만약 효도한다면 어머니가 어찌 자애롭지 않겠습니까. 어머니가 자애롭지 못한 것은 자식의 잘못입니다."라고 하니, 대인이 가련하게 여겨서 그만두었다. 오랜 시간이 흐른 뒤에 계비가 감동하여 마침 기뻐함에 이르자 친척과 이웃들이 모두 감탄하여 왕상(王祥)의 효성에 견주었다.계비가 세상을 떠나자 예에 지나칠 정도로 슬퍼하여 몸이 쇠약해졌다. 계비는 아들 하나를 두었으니 주환(周煥)이다. 공이 정성을 다하여 보살폈는데, 함께 잠자며 한 이불을 덮을 정도였고 늙어서도 변함이 없었다. 공의 외삼촌이 매우 가난하여 공에게 와서 의탁하였는데, 낳아 주신 부모처럼 섬겨 무엇이든 하지 못하는 것이 없을 만큼 갖가지로 도와주었다. 그가 세상을 떠나자 집안 재산을 털어 장사 지내주고선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내 일찍 어머니를 여의고 어머니의 형제라곤 오직 외삼촌만 계셨는데, 지금 모두 세상을 떠났다."라고 하고는 말을 마치자 눈물이 옷깃을 적셨다. 평상시 자신의 노력으로 얻은 것이 아니면 먹지 않았고 합당한 사람이 아니면 벗하지 않았다. 눈으로는 예가 아닌 색을 보지 않고, 귀로는 예가 아닌 말을 듣지 않았다. 자신을 단속하고 집안을 바르게 하였으며, 공평한 마음으로 사람들의 모범이 되었다. 자손들은 그 가르침을 따랐고 향리에서는 그 의리에 탄복하였다.기묘년(1879, 고종16) 1월 4일에 졸하였다. 광대동(光大洞) 유좌(酉坐) 언덕에 장사 지냈다. 배위(配位)는 보성 오씨(寶城吳氏) 오용상(吳龍祥)의 따님으로, 부덕(婦德)이 있었다. 아들은 재한(在翰)이고, 손자는 영현(榮鉉), 장현(章鉉)이고, 딸은 평택(平澤) 임노열(林路烈)에게 출가하였다. 다음과 같이 명을 짓는다.어머니는 매우 수고하셨으니 母氏劬勞나를 낳고 길러 주셨네. 生我育我어린 자식 두고 어머니 떠나셨으니 子幼母違외로운 몸 누구를 의지할까. 煢煢何恃민자건은 갈대꽃 넣은 옷 입었고52) 閔被蘆絮왕상은 모진 고초 겪었네.53) 祥遭楚虐곡진하게 받들어 따랐고 委曲承順말과 얼굴에 드러내지 않았네. 不見辭色끝내 기뻐함에 이르렀으니 終焉底豫근심스럽게 하지 않고 한탄하지 않았네. 不戚不咨큰 강령 이미 확립되니 大綱旣立온갖 사람 미루어 확대할 수 있네. 萬目可推 鄭君在翰李君承愚。皆吾鄕善士。二人世居一巷。到老相守。毅然爲道義之交。一日鄭君以其先大人黙窩公遺事狀。來謁誌銘之文。狀卽李君所撰也。李君以世交子弟。陪從出入。不啻久矣。則詳黙窩之行宜。莫如李君。且以李君之賢。必不爲阿私。則其言固可證信。何待乎余言。以契分則均是友也。李君之所不辭。余豈獨辭之哉。按公諱百煥。字益瑞。號黙窩。河東之鄭。自羅至麗爲東方鉅族。我朝有諱汝諧。經學文行。著稱於世。世云遯齋先生。高祖諱仁采。號德谷。官知中樞。曾祖諱錫。號盤山。祖諱陽武。考諱義相。非淸道金氏相俊女。繼妣金海金氏某女。純廟己卯七月七日。卽公之寅降也。幼喪所恃。繼妣性峻難諧。公克意承順。雖牛下之役。夏楚之苦。不作於意。不見於色。其大人每恐其不慈。公泣而諫曰。子若孝焉。則母豈不慈。母之不慈。子之罪也。大人憐而止之。久之。繼妣感之而竟底豫焉。親戚鄰里。莫不嗟賞。以王祥之孝擬之。繼妣歿。哀毁過禮。繼妣有一男曰周煥。公撫愛甚篤。同寢同被。至老不替。公舅氏至貧。來依於公。事之如所生。凡百周恤。無所不至。其歿也。傾家財以營葬。因語人曰。吾早而失母。母之同氣。惟舅氏在。今皆失之。語了涕下沾衿。平居非其力不食。非其人不友。目不接非禮之色。耳不聽非禮之言。勅身正家。平心率物。子孫遵其敎。鄕里服其義。己卯正月四日卒。葬光大洞酉坐原。配寶城吳氏龍祥女。有婦德。男在翰。孫榮鉉章鉉。女適平澤林路烈。銘曰。母氏劬勞。生我育我。子幼母違。煢煢何恃。閔被蘆絮。祥遭楚虐。委曲承順。不見辭色終焉底豫。不戚不咨。大綱旣立。萬目可推。 소 밑을 청소하는 일 진(晉)나라의 이름난 효자인 왕상(王祥)의 고사를 차용한 일화인 듯하다. 《진서(晉書)》〈왕상열전(王祥列傳)〉에, 왕상(王祥)의 계모 주씨(朱氏)가 아버지에게 왕상을 모함하였는데, 이 때문에 왕상이 아버지의 사랑을 잃어 매양 소 밑을 청소하게 하였다는 고사가 전한다. 민자건(閔子騫)은……입었고 《태평어람(太平御覽)》 권819 〈효자전(孝子傳)〉에, "민자건이 계모에게 괴롭힘을 당하여 겨울에 솜을 넣은 옷 대신 갈대꽃을 넣은 옷을 입었는데, 그의 아버지가 뒤에 그 사실을 알고서 계모를 내보내려고 하자 민자건이 무릎을 꿇고 말하기를 "어머니가 집에 계시면 한 아들만 얇은 겨울옷을 입지만, 어머니가 나가시면 세 아들이 추위에 떨게 됩니다."라고 한 고사가 있다. 여기서는 계모에게 효성을 다하였다는 말인 듯하다. 왕상은……겪었네 왕상(王祥)은 계모 주씨(朱氏)가 겨울에 생선을 먹고 싶어 하자 옷을 벗고 얼음을 깨고 물에 들어가 고기를 잡으려 하였는데 홀연히 얼음이 녹으며 잉어 두 마리가 뛰어올랐다고 한다.《五倫行實圖 孝子》여기서는 정백환(鄭百煥)이 계모에게 고생한 것을 비유한 말인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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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부인 강씨 묘지명 淑夫人姜氏墓誌銘 기군 동익(奇君東翼)은 내 고향의 옛 벗인데, 중년 이후로는 나의 집과 매우 가까운 데 살았다. 이 때문에 그 대부인(大夫人)의 훌륭한 규문의 법도를 들을 수 있었는데, 사람들에게 칭찬을 받은 것이 한두 가지뿐만이 아니었다. 부인이 세상을 떠난 지 9년 뒤에 동익이 그 가장(家狀)을 가지고 와서 묘지명을 지어 주기를 청하였는데, 전에 들은 것이 과연 헛되이 전해진 것이 아니었으니, 지금 가장에 기록된 내용은 또한 과언이 아니다.부인이 시집왔을 초기에 남편의 집이 매우 가난하여 생계를 꾸릴 수 없었기에 부인이 친히 부지런히 일하여 밤낮으로 게으르지 않았다. 이로부터 집안 형편이 펴져 변변찮은 음식이라도 봉양할 수 있었다. 시부모를 섬길 적에는 온화하고 즐거운 기색(氣色)으로 물 흐르듯이 응대하였다. 시부모가 늙고 병이 많아 항상 병석에 있었는데, 음식이 입에 맞는지 약 처방이 잘 되었는지 반드시 살펴보고 맛을 본 뒤에 올렸다. 전후로 당한 상에 매우 슬퍼하였고, 장사 지낼 때 쓰는 여러 기물도 일일이 스스로 마련하였으니, 차자(次子)라는 이유로 장자에게 수고로움을 양보하지 않았다. 남편을 섬길 적에는 매우 온순하였으니, 집안의 크고 작은 일을 물어본 뒤에 행하여 일찍이 한마디 말도 서로 언성을 높인 적이 없었다.규방(閨房)에서는 온화하고 고요하여 사람의 소리가 들리지 않는 듯하였다. 내외 친족으로부터 천한 노복에 이르기까지 혼사에는 부조하고 상사에는 부의하였다. 평상시 옷은 사치스럽게 입지 않았고 음식은 소박하게 차렸다. 집안에서는 무당을 쓰지 않고 문안으로 광대를 들이지 않고 오직 부지런함으로 스스로 단속하고 검소함으로 스스로 길렀다. 만년에 이르러 몸이 편안하고 집안이 평온하였으며, 장수와 복을 누렸다.부인의 관향은 진주(晉州)이니, 신라(新羅) 병부 상서(兵部尙書) 휘 민첨(民瞻)이 시조이다. 이로부터 대대로 훈벌의 가문으로 이름났다. 중엽에 이르러 휘 덕룡(德龍)이란 분이 계셨는데,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켰고 함창 현감(咸昌縣監)에 제수되었으니, 바로 부인의 7대조이다. 증조는 휘 우하(遇河)이고, 조부는 휘 택주(宅周)이다. 부친은 휘 진오(鎭五)이니, 통정대부를 지냈다. 모친 숙인(淑人)은 천안 전씨(天安全氏)로, 전종언(全宗彦)의 따님인데, 순묘(純廟) 계미년(1823, 순조23) 5월 26일에 태어났다. 연일 현감(延日縣監) 기공 하운(奇公夏雲)에게 출가하였고, 남편의 관직에 따라 숙부인에 봉해졌다. 1남 1녀를 두었으니, 아들은 바로 동익(東翼)이고, 딸은 문재항(文載頊)에게 출가하였다. 동익은 4녀를 낳았는데, 고석주(高錫柱), 윤상의(尹相義), 민영제(閔泳悌), 윤봉혁(尹鳳赫)에게 출가하였다. 병신년(1896, 고종33) 2월 23일에 졸하였다. 도장면(道莊面) 옥동촌(玉洞村) 뒤 을좌(乙坐) 언덕에 장사 지냈다. 다음과 같이 명을 짓는다.나라의 흥망 邦之隆替집안의 성쇠. 家之盛衰실로 내조에 달렸으니 實係內助예부터 그러하였네. 自昔然而처음엔 가난하다가 만년에 넉넉해졌고 早嗇晩豊먼저는 곤궁하고 나중엔 창대하였네. 先困後昌향리에 드러나 빛났으니 著耀鄕里남은 복록 다함이 없네. 餘祿無疆어떻게 그러할 수 있는가 問何因爾부인의 현숙함 때문일세. 夫人賢淑백세토록 향기로운 재물을 올리니 百世芬苾옥동의 산기슭일세. 玉洞之麓 奇君東翼。余鄕井舊要也。中年以來。敞寓尤密邇焉。是以得聞其大夫人閫範之美。爲人所稱道者。非止一二。夫人沒後九年。東翼抱其家狀。請幽竁之誌。前所聞。果非虛傳。而今所狀者。亦非過語也。夫人于歸之初。天家貧甚。無以爲計。夫人親服勤勞。夙夜不懈。自是而生理有賴。菽水不罄。事舅姑。氣和色愉。應對如流。舅姑老而多病。恒在床褥。其飮饍之宜。藥餌之方。必審視而嘗進之。遭前後喪。哀戚殊甚。喪具凡百。一一自備。不以次房而遜於長房。事君子。極其婉順家事巨細。咨而行之。未嘗以一言相稽。閨房之內。雍容靜暇。若無人聲。自內外族戚以至婢僕之賤。婚嫁有助。死喪有賻。平居衣不華奢。食不甘美。家不用巫覡。門不納玩戱。惟以勤勞自持。儉約自養。至於晩歲。身安家溫。備享壽祿。夫人貫晉州。以新羅兵部尙書諱民瞻爲始祖。自是世著勳閥。至中葉有諱德龍。壬辰倡義。除咸昌縣監。卽夫人七世祖也。曾祖諱遇河。祖諱宅周。考諱鎭五。官通政。妣淑人天安全氏宗彦女。純廟癸未五月二十六日生。適延日縣監奇公諱夏雲。從夫職封淑夫人。擧一男一女。男卽東翼。女適文載頊。東翼生四女。曰高錫柱尹相義閔泳悌尹鳳赫。以丙申二月二十三日卒。葬道莊面玉洞村後乙坐原。銘曰。邦之隆替。家之盛衰。實係內助。自昔然而。早嗇晩豊。先困後昌。著耀鄕里。餘祿無疆。問何因爾。夫人賢淑。百世芬苾。玉洞之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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酬長田李上舍樂裕【最善】韻 逢君秋雨裏。句在無言梅。老驥空愁櫪。摶鵬冷笑盃。今宵邀月賞。那處掃雲開。別後東平樂。江南聽雁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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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학생 청계 최군 묘지명 故學生淸溪崔君墓誌銘 군의 성은 최씨(崔氏), 이름은 창렬(昶烈), 자는 성규(性圭), 본관은 낭주(朗州)이다. 고려 초에 휘 지몽(知夢)이 고려 태조를 섬겨 동래후(東萊侯)에 봉해졌고, 식읍(食邑) 1천 호(戶)를 받았으니, 족보에 등재되어 있는 선조이다. 중대에 이르러 휘 안우(安雨)는 조선에서 벼슬하여 군기시 소감(軍器寺小監)을 지냈다. 휘 운(雲)은 호가 덕암(德庵)이고, 평안 감사(平安監司)를 지냈다. 휘 추(湫)는 호가 난계(蘭溪)이고, 문과에 급제하여 장성(長城), 능성(綾城), 고창(高敞), 광양(光陽)의 수령을 지냈다. 휘 치호(致湖)는 문과에 급제하고 승지를 지냈다. 휘 광(銧)은 호가 매곡(梅谷)인데, 찰방을 지냈다. 모두 그 현조(顯祖)이다. 고조는 휘가 인수(仁受), 호가 송암(松庵)인데, 장수하였다는 이유로 첨중추(僉中樞)에 올랐다. 증조는 휘가 성각(聖覺)이고, 조부는 휘가 진후(鎭厚), 호가 운곡(雲谷)으로, 문장과 덕행이 있었다. 부친은 휘 의한(義漢)이다. 모친은 제주 양씨(濟州梁氏)로, 양시중(梁時仲)의 따님이다. 을묘년(1855, 철종6) 6월 23일 산음리(山陰里)에서 군을 낳았다.공은 타고난 바탕이 영특하였으니, 어려서 독서하는 사람의 곁에 있으면서 그 소리를 듣고 외워서 전할 수 있었다. 스승에 나아가게 되어서는 문리(文理)가 날로 성취하였다. 성동(成童)에 이르러 《소학(小學)》, 《대학(大學)》, 《논어》, 《맹자》, 《시경》, 《서경》을 여러 번 송독하여 매우 익숙하였기에 글을 지음에 문채(文彩)가 있었다. 어느 날 문득 마음속으로 말하기를 '나의 이전 공부는 다만 쓸데없이 마음과 힘을 허비하고 쓸데없이 시간을 허비하였다. 선철(先哲)이 말하기를 〈만약 존심양성(存心養性)을 하지 않으면 말로 지껄이는 것일 뿐이다.〉라고 하였으니, 지금 장구(章句)나 찾고 대구(對句)나 맞추면서 글을 지어 겉만 꾸미는 것이 어찌 학문이겠는가. 이는 다만 사람의 허황되고 부화한 습속을 자라게 할 따름이다.'라고 하였다.이로부터 지엽적인 것을 제거하고 근본을 배양하였으니, 〈사물잠(四勿箴)〉, 삼성(三省), 구용(九容), 구사(九思) 및 〈숙흥야매잠(夙興夜寐箴)〉을 써서 자리 곁에 붙여 놓고 늘 보면서 경계하고 반성하는 바탕으로 삼았다. 또 주돈이(周敦頤)와 정호(程顥), 정이(程頤)) 같은 여러 현인(賢人)의 격언과 요결(要訣) 수십 조(條)를 써서 아침저녁으로 읊조렸다. 일찍이 말하기를 "강절(康節 소옹(邵雍)) 선생이 수년 동안 백원산(百源山)에서 독서하며 밤에 침상에서 자지 않았는데 학문이 이루어지자 마침내 오(吳), 초(楚), 제(齊), 노(魯), 양(梁), 진(晉)나라 사이에서 유람하면서 천하의 선비와 두루 교유하고 천하의 풍속을 두루 관찰하였으니, 이 일이 매우 좋다. 늘 마음에서 잊지 않고 배운 것이 진보하기를 기다려 또한 장차 이 노인처럼 사방을 유람할 것이다."라고 하였다.무자년(1888, 공종25) 6월 11일에 병으로 집에서 별세하였다. 죽기 전에 말하기를 "나는 죄와 한(恨)이 한가지씩 있다. 부모보다 먼저 죽는 것이 죄이고, 강절 선생처럼 유람하려는 뜻을 이루지 못한 것이 한이다."라고 하였다. 외신산(外薪山) 중턱 아래 유좌(酉坐) 언덕에 장사 지냈다. 배위(配位)는 여흥 민씨(驪興閔氏)로, 민치장(閔致章)의 따님이다. 1남 1녀를 낳았으니, 아들은 창주(昌柱)이고, 딸은 하동(河東) 정순학(鄭淳鶴)에게 출가하였다.아, 군은 영특한 자질로 일찍 스스로 깨달았으니, 근본을 두터이 하고 실질에 나아가 향상되기를 그치지 않았다. 그런데 천명을 누리지도 못하고 품은 뜻을 펼치지도 못한 채 이처럼 급하게 중도에서 요절할 줄 누가 알았으랴. 창주는 철들기 전에 부친을 여의어 그 모습과 음성, 치적과 행적을 아득히 기억하지 못하였기에 이를 평생의 한으로 여겼다. 그 선인(先人)의 벗 난계옹(蘭溪翁)을 모시고 그 유사(遺事)를 기록한 다음 그 행장을 가지고 나를 찾아와서 말하기를 "비록 선인의 음성과 용모를 대하지 못했지만 직접 본 것 같은 마음을 붙일 수 있는 것은 오직 이것입니다. 원하건대 한마디 은혜로운 말을 보태 주십시오."라고 하였다. 내가 말하기를 "그대가 묘령(妙齡)의 나이에 이미 세상을 떠난 어버이를 잊지 않으려는 마음이 이와 같으니, 이는 한 집안에 자손이 끊어지지 않을 소식이다. 그 당시 펴지 못한 뜻이 이로 인하여 펴지지 않으리라고 어찌 장담하겠는가."라고 하고, 그 뜻을 가련하게 여겨 차마 사양하지 못하였다. 이에 다음과 같이 명을 짓는다.꽃 피우고 열매를 맺지 못하면 秀而不實일은 실로 편안하기 어렵네. 不食有報뜰의 난초는 날마다 자라네. 庭蘭向榮 君姓崔。諱昶烈。字性圭。系出朗州。麗初有諱知夢。事麗祖封東萊侯。食邑千戶。其登譜之祖也。至中系有諱安雨。仕我朝。官軍器寺小監。諱雲。號德庵。平安監司。諱湫。號蘭溪。文科。歷宰長城綾城高敞光陽。諱致湖。文科承旨。諱銧。號梅谷。察訪。皆其顯祖也。高祖諱仁受。號松庵。壽陞僉中樞。曾祖諱聖覺。祖諱鎭厚。號雲谷。有文行。考諱義漢。妣濟州梁氏時仲女。以乙卯六月二十三日。生君于山陰里。姿稟穎悟。幼而在讀書。側聞其聲而能誦傳之。及就傳。文理日就。至成童。小大學論孟詩書。誦數甚熟。綴文緝句。詞義斐然。一日忽語于心曰。我前日之功。只是枉費心力。枉費光陰。先哲有言曰。若不存養。只是說話。今尋章摘句。抽黃對白。以爲粧撰皮毛者。此何學也。適足以長人虛夸浮靡之習而已。自此刊落枝葉。培養本源。書四勿三省九容九思及夙興夜寐箴。貼之座側。以爲常目警省之地。又書濂洛群賢格言要誨數十條。晨夕諷誦。嘗曰。康節先生。讀書百源山中。夜不就枕。數年。學旣有成。乃出遊於吳楚齊魯梁晉之間。遍交天下之士。遍觀天下之俗。此事甚好。尋常不忘於心。俟所學有進。亦將出遊四方如此老也。戊子六月十一日。以疾終于家。臨歿言曰。吾有一罪一恨。先父母而歸。一罪也。未遂康節之志。一恨也。葬外薪山中山下酉坐原。配驪興閔氏致章女。擧一男一女。男昌柱。女適河東鄭淳鶴。嗚呼。君以穎悟之姿。早自覺悟。敦本就實。方進不已。誰知命道不媚。齎志未伸。而中途夭折。若是遽遞耶。昌柱未及省事而失所怙。儀容聲音。行治事爲。漠然不記。以是爲平生恨。從其先友蘭溪翁。得記其遺事。以其狀過余而言曰。雖未及見先人之音容。而可以寓如見之情者。惟在於此。願爲之加惠一言也。余曰。賢以妙齡。思欲不忘其己沒之親。至於如此。此是人家子孫碩果消息。當日未伸之志。安知不因此而有伸也。哀其意而不忍辭。銘曰。秀而不實。事固難平。不食有報。庭蘭向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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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편저자)
유형 :
고전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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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부

퇴정 처사 문공 묘지명 退亭處士文公墓誌銘 선비가 삼대(三代)에 태어나지 않아 이미 고요(皐陶)와 기(夔), 원개(元凱)54)의 부류와 더불어 태평성대에 제제(濟濟)하게 서로 사양하는 지경에 참여하지 못하였다면, 아래 시대로 내려와 말세에 태어나 당대의 어질고 덕이 있는 사람과 함께 교유하더라도, 이 또한 괜찮을 것이다. 고(故) 처사 퇴정(退亭) 문공(文公)은 은봉(隱峯) 안 문강공(安文康公)을 스승으로 섬기고, 선원(仙源) 김 문충공(金文忠公), 청음(淸陰) 김 문정공(金文正公), 노봉(老峯) 민 문충공(閔文忠公), 월사(月沙) 이 문충공(李文忠公), 오리(梧里) 이 문충공(李文忠公)을 벗하여 우리나라의 태평 시절에 교제하면서 학문과 덕행을 서로 연마하였으니, 그 성대한 만남과 고고한 기상은 먼 후대에 사람들에게 공경심을 일으키게 할 것이다. 아, 공의 현명함이여!공의 휘는 존도(存道), 자는 성기(聖器)로, 남평(南平) 사람이다. 고려 말기 삼우당(三憂堂) 휘 익점(益漸)이 그 중대의 현조(顯祖)이다. 고조 우창(佑昌)은 통정대부이고, 증조 민(敏)은 생원이며, 조부 언관(彦寬)은 선전관(宣傳官)이고, 선고 운룡(雲龍)은 부호군인데, 대대로 문장과 덕행이 있었다. 배위(配位)는 익산 소씨(益山蘇氏)로, 아무개의 따님인데, 규문의 법도를 순전히 갖추었다. 만력(萬曆) 임인년(1606, 손조35) 9월 19일에 보성(寶城) 도개리(道開里)에서 공이 태어났다.공은 타고난 자품이 빼어났으니 동배(同輩)에서 특출하였다. 8세에 호군공(護軍公)이 운자(韻字)를 부르니, 공이 부르는 즉시 대답하기를 "창밖에 눈과 달빛 희니, 깨끗함에서 인심을 보겠네. 눈과 달빛 나의 곡조를 일으키니, 오늘 밤 누가 나를 알아주랴.[窓外雪月白, 潔潔見人心. 二白唱我曲, 今宵誰知音?]"라고 하였으니, 그 기상이 어릴 적부터 이미 이와 같았다. 모부인(母夫人)이 병환이 나자 정성을 다하고 매우 근심하며 방 곁을 떠나지 않았다. 매일 저녁 목욕재계하고 북두성에 빌고 하늘에 빌었는데 한 달여 만에 병이 나았다. 그날 저녁 호군공의 꿈에 어떤 노인이 와서 말하기를 "그대의 처가 나은 것은 그대 아들의 효성 때문이다. 내 그 효성에 감동하여 그 수명을 90세까지 연장하였다."라고 하였다. 독서에 매우 힘써서 문사(文詞)가 날로 성취되니, 과거 시험의 각 문체에 영민하고 넉넉하지 않음이 없었다. 약관의 나이에 마침내 은봉(隱峯) 안 선생(安先生)의 문하에 나아가 수학하였다. 선생이 그 영특함을 아껴 매우 기대하였다. 이로부터 사장(詞章)의 기습을 떨쳐 버리고 요체를 파악하고 근원을 찾는 곳에서 힘쓰고 착실하게 연마하기를 비로소 그만두지 않았다.정묘호란(丁卯胡亂) 때 임금이 강도(江都)에 행행(幸行)하니 조정과 민간(재야(在野)의 인심이 흉흉하였다. 당시 상국(相國) 이원익(李元翼)이 완산(完山)에서 군사를 독려하였는데, 공은 평소 그와 서로 잘 알고 지냈기에 즉시 달려가서 난을 평정할 계책을 아뢰었다. 얼마 되지 않아 적이 물러나는 것을 보고 돌아왔다. 임신년(1632, 인조10)에 부친상을 당해 3년 동안 시묘살이를 하였는데, 예에 지나칠 정도로 슬퍼하여 몸이 상하였다.병자호란(丙子胡亂)에 임금은 남한산성(南漢山城)에 머물고 세자는 강도(江都)로 들어갔는데, 안팎으로 연락이 끊겨 군신 상하가 매우 놀랐다. 공이 의병 30여 명을 규합하여 은봉(隱峯)의 막하에 나아갔다. 정축년(1637, 인조15) 1월에 완산(完山)에 도착하였는데, 지나는 곳의 여러 고을에서 즉각 호응하였다. 한밤중에 군사를 점검하면서 지은 시에 "당대의 남아 칼을 차고 노래 부르니, 사방 적의 형세 어떠한가? 군사 점검하는 이 밤 영웅호걸들 승전고 울릴 내일 아침 의기가 충만하리라.[一代男兒杖釰歌, 四邊賊勢問如何? 點軍此夕英豪士, 乘勝明朝意氣多.]"라고 하였다. 각 도에 격문을 띄워 함께 군사를 일으키는 의리를 깨우치고, 또 순찰(巡察) 이시방(李時昉)에게 급히 편지를 보내 전쟁에서의 기무(機務)를 진달하였다. 다음 날 여산(礪山)에 이르러 강도(江都)는 지키지 못하고 남한산성은 포위가 풀렸다는 보고를 듣고 북쪽을 향해 통곡하고 의병을 파하였다. 공이 그 삼종형(三從兄) 재도(載道)가 남한산성에서 호종하며 여러 날 추위에 떨며 분을 참지 못하여 병이 났다는 말을 듣고는 즉시 달려가서 만나 보았다. 이어서 난리 끝에 서울이 피폐하고 친구들이 뿔뿔이 흩어진 것을 보고 비분강개함을 견디지 못하여 시를 지었는데, 그 시에 "고관대작의 저택 도리(桃李)는 절로 열매 맺었지만, 강도엔 다 떨어져 아득히 흘러가네.[朱門桃李自成實, 盡落江都渺渺流.]" 하였다. 2월에 집으로 돌아오자 친족들이 모두 모였다. 공이 탄식하여 말하기를 "나라가 이처럼 치욕을 당했으니, 이 어찌 신하가 차마 말할 바이겠는가. 다만 내 일찍 죽지 못하여 이러한 상황을 만난 것이 한스럽다."라고 하였다.이보다 앞서 도개리(道開里)에서 원봉리(元峯里)로 이사하였다. 산을 등지고 물을 굽어보는 형세라 경치가 감상할 만하였다. 인지당(仁智堂)이라는 편액을 걸었는데 이에 이르러 퇴정(退亭)이라고 편액을 고쳐 그 뜻을 붙였다. 날마다 편복(便服) 차림으로 그 사이에서 부앙하며 풍월을 읊조리고 책 속에 파묻혀 지내 득실과 부침에 대해서 담담하였다. 서울 친구 가운데 공을 추천하려는 자가 있었는데 공이 굳게 거절하여 말하기를 "나의 뜻이 이미 정해졌으니, 결코 되돌릴 수 없다. 다만 나의 선친이 문학으로 세상에 이름이 났는데 하나의 명성도 없는 것이 한스럽다."라고 하였다. 어느 날 청음(淸陰) 선생이 심양(瀋陽)에서 돌아왔다55)는 말을 듣고 탄식하여 말하기를 "문문산(文文山)56)은 수감되었다가 사사(賜死)되었고, 이 노인은 수감되었다가 살아 돌아왔지만 그 큰 기상과 큰 절개는 생사를 가지고 다르게 보아선 안 된다. 아, 이 노인은 바로 오늘날의 문산이거니와, 나는 그의 벗으로 당일(당시) 강직한 신하가 되지 못한 것이 한스럽다."라고 하였다. 노봉(老峯) 민공(閔公)이 일찍이 본성(本省)의 안렴사(按廉使)가 되어 방문한 적이 있었는데, 은거하는 곳의 단장이 소산하고 담박한 것을 보고 탄식하여 말하기를 "그대는 참으로 남주(南州)의 고상한 선비이다."라고 하고, 그 집의 편액을 원봉(元峯)이라고 하였다. 또 시를 남겼는데, 그 시에 "바쁘게 행장을 꾸려 저물녘에 찾으니 청산의 구름 걸린 높은 나무 고인의 마음이로다.……[草草行裝簿暮尋, 靑山雲樹故人心. 云云.]" 하였다. 여러 책과 경전을 돌아가며 익숙히 반복하여 읽어 은미한 말과 오묘한 뜻을 환하게 통달하지 않은 것이 없었지만 《논어(論語)》 한 책에 대해서는 더욱 많이 공부하여 일상 생활하면서 잠시도 손에서 놓지 않았다.기유년(1669, 현종10) 10월 18일에 세상을 떠났다. 가락동(加樂洞) 가정(柯亭) 임좌(壬坐) 언덕에 장사 지냈다. 배위(配位)는 죽산 안씨(竹山安氏)로, 안진(安震)의 따님이다. 아들 하나를 낳았으니 시진(時振)이다. 손자는 일화(日華)이고, 증손은 홍덕(弘德), 취덕(就德), 명덕(命德), 윤덕(潤德), 응덕(應德)이다. 현손 이하는 기록하지 않는다.공은 외진 고을의 일개 선비로 이름은 사적(仕籍)에 있지 않고, 몸은 조정의 반열에 오르지 못하였지만, 매양 나라에 위급한 일이 있으면 자신을 돌보지 않고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쳤으니, 나아감에 한결같아 그칠 줄 몰랐다. 벼슬을 사양하고 향리로 돌아와서는 당겨도 일어나지 않고 불러도 응하지 않았으며, 교유를 끊고 한가롭고 한적하게 지냈으니, 처하는 데 한결같아 나아감을 알지 못하였다. 어찌 전후의 출처가 이처럼 훌륭한 것인가. 대개 그가 주장한 바는 의리에 한결같은 것일 따름이다. 일개 부인이지만 칠실(漆室)의 근심이 있었고 일개 동자이지만 왕기(汪錡)에게는 상(殤)의 예를 적용하지 않았는데,57) 더구나 공은 홍유(鴻儒) 숙덕(宿德)으로 한 지방의 기대를 받는 자였으니 말해 무엇 하겠는가. 담암(澹庵)이 소조정(小朝廷)의 수치가 된다는 것58)을 생각하고 첩산(疊山)이 한가로운 백성이 된 것59)을 생각하였으니, 이는 공이 만년의 절조를 가다듬은 바로서, 한겨울의 송백(松柏)과 같은 것이다. 아, 공경할 만하다.7세손 형(炯)이 유장(遺狀)을 가지고 와서 묘지명을 지어 주길 청하였다. 유장을 살피니 바로 우리 무사재(無邪齋) 박 선생(朴先生)이 지은 것이었다. 어루만지며 훑어보니 더 한층 감격스러웠다. 그 말에 "비록 처한 상황이 다르고 수립한 바가 각각 다르더라도 그 뜻은 선원(仙源), 청음(淸陰)과 한가지이다."라고 하였다. 이는 그의 행적에 걸맞고 합당하여 먼 후대에도 바뀌지 않을 의론이니, 소자 후생이 어찌 감히 다시 다른 말을 첨언하겠는가. 삼가 유장의 말에 근거하여 그 청에 부응한다. 이에 다음과 같이 명을 짓는다.어버이에게 효도하고 군주에게 충성하며 孝親忠君현명한 이를 섬기고 어진 이 벗하네. 事賢友仁사문의 훌륭한 선비요 斯文偉儒밝은 시대의 은일자로다. 昭代逸民시사가 크게 변하자 時事一變돌아와 동강에 은거하였네. 歸臥東岡고상한 풍모와 정취, 큰 절개 高韻大節백세 뒤에 더욱 빛나리라. 百世彌彰 士不生三代上。旣不得與皐夔元凱之類。濟濟相讓於亭午照皞之域。則降而生於叔季之世。得一時賢德與之遊從。斯亦可矣。故處士退亭文公。以隱峯安文康公爲師。以仙源金文忠公。淸陰金文正公。老峯閔文忠公。月沙李文忠公。梧里李文忠公爲友。往復切磋於大東昇平之日。其會遇之盛。氣象之高。百世之下。足令人起敬。嗚呼。公其賢乎哉。公諱存道。字聖器。南平人。麗季三憂堂諱益漸其中系顯祖也。高祖佑昌通政。曾祖敏生員。祖彦寬宣傳。考雲龍副護軍。世有文行。配益山蘇氏某女。閫範純備。萬曆任寅九月十九日。公生于寶城道開里。天資秀爽。出於等夷。八歲護軍公拈韻呼之。公應口而對曰。窓外雪月白。潔潔見人心。二白唱我曲。今宵誰知音。其氣趣自幼己如此。母夫人有疾。致誠致憂。不離房側。每夕齋沐。祈斗祝天。月餘病愈。其夕護軍公夢有一老人來言曰。君妻之愈。以其子之孝也。吾感其孝。延其壽九十云。讀書刻苦。文詞日就。功令各體。無不敏贍。弱冠遂就學于隱峯安先生之門。先生愛其開悟。深寄意焉。自是刊落詞章之習。而於反約窮源處。勉勉循循。未始有已。丁卯之亂。車駕幸江都。朝野洶洶。時李相國元翼。在完山視師。公素與相善。卽馳詣爲陳剿亂之策。未幾。見賊退而還。壬申遭外艱。居廬三年。哀毁過節。丙子之亂。車駕駐南漢。世子入江都。內外阻絶。上下震駭。公糾合議旅三年餘人。赴隱峯幕。丁丑正月行到完山。所過列邑。響應影從。中夜點軍有詩曰。一代男兒杖釰歌。四邊賊勢問如何。點軍此夕英豪士。乘勝明朝意氣多。傳檄各道。喩以同仇之義。又馳書於李巡察時昉。以陳機務。明日至礪山。聞江都失守南漢解圍之報。北向痛哭而罷。公聞其三從兄載道。扈從南漢。累日觸寒。因以忿憤成疾。卽馳往見之。因見亂離之餘。京都凋殘。舊知零散。不勝悲慨有詩曰。朱門桃李自成實。盡落江都渺渺流。二月還家。族戚皆會。公歎曰。國家羞辱如此。此豈臣子所忍言。只恨吾死不早。見此爻象耳。先是自道開移寓元峯里。負山臨水。景致可賞。題其顔曰仁智堂。至是改題以退亭。以寓其意。日以便服。偃仰其間嘯詠咏風月。沈潛書籍。於得失陞沈淡如也。洛中舊遊。有擬公剡薦者。公固拒之曰。吾志己定。決不可回。但吾先人。文學著世。而未有一名。是可恨也。一日聞淸陰先生自瀋陽還。歎曰。文文山被囚而殺死。此老被囚而還。其宏綱大節。不可以生死而差殊觀也。嗚呼。此老卽今日之文山。而余以一友生。未得爲當日之張一鶚。可恨。老峯閔公嘗按廉本省。因來訪之。見薖軸粧黙點。蕭散淡泊。歎曰。子眞南州高士。題其室曰元峯。且留詩曰。草草行裝簿暮尋。靑山雲樹故人心云云。群書群經。循環熟複。微辭奧義。無不昭晣。而於論語一書。尤加功焉出入起居。手不釋卷。己酉十月十七日考終。葬加樂洞柯亭坐壬之原。配竹山安氏震女。生一男曰時振。孫日華。曾孫弘德就德命德潤德應德。玄孫以下不錄。公以窮鄕一布衣。名不在仕籍。身不參朝班。而每有警急。忘身殉國。一於出而不知止。及其謝歸鄕里也。挽之而不起。呼之而不應。絶遊息交。投閒置散。一於處而不知進。何前後出處若是遼絶耶。盖其所主者。一於義而已。一婦人也而。漆室有憂。一童子也而汪齮勿殤。則況以公鴻儒宿德而負一方之望者乎。懷澹庵小朝之恥。慕疊山閒民之爲。此公之所以砥礪晩節。如大冬之松柏也。吁可敬也。七世孫炯奉遺狀。來謁誌銘之文。按狀卽我無邪齋朴先生所撰也。摩挲繙閱。尤增一層感慨也。其言曰。雖所遇不齊。樹立各異。而其意則仙源淸陰同一歸也。此可爲稱停的當。百世不易之論。小子後生。何敢復容他說哉謹據狀說以塞其請。銘曰。孝親忠君。事寶友仁。斯文偉儒。昭代逸民。時事一變。歸臥東岡。高韻大節。百世彌彰。 원개(元凱) 팔원(八元)과 팔개(八凱)를 합친 말로, '원(元)'은 선(善)을 '개(凱)'는 화(和)를 뜻한다. 고양씨(高陽氏)의 후손인 여덟 명의 온화한 사람[八凱]과 고신씨(高辛氏)의 후손인 여덟 명의 선량한 사람[八元]을 가리킨다. 이들은 순(舜)이 요(堯) 임금의 신하가 된 뒤에 등용되어 백사를 주관하였다. 《春秋左氏傳 文公18年》 청음……돌아왔다 김상헌은 병자호란 때 척화(斥和)를 주장한 대표적 인물이다. 이 때문에 인조 18년(1640) 12월에 심양으로 압송되었는데, 온갖 회유와 협박에도 절개를 굽히지 않다가 6년이 지난 23년(1645) 2월에 본국으로 돌아왔다.《仁祖實錄 18年 12月 8日, 23年 2月 23日》 문문산(文文山) 남송(南宋)의 정치가이자 시인 문천상(文天祥, 1236~1282)을 말한다. 자는 송서(宋瑞)ㆍ이선(履善), 호는 문산이다. 남송이 원(元)나라에 항복하자 저항하다 체포되었고, 쿠빌라이칸이 그의 재능을 아껴 몽고에 전향을 권유했지만 거절하고 죽음을 택했다. 저서로는 《문산전집(文山全集)》이 있다. 왕기(汪錡)……않았는데 노 나라 동자 왕기가 전쟁에서 죽었는데, 어려서 죽은 사람에게는 상(殤)이라 하여 성인(成人)의 예로 장사 지내지 않는 예법이 있다. 공자가 말하기를 "왕기는 동자이지만 무기를 잡고 국가를 수호하였으니 성인의 예를 써도 된다." 하였다. 《春秋左氏傳 哀公11年》 담암(澹庵)이……것 호전(胡銓)은 송나라 사람으로, 자가 방형(邦衡)이고 호가 담암(澹庵)이다. 금(金)나라가 쳐들어왔을 적에 "만약 화의(和議)를 하면 소 조정(小朝廷)이 될 것이니, 소 조정에서 구차히 살지 않겠다."라고 하면서 화의에 강력하게 반대하였다. 《宋史 胡銓列傳》 첩산(疊山)이……것 첩산은 남송(南宋)의 학자 사방득(謝枋得)의 호이다. 송나라가 망하자 당석산(唐石山)에 은둔하여 제자를 가르치며 살았는데, 원(元)나라 사람이 강제로 북행(北行)하게 하자 곡기를 끊고 죽었다. 《宋史 謝枋得列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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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편저자)
유형 :
고전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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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부

통훈대부 사헌부 감찰 문산재 박군 묘지명 通訓大夫司憲府監察文山齋朴君墓誌銘 군의 성은 박씨(朴氏), 휘는 세진(世鎭), 자는 달지(達之), 호는 문산재(文山齋)이다. 밀양(密陽) 사람인데, 신라왕(新羅王) 혁거세(赫居世)가 그 시조이다. 중대에 이르러 휘 울(蔚)이 있는데, 찰방(察訪)을 지냈다. 이분이 맹성(孟誠)을 낳았는데, 첨정(僉正)을 지냈다. 이분이 휘 영걸(永傑)을 낳았는데, 부호군(副護軍)으로 이조 참의(吏曹參議)에 추증되었다. 이분이 휘 억서(億瑞)를 낳았는데, 통정대부이다. 이분이 휘 지수(枝樹)를 낳았는데, 호가 모봉(茅峰)이고 감찰(監察)을 지냈다. 임진왜란 때에 사직(社稷)을 위해 순절(殉節)한 공훈으로 좌승지(左承旨)에 추증되고, 또 호조 참판(戶曹參判)에 추증되었다. 이분이 휘 천주(天柱)를 낳았는데, 호는 회재(悔齋)로, 주부(主簿)를 지냈고, 효행이 있었다. 모친은 노씨(魯氏)인데, 열부(烈婦)의 행실이 있었서 정려(旌閭)를 받았다. 이분이 휘 이소(以素)를 낳았는데, 호가 태암(台庵)이고, 통정대부이다. 이분이 휘 태형(泰馨)을 낳았는데, 호가 월산(月山)이다. 이분이 휘 상욱(尙郁)을 낳았는데, 호가 송계(松溪)이고 통정대부이다. 이분이 휘 필사(必思)를 낳았는데, 호가 도은(道隱)이고 사복시 정(司僕寺正)에 추증되었다. 군에게는 고조가 된다. 증조의 휘는 경표(慶杓)이니 좌승지에 추증되었다. 조부는 휘 풍환(豊煥)인데, 호조 참판에 추증되었다. 부친은 휘 재원(在源)인데, 호가 쌍순재(雙筍齋)이고, 장수하였다는 이유로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에 제수되었다. 모친은 정부인(貞夫人)에 추증된 진주 형씨(晉州邢氏)인데, 형석찬(邢錫贊)의 따님이다. 계비(系妣)는 정부인에 추증된 완산 이씨(完山李氏)로, 이찬영(李贊英)의 따님인데, 부덕(婦德)이 있었다. 철종(哲宗) 기미년(1859, 철종10) 11월 19일에 주(州)의 정천리(淨泉里)에서 군을 낳았다.군은 천성이 온후하고 자상하였으며, 어려서부터 지극한 행실이 있다고 사람들에게 알려졌다. 집이 평소 매우 가난하여 군이 곁에서 어려운 살림을 꾸려 나가고, 출입하면서 온 힘을 기울여 마음과 뜻을 즐겁게 해 드리고, 구체(口體)의 봉양을 알맞게 하여 갖추지 않음이 없었다. 어버이가 병환이 나자 근심스러운 마음과 염려하는 기색으로 밤에도 옷을 벗지 않았고 손가락을 베어 피를 입으로 흘려 넣었으며, 자신이 대신 아프게 해 달라고 하늘에 빌었다. 평상시 자신이 사적으로 소유한 것이 없었고, 재물도 사적으로 축적하지 않았다. 평소 출입할 때에는 오직 어버이가 명하신 대로 따랐으며, 크고 작은 일을 경영할 때는 반드시 여쭈어본 뒤에 행하였다. 자신의 직분을 행하고 나서 여력이 있으면, 글방에 가서 독서하여 과정에 따라 차근차근 해 나갔고, 이를 폐하거나 빠뜨리지 않았다. 이러한 행동을 친족과 향당에까지 확대시켜서 절기마다 안부를 묻고 경조사를 챙기고 위급할 때 도와주는 것은 각각 그 실정에 알맞게 하고 각각 그 마음에 흡족하게 하였다. 비루한 말은 입에 담지 않았고 화나는 기색은 얼굴에 드러내지 않았다. 다툼이 있는 곳에는 가지 않고 경박한 사람은 만나지 않았다. 은거하면서 부모를 봉양하며 언행을 삼가고 경계하기를 50년 동안 한결같이 하였다. 향리에서 그 효성을 칭찬하여 장차 관아에 아뢰고자 하였는데, 군이 듣고서 즉시 그 문서를 빼앗아 불 속에 던지고 말하기를 "나에게 불효를 거듭 짓게 하지 말라."라고 하였다. 숙병(宿病)이 오래도록 낫지 않자, 어느 날 그 아들 문채(文采)를 불러 말하기를 "나는 필시 일어나지 못할 것이다. 늙은 부모님이 살아 계시니 누가 대신 봉양하겠는가. 너는 마땅히 힘써 구천에 있는 네 아비의 무한한 한을 풀어 주어야 한다."라고 하고는 말을 마치자 임종하였으니, 바로 무신년(1908, 순종2) 6월 20일이다. 동방(同坊) 작약산(芍藥山) 아래 반기동(半圻洞) 을좌(乙坐) 언덕에 장사 지냈다.배위(配位)는 숙인(淑人) 하동 정씨(河東鄭氏)로, 정재헌(鄭在憲)의 따님인데, 규문의 법도를 지극히 갖추었다. 부군보다 18년 먼저 졸하였다. 살던 마을 뒤쪽 소강산(小康山) 아래 경좌(庚坐) 언덕에 장사 지냈다. 아들 둘을 낳았으니, 장자는 준룡(準龍)으로 일찍 죽었고, 차자는 문채(文采)이다. 손자 이하는 어려서 기록하지 않는다.아, 옛날에도 오히려 인재를 얻기 어렵다고 탄식하였는데, 하물며 지금과 같은 말세에는 말해서 무엇 하겠는가. 공자(孔子)가 말한 '10호의 작은 고을에도 충신한 자'60)와 맹자(孟子)가 말한 '한 고을의 선한 선비'61)는 또한 만나 보기 어려울 것이다. 군은 순후한 자질을 타고났고 효도하고 삼가는 행실이 있었으니, 마땅히 공덕을 쌓은 응보가 있어야 하지만 침체되어 드날리지 못하고 수명도 누리지 못하였으니, 친구의 애석한 마음이 어떠하겠는가. 문채(文采)가 상복을 입고 행장을 가지고 와서 묘지명을 지어 주길 부탁하였다. 아, 어찌 차마 사양하겠는가. 이에 다음과 같이 명을 짓는다.작약산에 새로 묘도를 내어 芍藥新阡봉긋하게 봉분 만들었네. 若斧若堂을좌(乙坐) 신향(辛向)의 언덕 坐乙向辛효자가 묻힌 곳일세. 孝子攸藏하늘이 돕고 신이 돕는 것 天佑神勞효자라야 그러하네. 惟孝爲然효자의 효도 다함이 없으니 孝子不匱천년토록 향기로운 제물 올리네. 芬苾千年 君姓朴氏諱世鎭。字達之。號文山齋。密陽人。新羅王赫居世是其始祖也。至中系。有諱蔚察訪。是生諱孟誠僉正。是生諱永傑副護軍。贈吏參。是生諱億瑞通政。是生諱枝樹號茅峰監察。壬辰之亂。殉社著勳。贈左承旨。又贈戶曹參判。是生諱天柱號悔齋主簿。有孝行。妣盧氏有烈行。俱蒙褒旌。是生諱以素號台庵通政。是生諱泰馨號月山。是生諱尙郁號松溪通政。是生諱必思號道隱。贈司僕寺正。於君爲高祖也。贈祖諱慶杓。贈左承旨。祖諱豊煥。贈戶曹參判。父在源號雙筍齋。壽同中樞。妣贈貞夫人。晉州邢氏錫贊女。系妣贈貞夫人。完山李氏贊英女。有婦德。哲宗己未十一月十九日。生君于州之淨泉里。君天稟溫厚慈詳。自幼以至行聞於人。家素貧甚。君左右拮据出入竭蹶。有以樂其心志適其口體者。無不備至。親有疾。心憂色沮。夜不解帶。斫指汪血。祝天冀代。平居身不私有。財不私蓄。尋常出入。惟命是聽。巨細營爲。必稟而行。行有餘力。入塾看書。循循課程。未嘗廢闕。推而至於宗族鄕黨時節寒暄之問。吉凶慶弔之禮。急難周恤之風。各稱其情。各得其心。俚雜之言。不出於口。忿戾之氣。不形於色。足不到奔競之地。身不接浮浪之人。隱居養親。勤身勅行。五十年如一日。鄕里擧其孝。將聞于官司。君聞之。卽奪其狀投之于火曰。母重吾不孝爲也。有宿疾。久而不瘳。一日招其子文采曰。余必不起矣。老親在堂。誰其替養。汝宜勉力。以慰乃父九泉無窮之恨也。言訖而終。卽戊申六月二十日也。葬同坊芍藥山下半圻洞乙坐原。齊淑人河東鄭氏在憲女。閨範備至。先君子十八年卒。葬所居村後小康山下庚坐原。有二男。長準龍早逝。次文采。孫以下幼不錄。嗚呼。才難之歎。在古猶然。況今衰叔之世乎。孔子所謂十室之忠。孟子所謂一鄕之善。亦難得以見之矣。君稟醇厚之質。服孝謹之行。宜其有積累之應。而沈淹不揚。壽又不遐。知舊慨惜之心爲何如耶。文辨采曳衰抱狀。託以誌銘之文。嗚呼。豈忍辭諸。銘曰。芍藥新阡。若斧若堂。坐乙向辛。孝子攸藏。天佑神勞。惟孝爲然。孝子不匱。芬苾千年。 공자(孔子)가……자 《논어》 〈공야장(公冶長)〉에 "10호의 작은 고을에도 반드시 나처럼 충신한 자는 있지만 나처럼 배우기를 좋아하지는 않을 것이다.[十室之邑, 必有忠信如丘者焉, 不如丘之好學.]"라고 하였다. 맹자(孟子)가……선비 《맹자》〈만장 하(萬章下)〉에 "한 고을의 선사라야 한 고을의 선사를 벗할 수 있다.[一鄕之善士, 斯友一鄕之善士.]"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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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암 정공 묘지명 敬庵鄭公墓誌銘 이릉(爾陵)은 옛날에 문명이 있는 고을이라고 불렀는데, 근고(近古)에 이르러 학문을 탐구하고 도의를 행하는 선비가 여전히 훌륭하게 있었으니 경암(敬庵) 정공(鄭公)과 같은 분이 또한 그런 사람이다. 그 유풍과 남긴 자취는 백여 년이 지났을 정도로 오래되었지만 자못 기억하는 자가 있다. 다만 그 유고(遺稿)는 제 때에 수습하지 못하여 모두 잃어버리고 전하는 것이라곤 남 상사(南上舍)가 지은 추천장 한 통뿐이었다. 그 추천장을 살펴보니 "세대가 내려오면서 풍속이 야박해져 손가락을 베어 피를 흘려 입에 넣는 것을 효라고 하고, 병든 어버이를 위해 다릿살을 베어 먹이는 것을 효라고 하며, 물고기 한 마리를 얻으면 왕상(王祥)의 잉어62)라고 하고, 죽순 하나를 얻으면 맹종(孟宗)의 죽순63)이라고 하고 있다. 하나의 행실과 하나의 일에 나타난 것을 뽑아내고, 창졸간의 다급한 상황에서 분별해낸 것을 성대하게 효라고 하는 자는 평소 어버이를 봉양한 것을 돌아보면 과연 유감이 없겠는가. 오직 정흠(鄭欽)이 어버이를 섬긴 것이야말로 실로 이른바 평소에 유감이 없다는 것에 해당할 것이다. 그 부모의 나이가 93세이고, 정흠의 나이도 60세에 이르렀다. 어버이를 섬긴 이후로 다른 곳에서 유숙한 적이 없고, 어버이가 병이 들었을 적에는 한 발짝도 부모 곁을 감히 떠나지 않았다. 무릇 어버이를 모시는 정성과 봉양하는 일에 있어 즐거워하는 표정과 온순한 모습으로 마음과 힘을 다해 처음부터 끝까지 늘 하루같이 하였다."라고 하였다.아, 남공(南公)은 우리 고을의 이름난 진사(進士)이니, 그 말은 믿을 수 있어 후세에도 없어지지 않을 것이다. 큰 솥에 끓인 국은 고기 한 점만 맛보아도 그 전체의 맛을 다 알 수 있으니, 유고가 남아 있지 않은 것이 또한 어찌 한스럽겠는가.또 그 현손 재우(在禹)가 지은 가장(家狀)을 살펴보니, 거기에 "공이 항상 말하기를 '공경하면 온갖 선이 확립되고, 게으르면 온갖 선이 폐해진다. 옛 성인이 사람에게 보인 요체는 '경(敬)'만 한 것이 없고, 후학이 덕(德)에 들어가는 문호 또한 '경'만 한 것이 없다.'라고 하고, 마침내 '경암(敬庵)'이란 글자를 써서 재실의 편액으로 걸고 늘 주시하였다."라고 하였다.이 한 조목은 비록 당시 추천장에 실린 내용이 아니지만, 그 지극한 행실과 훌륭한 절조는 '경(敬)'이 아니면 어찌 행할 수 있으랴. 이름을 흠(欽)이라고 하고 자를 경심(敬心)이라 하고 호를 경암(敬庵)이라고 한 것에서 더욱 이 '경(敬)'을 항상 마음속에 새겨 잊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학문은 '경'을 위주로 하고 다스림은 '효'를 근본으로 삼았으니, 공이 어떤 사람인지는 여기에서 대략 알 수 있을 것이다.정씨(鄭氏)는 계보가 하동(河東)에서 나왔다. 고려 때 밀직부사(密直副使)인 휘 국룡(國龍)이 중시조이다. 7세대 뒤 휘 여해(汝諧)는 호가 둔재(遯齋)이고, 지평(持平)을 지냈으니, 공에게는 7대조가 된다. 고조는 참의에 추증된 휘 천경(天經)이고, 증조는 참의에 추증된 휘 침(忱)이고, 조부는 참판에 추증된 휘 문원(文黿)이다. 부친은 판서를 지낸 휘 인채(仁采)이다. 모친은 칠원 윤씨(漆原尹氏)로, 윤임(尹任)의 따님이다.공은 경종(景宗) 신축년(1721, 경종1)에 태어나 정종(正宗) 병오년(1786, 정조10) 7월 28일에 졸하였다. 화산(華山) 대방동(大榜洞) 술좌(戌坐)에 장사 지냈으며, 배위(配位)인 광산 김씨(光山金氏)와 합장하였다. 김씨는 김명구(金命九)의 따님으로, 부덕(婦德)이 있었다. 아들이 없어 동생 석(錫)의 아들 양문(陽文)을 양자로 삼았다. 두 딸은 각각 문혁룡(文赫龍), 김중신(金重臣)에게 각각 출가하였다. 다음과 같이 명을 짓는다.효는 인을 행하는 근본이고 孝爲仁本공경은 몸의 기틀일세. 敬者身基효도와 공경 曰孝曰敬간직하니 서로 바탕이 되네. 夾持交資두봉에서 노닐었고 頭峰杖屢대방동에 무덤 있네. 榜洞斧堂뒤미쳐 여운을 생각하매 追想餘韻지나는 사람 배회하네. 過者彷徨 爾陵古稱文明之鄕。至近古。而問學行誼之士。尙彬彬焉。若敬庵鄭公亦其人也。其遺韻餘躅。至百餘年之久。而頗有能記之者。但其遺稿。收不以時。歸於烏有。而所傳只是南上舍所撰剡薦狀一通而已。按狀有曰。世降俗渝。以一指之斷爲孝。以一股之割爲孝。得一魚則謂之王祥之鯉。得一菜則謂之孟宗之筍。摘其一行一事之立辨於倉卒急遽之間而藉藉爲孝者。顧其平日之養親。果無所憾者乎。惟鄭欽之事親。眞所謂無憾於平日者也。其親年九十有三。欽年又至六十矣。親老之後。未嘗經宿於他所。親病之日。不敢離側於跬步。凡諸扶奉之誠。供養之勤。愉色婉容。殫心竭力。自始至終。恒若一日云。嗚呼。南公是吾鄕名進士也。其言足可徵信。而爲不朽於來世矣。全鼎一臠。未爲不知其味。則遺稿散逸。亦何恨焉。又按其玄孫在禹所撰家狀。有曰。公常言敬則萬善立。怠則萬善廢。前聖示人旨訣。莫如敬。後學入德門庭。亦莫如敬。乃書敬庵字。揭于齋顔以常目焉。此一條。雖非當日薦狀中所載者。然其至行偉節。非敬安能做得來耶。名之以欽。字之以敬心。號之以敬庵。尤可見其眷眷於此而不忘也。學問則敬以爲主。行治則孝以爲本。公之爲公。於斯可槪矣。鄭氏系出河東。高麗密直諱國龍。其中祖也。七傳諱汝詣號遯齋官持平。於公爲七世。高祖贈參議諱天經。曾祖贈參議諱忱。祖贈參判諱文黿。考判書諱仁采。妣漆原尹氏任之女。公以景宗辛丑生。正宗丙午七月二十八日卒。葬華山大傍洞戌坐。齊光山金氏祔焉。金氏諱命九女。有婦德。無男。取次弟錫子陽文爲嗣。二女文赫龍金重臣。銘曰。孝爲仁本。敬者身墓。曰孝曰敬。夾持交資。頭峰杖屢。榜洞斧堂。追想餘韻。過者彷徨。 왕상(王祥)의 잉어 왕상이 계모 주씨(朱氏)가 겨울에 생선을 먹고 싶어 하자 옷을 벗고 얼음을 깨고 들어가 고기를 잡으려 하였는데 홀연히 얼음이 녹으며 잉어 두 마리가 뛰어올랐다고 한다. 《晉書 王祥列傳》 맹종(孟宗)의 죽순 맹종은 병이 위중한 어머니가 한겨울에 죽순을 먹고 싶어 하자 대숲에 들어가 슬피 울었는데 죽순이 돋아났다고 한다.《三國志 吳書 三嗣主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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二十三日諸益同會。各述其懷。 量鑿方施衲。佩帚須戒弦。風波憂白地。軒輊聽靑天。心茆鋤還塞。鬂絲鑷更懸。歸哉各努力。餘日掛西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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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정일【흥묵】에게 답함 答裴正一【興黙】 지난번에 답신을 계원(啓元) 편에 부쳤습니다. 지난달 그믐 무렵에 계원의 집에 갔다가 여전히 그곳에 머물러 있는 것을 보았지만 응당 조만간 전해질 것이라고 여겼습니다. 그런데 뜻밖으로 또 혜서(惠書)를 받들었으니 매우 고맙습니다. 서한을 통해서 부모를 모시고 공부하는 상황이 한결같다는 것을 알았으니 얼마나 듣고 싶었던 말이겠습니까. 부모가 모두 생존해 계시고 형제가 무고(無故)하여 족하(足下)께서는 이미 하늘로부터 즐거움 하나를 얻었으니 자신에게 달린 두 가지 즐거움40) 또한 힘을 쏟아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좋은 시절을 어찌 아끼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의림(義林)은 효를 행하고 싶어도 미치지 못하고 학문을 닦는 것도 때가 지났습니다. 누구를 원망하겠습니까. 그저 애석한 마음만 절실할 뿐입니다. 족하께서는 저를 전철(前轍)로 삼으십시오. 《주역(周易)》 공부는 지금 몇 권에 이르렀습니까? 읽고 난 뒤 다시 《논어》, 《맹자》 등의 책을 받아서 평이하고 천근한 일에서 착실하게 체인(體認)하여 일대본령(一大本領)을 갖추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형이상(形而上), 형이하(形而下)는 단지 도(道)와 기(器)의 경계에서 말하는 것이지 실로 상하가 대치하듯 하는 것을 이르지 않습니다. 경(敬)은 정(靜)만을 위주로 하지 않습니다. 경은 동(動)과 정(靜)을 관통하므로 《예기(禮記)》 〈곡례(曲禮)〉에서 "공경하지 않음이 없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음과 양이 서로 뿌리가 되고 동과 정이 서로 의지하기 때문에 "지혜로운 자는 물을 좋아하고 어진 사람은 산을 좋아한다."41)라고 하였습니다. 획이 없는 역(易)이 바로 태극이지 어찌 일찍이 별도의 획이 없는 역이 태극보다 먼저【先】 있었겠습니까. 이 '선(先)' 자는 소위 '미발 이전'과 같이 보아야 합니다. "건괘(乾卦) 구이(九二)에서는 성(誠)을 말하고, 곤괘(坤卦) 육이(六二)에서는 경(敬)을 말하였다……"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에 대해서는 《논어》 중궁문인장(仲弓問仁章) 아래의 주석에서 "극기복례(克己復禮)는 건도(乾道)이고 주경행서(主敬行恕)는 곤도(坤道)이다."라고 한 것을 미루어 알 수 있습니다. "음양이 소장(消長)하는 이치는 박괘(剝卦)와 복괘(復卦)에서 보아야 한다……"라고 하셨습니다. 어찌 박괘(剝卦)의 상효(上爻)에서 이미 사라진 양(陽)이 아래에 복괘(復卦)의 초효에서 생겨나는 양이 되어42) 초목의 꽃과 열매가 시들어 떨어진 뒤에 양기(陽氣)가 다시 뿌리에서 생기듯 하겠습니까. 向者答書。付送啓元便。前月晦間。過啓元家。見尙爾留滯當早晏傳達也。謂外又泰惠諭。感感多矣。仍審省做如一。何等願聞。父母俱存。兄弟無故。足下旣得其一樂於天。則其二樂之在我者。亦將勉而可得矣。好時節。豈不可惜。義林欲孝靡及。爲學過時。向誰尤爲。只切痛惜。惟足下視爲前車也。羲經之課。今至幾卷耶。讀了後。更授如論孟等書。就平易切近。着實體認。辦得一大本領。如何。形而上下。特以道器界至言。非實有上下如對待之云也。敬非主於靜而已。是貫乎動靜。故禮曰無不敬。陰陽互根。動靜交資。故曰知者樂水。仁者樂山。無畵之易。便是太極。何嘗別有無畵之易。在於太極之先耶。此先字。當看如所謂未發之前。乾九二言。誠坤六二言敬云云。論語仲弓問仁章下註曰。克己復禮。乾道也。主敬行恕。坤道也。推此可見。消長之理。當觀於剝復之間云云。豈剝上旣消之陽。下爲復初方生之陽也。如一草木之花實雕落。而陽氣復生于根。 두 가지 즐거움 맹자(孟子)가 이르기를 "군자가 세 가지 즐거움이 있으니, 천하에 왕 노릇하는 것은 여기에 끼지 않는다. 부모가 다 생존하고 형제가 무고한 것이 첫 번째 즐거움이요, 위로는 하늘에 부끄럽지 않고 아래로는 사람에게 부끄럽지 않은 것이 두 번째 즐거움이요, 천하의 영재를 얻어서 교육시키는 것이 세 번째 즐거움이다.【君子有三樂, 而王天下不與存焉. 父母俱存, 兄弟無故, 一樂也. 仰不愧於天, 俯不怍於人, 二樂也. 得天下英才而敎育之, 三樂也.】"라고 하였다. 《孟子 盡心上》 지혜로운……좋아한다 《논어(論語)》 〈옹야(雍也)〉에 보인다. 박괘(剝卦)의……되어 《주역》 64괘의 순서상 복괘(復卦)는 박괘(剝卦) 뒤에 온다. 박괘는 다섯 개의 음효(陰爻) 위에 하나의 양효(陽爻)가 있는 형상으로, 음이 극성하여 양기가 모두 소멸될 위기에 처한 괘이다. 그래서 바로 다음에 다섯 음효의 아래 하나의 양효가 생성되는 복괘로 받은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서괘전(序卦傳)〉에서는 "물건은 끝내 다할 수 없으니, 박이 위에서 다하면 아래로 돌아오기 마련이므로 복으로 받았다.【物不可以終盡, 剝窮上反下, 故受之以復.】"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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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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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영지에게 답함 答吳永之 댁의 당함(堂咸 당질)이 와서 혜서(惠書)를 받들었습니다. 서한을 통해서 부모님을 모시고 지내는 안부가 강녕하시고 여력으로 닦는 공부가 거듭되어 의심스럽고 난해한 문제들이 편지 폭에 가득함을 알았으니 우러러 사모하는 마음 금치 못하겠습니다. 《서(書)》에 이르기를 "과단성이 있어야 나중에 어려움을 겪지 않는다.43)"라고 하였고, 주자(朱子)는 "천하의 일은 편안하고 한가롭게 지내면서 이룰 수 있는 것이 아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우리 벗께서 힘쓰시기를 바랍니다. 사단(四端)은 사람이 반드시 지니는 마음이고 사체(四體 사지(四肢))는 사람이 반드시 지니는 사물입니다. 쉽게 보이는 형체를 가지고 보기 어려운 이치를 증명하여44) 사람들에게 반드시 지니고 있으며 없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게 합니다. 그러나 어찌 이발(已發)과 서로 유사하지만 미발(未發)과 유사하지 않을 리가 있겠습니까. 미발은 비록 혼연(渾然)한 전체이지만 혼연한 가운데 찬연(粲然)한 것이 있으니 이른바 인의예지(仁義禮智)가 그것입니다. 이것을 구한다면 미발을 모호하고 애매하다고 여겨 두서도 없고 체계도 없이 보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것이 근세에 이(理)를 위주로 논하는 이들의 커다란 병통입니다. 경계하십시오. 예악(禮樂)은 잠시라도 몸을 벗어날 수 없으니 이것이 형체가 없는 예(禮)이고 소리가 없는 악(樂)입니다.45) 이미 공경과 사손(辭遜)이 예의 근본임을 알았다면 유독 관대함과 공평함, 조화와 순리가 악의 근본임을 모르겠습니까. 令堂咸來。承惠緘。因審省節康寧。餘力尋溫。疑難滿幅。不任欣仰。書曰。惟克果斷。乃罔後艱。朱子曰。天下事。非燕閒暇豫之可得。願吾友勉之。四端人所必有之心。四體人所必有之物。以易見之形。證難見之理。使人知必有而不可無。然安有已發相似。而未發不相似之理。未發雖曰渾然全體。而渾然之中。有粲然者存。所謂仁義禮智是也。求之無乃以未發爲儱侗昆侖無頭脚無間架看耶。此是近世論理家大病。戒之戒之。禮樂不可斯須去身。此是無體之禮。無聲之樂。旣知恭敬辭遜爲禮之本。則獨不知寬平和順爲樂之本耶。 과단성이……않는다 성왕(成王)이 관리들에게 훈계한 내용 중 하나로, "너희 경사들에게 경계하노니 공이 높음은 뜻 때문이요, 업이 넓음은 부지런함 때문이니, 능히 과단해야 뒤에 어려움이 없을 것이다.【戒爾卿士, 功崇惟志, 業廣惟勤, 惟克果斷, 乃罔後艱.】"라고 하였다. 《書經 周官》 쉽게……증명하여 《맹자》 〈공손추 상(公孫丑上)〉에 "측은지심은 인의 단서이고, 수오지심은 의의 단서이고, 사양지심은 예의 단서이고, 시비지심은 지의 단서이다. 사람이 이 사단을 가지고 있는 것은 사체를 가지고 있는 것과 같으니, 이 사단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스스로 인의를 행할 수 없다고 말하는 자는 자신을 해치는 자이고, 자기 군주가 인의를 행할 수 없다고 말하는 자는 군주를 해치는 자이다.【惻隱之心, 仁之端也. 羞惡之心, 義之端也. 辭讓之心, 禮之端也. 是非之心, 知之端也. 人之有是四端也, 猶其有四體也. 有是四端而自謂不能者, 自賊者也; 謂其君不能者, 賊其君者也.】"라는 내용이 보인다. 형체가……악(樂)입니다 《예기(禮記)》 〈공자한거(孔子閒居)〉에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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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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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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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부

절작변무문 節酌辨誣文 도리(道理)는 무궁하지만, 시세(時世)는 다를 수 있다. 이 때문에 성현의 말은 시세와 인정에 따라 혹 같지 않을 수 있다. 전대의 성인이 밝히지 못했던 것을 후대의 현인이 밝혀 확충하거나 전대의 학설이 미진했던 점을 후대의 유학자가 변론하여 밝히는 것이 어찌 새로운 학설을 처음으로 확립함으로써 전대의 현인보다 뛰어남을 추구하고자 해서이겠는가. 도리어 도리를 밝혀 시대의 폐단을 구제하는 것은 어쩔 수 없어 마지못해 하는 것이다. 장자(張子)가 "좋지 않은 점을 함께 고치는 것이 바로 후학에게 바라는 바이다."라고 말하고, 주자가 "선배를 존경하고 경외하며, 의리를 강구하고 밝히는 일이 함께 행해져 어그러지지 않게 한다."라고 말한 것이 이러한 뜻이 아니겠는가. 그렇다면 학자가 선대 현인들에 대해 선대 현인들의 마음을 자신의 마음으로 삼아 의리를 강구하고 밝히는 데에 모든 노력을 다함으로써 혹시라도 선대의 현인들이 우연히 잘못 살핀 것이나 미쳐 자세하게 생각하지 못한 점이 있으면 또한 감히 내버려둔 채 지나쳐버리지 않는 것이 바로 존경하고 경외하는 도리를 십분 다하는 것이다. 이러한 조과입실(操戈入室)1)이 옛사람들이 학문에 뛰어날 수 있었던 이유이다.선사이신 노사(蘆沙) 선생은, 율곡(栗谷) 선생이 원래 가학(家學)이 유래한 연원이 되기에 일생 동안 독실하게 믿으면서 존경하고 사모하였다. 대체로 율곡이 이치를 강론한 말은 그 전체를 총괄하면  "이(理)는 형체가 없어 통하고, 기(氣)는 형체가 있어 국한된다."와 "기가 아니면 발현할 수 없고, 이가 아니면 발현하는 바가 없다." 등의 말이 이것이고, 그 단서를 정확히 가리켜보면 "온갖 정은 모두 이에서 발현된다."와 "사단과 칠정은 별개의 정이 아니다.", "이와 기는 호발함이 없다." 등의 말이 이것이다. 선사께서는 매번 그 말이 정확하고 완전하여 만세토록 바뀌지 않을 정론(定論)이고, 더욱이 오늘날 주기(主氣)의 증상에 맞는 진정한 약제라며 감탄하였다. 다만 "음(陰)이 정(靜)하고 양(陽)이 동(動)하는 것은 그 기제(機制)에 의해 저절로 그렇게 되는 것이지 그렇게 하도록 시키는 것이 있는 것은 아니다."라는 말에 대해 조금 이치에 맞지 않은 점이 있지만, 매번 융통성 있게 보고자 하면서 이 말은 단지 유행의 측면에서 말한 것이라고 하였다. 세속의 유학자들이 정론과 종지(宗旨)를 잘못 알고 내버려둔 채 강구(講究)하지 않으면서 오직 '음이 정하고 양이 동한다.'라는 일단의 말에만 집착하여 주기(主氣)의 증안(證案)으로 여김으로써 율곡의 은미한 뜻이 막혀 드러나지 않게 하는 것을 보고 선사께서 마침내 〈사의(私議)〉2) 등의 글을 지어 "이는 형체가 없어 통하고 기는 형체가 있어 국한된다."라는 말의 뜻을 밝혔는데, 매우 상세하였다. 또 〈외필(猥筆)〉3)을 지어 "음이 정하고 양이 동한다."라는 구절에 대해 조금 타당하지 못한 것이 전전하다가 잘못된 뜻에 이르게 되었음을 논변하고, 인하여 말하기를, "전대의 현인이 이것을 밝힌 것이 너무나 명쾌하여 훗날의 폐단이 이러한 지경에 이르게 될 줄 생각하지 못했을 수 있다."라고 하였다. 이것이 전대 현인의 뜻을 드러내 밝히고, 오늘날의 폐단을 바로잡아 고친 이유이다. 그러나 오히려 감히 스스로 편안하게 여기지 못하고 "외필"이라 하였고, 오히려 감히 스스로 독단하지 않고 "참으로 질정을 드리고 싶다."라고 하였으며, 오히려 감히 스스로 옳다 여기지 않고 "내가 의심한 것이 망령된 것이라면 유문(儒門)의 다행이다."라고 하였으니, 말이 더욱 간절하고 예의가 더욱 공손하여 이른바 "선배를 존경하고 경외하며 의리를 강구하여 밝힌다."라는 것이 함께 행해져 어그러지지 않을 수 있었다. 그런데 뜻밖에도 근래에 영남 사람 최동민(崔東敏)과 권봉희(權鳳熙) 무리들이 〈외필〉 가운데 한두 구절의 말을 지적하며 선사가 율곡을 공격하고 배척한 것이라고 하여 서로 연이어 통지문을 보내며 방자하게 헐뜯었다.아, 선사께서 율곡을 공격하고 배척했다는 것이 과연 어떤 일인가? 본령이 둘이다라고 말한 것과 천명이 멈추었다고 말한 것, 헛된 명칭이 있다고 말한 것들은 "이는 장수이고, 기는 역졸이다[理氣帥役]"라는 말의 뜻을 설명한 것인데, 저들은 율곡을 공격하고 배척한 것이라고 하였으며, 피음사둔(詖淫邪遁)4)이라 말한 것과 전도되어 창피스럽다고 말한 것은 주기(主氣)에 대한 후세 사람의 폐단을 말한 것인데, 저들은 율곡을 공격하고 배척한 것이라고 하였다. 단지 이것만으로 뭇사람을 선동할 수 없을까 염려하여 퇴계와 우암을 조롱한 것이라고 하였고, 단지 이것만으로 그 죄를 무겁게 할 수 없을까 염려하여 주자(朱子)를 침범하고 배척한 것이라고 하였다. 예로부터 소인이 군자를 무함하고 헐뜯을 때면 성현을 앞세우고 경전의 뜻을 빙자함으로써 간악함과 속임수, 시기와 거짓의 계책을 팔지 않은 적이 없었으니, 대개가 본디 이와 같다.무릇 의리는 천하 사람이 함께하는 것이니, 아들이 아버지를 사사롭게 옹호할 수 없고, 동생이 형을 사사롭게 옹호할 수 없으며, 제자가 스승을 사사롭게 옹호할 수 없고, 후대의 현인이 전대의 현인을 사사롭게 옹호할 수 없다. 온공(溫公)이 《의맹(疑孟)》편을 지었지만5) 그의 아들 강(康)은 맹자를 가장 순수하게 여겨 경연에서 진강(進講)하였고, 명도(明道)가 《대학(大學)》의 편차(編次)를 정했지만 이천(伊川)이 그것을 개정하였으며6), 오봉(五峰)의 잘못된 논의를 남헌(南軒)이 논변한 것이 많았고7), 고정(考亭)이 정립한 학설을 면재(勉齋)가 간혹 어기기도 하였다8). 주자는 주자(周子 주돈이(周敦頤))에 대해 직접적으로 "그의 말이 장자(莊子)나 노자(老子)와 같다."라고 하였고, 정자(程子)에 대해 직접적으로 "그의 말은 황노(黃老)의 유풍이 있는 것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라고 하였으며, 장자(張子 장재(張載))에 대해 직접적으로 "석씨(釋氏)에 가깝다."라고 하였고, 또 "《정몽(正蒙)》에 잘못된 부분이 많다."라고 하였다.우리나라의 경우에는 회재(晦齋)가 주자의 《대학장구(大學章句)》를 개정하였고9), 율곡이 퇴계(退溪)의 사칠의론(四七議論)을 변별하였으며10), 퇴계의 차의(箚疑)를 우암(尤庵)이 개정한 것이 많았고, 우암의 차의를 농암(農巖)이 간혹 논변하기도 하였다11). 그러나 어느 한 사람도 이것을 가지고서 아버지를 무함하고 헐뜯은 것이고, 형을 무함하고 헐뜯은 것이며, 스승을 무함하고 헐뜯은 것이고, 전대의 현인을 무함하고 헐뜯은 것이라고 말하는 자가 있었다는 말을 듣지 못했다.아, 선사는 율곡을 정신으로 융회(融會)하고 마음으로 전수받아 깊이 좋아하고 독실하게 믿었으니, 지극하다고 이를 만하다. 그러한 마음이 일상적인 글 사이에 드러나서 낱낱이 들어올릴 수 없을 정도인데, 우선 한 편에서 논한 것을 말해 보겠다. 선사께서는 일찍이 하환성재(河喚惺齋)가 율곡을 신구(伸救)한 상소12)를 논하면서 "천지에 참여하고 성쇠에 관계 된다."13)라고 하였고, 또 "이 상소에는 천지 뒤의 떳떳한 법이 있다."14)라고 하였으며, 또 "하늘이 이 옹(翁)을 낸 것은 바로 만세에 비태(否泰)의 소식을 전하기 위해서이다."15)라고 하였다. 이 말의 뜻을 자세히 음미해 보면 율곡을 아는 자가 선사만한 사람이 없고, 율곡을 존경하는 자 또한 선사만한 사람이 없으니, 일찍이 한 구절의 말을 해석한 것으로 공격하고 배척했다고 이르는 것이 사리에 옳겠는가? 옳지 않겠는가? 이는 삼척동자도 속일 수 없는 것인데, 온 세상 사람을 현혹시키고 만인의 눈을 가려 속이고자 하니, 매우 생각이 없는 것이다. 사람의 터무니없는 말이 이 정도까지 이르렀단 말인가?우리나라가 분당(分黨)한 지 수백 년 동안 선정(先正)을 무함하고 헐뜯었던 여러 선생의 말이 문자에 드러난 것이 많을 뿐만이 아니었지만, 어느 한 마디도 공격하고 배척했다고 말한 경우는 없었다. 그런데 유독 노사 선생께서 이치를 밝히고 폐단을 구제하기 위해 했던 지극히 공정한 말에 대해서만은 사납게 성내고 심하게 배척하여 서로 용납하지 못하게 하니, 도대체 무슨 곡절이란 말인가? 비유하자면 이는 한 우매한 사람에 대해 그와 길을 함께 걷는 치욕은 달게 받으면서도 그와 방을 함께 하는 것은 차마 하지 못하겠다는 경계와 같은 것이니, 아, 서글프구나.중암(重庵) 김 선생(김평묵(金平默)이 일찍이 〈외필〉을 구하여 읽고 감탄하며 말하기를, "이는 우리 화서(華西) 선생(이항로(李恒老))의 말과 약속하지도 않았음에도 합치된다." 하였고, 또 말하기를, "율곡을 존경하는 사람으로 기정진과 이항로 두 선생만한 사람이 없다." 하였으니, 선사를 안 사람이라고 이를 만하다. 아, 도(道)는 굽혀지기도 하고 펼쳐지기고 하며, 때는 소멸하기도 하고 성장하기도 하니, 예로부터 성현들은 한때 굽혀졌지만 마침내 만세토록 펼쳐졌다. 오늘날 시끄럽게 떠드는 저들도 또한 이규(李槼)ㆍ유직(柳稷)16)과 같은 부류일 뿐이니, 어찌 그들과 잡다한 말로 논변할 수 있겠는가. 다만 집집마다 그 글을 보관하고 그 말을 욀 수 없으니, 열 번 치는 나무와 세 번 전해지는 호랑이17)가 어찌 말을 교묘하게 하고 입을 잘 놀리는 사람들에 의해 먹혀들지 않을 바가 될 줄 보장하겠는가. 이에 감히 대략적인 내용을 간략히 서술하여 우리 유가의 학문하는 선비들에게 고한다. 道理無窮。而時世有異。是以聖賢之言。因時世人情而容有不同焉。前聖所未發。後賢發而擴之。前說所未盡。後儒辨而明之。是豈欲創立新說。求多於前人哉。乃所以明道理而捄時弊者。不得已也。張子曰。其未善者。共改之。正所望於後學。朱子曰。尊畏先輩。講明義理。竝行而不悖者。其非此意耶。然則學者之於先賢。當以先賢之心爲心。講明義理。十分盡底。而或有偶失照管者。未及細思者。則亦不敢放過。是乃十分尊畏之道。此操戈入室。古人之所以善學也。先師蘆沙先生於栗谷先生。原來是家學淵源之所自也。一生篤信而尊慕之。蓋栗谷論理之說。其總括全體。則曰理通氣局。及非氣不能發。非理無所發等語是也。其的指端緖。則曰萬般之情。皆發於理。及四七非兩情。理氣無互發等語是也。先師每歎其的確渾全。爲萬世不易之定論。而尤爲今日主氣之對證眞劑也。但於陰靜陽動。其機自爾。非有使之之語。有少未契。而每欲活看以通之。以爲此特流行邊說話矣。及見世儒之錯認。定論宗旨。遺而不講而專執陰靜陽動一段語。以爲主氣之證案。使栗谷微旨。鬱而不彰。先師遂著私議等說。以明理通之義。極其詳悉。又著猥筆。以辨陰靜云云之句。有些下語之未妥。以至輾轉差謬之意。因曰。前賢於此發之太快。而後弊之至此。容有未之思也。此所以發明前賢之意。而矯捄今日之弊者也。然猶不敢自安而曰。猥筆。猶不敢自專而曰。實有奉質之願。猶不敢自是而曰吾之所疑者妄。則儒門之幸也。言愈切而禮愈恭。所謂尊畏講明者。可以倂行而不悖矣。不意邇者。有嶺人崔東敏。權鳳熙輩。指摘猥筆中一二句語。謂先師攻斥栗谷。相繼投通。肆其詆毁。噫。先師之攻斥栗谷。果何事耶。曰雙本嶺。曰天命息。曰有虛名等語。是說理氣帥役之義。而彼曰攻斥栗谷。曰詖淫邪遁。曰顚倒倡披。是說後人主氣之弊。而彼曰攻斥栗谷。只此恐不足以動其衆。則曰譏切退尤。只此恐不足以重其罪。則曰犯斥朱子。自古小人誣陷君子者。未嘗不頭戴聖賢憑藉經訓以售其奸譎猜險之計者類固如此。夫義理天下之公物也。子不得以私其父。弟不得以私其兄。弟子不得以私其師。後賢不得以私其前賢。溫公作疑孟篇。而其子康以爲孟子最醇而進講於經筵。明道定大學編次。而伊川改定之。五峯差處。南軒多辨之。考亭定說。勉齋或違焉。朱子於周子直曰。其言似莊老。於程子直曰。其言不免有黃老之風。於張子直曰。近釋氏。又曰。正蒙多差處。至於我東。則晦齋改定朱子大學章句。栗谷辨別退溪四七議論。退溪之箚疑。尤庵多改之。尤庵之箚疑。農巖或辨焉。然未聞有一人以此誣毁其父。誣毁其兄。誣毁其師。誣毁其前賢者也。噫。先師之於栗谷。所以神會心授。而悅之深信之篤者。可謂至矣。其發於尋常文字之間者。不可枚擧。而姑以一篇所論言之。先師嘗論河喚惺齋伸捄栗谷疏有曰。參天地關盛衰。又曰。此疏有天地後經法。又曰。天生此翁。乃爲萬世傳否泰消息。詳味此意。知栗谷者。莫如先師。尊栗谷者。亦莫如先師。曾以一句語解而謂攻斥者。於事理可乎不可乎。此不足以瞞三尺之童。而乃欲以熒惑一世。欺蔽萬目。其不思甚矣。人之無據。一至於此乎。我東分黨數百年。詆毁先正諸先生之言。著於文字者。不啻多矣。而無一言攻斥。獨於蘆沙先生明理捄敝至公至正之言。怒之暴。斥之甚。而使不相容。抑何曲折歟。比如一昏愚之人。甘受行路之辱。而不忍同室之戒者也。吁可哀也。重庵金先生嘗得猥筆。讀之歎曰。此與我華西先生之言。不約而合。又曰。尊栗谷者。莫如奇李二先生。此可謂知先師矣。嗚呼。道有屈伸。時有消長。自古聖賢。未嘗無一時之屈。而竟伸於萬世。今日彼輩之嘵嘵。亦一李槼柳稷之流耳。何足與之多辨。但不能家蓄其書。戶誦其說。而十伐之木。三傳之虎。安保其不爲巧言利口之所入乎。玆敢略述梗槪。以告于吾黨遊從之士云。 조과입실(操戈入室) 자기의 창으로 자기 집을 공격하여 쳐들어온다는 말로, 배운 학문으로 가르쳐 준 사람을 공격하는 것을 이른다. 청출어람(靑出於藍)과 같은 말이다. 후한(後漢)의 하휴(何休)가 《춘추(春秋)》 삼전(三傳)에 대해 저술하였는데, 정현(鄭玄)이 그 내용을 반박하며 수정을 가하자, 하휴가 "강성(康成)이 나의 방에 들어와서는 나의 창을 쥐고서 나를 공격하는구나."라고 탄식한 데에서 유래하였다. 《後漢書 鄭玄列傳》 사의(私議) 〈납량사의(納凉私議)〉를 말한다. 노사(蘆沙) 기정진(奇正鎭)이 46세 때에 남암(南庵)으로 피서(避暑)를 가서 처음 초고를 짓고 죽기 직전까지 교정한 것으로, 저자의 사상이 가장 잘 드러나 있다. 기정진은 이 글에서, "근세에 성(性)을 논하는 자들이 이일(理一)과 분수(分殊)에 대하여 모르는 까닭에 이일을 형기(形氣)에서 떨어진 것으로 한정하고, 분수를 형기의 뒤를 따르는 것으로 한정시켰으며, 그 결과 이일과 분수가 별개의 것이 되고 성과 명(命)이 제멋대로 결정되어 성에 대한 논의가 분열되었다."라고 전제한 뒤에 이일원적(理一元的) 관점에서 주리론(主理論)을 전개하고 있다. 외필(猥筆) 81세 때에 지어 김석귀, 정재규, 정의림 등 세 제자에게 보여준 뒤 세상에 내놓았던 글로, 율곡이 일찍이 언급한 "음양(陰陽)의 동정(動靜)은 기(氣)의 기제(機制)로 스스로 그렇게 되는 것이지 그렇게 하도록 시키는 것이 있는 것은 아니다."라는 명제에 대하여, 동정하는 자체는 기이지만 동정하게 만드는 것은 이라고 단정함으로써 기의 자발성(自發性)을 비판하고 근원적인 이의 주재성(主宰性)을 강조하였다. 이 글이 나온 뒤에 간재(艮齋) 전우(田愚) 등이 논박하며 당시 많은 논쟁을 일으켰다. 피음사둔(詖淫邪遁) 말의 네 가지 병폐를 가리키는 것으로, 피사(詖辭), 음사(淫辭), 사사(邪辭), 둔사(遁辭)의 준말이다. 《맹자(孟子)》 〈공손추 상(公孫丑上)〉에  "한쪽으로 치우친 말에서 그의 마음이 가려 있음을 알며, 방탕한 말에서 그 마음이 빠져 있음을 알며, 사특한 말에서 그 마음이 도와 멀리 떨어져 있음을 알며, 회피하는 말에서 논리가 궁함을 알 수 있다.[詖辭知其所蔽, 淫辭知其所陷, 邪辭知其所離, 遁辭知其所窮.]" 라고 한 데서 유래한 말이다. 온공(溫公)이……지었지만 온공(溫公)은 송(宋)나라 때의 학자이자 정치가인 사마광(1019~1086)을 말하고, 《의맹(疑孟)》은 사마광이 《맹자(孟子)》의 의심스러운 것을 평론하여 맹자를 비판한 저술로 모두 11편이며 《온국문정사마공문집(溫國文正司馬公文集)》 권73에 실려 있다. 명도(明道)가……개정하였으며 명도(明道)는 북송 때의 학자인 정호(程顥)의 호이고, 이천(伊川)는 정이(程頤)의 호이다. 이들은 형제 사이로 이정(二程)이라 일컬어졌다. 오봉(五峰)의……많았고 오봉(五峯)은 송(宋)나라 때의 학자인 호굉(胡宏, 1105~1161)의 호이고, 남헌(南軒)은 장식(張栻, 1133~1180)의 호이다. 이들은 사제관계로, 장식이 호굉에게 사사하였다. 고정(考亭)이……하였다 고정(考亭)은 남송(南宋) 시대의 학자인 주희(朱熹, 1130~1200)의 별칭이다. 면재(勉齋)는 남송(南宋) 시대의 학자인 황간(黃榦, 1152~1221)의 호로, 주희의 제자이자 셋째 사위이다. 회재(晦齋)가……개정하였고 회재(晦齋)는 이언적(李彦迪, 1491~1553)의 호이다. 그는 주희의 《대학장구(大學章句)》에 대해 의심을 품고 일부 구절의 차례를 옮기거나 바꾸어서 《대학장구보유(大學章句補遺)》를 편집하였다. 율곡이……변별하였으며 퇴계(退溪) 이황(李滉)은 주희(朱熹)의 '사단은 이가 발한 것이고 칠정은 기가 발한 것이다.[四端理之發, 七情氣之發.]'라는 학설에 근거하여 '사단은 이(理)가 발하여 기(氣)가 이에 따르는 것이고, 칠정은 기가 발하여 이가 여기에 타는 것이다.'라는 이기호발설(理氣互發說)을 주장하였는데, 율곡(栗谷) 이이(李珥)는 '칠정은 사단을 내포한 것이며, 사단도 기(氣)가 발하면 이(理)가 타는 것이다.[氣發而理乘之]'라는 기발이승일도설(氣發理乘一途說)을 주장하여 퇴계의 이발설(理發說)을 부정하였다. 퇴계의……하였다 이황은 《주자대전(朱子大全)》의 이해를 위해 《주자서절요기의(朱子書節要記疑)》를 저술하였고, 송시열이 《주자서절요기의》를 재정리ㆍ보완하여 《주자대전차의(朱子大全箚疑)》라 하고서 권상하(權尙夏)에게 주며 김창협(金昌協)과 함께 마무리를 지을 것을 당부하였다. 이에 김창협은 노론 학인들과 토론하며 《주자대전차의》를 교정하였다. 하환성재(河喚惺齋)가……상소 하환성재(河喚惺齋)는 하락(河洛, 1530~1592)으로, 환성재는 그의 호이다. 본관은 진주(晋州)이며, 자는 도원(道源)이다. 진주(晉州) 출신으로 남명(南溟) 조식(曺植)의 문하에서 수학하였으며, 1568년(선조 1) 진사시에 장원으로 급제하였다. 이후 왕자사부(王子師傅)가 되어 임해군과 광해군을 가르쳤다. 계미년(1583, 선조16)에 상소를 올려 이이(李珥)와 성혼(成渾) 등의 무고를 구제하였다. 천지에……된다 《노사선생문집(蘆沙先生文集)》 20권 〈환성재유고서(喚醒齋遺稿序)〉에 보인다. 이……있다 《노사선생문집(蘆沙先生文集)》 20권 〈환성재유고서(喚醒齋遺稿序)〉에 보인다. 하늘이……위해서이다 비태(否泰)는 《주역》의 〈비괘(否卦)〉와 〈태괘(泰卦)〉를 말하는데, 〈비괘〉는 건괘(乾卦 ☰)가 위에 있고 곤괘(坤卦 ☷)가 아래에 있어 하늘과 땅의 기운이 서로 교류하지 않아 막히는 상이고, 〈태괘〉는 이와 반대로 건괘가 아래에 있고 곤괘가 위에 있어서 하늘과 땅의 기운이 서로 교류하여 통하는 상으로, 세도의 비색(否塞)함과 태평(泰平)함을 뜻한다. 이 말은 《노사선생문집(蘆沙先生文集)》 20권 〈환성재유고서(喚醒齋遺稿序)〉에 보인다. 이규(李槼)ㆍ유직(柳稷) 1650년(효종1)에 성균관 유생들이 이이(李珥)와 성혼(成渾)을 문묘에 종사할 것을 다시 주장하자, 이이에 대해서는 "천륜을 끊고 불가로 도망하여 숨었다."라고 비난하고, 성혼에 대해서는 "나라의 후한 은혜를 입고도 임금이 파천(播遷)하던 날 달려오지 않았다."라고 비난하며 반대 상소를 올린 900여 명 중 대표 인물들이다. 《孝宗實錄 1年 2月 22日》 세……호랑이 세 사람이 저자에서 호랑이를 보았다고 하면 사람들이 사실로 믿게 된다는 '삼인성시호(三人成市虎)'로, 터무니없는 거짓말도 여러 사람이 자꾸 말하면 진실로 믿게 된다는 것이다.《淮南子 說山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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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안 부안김씨(扶安金氏) 장사택일지(葬事擇日紙) 6 고문서-치부기록류-택기 종교/풍속-민간신앙-택기 庚寅 庚寅 扶安金氏 門中 扶安金氏 門中 전라북도 부안군 부안 서외 김채상 후손가 부안 서외리 김채상 후손가 모년에 부안의 부안김씨가에서 작성된 장사택일지. 부안(扶安)의 부안김씨가(扶安金氏家)에서 작성된 장사택일지(葬事擇日紙)이다. 장사택일지는 지관(地官)이 장례 날짜와 시간을 선택하고 이를 문서로 작성하여 망자의 가족에게 건네준 것이다. 지관은 일시를 선택하면서 망자의 사주와 시신이 묻힐 장지, 무덤의 방향과 방위, 지세(地勢) 등을 고려했기 때문에 관련된 사항들이 문서에 자세하게 적혀 있다. 뿐만 아니라 하관 시 안될 사람들의 간지와 자손들의 간지가 적혀 있었다. 그리고 상주에 관한 정보도 실려 있다. 장사택일지는 통상 안장(安葬)의 날짜, 하관(下棺)의 시각, 개토(開土), 방금(放金), 혈심(穴深), 취토(取土), 납폐(納幣), 파빈(破殯), 발인(發引), 정상(停喪) 등의 시간과 방위를 기록하였다. 이처럼 장례를 치르면서 장지와 장례일을 신중하게 선택한 것은 그 선택이 자손의 화복과 연관되어 있다고 보는 풍수지리설의 영향이 크게 작용하였기 때문이다. 여기에 효(孝)를 강조하였던 조선왕조의 유교적 관습이 어우러지면서 뿌리깊은 관습으로 남게 되었다. 어떤 면에서 보면 조선시대의 예법은 중국보다도 훨씬 더 유교적이었으며 더 엄격하였다. 그 중 상제에 관한 것이 특히 심하였다. 조선 후기의 당쟁은 이 상제를 둘러싼 예송(禮訟)이었다고 해도 그리 틀린 말이 아니다. 부안김씨가에서 작성된 이 문서는 '건화명(乾化命)'에 이어 '곤선명(坤仙命)'으로 시작하고 있다. 장사택일지에서 망자는 남자와 여자를 구분하여 기록하였는데, 건곤(乾坤) 즉 하늘과 땅으로 달리 표시하였다. 건은 남자를, 곤은 여자를 각각 나타낸 것이다. 따라서 이 문서의 망자는 남자와 여자, 즉 정해생의 남편과 경진생의 아내이다. 상주는 아들과 며느리, 손자 2명 등이다. 안장일은 경인년 12월 14일로 되어 있다. 이장(移葬)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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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46년 김채상(金彩相)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 고문서-명문문기류-명문 경제-매매/교역-토지매매명문 道光二十六年丙午九月晦日 賓有寬 金彩相 道光二十六年丙午九月晦日 賓有寬 金彩相 [着名] 3개 부안 서외 김채상 후손가 부안 서외리 김채상 후손가 1846년(헌종 12)에 빈유관이 서도질 관인제 아래에 있는 논을 김채상에게 팔면서 작성한 토지매매명문. 1846년(헌종 12)에 빈유관(賓有寬)이 서도질(西道秩) 관인제(灌仁堤) 아래에 있는 논을 김채상(金彩相)에게 팔면서 작성한 토지매매명문이다. 빈유관은 이 논을 매득하여 여러 해 동안 경작해 왔지만 부득이한 사정으로 팔게 되었다고 매매사유를 밝히고 있다. 거래된 토지는 서도질 관인제 아래에 있는 황자답(惶字畓) 3두락지이며, 부수로는 6부(負)가 되는 곳으로 거래가격은 30냥이다. 서노질 관인제가 어느 지역인지는 분명하지 않지만, 김채상의 거주지가 부안현 일도면 당북중리였으며, 그가 1856년에 매입한 산지(山地)가 부안현 하서면 지역이었다는 점, 그리고 이때의 거래에 빈씨(賓氏) 가문의 일원이 보인(保人)으로 기재된 점을 고려하면 부안현에 속한 논을 김채상이 매입한 것으로 추정되지만 확실하지는 않다. 한편, 관련문서를 통해서 볼 때 이 논을 거래할 당시의 김채상은 73세의 노인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 거래에는 답주(畓主)인 빈유관(賓有寬)과 증인 박유엽(朴有燁), 필집(筆執) 송성주(宋聖周) 등 3인이 참여하여 서명하였다. 김채상은 위에 언급한 것처럼 1856년에는 산소를 쓰기 위하여 산지를 매입하기도 하였으며, 산송(山訟)과 관련하여 여러 차례 부안현에 소지를 올리기도 하였다. 그는 또한 효자로도 널리 알려져서 누군가가 관에 그를 표창해달라고 청하면서 작성한 소지의 초안이 남아 있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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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문문기류

道光二十六年丙午九月晦日 金彩相前明文右明文事段自己買得累年耕食是多可要用所致勢不得已西道秩灌仁堤下惶字畓參斗落只所耕六負庫叱乙價折錢文參拾兩依數交易捧上是遣日後若有異端之弊則持此憑考事畓主 賓有寬[着名]證人 朴有燁[着名]筆執 宋聖周[着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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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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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자동 여묘의 옛 터를 보고 느낀 바 있어서 見匏子洞廬墓舊址 有感 풍수지탄하던86) 해 옛날 언제던가 風樹昔何年이 땅에 여묘를 지었지 此地築墓廬그해에 손수 심었던 소나무는 當日手植松숲 이루어 그림자도 무성해라 成林影扶疏대숲은 보살피는 사람이 없어 叢竹無人護형태만 남았으니 몇 가지인가 刑餘問幾條채소 밭엔 띠풀 가시 어지럽고 菜畦錯茅棘우물 벽돌엔 개구리 두꺼비 뛰네 井甃躍蛙蜍사물의 변화가 이미 이러하니 物變已若此내 귀밑머리 또한 희어졌구나 我鬢亦皤如비록 다시 여묘를 지으려해도 縱欲復築廬이제는 누구를 위할 것인가 今焉爲誰歟부앙하며 온갖 감회 이는데 俯仰生百感저녁 찬 바람이 옷을 스치네 夕風冷拂裾 風樹昔何年, 此地築墓廬.當日手植松, 成林影扶疏.叢竹無人護, 刑餘問幾條.菜畦錯茅棘, 井甃躍蛙蜍.物變已若此, 我鬢亦皤如.縱欲復築廬, 今焉爲誰歟.俯仰生百感, 夕風冷拂裾. 풍수지탄하던 어버이가 세상을 떠난 것을 비유한 것이다. 원문의 '풍수(風樹)'는 풍수지탄(風樹之歎)의 고사에서 유래하여 어버이가 세상을 떠나 다시는 봉양할 수 없는 슬픔을 말한다. 《한시외전(韓詩外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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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부

초겨울 눈보라 初冬 風雪 바다 하늘 눈보라가 겨울 들어 심해지니 海天風雪入冬深무슨 일로 처량하게 객의 마음 흔드나 何事悽悽攪客心무너진 몇 집에는 국화꽃이 시들고 摧敗幾家殘菊朶쓸쓸한 일천 산엔 단풍 숲 저무네 飄零千峀晩楓林들집의 가난한 농부는 곡식 수확 바쁘고 忙收野舍貧農稼산촌의 게으른 아낙 다듬이질 재촉하네 催起山村懶婦砧다시 밤이 와서 사람이 오지 않으니 還可夜來人不到형제와 같은 방에서 옛글을 찾네 棣蘭同室古文尋 海天風雪入冬深, 何事悽悽攪客心.摧敗幾家殘菊朶, 飄零千峀晩楓林.忙收野舍貧農稼, 催起山村懶婦砧.還可夜來人不到, 棣蘭同室古文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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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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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부

서사를 설립한 날에 제군과 함께 읊다 設社日 共諸君吟 고색 창연한 벽절산에 古色蒼蒼碧節山선비들이 빽빽이 달빛 아래 돌아오네 林林冠珮月中還초겨울 밤에 갓 씌운 등에 향그런 책상 있고 篝燈芸榻初冬夜백 리 길에 쑥대 신에 버들 지팡이 이어지네 蓬屐筽筇百里間지극히 가까운 이것으로부터 나아갈 수 있으니583) 至近如能從此進한참 높아 끝내 오르기 어렵다 말하지 말라 彌高莫道竟難攀스승과 벗이 서로 필요한 뜻을 알려하면 欲知師友相須意단지 마음에 있지 얼굴584)에 있지 않다네 只在心肝不在顔 古色蒼蒼碧節山, 林林冠珮月中還.篝燈藝榻初冬夜, 蓬屐筽筇百里間.至近如能從此進, 彌高莫道竟難攀.欲知師友相須意, 只在心肝不在顔. 지극히 …… 있으니 지극히 가까운 곳에서부터 학문을 해 나아가라는 뜻이다. 얼굴 얼굴을 대하고 만나는 것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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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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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월 십육일 삼가 선사의 〈구일 등고〉 시에 차운하다 기사년. 아래도 같다. 九月旣望 謹次先師九日登高韻【己巳下同】 늦가을 서실엔 티끌도 끊겼는데 晩秋書屋絶纖塵바로 노란 국화와 흰 달 만났네 正値黃花素月辰공자 성인 문하1)의 초학자는 孔聖門墻初學士대한제국 천지의 옛 백성이네 大韓天地舊民人자기 그림자 돌아보며 깊이 회포 논하고 回看自影論深抱이전 공부에 나아가 점차 새로움 깨닫네 却就前工漸覺新경계를 마주해2) 서성이며 잠 못 드는데 對境徜徉還不寐하늘 가득 서리 이슬이 의관을 적시누나 滿天霜露濕衣巾 晩秋書屋絶纖塵, 正値黃花素月辰.孔聖門墻初學士, 大韓天地舊民人.回看自影論深抱, 却就前工漸覺新.對境徜徉還不寐, 滿天霜露濕衣巾. 공자 성인 문하 '공성(孔聖)'은 공자(孔子)를 가리킨다. '문장(門墻)'은 문과 담장이라는 뜻으로, 스승의 문하를 비유한다. 《논어》 〈자장(子張)〉에 "선생님의 담장은 수 장이나 된다. 그러므로 그 문으로 들어가지 못하면 종묘의 아름다움과 백관의 많음을 볼 수가 없다.[夫子之牆數仞, 不得其門而入, 不見宗廟之美、百官之富.]"라는 내용이 보인다 경계를 마주해 원문의 '대경(對境)'은 불교어로 진경(塵境)을 대하는 것인데, 여기서는 국화나 달 등의 가을의 경물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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