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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55년 유인유씨(孺人柳氏) 추증교지(追贈敎旨) 고문서-교령류-고신 정치/행정-임면-고신 咸豐五年三月 日 哲宗 孺人柳氏 咸豐五年三月 日 哲宗 孺人柳氏 서울특별시 종로구 施命之寶 1개(적색, 정방형) 부안 돈계 김응상 후손가 부안 돈계리 김응상 후손가 1855년(철종 6) 3월, 왕이 김응상의 어머니 유인 유씨에게 내린 추증교지 1855년(철종 6)에 왕이 김응상(金膺相)의 어머니 유인(孺人) 유씨(柳氏)에게 내린 추증교지(追贈敎旨)이다. 김응상을 가선대부(嘉善大夫) 동지중추부사겸오위장(同知中樞府事兼五衛將)으로 임명하면서 그의 어머니 유인 유씨를 정부인(貞夫人)으로 추증(追贈)되었다. 즉, 이 문서의 맨 끝에 "嘉善大夫同知中樞府事兼五衛將金膺相妣 依法典追贈"라고 적혀 있는 내용이 바로 그 사실을 의미한다. 조선 시대에는 실직(實職)이 2품 이상인 종친(宗親)과 문무관(文武官)의 경우 그의 부(父), 조(祖), 증조(曾祖) 등 3대(代)에 걸쳐 사후(死後) 관직을 주었고 이를 추증(追贈)이라 하였다. 또한 부모(父母)를 추증할 때에는 실직에 있는 아들과 같은 품계를 내렸다. 김응상의 아버지 김명하(金命河)는 아들과 같은 가선대부로 증직(贈職)되었고 김응상의 어머니 유인 유씨는 그에 걸맞게 정부인으로 봉작되었다. 김응상에게는 두 분의 어머니가 있었는데, 바로 유인 유씨와 유인 박씨(朴氏)이다. 두 사람 모두 이때 정부인으로 추증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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敎旨學生金道明贈通政大夫承政院左承旨兼經筵參贊官者咸豐五年三月 日 [施命之寶]嘉善大夫同知中樞府事兼五衛將金膺相祖考依法典追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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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55년 유인정씨(孺人鄭氏) 추증교지(追贈敎旨) 고문서-교령류-고신 정치/행정-임면-고신 咸豐五年三月 日 哲宗 孺人鄭氏 咸豐五年三月 日 哲宗 孺人鄭氏 서울특별시 종로구 施命之寶 1개(적색, 정방형) 부안 돈계 김응상 후손가 부안 돈계리 김응상 후손가 1855년(철종 6) 왕이 김응상의 증조할머니 유인 정씨에게 내린 추증교지 1855년(철종 6) 3월, 왕이 김응상(金膺相)의 증조할머니 유인(孺人) 정씨(鄭氏)를 추증(追贈)하면서 내린 교지(敎旨)이다. 김응상이 절충장군(折衝將軍) 첨지중추부사겸오위장(僉知中樞府事兼五衛將)으로 임명되면서 그의 증조할머니 유인 정씨는 숙인(淑人)으로 추증된다. 즉, 이 문서의 맨끝에 "嘉善大夫同知中樞府事兼五衛將金膺相曾祖妣 依法典追贈"라고 적혀 있는 내용이 바로 그 사실을 의미한다. 조선 시대에는 실직(實職)이 2품 이상인 종친(宗親)과 문무관(文武官)의 경우 그의 부(父), 조(祖), 증조(曾祖) 등 3대(代)에 걸쳐 사후(死後) 관직을 주었고 이를 추증(追贈)이라 하였다. 또한 부모(父母)는 실직에 있는 아들과 같은 품계를 내리며 조부모(祖父母), 증조부모(曾祖父母)에게는 그의 품계에서 각각 1품씩 강등하여 추증하였다. 김응상에게 내려진 가선대부는 종2품 문무관(文武官)에게 주던 품계(品階)이다. 김응상의 증조할아버지 김덕렴(金德濂)은 통훈대부로 정3품에 봉(封)해지며 그의 부인 유인 정씨는 그에 걸맞게 숙인으로 봉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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敎旨孺人李氏贈淑夫人者咸豐五年三月 日 [施命之寶]嘉善大夫同知中樞府事兼五衛將金膺相祖妣依法典追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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敎旨孺人鄭氏贈淑人者咸豐五年三月 日 [施命之寶]嘉善大夫同知中樞府事兼五衛將金膺相曾祖妣依法典追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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敎旨學生金德濂贈通訓大夫司僕寺正者咸豐五年三月 日 [施命之寶]嘉善大夫同知中樞府事兼五衛將金膺相曾祖考依法典追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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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사람의 큰 잔칫날에 사의와 여안이 시에 개연히 차운하다 2수 彼人大宴日 士毅汝安有詩 慨然 次韻 【二首】 홀로 가을바람 맞으며 눈물 자욱 씻는데 獨倚秋風灑淚痕저 사람은 삼대가 이미 얽힌 뿌리라네 彼人三世已盤根어찌하여 팔도에 남아 하나 없는 것인가 胡無八域一男子제멋대로 붉은 깃발이 읍촌에 퍼져있네 任爾紅旗遍邑村이전에 병법을 배우지 못해 한스러워라 却恨從前未學兵금수401)가 밝은 하늘 더럽힘을 앉아서 보네 坐看蹄跡褻天明수명 늘릴 술법도 없어 거듭 탄식하는데 重歎難得長年術강가에는 우수수 낙엽 소리만 들리네 江上蕭蕭落木聲 獨倚秋風灑淚痕, 彼人三世己盤根.胡無八域一男子, 任爾紅旗遍邑村.却恨從前未學兵, 坐看蹄跡褻天明.重歎難得長年術, 江上蕭蕭落木聲. 금수 원문의 '제적(蹄跡)'은 금수(禽獸)의 발자국으로 악인을 비유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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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진영의 화를 입었을 때 감회를 적다 12월 1일 ○2수 被震禍時 識感 【十二月十日○二首】 스승은 간옹이요 부친은 벽봉269)인데 師曰艮翁父碧峯일찍이 도의로 몽매한 나를 가르치셨지 曾將道義敎昏蒙지금까지 조심조심 받들어 지녀왔으니 至今戰戰奉持去황천에서도 잘 모시고 따를 수 있으리 庶可泉臺好侍從사악을 내치고 정의를 지킴은 추성270)에서 본받고 斥邪衛正法鄒聖목숨 바쳐 스승을 높이는 건 예경에서 익혔다네 致死尊師講禮經부앙해도 이 마음 부끄러움은 없으나 俯仰此心無愧怍단지 학업을 정밀히 닦지 못해 탄식하네 只歎學業未硏精 師曰艮翁父碧峯, 曾將道義敎昏蒙.至今戰戰奉持去, 庶可泉臺好侍從.斥邪衛正法鄒聖, 致死尊師講禮經.俯仰此心無愧怍, 只歎學業未硏精. 벽봉(碧峯) 김택술의 부친 김락진(金洛進, 1859~1909)의 호이다. 추성(鄒聖) 맹자(孟子)를 가리키는데, 그의 고향이 추(鄒)이고 아성(亞聖)으로 칭해졌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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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재 허명갑을 면려하다 勉許秀才明甲 공부가 깊어지면 글맛이 항상 흘러 넘치고 功深書味常流露덕이 성대해지면 겸손의 빛290)이 더욱 길상하다네 德盛謙光更吉祥이 시를 긴요하게 여기고 반복해 읊조려서 喫緊此詩三諷咏평생 그대를 위해 보배로 삼아야 하리라 畢生爲汝作珍藏 功深書味常流露, 德盛謙光更吉祥.喫緊此詩三諷咏, 畢生爲汝作珍藏. 겸손의 빛 '겸광(謙光)'은 겸손한 덕이 밖으로 성대하게 빛을 발한다는 것이다. 《주역(周易)》 겸괘(謙卦) 단사(彖辭)에 "겸손하면 높은 이는 더욱 빛나고, 낮은 이도 사람들이 넘을 수 없으니, 군자의 끝마침이다.[謙尊而光, 卑而不可踰, 君子之終也.]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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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상사15)에서 현판 위의 시에 차운하다 實相寺次板上韻 불교는 예로부터 허와 공을 숭상했는데 佛尙虛空自古時어찌하여 절의 이름은 이와 반대인가 胡然寺號反於斯내악16)을 차지해 숨으니 마음속이 평온하고 占藏萊嶽中心穩삼한17)을 다 겪으니 지난 세월이 더디네 閱盡三韓往劫遲길손아 좋은 경치 없다고 말하지 말게나 行客休言無勝槪여러 암자들 다 이곳에서 갈라져 나왔지 諸菴皆得此分枝월사가 훌륭한 솜씨로 시 지어 남겼으니18) 月沙高手留詩跡우리 선조 계옹이 옛 친구를 만난 듯하네 吾祖溪翁見舊知-《월사집(月沙集)》에 이르기를 "변산(邊山)을 유람할 때 참봉(參奉) 김횡(金鋐)19)을 방문했다." 하였다.- 佛尙虛空自古時, 胡然寺號反於斯?占藏萊嶽中心穩, 閱盡三韓往劫遲.行客休言無勝槪, 諸菴皆得此分枝.月沙高手留詩跡, 吾祖溪翁見舊知.【《月沙集》云?遊邊山時, 訪金參奉鋐?.】 실상사(實相寺) 전라북도 부안에 있는 사찰이다. 내악(萊嶽) 삼신산(三神山)의 하나인 봉래산(蓬萊山)을 말하는데, 여기서는 변산(邊山)을 가리킨다. 삼한(三韓) 고대 우리나라 남부에 있던 마한(馬韓)ㆍ진한(辰韓)ㆍ변한(弁韓)을 말한다. 월사(月沙)가……남겼으니 《월사집(月沙集)》 제18권 〈부습유록(附拾遺錄)〉 에 〈변산을 유람할 때 참봉 김횡을 방문하여 술자리에서 시를 짓다〔遊邊山時歷訪金參奉鋐酒席口占〕〉라는 제목으로 실려 있다. 월사는 이정귀(李廷龜, 1564~1635)의 호이다. 문장이 뛰어나 신흠(申欽)ㆍ이식(李植)ㆍ장유(張維)와 함께 한문사대가로 꼽힌다. 김횡(金鋐) 본관은 부안, 호는 죽계(竹溪)이다. 생원시에 장원 입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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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봉서【병섭】에게 답함 答李鳳瑞【秉燮】 뜻하지 않게 안부 편지를 받아 펼쳐서 완미하였습니다. 고맙습니다. 벽산(碧山)에서 예를 익히고 송정(松亭)에서 시문(詩文)을 주고받고 침정(枕亭)에서 시가를 읊조리는 일이 덧없는 인생의 고상한 취미라는 것은 과연 형의 말씀대로입니다. 그러나 충분한 도리를 추구하기에는 부족합니다. 기수(沂水)와 무우(舞雩)의 즐거움24)은 설령 성급하게 논의하지 못하더라도 흥국(興國)25)과 아호(鵝湖)26)의 유람은 기풍과 자취를 살펴볼 수 있습니다. 만약 술 한잔 마시고 시 한 수를 읊으면서 한가로이 날을 보낼 뿐이라면 불행스럽게도 진(晉)나라 때의 청담(淸談)이 여기에 가까울 것입니다. 지난날 우리들의 행위가 후자에서 나왔다고 할 수는 없더라도 전자에 전일(專一)한 것을 보지 못했다면 역시 당연히 반성하여 뒷날의 감계(鑑戒)로 삼아야 할 것입니다. 대체로 우리는 오늘부터 결단코 한 번 출입하고 한 번 안부를 묻더라도 실질에 충분히 힘을 쏟아 약간의 효과를 거두어 헛된 명성에 귀착되지 않게 해야 합니다. 이것이 어찌 눈앞에 닥친 계책이 아니겠습니까. 《시경》에 이르기를, "비단옷에 홑옷을 덧입는다."27)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이 학자들이 마음을 세우는 근본적인 자리입니다. 조금이라도 외물로 향하고 명예를 추구하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곧 거짓이 됩니다. 料外承訊。披玩感感。碧山禮遊。松亭唱酬。枕亭風詠。此是浮生勝致者。果如兄敎。然求其十分道理。則末矣。沂雩之樂。縱未遽議。而興國鵝湖之遊。風蹟可考。若以一觴一詠。優遊度日而已。則晉室淸曠.不幸近之矣。向日吾輩之爲。雖不可謂出於彼。而亦未見其專於此。則亦當反省。為。後日鑑戒處也。大抵吾輩斷自今日。雖一出入。一寒喧。十分務實。俾有多少效益。而不爲虛聲所歸。豈非目下計耶。傳曰衣錦尙褧。此是學者立心地本也。纔有向外近名底意。便是僞也。 기수(沂水)와 무우(舞雩)의 즐거움 기우(沂雩)는 기수(沂水)에 목욕하고 무우(舞雩)에서 바람을 쏘인다는 말로 산수간에 노는 즐거움을 뜻한다. 공자의 제자 증점(曾點)이 자신의 뜻을 말해 보라는 공자의 명에 따라 "모춘에 봄옷이 이루어지거든 관자 대여섯 사람과 동자 예닐곱 사람과 함께 기수에 목욕하고 무우에서 바람을 쐬고 시를 읊으면서 돌아오겠다."라고 대답하였다. 《論語 先進》 흥국(興國) 중국 호북성(湖北省) 한양현(漢陽縣) 북쪽에 있는 절의 이름으로 본래 이름은 '태평흥국사(太平興國寺)'이다. 정호(程顥)가 장재(張載)와 함께 흥국사에서 종일 강론하고서 "옛날에도 어떤 사람이 이 자리에서 이런 강론을 한 일이 있었는지 모르겠다."라고 하였다. 《近思錄 卷14》 아호(鵝湖) 아호는 중국 강서성(江西省) 신주(信州) 연산현(鉛山縣)에 있는 산으로, 1175년 여조겸(呂祖謙)의 주선으로 주희와 육구령(陸九齡), 육구연(陸九淵) 형제가 이 산의 아호사(鵝湖寺)에 모여 논쟁을 펼친 바 있다. 비단……덧입는다 《중용장구》 제 33장에 "《시경》에 '비단옷을 입고 겉에 홑옷을 걸친다.'고 하였으니, 이는 문채가 밖으로 드러나는 것을 싫어해서이다."라는 말이 보인다. 《시경》은 위풍(衛風) 석인(碩人)과 정풍(鄭風) 봉(丰)을 말하며 모두 '의금경의(衣錦褧衣)'로 되어 있는데, 뜻은 동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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敎旨孺人林氏贈淑夫人者道光二十五年正月 日 [施命之寶]折衝將軍僉知中樞府事兼五衛將金膺相妻依法典從夫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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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35년 김양묵(金養默) 고신(告身) 고문서-교령류-고신 정치/행정-임면-고신 道光十五年六月十九日 憲宗 金養黙 道光十五年六月十九日 憲宗 金養默 서울특별시 종로구 施命之寶 1개(적색, 정방형) 부안 돈계 김응상 후손가 부안 돈계리 김응상 후손가 1835년(헌종1) 6월에 국왕이 김양묵을 통훈대부 행자여도찰방으로 임명하면서 내려 준 교지 1835년(헌종1) 6월 19일에 왕이 김양묵(金養黙)을 통훈대부(通訓大夫) 행자여도찰방(行自如道察訪)으로 임명(任命)하면서 내려 준 교지(敎旨)이다. 통훈대부는 정3품 당하관(堂下官)으로 문관의 품계이다. 찰방(察訪)은 역참(驛站)을 관장하던 종6품의 관직으로 행수법(行守法)에 따라 관직명 앞에 '행'(行)을 적었다. 행수법(行守法)은 품계가 높고 관직이 낮으면 '행'을 썼고 그 반대로 품계가 낮고 관직이 높으면 '수(守)'를 적었다. 이를 계고직비(階高職卑), 그 반대는 계비직고(階卑職高)라 하였다. 자여도(自如道)는 창원을 중심으로 동쪽의 김해, 서쪽의 함안, 남쪽의 웅천, 북쪽의 칠원에 걸쳐있던 조선 시대의 교통로였다. 중심역인 자여역(自如驛)에는 종9품의 역승(驛丞)이 소재하였으나 뒤에 종6품의 찰방이 파견되었다. 김양묵의 자여도찰방 임명은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1835년(헌종1) 6월 19일조에 "吏批 再政 以崔拱辰爲德陵直長 李是鍊爲開城經歷 金養默爲自如察訪 判敦寧單金逌根 知敦寧單鄭尙愚 行左承旨單嚴燾"라고 실려 있는 기록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한편 문서의 배면(背面)을 보면 '이〃(吏〃) 김정호(金貞浩) '라는 기록이 있다. '이이'는, 이조(吏曹)의 서리(胥吏)를 지칭하는데, 흔히 단골, 단골서리, 단골리로도 불렸다. 즉 김양묵의 고신을 작성해 준 사람이 김정호였다. 1829년(순조 29)에 정시문과(庭試文科)에 급제한 김양묵은 김응상(金膺相)의 아들로, 현재 부안(扶安)에 있는 김응상의 후손가에는 김응상의 고신 8점을 포함하여 그의 처와 부, 조, 증조가 받았던 고신 또는 추증교지 12점, 김응상의 호구단자 7점, 그리고 아들 김양묵의 고신 16점과 차첩(差帖) 2점, 문과 홍패(紅牌)와 시권(試券) 등이 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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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55년 숙부인(淑夫人) 임씨(林氏) 고신(告身) 고문서-교령류-고신 정치/행정-임면-고신 咸豐五年三月 日 哲宗 淑夫人 林氏 咸豐五年三月 日 哲宗 孺人林氏 서울특별시 종로구 施命之寶 1개(적색, 정방형) 부안 돈계 김응상 후손가 부안 돈계리 김응상 후손가 1855년(철종 6)에 왕이 김응상의 처 숙부인 임씨에게 내린 고신 1855년(철종 6) 3월, 왕이 김응상(金膺相)의 처(妻) 숙부인(淑夫人) 임씨(林氏)에게 내린 고신(告身)이다. 김응상이 가선대부(嘉善大夫) 동지중추부사겸오위장(同知中樞府事兼五衛將)으로 임명되면서 김응상의 처숙부인 임씨는 정부인(貞夫人)으로 봉작(封爵)되었다. 이 문서의 맨 끝에 "嘉善大夫同知中樞府事兼五衛將金膺相妻 依法典從夫職"라고 적힌 내용이 그 사실을 의미한다. 가선대부는 종2품 문무관(文武官)에게 주던 품계(品階)로 그 아내는 "남편의 관직에 따른다(從夫職)"는 규정에 따라, 임씨는 정부인으로 봉작되었다. 한편 김응상에게는 두 명의 부인이 있었는데 이번에 정부인으로 봉작된 숙부인 임씨와 또 다른 부인 숙부인 양씨(梁氏)도 이때 정부인의 칭호를 받게 되었다. 오늘날 전하고 있는 김응상의 호구단자에 따르면, 양씨는 남편 김응상과는 19살 차이가 나며, 김응상의 만년에 이르기까지 해로하고 있는 것으로 미루어 볼 때 후처(後妻)임이 분명하다. 그리고 김응상의 아들로 문과에 급제했던 김양묵(金養默)은 양씨와는 10살 차이밖에 나지 않았다. 김양묵은 전처(前妻) 임씨의 소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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찰방 매곡 최공 묘지명 察訪梅谷崔公墓誌銘 공의 성은 최씨(崔氏), 휘는 광(銧), 자는 중백(重伯), 호는 매곡(梅谷), 관향은 낭주(朗州)이다. 신라(新羅) 원보상(元甫相) 흔(昕)이 그 시조이다. 휘 지몽(知夢)에 이르러 고려 태조를 섬겨 동래후(東萊侯)에 봉해졌다. 시호는 민휴(敏休)이다. 휘 안우(安雨)에 이르러 본조에 들어왔는데, 군기시 소감(軍器寺小監)을 지냈다. 6대를 전해 내려와 휘 추(湫)에 이르렀는데, 이 분의 호는 난계(蘭溪)이고, 관직은 참판이다. 2대를 전해 내려와 휘 치호(致湖)에 이르렀는데, 이 분의 호는 상덕재(尙德齋)로, 교리를 지냈다. 공에게는 고조가 된다. 증조는 휘 결(潔)인데, 전생서 참봉(典牲署參奉)이다. 조부는 휘 경남(慶男)인데, 어모장군(禦侮將軍)이다. 부친은 휘 정민(廷敏)인데, 훈련원 봉사(訓鍊院奉事)이다. 모친은 여흥 민씨(驪興閔氏)로, 민경우(閔敬雨)의 따님인데, 만력(萬曆) 기축년(1589, 선조22) 1월 13일에 장흥(長興) 와리(瓦里)에서 공을 낳았다.공은 기개가 빼어나고 성정과 도량이 온화하고 순량하였다. 집안에서는 부모를 섬기고 나가서는 어른을 섬겼다. 말은 마치 입에서 내지 못하는 듯이 하고 몸가짐은 옷을 가누지 못하는 듯이 하였다. 독서를 좋아하는 성격이라 손에서 책을 놓지 않았다. 일찍이 집이 가난하고 어버이가 연로하여 봉양할 수 없는 것을 근심하여 마침내 명경(明經)으로 과거 공부하여 기쁘게 해 드리려는 계책으로 삼았다. 여러 번 향시에 합격하였지만 번번이 예부시(禮部試 대과)에 낙방하였다. 광해군(光海君) 때 시상(時象)이 좋지 못한 것을 보고 마침내 은거하여 응시하지 않았다. 이어서 연달아 어버이의 상을 당하였다. 상복을 벗으니 나이가 이미 너무 많아서 이 때문에 과거 공부를 접고자 하니, 친척이 권유하여 말하기를 "비록 기쁘게 해 드릴 처지는 아니지만 다만 문호(門戶)를 일으킬 계책에 힘쓰지 않겠는가."라고 하였다. 기축년(1649, 인조27)에 과거에 급제하여 규례에 따라 봉상시 직장(奉常寺直長)에 제수되었고, 계사년(1653, 효종4)에 율봉도 찰방(栗峯道察訪)에 제수되었다. 업무를 본 지 한 해 남짓 만에 늙었다는 이유로 사직하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장흥에서 능주(綾州)의 가옥치(佳玉峙)로 이사하였다. 이는 고요한 곳에서 한가롭게 지낼 계책이었으니, 옛 벗들과 시를 짓고 술을 마시며 서로 교유하였다.기유년(1669, 현종10) 6월 10일에 졸하였으니, 향년 81세이다. 능주의 서쪽 오리동(五利洞) 앞 산기슭 유좌(酉坐)의 언덕에 장사 지냈다. 배위(配位)는 김해 김씨(金海金氏)로, 김후장(金厚璋)의 따님인데, 부덕(婦德)이 지순하였다. 3남 1녀를 낳았으니, 장자는 동망(東望), 차자는 동로(東老), 삼남은 동효(東曉)이고, 딸은 하동(河東) 정문룡(鄭門龍)에게 출가하였다. 손자 이하는 기록하지 않는다.아, 공은 온갖 고생을 하였지만 아름다운 광채를 간직하였고, 70세에 이르러 비로소 찰방 한 직임을 받고 그쳤으니, 지위가 덕에 걸맞지 않은 것이 어찌 공과 같은 자가 있겠는가. 그러나 조상의 음덕으로 자손이 잘되는 보응(報應)은 마땅히 누리는 때가 있을 것이니, 최씨 후손은 힘쓸지어다.8세손 창주(昌柱)와 남표(南杓)가 가장(家狀)을 가지고 와서 묘지명을 지어 주기를 청하였다. 이에 다음과 같이 명을 짓는다.때를 만나고 만나지 못함은 하늘에 달렸고 遇不遇天얻고 얻지 못함은 명에 달렸네. 得不得命이 때문에 군자는 是以君子천명을 즐거워하고 명을 편안하게 여기네. 樂天而安命 公姓崔。諱銧。字重伯。號梅谷。貫朗州。新羅元輔昕。其始祖也。至諱知夢。事麗太祖。封東萊侯。諡敏休。至諱安雨。入我朝。軍器寺小監。六傳而諱湫號蘭溪。官參判。再傳而諱致湖號尙德齋。校理。於公爲高祖。曾祖諱潔。典牲署參奉。祖諱慶男。禦侮將軍。考諱廷敏。訓鍊奉事。妣驪興閔氏敬雨女。以萬曆己丑正月十三日。生公于長興之瓦里。氣宇秀爽。性度溫良。入事父母。出事長上。言若不出口。身若不勝衣。性勤讀書。手不釋卷。嘗念家貧親老無以爲養。遂業明經爲供歡計。累擧鄕解。輒屈禮部。當光海時。見時象不佳。遂隱不赴試。繼而連遭內外艱。服闋。年己耆艾。因欲廢擧。親戚强之曰。雖無獻悅之地。獨不爲門戶計耶。己丑擢第。例授奉常寺直長。癸巳除栗峯道察訪。視職歲餘。以老謝歸。自長興移寓于綾州之住玉峙。盖爲就靜養閒計也。與知舊士友。文酒相從。己酉六月十日卒。得年八十一。葬于綾之西五利洞前麓酉坐原。配金海金氏厚璋女。婦德純至。擧三男一女。長東望次東老次東曉。女適河東鄭文龍。孫以下不錄。嗚呼。公積若累艱。蓄章儲輝。至於行年七十。而始得攻駒一職而止。位不稱德。豈有如公者乎。然不食之報。當有享受之日。崔氏其勉乎哉。八世孫昌柱南杓奉家狀。來謁誌銘之文。銘曰。遇不遇天。得不得命。是以君子。樂天而安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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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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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정대부 성재 고공 묘지명 通政大夫惺齋高公墓誌銘 공의 성은 고씨(高氏), 휘는 진오(鎭俉), 자는 성순(聖巡), 호는 성재(惺齋)이니, 장수하였다는 이유로 통정대부에 올랐다. 계보는 장흥(長興)에서 나왔는데, 신라와 고려 사이에 대대로 작위와 공훈으로 이름이 났다. 휘 신전(臣傳)에 이르러 호조 참의를 지냈다. 이분이 휘 열(悅)을 낳았는데, 호조 참판을 지냈다. 이분이 휘 상덕(尙德)을 낳았는데, 사헌부 지평을 지냈다. 휘 가한(可漢)에 이르렀는데, 호가 봉강(鳳岡)으로, 바로 공의 고조이다. 증조의 휘는 명림(命霖), 호는 경재(敬齋)인데, 문학과 행실로 세상에 이름이 났다. 조부의 휘는 산택(山宅)이니, 은덕(隱德)이 있었다. 부친은 휘 세은(世殷), 호가 담암(澹庵)인데, 효우로 칭송을 받았다. 모친은 광산 이씨(光山李氏)로, 이영(李榮)의 따님이다. 정종(正宗) 무오년(1798, 정조22) 2월 5일에 공이 이지촌(鯉池村)에서 태어났다.공은 어려서 아버지를 여의었기에 봉양하지 못한 것을 평생의 한으로 여겼다. 모부인(母夫人)을 섬김에 부지런히 일하고 봉양하여 몸에 편안 것은 다 바쳤고, 평소 모친 곁을 떠난 적이 없었다. 숙사(塾舍)에 있을 때면 날마다 반드시 세 번 문안을 드렸다. 모친에게 병환이 있으면 몹시 근심하여 잠자리에 들지 않고 술과 고기를 먹지 않으며 다른 일은 제쳐 두고 모친의 뜻에 맞게 하는 것을 급선무로 삼았다. 모친의 상을 당하여 망극한 슬픔으로 몸이 상하여 정신을 잃었다가 깨어나곤 하였다. 장례의 모든 절차를 갖추어 반드시 성실하게 하여 유감이 없게 하였다. 어려서부터 과거 공부를 하여 문사(文詞)가 일찍 이루어졌다. 중년에 개연히 위기지학(爲己之學)에 뜻을 두어 《논어》, 《맹자》, 《심경(心經)》, 《근사록(近思錄)》 및 성리학의 책들을 가지고 주야(晝夜)로 연구하였다. 일찍이 말하기를 "보이지 않을 때에도 걱정하고 두려워하고 들리지 않을 때에도 경계하고 근신하는 것48)은 근본을 바르게 하는 제일의 방법이니, 잠시라도 소홀하거나 잊어선 안 된다."라고 하고 자리 곁에 써 붙여 놓고서 늘 보았다. 규문을 정돈하고 자손을 가르침에 화평하면서도 은혜로웠으며 엄격하면서도 법도가 있었다. 친척과 친구의 자손 가운데 고아가 되어 혼인하지 못하고 가난하여 배우지 못하는 자가 있으면 도와주어 혼인할 시기를 놓치거나 배우는 때를 놓치는 탄식이 없게 하였다. 흉년에는 그의 도움으로 밥을 지어 먹은 사람이 적지 않았다.무진년(1868, 고종5) 1월 11일에 정침(正寢)에서 생을 마감하였다. 이지(鯉池) 왼쪽 산기슭 원봉(圓峯)의 아래 자좌(子坐) 언덕에 장사 지냈다. 배위(配位)는 전주 이씨(全州李氏)로, 이동일(李東一)의 따님이다. 3남 4녀를 두었으니, 아들은 제문(濟文), 제옥(濟玉), 제식(濟植)이고, 딸은 광산(光山) 이남호(李南鎬), 광산(光山) 이치호(李致鎬), 이천(利川) 서학규(徐學奎), 남평(南平) 문영욱(文永郁)에게 출가하였다. 장방(長房)은 2남이니, 황(榥)과 모(模)이다. 이방(二房)은 3남이니, 용주(容柱), 헌주(憲柱), 만주(萬柱)이다. 삼방(三房)은 1남이니 기주(麒柱)이다. 이하는 기록하지 않는다.증손 광무(光茂)가 가장(家狀)을 가지고 묘지명을 지어 주기를 청하였다. 이에 다음과 같이 명을 짓는다.늘 깨어 있다는 것은 무엇인가 惺惺維何경계하고 삼가며 두려워한 것일세. 戒愼恐懼큰 근본이 이미 확립되면 大本旣立온갖 선이 갖추어지네. 萬善斯具멀고 외진 곳에서 한가롭게 지내며 婆娑遐隅세상과 서로 잊었네. 與世相忘넉 자의 무덤이 있으니 圓峯四尺군자가 묻힌 곳일세. 君子維藏 公姓高。諱鎭俉。字聖巡。號惺齋。壽階通政。系出長興。羅麗間。世著爵勳。至諱臣傳。官戶曹參議。生諱悅。戶曹參判。生諱尙德。司憲府持平。至諱可漢號鳳岡。卽公之高祖也。曾祖諱命霖號敬齋。文行著世。祖諱山宅。有隱德。考諱世殷號澹庵。孝友見稱。妣光山李氏榮女。正宗戊午二月五日。公生于鯉池村。早失所怙。以未得逮養爲終身恨。事母夫人。服勤就養。便身畢給。平居未嘗離側。若在塾舍。則日必三省。有疾極其憂。不就寢席。不御酒肉。舍置餘事。惟以迎合爲急。遭故。哀毁罔極。絶而復蘇。送終凡具。必誠無憾。早業功令。文詞夙就。中年慨然有志乎爲已之學。將論孟心經近思錄及性理諸書。晝夜硏究。嘗曰。恐懼不睹。戒愼不聞。此是端本第一法。不可斯須而忽忘。書諸座側以常目焉。修整閨門。敎誨子孫。和而有恩。嚴而有法。親戚知舊。有孤而未婚貧而未學者。爲之助力。俾無失時失業之歎。遇饑歲。待以擧火者爲不少。戊辰正月十一日卒于正寢。葬鯉池左麓圓峯下子坐原。配全州李氏東一女。有三男四女。濟文濟玉濟植。女適光山李南鎬光山李致鎬利川徐學奎南平文永郁。長房二男榥模。二房三男容柱憲柱萬柱。三房一男麒柱。以下不錄。曾孫光茂以家狀。謁誌銘之文。銘曰。惺惺維何。戒愼恐懼。大本旣立。萬善斯具。婆娑遐隅。與世相忘。圓峯四尺。君子維藏。 보이지……것 《중용장구》 제1장의 "도라는 것은 잠시도 떠날 수 없는 것이다. 떠날 수 있다면 그것은 도가 아니다. 그런 까닭에 군자는 보이지 않을 때에도 경계하고 근신하며, 들리지 않을 때에도 걱정하고 두려워한다.[道也者, 不可須臾離也, 可離, 非道也. 是故, 君子戒愼乎其所不睹, 恐懼乎其所不聞.]"라는 말에서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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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조 참판 난계 최공 묘지명 戶曹參判蘭溪崔公墓誌銘 공의 성은 최씨(崔氏), 휘는 추(湫), 자는 양호(養浩), 호는 난계(蘭溪), 관향은 낭주(朗州)이다. 휘 지몽(知夢)이 있는데, 고려(高麗)에서 벼슬하여 동래후(東萊侯)에 봉해지고 1천(千) 호의 식읍(食邑)을 받았다. 이분이 족보에 기록된 선조가 된다. 휘 안우(安雨)에 이르러 본조에 들어왔으니, 군기시 소감(軍器寺小監)을 지냈고, 휘 운(雲)은 호가 덕암(德庵)으로, 평안 감사(平安監司)를 지냈는데, 두 이름난 선조이다. 고조는 휘 사경(思敬)인데, 지용주사(知龍州事)를 지냈다. 증조는 휘 홍의(弘毅)인데, 사헌부 감찰(司憲府監察)을 지냈다. 조부는 휘 득초(得超)인데, 장악원 정(掌樂院正)을 지냈다. 부친은 휘가 자혁(自赫)인데, 사온시 직장(司醞寺直長)을 지냈다. 이다. 모친은 영광 김씨(靈光金氏)로, 현감 김시(金時)의 따님이다. 정통(正統) 병진년(1436, 세종18) 12월 3일에 공이 서울 남부(南部)에서 태어났다.어려서 남다른 자질이 있었고 영민하고 비범함이 남보다 뛰어났다. 스승에게 나아가 공부할 적에 번거롭게 독려하지 않아도 학습 과정에 따랐으며, 별도로 풀이하지 않아도 글 뜻을 알았다. 장성하여서는 제자백가를 널리 섭렵하여 암송함에 빠뜨림이 없었다. 문장을 지을 적에는 물이 솟아나는 듯이 산이 우뚝 솟은 듯이 하였다. 이윽고 스스로 말하기를 "이전의 성현이 저술하고 이론을 내세운 것은 그 뜻이 무엇을 하고자 하는 것이며, 후인이 독서하고 학문하는 것은 또한 그 뜻이 무엇을 하고자 하는 것인가." 하였다. 그러고는 마침내 과문(科文)이나 문장을 꾸미는 습속을 버리고 경서를 배우고 여러 책을 읽어 깊이 연구하고 몸으로 익혀 실천함과 학식을 넓혀 심성을 닦음을 위해 밤낮없이 노력하여 잠시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격언(格言)과 중요한 가르침이 있으면 반드시 자리 곁에 기록해 두었다. 반우(盤盂)와 궤장(几杖)에는 명(銘)이나 잠(箴)을 새겨 놓고 늘 보면서 스스로 경계하였다.성종(成宗) 임진년(1472, 성종3)에 문과에 급제하여 봉상시 직장(奉常寺直長)에 제수되었고, 얼마 되지 않아 사복시 정(司僕寺正)으로 자리를 옮겼으며, 병신년(1476)에 강원 도사(江原都事)로 부임하였다. 기해년(1479)에 내직으로 들어와 이조 좌랑이 되었고, 경자년(1480)에 외직으로 나가 고창 군수(高敞郡守)가 되었다.다스릴 적에는 한결같이 윤리를 밝히고 풍교를 순후하게 하는 것을 위주로 하였다. 규약을 엄히 하고 권선징악의 뜻을 보이며 상벌을 미덥게 하니, 시행한 지 몇 년 안 되어 간사하고 교활함이 자취를 감추고 폐단의 근원이 사라졌으며, 관리들은 그 위엄에 복종하고 백성들은 그 덕을 그리워하였다. 경내에 학문하고 효제(孝悌)에 힘쓰는 자가 있으면 반드시 찾아가 물어보고 후하게 상을 내렸다. 어느 날 백성 중에 자기 자식이 불효하다고 말하며 처벌해 주기를 청하는 사람이 찾아왔다. 공이 마침내 불효하는 사람을 잡아다 효자의 집안에 잡아 보낸 뒤 한 달 남짓 만에 풀어주니, 그 사람이 집으로 돌아가서는 한결같이 그 효자처럼 부모를 섬겼다. 갑진년(1484, 성종15)에 능성(綾城縣監)으로 관직을 옮겨 다스렸고, 무신년(1488)에 장성(長城)으로 관직을 옮겼으며, 기유년(1489)에 광양(光陽)에 부임하였는데, 이르는 곳마다 모두 치적(治績)이 있었으니, 공의 공적을 찬양해 기록한 풍비(豐碑)는 만인이 칭송하였다. 임자년(1492)에 군을 잘 다스린 치적을 높이 평가받아 내직으로 들어와 예조 참의(禮曹參議)가 되었다. 정사년(1497, 연산군3)에 효조 참판으로 승진하였고, 기미년(1499)에 치사(致仕)하고 낙향하였다.정묘년(1507, 중종2) 7월 26일에 사제에서 졸하였다. 와리(瓦里) 뒤쪽 산기슭 부갑(負甲)의 언덕에 장사 지냈다. 호조 판서에 추증되었다. 배위(配位)는 기계 유씨(杞溪俞氏)로, 정경부인(貞敬夫人)에 추증되었고, 1남 5녀를 낳았다. 아들 근지(近池)는 사성(司成)이다. 딸은 황보손(皇甫孫), 김석중(金碩中), 조승안(曺承安), 설등산(薜登山), 고상겸(高尙謙)에게 출가하였다. 손자는 셋이니, 치함(致涵)은 참봉이고, 치담(致淡)은 부위(副尉)이고, 치호(致湖)는 승지이다. 증손 이하는 기록하지 않는다.후손 창주(昌柱)와 남표(南杓)가 가장(家狀)을 가지고 와서 묘지명을 청하였다. 이에 다음과 같이 명을 짓는다.대구(對句) 맞추어서 문장 아름답게 꾸며 抽黃對白성취하는 바가 무슨 일이랴. 所就何事돌이켜 요약하고 근원을 궁구하며 反約窮源착실하고 자신에 절실하게 공부해야 하네. 近裏著己두텁게 쌓되 조금만 드러내니 厚積薄發하늘에서 떨어짐이 있네. 有隕自天출사하여 조정에 나아가 釋褐登廷나라를 다스리는 경륜을 자임하였네. 致澤經綸무성에서 소 잡는 칼을 어디에 쓰리오 武城牛刀현악에 맞추어 부르는 노랫소리 들리네.33) 絃誦有聲진원은 처벌하지 않았으니 陳元不罪난봉이 상서로움을 드러내네.34) 鸞鳳著祥고을을 두루 다스려 공적 드러났으니 歷典著績포상이 융숭하였네. 褒賞隆重나이 많아 치사하고 산중으로 돌아갔으니 引年歸山그 풍모와 운치 숭상할 만하네. 風韻可仰 公姓崔。諱湫。字養浩。號蘭溪。貫朗州。有諱知夢。仕麗朝。封東萊侯。食邑千戶。是爲登譜之祖。至諱安雨。入我朝。官軍器寺小監。諱雲號德庵。平安監司。皆其名祖也。高祖諱思敬。知龍州事。曾祖諱弘毅。司憲府監察。祖諱得超。掌樂院正。考諱自赫。司醞寺直長。妣靈光金氏縣監時女。正統丙辰十二月三日。公生于京之南部。幼有異質。英邁過人。就傳上學。不煩提督而遵循課程。不常訓釋而曉解文義。及長博涉諸家。成誦無遺。綴文點句。水湧山出。旣而自語曰。前聖所以著書立言者。其意欲何爲。後人所以讀書學問者。亦其意欲何爲。遂廢功令組繪之習。將經學念書。沈潛硏究。體察涵養。夜以繼日。造次不懈。有格言要誨。必書之座側。至於盤孟几杖。有銘有箴。常常寓目以自警焉。成宗壬辰擢文科。授奉常寺直長。尋遷司僕寺正。丙申赴江原都事。己亥入爲吏曹佐郎。庚子出宰高敞。爲政一以明倫理厚風敎爲主。嚴規約示勸懲信賞罰。行之有年。奸猾斂迹。弊瘼滌源。吏服其威。民懷其德。境內有學問孝悌者。必訪問之。厚加賞賜。一日民有來言其子不孝。請爲之懲治。公乃押送不孝之人於一孝子之家。月餘放之。其人歸家。事父母一如孝子人。甲辰移宰綾城。戊申遷長城。己酉赴光陽。所至皆有治績。豐碑萬口。壬子以治郡高第。入爲禮曹參議。丁巳陞戶曹參判。已未告老還鄕。丁卯七月二十六日卒于居第。葬瓦里後麓負甲原。贈戶曹判書。配杞溪俞氏贈貞敬夫人。生一男五女。男近池司成。女適皇甫孫金碩中曺承安薜登山高尙謙。孫三男致涵參奉。致淡副尉。致湖承旨。曾孫以下不錄。後孫昌柱南杓抱家狀。奉謁誌銘。銘曰。抽黃對白。所就何事。反約窮源。近裏著已。厚積薄發。有隕自天。釋褐登廷。致澤經綸。武城牛刀。絃誦有聲。陳元不罪。臠鳳著祥。歷典著積。褒賞隆中。引年歸山。風韻可仰。 무성(武城)에서……들리네 지방을 다스릴 때 예악으로 백성을 교화하고 선정을 베푼다는 비유로 쓰이는 말이다. 공자가, 제자 자유(子游)가 수령으로 있는 무성(武城) 고을에 갔는데, 현악에 맞추어 부르는 노랫소리를 듣고선 빙그레 웃으면서 말하였다. '닭을 잡는 데 어찌 소 잡는 칼을 쓰는가?'" 하였다. 《논어 양화(陽貨)》 진원(陳元)은……드러내네 후한(後漢)의 고성 영(考城令) 왕환(王渙)이 주부(主簿) 구람(仇覽)에게 "주부가 진원(陳元)의 과실을 듣고서도 처벌하는 대신에 교화하였는데, 새매의 뜻이 없어서야 되겠는가."라고 힐책하자, 구람이 "나는 새매가 난새나 봉황만은 못하다고 여깁니다."라고 하였다. 《後漢書 循吏列傳 仇覽》 여기서는 최추가 덕으로 교화한 것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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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재 고공 묘지명 敬齋高公墓誌銘 공의 휘는 명림(命霖), 자는 내여(乃汝), 호는 경재(敬齋)이다. 고씨(高氏)는 관향이 장흥(長興)인데, 신라(新羅)로부터 고려(高麗)에 이르기까지 대대로 저명한 석학이 있었다. 휘 신전(臣傳)에 이르러 본조에 들어왔으니, 호조 참의를 지냈다. 이분이 휘 열(悅)을 낳았는데, 호조 참판을 지냈다. 이분이 휘 상덕(尙德)을 낳았는데, 지평을 지냈다. 모두 그 현조(顯祖)이다. 고조는 휘 경리(景离)이고, 호가 둔암(遯庵)이다. 증조는 휘 원건(元健)이고, 조부는 휘 태제(泰濟)로 참봉을 지냈다. 부친은 휘 가한((可漢)이고, 호가 봉강(鳳岡)이다. 모친은 남평 *문씨(南平文氏)로, 문만웅(文萬雄)의 따님이다. 숙묘(肅廟) 경인년(1710, 숙종36) 2월 3일에 이지촌(鯉池村)에서 공을 낳았다.공은 체격이 단아하고 재능이 특출하였다. 어려서부터 지극한 성품이 있어서 부모의 곁에서 모시며 응대하고 대답함에 잘 받들어서 어김이 없었다. 7세에 《소학(小學)》을 배워 어린아이가 행할 모든 예법을 일일이 준행하였다. 10세에 《논어》와 《맹자》를 배워 문리(文理)가 날로 성취되었다. 관례를 함에 미쳐서는 포부가 크고 조예가 정밀하고 깊었다. 의리(義理)를 변론하는 곳에 이르러서는 선배와 숙유(宿儒 학식이 많은 선비)가 모두 스스로 그에게 미치지 못한다고 하였다. 일찍이 말하기를 "학문을 진전시키고 지혜를 늘리는 데에는 구사(九思)보다 절실 중요한 것이 없고, 몸과 마음을 단속하는 데에는 구용(九容)보다 중요한 것이 없으며,35) 인(仁)의 체단(體段)을 구하는 데에는 〈서명(西銘)〉36)보다 앞서는 것이 없다. 학문하는 규모는 박학(博學), 심문(審問), 신사(愼思), 명변(明辨), 독행(篤行)의 다섯 가지보다 잘 구비된 것이 없다."라고 하고, 자리 곁에 써서 걸어두고 스스로 경계하였다.한 마을에 같이 사는 시공(緦功)의 친척37)이 30여 가구였는데, 안부를 묻고 두루 구휼하여 은의(恩誼)가 있고 화목하였다. 수십 년이 되었지만 흠잡는 말을 하는 자가 없었다. 가문의 규약을 지어 매월 초하루에 사람들을 모아 놓고 고해주었다. 그 규약에 "첫째, 부모를 잘 섬기고, 형장을 잘 섬긴다.[善事父, 母 善事兄長.] 둘째, 학문을 권장하고 농사에 힘쓴다.[勤文學, 力農桑.] 셋째, 부세를 잘 납부하고 요역을 회피하지 않는다.[先賦稅, 趁徭役.] 넷째, 주색을 가까이하지 말고, 놀음을 배우지 말라.[勿近酒色, 勿學賭博.] 다섯째, 혼사와 상사에는 서로 돕고, 흉년에는 서로 구휼한다.[婚喪相扶, 饑饉相恤.] 여섯째, 쟁송을 경계하고 미신을 멀리 하라.[戒爭訟, 遠巫覡.]"라고 하였다. 집안의 후생(後生) 가운데 용모가 단정하고 자질이 특출한 자가 있으면 반드시 한 글방에 모아놓고 스승을 잘 선택하여 가르쳤다. 그리고 매달 직접 시험하여 부지런히 공부하는지 게으름을 피우는지를 살폈다. 늘 자손에게 경계하기를 "인생 사업은 다만 사(士)와 농(農) 두 가지만 있을 따름이다. 사세(事勢)와 재력(財力)이 미치는 자는 실로 마땅히 공부에 전념해야 하거니와, 만일 그렇지 않은 경우라면 동소남(董邵南)38)처럼 주경야독(晝耕夜讀)해야 한다. 이것이 선비의 본분이니, 힘쓰고 힘쓸지어다.무술년(1778, 정조2) 7월 9일에 졸하니, 천년동(千年洞) 당산등(堂山嶝) 을좌(乙坐) 언덕에 장사 지냈다. 배위(配位)는 보성 선씨(寶城宣氏)로, 선정기(宣廷夔)의 따님인데, 아들 둘을 낳았다. 계배(系配)는 전주 이씨(全州李氏)로, 이진휘(李震輝)의 따님이다. 아들 넷을 낳았으니, 산각(山珏), 산중(山重), 산택(山宅), 산언(山彦)이다. 7세손 광무(光茂)가 나에게 묘지명을 지어 주기를 청하였다. 이에 다음과 같이 명을 짓는다.이미 그 몸 깨끗하게 하여 旣淑其身집에서 예법으로 막았네.39) 以閑有家미루어 확대하여 실행하였으니 推以行之가문의 법도가 또한 드러났네. 門規亦嘉곤륜산의 옥은 광채 숨기고40) 昆玉潛光못 속의 구슬은 광휘 감추었네.41) 淵珠藏輝자손들이 가법을 받들었으니 子孫承式명성과 업적 작지 않네. 聲猷不微 公諱命霖。字乃汝。號敬齋。高氏貫長興。自羅至麗。世有名碩。至諱臣傳。入我朝官戶曹參議。生諱悅戶曹參判。生諱尙德持平。皆冥顯祖也。高祖諱景离。號遯庵。曾祖諱元健。祖諱泰濟參奉。考諱可漢。號鳳岡。妣南平文氏萬雄女。以肅廟庚寅二月三日生公于鯉池村。體容端雅。才氣挺邁。自幼有至性。侍父母側。應對唯諾。承順無違。七歲受小學書。凡百幼儀。一一遵循。十歲受論孟。文理日就。及官抱負贍富。造詣精深。至於辨論義理處。先進宿儒。皆自以爲不及。嘗曰。進學益智。莫切於九思。收斂身心。莫切於九容。求仁體段。莫先於西銘。爲學規模。莫備於博學審問愼思明辨篤行五者。書揭座側以自警焉。緦功之親同住一巷者。爲三十餘家。問訊周恤。恩誼雍睦。積數十年。未有間言。著門規。每於月朔。聚而告之。其規有曰。一善事父母。善事兄長。二勤文學力農桑。三先賦稅趁徭役。四物近酒色。勿學賭慱。五婚喪相扶。饑饉相恤。六戒爭訟遠巫覡。門內後生。有儀形端正。才性穎悟。必聚之一塾。擇師敎之。每朔躬親試之。以考其勤慢。常戒子孫曰。人生事業。只有士農兩件而已。事力可及者。固當專業於文字。如其不然。則如蕫邵南晝耕夜讀可也。此是士子本分。勉之勉之。以戊戌七月九日卒。葬于千年洞堂山嶝乙坐原。配寶城宣氏廷夔女。生二男。系配全州李氏震輝女。生四男。山珏山重山宅山彦。七世孫光茂謁余文以誌陰石。銘曰。旣淑其身。以閑有家。推以行之。門規亦嘉。昆玉潛光。淵珠藏輝。子孫承式。聲猷不微。 학문을……없고 구사와 구용은 군자가 갖추어야 할 아홉 가지의 마음가짐과 몸가짐이라는 뜻으로, 《예기》 〈옥조(玉藻)〉와 《논어》 〈季氏〉에 나온다. 서명(西銘) 송나라 장재(張載)가 지은 글로, 천지가 나의 부모이고 만물이 나의 동포라는 이치를 담고 있다. 《張載全書》 시공(緦功)의 친척 시공은 상복(喪服) 제도에서 가장 가벼운 3개월 동안 입는 시마복(緦麻服)과 5개월 동안 입는 소공복(小功服)의 친척을 말한다. 동소남(董邵南) 당(唐)나라 사람으로, 안풍(安豐)에 은거하여 주경야독하며 부모를 받들고 처자를 거느리며 살았다. 한유(韓愈)가 그의 이러한 삶을 두고 〈동생행(董生行)〉이란 글을 지었다. 《五百家注昌黎文集 卷2 嗟哉董生行》 집에서 예법으로 막았네 《주역》〈가인괘(家人卦) 초구(初九)〉에 "집에서 예법으로 막으면 뉘우침이 없어지리라.[閑有家, 悔亡.]" 하였으니, 집안을 다스리는 초기에 법도로 막으면 은혜를 손상하지 않고 의를 잃지 않을 것이라는 말로, 집안에서 처하기를 잘한다는 뜻이다. 곤륜산의……숨기고 《서경》 윤정(胤征)에 "불이 곤륜산을 태워 버리면 그 속에 있던 옥과 돌도 함께 다 타 버린다.[火炎崑岡, 玉石俱焚.]" 하였다. 못……감추었네 《장자》 〈열어구(列禦寇)〉에 "천금의 가치가 나가는 구슬은 반드시 깊은 못 속에 숨어 사는 검은 용의 턱 밑에 있는 법이다.[夫千金之珠, 必在九重之淵, 而驪龍頷下.]"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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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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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부

운곡 최공 묘지명 雲谷崔公墓誌銘 내가 일찍이 민치환(閔致煥) 어른과 교유한 적이 있어 운곡(雲谷) 최공(崔公)의 어짊에 대해서 들은 지 오래되었다. 그 말 가운데 "공은 한천(寒泉) 산중에 은거하여 발걸음은 문밖으로 나가지 않고 이름은 세상에 알려지지 않았지만, 문학에 뛰어나고 의를 행하는 데 돈독하였다. 규문을 정돈함에 화평하면서도 예가 있었으며, 생도를 가르침에 엄격하면서도 법도가 있었다."라고 하였으니, 대개 공은 바로 민씨(閔氏) 어른과 혼인한 집안의 벗이고, 민씨 어른은 바로 나의 장인이니, 그 말은 실로 믿을 만하여 낱낱이 마음에 잊히지 않았다. 50여 년이 지난 뒤에 공의 증손 창주(昌柱)와 남표(南杓)가 가장(家狀)을 가지고 와서 묘지명을 지어 주기를 청하였다. 삼가 그 가장을 살펴보고 과연 민씨 어른의 말이 근거가 있다는 것을 알았고 가장에서 말한 것이 또 거짓말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공은 몸가짐이 단정하고 마음속에 품은 생각이 맑고 고아하여 신선과 도인의 풍모(風貌)처럼 속기(俗氣)가 한 점도 없었다. 그래서 그와 교제하는 사람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비루함이 사라질 정도였다. 경사(經史)를 두루 섭렵하고 고금의 일에 해박하여, 마음에 온축하여 외면으로 드러나는 것이 마치 근원이 있는 물과 같이 깊고 깊어서 다함이 없었다. 《소학(小學)》으로 바탕을 삼고, 《대학(大學)》으로 규모를 세우고, 《논어(論)》와 《맹자(孟子)》로 맥락을 바로잡고, 《시경(詩經)》과 《서경(書經)》으로 진취하였으니, 과정과 절도에 정연하게 법도가 있었다. 자기에게 행하고서 남에게 미쳤기에 애초에 다른 것이 없었다.기쁜 마음으로 공손하고 조심스럽게 살아 계시는 부모님을 섬기고, 몸이 상할 정도로 지나치게 슬퍼하며 돌아가신 부모님을 장사 지내고, 슬퍼하고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선조를 추모하였다. 평소 거처할 적에 의관은 반드시 단정하게 하고, 얼굴빛은 반드시 위엄 있게 하였다. 집안사람을 다스릴 적에는 히히거리며 가볍게 웃는 실수가 없게 하였고, 자제를 가르칠 적에는 이리저리 휩쓸리는 습속이 없게 하였다. 항상 말하기를 "부지런하고 근신하며 청렴하고 검소함은 자신을 단속하는 부절(符節)이고, 온화하고 공손하며 화평하고 온순함은 남을 대하는 요체이다."라고 하고, 이어서 이를 자리 곁에 써서 놓아두고 늘 귀감으로 삼았다. 분수를 지키고 만나는 상황에 따라 편안히 여겼으며 광채를 마음속에 온축하고 있어 편안하고 여유롭게 지냈다. 애오라지 생을 마칠 때 일찍이 시를 지어 "봄 새싹 돋자 남쪽 이랑에 김을 매고, 가을 국화 피자 동쪽 울타리에서 따네. 세상을 경영하는 것 나의 일이 아니니, 은거하는 것 평소 기약한 것이라네.[春苗鋤南畝, 秋菊採東籬. 經濟非吾事, 隱淪是素期.]"라고 하였으니, 여기에서 그 뜻을 볼 수 있다.경술년(1910, 순종4) 11월 7일에 졸하였고, 기유년(1849, 헌종15)에 태어났으니, 향년 62세이다. 산음(山陰) 뒤쪽 산기슭 부간(負艮) 언덕에 장사 지냈다.공의 휘는 진후(鎭厚), 자는 윤옥(允沃), 낭주(朗州) 사람이다. 신라(新羅) 원보상(元輔相) 휘 흔(昕)이 시조이다. 아들 지몽(知夢)은 고려 태조를 섬겨 동래후(東萊侯)에 봉해졌고, 시호는 민휴(敏休)이다. 휘 안우(安雨)는 호가 죽계(竹溪)이고, 군기시 소감(軍器寺小監)을 지냈다. 이분의 아들 휘 자운(雲)은 호가 덕암(德庵)이고, 현감을 지냈다. 5대를 전해 내려와 휘 추(湫)는 호가 난계(蘭溪)인데, 문과에 급제하고, 참판을 지냈다. 2대를 전해 내려와 휘 치호(致湖)는 호가 상덕재(尙德齋)이고, 문과에 급제하고 승지를 지냈다. 4대를 전해 내려와 휘 선(銑)은 호가 매곡(梅谷)이고, 문과에 급제하고 찰방을 지냈다. 모두 그 현조(顯祖)이다. 고조는 휘 동로(東老)이고, 증조는 휘 태항(泰恒)이다. 조부는 휘가 인수(仁受)이고, 호가 송암(松庵)인데, 장수하였다는 이유로 첨추(僉樞)에 올랐다. 부친은 휘 성각(聖覺)이고, 호가 눌암(訥庵)이다. 모친은 장택 고씨(長澤高氏)로, 고명복(高命復)의 따님이다. 공은 창녕 조씨(昌寧曺氏)에게 장가들었는데, 조하량(曺夏良)의 따님이다. 2남 2녀를 낳았으니, 장자는 의한(義漢), 차자는 의택(義澤)이다. 딸은 각각 공주(公州) 이일무(李日茂)와 여흥(驪興) 민장호(閔章鎬)에게 각각 출가하였다. 손자 이하는 기록하지 않는다.아, 내가 태어나 아무것도 모를 때 공은 이미 세상을 떠났으니, 삼성(參星)과 진성(軫星)은 서로 마주 보지 못하고, 제비와 기러기는 서로 만나지 못하는 것과 같았다. 공의 풍모와 기품을 추념하여 따라가려고 해도 미치지 못하는 한스러움만 간절할 따름이다. 이에 오늘 묘지명을 써달라는 간청에 대해서 감히 굳게 사양하지 못한다. 다음과 같이 명을 짓는다.천명과 시운이 어긋나 命與時違세상에서 알아주지 않았네. 世莫我知산림에 은거하여 枕山樓谷광채를 숨겼네. 潛光蘊輝성동엔 수죽이 푸르고 城東水竹산음엔 눈과 달빛 비치네. 山陰雪月먼 후대에 남은 자취를 百歲遺躅뒤미쳐 상상할 수 있네. 追想髣髴 余嘗從閔丈致煥。得聞雲谷崔公之賢久矣。其言。曰公隱於寒泉山中。足不出門。名不出世。而優於文學。篤於行義。修整閨門。和而有禮。敎授生徒。嚴而有法。盖公卽閔丈之婚友。而閔丈卽余之婦翁也。其言固爲可信。而歷歷不忘於心。後五十餘年。公曾孫昌柱南杓以家狀。來謁誌行之文。謹按其狀。果知閔丈之言爲有據。而家狀之云又非誣也。公容儀端潔。襟懷淸高。如仙風道骨。無一點塵氛。人爲其容接者。不覺鄙吝自消。博涉經史。該貫古今。有以蘊畜於中而施應於外者。如有源之水。深深而不渴也。以小學爲田地。以大學立規模。以論孟正路脈。以詩書展步趨。課程節度。秩然有章。由己及人。未始有異。怡愉洞屬以事其生。擗踊毁瘠以送其終。悽愴怵愓以追其遠。平居冠服必整。容色必莊。御家衆無嘻嘻之失。敎子弟去靡靡之習。常曰。勤謹淸儉。持身之符。溫恭和順。接人之要因。書之座右以常鏡考焉。守分安遇。潛光蘊輝。優哉游哉。聊以卒歲嘗有詩曰。春苗鋤南畝。秋菊採東籬。經濟非吾事。隱淪是素期。此可以見其志也。庚戌十一月七日卒。距寅降已酉得年爲六十二。葬山陰後麓負艮原。公諱鎭厚。字允沃。朗州人。以新羅元輔諱昕爲始祖。子知夢。事麗祖封東萊侯。諡敏休諱安雨號竹溪。軍器寺小監。子雲號德庵縣監。五傳諱湫號蘭溪。文科參判。再傳諱致湖。號尙德齋。文科承旨。四傳諱銑號梅谷。文科察訪。皆其顯祖也。高祖諱東老。曾祖諱泰恒。祖諱仁受號松庵。壽陞僉樞。考諱聖覺號訥庵。妣長澤高氏命復女。公娶昌寧曺氏夏良女。生二男二女。男義漢次義澤。女適公州李曰茂驪興閔章鎬。孫以下不錄。嗚呼。余生未省事。而公已謝世矣。參軫不相對。燕鴻不相値。追惟風韻。只切靡逮之恨。玆於今日之請不敢牢辭云。銘曰。命與時違。世莫我知。枕山樓谷。潛光蘊輝。城東水竹。山陰雪月。百歲遺躅。追想髣髴。

상세정보
저자 :
(편저자)
유형 :
고전적
유형분류 :
집부

제용감 첨정 약포 조공 묘지명 濟用監僉正樂圃曺公墓誌銘 우리 고을의 선덕(先德)으로서 치사(致仕)하고 물러나 절개를 지켜 우러러 볼 만한 분이 십 수인데, 낙포(樂圃) 조공(曺公)이 그 가운데 한 사람이다. 공의 휘는 국병(國柄), 자는 신경(愼卿)이다. 명종(明宗) 때 벼슬하여 제용감 첨정(濟用監僉正)을 지냈다. 이윽고 물러나 능성(綾城)의 비봉산(飛鳳山) 아래에 은거할 곳을 마련하였는데, 이와 관련된 시가 있다. 그 시에 이르기를 "남쪽으로 와서 밭을 개간하고, 북쪽으로 바라봄에 은하수 높네. 비봉산 아래 맑은 바람 부니, 밤에 《이소경》을 읽네.[南來田疇闢, 北望河漢高. 淸風鳳岡下, 夜讀楚離騷.]"라고 하였다. 세대가 멀어 문고(文稿)가 전해지지 않고, 전하는 것이라고는 단지 초라하게 이 절구 한 수뿐이다. 그러나 상상하고 시를 음미해보면 그 충후하고 측달한 뜻과 울분에 차고 감개한 뜻은 먼 후대에서 마음이 통하고, 시대가 한참 지났어도 생각을 함께할 수 있다고 할 만하다. 그 저 바람과 구름, 달과 이슬만을 읊어 시문이 쌓여 있은들 과연 어디에 쓰겠는가. 그렇다면 세상에 공을 알고자 하는 자는 이를 살펴보면 충분할 것이다.대대로 서울에 살아 선조의 무덤이 인천(仁川)에 많았다. 임시로 살고 있는 곳에서 외롭고 쓸쓸하면 매양 뿌리를 생각하고 고향을 그리워하는 마음을 감당하지 못하였기에 집 뒷동산에다 작은 누대를 짓고 아침저녁으로 올라서 고향을 바라보았으니, 세상에서는 망향대(望鄕臺)라고 전해진다. 문을 닫고 자취를 감춘 채 명리(名利)를 멀리하며 인위적인 행위를 하지 않고, 경전을 연구하고 이치를 찾으며 생도를 가르치는 것을 노년의 계책으로 삼았으니, 향인(鄕人)의 자제 가운데 성취한 자가 많았다.조씨(曺氏)의 관향은 창녕(昌寧)이니, 신라(新羅) 태사(太師)인 창성부원군(昌城府院君) 휘 계룡(繼龍)이 을 시조이다. 휘 서(庶)에 이르렀는데, 호가 청윤(淸潤)으로, 본조에 들어와 보문각 직제학(寶文閣直提學)을 지냈다. 낸 이 분이 바로 공의 6대조이다. 증조는 휘 홍단(弘袒)인데, 오위장(五衛將)이고, 조부는 휘 숙문(淑文)이니, 계공랑(啓功郎)이다. 부친은 휘 정윤(貞允)인데, 지사(知事)를 지냈다. 모친 숙인(淑人)은 능성 구씨(綾城具氏)로, 구원성(具遠成)의 따님이다. 공의 생몰 연대는 잃어버려 전하지 않는다. 배위(配位) 숙인(淑人)은 진양 신씨(晉陽辛氏)로, 부덕(婦德)이 있었다. 묘소는 고을 서쪽 내동(內洞) 왼쪽 산기슭 유좌(酉坐) 언덕에 있으니, 쌍분이다. 아들 셋을 낳았으니, 진사 대수(大秀), 진사 대현(大玄), 그리고 대서(大緖)이다. 장방(長房)은 훈련원 봉사(訓鍊院奉事) 정희(廷禧)를 낳고, 봉사는 중일(仲逸)을 낳고, 중일은 부호군(副護軍) 순효(舜孝)를 낳고, 부호군은 한징(漢徵)을 낳고, 한징은 통정대부 봉의(鳳儀)와 진사 봉인(鳳人)을 낳았다. 이하는 다 기록하지 않는다.12세손 병홍(秉泓)이 그 가장(家狀)을 가지고 와서 묘지명을 지어 주기를 청하였다. 합당한 사람이 아니라는 이유로 감히 사양하지 못하였다. 이에 다음과 같이 명을 짓는다.하루가 지나지 않아 돌과 같이 不日介石홀연히 잘못을 뉘우쳤네.49) 幡然回轍고반이 언덕에 있고50) 考槃在阿도서가 집에 가득하였네. 圖書滿室편안고 여유롭게 노니니 優哉遊哉풍모와 운치 더욱 영원하리. 風韻彌長우뚝한 넉 자의 봉분 有崇四尺비봉산 남쪽에 있네. 飛鳳之陽 吾鄕先德。有致仕退休風節可仰者。爲十數人。樂圃曺公亦其人也。公諱國柄。字愼卿。仕明宗朝。濟用監僉正。旣而退營菟裘於綾城之飛鳳山下。因有詩曰。南來田疇闢。北望河漢高。淸風鳳岡下。夜讀楚離騷世代曠遠。文稿不傳。而所傳只此寂廖一絶詩而已。然而想象諷詠。其忠厚惻怛之意。憂憤感慨之志。可謂千載合席。曠世同轍彼風雲月露連編累牘果何用哉。然則世之欲知公者。觀於此足矣。世居京洛。墳墓多在仁川地。僑寓踽凉。每不勝懷本戀舊之意。就家後山頂。築小臺。朝夕登臨以瞻望焉。世傳爲望鄕臺。杜門屛跡。恬澹無爲。而以劬經硏理。訓迪生徒。爲從老計。鄕人子弟。多有成就者。曺氏貫昌寧。以新羅太師昌城府院君諱繼龍爲始祖。至諱庶號淸澗。入我朝。寶文閣直提學。卽公之六世祖也。曾祖諱弘袒。五衛將。祖諱淑文。啟功郎。考諱貞允。知事。妣淑人綾城具氏遠成女。公生卒年紀。逸而無傳。配淑人晉陽辛氏有婦德。墓州西內洞左麓酉坐雙兆。三男大秀進士。大玄進士。大緖長房生諱廷禧。訓鍊院奉事。奉事生諱仲逸。仲逸生諱舜孝。副護軍。護軍生諱漢徵。漢徵生諱鳳儀。通政。鳳人進士。以下不盡錄。十二代孫秉泓。奉其家狀。以徵幽竁之誌。不敢以非其人辭。銘曰。不日介石。幡然回撤。考槪在阿。圖書滿室。優哉遊哉。風韻彌長。有崇四尺。飛鳳之陽。 하루가……뉘우쳤네 《주역》 〈예괘(豫卦) 육이효(六二爻)〉에 "견고함이 돌과 같아서, 과거의 잘못을 하루가 지나지 않아 제거해 버리나니, 정하고 길하니라.[介于石, 不終日, 貞吉.]" 하였다. 고반(考槃)이 언덕에 있고 고반은 원래 《시경》〈위풍(衛風)〉의 편명으로, 은거하여 유유자적하게 도를 즐기고 덕을 이룸을 뜻하는데, 은자의 거처를 두루 이르는 말로도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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