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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재경에게 지어 주어 권면하다 贈勉權在炅 내 권재경을 사랑하노니 我愛權在炅명민하여 함께 학문할 만하네 聰敏可與學십리 길을 아침저녁으로 찾아오니 十里來朝夕기특하여라 성의가 지극하도다 奇哉誠亦卓살림이 어찌 이리도 어려운가 調度一何艱긴 낮 오후까지 배를 주리누나 永晝午枵腹부친이 늘 밭을 갈고 있으니 大人常耕田자식을 서숙에 다니게 하고 縱子遊書塾다시 연로한 조부가 있으니 更有重堂老때때로 와서 손자가 송독한 걸 본다오 時來觀誦讀집안에 어진 부친과 조부가 있는 것을 家有賢父祖옛날에는 사람들이 즐거워하는 바라 하였네268) 古云人所樂도심은 기한에서 발현되고 道心發飢寒문장은 부옥269)에서 나오는 법 文章出蔀屋이 말 역시 이치가 있으니 斯言亦有理참으로 날마다 반복해 외울 만하네 正可日三復장차 보건대 영가의 집안270)에서 行看永嘉門유속에서 우뚝한 고사가 배출되리라 高士挺流俗이에 한 편의 시를 지어서 爲作一篇詩네가 종신토록 힘쓰도록 격려하노라 助汝終身勖 我愛權在炅, 聰敏可與學.十里來朝夕, 奇哉誠亦卓.調度一何艱? 永晝午枵腹.大人常耕田, 縱子遊書塾.更有重堂老, 時來觀誦讀.家有賢父祖, 古云人所樂.道心發飢寒, 文章出蔀屋.斯言亦有理, 正可日三復.行看永嘉門, 高士挺流俗.爲作一篇詩, 助汝終身勖. 옛날에는……하였네 《맹자》 〈이루 하(離婁下)〉에 "도(道)에 맞는 자가 도에 맞지 않는 자를 길러주며, 재주 있는 자가 재주 없는 자를 길러준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어진 부형이 있음을 즐거워하는 것이다.[中也養不中, 才也養不才, 故人樂有賢父兄也.]"라고 한 것을 가리킨다. 부옥(蔀屋) 풀로 지붕을 이은 오막살이집으로, 곤궁한 민가 또한 백성을 비유한다. 영가(永嘉)의 집안 영가는 안동(安東)의 고호(古號)로, 권재경이 안동 권씨이므로 이렇게 말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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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질 상덕에게 답함 答從姪尙德 떨어져 지낸 지 제법 시간이 흘렀는데, 문득 편지를 받게 되니 매우 고맙고 위안이 된다. 근래 부모를 모시면서 어떻게 지내느냐? 걱정이 놓이질 않는다. 편지에서 지난번에 강회에 참여하였는데 그 전부터 집안의 재력이 부족하였다고 탄식하였는데, 강회에 참여한 것은 매우 기쁜 일이니 이는 우리 집안의 한 줄기 남은 희망이 아니더냐. 근래 네가 종유하는 사람들을 보면 잡스럽지 않아 항상 어질고 맑은 사람을 가까이 하려 하고 집에 거처하면서 응대할 때 말과 낯빛이 온화하고 부드러우니, 이는 사람답게 만드는 본령이다. 내 마음에 어찌 고맙고 다행스러움이 없겠느냐. 다만 이전처럼 한가롭게 지내 문자와 더욱 멀어진다면 이는 작은 병이 아니니, 빨리 마땅히 돌이켜야 한다. 한결같이 촌음을 아끼려고 마음을 먹고서 협실을 깨끗이 청소한 뒤에 쉬지 않고 부지런히 노력하며, 만일 의심나거나 잘 모르는 곳이 나오면 부친에게 여쭤 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또한 계인과 날마다 서로 어울리면 충분히 너의 의심과 모르는 곳을 풀어줄 수 있으니, 어찌 반드시 넉넉하지 않는 재력(財力)으로 식량을 싸서 과객이 된 이후에 비로소 책을 읽으려 하느냐. 이것은 모두 핑계를 대는 말이요, 성심(誠心)으로 독서하려는 뜻에서 나온 것이 아니다. 성인은 꼴 베는 이에게도 물었고, 189)세 사람이 가면 그 중에 반드시 나의 스승이 있으니,190) 비록 나이가 나보다 적거나 지위가 나보다 아래더라도 그 덕업이 나보다 뛰어난 자가 있으면 참으로 나의 스승이 되기에 해가 되지 않는다. 더구나 계인은 이웃 마을에 살면서 나이가 너보다 많고 공부도 너보다 나으며 그 가문의 명성과 재주의 뛰어남은 일찍이 우리 고을의 명사이니, 너는 모름지기 경외함으로 대하면서 질문하여야 한다. 우리 집안의 후생으로 훗날 가문의 책임을 부탁할 자가 누구이더냐。너는 모름지기 이러한 뜻을 깊이 체득하여 더욱 더 두려운 마음을 가져야 한다. 離阻有日。忽見手滋。感慰多矣。日來侍省若何。溯念無已。書中有言。向參講會。有從前不力之歎。喜事喜事。此是吾家一線餘望耶。觀汝近來從遊不雜。每欲親近賢淑。居家應對。辭色和順。此是作人本領也。於我心豈無感幸。但因循優遊。與文字益疏。不是小病也。亟宜反之。一以惜分陰爲心。淨掃夾室。孜孜矻矻。如有疑晦處。則稟問于家庭可也。又與季仁逐日相從。又足以解汝之疑晦。何必以不贍之力。欲裹糧爲客而後。乃始讀書耶。此皆推托之言。非出於誠心讀書之意也。聖人問于芻蕘。三人行必有我師。雖年下於我。地下於我。而其德業勝於我。則固不害爲吾之師。況季仁居在比隣。年上於汝。功夫上於汝。其門望才華。未嘗不是吾鄕名士。汝須敬畏而待以資問也。吾家後生可付後日家戶之望者誰耶。汝宜深體此意。更加惕念也。 성인은……물었고 《시경》 〈판(板)〉의 "옛날 성현 말씀에 나무꾼의 말이라도 들어 보라 하셨다네.〔先民有言 詢于芻蕘〕"라는 말에서 나온 것이다. 세 사람이……있으니 《논어》 술이(述而)에서 공자는 "세 사람이 함께 길을 가더라도 그 가운데에는 내가 스승으로 삼을 만한 사람이 반드시 있게 마련이니, 선한 자에 대해서는 그를 본받으면서 따를 것이요, 불선한 자에 대해서는 그를 경계하여 고칠 것이다.〔三人行 必有我師焉 擇其善者而從之 其不善者而改之〕"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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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중의 〈탄치흑〉 다섯 수에 화답하다 和汝重《歎薙黑》五絶 눈 속의 매화가지 홀로 넋을 지키고 있으니 雪裏梅梢獨守魂어찌 춤추는 나비 앵앵거리는 벌을 알겠는가 何知蝶舞與蜂喧꽃은 절로 피었다 떨어지니 의지할 데 없지만 自開自落雖無賴내년 봄에도 구십 일의 흔적과 바꾸지 않으리 不換明春九十痕어지럽게 엎은 비 다시 뒤집은 구름 되어2) 紛紛覆雨復飜雲다투어 취하더니 비린내를 향기인 줄 아네 爭醉腥塵認馥芬우리의 의관을 가지고 어디로 가야 하나 持我衣冠何處去유로3)가 천년토록 좋은 이웃이 되었네 兪盧千載好爲隣웅어4)의 바른 훈계를 외우던 사대부들 熊魚正訓誦冠紳변화에 처하여 지금 복건을 쓸 수 있는가5) 處變而今可飾巾한 가닥 《춘추》의 맥 천석만큼 무거운데 一脈春秋千石重어찌 방치하여 내 몸을 버리도록 하겠는가 豈容放過棄吾身전현을 낱낱이 세어보면 큰 성인이 몇인가 歷數前人幾豪聖모두 화복을 기러기 털과 같이 여겼다네 幷將禍福等鴻毛득실과 흥망성쇠의 이치를 보려 한다면 要看得喪乘除理도대체 누가 가장 높은 곳에 오르려는지 究竟誰爲太上高하늘이 〈북문〉6)을 짓게 했다 말하지 말라 休道天爲賦北門한겨울이라 한들 어찌 끝내 봄볕이 없겠는가 大冬豈竟不春暄그대에게 감개하여 끝없이 눈물을 흘리지만 之君感慨無窮淚변하여 다른 해에는 경하하는 술잔이 되리라 化作他年慶賀樽 雪裏梅梢獨守魂, 何知蝶舞與蜂喧?自開自落雖無賴, 不換明春九十痕.紛紛覆雨復飜雲, 爭醉腥塵認馥芬.持我衣冠何處去? 兪盧千載好爲隣.熊魚正訓誦冠紳, 處變而今可飾巾?一脈《春秋》千石重, 豈容放過棄吾身?歷數前人幾豪聖, 幷將ㅁ福等鴻毛.要看得喪乘除理, 究竟誰爲太上高?休道天爲賦《北門》, 大冬豈竟不春暄?之君感慨無窮淚, 化作他年慶賀樽. 어지럽게……되어 세상의 인정(人情)이 변하기 쉬움을 비유한 말이다. 두보(杜甫)의 〈빈교행(貧交行)〉에 "손 뒤집으면 구름이요 손 엎으면 비가 되니, 분분하고 경박함을 어찌 헤아릴 것 있으랴.[翻手作雲覆手雨, 紛紛輕薄何須數.]"라는 말이 나온다. 유로(兪盧) 노(盧) 땅 사람인 편작(扁鵲)과 유부(兪跗)로서 모두 옛날의 명의(名醫)이다. 웅어(熊魚) 웅(熊)은 곰 발바닥 요리를 가리키고, 어(魚)는 물고기 요리를 가리키는데 의리와 이욕을 비유하는 말로 쓰인다. 《맹자》 〈고자 상(告子上)〉에 "어물도 내가 원하는 바요 곰 발바닥도 내가 원하는 바이지만 이 두 가지를 겸하여 얻을 수 없을진댄 어물을 버리고 곰 발바닥을 취하겠다. 삶도 내가 원하는 바요 의(義)도 내가 원하는 바이지만 이 두 가지를 겸하여 얻을 수 없을진댄 삶을 버리고 의를 취하겠다.[魚我所欲也, 熊掌亦我所欲也, 二者不可得兼, 舍魚而取熊掌者也. 生亦我所欲也, 義亦我所欲也, 二者不可得兼, 舍生而取義者也.]"라는 말이 나온다. 복건(服巾)을……있는가 원문의 '식건(飾巾)'은 복건으로 머리장식을 하고 관면(冠冕)을 쓰지 않는 것으로, 대개 벼슬을 그만둔다는 뜻으로 쓰인다. 《後漢書 趙咨傳 注》 북문(北門) 《시경》의 편명으로, 어지러운 조정에서 벼슬하는 현인의 체념하는 심정을 읊은 시이다. 그 시에 "북문으로부터 나가며, 마음에 근심하기를 많이 하였노라. 끝내 어렵고 또 가난하거늘, 나의 어려움을 알아주는 이 없구나. 어쩔 수 없구나, 하늘이 실로 이렇게 만드셨으니, 말한들 무엇하랴.[出自北門, 憂心殷殷. 終窶且貧, 莫知我艱. 已焉哉, 天實爲之, 謂之何哉.]"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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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이앙 제태 에게 증정하다 奉贈崔而仰【濟泰】 경인년(1890, 고종27) 1월 8일에 내가 영남에 갔다. 상원일(上元日)에 산음(山陰)에 도착하고 다음 날 강성(江城)에 당도하여 신안강(新安江) 기슭으로 계남옹(溪南翁)73)을 찾아뵈었다. 안부 인사가 끝나자 옹의 조카인 이앙(而仰)이 말하기를, "지난밤에 계방(季方 정의림(鄭義林)의 자(字))과 노니는 꿈을 꾸었습니다. 꿈에서 깬 뒤 혼자 말하기를, '나는 계방과 평소에 일면식도 없건만 갑자기 꿈에 나타났으니 무엇 때문일까? 일찍이 계방이 영남에 오려고 한다는 말을 들었는데 가까운 시일 안에 만나려는 것인가?'라고 하였습니다. 우두커니 기다리면서 한참을 있었더니 과연 그렇게 되었습니다."라고 하였다. 인하여 적어 놓은 꿈 내용을 꺼내 보여주었는데 바로 7일이었다.아, 나와 이앙은 과연 일면식도 없지만 서로 편지를 주고받은 것은 자못 오래되었다. 동서로 500리를 벗어난 아득히 먼 곳에서 앞서지도 않고 뒤서지도 않게 서로 감응하는 것이 북채와 북, 그림자나 메아리와 같을 줄 누가 알았는가. 천지 간에 의기가 서로 감응하여 걷지 않아도 이르게 되고 빨리하지 않아도 빠른 것74)이 진실로 이와 같았다. 예전에 호상(湖上)에서 선사(先師)를 모실 때 나와 애산(艾山)75)이 두 차례나 기약도 없이 서로 만나자 선사(先師)께서 이르기를, "기이한 일이다. 어찌 기록으로 남기지 않겠는가."라고 하셨다. 만약 선사께서 살아 계신다면 또한 어찌 기이한 일이라고 하지 않으시겠는가.이에 대략 전말(顚末)을 적어 이앙에게 준다. 이앙은 언제나 나를 일깨우고 분발시켜 지극히 어리석고 근기(根氣)가 낮은 이 사람이 동성상응(同聲相應)76)하고 함께 돌아가는 결과에 부끄럽지 않도록 해주기를 바란다. 歲庚寅元月八日。余作嶺行。上元日到山陰翌日到江城。訪溪南翁於新安江上。寒暄畢翁從子而仰言曰。疇昔之夜。夢與季方遊。旣覺自語吾與季方。未有一面之雅。而遽爾入夢何也。聞季方嘗有意嶺行。其將從近見遇耶。佇俟久之。果爾果爾。因出所記夢蹟示之。乃七日也。嗚呼。吾與而仰。果無一面。而其有書路往復。則頗久矣。誰知東西遙遙半千里之外。不先不後。相應相感。如桴鼓影響哉。天地間氣類之感。有不行而至。不疾而速者固如此。昔年侍先師於湖上也。吾與艾山。有再次不期之遇。先師曰奇事也。盍記諸。若使先師而在焉。則亦豈不曰奇事也。玆以略述顚末。以呈而仰。願而仰爲之終始警策。使此至愚下根。無愧爲同聲同歸之歸也。 계남옹(溪南翁) 남옹은 최숙민(崔琡民, 1837~1905)의 호이다. 자는 원칙(元則), 본관은 전주(全州)이다. 경상남도 하동군 옥종면 두양리에서 살았다. 노사(蘆沙) 기정진(奇正鎭, 1798~1876)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저서로는 《계남집》이 있다. 걷지……빠른 것 《주역》 계사전 상(繫辭傳上)에 "신묘하기 때문에 빨리 하지 않아도 신속하고, 행하지 않아도 이른다."라는 말이 있다. 애산(艾山) 정재규(鄭載圭, 1843~1911)를 말한다. 자는 영오(英五) 또는 후윤(厚允), 호는 노백헌(老柏軒)ㆍ애산(艾山), 본관은 초계(草溪)이다. 기정진(奇正鎭, 1798~1879)의 문인이다. 동성상응(同聲相應) 동류(同類)끼리 서로 기맥이 통하여 자연히 의기투합하는 것을 비유한 말이다. 《주역》 〈건괘(乾卦) 문언(文言)〉에 "같은 소리끼리는 서로 응하고, 같은 기운끼리는 서로 찾게 마련이니,……이는 각자 자기와 비슷한 것끼리 어울리기 때문이다."라는 말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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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석이 연강 아우와 많은 수창시를 남겼다는 얘기를 듣고 뒤늦게 차운하여 만나는 날을 기다려 보여주다 4수 聞可石與蓮岡舍弟多有唱酬 追步其韻 待相見日示之【四首】 가석과 연강의 교분은 금을 끊을 만하니120) 石蓮交契斷堅金평소에 일편단심을 서로 비추는 듯하네 照得平生一片心근래에 연달아 시문을 주고받았던 때에 邇來唱和連篇日다 기울인 속마음이 몇 굽이나 깊어졌나 傾盡眞情幾曲深가석의 시 짓는 솜씨는 단련한 쇠보다 낫고 可石詩工勝鍊金소릉의 시 짓는 습성은 검남의 마음이로세121) 少陵性癖劒南心시속과 시국에 상심한 말을 시험 삼아 보니 試看病俗傷時語다시 〈풍천〉의 시122)로 얕고 깊음을 따졌다네 更把風泉較淺深침상 곁에 돈 다 없어졌다 한탄하지 말게 莫恨床頭見盡金장부의 생색은 마음 변치 않는 데 있다네 丈夫生色不渝心원컨대 연강 아래에서 호연지기를 길러서 願成浩氣蓮岡下하늘처럼 높고 땅처럼 깊이 가득 차기를 亘塞天高與地深세상에 변치 않는 삶이 일금의 가치인데 世不滄生直一金홀로 세한의 마음을 보존한 줄 누가 알까 誰知獨保歲寒心자운123)을 천 년이나 기다릴 필요가 없으니 子雲未必俟千載난실124)과 체원125)에서 정다운 이야기 깊어지네 蘭室棣園情話深 石、蓮交契斷堅金, 照得平生一片心.邇來唱和連篇日, 傾盡眞情幾曲深?可石詩工勝鍊金, 少陵性癖劒南心.試看病俗傷時語, 更把《風泉》較淺深.莫恨床頭見盡金, 丈夫生色不渝心.願成浩氣蓮岡下, 亘塞天高與地深.世不滄生直一金, 誰知獨保歲寒心?子雲未必俟千載, 蘭室、棣園情話深. 금(金)을 끊을 만하니 돈후한 우정을 나누어 왔다는 말이다. 《주역(周易)》 계사전(繫辭傳) 상(上)에 "두 사람의 마음이 같으면 그 날카로움이 금을 끊는다.〔二人同心, 其利斷金.〕"라고 하였다. 소릉(少陵)의……마음이로세 가석(可石)과 연강(蓮岡) 두 사람이 시 짓기를 좋아하여 서로 주고받은 시(詩)가 매우 많음을 말한 것이다. 소릉은 두보(杜甫)의 호이고, 검남은 남송(南宋)의 시인 육유(陸游, 1125~1210)의 별칭이다. 두보(杜甫)의 시 〈강상치수여해세요단술(江上値水如海勢聊短述)〉에 "나의 성벽이 좋은 시구를 매우 좋아하여, 시어가 사람을 놀라게 하지 않으면 죽어도 그만두지 않는다오.〔爲人性癖耽佳句, 語不驚人死不休.〕"라고 하였다. 《全唐詩 卷226 江上値水如海勢聊短述》 풍천(風泉)의 시 《시경(詩經)》 〈비풍(匪風)〉과 〈하천(下泉)〉을 지칭하는 말이다. 이 시는 모두 주(周)나라 왕실(王室)이 쇠망한 것을 현인(賢人)이 개탄하면서 옛날의 주나라 왕실을 생각하는 내용이다. 자운(子雲) 한(漢)나라 양웅(揚雄)의 자이다. 보통 당대(當代)에는 알아줄 사람이 없어서 후세에 제대로 평가해 줄 만한 식견이 높은 사람을 기다린다고 할 때 요부(堯夫), 즉 송나라 소옹(邵雍)과 함께 거론되는 인물이다. 난실(蘭室) 지란지실(芝蘭之室)의 준말로, 지초와 난초가 있는 방이라는 뜻이다. 《공자가어(孔子家語)》에 "선(善)한 사람과 함께 지내면 마치 지란의 방에 들어간 것과 같아 그 향기는 못 맡더라도 오래 지나면 동화된다."라는 말이 나온다 체원(棣園) 후창(後滄)과 연강(蓮岡) 형제를 가리키는 것으로, 혹독한 상황에서도 변치 않는 절의를 말한다. 《논어》 〈자한(子罕)〉에 "날씨가 추워진 뒤에야 소나무와 잣나무가 늦게 시드는 것을 알 수 있다.〔歲寒然後知松柏之後彫也〕"라는 말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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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한숙【윤채】에게 보냄 與金漢淑【潤采】 험한 길을 꺼리지 않고 멀리 천태산(天台山)으로 들어와 새로운 거처와 새해를 맞는 상황을 물어주셨으니, 이것은 일상적인 마음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습니다. 다만 동오경(董五經)처럼 일어날 일을 미리 아는 능력이 없어 잠시 바깥세상으로 나가는 바람에58) 결국 서로 어긋났습니다. 곧장 차비를 갖추고 가서 사례를 표하는 의례를 행하고 싶었지만 방도가 없었습니다. 아버지의 상중에 어머니가 돌아가신 경우를 물으셨습니다. 고인(古人)은 오히려 아버지가 생존한 상황으로 보아59) 기년복을 하였습니다. 하물며 아버지가 살아계신 상황에서 어머니가 돌아가신 지 이미 오래된 경우야 말할 나위가 있겠습니까. 무릇 상복은 처음 제정한 것으로 결정을 하니60) 기년복을 하는 것에 무슨 의문이 있겠습니까. 신주를 적고 축사를 하는 것에 대해서 말하자면 살아 계신 것으로 대해야 한다는 것만 알고 완전히 살아 계신 것으로 대해서는 안 됩니다.61) 혜량(惠諒)하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不憚崎懾遠入天台山中。爲問新寓新年之狀。此意已非常調可辦。但無董五經前知薄言出外。竟致相違卽欲理屐。以修回謝之禮。而末由也已。問父喪中母死者。古人猶以父在服朞。況父在時母死已久乎。凡服以始制爲斷。服朞何疑也。至於題主及祝辭。則不可專以知生而玖生之也。諒之如何。 동오경(董五經)처럼……바람에 동오경과 정이(程頤)의 고사를 가리킨다. 관련 내용은 다음과 같다. "또 숭산 앞에 동오경이란 사람이 있는데, 은자이다. 이천이 그의 명성을 듣고 경전을 궁구한 선비일 것이라 생각하여 특별히 찾아갔다. 동오경은 평소 암자를 나간 적이 없었는데, 이날은 만나지 못하였다. 돌아오는 길에 차와 과일을 지고 돌아오는 한 노인을 만났는데, 그 사람이 '그대는 정 선생이 아닙니까?'라고 하자, 이천이 특이하게 여겼다. 그 사람이 '선생이 오시려고 한다는 소식이 매우 크기에 제가 특별히 성안으로 들어가 조금의 차와 과일을 마련하여 장차 선생을 대접하려고 하였습니다.'라고 하였다. 이천은 그의 정성스러운 마음 때문에 다시 함께 그 집에 이르러 매우 정답게 이야기를 나누었으나 또한 남보다 크게 뛰어난 점이 없었고, 다만 오래도록 사물과 접하지 않아 마음이 고요하고 밝았다.【又嵩山前有董五經, 隱者也. 伊川聞其名, 謂其爲窮經之士, 特往造焉. 董平日未嘗出庵, 是日不値, 還至中途, 遇一老人負茶果以歸, 且曰君非程先生乎? 伊川異之. 曰先生欲來, 信息甚大, 某特入城置少茶果, 將以奉待也. 伊川以其誠意, 復與之同至其舍, 語甚款, 亦無大過人者. 但久不與物接, 心靜而明也.】" 《二程外書 卷12》 아버지가……보아 아버지가 사망하여 상중이기는 하지만 삼년상이 끝나기 전에는 여전히 살아계신 것으로 간주한다는 것이다. 상복은……하니 상복은 처음 결정한 것을 도중에 상황이 변하더라도 바꾸지 않고 입는다는 뜻이다. 예컨대, 아버지의 생존 중에 어머니가 돌아가시면 자식들은 성복(成服)일에 '부재위모기(父在爲母期 아버지 생존 중에 어머니가 사망하면 기년을 한다)'의 규정에 따라 자최장기복(齊衰杖期服)을 입는다. 성복을 하고 어머니 상을 치루는 도중에 아버지가 돌아가시는 상황이 발생하더라도 '부졸위모자최삼년(父卒爲母齊衰三年 아버지가 돌아가신 상황에서 어머니가 사망하면 자최삼년을 한다)'의 규정을 다시 적용하여 자최삼년복(齊衰三年服)으로 바꾸지 않는다. 신주를……됩니다 아버지가 살아계신 것으로 간주하면 어머니상의 상주는 남편인 아버지가 되므로 신주나 축사에 '망실(亡室)'이라고 써야 한다. 그러나 아버지가 돌아가신 것으로 간주하면 상주는 맏아들이 되어 '현비(顯妣)'라고 써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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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탄 처사 구공 묘지명 春灘處士具公墓誌銘 종족은 효성스럽다고 하고, 향당에서는 어른을 공경한다고 일컬어 한 고장의 선한 선비가 되는 데 어긋나지 않는 자가 가까이 우리 고을에 있으니, 춘탄(春灘) 구공(具公)과 같은 이가 그 사람이다.공의 휘는 철수(澈洙), 자는 성서(聖瑞)이다. 집이 가난하여 어버이를 봉양함에 부지런히 고기 잡고 나무하여 몸에 편안하고 입에 맞는 것은 모두 다 마련하여 올렸다. 평소에는 그 공경을 지극히 하고, 병환이 들었을 땐 근심을 지극히 하며, 상을 당했을 땐 슬픔을 지극히 하고, 제사에는 엄숙함을 지극히 하였으니, 살아서나 죽어서나 처음부터 끝까지 유감이 있지 않았다. 형제 두 사람은 화목하고 우애가 있어 한 자의 베와 한 말의 곡식을 깁고 찧는 것도 모두 함께하였다. 친족과 붕우에게는 온화함으로 대하고 신의로 사귀었으며, 곤궁한 사람을 도와주는 것은 늘 미치지 못하는 듯이 하였다. 해마다 좋은 때에 초대하여 마음껏 즐기면서 수일 동안 흥겹게 지냈다. 평상시에 겸손하고 공손함으로 자신을 단속하고 부지런하고 검소함으로 집안을 다스렸으며, 경전을 연구하여 손에서 책을 놓지 않았다. 이는 모두 가장(家狀)에 실린 대략이다. 아, 부침(浮沈)하는 것은 명(命)이고, 가고 머무름에는 때가 있다. 현재의 위치에 따라 행하였으니, 그 행실은 부침과 가고 머무르는 것을 벗어난 데 있었다. 여기에서 공이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있다.구씨(具氏)의 관향은 능성(綾城)이니, 평장사 민첨(民瞻)이 그 상대(上代)의 선조이다. 고조 준익(俊翼)은 참봉을 지냈고, 증조 용주(龍珠)는 이조 참의를 지냈고, 호는 오헌(梧軒)이다. 조부 담(壜)은 가선대부이다. 부친 상년(相年)은 공조 참의를 지냈다. 부인은 김해 김씨(金海金氏)로, 통정대부 김상희(金尙喜)의 따님이다. 공참공(工參公)은 종조부 승지 상묵(相黙)의 아들을 후사로 삼았는데, 이 분이 바로 춘탄(春灘)이다. 본생비(本生妣)는 전주 이씨(全州李氏)로, 판관 이동좌(李東佐)의 따님이다. 공은 순조(純祖) 무진년(1808, 순조8)에 태어났고, 철종(哲宗) 정사년(1857, 철종8) 12월 13일에 졸하였다. 마을 동쪽 간좌(艮坐)에 장사 지냈다. 송사(松沙) 기공 우만(奇公宇萬)이 그 묘갈명을 지었다. 배위(配位)는 연일 정씨(延日鄭氏)로, 현감 정재린(鄭在麟)의 따님인데, 부덕(婦德)이 있었다. 2남 1녀를 낳았으니, 장자는 희모(希謨)이고, 차자는 경모(慶謨)이다. 딸은 안명록(安命祿)에게 출가하였다. 차자는 2남 1녀를 낳았는데, 아들은 교륜(敎倫), 교신(敎信)이고, 딸은 이은환(李殷煥)에게 출가하였다. 교륜은 장방(長房)의 양자로 갔다. 다음과 같이 명을 짓는다.선을 쌓고 積累其善광채는 감추었네. 潛晦其光후손이 번성하니 螽斯椒聊남은 경사 영원하리라. 餘慶長長 宗族稱孝焉。鄕黨稱悌焉。而不失爲一鄕之善士者。近在吾鄕。若春灘具公。其人也。公諱澈洙。字聖瑞。家貧養親。服勤漁樵。便身適口。無不畢給。以至居致其敬。病致其憂。喪致其哀。祭致其嚴。生死始終。無有憾焉。兄弟二人。雍容湛樂。尺斗縫眷。與之共焉。以至族戚朋友。接之以和。交之以信。賙窮恤匱。常若不及。每歲良辰。招邀酣歡。以爲數日之暢。平居以謙恭持身。以勤儉御家。硏覽境典。手不釋卷。此皆狀辭大略也。嗚呼。陞沈命也。流坎時也。素其位而行。其行在於陞沈流坎之外。此可見公之爲公矣。具氏貫綾城。平章事諱民瞻。其上祖也。高祖俊翼參奉。曾祖龍珠吏參。號梧軒。祖壜嘉善。考相年。工參夫人金海金氏通政尙喜女。工參公取同祖承旨相黙子爲後。卽春灘也。本生妣全州李氏判官東佐女。公以純祖戊辰生。哲宗丁巳十二月十三日卒。葬里東艮坐。松沙奇公宇萬撰其碣銘。配延日鄭氏縣監在麟女。有婦德。擧二男一女。長希謨次慶謨。女適安命祿。二房生二男一女。敎倫敎信。李殷煥。敎倫系長房。銘曰。積累其善。潛晦其光。螽斯椒聊。餘慶長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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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심재 전씨 어른과 수창하다 2수 酬鍊心田丈【二首】 연심 어른은 걸출한 기상이 많아 鍊翁多傑氣작은 재목과 서까래가 아니라네 不是細材椽진실함을 믿어 겉치레55)가 없었으나 任悃無邊幅곤궁함56)을 지키느라 늘 위태로웠지 固窮一沛顚온화한 용모는 따스한 햇볕과 같고 和容如暖日웅장한 변론은 쏟아지는 폭포 같았네 雄辯若懸泉의리를 더욱 정밀히 할 뿐이지만 但得加精義단약이 완성되면 바로 신선이라네 丹成卽是仙한평생 처세에 부정함을 따르지 않았고 處世生平不詭隨연옹은 가슴속에 좋은 포부만 지녔지 鍊翁惟有好衿期그리우면 찾아가니 약속한 적이 없었고 相思卽訪曾無約잠시 헤어져도 회포는 다시 끝이 없었네 暫別餘懷更罔涯시편은 두보57)와 육유58)를 공부한 게 아니요 非是詩篇工杜陸첩부가 공손연59)과 장의60)를 배우는 걸 비웃었네 笑他妾婦學衍儀정토사의 맑은 모임 어겼다 탄식하지 마오 莫歎淨寺違淸會이 날이 더디 가서 노닐 수 있으니 正可逍遙此日遲 鍊翁多傑氣, 不是細村椽.任悃無邊幅, 固窮一沛顚.和容如暖日, 雄辯若懸泉.但得加精義, 丹成卽是仙.處世生平不詭隨, 鍊翁惟有好衿期.相思卽訪曾無約, 暫別餘懷更罔涯.非是詩篇工杜、陸, 笑他妾婦學衍、儀.莫歎淨寺違淸會, 正可逍遙此日遲. 겉치레 본문의 '변폭(邊幅)'은 겉으로 꾸미는 것을 말한다. 공손(公孫)이 쫓아가서 국사(國士)를 영접하지 않고 도리어 변폭을 수식하여 우형(偶形)같이 앉았다 하였고, 그 주석에 포백(布帛)의 변폭을 다듬은 것과 같다 하였다. 《後漢書 馬援傳》 곤궁함 원문의 '곤궁(困窮)'은 곤궁한 처지에서도 분수를 지키며 편안한 마음을 갖는 것을 말한다. 《논어》 〈위령공(衛靈公)〉에 "군자는 아무리 빈궁해도 이를 편안히 여기면서 도의를 고수하지만, 소인은 빈궁하면 제멋대로 굴게 마련이다.[君子固窮, 小人窮斯濫矣.]" 하였다. 두보(杜甫) 당(唐)나라 정치가이자 시인이다. 자는 자미(子美), 호는 소릉(少陵)이다. 이백(李白)과 함께 시로 명성을 나란히 하여 시성(詩聖)으로 일컬어졌다. 저서로는 《두소릉집(杜少陵集)》이 있다. 육유(陸游) 1125~1210. 남송(南宋)의 대표적인 시인으로, 자는 무관(務觀), 호는 방옹(放翁)이다. 강경한 북벌론자였으므로 조정의 기조가 화의와 북벌을 반복할 때마다 관직에서의 부침이 심했다. 지방관과 말직을 전전하는 등 불우한 일생을 보냈으며, 일생 동안 1만 수(首)에 달하는 방대한 양의 시를 남겼다. 특히 금(金)나라의 금(金)나라에 대한 항전(抗戰)을 통한 실지(失地)의 회복을 바라는 애국적인 시를 쓴 것으로 유명하다. 그의 시는 처음에는 강서시파(江西詩派)의 영향으로 기교를 추구하였으나, 중년 이후 호방함으로 변했고, 만년에는 전원생활에 귀의해서 담담하고 고요한 시풍을 열었다. 양만리(楊萬里)ㆍ범성대(范成大)ㆍ우무(尤袤)와 더불어 남송사대가(南宋四大家)로 불린다. 저서에 《검남시고(劒南詩稿)》 등이 있다. 공손연(公孫衍) 전국 시대 위(魏)나라 사람으로 서수(犀首)의 벼슬을 지냈기에 서수로 불렸다. 진(秦)나라를 위하여 제(齊)나라와 위(魏)나라에 유세(遊說)하여 소진(蘇秦)의 종약(縱約)을 깨뜨렸다. 장의(張儀)와 잘 지내지 못하여 진나라를 떠났다가 장의가 죽자 돌아왔는데 진나라에서 이를 재상으로 삼고자 하였으나 감무(甘茂)가 이간하여 다시 위나라로 갔다. 장의(張儀) 전국 시대 위(魏) 나라 사람으로 6국이 각각 강한 진(秦)나라를 섬기게 하는 연횡책(連橫策)을 주장하였다. 이것은 6국이 힘을 합쳐 진나라에 대항하는 소진(蘇秦)의 합종책(合從策)과 반대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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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재 선생 문공 행장 思齋先生文公行狀 사재(思齋) 선생 문공(文公)의 휘는 빈(彬), 자는 군보(君甫)이며, 남평(南平) 사람이다. 무성공(武成公) 휘 다성(多省)이 그의 시조이다. 휘 익점(益漸)에 이르러 강성군(江城君)에 봉해졌는데 세상 사람들이 삼우당(三憂堂) 선생이라고 불렀다. 고조의 휘는 화(和), 호는 만은(晩隱)이며, 목은(牧隱) 이 선생(李先生)에게 수학하였고, 도승지(都承旨)를 지냈으며, 시호는 경혜(景惠)이다. 증조의 휘는 염(琰)이고, 정읍 현감(井邑縣監)을 지냈다. 조부의 휘는 상행(尙行), 시호는 경숙(敬肅)이다. 선고(先考)의 휘는 옹(雍), 호는 도암(道庵)이며, 좌찬성(左贊成)을 지냈으며, 시호는 충순(忠純)이다. 선비(先妣)는 하동 정씨(河東鄭氏) 인걸(仁傑)의 따님이다. 정통(正統) 신유년(1441, 세종23)에 능주(綾州) 월곡리(月谷里)에서 공을 낳았다. 공은 일찍 집안의 가르침을 받아 평소 가풍에 무젖었다. 조금 성장하여서는 어진 이를 섬기고 인한 사람을 벗하여 학문에 조예가 있어 펼치고 넓혀서 문망(聞望)과 명성이 원근에 회자되었다. 단종조(端宗朝)에 맹산 현감(孟山縣監)에 특별히 제수되었는데 사무를 본 지 한 해가 지나자 치적이 크게 드러났다. 세조(世祖) 초기에 관직에서 물러나 고향으로 돌아가 수석(水石)을 읊조리며 자기 뜻대로 자유로이 살았다. 새로 서재를 짓고 학규를 만들어 생도들을 권장하고 자손을 가르치는 것을 만년의 계책으로 삼았다. 배위(配位)는 밀양 박씨(密陽朴氏) 기웅(起雄)의 따님이다. 3남을 두었는데 구연(九淵), 구택(九澤), 구심(九潯)이다. 장방(長旁)은 2남을 두었는데, 우주(遇周)는 장사랑(將仕郞)을 지냈고, 복주(復周)는 부사(府使)를 지냈다. 이방(二旁)은 4남을 두었는데, 억붕(億鵬), 억도(億道), 억수(億壽), 억명(億明)이다. 공의 묘소는 아무 산 아무 좌(坐)의 언덕에 있다.아, 이렇게 후한 덕이 있고 인망이 매우 두터웠는데도 불구하고 이 세상에 쓰이지 못하고 바다 모퉁이에서 은거하며 애오라지 생을 마감하였으니, 식자들의 실망스러움이 어떠하겠는가. 그러나 유풍과 여운이 집안에 전하고 사람들에게 전파되어 사당을 건립하고 제단을 설치하여 영원토록 제향을 폐하지 않을 것이니, 이른바 단점을 버리고 장점을 취한다는 것이 이를 이르는 것이 아니겠는가. 16세손 경식(敬植)이 가장(家狀)을 받들어 서문을 써 줄 것을 부탁하였다. 나는 합당한 사람이 아니어서 참으로 감히 승낙할 수 없지만 어진 이를 사모하고 덕이 있는 이를 좋아하는 것은 본성에서 나오고, 게다가 경식은 평소 종유한 친분이 있기에 그 뜻을 또 저버릴 수 없어 삼가 가장에 근거하여 이상과 같이 대략적으로 기술한다. 思齋先生文公諱彬字君甫。南平人。武成公諱多省。其始祖。至諱益漸封江城君。世稱三憂堂先生。高祖諱和。號晩隱。受學于牧隱李先生。官都承旨。諡景惠。曾祖諱琰。井邑縣監。祖諱尙行。諡敬肅。考諱雍。號道庵。官左贊成。諡忠純。妣河東鄭氏仁傑女。正統辛酉。生公于綾州月谷里。早襲庭訓。擩染有素稍長。事賢友仁。學問造詣。奮張展拓。而聞望聲華。膾炙遠邇。端宗朝。特除孟山縣監。視事踰年。治蹟大著。世祖初解官歸鄕。粧點水石以自寄敖。開講室立學規。以獎進生徒。訓迪子孫。爲晩年計。配密陽朴氏起雄女。三男。九淵九澤九潯。長旁二男。遇周將仕郞。復周府使。二旁四男。億鵬億道億壽億明。公墓在某山某坐原。嗚乎。以若厚德重望。未有試於斯世。而潛光海曲聊以卒歲。其爲識者之缺望何如也。然遺風餘韻。傳之在家。播之在人。建祠設壇。百世不替。所謂屈短伸長。非此之謂耶。十六世孫敬植。奉家狀。託以不朽之文。余以非其人。固不敢承膺。而慕賢好德。出於秉彛。而且敬植有平昔游從之分。其意又不可孤。謹據狀而纂述梗槪如右云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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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순견10)【국정】에게 답함 答安舜見【國禎】 며칠 전 귀성(貴星 상대방의 심부름꾼)이 왔을 때 바쁘다 보니 답장을 보내지 못하였습니다. 요사이 날이 맑고 따뜻한데 상중(喪中)의 체후는 편안하시며, 일마다 성찰하고 이르는 곳마다 스스로 살피고 궁구하는 일로 눈앞에 닥친 응수(酬應)와 일상의 공부가 서로 배치되는 일은 없으십니까. 학자(學者)의 병통은 바로 이치와 일을 각각 둘로 구분하는 데 있으니, 이것은 자신을 채찍질하여 자신과 아주 가깝게 할 수 없는 병통입니다. 정자(程子)가 말하기를, "존심양성(存心養性)을 하지 못한다면 단지 말일 뿐이다."11)라고 하였으니, 이 말을 깊이 유념해야 합니다. 아우는 평소 남보다 모자란 자질에 꾸물대다가 때를 놓치는 일이 더해져 나이는 많아지고 기력은 쇠퇴한 채 온갖 일에 바빴습니다. 시인(詩人)이 말한 "내가 이럴 줄 알았더라면 차라리 태어나지 말 것을."12)라는 것이 시로 내 마음을 먼저 포착한 말입니다. 강생(姜生)의 문목(問目)에서 주해(註解) 운운한 조목의 말은 주서(朱書)에 보이는지요? 아우는 참으로 전날의 제 주장에 미진한 부분이 있다는 것을 알고 곧 "참되고 고요하다는 것은 이(理)의 측면에서 말한 것이고 미발(未發)은 심(心)의 측면에서 말한 것이다."라고 다시 바로잡았습니다. 지금 형의 말씀을 보니 더욱 의혹이 사라져 크게 감사하고 다행스러운 마음입니다. 혼백 운운한 것에 대해 말씀드리자면, 음양(陰陽)은 서로 그 속에 내재하여 본래 칼로 자르듯 음이 되고 양이 되는 이치가 없습니다. 혼(魂)은 양의 영(靈)이고 백(魄)은 음의 영이며, 혼은 발용(發用)을 위주로 하고 백은 수장(收藏)을 위주로 합니다. 이것은 큰 구분입니다. 그러나 수장처(收藏處)에 발용함이 있고 발용처에 수장함이 있습니다. 이것이 서로 내재하는 것입니다. 입이 맛을 알고 코가 냄새를 아는 것은 본래 백(魄)이지만 혼(魂)도 그 안에 있습니다. 이것은 마치 거울의 바탕이 본래 밝고 물의 표면이 본래 맑은 것은 백이지만 광채가 밝게 드러나고 사물을 만나면 반드시 비추는 것은 혼인 것과 같습니다. 어찌 칼로 자른 듯이 혼이 되고 백이 되는 이치가 있겠습니까. 다시 세세히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日者貴星之來。緣忙稽謝。卽日晴暄。孝候支迪。隨事省察。隨處體究。有以見眼前酬應與日用工夫。不相背馳否。學者之病。正在於理事各成兩截處。此是不能鞭辟切近之病。程子曰。若不能存養。只是說詁。此言當深念也。弟素以不逮之質。加以因循失時。年力衰替。百故鞅掌。詩人所謂知我如此。不如無生。實是先獲我心者也。姜生問目一條語註解云云見於朱書耶弟固知前日鄙說之有未盡處。旋復改之曰。眞而靜是理上說。未發是心上說。今見俯示。尢覺釋然。其感幸大矣。魂魄云云。夫陰陽互藏其宅。本無截然爲陰爲陽之理。魂者陽之靈。魄者陰之靈。魂主發用。魄主收藏此則大分也。然收藏處有發用。發用處有收藏。此則互藏也。口之知味。鼻之知臭。固魄也。而魂亦在其中。如鑑之地本明。水之面本淸者。魄也。而其光彩著見。遇物必照者。是魂也。豈有截然爲魂爲魄之理也。更望細思。 안순견 순견(舜見)은 안국정(安國禎, 1854∼1898)의 자이다. 본관은 죽산(竹山), 호는 송하(松下)이다. 기우만(奇宇萬)의 《송사집(松沙集)》 권38에 〈송하거사안공묘갈명(松下居士安公墓碣銘)〉이 실려 있다. 만약……뿐이다 정호(程顥)의 말로, 《이정유서(二程遺書)》 권1에 보이며, 《근사록(近思錄)》 권4 〈존양(存養)〉에도 채록되었다. 내가……것을 《시경(詩經)》 〈초지화(苕之華)〉에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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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자성에게 써 주다 書贈金子惺 주부자(朱夫子)가 말하기를, "학자에게는 인순(因循)111)이 가장 두려운 일이다."112)라고 하였다. 이것은 참으로 학자가 띠에 적어놓고 마음에 새겨 두어야 할 사항이다. 좋은 일이 지나가고 궂은일이 다가와도 여전히 뜻이 없는 자는 진실로 말할 가치가 없다. 간혹 뜻을 지녔지만 더불어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것은 모두 인순(因循)이 빌미가 되기 때문이다.아, 내가 약관(弱冠)이었던 시절에 향리의 노 선생들로부터 옛사람의 위기지학(爲己之學)에 대해 듣고 일찍이 조금이라도 스스로 힘을 다하여 노력하려는 뜻을 지니지 않았던 적이 없었다. 그러나 책을 읽었지만 거칠고 서툴며 번거로움을 싫어하여 경전(經典) 한 권을 제대로 기억하지 못하고 이치를 궁구하였지만 진지하게 힘을 쏟지 않아 한 가지도 쇄락(灑落)한 경지에 이르지 못하였다. 그리고 경(敬)을 위주로 하였지만 조장(助長)과 망각(忘却)113)이 서로 번갈아 일어나고 세상을 살아가는 몸가짐은 허물이 날로 쌓여갔다. 기대하며 기다리기도 하고 골몰했건만 모두 가버리기도 하여 어제 후회한 일은 오늘 고치기 어려웠고 지난해에 의심스럽던 사항은 올해에도 명백히 밝히지 못하였다. 이윽고 세월은 나를 기다려주지 않아 귀밑의 검은 머리는 이미 희끗희끗해졌다.아, 이것이 어찌 애초의 생각이었겠는가. 천지 간에 형체를 부여받아 사람이 되었건만 끝내 물고기나 금수(禽獸)로 돌아가고 말았으니 천 번을 후회해도 미치지 못하고 만 번을 후회한들 무슨 보탬이 되겠는가. "이럴 줄 알았다면 태어나지 않느니만 못하였다."114)라는 말을 되새길 때마다 저절로 삶이 애처로울 뿐이다.기축년(1889, 고종26) 겨울에 김군 자성(金君子惺)이 벽산 서사(碧山書舍)에서 나와 종유(從遊)하였는데 서로를 대한 지 두세 달이 지나자 나에게 일상생활을 하면서 항상 살펴야 하는 말 한마디를 청하였다. 이에 내가 이르기를, "배고프고 목마른 자에게 먹고 마실 것을 구하고 귀머거리나 장님에게 눈과 귀를 빌리는 이치가 있겠는가. 내 마음을 되돌아보면 그대를 성장하게 할 수 있는 약간의 지식도 없고 오직 일찍이 인순(因循)으로 스스로 잘못되었던 경험만 있을 뿐이다. 사양하지 못하여 이것으로 거울과 전철의 경계로 삼으니 괜찮겠는가?"라고 하였다. 朱夫子曰。學者最怕因循。此誠學者書紳而服膺處也。熙往穰來。悠悠無志者。固不足道。其或有志而同歸泯然者。此皆因循爲崇也。嗚呼。余在弱冠時。從鄕里諸老先生。聞知古人爲己之學。而未嘗無一分自效之意。讀書而鹵莽厭苦。未有一經記熟。窮理而含糊不力。未有一事脫落。主敬而助忘相禪。行己而愆尤日積。或期擬而等待。或汨沒而俱往。昨日所悔。今日難改。前年所疑今年未瑩。旣而靈曜纖阿。不我延待。而鬢畔黎黑。已屬星星矣。嗚呼。此豈初料哉。上穹下際。賦形爲人。而竟未免鱗介飛走之歸。千悔無及。萬悔何益。每誦知我如此不如無生之語。而自哀其生而已也。己丑冬。金君子惺從余於碧山書舍。相對兩三月。請余一言爲日用顧諟之方。余曰。求飮食於飢渴。借視聽於聾盲。有是理哉。回視胸中。無一如半解可以相長者。而惟有曾經已試底因循自誤的而已。旣不得辭。則以此爲鑑車之戒。可乎。 인순(因循) 낡은 인습을 버리지 못하고 따르는 것을 이른다. 학자에게는……일이다 《주자어류》 권113 〈훈문인(訓門人)〉에 보인다. 조장(助長)과 망각(忘却) 《맹자》 〈공손추 상(公孫丑上)〉에 "반드시 호연지기를 기르는 데 힘쓰되 효과를 미리 기대하지 말아서, 마음에 잊지도 말고 억지로 조장하지도 말아야 한다.[必有事焉而勿正 心勿忘 勿助長也]"라고 한 말에서 유래하였다. 이럴……못하였다 《시경》 소아(小雅) 〈소지화(苕之華)〉에 나오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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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감선사193)의 비석을 보고 觀眞鑑禪師碑 유학엔 큰 근본과 공인된 도리가 있고 儒有大本與達道허무적멸194)은 불가에서 중히 여기네 虛無寂滅佛所寶동정과 체용은 본래 절로 다른데 動靜體用本自殊뒤섞여 분별이 없어 이미 분명하지 않네 混而無分已糊塗공자는 열고 석가는 다함195)이란 무슨 말인가 孔發釋窮是何言유학 끌어와 불교로 들어갔다 불교를 도리어 높였네 援儒入佛佛反尊고운이 어찌 유학자의 아들이 아니겠는가마는 孤雲豈非儒家子명성과 실상이 서로 같지 않음이 아니겠는가 無乃名實不相似퇴계196) 이후로 연재197)와 간재198)에 이르렀으니 退溪以後逮淵艮진실로 유래가 있는 천추의 의론이라네 良由以來千秋論 儒有大本與達道, 虛無寂滅佛所寶.動靜體用本自殊, 混而無分已糊塗.孔發釋窮是何言? 援儒入佛佛反尊.孤雲豈非儒家子? 無乃名實不相似?退溪以後逮淵、艮, 良由以來千秋論. 진감선사(眞鑑禪師)의 비(碑) 국보 제47호 하동 쌍계사에 있는 통일신라 후기의 유명한 승려인 진감선사의 탑비이다. 진감선사는 불교 음악인 범패를 도입하여 널리 대중화시킨 인물로, 애장왕 5년(804)에 당나라에 유학하여 숭려가 되었으며, 흥덕왕 5년(830)에 귀국하여 높은 도덕과 법력으로 당시 왕들의 부름을 받다가 77세의 나이로 쌍계사에서 입적하였다. 허무적멸(虛無寂滅) 허무는 도(道)의 본체는 허무하다는 노자(老子)의 사상이고, 적멸은 생사를 초월한 열반(涅槃)의 세계로 불교의 사상이다. 공자가……다함 《고운집》 권2 〈진감 화상 비명(眞鑑和尙碑銘)〉에 "심약의 말 중에 '공자는 단초를 열었고 석가는 극치를 다했다.'라는 말이 있다. 그는 대체(大體)를 안 자라고 이를 만하니, 이 정도는 되어야 비로소 지극한 도에 대해서 더불어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불교가 심법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으로 말하면 현묘하고 현묘해서 어떤 이름으로도 이름 지을 수가 없고 어떤 설명으로도 설명할 수가 없다. 비록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의 뜻이나 앉아서 잊는 경지를 체득했다고 할지라도, 끝내는 바람이나 그림자를 붙잡아 매기기 어려운 것처럼 표현하기 어렵다고 해야 할 것이다.〔沈約有云, 孔發其端, 釋窮其致. 眞可謂識其大者, 始可與言至道矣. 至若佛語心法, 玄之又玄, 名不可名, 說無可說. 雖云得月指或坐忘, 終類係風影難行捕.〕"라는 말이 나온다. 퇴계(退溪) 이황(李滉, 1501~1570)의 호이다. 본관은 진성(眞城), 자는 경호(景浩), 다른 호는 지산(芝山)ㆍ퇴도(退陶), 시호는 문순(文純)이다. 주자학을 심화 발전시켜 이후 도학의 시대를 여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저서에 《퇴계집》이 있다. 연재(淵齋) 송병선(宋秉璿, 1836~1905)의 호이다. 본관은 은진(恩津), 자는 화옥(華玉), 다른 호는 동방일사(東方一士),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송시열(宋時烈, 1607~1689)의 9세손이다.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을사오적을 처형할 것을 주장하는 한편, 그 반대 운동을 계속하다가 국권이 강탈된 것에 대한 통분으로 자결하였다. 저서에 《연재집》이 있다. 간재(艮齋) 전우(田愚, 1841~1922)의 호이다. 본관은 담양(潭陽), 자는 자명(子明), 다른 호는 구산(臼山)ㆍ추담(秋潭)이다. 임헌회의 문인이며, 후창 김택술의 스승이다. 만년에 전라도 계화도(繼華島)에서 후진을 많이 길러 냈다. 도학의 연구와 도통의 계승을 중시하였고, 도학의 중흥이 국권 회복의 길이라 여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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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운여의 자에 대한 설 魏雲汝字說 용은 만약 구름을 일으키지 못하면 용이 아니다. 굳이 우리에 가두어 기르면 개나 양과 같고, 새장에 가두면 매와 같다. 그러나 구름을 일으킬 수 있기 때문에 하늘로 오르기도 하고 땅으로 내려오기도 하여 신령스러운 변화를 예측할 수 없다. 그러나 이것은 구름의 능력 때문이 아니라 바로 용의 덕이 그렇게 할 수 있는 것이다.깊은 연못 아래에 숨어 있고 천 길 깊은 곳에 틀어박혀 있어도 갈수록 더욱 깊이 잠기고 갈수록 더욱 고요하여, 보통의 물고기가 그러하듯 서로 어울려 출입을 하고 무리를 이루어 오고 간 적이 없으니 하루 이틀 쌓인 것이 아니다. 가장 깊이 잠겨있는[至潛] 것은 반드시 가장 뚜렷하게 드러나는[至著] 쓰임이 있고 지극히 고요한[至靜] 것은 반드시 지극히 움직이는[至動] 오묘함이 있으니 용의 덕은 이로써 이루어지고 덕이 이루어지면 구름이 뒤따른다.나의 벗 위군 계룡(魏君啓龍)이 이미 '용(龍)' 자로 이름을 정하였으니 용이 되는 방법을 찾아서 자(字)를 지어야 마땅하건만, 도리어 이와 반대로 결국 궁극에는 저절로 이르는 '운(雲)'을 자로 삼았는가. 아, 용이 되어 구름을 기약하는 것은 학문을 하여 신(神)을 궁구하고 조화를 아는 것[窮神知化]142)을 기약하는 것과 같다. 궁신지화(窮神知化)가 비록 성대하게 길러서 저절로 이르는 것143)이라고 하더라도 표준과 지향은 그치지 않는 데 있다. 《주역》에 이르기를, "용과 뱀이 숨는 것은 자신의 몸을 보전하기 위함이다."라고 하고, "의(義)를 정밀히 연구하여 신묘한 경지에 들어가는 것은 치용(致用)을 위함이다."144)라고 하였다. 운여(雲汝)는 이름을 돌아보고 뜻을 생각하여 멈추지 않고 부지런히 힘쓰기 바란다. 그렇게 한다면 천하가 문명(文明)이 이루어지는 날 혹 뛰어오르거나 밭에 있지 않을지 어찌 알겠는가.145) 龍而不雲非龍也。必牢而畜之如犬羊。籠而縶之如鷹隼。惟其能雲。是以或升或降。靈變不測。然此非雲之力。乃龍之德有以致之也。藏於九淵之下。縶於千仞之深。潛而愈潛。靜而愈靜。未嘗唯唯而出入。洋洋而往來。如凡魚之爲者。非一日二日之積矣。至潛者必有至著之用。至靜者。必有至動之妙。而龍之德。得以成焉。德成而雲從之矣。余友魏君啓龍。旣命名以龍。則當求其所以爲龍者以表德焉。乃反以在外之雲究竟自至者而爲之耶。噫龍而期於雲。猶學而期於窮神知化也。窮神知化。雖云養盛自至。而所以爲標準向望。則在所不已。易曰。龍蛇之縶。以存身也。精義入神。以致用。願雲汝顧名思義。勉勉不措。則安知無或躍在田。天下文明之日也。 신(神)을……아는 것 《주역》 계사전 하(繫辭傳下)에 "자벌레가 몸을 굽혀 움츠리는 것은 장차 몸을 펴기 위해서이고, 용과 뱀이 땅속에 숨는 것은 몸을 보전하기 위해서이다. 사람이 의(義)를 정밀히 하여 신묘한 경지에 들어감은 장차 극진하게 쓰기 위해서이고, 쓰는 것을 이롭게 하여 몸을 편안히 함은 덕을 높이기 위해서이다. 이 단계를 지나서 더 나아가면 혹 헤아릴 수 없으니, 신(神)을 궁구하여 조화를 아는 것이 덕의 성대함이다."라는 내용이 나온다. 궁신지화가……이르는 것 장재(張載)의 《정몽(正蒙)》 〈신화(神化)〉에 나오는 말이다. 의(義)를……위함이다 《주역》 〈계사전 하(繫辭傳下)〉에 보이는 말이다. 천하가……알겠는가 《주역》 건괘(乾卦) 구이(九二)에 "나타난 용이 밭에 있음이니, 대인을 만나 보는 것이 이롭다." 하였는데, 그 문언전(文言傳)에 "나타난 용이 밭에 있다는 것은 천하가 문명하다는 것이다.[見龍在田 天下文明]" 라는 구절을 인용하였다. '혹 뛰어오른다'라는 말은 건괘 구사(九四)에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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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생 형중 권하 에게 주다 贈金生亨仲【權夏】 천하의 일에 대해서 뜻을 세웠으나 이루지 못한 자들이 오히려 많다. 하물며 뜻이 없건만 성취하는 바가 있을 수 있겠는가. 일상의 예사로운 것들, 예컨대 물을 긷고 땔나무를 하는 일165), 꽃을 보고 버들을 꺾는 일166) 등 모두 그러하다. 하물며 평소에 자기 자신과 집안을 위한 커다란 공부, 커다란 사업이야 말할 나위가 있겠는가. 뜻이 확립되지 않으면 한때의 선심(善心)이나 호의(好意)는 기름으로 그린 그림, 얼음으로 새긴 조각에 지나지 않고, 여러 경전(經典)의 격언(格言)이나 핵심적인 가르침은 문구(文具)나 책을 쌓아놓기만 한 책방에 지나지 않는다. "학문은 가장 먼저 뜻을 세워야 한다."167)는 선유(先儒)의 말이 이것이다.김군 형중보(金君亨仲甫)가 나에게 일찍이 말 한마디를 청하였으나, 그 뜻이 매우 가상하였지만 군(君)은 입지(立志)의 첫 번째 착수처에 대해서 이미 깨닫고 체득한 것이 있는지 모르겠다. 그렇다면 여러 경전의 말씀 하나하나에 대해서 반드시 문구로 간주하지 않을 것이고 추구하고 필요로 하는 것이 모두 갖추어지지 않음이 없을 것이니, 어찌 지리멸렬하다 늙어버려 사리에 어둡고 어리석은 사람의 말 한마디를 기다리겠는가. 아니면 미치지 못할까 두려워하는 듯한 마음으로 다식(多識)하면서도 과문(寡聞)한 사람에게 묻고 유능하면서도 무능한 자에게 묻는 것이 고인(古人)과 같아서인가?168) 후의(厚意)를 저버리기 어려워 삼가 '입지(立志)' 2자를 경계로 올린다. 이미 알고 있는 소릉(昭陵)이라고 소홀히 하지 말고 더욱 힘쓰기를 바랄 뿐이다. 天下事。有志而未就者尙多。況無其志而能有所就乎。尋常日用。如運水搬柴看花折柳。無不皆然。況平生身家大功夫大事業乎志。苟不立則一時之善心好意。不過爲脂畵氷鏤群經之格言要誨。不過爲文具書肆。先儒所謂學莫先於立志者。此也。金君亨仲甫向余曾有一言之請。其意非不可尙。但未知君於立志一着。已有所理會而體當者耶。然則於群經言言。必不看作文具而其所求所須。無所不備。何侍乎滅裂老昏者之一言乎。抑以其如恐不及之意。或有出於問。寡問不能如古人耶。厚意難孤謹以立志二字奉規焉。勿以已見之昭陵而略之。更加勉旃是所望也耳。 물을……하는 일 물 긷고 땔나무 하는 일상적인 일이 곧 신통(神通)이며 묘용(妙用)이라는 주장은 당나라 때의 사람으로 선종(禪宗)에 통달한 방온(龐薀)의 게송(偈頌)에 나오는 말이다. 꽃을……꺾는 일 주희의 〈답여자약서(答呂子約書)〉에 "불서(佛書)에 능(能)과 소능(所能)에 관한 설이 있는데 능은 사람이 일을 하는 것이고 소능은 사람이 하는 일이다. 이를테면 도(道)는 소능에 해당하고 학(學)은 능에 해당한다. 예를 들면, 지금 아이들이 대구(對句)를 지을 때 '꽃을 보고 버들을 꺾는다[看花折柳]' 하는데, 여기서 보고 꺾는 행위는 능이고 꽃과 버들은 소능이다.[佛書, 有能與所能之說, 能謂人所做作, 所能謂人所做作底事. 如道則所能之謂, 學卽所謂能也. 如今小兒屬對, 看花折柳, 看與折字是能, 花與柳是所能.]"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학문은……한다 이이(李珥)가 《성학집요(聖學輯要)》 〈수기 제2상(修己第二上)⋅입지장 제2(立志章第二)〉에서 한 말이다. 다식(多識)하면서도……같아서인가 《논어》 〈태백(太白)〉에 "유능하면서도 무능한 자에게까지 물어보고, 박학다식하면서도 천학 과문한 자에게까지 물어보고, 있어도 없는 듯하고, 찼어도 빈 듯하고, 누가 덤벼들어도 따지지 않는 이런 태도를 옛날에 우리 벗이 지니고 있었다."라는 증자(曾子)가 안연(顏淵)을 평한 말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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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안사에 머물며 김군식에게 써 주다 留新安社。書贈金君式。 고(故) 대곡옹(大谷翁)46)은 우리 사문의 고족(高足 뛰어난 제자)으로, 그의 학술과 행실은 한 시대의 으뜸이 되고 후학의 모범이 될 수 있었는데, 사문(斯文)이 복이 없어 중도에 갑자기 삶이 멈추어 오래도록 식견이 있는 사람들이 안타깝게 여기며 슬퍼하였다.임인년(1902) 봄에 내가 사문(師門)의 문집을 간행하는 일47)로 강성(江城 경남 산청의 옛 지명)의 신안사(新安社)에 갔었는데, 당시에 산석옹(山石翁)이 그 자리에 있었다. 한 소년이 그를 만나보게 하고 말하기를, "이 분은 대곡옹 집안사람으로, 자(字)가 군식(君式)입니다."라고 하였는데, 그의 부친과 여러 종친들이 대곡옹의 유고(遺稿)를 간행할 것을 도모하여 한창 글을 거두어 모으고 있었기 때문에 이 사람을 보내 여기에 오게 된 것이었다.아, 대곡을 보지 못한 지 이십 년 만에 비로소 그 집안사람을 보게 되었으니, 슬프면서도 위안이 되는 마음이 어찌 원빈(元賓)48)을 만나는 것과 같을 뿐이겠는가. 더욱이 그의 문장을 모아 책으로 간행하여 대곡으로 하여금 백세토록 썩어 없어지지 않게 하였으니, 종친을 돈독히 하는 의리와 어진 이를 숭상하는 정성은 참으로 세상에 좋은 사람이 없다고 말할 수 없을 것이다.군식을 삼가 살펴보건대, 함께 지내는 여러 날 동안 몸가짐이 한결같아 지초(芝草)의 뿌리와 예천(醴泉)의 원천임을 또한 속일 수 없었고, 분연히 뜻을 세워 쉬지 않고 끊임없이 나아가 대곡의 도로 하여금 문정(門庭) 사이에서 실추되지 않게 하였으니, 이것이 어찌 김씨(金氏) 한 가문만의 복일뿐이겠는가. 생각건대, 존대인 어른이 오늘날 애를 태우며 마음을 쓰고, 피땀을 흘리며 노력하는 것이 이러한 뜻이 아니라고 기필하지는 못할 것이다. 故大谷翁我師門高足。其學術行義。足以爲一世之冠冕。來學之標範。斯文無祿。中途遽閼。而爲有識之怊悵久矣。歲壬寅春。余以師門刊事。到江城之新安社。時山石翁在座。一少年使見之曰。此卽大谷翁門內人。字君式也。其大人丈與諸宗。謀刊大谷翁遺稿。而方收聚文字。故送此人來此也。嗚呼。不見大谷二十年。乃見其門內人。其悲慰之情。豈惟如見元賓而已。況收其文刊其書。使大谷不朽於百歲。其惇宗之義。尙賢之誠。信不可謂世無好人也。竊覸君式。相處累日。操守有常。芝醴根源。又不可誣矣。奮然立志。循循不舍。使大谷之道。不墜於門庭之間。此豈惟爲金氏一門之福也耶。尊大人丈今日所以若心血力者。想未必非此意云爾。 대곡옹(大谷翁) 19세기 유학자인 김석구(金錫龜, 1835~1885)로, 대곡은 그의 호이다. 노사(蘆沙) 기정진(奇正鎭, 1798~1879)의 문인으로, 일신(日新) 정의림(鄭義林), 노백헌(老栢軒) 정재규(鄭載奎)와 더불어 노문 삼자(三子)라 일컬어졌다. 임인년(1902)……일 노백헌(老栢軒) 정재규(鄭載圭) 등과 함께 경남 산청의 신안정사(新安精舍)에서 스승 노사(蘆沙) 기정진(奇正鎭)의 문집을 목판으로 삼간(三刊)한 일을 말한다. 원빈(元賓) 원빈(元賓)은 당나라 때의 문장가인 이관(李觀)의 자로, 한유(韓愈, 768~824)의 절친한 친구 중 한 사람이었다. 당시에 한유와 함께 문장 공부를 하면서 서로 우열을 다툰다는 명성이 있었는데 29세에 요절하였다. 한유는 이관이 죽은 뒤에 이사석(李師錫)에게 답한 편지에서 "원빈을 생각하지만 보지 못하여 원빈이 사귀던 사람을 보면 곧 원빈을 보는 듯하다.[思元賓而不見, 見元賓之所與者, 卽如元賓焉.]"라고 말하였다. 《韓昌黎集 卷3 答李秀才書》 여기에서는 대곡 김석구를 비유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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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29년 임피유생(臨陂儒生) 채홍운(蔡弘運) 등 상서(上書) 고문서-소차계장류-소지류 법제-소송/판결/공증-소지류 己丑十月 日 蔡弘運 御史道 己丑十月 日 蔡弘運 暗行御史 전라북도 군산시 暗行御史[署押] 3개(적색, 원형) 임피 김정우가 전주역사박물관 전북대학교 박물관, 『박물관도록 –고문서-』, 1998. 전경목 등 역, 『儒胥必知』, 사계절, 2006. 최승희, 『한국고문서연구』, 지식산업사, 2008. 1829년 10월에 임피현(臨陂縣)의 유생 채홍운(蔡弘運) 등 34명이 암행어사(暗行御史)에게 올린 상서(上書). 1829년 10월에 임피현(臨陂縣)의 유생 채홍운(蔡弘運) 등 34명이 암행어사(暗行御史)에게 올린 상서(上書)이다. 이들은 이 상서에서 임피 출신의 유생 고(故) 김정우(金鼎祐)와 그 아들 김덕강(金德鋼), 손자 김지황(金之璜)의 뛰어난 효행을 열거하면서, 한 집안에서 3대에 걸친 보기 드문 효행을 조정에 알려 정려의 특전을 내려줄 것을 요청하고 있다. 이 문서에는 작성연대가 기축년으로 되어 있는데, 『승정원일기』 고종 5년 4월 9일 기사에 각도에서 올린 정려 요청 건을 조정에서 논의하는 내용 가운데 마침 임피의 김정우와 관련된 기록이 실려 있어서 작성연대를 추정하는데 도움이 된다. 그런데 이때에는 임피에 사는 고 학생 김정우와 그의 아들 김덕강과 그의 손자 김지황과 증손 김기회(金驥會), 김태회(金駾會) 등 4대의 여섯 효자에 대하여 정려해 달라는 것이었다. 따라서 3대의 정려를 요청한 기축년은 고종 5년보다 앞선 기축년, 즉 1829년(순조 29)으로 추정된다. 김정우는 어려서부터 효성이 지극하여 부모가 병이 들었을 때에는 6월에 오리가 저절로 품안으로 날아들었는가 하면, 9월에 앵두나무에 열매가 맺어 병중의 부모에게 맛있는 음식과 열매를 드릴 수 있었다. 또한 부모가 위독하자 손가락을 잘라 그 피를 약과 함께 드렸으며, 대변을 맞보면서 부모의 증세를 관찰하였다. 마을사람들이 그 효행에 감복하여 향리와 감영을 거쳐 조정에 정려를 내려달라고 호소했지만 아직껏 정려를 받지 못하였다. 그래도 마을 사람들은 그를 김효자라고 불렀다. 김정우의 아들 김덕강도 어려서부터 보기 드문 효자이자 형제간에 우애가 깊은 인물로 향리에 널리 알려졌으며, 그의 나이 60세와 70세 때 각각 부친상과 모친상을 당했을 때에도 예를 다하며 장사를 치렀으며, 10여 리(里)나 멀리 떨어진 부모의 산소에 하루도 거르지 않고 아침저녁으로 다니면서 호곡(號哭)을 하였다. 김덕강의 아들 김지황도 효행이 깊어 초봄인데도 부친의 숙환에 얼음을 깨고 잉어를 잡아 부친에게 대접하였다. 부친의 병세가 심해지자 대변을 맞보면서 증세를 관찰하였고, 손가락을 잘라 그 피를 부친에게 마시게 하여 연명하도록 하였다. 모친이 병들었을 때에도 약을 대접하는 등 온갖 정성을 다하였다. 임피의 유생들은 이처럼 뛰어난 효행을 반드시 조정에 알려 정려의 혜택을 받게 해달라고 암행어사에게 탄원을 올렸다. 이에 대하여 암행어사는 한 집안에서 세 명의 효자가 나온 것은 척박한 풍속에 모범이 되는 일로 참으로 아름다운 일이기는 하지만, 임금에게 이를 아뢰는 일은 신중히 해야 하는 일이니 마땅히 잘 헤아려서 처리하겠다는 처분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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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씨세고》 서문 鄭氏世稿序 무릇 사람이 지니고 있는 이 몸은 선조가 남겨준 기(氣)가 아닌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씨를 뿌리고 계속해서 태어나고 태어났기에 그 소속감이 가장 친근하고, 그 은혜가 가장 절실하다. 그러나 세대가 번갈아 바뀌고, 옛날과 오늘날이 매우 동떨어지면서 그 용모와 기상을 볼 수 없고, 그 음성과 웃음소리를 들을 수 없으며, 그 움직임과 행위를 알 수 없게 되니, 이처럼 기운이 같고 친근함이 절실했던 사이가 소원해지고 서먹해져서 또 이와 같이 되는 것인가. 추억하고 상상하여 비슷하게나마 마치 조상이 계시는 듯이 여긴다는 뜻을 붙일 수 있는 것은 오직 유언(遺言)과 유서(遺書) 뿐일 것이다.우리 선세(先世)는 평소 문학(文學)과 벼슬로 조선 중기에 저명하였으나 오늘날에 이르러서는 극도로 쇠락해졌다. 이리저리 떠돌며 외롭고 고달파서 자신을 보존하는 데에 겨를이 없으니, 반남(潘南)의 옛터는 무성하게 자란 잡초에 파묻혔고, 가야(伽倻)의 선롱(先壟 조상의 무덤)은 소슬하게 구슬픈 바람만 불고 있다. 아, 남쪽 월(越) 땅의 새와 북쪽 오랑캐 땅의 말들도 오히려 애틋하게 고향을 그리워하는 정이 있는데, 하물며 이런 지경에 이른 사람이야 하늘에 닿는 슬픔과 뼈에 사무치는 고통이 어떠하겠는가.용모와 음성은 형세상 본디 막연해지겠지만, 대대로 전해 내려오는 문고(文稿)마저도 또한 흩어지고 사라져서 남아 있는 것이 없었다. 그런데 내가 젊은 시절부터 샅샅이 찾아서 짧은 말이나 글을 만나게 되면 금가루처럼 아끼고 거두어 모아두었다가 이를 합쳐 책으로 만들어 《정씨세고(鄭氏世稿)》라 명명하였다. 그사이에 간혹 삭제해야 한다고 말할 만한 것이 없지 않겠지만, 삭제하여 근거로 삼을 바를 독단적으로 없애는 것보다는 어찌 보존하여 살펴볼 바가 있게 하는 것이 더 낫지 않겠는가.선조의 세대로부터 세월이 오래 지났을 뿐만 아니고, 선조의 고향으로부터 거리가 멀어졌을 뿐만이 아니지만, 선조의 기상과 말이 이 책에 갖추어져 있으니, 말을 완미(玩味)하고 그림을 살펴보면 마치 직접 음성과 용모를 받드는 것처럼 황홀하여 백년의 세월이 흘렀음을 느끼지 못할 것이다. 아, 우리 선조의 자손들이 이 책을 보고서 슬픈 마음이 들지 않는다면 사람의 감정이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대대로 전할 덕을 세워 내려주는 것이 어려운 일임을 느끼고, 가문의 운이 쇠락한 지 오래되었음을 슬퍼한다면, 몸을 삼가고 학문에 힘쓰며, 집안을 화목하게 하고 종족을 보존하여 선조의 일을 계승하여 완성시킬 바탕을 도모해야 할 것이니, 아마 이것을 그만둘 수 없는 점이 있을 것이다. 夫人之有此身。孰非祖先之遺氣哉。種下種子。接續生生。其屬爲最親。其恩爲最切。然世代迭遷。今古懸隔。其面貌氣象。不可得以見矣。聲音笑語。不可得以聞矣。動靜作爲。不可得以知矣。以若一氣親切之地。而其疎且闊。又如此耶。若其追惟想象。以寓彷彿如在之意。則其惟遺言遺書乎。我先世。素以文學仕宦。著名中葉。而零替至今日而極矣。流離孤苦。不遑自存。潘南遺墟。荒草蕪沒。伽倻先壟。悲風蕭瑟。嗚呼。越鳥胡馬。猶有懷本戀戀之情。況人生到此。而其窮天之感。切骨之痛。爲何如哉。面貌聲音。勢固漠然。而至於世傳文稿。亦且散逸無有存者矣。余自早歲。到底搜覓。遇片言隻字。愛如金屑而收拾之。合以成編。名之曰鄭氏世稿。其間或不無存削之可言。然與其削之而專無所據。曷若存之而俾有所稽耶。去先祖之世。不啻久矣。去先祖之鄕。不啻遠矣。而先祖之氣象言辭。具在於是。玩辭考畵。怳若親承音容。而不知百世之爲曠也。嗚呼。爲吾祖子孫者。覽是書而無悲感之心。則其可謂人情乎。感世德創垂之艱。悲家運零替之久。謹身力學。宜家保族。圖所以繼述成立之地。蓋將有不能已焉者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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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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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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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부

우연히 쓰다 偶題 십 년 동안 산당에서 글로써 모였는데 十載山堂會以文지기가 무리 중 뛰어난 이 보기 드무네 罕看志氣迥超群주희와 장식은 홀로 호굉과 이동을 빛냈으나444) 朱張獨自光胡李후파와 이한은 외려 퇴지와 자운에게 보답했네445) 芭漢猶能報退雲품성은 예나 이제나 종류가 다르지 않은데 稟性不殊今古種스승으로서 되레 나와 남을 기를 줄 몰랐네 爲師還昧己人耘모두 위에 있으면서 정치 교화가 없어서이니 總緣在上無治敎언제쯤 순후한 풍속에 온 세상이 훈훈해질까 何日醇風一世醺 十載山堂會以文, 罕看志氣逈超群.朱、張獨自光胡、李, 芭、漢猶能報退、雲.稟性不殊今古種, 爲師還昧已人耘.總緣在上無治敎, 何日醇風一世醺? 주희(朱熹)와……빛냈으나 주희의 스승은 이동(李侗)이고, 장식(張栻)의 스승은 호굉(胡宏)이다. 후파(侯芭)와……보답했네 후파의 스승은 양웅(揚雄)인데 스승의 삼년상을 치렀고, 이한(李漢)은 한퇴지(韓退之)의 제자이자 사위로 《창려선생집(昌黎先生集)》의 서문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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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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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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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부

유두348) 流頭 좋은 절기 유두에 백성들 삶 즐기니 流頭佳節樂民生아직 신라의 옛 풍속을 볼 수 있네 尙見新羅舊俗情선명하고 깨끗한 의상에 강물 푸르고 鮮潔衣裳江水綠인연 머문 잔치 자리에 달빛 밝구나 留緣樽俎月輝明이 날 시절 차례는 천년토록 같은데 千年此日同時序삼한의 성시는 몇 번이나 바뀌었나 幾度三韓易市城풍물을 보며 서생은 느낀 바 무엇인가 覽物書生何所感삼복더위349) 뜨거워도 살쩍엔 서리 내렸네 庚炎雖熱鬢霜橫 流頭佳節樂民生, 尙見新羅舊俗情.鮮潔衣裳江水綠, 留緣樽俎月輝明.千年此日同時序, 幾度三韓易市城.覽物書生何所感, 庚炎雖熱鬢霜橫. 유두(流頭) 음력 6월 15일이다. 신라 때부터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는 명절로, 이날에는 가족이나 가까운 사람들끼리 짝을 지어 맑은 시냇가나 폭포로 가서 머리를 감고 목욕을 한 뒤 준비한 음식을 나누어 먹음으로써 질병을 예방하고 더위를 물리친다고 한다. 삼복더위 원문은 '경염(庚炎)'은 불꽃 같은 삼복(三伏) 더위를 이른다. 삼복 중 초복과 중복은 각각 하지(夏至) 후 세 번째와 네 번째 경일(庚日)이고 말복은 입추(立秋) 후 첫 번째 경일이기 때문에 복날을 일컬을 때 '庚' 자를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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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편저자)
유형 :
고전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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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부

홍수를 보고 觀大水 연이어 사흘을 비가 내리니 連天三日雨어찌 이리도 많은 비가 오나 洪水一何多홀연 보니 푸른 바다 이루어 忽見成滄海문득 큰 강물 터졌나 놀라네 飜驚決大河온통 쓰러져 일년 양식 끝났고 蕩殘終歲食떠내려가 잠긴 인가가 몇인가 漂沒幾人家누가 다시 기이한 경관 다투랴 誰復爭奇觀응당 참담해 노래하지 못하리 還應慘不歌 連天三日雨, 洪水一何多.忽見成滄海, 飜驚決大河.蕩殘終歲食, 漂沒幾人家.誰復爭奇觀, 還應慘不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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