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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백현에 대한 제문 祭金伯顯文 오호라! 말세라 세상의 등급이 떨어져 순진함이 날로 삭막해져 온량(溫良) 개제(愷弟)하고 질실(質實) 근각(謹慤)하여 본분에 의지하고 도리를 가까이하여 세간의 갖가지 병통이 없는 것이 우리 백현 같은 사람이 몇 명이나 있겠는가? 무거운 짐은 한 팔로 옮길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세찬 물결은 한 줌의 흙으로 막을 수 있는 것이 아니어서, 비록 사속(絲粟)이나 모발(毛髮) 같은 사소한 어짊과 두공[欂櫨]이나 문턱[扂楔] 같은 사소한 재목이라도 많을수록 더욱 좋고 쌓일수록 더욱 기이하니, 반드시 모름지기 모두 받아서 함께 저축하여 서로 기뻐하고 뜻이 맞은 뒤에야 많은 세상일을 수습하고 많은 세상의 가르침에 도움을 줄 수 있네. 어찌하여 근년 이래로 아침에 한 사람을 잃고 저녁에 한 사람을 잃어, 오직 많아지지 않을 뿐 아니라 도리어 줄어들고 오직 쌓이지 않을 뿐 아니라 도리어 흩어지는가? 외롭고 쓸쓸하여 풍색이 좋지 못하니, 상구(上九)의 박(剝)175)이 아직 이렇게 다하지 않으니 크게 올 복괘(復卦)가 다시 어느 때에 있겠는가? 더구나 우리들 약간의 사람이 궁벽한 산 적막한 물가에서 어렵게 상종하며 강사(講社)를 열고 강규(講規)를 세워 구구하게 남은 날을 위한 계획으로 삼은 것이 얼마나 부지런하였는데, 학산(䳽山)·오계(梧溪)176)·신암(愼庵)177)·근재(謹齋)178) 같은 이들이 차례로 돌아가신 지 오래 되었으니 어떠하겠는가. 근래 또 송하(松下)179)를 잃었고, 또 이어서 군을 잃었으니, 남은 생애 쓸쓸하여 무료하고 의지할 곳 없어 세상만사는 따라서 장차 쉬어야 하지 않겠는가. 개연히 나는 자나 깨나 탄식하니 눈물이 옷깃을 적시네.오호라! 늙으신 부모님이 당에 계시고 둘째 아드님이 아직 관례를 치르지 않아 끝내지 못한 빚이 있으니. 이것이 유감스러움이 되네. 그러나 고금의 인물들 가운데 어찌 일을 끝내고 돌아가신 분이 있었던가. 뒷사람에게 맡기면 눈을 감을 수 있고, 더구나 북풍이 불고 눈비가 내려 시상(時象)이 두려우니, 오늘 떠나는 것이 돌아가는 구름 속의 높이 나는 기러기와 속진에서 벗어난 맑은 매미가 되지 않을 줄 어찌 알겠는가. 하산(鰕山)의 풍월과 회촌(會村)의 수석에 남은 풍운(風韻)은 백세토록 불후할 것이네. 눈물 섞어 슬픔을 진술하여 이렇게 제사 올리니, 어둡지 않은 혼령 계실 것이니 혼령이여 흠향하소서. 嗚呼。叔季世降。淳眞日索。而溫良愷弟。質實謹慤。依本分近道理。無世間種種病痛如吾伯顯者。有幾人耶。重任非隻肘可運。奔波非捧土可塞。雖絲粟毛髮之賢。欂櫨扂楔之材。多多而益善。積積而愈奇。必須俱受倂蓄。交驩相得。然後可以收拾得多少世事。補裨得多少世敎。奈之何。近年以來。朝而失一人焉。暮而失一人焉。不惟不多而反以損之。不惟不積而反以散之。踽踽零零。風色不佳。未知上九之剝。尙爾未盡。而大來之復。更在何時耶。況吾儕若干人。間關相從於窮山寂寞之濱。開講社立講規。以爲區區餘日之計者。何等密勿。而如䳽山梧溪愼庵謹齋。次第凋謝者久矣。近又失松下。又繼而失君焉。餘生落落。無聊無賴。世上萬事。從之而可且休歇耶。慨我寤歎。淸血沾衿。嗚呼。老親在堂。次胤未冠。未了之債。此爲可憾。然古今人物。安有了事而就化者耶。付之後人。可以瞑目。況北風雨雪。時象可怕。則今日之行。安知不爲歸雲之冥鴻。蛻塵之淸蟬耶。鰕山風月。會村水石。遺風餘韻。百歲不朽。和淚述哀。奠此侑儀。不昧者存。靈其歆格。 상구(上九)의 박(剝) 《주역》 박괘(剝卦) 상구(上九)를 말하는데, 박괘(剝卦)는 5개의 음효와 1개의 양효로 구성되어 있다. 음의 세력이 강해져 혼란스럽지만, 양이 완전히 소멸되지는 않은 상태를 말한다. 오계(梧溪) 문봉환(文鳳煥, 1849∼1890)의 호이다. 신암(愼庵) 노응규(盧應奎, 1851~1907)의 호이다. 자는 성오(聖五), 본관은 광주(光州)이다. 지금의 경상남도 함양군 출신이다. 허전(許傳, 1797~1886)의 문인이고, 최익현(崔益鉉, 1833~1907) 등을 사사하였다. 1895년 을미사변으로 명성황후(明成皇后)가 시해되자, 의병을 일으켜 진주성을 장악하였으나, 일본군의 공격과 내부의 반란으로 성이 함락되자, 아버지와 형은 살해되고 가산이 몰수되는 비운을 겪었다. 1902년 한때 조정의 관직을 맡은 적이 있으나,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관직을 버리고 다시 의병 활동을 계속하다가 1907년 결국 체포되어 옥사하였다. 윤병현(尹秉玹, 1857~?)의 호이다, 자는 치화(致化), 호는 신암(愼庵), 본관은 남원(南原)이다. 여기서는 누구를 가리키는 지 정확하지 않다. 근재(謹齋) 김규원(金奎源, 1852∼?)의 호이다. 자는 문현(文見), 본관은 경주(慶州)이다. 송하(松下) 안국정(安國禎, 1854∼1898)의 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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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갈명 墓碣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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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부

외손자 송병기에게 보냄 與宋外孫秉基 너를 보낸 지 벌써 여러 날이 되었구나. 서재를 청소하고 휘장을 내려 과연 내 말대로 집중하며 책을 읽고 있는지 잘 모르겠구나. 마을 서당은 너무 시끄러운 것 같고 산당에서 책을 읽으면 집안에서 해야 할 일을 할 수가 없으니, 다만 편리하고 조용한 것은 집안의 서재만한 것이 없다. 그러나 이 일은 다만 내 뜻이 독실함에 달려 있으니, 뜻이 만약 독실하지 않고서 이전처럼 한가롭게 지내면서 한가로운 객을 대하여 한가로운 이야기나 나누거나 혹은 아침까지 자면서 늦게 일어나거나 혹은 대낮에 낮잠을 잔다면 한 해가 다 지나가더라도 어찌 성취할 수 있겠느냐. 옛날의 문장가나 현철한 이로 백 대에 아름다운 이름을 남긴 자 가운데 그 누가 각고의 노력으로 공부하지 않고서 이와 같을 수 있겠느냐. 예를 들면 소강절은 10년 동안 밤에 잠을 자지 않았으며 면재 황간(黃幹)은 십년 동안 밤에 허리띠를 풀지 않았으니, 모두 이에 해당한다. 천하의 좋은 일은 모두 어렵고 고생하는 가운데에서 나오니, 《주역》에서 말한 "거듭된 고난 속에서도 마음은 형통하다."201)라 한 것이 바로 이것이다. 매번 정성과 독실한 뜻은 부족하고 한가롭게 지내는 모습은 많은 너를 보는데, 이는 하찮은 병이 아니다. 평소 생활하면서 우선 모름지기 아침에 일찍 일어나고 밤늦게 자면서 용모를 단정히 하여 방만하게 하지 않은 이후에 이 마음이 안정하게 되어 산만함에 이르지 않는다. 깊이 경계로 삼아 이 좋은 시절을 잃지 말아야 한다.질문 : 《중용》에서 "중용은 지극하구나. 사람들[民]이 능한 이가 적은지 오래되었다."202)라 하였는데, '민(民)'은 일반 백성을 가리킵니까, 아니면 천하 사람을 통틀어 말한 것입니까.답변 : 사람은 천하의 백성을 통틀어 이른 것이다.질문 : 〈지인용장(知仁勇章)〉의 장하주(章下註)에서 "순은 지(知)이고, 안연은 인(仁)이고 자로는 용(勇)이니, 이 세 가지 중에 한 가지라도 없으면 도에 나아가 덕을 이루지 못한다."라고 하였는데, 이 말대로라면 순임금에게 있어서는 지이지만 인과 용은 없으며, 안연에게 있어서는 인하지만 지와 용은 없는 것입니까.답변 : 각각 한 가지를 들어서 말한 것이지, 순이 지하기만 하고 인과 용은 없다는 것을 이름이 아니다.질문 : "나는 그 중에 하나도 잘하지 못한다.……"203)라 하였는데, 이는 겸손한 말입니까. 아니면 위의 문장의 "그 지극함에 이르러서는 성인도 능하지 못한 것이 있다."204)는 것을 이어서 말한 것입니까.답변 : 이는 참으로 성인의 겸손한 말인데, 그러나 그 지극함에 이르면 또한 능하지 못한 바가 있다.질문 : "《시경》에서 '신이 이르른 것'이라 하였다."205)라 하였습니다. 위에서는 귀(鬼)와 신(神)을 함께 들어 말하였는데,206) 여기서는 다만 '신(神)'자만 들어서 말한 것은 어째서 그렇습니까. 다만 '이르러서 펼친 것'207)을 위주로 하여 말하였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까.답변 : 이미 "이르렀다."고 하였으니, 이르른 것은 '이르러서 펼친 것'이 아니더냐.질문 : "인은 사람이다."208)라고 하였는데, 《장구》에서 "인이란 천지가 만물을 낳는 마음이다."209)라고 하였습니다. 다만 '사람'만을 말한 것은 어째서 그렇습니까.답변 : 사물의 신령함이 되면서 이 이치를 온전히 가진 것이 사람이다.질문 : "천하의 달도(達道)는 다섯 가지이다.……"210)라 하면서 군신을 먼저하고 부자를 뒤에 한 것은 어째서 그렇습니까.답변 : 애공을 대하여 말하였기 때문에 군신을 먼저 말하였다.질문 : "낮은 지위에 있으면서 윗사람에게 신임을 얻지 못한다."211)라 하였는데, 이 장은 공자가 애공의 질문에 대답하면서 낮은 지위의 일을 말한 것은 어째서 그렇습니까.답변 : 학문은 한 가지이며 이치도 한 가지이다. 어찌 임금을 대하고 신하를 대하는 구별이 있겠느냐. 送別已有日矣。未知掃塾下帷。專精讀書。果能一如吾言否。洞齋近熟鬧。山堂曠職分。惟是穩便從容。莫如家塾耳然此事。只在於吾之篤志。志若不篤。而因循悠泛。對閑人客。打閒說話。或早寢晏起。或日中打睡。則窮歲窮年。安能有成。古之文章賢哲。流芳百世者。誰無十分刻苦功夫。而能如此耶。如邵康節十年夜不就枕。黃勉齋十年夜不解帶者。皆是也。天下好事。皆從艱難辛苦中出來。易所謂習坎心亨。是也。每見汝少誠篤之意。多悠泛之狀。此其不細之病也。日用之間。先須夙興夜寐。收歛儀形。俾不放慢。然後此心有所安頓。而不至於散漫。千萬戒之。勿失此好時節也。子曰。中庸其至矣乎。民鮮能久矣。民指庶民。抑統天下人否。人統謂之天民。知仁勇章云云。舜知也。顏淵仁也。子路勇也。三者廢其一。則無以造道而成德矣。以此言則在舜知而未仁勇。在顏淵仁而未知勇耶。各擧一事而言。非謂舜知而未仁未勇也。丘未能一云云。此盖謙辭歟。抑承上文及其至聖人有所不能而言歟。此固聖人之謙辭。而極其至。則亦有所未能焉。詩曰神之格思。上竝擧鬼神言。此獨擧神字言。何也。只主至而伸者言故耶。旣曰格。則格非至而伸者耶。仁者人也。章句仁者天地生物之心。獨言人者何也。爲物之靈。而全此理者。人也。天下之達道五云云。先君臣後父子。何也。對哀公言。故先君臣。在下位不獲乎上。此章孔子對哀公問。而言在下位之事。何耶。學一也。理一也。豈有對君對臣之別。 거듭된……형통하다 《주역》 〈감괘〉 괘사(卦辭)의 "습감은 신실함이 있어서 마음만은 형통하니, 계속 나아가면 가상(嘉尙)함이 있으리라.〔習坎 有孚 維心亨 行有尙〕"라는 말에서 발췌한 것이다. 중용은……오래되었다 《중용》 제3장에 보이는 말이다. 나는……못한다 《중용》 제13장에서 공자가 "군자의 도가 네 가지인데 나는 그중에 한 가지도 능하지 못하니, 자식에게 바라는 것으로써 부모를 섬김을 능히 하지 못하며, 신하에게 바라는 것으로써 군주를 섬김을 능히 하지 못하며, 아우에게 바라는 것으로써 형을 섬김을 능히 하지 못하며, 붕우에게 바라는 것을 내가 먼저 베풂을 능히 하지 못한다.[君子之道四, 丘未能一焉, 所求乎子以事父, 未能也, 所求乎臣以事君, 未能也, 所求乎弟以事兄, 未能也, 所求乎朋友先施之, 未能也.]"라고 한 데에서 온 말이다. 그 지극함에……것이 있다 《중용》 제12장에 "군자가 추구하는 도는 그 용(用)이 광범위하다. 그래서 필부필부(匹夫匹婦)의 어리석은 수준으로도 다 함께 알 수가 있지만, 그 도의 지극한 차원에 이르면 비록 성인이라도 알지 못할 면이 있다. 필부필부의 불초한 수준으로도 행할 수가 있지만, 그 도의 지극한 차원에 이르면 비록 성인이라도 행할 수 없는 면이 있다.〔君子之道 費 夫婦之愚 可以與知焉 及其至也 雖聖人亦有所不知焉 夫婦之不肖 可以能行焉 及其至也 雖聖人亦有所不能焉〕"라 하였다. 《시경》에서……하였다 《중용장구》 제16장에서 "《시경》에 이르기를 '신(神)의 이르름을 예측할 수 없으니, 하물며 신을 싫어할 수 있겠는가.'라 하였으니, 은미(隱微)한 것이 드러나니, 성(誠)의 가릴 수 없음이 이와 같구나!〔詩曰神之格思 不可度思 矧可射思 夫微之顯 誠之不可揜如此夫〕"라고 한 구절이 보인다. 위에서는……말하였는데 16장의 초입에서 공자는 "귀신의 덕이 됨은 성대하도다."라 하였다. 이르러서 펼친 것 주자는 16장 귀신이 덕이 성대하다는 구절의 주에서 "귀신을 한 기로써 말한다면 이르러서 펼친 것은 신(神)이 되고 돌이켜서 돌아가는 것은 귀(鬼)가 된다."라 하였다. 인은 사람이다 《중용장구》 제20장에 "인은 사람이니 어버이를 친히 함이 크고, 의는 마땅함이니 어진 이를 높임이 크다.[仁者人也, 親親爲大; 義者宜也, 尊賢爲大.]"라고 하였다. 인이란……마음이다 《중용》 20장의 '정치를 하는 것이 사람에게 있다.〔爲政在人〕"의 주에 보이는 말이다. 천하의 달도(達道)는 다섯 가지이다 《중용장구》 제20장에 "천하의 달도가 다섯인데 이것을 행하는 것은 세 가지이니, 군신간과 부자간과 부부간과 형제간과 붕우간의 사귐이 다섯 가지는 천하의 달도요, 지ㆍ인ㆍ용 이 세 가지는 천하의 달덕이니, 이것을 행하는 것은 하나입니다. …… 학문을 좋아함은 지에 가깝고, 힘써 행함은 인에 가깝고, 부끄러움을 앎은 용에 가깝다.〔天下之達道五, 所以行之者三, 曰君臣也, 父子也, 夫婦也, 昆弟也, 朋友之交也五者, 天下之達道也; 知ㆍ仁ㆍ勇三者, 天下之達德也, 所以行之者一也.……好學近乎知, 力行近乎仁, 知恥近乎勇.〕"라고 한 것을 말한다. 낮은……얻지 못한다 《중용장구》 제20장에, "아랫자리에 있으면서 윗사람의 신임을 얻지 못하면 백성을 다스리지 못할 것이다.……어버이에게 순함이 방법이 있으니 자기 몸을 돌이켜보아 성실하지 못하면 어버이에게 순하지 못할 것이다. 몸을 성실하게 함에는 길이 있으니 선을 밝게 알지 못하면 몸을 성실히 하지 못할 것이다.〔在下位不獲乎上 民不可得而治矣……順乎親有道 反諸身不誠 不順乎親矣 誠身有道 不明乎善 不誠乎身矣〕"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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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해심180)에 대한 제문 祭梁海心文 칠실(漆室)의 아녀자가 길쌈을 걱정하지 않은 것181)은 무슨 까닭이며, 왕동(汪童)을 상례(殤禮)로 치르지 않은 것182)은 무슨 의리인가? 천리(天理)가 인심(人心)에 뿌리를 둔 것은 부녀자나 어린 아이라고 해서 차이가 있지 않으니, 더구나 장부로 태어나 선비가 되어 선왕의 책을 읽고 선왕의 가르침을 받은 사람이야 어떠하겠는가. 거사(擧事)를 이루지 못하여 몸은 재앙의 그물에 빠져 감옥에 갇히고 먼 섬으로 유배당하였으니, 어느 곳인들 가지 않았던가. 정확(鼎鑊)183)이 앞에 있고 도거(刀鉅)184)가 뒤에 있어도 정신으로 지켜 흔들리지 않고 말은 준엄하고 곧아 만 사람의 구경꾼 들을 용동시키고 천고의 의리를 밝힘이 있었던 것이 어떠하였던가. 일은 비록 성취하지 못하였으나 성취한 것은 충(忠)이고, 몸은 비록 보존하지 못하였으나 보존한 것은 의(義)였으니, 군은 여기에 거의 유감이 없을 것이네.의림(義林)은 한번 병든 것이 계속 이어져 문밖을 나가지 않은 것이 4,5년이 되어, 전에 감옥에 있을 때 능히 달려가 살피지 못하였고 뒤에 널[柩]이 돌아오던 날에 능히 달려가 곡하지 못하였으니, 이것이 어찌 평소 두터이 지내던 정의이겠는가. 슬픈 마음 엮어 제문을 지어 이에 영결을 고하네. 漆嫠之不緯何故。汪童之勿殤何義。天理之根於人心者。不以婦孺而有間。況生爲丈夫。身爲士子。而讀先王之書。服先王之敎者乎。擧事未就。而身陷禍罟。牢獄之囚。絶島之行。何所不至。鼎鑊在前。刀鉅在後。而神守不撓。言辭峻直。有以聳萬夫之觀瞻。明千古之義理者。爲何如耶。事雖未就而所就者忠。身雖不存而所存者義。君其於此庶乎無憾。義林一病沈綿。不出户庭。爲四五年。前未能趨省於置棘之時。後未能奔哭於返柩之日。此豈平昔相厚之誼耶。綴哀緘辭。玆以告訣。 양해심(梁海心) 양회일(梁會一, 1856∼1908)을 말한다. 자는 해심, 호는 행사(杏史), 본관은 제주(濟州)이다. 전라남도 화순 출신이다. 화순 일대에서 의병을 일으켜 능주(綾州), 화순(和順)을 차례로 공격하여 군아(郡衙)와 주재소(駐在所)를 점령하였다. 여세를 몰아 광주를 공격하려고 의병을 이끌고 행군하다가 판치(板峙, 현 너릿재) 전투에서 동지 5명과 함께 체포되어 지도(智島)에 유배되었고, 1907년 12월 특사로 석방되었다. 1908년에 다시 의거를 모색하다가 일본 경찰에게 체포되어 장흥경찰서에 구금되어 단식 중에 절명하였다. 1990년에 건국공로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칠실(漆室)의……것 이불휼위(嫠不恤緯)와 칠실지우(漆室之憂) 두 가지 고사(故事)를 합하여 말한 것으로, 자신의 일을 잊고서 나라를 걱정하는 마음을 뜻한다. 《춘추좌씨전》 소공(昭公) 24년 기사에 이르기를 "과부가 베를 짜는 씨줄이 끊어지는 것은 걱정하지 않고서 주나라가 망할 것을 걱정하였는데, 이는 그 재앙이 자기에게도 미칠 것이라고 여겼기 때문이다.[嫠不恤其緯, 而憂宗周之隕, 爲將及焉.]"라고 하였다. 그리고 노(魯)나라 칠실(漆室) 고을의 과년한 여자가 기둥에 기대어 울고 있기에 이웃 여인이 그 이유를 묻자, 대답하기를 "노나라의 임금은 늙었고 태자는 어리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이웃 여인이 "그것은 경대부(卿大夫)가 근심할 일이다."라고 하니, 과년한 여자가 말하기를 "그렇지 않다. 예전에 손님의 말이 달아나 내 남새밭을 밟아서 내가 한 해 동안 남새를 먹지 못하였다. 노나라에 환난이 있으면 군신·부자가 다 욕을 당할 것인데 어찌 여자만 피할 곳이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列女傳 魯漆室女傳》 《후한서(後漢書)》 〈노식전(盧植傳)〉에는 "식이 들으니, 과부가 길쌈을 걱정하지 않은 일이 있고, 칠실에 기둥에 기대어 걱정하는 슬픔이 있다.[植聞嫠有不恤緯之事, 漆室有倚楹之戚.]"라고 하였다. 왕동(汪童)을……것 왕동은 춘추 시대 노(魯)나라의 동자(童子) 왕기(汪踦)이고, 상례(殤禮)는 미성년자의 죽음에 대한 상례(喪禮)이다. 왕기가 국란(國亂)에 나서서 싸우다가 죽었는데 뒤에 사람들이 성인(成人)의 예로 장사하고자 하여, 공자에게 "그에게 상례(殤禮)를 적용하지 않은 것이 어떠한가?"라고 묻자 "미성년자라 할지라도 국가를 위하여 죽었으니 상례를 적용하지 않는 것이 좋다."라고 답하였다. 《禮記 檀弓下》 정확(鼎鑊) 형벌의 도구로 사람을 삶아 죽이는 가마솥이다. 도거(刀鉅) 형구(形具)를 가리킨다. 도는 거세(去勢)하는 데 쓰는 칼이고, 거는 월형(刖刑)에 쓰는 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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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 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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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선대부 예조 참판 김공이 의를 베푼 것에 대한 추모불망비 嘉善大夫禮曹參判金公施義追慕不忘碑 옛날 범 문정공(范文正公)이 의전(義田)을 마련하고 봉급을 나눔에 항상 종족에게 균등하게 하였으니,186) 그 의를 귀하게 여기고 재물을 가볍게 여기는 유풍은 천년 뒤에서 생각해도 사모하고 탄상하는 정을 감당하지 못한다. 더구나 오늘날에 고인의 위대한 행실이 있음을 보게 됨에야 어떠하겠는가.고 예조 참판 김재환(金在煥) 공은 바로 삼족당(三足堂) 선생187) 휘 대유(大有)의 후손이고 증 호조 참판 휘 우직(宇直)188)의 아들이다. 젊어서 매우 가난하여 봉양할 수 없자 드디어 몸을 부지런히 움직여 산림을 주관하여 집안의 재력이 자못 부유하게 되자 산 사람 섬김에 기쁨을 다하였고 죽은 이를 섬김에 예를 다하였고, 집을 지어 책을 쌓아서 독서하고 의를 행하는 것을 궁극의 계획으로 삼았다. 매번 흉년이나 혹 춘궁기를 만나면 구휼하여 공급하는 은혜가 고을의 가난한 이에게 두루 미쳤고, 족척(族戚)의 친한 이에 이르러서는 더욱 은의(恩意)를 다하여 기포(飢飽)와 한난(寒暖), 고락(苦樂)과 영췌(榮悴)에 한 몸처럼 서로 의지하여 애초에 차이를 두지 않았다. 이 때문에 내외의 친소(親疎)에게 모두 마음을 얻었고, 고학(皐鶴)이 하늘에 들리게189) 되자 임금님의 포증이 융숭하고 무거워 지위가 참판[亞卿]에 이르렀고 장수하여 기로사(耆老社)에 올랐다. 임종에 미쳐서는 여러 종족들을 불러 이르기를 "나는 지금 죽을 것이니 능히 다시 서로 정을 지극히 할 수 없을까 두렵다."라고 하고는 드디어 전지(田地)를 나누어 하사함에 각각 차등을 두었다. 전지를 받은 사람은 모두 수십 여 집이었다.공을 이미 장사지내고 나서 여러 종족들이 모여서 도모하여 장차 비석을 세워 그 글을 적으려고 인하여 나에게 물었다. 내가 다음과 같이 말한다.베풀고 덕을 드러내지 않는 것 이것은 실로 공의 뜻이다. 그러나 남의 은혜를 받고 차마 잊지 못하는 것 또한 효자와 인인(仁人)의 마음이다. 더구나 지금 세교(世敎)가 밝지 못하여 욕망의 물결이 하늘에 넘쳐 쌀알을 헤아려 밥을 짓고 섶을 저울질 하여 불을 때고,190) 와각(蝸角)의 만촉(蠻蜀)191) 같은 것이 도도하게 모두 이러하니, 공의 지극한 행실과 훌륭한 절도는 어찌 금석에 새겨 사통팔달의 거리에 게시하여 천부(淺夫)와 소인[宵人]으로 하여금 취하여 법으로 삼을 바가 있게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옛 사람은 정(鄭)나라의 한씨(罕氏)와 송(宋)나라의 악씨(樂氏)를 뒤에 망할 자로 여겼으니,192) 지금 공의 적선(積善)과 여록(餘祿)은 또한 어찌 다함이 있겠는가? 감동하여 우러르던 끝에 삼가 그 대강을 서술할 뿐이다. 昔范文正公。置義田分俸祿。常均於宗族。其貴義輕財之風。追惟千載。不勝愛慕嗟賞之情。況在今日而見有古人之偉行乎。故禮曹參判金公在煥。卽三足堂先生諱大有後。贈戶曹參判諱字直子也。少貧甚。無以爲養。遂勤身幹家。以至家力頗溫。而生事盡歡。死事盡禮。築室儲書。以讀書行義爲究竟家計。每遇饑歲或窮春。賑給之惠。遍於鄕坊之貧者。至族戚之親。尤盡恩意。飢飽寒暖。苦樂榮悴。相須一體。未始有間。是以內外親疎。咸得其心。以至皐鶴聞天。天褒隆重。位至亞卿。壽隮耆老社。及其臨終也。招諸宗族謂曰。我今死矣。恐不能復相致情。遂分田地。賜各有差。其受田者。凡數十餘家。公旣葬。諸族聚而謀之。將伐石以識其書。因問於余。余曰。施而不德。此固公之意。然受人恩而不忍忘。亦孝子仁人之心也。況今世敎不明。慾浪漲天。數米秤薪。蠻蜀蝸角。滔滔皆是。若公之至行偉節。豈不可以刻之金石。揭之通衢。使淺夫宵人得有所取法乎。古人以鄭之罕宋之樂爲後亡者。今公之積善餘祿。亦豈有艾乎。感仰之餘。謹述其梗槩云爾。 범 문정공(范文正公)이……하였으니 범 문정공은 송(宋)나라 때 이름난 재상 범중엄(范仲淹, 989~1052)을 말한다. 자는 희문(希文)이고, 문정(文正)은 시호이다. 오현(吳縣) 출신이다. 벼슬이 참지정사(參知政事)에 이르러 귀하게 되었을 때, 여러 자제들에게 경계하여 말하기를 "우리 오현의 종족이 매우 많아서 나에게 실로 친소가 있으나 조종께서 보신다면 모두 한 자손이니 실로 친소가 없다.……조종 이래로 덕을 쌓기를 백 년 남짓하여 비로소 나에게서 발복하여 높은 관직에 이르렀으니 만약 홀로 부귀를 누리고 종족의 기한(饑寒)을 보살피지 않는다면, 후일 어떻게 지하에서 조종을 볼 것이며, 지금 무슨 낯으로 가묘에 들어갈 것인가.[吾吳中宗族甚衆, 於吾固有親疎, 然吾祖宗視之, 則均是子孫, 固無親疎也.……自祖宗來, 積德百餘年, 而始發於吾, 得至大官, 若獨享富貴, 而不恤宗族, 異日何以見祖宗於地下, 今何顔入家廟乎?]"라고 하고, 오현의 일족을 위하여 자신의 봉급을 덜어 의전택(義田宅)을 설치하고 대소사에 그 경비를 충당하게 했던 일이 있는데, 이것을 의장(義庄)이라고 한다. 《小學 善行》 삼족당(三足堂) 선생 김대유(金大有, 1479~1551)를 말한다. 자는 천우(天祐), 호는 삼족당, 본관은 김해(金海)이고, 탁영(濯纓) 김일손(金馹孫, 1464~1498)의 조카이다. 현량과(賢良科)로 나아가 호조 좌랑·정언 등의 관직을 역임하였다. 청도(淸道)의 자계서원(紫溪書院)과 선암서원(仙巖書院)에 제향되었다. 우직(宇直) 김우직(金宇直, 1797~1854)을 말한다. 자는 영윤(永允), 호는 지헌(止軒)이다. 자세한 내용은 기우만(奇宇萬)의 《송사집(松沙集)》 권32 〈지헌 김공 묘갈명(止軒金公墓碣銘)〉에 보인다. 고학(皐鶴)이 하늘에 들리게 은거하는 군자의 덕이 멀리까지 알려지는 것을 비유한다. 《시경》 〈소아(小雅) 학명(鶴鳴)〉에 "학이 구고의 늪에서 우니, 그 소리가 하늘에 들린다.[鶴鳴于九皐, 聲聞于天.]"라고 한 데서 나온 말이다. 쌀알을……때고 각박하여 까다롭게 따진다는 의미이다. 와각(蝸角)의 만촉(蠻蜀) 작은 것을 놓고 서로 아옹다옹하는 것을 말한다. 달팽이의 왼쪽 뿔에 있는 촉(觸)나라와 오른쪽 뿔에 있는 만(蠻)이라는 나라가 영토를 다투느라 전쟁을 벌여 죽은 시체가 백만이나 되었다는 우화로, 《장자(莊子)》 〈칙양(則陽)〉에 실려 있다. 정(鄭)나라의……여겼으니 《춘추좌씨전》 노양공6(魯襄公六) 26년 조에 "진(晉)나라 숙향(叔向)이 말하기를 '정(鄭)나라의 한씨(罕氏)와 송(宋)나라의 악씨(樂氏)는 최후에 망할 것이니, 두 집안 모두 국정을 장악하게 될 것이다. 〈그 이유는〉 민심이 모두 저들에게 돌아갔기 때문이다. 은혜를 베풀고도 스스로 덕으로 여기지 않은 것은 악씨가 한씨보다 더 훌륭하다. 악씨는 아마도 송나라와 성쇠를 함께할 것이다.'라고 하였다."라고 한 데서 인용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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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자후167)에 대한 제문 祭權子厚文 오호라! 자후가 어찌 여기에 그치는가? 예로부터 지금까지 현인 지사(賢人志士)가 수를 얻지 못하고 중도에 요절한 사람이 얼마나 많겠는가만 지금 자후의 죽음은 가장 애석한 것이 있네.오호라! 한산(閒散)한 곳에 버려져 있다가 문득 쓸쓸한 지경에 이르고 끝내 영남의 한 포의로 마친 것은 족히 자후를 위해 애석할 것이 없고, 거적으로 만든 문에 아무것도 없는 방에서 소산(蕭散)하고 담박(淡泊)하여 죽은 뒤 식구들을 보호할 계책이 있음을 보지 못한 것은 족히 자후를 위해 애석할 것이 없고, 맏아들이 장성하여 관례를 치렀으나 아내를 맞이하지 못하여 비록 서운할 것 같지만 짚신이나 갓끈 같은 물건도 반드시 짝이 있으니, 또한 족히 자후를 위해 애석할 것이 없네.오호라! 하늘과 땅이 뒤바뀌고 해와 별이 어두워졌으니 우리의 남은 생애 실로 족히 따질 것이 없지만 바라기는 덕 있고 명명 있는 다소의 사람들이 세간에 섞여 있으면서 그들로 하여금 아침에 한 사람을 인도하고 저녁에 한 사람을 깨우쳐 선한 사람이 많아지고 악한 사람이 적어지게 하여 조금이나마 회복을 도모할 날이 있기를 바랐는데, 얻지 못할 뿐 아니라 도리어 잃게 될 줄을 어찌 알았겠으며, 더하지 못할 뿐 아니라 도리어 덜게 될 줄을 어찌 알았겠는가! 하늘이 화를 내린 것을 후회하지 않아서 할 수 있는 것이 없다면 마땅히 손을 잡고 발을 밟아168) 채찍을 나란히 하여 수레를 함께 타기를 마치 학린(涸鱗)169)이 서로 적셔주고 탕슬(湯蝨)170)이 서로 위로하는 것처럼 하여 살아서는 함께 도원(桃源)171)의 백성이 되고 죽어서는 함께 소흥(紹興)172)의 선비가 되는 것, 이것이 평소 서로 기대했던 뜻이 아니던가? 어찌하여 갑자기 이 세상과 우리들을 버림이 이와 같은가!고개(영남)의 구름은 막막하고 호수(호남)의 바람은 쓸쓸하네. 천고의 강개한 마음에 산은 참담해 하고 물은 오열하네. 천 리에서 제문 지어 슬픈 마음 깃들이네. 嗚呼。子厚何以止於斯。自古至今。賢人志士。未得其壽而中途夭逝者。何限。而今於子厚之逝。最有所痛惜者。嗚呼。投閒置散。淹到落莫。終之以嶠南一布衣。未足爲子厚惜也。席門磬室。蕭散淡泊。未見有身後庇眷之策。未足爲子厚惜也。胤子年壯。旣冠未室。雖若可憾。而葛屨冠緌。物必有耦。亦不足爲子厚惜也。嗚乎。天地飜覆。日星晦沈。吾輩殘生。固不足爲有無。而庶幾宿德雅望多少人。參錯在世間。使之朝牖一人。暮誨一人。至於爲善者多。爲惡者少。而冀有一分圖回之日。豈知不惟不得而反以失之。不惟不添而反以損之耶。天不悔禍。如無可爲。則當携手躡足。聯鞭同車。如涸鱗之相濡。湯蝨之相弔。生則俱爲桃源之民。死則共爲紹興之儒。此非平日相期之意耶。如何如何。遽棄斯世與吾儕若是耶。嶺雲漠漠。湖風瑟瑟。千古慷慨。山慘水咽。緘辭千里。以寓一哀。 권자후(權子厚) 권기덕(權基德, 1856~1898)을 말한다. 자는 자후, 호는 삼산(三山), 본관은 안동(安東)이다. 발을 밟아 만류한다는 뜻이다. 한신(韓信)이 스스로 왕이 되겠다며 사자를 보내자 한 고조(漢高祖)가 화를 내며 꾸짖었는데, 진평(陳平)이 고조의 발을 밟으며 귓속말로 형세가 불리하니 왕으로 봉해주라고 한 고사에서 나온 말이다. 《史記 卷92 淮陰侯列傳》 학린(涸鱗) 수레바퀴 자국에 고인 물에 있는 물고기로 어려움에 처한 상황을 말한다. 《장자》 〈외물(外物)〉에 수레바퀴 자국[涸轍]에 고인 얕은 물속에서 말라 들어가며 헐떡이는 붕어[鮒魚]가 약간의 물[斗升之水]만 부어 주면 살 수 있겠다고 하소연하는 내용이 있다. 탕슬(湯蝨) 벼룩과 이로, 서로 위로한다는 말이다. 《회남자(淮南子)》 〈설림훈(說林訓)〉에 "목욕할 채비가 갖추어지면 벼룩과 이가 서로 애도한다.[湯沐具而蟣蝨相弔]"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도원(桃源) 도연명(陶淵明, 365~427)의 〈도화원기(桃花源記)〉에서 일컬은 무릉도원(武陵桃源)을 말한다. 진(秦)나라 화를 피하여 들어간 사람들이 살았던 세상 밖의 별천지이다. 소흥(紹興) 중국 남송(南宋) 고종(高宗)의 두 번째 연호로, 1131~1162년에 해당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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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응장에 대한 제문 祭李應長文 영남은 옛날부터 우리나라의 추로(鄒魯)173)라 일컬어져 근세 이래로 노성하고 덕 있는 분들이 이어져 빛났으니, 군은 그들과 동일한 부류의 한 무리 사람이 아니겠는가.소년 때부터 뛰어난 재주로 기상이 우뚝해 범상치 않았고, 문로가 이미 발라 앞길이 바야흐로 펼쳐지게 되었네. 종산(鍾山)에 가을 비 내리고 영귀정에 봄바람 불면 천 리에서 서로 찾아와 정답게 창수하였고, 쌍계사에서 만나기로 약속하였으나 난리를 만나 이루지 못하여 난리가 고요해지기를 기다려 다시 끊임없이 왕래하기를 바랐는데, 조금 더 머물러 기다리지 않고 갑자기 이렇게 돌아가실 줄 어찌 알았겠는가. 친구들은 돌아가시고 시국의 상황은 날로 심해지니 외로이 벗들을 떠나 쓸쓸히 지내는 나는 누구와 함께하겠는가? 옻칠은 벗겨지고 아교는 떨어지며, 거문고는 부서지고 줄은 끊어져174) 영남의 달과 호남의 구름이 천고에 아득해 졌네. 인하여 들어와 제사 드리며 감히 이것으로 영결을 고하네. 嶠南古稱東方鄒魯。而近世以來。老成宿德。繼以彬彬焉。君其非流亞一隊人耶。少年英才。磊落不群。門路旣正。步趨方張。鍾山秋雨。詠亭春風。千里相尋。唱酬款款。雙溪留約。遘亂未就。冀待風靜。復圖源源。豈知不少留待而遽爾大歸耶。知舊凋落。時象日甚。煢煢離索。誰與爲徒。漆分膠折。琴破絃斷。嶺月湖雲。千古茫茫。因人致侑。敢此告訣。 추로(鄒魯) 추(鄒)와 노(魯)는 모두 춘추 시대의 국명(國名)으로, 공자는 노나라에서 태어났고 맹자는 추나라에서 태어났다. 이 때문에 예교(禮敎)와 학문을 숭상하는 지방을 일컫게 되었다. 옻칠은……끊어져 교칠(膠漆)처럼 친밀한 사이와 백아절현(伯牙絶絃)의 고사를 인용한 말이다. 교칠은 후한(後漢)의 진중(陳重)과 뇌의(雷義)가 돈독한 우정을 발휘하자, 사람들이 "교칠이 굳다고 하지만, 진중과 뇌의의 우정만은 못하다.[膠漆自謂堅, 不如雷與陳.]"라고 한 것이고, 백아절현은 춘추 시대의 백아(伯牙)가 거문고를 잘 탔는데, 그의 벗 종자기(鍾子期)가 거문고 소리를 잘 감상하였다. 백아가 거문고를 타면서 고산(高山)에 뜻을 두면 종자기가 "높고 높기가 마치 태산과 같도다![峨峨兮若泰山]"라고 하였고, 또 유수(流水)에 뜻을 두면 "넓고 넓기가 마치 강하와 같도다![洋洋兮若江河]"라고 하였는데, 종자기가 죽자 백아는 자신의 거문고 소리를 들을 사람이 없다 하여 줄을 끊고 다시는 거문고를 타지 않았다고 한다. 《列子 湯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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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의위 연정 이공 묘지명 忠義衛蓮汀李公墓碣銘 공의 성은 이씨(李氏), 휘는 상후(相厚)193), 자는 성징(聖徵), 호는 연정(蓮汀)이다. 시호 양평공(襄平公) 휘 원계(元桂)인 완풍군(完豊君)의 후손이다. 양평공은 완산군(完山君)을 낳았으니, 시호는 양도공(襄度公), 휘는 천우(天祐)이다. 양도공은 여양군(驪陽君) 휘 굉(宏)을, 여양군은 월성군(月城君) 휘 명인(明仁)을, 월성군은 부사맹(副司猛) 휘 효상(孝常)을, 부사맹은 부사과(副司果) 휘 세원(世元)을, 부사과는 사마(司馬) 휘 학(鶴)을, 사마는 진사 휘 응종(應鍾)을, 진사는 휘 극조(克操)를, 극조는 충의위(忠義衛) 휘 전(腆)194)을 낳았다. 이분은 강수은 선생(姜睡隱先生)의 문인으로, 문학과 의로운 행의로 세상에서 추중을 받았으니 바로 공의 증조부이다. 조부는 충의위(忠義衛) 휘 형진(亨震)으로 집안의 가르침을 받아 문학과 행실로 이름이 났다. 부친은 휘 옹(滃)195)이니, 충의위이다. 모친은 장택 고씨(長澤高氏)로, 부회(傅誨)의 따님이다. 생부(生父)는 휘 집(濈)이며, 생모는 영광 정씨(靈光丁氏) 도(燾)의 따님으로, 숙묘(肅廟) 을묘년(1675, 숙종1) 1월 11일에 영광(靈光) 묘장리(畝長里)에서 공을 낳았다.기우(氣宇)가 의젓하며 재능과 성품이 남보다 뛰어났다. 일찍 아버지를 여의였기에 따라가려고 해도 미치지 못하는 슬픔을 깊이 가슴에 간직하여 아침저녁으로 사당에 참배하고 삭망(朔望)에는 산소를 참배하였는데 비바람이 치든 춥든 덥든 폐한 적이 없었다. 해마다 기일이 되고 봄가을 우로(雨露)가 내리면 애통하고 서글픈 마음에 마치 부친이 살아계신 듯한 정성을 다하였다. 지극한 효성으로 어머니를 섬겼는데 고기 잡고 나무하고 변변치 않은 음식이나마 정성을 다해 봉양하여 기쁘게 해드렸으며 공경하는 마음으로 삼가고 조심하였다. 평소 의관을 반드시 단정히 하고 용모를 반드시 삼갔는데 엄숙하고 숙연하여 보는 사람들이 공경하는 마음을 일으켰다. 사람을 대할 적에는 너그럽고 간이(簡易)하여 준엄하거나 기이한 행실이 있는 것을 보지 못했다. 그러나 의리와 시비의 근원에 대해서는 또 주저하거나 사정을 봐주는 일이 있지 않았다. 여러 경서에 통달하고 제자백가에 박식하여 체득하고 실천하며 발휘하고 확충하였다. 세상의 변화와 시상(時象)에 대해서는 그윽하고 깊으며 은미하고 소홀한 곳에 통달하지 않음이 없었지만 마치 모르는 듯이 항상 침묵을 지켰다. 찾아와 묻는 사람이 있으면 번번이 말하기를 "한쪽으로 치우친 지각은 곤충도 오히려 잘할 수 있으니, 이 어찌 귀할 것이 있겠는가. 성인은 먼저 아는 것을 지혜로 삼지 않고 사람이 지켜야 할 도리에 힘쓰는 것을 지혜로 삼았다."라고 하였다. 관직은 충의위(忠義衛)를 지냈으니 이는 선대의 음덕(蔭德)으로 인한 것이다. 어느 해 12월 29일에 졸하였다. 능주(綾州)의 남쪽의 한 방리(坊里) 연화봉(蓮花峯) 부간좌(負艮坐)의 언덕에 장사 지냈다. 배위(配位)는 이천 서씨(利川徐氏)로, 응상(應祥)의 따님이다. 묘소는 남평(南平) 철천(鐵川) 갑좌(甲坐)에 있다. 계비(繼妣)는 무송 유씨(茂松庾氏)로, 석량(碩良)의 따님이다. 묘소는 건위(乾位) 아래에 합장하였다. 후사가 없어 종부제(從父弟) 상회(相檜)의 아들 일훈(一薰)196)을 양자로 삼았고, 딸은 풍산(豊山) 홍찬동(洪贊東)에게 출가하였다.아, 공은 왕실 계통의 훌륭한 가문으로 문망(門望)과 명성은 세상에 자랑할 만하고 문학과 재능은 당시에 주선(周旋)할 수 있었으니, 전국 시대의 공자 가운데 제(齊)나라의 전문(田文), 조(趙)나라 조승(趙勝)197)과 같다고 하더라도 누가 불가하다고 하겠는가. 하지만 도리어 남쪽 변방의 적막한 물가에 광채를 감추고 자취를 거두어, 온포(縕袍)로 패옥(珮玉)을 대신하고 단출한 음식을 진수성찬처럼 여겨 아득히 초야에 은둔하며 한가로이 지내다가 생을 마감하였으니, 그 훌륭한 기품과 뛰어난 흥취는 먼 후대에도 옷깃을 여미게 할 것이다. 그 재주가 이처럼 높지만 덕으로써 거느리고, 그 지혜가 이처럼 밝지만 어리석음으로 지켰다. 사람이 지켜야 할 도리를 힘쓰는 것을 지혜로 삼고 먼저 아는 술수를 귀함으로 여기지 않았으니, 그 바른 학문은 속일 수 없을 것이다. 세상 사람들은 말단적인 참위(讖緯)나 술수(術數)에 분주하지만 스스로 터득한 자는 경계할 줄을 알 것이다.묘소에 오래도록 묘표가 없었는데, 6대손 이기백(李琪白)이 종친들과 도모하여 돌을 깎아 비석을 세우려 하면서 후면에 새길 글을 청하였다. 내가 감히 합당한 사람이 아니라고 사양하지 못하였다. 다음과 같이 명을 짓는다.하늘이 밝은 운수를 열어 天啓煕運천명이 이어지네. 寶籙綿綿공의 아들과 손자 公子公孫후손이 많고 많네. 冑支兟兟묘장리에 은거하여 畝長菟裘세상 위한 도모 빛났네. 世猷赫然고상하게 멀리 떠났으니 高尙遐擧밝은 시대 일민이었네. 昭代逸民연화산이 어디인가 蓮花何山해마다 봄풀이 자라네. 春草年年아, 너희 초동, 목동들아 嗟爾樵牧베지도 자르지도 말라. 勿蒸勿薪 公姓李。諱相垕。字聖徵。號蓮汀。完豊君諡襄平公諱元桂之後也。襄平生完山君諡襄度公諱天祐。襄度生驪陽君諱宏。驪陽生月城君諱明仁。月城生副司猛諱孝常。司猛生副司果諱世元。司果生司馬諱鶴。司馬生進士諱應鍾。進士生諱克操。克操生忠義衛諱㙉。以姜睡隱先生門人。文學行義。爲世推重。卽公之曾祖也。祖諱亨震忠義衛。服襲庭訓。文行著聞。考諱滃忠義衛。妣長澤高氏傅誨女。生考諱濈。妣靈光丁氏燾女。以肅廟乙卯正月十一日生公于靈光畝長里。氣宇疑重。才性過人。早喪所怙。深懷靡逮之痛。晨夕謁廟。朔望展墳。風雨寒暑。未嘗廢弛。歲序諱日之臨。春秋雨露之濡。哀傷感惻以盡如在之誠。事母至孝。漁樵菽水。怡愉洞屬。平居冠服必勅。容色必謹。儼然肅然。瞻者起敬。及至接人。寬弘簡易。不見有峻絶阻異之行。然於義利是非之原。又未有依違假借也。淹貫群經。博洽諸子。體認踐履。發揮展拓。至於世變時象。幽深微忽。無不通曉。而恒居沈默。若無所知也。人有來問者。輒曰。一偏知覺。昆蟲猶有能之。此奚足貴乎。聖人不以先知爲知。而以務民之義爲知也。官忠義衛。蓋其世蔭也。以某年十二月九日卒。葬綾州南一坊蓮花峯負艮之原。配利川徐氏應祥女。墓南平鐵川甲坐。系配茂松庾氏碩良女。墓祔乾位下。無嗣。取從父弟相檜子一薰爲後。一女適豊山洪贊東。嗚呼。公以璿派華冑。門望聲猷。足以誇張於世。文學才華。足以周旋於時。如列國公子齊之文趙之勝。誰謂不可。而乃能潛光斂迹於南荒寂寞之濱。以縕袍代珮玉。箪瓢視列鼎。邈然遐擧。優遊卒歲。其偉韻逸趣。百世之下。可以斂衽。其才若是高矣。而將之以德。其知若是明矣。而守之以愚。以務民之義爲知。不以先知之術爲貴。其學問之正。不可誣矣。世之營營於讖緯術數之末。而自以爲得者。可以知戒矣。墓久無表。六代孫琪白謀諸宗。伐石樹隧。請其所以刻諸陰面者。余不敢以非其人辭。銘曰。天啓煕運。寶籙綿綿。公子公孫。冑支兟兟。畝長菟裘。世猷赫然。高尙遐擧。昭代逸民。蓮花何山。春草年年。嗟爾樵牧。勿蒸勿薪。 상후(相厚) 《송사집(松沙集)》 권39 〈연정이공묘지명(蓮汀李公墓誌銘)〉에는 '厚'가 '垕'로 되어 있다. 전(腆) 《송사집(松沙集)》 권39 〈연정이공묘지명(蓮汀李公墓誌銘)〉에는 '㙉'으로 되어 있다. 옹(滃) 《송사집(松沙集)》 권39 〈연정이공묘지명(蓮汀李公墓誌銘)〉에는 '潝'으로 되어 있다. 일훈(一薰) 《송사집(松沙集)》 권39 〈연정이공묘지명(蓮汀李公墓誌銘)〉에는 '一'이 '日'로 되어 있다. 제(齊)나라의……조승(趙勝) 전국 시대 제(齊)나라의 맹상군(孟嘗君) 전문(田文), 위(魏)나라의 신릉군(信陵君) 위무기(魏無忌), 조(趙)나라의 평원군(平原君) 조승(趙勝), 초(楚)나라의 춘신군(春申君) 황헐(黃歇)이 모두 재상 지위에 있으면서 선비들을 좋아하여 문하에 식객 3천을 두었다. 《史記 孟嘗君列傳, 平原君虞卿列傳, 魏公子列傳, 春申君列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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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국서【계】에게 답함 答黃國瑞【稽】 이별한 뒤 언제 만났는지 아득하여 돌이켜 기억할 수도 없습니다. 돌아보건대 이렇게 천한 목숨이 지난 몇 년간 어려운 처지에 놓여 있거나97) 후미진 구석을 떠돌거나 문을 닫고 병으로 몸을 가누지 못하는 상황을 겪지 않은 적이 없습니다. 이곳은 사방의 벗들과 평소에 교유하던 곳과 비교하면 아득하기가 마치 세상 소식과 막혀있는 듯합니다. 뜻하지 않게 노형(老兄)께서 그래도 이렇게 저를 잊지 않고 버리지 않고 친필로 쓰신 편지를 보내주셨는데, 장황하고 자세하여 매우 간절하였습니다. 편지를 펴놓고 여러 번 읽어보니 저도 모르게 고질병이 몸에서 떨어져 나가 다시 옛날에 모시고 뒤따르던 때의 기분이 완연합니다. 감격스럽기 그지없어 대할 방도를 모르겠습니다. 서신을 통하여 부모님을 모시고 새해를 맞아 모든 복이 모인 것을 알았습니다. 신명이 덕을 지닌 군자를 도와주는 것이 이치상 응당 이와 같아야 할 것입니다. 우러러 축하드리며 실로 저의 간절한 마음에 부합합니다. 아우는 죽을 지경에 이르러 숨쉬기도 벅차고 날이 갈수록 더욱 쇠약해져 애타는 심정을 달래면서 그저 빈궁한 집에서 비탄에 잠길 뿐입니다. 선대부장(先大夫丈)의 묘갈문(墓碣文)에 관한 일로 또 이미 중암 선생(重菴先生)98)을 찾아뵈었습니까? 어버이를 현창(顯彰)하는 정성이 사람을 감탄하여 우러러보게 합니다. 아우는 참으로 하찮은 존재이건만 선생께서 어떻게 아셨겠습니까. 이는 반드시 형들이 종유하는 사사로운 정 때문에 곡진하게 말씀드렸기 때문일 것입니다. 듣자니 놀라워 얼굴이 붉어집니다. 一別會在何時。茫然不可追記矣。顧此賤命。年來經歷。無非雲雷水山。流離僻隅。杜門病廢。此於四方知舊平昔交遊之地。漠然若隔世消息。不謂老兄猶且不忘不遺。親賜手書。張皇覼縷。極其懇惻。披玩三復。不覺沈痾之祛身。而完然復是昔年陪從時氣味。感領萬萬。不知所以爲對。仍審侍省迓新。百福湊集。神相愷悌。理應如此。仰賀區區實副懇情。弟風樹殘喘。日益衰頹。撫念耿耿。只有窮廬悲歎而已。先大夫丈碣文。又已奉謁於重菴先生耶。顯親之誠。令人嘆仰。如弟何等蟻蝨。而先生何從而知之。此必兄輩。以從遊之私。而曲爲之說耶。聞之瞿然騂顔。 어려운……있거나 원문은 '운뢰수산(雲雷水山)'이다. '운(雲)'과 '뢰(雷)'로 이루어진 것이 둔괘(屯卦)이고 '수(水)'와 '산(山)'으로 이루어진 것이 건괘(蹇卦)로서 모두 어렵고 힘든 상황을 만나 곤고(困苦)한 처지에 놓인 것을 상징한다. 중암 선생(重菴先生) 중암은 김평묵(金平默, 1819~1891)의 호이다. 자는 치장(稚章), 본관은 청풍(淸風)이다. 화서(華西) 이항로(李恒老, 1792~1868)와 매산(梅山) 홍직필(洪直弼, 1776~1852)의 문인이다. 저서로는 《중암집》이 있다. 시호는 문의(文懿)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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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경지【재홍】에게 답함 答鄭敬之【在洪】 두보(杜甫)의 시(詩)에 "봄이 오면 오래도록 회포를 펼치리라고 생각했건만, 늙어가면서 친하게 알고 지내는 사람 얼굴 보기 드물다."96)라고 하였습니다. 아우는 궁벽한 골짜기에서 움츠리고 지내서 찾아오는 사람이 전혀 없으니 외롭고 쓸쓸하여 마음을 가눌 길이 없습니다. 매번 이 노인의 시는 오로지 저를 위해서 마련하고 지은 것으로 생각하고 한번 읊조리고 한번 탄식하면서 그럭저럭 자신을 위로하였습니다. 다행스럽게 노형(老兄)께서 뭇사람이 버린 상황에서도 저를 버리지 않고 글과 술로 저를 맞이하고 뛰어난 시로 저에게 넌지시 간하며 저에게 안부를 묻고 강론과 토의로 저를 면려하는 것이 느리지도 않고 빠르지도 않으며 정겨움이 넘쳐났습니다. 그 뜻을 어찌 잊을 수 있으며, 그 뜻을 어찌 소홀하게 여길 수 있겠습니까. 두보가 생각만 하고 이루지 못한 것을 오늘에 이르러 내가 이룰 수 있으리라고 어찌 알았겠습니까. 위로되는 마음 가득합니다. 보내신 서신에, "눈앞에 놓인 어지러운 시속(時俗)은 별달리 다스릴 방도가 없고 벗들과 의리를 강구하는 것처럼 급박한 일이 없다."라고 하였는데, 이것은 참으로 그렇습니다. 그러나 지금과 같은 세상에서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비록 근심이 없는 태평한 시기일지라도 선비가 추구해야 하는 것은 이 일뿐입니다. 이것 외에는 추구할만한 일이 하나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군자는 이유를 자기에게서 찾고 소인은 남에게서 찾습니다. 그러나 소인이 구하는 것은 얻는 데 도움이 되지 못하니 외부에 있는 것을 구하기 때문이고, 군자가 구하는 것은 얻는 데 도움이 되니 자기에게 있는 것을 구하기 때문입니다. 하물며 우리에게 남은 생애가 지금 세상에 살고 있으니 어찌 뜨락 밖으로 한 발자국이라도 내딛는 것을 용납하겠습니까. 문을 걸고 담 구멍을 막아 세상과 서로를 잊으며 내 옷을 입고 내 음식을 먹으며 내 책을 읽어 늘그막에 조그마한 공을 거두는 것이 가장 좋은 요결(要訣)입니다. 형께서도 이미 잘 알고 계시리라고 생각합니다. 杜子詩曰。春來準擬開懷久。老去親知見面稀。弟跧滯窮峽。過終絶罕。踽踽凉凉。無以爲懷。每疑此老詩偏爲此生準備而作也。一諷一歎。聊以自慰。幸有老兄不棄於衆棄之中。邀我以文酒。諷我以瓊律。訊我以寒暄。勉我以講討。不徐不疾。款款津津。其義何可忘。其義何可少耶。杜子所以準擬而未就者。安知至於今日而我得就之耶。滿心慰慰。來喩以爲目今俗擾。別無所營。從友講義。莫此爲急。此固然矣。然非惟今俗爲然。雖在昇平無虞之時。士之所當求者。此事而已。外此了無一事可求者。是以君子求諸己。小人求諸人。然彼求無益於得。求在外故也。此求有益於得。求在我故也。況吾輩殘生。坐在今日世界。豈容一步於門庭之外耶。杜門塞竇。與世相忘。衣吾衣。食吾食。讀吾書。以收桑楡萬一之功。此是太上要訣。想兄已諒悉矣。 봄이……드물다 두보의 〈십이월일일삼수(十二月一日三首)〉 가운데 3수에 해당하는 구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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敎旨金膺相爲折衝將軍行龍驤衛副護軍者道光二十五年正月 日 [施命之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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敎旨金膺相爲嘉善大夫同知中樞府事兼五衛將者咸豐五年二月 日 [施命之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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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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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차계장류

1903년 이병덕(李秉德) 소지(所志) 고문서-소차계장류-소지류 법제-소송/판결/공증-소지류 癸卯三月日 李秉德 巡相閤下 癸卯三月日 李秉德 全羅道觀察使 전라북도 전주시 使[着押] 7개(적색, 정방형) 전주 송진택가 전주역사박물관 박병호, 『韓國法制史攷 : 近世의 法과 社會』, 법문사, 1974. 최승희, 『增補版 韓國古文書硏究』, 지식산업사, 1989. 박병호 외, 『호남지방 고문서 기초연구』, 한국학중앙연구원, 1999. HIKS_Z041_01_A00022_001 1903년 3월에 이병덕(李秉德)이 순찰사(巡察使)에게 올린 소지(所志). 1903년 3월에 이병덕(李秉德)이 순찰사에게 올린 소지이다. 작년(1902) 11월에 이병덕은 태인현 남촌면(南村面) 고당산(古堂山)에 그의 처를 장사지냈는데, 태인에 사는 최영대(崔永大)가 치표(置標)해 둔 곳과는 백여 보 떨어진 곳이었다. 이병덕은 장사를 치를 때 돌 때문에 임시로 안치하고 돌아가 날이 풀리면 면례(緬禮)하려고 하였는데 봄이 되자 노모의 숙환이 심해져 그러지 못하였다. 그러자 최영대가 산재관(山在官)에게 이병덕을 무소(誣訴)하는 바람에 이병대는 잡혀가 독굴을 당하게 되었다. 이에 이병덕은 골짜기 건너에서 앉으나 서나 보이지 않는 백보 이상 떨어진 곳의 치표 때문에 강제로 금장(禁葬)하는 것은 법의(法意)가 아니며, 병환 중인 노친의 봉양을 위해서 이장할 기한을 넉넉히 달라고 정소(呈訴)하였다. 이에 순찰사는 표와 무덤이 다르고 또 수백여 보 떨어진 곳은 강제로 굴이(掘移)를 할 수 없으니 갇혀 있는 자를 즉시 석방한 후 형지(形止)를 보고하라고 산재관(山在官)에게 제음(題音)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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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55년 김응상(金膺相) 고신(告身) 4 고문서-교령류-고신 정치/행정-임면-고신 咸豐五年二月 日 哲宗 金膺相 咸豐五年二月 日 哲宗 金膺相 서울특별시 종로구 施命之寶 1개(적색, 정방형) 부안 돈계 김응상 후손가 부안 돈계리 김응상 후손가 1855년(철종 6) 2월에 왕이 김응상을 가선대부 행용양위호군 겸 오위장으로 임명하면서 내려 준 교지 1855년(철종 6) 2월에 왕이 김응상(金膺相)을 가선대부(嘉善大夫) 행용양위호군 겸 오위장(行龍驤衛護軍兼五衛將)에 임명(任命)하며 내려 준 교지(敎旨)이다. 가선대부는 종2품 문무관(文武官)에게 주던 품계(品階)이다. 용양위(龍驤衛)는 오위(五衛) 중 하나로 서울의 동부와 경상도의 병력을 관할(管轄) 하던 중앙의 군사조직이다. 그리고 호군(護軍)은 정4품직이고 오위장(五衛將)은 오위(五衛)의 군사를 통솔하던 정3품의 무관직(武官職)이다. 한편 호군에는 여러 등급이 있었다. 상호군(上護軍)은 정3품, 대호군(大護軍)은 종3품, 호군은 정4품, 부호군(副護軍)은 종4품이다. 따라서 김응상은 종2품의 품계를 지니고 있으면서 정4품의 관직을 받은 셈이다. 이처럼 자신이 지닌 품계보다 낮은 관직에 임명되는 경우를 계고직비(階高職卑)라고 하였으며, 관직 앞에는 반드시 '행(行)'이라고 쓰도록 했다. 그리고 그와는 반대인 경우, 즉 자신이 지닌 품계보다 높을 관직에 임명되는 계비직고(階卑職高)의 경우에는 관직명 앞에 수(守)라고 썼다. 이를 행수법(行守法)이라고 하였다. 한편 김응상의 오위장 임명 사실은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1855년(철종 6) 2월 19일조에 "兵批 判書洪鍾應進 以洪在喆南獻敎爲知事 吳取善爲同知 趙然興·兪章煥爲副摠管 尹致膺爲僉知 尹義儉爲兼訓鍊都正 尹致勛·朴長晉·金膺相·安壽祿·王道林爲五衛將 趙秉協 李承游爲文兼, 李興洙爲部將 方禹龍爲守門將 柳光魯爲慶尙右兵使 金鎭浩爲高嶺僉使 黃基崙爲蝟島僉使 金玹基爲德津萬戶"라고 실려 있는 기록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김응상은 그해, 즉 1855년에 세 번의 고신을 추가로 받게 되는데, 이때 받은 관직을 차례로 살펴보면, 가선대부(嘉善大夫), 가선대부(嘉善大夫) 행용양위호군(行龍驤衛護軍), 가선대부(嘉善大夫) 동지중추부사 겸 오위장(同知中樞府事兼五衛將) 등이다. 현재 부안(扶安)에 있는 김응상의 후손가에는 김응상의 고신 8점을 포함하여 그의 처와 부, 조, 증조가 받았던 고신 또는 추증교지 12점, 김응상의 호구단자 7점, 그리고 김응상의 아들 김양묵(金養黙)의 고신 16점과 차첩(差帖) 2점, 문과 홍패(紅牌)와 시권(試券) 등이 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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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 호조 참판 경신암 오공 묘갈명 贈戶曹參判敬愼庵吳公墓碣銘 정(鄭)나라에 기근이 들자 자피(子皮)는 한 가구당 1종(鍾)의 곡식으로 구휼하였고,198) 송(宋)나라에 기근이 들자 자한(子罕)이 시행하였지만 이를 기록하지 않았으니,199) 군자가 말하기를 "정(鄭)나라의 한씨(罕氏)와 송(宋)나라의 악씨(樂氏)는 가장 마지막에 망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아, 옛날 선민(先民)이 의리를 귀하게 여기고 재물을 가볍게 여겼던 기풍이 먼 후대에 늠연히 사람으로 하여금 탄식을 자아내게 하네.우리 고장에 근고(近古)에 살았던 경신암(敬愼庵) 오공(吳公), 휘 만상(萬祥), 자 회일(會一)은 바로 또한 한씨(罕氏)와 악씨(樂氏)에 버금갈 것이다. 큰 흉년을 만나 곳간의 곡식을 모두 내놓아 구휼하였으니, 이 덕분에 살아난 사람이 매우 많다. 지금까지도 향리 사이에서 미담으로 자자하게 전해진다. 자손이 번성하고 문학이 뛰어났으니, 이른바 마지막에 망한다는 말이 어찌 오직 고인에게만 해당하겠는가.공은 성품이 효성스러워 평소 부모를 시봉(侍奉)함에 지물(志物)의 봉양200)에 빠뜨림이 없었다. 하루는 밖에서 취하여 돌아오자 그 부친이 매우 꾸짖었는데, 이후로는 한 모금의 술도 입에 대지 않았다. 부유한 집안에 생장하였지만 화려한 것을 좋아하지 않아 의관이 한사(寒士)와 같이 수수하였다.병자년(1876, 고종13) 9월 13일에 졸하니, 탄생한 해인 병신년(1836, 헌종2)으로부터 41년이 된다. 묘는 고을의 품평(品坪) 앞 몰니등(沒泥嶝) 병좌(丙坐)의 언덕으로 이장하였다.오씨(吳氏)는 관향이 보성(寶城)이니, 고려(高麗) 평장사(平章事) 연총(延寵)이 그 시조이다. 위대한 공훈과 높은 관작은 대대로 이어졌다. 중엽에 이르러 휘 방한(邦翰)이 있었으니, 임진년(1592, 선조25)에 순절(殉節)하여 병조 참판에 추증되었다. 증조 휘 세관(世觀)은 호조 참판에, 조부 휘 태유(泰有)는 사복시 정(司僕寺正)에 추증되었고, 부친 휘 석규(錫圭)는 좌승지에 추증되었다. 모친은 공주 이씨(公州李氏)로, 정후(政厚)의 따님이다. 공은 창녕 조씨(昌寧曺氏) 광엽(光葉)의 따님에게 장가들었는데, 유순하고 얌전하여 규문의 법도에 어긋남이 없었다. 모두 두 아들을 두었으니, 수남(壽南)과 수극(壽極)이다. 장자의 아들은 응조(應祚)이고, 차자의 아들은 경조(庚祚), 병조(秉祚)이다. 증손과 현손 이하는 다 기록하지 않는다. 증손 재홍(在鴻)은 나와 죽마고우로, 어느 날 그 조카 창호(昌鎬)를 시켜 지은 가장(家狀)을 지어 가지고 와서 묘갈명을 청하였다. 어찌 차마 사양하겠는가. 다음과 같이 명을 짓는다.검소함으로 자신의 몸가짐으로 삼았고 儉以持己은혜를 베풀어 남에게 미쳤네. 惠以及人남은 명성 많은 사람에게 전해지니 遺芳萬口남은 경사 천추에 영원하리라. 餘慶千春 鄭饑而子皮賙粟戶一鍾。宋饑而子罕施而不書。君子曰鄭之罕。宋之樂。其後亡者乎。噫。古昔先民。貴義輕財之風。百世之下。凜凜然令人興歎。吾鄕近古敬愼庵具公。諱萬祥。字會一。卽亦罕氏樂氏之流亞也。遭歲大無。傾囷恤匱。賴活甚衆。至今藉藉爲鄕里間美談。後嗣蕃衍。文學蔚然。所謂後亡者。豈惟古人爲然。公性孝。平居侍奉。志物無闕。一日自外醉歸。其大人切責之。自後勺飮不入口。生長富饒。不喜華靡。冠服蕭然如寒士。丙子九月十三日卒。距丙申懸弧爲四十一。墓移窆州之品坪前沒泥嶝丙坐原。吳氏貫寶城。麗朝平章事延寵。其鼻祖也。偉勳嵬爵。奕世相望。至中葉。有諱邦翰。壬辰立憧。贈兵曹參判。曾祖世觀。贈戶曹參判。祖泰有。贈司僕寺正。考錫圭。贈左承旨。妣公州李氏政垕女。公娶昌寧曺氏。光葉其考也。柔婉靜嘉。閫範無闕。擧二男曰壽南壽極。長房男應祚。次房男庚祚秉祚。曾玄以下不盡錄。曾孫在鴻。余竹馬舊交世。一日伻其從子昌鎬。以所著家狀。來請碣銘之文。嗚呼。豈忍辭哉。銘曰。儉以持已。惠以及人。遺芳萬口。餘慶千春。 정(鄭)나라에……구휼하였고 정(鄭)나라 자전(子展)이 죽고 아들 자피(子皮)가 부친을 이어 상경의 지위를 계승하였다. 당시 정나라에 기근이 들었는데 아직 보리가 익기 전이라 백성들이 고통을 받고 있었다. 자피는 자전의 명으로 백성들에게 가구당 1종(鐘)의 곡식을 나누어 주었다. 이 때문에 백성들의 마음을 얻은 한씨(罕氏)는 국정을 장악하여 늘 상경으로 있었다. 《春秋左氏傳 壤公29年》 송(宋)나라에……않았으니 송(宋)나라 사성(司城) 자한(子罕)이 자피(子皮)의 소식을 듣고 말하기를 "선한 사람을 가까이하는 것이 백성이 바라는 바이다."라고 하였다. 송나라에도 기근이 들자 자한은 평공에게 공실의 곡식을 백성들에게 빌려줄 것을 요청하고, 모든 대부에게 곡식을 빌려주게 하였다. 사성씨는 곡식을 빌려준 뒤에 기록하지 않았는데, 이는 백성들에게 돌려받을 뜻이 없었다는 말이다. 진(晉)나라의 숙향(叔向)이 이 말을 듣고 "정나라의 한씨와 송나라의 악씨는 아마도 가장 나중에 망할 것이다." 하였다.《春秋左氏傳 壤公 29年》 지물(志物)의 봉양 지(志)는 양지(養志)로 어버이의 뜻을 받들어 어버이를 즐겁게 하는 것을 말하고, 물(物)은 의복ㆍ음식 등으로 어버이를 봉양하는 것을 말하는데, 둘 다에 소홀함이 없었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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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 통훈대부 사복시 정 경헌 홍공 묘갈명 贈通訓大夫司僕寺正敬軒洪公墓碣銘 공의 휘는 영환(永桓)이고, 자는 무경(武卿)이며, 경헌(敬軒)은 그의 호이다. 본관은 풍산(豊山)으로, 고려조(高麗朝)의 직학사(直學士) 경(慶)의 후손이다. 중엽에 휘 치(治)란 분이 있었으니, 학행으로 재랑(齋郞)에 제수되었다. 세상에서는 그를 일송(一松) 선생이라고 불렀다. 증조는 경고(景古)로, 덕을 숨긴 채 벼슬하지 않았다. 호는 침수정(枕潄亭)이고, 형조 참판에 추증되었다. 조부는 천규(天奎)이다. 부친은 이수(履洙)로, 효행으로 이름이 드러났다. 모친은 함풍 이씨(咸豊李氏)로, 두평(斗平)의 따님이다. 후비(後妣)는 진주 정씨(晉州鄭氏)로, 통덕랑(通德郞) 정최(鄭最)의 따님인데, 영묘(英廟) 기유년(1729, 영조5) 3월 2일에 우봉리(牛峯里)에서 공을 낳았다.순후하고 소박하며 신중하였고, 타고난 성품이 매우 순수하였다. 집이 가난하여 어버이를 봉양하기 위해 몸소 농사지으면서도 온화한 얼굴빛과 부드러운 용모를 잠시도 어김이 없었다. 어버이의 상을 당해서는 피눈물을 흘리며 지나치게 슬퍼하였으며 3년 동안 죽을 먹었다. 기일(忌日)이 되면 치재(致齋)를 극진히 하였으며 제기를 깨끗이 닦고 제수(祭需)를 장만하는 일은 반드시 직접 하였다. 세 아우와 낮에는 다정하게 마주 보며 밤에는 함께 잠을 잤다. 조용히 화락하게 지내며 일찍이 한마디 말에도 온화함을 잃은 적이 없었다. 머리가 하얗게 센 노년에 이르도록 한방에서 함께 지내고 먹었으며 분가(分家)하지 못하게 하였다.일찍이 말하기를 "'경(敬)' 한 글자는 배우는 자의 시작이자 끝이니, 잠시도 내 몸에서 떠나게 해선 안 된다."라고 하고, 마침내 재실(齋室)에 편액을 걸어 경계하고 반성하는 바탕으로 삼았다. 《소학(小學)》을 입신하는 터전으로 삼고 사서(四書)를 학문에 나아가는 지름길로 삼았으며, 정자(程子)와 주자(朱子)의 책까지도 탐구하고 연구하지 않음이 없었다. 그리하여 함양(涵養)하는 공부 가운데에서 체득하고 실천하는 데에서 미루어 확대하였다. 이 때문에 집에서나 고을에서나 일에 응하고 사람을 만날 적에 성대하게 자세하고 화평한 풍모가 있었다. 평생 깊이 스스로 명성을 감추고 남에게 자랑한 적이 없었으며 산림에서 한가하게 노닐다가 애오라지 생을 마감하였으니, 최상의 경지에서 덕을 수립하고 지극한 즐거움의 경지에서 노닌 것의 풍치와 격조를 대략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정종(正宗) 계축년(1793, 정조17) 9월 4일에 생을 마감하였다. 해하봉(海鰕峯)의 선영 오른쪽 언덕 사좌(已坐)에 장사 지냈다. 나중에 증손 홍필주(洪弼周)의 장수와 귀함으로 사복시 정에 추증되었다. 배위는 청주 한씨(淸州韓氏)로 숙인(淑人)에 추증되었으며, 명신(命新)의 따님으로 부덕(婦德)이 있었다. 공이 별세한 18년 뒤에 생을 마감하였다. 우봉촌(牛峯村) 뒤 남산(南山) 을좌(乙坐) 언덕에 장사 지냈다. 3남 1녀를 두었으니, 아들은 희찬(羲纘), 낙해(樂海), 백우(百禹)이고, 딸은 문혁진(文爀鎭)에게 출가하였다. 증손 이하는 다 기록하지 않는다.공의 현손 우방(祐邦)이 장차 제묘(題墓)201)하는 일을 하려고 한다며 나에게 그 후면에 기록할 글을 청하였다. 생각건대 미천하고 형편없는 사람이 실로 감당할 수 없지만, 교분이 소중하여 굳게 사양하기 어려운 점이 있었다. 다음과 같이 명을 짓는다.아, 이 넉 자의 봉분은 吁此四尺길한 분 묻힌 곳이네. 吉人之藏해하봉에 영령이 내려오니 鰕山降靈대대로 번창하리라. 永世厥昌 公諱永桓。字武卿。敬軒其號也。糸出豊山。麗朝直學士之慶後。中葉有諱治。以學行除齋郞。世稱一松先生。曾祖景古。隱德不仕。號枕潄亭。贈刑曹參判。祖天奎。考履洙。以孝著名。妣咸豊李氏斗平女。後妣晉州鄭氏通德郞最女。英廟已酉三月二日。生公于牛峯里。淳厚簡童。天稟甚粹。家貧養親。躬幹耕稼。怡色惋容。造次無違。及遭艱。泣血過毁。啜粥三年。遇忌日。極其致散。漑濯烹熟之節。必親爲之。與弟三人。晝則對床。夜則聯枕。從容湛樂。未嘗有一言失和。至老白首。一室同爨。不令析箸。嘗曰。敬之一字。是學者之成始成終。不可斯須去身。遂揭題齋顔。以爲警省之資。以小學爲立身田地。以四子爲進學蹊徑。至於程朱諸書。無不沈索硏究。體之於涵養之中。推之於踐履之際。是以其居家處鄕。應事接物。蔚然有慈詳豈弟之風。平生深自鞱晦。未嘗衒鬻於入。而婆娑邱林。聊以卒歲。其所以立於太上之門而遊於至樂之界者。風韻標致。槩可想也。正宗癸丑九月四日終。葬海鰕峯先隴右岡已坐。後以曾孫弼周壽貴。贈司僕寺正。配淸州韓氏贈淑人。命新女。有婦德。後公十八年而終。葬牛峯村後南山負乙之原。有三男一女。男羲纘。樂海。百禹。女文爀鎭。孫曾以下不盡錄。公玄孫祐邦。以將有題墓之役。請余誌其後。顧膚淺藐末。固不可以承當。而事契之重。有難牢讓。銘曰。吁此四尺。吉人之藏。鰕山降靈。永世厥昌。 제묘(題墓) 무덤에 죽은 자의 이름 등을 써서 표시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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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부

증 통정대부 승정원 좌승지 외재 김공 묘갈명 贈通政大夫承政院左承旨畏齋金公墓碣銘 공의 휘는 예길(禮吉), 자는 성택(聖宅), 호는 외재(畏齋)이다. 김씨(金氏)는 세계(世系)가 김해(金海)에서 나왔으니, 바로 가락국(駕洛國) 수로왕(首露王)의 후예이다. 고려(高麗) 때에 이르러 훈벌(勳閥)이 찬란하였다. 휘 서(湑)란 분이 계셨으니, 우리 태종(太宗) 때 분릉군(盆陵君)에 봉해지고, 백동사(白洞祠)에 배향되었다. 3대를 전해 내려와 휘 준손(駿孫)은 아우 휘 기손(驥孫), 일손(馹孫)과 더불어 모두 문과에 급제하였으므로 '김씨삼주(金氏三珠)'라고 불렸는데, 홍문관 직제학을 지냈고, 연천군(燕川君)에 봉해졌다. 이분이 휘 대유(大有)를 낳았으니, 호가 삼족당(三足堂)이다. 기묘년(1519, 중종14) 현량과(賢良科)에 급제하였는데, 소인들이 권력을 장악한 것을 보고 물러나 운문(雲門)의 우연(愚淵)에 은거하였으니, 바로 공의 9대조이다. 증조는 삼휘(三徽)로, 호가 취상당(翠相堂)이다. 의로운 행실로 세상에 드러났으며,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였다. 조부는 덕항(德恒)으로 호가 매곡(梅谷)인데, 덕을 숨기고 벼슬하지 않았다. 부친은 술회(述會)로, 호가 죽와(竹窩)이고, 수문장(守門將)을 지냈으며, 가선대부에 추층되었다. 모친은 정부인(貞夫人) 의성 김씨(義城金氏)로, 참봉 중화(仲華)의 따님이다. 영종(英宗) 병자년(1756, 영조32) 1월 15일에 금릉(金陵)의 삼인리(三仁里) 옛집에서 공을 낳았다.공은 타고난 성품이 뛰어나고 재기(才氣)가 영특하여 육경(六經)에 통달하였고 제자백가를 두루 섭렵하였다. 견문은 넓고 시문은 뛰어났으며, 더욱이 예학(禮學)에 조예가 깊어 상변(常變), 길흉(吉凶), 절문(節文), 도수(度數)에 대해서 정밀하게 생각하고 깊이 분변하여 훤히 이해하지 않음이 없었다. 이 때문에 원근의 사우들이 예에 의심스러운 점이 있으면 번번이 공에게 가서 물은 다음 결정하였다. 양친을 효도로 섬기되 기쁜 마음으로 공경하고 삼갔으며 뜻을 받드는 일과 물질로 봉양하는 일을 모두 지극히 하였다. 상례를 거행할 적에는 매우 슬퍼하였고 한결같이 고례(古禮)를 따랐다. 형제 다섯 사람 모두 문장과 덕행이 있었고, 함께 단란하게 지냈다. 형과 아우가 날로 매진하여(며) 조용히 화락하고 즐겁게 지내 온화한 기운이 넘쳤다. 심지어 친척이나 벗을 대할 적에도 온화하고 인자하며 자애롭고 은혜로워 각각의 사람들에게 그 마음을 얻었으므로 향리에 어떤 사람이 혹시 잘못을 하면 번번이 "아무 공이 알게 하지 말라."라고 하였으니, 이처럼 존중 받았다.순묘(純廟) 계미년(1823, 순조23) 12월 15일에 졸하였다. 나중에 손자 재환(在煥)이 귀하게 되자 공은 통정대부(通政大夫) 승정원 좌승지에 추증되었다. 묘소는 암천방(唵川坊) 황곡리(黃谷里) 당산(堂山) 병좌(丙坐)의 언덕에 있다. 배위는 숙부인(淑夫人) 강릉 유씨(江陵劉氏)로,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 유치일(劉致一)의 따님인데, 부덕(婦德)이 지극하였다. 4남 1녀를 낳았으니, 아들은 은직(殷直), 취직(就直), 응직(應直), 자직(宇直)이고, 딸은 하동(河東) 정인대(鄭仁大)에게 출가하였다. 손자 재영(在瑛), 재호(在瑚), 재련(在璉), 재순(在珣)은 장남의 소생이고, 재달(在達), 재방(在邦), 재홍(在洪)은 차남의 소생이며, 재업(在業), 재선(在善), 재흠(在歆), 재민(在敏)은 셋째 아들의 소생이고, 재환(在煥)은 관직이 예조 참판으로 넷째 아들의 소생이다. 증손과 현손 이하는 기록하지 않는다.증손 찬석(璨錫)이 가장(家狀)을 가지고 와서 묘지명을 지어 주기를 청하기에 사양하지 못하였다. 다음과 같이 명을 짓는다.연천의 고가요 燕川古家삼족당의 어진 후손이네. 三足賢孫효우로 가업을 이었고 孝友箕裘시례는 연원이 있네. 詩禮淵源황곡리의 산기슭에 黃谷之麓넉 자의 무덤이 있네. 四尺斧堂자손들이 번성하여 螽斯兟兟남은 복록 정히 영원하리라. 餘祿正長 公諱禮吉。字聖宅。號畏齋。金氏系出金海。卽駕洛國首露王之后也。至麗朝。勳閥煒燁。有諱湑。我太宗朝封盆陵君。享于白洞祠。三傳諱駿孫。與弟諱驥孫馹孫。俱登文科。稱金氏三珠。官弘文直提學。封燕川君。是生諱大有。號三足堂。已卯登賢良科。見群小用事。退隱於雲門之愚淵。卽公之九世祖也。曾祖三徽。號翠柏堂。行義著世。中司馬。祖德恒。號梅谷。有隱德不仕。考述曾。號竹窩。官守門將。贈嘉善。妣貞夫人義城金氏。參奉仲華女。英宗丙子正月十五日。生公于金陵之三仁里舊第。公天稟挺邁。才氣穎異。淹貫六經。涉躐諸家。聞見宏博。詞華斐蔚。尤邃於禮學。常變吉凶。節文度數。精思深辨。無不昭晣。是以遠近士友。禮有所疑。輒就公咨決焉。孝事二親。怡愉洞屬。志物俱至。執喪哀毁。一遵古禮。兄弟五人。皆有文行。對床連榻。爾征我邁。從容湛樂。和氣融融。以至待族戚接朋友。溫仁慈惠。各得其心。閭里間。人或有過。則輒曰。勿使某公知之。其見重如此。純廟癸未十二月十五日卒。後以孫在煥貴。贈通政大夫承政院左承旨。墓唵川坊黃谷里堂山丙坐原。配淑夫人江陵劉氏。同知致一女。婦德備至。生四男一女。男殷直。就直。應直。宇直。女適河東鄭仁大。孫男在瑛。在瑚。在璉。在珣。長房出。在達。在邦。在洪。二房出。在業。在善。在歆。在敏。三房出。在煥。官禮參。四房出。曾玄以下不錄。曾孫璨錫。奉家狀。請爲隧道表銘之文。辭不獲已。銘曰。燕川古家。三足賢孫。孝友箕裘。詩禮淵源。黃谷之麓四尺斧堂。螽斯兟兟。餘祿正長。

상세정보
저자 :
(편저자)
유형 :
고전적
유형분류 :
집부

가선대부 동지중추부사 손공 묘갈명 嘉善大夫同知中樞府事孫公墓碣銘 공의 휘는 시웅(始雄), 자는 미경(美卿), 호는 죽음(竹陰)이다. 손씨(孫氏)의 선조는 노(魯)나라 소공(昭公)이 망명길에 오를 때 기린을 타고 바다를 건너 동쪽으로 와서 구사(仇史)에 이르러 살았다고 한다. 후손 가운데 구례마(俱禮馬)가 있었으니, 신라(新羅) 태조(太祖)를 도와 모량부(牟梁部) 대인(大人)이 되었다. 훌륭한 공적과 높은 작위는 대대로 끊이지 않았다. 고려(高麗) 때 휘 빈(贇)이 있었으니, 밀성군(密城君)에 봉해져 자손들이 그대로 관향으로 삼았다. 휘 책(策)에 이르러 문과에 급제하고 목사(牧使)를 지냈다. 이분이 휘 계경(季敬)을 낳았다. 조선에 들어와서 그 백씨(伯氏) 휘 검경(儉敬)이 망복(罔僕)의 의리202)로 보성군(寶城郡)에 귀양 가는 것을 보고 공도 함께 남하하다가 부안(扶安)의 갈촌(葛村)에 정착하였다. 3대를 전해 내려와 휘 비장(比長)에 이르러 생원으로 문과에 급제하여 홍문관 제학이 되었고, 점필재(佔畢齋) 김 선생(金先生)과 더불어 85학사에 선발되었다. 금남(錦南) 최공 부(崔公溥)와 함께 하교를 받들어 《동국통감(東國通鑑)》을 편수하였으며, 연산군(燕山君) 때 벼슬에서 물러나 부안(扶安)에서 지냈다. 대대로 문학과 행실로 이름이 났다. 고조는 휘 근로(謹老)이고, 증조 휘 대남(大南)은 장악원 정(掌樂院正)에 추증되었으며, 조부 휘 우절(遇節)은 호조 참의에 추증되었다. 부친은 휘 일(逸)이니, 공조 참판을 지냈다. 배위는 정부인(貞夫人) 은진 송씨(恩津宋氏)로, 송후일(宋厚日)의 따님이다. 생부(生父)는 휘 이룡(以龍)으로, 가선대부에 추증되었다. 모친은 정부인 남평 반씨(南平潘氏)로, 반명환(潘明煥)의 따님이다. 현종(顯宗) 계축년(1673, 현종14) 10월 22일에 정동(井洞)의 사제(私第)에서 공을 낳았다.공은 타고난 성품이 순후하고 신중하였으며, 어려서부터 지극한 행실이 있었다. 집안이 본디 너무 가난하였으므로 고기 잡고 나무하며 밭 갈고 가축을 길러 온갖 일을 모두 직접 하였으며, 이것으로 어버이에게 맛있는 음식을 봉양하였다. 게다가 한가한 날에는 치웅(致雄)과 필웅(必雄) 두 아우와 함께 글방에 들어가 책상을 마주하고 공부에 매진하였다. 어버이의 병이 위독해지자 낮에는 병석을 떠나지 않고 밤에는 잠자리에 나아가지 않았으며 의원을 불러오고 약을 조제(調劑)하는 데 정성과 노력을 다하였다. 살아 있는 잉어가 여울에서 나오고 꿩이 뜰에 떨어지는 기이한 일이 있었는데, 사람들이 효성으로 하늘을 감동시켜 그러한 것이라고 하였다.연달아 소생(所生 친부모)과 소후(所後 양부모)의 상을 당해서는 한결같이 예제(禮制)를 준행하여 상례의 형식과 내용203)이 모두 지극하였다. 일찍이 가훈(家訓)을 지어 자손을 거듭 경계하였다. 그 가훈에 "부모에게 효도하고, 형제간에 우애 있고, 집안을 바르게 하고, 종친과 화목하게 지내며, 제사를 받들고, 혼인을 가려서 하고, 학문과 문장에 힘쓰고, 농사를 힘써 짓고, 장기와 바둑을 가까이하지 말고, 미신을 믿지 말라."라는 뜻으로 상세히 입설(立說)한 것이 몹시 정성스럽고 간곡하였으니, 그 좋은 계책과 훌륭한 가르침은 모두 가정을 꾸리는 자의 귀감이 될 만하였다. 죽수(竹樹)의 북쪽에 집을 짓고 죽음(竹陰)이라고 자호하였다. 자호와 연관된 시 한 편이 있는데 아래와 같다.비봉산 앞 대숲이 우거졌으니 飛鳳山前竹樹陰맑은 풍취는 백세 지나도록 변치 않네. 淸風百世不移心보배인 낭간204) 옥인 양 사랑스럽게 바라보고 看來愛有琅玕寶아침 해 뜨길 기다려 덕음을 보네. 留待朝陽覽德音이 시에서 그 뜻을 알 수 있다. 구용(九容)과 구사(九思)를 자리 오른쪽에 써서 늘 스스로 귀감으로 삼았으며, 《소학(小學)》과 《대학(大學)》을 평소 몸을 단속하는 근본으로 삼았다. 향리(鄕里)에서 여러 번 그 효성을 상위 관사에 천거하였다. 장수하였다는 이유로 가의대부(嘉義大夫)에 올라 3대가 추증되었다.경신년(1740, 영조16) 1월 6일에 세상을 떠났다. 한천(寒泉)의 모산(牟山) 뒤 갑좌(甲坐)의 언덕에 장사지냈다. 배위는 정부인(貞夫人) 순창 조씨(淳昌趙氏)로, 조사룡(趙士龍)의 따님이다. 규문의 법도에 어긋남이 없었다. 4남을 낳았으니, 첫째는 명신(命新), 둘째는 흥신(興新), 셋째는 항신(恒新), 넷째는 극신(克新)으로 중부(仲父)의 양자로 갔다. 손자 원효(元孝)는 장자의 소생이다. 생원 덕효(德孝), 찬효(贊孝)는 둘째의 소생이다. 순효(淳孝)는 셋째의 소생이다. 광효(光孝), 필효(必孝), 욱효(郁孝)는 넷째의 소생이다. 증손 이하는 다 기록하지 않는다.6세손 영렬(永烈)과 영모(永謨)가 가장(家狀)을 가지고 비석의 뒷면에 새길 글을 지어 달라고 청하였다. 다음과 같이 명을 짓는다.충강 가 忠江之上주산의 남쪽. 珠山之陽우뚝한 넉 자의 봉분 있으니 有崇四尺효자가 묻힌 곳일세. 孝子攸藏가훈 적은 책 한 권 家訓一書후손에게 남긴 계책 매우 창성하네. 貽謨孔彰후손이 번성하니 螽斯椒聊남은 복록 정히 영원하리라. 餘祿正長 公諱始雄。宇美卿。號竹陰。孫氏之先。在魯昭公出奔時。有曰承麟。浮海而東。至仇史居焉。後孫有曰俱禮馬。佐新羅太祖。爲牟梁剖大人。崇勳嵬爵。奕世不絶。至麗朝。有諱贇。封密城君。子孫乃貫焉。至諱策。文牧使。生諱季敬。入我朝。見其伯氏諱儉敬。以罔僕之義。謫寶城郡。公亦與之南下。止千扶安之葛村。三傳至諱比長。生員文科弘文提學。與佔畢齋金先生。選八十五學士。與錦南崔公溥奉敎修東國通鑑。燕山朝退休扶安。世著文行。高祖諱謹老。曾祖諱大南。贈掌樂院正。祖諱遇節。贈戶曹參議。考諱逸。工曹參判。配貞夫人恩津宋氏厚日女。生考諱以龍。贈嘉善大夫。妣貞夫人南平潘氏明煥女。顯宗癸丑十月二十二日。生公于井洞第。公天稟醇謹。幼有至行。家素貧甚。漁樵耕牧。凡百事役。無不躬親爲之。以供甘旨之養。更於暇日。與二弟致雄必雄。入塾對案。不廢課程。親有劇疾。晝不就席。夜不就枕。迎醫合藥。誠力俱至。有生鯉出灘。投雉墮庭之異。人謂孝感致然。連漕所生所後喪。一遵禮制。易戚備至。嘗著家訓。申戒子孫。其訓以孝於父母。友於兄弟。正閨閫。睦宗族。奉祭祀。擇婚姻。務學文。力農業。勿近博奕。勿用巫覡之意。縷縷立說。極其懇惻。其嘉謨良規。皆可以爲有家者之柯則。築室竹樹之陰。自號竹陰。因有詩曰。飛鳳山前竹樹陰。淸風百世不移心。看來愛有琅玕寶。留待朝陽覽德音。此可以見其志矣。書九容九思於座右。常自鏡考。以小學大學爲平生律身之本。鄕道累薦其孝於上司。以壽陞嘉義。追榮三世。庚辰正月六日考終。葬寒泉之牟山後甲坐原。配貞夫人淳昌趙氏士龍女。閫儀無闕。生四男。長命新。次興新。次恒新。次克新。出系仲父后。孫元孝長房出。德孝生員。贊孝二房出。淳孝三房出。光孝。必孝。郁孝。四房出。曾孫以下不盡錄。六世孫永烈永謨奉家狀。請爲文以識碑陰。銘曰。忠江之上。珠山之陽。有崇四尺。孝子攸藏。家訓一書。貽謨孔彰。螽斯椒聊。餘祿正長。 망복(罔僕)의 의리 망국의 신하로서 의리를 지켜 새 왕조의 신복(臣僕)이 되지 않으려는 절조를 말한다. 은(殷)나라가 망할 무렵 기자(箕子)가 "은나라가 망하더라도 나는 남의 신복이 되지 않으리라.[商其淪喪, 我罔爲臣僕.]"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書經 微子》 상례의 형식과 내용 원문은 '易戚인데, 상례가 형식과 내용의 측면에서 모두 훌륭하게 치러졌다는 의미이다. 《논어(論語)》 팔일(八佾)에 "상례는 형식적으로 잘하기보다는 차라리 슬퍼하는 마음이 가득해야 한다.[喪與其易也寧戚]"라고 한 데서 유래하였다. 낭간(琅玕) 중국에서 나는 경옥(硬玉)의 한 가지로, 어두운 녹색이나 청백색이 나는 반투명의 옥인데, 옛부터 장식에 많이 쓰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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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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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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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부

贈鏡城宗人禹範【昌均】 雉城何等地。相見卽同親。在昔南强士。如今北産人。磨雲難入夢。豆滿近殊鄰。此去三千路。秋風擾我神。君是邵城裔。同根百世親。圖南罵好客。還北作勞人。絶塞非宜土。淳鄕卽善隣。臨岐無所贈。努力保心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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