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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17 卷之十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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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병연 정석에게 지어 주다 贈崔秉硏正錫 벽절산 속에 한 초당이 있으니 碧節山中一草堂등불 켜고 날 밝도록 학업에 힘쓰누나 焚膏勤業繼朝陽앵무새 같음을 경계한 상채의 말을 일찍이 들었고347) 戒存鸚鵡曾聞蔡사람과 소의 도리를 뒤섞은 자상을 다시 안타까워하네348) 道混人牛更病桑만약 전심하여 육예를 통달할 수 있다면 如使專心六藝透한 손으로 온갖 냇물 막는 게 어찌 어려우랴 何難隻手百川防나 같은 늙은이는 죽을 날이 머지않았으니 如余老矣亡無日훗날 그대 덕분으로 빛날 수 있기를 바라노라 願得他年賴以光 碧節山中一草堂, 焚膏勤業繼朝陽.戒存鸚鵡曾聞蔡, 道混人牛更病桑.如使專心六藝透, 何難隻手百川防?如余老矣亡無日, 願得他年賴以光. 앵무새……들었고 상채(上蔡)는 송(宋)나라 학자인 사양좌(謝良佐)의 호로, 정이(程頤)의 제자이다. 사양좌가 일찍이 당시 사대부들을 평하여 "명리의 관문을 통과해야 비로소 조금 쉴 수 있는 곳이니, 지금의 사대부야 어찌 말할 것이 있겠는가. 말만 잘하는 것이 참으로 앵무새와 같다.[透得名利關, 方是小歇處, 今之士大夫, 何足道? 能言, 眞如鸚鵡也.]"라고 하였는데, 이를 두고 이렇게 말한 것이다. 사람과……자상(子桑)을 자상은 도가(道家)의 무리인 자상백자(子桑伯子)를 가리킨다. 《논어집주(論語集註)》 〈옹야(雍也)〉에 중궁(仲弓)이 자상백자에 대해 물으니, 공자가 "그의 간략함도 괜찮다.[可也簡]"라고 대답하자, 중궁이 자상백자는 너무 간략한 것[太簡]이 아니겠냐고 말하였는데, 이 대목에 대한 주희(朱熹)의 집주에 "《공자가어(孔子家語)》에 '자상백자가 의관을 제대로 갖추지 않고 거처하자, 공자가 그는 사람의 도리를 소와 말과 같게 하려 한다고 비판하였다.'라고 하였으니, 그렇다면 자상백자는 아마도 너무 간략한 자일 것이다.[家語記伯子不衣冠而處, 夫子譏其欲同人道於牛馬. 然則伯子蓋太簡者, 而仲弓疑夫子之過許與!]"라고 하였다. 여기서는 이를 차용하여 이렇게 말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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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 내린 달밤 雪月夜 눈 내린 빈산의 달밤은 참으로 더디 가는데 雪月空山夜正遲시혼은 흥을 타고 그 어디로 향해 가는고 詩魂乘興向何之가을 지난 동산의 국화는 예전 역사340)와 같고 經秋園菊同前史섣달 기다리는 다리 가 매화341)는 후일을 기약한다오 待臘橋梅結後期대숲 집 주인의 노래가 청절한 곳이요 竹館人歌淸絶處솔에 깃든 학의 꿈342)이 편히 이루어지는 때일세 松棲鶴夢穩成時남쪽 지방에 한 해가 저무는 걸 깜짝 놀라니 飜驚南國年光暮기러기의 울음소리에 일삼는 바가 있구나 鴻鴈聲中有所事 雪月空山夜正遲, 詩魂乘興向何之?經秋園菊同前史, 待臘橋梅結後期.竹館人歌淸絶處, 松棲鶴夢穩成時.飜驚南國年光暮, 鴻鴈聲中有所事. 예전 역사 국화를 유독 좋아했던 진(晉)나라 도연명(陶淵明)의 고사를 가리켜 말한 것이다. 도연명이 일찍이 팽택 영(彭澤令)을 그만두고 지은 〈귀거래사(歸去來辭)〉의 서문 말미에 "중추로부터 겨울에 이르기까지 관직에 있은 지가 80여 일이었다. 일을 따라 마음을 순히 하였으므로 명명하기를 '귀거래혜'라 하니, 을사년(405) 11월이었다.[仲秋至冬, 在官八十餘日. 因事順心, 命篇曰歸去來兮, 乙巳歲十一月也.]"라고 하고, 그 본문에는 "세 오솔길은 묵었으나, 소나무와 국화는 아직 남아 있도다.[三徑就荒, 松菊猶存.]"라고 하였는데, 여기서는 이것을 두고 이렇게 말한 것이다. 다리 가 매화 당(唐)나라 맹호연(孟浩然)의 답설심매(踏雪尋梅)의 고사에서 유래한 말이다. 다리는 장안(長安) 동쪽에 흐르는 파수(灞水) 위에 놓인 파교(灞橋)를 가리킨다. 맹호연이 일찍이 눈이 내리는 속에 나귀를 타고 파교에 가서 매화를 구경한 고사가 있었는데, 송(宋)나라 소식(蘇軾)의 〈증사진하충수재(贈寫眞何充秀才)〉 시에 이를 읊기를 "또 보지 못했는가, 눈 속에 나귀를 탄 맹호연이 눈썹을 찌푸리고 시를 읊으매 어깨가 산처럼 솟음을.[又不見雪中騎驢孟浩然, 皺眉吟詩肩聳山.]"라고 하였다. 학의 꿈 세속을 초탈하고자 하는 뜻을 비유한다. 당나라 사공도(司空圖)의 〈여이생론시서(與李生論詩書)〉에 "땅이 청량하니 학의 꿈은 맑고, 숲이 고요하니 중의 모습 엄숙하여라.[地涼淸鶴夢, 林靜肅僧儀.]"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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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승지 상덕재 선생 최공 묘지명 左承旨尙德齋先生崔公墓誌銘 선생의 성은 최씨(崔氏), 휘는 치호(致湖), 자는 평원(平遠)이다. 초휘(初諱)는 업(嶪)이었으며, 호는 상덕재(尙德齋), 관향은 낭주(朗州)이다. 고려 때 동래후(東萊侯) 휘 지몽(知夢)이 그 비조이다. 휘 안우(安雨)에 이르러 조선에 입조(入朝)하였으니 관직은 군기시 소감(軍器寺小監)을 지냈다. 이분이 휘 운(雲)을 낳았는데, 호는 덕암(德庵)이고, 평안도 관찰사(平安道觀察使)를 지냈다. 휘 득초(得超)에 이르러 장악원 정랑(掌樂院正郞)을 지냈는데, 공의 고조이다. 증조는 휘 자혁(自赫)으로, 사온시 직장(司醞寺直長)을 지냈다. 조부는 휘 추(湫)로, 호가 난계(蘭溪)이고, 호조 참판(戶曹參判)을 지냈다. 선고의 휘는 근지(近池)로, 호는 월계(月溪)이며, 사성(司成)을 지냈다. 모친은 여흥(驪興) 민씨(閔氏)로, 참의 민식(閔湜)의 따님이다. 명종(明宗) 갑자년(1564, 명종19) 10월 16일에 서울 남부(南部)의 사제에서 공을 낳았다.어려서 남다른 자질이 있었고 영리함이 남보다 뛰어났다. 겨우 말을 할 만한 나이에 문득 시구를 지을 수 있었는데, 〈영오시(詠烏詩)〉에 "새 가운데 너는 효도할 수 있으니, 고인이 현자에 견주었네.[鳥中爾能孝, 古人比於賢.]"라고 하였다. 7세에 모친상을 당해 유인(孺人)에 대한 애도가 망극하니 보는 사람들이 눈물을 흘렸다. 상복을 벗자 글방 스승에게 나아가 글을 읽었다. 스승이 그가 자주 내정(內庭)으로 들어가 혹 오래도록 나오지 않는 것을 보고 그 까닭을 물으니, 대답하기를 "소자가 평소 애태우며 그리워하는 마음은 반은 자애로운 어머니에게, 반은 스승에게 향한 것입니다."라고 하자, 스승이 기특하게 여겼다.독서할 적에는 손을 단정히 모으고 꼿꼿하게 않아 전심치지(專心致志)하되 송독하는 횟수는 한도가 있었으나 연구에는 일정한 한계를 두지 않았다. 사서오경(四書五經)에서부터 제자백가 자(諸子百家)에 이르기까지 돌아가면서 몇 번이고 충분히 반복 학습하여서 깊게 통달하고 두루 폭넓게 이해하였다. 석담(石潭)1) 이 선생(李先生)이 성리학에 심오하다는 말을 듣고 마침내 가서 배웠다. 또 임공 숙영(任公叔英), 고공 용후(高公用厚), 홍공 입(洪公雴), 김공 반(金公槃), 고공 전천(高公傳川), 민공 성징(閔公聖徵)과 더불어 도의(道義)로 사귀었는데, 서로 충고하고 절차탁마하며 더욱 스스로 확충하여 훌륭하다는 명성과 명망이 당대에 자자하였다.계미년(1583, 선조16)에 사마시에 합격하여 예빈시 참봉(禮賓寺參奉)에 제수되었다. 을유년(1585)에 강원도 도사(江原道都事)에 임명되었지만 어버이가 연로하다는 이유로 부임하지 않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조지서 사지(造紙署司紙)에 제수되었다. 병술년(1586)에 낭천(狼川)에 임명되는 명이 있었지만 또 어버이가 연로하다는 이유로 부임하지 않았다. 정해년(1587)에 과거에 급제하여 바로 홍문관 교리에 제수되었는데, 상소를 올려 사직하였다. 상소의 내용은 대략 다음과 같다. "전하께서는 요순(堯舜)의 자질이 있고 요순의 지위가 있으며 요순의 백성이 있는데, 요순과 같은 은택이 나라에 두루 미치지 못하는 것은 어째서입니까? 송(宋)나라 신하 채침(蔡沈)이 말하기를 '후세의 군주가 이제삼왕(二帝三王)의 다스림에 뜻을 둔다면 그 도를 구하지 않을 수 없으며, 이제삼왕의 도에 뜻을 둔다면 그 마음을 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그 마음을 구한다.[求其心]'라는 석 자가 어찌 오늘날의 급선무가 아니겠습니까. 마음을 구하는 법은 선성(先聖)의 가르침이 서책에 매우 자세히 드러나 있으니, 반드시 모름지기 유현(儒賢)을 친히 가까이하여 아침저녁으로 강구(講究)하여 그 이치를 밝히고 그 실제를 행한다면 마음을 구하는 방법이 터득되고 다스리는 근본이 확립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무자년(1588)에 사간원 헌납(司諫院獻訥)에 제수되었고, 얼마 뒤에 사헌부 장령(司憲府掌令)으로 옮겼다. 어느 날 주상이 경연에 나아가 《서경》의 하서(夏書) 〈오자지가(五子之歌)〉를 강론하다가 이어서 "백성은 나라의 근본이다.[民惟邦本]"라는 뜻을 물으니, 공이 매우 자세히 대답하였다. 또 말하기를 "공자(孔子)가 말하기를 '한마디 말로 나라를 흥하게 하고 한마디 말로 나라를 잃을 수 있다.'라고 하였습니다. 지금 이 한마디가 또한 나라의 흥망이 달려 있는데 성상(聖上)의 물음이 여기에 미치니 감히 나라를 흥하게 하지 않겠습니까."라고 하였다.경인년(1590)에 집의에 제수되었다. 과거 시험에서 사람을 선발할 적에 오로지 문예를 숭상하는 것을 보고 아뢰기를 "장구(章句)나 익히는 학문은 세상을 경륜하는 학문이 아니며, 문장을 짓는 기교는 나라를 잘 다스리는 계책이 아닙니다. 지금 장구나 익히고 문장을 짓는 능력을 가지고 선비를 선발하면서 세상을 경영하고 잘 다스리는 효과를 바라니 어찌 어렵지 않겠습니까."라고 하였다.임진왜란 때 상국(相國) 유성룡(柳成龍)이 공을 천거하여 서기(書記)를 담당하게 하였는데, 기무(機務)에 참여하여 계책을 내었기에 드러난 공적이 많았다. 병신년(1596)에 부친상을 당했고, 계묘년(1603)에 세자시강원 보덕(世子侍講院輔德)에 제수되었으며, 을사년(1605)에 좌부승지(左副承旨)로 옮겼다. 광해군 신해년(1611, 광해군3)에 도승지(都承旨)에 올랐을 때 상소를 올려 직간하였는데, 그 상소 중에 "법을 엄하게 하고 형벌을 가혹하게 한다."라는 등의 말이 있었다. 이에 광해군이 몹시 화를 내며 이르기를 "그대는 나를 진(秦)나라 이세(二世)에 견주는 것인가?"라고 하니, 천천히 대답하기를 "전하께서 만약 이세에 비견되는 것을 부끄러워하신다면 이세의 행실을 따르지 마소서."라고 하였다. 이에 광해군이 더욱 노여워하여 장(杖)을 치고 의금부에 3일 동안 가두었다가 사죄(死罪)에서 1등급을 줄여 진도(珍島)로 유배보냈다. 이에 연관된 시가 아래와 같다.의금부 서리 행차 재촉하여 남쪽으로 문 나서니 禁吏促行南出門이 몸은 살아서 향촌으로 돌아오지 못하리라. 此身生不返鄕村소슬하게 비바람 치는 지난밤 꿈에 蕭蕭風雨前宵夢상강으로 날아가 굴원을 보았네.2) 飛入湘江見屈原계해년(1623, 인조1) 인조반정(仁祖反正) 때 즉시 유배에서 풀려나는 은혜를 입었고, 부제학으로 여러 번 불렀지만 나아가지 않았다. 이에 장흥(長興)의 와리(瓦里)에 거처하며 산수를 즐기고 글을 짓고 술을 마시며 스스로 즐기다가 정묘년(1627, 인조5) 10월 16일에 졸하였다. 와리 뒤쪽 산기슭 갑좌(甲坐) 언덕에 장사 지냈다. 배위(配位)는 여흥 민씨(驪興閔氏)로, 참의 민순(閔絢)의 따님이다. 3남 2녀를 낳았는데, 아들 결(潔)은 참봉(參奉), 숙(淑)과 해(海)는 진사이다. 딸은 변극중(邊克中)과 김인복(金寅福)에게 출가하였다. 손자 이하는 기록하지 않는다.12세손 창주(昌柱)와 남표(南杓), 14세손 동민(東珉)이 가장(家狀)을 가지고 와서 묘지명 지어 주기를 청하였다. 다음과 같이 명을 짓는다.하늘이 밝은 운을 열어주어 天啓照運명철한 군주와 어진 신하가 만났네. 明良際出금당과 옥서3)에서 玉署金堂군신 간에 정사를 논하고 문답하였네. 都兪密勿세상에 다 베풀지 못했는데 不竟厥施창오의 구름 아득하네.4) 梧雲茫茫세상에 용납되지 못하여 身不見容갑자기 남쪽 변방으로 귀양갔네. 奄竄南荒우레치고 비 내리는 가운데 雷雨繼作동쪽 언덕에 누웠네. 因臥東岡먼 후대에 회상해 보면 追惟百世그 풍도와 운치 더욱 드러나리라. 風韻彌彰 先生姓崔。諱致湖。字平遠。初諱嶪。號尙德齋。貫朗州。麗朝東萊侯諱知夢。其鼻祖也。至諱安雨。入我朝。官軍器寺小監。是生諱雲。號德庵。平安道觀察使。至諱得超。掌樂院正郞。公之高祖也。曾祖諱自赫司醞寺直長。祖諱湫。號蘭溪。戶曹參判。考諱近池。號月溪。司成妣驪興閔氏參議湜女。明宗甲子十月十六日。生公于京之南部私第。幼有異質。穎悟過人。纔能言。便能綴句。詠烏詩曰。鳥中甭能孝。古人比於賢。七歲丁外艱。孺哀岡極。見者釀涕。服闋。就讀塾師。師見其頻入內庭。或久而不出。問其故。對曰。小子平日戀戀意。半是慈親半是師。師奇之。讀書端拱危坐。專心致志。誦數有程。硏究無方。自四書五經以至諸子百家。循環熟復。淹貫該洽。聞石潭李先生邃於理學。遂往學焉。又與任公叔英高公用厚洪公雴金公槃高公傳川閔公聖徵爲道義交。規警切磋。益自展拓。令聞令望。藉甚一時。癸未中司馬。除禮賓寺參奉。乙酉差江原道都事。以親老不就。旋除造紙署司紙。丙戌有狼川之命。又以親老不就。丁亥擢第。卽拜弘文館校理。上疏辭。略曰。殿下有堯舜之資。有堯舜之位。有堯舜之民。堯舜之澤。未洽於國家者何也。宋臣蔡沈之言曰。後世人主。有志於二帝三王之治。不可不求其道。有志於二帝三王之道。不可不求其心。然則求其心三字。豈非今日急先之務乎。求心之法。先聖謨訓。著於簡冊者。至爲詳悉。必須親近儒賢。夙夜講究。以明其理。以踐其實。則求心之法得。而爲治之本立矣。戊子除司諫院獻訥。尋遷司憲府掌令。一日上御經筵講夏五子之歌因問民惟邦本之義公對之甚悉。且曰。孔子云一言而興邦。一言而喪邦。今此一言。亦興喪之所由繫。而聖問及此。敢不爲興邦賀。庚寅拜執義。見科試取人。專尙文藝。啓曰。章句之習。非經綸之學。文詞之術。非治平之策。今取士於章句文詞之間。而望其有經綸治平之效。不其難矣乎。壬辰之亂。柳相國成龍。擧公爲掌書記。參謀機務。多有著績。丙申遭內艱。癸卯除世子侍講院輔德。乙巳移左副承旨。光海辛亥陞都承旨。抗疏直諫。疎中有嚴法刻刑等語。光海大怒曰汝比予於秦二世乎徐對曰殿下若愧比二世則勿行二世之行。光海愈怒。杖囚禁府三日。減死一等。流于珍島。因有詩曰。禁吏促行南出門。此身生不返鄕村。蕭蕭風雨前宵夢。飛入湘江見屈原。癸亥改玉。卽蒙解放。以副提學累徵。不赴。因居于長興之瓦里。以山水文酒自娛。丁卯十月十六日卒。葬瓦里後麓甲坐原。配驪興閔氏參議絢女。生三男二女。男潔參奉。淑。海進士。女適邊克中金寅福。孫以下不錄。十二世孫昌柱南杓十四世孫東珉。以家狀來謁誌銘。銘曰。天啓照運。明良際出。玉署金堂。都兪密勿。不竟厥施。梧雲茫茫。身不見容。庵竄南荒。雷雨繼作。因臥東岡。追惟百世。風韻彌彰。 석담(石潭) 율곡(栗谷) 이이(李珥, 1536~1584)의 별호이다. 상강으로……보았네 상강은 중국의 소상강(瀟湘江)으로, 초(楚)나라의 충신인 굴원(屈原)이 유배되어 있다가 죽은 곳이다. 금당(金堂)과 옥서(玉署) 금마문(金馬門)과 옥당서(玉堂署)를 가리킨다. 한(漢) 나라 때 이곳에 학사들을 초대하였는데, 이 때문에 후대에는 한림원이나 한림학사를 지칭하는 말로 쓰였다. 조선 시대에는 홍문관이나 규장각 등 문신들이 근무하는 곳을 일컫는 말로 사용되었다. 여기서는 묘지명의 주인공인 최치호(崔致湖)가 홍문관 교리로 제수된 적이 있기 때문에 사용한 듯하다. 창오의 구름 아득하네 최치호를 인정해 주었던 선조(宣祖)가 세상을 떠났다는 말이다. 오운(梧雲)은 창오(蒼梧)의 구름이라는 말로, 창오는 순(舜) 임금이 묻힌 산 이름이다. 두보(杜甫)의 시에 "머리 돌려 순 임금 향해 절규하노니, 창오의 구름이 정녕 시름겨워서.[廻首叫虞舜, 蒼梧雲正愁.]"라는 구절이 나온다. 《杜少陵詩集 卷2 同諸公登慈恩寺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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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정 형공 묘지명 茅汀邢公墓誌銘 옥새 찍힌 교서(敎書)를 내려 격려하고 금을 하사하거나 품계를 더하였으니, 한(漢)나라 때 양리(良吏)가 여기에서 성대해졌다.5) 이는 현명한 군주와 어진 신하의 만남이고 태평의 상징이니, 삼대(三代) 이하의 시대에서는 견줄 만한 왕조가 드물었는데, 오직 우리 성종(成宗)과 중종(中宗)의 즈음이 또한 여기에 가까울 것이다. 권유하고 포상하는 전지(傳旨)가 날로 주군(州郡)에 내려지고 직분을 나누어 맡은 지방 관원이 날로 선(善)을 장려하자 어진 관리가 성대히 출현하고 칭송하는 소리 또한 자자하여 무궁한 아름다움에 이르렀다.모정(茅汀) 형공(邢公)은 또한 당시의 어진 관리였다. 정릉(靖陵 중종(中宗)의 능호) 경인년(1530, 중종25)에 외직으로 나가 남평(南平)을 다스렸고, 계사년(1533, 중종28)에 하양(河陽)으로 옮겼는데, 치적이 으뜸이어서 특별히 은혜로운 유서(諭書)를 내렸다. 그 유서에 이르기를 "지금 관찰사 송흠(宋欽)6)이 아뢴 말에 따르면, 그대가 남평을 다스릴 때부터 세금을 줄이고 형벌을 신중히 하며 청렴하고 부지런함이 이미 드러나 그대가 떠난 뒤에도 백성들이 그리워한다는 것을 알았으니 내 매우 가상하게 여긴다. 표리(表裏) 1습(襲)을 하사하여 칭찬하고 장려하는 뜻을 보이니, 그대는 나의 지극한 뜻을 체득하여 끝까지 변하지 말라."라고 하였다. 이듬해 봄에 또 유서를 받았는데, 하교하기를 "그대의 청렴하고 탁월한 재주를 가상하게 여겨 특별히 표리 1습을 하사하니, 그대는 받들라."라고 하였다. 위로는 잘 다스리기를 바라는 군주가 있고 아래로는 충성을 바치는 신하가 있어 구름이 용을 좇고, 바람이 호랑이를 따르듯이 의기와 기질이 맞는 성군(聖君)과 현신(賢臣)이 서로 만났으니, 얼마나 성대한 일인가. 선비가 삼대(三代) 때 태어나지 못해 이미 고요(皐陶)ㆍ기(夔)ㆍ후직(后稷)ㆍ설(契)이 태평성대에 정사(政事)를 토론하는 자리에 참여하지 못했지만, 우리 동방이 흥성한 시대에 태어나 위로 성스럽고 명철한 군주가 있고 아래로 온화하고 고상한 신하가 있었으니, 송흠(宋欽) 선생 같은 분이 추천하고 칭송하기를 이와 같이 정중하게 한 것은 옳다. 그 나머지 작위를 받지 못하고 자손이 번성하지 못한 것이 어찌 공에서 보탬이 되거나 손해나는 일이겠는가.공의 휘는 자관(自寬), 자는 장백(長伯), 모정(茅汀)은 그의 호이다. 고려 때 평장사(平章事) 방(昉)이 그 중시조이다. 2대를 전해 내려와 공미(公美)에 이르러 왜구(倭寇)를 정벌한 공로로 진양군(晉陽君)에 봉해졌는데, 자손이 그대로 관향으로 삼았다. 진양군으로부터 3대를 전해 내려와 군철(君哲)에 이르러 본조에 들어와 충청 병사(忠淸兵使)를 지냈으니, 바로 공의 증조이다. 조부 경승(慶承)은 장사랑(將仕郞)을 지냈고 호조 참판에 추증되었다. 부친 은 용인(用仁)은 진사(進士)이다. 모친은 청주 한씨(淸州韓氏)인데, 홍치(弘治) 무신년(1488, 성종19) 11월 3일에 공을 낳았다.공은 천성이 단정하고 고아한 지조가 있으며 청렴하였다. 효우(孝友)와 문학으로 당대에 추중(推重)을 받았다. 정축년(1517, 중종12)에 생원시에 합격하였으며, 기묘년(1519)에 중부 참봉(中部參奉)에 제수되었다. 남평(南平)과 하양(河陽)의 고을 원을 역임하였는데, 남평의 백성들이 사당을 세워 봄가을로 향사(享祀)를 지냈다. 병오년(1546, 명종1) 3월 19일에 졸하였으니, 향년 59세이다. 남평 저포면(猪浦面) 하류촌(下流村) 안산(案山) 병좌(丙坐)에 장사 지냈다. 숙부인(淑夫人) 광산 김씨(光山金氏)는 주부(主薄) 김숭령(金崇齡)의 따님이다. 신해년(1491, 성종22) 9월 2일에 태어났고, 무신년(1548, 명종3) 1월 18일에 졸하였다. 묘소는 부군과 합장하였다. 1남 2녀를 두었으니, 아들은 세현(世賢)이고, 딸은 각각 양응기(梁應箕), 조국성(曺國聖)에게 각각 시집갔다. 세현은 자식이 없어 양씨(梁氏)가 외손으로서 공의 제사를 받들었다. 공의 문적(文蹟)은 병화에 유실되었는데, 만년의 것은 양씨의 집안에서 약간의 유고(遺稿)를 얻었다. 종(從) 9세손 도열(道烈)이 눈물을 닦으며 붓을 들어 그 일을 서술하고 이어서 나에게 묘지명을 지어 주기를 청하였다. 아, 어찌 차마 사양하겠는가. 다음과 같이 명을 짓는다.호남의 군현을 다스렸고 分憂湖郡영남 고을을 맡아 다스렸네. 歷典嶺邑봄볕이 빛을 발하였으니 陽春動輝성상의 표창이 융성하였네. 天褒隆洽어진 관리 계속 전해짐에 良吏續傳누가 감히 공을 빠뜨리랴. 誰敢遺公훌륭한 풍도와 위대한 공적 英韻偉蹟무궁한 후대에 밝게 드리우리라 昭垂無窮 璽書勉勵。增秩賜金。而漢世良吏。於斯爲盛。此其明良之會。昇平之象。三代以下。鮮見其比。而惟我成宗中宗之際。亦庶幾焉。獎諭褒旨。日下州郡。而字牧分職。日勤於善。所以良吏蔚興。頌聲倂作。而用底于無疆之休也。茅汀邢公。亦當時之良吏也。靖陵庚寅。出莅南平。癸巳移河陽。以治平第一。特蒙恩諭。有曰。今仍觀察使宋欽所啓。知爾自爲南平時。薄賦愼刑。廉勤己著。民有去後之思。予甚嘉之。賜表裏一襲。以示褒獎之意。爾其體予至懷。終始不渝。明年春。又蒙諭。有曰。嘉爾淸白卓異。特賜表裏一襲。爾其頌受。嗚呼。上有願治之主。下有效忠之臣。雲龍風虎。何等盛儀也。士不生三代之上。旣不得與臯夔稷契都兪吁咈於太和照皞之中。則生於大東日中之世。上有聖明之君。下有儒雅之臣。如宋欽先生。而推引賞識。若是鄭重則可矣。其餘爵位之不揚。祚胤之不昌。曷足以加損於公也耶。公諱自寬。字長伯。茅汀其號也。麗朝平章事昉。其中祖也。再傳至公美。征倭有功。封晉陽君。子孫仍貫焉。自晉陽君三傳至君哲。入我朝。官忠淸兵使。卽公之曾祖也。祖慶承。仕郞贈戶曹參判。考用仁進士。妣淸州韓氏。以弘治戊申十月三日生。公天資端詳。雅操廉潔。孝友文學。見重一時。丁丑中生員。己卯除中部參奉。歷宰南平河陽。南平民建祠。春秋享祀。丙午三月十九日卒。享年五十九。葬南平之猪浦面下流村案山丙坐。淑夫人光山金氏主薄崇齡女。辛亥九月二日生。戊申正月十八日卒。墓合祔。有一男二女。曰世賢。曰梁應箕。曺國聖。世賢無育。梁氏以外裔奉公祀。文蹟失於兵燹。晩於梁氏家得若干遺實。從九世孫道烈。抆淚沘筆以序其事。仍請余以誌墓之文。嗚呼。豈忍辭哉。銘曰。分憂湖郡。歷典嶺邑。陽春動輝。天寢隆洽。良吏續傳。誰敢遺公。英韻偉蹟。昭垂無窮。 조서를……성대해졌다 선제(宣帝)는 백성들의 질고를 잘 알고 있었으므로 지방관의 역할을 특별히 중시하여, 치적이 있는 지방관은 새서(璽書)로 권면하여 금을 하사하기도 하였으며, 그중에서도 두드러진 사람은 품계를 높여 주고 관내후(關內侯)나 공경 대신(公卿大臣)으로 임명하기도 하였다.《漢書 循吏傳》 송흠(宋欽) 1459~1547. 자는 흠지(欽之), 호는 지지당(知止堂), 시호는 효헌(孝憲)이다. 담양(潭陽)ㆍ장흥(長興)의 부사(府使), 전라도 관찰사를 지냈으며, 청백리(淸白吏)에 녹선(錄選)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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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희당 처사 홍공 묘지명 晩喜堂處士洪公墓誌銘 아, 여기는 병좌병향(丙坐丙向)에 좌병향임(坐丙向壬)7)으로 혈(穴)과 봉분을 함께한 곳인데, 고(故) 만희당(晩喜堂) 홍공(洪公)과 그 부인 나주 나씨(羅州羅氏)의 무덤이다. 조금 내려와 정좌(丁坐) 언덕에 있는 것이 둘째 부인 하동 정씨(河東鄭氏)의 무덤이다. 공은 숙종(肅宗) 임진년(1712, 숙종38)에 태어났으며 태어난 지 60세 되던 해에 졸하였다. 졸한 지 125년 뒤에 현손(玄孫) 형주(馨周), 기주(基周), 경주(慶周)가 무덤 앞에 작은 비석을 세우고, 또 실제의 일을 기록하기를 도모하여 장차 무덤에 묘지명을 새기려고 행장(行狀)과 묘갈문을 가지고 와서 나에게 부탁하기를 "이 금석문은 만년의 계책8)입니다. 합당하지 않은 사람에게 부탁하면 소홀해질까 염려됩니다."라고 하였는데, 그 선조를 향한 추모하는 정성이 참으로 훌륭한 자손이라고 할 수 있다.공의 휘는 이발(履潑), 자는 자함(子涵)이니, 세계(世系)는 풍산(豊山)에서 나왔다. 직학사(直學士) 휘 지경(之慶)이 그 현조(玄祖 5대조)인데, 문학(文學)과 행의(行誼)가 대대로 그 미덕을 더하였다. 고조는 휘 준(埈)인데, 장악원 정(掌樂院正)에 추증되었고, 증조는 휘 덕우(德遇)인데, 호조 참의에 추증되었다. 조부는 휘 경고(景古)인데, 호가 침수정(枕漱亭)으로 형조 참판에 추증되었다. 부친은 휘가 천규(天奎)이고 호가 오은(鰲隱)으로 은덕(隱德)이 있었다. 모친은 인천 이씨(仁川李氏)로, 이인량(李仁亮)의 따님이다.공의 성품은 효성스러웠으니, 집이 가난하여 직접 집안 살림을 꾸렸고, 충심으로 극진히 봉양하였다. 상례를 거행함에 지나치게 애통해하였고, 3년 동안 시묘살이를 하였다. 일찍 부친의 훈육을 받고 경전을 읽고 학업에 매진하여 문사(文詞)가 넉넉하면서도 막힘없이 시원스러웠으며, 의리를 행하여 환하게 빛났다. 오서육경(五書六經)으로부터 정자(程子)와 주자(朱子)의 여러 설에 이르기까지 통달하여 회통(會通)시키지 않음이 없었다. 더욱 역학(易學)에 심오하였으니, 순환하면서 복습하고 반복해서 깊이 연구하여 노년에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산수(山水) 사이의 경치 좋은 곳에 초가집을 짓고 형제간에 다정하게 마주 보며 강론하고 토론하니, 원근의 선비들이 소문을 듣고 모여들었다. 사람들이 이곳을 학당동(學堂洞)이라고 불렀다.아들 영구(永九)는 나씨(羅氏)의 소생이다. 아들 영범(永範), 영조(永兆)와 김양려(金陽麗)에게 시집간 딸은 정씨(鄭氏)의 소생이다. 홍씨(洪氏) 일문(一門)은 자손이 번성하고 훌륭한 가법(家法)이 향리에 소문이 나서 학문에 뜻을 둔 많은 선비가 바야흐로 성대하여 다하지 않았으니, 이는 만희옹(晩喜翁)과 같은 여러 선배가 선도한 힘이 아니겠는가. 유풍과 여운이 더욱 백세토록 뻗어나가 사라지지 않을 것인데, 더구나 지금 은택이 사라지지 않았고 친분이 다하지 않았으니 좋은 방향으로 계승한 민첩함이 마땅히 이러함에랴. 우러러보면서 감동하는데, 감히 그 부지런한 뜻에 일부나마 힘써 부응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다음과 같이 명을 짓는다.은둔하여 곤궁하면 형통하니 遯肥困亨대대로 옛 음덕을 누렸네. 世食舊德무덤에 글을 실으니 載辭幽堂억만년 수를 누리리라. 用壽斯億 嗚呼。此坐丙而向壬。竝穴而同墳者。故晩喜堂洪公及共夫人羅州羅氏之藏也。稍下而負丁者。系夫人河東鄭氏窆焉。公以肅宗壬辰生。生六十歲而卒。卒一百二十五年。而玄孫馨周。基周慶周竪墳前短碣。又謀記實。將以銘諸幽竁。持行狀及碣文來。命於義林。此是金石萬年計也。托非其人。恐涉疏歇。而其向先追遠之誠。誠可謂能子能孫矣。公諱履潑。字子涵。系出豊山。直學士諱之慶。其玄祖也。文學行誼。世濟其美。高祖諱埈。贈掌樂正。曾祖諱德遇。贈戶曹參議。祖諱景古。號枕漱亭。贈刑曹參判。考諱天奎。號鰲隱。有隱德。妣仁川李氏仁亮女。公性孝。家貧躬幹。忠養備至。執喪過毁。廬墓三年。早襲庭訓。劬經績學。文詞贍暢。行義煒燁。自五書六經至程朱諸說。無不淹貫會通。尤邃易學。循環紬繹。至老不倦。結茅山水間。兄弟對床講討。遠近士子。聞風空集。人號其地爲學堂洞。子永九羅氏出。永範永兆女金陽麗。鄭氏出也。洪氏一門。椒聊蕃衍。而家法之美。聞于鄕邦。濟濟志學之士。方蔚然而未艾。此非先輩諸公如晩喜翁垂創之力歟。流風餘韻。加以亘百世而不泯。況今澤未斬而親未竭。其式穀似述之敏。宜乎內爾也。瞻感攸至。敢不勉副勤意之一二也。銘曰。遯肥困亨。世食舊德。載辭幽堂。用壽斯億。 좌병향임(坐丙向壬) 묘소의 방향을 말한 것으로, 병(丙 방위로는 남녘에 해당)을 등지고 임(壬 방위로는 북녘에 해당)을 향함을 의미한다. 만년의 계책 〈능고대(凌敲臺)〉 시에 "백 년 인생에 지었을 만년의 계책이여, 바위 위 옛 비석엔 푸른 이끼만 남았네.[百年應作萬年計, 巖上古碑空綠苔.]"라는 시구가 있다. 《唐百家詩選 卷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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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서하여 제군에게 보이다 自叙示諸君 중유의 헤진 솜옷에 굴원의 관 높이 쓰고224) 仲袍弊弊屈冠峨흰 머리에 야윈 얼굴로 반평생이 지났구나 霜鬂蒼顔半世過도를 구할 땐 돌을 뚫는 것 같아 탄식했어도 求道堪歎同透石사람을 건네줄 땐 세파를 따르지는 않았네 涉人不肯輒隨波비바람 하늘에 가득하여 심회가 사납지만 滿天風雨心懷惡안개 노을 낀 벽지에도 살 계책은 많다네 僻地烟霞計活多도리어 부끄럽네 제군이 멀리서 왔는데 還愧諸君來自遠옆사람이 무성가225)에 잘못 견주는 것이 傍人錯比武城歌 仲袍弊弊屈冠峨, 霜鬂蒼顔半世過.求道堪歎同透石, 涉人不肯輒隨波.滿天風雨心懷惡, 僻地烟霞計活多.還愧諸君來自遠, 傍人錯比武城歌. 중유의 …… 쓰고 중유(仲由)나 굴원(屈原)처럼 높은 뜻을 가지고 살았다는 뜻이다. '중유'는 공자의 제자인 자로(子路)의 이름이다. 《논어》 〈자한(子罕)〉에 "해진 솜옷을 입고서[衣敝縕袍], 여우나 담비 가죽옷을 입은 자와 함께 서 있어도, 부끄러워하지 않을 자는 아마 중유일 것이다."라고 하였다. '굴원'은 삼려대부(三閭大夫)로 있다가 간신배의 모함으로 조정에서 쫓겨난 초(楚)나라 대부이다. 그가 지은 〈섭강(涉江)〉에 "내 어릴 적부터 이런 특이한 복장을 좋아했는데, 늙어서도 그 마음이 변하지 않았네. 긴 칼 허리에 늘여 차고서, 우뚝 높은 갓 머리에 썼지.[余幼好此奇服兮, 年旣老而不衰. 帶長鋏之陸離兮, 冠切雲之崔嵬.]"라고 하였다. 무성가(武城歌) 공자의 제자 자유(子游)가 무성(武城)의 수령으로 나가서 사람들에게 예악(禮樂)을 가르쳐 교화를 잘 시켰는데, 공자가 그곳을 지나가다가 현가(弦歌) 소리를 듣고는 칭찬한 일이 있다. 《論語 陽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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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곡 형공 묘지명 道谷邢公墓誌銘 공의 휘는 세영(世英), 자는 춘영(春榮), 호는 도곡(道谷)이다. 신라(新羅) 때 휘 옹(顒)이 있었는데, 당(唐)나라 학사로 바다를 건너 동방으로 왔으니, 이 분이 상조(上祖)이다. 중대 휘 공미(公美)에 이르러 왜구(倭寇)를 토벌한 공로가 있어 진양군(晉陽君)에 봉해졌으며, 자손들이 그대로 관향으로 삼았다. 이 분이 예부 상서(禮部尙書)를 지낸 휘 문궤(文軌)를 낳았고, 문궤가 판도 판서(版圖判書)를 지낸 휘 찬(贊)을 낳았으며, 찬이 진사를 지낸 휘 군철(君哲)을 낳았는데, 군철이 공에게는 고조가 된다. 증조는 휘 경(慶)이니, 장사랑(將仕郎)을 지냈고 호조 참판에 추증되었다. 조부는 휘 용인(用仁)인데, 진사이다. 선고(先考)는 휘 자홍(自弘)인데, 벽동 군수(碧潼郡守)를 지냈다. 모친은 연안 이씨(延安李氏)인데, 정덕(正德) 2년 우리 중종(中宗) 정묘년(1507, 중종2)에 공을 낳았다.공은 생래적으로 기개가 높고 도량이 넓으며, 타고난 효성과 우애가 있었다. 조금 자라서는 우뚝이 성인(成人)과 같았다. 경전을 읽으면서 힘써 배웠는데, 더욱 《소학(小學)》, 《근사록(近思錄)》 및 성리학에 관한 책을 깊이 연구하여 발휘하고 확충하여 사물의 본체와 작용을 빠뜨리지 않았다. 평소 몸가짐은 구차하고 소홀한 뜻이 있는 것을 보지 못했다. 또한 일찍이 모질고 과격한 행동을 한 적이 없었다. 중년에 능주(綾州) 도동(道洞)으로 이사한 다음 산을 구입하여 정자를 짓고 시냇물을 끌어다 꽃을 심고 한가로이 노닐면서 그윽하고 빼어난 흥취를 두루 만끽하였다. 학행(學行)으로 재랑(齋郞)에 제수되었지만 상소를 올리고 나아가지 않았다. 향리에서 이름난 양학포(梁學圃) 제현과 서로 날마다 어울리면서 회포를 시로 읊었다. 기묘년(1519, 중종14)에 조정암(趙靜庵)이 본주(本州)에 귀양 오자 가서 위문하였다. 이를 인연으로 강론하고 질정하기를 끊이지 않고 하였다. 사약을 내리는 명이 이르자 슬퍼하고 상심하는 마음을 감당하지 못하여 절구(絶句) 한 수를 지어 그 심정을 토로하였다.신사년(1581, 선조4) 10월 13일에 사제에서 졸하였으니, 향년 75세이다. 죽동(竹洞) 간좌(艮坐) 언덕에 장사 지냈다. 배위(配位)는 한산 이씨(韓山李氏)니 아무개의 따님이다. 묘소는 공의 오른쪽에 있다. 계배(繼配)는 수원 백씨(水原白氏)로, 아무개의 따님이다. 묘소는 같은 언덕 갑좌(甲坐)에 있다. 모두 3남이니, 응지(應祉), 응식(應植), 응희(應禧)이다.12세손 도열(道烈)이 못난 나에게 편지를 보내 묘지명을 지어 주기를 청하였다. 다만 고루(固陋)하고 용렬하여 실로 감히 감당할 수 없음을 알지만 유풍에 느끼는 바가 있어 차마 끝내 사양하지 못하는 점이 있었다. 다음과 같이 명을 짓는다.도곡의 산은 道谷之山쉬고 노닐 수 있네. 可以棲遲도곡의 물은 道谷之水굶주림도 즐길 수 있네. 可以樂飢산은 높고 물은 유장하니 山高水長운치는 전과 다름이 없네. 風韻依然백세토록 생각나게 하니 百世興想지나는 사람 머무르네. 過者留連 公諱世英。字春榮。號道谷。新羅時有諱顒。以唐學士。浮海東來。是其上祖也。至中系諱公美。討倭有功。封晉陽君。子孫仍貫焉。是生諱文軌。禮部尙書。是生諱贊。版圖判事。是生諱君哲。進仕於公爲高祖。曾祖諱慶。將仕郎贈戶曹參判。祖諱用仁。進士。考諱自弘。碧潼郡守。妣延安李氏。以正德二年我中宗丁卯生。公生而氣宇峻茂。孝友根天。稍長屹若成人。劬經力學。尤蓫小學近思錄及性理之書。發揮展拓。體用無闕。平生行已。未見有苟且簡慢之意。亦未嘗有斬絶矯激之行。中年移寓綾州之道洞。買山結亭。引流裁花。逍遙徜徉。備盡幽逸之趣。以學行除齋郞。疏辭不就與鄕裏名勝梁學圃諸賢。日相追逐。唱酬遺懷。己卯趙靜庵謞本州。往省之。因以講討問辨。源源不絶。及後命至。不勝哀傷。爲賦一絶詩以寫其情。辛巳十月十三日卒于居第。享年七十五。葬于竹洞艮坐之原。配韓山李氏某女。墓附右。繼配水原白氏某女。墓同原甲坐。擧三男曰應祉應植應禧。十二世孫道烈。走書不侫。謁誌墓之文。顧固陋微劣。固知不敢承當。而曠感餘風。有不忍終辭者。銘曰。道谷之山。可以棲遲。道谷之水。可以樂飢山高水長。風韻依然。百世興想。過者留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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贈水山金聖則【義鉉】 世味頭俱白。鄕情眼復靑。前期知有限。何必淚空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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允性【金大源】兄故爲留行。又以惜別號韻。因酬之。 雛合本無邊。送迎互有連。淸遊繩此日。佳約筮明年。雪淺任踰嶺。木輕易渡川。歸餘多小思。茅屋夢依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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正月立春前一日二日。寄允性兄。 天日會成歲。雄雌各守家。靑春吾已過。華髮子兼斜。晩學難尋道。先知易泳涯。罄懷應不遠。聊寄一梅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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人日夜懷允性兄 惡離常好合。不見意茫然。梅蘂經春發。栢樽竟夕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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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거래사〉를 읽다가 '거문고와 책을 스스로 즐기다'305)는 말에 감회가 있어 讀《歸去來辭》, 感琴書自娛之語 멀리 심양306)에 살던 처사의 마음을 생각해보니 緬想潯陽處士心거문고와 책만 안고 운림307)에서 즐거워했다오 琴書獨抱樂雲林책 속의 진미를 탐닉함만 추구할 뿐이었고 只求卷裡耽眞味인세의 묘음에 맞추는 걸 원치 않았다네 不願人間和妙音장단의 곡조는 물고기가 나와 들었을 터이고308) 長短曲應聽水族글 읽는 소리는 산새 울음과 뒤섞였을 것일세 咿唔聲或雜山禽스스로 즐긴 그 깊은 뜻을 그 누가 알리오 自娛深意誰能識부질없이 거문고와 책을 가지고 찾아보노라 謾向絃篇上面尋 緬想潯陽處士心, 琴書獨抱樂雲林.只求卷裡耽眞味, 不願人間和妙音.長短曲應聽水族, 咿唔聲或雜山禽.自娛深意誰能識? 謾向絃篇上面尋. 거문고와……즐기다 도연명(陶淵明)의 〈귀거래사(歸去來辭)〉에 "친척들과의 정담을 즐거워하고, 거문고와 서책을 즐기면서 시름을 달랜다.[悅親戚之情話, 樂琴書以消憂.]"라고 한 데서 보인다. 《古文眞寶 後集 卷1》 심양(潯陽) 도연명의 고향으로, 그는 팽택 영(彭澤令)의 벼슬을 버리고 심양의 율리(栗里)로 돌아가 여생을 마쳤다. 운림(雲林) 구름 낀 숲이라는 뜻으로, 은거하는 장소를 비유한다. 당나라 왕유(王維)의 시 〈도원행(桃源行)〉에 "당시에 산 속 깊이 들어간 것만 기억하노니, 맑은 시내 건너 몇 차례나 운림 속을 찾아갔나.[當時只記入山深, 靑溪幾度到雲林.]"라고 하였다. 장단(長短)의…… 터이고 도연명이 거문고를 연주하면 물고기가 물속에서 나와 들었을 것이라는 뜻으로, 《순자(荀子)》 〈권학(勸學)〉에 "호파가 거문고를 연주하자 물속 물고기가 나와서 들었고, 백아가 거문고를 연주하자 여섯 마리 말이 고개를 치켜들고 들었다.[瓠巴鼓瑟而流魚出聽, 伯牙鼓琴而六馬仰秣.]"라고 한 데서 유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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즉흥으로 읊다 卽事 병든 몸이 경물을 보자 감회가 앞서는데 病夫覽物感懷先대화성이 서쪽으로 흐르니298) 또 일년이 지났네 大火西流又一年늙은 나무엔 가을 매미 울어대니 어찌 그리 쓸쓸한가 老樹殘蟬何蕭索푸른 갈대엔 흰 이슬 맺혀 있으니 더욱 처량하여라 蒼葭白露轉凄然영허299)가 윤달을 만드니 명협300)은 푸른빛이 더해지고 盈虛作閏蓂添碧보름에 밤을 맞이하니 밝은 달은 참으로 둥글도다 三五當宵月正圓맑은 창가에 고요히 앉으매 속된 일이 없으니 靜坐淸窓無俗事문득 입으로 화식을 먹지 못함을 의심하노라301) 却疑口不食人煙 病夫覽物感懷先, 大火西流又一年.老樹殘蟬何蕭索? 蒼葭白露轉凄然.盈虛作閏蓂添碧, 三五當宵月正圓.靜坐淸窓無俗事, 却疑口不食人煙. 대화성이 서쪽으로 흐르니 음력 7월이 되었음을 말한다. 《시경》 〈빈풍(豳風) 칠월(七月)〉에 "7월에 대화성이 서쪽으로 흐르거든, 9월에는 옷을 만들어 준다.[七月流火, 九月授衣.]"라고 하였다. 영허(盈虛) 기영(氣盈)과 삭허(朔虛)를 이르는 말로, 《서경》 〈우서(虞書) 요전(堯典)〉의 '기삼백(朞三百)'에 대한 주석에서 "해가 하늘과 만날 적에는 5일과 940분의 235일이 더 많은데 이것을 기영이라 하고, 달이 해와 만날 적에는 5일과 940분의 592일이 적은데 이것을 삭허라 한다. 기영과 삭허를 합쳐서 윤달이 생긴다."라고 하였다. 명협(蓂莢) 요(堯) 임금 때 섬돌 사이에 났던 상서로운 풀로, 매월 1일부터 15일까지 하루에 한 잎씩 나다가 16일부터는 하루에 한 잎씩 떨어져 그믐이 되면 다 졌으며, 작은달에는 마지막 한 잎이 시들기만 하고 떨어지지 않았으므로, 인하여 달력을 만들었다고 한다. 문득……의심하노라 자신이 화식(火食)을 하지 않는 신선인가 의심한다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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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봄 십삼일 밤 달을 읊다 詠新春十三夜月 강 하늘 아득하여 바라봐도 끝없고 江天渺渺望無窮밝은 달은 높다랗게 하늘에 떳구나 皓月迢迢上碧空얼음으로 둥근 바퀴 만들었나 어찌 저리 맑은가 氷作圓輪何潔淨옥으로 전체를 이루었나 정말 영롱하구나 玉成全體正玲瓏달빛이 서재 촛불에 더해지니 서생은 깨이고 光添芸燭醒書客달그림자 매화 가지에 들어오니 화공이 고뇌하네 影入梅梢惱畵工십오일 밤에 풍년을 점치기엔 아직 이르니 尙早占豊三五夜시골 노인은 등한하여 함께 하지 않는다네 等閒野老不曾同 江天渺渺望無窮, 皓月迢迢上碧空.氷作圓輪何潔淨, 王成全體正玲瓏.光添芸燭醒書客, 影入梅梢惱畵工.尙早占豊三五夜, 等閒野老不曾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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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철하에게 주다 贈趙澈夏 객을 맞아 서재에서 기쁘게 주렴 걷으니 迎客書樓喜捲簾푸른 강의 흰 돌들이 길에 촘촘하구나 滄江白石路纖纖정성스레 찾아온 그대의 뜻 알겠으니 慇懃相問知君意얼음 추위를 열흘이나 가하지 말게나226) 莫把氷寒十日添 迎客書樓喜捲簾, 滄江白石路纖纖.慇懃相問知君意, 莫把氷寒十日添. 얼음 …… 말게나 학문을 꾸준히 하라는 뜻이다. 《맹자》 〈고자 상(告子上)〉에 "비록 천하에 쉽게 자라는 물건이 있더라도 하루 동안 햇볕을 쬐어 주고 열흘 동안 춥게 한다면 제대로 자랄 수 있는 것이 없다.[雖有天下易生之物也, 一日暴之, 十日寒之, 未有能生者也.]"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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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아378)에게 주어 면려하다 贈勉觀兒 너를 가르친 지 여러 해 되어 기대가 큰데 敎汝多年期待深외부의 사사로움이 침범할까 항상 두렵구나 外私常恐或來侵가까이 네 아비를 스승 삼기에 부족하더라도 近師乃父雖無足위로 가문의 명성 이으면 마음 세울 수 있으리 上述家聲可立心세상에 자랑하는 조충379)의 기예 부끄러워하고 衒世堪羞雕蟲技사람을 놀래키는 노룡380)의 울음소리 내야하리 驚人應作老龍吟그 원천은 바로 성실과 근면에 있나니 源頭正在誠勤上콸콸 터지는 강하를 누가 또 막겠느냐 沛決江河孰復禁 敎汝多年期待深, 外私常恐或來侵.近師乃父雖無足, 上述家聲可立心.衒世堪羞雕蟲技, 驚人應作老龍吟.源頭正在誠勤上, 沛決江河孰復禁. 관아 김택술의 삼남인 형관(炯觀)을 말한다. 자는 극부(克孚), 호는 건암(健菴)ㆍ기산(麒山)이며, 기린정사(麒麟精舍)를 세우고 남고(南皐)서원ㆍ동죽(東竹)서원ㆍ고부문묘(古阜文廟)의 장의(掌議)를 하였다. 조충(雕蟲) 조충전각(雕蟲篆刻)의 준말이다. 벌레 모양이나 전서(篆書)를 새기는 것처럼, 미사여구(美辭麗句)로 문장을 꾸미기나 하는 작은 재주라는 뜻이다. 한(漢)나라 양웅(揚雄)의 《법언(法言)》 〈오자(吾子)〉에 "부라는 것은 동자 시절에나 했던 조충전각과 같은 일로서, 장부가 되어서는 하지 않았다.[賦者, 童子雕蟲篆刻, 壯夫不爲也.]"라는 말이 나온다. 노룡(老龍) 문단의 대가를 비유한 말이다. 송대(宋代) 용도각(龍圖閣)의 대제(待制)를 소룡(小龍), 직학사(直學士)를 대룡(大龍), 학사(學士)를 노룡(老龍)이라 했던 데에서 온 말이다. 《泊宅編 卷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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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날 밤 다시 짓다 是夜更賦 보리술 두 병에다 과자 안주를 놓고서 麥酒雙甁菓子肴달빛 난간에 둘러 앉아 모두 깊이 사귀네 月欄團坐總深交이슬이 젖어 풀 벌레 소리가 새로 더하고 露滋草蛩新添響밤이 깊어 숲 새들은 이미 둥지에 깃들었네 夜久林禽已定巢옛 학문은 도리어 젊은이에게 의지해야하니 舊學還宜資少輩처음 마음은 끝까지 버리지 말아야하네 初心莫使負終梢시를 줌은 성병495)이나 다투려는 게 아니니 贈詩不是爭聲病한수를 도교에게 묻는 게 무슨 상관이랴496) 寒瘦何關問島郊 麥酒雙甁菓子肴, 月欄團坐總深交.露滋草蛩新添響, 夜久林禽己定巢.舊學還宜資少輩, 初心莫使負終梢.贈詩不是爭聲病, 寒瘦何關問島郊. 성병(聲病) 시부(詩賦)를 지을 때 평자(平字)와 측자(仄字)를 규칙에 따라 골라 써서 성조(聲調)를 맞추는 병폐인데, 여기서는 시 짓는 솜씨의 의미로 쓰였다. 한수를 …… 상관이랴 시의 형식적인 면을 따지지 말고 내용을 잘 살피라는 뜻이다. 원문의 '한수(寒瘦)'는 시풍이 청한하고 파리함을 말한 것이고, '도교(島郊)'는 가도(賈島)와 맹교(孟郊)를 가리킨다. 소식(蘇軾)이 일찍이 당인(唐人)의 시풍(詩風)에 대하여 〈제유자옥문(祭柳子玉文)〉에서 평론하기를 "원진의 시는 경박하고, 백거이의 시는 비속하며, 맹교의 시는 청한하고, 가도의 시는 파리하다.[元輕白俗, 郊寒島瘦.]"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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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횡315) 田橫 적제316)가 어느덧 사해를 평정하니 赤帝居然四海平의사들로 하여금 앞길을 잃게 하였네 致令義士失前程삼천 리의 기역은 자취를 남길 만하고317) 三千箕域堪留跡오백 명318)의 영명은 명성을 세울 만하다오 五百英名可樹聲옥이 부서지고 난이 꺾였으니319) 어찌 그리 열렬하며 玉碎蘭摧寧烈烈노비처럼 아첨하고 굽실거리니320) 어찌 그리 구차한가 奴顔婢膝豈營營만일 이처럼 낙양에 가는 일이 없었더라면321) 洛陽一往如無此천추에 흠탄하는 마음이 더욱 통쾌했으리라 更快千秋仰歎情 赤帝居然四海平, 致令義士失前程.三千箕域堪留跡, 五百英名可樹聲.玉碎蘭摧寧烈烈? 奴顔婢膝豈營營?洛陽一往如無此, 更快千秋仰歎情. 전횡(田橫) 전국 시대 제(齊)나라의 왕족으로, 제왕(齊王) 전영(田榮)의 아우이다. 초(楚)와 한(漢)이 대치하던 당시 전영의 뒤를 이어 제왕이 되어 항우(項羽)를 섬겼는데, 항우가 패망하자 화를 당할 것을 두려워하여 500명의 의사(義士)를 거느리고 서해의 오호도(烏乎島)로 피신하였다. 그 뒤에 와서 항복하면 왕후(王侯)로 봉해 주겠다는 한 고조(漢高祖)의 부름을 받고서 낙양(洛陽)으로 가던 도중에, 끝내 굴복하는 것을 싫어하여 그만 자결하였다. 이 소식을 전해들은 의사들도 모두 자결하여 충절을 지켰다. 《史記 卷94 田儋列傳》 적제(赤帝) 한 고조 유방(劉邦)을 가리킨다. 한 고조가 창업(創業)하기 전 미천했을 시절에 일찍이 술에 취해 길을 가다가 길을 막고 있는 흰 뱀을 칼로 쳐서 죽였다. 그날 밤 어떤 노파가 길에서 울고 있다가 말하기를 "흰 뱀은 나의 아들로 백제(白帝)인데, 뱀으로 화해 있다가 적제(赤帝)에 의해 죽임을 당하였다."라고 한 고사 있다. 《前漢書 卷1 上 高帝紀》 삼천……만하고 기역(箕域)은 기자(箕子)의 영역이라는 뜻으로 우리나라를 가리킨다. 이는 우리나라 태안 근처의 서해에 속칭 오호도(嗚呼島), 또는 전횡도(田橫島)라는 섬이 있으므로 한 말이다. 지금 충청남도 보령시 오천면에 외연도가 있는데, 이 섬의 별칭이 전횡도와 오호도이며, 이 섬에는 현재도 전횡을 제사 지내는 사당이 남아 있어 매년 전횡 장군을 추모하며 풍어를 기원하는 제례를 지낸다. 오백 명 전횡(田橫)을 따라 죽은 500명의 의사(義士)를 가리킨다. 옥(玉)이……꺾였으니 차라리 의리를 취해서 죽을지언정 구차히 생명을 보전하기를 않는다는 굳은 절개를 비유한 말이다. 《북제서(北齊書)》 권41 〈원경안전(元景安傳)〉의 "대장부가 차라리 옥그릇처럼 부서질지언정 질그릇으로 온전할 수는 없다.[大丈夫寧可玉碎, 不能瓦全.]"라고 하고, 또 《세설신어(世說新語)》 〈언어(言語)〉에 "차라리 난초로 꺾이고 옥으로 부서질지언정, 쑥부쟁이처럼 더부룩하게 우거지지는 않겠다.[寧爲蘭摧玉折, 不作蕭敷艾榮.]"라고 하였다. 노비처럼 아첨하고 굽실거리니 《채근담(菜根譚)》에 "비단옷에 맛있는 음식만 먹는 자들은 남에게 비굴하게 굽실거리고 아첨하는 것을 달게 여긴다.[袞衣玉食者, 甘婢膝奴顔.]"라고 하였다. 만일……없었더라면 전횡이 왕후(王侯)로 봉해 주겠다는 한 고조(漢高祖)의 회유에 넘어가 낙양에 올라간 일을 두고 말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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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자의 무리 孔氏徒 만겁 지나도 끝내 공자 무리로 귀의할 것이니 萬劫終歸孔氏徒이것 말고는 부질없는 생각이 추호도 없다오 外他浮念一毫無옛 나라인 해좌는 삼천 리 강토요 舊邦海左三千里누추한 마을309)인 창동은 제이구 지역일세 陋巷滄東第二區만년에 천리마의 엎드림310)을 편히 여기는 데 이미 익숙하고 已慣暮年安驥伏소싯적에 지녔던 붕새의 포부311)를 잃었어도 탄식하지 않네 不嗟少日失鵬圖때때로 글 물으러 오는 마을 수재가 있으니 有時問字來村秀어찌 유거하는 자의 한 즐거움이 아니겠는가312) 豈非幽居一樂乎 萬劫終歸孔氏徒, 外他浮念一毫無.舊邦海左三千里, 陋巷滄東第二區.已慣暮年安驥伏, 不嗟少日失鵬圖.有時問字來村秀, 豈非幽居一樂乎? 누추한 마을 공자의 무리 중 수제자인 안연(顔淵)이 살았던 곳이다. 공자가 일찍이 제자 안연을 칭찬하기를 "어질다, 안회(顔回)여. 한 그릇의 밥과 한 표주박의 음료로 누추한 마을에서 사는 것에 대해 다른 사람들은 그 근심을 견뎌 내지 못하는데, 안회는 그 즐거움을 고치지 않으니, 어질다, 안회여![賢哉, 回也. 一簞食一瓢飮在陋巷, 人不堪其憂, 回也不改其樂, 賢哉, 回也!]"라고 하였다. 《論語 雍也》 천리마의 엎드림 삼국 시대 위(魏)나라 조조(曹操)의 〈보출하문행(步出夏門行)〉 시에 "늙은 천리마는 구유에 엎드려 있어도 천 리를 달릴 뜻이 있고, 열사는 노년에도 씩씩한 마음 그치지 않는다.[老驥伏櫪, 志在千里; 烈士暮年, 壯心不已.]"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世說新語 卷中之下 豪爽》 붕새의 포부 《장자(莊子)》 〈소요유(逍遙遊)〉에 커다란 붕새가 남해(南海)로 가기를 도모하여 북해(北海)에서 남해로 멀리 날아가는 것을 묘사한 구절이 있는데, 이를 두고 '붕도(鵬圖)'라고 말한 것으로 전하여 사람의 웅대한 포부를 비유한다. 때때로……아니겠는가 맹자가 군자(君子)의 삼락(三樂)에 대해 말하면서 "천하의 영재를 얻어 가르치는 것이 세 번째 즐거움이다.[得天下英才而敎育之, 三樂也.]"라고 하였는데, 여기서는 이 세 번째 즐거움에 비겨 이렇게 말한 것이다. 《孟子 盡心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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