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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11 卷之十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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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12 卷之十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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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저 雜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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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지들에게 적어 보이다 書示諸同志 태극(太極)은 천지의 종조(宗祖)이고 조화(造化)의 주재자(主宰者)이며 만물(萬物)의 기저(基底)이고 천하 고금(天下古今)에 걸친 인사(人事)의 준칙이다. 지극히 미묘하지만 일용(日用)의 상도(常道)를 벗어나지 않고, 지극히 가깝고 절실하지만 실로 천명(天命)의 엄중함에 근원을 두고 있다. 세상의 치란(治亂), 인물의 현부(賢否), 풍속의 오륭(汚隆), 일의 성패가 오로지 이 도리가 밝은가 어두운가에 달려있을 뿐이다. 그러나 도리(道理)는 형체가 없고 사람의 마음에는 가려짐[蔽]이 있다. 마음이 이미 가려졌다면 비록 형기의 거친 흔적마저 명백히 볼 수 없다. 하물며 형체가 없는 오묘한 도리야 말할 나위가 있겠는가. 이 때문에 성인(聖人)이 경(經)을 짓고 현인(賢人)이 전(傳)을 찬술하여 천언 만어(千言萬語)에 이르도록 끊임없이 펼쳤던 것은 이 이치를 밝혀서 사람마다 볼 수 있게 하기 위함이었다.그러나 삼대(三代) 이후로 세교(世敎)가 밝지 못하여 순경(荀卿), 양웅(揚雄)과 같이 세상에 드문 호걸조차도 기(氣)를 성(性)으로 인식하는 것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성악설(性惡說)을 주장하기에 이르렀으니, 하물며 그들보다 못한 사람이야 말할 나위가 있겠는가. 오랜 세월 어둠에 뒤덮여 헤매며 갈피를 잡지 못하다가, 송(宋)나라 때에 이르러 낙양(洛陽)과 민중(閩中)1) 사이에서 2~3명의 선각자가 역량을 발휘하여 성선(性善)의 뜻을 세상에 크게 밝혀놓았다.우리 동방에서는 정암(靜庵 조광조(趙光祖)), 퇴계(退溪 이황(李滉)), 율곡(栗谷 이이(李珥)),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 등 여러 선생께서 이를 독실하게 믿고 신중하게 지켜 노맥(路脈)이 안정되었다. 아, 유풍(遺風)이 점점 멀어지면서 미언(微言)이 쉽게 가리어져 태극(太極)이 기(氣)를 띤 사물이라고도 하고, 오성(五性)이 기(氣)로 인하여 있다고 하기도 하고, 명덕(明德)이 형이하(形而下)라고 하기도 하고, 만수(萬殊)가 기분(氣分)이라고 하기도 하며, 달도(達道)가 기발(氣發)이라고 하기도 하였다. 이와 같다면 성정(性情)과 체용(體用), 시종과 본말은 기(氣)가 주인이 되지 않는 경우가 없으니 이른바 태극의 주재라는 것이 과연 어디에 있는가.대강(大綱)이 이미 어그러졌으니 나머지가 어떨지는 모두 알 수 있다. 선성(先聖)과 선현(先賢)이 몹시 애를 태우고 수고를 마다하지 않으면서 미언(微言)이 가리어진 상황에서 이것을 밝혀놓았건만, 이제 이미 밝아진 뒤에 다시 드러나지 않게 되었으니 탄식을 감당할 수 있겠는가. 사람들은 이 이치를 강구하고 토론하여 눈앞에 밝게 드러나도록 했더라도 운용(運用)의 과정에 이르면 쉽게 잘못을 저지른다. 하물며 눈앞에 보이는 것은 모두가 형기(形氣)가 거칠고 조악한 사물이니 정밀하고 순수한 민이(民彝 사람의 도리)에는 어떠하겠으며, 세도(世道)에는 어떠하겠는가.오직 우리 노사 선생(蘆沙先生)께서 일찍이 이를 개탄하고 구원할 방도를 생각하였으니, 이것이 《납량사의(納凉私議)》와 《외필(猥筆)》을 지으신 까닭이다. 변석(辯析)하고 회통(會通)하여 선철(先哲)의 미지(微旨)가 세상에 다시 밝게 드러나기를 바랄 만하였다. 그러나 생각지도 못했건만 영남의 권(權)2), 최(崔)3) 등 여러 사람이 어구(語句)를 지적하여 사람들의 눈과 귀를 현혹하고 거짓된 사실로 전현(前賢)을 헐뜯었다. 이 사람들의 이 행위가 공심(公心)에 의해 일어났는지 아니면 시기와 혐의(嫌疑)에 부림을 당해서인지 모르겠다. 이제 《외필》이 간행되어 사방에 널리 퍼졌으니 눈이 있는 자라면 모두 볼 수 있게 되었다. 게다가 오랜 세월이 흘러 애오(愛惡)가 차츰 쇠미해졌으니 공의(公議)만 남아있을 뿐이다. 그저 입을 닫고 혀를 묶어둔 채로 청정(淸靜)한 마음을 지키고 분변을 하지 않으면서 백세(百世) 뒤의 사람을 기다려야 할 것이다.그러나 다만 오당(吾黨) 선비들이 오늘날 변론을 벌이는 이기설(理氣說) 등을 시험 삼아 본다면 어느 것이 득(得)이고 어느 것이 실(失)이라고 여기겠는가. 그렇다면 이것은 후대에 맡길 수 없으며 즉시 사실을 규명해야 하는 일이다. 만약 자기는 지식이 없으면서 다른 사람의 비방이나 칭찬에 따라 편리함을 택하고 좋아하는 대로 편든다면 인습(因襲)과 구차스러움을 행하는 사이에 이 몸이 혹여 한쪽에 치우치는 죄과에 빠지지 않으리라는 것을 어찌 알겠는가. 다만 도리(道理)는 형체가 없는 오묘함이다. 모름지기 침착하고 독실한 태도로 오래도록 존심 양성(存心養性)을 해야만 비로소 볼 수 있다. 힘쓰라! 이것이 학문(學問)의 기본 법칙이고 자신과 집안을 위한 중대한 계책이니 또 어찌 이 하나의 일만 해내고 말 뿐이겠는가. 太極是天地之宗祖。造化之主宰。萬彙之根柢。天下古今人事之準則也。至微至妙。而不離乎日用之常。至近至切。而實原乎天命之嚴。世之治亂。人之賢否。俗之汚隆。事之成壞。只在乎此箇道理明不明如何耳。然道理無形而人心有蔽。心旣有蔽。則雖形器粗迹。見且猶不得了了。況無形之妙乎。是以聖賢作之經。述之傳以至於千言萬語。娓娓而不已者。無非所以明此理。使人人得以見之。然三代以降。世敎不明。雖間世豪傑如荀卿揚雄之徒。猶不免認氣爲性。至有性惡之說。況其下者乎。百世長夜。擿埴倀倀。至宋。洛閩間有二三先覺出而發揮之。使性善之義大明於世。曁于我東。如靜退栗尤諸先生。篤信謹守。路脈坦然。嗚呼。遺風浸遠。微言易晦。或以太極爲帶氣之物。或以五性爲因氣而有。或以明德爲形而下。或以萬殊爲氣分。而以達道爲氣發。如此則性情體用始終本末。無非氣爲之主。而所謂太極主宰者。果安在哉。大綱旣差。餘皆可知。先聖先賢。苦心苦口。所以明之於旣晦之餘者。今不免復晦於旣明之餘。可勝歎哉。人於此理講之討之。使昭然在目。至運用之際。易致差失。況目前所見。無非形氣鹿粗之物。則其於民彝何。其於世道何。惟我蘆沙先生。嘗慨然於此。思有以救之。而納凉猥筆之書所以作也。析以辨之。會而通之。使往哲微旨庶幾復明於世。不意嶺中權崔諸人。指摘句語。眩惑視聽。以爲誣毁前賢。未知此人此擧是公心所發耶。是猜嫌所使耶。今猥筆之書。刊布在四方。有眼者。皆可得以見之。況時移歲久。愛惡稍衰。則所餘者公議而已。只有緘口結舌。守靜無辨。以俟百世之人可也。然惟吾黨之士。試觀今日所辨如理氣之說。以爲何者爲得。何者爲失。此則不可委之於後。而所當卽下究覈者也。若已無知識。而隨人毁譽。惟便是擇。惟好是阿。則因仍苟且之頃。安知此身或不陷於偏側之科乎。但道理是無形之妙也。須從容沈索。積久存養。乃可以見。勉之勉之。此是學問大法。身家大計。又豈足止爲了此一事而已耶。 낙양(洛陽)과 민중(閩中) 낙양은 정호(程顥)ㆍ정이(程頤)가, 민중은 주희(朱熹)가 거주하던 곳이다. 권(權) 《일신재집》 〈통고영남열읍장보문〉에 따르면 권봉희(權鳳熙)를 가리킨다. 최(崔) 《일신재집》 〈통고영남열읍장보문〉에 따르면 최동민(崔東敏)을 가리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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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상기우록 湖上奇遇錄 갑술년(1874, 고종11) 가을에 친족인 사문(斯文) 백언(伯彦)4)이 사상(沙上)5)에서 나를 찾아와 말하기를, "노선생(老先生)께서 계방(季方 정의림(鄭義林)의 자(字))의 안부를 매우 자세히 물으셨다. 인하여 서찰 봉투 하나를 가리키면서 말씀하기를, '이것은 삼가(三嘉)에 사는 정재규(鄭載圭)6)의 편지이다. 이 사람은 의림(義林)과 성씨도 서로 같고 나이도 서로 비슷하며 재능과 성격도 서로 닮았으며 사는 곳의 지명 또한 다르지 않으니 참으로 우연이 아니다. 그래서 이것을 보관했다가 의림에게 보이고자 한다.' 하셨습니다."라고 하였다.삼가(三嘉)에 정 사문(鄭斯文)이라는 현자가 있다는 말은 이보다 앞서 이미 익히 들었다. 하지만 이 보잘것없는 몸으로 그와 함께 하는 것이 있고 나란히 사문(師門)의 칭찬을 받으리라는 것을 어찌 알았겠는가. 사정(私情)이 두려워 감히 사문의 뜻을 받들 수 없다는 것을 잘 알지만 정 사문을 우러러 흠모하는 나의 마음은 이때부터 더해갔다. 이에 전편(轉便)을 통해서 삼가 통성명은 하였으나, 직접 뵙는 일까지는 아득하여 기약이 없었다.다음 해인 을해년(1875) 겨울 10월에 내가 사상(沙上)으로 가서 선생을 찾아뵈었는데 후윤(厚允 정재규(鄭載圭)의 자)이 3일 전에 당도해 있었다. 그다음 해 여름 4월에 내가 진구(珍邱)의 우사(寓舍)로 가서 선생을 찾아뵈었더니 후윤이 또 3일 먼저 당도해 있었다. 이것이 어찌 사람이 꾀한다해서 되는 일이겠는가. 얼굴을 마주하고 약속을 하며 손을 맞잡고 언약을 하면서 매우 간절하게 둘이서 응낙하더라도 끝내는 서로 형편이 어긋나 뜻대로 되지 않는 것이 열에 여덟, 아홉이다. 하물며 아득히 먼 500리 땅에서 애초에 한마디의 약속도 없던 사이야 말할 나위가 있겠는가. 그러나 앞서지도 않고 뒤서지도 않으며 메아리처럼 합치된 것이 귀신과 같아 한 번, 두 번 기약이라도 한 듯이 만나게 되었다. 이것은 예사로운 입장에서도 신기하고 절묘한 일이건만 도리어 함께 하는 것이 있고 스승에게 칭찬을 들었으니 참으로 진귀하고 소중한 일이다.선생께서 두 제자를 돌아보고 이르시기를, "이것은 세상에 드문 신기하고 절묘한 일이다. 어찌 각자 기록을 남겨서 잊지 않겠다는 뜻을 보이지 않는가."라고 하셨다. 이에 삼가 전말(顚末)을 서술하고 이로 인하여 후윤의 학문과 지절(志節)을 돌이켜 기억하자니 실로 나처럼 어리석은 자가 미칠 수 있는 대상이 아니었다. 그러나 앞뒤로 이어진 기이한 우연이 이처럼 여러 차례 반복되었으니 후윤은 자기만 못한 자를 벗으로 삼지 말라는 공자의 교훈7)을 고집스럽게 지키지 않아야 할 것이다. 나처럼 무능한 사람을 불쌍히 여겨 은혜롭게 대하고 멀리하지 않으며 이끌고 일깨워주어 자기와 함께 돌아가도록 한다면 이처럼 세상에 드문 우연에 부응할 뿐만이 아니며, 또한 우리 선생께서 끊임없이 칭찬하신 뜻이 아니겠는가. 이에 다음과 같은 시를 짓는다.네 가지가 같다는 말씀은 부끄럽지만 堪愧四同說두 번씩이나 만난 우연이 더욱 기이하구나 最奇再遇緣선생께서 기록으로 남기라 명하시니 先生命以記이 뜻이 참으로 깊고도 깊도다 此意正淵淵 歲甲戌秋。鄙族伯彦斯文。自沙上過余而言。老先生問季方安否甚悉。因指一幅封題曰。此是三嘉鄭載圭書也。此人與義林。姓氏相同。年紀相近。才性相似。至於所居地名亦不異。甚非偶然。故留此欲爲義林示之也。三嘉有鄭斯文之賢。前此蓋已稔聞。豈知醜差之身。與有所同。而倂見稱道於師門哉。私情悚惕。固知不敢承膺。而區區嚮仰之心。自此而有加矣。玆因轉遞。謹以姓名自通。而至於一番承接。則闊然無期。越明年乙亥冬十月。余往拜先生於沙上。厚允先三日至。明年夏四月。余往拜先生於珍邱寓舍。厚允又先三日至。是豈人謀所及哉。面以證期。手以置契。兩諾俱應。極其丁寧。而終至汗渙緯繣不如吾意者。十居八九。況漫漫半千里。初無一言之約哉。然不先不後。嚮合如神。至一至再。奉接如期。此在尋常之地。猶爲奇絶。乃有所同而見道於師門。曾是珍重者耶。先生顧謂二子曰。此是曠世奇絶事。盍各記諸以示不忘也。於是謹序述顚末。而因念厚允學問操守。實非如愚所可及者。然前後奇遇。若是種種。則厚允於母友不如之訓。似不當膠守矣。矜此不能。惠爾不遐。提挈警覺。俾與之同歸。則不惟爲副此曠絶之遇。而亦豈非我先生眷眷稱道之意耶。仍有詩曰。堪愧四同說。最奇再遇緣。先生命以記。此意正淵淵。 백언(伯彦) 정시림(鄭時林, 1833~1912)의 자이다. 본관은 광산(光山), 호는 월파(月坡)이다. 기정진의 문인으로, 보성(寶城)에 거주하였다. 사상(沙上) 기정진이 거처하던 노산(蘆山) 아래 하사(下沙)를 이른다. 정재규(鄭載圭) 1843~1911. 본관은 초계(草溪), 자는 영오(英五)ㆍ후윤(厚允), 호는 노백헌(老柏軒)ㆍ애산(艾山)이다. 청계(淸溪)는 초계의 이칭(異稱)이다. 김홍집(金弘集) 등 개화파에 의한 개화운동이 시기상조임을 밝히고 위정척사(衛正斥邪)를 주장하였다. 1894년 갑오개혁 때에는 유림에게 통문을 돌려 의병을 일으키자고 호소하였다. 1905년 을사조약이 맺어진 후 최익현(崔益鉉) 등과 의병을 일으킬 것을 계획하였으나 성사시키지 못하였다. 저서로 《노백헌집(老柏軒集)》이 있다. 자기만……교훈 《논어(論語)》 〈학이(學而)〉에 "공자(孔子)가 말하기를, 군자가 후중하지 않으면 위엄이 없으니, 배우는 것 또한 견고하지 못하다. 충(忠)과 신(信)을 주로 하며, 자기만 못한 자를 벗으로 삼지 말며, 허물이 있으면 고치기를 꺼리지 마라."라는 내용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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恭承嘉命許以令愛貺室僕之堂姪赫哲玆有先人之禮謹行納幣之儀 不宣伏惟尊照 上狀乙亥十二月初七日扶寧後人金直拜(皮封)崔生員上狀執事宅 謹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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閱歲阻拜瞻仰政溸意表惠䟽忽至奉讀數回如敵良晤山川之綿邈不能間人心曲也矧審哀體動止連護万支覃節均得泰旺區區仰慰實愜願聞弟昨冬以家季憂擾幾涉危境近幸差復以身家以滯祟屢朔呻苦氣血從又脫落甚可畏也方試藥餌而亦未能其必效也就先孝事一層節示是大關嶺而旣已順過幸莫大矣然前頭之嶺尤有甚焉者將奈何奈何如渠病孱者有心而不能助一臂之力可恨可悵未知何以則爲好耳五筆中書不能如意之際繼而有功甚緊甚緊其緊不可量矣然吾傳本色俱是淸寒者此亦不容易得者其感且悚難以形喩也餘留不備謝禮庚午四月三日 弟安橓拜拜(皮封)堂邨 哀座執事觀峴謹謝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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忝親扶寧后人金彩相再拜忝親彩相白伏承尊慈不鄙寒微許以令愛貺室僕之第二孫洛恒玆有先人之禮敬遣使者行納幣之禮不備伏惟尊慈特賜鑑念謹上狀崇禎後丁卯四月十三日(皮封)上狀崔生員 執事 方謹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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扶寧后人金載相再拜恭承嘉命許以 令愛貺室于僕之子龍煥年旣長成玆有先人之禮謹行納幣之儀不備伏惟尊照 狀上辛丑十一月二十九日(皮封)謹封上狀李生員 下執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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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덕경【달환】에게 답함 答文德卿【達煥】 세상에 얽매였던 곳을 떠나 고요한 곳으로 나아가니 새로 마련한 집터가 한가롭고 자유스럽습니다. 더구나 가을을 틈타 서늘한 바람을 맞으며 오랜 세월 사귄 친구의 얼굴을 함께 대하였으니 위안이 되고 마음이 놓이는 것이 어떠하겠습니까. 돌아온 이래 벌써 두 달이 지났습니다. 형의 체후는 어떠신지 모르겠습니다. 부모님 또한 평온하신지요? 매양 소식을 듣고 싶은 마음이 절실합니다. 아우는 병세가 날로 심해져 바로 서산(西山)에 지는 해와 같으니 가련합니다. 아, 남은 날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참으로 마땅히 부지런히 노력하여 죽기 전에 좁은 소견이라도 얻기를 바라는 것이 어찌 지극한 소원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처지와 형편이 이와 같은 데다가 또다시 쓸쓸하고 적막하여 답답하고 의지할 곳도 없으니 어떠하겠습니까. 매양 세상일은 전부 쓸어버리고 형처럼 학식이 뛰어나고 견문이 넓은 또래들과 차분하게 서로 보고자 하지만 그렇게 할 수 없었습니다. 조물주가 평생에 걸쳐 곤궁했던 처지를 불쌍히 여기고 특별히 만년에 여지를 갖게 해주려는지 모르겠습니다. 우습습니다. 악(惡) 역시 이(理)가 주재(主宰)합니다. 이것이 저의 본의는 아니지만 자세히 말하자면 역시 얘기할만한 곡절(曲折)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발(發)하여 곧게 이루어진 것은 분명히 이(理)가 주재한 것이고 곧게 이루어지지 않은 것은 기(氣)가 이겼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위선(爲善)과 위악(爲惡)'의 분명한 경계입니다. 참으로 용납할 수 있는 다른 평설(評說)이 없습니다. 그러나 이(理)라는 것은 본래 사물을 주재하되 그렇지 않은 때가 없는 것입니다. 만약 위쪽의 반은 이가 주재하고 아래쪽의 반은 기가 주재한다면 그렇지 않은 때가 없다는 것이 어떻게 성립할 수 있겠습니까. 비유하자면, 물이 아래로 흐르는 것은 분명 이의 본연(本然)이지만 튀겨서 이마 위로 올라가게 하고 힘을 가하여 산에 있도록 하는 것을 본연이라고 하는 것은 옳지 못하며 또한 사리와 형세가 그렇게 되도록 한 것이 아니라고 할 수 없습니다. 맹자(孟子)는 작은 나라가 큰 나라에게 부림을 받고 약한 자가 강한 자에게 부림을 받는 것을 모두 하늘의 이치라고 보았고,5) 주자(朱子)는 기화의 성쇠와 인사의 치란을 상리(常理)라고 하였으니6) 이를 통해 살펴볼 수 있습니다. 하물며 선을 따르면 길하고 악을 따르면 흉하며,7) 천리를 따르면 여유가 있고 인욕을 따르면 위태로우니8) 이(理)가 주재하지 않는 경우가 없습니다. 이것은 이(理)에 나아가 깊이 탐구하여 말한 것입니다. 위의 한 조목과 각각 하나의 의미가 되기에 문제가 없습니다.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謝繫就靜。新寓蕭散。矧且乘秋溯涼。共對知舊積年之面。其慰豁之情。爲何如哉。歸來。月已再弦矣。未審兄體何如。惟憂亦平和否。每切願聞。弟病情日深。正是下山之日。可憐。嗚呼餘日幾何。固宜汲汲勉力。企得一管之見於未死之前。豈非至願。而身事如此。又復落落離索。無聊無賴。奈何。每欲掃却外事。與如兄年輩老宿之人。爲從容相觀計。而不可得。未知造物矜其平生蹇滯。而特許其晩年一副餘地耶。可呵。惡亦理爲之主宰。此非鄙之本意。而究言之。亦不無曲折可言處。發而直遂。固理之爲主。而其不直遂者。爲氣所勝故也。此是爲善爲惡八字界至也。固無他說之可容更評。然理者。是合下主宰物事而無時不然者也。今以上一半。理爲之主。下一半。氣爲之主。則烏在其無時不然者乎。比之水潤下。固理之本然。而其搏之以過顙。激之以在山。謂之本然則不可。而亦不可謂非理勢之使然也。孟子以小役大弱役强。同謂之天。朱子以氣化盛衰。人事治亂。謂理之常。此可考也。況惠迪吉。從逆凶。順理則裕。從欲惟危無非理爲之主也。此是就理上深探而究言之者也。與上一條自不妨各爲一義。如何如何。 맹자(孟子)는……보았고 《맹자》 〈이루 상〉에 "천하에 도가 있을 때에는 소덕(小德)이 대덕(大德)에게 부림을 당하고 소현(小賢)이 대현(大賢)에게 부림을 당하며, 천하에 도가 없을 때에는 나라가 작은 자가 나라가 큰 자에게 부림을 당하고 약자가 강자에게 부림을 당한다. 이 두 가지는 하늘(이치와 형세)이니, 하늘을 순종하는 자는 보존되고 하늘을 거스르는 자는 망한다."라고 하였다. 주자(朱子)는……하였으니 《맹자집주》 〈등문공 하(滕文公下)〉 제9장의 "천하에 사람이 살아온 지가 오래되었는데, 한 번 다스려지고 한 번 어지러웠다.【天下之生久矣, 一治一亂.】"라는 구절에 대한 주희(朱熹)의 주에, "한 번 다스려지고 한 번 어지러웠다는 것은 기화의 성쇠와 인사의 득실이 반복하여 서로 찾아오는 것이니, 이치의 떳떳함이다.【一治一亂, 氣化盛衰ㆍ人事得失, 反覆相尋, 理之常也.】"라는 내용이 보인다. 선을……흉하며 《서경》 〈대우모(大禹謨)〉의 "선을 따르면 길하고 악을 따르면 흉하다."라는 구절을 인용한 것이다. 천리를……위태로우니 정이(程頤)가 지은 〈사물잠(四勿箴)〉 가운데 동잠(動箴)에 '철인은 기미를 알아 생각할 때에 성실히 하고, 지사는 행실을 힘써 행함에 지조를 지킨다. 천리를 따르면 여유가 있고 인욕을 따르면 위험하니, 창졸간에도 능히 생각해서 전전긍긍하여 스스로 잡아 지키도록 하라. 습관이 성(性)과 더불어 이루어지면 성현과 함께 돌아가리라.【其動箴曰, 哲人知幾, 誠之於思, 志士勵行, 守之於爲. 順理則裕, 從欲惟危, 造次克念, 戰兢自持. 習與性成, 聖賢同歸.】"라고 한 내용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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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곡사 유지322)에서 여러 선비의 시에 차운하다 次艮谷祠遺址多士韻 옛날 어느 해에 간곡에다 사우를 세웠던가 立祠艮麓昔何年남쪽 고을의 어진 노곡323)을 제향하기 위해서였네 爲有南州老谷賢묘목에 꽃이 피지 않으니324) 성효가 지극하였고 墓木不花誠孝至시옹325)과 덕이 같았으니 학문이 전일했다오 市翁同德學功專희생 올린 제단이 정결하니 선비들이 찾아오고 騂牲壇潔來章甫높이 솟은 홍살문이 우뚝하니 동천이 빛나는구나 紅箭門高耀洞天창의록에 빼어난 공적이 기록되어 있으니 倡義錄中偉然蹟우리 집안 선조326)와 함께 길이 전해지리라 與吾家祖永相傳 立祠艮麓昔何年? 爲有南州老谷賢.墓木不花誠孝至, 市翁同德學功專.騂牲壇潔來章甫, 紅箭門高耀洞天.倡義錄中偉然蹟, 與吾家祖永相傳. 간곡사(艮谷祠) 유지(遺址) 간곡사는 노곡(老谷) 유동수(柳東秀)를 제향하는 간곡서원(艮谷書院)의 사묘(祠廟)이다. 간곡서원은 부여군 임천면 간곡에 유동수를 제향하기 위해 향현사(鄕賢祠)를 창건하면서 시작되었다. 그 후 1732년(영조 8) 이 사우(祠宇)를 창의사(倡義祠)라 하였고, 1740년(영조 16)에 강학 장소로 서원을 창건하여 간곡서원이라 하였다. 1868년(고종5)에 조정의 서원훼철령으로 서원을 훼철하고, 단을 놓아 석채로써 구례를 따랐다. 1969년에 유지(遺址)에 사우와 서원을 복원하였다. 노곡(老谷) 유동수(柳東秀, 1579∼1654)로, 본관은 문화(文化), 자는 수보(秀甫), 호는 노곡이다. 병자년(1636, 인조14)의 호란(胡亂) 때 상주(喪主)의 몸으로 호남에서 의병을 모아 여산(礪山)에 이르렀으나 강화조약이 성립되었다는 소식을 듣고서 통곡하고 귀가하였다. 1646년 유탁(柳濯)이 난을 일으켰을 때 이산 현감(尼山縣監)으로서 이 사실을 미리 조정에 고발한 공으로 통정대부에 올랐다. 묘목(墓木)에……않으니 시묘살이 3년 동안 어버이를 그리워하면서 흘리는 피눈물로 인하여 묘목에 꽃이 피지 않은 것이다. 시옹(市翁) 호가 시남(市南)인 유계(兪棨, 1607~1664)를 가리킨다. 본관은 기계(杞溪), 자는 무중(武仲),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병자호란의 화의가 성립되자 척화신으로 유배되었다가 금산의 마하산(麻霞山)에 은거하여 학문에 전념하였다. 우리 집안 선조(先祖) 후창의 10대조인 김정길(金鼎吉, 1576~1645)을 가리킨다. 병자호란 때 인조가 남한산성으로 피난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곧바로 의병과 의곡(義穀)을 모아 여러 동지들과 함께 여러 고을에 격문을 전하며 청주(淸州)까지 진격하였다가, 화의(和議)가 이루어졌다는 소식을 듣고서 통곡하고 집으로 돌아와서는 두문불출하여 세상에 자취를 감추었는데, 이 일이 《호남창의록(湖南倡義錄)》에 실려 있다고 하였다. 《後滄集 卷16 參奉府君祭壇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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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암 백형에게 부치다 寄省菴白兄 화문을 함께 나왔으니 우정이 가볍지 않고430) 同出華門誼不輕다시 제영431)을 배워 오래 공경할 수 있었네 更能久敬學齊嬰지난가을 역로에서 날 저문 것을 근심하며 前秋驛路愁天暮밤마다 강가의 정자에서 밝은 달을 보았네 每夜江亭見月明정밀한 식견은 응당 터럭 끝까지 분석하고 精識應臻毫縷析새로운 시는 거의 옥금을 연주하듯 울렸네 新詩幾奏玉金鳴서로 그리워하며 평안하단 소식 알리니 相思爲報平安字매화 대나무 맑은 바람도 똑같은 심정이리 梅竹淸風一樣情 同出華門誼不輕, 更能久敬學齊嬰.前秋驛路愁天暮, 每夜江亭見月明.精識應臻毫縷析, 新詩幾奏玉金鳴.相思爲報平安字, 梅竹淸風一樣情. 화문(華門)을……않고 성암 백형(省菴白兄)이 저자 후창 김택술과 함께 간재(艮齋) 전우(田愚) 문하의 동문임을 말한 것이다. 화문은 화도(華島 계화도(繼華島))에 살았던 간재 전우의 문인임을 말한다.의 문하를 말하는데 화도에 간재 가 살았던 곳이다. 제영(齊嬰) 제(齊)나라의 재상 안영(晏嬰)을 말하며, 자는 평중(平仲)이다. 《논어 공야장》에서 공자(孔子)가 그를 칭찬하여 "안평중은 남과 사귀기를 잘하였다. 오래되어도 공경하는구나.〔晏平仲善與人交, 久而敬之.〕"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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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우경 석주 군에게 주다 贈權君禹卿【錫柱】 성학의 규모로 바른 학맥을 전하고 聖學規模正脈傳의관을 삼가 지키니 그 마음 오롯하네 謹持衣帶厥心專두 소매의 선왕 옷 입은 그대를 흠모하고 欽君雙袖先王服속사의 자리에 무리 지은 저들 부끄러워라 愧彼群居俗士筵언행을 따라가 보면 상투적인 일이 되었으니 從看言行歸一例모름지기 안팎이 온전케 되어야 하네 須將表裏致純然끝을 잘 마무리함은 무엇보다 어려운 일인데 克終最是爲難事엎어진 수레바퀴435)가 어지럽게 내 앞에 있네 覆轍紛紛在我前 聖學規模正脈傳, 謹持衣帶厥心專.欽君雙袖先王服, 愧彼群居俗士筵.從看言行歸一例, 須將表裏致純然.克終最是爲難事, 覆轍紛紛在我前. 엎어진 수레바퀴 원문의 '복철(覆轍)'은 앞사람이 실패한 전례(前例)를 뜻한다. 《한시외전(韓詩外傳)》에 "앞에 가는 수레가 엎어졌는데도 뒤에 가는 수레가 경계하지 않는다. 이 때문에 뒤에 다시 엎어지는 것이다.〔前車覆而後車不誡, 是以後覆也.〕"라는 말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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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우록〉을 읽고 감회가 일어 적다 閱奇遇錄有感而記 내가 일찍이 공문(孔門)의 제자들이 천하의 대성(大聖)을 만나 스승으로 삼고 천하의 대현(大賢)을 만나 벗으로 삼아 스승에게 계발을 받고 벗과 강론을 하며 벗과 강론을 하고 스승에게 물어 바로잡았던 것을 생각해보니, 항항 간간(行行侃侃)한 위의(威儀)8)와 절절 시시(切切偲偲)한 즐거움9)이 천년 세월이 흐른 뒤에도 상상이 되어 나도 모르게 감탄을 하고 감흥이 일었다.비록 요(堯)나 순(舜) 같은 군주와 고요(皐陶)ㆍ기(夔)ㆍ후직(后稷)ㆍ설(契)과 같은 무리를 만나 격의 없이 정사를 논하지는10) 못했을지라도 맹자(孟子)가 말한 천하에 왕(王)이 되는 것은 삼락(三樂)에 포함하지 않는 의리11)로 미루어 보자면 경중(輕重)과 저앙(低昂)의 분별은 차라리 저것을 버릴지언정 이것을 잃을 수 없게 된 지 오래되었다. 그렇다면 천하의 즐거움 가운데 이보다 큰 것이 있겠는가.내가 을해년(1875, 고종12), 병자년(1876) 연간에 선생의 문하에서 김경범(金景範)12), 정후윤(鄭厚允)13), 기회일(奇會一)14), 정주윤(鄭周允)을 만났다. 태극(太極)과 성명(性命)의 은미함으로부터 3백 경례(經禮), 3천 곡례(曲禮)의 다양함에 이르기까지 각기 들은 바를 펼치고 각기 본 바를 말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물러나서는 사실(私室)에서 강구하고 나아가서는 강석(講席)에서 질정(質正)하며 한 시대의 대현(大賢)을 만나 스승으로 삼고 한 시대의 대유(大儒)를 만나 벗으로 삼아 넘치는 훈도(薰陶)를 받고 빠져들고 젖어 들어 옛날과 동떨어진 시기에 사수(洙泗 공자의 문하)의 성대한 법도를 직접 경험하였다. 이것이야말로 이번 생에서 다시 만나기 어려울 뿐만 아니라 실로 천백 세(世)에 걸쳐 겨우 한두 번이나 있을까 말까 한 일이다.아, 세월이 덧없이 흘러 이제 벌써 17년이 지났다. 선사(先師)께서 이미 타계하시고 김경범도 이어서 세상을 떠나고 남아있는 2~3자(子) 또한 멀리 헤어져 있다. 나 또한 가난과 질병으로 이곳저곳 떠돌아 옛 학문은 성취를 이루지 못하였고 나이는 이미 늙고 정력은 이미 쇠퇴하였다. 병중에 묵은 종이 더미를 열람하다가 우연히 서문(序文) 1통(通)을 발견하였다. 이를 읽자니 부끄럽고 슬프고 분하여 스스로 제재하지 못하고 삼가 이 글을 지어 뜻을 보인다. 余嘗思孔門諸子。得天下之大聖以爲師。得天下之大賢以爲友。開之於師而講之於友。講之於友而質之於師。行行侃侃之儀。切切偲偲之樂。想像千載之下。不覺感歎而興起也。雖不得唐虞之君與皐夔稷契之徒。都兪吁咈於太虛亭午之日。以孟子所謂王天下不與三樂之義推之。則其輕重低昂之分。寧可遺於彼而不可失於此久矣。然則天下之樂。其有以大於此乎。余於乙亥丙子年間。與金景範鄭厚允奇會一鄭周允。遇於先生之門。自太極性命之微。至三百三千之多。無不各陳所聞。各道所見。退而講之於私室。進而質之於函席。得一世之大賢以爲師。得一世之大儒以爲友。薰蒸洋溢。涵濡浹洽。親見洙泗盛儀於去古己遠之日。此不惟爲此生難再之遇。而實千百世絶無僅有之事也。嗚呼。荏苒日月。已十有七年于玆矣。先師已沒。景範繼逝。其餘二三子。又且離違在遠。余亦貧病流離。舊學未就。年力已替矣。病中偶閱舊紙堆。得所贈序文一通。讀之感愧悲憤。有不自裁者。謹書此而見志焉。 항항 간간(行行侃侃)한 위의(威儀) 제자가 스승을 모시고 있을 때 굳세고 강직한 태도를 지니는 것을 의미한다. 《논어(論語)》 〈선진(先進)〉에 "옆에서 모시는데 민자건(閔子騫)은 온화하였고, 자로(子路)는 굳세었고, 염유(冉有)와 자공(子貢)은 강직하니 공자께서 즐거워하셨다."라는 내용이 있다. 절절 시시(切切偲偲)한 즐거움 친구 간에 착한 일을 하도록 서로 권하고 격려하는 일, 서로 도의(道義)를 절차탁마(切磋琢磨)하는 일을 의미한다. 《논어》 〈자로(子路)〉에 "자로가 '어떠해야 선비라고 이를 만합니까?'라고 묻자, 공자가 대답하기를, '간절하고 자상하게 권면하며 화락(和樂)하면 선비라 이를 만하다. 붕우(朋友) 간에는 간절하고 자상하게 권면하며 형제는 화락해야 한다."라는 내용이 있다. 격의……논하지는 원문은 '都兪吁咈於太虛亭午之日'이다. '太虛亭午之日'이 문맥에 맞지 않아 이 부분을 생략하고 번역하였다. 천하에……않는 《맹자》 〈진심상(盡心上)〉에 "군자가 세 가지 즐거움이 있으니, 천하에 왕 노릇하는 것은 여기에 끼지 않는다. 부모가 다 생존하고 형제가 무고한 것이 첫 번째 즐거움이요, 위로는 하늘에 부끄럽지 않고 아래로는 사람에게 부끄럽지 않은 것이 두 번째 즐거움이요, 천하의 영재를 얻어서 교육하는 것이 세 번째 즐거움이다"라고 하였다. 김경범(金景範) 경범은 김석구(金錫龜, 1835~1885)의 자이다. 김석구의 본관은 김해(金海), 자는 경범, 호는 대곡(大谷)으로 전라도 남원에서 태어났다. 《맹자(孟子)》에 통달하여 '김맹자(金孟子)'로 불렸다. 학문에 전념하기 위해 담양군 대전면 대곡리(大谷里)로 이사하였고, 27년간 기정진의 문하에서 공부하였다. 정후윤(鄭厚允) 후윤은 정재규(鄭載圭, 1843~1911)의 자이다. 자는 영오(英五)ㆍ후윤(厚允), 호는 노백헌(老柏軒)ㆍ애산(艾山), 본관은 초계(草溪)이다. 경상남도 합천군 쌍백면 묵동에서 살았다. 노사(蘆沙) 기정진(奇正鎭, 1798~1876)의 문인으로, 개화(開化)에 반대하여 위정척사(衛正斥邪)를 주장하였다. 저서로는 《노백헌집》이 있다. 기회일(奇會一) 회일은 기우만(奇宇萬, 1846~1916)의 자이다. 본관은 행주(幸州)이고 호는 송사(松沙)이다. 참봉을 지내 기 참봉으로 불렸으며, 호남의 거유(巨儒) 기정진(奇正鎭)의 손자로 그 학업을 이어받아 문유(文儒)로 추앙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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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덕랑 둔와 박공 묘갈명 通德郞遯窩朴公墓碣銘 숨은 덕행이 세상에 드러나지 않은 사람 가운데 그 공업이 그다지 기이하지 않고 그 명예가 그다지 특별하지 않지만, 선조가 공덕을 쌓아 누리지 않은 보답이 이따금 후세 자손 사이에 드러나기도 한다. 이 때문에 자손을 보고서 그 선조의 덕을 알 수 있는 것이다. 둔와(遯窩) 박공(朴公)은 태어나 많은 일을 당하고 온갖 어려움을 겪어 마침내 천관산(天冠山)으로 들어가 문을 닫고 독서하여 생도들을 가르치며 한가롭게 소요하다가 그대로 생을 마감하였다. 세상에는 실로 명성(名聲)을 얻지 못했는데도 알려지는 경우가 있으니, 더구나 여기에 나아가 그에 대한 사실이 존재함을 아는 경우야 말해서 무엇 하겠는가. 심지어 죽은 뒤에 자손이 더욱더 번성하여 문학과 관직으로 성대함이 뒤따라 우뚝이 남쪽 고을의 명가가 되었다. 이에 사람들이, 공이 쌓은 공덕의 실상에 탄복하였으니, 단연코 속일 수 없는 점이 있다.공의 휘는 만윤(萬潤), 자는 중실(仲實)이니, 세계는 밀성(密城)에서 나왔다. 고려(高麗) 때 밀성군(密城君) 휘 언부(彦孚), 은산군(銀山君) 휘 영균(永均), 밀성군(密城君) 휘 천경(天卿), 그리고 조선에 들어와서 문정공(文貞公) 휘 부(敷)는 모두 이름이 높이 드러난 선조이다. 문정공 아우의 셋째 아들은 윤리(允利)인데, 좌찬성(左贊成)으로 점필재(佔畢齋) 김 선생(金先生)의 뛰어난 제자이다. 찬성공의 5세손은 계문(啓文)인데, 군자감 정(軍資監正)으로, 처음 호남의 장흥(長興)에 거주하였는데, 바로 공의 고조이다. 증조 경립(景立)은 공조 참의이고, 조부 인적(仁績)은 한성부 좌윤(漢城府左尹)이며, 부친 세장(世章)은 동지중추부사이다. 모친은 정부인(貞夫人) 행주 기씨(幸州奇氏)로, 기수흥(奇壽興)의 따님이다. 영묘(英廟) 경술년(1730, 영조6)에 부(府)의 종정리(鍾亭里) 사제에서 공을 낳았고, 정묘(正廟) 신축년(1781, 정조5) 1월 20일에 생을 마감하였다. 남하면(南下面) 동촌(洞村) 뒤 술좌(戌坐) 언덕에 장사 지냈다. 배위(配位)는 분성 김씨(盆城金氏) 김덕해(金德海)의 따님이다. 모두 아들 셋을 두었으니, 이형(履亨), 이중(履重), 이덕(履德)이다. 손자 이하는 다 기록할 수 없다.현손(玄孫) 희원(凞元)이 내가 교유한 친분이 있다는 이유로 그 종제 희준(凞俊)을 보내 묘갈문을 지어 달라고 청하니, 감히 사양하지 못하였다. 다음과 같이 명을 짓는다.아름다운 나무는 뿌리 감추고210) 嘉木晦根좋은 옥은 광채 품고 있네. 良玉蘊光음덕에 대한 보답으로 不食之報후손이 번창하리라. 後錄彌昌 人有隱德而不需於世者。其功業不甚奇也。其聲稱不甚異也。而積累不食之報。往往發見於後嗣子孫之間。是以。觀乎子孫而其先德可知也。遯窩朴公。生丁多故。備經百艱。遂入天冠山中。杜門讀書。敎授生徒。婆娑徜徉。聊以卒世。世固有不得其名而知之。況進於此而識其實之所存哉。至於身後而螽斯椒聊。愈益蕃衍。文學科宦。從以蔚興。偉然爲南州之名家。於是而人服公積累之實。斷斷有不可誣者矣。公諱萬潤。字仲實。系出密城。麗朝密城君諱彦孚。銀山君諱永均。密城君諱天卿。入我朝。文貞公諱敷。皆其顯祖也。文貞弟三子曰允利。左贊成。佔畢齋金先生高弟。贊成五世孫曰啓文。軍資監正。始居湖之長興。卽公之高祖也。曾祖景立。工曹參議。祖仁績。漢城左尹。考世章。同中樞。妣貞夫人幸州奇氏壽興女。英廟庚戊。公生于府之鍾亭里第。正廟辛丑正月二十日考終。葬南下面洞村後戌坐原。配盆城金氏德海女。擧三男曰履亨履重履德。孫以下不能盡錄。玄孫凞元。以余有游從之舊。伻其從弟凞俊。謁碣銘之文。不敢辭。銘曰。嘉木晦根。良玉蘊光。不食之報。後錄彌昌。 아름다운……감추고 병산(屛山) 유자휘(劉子翬)가 주희의 자(字)를 원회(元晦)라 지어 주며 남긴 축사에 "나무는 뿌리를 감추어야 봄의 자태가 찬란히 펴지고, 사람은 몸을 감추어야 정신이 안에서 살찐다.[木晦於根, 春容燁敷; 人晦於身, 神明內腴.]"라고 하였다. 《屛山集 卷6 字朱熹祝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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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지명 墓碣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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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선대부 행 전라도좌우후 조공 묘갈명 嘉善大夫行全羅道左虞侯趙公墓碣銘 아, 이곳은 고(故) 가선대부 행 전라도 좌우후 조공 휘 종성(鍾成), 자 문익(文益), 호 해은(海隱)의 옷과 신발이 묻힌 곳이다. 공은 태어나서 지극한 성품이 있었고, 양친을 효성으로 섬겨 구체(口體)의 봉양과 심지(心志)의 봉양을 위해서는 힘을 다해 주선해서 다 갖추어 드렸다. 병을 간호할 적에는 지극히 근심하여 팔을 휘저으며 걷지 않고, 웃을 때 잇몸을 드러내지 않았으며,211) 변이 단지 쓴지를 맛보아 병세에 대한 차도를 알아보았다. 이에 효성이 하늘에 감응하여 산 꿩이 뜰에 떨어지는 일이 있기까지 하였다. 상례를 거행할 적에는 지나치게 슬퍼하여 거의 목숨을 해칠 정도였고, 부친과 모친상에 모두 6년 동안 시묘살이를 하였다. 향리에서 안타까워하여 지속적으로 천거하였다.집안이 본래 너무나 가난하였는데, 공이 부지런하고 검소하여 재물을 모아 집안 살림을 일으켰다. 그러나 친족과 이웃의 가난하고 주린 사람을 구휼하는 일에 대해서는 아끼는 바가 없어 각각의 사람들에게 그 마음을 얻었다.순묘(純廟) 경인년(1830, 순조30) 11월 8일은 바로 그가 태어난 날이다. 정해년(1887, 고종24)에 의금부 도사에 제수되고, 경인년(1890)에 6품으로 올랐으며, 계사년(1893)에 전라도 좌우후(全羅道左虞侯)에 제수되고, 이해 가을에 통정대부에 올랐으며, 임인년(1902)에 가선대부에 올랐다. 관직에 있을 적에는 백성을 사랑하고 은혜를 베풀었으며, 힘써 폐단을 제거하였으니, 집집마다 칭송하여 갈수록 더욱 자자해졌다. 병오년(1906) 12월 28일에 집에서 별세하였으며, 현(縣)의 입암리(笠巖里) 해좌(亥坐) 언덕에 장사 지냈다.조씨(趙氏)의 본관은 한양(漢陽)이다. 고려(高麗) 때 첨의중서사(僉議中書事) 휘 지수(之壽)가 시조이다. 한천부원군(漢川府院君) 양절공(良節公) 휘 온(溫)이 중대의 현조(顯祖)이다. 증조는 참봉에 추증된 휘 사보(士普)이고, 조부는 휘 참봉에 추증된 휘 제채(濟采)이며, 부친은 공조 참판에 추증된 휘 인경(仁敬)이다. 모친은 정부인(貞夫人) 선산(善山) 임씨(林氏)로, 임상원(林相原)의 따님이다. 계비(系妣)는 정부인 전주 이씨(全州李氏)로, 이원도(李源道)의 따님이다. 공은 연안 차씨(延安車氏) 윤백(允伯)의 따님에게 장가들었다. 모두 2남 3녀를 두었으니, 기원(基元)은 전서(典書), 용원(龍元)은 주사(主事)이다. 사과(司果)인 경주(慶州) 김원영(金元永), 사과인 경주 김기활(金琪活), 임천(利川) 서선재(徐善才)가 사위이다. 장자의 아들은 병연(炳燕), 차자의 아들은 병선(炳善)이다.기원이 족인(族人) 병두(炳斗)를 보내 묘갈명을 청하였다. 나는 적합한 사람이 아니라는 이유로 사양하였지만 되지 않아 삼가 가장(家狀)에 의거하여 이상과 같이 기술하여 명을 짓는다.입암의 기슭에 笠巖之麓우뚝한 넉 자의 봉분이 있네. 有崇四尺효자가 묻혔으니 孝子之藏현인의 유택일세. 賢人攸宅지나는 사람 가리키고 行路指點초동이 공경할 줄 아네. 樵牧知敬봄가을로 제수 올리니 春秋苾芬자손들이 한없이 번성하네. 子孫繩繩 嗚呼。此故嘉善大夫行全羅道左虞侯趙公諱鍾成。字文益。號海隱衣履攸藏也。公生有至性。孝事兩親。凡口體之奉。心志之養。周旋竭蹶。無不畢給。侍疾致憂。不翔不矧。嘗糞甛苦。以試差劇。孝感攸至。至有山雉下庭。執喪過毁。幾於傷生。居盧墓側。前後六年。鄕里感傷。剡薦相續。家素貧甚。公勤儉積累。以起産業。然於族戚隣里周窮恤匱之節。無所係吝。各得其心。純廟庚寅十一月初八日。卽其寅降也。丁亥除禁府都事。庚寅陞六品。癸已拜全羅道左虞侯。秋陞通政。壬寅陞嘉善。其在官。愛民施惠。務祛敝瘼。家稱戶頌。久愈藉藉。丙午十二月二十八日考終于居第。葬縣之笠巖里亥坐原。趙氏本漢陽人。麗朝僉議中書事諱之壽爲始祖。漢川府院君良節公諱溫。其中系顯祖也。曾祖贈參奉諱士普。祖贈參奉諱濟采。考贈工曹參判諱仁敬。妣貞夫人善山林氏相原女。系妣貞夫人全州李氏源道女。公娶延安車氏允伯女。擧二男三女。曰基元典書。曰龍元主事。曰慶州金元永司果。曰慶州金琪浩司果。曰利川徐善才。長房男炳燕。次房男炳善也。基元伻其族人炳斗。來謁隧道之文。余以非其人辭不獲已。謹据狀而纂次之如右云爾。銘曰。笠巖之麓。有崇四尺。孝子之藏。賢人攸宅。行路指點。樵牧知敬。春秋芯芬。子孫繩繩。 팔을……않았으며 《소학》 〈명륜(明倫)〉에 "부모가 병환이 있으면 장성한 아들은 머리를 빗지 않으며, 다닐 때 팔을 벌리고 흔들어 대면서 활기차게 걷지 않으며,……웃되 잇몸이 보이도록 크게 웃지 않는다.[父母有疾, 冠者不櫛, 行不翔,……笑不至矧.]"라는 내용이 보인다. 본래 《예기》 〈곡례 상(曲禮上)〉의 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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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남 손공 묘갈명 石南孫公墓碣銘 공의 휘는 처상(處祥), 자는 사은(士隱), 호는 석남(石南)이다. 손씨(孫氏)는 세계(世系)가 밀양(密陽)에서 나왔는데, 다. 신라(新羅)부터 고려(高麗)에 이르기까지 대대로 이어졌다. 조선에 들어와 휘 책(策)이 있었으니, 문과에 급제하고 목사(牧使)를 지냈다. 현손 휘 비장(比長)에 이르러 문과에 급제하고, 홍문관 제학을 지냈다. 연산군(燕山君) 때 벼슬에서 물러나 부안(扶安)의 갈촌(葛村)에 은거하였는데, 공에게는 10대조가 된다. 고조는 휘 시웅(始雄)으로, 동지중추부사이고, 증조는 휘 흥신(興新)으로, 부호군(副護軍)이다. 조부는 휘 덕효(德孝)로, 진사이고, 부친은 휘 몽두(夢斗)이다. 모친은 남평 문씨(南平文氏)로, 문시규(文始奎)의 따님인데,부덕(婦德)이 지극하였다.공은 을축년(1805, 순조5) 3월 1일에 태어났다. 타고난 성품이 순후하고 기개가 빼어나고 도량이 넓었다. 서당에 나아가 공부하였는데, 번거롭게 훈장(訓長)이 감독하지 않아도 대여섯 번 이상을 송독(誦讀)하였다. 글을 짓고 글씨를 썼는데 글과 글씨는 보는 자들이 놀라고 기이하게 여길 정도의 수준이었다. 집안이 매우 가난하여 몸소 밭을 갈고 힘써 농사지어 변변치 않은 음식으로나마 어버이를 봉양하였다. 일하고 남은 힘이 있거나 고 한가한 날이면 두 아우와 함께 방을 쓸고 책상을 맞대어 토론하고 송독하였는데 공부하는 데 확실하게 과정이 있었다. 여러 번 향시(鄕試)에 합격하였지만 번번이 예부시(禮部試 대과)에는 합격하지 못했다. 그 대인(大人)이 경계하여 말하기를 "사람들이 과거에 응시하는 것은 대부분 부모를 영화롭게 하려는 계책이다. '나는 네가 나를 잘 봉양하는 것만 말할 뿐이지, 네가 나를 녹봉으로 봉양하는 것은 말하지 않는다.'라고 한 것은, 옛사람이 자식에게 경계한 말이 아니더냐.205) 내가 너희에게 바라는 것 또한 그러하니, 너희도 더 이상 서로 경쟁하는 곳에 마음을 허비하지 말라."라고 하니, 공이 마침내 문을 닫고 장막을 드리운 채 전심전력하여 자신의 수신(修身)을 위한 학문을 하고, 존심양성(存心養性)하며 연구하여 체득하고 실천함에 서로 그 힘을 쏟아 날로 깊은 경지에 나아갔다.배위(配位)는 고흥 유씨(高興柳氏)로, 유광인(柳光仁)의 따님인데, 규문의 법도에 어긋남이 없었다. 어느 날 공이 병환으로 목숨이 위태로워지자 유씨를 돌아보고 말하기를 "노친을 잘 봉양하며 어린아이들을 잘 키우고, 내가 죽는 것을 한스러워하지 말라."라고 하였는데, 말을 마치자 기절하였다. 유씨가 손가락을 깨물어 피를 내어서 공의 입에 흘려 넣어 소생하게 하였는데, 얼마 있다가 졸하였다. 유씨는 뒤따라 죽기로 맹세하고 전혀 마시지도 먹지도 않았다. 집안사람들이 극구 만류하면서 말하기를 "노친(老親)이 살아 계시고 아이들이 품 안에 있는데 다만 부군(父君)께서 임종 때 한 말을 생각하지 않으십니까."라고 하니, 유씨가 멍하니 한숨을 쉬고 말하기를 "나의 뜻을 따르기보다는 차라리 부군의 뜻을 따르는 것이 낫다."라고 하고 마침내 일어났다. 장례를 치른 뒤에 부지런히 집안 살림을 꾸리며 정성을 다해 시어른을 봉양하니, 향리에서 칭찬하여 효열부(孝烈婦)라고 일컬었다. 향리에서 추천하는 보고가 끊이지 않고 계속 이어졌다.공의 묘소는 호암면(虎巖面) 우비등(牛鼻嶝) 계좌(癸坐) 언덕에 있다. 부인이 세상을 떠나자 부군을 따라 죽으려 한 뜻에 따라 합장하였다. 인용(麟鏞)이라는 아들 하나가 있는데 군수를 지냈다. 손자는 참의관(參議官) 영렬(永烈), 진사인 영하(永夏), 그리고 영길(永吉), 영진(永鎭), 영실(永實)이다. 증손 이하는 다 기록하지 않는다.영렬이 가장(家狀)을 가지고 와서 묘갈명을 지어 주기를 청하였다. 나는 천하고 용렬한 데다 병으로 문장 짓는 것을 폐하여 감히 청에 응하지 못한 지 오래 되었지만 예전부터 서로 두터운 우의가 있었기에 차마 끝내 사양하지 못하였다. 다음과 같이 명을 짓는다.선 쌓고 의로움 행하였지만 積善行義오히려 덕을 감추었네. 尙絅晦根그 보답 누리지 않고 不食厥報후손에게 복을 남겼네. 垂裕後昆효자의 덕행 잘 전해주니 錫類式穀후손의 복 창성하리라 後祿以昌문암에 있는 무덤에 門巖斧堂해마다 늘 제향 올리네 歲事有常 公諱處祥。字士隱。號石南。孫氏系出密陽。自羅至麗。奕葉相承。入我朝。有諱策。文科。官牧使。至玄孫諱比長。文科官弘文提學。燕山朝。退休于扶安葛村。於公爲十世祖也。高祖諱始雄。同中樞。曾祖諱興新。副護軍。祖諱德孝。進士。考諱夢斗。妣南平文氏始奎女。壺儀備至。公以乙丑三月一日生。天稟醇厚。氣宇秀爽。就塾上學。不煩提督。而誦數甚勤。綴文揮毫。文與筆。見者驚異之。家貧甚。躬耕力穡以供菽水。以餘力暇日。與其二弟。掃室連榻。講討誦習。的有程曆。累中鄕解。輒屈禮部。其大人戒之曰。人之赴擧。多爲榮親計也。吾謂汝以善養。不謂汝以祿養。此非古人戒子語耶。吾之所望於汝者亦然。汝亦勿復費心於紛竸之間也。公遂杜門下帷。專心爲己。存養硏究。體認踐履。交致其力。日就邃密。配高興柳氏光仁女。閫範無闕。一日公屬疾幾危。顧柳氏曰。善養老親。善育稚孩。我死無恨。言訖而絶。柳氏血指注口。得甦數頃而卒。柳氏誓以下從。絶不飮食。家衆防之甚力。且曰。老親在堂。稚孩在懷。獨不念夫君臨沒之言乎。柳氏曠然太息曰。與其遂吾之志。不若遂夫之志也。遂起焉。視奠之餘。勤理家務。備盡忠養之節。隣里歎賞。稱以孝烈婦。鄕道剡報。續續不絶。公墓在虎巖面牛鼻嶝癸坐原。夫人之沒。從下從之意。爲之合封焉。有一男曰麟鏞。官郡守。孫男曰永烈。議官。曰永夏。進士。曰永吉。曰永鎭。曰永實。曾孫以下不盡錄。永烈抱家狀。請爲碣銘之文。余以淺劣。病廢鉛槧。其不敢承膺久矣。而在平昔相厚之義。有不忍終辭。銘曰。積善行義。尙絅晦根。不食厥報。垂裕後昆。錫類式穀。後祿以昌。門巖斧堂。歲事有常。 나는……아니더냐 정이(程頤)가 문인인 윤돈(尹焞)에게 "그대는 노모가 계시니, 과거를 보지 않을 수 없다." 하였다. 윤돈이 이 사실을 어머니에게 말씀드리자 그의 어머니는 "나는 네가 잘 봉양하는 것만 알지 녹봉으로 봉양하는 것은 알지 못한다.[吾知汝以善養, 不知汝以祿養.]" 하였다. 이후 윤돈은 종신토록 과거에 응시하지 않았다. 《宋史 道學列傳 尹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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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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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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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 통훈대부 군자감 정 청계 조공 묘갈명 贈通訓大夫軍資監正淸溪趙公墓碣銘 공의 휘는 옥생(玉生), 자는 국미(國美), 호는 청계(淸溪)이다. 조씨(趙氏)의 관향은 함안(咸安)으로, 고려(高麗) 때 평장사(平章事) 휘 정(鼎)이 그 시조이다. 세계(世系)의 중대(中代)에 이르러 휘 승숙(承肅)이란 분이 계셨으니, 세상에서는 덕곡(德谷) 선생이라고 하였다. 이분이 휘 종례(從禮)를 낳았는데, 종례의 호는 율정(栗亭)으로, 본조에 들어와 보문각 직제학(寶文閣直提學)을 지냈다. 3대가 전해 내려와 휘 임(琳)에 이르렀는데, 그의 호는 진재(愼齋)로, 대사성(大司成)을 지냈다. 휘 희광(希匡)에 이르러 참봉(參奉)을 지냈으며, 동복(同福)의 예곡(艾谷)에 우거하였는데, 이로 인하여 자손들이 이곳에 거주하게 되었다. 고조는 휘 인(仁)이니, 문학과 행실이 있었다. 증조는 휘 유보(惟寶)이니, 습독관(習讀官)을 지냈고, 조부는 휘 호(豪)이니, 내금위장(內禁衛將)을 지냈다. 부친은 휘 기벽(奇壁)이고, 모친은 삭녕 최씨(朔寧崔氏)로, 참봉 최인수(崔仁壽)의 따님이다.선묘(宣廟) 무신년(1608, 선조41) 8월 16일에 공은 예곡(艾谷)의 사제에서 태어났다. 일찍 고아가 되어 가난하였지만 어머니를 지극한 효성으로 섬겼다. 9세에 능성(綾城)의 산음리(山陰里)로 이사하여 살았다. 박공 영춘(朴公永春)과 이웃에 살았는데, 박공은 그가 명문가의 후손이라는 것을 알았고, 또 기골이 준수한 것을 보고 권유하여 학교에 들어가게 하고, 이어서 딸을 시집보냈다.공은 고생을 무릅쓰고 힘써 노력하여 전심으로 학문에 매진였고, 문학으로 명망이 당대에 떨쳤지만 명리(名利)를 다투는 과거 시험장과 벼슬을 구하는 방법에는 담담하였다. 일찍이 시속을 따라 사람들과 어울려 잇속에 머뭇거리면서 말을 더듬거리는 태도를 보이지 않았고, 오직 선을 쌓고 의를 행하며 후학들을 권장하여 정진(精進)시키는 것을 궁극적인 계책으로 삼았다. 거처하는 곳은 산이 높고 골짜기가 깊어 운림(雲林)이 창연(蒼然)하니, 사람과 땅이 잘 어울리고 정경(情境)206)이 서로 부합하여 한가롭게 소요하며 그윽이 감상하는 흥취를 극진히 하였으니, 실로 고인이 이른바 "영원히 이 즐거움을 잊지 않으려 맹세한다.[永矢不諼]"라는 뜻207)이 있었다. 장수하였다는 이유로 군자감 정(軍資監正)에 올랐다.기묘년(1699, 숙종25) 3월 13일에 졸하였으니, 향년 92세이다. 배위(配位)는 밀양 박씨(密陽朴氏)로, 박영춘(朴永春)의 따님이자, 판서 박사룡(朴駟龍)의 손녀인데, 부덕(婦德)이 있었다. 초장동(草庄洞) 경좌(庚坐)에 쌍분으로 장사 지냈다. 아들 셋을 낳았으니, 원규(元奎), 서규(瑞奎), 창규(昌奎)이다.연대가 더욱 멀어지고 문헌이 흩어지고 없어져 당시의 숨은 덕과 행실이 이 때문에 드러나지 않았으니, 어찌 자손의 한이 되지 않겠는가. 후손 익제(翼濟)가 가장(家狀)을 가지고 와서 비석의 후면에 기록할 글을 청하였다. 다음과 같이 명을 짓는다.산음리는 山陰之里여생을 보낸 곳이요. 杖屨是經초장동은 草庄之洞선생의 의복이 묻힌 곳이네. 衣履是藏지역의 명성 사람에 달렸으니 地逐人好정채가 은은하게 드러나네. 精采闇章자손이 잘 계승하였으니 子孫善述남은 복록 정히 영원하리 餘祿正長 公諱玉生。字國美。號淸溪。趙氏貫咸安。高麗平章事諱鼎。其始祖也。至中系有諱承肅。世稱德谷先生。生諱從禮。號栗亭。入我朝。寶文閣直提學。三傳至諱琳。號愼齋。大司成。至諱希匡。參奉。寓居同福之艾谷。子孫因居焉。高祖諱仁。有文行。曾祖諱惟寶。習讀。祖諱豪。內禁衛將。考諱奇壁。妣朔寧崔氏參奉仁壽女。宣廟戊申八月十六日。公生于艾谷第。早孤貧。事母至孝。九歲流寓綾城之山陰里。與朴公永春接隣。朴公知其爲名家遺裔。而且見其氣骨俊異。勸令就學。因以女妻之。公勤苦刻勵。一意征邁。文學聲望。擅於一時。而於聲利之場。干進之路。澹泊如也。未嘗隨俗混塵。有趑趄囁嚅之態。惟以積善行義。奬進後學。爲究竟計。所居山高谷邃。雲林蒼然。人地相得。境情交孚。婆娑徜徉。以盡其幽賞之趣者。實有古人所謂永矢不諼之意。以壽陞軍資監正。已卯三月十三日卒。得年九十二。配密陽朴氏永春女。判書駟龍孫。有婦德。葬草庄洞庚坐雙兆。生三男。元奎。瑞奎。昌奎。嗚呼。年代彌遠。文獻散逸。當日之隱德幽行。因以不暢。豈不爲子孫之恨。後孫翼濟以家狀。請爲文以識碑陰。銘曰。山陰之里。杖屨是經。草庄之洞。衣履是藏。地逐人好。精采闇章。子孫善述。餘祿正長。 정경(情境) 정(情)은 사물을 대하여 인식하는 사람의 주관적인 마음을 가리키고, 경(境)은 인식의 대상이 되는 외부의 객관적인 현상을 가리킨다. 영원히……뜻 《시경》〈위풍(衛風) 고반(考槃)〉에 "은사의 집이 시냇가에 있으니, 석인의 마음이 넉넉하도다. 홀로 자고 깨고 말을 하지만, 영원히 이 낙을 잊지 않으려 맹세하도다.[考槃在澗, 碩人之寬. 獨寐寤言, 永矢不諼.]"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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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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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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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부

학생 김공 묘갈명 學生金公墓碣銘 금릉(金陵)의 연자천(燕子川) 가 아암동(兒巖洞)에 부자(負子 정남향) 향오(向午)에 우뚝한 넉 자의 봉분이 있으니, 바로 고(故) 학생(學生) 김공(金公)의 신과 옷이 묻힌 곳이다. 공의 휘는 필환(弼煥), 자는 공서(公瑞), 관향은 도강(道康)이다. 고(故) 광정대부(匡靖大夫) 문하평리(門下評理) 휘 을경(乙卿)이 그 시조인데, 문학(文學)과 관직으로 대대로 가문을 빛냈다. 고조는 선의(善疑), 증조는 익형(益兄), 조부는 명의(明義)이다. 부친은 유문(有文)이고, 모친은 통천 최씨(通川崔氏)로, 최일채(崔日彩)의 따님이다.공은 순조(純祖) 경진년(1820, 순조20)에 태어났는데, 용모가 뛰어나고, 성품이 자상하였다. 집이 가난하여 몸소 농사지어 양친을 효성으로 봉양하였는데, 사랑과 공경이 모두 지극하였고 지물(志物)의 봉양에 빠뜨림이 없었다. 상례를 거행할 적에는 너무나 슬퍼하면서도 한결같이 예제(禮制)를 따랐고, 삭망(朔望)에 묘소를 참배할 적에는 비바람이 몰아쳐도 그만두지 않았다. 평소 몸가짐에 규범이 있었으며, 집안을 다스리는 데에 법도가 있었다. 화려하고 아름다운 의복과 진귀한 물건은 집안에 들이지 않았다. 집안 내에 효성스럽고 성실한 가풍이 저절로 흥성하여 친척과 이웃까지도 기뻐하며 서로 뜻이 맞아 어울렸다. 이해를 따지고 서로 헐뜯는 일에 대해서는 아득히 듣지 못하는 듯이 하였지만, 의리와 사정(邪正), 물건을 주고받는 일에는 일찍이 조금도 주저하거나 구차한 뜻이 있지 않았다.갑신년(1824, 순조24) 윤5월 15일 생을 마감하였다. 배위(配位)는 청주 김씨(淸州金氏)로, 김귀갑(金貴甲)의 따님이다. 정숙하고 자애롭고 유순했으며 부덕(婦德)이 지극하였다. 공보다 3년 먼저 생을 마쳤는데, 묘는 같은 언덕에 있다. 2남 3녀를 낳았으니, 장자는 규상(奎庠), 차자는 규홍(奎洪)이다. 딸은 허일조(許一祚), 김한준(金漢俊), 양태한(梁泰漢)에게 출가하였다. 장자의 아들은 성진(成鎭)이고, 차자의 아들은 창진(昌鎭)이다.창진이 그 대인(大人)의 명으로 유장(遺狀)을 가지고 와서 묘갈명을 청하였다. 아, 나는 공이 살아 계실 때 직접 뵙지 못하였지만 후손을 통해 그 의로운 행실에 대해서 들은 지 오래되었다. 지난 일을 생각하고 감회에 잠기매 어찌 차마 사양하겠는가. 다음과 같이 명을 짓는다.효도와 우애로 입신하고 孝悌立身근검으로 가정 이루었네. 勤儉成家자손이 번성하니 子孫繩繩남은 음덕 매우 훌륭하네. 餘蔭孔嘉 金陵之燕子川上兒巖洞。有崇四尺負子向午者。卽故學生金公衣履之藏也。公諱弼煥。字公瑞。貫道康。故匡靖大夫門下評理諱乙卿。其始祖也。文學仕䆠。世代煒燁。高祖善疑。曾祖益兄。祖明義。考有文。妣通川崔氏曰彩女。公以純祖庚辰生。姿相奇偉。性氣慈詳。家貧躬耕。孝養二親。愛敬倶至。志物無闕。執喪過哀。一從禮制。朔望展墳。風雨不廢。平居。持身有則。御家有法。華美之服。珍怪之物。不入於家。一家之內。孝順勤慤之風。油然興行。以至族戚隣里。無不歡欣相得。有利害毁譽。漠然無聞焉。而於義利邪正。辭受取予。未嘗有一毫依違苟且之意。甲申閏五月十五日考終。配淸州金氏貴甲女。貞淑慈柔。婦德備至。先公三年而終。墓同原。生二男三女。長奎庠。次奎洪。女適許一祚金漢俊梁泰漢。長房男曰成鎭。次房男曰昌鎭。昌鎭以其大人命。奉遺狀。宋謁碣銘之文。嗚呼。余於公之在世。未得拜床。而因緣後承。得聞其行義久矣。緬古感今。豈忍辭諸。銘曰孝悌立身。勤儉成家。子孫繩繩。餘蔭孔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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