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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망실196)에 제하다. 마땅히 갑신년(1944) 조에 있어야 한다. 題不忘室【當在甲申年條中】 구렁에 버려짐과 머리 잃음을 잊지 않는다고197) 不忘在壑與喪元공자와 맹자198)께서 분명한 격언을 남기셨다오 鄒魯分明有法言천사라도 거들떠보지 않음은 의가 아니기 때문이요199) 千駟寧觀非義地만인이라도 내 가서 대적함은200) 지강의 경지201)에 들어서라네 萬人吾往至剛門서책은 고기처럼 좋아해야 하니202) 세 시렁에 가득 채우고 書宜嗜豢盈三架소나무는 양식으로 삼을 만하니203) 후원에 빼곡히 심는다오 松可爲粮滿後園불망 두 자로 편액한 걸 그대는 비웃지 마소 二字扁楣君莫笑옛사람을 상론할204) 후생이 절로 있을 터이니 尙論自有後生存 不忘在壑與喪元, 鄒魯分明有法言.千駟寧觀非義地, 萬人吾往至剛門書宜嗜豢盈三架, 松可爲粮滿後園.二字扁楣君莫笑, 尙論自有後生存. 불망실(不忘室) 후창 소유의 토실(土室) 이름이다. 후창은 갑신년인 1944년에 〈불망실기(不忘室記)〉를 지었는데, 그 기문에 당시 일본의 폭정과 수탈이 극에 달해 의리상 욕을 받을 수 없기에 토실에 몸을 숨겨 처음에는 솔잎과 마를 채취하여 연명하다가 마지막에는 구렁에 들어가 죽겠다고 하였다. 《後滄集 卷21 不忘室記》 구렁에……않는다고 《맹자》 〈등문공 하(滕文公下)〉에 맹자가 "옛날에 제 경공(齊景公)이 사냥할 때 우인(虞人)을 정(旌)으로 불렀으나 우인이 오지 않자 그를 죽이려고 하였다. 이에 대해 공자(孔子)께서는 '지사(志士)는 자신의 시신이 도랑에 버려질 수도 있음을 잊지 않고, 용사(勇士)는 죽음을 당해 머리가 잘릴 수도 있음을 잊지 않는다.[志士不忘在溝壑, 勇士不忘喪其元.]'라고 칭찬하셨으니, 공자께서는 어찌하여 그를 취하셨는가? 합당한 부름이 아니면 가지 않은 것을 취하신 것이다."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공자(孔子)와 맹자(孟子) 원문의 추(鄒)와 노(魯)는 모두 춘추 시대의 국명(國名)으로, 공자는 노나라에서 태어났고 맹자는 추나라에서 태어났으므로 공자와 맹자를 가리키는 뜻으로 쓰인다. 여기서는 우인(虞人)을 칭찬하는 공자의 말을 맹자가 인용하였으므로 두 사람을 모두 언급한 것이다. 천사(千駟)라도……때문이요 천사는 4천 필의 말을 이른다. 《맹자》 〈만장 상(萬章上)〉에 맹자가 이윤(伊尹)의 마음가짐을 설명하면서 "의롭지 못하거나 도에 합당하지 않으면 천하를 그에게 녹봉으로 주어도 돌아보지 않고, 4천 필의 말을 매어 놓는다 하더라도 거들떠보지 않았다.[非其義也, 非其道也, 祿之以天下, 不顧也, 繫馬千駟, 不視也.]"라고 하였는데, 이를 차용하여 이렇게 말한 것이다. 만인(萬人)이라도……대적함은 《맹자》 〈공손추 상(公孫丑上)〉에 "스스로 돌이켜서 정직하지 못하면 비록 미천한 사람이라도 내 두려워하지 않겠는가. 그러나 스스로 돌이켜서 정직하다면 비록 천만 명이 있더라도 내가 가서 대적할 수 있다.[自反而不縮, 雖褐寬博, 吾不悴焉? 自反而縮, 雖千萬人, 吾往矣.]"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지강(至剛)의 경지 원문의 강문(剛門)은 지극히 굳센 경지를 비유한 말로, 맹자가 호연지기(浩然之氣)를 설명하면서, "그 기운 됨이 지극히 크고 지극히 강하니, 정직함으로써 잘 기르고 해침이 없으면 이 기가 천지 사이에 꽉 차게 된다.[其爲氣也, 至大至剛, 以直養而無害, 則塞于天地之間.]"라고 한 데서 유래하였다. 《孟子 公孫丑上》 고기처럼 좋아해야 하니 원문의 환(豢)은 추환(芻豢)의 줄임말로, 초식(草食) 가축과 잡식(雜食) 가축을 뜻하는데, 맛있는 고기 음식을 비유한다. 《맹자》 〈고자 상(告子上)〉에 "의리가 우리의 마음을 즐겁게 하는 것은 마치 고기가 우리의 입을 즐겁게 하는 것과 같다고 할 것이다.[理義之悅我心, 猶芻豢之悅我口.]"라고 하였다. 소나무는……만하니 후창의 〈불망실기(不忘室記)〉에 토실(土室)에 몸을 숨겨 처음에는 솔잎과 마를 채취하여 연명한다고 하였는데, 이 솔잎 때문에 이렇게 말한 것이다. 《後滄集 卷21》 상론(尙論)할 옛사람의 일을 평론하는 것을 말한다. 《맹자》 〈만장 하(萬章下)〉에 "천하의 훌륭한 선비라야 천하의 훌륭한 선비를 벗할 수 있다. 천하의 훌륭한 선비와 벗하는 것으로 충분하지 못하여 또다시 위로 올라가서 옛사람을 논한다.[天下之善士, 斯友天下之善士. 以友天下之善士爲未足, 又尙論古之人.]"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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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중에 만당형장190)을 생각하며 3수 病中憶晩棠兄丈【三首】 이년이 지나도록 당형을 보지 못했는데 不見棠兄再過冬나의 상태로 당형을 미루어 알 수 있다네 以吾狀態可推公얼마나 머리가 센지는 다소 다를 터이고 淺深鶴髮差分異전후로 형제 잃은 슬픔191)은 일체 똑같으리라 先後鴒悲一體同용악에 힘써 달려갔으나 미치지 못하였고 龍岳專趨曾未及웅진에 들러 찾아뵀으나 또 허사가 되었다오 熊津歷拜又成空갑자기 몸져누워 장차 벙어리가 되려 하니 忽然臥病將成啞서로 만난들 어찌 속마음을 다 말할 수 있으랴 相對何能說盡衷사십 년 동안 기나긴 한겨울로 괴로웠는데 四十年間困大冬봄이 오자 비로소 조화옹을 보는구나 春來始見化翁公원수를 섬멸함은 예전 만남 뒤에 일찌감치 있었고 殲讐早在前逢後술을 따라 준 건 다 같이 축하한 일보다 오히려 늦었다오 酌酒猶遲一賀同서인에 대한 근심이 비록 눈에 가득하지만 憂在西人雖溢目태극기는 높이 걸려 이미 창공에 펄럭이누나 旗高太極已翻空세속에 매인 몸인지라 무궁한 설이 있으니 世途身分無窮說행여 기회가 된다면 한 번 소회를 토로하리라 倘有其時一吐衷추억하건대 유조192)의 해가 든 봄과 겨울에 憶曾柔兆歲春冬양부193)의 시론을 우리 당형에게 들었다오 兩部詩論受我公활수에 오르는 건194) 기약하지 못하거니와 活水登臨不期會천태에서 풍영하는 건195) 그 언제나 함께하랴 天台風詠幾時同궁한 길에 낙척하니 일평생의 한이요 窮途落拓平生恨늘그막에 처량하니 만사가 부질없어라 暮境凄涼萬事空당시에 기대한 뜻이 진중하였는데 珍重當年期待意지금 유복 차림이 진심 아닌 게 부끄럽구나 至今儒服愧非衷 不見棠兄再過冬, 以吾狀態可推公.淺深鶴髮差分異, 先後鴒悲一體同.龍岳專趨曾未及, 熊津歷拜又成空忽然臥病將成啞, 相對何能說盡衷?四十年間困大冬, 春來始見化翁公.殲讐早在前逢後, 酌酒猶遲一賀同.憂在西人雖溢目, 旗高太極已翻空.世途身分無窮說, 倘有其時一吐衷.憶曾柔兆歲春冬, 兩部詩論受我公.活水登臨不期會, 天台風詠幾時同?窮途落拓平生恨, 暮境凄涼萬事空.珍重當年期待意, 至今儒服愧非衷. 만당형장(晩棠兄丈) 김희현(金熺鉉, 1872~1951)으로, 만당은 그의 호이며, 본관은 광산(光山), 자는 정오(定五)이다. 후창의 외종형(外從兄)이다. 후창이 일찍이 그를 위해 〈만당시고서(晩棠詩稿序)〉를 썼다. 《後滄集 卷20 晩棠詩稿序》 형제 잃은 슬픔 원문의 영비(鴒悲)를 번역한 것이다. 영(鴒)은 척령(鶺鴒)의 준말로 할미새를 뜻하는데, 흔히 형제 또는 형제간의 우애를 비유한다. 《시경》 〈소아(小雅) 상체(常棣)〉에 "할미새가 언덕에 있으니, 형제가 급난을 당하였도다. 매양 좋은 벗이 있으나, 길이 탄식할 뿐이니라.[脊令在原, 兄弟急難. 每有良朋, 況也永歎.]"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유조(柔兆) 고갑자(古甲子)로 천간(天干) 가운데 병(丙)에 해당하는데, 여기서는 병술년(1946)을 가리키는 듯하다. 양부(兩部) 양부고취(兩部鼓吹)와 같은 말로, 앉아서 음악을 연주하는 부대(部隊)와 서서 음악을 연주하는 부대가 함께 연주하는 매우 기세가 성대한 음악을 뜻한다. 여기서는 음악 용어를 시의 이론에 대입하여 말한 듯하다. 활수(活水)에 오르는 건 활수는 문맥으로 볼 때 높은 정자나 누대의 이름을 가리키는 듯한데, 자세하지 않다. 활수라는 말은 남송(南宋) 때 주희(朱熹)의 〈관서유감이수(觀書有感)〉 시에 "묻노니 너는 어찌 이렇게 맑을 수가 있느뇨, 근원에서 흐르는 물이 내려오기 때문이겠지.[問渠那得淸如許? 爲有源頭活水來.]"라고 한 시구에서 유래하였다. 《晦庵集 卷2》 천태(天台)에서 풍영(風詠)하는 건 천태는 정읍 이평면 창동리에 있는 천태산(天台山)을 가리킨다. 풍영은 바람을 쐬며 시를 읊조린다는 뜻으로, 속세에서 벗어나 자연에서 즐기는 것을 말한다. 공자의 제자 증점(曾點)이 자신의 뜻을 말하기를 "늦은 봄날 봄옷이 이루어지거든 어른 대여섯 사람, 동자 예닐곱 사람과 함께 기수에 목욕하고 무우에서 바람을 쐬고 시를 읊으면서 돌아오겠다.[浴乎沂, 風乎舞雩, 詠而歸.]"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論語 先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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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사 윤봉길222)행 尹義士奉吉行 윤봉길이여 진정한 의사로다 尹奉吉眞義士당시 빼어난 기운 타고난 건223) 우연이 아니로세 岳降當年匪偶爾한 때의 행적은 천년토록 길이 빛나고 一時之蹟光千祀칠 척의 장신은 온 천하224)를 구제하였네 七尺之身濟九有약관의 나이에 일찍부터 명성을 떨치려 했으니 弱齡早欲立大名충과 효가 지극하다고 사우들에게 알려졌다오 忠孝二字聞師友붓을 잡으면 스스로 면려하는 시를 막힘없이 썼으니 筆下滾滾自勖詩지금까지도 사람의 기운을 분발하게 한다오 至今令人氣蚴蟉보잘것없고 누추한225) 시목동에서 佌佌蓛蓛柹木洞산풍의 간고226)로써 부모를 봉양하였네 山風之幹養父母효를 옮겨 충을 하려 했지만227) 나라 없음을 어이하랴 移孝爲忠柰無國우리나라가 협소하여 대바구니 속에 있는 것 같았네 東土窄窄如在簍문을 나가 서쪽으로 달려가 새 정부에 찾아가니228) 出門西走新政府백범 노인229)을 처음 만나면서 마치 구면처럼 여겼다네 初面如舊白凡叟한 조각 간담을 서로 활짝 터놓으면서 一片肝膽相照地영구의 쉽고 어려운 일을 각자 취하였네230) 嬰臼難易各自取중국과 우리나라의 형세는 순치보거231)와 같으니 唇齒輔車中東勢고금의 논의가 과연 다름이 없겠는가 古今之論無異否팔월 상해에서 일왕을 위한 잔치가 있었는데232) 八月上海島酋宴대륙을 삼킬 듯이 기세가 몹시 등등하였다네 垂呑大陸勢甚阜계엄 상태가 서릿발 같이 삼엄하여 戒嚴肅肅如霜雪나는 새도 감히 그 뒤를 지나가지 못했는데 飛鳥莫敢掠其後편한 걸음으로 무인지경을 가는 듯이 했으니 平步躡去如無人온갖 신령이 오르내리며 좌우를 호위하였다오 百靈閃閃擁左右품속에 숨긴 한 덩이의 물건은 무엇인가 懷中一塊是何物삽시간에 천둥 벼락 치는 굉음이 울렸네 頃刻雷霆生擊掊한 사람의 순국에 열 명 대장을 모두 죽게 하고 一斃斃盡十大將가련하게도 나머지는 심한 화상을 입었다오 可憐餘物作炙灸스스로 성명을 외치고서 춤추고 환호하며 自唱姓名舞且呼대한독립만세를 오래도록 부르짖었도다 大韓獨立萬歲久어찌 자신이 쓸 총포가 하나도 없으랴마는 那無一礮自家用웅어에 대한 구분233)이 진작부터 명백하였다네 熊魚之分早判剖윤봉길이여 윤봉길이여 尹奉吉尹奉吉의사라는 칭호가 만인의 입에서 앞다퉈 나왔도다 義士爭稱萬人口진심으로 은혜를 베푸니 민국을 찬란히 빛내고 中心載恩華民國덕을 좋아하는 자들이 함께 도우니 유럽까지 아울렀네 好德同贊幷巴歐그 큰 공로가 귀결된 바를 살펴보건대 淸看大功歸宿處조국의 온 지역을 한 비로 깨끗이 청소함일세 祖國之周掃一帚조국을 다시 얻었으니 어찌 충이 아니겠는가 復得祖國豈非忠이름 날려 부모를 드러냈으니234) 효 역시 성대하도다 掦名顯親孝亦厚예산은 높고 덕산은 무거우니 禮山高兮德山重예산과 덕산은 충효의 고을이로세235) 禮德之山忠孝部윤봉길이여 진정한 의사로다 尹奉吉眞義士몸은 떠났어도 의는 남아 있어 길이 불후하리라 身去義存長不朽 尹奉吉眞義士! 岳降當年匪偶爾.一時之蹟光千祀, 七尺之身濟九有.弱齡早欲立大名, 忠孝二字聞師友.筆下滾滾自勖詩, 至今令人氣蚴蟉.佌佌蓛蓛柹木洞, 山風之幹養父母.移孝爲忠柰無國? 東土窄窄如在簍.出門西走新政府, 初面如舊白凡叟.一片肝膽相照地, 嬰臼難易各自取.唇齒輔車中東勢, 古今之論無異否?八月上海島酋宴, 垂呑大陸勢甚阜.戒嚴肅肅如霜雪, 飛鳥莫敢掠其後.平步躡去如無人, 百靈閃閃擁左右.懷中一塊是何物? 頃刻雷霆生擊掊.一斃斃盡十大將, 可憐餘物作炙灸.自唱姓名舞且呼, 大韓獨立萬歲久.那無一礮自家用? 熊魚之分早判剖.尹奉吉尹奉吉! 義士爭稱萬人口.中心載恩華民國, 好德同贊幷巴歐.淸看大功歸宿處, 祖國之周掃一帚.復得祖國豈非忠? 掦名顯親孝亦厚.禮山高兮德山重, 禮德之山忠孝部.尹奉吉眞義士! 身去義存長不朽. 윤봉길(尹奉吉) 1908~1932. 일제강점기의 독립운동가로, 본관은 파평(坡平), 본명은 우의(禹儀), 호는 매헌(梅軒)이다. 충청남도 예산(禮山) 출신이다. 아버지는 윤황(尹璜)이며, 어머니는 경주 김씨로 김원상(金元祥)이다. 1932년 4월 29일에 상해 홍구공원(虹口公園)에서 일왕(日王)의 생일을 축하하는 행사장에서 폭탄을 던져 일본 상하이파견군 대장 등을 즉사시키는 거사를 감행하였다. 거사 직후 현장에서 체포되어 일본 군법회의에서 사형을 선고받았다. 일본으로 호송되어 오사카 위수형무소에 수감되었다가 그해 12월 19일에 총살형을 받고 25세의 젊은 나이에 순국하였다. 이 사건은 중국 등 세계에 알려졌고, 중국의 지도자 장개석은 "중국 100만 대군도 하지 못한 일을 조선의 한 청년이 해냈다."라고 격찬하였다.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 빼어난 기운 타고난 건 원문의 강악(降嶽)은 산악의 신령한 기운을 받아 훌륭한 인물이 탄생하는 것을 말한다. 《시경》 〈대아(大雅) 숭고(崧高)〉에 "높디높은 산악이, 우뚝 하늘에 닿았도다. 산악에서 신령한 기운을 내려, 보후(甫侯)와 신백(申伯)을 내셨도다.[崧高維嶽, 駿極于天. 維嶽降神, 生甫及申.]"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온 천하 원문의 구유(九有)는 구주(九州)와 같은 말로, 천하 또는 중국 전체를 뜻하는 말이다. 보잘것없고 누추한 원문의 차차(佌佌)는 작은 모양이고, 속속(蔌蔌)은 가난하고 누추한 모양을 형용한 말로, 《시경》 〈소아(小雅) 정월(正月)〉에 "보잘것없는 소인들은 저 집을 소유하며, 누추한 자들은 곡식을 소유한다.[佌佌彼有屋, 蔌蔌方有穀.]"라고 한 데서 유래하였다. 산풍(山風)의 간고(幹蠱) 산풍은 산 아래에 바람이 있는 고괘(蠱卦)를 가리킨다. 간고는 《주역》 〈고괘(蠱卦)〉에 "초육(初六)은 아버지의 일을 주관함이니, 자식이 있으면 돌아간 아버지가 허물이 없게 된다.[初六, 幹父之蠱, 有子, 考无咎.]"라고 한 데서 온 말로, 전하여 자식이 아버지의 뜻을 잘 계승하여 아버지가 미처 다 이루지 못한 사업을 완성하는 것을 말하는데, 여기서는 집안일을 주관하는 것을 의미한다. 효(孝)를……했지만 원문의 이효위충(移孝爲忠)은 《효경(孝經)》 〈광양명(廣揚名)〉에 "군자가 어버이를 효도로 섬기기 때문에 충성을 임금에게 미루어 옮길 수 있다.[君子之事親孝, 故忠可移於君.]"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문을……찾아가니 새 정부는 당시 상해(上海)에 있던 대한민국임시정부를 가리킨다. 윤봉길은 23세가 되는 1930년 3월에 만주(滿洲)로 망명하였고, 1931년 8월에 임시정부가 있는 상해로 갔다가 그해 겨울에 임시정부의 김구(金九)를 찾아가서 독립운동에 신명을 바칠 각오임을 호소하였다고 하는데, 이 일을 두고 말한 것이다. 백범(白凡) 노인 김구(金九, 1876~1949)로, 백범은 그의 호이다. 본관은 안동(安東), 아명은 창암(昌巖), 본명은 창수(昌洙), 호는 백범ㆍ연하(蓮下)이다. 삼일 운동 후 중국 상해(上海)의 임시정부 조직에 참여하였고, 1928년에 이시영(李始榮) 등과 한국독립당(韓國獨立黨)을 창당하였고, 1931년에 한인애국단(韓人愛國團)을 조직하여 1932년 1월의 이봉창(李奉昌)의 의거와 4월의 윤봉길(尹奉吉) 의거 등을 지휘하였다. 영구(嬰臼)의……취하였네 영구는 춘추 시대 진(晉)나라 대신 조삭(趙朔)의 친구 정영(程嬰)과 문객인 공손저구(公孫杵臼)를 가리킨다. 진나라 경공(景公) 3년에 대부(大夫) 도안가(屠岸賈)가 조삭의 일족(一族)을 멸족시키자, 공손저구가 정영과 함께 조삭이 남긴 고아(孤兒)를 세울 일을 논의한 끝에, 정영에게는 조삭의 진짜 고아를 보호하게 하고, 공손저구 자신은 다른 사람의 아이를 데리고 거짓 조삭의 아이라고 위장하여 산중에 숨어 있으면서 정영에게 자신을 도안가에게 밀고하게 하였다. 그리하여 공손저구 자신은 가짜 아이와 함께 도안가에게 잡혀 살해당하고, 조삭의 진짜 고아는 정영에 의해 무난히 목숨을 보전하게 되었다. 경공 15년에 한궐(韓厥)의 주선으로 조삭의 고아인 조무(趙武)를 조씨(趙氏)의 후계자로 삼아 예전의 지위와 땅을 회복하게 하고 동시에 조삭의 원수를 갚게 하였다. 정영은 이후 조무(趙武)가 관례식을 올리던 날에 조삭과 공산저구에게 일을 성공함을 보고하기 위해 황천으로 가야 한다고 하며 조무의 간곡한 만류를 뿌리치고 자살하였다. '쉽고 어려운 일'이란 공손저구가 정영과 처음 논의할 때 죽는 일은 쉽고 조삭의 고아를 세우는 일은 어렵다고 하면서, 정영에게는 고아를 세우는 어려운 일을 하라고 하고 공손저구 자신은 죽는 쉬운 일을 하여 먼저 죽겠다고 한 것을 가리킨다. 여기서는 나라의 독립을 위해 윤봉길은 공손저구의 쉬운 일을, 김구는 정영의 어려운 일을 각자 취해 행하였다고 말한 것이다. 《史記 卷43 趙世家》 순치보거(脣齒輔車) 순치는 입술과 이를 말하고, 보거는 광대뼈와 잇몸을 말한 것으로, 전하여 피차의 관계가 아주 밀접하여 서로 의지하는 사물을 비유한다.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 희공(僖公) 5년 조에 "광대뼈와 잇몸이 서로 의지하고, 입술이 없어지면 이가 시리게 된다.[輔車相依, 脣亡齒寒.]"라고 하였다. 팔월……있었는데 1932년 4월 29일에 상해 홍구공원에서 일왕(日王)의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열린 행사를 두고 말한 것이다. 원문의 팔월(八月)은 사월(四月)이 되어야 하는데, 후창의 착오가 있는 듯하다. 웅어(熊魚)에 대한 구분 곰 발바닥 음식과 물고기 음식 가운데 택일하라면 물고기보다는 곰발바닥을 택한다는 말로, 생사(生死)의 선택에 있어 구차히 살기보다 떳떳하게 의리(義理)를 따라 죽는 것을 택하는 비유로 쓰인다. 《맹자》 〈고자 상(告子上)〉에 "어물도 내가 원하는 바요 곰 발바닥도 내가 원하는 바이지만 이 두 가지를 겸하여 얻을 수 없다면 어물을 버리고 곰 발바닥을 취하겠다. 삶도 내가 원하는 바요 의(義)도 내가 원하는 바이지만 이 두 가지를 겸하여 얻을 수 없다면 삶을 버리고 의를 취하겠다.[魚我所欲也, 熊掌亦我所欲也, 二者不可得兼, 舍魚而取熊掌者也. 生亦我所欲也, 義亦我所欲也, 二者不可得兼, 舍生而取義者也.]"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이름……드러냈으니 《효경》 〈개종명의장(開宗明義章)〉에, "몸과 사체와 털과 살은 부모에게서 받은 것이니 감히 손상시키지 않는 것이 효도의 시작이다. 몸을 세워 도를 행하여 후세에 이름을 날려 부모를 드러내는 것이 효의 마침이다.[身體髮膚, 受之父母, 不敢毀傷, 孝之始也. 立身行道, 揚名於後世, 以顯父母, 孝之終也.]"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예산……고을이로세 윤봉길이 예산군(禮山郡) 덕산면(德山面) 시량리((柿梁里)에서 태어난 것을 두고 이렇게 말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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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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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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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차계장류

全州居民宋鎭澤右謹言世皆如李太漢之父子則 官令莫售 國法安在如此化外不可以尋常凡類治之不啻以屢度截嚴 營題以初十日再納侤於 城主嚴明之下斷當掘移之意眼同別差奉 分付出去矣渠之父子與其弟一齊避身而差使亦莫知所向故不勝憤迫玆敢更陳 洞燭敎是後使太漢之奴子押將差不日督掘以懲右漢之化外不測之習千萬伏祝爲白只爲行下向敎是事城主 處分癸酉十二月 日泰仁官[着押][題辭]李太漢之所▣雖萬萬可痛以奴代(背面)掘此是法外不可許施偸塚掘漑覓主之例事卽爲掘漑向事十一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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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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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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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부

서(2) 書(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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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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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빙류

己巳十二月初七日 前手標右手標事亡夫生時得用錢未報条二十兩每朔五分例限明年九月晦內並本利備報之意如是成標爲去乎日後若有異言則以此憑考事標主自筆喪人朴在文 不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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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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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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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빙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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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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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유형분류 :
시문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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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저자)
유형 :
고문서
유형분류 :
서간통고류

雪殘空紛冱自切駕舟之懷只固間隔未能遂意適有獻勺敢請賁惠伏冀無孤素望爲此謹控庚臘望日弟田鎰健孫斗宣拜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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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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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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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빙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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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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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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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간통고류

金生員主前疏上제상ᄒᆞ옵고목화三十斤이슈가ᄒᆞ온목화온바니목화즉반ᄂᆡ길할차로둔목화거로달은ᄉᆞᄅᆞᆷ의게방매할쳐지오나화지가호품이기로통긔ᄒᆞ오니직지몸소나려와졔셔보시고가져가기되갑신즉금잇셔야할테오니ᄇᆡ가금일발션할테기로양고ᄒᆞ오니졔ᄇᆡᆨᄉᆞᄒᆞ고ᄂᆡ려오소셔甲寅十二月卄七日姨侄斗燁拜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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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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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현대문서
유형분류 :
증빙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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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저자)
유형 :
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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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간통고류

伏惟辰下靜體動止候連護康旺伏慰且溯不任下忱 記下等公私悶惱私悶何煩就悚白今番道 啓臚列時尊宅請 褒事伏不勝感頌之地以此等事每當如此之時則本廳禮目錢參拾兩乃是應酬之例故玆以委告此回 下施俾得公用之地切仰切仰而 啓草與件記昭詳謄上覽則可想念幷 下諒處之若何餘不備謹拜候庚午正月初二日 記下 白樂弼等首拜就其中今番尊宅之居首參榜尤切感頌而已扶安金 生員 宅下執事入納完啓書廳?上候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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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간통고류

省禮言卽便承拜惠䟽從謹審春㬉孝候連爲万支慰賀區區實愜拱祝記下姑依前羕而已耳就來錢貳百兩依到而此阮?(段)去晦爲限今未結末中間見督將何堪過期於不日上送如何如何一首黃鷄緊感緊感弘斌兄常時不平云万万悶鬱/悶鬱/耳餘姑留不備謝疏禮庚午二月一日 記下 李度聲拜拜(皮封)扶堂邨 孝廬回納完西謹謝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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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부기록류

蘭谷扁額後題吾宗族中特有孝烈世襲家庭者卽士人洛坤之家余愛其香德而以蘭谷二字扁其楣夫蘭者生於幽谷不爲無人而不芳今乃獨茂與衆草爲伍孔夫子感嘆之辭也生於幽谷竟歲無人採含薰祇自知朱夫子嘆美之詩也公之祖考學生公孝感神明鳥降靈餌晨夕上墓雙膝穿階祖妣孺人崔氏孝烈卓異再嚼血指一家雙行道剡登 聞與公同時 命閭又其從祖母孺人朴氏廬於姑墓殉於夫忌杲洌虎感登聞命閭此三孝烈旣爲闡揚且其先考學生公文辭夙就三中初試又孝行特異朔望省掃且今日公亦追先範而今七十七歲雖風雪中期於朔望不懈且是老境難行之事也孰謂靈芝之無本源哉觀此則其平日所守之規修德之香不待言而知矣今其蘭谷之號不亦宜乎若其遯世不見知而不悔人不知而不慍是可謂不爲無人而不芳者也不求人知不患莫己知亦可謂含薰自知者也余以是每喜讚歎因爲之記矣歲在丙子三月下澣扶寧金益容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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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3 卷之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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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자 헌에게 보냄 寄憲孫 네가 특별히 방종하며 헛되이 시간을 보내는 습관이 없고 집안을 잘 이끌고 애비의 뜻을 잇는 일194)에 마음을 두는 것을 항상 보게 되니, 이 때문에 내가 만년에 신세가 조금 안정되고 집안은 조금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내가 너에게 위안을 받으니, 그 마음이 어떻겠느냐. 사방의 친구들도 또한 이따금 칭찬하지 않는 자가 없다. 다만 너는 평소 용모와 안색의 사이에 온화한 기운이 적기 때문에 사람을 상대하고 일에 대응할 때 온당하지 못한 단서가 없지 않으니, 이것이 너의 단점이다. 이미 그 단점을 알았으니, 어찌 온 힘을 다해 맹렬하게 살피지 않으랴. 《시경》에서 "온화하고 공손한 사람이여, 오직 덕의 기반이네."195)라 하였으니, 대저 온화함이란 천지가 사물을 많은 마음이요, 우리 사람이 마음에 지녀야할 기초이다. 천하의 물건은 양을 향하고 음을 등지며 온화함을 좋아하고 썰렁함을 싫어하지 않음이 없는데, 더구나 사람 마음의 향배는 어찌 이에서 벗어남이 있겠느냐. 지금부터 마음과 뼈에 새겨서 냉정하고 차가운 낯빛을 얼굴에 드러내지 말고 절박한 말은 입에서 내지 말며, 틈틈이 책을 읽고 이치를 연구하여 학문을 배양하며 또한 나의 허물을 말해 주고 나의 부족한 점을 충고해 주는 많은 도움을 줄 정직한 벗과 교유한다면, 이것이 네 한 몸의 복이며 한 집안의 경사가 될 것이니, 온 힘을 기울여 노력하라. 옛날 여동래는 젊어서 많이 격노하였다. 하루는 《논어》의 "자신에게 책망을 두터이 하고 남에게 책망을 가볍게 한다."는 구절을 읽고 나서는 죽을 때까지 격노하지 않았으니, 이것이 기질을 변화하는 방법이다.196) 너 또한 동래 선생처럼 기질을 변화해야 한다. 每見汝別無放逸浮浪之習。而留心於克家幹蠱之業。此我於晩年。身勢稍爲安帖。家容稍爲安集也。吾之所以慰望於汝者。其心爲何如。而四方知舊亦不無種種稱道者矣。但汝平日容色之間。少溫和之氣。是以接人應物。或不無未穩之端。此汝之所短也。旣知所短。豈不十分猛省乎。詩曰。溫溫恭人。惟德之基。夫溫溫者。天地生物之心。而吾人存心之基也。天下之物。莫不向陽而背陰。好溫而惡寒。況人情向背。豈有外於此乎。自今以往。銘心刻骨。冷涼之色。勿形於顔。迫切之言。勿出於口。間間讀書玩理以培養之。又從直友强輔。能言吾過。能攻吾闕者。與之遊逐。此汝一身之福。一家之慶也。千萬勉勉。昔呂東萊。少多暴怒。一日讀論語躬自厚而薄責於人之語。終身不暴怒。此是變化氣質法。汝亦變化質氣。如東萊先生也。 애비의 뜻을 잇는 일 원문의 '간고(幹蠱)'는 자식이 아버지의 뜻을 잘 계승하여 아버지가 미처 다 이루지 못한 사업을 완성하는 것을 말한다. 《주역》 〈고괘(蠱卦) 초육(初六)〉에 "초육은 아버지의 일을 주관함이니, 자식이 있으면 돌아간 아버지가 허물이 없게 되리라.〔初六, 幹父之蠱, 有子, 考无咎.〕"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온화하고……기반이네 《시경》 〈대아(大雅) 억(抑)〉에 나오는 구절이다. 여동래는……방법이다 여조겸이 젊었을 때에 기질이 거칠고 포악하여 밥상이 맘에 들지 않으면 기물을 부수곤 하였다. 뒷날 오랫동안 병을 앓으면서 한가할 때에 《논어》를 읽었는데, 〈위령공(衛靈公)〉의 "자신의 잘못은 혹독하게 꾸짖고 남의 잘못에 대해서는 가능한 한 이해해 주도록 노력하면 다른 사람의 원망을 받지 않게 될 것이다."라는 구절을 읽고 크게 깨달아 그 뒤로는 갑자기 성내는 버릇을 고치게 되었다. 《心經 卷1 損大象懲忿窒慾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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癸酉十一月二十五日到付全州儒生▣…▣▣▣▣(宋鎭澤)右謹言痛迫情▣…▣泰仁縣居李太漢偸塚▣…▣屢度鳴寃是乎則伏想 洞察是在果頃日良中本官圖形報狀 題敎內宋民之前後文軸若是昭然李▣▣(民之)生臆可知卽爲督掘事 行下敎是故卽往到付是乎則本官家發差跟捉是乎所凶彼李哥百般謀避一向頑拒 營題之下寧容若是前後文軸玆敢帖呈伏乞更加 洞察自官督掘之意 嚴明題下俾雪寃恨之地千萬泣祝行下向敎是事巡相閤下 處分癸酉十一月 日巡使[着押][題辭]依前題督掘事初一日山在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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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학중81)에 대한 제문 祭朴學中文 하늘이 현철한 분 낸 것은 장차 큰일을 함이 있게 하기 위한 까닭인데 이에 그 마음을 답답하게 하고 그 행하는 것을 막히게 하여 혹 그 장수를 누리지 못하게 하는데 이르니, 조물주는 여기에 그 어떤 마음을 쓰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어리고 장성할 때 효도하고 공손하며 늙어서 예를 좋아하였으니, 행실은 옥루(屋漏)82)에 부끄럽지 않을 수 있고 학문은 고금을 종합할 수 있으며, 인(仁)은 사람을 이롭게 하고 만물에 은택을 끼칠 수 있고, 지(智)는 일을 도모하고 계책을 헤아릴 수 있으며, 곧으면서도 남과 절교하지 않고 화합하면서도 남과 얽매지 않는 것은 형이 거의 가까웠다고 하겠습니다. 오직 이 마경(馬卿)의 병83)과 현안(玄晏)의 질84)이 계속 이어져 남아 있어 일어날 수 있는 날이 없어, 신음 속에 세월을 보낸 것은 겨우 요절을 면하는데 이르렀고 그 건강했던 날을 찾아보면 또 삼분의 일이 되지 못하니, 어찌 덕은 넉넉하고 명에는 곤액을 당함이 이와 같습니까.오호라! 한 방에서 문을 닫은 채 고요히 지내며 병을 요양하여 사려는 점점 끊어지고 기욕은 점점 담박해져 본원의 자리에 조용하고 연구 탐색하는 즈음에 침잠하여 천하의 의리를 열람하고 천하의 지극한 즐거움을 알았던 것은 애초에 병을 요양하는 가운데로부터 터득한 것이 아님이 없습니다. 혹 하늘의 뜻은 이런 질병을 주어서 그로 하여금 무너진 풍속의 도도한 가운데 섞이지 않고 사도(斯道)에 힘을 다할 수 있게 한 것이라면, 어찌 학문이 진보함에 병 또한 심해져 이런 지경에 이를 줄 어찌 알았겠습니까.오호라! 선왕의 전례(典禮)가 하루아침에 쓸어버린 듯 없어져 시상(時象)과 풍색(風色)은 극히 헤아리기 어려운데, 이에 능히 초연(超然)히 먼저 가서 숭정(崇禎)의 유민85)과 우리나라[小華]의 완인(完人)이 되는 것을 잃지 않게 하였으니, 또 어찌 하늘의 뜻이 아닌 줄 알겠습니까. 효성으로 편모를 모시면서 봉양을 마치지 못하였고 여러 아들에게 공부를 권면하여 학업을 마치는 것을 보지 못하였으니, 노형의 눈은 생각건대 응당 지하에서 감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미 완인이 되었는데 또 완전한 복을 구하는 것은 어렵지 않겠습니까. 더구나 여러 아들이 어질고 효도하니 그 아버지가 끝내지 못한 소원을 족히 끝낼 수 있을 것입니다. 원컨대 형께서는 마음 놓고 어두운 지하에서 걱정하지 마소서.아우는 부로를 잃은 외로운 처지에 쓸쓸히 지내고 있어 여생이 근심스러웠는데 중년 이후로는 오직 형에게 의지하였습니다. 경인년(1890, 고종27)에 식구들을 데리고 가까이 가서 살게 되었는데 형은 마침 병들었고, 지금 같은 마을에 와서 머물고 있는데 형은 또 돌아가셨습니다. 애달픈 나의 박한 운명은 단지 붕우와 지내는 한 즐거움이 있었는데 또한 능히 그 끝을 보장하지 못하단 말입니까. 형과 작별한 이후 돌아가시기 전까지 그 사이 세월이 얼마인지는 모르겠으나 장차 누구에게 의지하겠습니까. 험한 길이 앞에 있는데 맹인은 지팡이를 잃고 풍파가 끝이 없는데 외로운 배는 키를 잃었으니, 무엇으로 기대하고 면려하여 훗날 지하에서 보고할 것으로 삼겠습니까. 天生賢哲。將以有爲也。而乃拂欝其心。室塞其行。以至或不得其壽焉。造物於此。未知其何所用心耶。幼壯孝弟。老而好禮。行可以不愧屋漏。學可以經緯古今。仁可以利人澤物。智可以圖事揆策。貞而不絶於人。和而不泥於物者。兄其庶幾焉。惟是馬卿之病。玄晏之疾。沈綿彌留。無日可起。其所以捱過得呻吟中光陰者。僅至免夭。而求其康適之日。則又不得爲三之一矣。何其優於德而厄於命若是耶。嗚呼。杜門一室。靜居養病。思慮漸熄。嗜欲漸淡。從容於本源之地。沈潛於硏索之際。閱天下之義理。會天下之至樂者。未始不自養病中得來。或者天意降此疚疾。使之不雜於頹俗滔滔之中。而得以盡力乎斯道也。豈知學進而病亦進以至於此耶。嗚乎。先王典禮。一朝掃如。時象風色。極其叵測。乃能超然先逝。不失爲崇禎之遺民。小華之完人者。又安知非天意耶。孝奉偏闈。未得終養。勉課諸郞。未見卒業。老兄之目。想應不暝於地下矣。然旣爲完人。又求完福。其不難乎。況諸郞賢孝。足以了厥考未了之願。願兄釋然無虞於冥冥之中也。弟孤露離索。餘生惸惸。中年以來。所賴惟兄。庚寅之歲。絜家就近。而兄適病焉。今也來留同塾。而兄又逝焉。哀此薄命。只有朋友一樂。而亦不能保其終耶。別兄以後。屬纊以前。未知其間日月幾何。而將誰賴依。險路在前而盲人失相。風濤無涯而孤舟失柁。其何以期勉以爲他日下報之地耶。 박학중(朴學中) 박인진(朴麟鎭, 1846∼1895)을 말한다. 자는 학중, 호는 우인당(愚忍堂)·즉이재(則以齋), 본관은 밀양(密陽)이다. 옥루(屋漏) 집에서 가장 어두운 서북쪽 방구석을 가리키는데, 아무도 모르는 자기의 마음속이라는 의미로 쓰인다. 《시경》 〈대아(大雅) 억(抑)〉에 "네가 네 집에 있을 때에 보니 옥루에 있을 때에도 부끄러움이 없었네.[相在爾室, 尙不愧于屋漏.]"라고 하였다. 마경(馬卿)의 병 마경은 한(漢)나라 사마상여(司馬相如)를 가리킨다. 그의 자가 장경(長卿)이므로 이렇게 부르는 것이다. 그는 소갈병(消渴病)을 앓아 벼슬을 그만두고 은퇴하여 무릉(茂陵)에 살다가 죽었다. 《史記 卷117 司馬相如列傳》 현안(玄晏)의 질 현안은 진(晉)나라 황보밀(黃甫謐)의 호이다. 그는 일생 풍비(風痺)에 시달리면서도 손에서 책을 놓지 않아 서음(書淫)이라는 칭호를 얻었는데, 은거하며 저술을 일삼았다. 《晉書 卷51 皇甫謐列傳》 숭정(崇禎)의 유민(遺民) 중국 명나라의 마지막 황제인 숭정제가 남긴 백성이라는 뜻으로, 명나라는 망하고 숭정제는 죽었지만 여전히 숭정제를 황제로 여기고 명나라를 정통으로 여겨 그 백성임을 자처하는 사람들을 가리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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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파선생집(南坡先生集) 8권 3책 南坡集 南坡先生集 고서-집부-별집류 교육/문화-문학/저술-문집 문집 표점영인 南坡先生集 [1898] 李僖錫 목활자본 『남파집(南坡集)』 3 有界 10行20字 註雙行 한자 上下內向2葉花紋魚 전남대학교도서관_불명처2 전남대학교도서관 1898년(광무 2)에 간행한 남파(南坡) 이희석(李僖錫, 1804∼1889)의 문집, 8권 3책(목활자본)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그의 손자 이선원(李善遠)이 편찬하였다. 『남파선생집(南坡先生集)』 해제 1. 생애와 사상 이희석(李僖錫, 1804∼1889)의 자는 효일(孝一)이고, 호는 남파거사(南坡居士)이며, 본관은 인천(仁川)이다. 시조인 휘(諱) 문화(文和)는 정희왕비(貞僖王妃)의 외조부로 의정부 찬성(議政府贊成)을 지냈으며, 시호는 공도(恭度)이다. 이문화는 집안이 벌열(閥閱)이 되는 것을 경계하여 아들 6명을 모두 지방으로 내려 보냈다. 이때부터 장흥(長興)에 인천이씨가 거주하게 되었다. 청강(淸江) 휘 승(昇, 1556~1628)은 문장과 행의(行義)가 있어 호남으로 내려온 인천이씨의 현조(顯祖)가 되었다. 문집으로 『청강유집(淸江遺集)』이 전한다. 청강 이승을 추모하기 위해 장흥의 인천이씨는 영석재(永錫齋, 전라남도 문화재 제69호)를 설립하였다. 고조부는 휘 윤덕(潤德), 증조부는 휘 복현(復顯), 조부는 휘 능계(能啓), 부친은 휘 중집(重楫)이다. 부친은 천성이 배우기를 좋아하였으나 집안이 가난하여 공부에 전력하지 못하였기에 자식 교육에 더욱 힘을 쏟았다. 모친은 평강채씨(平康蔡氏)로, 채석후(蔡錫垕)의 딸이다. 이희석은 1804년(순조 4) 5월 15일 전남 장흥군 용산면 접정리 청적(聽笛)마을에서 태어났다. 타고난 재주가 걸출하고 성격이 꼿꼿하고 호걸스러운 모습을 가지고 있어 이름만 듣고 만난 적이 없던 사람도 우연히 만나면 단번에 남파를 알아볼 정도였다. 사람들과 교유할 적에 구차히 영합하지 않았고 평소 불의한 사람과는 애초에 스스로 교분을 맺으려고 하지 않았다. 그러나 후배나 어린 학생이 질의하면 온화한 기색으로 자상히 알려주었다. 10세를 전후로 문리가 통달하여 제자백가 등을 남김없이 두루 통했는데, 사서와 오경에 더욱 공력을 다해 주소(註疏)가 아무리 많은 글도 자기 말처럼 외웠다. 이희석은 노사 문하에 나아가 스승의 말을 듣고 스승의 덕을 보자 마치 시원스럽게 물이 아래로 흐르는 것 같아 의귀처(依歸處)로 삼아 자신의 학업을 마칠 수 있을 것이라 여겼다. 이희석은 노사 기정진보다 여섯 살 적었는데, 기정진은 이희석을 벗으로 대우했고, 그는 스승으로 받들었다. 1851년(철종 2) 홍수로 전토를 잃고 장흥에서 나주 사호(沙湖, 현 광주광역시 광산구 사호동)로 이거하였다. 기정진의 거주지 근처로 옮긴 것이다. 이때부터 기정진의 거처에서 매달 29일은 숙식을 하며 강학에 열중하였다. 1879년 기정진 사후에 다시 장흥으로 거처를 옮긴 것으로 보인다. 1880년(고종 17) 77세 되던 해에 진사시(進士試)에 응시하여 합격하였다. 또 조정에서 고령이라고 하여 특별히 통정대부(通政大夫)에 가자(加資)하였다. 이에 대해 이희석은 임종 전에 하신 어버이 말씀이 귓가에 뚜렷이 남아 저버릴 수 없어 죽기 전에 과거에 응시했다고 소회를 밝혔다. 고향에 돌아와 어버이 묘소에 가서 고유(告由)만 했을 뿐 당상관(堂上官)의 비단 관복과 옥관자(玉貫子)를 몸에 걸치지 않았다. 1889년(고종 26) 7월 17일에 묵동(墨洞) 우사(寓舍)에서 세상을 떠났다. 장흥 천관산 수정암(水晶菴) 선영에 장사하였다. 부인은 광산김씨로 김상희(金相禧)의 딸이다. 슬하에 1남 2녀가 있는데 아들은 인호(麟浩)이고, 첫째 딸은 낭주최씨(朗州崔氏) 최면식(崔冕植), 둘째 딸은 철원주씨(鐵原周氏) 주방일(周邦一)에게 시집갔다. 큰딸과 아들 인호는 안타깝게도 이희석보다 먼저 세상을 떠났다. 인호는 2남 3녀를 두었는데, 아들은 선원(善遠)과 학근(學根)이다. 둘째 아들 학근은 인천이씨 족보에 학원(學遠)으로 실려 있다. 선원이 이희석의 유고를 수집, 문집 간행을 주도하였다. 이희석은 시(詩)에 뛰어났는데, 『남파집』에는 성리설이 거의 없는 점이 특징이다. 기우만의 행장에서 이희석이 직접 언급한 문장에 관한 의견을 다음과 같이 남기고 있다. "새롭고 기이함을 좋아하고 화려한 문장을 숭상하는 것은 문장가의 큰 병통이다. 글을 지을 때는 우임금의 치수(治水)처럼 일삼은 바가 없이 자연스러운 형세를 따를 뿐이다. 만일 부화(浮華)한 표현에만 마음을 쓰고 남을 기쁘게 하는 데 힘쓴다면 부인이나 여자가 용모를 치장하는 정도의 기량에 불과하니 나는 이렇게 하지 않겠다." 산수 유람과 기행에 관한 시와 글이 많은 것은 노사학파의 문인에게서 나타나는 하나의 특징 중 하나이다. 이희석 역시 문집 안에 다양한 지역을 유람하며 남긴 시문이 있고, 특히 「원유록」은 여행하며 지은 시문을 종합한 것으로서 이희석의 산수에 관한 사상의 일면을 살필 수 있다. 2. 문집 구성과 내용 『남파집(南坡集)』은 남파(南坡) 이희석(李僖錫)의 문집으로 8권 3책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1898년(광무 2) 전남 장흥군 용산면 어산리에 있는 인천이씨 재실인 영석재(永錫齋)에서 손자 이선원(李善遠)에 의해 목활자본으로 간행되었다. 책별로 권두에 차례가 있고, 시가 권1에 140제 247수, 권2에 129제 193수, 총 369제 440수가 있다. 권3에는 서 34편, 권4에 잡저 9편, 권5에 서(序) 9편, 기(記) 12편, 발(跋) 6편이 있다. 권6에는 행장 3편, 묘지명 1편, 제문 7편이 있으며, 권7에는 「원유속록후서(遠遊續錄後序)」와 「원유록(遠遊錄)」이 실려 있다. 권8은 부록으로 남파의 행장과 전, 묘지명, 발문, 후서 등이 수록되어 있다. 권1과 권2에 수록된 한시 440수는 스승인 노사 기정진과 그 문인, 친족이나 친구, 그리고 동향의 장흥위씨(長興魏氏)들과 주고받은 시가 많다. 기정진(奇正鎭), 기우만(奇宇萬), 기양연(奇亮衍), 김평묵(金平黙), 조의곤(曺毅坤), 오상봉(吳相鳳), 김한섭(金漢燮), 김영택(金永澤), 안달삼(安達三), 소치(小癡) 허련(許鍊) 등 많은 인물에게 준 시들이 있어 그의 교유관계를 보여준다. 유람시가 많은 분량은 차지하고 있는데, 이들 시에서 그가 추구하였던 인지지락(仁智之樂)의 면모를 확인할 수 있다. 장흥 인근에 있는 천관산, 제암산, 월출산 등 산천을 두루 유람하였다. 천관산에 올라 쓴 시 「유관산(遊冠山)」과 청산도와 거금도, 진도 등지에서 바다를 보며 읊은 「고금도(古今島)」, 「등고금도가마치망한라산(登古今島駕馬峙望漢拏山)」이 있다. 또 합천 삼가 남명(南冥) 조식(曺植)의 강학처인 뇌룡정(雷龍亭)을 방문하여 조식의 시에 차운하였다. 주변의 풍광에 자신의 감정을 담은 「사인정풍영계회(舍人亭風詠契會)」, 「장천재수창(長川齋酬唱)」 등은 대표적인 장편시이다. 「자민(自憫)」, 「초도음(初度吟)」 등은 자신을 돌아보며 불우한 인생에 대한 회한과 학문 성취의 한계를 표현한 시이다. 「학문(學問)」, 「감회(感懷)」, 「도통탄(道統歎)」 등 설리적(說理的) 시도 있다. 「독좌(獨坐)」와 「유회(幽懷)」는 은일 생활의 고독을 읊은 것이며, 「애국음(愛菊吟)」과 「조일대국(朝日對菊)」은 도연명의 전원 취미를 본받아 국화를 사랑하는 마음을 읊은 시이다. 이밖에 「석별(惜別)과 「억추려(憶秋旅)」 등은 친구와의 우정을 생각하며 만나지 못하는 아쉬움을 표현하고 있다. 그 중 「하사좌상증조천관안행오(下沙座上贈朝天館安行五)」는 제주도에서 노사에게 공부하러 온 안달삼(安達三)에게 준 오언고시로 면암 최익현이 제주도 유배 중에 이 시를 처음 보았다고 『남파집』 발문에서 그 인연을 소개하였다. 병인양요 때인 1866년(고종 3) 10월, 이희석이 장성에 있을 때 출전(出戰)하려고 가는 고제홍(高濟洪)에게 감격하며 써준 시 「고중범부의지행(高仲範赴義之行)」과 서양의 이양선 소식을 듣고 탄식을 하는 시 「문양선소식발탄(聞洋船消息發嘆)」 등은 그의 현실 인식을 잘 보여준 시이다. 권3에는 서(書) 34편이 실려 있다. 스승인 기정진에게 올린 편지와 자식과 친족 동생에게 보낸 편지, 고향의 벗 김대원(金大源), 사돈 최득수(崔得洙), 영남의 동문 조성가(趙性家), 이항로의 문인 김평묵 외 장흥부사로 부임했던 한치조(韓致肇), 이학래(李鶴來), 송기로(宋綺老) 등과 주고받은 편지로 안부를 묻는 내용이 대부분이다. 김대원에게 보낸 편지는 김대원 아들이 먼저 세상을 떠난 것에 대한 위로를 보냈고, 최득수의 경우 최득수의 며느리이자 이희석의 딸이 세상을 떠난 것에 대한 소회를 적었다. 권4는 잡저(雜著)이다. 「거려설(蘧廬說)」은 이희석이 만년에 고향으로 돌아와 지은 작품이다. 거려(蘧廬)는 누추한 여관이란 뜻이다. 이희석은 30세 이전에는 어버이가 살던 집에서 살다가 30세 이후에는 어산(語山) 묵촌(墨村)에 살았고, 그 후에는 장성, 나주에서 살다가 10여 년 후에 다시 고향으로 돌아왔다. 「회갑설(回甲說)」은 회갑을 사치스럽게 할 것이 아니라 낳고 길러주신 부모님의 노고를 생각하고 효도의 의미를 돌이켜보는 날이어야 한다는 취지로 쓴 글이다. 「거긍설(去矜說)」은 자랑과 과시를 의미하는 '긍(矜)'자로 재능과 과시의 상관 관계를 언급하면서 자랑하는 마음을 없애고 좋은 독서를 해야 한다고 논설하고 있다. 「거긍설」에서 양웅(揚雄)의 "책을 좋아해도 중니(仲尼; 공자)에게 구하지 않으면 책 가게일 뿐이고, 말을 좋아하여도 중니에게 보이지 않으면 자질구레한 말일 뿐이다."라는 구절과 사상채(謝上蔡)가 이천(伊川) 선생과 작별한 지 1년 만에 찾아가 뵈었는데 이천 선생이 "무슨 공부를 하였는가?" 하고 묻자, 사씨가 "다만 '긍(矜; 자랑하고 과시하는 마음)' 자(字)를 없애려 하였습니다."라는 일화를 인용하였다. 「정설증영석재제생(貞說贈永錫齋諸生)」은 이희석이 『주역』의 원형이정(元亨利貞) 중 정(貞)을 가지고 영석재(永錫齋) 여러 학생에게 당부한 글이다. 『주역』 곤괘(坤卦)에서 '정(貞)'의 의미와 영석재가 위치한 풍수지리적 환경을 연관하여 논하면서 '정(貞)'의 자세로 노력해 공부하라는 취지가 담겨있다. 「김민수기실(金敏受記實)」은 흉년에 마을과 친척들을 구제한 김영택(金永澤)의 공로가 알려져 수령 윤용(尹墉)과 관찰사 이돈상(李敦相)이 조정에 알린 사실 등을 기록한 글이다. 「설계(舌誡)」는 온몸에 병이 들었는데 그중 혀를 잘못 놀려 말을 함부로 하는 병이 가장 큰 병이라는 논의를 편 글이다. 주자의 '이렇게 하는 것이 병통이라는 것을 알았다면, 이렇게 하지 않는 것이 약이다.[若知如此是病 則不如此是藥]'라는 말을 인용하여 끝맺었다. 「의석서(擬惜誓)」는 『초사(楚辭)』 중 하나인 「석서(惜誓)」를 본떠 자신을 경계한 의고문(擬古文)이다. 「의주군신하궁인작관저시(擬周群臣賀宮人作關雎詩)」는 주나라 신하들이 관저시(關雎詩)를 쓴 궁인에게 경하하는 모습을 전문(箋文) 형식으로 쓴 글이다. 「선왕고부군신천록(先王考府君新阡錄)」은 부친의 묘소를 이장한 경위를 소상히 밝히며 후손을 경책한 글이다. 권5에는 서(序) 9편, 기(記) 12편, 발(跋) 6편이 실려 있다. 「사호이택서(沙湖移宅序)」는 이희석이 1851년 여름 대홍수를 만나 전토(田土)를 잃고 금성(錦城; 나주) 사호(沙湖)로 이사하게 된 경위를 『주역』의 논리를 발려와 기록한 글이다. 「애국서(愛菊序)」는 국화를 좋아하는 마음은 도연명 못지않다며 도연명을 경앙(景仰)하는 마음을 드러낸 글이다. 「지운서(止雲序)」는 이희석의 벗 김경현(金擎鉉)의 호인 '지운(止雲)'에 대해 써준 글이다. 김경현의 자는 국민(國敏), 호는 지운(止雲), 본관은 영광(靈光)이다. 이리저리 떠도는 구름의 속성을 언급하며 정자(程子)의 「정성서(定性書)」와 『주역』 「간괘(艮卦)」 단사(彖辭)의 말을 인용하여, 공자가 말한 출처(出處) 역시 여기에서 벗어나지 않음을 피력하였다. 「가암서(可菴序)」는 김영하(金永夏)의 호인 '가암(可菴)'의 '가(可)'자에 관해 썼고, 「묵헌서(黙軒序)」는 박인환(朴寅煥)의 자호(自號)인 '묵헌(黙軒)'의 '묵(黙)'자에 대해 썼으며, 「죽사서(竹史序)」는 둘째 사위 주운지(周雲之)의 자호인 죽사(竹史)에 대해 의미를 부여하고 당부한 글이다. 그 밖에 「묵헌김공유집서(默軒金公遺集序)」는 해남 출신으로 사헌부 장령을 지낸 묵헌 김재일(金載一, 1749~1817)의 시문집의 서문이고, 「묵와위공유고서(默窩魏公遺稿序)」는 장흥 위수택(魏守澤)의 유고집 서문이다. 「영보동계서(永保洞契序)」는 이규호(李圭浩)를 대신해서 지은 글이다. 영보동계는 영암 덕진면 영보동에서 연촌(烟村) 최덕지(崔德之, 1384~1455)의 내외 후손을 중심으로 결성된 계인데, 세월이 흐르면서 유명무실해졌다가 당시 수령의 도움으로 다시 동약(洞約)이 정해져 이를 기념한 글이다. 기(記)는 12편인데 「율정공비음기(栗亭公碑陰記)」는 선조 율정공 이두(李斗)의 비문 뒷면에 쓴 글이다. 율정공 이두의 자는 천추(天樞), 호는 율정, 또는 장춘오(藏春塢)이다. 율정공은 장흥에 내려와서 자제와 문하생과 강학만 하고 벼슬을 하지 않았다. 그의 글은 병란으로 인해 없어져 1573년(선조 6)에 쓴 족보의 서문 1편만 남아있다. 「연원중수기(淵院重修記)」는 노봉(老峯) 민정중(閔鼎重)과 둔촌(屯村) 민유중(閔維重)의 위패를 모신 연곡서원(淵谷書院, 현 전남 장흥군 장흥읍 원도리)이 대원군에 의해 훼철된 뒤에 다시 중수한 사실을 쓴 글이다. 「덕암재기(德巖齋記)」와 「낙영재기(樂英齋記)」는 모두 장흥에 있는 강학처에 관한 글이다. 장흥 묵촌의 덕암재는 이희석의 장흥 묵촌 친족들이 자제들의 공부를 위해 설립한 글방이고, 낙영재는 장흥 용산면에 있는 용강사(龍岡祠)의 강당으로 월산재(月山齋)와 더불어 우수(愚叟) 김상범(金尙範)의 5, 6대손이 세운 것이다. 그밖에 「송석당기(松石堂記)」, 「도곡서실기(道谷書室記)」, 「최씨용호정기(崔氏龍湖亭記)」, 「금구열녀정씨정려기(金溝烈女鄭氏旌閭記)」, 「노원기(鹵園記)」, 「화봉기(華峯記)」, 「유관산기(遊冠山記)」, 「유사산기(遊獅山記)」가 있다. 「노원기(鹵園記)」는 바닷가에 살던 김경여(金景汝)라는 사람에게 '노원(鹵園)'이라는 호를 지어주면서 그 의미를 부연 설명한 글이다. 특히 「유관산기」과 「유사산기」는 유람을 좋아했던 이희석이 천관산과 사자산을 유람하고 쓴 글로 문학적 필치를 잘 보여주는 작품이다. 발문은 6편이 실려 있는데, 족조 이적(李績)에 관한 「족조퇴옹공비문발(族祖退翁公碑文跋)」이 있고, 「영모재유집서발(永慕齋遺集序跋)」, 「서양성재선효자언행록후(書養性齋宣孝子言行錄後)」, 「서고씨삼효문기후(書高氏三孝門記後)」, 「서경주최씨효열록후(書慶州崔氏孝烈錄後)」, 「서영천굴결사기후(書靈泉窟結社記後)」가 있다. 그중 「영모재유집서발」은 1875년(고종 12) 1월 18일 삼가(三嘉)에 사는 친족 이양년(李亮年)과 이붕석(李鵬錫)이 영모재 문집 관련 일로 방문하자 써준 글이다. 「서경주최씨효열록후」는 판서 오준영(吳俊泳)을, 「서영천굴결사기후」는 무산도호부사(茂山都護府使) 고제환(高濟煥)을 대신해서 지어준 글이다. 권6에는 행장 3편, 묘지명 1편, 제문 7편이 실려 있다. 「삼종대부초당처사공행장(三從大父草堂處士公行狀)」은 이희석이 8세 때 『사략(史略)』을 배웠던 이상계(李商啓)의 행장이다. 이희석이 노사 기정진에게 부탁하였으나 근거할 만한 글이 없어 감히 행장을 쓰지 못하고 사양하면서 집안사람들이 사실을 모아 기록하라고 권유하였다는 내용이 보인다. 「소암처사위공행장(素菴處士魏公行狀)」은 위영우(魏榮禹)의 생애를, 「반천거사염공행장(磻泉居士廉公行狀)」은 염한기(廉翰琪)의 생애를 기록한 글이다. 행장 3편 모두 장흥에 거처했던 인물들이다. 묘지명은 부친 이중집(李重楫)에 대한 묘지명이 있으며 스승 기정진의 제문 2편과 기장일(奇章一), 도곡처사(道谷處士) 송종운(宋鍾雲) 제문이 있다. 그리고 「용산기우문(蓉山祈雨文)」은 기우제에 관한 글이고, 「제당산문(祭堂山文)」은 가뭄에 병충해 제거를 기원하는 글이고, 「축호문(逐虎文)」은 산신령에게 호랑이를 물리치게 해달라는 기원문이다. 「축호문」은 장흥부사 신석유(申錫裕)를 대신하여 쓴 글이다. 권7에 실린 『원유록(遠遊錄)』은 이희석이 1866년(고종 3) 3월 2일부터 6월 15일까지 약 4개월간의 여행기록이다. 「원유속록후서(遠遊續錄後序)」에 의하면, 원래 1858년(철종 9) 기문현(奇文鉉), 기봉진(奇鳳鎭)과 함께 수개월 동안 관서(關西) 유람을 하고 돌아오던 중 칠원(漆原)에서 쉬다가, 마침 그곳에서 만난 김녹휴(金錄休)가 관동(關東) 유람을 청하였다. 이희석은 즉시 승낙하였지만, 기봉진이 내년 봄에 가자고 하고서는 끝내 아무런 말이 없어 결국 무위에 그쳤다. 그러던 중 1866년(고종 3) 3월 고종의 가례(嘉禮)로 인한 증광시에 응시하기 위하여 한양으로 왔다가 김회현(金會鉉)과 함께 강화도를 유람하고, 한양으로 다시 들어온 뒤 김우(金玗)와 함께 세 사람이 금강산을 다녀오고, 다시 한양으로 와서 김회현과 함께 영서(嶺西)를 따라 남으로 내려가 조령을 넘어서 영남을 거쳐 집으로 돌아왔다. 권7 마지막 부분에는 이희석이 경유지와 거리를 기록해 두었다. 장흥 남면에서 출발, 한양, 강화(정족산성, 마니산), 한양 동대문, 금강산 장안사, 마하연, 유점사, 신계사, 총석정, 금성(金城), 창도(昌道), 원주, 조령, 대구, 합천 삼가, 진주 월횡(月橫), 하동, 구례 간전, 순천, 장흥 남면 묵촌까지 3,360리에 달하는 긴 거리이다. 그는 가는 곳곳마다 자신이 보고 느낀 것을 기록하고 많은 시문을 남겼다. 그 중 「성단음(星壇吟)」, 「정양사음(正陽寺吟)」, 「마하연음(摩訶衍吟)」 등은 문학적으로 뛰어난 작품이 실려 있다. 또한 「산림학자변(山林學者辨)」, 「조성하순소등비로변(趙成夏舜韶登毗盧辨)」, 「삼신산설(三神山說)」과 같은 논변문(論辨文)도 실려 있는데, 그 중 「산림학자변」은 산림(山林)이라는 용어와 의미 등을 사적(史的)으로 서술하였으며, 오늘날에 산림이 붕당의 희생양이 되어 위로는 공로를 펼치지 못하고 아래로는 은택을 미치지 못함을 한탄하였다. 그리고 「조성하순소등비로변」은 도동(桃洞)에서 이희석이 조성하(趙成夏, 1845~1881)의 『금강록(金剛錄)』을 보고, 동행했던 중들에게 지난해 조성하가 비로봉에 올라간 경위에 대해 듣고 느낀 점을 기록한 글이다. 조성하의 본관은 풍양, 자는 순소(舜韶), 호는 소하(小荷)이다. 병조판서 조병준(趙秉駿)의 아들로 조병귀(趙秉龜)에게 입양되었으며, 신정왕후(神貞王后) 조씨(趙氏)의 친정 조카이다. 편서로 『금강산기(金剛山記)』가 전해오는데, 이것이 이희석이 언급한 『금강록』일 것이다. 영남 지역에서는 주로 자신의 친족들이 와서 안내하거나 도움을 주어서 영남 여행을 계속할 수 있었다. 합천 삼가에서는 선조 이문화(李文和)를 모신 서계서원(西溪書院), 남명 조식의 강학처인 삼가 토동(兎洞)의 뇌룡정(雷龍亭)을 방문하였으며, 하동 월횡에서는 10여 일간 머무르면서 하달홍(河達弘, 1809~1877)과 동문인 조성가(趙性家, 1824∼1904) 등과 함께 시문을 주고받았다. 이희석과 조성가가 서로 창화(唱和)하며 지은 28운의 연구(聯句) 「여월재연구(與月齋聯句)」가 있는데, 특히 하달홍은 이를 기념하며 「파월연구서(坡月聯句序)」를 써주었다. 하달홍은 금강산의 뛰어난 절경과 여행 중 들었던 이야기가 여기에 다 실려 있을 정도로 빼어난 작품이라고 칭하였다. 「원유록」을 보면, 강화도 기록에는 '추보(追補)'라는 작은 글자가 종종 보인다. 아마 문집을 편집할 당시 『원유록』 원편이 있었는데, 편집하면서 관련된 내용을 추가하고 해당 내용 끝에 '추보'라고 써놓았던 것으로 보인다. 또 인명이나 지명에 세주(細註)를 달아 내용의 이해를 돕고 있다. 권8은 이희석의 생애와 문집 출간에 관한 각종 기록이 수록되어 있다. 기우만(奇宇萬)이 지은 행장을 비롯하여 기삼연(奇參衍)의 「남파이선생전(南坡李先生傳)」, 이승욱(李承旭)이 지은 묘지명, 그리고 김평묵(金平默), 최익현(崔益鉉), 송기로(宋綺老), 조성가(趙性家)로부터 받은 문집 발문 및 후서(後敍)가 실려 있다. 마지막 부분에 실린 삼종손(三從孫; 칠촌 조카의 아들) 이주원(李周遠)의 발문에 의하면, 이선원(李善遠) 등이 선조 이희석 문집을 출간하지 못해 한스럽게 여기다가 1898년(광무 2) 『인천이씨장흥파세보(仁川李氏長興派世譜)』를 출간하면서 집안 종형제인 이대원(李大遠)·이정원(李正遠) 등과 발간에 대해 논의하여 『남파집』을 함께 출간하였다. 『남파집』 맨 마지막 장에 '장흥부 어산(語山) 영석재에서 시간(始刊)'라는 기록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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