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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은경(盧殷卿) 간찰(簡札) 고문서-서간통고류-서간 盧殷卿 盧軫永 광주 민종기 (재)한국학호남진흥원 HIKS_Z999_99_A00918_001 노은경(盧殷卿)이 노진영(盧軫永)에게 쌀을 보내준 것에 대해 감사를 표한 간찰 모년 2월 22일에 종생(宗生) 노은경(盧殷卿)이 노진영(盧軫永)에게 보낸 간찰이다. 보내준 서찰을 받으니 직접 얼굴을 뵌 것 같아 감사한데 더구나 쌀을 보내주어 썰렁한 주방에 연기를 피울 수 있게 해주어 말할 수 없이 감사하고 보답할 방도도 모르겠다고 하였다. 혹여 서신을 받고 답장을 하지 않으면 옥에 티가 될까 싶었다면서 상대방의 평안을 축원하며 마무리하였다. 또 은경이라는 이름은 소자(小字)였는데 지금은 정명(正名)으로 통용하고 있으니 허물하지 말아달라고 덧붙였다. 이 편지는 노상용(盧尙鏞)이 노진영에게 보낸 간찰과 합봉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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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상용(盧尙鏞) 간찰(簡札) 고문서-서간통고류-서간 盧尙鏞 盧軫永 광주 민종기 (재)한국학호남진흥원 HIKS_Z999_99_A00918_001 노상용(盧尙鏞)이 노진영(盧軫永)에게 올해 농사 준비에 필요한 종자용으로 쓸 곡식을 도와달라고 당부하는 내용의 간찰 모년 3월 27일에 노상용(盧尙鏞)이 노진영(盧軫永)에게 보내는 간찰로 국한문 혼용으로 작성되었다. 지금 농사 준비를 하느라 분망한 시기에 아무 준비와 주선이 없어서 적수공권(赤手空拳) 형편에 몹시 딱한 형편이므로 지금 얼마간이라도 자신의 형편을 헤아려주어서 올해 농사에 지장이 없게 해달라고 간절히 부탁하고 있다. 혹시 준비가 어렵다면 무엇보다 긴급한 것이 종자(種子)이므로 색조(色租) 2석(石)을 반드시 빌려달라는 것이다. 빌려주지 않으면 사실상 올해 농사는 아예 시작하지 못하게 되므로 동정한다는 마음으로 빌려주시면 성심성의껏 갚겠다고 하면서 약한 사람을 도와주는 것도 사회사업가의 일이 아니겠냐고 하였다. 이 편지는 노은경(盧殷卿) 간찰(簡札)과 합봉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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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9년 장대영(張大榮) 등 고목(告目) 고문서-첩관통보류-고목 茂城書院 李生員 광주 민종기 (재)한국학호남진흥원 1929년 11월에 무성서원 서재 장대영 등 5인이 이 생원에게 무성서원의 집강에 추천되었으므로 삭분향에 와줄 것을 알리는 고목 1929년 11월 15일에 무성서원 서재(茂城書院西齋) 장대영(張大榮) 등 5인이 이 생원(李生員)에게 무성서원의 집강(執綱)에 추천되었으므로 삭분향(朔焚香)에 와줄 것을 알리는 고목이다. 무성서원의 원장(院長)과 원이(院貳)는 경재상(京宰相)이 맡고 집강·장의(掌議)·색장(色掌)·유사(有司)는 도내(道內) 지조 있고 신중한 선비에게 맡기는 것이 전래하는 규례이다. 이번 도회(道會) 때에 사림의 공의(公議)에 따라 이 생원을 집강으로 천망하여 망첩(望帖)을 올리니 이번 초하루 분향례(焚香禮)에 와서 배알하고 봉심(奉審)할 것을 아뢰는 내용이다. 무성서원은 전라북도 정읍시 칠보면 무성리에 있는 서원이다. 고려시대에 최치원(崔致遠, 857~?)의 생사당(生祠堂)으로 태산사(泰山祠)를 건립하였는데 1483년(성종 14)에 정극인(丁克仁)이 세운 향학당(鄕學堂)이 있던 지금의 자리로 이전하였다. 1549년(명종 4)에 신잠(申潛, 1491~1554)의 생사당을 짓고 향사하다가 1615년(광해군 7)에 태산서원으로 창립, 1696년(숙종 22)에 무성서원으로 사액 받았다. 1630년(인조 8)에 정극인(丁克仁, 1401∼1481), 송세림(宋世琳, 1479∼?), 정언충(鄭彦忠, 1706∼1771), 김약묵(金若默, 1500∼1558)을, 1675년(숙종 1)에 김관(金灌, 1575~1635)을 추가 배향하였다. 이 서원은 1868년(고종 5)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에도 존속한 47개 서원 중의 하나이다. 1968년 12월 사적 제166호에 지정되고, 2011년 7월에 정읍무성서원(井邑武城書院)으로 이름이 바뀌었으며, 2019년 7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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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오년 박보규(朴甫奎) 간찰(簡札) 2 고문서-서간통고류-서간 朴甫奎 광주 민종기 (재)한국학호남진흥원 병오년에 박보규(朴甫奎)가 형에게 보낸 간찰 병오년 9월 16일에 박보규(朴甫奎)가 형에게 보낸 간찰로, 자신을 아우라고 하였다. 부모를 모시고 지내는 형의 안부를 물었고, 자신은 별다른 일 없이 그대로 잘 지내고 있다고 하였다. 형이 지난달에 부탁한 작은 도끼 하나를 아직도 보내드리지 못하고 있는 것은 자신이 관심이 없어서가 아니라 어쩌다보니 그렇게 되었다고 용서를 구하고, 다음 달 3~4일 사이에는 꼭 부쳐드리겠다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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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9년 박재빈(朴載彬) 준호구(準戶口) 고문서-증빙류-호적 康津縣監 朴載彬 康津縣監 <着押> 帖子印, 周挾字改印, □…□(적색, 정방형, 6), □…□(적색, 직방형,12.3×5.8) 광주 민종기 (재)한국학호남진흥원 1879년에 康津縣監이 幼學 朴載彬(51세)에게 발급한 準戶口. 1879년에 康津縣監이 幼學 朴載彬(51세)에게 발급한 準戶口. *父 學生 千益 祖 學生 碓俊 曾祖 學生 師正 外祖 學生 金龍郁 *주소: 古郡內面 朴東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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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2년 박이충(朴以忠) 준호구(準戶口) 고문서-증빙류-호적 康津縣監 朴以忠 康津縣監 <着押> 帖子印, 周挾字改印, □…□(적색, 정방형, 6) 광주 민종기 (재)한국학호남진흥원 1882년에 康津縣監이 鰥夫 幼學 朴以忠(54세)에게 발급한 準戶口. 1882년에 康津縣監이 鰥夫 幼學 朴以忠(54세)에게 발급한 準戶口. *父 學生 信益 祖 學生 碓俊 曾祖 學生 師正 外祖 學生 金子雲 *주소: 古郡內面 朴東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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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봉_앞면)光州日谷盧監察宅 侍座下 入納潭陽山陰洞留 戚下生 謹拜上候書(피봉_뒷면)庚申三月二日 付便, 謹.(簡紙)謹再拜上候書向於舍弟便上書, 伏想入 燭矣시리이다. 伏未審春氣漸和,侍中氣體候連享萬安이시며 令胤安侍玉抱懋課, 大小諸節亦得均康하신잇가 倂伏慕區區無任下誠之至. 伏聞 戚丈主今月初旬間에作東酉蒲坪之行次하옵신단니 留屯峙로 若爲行次之作路신則 戚下生今年留連處山陰洞에 暫時枉駕하옵셔시기를 千萬伏望이로쇼이다. 戚下生이 伏悚有伏白之事이옵기에 玆以伏告하오니恕燭하옵셔 俾副微忱하옵쇼셔. 戚下生 眠食無恙에伏幸. 而今初六日은 舍弟在萬身死之日初回, 故로 痛割悲悽이옵고 初五日去松山而七八兩日間에야 來于山陰洞하것나이다. 其間에 若有 行次之駕신則 伏拜치못하올ᄭᅡ 伏慮하옵나이다. 恕燭하옵쇼셔. 餘在日間伏拜, 謹不備上候書.庚申三月二日, 戚下生 宋在讚 上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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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22년 김계현(金啓鉉) 준호구(準戶口) 고문서-증빙류-호적 和順縣監 金啓鉉 和順縣監 <着押> 周挾無改印, □…□(적색, 정방형, 6) 광주 민종기 (재)한국학호남진흥원 HIKS_Z999_99_A00786_001 1822년 호주 김계현의 요청으로 화순현에서 동년의 호적대장에서 해당 내용을 등서하여 발급해 준 준호구 1822년(순조 22) 호주 김계현의 요청으로 화순현에서 동년(同年)의 호적대장을 토대로 작성하여 발급해 준 등본 성격의 준호구이다. 김계현의 거주지는 화순현(和順縣) 동면(東面) 제11 물찬내마을[水冷川里] 제6통 1호이다. 직역은 유학(幼學)이고 올해 나이는 63세 경진생(庚辰生)이며, 본관은 광산(光山)이다. 김계현의 사조(四祖)는 아버지 학생 일해(日海), 할아버지 학생 석삼(錫三), 증조(曾祖) 학생 자광(自光), 외조(外祖) 학생 박인삼(朴仁森) 본관은 밀양(密陽)이다. 김계현의 아내 이씨(李氏)는 연령 63세 경진생(庚辰生)이며, 본적은 전주(全州)이다. 이씨의 사조는 아버지 학생 만영(萬榮), 할아버지 학생 우춘(遇春), 증조 진사(進士) 욱(旭), 외조 학생 김대백(金大白) 본관은 의성(義城)이다. 가족으로 어머니 박씨(朴氏)는 연령 82세 신유생(辛酉生)이고, 아들 동학(東學)은 개명(改名)하여 재우(在宇)이고 나이는 25세 무오생(戊午生)이며, 며느리 김씨(金氏)는 연령 25세 무오생이다. 소유하고 있는 여종 악춘(惡春)은 나이 21세 임술생(壬戌生)이다. 문서에는 화순 현감(和順縣監)의 관인(官印)과 주협무개인(周挾無改印) 및 현감의 서압(署押)이 찍혀있으며, 1819년 호적과 대조 확인을 마쳤다는 '기묘호구상준인(己卯戶口相凖印)'이 기재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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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년 송재찬(宋在讚) 서간(書簡) 고문서-서간통고류-서간 宋在讚 盧鍾龍 광주 민종기 (재)한국학호남진흥원 1920년 3월 2일에 척하생 송재찬이 노종룡에게 담양 산음동에 방문해 주기를 요청한 내용의 서간. 1920년 3월 2일에 척하생(戚下生) 송재찬(宋在讚)이 노종룡(盧鍾龍, 1856~1940)에게 담양(潭陽) 산음동(山陰洞)에 방문해 주기를 요청한 내용의 서간(書簡)이다. 담양 산음동에 머물고 있는 척하생 노종룡이 지난번에 사제(舍弟) 편에 보낸 편지는 읽어보셨을 것이라는 인사로 편지를 시작하여 봄기운이 점차 퍼지는 이때에 어르신 모시고 지내는 상대의 안부를 묻고 아드님은 함께 공부 잘 하고 있는지, 여러 분들도 모두 강녕한지 물었다. 듣자하니 이달 초순간에 척장(戚丈)께서 동유(東酉) 포평(蒲坪)에 행차 하신다는데 유둔치(留屯峙)로 길을 정해 오신다면 자신이 금년에도 연속해서 머물고 있는 산음동에 잠시 왕림해주시기를 간절히 바란다고 했다. 자신이 말씀드릴 사안이 있어 그러하다며 양해하시고 꼭 오시기를 바란다고 했다. 자신은 지내는 데는 문제없지만 이달 초6일이 자신의 동생 재만(在萬)의 첫 기일(忌日)이라고 하며, 때문에 5일에는 송산(松山)에 가고, 7~8일 사이에야 산음동으로 오니 그 사이에 오시게 되면 뵙지 못할 염려가 있음을 양해해 달라고 하며 편지를 마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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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5년 이종택(李鍾宅) 서간(書簡) 고문서-서간통고류-서간 李鍾宅 盧鍾龍 광주 민종기 (재)한국학호남진흥원 1935년 6월 18일, 이종택이 노종룡에게 현와 고광선 문집 간행중에 자신의 소회를 전한 서간. 1935년 6월 18일, 봉산정사(鳳山精) 간소(刊所)에서 소제(小弟) 이종택(李鍾宅)이 노종룡(盧鍾龍)에게 현와(弦窩) 고광선(高光善)의 문집 간행에 참여하면서 자신의 소회를 전한 편지이다. 자신이 벽지(僻地)에서 소해(蘇海) 노종룡 노형(老兄)이 현사(賢仕)라는 소문을 들었다는 것, 자신은 예(禮)만 있지, 재물은 없다는 것, 다행히 중년(中年)에 담대헌(澹對軒)에서 뵙고 잠깐 의범(懿範)을 대하였을 뿐이라는 것, 금년 봄에 또 봉산정사에사 덕음(德音)에 대해 들었다는 것, 매번 암자에서 당신의 자가(自家)를 만나 기거하심을 묻지만 혹은 상세하고 혹은 대략적이어서 진면목을 얻을 수 없었다는 등의 상대방을 간절히 궁금해 하는 인사로 편지를 시작했다. 주요내용은 자신이 문고(文稿)를 기록하는 역을 받았지만 재주와 식견이 적어 여러 달 동안 한 일이 없이 쌀을 축내었을 뿐이라는 것, 돌아간다고 말하는 상황에서 한스러운 것은 서석(瑞石)을 만나지 못한 것이라며 있는 곳을 알고자 한다고 했다. 노형(老兄)에게 종이 한 장의 편지가 없을 수는 없기에 이렇게 편지한다며 죄를 따지지 말아 주기를 바란다고 인사했다. 마지막에는 서석(瑞石)과 함께 더욱 한 층 높아지기를 바란다는 인사로 편지를 가름했다. 편지 봉투의 발신자 정보는 보라색 잉크를 사용하여 찍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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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1년 기종섭(奇鍾燮) 서간(書簡) 고문서-서간통고류-서간 奇鍾燮 盧軫永 광주 민종기 (재)한국학호남진흥원 1931년 12월 6일에 제 기종섭이 노진영에게 장성 토지의 소작문제로 보낸 서간. 1931년 12월 6일에 제(弟) 기종섭(奇鍾燮)이 노진영(盧軫永)에게 장성(長城) 토지의 소작(小作)문제로 보낸 서간(書簡)이다. 겨울 들어서 소식을 가끔 자신의 족속인 운도(雲度)에게 대략 들었다고 말하며 요즈음 형과 가족들의 안부를 물었다. 자신은 노인(老人)께서 그럭저럭 평안하시며, 자신 집이 종기(腫氣) 때문에 몇 십일간 자리에 붙어 있다고 했다. 대단히 염려할 것은 아니지만 고통이 적지 않다고 했다. 다만 어떤 일이 있어 부득이 염치 불구하고 간청한다며 귀하의 면(面)에 살고 있는 오룡리(五龍里)의 김순좌(金舜佐)에게 귀하의 땅을 경작할 수 있게 해 주기를 청하였다. 그 이유는 자신과 김순좌가 서로 땅을 교환하여 경작하면서 각 토지에 대한 권리를 주장하고 있었는데 김순좌가 소작하던 땅을 지난 겨울에 빼앗겼다며 그것은 곧 자신의 토지가 빼앗김을 당한 것과 같기 때문에 김순좌가 농사를 지을 수 있도록 형이 소유한 장성면(長城面) 삼태구(三台區)에 있는 토지 4~5두락을 김순좌가 소작할 수 있도록 명의를 변경해 달라고 요청하였다. 그리고 서로 친하게 지내는 사이에도 처음에는 이 상황을 발설하지 않고 싶었는데 지금은 부득이 하여 말씀 드린다며 형이 다른 곳에 말하지 않아 주기를 청했다. 세로 괘선이 있는 규격지 3장을 이용하여 한문으로 작성하였다. 병중에 있어 간략히 쓴다고 인사하고 편지를 마쳤다. 발신자 기종섭은 담양 수북 대방리에 살았다. 기종섭의 족속(族屬)이 되는 기운도(奇雲度, 1882~1949)의 본관은 행주(幸州), 자(字)는 공룡(公龍), 호(號)는 소석(小石)이다. 아내는 죽산안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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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봉_앞면)光州郡 本村面 日谷里盧軫永 氏(피봉_뒷면)潭陽 水北 大舫里奇鍾燮(簡紙)(제1장)冬來寒喧, 頃頃槩聆於鄙族雲度矣,旋已多時. 更伏問,兄體承歡萬裕, 眷內吉迪, 仰用溸禱, 日夕動止. 弟老人粗安, 但身家以腫氣, 箕旬貼席.雖非大段念慮, 而其爲苦痛, 則不少矣. 第有勢, 不得已冒廉仰恳者, 貴面內五龍里金舜佐與弟交換田土耕作, 盖非各自所有借(제2장)人權利, 而金舜佐小作今冬見奪, 則弟之小作, 亦將次第移去矣.兄之所有長城南面三台區土地四五斗落間小作移錄於舜佐, 千萬切仰. 此非舜佐之所請, 亦非舜佐之私情, 直接弟之耕作所關故耳. 弟今舜佐交換小作九斗落則畢竟見奪, 事勢良貝.(제3장)兄須軫念, 勿以等閒聽過, 期於必施, 若何若何. 相親之地, 初不欲發說矣. 今不得已仰瀆, 此意 兄或垂諒耶? 病中草草. 不備禮.辛未十二月六日, 弟 奇鍾燮 拜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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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봉_앞면)光州 日谷里盧 蘇海 先生 經座下(피봉_뒷면)光州郡 西倉面 鳳山精舍弦窩高先生遺稿刊所(簡紙)僻在塵境, 聞蘇海老兄之賢, 於人者最大二事. 白首封章, 辭甚憤潡, 知有團令不知有已.緇衣好賢, 這甚懇到, 知有禮而不知有財, 此豈易事耶? 求之於古, 實尠其儔,願享而未之得心帶紆鬱. 幸而中年獲拜於澹對軒, 乍對懿範而已. 今春又承於鳳山舍畧聞德音而已. 時日不爲饒待, 遽爾分張, 無乃緣薄之致歟. 每逢省菴君之自家, 而回必問起居, 或詳或畧未得眞面, 聖人所謂慮是遠而歎如之何弦. 玆文稿謂承■(校)役, 而但才短識涉數月間空索, 鳳山米人謂我,何可悚悚不幾似好. 告歸所恨者, 端石不見也. 或請知處不得尋訪也. 於老兄不可無一紙, 故玆敢替伸不罪否.瞻仰昊天, 曷惠其■〔寧〕, 此則人人同情, 奈何.惟祝 難老增慶, 與瑞石更高一層耳. 餘不備上.乙亥六月十八日, 小弟 李鍾宅 拜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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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9년 노진영(盧軫永) 간찰별지(簡札別紙)_우편물수령증(郵便物受領證) 고문서-증빙류-영수증 1939 盧軫永 安秉鉉 광주 민종기 (재)한국학호남진흥원 HIKS_Z999_99_A00880_001 1939년 5월 15일, 노진영이 안병현으로부터 받은 소포의 우편물 수령증. 1939년 5월 15일, 광주(光州) 대정전(大正町)에 사는 노진영이 서울의 안병현(安秉鉉)으로부터 받은 소포의 우편물 수령증이다. 수령은 1건이며, 우편료는 14전(錢)이다. 영수증의 발행장소는 광주 대정정에 있는 '우편국소/우편취급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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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봉_앞면)全南 光州府 大正町 一一二番地盧軫永 氏 必親鑒書留(피봉_뒷면)京城府 內需町 七0,ノ七七安秉鉉(簡紙)1.阻違洽滿月餘에 未修一字候音하니 非徒日怠慢이라 依托子姪於 尊座受敎之地에 誠意滅矣요 道禮無矣라. 如是懶散之踪이 安敢望受 賜於當世之 君子乎, 難以措辞發明也.謹惟淸和貴體候度不以公務致勞하고 寶覃面面吉慶가.區區禱祝이 不能食息少弛라. 生은 省候依昔하고 外無大警하니 遠念之澤으로 압니다. 鄙孫地燮은勿論, 指導하심을 바다 日日登校함을 認識하나 素無敎導凡節에 極爲愧赦이나 然而從今無庚者은 貴座의 敎授하심을 바다 他口에魚燮成龍을 不待詹尹知之 而預切欣感萬萬耳. 餘惟祝貴體萬祉 而更■(預)以私自顒祝者은 特加垂念於鄙之穉孫ᄒᆞ시와 答之敎之耳.2.去今一週日前, 出脚他方, 再昨乘暮歸巢於光州蓬戶, 則 惠電來墜産案, 卒未得解■(語)語意中, 且郵卒累來索引云, 翌日果然投一緘書索引, 忙手披讀, 乃是吾 仁兄惠我, 而德音者也.滿紙提喩如弟愚頑足以想到於君子之復,萬一而廢一曰, 世上事運也之敎, 非好非好之辞耶.兄之中間立場, 神勞身苦, 弟是詳解, 而弟之當事, 朔望心熱腦煎, 兄亦諒燭矣.但於吾 仁兄, 自不勝未安, 千萬千萬.示中例条三回分, 旣爲消費也. 無足更論, 而二回分亦活動中消費之物, 各爲出資云, 還爲未安未安, 都是由我嫌也. 不是爲 兄咎也. 且兄之難顔面於某方者大矣. 玆以還呈, 査領傳致, 如何如何. 弟當晋 軒謝禮, 人事之當然, 而事3.有掣肘, 姑未遂素, 而限三四介月內, 期於晋軒修人事於吾 仁兄與某方計耳. 恕燭如何如何. 惠示 ■■■絶對責任云事, 聞之自不勝舞之蹈之. 然 兄之過去奪鬪勞力, 若是其未安無他, 而更以何廉恥, 敢望於吾 仁兄哉.然世上事, 先爲失敗, 後日成功之源也. 若吾 兄以育英之本位, 更以收容, 則■■■■(私幸何極)去番反還物, 臨時保管■■(自料)耳. 周周諒燭, 企仰企仰. 寒喧姑閣, 而惟仰問者,吾兄萬齡, ■…■趁爲遂洗完企耶. 以是裕.五月十五日, 弟 盧軫永 二拜.非但成事之幸也, 鄙家擧門之大運也. 則 諒此殘門之情勢如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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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2년 박병해(朴炳海) 서간(書簡) 고문서-서간통고류-서간 朴炳海 盧軫永 광주 민종기 (재)한국학호남진흥원 1942년 5월 20일, 박병해가 노진영에게 아버지 상에 위문해 준데 대한 감사를 전한 서간. 1942년 5월 20일, 박병해(朴炳海)가 노진영(盧軫永)에게 아버지 상에 위문해 준데 대한 감사를 전한 서간이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시간이 흘러 상일(祥日)에 이른 상황을 전하고 이때 위문해 주신데 대하여 감사를 전했다. 여기에서 언급한 상은 소상(小祥, 돌아간 지 만 1년 기일) 혹은 대상(大祥, 돌아간지 만 2년 기일)으로 보인다. 발신자 박병해의 거주지는 화순군 도암면 원천리(源泉里)이다. 본관은 밀양(密陽), 충신 증승지, 증호조참판 박지수(朴枝樹)와 효자 주부(主簿) 박천주(朴天柱)가 11대조와 12대조이다. 7대조는 첨지중추부사를 지낸 박필운(朴必運)이요, 통정대부(通政大夫) 박준각(朴準珏)의 손자이다. 1918년에 그의 생전 거주지인 원천리 1구에 세워진 '사인박병해행의송덕비(士人朴炳海行義頌德碑)'에 의하면 그는 훌륭한 명문의 후손으로 남에게 은혜 베풀기를 좋아했고, 1916년에 많은 돈을 내놓아 마을을 돕고, 1918년에도 돈을 내놓아 100호를 도왔기에 마일이 모두 칭찬하여 인인(仁人)이라 칭찬했다고 했다. 송덕비는 남평(南平) 문제보(文濟普)가 글을 짓고 광산(光山) 이철호(李喆鎬)가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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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형분류 :
서간통고류

兄의팬지를拜讀하고그동안修謝가遲延되여서大端未安함니다弟는其間例의胸膈痛으로連日出入을全廢하엿다가今日에사兄의照會件으로某方面에알아보앗는대그內容이米穀을時方滿洲로輸出시키는것은別利益이無하다함니다近日滿洲政府에서米穀輸入統制必要上政府에서一手買点하기ᄯᅢ문이고米穀을北支로輸出하는대는多大한利益이잇스나左記의條件이俱備한사람의ᄭᅴ輸出을許可하기됨니다一. 天津이나北京等地在駐領事官이証明하여준該當地米穀商으로領事館証明을添付하여朝鮮總督府에提願하는者二. 右의証明이有한米商으로부터幾萬石送付하여달나는注文을得한人士의ᄭᅴ이른한條件下에朝鮮總督府는비로소許可할可能性이有한대그럿다고반다시許可하여주는것도안이라님다目下上海居留民團及漢口居留民團側으로 同証明을添付하여朝鮮總督府에提願한것이數百萬石이나마다不許可되고잇슴니다何故오하면自今으로支那人衆이全部朝鮮米食을所願하는대萬一無制限으로그양放任하면朝鮮米는出回前부터라도支那人의ᄭᅴ全部預賣或은買点되고말것이다그려면內鮮食粮問題가大打擊을바들憂慮가잇다는意味에서農商務省에서는絶對禁輸方針을樹立한것을外務省에서我國在外居留民을엇덧케하는야하는問題에서右와如한最小範圍의條件ᄭᅡ으로兩省間에協定된것인대朝鮮總督府에서는同兩省의根本方針에基하야政務를遂行할ᄲᅮᆫ外라다시朝鮮內實地現況에參照하여多小加減은할수잇지만은大方針의協定的軌道는到底히違越할수업다는것인대時方北支ᄭᅡ지輸送하면每石에四円五十錢假量의純利가잇스나將來난乃至十餘円假量ᄭᅡ지도 純利가잇겟다함니다然則大兄게서萬一生覺이게신다면天津이나北京이나兩處에領事館証明을가진當地商人과連絡하여幾萬石注文이兄의名義로오면本府交涉은弟가하여드리겟슴니다그리아시고工作하여보시오北京으로가시던지或은坐而周旋하던지그것이必要하게되엿슴니다그것이ᄯᅩ한잇다고本府에서何等의考慮도업시얼는하여주는것도안이올시다滿洲輸出은自今作罷하시오이른것은다商工政策上當筋의秘話오니絶對嚴秘하시오萬一그른周旋을할수잇거든곳回示하여주시오餘惟祝侍體大安不備上五月二十四日 弟安秉鉉上盧軫永 仁兄【피봉】〈前面〉全南光州府大正町一一二盧軫永 仁兄〈後面〉京城府內需町七0 七七安秉鉉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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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편저자)
유형 :
고문서
유형분류 :
서간통고류

1942년 박태경(朴泰慶) 서간(書簡) 고문서-서간통고류-서간 朴泰慶 盧軫永 광주 민종기 (재)한국학호남진흥원 1942년 음력 1월 17일, 제 박태경이 노진영에게 소작문제로 보낸 서간. 1942년 음력 1월 17일, 제(弟) 박태경(朴泰慶)이 노진영(盧軫永)에게 소작(小作)문제로 보낸 서간이다. 새해를 맞아 상대와 그 가족들의 안부를 묻는 인사로 편지를 시작했다. 주요내용은 전년도에 광주를 떠나 고향으로 이거할 때 자신이 짓던 소작 3두락은 동정 상 계속 받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며, 이달 임오년을 만나 역시 잊지 않고 있다며 올해도 소작을 전과 똑같이 받을 수 있는지 대답해 주기를 바란다는 내용이다. 발신자 박태경이 있는 발신지 주소는 진도군 조도면(鳥島面) 창유리(昌柳里)의 정기복(鄭基福)씨 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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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편저자)
유형 :
고문서
유형분류 :
증빙류

1819년 장철봉(張哲奉) 호구단자(戶口單子) 고문서-증빙류-호적 張哲奉 康津縣監 <着名> 광주 민종기 (재)한국학호남진흥원 1819년(순조19) 장철봉(張哲奉)이 자기 호(戶)의 인적사항을 기록하여 강진현(康津縣)에 제출한 호구단자 1819년(순조19) 고금도(古今島) 진리(鎭里)에 거주하는 장철봉(張哲奉)이 자기 호(戶)의 현황을 기록하여 강진현에 제출한 호구단자이다. 장철봉은 현재 46세의 홀아비이고 본관은 인동(仁同)이다. 이어서 장철봉의 사조(四祖)가 기재되어 있는데, 아버지는 한량(閑良) 장대운(張大運)으로 올해 70세이고, 조부는 절충장군 장무량(張武良), 증조부는 장홍(張弘), 외조부는 가선대부 추상련(秋尙連)으로 본관은 나주(羅州)이다. 모시고 사는 어머니는 '봉모(奉母)'로 표시하였는데 성은 추씨(秋氏)이고 70세이다. 딸 아지(阿只)는 올해 13세이다. 장철봉이 홀아비이기 때문에 처(妻)에 대한 정보는 기재되어 있지 않다. 말행(末行)의 '무인년(1818) 9월'은 기묘식년의 호적대장을 만들기 위해 전년도에 작성하여 제출한 시기를 가리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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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편저자)
유형 :
고문서
유형분류 :
명문문기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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