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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태원에게 답함 신미년(1931) 答李台元 辛未 편지를 받고 모 어른의 일이 과연 헛되이 전해진 것이 아님을 알았으니 이 도대체 어찌 된 일입니까? 일이 기왕의 일인지라 비록 말하고 싶지 않지만, 세교(世敎)에 해가 되는 것에 대해서는 근심이 종남산과 같습니다. 그런데 그대가 미봉하고 장찬(粧撰)87)하여 왜곡되게 한 가지 의리로 만들었으니 이것은 또 어찌된 일입니까? 한훤당(寒暄堂 김굉필)이 매우 노해서 여종을 질책한 것과, 우암(尤庵 송시열)이 복어를 먹으려 한 것은 비록 소소한 일이지만 정암[靜庵 조광조(趙光祖)]과 소윤[少尹 윤원형(尹元衡)]이 오히려 간쟁하고 저지하여 오늘에 이르도록 미담으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고인은 바른 도리로 스승을 섬기는 것이 이와 같았거늘, 그대는 이미 충간하지 못하고 스승을 큰 실수에 빠뜨렸습니다. 또 이어서 그 잘못을 대 순임금의 "알리지 않고 장가간 일"88)에 견주었으니 천하에 어찌 이와 같은 성품과 이치가 있겠습니까? 생각건대 또한 모 어르신은 평소에 이(理)가 기(氣)를 따라서 품수를 달리한다고 말했기 때문에 발용(發用)에도 편전(偏全)이 있는 것입니까? 이와 같이 일을 강론하는 것은 실로 밝지 못한 것입니다. 承書知某丈事果非虛傳, 此何事此何事? 事係旣往, 雖不欲說, 世敎之害, 憂齊終南.左右乃彌縫粧撰, 曲成一副當義理, 此又何也? 寒暄之盛怒責婢, 尤庵之欲食河豚, 細事也.靜庵少尹猶諫而止之, 至今傳爲美談.古人之以道事師如此, 左右旣不能忠諫而陷師於大失.又從而擬之於大舜之不告而娶, 天下安有似此性理? 抑亦某丈雅言理隨氣而異稟, 故發用有便全者耶? 如此講理, 實所未曉. 장찬(粧撰) 허물을 드러나지 않게 감추어 꾸미는 일이다. 알리지……일 "순이 어버이에게 알리지 않고 장가를 든 것은 후사가 없게 될까 염려해서였다. 그래서 군자는 그것을 어버이에게 알린 것과 같다고 여기는 것이다.〔舜不告而娶 爲無後也 君子以爲猶告也〕" 《맹자》 〈이루 상(離婁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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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영규에게 답함 答權寧奎 초연하고 깨끗함은 한 마리 봉황이 하늘을 날듯해야 하고, 일을 시행함에 열심히 전진하는 것은 천리마가 길에서 달리듯 해야 합니다. 또 뜻을 쓰는 일이 전일하고 미더운 것은 암탉이 알을 품듯 해야 하고, 선(善)을 행할 때 안정되고 굳건함은 늙은 용이 연못에 깊이 숨듯 해야 합니다. 超俗脫灑, 若孤鳳之翔天, 施功邁往, 若名騏之在途.用志專孚,若雌鷄之抱卵, 處善安固若老龍之藏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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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부기록류

지출장부(支出帳簿) 고문서-치부기록류-치부 정읍 성주이씨 이유원 후손가 성주이씨 이정순 실제 비용 등의 사용 내역과 추가 비용 등을 기록한 지출장부 실제 비용 등의 사용 내역과 추가 비용 등을 기록한 지출장부이다. 실용(實用)이라 한 실제 비용의 구체적인 사용 내역을 밝히고 이어서 양합(兩合)이라 한 것으로 보아 실제 비용 외에 또 하나의 사용처가 있을 것으로 보이나 그 기록은 없다. 실제로 사용한 비용은 4백4십9냥6전이며 그 내역은 차비(車費), 오반(午飯), 삼신[麻履] 등의 비용이다. 가입(加入)이라 하여 추가로 들어간 비용도 기록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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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5년 이상린(李相麟) 화조(禾租) 보관증 고문서-증빙류-증서 大正四年(乙卯)舊二月二十二日 李相麟 李龍淳 大正四年(乙卯)舊二月二十二日 李相麟 李龍淳 李相麟 (印), 李毅淳 (印) 정읍 성주이씨 이유원 후손가 성주이씨 이정순 1915년 2월 22일에 이상린이 이용순에게 발급한 화조(禾租) 보관증 1915년 2월 22일에 이상린이 이용순에게 발급한 화조(禾租) 보관증이다. 보관하는 화조의 수량과 지급규정 및 당사자 등이 기재된 문서이다. 보관하는 화조는 2석이다. 화조는 소작인 등의 조세로 받은 곡물을 말한다. 이 화조를 보관하는 사실이 확실함을 다짐하고, 어느 때든지 이 증서를 휴대하고서 도착하는 즉시 지체 하지 않고서 내주기로 약정하였다. 보관주는 이상린이며, 아보인은 이의순이다. 아보인은 거간 혹은 중개인을 가리킨다. 보관을 위탁한 사람은 이용순이다. 보관주와 아보인은 이름 아래에 날인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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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간통고류

사주단자(四柱單子) 고문서-서간통고류-혼서 정읍 성주이씨 이유원 후손가 성주이씨 이정순 사주단자 모(某)의 사주단자(四柱單子)이다. 사주는 갑인년(1914년) 정월 29일 묘시(卯時)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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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2년 문조(門租) 수입기(收入記) 고문서-증빙류-증서 壬戌十月二十三日 壬戌十月二十三日 정읍 성주이씨 이유원 후손가 성주이씨 이정순 HIKS_Z037_01_A00998_001 1922년 10월 23일에 네 명에게 받은 계조 11두와 다섯 동네에서 거둔 조세를 기록한 문조 수입기 1922년 10월 23일에 작성된 문조 수입기로 네 명의 계조(計租) 11두(斗)와 시천(詩川)‧운곡(雲谷)‧석동(石洞)‧장동(長洞)‧가천(可川) 등 다섯 동네에서 거둔 조세도 함께 기록되었다. 종천(鍾千)은 개명된 이름이 아울러 적혀 있다. 문조(門租)는 문중의 도조(賭租)를 가리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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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조(門租) 수입기(收入記) 1 고문서-증빙류-증서 정읍 성주이씨 이유원 후손가 성주이씨 이정순 HIKS_Z037_01_A00998_001 모년에 39명의 조세 수입 2섬[석] 19두에 대한 문조 수입기 모년에 문조 수입기로 39명의 조세 수입 2섬[石] 19두(斗)이다. 45명의 명단 아래 섬‧두‧정(丁)의 단위로 기재되어 있는데 그 중 8명의 명단 아래에는 없다. 총 39명의 수입이고, 시천(詩川)‧운곡(雲谷)‧석동(石洞)‧장동(長洞)‧가천(可川) 등 다섯 동네에서 받은 기록도 보인다. 문조(門租)는 문중의 도조를 가리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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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사에게 보내려던 편지 【1925년 12월 20일】 擬與檢事書 乙丑十二月二十日 초 10일에 답한 것에서 이미 내 뜻을 다 말했다. 그 중에서 '무함을 변론하고 유훈을 지켜 선사에게 돌아가 뵙는다.[辨誣守訓 歸拜先師]'는 여덟 글자에서 내 뜻을 알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또다시 부른 것은 무엇 때문인가? 간옹께서 인허를 금지한 문고는 처음부터 남의 영업물건이 되는 것은 온당하지 않으니, 방해의 유무를 논하는 것은 온당하지 않다. 무함을 변론하고 유훈을 지키는 것은 제자의 직분으로 좋은 일이라고는 할 수 있어도 나쁜 일이라고는 할 수 없는 것이니, 법률을 침범했는지 여부를 말하는 것은 더욱 온당하지 않다. 그런데도 강제로 처단한다면 검사가 밝지 못 한 것이며 공정하지 못한 것이다. 화해를 허락하면 스승이 없게 되고, 반대로 고소하면 그와 똑같은 사람이 된다. 그런데도 구차하게 벗어날 것을 구한다면 나 김택술은 인륜과 도의를 어그러뜨린 사람이 될 것이다. 初十日, 所答已盡矣, 而就中辨誣守訓歸拜先師八字, 可見吾志, 更呼何也? 蓋艮翁禁認之稿, 初不當爲人營業物, 則妨害有無, 不當論也. 辨誣守訓, 弟子之職, 而可臧不可否者, 則犯律與否, 尤不當言也. 猶且强制處斷, 則檢事之不明不公也. 許和則無師也, 反訴則同浴也. 猶且苟且求免, 則金澤述之悖倫悖義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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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구잠 【경오년(1930)】 愼口箴 【庚午】 나이 마흔에 미움 받으면 四十見惡,옛 성인이 버려 내쳤네 先聖所棄.어찌하여 미움 받는가 見惡以何,언행에 허물이 많아서네. 言行尤悔.뉘우칠 행동은 오래 아프고 悔固可疚,잘못된 말은 부끄러움을 더하네. 尤益見愧.옥에 흠은 지워 없애기 어렵고 圭玷難磨,나쁜 말은 달리는 말보다 빠르며, 駟馳曷及?하물며 이 중요한 기관에는 矧玆樞機,앙화와 재난이 함께 모인다네. 禍難交集.이제 장차 중년인데 今將中身,아직도 입조심이 안 되니, 尙不愼口,그 결말에 생각이 미치면 念及其終,가슴 아리고 머리 지끈거리네. 痛心疾首.병마개처럼 입을 지키라 守口如甁,회옹 주희의 잠언223)이고, 晦翁規箴,입 없는 박처럼 無口之匏,이정승은 침묵하였네.224) 李相默沈.나 이제 이를 본받아 我其法此,어제를 거울삼아 내일을 경계하니 懲前毖後,조심하고 조심하여 愼旃愼旃,큰 허물을 면하리라. 庶免大咎. 四十見惡, 先聖所棄。 見惡以何, 言行尤悔。 悔固可疚, 尤益見愧。 圭玷難磨, 駟馳曷及? 矧玆樞機, 禍難交集。 今將中身, 尙不愼口, 念及其終, 痛心疾首。 守口如甁, 晦翁規箴, 無口之匏, 李相默沈。 我其法此, 懲前毖後, 愼旃愼旃, 庶免大咎。 회옹 주희(晦翁朱熹)의 잠언 주희는 〈경재잠(敬齋箴)〉에서 "입 지키기를 병마개처럼하고, 의욕 막기를 성벽처럼 하라[守口如甁, 防意如城。]"라고 하였다.《晦庵集 卷85》 입 없는……침묵하였네 북송의 명재상 이항(李沆, 947~1004)이 매우 과묵하여 사람들이 '입 없는 박[無口匏]'이라 하였다. 《宋史·李沆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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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학서 전 병자년(1936) 趙學瑞傳【丙子】 조학서(趙學瑞)의 이름은 순식(順植)으로 그 형은 일찍 죽고 아들 하나를 남겼다. 학서는 형수를 섬기고 아버지를 여읜 조카를 무육(撫育)하였다. 가정의 크고 작은 일은 돈 한 푼이나 한 척의 비단이라도 반드시 형수에게 명을 받은 뒤에 사용하였으며, 그 아내는 형님 모시기를 시모 모시듯 하여 아주 작은 것도 마음대로 쓰지 않았다. 형수는 성질이 사나워 모시기 어려웠는데, 학서와 아내는 더욱 공손하였다. 일찍 일어나고 밤늦게 쉬면서 손발이 부릅뜨도록 다만 조카를 교육함에 정성을 쏟았으며 조카가 다 커도 오히려 집안일을 꾸려가지 않게 하였으니 20년을 하루같이 그렇게 하였다. 분가를 생각하지 않고 홀로 집안을 꾸리다가 40살이 된 이후에 비로소 살림을 나눴는데, 또한 종가에서 재물을 받지 않았기에 생활이 곤란하였지만 얼굴에 그러한 기색을 나타내지 않았다.다음과 같이 논한다. "학서는 종자(宗子)만 생각하였지 자신은 생각하지 않았으니, 어째서 그런가. 종자는 부조(父祖)의 적통이니, 종자를 높이는 것은 결국 부조를 높이는 것이다. 그러므로 종자는 뿌리이며 나는 가지이다. 뿌리를 북돋으면 가지가 무성한 것은 당연한 이치이다. 학서는 이런 이치를 잘 알았구나. 나는 그 후손이 번창할 것을 확신한다. 아! 지금 사람은 지자(支子)가 종자를 업신여기고 서자가 적자를 해치니, 이는 스스로 그 뿌리를 손상시켜서 그 망함을 재촉하는 것이다. 아! 슬플 따름이다. 趙學瑞, 名順植, 其兄早亡, 有一子.學瑞奉丘嫂撫孤姪, 家政巨細, 以至一錢尺帛, 必稟命於嫂, 其妻事姒如姑, 毫不敢自由.嫂更亢厲難事, 學瑞偕其妻滋益恭.早作暮息, 胼胝手足, 惟敎育其姪是誠, 以至長大, 猶不使幹蠱, 二十年如一日.不思分家而自營, 年四十後始各産, 亦無資於宗家, 以是生艱而無幾微色.論曰: "學瑞知有宗子而不知有身者, 何也.宗子者, 父祖之嫡傳, 尊宗子, 所以尊父祖也.故宗子根也, 吾身支也.根培則支達, 理也.學瑞其深知此理者歟.吾知其後必昌.噫, 今之人之以支凌宗, 以庶賊嫡者, 是自戕其根而促其亡, 可哀也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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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이 끝났기에 읊음 春後吟 천태산112) 절경 유람했던 일 떠올렸더니 回憶天台絶勝遊봄을 보낸 남은 흥취가 풍류로 이어진다 送春餘興續風流버들가지는 베를 짠 듯 푸르름이 산에 펼쳐졌고 柳條如織靑舖山부들 잎은 칼날을 뽑은 듯 초록이 물가에 꽂혀있네 蒲葉抽刀綠揷洲다만 취했다 깼다 할 수 있는 날 삼만 일 뿐인데 只可醉醒三萬日치세와 혼란은 변화하여 천 년 동안 계속 되었네 無常治亂一千秋좋은 시절의 행락을 서로 저버리지 마소서 芳辰行樂莫相負어찌해서 세월은 조금도 머물러주지 않는가 其柰年華不少留 回憶天台絶勝遊,送春餘興續風流.柳條如織靑舖山,蒲葉抽刀綠揷洲.只可醉醒三萬日,無常治亂一千秋.芳辰行樂莫相負,其柰年華不少留. 천태산 절강성(浙江省) 천태현(天台縣)에 있는 산이다. 도교에서 남악(南嶽)으로 삼고, 불교 천태종(天台宗)의 발원지라고 알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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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답에서 田間 농가의 은거지113)가 바로 우리 집이니 田家薖軸是吾家어린 대나무와 새로 핀 매화에 하나의 비낀 길 稚竹新梅一逕斜꿈에선들 어찌 명예와 잇속에 이른 적이 있었던가 夢想何曾到名利고황114)에도 거리낄 게 없어 놀과 안개에 푹 빠졌었지 膏肓無妨病烟霞깊은 계곡에서 흐르는 물소리 조용히 듣고 靜聽絶澗淙淙水평야에 한없이 펴진 모래톱을 굽어보네 俯看平野歷歷沙듣자니 바다는 바람과 비의 심한 것도 받는다 하는데 聞道海徼風雨惡도도한 하늘 물결에 누가 그치게 할지 모르겠구나 不知誰息滔天波 田家薖軸是吾家,稚竹新梅一逕斜.夢想何曾到名利?膏肓無妨病烟霞.靜聽絶澗淙淙水,俯看平野歷歷沙.聞道海徼風雨惡,不知誰息滔天波. 은거지 원문 '과축(薖軸)'은 은자(隱者)가 한가로이 소요하며 지내는 것을 말한다. 《詩經 衛風 考槃》 고황 뱃속 깊은 곳에 있는 장기(臟器)로, 병마가 그곳으로 들어가면 치료할 수 없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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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암 선생의 묘를 찾아뵙고 임술년(1922) ○이하 동일하다. 拜尤菴先生墓【壬戌○下同】 만세토록 종왕양이와 공필189)을 생각하여 萬世尊攘思孔筆평생 마음의 법을 주자로 말미암았지 一生心法自朱門오늘날 천하는 비린내 나는 풍우로 가득하니 腥風羶雨今天下어찌 선생께서 구천에서 일어날 수 있으랴 安得先生起九原아름다운 물 밝은 산은 이 가운데 모여들고 麗水明山萃此中가성190)의 형세 어찌 그리도 무성한지 佳城氣勢何葱葱응봉 가득 비췻빛에 푸른 시내 활발하니 鷹峯長翠靑川活풍류와 운치가 천년 만년 무궁하도다 風韻千秋也不窮 萬世尊攘思孔筆,一生心法自朱門.腥風羶雨今天下,安得先生起九原.麗水明山萃此中,佳城氣勢何葱葱?鷹峯長翠靑川活,風韻千秋也不窮. 공필 원문 '공필(孔筆)'은 《춘추》를 지어 역사상의 인물들을 포폄(褒貶)해서 대의명분을 밝게 세운 공자의 사필(史筆)을 말한다. 가성 무덤을 성에 비유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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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양동 유람 遊華陽洞 화양동의 승경은 예로부터 소식 들어 華陽勝槩昔聞之이날 이곳에 오르니 오랜 숙원 이루었구나 此日登臨償夙期푸른 나무 붉은 꽃이 비단처럼 피었고 樹綠花紅開錦繡맑은 연못 하얀 바위 유리처럼 비춘다 潭淸石白映琉璃산 깊어 마치 선령이 있는 것 같고 山深如有仙靈在경치 빼어나 어찌 세속인들 알까 境絶何能俗子知우리들 경치만 보고 즐길 뿐만 아니라 非直吾生耽玩賞뛰어난 발차취 찾아 새 시에 부치리라 也搜奇蹟付新詩 華陽勝槩昔聞之,此日登臨償夙期.樹綠花紅開錦繡,潭淸石白映琉璃.山深如有仙靈在,境絶何能俗子知?非直吾生耽玩賞,也搜奇蹟付新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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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기창에게 보냄 정묘년(1927) 與宋基滄 丁卯 그대는 이갈이 하던 동자시절에 신학문을 버리고 머리를 기르며 성현을 공부하겠다던 분이 아니셨던가요? 또 성동(成童 15세) 시절에는 먼저 유자(儒者)의 옷을 입어서 여러 유생들의 본보기가 되지 않았습니까? 이것만으로도 이미 어려운 일이거늘, 눈 쌓인 한겨울에 울부짖으며 먹지 않고 홀로 백리를 걸어 스승의 환난에 달려와 함께 죽겠다고 맹세한 사람이 아니었던가? 이런 사람을 어디에서 다시 만날 수 있을 것인가? 그리하여 나는 "인재가 사라진 시절에 하늘이 이 사람을 낸 것은 뜻이 있어서이지 않겠는가?"라고 생각했습니다. 또 "영주산(瀛洲山) 아래 우덕리(優德里) 송씨 가문에서 위인이 나왔다"라고 생각했는데, 그 일이 크게 어긋나 그대처럼 청고하고 독실한 자질로 갑자기 스스로 암흑의 땅에 빠지게 될 줄을 어찌 알았겠습니까? 바야흐로 긴 밤 책을 송독할 때는 금 쟁반에 옥 젓가락 소리가 들렸고, 종이를 펴서 문사를 토해낼 때는 바람이 세차게 일고 물이 용솟음치는 형세여서 장차 천하의 문장을 들어 홀로 독점할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어찌하여 수개월동안 먼지더미에 경전을 묶어 보관하고, 여름 내내 파리 떼 나는 소굴에서 썩은 나무와 썩은 담장이 되어버렸는가요? 참으로 사람은 지혜롭기가 쉽지 않고, 사람을 안다는 것 또한 쉽지 않습니다. 생각건대 내가 여러 제자들과 교학 상장할 때에 그대를 믿을 만하다고 여겨 이름을 기창(基滄)이라 하였고, 자(字)를 이경(以敬)이라 한 것은 대개 깊은 뜻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그와 같이 되었으니, 이는 또한 운기(運氣)이지 인력(人力)이 아닐 것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내 분수가 박복한 소치일 터이니, 마음의 근심이 은하수처럼 유장합니다. 《시경》에 이르길 "사람들의 생각이 많은 것은 각각 까닭이 있다."77) 라고 했는데, 이제 그대가 이 학문을 버리고 다른 학문을 도모하는 뜻이 어디에 있는가요? 그대가 부랑한 것을 쫓고 잡란한 것을 일삼는다 해도 결코 최악의 지경까지 이르진 않을 것이라는 것을 알기에 염려하지는 않겠습니다. 그대가 신학문을 한다고 해도 풍부(馮婦)가 천고의 웃음거리가 되었다78)는 사실은 잘 알 것입니다. 만일 또 그대가 학업을 그만두고 집안일을 다스린다고 하면 어버이의 바람은 학업에 있지 결코 집안일에 있지 않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내가 일찍이 그대의 시를 보았는데 "어느 때에 통쾌하게 삼백주(三百州)가 회복되는 것을 볼까?"라는 구절이 있었습니다. 아마도 풍진 세상에 발을 내딛어 크게 바라는 바를 추구하고자 하는데, 그에 앞서 "초당의 봄잠을 충족하는 것이 아닌가?"79)라는 생각도 해봅니다. 그러나 비록 천지를 뒤흔드는 공업이라 할지라도 반드시 학문의 본지가 있은 연후에 볼만한 것이 있게 됨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하여 태공(太公)이 목야(牧野)를 청명하게 한 것도 "경의(敬義)를 따르면 길하다.80)"라는 서책에 근본했고, 제갈공명(諸葛孔明)의 천하삼분 계책도 "영정(寧靜) 담박(澹泊)"의 훈계에서 비롯되었습니다. 또 주자(朱子)는 "진정한 영웅은 전전긍긍하는 신중한 자세에서 만들어진다."라고 한 것도 미더운 말입니다. 비록 그러하나 이는 재략(才略)으로 할 수 있는 것으로 말했으니, 그대와 나의 경우는 본래 품수 받은 자질이 다만 경전에 힘쓰고 심신을 선하게 하여 윤리강상(倫理綱常)을 부축하고 도학(道學)을 밝힐 수 있는 것뿐입니다. 비록 그렇다 할지라도 만약 이 학문의 어려운 관문을 통과하고 나서면 세도(世道)에 공이 있는 것이 흔천동지(掀天動地)의 공업에 뒤지지 않을 것입니다. 이러한 진리를 그대가 어찌 모르는가요? 아! 그대의 뜻이 과연 여기(학문)에 있는 것인가? 저기(공업)에 있는 것인가? 나는 알 수 없습니다. 다만 삼년 동안 스승과 제자의 우의에 절실한 아픔의 관계가 있기 때문에 이 폐간에서 나오는 말을 개진하는 것이니, 그대가 번연히 길을 바꾸어 더욱 용감히 나아간다면 정말 다행이겠습니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이 편지를 다시 돌려보내십시오. 나는 천금의 옥벽을 헤진 빗자루와 동일하게 보는 처지에 던져버리기를 원치 않습니다. 장차 편지를 안고 스스로 슬퍼하면서 그대를 강호에서 잊을 것입니다. 汝在齠齔, 非棄新學而長髮讀聖賢書者乎? 又在成童, 非先著儒服爲諸生效法者乎? 此已是難事, 而隆冬積雪, 號泣不食, 隻行百里, 赴師難而誓同死者, 何處更覯? 吾以爲當此人材寥寥乏日天生此人, 其或有意乎? 又以爲瀛洲山下優德里, 宋氏之門, 有偉人者出乎, 孰料其事有大謬? 以若淸高篤實之姿, 遽自陷於窣窣沓沓之地, 方其永夜誦讀, 金盤玉筯之聲, 展紙吐辭, 風迅水湧之勢也.若將擧天下之文而獨擅之, 胡爲乎累月塵堆, 束閣經傳, 長夏蠅窩, 朽木糞土之爲乎? 人固未易知, 知人亦未易也.念吾相從諸子, 以汝爲可侍, 名以基滄, 字以以敬, 蓋有深意存也.今乃若此, 是亦運氣而非人力歟, 抑亦賤子分薄之致歟.心之憂矣, 河漢其長.詩云人之善懷, 亦各有行, 今汝之舍此而他圖者, 志果安在? 使汝欲遂浮浪事雜亂, 吾知其汙不至此, 不須慮也.使汝欲更理新學, 馮婦之偉千古所笑, 汝所知也.欲輟業而幹蠱, 則親之所欲, 在此而不在彼也.吾嘗見汝詩, 有何時快復三百州之句矣.無乃出脚風塵, 求所大欲, 先足此草堂春睡也乎.蓋雖掀天揭地事業, 必有學問爲之本地, 然後有可觀者.故太公之牧野淸明, 本於敬義吉從之書, 孔明之三分籌策, 本於寧靜澹泊之戒.朱子所謂眞正大英, 雄自戰兢臨履做來者, 其信矣.夫雖然, 此以才略可爲者言, 若汝與我者, 合下稟質, 只可劬經傳淑身心, 扶倫綱明道學而已.雖然若能於此, 透關出場, 其有功世道, 曾不下掀揭事業.此箇義諦, 汝豈未知? 噫! 汝之志, 果在此乎在彼乎? 吾不得以知之.但三年師生之誼, 有切痛痒之關, 陳此瀝肝之言, 如得幡然改轍, 一倍勇進則幸矣.不然此紙還以見歸.吾不欲以千之璧, 投諸視同弊箒之地.將抱此自傷, 而伊人則可忘江湖也. 사람들의……있다 《시경》 〈재치(載馳)〉에 "여자가 그리움 많은 것은 또한 각기 도리가 있거늘.〔女子善懷, 亦各有行.〕"에서 나온 말이다. 정현(鄭玄)과 주자(朱子)가 '선(善)'을 '다(多)'로 풀이하였다. 풍부(馮婦)가……되었다 "진(晉)나라 풍부(馮婦)가 호랑이를 잘 잡았는데, 마침내 좋은 선비가 되었다. 그러나 호랑이를 보자 팔을 걷어붙이고 수레에서 내리며 절제할 바를 알지 못했다. 《맹자》 〈진심(盡心)〉 초당의……아닌가 제갈량이 일찍이 융중(隆中)에 은거하고 있을 때 읊은 시에 "초당에 봄잠이 넉넉하니, 창밖의 해는 더디기만 하구나. 큰 꿈을 누가 먼저 깰까? 평소 내 스스로 아노라.[草堂春睡足, 窓外日遲遲.大夢誰先覺, 平生我自知.]"에서 의미를 취했다. 경의(敬義)를……길하다 "군자는 경으로써 안의 마음을 곧게 하고, 의로써 밖의 일을 바르게 하니, 이렇게 경과 의가 확립되어서 그 덕이 외롭지 않다.〔君子敬以直內 義以方外 敬義立而德不孤〕" 《주역》 〈곤괘(坤卦) 문언(文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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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남룡에게 답함 계유년(1933) 答朴南龍 癸酉 요즘 젊은이들이 신풍조에 취해서 관상(冠裳 유학자의 의상)을 훼손하는 자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일찍이 유학을 업으로 삼아 여전히 옛 법식에 있는 자들조차 모두 전일의 스승과 어른을 잊고 지내는 것이 강호의 물고기와 같습니다. 그런데 오직 그대만큼은 학문을 그만두고 돌아간 지 한 해가 지났는데도 멀리서 편지를 부쳐 나의 생사를 물어주니, 적조(積阻 오랫동안 격조)함을 위로해주는 기쁨일 뿐 아니라 그대가 이 학문에 종사하여 잊지 않고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습니다. 편지에서 "가난으로 인해 높은 누각에 서책을 묶어두었다."라는 말은 무엇 때문입니까? 아마도 뜻이 견고하지 못하고 힘씀이 부지런하지 못해서 약간의 세풍에 구속됨을 면치 못한 것이 아닌가요? 시험 삼아 옛날의 현인, 군자를 보건데 누가 빈궁(貧窮) 가운데로부터 성취를 이루지 않았던가요? 안자(顔子)는 늘 궁핍했지만 덕행이 가장 높았고, 증자(曾子)는 밭의 김을 매었지만 끝내 성인의 학문을 계승했습니다. 계로(季路 자로)는 짐을 이고 지고 날랐지만 백세의 사표가 되었고, 호미질을 하면서도 경전을 차고 다녔던 예관(倪寬)은 한(漢)나라의 경상이 되었고, 주경야독하였던 동소남(董邵南)은94) 이름을 드날렸습니다. 또 세간의 부호 자제들을 보십시오. 누가 즐겨 머리를 숙이고 학문을 구하는 자가 있던가요? 마음으로는 주색을 연연해하고 서책을 도외시하면서 다툼으로 남을 능멸하고 도박으로 어버이를 저버립니다. 그렇기 때문에 편안히 거처하면 금수에 가까워짐을 순임금 때부터 근심하였고, 완악함과 사치로 종족을 전복시킨다고 유공(柳公 유형원?)은 경계를 두었습니다. 이는 가난이 도리어 바탕이 되어 학문을 이루고 부(富)는 학문에 방해됨이 이와 같은 바, 그대는 어찌 스스로를 위로하지 않는 것입니까? 더욱 힘쓰십시오. 近日年少, 醉新風而毁冠裳者, 不須言, 其嘗業文而尙在舊式者, 擧忘前日師長, 若江湖之魚.惟左右輟歸經年, 乃能寄遠書問死生, 非但喜積阻之慰, 因此而知左右之於此學.有事而不忘矣, 乃有緣於傷哉束書高閣之喩何也? 無乃知尙未堅, 力尙未勤, 不免些爲世風所囿耶? 試觀古之賢人君子, 孰不從貧窮中做成? 顔子屢空, 德行最崇, 曾氏芸田, 卒繼聖傳.季路負戴, 師表百世, 鉏禾帶經, 兒爲漢卿, 暮讀朝■, 董生顯名.又觀世間當豪子弟.孰肯屈首而向學者? 心戀酒色, ■視簡冊, 鬪狼陵人, 博賭遺親.逸居近獸, 憂自舜后, 頑奢覆宗, 戒存柳公.是則貧之反資而成學, 富之適足以妨學, 有如此者, 左右何不以此自慰而益孜孜也. 동소남(董召南) 당나라 때 안풍(安豐) 사람으로 은사(隱士)인데 한유(韓愈)가 〈동생행(董生行)〉이라는 노래를 지어 동소남이 주경야독(晝耕夜讀)하며 부모에게 효도하고 처자식을 사랑하는 내용을 읊었다. 《小學 善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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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제칠 기석에게 답함 무인년(1933) 答姜齊七 璣錫 戊寅 중양일(重陽日)에 보낸 편지를 받고 "예전의 질병이 나은 후에 얼굴에 종기가 생겼고, 종기가 그치자 다시 설사의 괴로움이 심하다."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니 그대의 금년 신운이 곤액하십니다. 비록 그렇지만 질병이 닥치는 것은 성현도 면치 못한 바였으니 하물며 뭇사람들이겠습니까? 끝내 우려할 것이 없다면 그것만으로 이미 다행입니다. 병에 걸린 사람과 옆에서 지켜보는 사람이 그것으로 위로하고 굳이 뒤늦게 문제 삼을 일은 없겠습니다. 다만 한 가지 말씀드릴 것은 현재 부모님을 모시고 있는 그대로서는 공자께서 말씀하신 "부모는 오직 질병만을 근심하신다."95)라는 훈계를 마땅히 두렵게 생각하여 음식, 희로애락, 과로 등 모든 질병을 초래할 수 있는 것들을 더욱 경계하고 조심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하여 질병이 나로 말미암아 생겨나 어버이께 근심을 끼치는 일이 없도록 오로지 힘써야 할 것입니다. 더 나아가 말하자면 배우는 자는 마땅히 질병이 오면 두려워하고 반성하여 "하늘이 나에게 병을 가한 것은 내 평상시의 처신에 착하지 못한 죄를 다스리는 것이다."라고 생각하여 스스로 깊이 후회하고 질책하여 타일 수신(修身)의 자료로 삼아야 합니다. 그러니 조금이라도 성내거나 원망하는 마음을 두어서는 안 됩니다. 이 두 가지로 안팎을 번갈아 닦아 나아가야지 성현 또한 질병을 면치 못한다는 말로 자신의 마음을 누그려 뜨려서는 안 될 것입니다. 그렇게 한다면 이는 무엇을 하던지 공부처가 아님이 없는 것입니다. 섭생하여 쇠약한 몸을 좋아지게 단련하는 여가에 생각이 여기까지 미쳤는지 모르겠군요. 奉重陽日書, 知昔疾療後, 有面腫, 腫已又苦於痢甚矣.高明今年身運之厄也.雖然疾病之來, 聖賢所不免, 况衆人乎? 終而無慮, 則斯已幸矣.當者與傍觀, 只當以此慰之, 不必追提.但有一焉, 現在侍下者, 當惕念孔子父母唯憂之訓, 其於居處飮食喜怒逸勞, 凡可以致疾者, 一倍戒愼.勿使疾自我作以貽親憂者, 是所可勉.又進而言之, 則學者當於疾病時, 恐懼省念曰, 天之加我以病者, 是治我平日行已未善之罪也, 深自悔訟以爲他日改修之姿.不可少有慍怒慝尤之心者, 尤所當勉.以此二者, 內外交修, 不宜槩以聖賢亦不免疾病之語自寬, 則是乃撫適而非下工處也.未知調將之暇, 亦嘗念及於此否. 부모는……하신다. "맹무백(孟武伯)이 효(孝)를 물으니, 공자께서 '[父母唯其疾之憂]'라고 대답하였다." 《논어》〈위정(爲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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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인 최씨 전 병자년(1936) 孺人崔氏傳【丙子】 유인 전주 최씨(全州崔氏)는 부안 김상락(金相樂)의 아내이다. 30살에 남편을 여의고 아들 딸 한 명씩을 두었는데 살림이 곤궁하여 살아가기 힘들었다. 비록 남편의 두 형이 몸소 구휼하여 주고 또한 개가할 생각을 방해하지 않았지만, 유인은 정조를 지키기로 맹세하고 삯바느질을 하며 근근이 생활을 꾸려갔다. 아들이 학질을 앓아 거의 죽게 되었는데도 약을 마련할 방도가 없자 울면서 "이 아들이 죽으면 우리 남편은 영원히 죽게 된다."라 하고는, 손가락을 찢어 피를 흘려 넣으며 국에 타서 마시게 하니 이윽고 조금씩 소생하였다.온갖 고생을 다 형용할 수 없으니, 부귀한 집에서 자라나 평소 좋은 옷 입고 맛난 음식을 먹다가 갑자기 굶주리고 추위에 시달림을 타인은 감당하기 어려운데 유인은 다만 줄곧 참고 견디었다. 딸이 장성하여 시집가게 되자 사위를 따라 김제(金堤) 야촌(野村)에 거주하면서 자못 편안하게 세월을 보냈다. 그러나 사위가 또다시 곤궁하게 되자 아들을 이끌고 고부(古阜) 현암리(玄巖里)로 이사하였다.아들이 장성하여 아내를 두었으나 곤궁함은 이전과 같아서 만년에 창동(滄東)의 옛 집으로 돌아왔으나 또한 편안한 날이 없어서 의식을 마련하느라 분주하여 늙도록 쉬지 못하였다. 갑술년(1934년) 10월 21일 길을 가다다 타지에서 죽으니 관가에서 묻어주었는데, 한 달이 지나서야 아들과 조카가 비로소 알게 되어 선영의 곁에 반장(反葬)하였다.오호라! 천도는 선한 이를 복 주고 악한 이에게 재앙을 주니 유인은 만 번 죽어도 다행함이 없을 상황에 처하여 한 조각 빙설 같은 절개를 잡았으니, 정자의 '주려 죽은 것은 대단히 하찮은 일이요 절개를 잃은 것은 대단히 크다.'184)는 뜻을 들은 것이 아니겠는가. 그 정절과 그 선행이 이보다 큼이 없을 것인데 평생 고생스럽게 살아 옷을 너덜너덜 기워 입고 배가 푹 꺼져 도로에서 넘어져 죽게 됨에 이르렀으니, 하늘이 재앙을 내림이 어찌하여 이처럼 가혹한가. 삼가 고인의 말에 의혹이 없지 않을 수 없다. 내가 유인에게는 남편의 재종질이 되는데 맨 손으로 사는 처치라 살아서 조금도 도움이 되지 못하였고 죽어도 아무 쓸모없이 슬퍼하니 또한 부끄러울 따름이다. 孺人全州崔氏, 扶安金相樂妻, 年三十夫亡, 有一子一女, 窮無以生, 雖有夫之二兄, 躬不恤未及, 且有不妨改適意, 孺人矢心守貞, 傭針線僅活.子病長瘧幾危, 無以爲藥, 泣曰: "此子亡, 吾夫永死矣." 裂指出血, 和羹飮之, 因漸甦復.凡百辛酸, 不可俱狀.生長富豪, 素善衣食, 而猝困飢寒, 人所不堪, 只得一直忍耐已.而女長嫁人, 從婿居金堤野村, 頗得安過, 壻又窮敗, 則挈子移居古阜玄巖里.子壯有室, 然困復如前, 晩年還于滄東舊居, 亦無有寧日, 奔走衣食, 老不休息.甲戌十月二十一日, 旅死路中, 自官瘞之, 越一月子姪始知, 而返葬先塋之側.嗚呼, 天道福善禍滛, 孺人處萬死無幸之地, 執一片氷雪之節, 其非與聞於程先生'餓死極小失節極大'之義者乎.其貞其善也, 莫斯爲大, 而一生困苦, 鶉結枵腹, 以至顚死道路, 天之降禍, 又何若是酷哉.竊不能無惑於古人之言也.余於孺人爲夫之再從姪也, 而赤手爲生, 生不能少爲之地, 死爲此無益之悲, 亦可愧也已. 주려……크다 《소학》 〈가언(嘉言)〉에서 어떤 사람이 정자(程子)에게 외로운 과부가 빈궁하여 의탁할 곳이 없으면 재가해도 되느냐고 묻자 정자가 대답하기를 "다만 후대에 추위에 떨며 굶주려 주는 것을 두려워하기 때문에 이런 말이 있다. 그러나 굶주려 죽는 것은 대단히 하찮은 일이요, 절개를 잃은 것은 대단히 크다."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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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정호 찬흥에게 답함 정묘년(1927) 答趙正豪 燦興 丁卯 맹자는 "사람의 즐거움에 어진 부형이 계시는 것이다."라고 했고, 여형공(呂滎公)은71) "집안에 어진 부형이 없으니 성취한자가 드물다."라고 했습니다. 이제 정호의 아버지는 몸소 농사를 지으며 그대를 놓아 유학케 해주니 그 어진 아버지 됨이 누가 그보다 더하겠습니까? 비록 그러하나 옛날의 호걸이 반드시 다 어진 아버지가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예컨대 중궁(仲弓)의 경우 지극히 천악(賤惡)한 아버지였음에도 오히려 십철(十哲)의 으뜸으로 손꼽혔으니,72) 다른 것은 더 말할 것이 없습니다. 나는 이 때문에 말합니다. '어진 아버지가 없이 자신의 몸을 성취하지 못한다면 할 말이 있겠지만, 어진 아버지가 계신데도 그 몸을 성취하지 못한다면 그 죄가 막심합니다.' 그렇다면 어찌해야 좋을까요? 반드시 도를 밝히고 덕을 세워서 부모가 남기신 몸을 착하게 하고 후세에 이름을 날려 부모를 드러나게 한 연후에 내 일을 마쳤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니 정호는 의당 깊이 생각하고 마음을 다해야 할 것입니다. 孟子曰人樂有賢父兄, 呂滎公曰內無賢父兄, 而有成者少矣.今正豪之嚴君, 躬幹稼穡, 而縱正豪遊學, 其爲賢父, 孰加於此? 雖然古之豪傑, 未必皆有賢父.如仲弓則至有賤惡之父, 而尙得爲十哲之首科, 其他更何論? 余故曰無賢父而不成其身者, 尙可說, 有賢父而不成其身者, 其罪莫甚焉, 然則如之何其可也? 必也明道立德, 用淑遺體, 揚名後世以顯父母, 然後吾事已了.正豪乎宜深思而盡心焉. 여형공(呂滎公) 여희철(呂希哲)로 그의 부모가 모든 일은 반드시 예법을 따르도록 엄격하게 가르쳤다. 중궁(仲弓)……꼽혔으니 공자가 문하의 제자들을 두고 "덕행에는 안연, 민자건, 염백우, 중궁이고, 언어에는 재아, 자공이고, 정사에는 염유, 계로이고, 문학에는 자유, 자하이다.[德行, 顔淵ㆍ閔子騫ㆍ冉伯牛ㆍ仲弓, 言語, 宰我ㆍ子貢, 政事, 冉有ㆍ季路, 文學, 子游ㆍ子夏.]"라고 했는데, 이를 공문사과(孔門四科)라 하고, 열거한 열 명의 제자를 공문십철(孔門十哲)이라고 한다. 《논어》 〈선진(先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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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태에게 보냄 병인년(1926) 寄炯泰 丙寅 이번 국상(國喪)136)의 애통함은 앞 시대의 큰 근심에 비할 게 아니다. 이 황제 이후 더 이상 우리의 임금이 없기 때문이다. 무릇 국상이 나면 선비와 서민의 처와 아들까지 또한 모두 상복을 입는 것이 국법이다. 게다가 지금은 나라가 이미 망하고 임금도 없어져 이천만 동포가 너무나 애통하고 망극하여, 눈물을 비처럼 흘리고 우레처럼 울부짖으며 남녀학교의 어린 학생들과 노예ㆍ백정ㆍ배우ㆍ기생에 이르기까지 하루아침에 흰옷을 입지 않은 이가 없음에랴! 너는 비록 관례는 안했지만 성동(成童 15세)은 이미 지났으니 시시덕거리거나 함부로 행동해서는 안 된다. 또 연한 검정색 댕기137)를 써서 슬픔을 표현하도록 하여라. 너의 모친은 순수한 흰 명주를 사용하고 네 형수와 누이는 비록 흰 것을 쓸 수 없다면 연한 옥색은 반드시 해야 한다. 今番國恤之痛, 非比前世大慽.以此帝後, 更無吾君故也.凡有國哀, 士庶之妻與子, 亦皆有服 國典也.況今國旣破君又亡, 二千萬衆, 至痛罔極, 揮淚成雨, 號哭如雷, 至於男女學校幼年生徒 皁隷屠賤, 倡優淫妓, 莫不一朝縞素者乎! 汝雖未冠, 成童已過, 不宜嬉笑恣放.又用淺黑唐岐 以表哀情.汝慈則純用縞素, 汝嫂汝妹, 雖不能用素, 淺玉色, 則決不可已也. 이번 국상(國喪) 순종황제의 국상을 말한다. 1926년 음 3월 14일(양 4월 25일) 오전 6시 15분 창덕궁 대조전에서 53세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댕기 원문 '당기(唐岐)'는 댕기를 뜻하는 말로 보인다. 댕기는 한자어로 '당지(唐只)'이나 '당기(唐岐)'는 머리를 땋을 때의 '갈래[岐]'라는 말이 들어가 있어 댕기일 가능성이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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