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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6년 이유원(李有源) 가선대부이조참판겸동지의금부사(嘉善大夫吏曹參判兼同知義禁府事) 추증교지(追贈敎旨) 고문서-교령류-고신 光緖十二年 十二月 日 李有源 光緖十二年 十二月 日 高宗 李有源 서울특별시 종로구 施命之寶 정읍 성주이씨 이유원 후손가 성주이씨 이정순 HIKS_Z037_01_A00914_001 1886년 12월에 학생 이유원을 가선대부이조참판겸동지의금부사에 추증한다는 일종의 사령장 1886년 12월에 학생 이유원을 가선대부이조참판겸동지의금부사에 추증한다는 일종의 사령장이다. 이유원은 이기두의 부친이다. 이기두는 직역이 유학(幼學)이었다가 이때 아마도 납속(納粟) 등의 방법으로 관직을 취득한 것으로 보이는데, 처음의 절충장군행용양위부호군에서 가선대부동지중추부사까지 올랐다. 이때 부친의 직역은 학생이었다가 가선대부이조참판겸동지의금부사로 증직되었다. 학생은 유학(幼學)이 죽어서 사용하는 호칭이다. 가선대부는 문관의 품계로서 종2품의 하계(下階)이다. 이조참판은 이조에 속한 종2품의 벼슬이며, 의금부에 소속된 종2품의 관직인 동지의금부사직을 겸하였다. 가선대부 앞의 증(贈) 자는 죽은 사람에게 관직을 내릴 때 붙이는 글자이다. 끝에는 날짜를 기재하였는데, 직인을 찍은 부분을 종이를 붙여 가렸다. 광서는 중국 청나라 광서제의 연호이며, 이는 갑오개혁 이전인 1894년까지 사용되었다. 직인은 연호년 위에다 찍었는데, 흐려서 글자를 식별하기 어렵다. 날짜 왼쪽에는 증직의 근거를 기재하였는데, 아들인 이기두의 관품이 가선대부동지중추부사이며 그의 고(考)는 법전에 의거하여 추증한다는 것이다. 법전은 『경국대전』 이전(吏典)의 추증조에서 '종친 및 문무관으로 실직 2품 이상은 3대를 추증한다.'는 법규를 가리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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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택에게 답함 무진년(1928) 答李鐘澤 ○戊辰 우리 도의 바름은 하늘의 명으로부터 나와 성인의 가르침으로 세워졌고, 순선(純善)한 본성으로부터 도출되어 영명한 마음에 갖추어져 있습니다. 그것을 몸으로 실천하면 몸이 편안해지고 그것을 세상에 사용하면 세상이 다스려지니, 잠시도 떠날 수 없는 것입니다. 이단 학설의 바르지 못함은 하늘이 미워하고 성인이 배척한 것입니다. 타고난 본성에서 찾아보면 본디 없는 것이고 허령한 마음에서 체험해보면 불안한 것이니, 몸에는 죽음과 치욕의 재앙이 있게 하고 세상은 혼란과 멸망의 지경으로 들어가게 되니, 잠시라도 가까이 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만약 타고난 성품의 덕성을 실추시키고 본래부터 밝은 심지(心知)를 어둡게 하는 자가 아니라면 정정당당(亭亭當當)하고 직상직하(直上直下)86)하며 평탄정대하고 진선진미하고 온전한 우리 도를 버리고, 덜컹덜컹 하고 이랬다저랬다 하며 구불구불 뒤섞여 험악하고 위태로운 저들의 술책을 어찌 따르겠습니까? 불교의 게송에 "해가 싸늘해질 수도 있고 달이 뜨거워질 수도 있으나, 뭇 마귀가 감히 우리의 진결(眞訣)을 깨뜨릴 수 없다."87)라고 하였습니다. 저들이 비록 이교도라 할지라도 오히려 진실로 지키는 것이 있었기 때문에 마귀한테 꺾여 빼앗기지 않는 것이 이와 같습니다. 만약 우리 성인의 정도(正道)를 가지고서도 도리어 부정한 학설에 의해 무너지고 혼란스럽게 된다면 어찌 도리어 불교도의 비웃음거리가 되지 않겠습니까? 그대가 힘쓰기 바랍니다. 비록 그렇지만 이것은 모두 이단과 사설 가운데 알기 쉬운 것으로 말한 것입니다. 이치에 가까워 진리를 어지럽히는 것은 우리 도의 담장 안에도 간혹 있습니다. 이것은 경전을 궁구하고 이치를 연구하는 공부가 아니면 결단코 살필 수가 없습니다. 또한 그대는 헤아리기 바랍니다. 吾道之正, 出自上天之命, 而立於聖人之敎, 循其純善之性, 而具於靈明之心, 行之於身而身安, 用之於世而世治, 不可須更而離者也.異說之邪, 上天之所惡, 而聖人之所斥也.求之於性分而本無, 驗之於心靈而不安, 身有戮辱之禍, 世入亂亡之境, 不可晷刻而近者也.茍非墜秉彝之德性, 而昧本明之心知者, 安肯舍吾亭亭當當直上直下坦平正大美善安全之道, 而徇彼轇轇轕轕之東之西崎嶇回互險惡危殆之術哉? 釋子之偈曰: "日可冷, 月可熱, 衆魔不敢壞眞訣." 彼雖異敎, 猶實有所守, 故不被魔障之撓奪如此.若以吾聖人之正道, 還被邪說之壞亂, 豈不反爲釋子所笑乎? 惟高明勉之.雖然, 此皆以異邪之易知者言, 若其近理而亂眞者, 則吾道門墻之內亦或有之.此非竆經研理之功, 定無以察之, 亦惟高明之諒之也. 직상직하(直上直下) 상하가 일관되었다는 뜻이다. 정호(程顥)가 "중은 천하의 큰 근본이니, 천지 사이에 정정당당하고 상하 좌우 어디든 막힘없이 통하는 바른 이치이다. 이를 벗어나면 옳지 못하니, 오직 공경하여 잃음이 없어야 가장 극진하다.〔中者, 天下之大本, 天地之間, 亭亭當當直上直下之正理. 出則不是, 唯敬而無失, 最盡〕"하였다. 《이정유서(二程遺書)》 권11 〈사훈(師訓)〉, 《근사록(近思錄)》 권1 〈도체(道體)〉. 또 《주자어류(朱子語類)》 권95에 주희(朱熹)가 정정당당의 뜻이 무엇이냐는 질문을 받고 "이것은 속어이니, 대개 불편불의 직상직하의 뜻이다.〔此俗語也 蓋不偏不倚直上直下之意也〕"라고 대답한 말이 나온다. 해가……없다 당나라 영가현각대사(永嘉玄覺大師)의 게송 가운데 있는 구절인데, 전우(田愚)도 이를 인용한 적이 있다. 《간재집(艮齋集)전편》 권1 〈여박녀길 세화 ○임인(與朴年吉 世和 ○壬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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伏未審炎霖支離 氣體候連亨萬康 令允安侍均吉 大孝諸節均慶 姑伏溸區區不任斗祝 族弟 劣狀姑依 ??門內 萬無顯警 伏幸伏幸 就白 去六月分 令允以門中事來訪矣 楊州先塋成碑事 果其間完成耶 此處勿頃洞先塋下 租包殖利事 年年存本取利 各人名下分明載在 而其間中間 亂說或聞云 年前族侄敎仁來此 時許給于族弟云 是豈成說耶 孝勿遵信 伏仰事 此處年形豐登云 而貴下亦然耶 能覽後卽爲回示 伏?事 餘?擾不備上候禮庚申 七月 十六日 族弟 李福容 再拜<피봉>富川郡 蘇萊面 茂芝洞 李福容 謹封全南 寶城郡 文德面 可川里 李冕容氏 閤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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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심 황장에게 답함 答小心黃丈 丙寅九月 병인년(1926) 9월"스승을 지키는 도는, 무함한 사람을 성토하는 것이 정도이고 유훈을 지키는 것은 그 다음이다."라고 편지에서 하신 말씀은 당연하신 말입니다. 다만 무함한 사람을 성토하는 일에 있어 우리들은 힘을 다하지 않았다 할 수 없으나 무함한 자들이 죄를 인정하지 않는 이상 세상에 이를 처벌할 국법이 없는 것 또한 어찌할 수가 없으니, 유훈을 지키는 일에 대해 우리가 할 도리를 다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지금 용동의 간행이 유훈을 무시하고 마침내 인가를 내기에 이르렀습니다. 스승을 욕보인 죄에 대해서는 작년 겨울에 진주의 간행을 성토한 글에서 이미 다하여 비록 다시 거론할 일이 없다 하더라도, 유훈을 지키는 사람이 평소에 받은 훈사와 편지 및 선대의 문자에 대해 침묵한 채 맡겨두어서 죄 짓는 데로 똑같이 돌아가서는 안 될 듯하였으므로 이미 동지들과 함께 연서(聯書)하여 인가를 받아 간행하는 속에서 빼주기를 청했으니, 이 일이 타당한지 아닌지는 모르겠습니다. 전일효(田鎰孝)가 오진영과 합의했다는 말은 일찍이 듣지 못했으나 그가 갈라선 것이 의리 때문이 아니고 이익 때문이라면, 다시 이익 때문에 합의했어도 이상할 일이 없습니다. '송의 신학은 할 만하다는 논〔宋之新學可爲之論〕'에 이른바 "치우친 말에서 가린 바를 안다."27)는 것은 오늘날의 낭패이고, 또 이른바 "마음에서 발동하여 일을 해친다."28)는 것은 우리 어르신께서 지적하신 것이니, 어찌 말을 아는 도가 되지 못하겠습니까? 근래에 또 여름 즈음에 호남의 첨좌에게 답한 편지를 얻어 읽어보니 올바른 의리와 확고한 의론이 조목조목 타당하고 글자마다 바꿀 수 없었는데, 중립에 선 자들을 배척하며 율곡을 인용하여 말한 것은 더욱 절실하고 들어맞았으니, 백번 엄숙히 받들어 읽음에 어찌 존경하여 감복하는 마음 이길 수 있겠습니까? 다만 이천의 일을 인용하여 숙질에 대해 논한 것은 아마도 인용하지 않은 것만 못한 것 같은데, 어떻게 생각하실지 모르겠습니다. 閑師之道, 討誣爲正, 守訓爲次, 下喩當矣.但討誣之擧, 吾輩不可謂不盡力, 而誣者不服, 則世無王章, 亦無如之何矣.其於守訓, 不可不盡在我之道也.今龍刊不有遺訓, 竟至出認.其辱師之罪, 昨冬討晉章已盡, 雖無事復擧, 然凡守訓人, 平日所受訓辭書牘, 及先世文字, 恐不可含嘿任他, 而同歸於罪.故已與同志聯書, 請拔於認刊中, 未知此事爲得當否.孝與震合, 未之曾聞.然其離也, 不以義而以利, 則更以利合, 亦無怪矣.宋之新學, 可爲之論, 所謂詖辭, 知其所蔽者, 今日之狠狽, 又所謂發於其心, 害於其事者, 吾丈之斥, 豈不得爲知言之道乎? 近又得夏間, 答湖南僉座書, 讀之, 正義確論, 條條得當, 字字不易, 其斥中立者之引栗翁爲說者, 尤爲切中, 百回莊讀, 曷勝敬服? 但其引伊川事, 以論叔姪者, 恐不如不引, 未知如何. 치우친 말에서 가린 바를 안다 《맹자(孟子)》 〈공손추 상(公孫丑上)〉 제2장의 "무엇을 말을 안다고 합니까? 맹자가 말하기를, 치우친 발에서 가린 바를 알며, 방탕한 말에 빠져 있는 바를 알며, 부정한 말에 괴리된 바를 알며, 도피하는 말에 궁함을 알 수 있다.〔何謂知言? 曰:詖辭, 知其所蔽;淫辭, 知其所陷;邪辭, 知其所離;遁辭, 知其所窮〕"라고 한 것에서 말의 네 가지 병통을 말한다. 마음이 발동하여 일을 해친다 《맹자(孟子)》 〈등문공 하(滕文公下)〉에 그릇된 학설은 "마음에 나타나 일을 해치고, 그 일에 나타나 정치를 해친다.〔作於其心 害於其事 作於其事 害於其政〕"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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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흥에게 답함 정묘년(1927) 答李起興 ○丁卯 보내온 편지를 받들어 읽으니, 모두가 '경력체험(經歷體驗) 진실각고(眞實刻苦)'의 뜻에서 나왔으며, "가난을 이유로 학문을 폐하지 않고 시대가 변천을 이유로 지조를 바꾸지 않아야 한다."는 말씀으로 마쳤습니다. 두 가지 대절(大節)과 여덟 글자로 기초를 세운 제목은 흠송하고 탄복할 뿐만 아니라 해이해진 저를 경계한 것도 실로 많았습니다. 어찌 이미 고도(古道)로 자처하고 또 능히 고도로 남을 흥기하게 하는 자가 아니겠습니까? 저는 이로 인하여 우러러 한 마디 말씀을 올리고자 합니다. 대저 가난함이 극치에 달하여 굶어 죽어 구렁텅이에 나뒹굴 일이 눈앞에 있고 시대의 변화가 험악하여 형장의 이슬로 사라질 일이 뒤에 있어도, 지사(志士)가 죽음을 잊지 않는 것82)과 대장부가 위무(威武)에 지조를 꺾지 않는 것83)을 여기에서 볼 수 있어야 비로소 정말로 학문을 폐하지 않고 지조를 바꾸지 않는다 말할 수 있습니다. 가만히 근래에 고도를 지키는 자를 살펴보면, 처음에는 성대하게 볼만 한 것이 없지 않지만, 광란(狂瀾)으로 흔들고 겁화(劫火)84)로 태우게 되어서는 형벌이나 굶주림의 압박이 다가오기도 전에 이미 젊은 시절 예리하게 나아갔을 때 터득했던 것을 도리어 만년에 도를 깨우칠 나이에 잃어버립니다. 매번 이로 인해 답답하고 애석하며 또한 전전긍긍 저 또한 이러한 폐단이 있을까 두렵습니다. 그대는 약관의 나이로 앞길이 만 리 멀리 펼쳐 있지만, 세상이 언제 맑아질지 모르고 시대의 변화는 예측하기 어렵습니다. 저는 스스로를 반성한 나머지 또한 그대에게 다음과 같은 태도를 바랍니다. 삼군(三軍)도 빼앗을 수 없는 의지85)와 만 마리 소도 되돌리기 어려운 힘을 더욱 떨쳐서 훗날 더욱 굳건하고 씩씩한 효과를 거두고, 종국적으로 한 숨이라도 붙어 있다면 조금도 해이하지 말아서 근래에 고도를 지킨다고 하는 자들로 하여금 부끄러워 죽게 하고 길이 후대에 할 말이 있게 하십시오. 아, 오늘날을 어떠한 때입니까? 우리의 선사이신 공자가 장차 제사를 받을 수 없게 되고 도가 사라지게 되었습니다. 한(漢)나라가 망할 때에는 무향후(武鄉侯 제갈량(諸葛亮))가 있었고 송(宋)나라 망할 때에는 문문산(文文山 문천상(文天祥))이 있었는데, 도가 사라지려는 즈음에 유독 공자를 위해 죽을 자가 없을 수 있겠습니까. 저는 또한 그대가 우뚝하게 몸소 세도를 책임져서 공자를 받드는 우리 유가의 무후와 문산이 되기를 바랍니다. 진실로 그런 사람이라면 제가 비록 노둔할지라도 채찍을 잡고 뒤를 따르겠습니다. 비록 그렇지만 이것이 어찌 벌컥 화를 내어 용기를 팔아서 혈전을 벌이는 것과 같겠습니까. 단지 힘써 일맥을 부지하여 죽음에 이르더라도 변치 않는 것일 뿐이고, 또한 오직 학문을 폐하지 않고 지조를 바꾸지 않기를 보내온 편지에 말씀한 것처럼 할 따름입니다. 더불어 서로 연마하고 서로 면려하기를 바랍니다. 奉讀來書, 無非出於"經歷體驗眞實刻苦"之意, 而終以"不以貧窶廢學, 不以時變易操".二大節立八字著腳之題, 欽尚敬服之餘, 有所警發於頹散者實多.豈非既以古道自處, 而亦能以古道興人者耶? 僕請因此而仰贊一言.夫貧窶之極而溝壑在前, 時變之險而刀鋸在後, 志士之不忘, 丈夫之不屈, 於此乃見, 而始可謂眞不廢, 眞不易矣.竊觀近日之守古道者, 其初非不蔚然可觀, 及夫蕩之以狂潮, 焚之以刼火, 不待鋸壑之迫, 而已把所得於盛年銳進之日者, 反失於晚節聞道之時, 每爲之悶惜, 而亦兢兢然, 恐己之有是也.足下在弱冠之年, 前程之遠若萬里, 河清無期, 時變難測, 區區自省之餘, 亦願足下加奮三軍不奪之志、萬牛難回之力, 管取他日益堅益壯之效, 究竟以一息尚存, 不容少懈, 使近日守者愧死, 而有辭乎永世也.鳴呼, 今日何日? 我孔聖先師, 將不得血食, 而道其亡矣.漢亡有武鄉侯, 宋亡有文文山, 道亡獨可無爲孔聖死者乎? 僕又願足下卓然身任世道, 作孔聖家武侯文山, 誠然者, 僕雖駑, 請執鞭下風也.雖然, 此豈赫怒賈勇, 若血戰然哉? 不過曰力扶一脈, 至死不變, 亦唯曰不廢不易, 如來喩焉已矣.幸與交修而胥勖焉. 지사(志士)가……것 공자(孔子)가 "의지가 굳은 선비는 곤궁하여 자기 시체가 구학에 버려질 것을 잊지 않고, 용맹한 사람은 언제라도 자기 머리를 잃을 것을 잊지 않는다. 志士不忘在溝壑, 勇士不忘喪其元." 하였다. 《맹자(孟子)》 〈등문공 하(滕文公下)〉 대장부가……것 맹자(孟子)가 대장부에 대해 논하면서 "부귀가 마음을 방탕하게 하지 못하고 빈천이 절개를 옮겨 놓지 못하며 위무가 지조를 굽히게 할 수 없으니, 이런 것을 대장부라고 이른다.〔富貴不能淫, 貧賤不能移, 威武不能屈, 此之謂大丈夫〕" 《맹자(孟子)》 〈등문공 하(滕文公下)〉 겁화(劫火) 불가(佛家)의 용어로, 재앙을 뜻한다. 하나의 세계가 끝날 즈음에 겁화가 일어나 온 세상을 다 불태운다고 하는데, 한 무제(漢武帝) 때 곤명지(昆明池) 밑바닥에서 검은 재가 나오자, 인도 승려 축법란(竺法蘭)이 "바로 그것이 겁화를 당한 재[劫灰]"라고 대답하였다. 《고승전(高僧傳)》 권1 〈한락양백마사축법란(漢洛陽白馬寺竺法蘭)〉 삼군도……의지 매우 굳센 의지를 이른다. 《논어(論語)》 〈자한(子罕)〉에 "삼군을 거느리는 장수의 목숨은 빼앗을 수 있지만 비록 필부라 할지라도 그의 뜻은 꺾을 수 없다.〔三軍可奪帥也, 匹夫不可奪志也〕"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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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윤일에게 보냄 정축년(1937) 與吳允一 丁丑 거상(居喪)의 시기에는 다른 생각은 생기지 않고 다만 한 덩어리의 측은한 마음만 있으니, 충양(充養)89) 을 체험함으로써 인을 이루다 쓸 수 없다는 근본을 세우기가 딱 좋고, 인사를 드물게 접하여 마음이 고요하고 기가 깨끗해지니, 경서를 읽으면서 이치를 연구하고 시비를 정밀히 분별함으로써 의를 이루다 다 쓸 수 없다는 근본을 세우기에 딱 좋습니다. 제수를 올리고 곡배(哭拜)하는 것 외엔 다른 일은 없습니다. 그대 같은 경우는 병이 많으니 역시 마땅히 시의적절하게 호흡하고 몸을 문지름으로써 건강하게 오래 살 수 있는 근본을 세워야 합니다. 만약에 "거상하는 지금은 예서(禮書)를 읽을 때이지, 존양성찰과 격물치지를 할 때가 아니다. 슬픔에 몸이 훼손되는 것이 마땅하니 수양을 어찌 감히 하겠는가?"라고 말한다면 이것은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신중하게 거상하는 것은 또한 부모를 사랑하는 방법입니다. 부모를 사랑하는 것은 부모가 남겨준 몸뚱이를 사랑하는 것이니, 부모가 남겨준 몸뚱이를 사랑하는 것은 그것을 보존하는 방법을 생각하는 것이고 그것을 이룰 것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호흡하고 몸을 문질러서 수명을 연장하는 것은 몸을 보호하는 것이고, 인을 함양하고 의를 연구하는 것은 몸을 이루는 것입니다. 몸을 보호하고 몸을 이루면, 그것은 예법에 크게 맞는 것입니다. 그대는 모름지기 이에 따라 공효를 시험해보아야 합니다. 어떻습니까?부친의 상에는 '고자(孤子)'라 호칭하고 모친의 상에는 '애자(哀子)'라 호칭하며 모두 돌아가신 경우에는 '고애자(孤哀子)'라 호칭하니, 승중(承重)90)의 경우도 그러합니다. 이제 그대가 당한 상은 부모님 모두 돌아가신 경우가 아니니, 멀리 몇 년 전에 있었던 조부상을 끌어다가 지금 당한 조모상에 '고애손(孤哀孫)'이라 호칭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이후에 축사(祝辭)와 소장(疏狀)에서도 다만 '애손(哀孫)'이라고만 호칭해야 합니다. 방립(方笠)91)의 끈은 참최의 경우 마(麻, 삼)를 쓰고 자최의 경우 포(布, 베)를 쓰니, 관(冠)과 수질(首絰)과 요질(腰絰)의 끈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居憂之時, 他念不生, 只有一團惻隱之心, 正好體驗充養, 以立仁不可勝用之本; 罕接人事, 心靜氣清, 正好念經研理, 精別是非, 以立義不可勝用之本.饋奠哭拜之外, 無他事.如哀多病, 亦宜以時調息摩體, 以立健壽之本.如曰: "此是讀禮時, 非存省竆格時, 哀毀是其宜, 修養豈敢爲?" 則此殊不然.夫謹居喪, 所以愛親也.愛親, 斯愛親遺矣, 愛親遺, 思所以保之矣, 思所以成之矣.調摩延壽, 保身也; 養研仁義, 成身也.保身成身, 則其爲禮也大矣.哀須依此試功, 如何?父喪稱孤子, 母喪稱哀子, 俱亡稱孤家哀子, 承重亦然.今哀所遭非偕喪, 不宜遠引幾年前祖父喪, 而幷稱孤哀孫於今日祖母喪也.茲後祝辭與疏狀, 只稱哀孫也.方笠纓, 斬衰用麻, 齊衰用布, 觀於冠及首腰絰纓, 可知矣. 충앙(充養) 본성을 확충하여 양성하는 것을 말한다. 승중(承重) 상제(喪祭)나 종묘의 중요한 책임을 할아버지로부터 손자가 전수받았다는 뜻으로, 할아버지의 입장에서는 전중(傳重)이라 하고, 손자의 입장에서는 승중이라고 한다. 방립(方笠) 원래 서울의 아전들이 쓰던 검은색 모자였는데, 조선 중엽 이후 흰색으로 바뀌면서 상을 당한 사람들이 착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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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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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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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부기록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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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빙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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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5 後滄先生文集卷之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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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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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부

서 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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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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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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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재 소장에게 답함 答悅齋蘇丈 甲子九月 갑자년(1924) 9월이전에 논의하는 사람들이 혹 말하기를, "호남이 반드시 다 옳은 것도 아니고 영남이 반드시 다 그른 것도 아니다." 하니, 이것은 대개 영남이 진짜로 서울의 묵인을 받음이 있다고 인정하기 때문인데, 만약 서울의 묵인이 속인 것으로 귀결된다면 영남이 어찌 한결같이 옳을 수 있겠습니까? 송병휘(宋秉徽)가 홍희(洪憙)에게 보낸 편지에 말하기를, "묵인해준다는 허락을 얻으려고 왔으나 묵인해준다는 허락을 얻지 못했기 때문에 돌아오지 않을 수 없었다." 하였으니, 이를 보면 오진영의 이른바 "분명히 묵인이다."라는 말은 깨졌고, 조충현(趙忠顯)이 최경존(崔敬存)에게 보낸 편지에 말하기를, "민씨【영휘(泳徽)】어른은 원고를 가지고 왔을 때도 한마디 말이 없었고 원고를 가지고 갈 때도 한마디 말이 없었다." 하였으니, 이를 보면 성기운(成璣運)이 이른바 "묵인을 얻는 것은 결국 하공(荷公)【영휘의 호는 하정(荷汀)이다】이 전담할 것이다."라는 말도 깨졌으니, 가소롭고 가소로울 뿐입니다.권순명이 창암(김광언)과 함재 두 어른을 속여 청도에 보내는 답서에서 최 씨를 빼고 오진영으로 바꾸어 팔도에 편지를 보냈으니, 속이는 것이 끝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전일효가 최경존에게 보낸 편지에, "김모의 문서는 간악함을 부려 도둑질하는 행위이다." 했고, 박계동이 정재(靜齋 간재의 차자 전화구)에게 보낸 편지에, "모씨와 모씨는 안면을 바꾸고 곡절을 꾸며냈다.【여기까지이다】." 했으니, 천하에 어찌 이와 같은 변괴가 있겠습니까? 대개 영남 무리가 하는 짓은 모두 이와 같으니, 하나를 미루어 그 나머지를 알 수 있습니다. 아, 《주례(周禮)》에는 유언비어를 날조한 것에 대한 형벌이 있고42), 국전(國典)에는 사람을 속인 것에 대한 율법이 있습니다. 오늘날 천하는 법의 기강이 땅에 떨어져 저들이 뻔뻔스레 선비들 사이에서 행세하면서 하늘을 보고도 아무 생각이 없으니, 이들을 일러 뭐라 하겠습니까? 前此議者, 或謂"湖未必盡是, 嶺未必盡非", 此蓋認嶺有眞京默也, 苟京默之歸誑, 嶺安有一是乎? 宋秉徽與洪憙書曰: "欲得默許而來, 默許不得, 故不得不歸." 觀此則吳所謂分明是默之說, 破矣.趙忠顯與崔敬存書曰: "閔丈【泳徽】, 稿之來也, 無一言, 稿之去也, 無一言", 觀此則成所謂得默, 結局荷公【泳徽號荷汀】專擔之說, 破矣, 好笑好笑.權純命, 誣鬯涵二丈, 以割崔換吳於淸道答書, 飛書八省, 譸張靡極.故田鎰孝與崔敬存書曰: "金某文書, 作奸盜戝之行", 朴▼{王+啓}東與靜齋書, "某也某也, 改換頭目, 粧撰典折【此止】", 天下安有如此變恠乎? 蓋嶺派所爲, 擧皆如此, 推一而可知其餘.噫, 周禮有造言之刑, 國典有誣人之律.今天之下, 法綱墮地, 此輩靦然行章甫間, 視天矇矇, 謂之何哉. 주례에는……있고 《주례(周禮)》 〈지관(地官) 대사도(大司徒)〉에 "육향에서 시행하는 여덟 가지 형벌을 사용하여 만민을 규찰한다. 이 여덟 가지 형벌은, 첫째는 어버이에게 불효한 것에 대한 형벌이며, 둘째는 구족(九族)과 화목하지 않은 것에 대한 형벌이며, 셋째는 인척을 친애하지 않는 것에 대한 형벌이며, 넷째는 윗사람을 공경하지 않은 것에 대한 형벌이며, 다섯째는 벗에게 신의를 지키지 않은 것에 대한 형벌이며, 여섯째는 곤궁한 사람을 구제하지 않은 것에 대한 형벌이며, 일곱째는 유언비어를 날조한 것에 대한 형벌이며, 여덟째는 난을 일으킨 백성에 대한 형벌이다.〔以鄕八刑 糾萬民 一曰不孝之刑 二曰不睦之刑 三曰不婣之刑 四曰不弟之刑 五曰不任之刑 六曰不恤之刑 七曰造言之刑 八曰亂民之刑〕"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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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윤일에게 답함 신사년(1941) 答吳允一 辛巳 사람이 학문하지 않아서 흑백을 분별할 수 없다는 것으로 근심을 삼고, 마땅히 학문에 힘써서 기질을 변화시키고 근본으로 돌아가는 것을 표준으로 삼고, 자기 견해를 스스로 옳다 여겨서 좌정관천을 면하지 못한 것을 경계로 삼으며, 책을 읽어 분발하여 훌륭한 사람에게 올바름을 취하는 것으로 힘씀을 삼고, 몸이 시세에 얽매인 까닭으로 제 집에 놀러오지 못한 것을 근심으로 삼는다는 편지 내용을 받아보았습니다. 이 대목에서 학문은 기회를 놓칠 것처럼 생각하여 서둘러함으로써 날마다 정심함에 나아간다는 뜻을 볼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반드시 저의 입장에서 말한다면 잘못입니다. 세간에 고명한 사람들은 적지 않으니 나에게 진실로 터득한 것 있다면 어찌 나아가 질정(質正)할 곳이 없음을 근심하겠습니까. 진실로 질정할 만한 사람이 있다면 천 리가 떨어져 있어도 종이 한 장의 편지로 지척에서 얼굴을 맞대고 이야기 하는 것처럼 할 수 있으니, 또한 어찌 몸이 얽매임을 근심하겠습니까. 저는 비록 그런 사람은 아닐지라도 그만둘 수 없다면 지금부터라도 편지를 주고받는 것을 당신의 편지에서 말한 것처럼 하는 것은 제가 원하는 것입니다. 그윽이 당신의 자질을 살펴볼 때, 겉모습은 약하고 둔한 듯하나 내면은 실로 밝고 강하니, 어찌 감히 본 것이 없어서 구차스럽게 말을 많이 하겠습니까. 제가 더불어 사귀는 것을 좋아하는 까닭입니다. 공자가 학문하는 큰 방법인 다섯 가지 놓지 않는 법을 자세히 논하였는데, '명강(明剛)' 두 글자로 끝을 맺었습니다. 이것이 도학의 철두철미한 곳이니, 원컨대 격물·치지·성의·정심에 더욱 노력하여 만리를 모두 통달하고 백행을 다 선하게 하여 지대한 명강의 경지에 나가는 것이 어떠하겠습니까. 말씀하신 음성의 오진영이 스승의 의리를 속여 배반하고 사문의 큰 변란을 일으킨 죄는 사람들이 모두 비난할 수 있는 것인데, 하물며 만약 용암선생(김시묵)이 살아계셨다면 반드시 의리를 들어 성토할 것이라는 말은 대단히 옳습니다. 이제 용암선생의 문집을 음성의 오진영에게 교정과 서문을 부탁했다하니, 어찌 그것이 옳지 않다는 것을 모르겠습니까마는 다만 문장의 기교를 취하고 성세를 좇아가서 그리 한 것입니다. 이는 도도한 속된 작태로서 어찌 말거리가 되겠습니까. 그러나 현자의 도로는 한 번 바르게 말하지 않을 수 없으니, 편지로 주인에게 깨우쳐주었는데 듣지 않았다고 하여 그만둘 수 있겠습니다. 구해서 볼 수 있는 여부는 당신이 이미 마음에 편안치 않다 했으니 맹자가 자신이 하고 싶지 않은 바를 바라지 않는다고 한 뜻에 해당합니다. 이것을 가지고 판단할 수 있으니, 어찌 다시 다른 사람에게 묻겠습니까. 承以人不學問, 無別黑白爲懼, 當勉學問, 變氣反本爲準, 自是己見, 不免坐井爲戒, 讀書憤悱, 就正高明爲務, 終之以身縻勢故, 未遊弊廬爲憂.即此可見學如不及, 日造精深之意.然必以鄙人爲說, 則誤矣.世間高明自不乏人, 我茍有所得, 何患就正無所? 茍有可正, 千里一紙, 咫尺面談, 又何憂身縻哉? 鄙人雖非其人, 無已, 則自茲以往, 書尺往復, 如惠書所云, 亦吾之願.竊覵貴座資質, 外似柔鈍, 內實明剛, 豈敢無所見, 而茍然謾說乎? 吾之所以樂與之交者也.蓋孔子備論爲學大方, 五不措之法, 而終之以明剛二字.是爲道學築底處, 願益加努力於格致誠正之功, 使萬理皆通, 百行盡善, 以進於明剛之大且至焉者如何? 所喩陰吳誣背師義, 作師門大變之罪, 人皆可斥, 況使勇菴而在者, 必舉義聲討, 極是極是.今以勇集託陰校弁, 豈不知其不是哉? 特以取文技, 趨聲勢而然.此滔滔俗態, 何足道哉? 然在賢之道, 不可不一番正言, 書喩於主人, 不見聽, 則亦可已矣.購見與否, 賢既云於心不親帖, 則孟子所謂無欲其所不欲者.此可以斷之, 何復問於別人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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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심 황장종복에게 답함.【○현동 첨좌를 대신하여 지음】 계해년(1923) 7월 答小心黃丈【鐘復 ○代 玄洞僉座作 ○】癸亥七月 현산(玄山)1)에 풀이 무성하고, 화도2)에도 가을이 찾아왔습니다. 눈 깜짝할 사이에 어느새 선사(先師)의 연사(練事)3)가 지나가 버렸으니 스승님을 잃은 슬픔4)은 더욱 간절하고 한결같습니다. 이즈음에 어르신의 편지5)를 받아 보니, 당당하고도 지극히 바른 의리와 분명하고도 이치가 극진한 말씀에서 선사의 도덕과 의절이 이로써 밝게 드러나 마치 해와 별을 모두가 보는 것과 같았으며, 한쪽 사람6)의 잘못되고 낭패한 일이 실정이 밝혀지고 벌이 마땅하여 거울처럼 선명하고 서릿발처럼 엄격할 뿐만이 아니었습니다. 아아, 집사의 한마디 말이 아니었다면 간재 문하의 한 조각 의체(義諦)7)는 거의 사라졌을 것입니다.호남이 영남과 달리 하는 것은 총독부의 인가를 받지 않는다는 하나의 의리에 있으니 이것이 가장 큰 것이고, 이 외에도 또한 몇 가지 작지 않은 이유가 있습니다. 호남은 전편과 후편을 각각 편집하여 손수 편정(篇定)하신 고본(稿本)을 사용할 것을 주장하였으나 영남은 합고(合稿)할 것을 주장하는 것이 한 가지이며, 호남은 감히 한 편도 첨가하지 않아 "썩은 시신을 지각이 없다며 속이는 것일 뿐이다." 하신 엄한 훈시8)를 따랐는데 영남은 사적인 것을 용납함을 면치 못한 것이 두 가지이며, 호남은 고인의 축장(築場)하는 뜻9)을 붙였는데 영남은 개의치 않은 것이 세 가지입니다.이 몇 가지 이유에 대해서, 마음을 가라앉히고 생각해보면 저들과 우리들 사이의 잘잘못을 아는 것은 어렵지 않으니, 수레를 돌려 바른 데로 달려가는 것이 쉬울 것 같은데, 어찌하여 서로를 이기고자 하는 투쟁심으로 성을 마주 쌓고 깃발을 내걸어서 한결같이 버티며 잘못을 인정하지 않는단 말입니까? 서울의 묵인이 났다고 속이고 원고를 판매하는 적도에게 넘겨서 선사께서 지킨 것을 깎아 없애고 온 나라의 욕을 실컷 얻어먹는 지경에 이르렀는데도 오히려 잘못을 뉘우치고 훗날을 좋게 할 생각은 하지 않고 다시 강태걸(姜泰杰)의 일10)을 일으켜 어깃장을 놓았으니, 참으로 이해할 수 없는 노릇입니다.전체 원고를 발간하지 않고 절요본을 먼저 찍는 것을 의(義)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전체 원고를 사서 읽을 돈을 빼앗아 장사꾼의 전대를 채워주는 것을 인(仁)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호남에서 발간하는 것을 깨뜨리고 싶어서 한 무리의 적을 내세워 막는 것을 예(禮)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비록 장사꾼이 이를 했다 하더라도 이것을 주관한 사람은 누구입니까? 인가를 받았다는 이름을 피할 수 없고 스승에게 누를 끼치는 것을 면할 수 없으니 지혜롭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사람으로서 사체11)를 헤아리지 못하여 의리가 이러한 지경에 이르렀으니 어찌 더불어 보합12)을 논의할 수 있겠습니까? 다만 나의 부끄럽지 않은 의리를 지키고 나의 마땅히 해야 할 직분을 닦을 뿐입니다. 玄山草宿, 華嶹秋入.轉眄之頃, 奄經先師練事, 山樑之痛, 彌切惟均.乃於此際, 獲拜尊函, 堂堂至正之義, 鑿鑿理到之言, 先師之道德義節, 以之昭著, 如日星之共睹.一邊人之舛錯狼狽, 情得罰當, 不啻鑑明霜嚴.噫, 靡執事者一言, 艮翁門下一副義諦, 幾乎熄矣.蓋湖之貳嶺, 在不認一義, 此其最大者, 外此而亦有種種非細故者.湖主各稿, 用手定本, 而嶺主合稿者一也.湖不敢添入一篇, 遵欺其朽骨無知之嚴訓, 而嶺不免容私者二也.湖寓古人築場之意, 而嶺之不以為意者三也.於此數段, 平心究之, 彼我之是非不難知, 回車趍正, 似易易也, 柰之何爭心勝氣, 對壘揭幟, 一向抵賴? 至於誑出京, 默投稿販賊, 剝喪先師所守, 飽喫通國唾罵, 而猶不思悔過善後, 復惹出姜事, 以乖張之, 絶不可曉也.蓋全稿不刊, 而先印節要, 得爲義乎? 奪購讀全稿之金, 充賈人之槖, 可謂仁乎? 欲破湖刊, 出一對敵而抵之, 可謂禮乎? 雖曰賈人爲之, 其主之者誰也? 認名不得避, 累師不得免, 可謂智乎? 人而不揆事體義理, 乃至於此, 則何可與論保合哉? 只得守吾不愧之義, 修吾當爲之職已矣. 현산(玄山) 지명으로, 간재(艮齋)의 묘가 있는 익산 현동을 말한다. 화도(華島) 지명으로, 본래 전라북도 부안군에 있는 계화도(界火島)인데, 전우가 이곳에 정착하여 강학을 하며 중화(中華)를 계승한다는 뜻에서 계화도(繼華島)라고 고쳐 불렀다. 선사(先師)의 연사(練事) 선사는 돌아가신 스승을 일컫는 말로, 여기에서는 전우를 지칭한다. 연사는 연제(練祭)로, 본래 부모의 상을 치를 때 만 1주기에 지내는 제사를 뜻하며, 소상(小祥)이라고도 부른다. 간재는 1922년 7월 4일에 졸하였다. 스승님을 잃은 슬픔 원문의 '산량지통(山梁之痛)'은 스승이나 현인을 잃은 슬픔을 말한다. 공자가 자신의 죽음을 예견하고 "태산이 무너지려나, 들보가 꺾이려나, 철인이 시들려나?〔泰山其頹乎, 梁木其摧乎, 哲人其萎乎〕"라고 노래하였는데, 과연 7일 뒤에 세상을 떠났다는 고사에서 유래하였다. 《예기(禮記)》 〈단궁 상(檀弓上)〉 어르신의 편지 원문의 '존함(尊函)'은 상대방의 편지를 높여 부르는 말이다. 한쪽 사람 원문의 '일변인(一邊人)'은, 오진영(吳震泳)이 스승의 유지(遺旨)를 무시하고 총독부의 허가를 얻어 문집을 발간하려고 했기 때문에, 그의 이름을 말하는 것조차 꺼려해서 사용한 말이다. 의체(義諦) 사물의 바탕이 되는 뜻이나 이유를 말한다. 썩은……훈시 이 말은 《간재집(艮齋集)後編續)》 권5 〈시자손문인〔示子孫門人〕〉에 나오는 말로,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사고는 이미 정본을 대략 완성하였으니, 이 외에 한 편도 함부로 첨가하지 말라. 이러한 뜻을 자손과 문인은 삼가 어김없이 따르지 않아서는 안 될 것이다. 만약 훗날 사사로운 안면에 구애되어 다시 변통할 방도를 행하는 자가 있다면, 이는 자신의 아버지와 스승을 차마 죽은 사람 취급하여 썩은 시신을 지각이 없다며 속이는 것일 뿐이니, 제자들은 그리 알라.〔私稿旣已略成定本, 此外無得妄添一篇. 此意子孫門人, 不可不恪遵無違. 若異日有拘於顔私, 復行通變之道者, 是忍死其父師.而欺其朽骨無知爾, 諸子識之〕" 고인의 축장(築場)하는 뜻 축장은 스승이 돌아가신 뒤에 무덤가에 움막을 짓고 거상(居喪)하는 것을 말한다. 《맹자(孟子)》 〈등문공 상(滕文公上)〉에 "공자께서 돌아가시자 3년이 지난 다음 문인들이 짐을 챙겨 돌아갔다.……자공(子貢)은 다시 돌아와 묘 마당에 집을 짓고서 홀로 3년을 거처한 다음에 돌아갔다.〔昔者, 孔子沒, 三年之外, 門人治任將歸……子貢反, 築室於場, 獨居三年然後歸〕" 하였다. 강태걸(姜泰杰)의 일 강태걸은 오진영의 제자이다. 오진영의 지시를 받아 간재 사고(私稿)의 선집(選集)을 만들어 서울로 가서 인가를 받는 일을 도맡아 하였으며, 이를 반대하는 김택술(金澤述)과 최병심(崔秉心) 등을 진천서(鎭川署)에 고소하여 배일당(排日黨)으로 몰아세우는 데에 앞장섰다. 《사백록(俟百錄)》 권1 〈진걸화사(震杰禍士)〉 사체(事體) 사리와 체면을 아울러 이르는 말이다. 보합(保合) 《주역(周易)》 건괘(乾卦) 단사(彖辭)의 "하늘의 도가 변화함에 각각 성명을 바르게 하여 큰 화기를 보전케 해 준다.〔乾道變化 各正性命 保合大和〕"라는 말을 압축하여 표현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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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심 황장에게 올림 上小心黃丈 乙丑二月 을축년(1925) 2월매번 우리 어르신께서 정재(靜齋)에게 보낸 편지글을 읽어보면, 늠연하게 선사의 절의가 드러나고 환하게 음인(陰人)13)의 간담을 깨뜨려서 사람으로 하여금 숙연하게 공경심을 일으키게 하니, 직접 존장의 가르침을 받는 것 같았습니다.아, 저들이 스승을 무함하는 일이 날마다 불어나고 달마다 깊어지고 있습니다. "은행나무 아래에서 홀로 명을 받은 것14)은 리(鯉)가 공자(孔子)를 독대하고15)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이 효종(孝宗)을 독대한 것이다." 하고【김세기】, "증자의 일관(一貫)이다."16) 하고【우형근】, "단전밀부(單傳密付)17)로, 간옹이 귓속말로 전한 것이다." 하며【조충현】, "경신년(1920)의 유서는 인가 받지 말라는 뜻이 아니라 별도로 가리키는 뜻이 있다." 하며【최원, 정운한, 김세기가 세 차례 어른에게 말한 것임】, "신해년(1911)의 유서는 하늘에서 떨어지고 땅에서 솟아났다." 하고【정운한】, "크게 의심할 만하다." 하고【김세기】, "감히 가리켜 있다고 할 수 없다." 하니【조충현】, 사람들의 기탄없음이 어찌 이런 극심한 지경에 이른단 말입니까? 일이 이에 이르러 내버려두려고 하면 끝내 선사의 무함을 씻을 날이 없고, 내버려두지 않으려고 하면 저쪽은 강하고 우리는 약하여 결말이 날 기약이 없으니 어떻게 하면 좋을지 모르겠습니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호중(湖中)은 선사께서 도를 제창한 곳입니다. 그러므로 동문과 노성(老成)한 분들이 많으니, 오늘날의 변란에 큰 발길질로 치우친 말을 막고 지극한 정성으로 은혜에 보답하는 것18)은 또한 마땅히 호중에서 많이 나와야 하는데, 적막하니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을 뿐만 아니라 도리어 저쪽을 편들어 비호하는 자가 있음을 면하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나라 사람들이, 음성의 오진영을 성토하는 것이 호남의 치우친 논의에서 나왔다고 의심하는 것에 혹 염려가 없지 않으니, 어찌 답답하고 한탄스럽지 않겠습니까? 이에 홀로 우리 어르신께서 사문의 선배요 호중의 두터운 명망으로 우뚝이 의리를 잡아 지키고 의연히 정도를 부지하여 남들이 밝히지 못한 것을 밝히신 스승의 의리를 천명하셨고 폐와 간을 보듯 훤한 저들의 실정을 알아내셔서 확실하게 각인시켜19) 조금도 용서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런 후에야 사람들이 모두 음성의 오진영이 저지른 죄는 마땅히 성토해야 하고 호남의 의론이 치우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서, 의심하던 자들도 일제히 따라서 안정되었습니다. 어르신 같은 분은 참으로 노성하고 명망이 두터운 실상에 부합하여 사문의 순정한 신하가 되시니, 세도의 다행스러움이 어찌 이보다 더함이 있겠습니까? 저 무리들이 점점 더 무함하여 거리낌이 없으니, 오직 우리 어르신께서는 거울 같은 마음을 더욱 밝히고 부월 같은 필치를 더욱 엄격하게 하여 시종 그들을 물리쳐 멈춤이 없으시기를 바랍니다. 每得吾丈與靜齋書, 讀之, 凜凜然先師節義著, 灼灼然陰人奸膽破, 令人肅肅然起敬, 宛若親承尊誨也.噫, 彼邊之誣師, 日滋月深.謂杏下獨命, 爲鲤尤獨對【金世基】, 曾子一貫【禹烔根】, 單傳密付, 艮翁耳語【趙忠顯】.謂庚申遺書, 謂非指勿認, 而別有所指【崔愿·鄭雲翰·金世基, 三次惇丈】.謂辛亥遺書, 從天降從地出【鄭雲翰】, 可疑之大者【金世基】, 不敢指以爲有【趙忠顯】, 人之無忌憚, 胡至此極? 事到于此, 欲置之乎, 則終無洗誣之日, 不置之乎, 則彼強我弱, 出場無期, 未知如何則可乎? 竊念湖中, 先師倡道之地.故多同門老成, 今日之變, 大踢距詖, 血誠報佛, 亦宜多出湖中, 不惟寥寥爲未聞, 反不免有護袒者.故國人之疑討陰之出於湖南偏論者, 或不無慮, 寧不悶歎? 乃獨有吾丈, 以師門先進, 湖中重望, 卓然仗義, 毅然持正, 闡師義之發人未發, 得彼情之如見肺肝, 一棒一血, 不少假貸.然後人皆知陰罪之當討, 湖論之非偏, 疑之者, 翕然隨定.若丈者, 誠副老成重望之實, 而爲師門之純臣也, 世道之幸, 豈有加此哉? 彼輩之滋誣無憚, 惟願吾丈之心鏡愈明, 筆斧愈嚴, 始終闢之而無替也. 음인(陰人) 음성(陰城)에서 살고 있던 오진영을 가리킨다. 은행나무……것 원문의 '행하독명(杏下獨命)'은 오진영이 은행나무 아래에서 홀로 간재에게 문집 발간의 명을 받았다는 말이다. 리(鯉)가 공자(孔子)를 독대하고 리는 공자의 아들로, 자는 백어(伯魚)이다. 공자가 뜰에 홀로 서 있을 적에, 백어가 종종걸음으로 그 옆을 지나가자, 공자가 시(詩)와 예(禮)를 배우라고 훈계한 고사를 말한다. 《논어(論語)》 〈계씨(季氏)〉 증자의 일관(一貫)이다 일관은 일이관지(一以貫之)의 준말이다. 공자(孔子)가 제자 증삼(曾參)을 불러서 "나의 도는 하나의 이치로써 모든 일을 꿰뚫고 있다.〔吾道 一以貫之〕"라고 하자, 증삼이 "예, 그렇습니다.〔唯〕" 하여 곧바로 깨닫고는 잘 모르는 다른 문인에게 "부자의 도는 바로 충서이다.〔夫子之道 忠恕而已矣〕"라고 설명해 준 것을 말하는데, 오진영이 문집간행에 대한 간재의 뜻을 홀로 알았음을 비유한 것이다. 《논어(論語)》 〈이인(里仁)〉 단전밀부(單傳密付) 《주자대전(朱子大全)》 권59 〈답왕숙경서(答汪叔耕書)〉에서 "〈태극도(太極圖)〉를 단전밀부(單傳密付)의 삼매(三昧)로 여기는 것은 또한 근세 학자들이 형체를 등지고 그림자를 쫓으며 거짓을 가리켜 진짜라고 하는 폐단입니다."라고 하였다. 단전밀부는 한 사람에게만 은밀하게 전수한다는 의미이고, 삼매는 흐트러짐 없이 한곳에 집중한다는 의미로 모두 불교의 용어이다. 여기서는 전우가 오진영에게 은밀히 남긴 유언이라는 의미이다. 큰 발길질로……보답하는 것 《주자대전(朱子大全)》 권28 〈답진동보서(答陳同夫書)〉에, "공자가 어찌 지극히 공정하고 지극히 성실하지 않았겠으며, 맹자가 어찌 거친 주먹을 휘두르고 큰 발길질을 하지 않았겠는가.〔仲尼豈不是至公血誠 孟子豈不是麤拳大踢〕"라고 한 데서 나온 말로, 여기서는 오진영의 한쪽으로 치우친 주장을 반박하여 물리치고 스승의 은혜를 지성으로 갚는 것을 말한다. 확실하게 각인시켜 원문의 '일봉일혈(一棒一血)'은 《주자어류(朱子語類)》 권34에 "대개 성인이 하시는 일은 예를 들면 방망이로 내려쳐서 한 가닥 혈흔(血痕)이 생기게 하고 손바닥으로 때려서 혈인(血印)이 생기게 하는 바로 그런 것과 같은 것이다.〔大概聖人做事 如所謂一棒一條痕 一摑一掌血 直是恁地〕"라고 한 데서 나온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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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심 황장에게 올림 上小心黃丈 丙寅七月 병인년(1926) 7월오진영의 일은 죄가 극치에 달하여 이미 할 말이 없고, 용동(龍洞)에서의 발간20)도 스승의 유훈을 저버림을 면치 못하였으니, 사도의 재앙이 한결같이 어찌 이 지경에 이르렀습니까? 바야흐로 동지들과 맹세코 유훈을 지킬 것을 종신의 계책으로 세울 뿐이니, 더욱 우리 어르신의 이전 편지에서, "문집 발간을 차라리 아예 먼 후대로 늦추는 것이 낫다." 하신 논의가 질정하여 의심할 것이 없음을 깨닫습니다.진주에서의 발간을 알린 첫 통문에 음성 오진영 무리의 핵심인물들은 쥐가 머리를 감추고 여우가 꼬리를 숨기듯이 자취를 감춰서 이편도 저편도 아닌 중립자들의 이름을 빌리거나 속여서 기록하여【죽은 지 3년 된 이석승의 이름이 그 속에 들어있다.】 마치 공론에서 나온 것처럼 사람들을 현혹하였습니다. 그러나 이인구가 발간한다는 통문이 갑자기 나오자 그 일이 와해될 것을 두려워하여 머리를 드러내고 꼬리를 흔들어대더니, 권순명, 유영선, 김종희, 최원, 김세기 등 12인의 두 번째 통문이 있어 말하기를, "이 일은 석농 오진영이 실제로 주선했다."라고 하고, 사람들에게 용맹한 장수와 사나운 병사들이 적을 만나면 반드시 승리할 것이라는 뜻을 비치며, 그 맡은 일이 반드시 성공해서 호응함이 있기를 기대했습니다. 이것은 매우 간사하며 가소로운 일인데, 스승의 손자를 고소하여 구속시킨 일21)에 있어서는 또한 다른 사람을 핑계대어 말하기를, "오진영이 한 것이 아니다." 하였습니다. 오진영이 이미 인쇄할 곳을 주선하였으니, 스승의 손자를 고소하여 구속시킨 것은 인쇄하는 곳에서의 큰일인데, 어찌 주선한 자가 하지 않을 리가 있겠습니까? 어린 아이도 속일 수 없는 만큼 그들의 간사한 속내가 함께 노출됨을 더욱 잘 볼 수 있습니다. 오진영이 일찍이 말하기를, "강태걸의 고소는 내가 시킨 것이 아니다." 하였으나 이렇게 된 후에도 오히려 감히 입을 열어 스스로 변론할 수 있겠습니까?옛날에 우암 선생이 광남(光南)22)을 구한 일 때문에 당시에 비난을 많이 받자 이내 말하기를, "설사 광남이 정말로 큰 죄가 있고 내가 앞장서 말하여 그를 구제했더라도 무슨 큰 죄가 되겠는가?"23) 하였으니, 우암이 스승의 손자를 중히 여긴 것이 이와 같습니다. 오진영은 매번 우옹으로 자처하며 무함을 변론한 사람을 군주를 비하하고 종통을 둘로 나누었다24)고 주장한 윤휴(尹鑴)로 취급하더니, 지금 전사인에 대해서는 어찌하여 잠시도 먼저 우옹을 어줍잖게라도 흉내 내지 않고, 마치 왕망(王莽)이 유자(孺子)를 끼고서 해치기에 급급했던 것25)처럼 하여 드러내놓고 고소하는 화란을 더하기를 이처럼 급히 한단 말입니까?전사인이 이미 오진영에게 속았다는 것을 깨달았다면, 마땅히 미혹당하여 죄를 지었다는 것을 사묘(祠廟)26)에 고하고, 아울러 사우들에게 사과한 다음 유서를 받들고 근거하여 진주에서 간행하는 것을 곧바로 성토했어야 합니다. 이것이 고치고 보충하여 뒷날을 좋게 하는 방도인데, 계책이 여기에서 나오지 않고 급급하게 인가를 받아 간행하기를 힘써서 선사의 가르침을 버린 똑같은 자취로 함께 돌아가니, 얼마나 잘못되었습니까? 혹자는 "인가를 받은 것은 마찬가지인데, 진주를 성토하고 용동을 성토하지 않는 것은 진주를 박대하고 용동을 후대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의심하지만, 이는 생각 없이 하는 말입니다. 인가를 받은 것은 마찬가지이나 용동은 스스로 그 죄를 담당하였고 또 선사께서 손수 편정한 각각의 원고를 썼으니, 스승을 무함하고 원고를 어지럽힌 오진영의 간행과는 같은 죄가 될 수 없습니다. 모르겠습니다만 어찌 생각하시는지요? 震泳事, 罪至極頭, 已無可言.至於龍刊, 又不免棄訓, 師道之厄, 一何至此? 方與同志立誓, 抱遺訓, 終身計而已, 益覺吾丈前書, 刊事, 寧可遅緩百年之論, 爲建質無疑也.晉印之初通也, 陰黨骨子, 藏鼠頭, 隱狐尾, 或借或冒中立者名而錄之【沒已三年之李錫升入名其中】, 眩人以若出公議.然及李仁矩刊通忽出, 則恐其事瓦觧, 乃露頭搖尾.有權純命·柳永善·金鐘熙·崔愿·金世基輩十二人之再通, 而曰: "此事, 吳石農實周章之." 示人以猛將悍卒, 遇敵必勝之意, 冀其知事之必成而有應之者.此已極奸好笑, 而至於訴拘師孫之事, 則又諉之他人, 而曰: "非震所爲." 夫震旣周章印所矣.訴拘師孫, 乃印所中大事, 焉有周章者, 不爲之理乎? 尺童之瞞不得, 而益見奸膓之迸露矣.震嘗言: "杰訴, 非吾所使." 此後亦尙敢開口自辨耶.昔尤庵先生, 以救光南之故, 厚受時誚, 而乃曰: "設使光南, 眞有大罪, 而愚倡言救之, 亦何足爲大罪哉?" 蓋尤翁之重師孫也如此, 震每以尤翁自處, 處辨誣人於尹鑴卑主貳統之說, 而今於士仁也, 何不暫先效嚬於尤翁, 若王莽之攝孺子而急於戕害, 顯加訴禍之此急乎?士仁旣悟見欺於震也, 則當告其迷惑獲罪於祠廟, 并以謝之於士友, 奉據遺書, 正討晉印.是爲改補善後之道, 而計不出此, 乃汲汲然認刊之是務, 同歸於棄訓之一轍, 何其誤也? 或疑認則一也, 討晉而不討龍, 無乃薄晉而厚龍, 此不思之言也.認雖一也, 龍則自擔其罪, 而又用手定各稿, 非可與誣師亂稿之震印同科.未知如何. 용동(龍洞)에서의 발간 전우의 손서(孫壻)인 이인구(李仁矩)와 장손인 전일효(田鎰孝)가 1925년 겨울에 논산(論山) 용동(龍洞)의 봉양정사(鳳陽精舍)에 간소(刊所)를 설치하여 문집 간행을 착수한 것을 말한다. 1927년경에 목판으로 간행하였는데, 이것을 용동본(龍洞本)이라고 한다. 스승의……일 스승의 손자는 간재의 장손인 전일효를 말한다. 전일효의 자는 사인(士仁)으로, 오진영에게 문집 원고를 넘겨주었다가 돌려받는 문제로 서로 고소한 일이 있다. 광남(光南) 김장생(金長生)의 손자인 김익훈(金益勳)의 호이다. 설사……되겠는가? 《송자대전(宋子大全)》 권77 〈답류우구(答柳悠久)〉에 보인다. 《송자대전》에는 "설사 광남에게 참으로 큰 죄가 있는데 내가 감히 구출했다 하더라도 내가 어떻게 세상에 용납되지 못하는 데까지야 이르겠는가〔設使光南眞有大罪而愚敢救之, 亦何至難容於世哉〕"라고 되어있다. 군주를……나누었다 기해년(1659, 효종10년)에 예론(禮論)이 발생했을 때, 송시열은 효종이 적장자가 아니라는 이유로 자의대비의 복상 기간을 기년으로 정했는데, 이에 대해 윤휴가 "임금을 비하(卑下)하고 종통(宗統)을 둘로 하는 것이다."라고 비판한 말을 가리킨다. 《조선왕조실록》 숙종 13년. 왕망이……급급했던 것 평제(平帝)를 독살하고, 광척후(廣戚侯) 유현(劉顕)의 아들 유영(劉嬰)을 황태자로 세워서 스스로는 가황제(假皇帝)ㆍ섭황제(攝皇帝)로서 섭정을 한 것을 말한다. 사묘(祠廟) 선조 혹은 선현의 신주(神主)나 영정(影幀)을 모셔 두고 제사 지내는 건축물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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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심 황장에게 올림 上小心黃丈 丁卯 정묘년(1927)삼가 생각해보니, 스승께서 돌아가신 후 동문 중에서 식견이 고명하고 의론이 정확한 분은 오직 우리 황소심 선생 한 분이 있을 뿐인데, 책 상자를 짊어지고 도를 묻는 것은 형세상 이미 행할 길이 없고 시절에 문안하는 편지는 번번이 해를 넘기니, 어찌 이리도 현인을 좋아하는 정성이 엷단 말입니까. 자신을 돌아보며 스스로 자책하다보니 싱숭생숭 즐겁지가 않습니다.삼가 생각건대, 겨울 추위에 도를 즐기며 지내시는 기거가 안회(顔回)처럼 한 표주박의 물을 마시고29) 원안(袁安)처럼 눈 덮인 속에 고고히 누워서30) 다른 사람의 좋은 음식과 의복을 원하지 않으시리니, 비록 군자가 본성으로 여기는 것이 이에 있고 저 외물에 있지는 않으나 인자하고 현명한 사람의 곤액이 한결같이 이렇게 한심한 지경에 이르렀으니, 이것은 세상의 운수입니다. 시생 같은 자야 어찌 말할 거리가 되겠습니까? 죽어 시신이 골짜기에 나뒹구는 것이 분수이니 지사(志士)인 냥 잊지 않을 필요도 없으나31) 구구한 저의 일념은 그래도 경서를 껴안고 끝까지 선사를 저버리지 않는 것입니다.그렇지만 이 음성의 해괴한 도적이 스승께서 떠나시자 더욱 거리낌 없이 '인가 받으라고 지시했다〔認敎〕'고 스승을 무함하여 스승의 백옥과도 같은 깨끗한 고결함을 더럽히고, 또 멋대로 원고를 고쳐서 금저울〔金秤〕과도 같은 정확한 의리를 어지럽는 것을 어찌한단 말입니까. 하늘까지 넘치는 사나운 물결은 결단코 거룻배 하나로 상대하여 건널 수 없으니, 온종일 근심하고 두려워하지만 계책이 나올 곳이 없습니다.그들이 스승을 무함한 것은, 다만 그가 이른바 "은행나무 밑에서 독대했다." 운운한 말만 보더라도 원래 명백한데, "말에 정확히 구별함이 부족하였다."32)느니 "성토하는 글의 초안을 주관하지 않았다."느니 하는 등의 말로써 백방으로 벗어나려 했지만 그러지 못했습니다. 지난겨울에 또한 그가 임술년(1922) 가을에 혼자 이름으로 서근소(徐近小)에게 답한 편지를 얻었는데, 곧장 "사실은 원래 선사의 '말씀하지 않은 지시〔不言之敎〕'를 따른 것이다." 하였으니, 말씀하지 않은 지시라는 것이 인가를 받을 뜻이 아니면 무엇이겠습니까? 그가 "사실은"이라고 하고 "원래 따른 것이다."라고 한 것에서 다시금 무함하고 모독한 것이 매우 혹독함을 깨달았습니다. 竊念山頹後, 同門中識見高明, 議論精確, 惟吾黃小心先生一人在, 而負笈問道, 勢已末由, 時節侯書, 動輒經歲, 是何好賢之誠薄? 撫躳自訟, 忽忽靡樂.伏惟冬寒, 起居樂道, 飲顏氏水, 卧袁安雪, 而不願人梁繡也, 雖君子所性在此不在彼, 仁賢之厄, 一至於此寒心者, 世運也.如侍生者, 何足道哉? 溝壑是分, 不待不忘也.然區區一念, 猶欲抱經而終不負先師也.柰此陰怪之賊, 師去益無憚, 旣誣認敎, 汙了白璧之潔, 又擅改稿, 亂了金秤之義? 滔天虐浪, 決非一葦之抗, 夙夜憂惧, 計無所出.蓋其誣師, 但觀渠所謂杏下云云說, 原自明白, 而欲以語欠區別, 舍主討草等說, 百方圖脫, 而不得者也.昨冬又得渠壬戌秋, 單名答徐近小書, 直以為其實原從先師不言之敎, 不言之敎, 非認意而何? 其曰其實, 曰原從者, 更覺誣衊之孔酷也. 안회(顔回)처럼……마시고 안회가 한 그릇의 밥과 한 표주박의 물로 누추한 시골에서 지내는 것을 딴 사람들은 그 근심을 견디지 못하지만, 안회만은 그 즐거움을 변치 않았다는 고사이다. 《논어(論語)》 〈옹야(雍也)〉 원안(袁安)처럼……누워서 원안은 후한(後漢)의 현사(賢士)이다. 낙양(洛陽)에 폭설이 내려 다른 사람들은 눈을 치우고 밖으로 나와 먹을 것을 구하였으나 원안은 "큰 눈이 내려 사람들이 모두 굶고 있는 판에, 사람들에게 먹을 것을 구하는 것은 온당치 못하다.〔大雪人皆餓 不宜干人〕" 하며 혼자 집에 누워 있었던 고사이다. 《후한서(後漢書)》 권45 〈원안열전(袁安列傳)〉 죽어……없으나 제 경공(齊景公)이 우인(虞人)을 우인에게 쓰는 피관(皮冠)으로 부르지 않고 대부에게 쓰는 정(旌)으로 부르자 우인이 죽음을 무릅쓰고 가지 않았는데, 이를 두고 공자가 "지사는 죽어서 시신이 도랑이나 골짜기에 있을 것을 잊지 않고, 용사는 싸우다 머리를 잃을 것을 잊지 않는다.〔志士不忘在溝壑 勇士不忘喪其元〕"라고 하여 우인의 지조를 칭송한 데서 나온 말이다. 《맹자(孟子)》 〈등문공 하(滕文公下)〉 말에 정확히 구별함이 부족하였다 이 말은 오진영이, 간재가 인가를 지시했다고 한 자신의 말이 공격을 받자 이를 해명하기 위해 한 말로, 〈답김용승서(答金容承書)〉에, "은행나무 아래에서 독대할 때에는 문집 간행의 지속만을 논했고 애초에 인가를 받을지 말지는 언급이 없었는데, 스승과 제자간의 대화를 나중에 기억하다보니 말에 정확히 구별함이 부족하였으니, 이것은 말을 전달함에 소홀했던 나의 과실이다.〔杏下竹床時 單論刊稿遲速 初無認否之及 追記師生酬酌 而語欠區別 此吾命辭疎忽之過也〕"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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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재 소장학규에게 답함 答悅齋蘇丈學奎 ○甲子 갑자년(1924)지난 달 찾아뵌 것은 사실 몇 년간 벼르던 끝에 나온 것인데, 인연이 사람과 어긋나 공교롭게도 출타를 하시어 그리운 마음에 한없이 방황하였습니다. 그래도 오히려 운곡(雲谷)34)의 풍물이 옛날의 경관 그대로이고 명덕정(明德亭)35) 위의 상쾌한 기운이 사람 품을 파고드는 것을 보고 고인의 빼어난 운치를 손을 내밀면 바로 움켜쥘 수 있을 듯하였으니, 이것이 이미 사람의 뜻을 조금은 강하게 해주었습니다. 얼마 후에 아드님 형제의 안내를 받아 서실로 들어갔는데, 첫째 아드님은 정성스러워 사람을 흡족하게 하고 둘째 아드님은 명민하여 기뻐할 만하였으니, 군자의 전형과 고가(故家)36)의 훌륭한 집안 교육이 또한 사람으로 하여금 공경하고 흠모케 하여 마침 높으신 가르침을 입지 못한 것 때문에 크게 탄식할 필요도 없었습니다. 더구나 이렇게 편지와 아름다운 시37)를 당일로 오롯이 보내주셨으니, 정의가 중하고 의리가 바르며 풍격이 아름답고 뜻이 깊어서 깜짝 놀라고 감탄하였습니다. 이에 외람된 생각으로 지난번에 만약 하룻밤 모시고 이야기를 나누지 않았더라면 어떻게 이런 귀중한38) 글을 얻어 영원히 산속의 보물로 만들 수 있었겠습니까? 이어 생각하니, 시생과 우리 어른은 선대에 가까운 친척이었고 선친과는 연세가 같았습니다. 부친을 여읜 뒤로는 친소와 귀천을 구분하지 않고 선친과 연세가 같은 분이 있다는 것을 들으면 번번이 서글퍼지며 부모를 끝까지 봉양하지 못한 슬픔39)이 흘러나왔습니다. 하물며 우리 어른과 같은 위치에 계신 분이겠습니까? 매번 우리 어른께서 술이 반쯤 취해 흰 수염을 쓰다듬으며 의리와 이익을 담론하고 고금을 논평하시는 것을 볼 적마다 풍치와 언론의 풍부함이 선친과 거의 엇비슷하다고 가만히 생각하며 마음속으로 말하기를, "우리 부친이 살아계시면 아직도 이 어른처럼 건강하시고 아직도 이 어른과 함께 선비들 사이에서 주선할 수 있으셨을텐데." 하였으니, 저도 모르게 줄줄 눈물이 흐르려 했습니다. 말이 여기까지 이르고 보니 우리 두 집안의 친분과 정의는 평상시에 실제로 상상하던 것에 비할 바가 아닙니다. 또 제가 다행히 우리 어른과 함께 구산옹40)의 문하에 출입했고, 또 다행히 시비가 뒤섞인 날을 당하여 잡아 지키는 것이 우리 어른과 같았으니, 마침내 선대의 친밀한 정의가 이에 더욱 친밀해짐을 알았고, 또한 본 바가 서로 부합하는 것이 선대의 우의로 맺어진 두 집안의 행복임을 이로써 알았습니다. 이런 점에 나아가 노소간에 간극이 없는 믿음과 피차 서로 격려하는 도를 구한다면 또한 그것이 실제임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우연히 《맹자》의 "문왕은 기주에서 태어나 필영에서 죽었으니, 서이 사람이다.〔文王 生於岐周 卒於畢郢 西夷之人也〕"41)라고 한 부분을 읽었는데, 제가 여기에 보충하여 "간옹은 완산에서 태어나 부안에서 죽었으니, 호남사람이다."라고 하겠습니다. 호남은 진실로 간옹의 도학이 처음 시작하여 끝을 맺은 땅입니다. 그러므로 돌아가신 후에 이런 망극한 무함을 당하신 것에 대해 완주에는 우리 어른과 여러 분들이 계시고 부안에는 창암과 함재 및 여러 분들이 계시는 만큼 한 조각 마음을 단단히 먹어 일생토록 부처님 같은 은혜를 갚고 큰 붓으로 훤히 밝혀 백세토록 사설(邪說)을 막아서 간옹의 도로 하여금 언제라도 의지할 것이 있게 해야 하니, 하늘의 뜻이 어찌 우연히 그리되겠습니까. 삼가 강성한 힘을 더욱 떨쳐 백번 부러져도 회피하지 않고 아홉 번 죽어도 후회하지 않아서, 맹세코 호남 한 지역이 영원히 후세에 할 말이 있도록 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렇게 하신다면 못난 시생도 마땅히 하풍(下風)에 달려가 함께하여 영광이 있도록 하겠습니다. 客月拜門, 實出於累年經擬之餘, 而緣與人違, 巧值駕外, 徊徨眷戀.猶見雲谷風物, 不改舊觀, 明德亭上, 爽氣襲人, 高人逸韻, 若可挹取, 此已稍強人意.旣而令似兄弟, 延入書室, 一哥誠欵洽人, 二哥明敏可喜, 君子典型, 故家詩禮, 又令人欽豔, 不須以適違尊誨, 大致於邑.矧茲赫蹏瓊什, 卽日耑賜, 情重而義正, 格佳而意深, 驚喜感幸.私竊以爲向使不失一宵之陪話, 安能獲此百朋之手筆, 永作山中之寶哉? 仍念侍生之於吾丈, 先世切戚也, 先人同庚也.一自失怙以來, 不分親踈貴踐, 聞有與先人同庚者, 輒惕惕動蓼莪悲, 况如吾丈地哉? 每見吾丈酒半酣揮白鬚, 談說義利, 揚扢古今, 暗想風致言論恰恰, 與先人或相上下, 自語於心曰: '吾親而在者, 尙能如此丈之康健, 尙能與此丈周旋於章掖間.' 不覺泫然乎欲淚興.言到此兩家契誼之, 非比平常, 實際可想.且澤述幸而與吾丈同出臼門, 又幸而當此是非混淆之日, 所執與吾丈同, 乃知先戚之誼, 於是乎益密.又以知所見之相符, 兩家先誼之幸福也.卽此而求之, 老少無間之孚, 彼此相勉之道, 又可知其實際也.偶誦孟子之言, 曰: "文王生於岐周, 卒於畢郢, 西夷之人也." 澤述足之, 曰: "艮翁生於完山, 卒於扶風, 湖南之人也." 湖南, 固艮翁道學, 成始成終之地.故旣沒而遭此罔極之誣, 在完而有吾丈諸公, 在扶而有鬯涵諸公, 寸心斷斷, 報佛恩於一生, 大筆晳晳, 距邪說於百世, 俾艮翁之道, 始終之有賴, 天意豈偶然哉? 伏願益奮大壯之力, 百折不回, 九死靡悔, 誓使湖南一區, 永有辭於來許, 則侍生之無似, 亦當奔趍下風, 而與有榮矣. 운곡(雲谷) 열재 소학규가 거주했던 완주군 용진면 상운리 운곡을 가리킨다. 명덕정(明德亭) 위치는 미상이다. '명덕(明德)'은 대학의 "명명덕(明明德)"에서 그 의미를 취한 것이다. 고가(故家) 여러 대에 걸쳐 벼슬하며 살아온 집안을 말한다. 편지와 아름다운 시 원문의 '혁제(赫蹄)'는 옛날에 글씨를 쓰는 데 썼던 폭이 좁은 비단을 뜻하는 말인데 종이의 이칭으로 쓰이기도 하고 여기서는 상대방의 편지를 뜻하며, 경십(瓊什)은 상대방이 지은 시나 문장을 높여서 일컫는 말이다. 귀중한 원문의 '백붕(百朋)'은 많은 재물을 뜻하는 말인데, 여기서는 소학규가 지어서 보낸 시를 칭송하여 말한 것이다. 붕(朋)은 화폐의 단위이다. 《시경(詩經)》 〈청청자아(菁菁者莪)〉에 "이미 군자를 만나 보니, 나에게 백붕을 주신 듯하네.〔旣見君子 錫我百朋〕" 하였다. 부모를……슬픔 원문의 '육아(蓼莪)'는 《시경(詩經)》 소아(小雅) 편명인데, 부모가 돌아가신 뒤에 살아생전에 효도하지 못한 자식의 슬픈 심경을 읊은 시이다. 구산옹(臼山翁) 구산은 간재 전우의 호 가운데 하나이다. 문왕은……사람이다 《맹자(孟子)》 〈이루하(離婁下)〉에서는 "순임금은 제풍에서 태어나 부하로 옮겼다가 명조에서 죽었으니, 동이의 사람이다. 문왕은 기주에서 태어나서 필영에서 죽으니 서이의 사람이다.〔孟子曰, "舜生於諸馮, 遷於負夏, 卒於鳴條, 東夷之人也. 文王生於岐周, 卒於畢郢, 西夷之人也〕"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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