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12대조 가선대부 행 이조 참판 운강 선생 가장 從十二世祖嘉善大夫行吏曹參判雲江先生家狀 선생의 휘는 계(啓), 자는 회숙(晦叔), 처음 자는 언(亨彦), 성은 김씨로 계통은 신라 경순왕(敬順王)에서 나왔다. 고려조 휘 춘(春)이 부령군(扶寧君)에 봉해졌는데, 2대를 지나 휘 작신(作辛)이 부령군을 이어 받아 봉해졌다. 인하여 부령을 관향으로 삼았으니, 즉 지금의 부안군(扶安郡)이다. 또 2대를 지나 평장사(平章事) 휘 구(坵)는 문장과 덕업이 뛰어나 고려 역사에 보이며, 이 분이 휘 여우(汝盂)를 낳았다. 여우는 형부 상서(刑部尙書)를 지냈으며 큰 공훈을 세워 왕이 단서(丹書)를 하사하였다. 조정에서 두 분의 충성을 기려 도동사(道東祠)에 제향 하였다.4대를 지나 고부군사 휘 광서(光敘)에 이르러 고려의 운이 장차 다할 것을 보고서 조선의 신하가 되지 않겠다는 뜻을 지니고 관향으로 완전히 돌아갔으니, 이 분이 5대조가 된다. 증조의 휘는 회윤(懷允)으로 사온서 직장(司醞署直長)을 지냈으며 좌통례(左通禮)에 추증되었다. 조부의 휘는 직손(直孫)으로 문과에 합격하여 첨정(僉正)을 지냈고 도승지(都承旨)에 추증되었으며, 율곡(栗谷) 이이(李珥) 선생이 신도비를 지었다. 부친의 휘는 석옥(錫沃)으로 성균관 생원을 지냈고 호조참판(戶曹參判)에 추증되었으며, 고봉(高峰) 기대승(奇大升) 선생이 묘갈명(墓碣銘)을 지었다. 3대의 추증은 선생이 귀해졌기 때문이다. 선비(先妣)는 정부인에 추증된 영월 신씨(寧越辛氏) 현감 중졸(仲椊)의 따님으로 성품이 엄격하여 법도를 지녔으며 부인과 어머니 역할에 모두 그 도를 얻었다. 네 아들을 두었으니, 희(喜)와 선(善)은 모두 장사랑(將仕郞)이 되었으며, 점(坫)은 참봉으로 학행이 뛰어나 매당 선생(梅堂先生)이라 불리었으니, 그의 막내이다.선생은 가정 무자년(1528년)에 부안 옹정리(甕井里)에서 태어났다. 얼굴이 빼어나고 환하였으며 자품이 온화하고 순수하여 사람들이 큰 그릇이 될 것으로 기대하였다. 겨우 예닐곱 살에 참판공(參判公)의 상을 당하였는데, 신부인이 선생은 막내이므로 비록 매우 사랑하였지만 그러나 작은 잘못이라도 저지르면 곧바로 매질하면서 가르치기를 "과부의 아들을 사랑만하고 노력하도록 만들지 않는다면112) 어찌 능히 스스로 설 수 있겠느냐."라 하였으니, 의로운 방법으로 가르침이 이와 같았다.장성하여 하서(河西) 김인후(金麟厚) 선생의 문하에서 학문을 배웠으며 면앙(俛仰) 송순(宋純), 미암(眉巖) 유희춘(柳希春), 고봉 기대승(奇大升), 사암(思菴) 박순(朴淳), 송강(松江) 정철(鄭澈) 등과 우호를 나누었다. 임자년(1552년) 4월에 계공랑(啓功郞)으로 문과에 합격하여 승정원 정자(承文院正字)에 제수되었다. 그러나 학문이 정밀하지 못하고 문사가 넉넉하지 못하다고 생각하여 다급하게 벼슬길에 나가려 하지 않고서 물러나 책을 읽었으니, 사서와 육경 및 여러 성리서들을 부지런히 읽어 정미하게 연구하였으며 병법과 한어(漢語)까지도 익혀서 통달하였다.임술(1562년), 계해(1563년) 연간에 내직으로 들어가 집의, 한림, 교리, 수찬, 헌납, 병조와 이조와 예조의 낭관을 지냈다가 경상도 어사(慶尙道御史)로 제수되었다. 이에 탐장(貪贓)을 저지른 수령들이 모두 소문만 듣고도 인끈을 풀고 떠나갔다. 갑자년(1564년) 정월에 지평(持平)에 제수되어 부르는 명이 있자 소장을 올려 사양하였지만 윤허를 받지 못하였다. 이윽고 외직인 경성 판관(鏡城判官)에 제수되었다. 경성의 풍속은 본래 강하고 사납기에 부임한 초기부터 너그럽게 어진 정사에 힘쓰고 청백한 다스림을 숭상하니, 경성의 백성들이 모두 그 덕을 칭송하였다. 을축년(1565년)에 사간으로 있다가 평안도 안무사(平安道按撫使)에 제수되었는데, 주상께서 친히 교유를 내렸다. 대개 평안도는 서쪽 변방에 있어서 여러 차례 병화를 겪어 백성들이 편안하게 살지 못하기에 이런 명을 내린 것이다. 명을 수행하고 돌아와 곧바로 순천 도호부사(順天都護府使)에 제수되었는데, 학문을 흥성하는 것을 자신의 책임으로 삼았다. 전 부사 이정(李楨)은 한훤당(寒暄堂) 김굉필(金宏弼) 선생이 이곳으로 귀양 와서 타계하였기에 옥천정사(玉川精舍)를 세워 제향 하였는데, 이윽고 모친상을 당하여 떠나게 되었다. 선생이 정사의 제도를 두루 살펴보고는 신위가 한쪽에 치우쳐 있어서 온당하지 않게 여겨 심부름꾼을 보내 이공에게 물어보고서 다시 당의 가운데로 신위를 안치하니 의식이 이윽고 완비되었으며 조리도 또한 갖추어졌다.병인년(1566년) 6월에 기고봉(奇高峰)을 방문하여 두 신주에 대한 의미에 대해 물어113) 서로 변론하고 질정하였다. 융경 정묘년(1567년)에 선조가 등극하자 장령에 제수되었다. 11월에 11일은 대전(大殿)의 탄신일이다. 전한(典翰) 기대승(奇大升), 수찬(修撰) 유희춘(柳希春), 정철(鄭澈) 등과 경연청(經筵廳)에 나아가 문안을 올렸는데, 주상이 퇴상(退床)을 하사주니 마침내 용배의 술을 마셔 대취하였다. 선생이 시를 지어 은혜에 사례하였다.천상의 백옥루는 참으로 허튼 말이며 天上玉樓眞謾說해중의 봉래도 또한 보기 어려워라 海中蓬島亦難看어찌 같으랴, 미천한 신하가 천재일우의 기회 만나 那似微臣千一遇차분하고 큰 덕을 지닌 용안을 가까이 하는 것과. 從容丕顯近龍顔이로부터 임금의 지우가 더욱 높아졌다. 이전에 안서순(安瑞順)이 정륜(鄭倫), 김응정(金應貞)과 소장을 올려 을사년 여러 간신들이 임금을 기망한 죄를 지적하여 모두 극형을 받았는데, 선생이 정언 최정(崔頲)과 소장을 올려 합계하여 극력 신원하였다.무진년(1568년) 봄에 동부승지(同副丞旨)에 제수되었다. 유희춘, 우부승지 김첨경(金添慶)114) 등과 함께 어록의 자의를 논하였는데, 유공은 선생의 말을 많이 취하고서 어탑 앞으로 나아가 그 까닭을 아뢰었다. 당시 선생은 여러 차례 경연관으로 임금을 모셨는데, 성덕을 보필함에 갖춰지지 않은 것이 없어 세상에서 유악(帷幄)에 쓸 만한 인재를 얻었다고 하였다. 또한 우찬성(右贊成) 이황(李滉), 대사헌(大司憲) 김귀영(金貴榮),115) 대사간(大司諫) 강사상(姜士尙),116) 대제학(大提學) 노수신(盧守愼), 좌상(左相) 권철(權轍),117) 우상(右相) 홍섬(洪暹)118) 등과 정암(靜菴) 등 제현이 화를 당한 이유와 남곤(南袞), 심정(沈貞)의 무리들이 올바른 사람을 해친 정상을 극력 아뢰었으니, 연달아 서로 의논을 수합하여 숨김없이 진달하였다.시월에 상의원 정(尙衣院正)에 제수되었다. 기사년(1569년) 6월에 주상께서 특별히 회령 부사(會寧府使)에 제수하였는데, 사헌부에서 자격이 되지 않는다고 논하자 주상께서 굳건히 거부하였다. 승지 기대승이 또다시 차자를 올려 아뢰기를 "김계는 사헌부에서 인물이 그 자리에 맞지 않는다고 한 것이 아니라 다만 급하게 승진한 것으로 논한 것입니다. 그런데 끝내 청이 받아들여지지 않는다면 김계는 변장으로 명을 어길 수 없으니 형세상 마땅히 부임하여야 합니다. 김계는 선비입니다. 어찌 마음에 만족스럽지 않은 점이 없겠습니까. 지금 만약 억지로 부임하게 한다면 자못 인재를 배양하는 도에 어긋납니다."라 하자, 주상께서 "이것은 그렇지 않은 점이 있다. 김계를 불선(不善)으로 논하였는데 부임시킨다면 과연 이와 같거니와, 다만 급하게 승진한 것으로 논하여 부임하지 못하게 한다면 이는 도리어 공론이 허락한 것이다. 무슨 부끄러움이 있겠는가."라고 하고서 끝내 윤허하지 않았다. 대개 선생은 나이가 겨우 40살인데 갑자기 가선대부(嘉善大夫)의 반열에 오르기 때문에 여론이 이를 꺼려하였으나 주상께서 끝내 윤허하지 않았다. 당시 조정에는 바야흐로 변방에 대해 근심하였는데 북문(北門)을 잠기는 일은 선생이 아니면 감당할 수 없었다.7월에 황해 감사(黃海監司)의 천망(薦望) 에 들었다가 마침내는 첨지(僉知)에 제수되었다. 10월에 강원 감사(江原監司)의 천망에 들었다. 경오년(1570년) 외직인 황해 감사(黃海監司)로 나갔다. 부임할 때 감영 안의 기생들이 선생의 용모가 옥 같다는 소리를 듣고서 일제히 나아가 가마를 메려고 하니, 즉시 명하여 물리쳤다. 10월에 소장을 올려 을사년 신원과 삭직의 일에 대해 아뢰었는데, 말이 대단히 통절하여 당시 여론이 옳다고 하였다. 석담(石潭)으로 율곡(栗谷) 이 선생을 방문하여 조고(祖考) 승지공(承旨公)의 신도비명을 부탁하였다. 또한 율곡에게 인심과 도심설에 대해 묻고 질정하기를 "지각이 형기에서 발한 것이 인심이 된다. 그러나 정심에 어긋나지 않으면 처음에는 인심이지만 끝에는 도심이 된다. 지각이 성명에 발한 것이 도심이 된다. 그러나 형기를 따르면 처음에는 도심이었지만 마침내는 인심이 된다. 이것이 인심과 도심이 서로 시종이 된다는 것이다.……"라 하였다.신미년(1517년) 2월 전라 감사(全羅監司)의 천망에 들어갔다가 마침내 우부승지(右副承旨)에 제수되었다. 임신년(1518년)에 형조 참의(刑曹參議)에 제수되었다. 10월에 명나라 사신 한세능(韓世能)과 진삼모(陳三謨)가 조서를 받들고 이르자 소재(蘇齋) 노수신(盧守愼)이 빈상(儐相)이 되고 선생은 접반사(接伴使)가 되어 모화관(慕華舘)에 가서 영접과 전송의 예를 행하였다. 12월에 제문을 지어 기고봉의 영연에 찾아가 제사를 지냈는데, 선생과 고봉은 이미 막역하게 사귀었으며 겸하여 혼인의 정의가 있었다. 또한 고봉이 병들어 돌아갔다가 선생의 중형 매당공(梅堂公)의 집에서 타계하였으므로 그 애통한 정은 다른 사람과 남달랐다.만력 계유년(1519년) 정월에 동래 부사(東萊府使)에 제수되었다. 유희춘이 주상에게 아뢰기를 "문신 가운데 한어에 능통한 자로 어전에서 통역할 만한 이는 대단히 적습니다. 그러므로 나라에서 반드시 미리 육성하였으니, 세종 때는 중국의 명사가 요동에 귀양 오자 신숙주(申叔舟)와 성삼문(成三問) 등을 보내어 한어를 배우게 하기도 하였습니다. 중종 때는 최세진(崔世珍)119)과 윤개(尹漑)120) 등이 한어를 잘하니 중종이 장려하며 임무를 맡겼습니다. 이처럼 중하게 여겼는데, 지금은 다만 김계 한 사람뿐인데 동래 부사에 제수하시니 승문 제조(承文提調)가 많이 애석하게 여깁니다.……"라고 하였다.3월에 외직인 충청병마절도사(忠淸兵馬節度使)가 되었는데, 주상께서 《행군수지(行軍須知)》 한 권을 하사하였다. 대개 선생이 비록 문신이지만 주상께서 곤수(閫帥)의 재주가 있음을 알았기에 특별히 이 관직에 제수한 것이다. 6월에 사역원 제조에 제수되어 한학, 몽학, 여진학의 통역을 배운 자들의 시험을 담당하였다. 12월에 이조 참의 겸지홍문관춘추관사(吏曹參判兼知弘文舘春秋舘事)에 제수되었다. 선생은 벼슬에 나아간 10년 동안 여러 차례 명나라에 사신으로 갔는데, 그 해와 달을 자세히 알 수 없다. 비록 모두 몇 차례 갔는지 알 수는 없지만 분명하게 증거를 찾을 수 있는 것은 일찍이 군기 첨정(軍器僉正)으로 있다가 서장관(書狀官)이 되어 연경에 갔으며, 또한 성절사가 되어 정랑(正郞) 상진(尙震)121)과 함께 갔으며, 또한 동지사가 되어 두 번 갔으며, 또한 질정관으로 갔으며, 서장관으로 간 것이 또한 한두 번에 그치지 않는다. 또한 《율곡전서(栗谷全書)》에 고증해보면 가정 갑자년(1564년)에 선생은 모두 세 차례 연경에 다녀왔으며, 갑자 이후에 또한 몇 차례 다녀왔는지 알 수 없다.일찍이 명나라 조정에 이르자 천자가 친히 동방의 일에 대해 묻고서 특별히 조정에서 알현하게 하였다. 이에 선생은 조심조심하며 걸음걸이가 법도가 있었고 눈은 밝은 별과 같았으며 목소리는 커다란 종과 같아 신비로운 정채가 멀리까지 어리고 풍도가 엄숙하고 단정하니, 천자가 그 풍골의 뛰어난 것을 사랑하였으며 또한 그 사신으로 온 것을 가상하게 여겼다. 이에 화공에게 명하여 그 모습을 그리게 하고서 먼저 열국의 사신들에게 반포하여 보여주면서 동국에 이러한 인걸이 있음을 알게 하였으며, 다음으로 조선으로 돌아가 본국의 군민(君民)들에게 보여주어서 천자의 기림을 받은 것을 알게 하였다.만년에 명성과 지위가 지나치게 높아지자 스스로 벼슬을 그만두면서 "나는 먼 지방 사람으로 나이가 약관을 지나자 고제(高弟)가 되었으니 너무 빠르지 않다고 말할 수 없으며, 겨우 벼슬에 나아가자 지위가 아경에 이르렀으니 현달하지 못하였다고 이를 수 없다. 옛 사람이 '족함을 알면 욕되지 않고 그칠 줄을 알면 위태롭지 않다.'122)고 하였으니, 참으로 격언이다."라고 하고는 이에 소장을 올려 사직하였다. 곡성(谷城)의 동쪽 10리 큰 강가에 자리를 정하여 정자를 짓고서 운강정(雲江亭)이라 명명하였다. 인하여 운강으로 자호하고서 날마다 사우, 문도와 함께 서적을 토론하고 의리를 강구하였다. 하루는 문인들을 불러 말하기를 "우리 동방은 좁고 작아 나보다 뛰어난 사람을 보거든 반드시 질시하는 마음을 지니니, 하물며 지금은 당론이 매우 격렬하니 끝내 어느 지경에 이를지 모르겠다. 반드시 시비가 서로 다르게 서서 비방과 기림이 당파의 논의를 따르게 될 것이니 옥석을 가릴 수 없게 되어 조정이 안정되지 않을 것이다. 내가 죽은 뒤에 만일 빗돌을 세우게 된다면 다만 본래 관직과 이름만 쓰고 행적을 기록하지 말라."라고 하였다.공은 갑술년(1574년) 정월 6일에 타계하시니 나이 47살이었다. 부안(扶安) 석동산(席洞山) 선영의 간좌(艮坐) 언덕에 장사 지냈다. 부인 정부인(貞夫人)은 해주 오씨(海州吳氏) 붕지(鵬之)의 따님으로 쌍분으로 합부하였다. 서자 아들 두 명이 있는데, 효평(孝平)은 주부(主簿)가 되었으며 효길(孝吉)은 직장(直長)이 되었다.선생은 어려서 남다른 자질을 지녀 일찍부터 원대한 뜻을 지녔다. 이윽고 장성하자 성취한 바가 매우 컸는데, 그 대개를 논하자면 즉 하서(河西) 선생을 스승으로 섬겨 일찍 학문의 요점을 들었으며 율곡(栗谷) 등 제현과 도의로 서로 사귀었으니, 이것은 연원의 올바름이다. 젊은 나이에 과거에 합격하였으나 학문이 넉넉하지 못함을 스스로 부족하다고 여겨 벼슬에 나아갈 뜻을 두지 않고 더욱 연마하였으니, 이것은 조예가 깊은 것이다. 이윽고 부르는 명에 응하여 온 정성으로 공사(公事)를 받들어 들어와서는 임금의 계책을 돕고 나아가서는 간성(干城)이 되어123) 각각 그 직분을 다한 것은 임금을 섬긴 충성이다. 정암(靜菴) 등 제현들이 화를 당한 사연과 남곤(南袞), 심정(沈貞) 무리들이 올바른 사람을 해친 정상을 힘써 아뢰고 또한 을사년 억울함을 당한 이와 거짓으로 공훈을 받은 자들에 대해 신원하고 삭훈하라고 청한 것은 현인을 높이고 간신을 구변한 공변됨이다. 선생이 "인심과 도심은 서로 시종(始終)이 된다."고 한 것은 깊이 생각하고 밝게 분별한 공이다. 명나라 만 리 길을 능력이 있어 수고함124)을 꺼리지 않고 능히 사신의 임무를 맡아 천자의 포상을 받기까지 한 것은 성인이 말한 '사방에 사신으로 가서 군명을 욕보이지 않는다.'125)는 경우에 해당한다. 벼슬에서 물러날 때가 아직 되지 않았는데, 만족함을 알아 향촌으로 돌아갔으며 임종에 한 마디 말은 당론을 초월한 것은, 성인이 말한 '기미를 보고 일어나 하루가 지기를 기다리지 않는다.'126)는 것에 해당한다.이런 까닭으로 하서(河西) 선생이 일찍이 시를 주기를 "그대의 원대한 포부를 보니 속류가 아니로다.[看君遠抱非流俗]"라고 하였으며, 사암(思庵) 박순(朴淳)이 〈조경(朝京)〉이란 시를 주면서 "조정은 응당 이미 홍유임을 알았어라.[朝廷應己識鴻儒]"라고 하였으며, 면앙은 〈잡록(雜錄)〉에서 "우리 벗 회숙은 직(稷)과 설(契) 같은 계책과 관중(管仲)과 제갈량(諸葛亮) 같은 재기를 지녔다."라고 하였다. 미암(眉巖)이 선생의 부음을 듣고서 슬픔에 놀라며 애석하게 여기기를 "이 사람은 문무를 갖춘 뛰어난 인재로, 선을 좋아하고 악을 미워하는 마음을 지녔으며 강개하여 신의를 지키는 행동을 하니, 조정에서 바야흐로 크게 쓸려고 하였는데 갑자기 이렇게 되었구나."라고 하였다. 고봉(高峰)은 "회숙은 문무의 재주를 지녔으며, 능히 자신을 곧게 한 뒤에 행하여 세상에 연연하지 않았다."라고 하였다. 옥계(玉溪) 노진(盧禛)127)은 제문에서 "덕이 부족한 것이 아니거늘 수가 50살도 채우지 못하였다."라고 하였으며, 또한 "높은 식견은 탁월하여 넘겨 볼 수 없다."라고 하였다. 오봉(鰲峰) 김제민(金齊閔)128)이 칭송하기를 "당대의 명경(名卿)이 되어 충직한 목소리가 조정에 진동하였다."라 하였다. 이제(頣齋) 황윤석(黃胤錫)129)은 "혁혁한 운강옹이여! 호남에 으뜸이로다. 하서를 스승 삼고 율곡을 벗 삼았으니 그 유택이 지금도 전하도다."라고 하였다. 성담(性潭) 송환기(宋煥箕)130)는 "운강공의 맑은 명성과 올바른 도는 먼 세대까지 이어져서 후세에 덕행을 드리울 수 있다."라고 하였다. 수종재(守宗齋) 송달수(宋達洙)131)는 벼슬의 급류에서 과감하게 물러난 것132)을 인정하며 '학문의 힘은 속일 수가 없다.'라고 하였다. 제현의 칭송과 기술을 보면 또한 선생의 만분의 일이라도 알 수 있다. 후대의 선비들이 선생의 덕의를 존모하여 문정공(文貞公) 휘 구(坵)를 모신 도동 서원에 뒤미처 배향하였다.아! 선생의 후손이 영락하여 문헌이 전하지 않으니, 관직과 이력도 오히려 자세히 알 수 없거든 하물며 행하였던 사실이랴. 헌종(憲宗) 병오년(1846년)에 방손인 필흠(弼欽)이 비로소 가장(家狀)의 초고를 갖추어 수종재에게 묘갈명을 청하였는데, 본래 가장에서 수집한 내용이 넓지 못하고 고증한 것이 정밀하지 못하여 대부분 빠졌으며 서차가 뒤바뀌었다. 그러므로 지은 바 묘갈명이 선생이 마음에 깊이 간직한 것을 드러내지 못하였다. 그 후에 방손 국환(國煥)이 다시 가장(家狀)을 지었는데, 자세하다고 할 수는 있지만 또한 선후의 차서가 어긋나며 서술 도중에 중복된 내용이 많았는데 도리어 핵심을 빠트렸다.이에 택술이 수종재가 지은 묘갈명과 국환씨가 찬한 가장 및 매당 후손가에 보관한 문첩 등을 취하고 또 선현의 유집을 고찰하여 서로 대조하여 증거를 대어 교정하여 그 소략함을 보충하고 그 번거로움을 삭제하여 어긋난 사실을 바로잡아 차례를 정하고서 다시 가장 한 통을 지었는데, 그 관직과 이력은 을축년 평안 안무사(平安按撫使) 이상은 달리 근거할 바가 없어 다만 옛날 가장에 의거하여 기록하였다.【다만 집의(執義)는 옛날 가장에 없던 것인데, 《고봉집(高峰集)》에서 "회숙이 일찍이 집의에서 관찰사에 이르렀다."고 하였으니, 집의는 분명 초년 관직일 것이다. 그러므로 임술, 계해 년간에 편차하였다.】 순천 부사(順天府使)부터 그 아래는 미암과 고봉 등 여러 문집의 분명한 증거에 의거하여 기록하였는데, 좌부승지(左副承旨)와 호조 참판(戶曹參判)이 된 것은 선현의 유집에 있지만 어느 해에 했는지 알 수 없기에 감히 특정한 해 아래에 억지로 기록하지 않았다. 공조 참판(工曹參判)이 된 것은 묘비와 각각의 기록에서 증거를 댈 수 있으나 또한 어느 해에 있었던 일인지 알 수 없기에 기록하지 않는다. 옛날 가장에서 "신미, 임신 연간에 예조·이조·호조 참의를 지냈다."고 하였는데 관직 등급의 차례로 따져보면 계유년에 참판이 된 것을 증거할 수 있으니, 이는 믿을 만 하지만 일단 다른 책에 보이지 않기에 기록하지 않고 제쳐 둔다.돌아보건대 선생이 돌아가신 지 지금 334년이 되니 시대가 벌써 아득히 멀게 되었다. 만일 국사와 야사 및 동시대의 제현 문집을 널리 고찰하지 않는다면 가장에 자세히 실을 수 없는데, 식견이 어둡고 좁은 내가 어찌 이렇게 할 수 있겠는가. 다만 전날 고찰한 것과 지금 기록하지 않은 것은 또다시 망실할 우려가 있기에 그러므로 감히 여기에 기록하여 훗날 박식한 이를 기다리니, 지금의 가장이 전부 자세히 기록하였기에 다시 증보할 필요가 없다고 자신하지 않는다. 그러나 세상의 입언하는 군자가 혹여 취하여 채택하는 자료로 삼는다면 또한 거의 그에 가까울 것이다.숭정후 다섯 번째 정미년 맹춘 모일에 종12대손 택술은 삼가 짓는다. 先生諱啓, 字晦叔, 初字亨彦, 姓金氏, 系出新羅敬順王.高麗朝有諱春, 封扶寧君, 二傳而有諱作辛, 襲封扶寧君, 因貫以扶寧, 卽今扶安郡也.又二傳而有平章事諱坵, 文章德業, 著於麗史, 生諱汝盂, 官刑部尙書, 有大勳勞, 王賜丹書, 褒忠兩世, 享道東祠.歷四世, 至古阜郡事諱光敘, 見麗運將訖, 志存罔僕, 大歸貫鄕, 是爲五世祖也.曾祖諱懷允, 司醞署直長贈左通禮.祖諱直孫, 文科僉正贈都承旨, 栗谷李先生珥撰神道碑.考諱錫沃, 成均生員贈戶曹參判, 高峰奇先生大升撰墓碣銘.三世之贈, 以先生貴也.妣, 贈貞夫人寧越辛氏縣監仲椊女, 性嚴有法度, 爲婦爲母, 咸得其道.生四男, 喜善皆將仕郞, 坫參奉有學行, 號梅堂先生, 其季也.嘉靖戊子, 生于扶安甕井里, 眉宇秀朗, 姿稟溫粹, 人以大器期之.年甫齠齔, 丁參判公憂, 辛夫人以先生爲末子, 雖甚愛之, 然有小過, 則輒橽而誨之曰: "寡婦之子, 愛而勿勞, 則豈能自立." 義方之敎, 蓋如此.及長, 受業河西金先生之門, 與宋俛仰純·柳眉巖希春·奇高峰大升·朴思菴淳·鄭松江澈相好.壬子四月, 以啓功郞登文科, 拜承文院正字, 以學問未精, 文詞不贍, 不欲躁進, 乃退而讀書, 四字六經及性理諸書, 無不劇讀精究, 至於兵學漢語, 亦皆旁通.壬戌癸亥間, 入爲執義·翰林·校理·修撰·獻納·兵吏禮郞, 轉拜慶尙道御史, 守令贓汙者, 皆望風解印而去.甲子正月, 除持平, 有召命, 上疏辭不允, 己而出拜鏡城判官.鏡俗素强悍, 赴任之初, 務存寬仁, 治尙淸白, 鏡民咸頌其德.乙丑, 以司諫拜平安道按撫使, 上親降諭書, 蓋平安一路, 邊於西陲, 屢經兵火, 民不安集, 故有是命也.應命而歸, 旋拜順天都護府使, 以興學爲己任.前府使李楨, 以寒暄金先生謫是土而沒, 立玉川精舍而享之, 已而丁內艱而去, 先生周視規制, 以神位在邊爲未愜, 伻質李公, 更安神位于堂中, 儀式旣備, 條貫亦備.丙寅六月, 訪奇高峰, 問二主之義, 相與辨論質難.隆慶丁卯, 宣廟御極, 拜爲掌令.十一月十一日, 大殿誕日也, 與典翰奇大升·修撰柳希春·鄭澈, 至經筵廳問安, 自上賜退膳, 遂飮龍盃大醉.先生作詩以謝恩曰, 天上玉樓眞謾說, 海中蓬島亦難看.那似微臣千一遇, 從容丕顯近龍顔.自是恩遇益隆盛矣.先是安瑞順與鄭倫金應貞上疏, 直斥乙巳羣奸誣罔之罪, 俱受極刑, 先生乃與正言崔頲, 上疏合啓, 極力伸雪.戊辰春, 拜同副丞旨, 與柳希春·右副承旨金添慶, 共議語錄字義, 柳公多取先生之言.至於榻前, 奏達其由.時先生屢侍經筵, 贊襄聖德, 無不備盡, 世稱帷幄得人.又與右贊成李滉·大司憲金貴榮·大司諫姜士尙·大提學盧守愼·左相權轍·右相洪暹, 力陳靜菴諸賢被禍之由, 袞貞輩害正之狀, 連相收議, 備達無隱.十月拜尙衣院正.己巳六月, 上特除會寧府使, 憲府論以資格未準, 上牢拒之.承旨奇大升又箚奏曰: "金啓, 憲府不以人物爲非, 只以驟陞論之, 而竟不得請, 則啓以邊將不能違命, 勢當赴任, 啓, 士類也, 豈不慊於心乎.今若强使赴任, 殊乖培養之道." 上曰: "此則有不然者.金啓以不善論之而赴任, 則果如是, 只以驟陞論之而止之, 則是公論許之也, 有何慙愧." 終不允.蓋先生年纔四十, 忽陞嘉善, 故物情不愜, 而上終不允者.時朝廷, 方有邊憂, 以北門鎖鑰, 非先生不可也.七月入黃海監司望, 遂拜僉知, 十月入江原監司望.庚午春, 出爲黃海監司, 赴任時, 營中妓姬, 聞先生容姿如玉, 欲齊進荷轎, 卽命却之.十月上疏, 言乙巳伸削事, 語甚痛切, 時論韙之.訪栗谷李先生于石潭, 請祖考承旨公神道碑銘, 又問質人心道心之說于栗谷曰: "知覺發於形氣者爲人心, 然不咈乎正理, 則始焉人心, 終爲道心, 知覺發於性命者爲道心, 然循乎形氣, 則始焉道心, 終爲人心, 此人心道心相爲終始云云." 辛未二月, 入全羅監司望, 遂拜右副承旨.壬申, 拜刑曹參議, 十月, 天使韓世能·陳三謨奉詔而至, 盧蘇齋守愼爲儐相, 先生爲接伴使, 詣慕華舘, 行迎餞之禮.十二月, 爲文往祭于奇高峰之靈, 先生與高峰, 旣爲莫逆之交, 兼有姻親之誼.且高峰病歸, 卒于先生仲兄梅堂公家, 其慟傷之情, 有異於他人者矣.萬曆癸酉正月, 除東萊府使.柳希春言於上曰: "文臣能漢語, 堪爲御前通事者至少, 故國家必預爲之培養, 世宗朝中朝名士謫遼東, 至遣申叔舟·成三問等, 往學漢語, 中廟朝崔世珍·尹漑等, 以善漢語, 中廟勸獎而責任之, 其重之也如是, 今只有金啓一人, 而又差東萊府使, 承文提調率多嗟惜云云." 三月出爲忠淸兵馬節度使, 上以《行軍須知》一卷賜之, 蓋先生雖文臣, 上知其有閫帥才, 故特拜是職也.六月拜司譯院提調, 考試漢學蒙學女眞學通事講者.十二月, 拜吏曹參判兼知弘文舘春秋舘事.先生出仕十載之間, 屢有朝天之行, 而年月莫詳, 雖不知凡幾度, 然若其昭然可徵者, 則嘗以軍器僉正爲書狀官赴京, 又爲聖節使, 與尙正郞震同赴, 又爲冬至使再赴, 又爲質正官赴之, 以書狀官赴之者, 又不止一再.且考諸《栗谷全書》, 則嘉靖甲子, 先生凡三赴燕京矣, 甲子以後, 又不知有幾度也.嘗至天朝, 天子親問東事, 特賜庭對, 於是先生洞洞屬屬, 行步有矩, 眼若曙星, 聲如洪鍾, 神彩凝遠, 風儀肅整, 天子愛其風骨魁偉, 又嘉其專對, 命畫工圖繪其像, 先令頒示列國使臣, 使知東國有此人傑, 次令歸示本國君民, 俾知獲蒙天褒.晩年以名位過隆, 自解曰: "吾以遐土之蹤, 年過弱冠, 獲叅高弟, 不可謂不早也.纔踰始仕, 位至亞卿, 不可謂不達也.古人云, 知足不辱, 知止不殆, 眞至言也." 乃上疏辭職.占地于谷城東十里大江上, 構一亭, 名曰雲江亭, 因以雲江自號, 日與士友門徒, 討論書籍, 講究義理.一日召語門人曰: "我東褊小, 見人勝己, 必有嫉妒之心, 况今黨論大熾, 未知終至何境, 其必是非各立, 毁譽相隨, 玉石難辨, 朝著不靖, 我死之後, 如立墓石, 則只書本職姓名, 勿爲記蹟也." 甲戌正月六日卒, 壽四十七, 葬于扶安席洞山先兆艮坐原, 配貞夫人海州吳氏鵬之女, 祔以雙墳.有庶男二人, 孝平主簿, 孝吉直長.先生幼有異質, 夙抱遠志, 及乎旣長, 所就甚大, 論其大槩, 則師事河西先生, 早聞學問之要, 栗谷諸賢, 以道義相長, 此淵源之正也.妙年登第, 以學之不優, 自視欿然, 無意進取, 益加磨礱, 此造詣之深也.旣應召命, 一心奉公, 入贊訏謨, 出鎭屛翰, 各盡其職者, 事君之忠也.力陳靜菴諸賢被禍之由, 袞貞輩害正之狀, 又請伸削乙巳寃枉僞勳者, 尊賢辨奸之公也.其曰: "人心道心, 相爲終始"者, 審思明辨之功也.至於皇華萬里, 不憚賢勞, 能自專對, 至蒙天子之褒賞者, 聖人所謂'使於四方, 不辱君命'也.未及致事, 知足而歸, 臨終一言, 超脫黨論者, 聖人所謂'見幾而作, 不俟終日'也.是故河西先生嘗贈詩曰: "看君遠抱非流俗." 思菴贈〈朝京〉詩曰: "朝廷應己識鴻儒." 俛仰〈雜錄〉曰: "吾友晦叔, 稷契訏謨, 管葛才氣." 眉巖聞先生訃音, 驚怛悼惜曰: "斯人也, 有文武長材, 有好善惡惡之心, 有慷慨信義之行, 朝方望以大用, 遽至是乎." 高峰曰: "晦叔有文武材, 能直己以行, 不娖娖於世." 盧玉溪禛祭文曰: "德非不足也, 而壽未及於半期." 又曰: "高識卓難窺." 金鰲峰齊閔稱之曰: "爲時名卿, 忠直之聲, 震於朝著." 黃頣齋胤錫曰: "赫赫雲翁, 冠冕湖南.師河友栗, 遺澤猶覃." 宋性潭煥箕曰: "雲江公之淸名直道, 克纘遠世, 而垂裕後昆." 宋守宗達洙, 則以急流勇退許之, 而謂'學問之力不可誣也.' 觀於諸賢之稱述, 亦可以知先生之萬一矣.後之章甫慕先生德義, 追享道東文貞公祠.噫, 先生之後承零替, 文獻無傳, 官職履歷, 尙不可詳, 况其事實乎.憲廟丙午, 旁孫弼欽, 始具狀草, 請墓碣銘于守宗齋, 而本狀裒蒐未廣, 考據未精, 率多疎漏顚倒, 故所撰墓銘, 未能盡發其蘊.其後旁孫國煥, 更撰家狀, 可謂詳矣, 亦未免先後舛錯, 間多架疊, 而反遺肯綮.於是澤述取守宗齋所撰墓銘·國煥氏所撰家狀及梅堂後孫家所藏文牒, 又考先賢遺集, 參互證訂, 補其疎略, 刪其繁蔓, 正其差誤, 定其次第, 復撰家狀一通, 而其官職履歷, 自乙丑平安按撫使以上, 他無所據, 而只依舊家狀錄之.【但執義, 舊狀所無, 而《高峰集》云, "晦叔嘗以執義, 轉至觀察使", 則執義必是初職, 故係于壬戌癸亥之間.】 自順天府使以下, 據眉高諸集之明證而錄之, 其爲左副承旨·戶曹參判, 有先賢遺集, 而未詳在何年, 故不敢强錄于某年之下.爲工曹參判, 有墓碑及各錄之可徵, 而亦未詳在何年, 故不錄.舊狀云, 辛未壬申間, 爲禮吏戶曹參議, 揆以官階次第, 證以癸酉參判, 則此爲可信, 而姑未見據於他書故闕之.顧今先生之沒, 爲三百有三十有四年, 世旣遠矣, 如非廣考國乘野史及幷時諸賢文集, 難以詳悉于狀, 而昧識謏見, 豈足以與此.但前日之所考, 及今不記, 則又有亡失之慮, 故敢此敘錄, 益俟異日之博見, 非謂今日之狀, 詳悉已盡, 而不復增補也.然世之立言君子, 或取而爲裁擇之資, 則亦庶幾近之云爾.崇禎五丁未孟春日, 從十二世孫澤述謹狀. 사랑만하고……않는다면 《논어》 〈헌문(憲問)〉에서 "사랑한다면 그를 노력하도록 만들지 않을 수 있겠는가. 충성한다면 그를 깨우쳐 주는 일을 그만둘 수 있겠는가.〔愛之 能勿勞乎 忠焉 能勿誨乎〕"라고 공자가 말하였는데, 이에 대해서 소식(蘇軾)이 "사랑하기만 하고 노력하도록 만들지 않는다면 그것은 새나 짐승의 사랑이요, 충성하기만 하고 깨우쳐 주지 않는다면 그것은 여자나 내시의 충성이다.〔愛而勿勞 禽犢之愛也 忠而勿誨 婦寺之忠也〕"라고 해설하였다. 두 ……물어 《고봉집》 권2 〈이주설(二主說)〉에 그 내용이 보인다. 김첨경(金添慶) 1525~1538. 본관은 강릉(江陵), 자는 문길(文吉), 호는 동강(東岡) 또는 장주(漳洲)이다. 1572년(선조 5) 천추사로 명나라에 다녀왔고, 이어 대사간, 형조참판을 거쳐 예조판서에 이르렀다. 역학에 자득(自得)의 묘를 얻었고, 경학에 전력하였다. 기품이 청아하고 효우(孝友)가 매우 뛰어났다. 시호는 숙간(肅簡)이다. 김귀영(金貴榮) 1520~1593. 본관은 상주, 자는 현경(顯卿), 호는 동원(東園)이다. 평난공신 2등에 책록되고, 상락부원군에 봉해진 뒤 기로소에 들어갔으나, 시비에 적극성이 없다는 조헌의 탄핵으로 사직하였다. 임진왜란 때 중추부영사로서 임해군을 배종하여 함경도에 피란하였는데, 회령에 수개월 머무르는 동안 민폐가 많아 인심을 잃었다. 강사상(姜士尙) 1519~1581. 본관은 진주(晋州), 자는 상지(尙之), 호는 월포(月浦), 시호는 정정(貞靖)이다. 1568년(선조 1) 사간 유희춘과 조광조의 신원과 추숭을 건의하였다. 1570년에는 주청사로 명나라에 다녀왔으며, 그 뒤 병조 ·형조 ·이조 판서와 한성부판윤을 역임하였다. 권철(權轍) 1503~1578. 본관은 안동, 자는 경유(景由), 호는 쌍취헌(雙翠軒), 시호는 강정(康定)이다. 사관(史官)이 되어 사초(史草)를 쓸 때 직필(直筆)하여 영의정 김안로(金安老)의 미움을 받아 한때 좌천되었다가, 1537년 김안로가 사사(賜死)되자 다시 사관에 복직되었다. 1565년 윤원형(尹元衡)이 죽자 이듬해 우의정이 되었다. 이 해 등극사(登極使)로 명나라에 다녀오고, 1567년 선조 즉위년에 좌의정이 되었으며, 1571년 영의정에 올랐다. 홍섬(洪暹) 1504~1585. 본관은 남양(南陽), 자는 퇴지(退之), 호는 인재(忍齋), 시호는 경헌(景憲)이다. 조광조(趙光祖)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김안로의 전횡을 탄핵하다가 그 일당의 무고로 유배, 김안로가 사사(賜死)된 뒤 풀려나왔다. 그 후 좌찬성 겸 이조판서, 대제학을 겸임하게 되자 삼대임(三大任)이 과중하다 하여 좌찬성을 사임하였다. 우의정, 좌의정을 거쳐 영의정을 세 번에 걸쳐 중임하였다. 최세진(崔世珍) 1468~1542. 본관은 괴산(槐山), 자는 공서(公瑞)이다. 중인(中人)으로서 특전을 받아 1503년(연산군9) 별시문과(別試文科)에 급제하였다. 조선 전기의 어문학자. 당대 최고의 중국어·운서 연구의 대가였다. 이문(吏文)에도 뛰어나, 사대문서 작성과 사신의 내방에 중요 역할을 했다. 《훈몽자회》를 편찬하고 언문자모를 표기하여 한글의 보급과 발전에 크게 기여하였다. 저서는《사성통해》,《이문집람, 《언해효경》등이 있다. 윤개(尹漑) 1494~1566. 본관은 파평(坡平), 자는 여옥(汝沃), 호는 회재(晦齋)로 김안국(金安國)의 문인이다. 중종 때 기묘사화에 관련되었으나 중국어를 잘해 외직에 좌천되는 것으로 그쳤다. 인종 때 윤원형과 함께 을사사화를 일으켜 대윤의 제거에 가담하고 위사공신에 책록되었으나, 선조 초에 을사 원흉으로 규탄받아 모든 훈작이 삭탈되었다. 상진(尙震) 1493~1564. 본관은 목천(木川), 자는 기부(起夫), 호는 송현(松峴)·범허재(泛虛齋)·향일당(嚮日堂), 시호는 성안(成安)이다. 1526년 예조좌랑 때 성절사(聖節使)의 서장관(書狀官)으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1544년 중종이 죽자 춘추관지사(春秋館知事)로 《중종실록(中宗實錄)》 편찬에 참여했다. 그 후 중추부지사(中樞府知事) 등을 지내고 우의정·좌의정을 거쳐 1558년 영의정이 되었다. 15년 동안 재상으로 왕을 보좌, 명상으로서 조야의 신망이 두터웠다. 족함을……않다 노자 《도덕경》 44장에 보인다. 간성이 되어 원문의 '병한(屛翰)'은 나라의 울타리와 기둥이란 뜻으로 《시경》 〈판(板)〉에서 "큰 제후국은 나라의 병풍이며 대종(大宗)은 나라의 정간(楨榦)이다.〔大邦維屛, 大宗維翰.〕"라고 하였다. 수고함 원문의 '현로(賢勞)'를 해석한 말이다. 맹자(孟子)가 《시경》 〈북산(北山)〉 시를 인용하면서 "이것이 왕의 일이 아님이 없건만, 나만 홀로 어질다 하여 수고롭구나.〔此莫非王事 我獨賢勞也〕"라고 하였다. 《孟子 萬章上》 사방에……않는다 《논어》 〈자로(子路)〉에서 자공(子貢)이 어떠해야 선비라고 말할 수 있느냐고 묻자, 공자가 "염치를 알고서 자기 몸가짐을 단속하고, 사방에 사신으로 나가서 임금의 명을 욕되게 하지 않아야 선비라고 이를 수 있다.〔行己有恥 使於四方 不辱君命 可謂士矣〕"라고 하였다. 기미를……않는다 《주역》 〈계사전 하(繫辭傳下)〉에 "군자는 기미를 보고 떠나면서 하루가 다하기를 기다리지 않는다. 〈예괘(豫卦) 육이(六二)〉에 '돌처럼 견고해서 하루가 다하기를 기다리지 않으니 정하고 길하다.'라고 하였다. 절개가 돌과 같으니 어찌 하루가 다하기를 기다리겠는가. 이를 통해서 군자가 결단하는 것을 알 수 있다.〔君子見幾而作 不俟終日 易曰 介于石 不終日 貞吉 介如石焉 寧用終日 斷可識矣〕"라고 하였다. 옥계(玉溪) 노진(盧) 1518~1578. 본관은 풍천(豊川), 자는 자응(子膺), 호는 옥계(玉溪) ·칙암(則庵), 시호는 문효(文孝)이다. 1546년 증광문과에 을과로 급제한 후 박사 ·전적 ·예조의 낭관을 거쳐 지례현감이 되었는데, 선정을 베풀어 청백리에 녹명되었다. 1567년 이조참의에서 충청도관찰사, 전주부윤(全州府尹)을 거쳐 부제학이 되었는데 홀어머니의 봉양을 위해 모두 사퇴하고 곤양군수로 나갔다. 평소 기대승(奇大升) ·노수신(盧守愼) ·김인후(金麟厚) 등의 학자들과 교유하였다. 어머니에 대한 지극한 효도로 정문(旌門)이 세워졌다. 오봉(鰲峰) 김제민(金齊閔) 1527~1599. 본관은 의성, 자는 사효(士孝), 호는 오봉(鰲峰), 시호는 충강(忠剛)이다. 이항(李恒)의 문인이다. 화순현감 ·순창군수, 1586년 전라도도사(都事)를 지낸 뒤, 병으로 물러났다. 1592년 임진왜란 때 향리(鄕里)에서 의병을 모아 싸웠으며, 난이 끝나자 학문에 전심하였다. 사마천(司馬遷)의 《사기》에 정통하였고, 많은 저서가 있었으나 전란으로 거의 타 없어졌다. 이조판서가 추증되었고, 문집에 《오봉집》이 있다. 이재(頣齋) 황윤석(黃胤錫) 1729~1791. 본관은 평해(平海), 자는 영수(永叟), 호는 이재(頤齋)·서명산인(西溟散人)·운포주인(雲浦主人)·월송외사(越松外史)로, 김원행(金元行)의 문인이다. 그의 학문은 실학시대의 학풍을 이어받아 발전시킨 것인데, 처음에는 이학(理學)의 공부에 힘쓰고 『주역』을 비롯한 경서의 연구도 하였으나, 북경을 거쳐서 전래된 서구의 지식을 받아 이를 소개한 공이 크고, 또 종래의 이학과 서구의 새 지식과의 조화를 시도한 점이 특색이다. 성담(性潭) 송환기(宋煥箕) 1728~1807. 본관은 은진(恩津), 자는 자동(子東), 호는 심재(心齋) ·성담(性潭), 시호 문경(文敬)이다. 1795년 이조참의에 이어 예조판서에 오르고 좨주(祭酒) ·이조판서를 거쳐 우찬성(右贊成)에 이르렀다. 당시 성리학계(性理學界)에서 심성(心性)의 변(辨)으로 논쟁을 벌일 때 호론(湖論)인 한원진(韓元震)의 주장을 지지했다. 학덕을 겸비하여 조야의 존경을 받았으며 문하에 많은 선비가 모여들었다. 문집 《성담집(性潭集)》이 있다. 수종재(守宗齋) 송달수(宋達洙) 1808~1858. 본관은 은진(恩津)이고, 호는 수종재(守宗齋)이다. 송시열(宋時烈)의 8대손이며, 송치규(宋穉圭)에게 학문을 배웠다. 예학과 성리학에 뛰어났으며, 낙론(洛論)을 지지하여 인물성동론(人物性同論)을 주장하였다. 문집인 《수종재집》이 있다. 벼슬의……것 벼슬자리에서 과감하게 물러나는 것을 말한다. 송나라 전약수(錢若水)에 대해서 어떤 도승(道僧)이 "급류 속에서 용감하게 물러날 수 있는 사람이다.〔是急流中勇退人也〕"라고 평하였는데, 과연 그가 추밀 부사(樞密副使)에 이르렀을 때 40세도 안 된 나이로 관직에서 물러났다는 일화가 송나라 소백온(邵伯溫)이 지은 《문견전록(聞見前錄)》 권7에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