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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재기 【기미년(1919)】 懶齋記 【己未】 방과 마루, 문과 창, 대야와 사발 등에 명(銘)을 두는 일은 고금의 사람이 잠시도 폐지한 적이 없고, 부지런히 노력하는 뜻을 여기에 담지 않은 것이 없기에 나는 나재공(懶齋公)의 편호(扁號)에 대해서 그가 법문(法門)을 깨고 어긴 것을 내심 괴이하게 여겼다가 그 재명(齋銘)을 읽고 난 뒤에 이름을 명한 것이 화둔 선생(華遯先生 전우(田愚))에게서 나왔고, 그 뜻이 매우 깊고 간절하여 보통 사람이 생각할 수 있는 바가 아님을 알게 되었으니, 청컨대 그 말과 뜻을 부연하여 진술해도 되겠는가?무릇 천하의 일이란, 민첩함과 노둔함은 각기 그 유를 따르고, 장점과 단점은 똑같이 좋은 점과 나쁜 점이 있으니, 비록 조물주의 신묘함으로도 비오는 날씨와 갠 날씨를 둘 다 갖출 수 없고, 해와 달의 밝음으로도 낮과 밤을 함께 비출 수 없는데, 하물며 사람이야 더 말할 것이 있겠는가. 이런 까닭으로 게으른 것이 있는 뒤에 부지런한 것이 있으니, 부지런하지 않는 바가 없는 것은 반드시 게으르지 않는 바가 없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악에 게으른 자가 반드시 선에 부지런한 자이고, 영리에 부지런한 자가 바로 의리에 게으른 자임을 알겠다.현재 공은 독으로 창을 내고 가시덤불로 대문을 만들어 살면서도 넓은 저택처럼 여기고, 여기저기 꿰맨 옷을 몸에 걸치면서도 생계를 꾸려 나가는 재주가 서툰 것을 부끄럽게 여기지 않았다. 게으른 것이 이와 같았으니, 의당 부지런한 것은 삼천 삼백(三千三百)16)을 강론하고 일도양단에 힘쓰는 것이었다. 이 재실에 거처하면서 스승의 뜻을 좇음이여, 나는 그가 허물을 면했음을 알겠다.내가 또 생각하건대, '게으름[懶]'이라는 글자는 '심(心)'방에 '힘입을 뢰[賴]'자로 이루어졌으며, 마음은 의리의 본심이 있고 또한 이욕의 사심이 있으니, 진실로 본심을 힘입는다면 이는 또한 악에 게으른 것이 아니겠는가. 만약 힘입는 것이 사심에 있다면 두렵게 여길 만한 것이 의리에 게으른 것이 아니겠는가. 이는 또 순(舜) 임금과 도척(盜跖)이 되는 기관(機關)이니, 더욱 삼가지 않을 수 없고, 인간 세상을 경계시키고 반성하게 할 수 있는 점이 있다. 그래서 이렇게 공에게 고하고 편액 뒤에 끌어다 이어 써서 이 재실에 오르는 자에게 질정하도록 권고하였다. 室堂、戶牖、盤盂之有銘, 今古人未之或廢, 而莫不勤勵之意是寓.余於懶齋公之扁號, 竊怪其用打乖法門, 及讀其齋銘, 然後知命名出自華遯先生, 而其意之深切, 有匪夷所度者矣, 請敷其說而衍其義可乎? 凡天下之事, 敏鈍各以其類, 長短均有得失, 雖以造化之神也, 而未得雙備於雨暘, 日月之明也, 而不能通照於晝夜, 而況於人乎? 是故有所懶而後有所勤, 無所不勤者, 必無所不懶者也. 吾知其懶於惡者, 必勤乎善者也; 營利勤者, 乃義之懶者也.方公甕蓽而爲廣廈, 身百結而不恥生理之疏.懶也若是, 宜其所勤者, 三千三百之是講, 而一刀兩段之是務也.居是齋而遵師旨乎, 知其免矣.夫抑余又念懶之爲字, 從心從賴, 心有義理之本心, 亦有利欲之私心, 苟本心之是賴, 斯不亦懶於惡者乎? 如所賴在於私心, 可畏者非懶於義乎? 此又舜、跖之機關, 尤不可不愼, 而有足以警省人世者.旣以告之於公, 牽連書之扁後, 諗質于登斯齋者. 삼천 삼백(三千三百) 크고 작은 예절을 말하는 것으로, 《예기(禮記)》 〈예기(禮器)〉에서는 "경례가 삼백 가지이고, 곡례가 삼천 가지인데, 그 근본은 하나이다.〔經禮三百, 曲禮三千, 其致一也.〕"라고 하였고, 《중용장구》 제27장에서는 "넉넉히 크도다. 예의가 삼백 가지이고, 위의가 삼천 가지이다.〔優優大哉! 禮儀三百, 威儀三千.〕"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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土地所有權保存ニ付證明申請書一 不動産ノ表示一 所在地 始興郡 秀岩面 物旺里 淡字 六九七-一 宅地 九百四拾坪 不動産ノ價格金 六拾圓也一 所在地 上同 淡字 六九七-二 田地 貳百八拾六坪貳合 不動産ノ價格金 拾圓也一 所在地 上同 淡字 六九八 田地 壹百拾八坪五合五夕 不動産ノ價格金 六圓也一 所在地 上同 鱗字 六四 六四一 畓地 壹千九拾五坪壹合參夕 不動産ノ價格金 貳百圓也一 證明ノ目的 所有權保存一 所有者ノ住所氏名 富川郡 蘇萊面 茂芝洞 三統九戶 所有者 李宜容 (印)一 不動産ノ價格金 貳百七拾六圓也一 登錄稅金 八拾參錢也右土地ハ自己ノ所有ナルコトテ保存證明セラレ度別紙面テ添附レ此段及申請候也大正三年 七月 卅一日 富川郡 蘇萊面 茂芝洞 三統九戶 申請人 李宜容 (印)始興郡廳 御中證明濟證明官吏 始興郡守 尹弼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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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구에게 답함 을유년(1945) 答金聖九 乙酉 그대가 초상을 당한 후 이미 일주기가 되어 연제를 지낼 때 일찍이 몸소 조문하지 못하여 조문 편지로 대신하고, 그대 형님의 부음을 받은 후 시일이 또 이미 오래되었는데 조문 편지조차 쓸 겨를이 없었습니다. 인사(人事)를 기준으로 따진다면 버림을 받아야 마땅한데도 도리어 멀리서 은혜로운 편지를 보내주셨습니다. 그대 집안의 상사의 고통과 조국부흥의 바람을 간절히 말씀하셨는데, 저를 한 집안의 친척으로 여겨주는 것과 같은 측면이 있었습니다. 후의를 깊게 느꼈으니, 어떻게 감사드려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아, 작고하신 그대 형님의 일생은 선친의 유지를 받들어 도를 부흥시키고 강토를 회복하는 데에 쓰지 않은 계책이 없었건만 끝내 금년 7월 8일에 기쁜 소식을 듣지 못하고 먼저 열흘 전에 죽었으니, 어찌 슬프지 않겠습니까. 비록 그러할지라도 오늘의 기쁜 소식은 통괄적으로 말하면 온 국민의 보편적인 경사이고 단편적으로 말하면 당신 집안 일가의 경사라고 하더라도 괜찮습니다. 그대 선친과 선형의 밝은 충심은 죽을 때까지도 굳건함이 이미 이와 같았고, 모친을 여의어 상중에 있는 당신은 오십 년 동안 문을 닫고 스스로를 바르게 하였습니다. 당신 막내 동생의 여러 해 동안 우울한 생각은 또한 어떠했습니까. 그런데 하루아침에 신장되었으니 살아 있는 사람이 이미 즐거이 쳐다보며 기염을 토해내니, 작고하신 분들의 혼령이 살펴봄이 또한 어찌 매우 밝아서 기뻐하지 않으시겠습니까. 바라건대 이것으로 소회를 푸시어 절대 너무 슬퍼하지 마시고 도리어 스스로 위로하는 것이 어떠하겠습니까. 저는 질병으로 거의 죽음에 이르렀는데, 처음으로 통쾌한 일을 봤으니, 삼려대부 굴원처럼 세상을 벗어나 신선이 되고 싶었던 소원78)을 이룰 수 있음을 스스로 다행이라 여깁니다. 처음에는 병을 무릅쓰고 문하에 이르러 먼저 위로의 예를 드리고 아울러 소회를 모두 토로하려고 했는데, 끝내 스스로 떨치고 일어나지 못한 채 다만 셋째 아들 형관을 보내 대신 가게 하니, 정말로 부끄럽고 송구스럽습니다. 다시 용서해주시기 바랍니다. 아들은 비록 매우 용렬할지라도 다행히 왜놈의 더러움엔 오염되지 않았으니, 원컨대 한 말씀 가르쳐주셔서 흥성할 수 있도록 해주기 바랍니다. 自尊遭憂, 朞而練矣, 曾不躳吊而替以狀, 自承令伯氏訃音, 日亦久矣, 而狀且未遑.責以人事, 宜遭疎斥, 乃蒙遠賜惠狀.尊門喪禍之痛․祖國興復之幸, 說到懇至, 有若一家之親, 深感厚意, 不知攸謝.噫, 先伯氏一生, 承先庭遺志, 扶道復疆, 計無不至, 而竟未聞今年七月八日之喜報, 先逝於旬日前, 寧不悲哉? 雖然, 今日喜報, 統言則萬姓之普慶, 偏言則謂尊門一家之慶, 可也.先父兄炳然之丹, 至死蘊結既如是, 哀侍之半百歲, 杜門自靖, 令季氏積年壹鬱之思想, 又如何哉? 而乃一朝見伸, 生者既快覩而吐氣, 則神鑑亦豈不孔昭而悅豫乎? 幸願以是遣懷, 切勿過悲, 還以自慰, 如何? 澤述疾病垂死, 始見快事, 自幸遂屈三閭度世之願已耳.初欲力疾詣門, 先伸慰禮, 兼究所懷, 竟以不能自振, 而止送第三子炯觀替行, 殊切歉悚, 幸再恕之.兒子雖庸甚, 尚幸不染倭穢, 願一言之敎, 俾有興成也. 삼려대부……소원 주희(朱熹)가 유덕수(劉德修)에게 답한 편지에 "굴원이 지나간 일은 미칠 수 없고 앞으로 올 일은 알 수 없기 때문에 오래 살아서 속진의 세상을 벗어나 신선이 되기를 원함이 있었으니, 이 또한 당시 사람들의 망녕된 일을 견디지 못하여 그들이 마침내 어떻게 되는지 보고자 한 것일 뿐입니다. 매양 글을 읽다가 여기에 이르기만 하면 한 번 크게 웃지 않은 적이 없었습니다.〔屈平以往者不及來者未聞, 而有長生度世之願, 亦是不堪時人之妄作, 而欲見其末梢作如何出場耳. 每讀至此, 未嘗不發一大笑也〕"하였다. 《주자대전속집(朱子大全續集)》 권6 〈답유덕수(答劉德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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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송기 【정미년(1907)】 庭松記 【丁未】 모든 생물이 생장하는 데에 다행스러운 것이 있고 불행한 것이 있으며, 또 불행 중에 다행한 것이 있고 다행 중에 불행한 것이 있으니, 내 집에 외따로 자라는 소나무로 징험해보면 그것이 진실로 옳음을 알 수 있다.이 소나무는 뜰 가의 거칠고 메마른 땅에서 생장하여 뿌리와 줄기가 이리저리 굽어지고 꺾여 재목답지 못하고, 가지와 잎이 서리서리 얽히고 막혀 뻗질 못하니, 다행이 깊은 산의 울창한 숲 속에서 생장하여 위로는 하늘을 찌르고 아래로는 천 사람을 덮어주는 것과 비교하면 불행하다고 이를 만하다. 그러나 장인이 베거나 나무꾼이 자름에 미쳐서는 깊은 산에서 생장한 것은 하루아침에 없어져 버리지만, 이것은 운치를 아는 시인이나 청렴한 선비에게 취해져 쉬거나 머무는 사랑을 받아 꺾이고 베어지거나 잘리고 뽑히는 우환이 없으니, 이에 다행 중에 불행한 점이 있고, 불행 중에 또한 다행한 점이 있다.아, 옛 군자는 불행스럽게도 깊은 골짜기나 머나먼 바닷가의 변방에 있을 때에는 가난하여 스스로 끼니를 해결하지 못하고 곤궁하여 스스로를 보호하지 못하지만, 다행스럽게도 현인을 좋아하는 자가 일어나면 천거하여 묘당(廟堂)의 높은 자리에 두어서 녹봉으로 부유하게 하고 관작으로 귀하게 하며, 신의로 맡기고 공경으로 존숭한다.내가 비록 오늘날 세상에도 또한 옛 군자처럼 위에 있는 자에게 등용되는 경우가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지금 좋은 땅에서 자라지 못하였으나 끝내 사람의 사랑을 받는 소나무가 이러한 군자와 비슷한 점이 있으니, 이것이 내가 감흥이 일어 마지않는 이유이고, 세한후조(歲寒後凋)의 절개1)는 우리 공자가 이미 찬양하였으니, 앞으로 날마다 여러 차례 반복하여 읊조릴 것이다. 凡物之生, 有幸者, 有不幸者, 又有不幸而幸者, 幸而不幸者.以余家所存孤松驗之, 知其信然矣.是松也, 生於庭除瘠埆之地, 本幹屈曲而不材, 柯葉鬱結而不揚, 視幸而生乎深山茂林之中, 上干雲霄, 下庇千人者, 可謂不幸也.然及乎匠石斬焉, 樵者伐焉, 則生乎深山者, 將一朝而盡, 而此則爲韻人淸士之所取, 有憩稅盤桓之愛, 而無敗伐剪拜之患.於是乎, 幸者有不幸矣, 不幸者亦有幸矣.嗟呼, 古之君子, 不幸而在荒谷絶海之濱, 貧不能自食, 窮不能自保, 幸而有好賢者作, 進而置之廟堂之上, 富之以祿, 貴之以爵, 任之以信, 尊之以敬.余雖不知今之世, 亦有如古之君子, 爲在上者所取.然今松之不生樂地而終爲人愛者, 有似乎此.此余所興感而不已者也.若其歲寒後凋之節, 吾夫子已贊揚之, 方且日三復焉. 세한후조(歲寒後凋)의 절개 해가 저물어 날씨가 추워진 뒤에야 맨 늦게 시드는 절개를 말하는 것으로, 《논어(論語)》 〈자한(子罕)〉에 "해가 저물어 날씨가 추워진 뒤에야 소나무와 잣나무가 맨 늦게 시든다는 것을 안다.〔歲寒然後, 知松柏之後凋也.〕"라고 한 데에서 나온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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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암기 【정미년(1907)】 果菴記 【丁未】 외제(外弟) 자정(子貞)이 일찍이 나에 말하기를,"내가 거처하고 있는 암자에 '과(果)'로 편액을 하였으니, 형님께서 저를 위해 그 사실을 기록해주십시오."하였다. 내가 이에 응답하여 말하기를,"이것은 어렵지 않다. 그러나 나는 그대가 '과'에서 무엇을 취한 것인지 모르겠다. 오늘날 세상이 여러 음(陰)이 양(陽)을 박해하는 시기여서 그대는 먹지 않고 남겨둔 큰 과일[碩果]을 보호하듯 하나의 양[一陽]을 보호하고자 하는 것인가?2)《예기》에 이르기를, '장차 선한 일을 하려고 할 때에는 부모에게 아름다운 명예를 끼칠 것을 생각하여 반드시 과감하게 행한다.'3)라고 하였으니, 이것은 부모가 이미 돌아가신 사람을 위해서 한 말이다. 그러나 '부모가 비록 돌아가셨지만'이라고 하였다면 부모가 모두 생존해 계신 자는 더욱 알 수 있다. 그대는 여기에서 취한 것인가?공자가 말하기를, '유(由 계로(季路))는 과감하니, 정사에 종사하는 데에 무슨 문제가 있겠습니까.'4)라고 하였으니, 그대는 정사에 종사하는 데에 뜻을 두고서 계로를 본받으려고 하는 것인가?아니면 세상의 혼란이 이미 극도로 심하여 큰일을 할 수 없기 때문에 영원히 떠나가서 돌아오지 않기를 은둔자처럼 과감하게 하려는 것인가?또는 혹 타고난 기질에 얽매여 대인(大人)이 될 수 없다면 차라리 행하는 것을 반드시 과감하게 하여 오히려 선비라는 이름을 잃지 않기를 바라는 것이 낫다고 여겨서인가? 그대는 나에게 분명하게 알려주게나."하였다. 자정이 말하기를,"괴이하군요! 형님이여. 공자가 말하기를, '널리 배우고, 자세히 묻고, 신중히 생각하고, 밝게 분변하고, 독실하게 행하여 남이 한 번에 잘하면 나는 백 번을 노력하고, 남이 열 번에 잘하면 자기는 천 번을 노력해야 한다. 이 방법을 과감하게 잘한다면 비록 어리석다 하더라도 반드시 밝아지며, 비록 유약하다 하더라도 반드시 강건해진다.'5)라고 하여 진실하게 당부하는 뜻을 다했으니, 이것이 학문을 하는 전체요, 덕에 들어가는 큰 방법입니다. 그런데 형님께서는 '과감하게 잘한다[果能]'의 '과'가 있는 줄 모르고, '과' 중에 단지 한 가지 일로 말한 것과 성인이 달갑게 여기지 않은 '과'만을 취하여 견주시는 것은 무엇 때문인지요? 제가 암자에 편액을 한 것은 대체로 이러한 뜻에서 나온 것이고, 또한 제가 사숙하는 간재(艮齋) 전 선생(田先生 전우(田愚))께서 명하신 것이 아니겠습니까. 형님께서 시험 삼아 생각하신다면 반드시 그 설을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하였다. 내가 이에 문득 깨닫고서 말하기를,"내가 알겠다. 무릇 성인이 성인이 되는 이유는 명철하고 강건하기 때문이고, 평범한 사람이 평범한 사람이 되는 이유는 우둔하고 유약하기 때문이니, 우둔하고 유약한 것을 변화시켜 명철하고 강건할 수 있다면 평범한 사람도 또한 성인이 될 수 있다. 그러나 비록 변화하고자 한다 하더라도 배우고 물으며 백 번 천 번 노력하는 공부를 사용하지 않는다면 될 수 없고, 비록 배우고 물으며 백 번 천 번 노력하는 공부를 사용한다 하더라도 과감하고 능숙하게 사용하지 못한다면 또한 될 수 없으니, '과'라는 한 글자는 천 마리 소보다 힘이 세고 열 마리 호랑이보다 용감하니, 바로 평범한 사람을 단련시켜 성인으로 만들어주는 성패의 기관이 된다.만약 과감하게 행하여 명철함과 강건함에 이를 수 있다면 음이 성대한 세상을 만난다 하더라도 저절로 하나의 양을 보호하고 지키기를 큰 과일처럼 할 수 있을 것이고, 선을 하려고 할 때에 저절로 부모를 생각하여 반드시 과감하게 행할 수 있을 것이며, 뜻을 얻어 정사에 종사하게 되어서는 저절로 계로처럼 과감하게 행할 수 있을 것이니, 은둔자의 과감함6)이나 소인이 행실을 과단성 있게 하는 것7)은 또 말 할 것이 없을 것이다. 간옹이 명한 이유와 자정이 편액을 한 이유가 아마도 이 때문일 것이다."하였다. 자정이 기뻐하며 말하기를,"지금에서야 비로소 '과암(果菴)'의 사실을 기록할 수 있게 되었으니, 다시는 남은 감정이 없게 되었습니다. 그 힘을 쓰는 방법은 공자가 다섯 가지 부조(不措)8)의 가르침을 두었으니, 내가 앞으로 스스로 힘쓸 것입니다."하였다. 外弟子貞嘗謂余曰: "吾所居之菴, 扁之以果, 兄爲我記其實." 余應之曰: "是不難.然余未知子奚取於果也? 今之世, 群陰剝陽, 子欲保一陽, 如碩果之不食耶? 《記》曰: '將爲善, 思貽父母令名, 必果.' 此爲父母已沒者言.然旣云'父母雖沒' 則其父母俱存者, 尤可知矣.子其有取於此耶? 孔子曰: '由也果, 於從政乎, 何有?' 子其有志於從政而學季路耶? 抑世亂已極, 不可以有爲, 故欲長往不返, 如隱者之果哉耶? 又或氣稟所拘, 不能爲大人, 則無寧所行必果, 猶欲不失士之名耶? 子其明告我." 子貞曰: "異哉! 兄也.孔子曰: '博學審問愼思明辨篤行, 人一己百, 人十己千, 又以果能此道, 雖愚必明, 雖柔必剛.' 致其丁寧之意.此爲學之全體, 入德之大方.兄不知有果能之果, 乃取果之只以一事言者及聖人所不屑之果而擬之, 何也? 吾之扁菴, 蓋出於此, 而亦非吾之所私艮齋 田先生之所命也.兄試思之, 必得其說." 余乃憬然而悟曰: "余知之矣.夫聖人之所以爲聖人者, 以其明且剛也; 凡人之所以爲凡人者, 以其愚且柔也.能變愚柔而爲明剛, 則凡人亦可以爲聖人矣.雖欲變之, 而不用學問百千之功, 未可也; 雖用學問百千之功, 而不果能用之, 亦未可也.果之一字, 大於千牛, 勇於十虎, 乃鍛凡鑄聖之成敗機關也.苟能果而致明剛焉, 則遇陰盛之世, 自能保守一陽而如碩果矣; 將爲善, 自能思父母而必果矣; 得志而從政, 自能如季路之果矣.至於隱者之果哉, 小人之行果, 又不足道矣.艮翁之所命, 子貞之所扁, 其以此哉." 子貞喜曰: "今乃記得果菴之實, 無復餘蘊矣.其用力之方, 夫子有五不措之訓, 吾方且自勖焉." 오늘날 …… 것인가 《주역》의 〈박괘(剝卦)〉는 5개의 음효와 1개의 양효로 구성되어 5개의 음이 하나 남은 양을 박해하는 형상을 가지고 있고, 〈박괘 상구(上九)〉에 "마지막 남은 큰 과일은 먹지 않는다.〔碩果不食.〕"라고 하였는데, 대한제국의 혼란한 시대 상황을 〈박괘〉에 비유하고, 이에 대처하는 당시 선비들의 마음을 〈박괘 상구〉의 효사(爻辭)를 인용해 표현한 것이다. 선한 …… 행한다 《예기》 〈내칙(內則)〉에 "부모가 비록 돌아가셨지만 장차 선한 일을 하려 할 때에는 부모에게 아름다운 명예를 끼칠 것을 생각하여 반드시 과감하게 행하고, 장차 선하지 못한 일을 하려 할 때에는 부모에게 수치와 욕을 끼칠 것을 생각하여 반드시 과감하게 행하지 말아야 한다.〔父母雖沒, 將爲善, 思貽父母令名, 必果; 將爲不善, 思貽父母羞辱, 必不果.〕"라는 내용이 보인다. 유(由)는 …… 있겠습니까 《논어집주》 〈옹야(雍也)〉 제6장에 보인다. 널리 …… 강건해진다 《중용장구》 제20장에 보인다. 은둔자의 과감함 원문의 "은자지과재(隱者之果哉)"를 국역한 것으로, 《논어》 〈헌문(憲問)〉에서 공자(孔子)가 천하를 경륜할 뜻을 지니고 위(衛)나라에서 경쇠를 치고 있을 때에, 삼태기를 메고 문 앞을 지나가던 한 은사(隱士)가 그 소리를 듣고는 "자신을 알아주지 않으면 그만두면 될 것이다.〔莫己知也, 斯已而已矣.〕"라고 말하자, 공자가 "과감하구나. 그렇게 처신한다면 어려울 것이 없겠다.〔果哉! 末之難矣.〕"라고 한 데에서 인용한 말인 듯하다. 소인이 …… 것 《논어집주》 〈자로〉 제20장에 자공(子貢)이 '선비[士]'의 세 번째 수준을 묻자, 공자가 말하기를, "말을 반드시 미덥게 하고 행실을 반드시 과단성 있게 하는 것은 국량이 좁은 소인이지만 그래도 또한 그다음이 될 수 있다.'〔言必信, 行必果, 硜硜然小人哉, 抑亦可以爲次矣.〕"라는 구절에서 인용한 말인 듯하다. 다섯 …… 부조(不措) 《중용장구》 제20장 제19절에 "배우지 않음이 있을지언정 배울진댄 능하지 못하면 놓지 않으며, 묻지 않음이 있을지언정 물을진댄 알지 못하면 놓지 않으며, 생각하지 않음이 있을지언정 생각할진댄 알지 못하면 놓지 않으며, 분변하지 않음이 있을지언정 분변할진댄 분명하지 못하면 놓지 않으며, 행하지 않음이 있을지언정 행할진댄 독실하지 못하면 놓지 않는다.〔有弗學, 學之, 弗能, 弗措也; 有弗問, 問之, 弗知, 弗措也; 有弗思, 思之, 弗得, 弗措也; 有弗辨, 辨之, 弗明, 弗措也; 有弗行, 行之, 弗篤, 弗措也.〕"라는 말에서 나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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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육재기 【경신년(1920)】 樂育齋記 【庚申】 태인(泰仁) 서쪽, 용산(龍山) 남쪽에 고 반포재(伴圃齋) 이공(李公)의 학당이었던 옛 터가 남아 있었는데, 그 5대손 재형(載珩)과 광범(廣範)이 종당(宗黨)의 자제들을 위해 그 터에 서재(書齋)을 지어 '낙육(樂育)'이라 명명하고 나에게 한 마디 말로 권면해 줄 것을 청하였다.내가 생각건대 천하의 영재를 얻어 교육하는 즐거움에 대해 추맹씨(鄒孟氏 맹자)가 천하에 왕 노릇 하는 즐거움도 그 보다 못하다고 하였는데,17) 이는 매우 큰일인지라 덕이 천하의 스승이 될 수 있는 사람이라야 여기에 해당할 수 있거니와 횡거 선생(橫渠先生)이 또 영봉인(穎封人)을 들어 실증하였으니,18) 사람을 교화하는 한 가지 선이나 그릇을 완성해 주는 한 가지 재주라도 또한 이러한 즐거움에 참여할 수 있음을 알 수 있고, 모든 천하 후진의 부형(父兄)과 스승, 존장이 된 자들은 큰 즐거움으로 스스로를 작게 여겨 자처하지 않을 수 없음이 분명하다. 광범은 이러한 의리를 깊이 아는 자일 것이다.반포공(伴圃公)은 영조와 정조의 태평성대한 때를 만나 일찍 문과(文科)에 급제하였고, 지위가 3품(品)까지 올랐으니, 문장과 현명함, 재능이 반드시 세상에 우뚝하였을 것이다. 만약 이에 걸맞게 나아갔다면 금자(金紫)와 은청(銀靑)19) 등 어느 관작이든 될 수 없었겠는가. 그런데 도리어 이것을 버리고 취하지 않았으며, 산림 속 여막으로 물러나 은거하였다. 설치한 것은 학사(學舍)와 강단(講壇)이고, 일삼은 것은 후진을 이끌어 도와주는 것이며, 가르친 것은 효제ㆍ충신(孝弟忠信)과 궁리ㆍ수신(窮理修身)의 도였으니, 가벼운 일과 중대한 일 사이에서 즐거움으로 삼을 바를 잘 가렸다고 이를 만하다. 사람에게 미친 아름다운 은혜를 생각하면 진작하는 자들이 성대하게 배출되었을 것인데, 그 시대가 멀고 유풍이 아득하여 대강 고찰할 수 없는 것이 한스럽다.지금 광범이 이 일을 한 것은 본디 자제들을 교육할 곳을 마련하고, 또한 선조의 일을 계승하기 위해서이다. 한 가지 일에 자애와 효성의 도가 갖추어졌으니, 어느 누가 가상하게 여기지 않겠는가. 비록 그렇지만 천하의 일은 이름과 실상이 서로 걸맞기 어려우니, 실상이 있지 않으면 이름이 어디에 있겠는가. 청컨대 내가 '낙육'이라는 이름에 대해 인재를 기르는 실상을 논해보고자 한다.그 실상의 도가 어디에 있겠는가? 또한 오직 반포공이 가르친 효제ㆍ충신과 궁리ㆍ수신의 도가 이것일 따름이다. 대저 글을 널리 읽고 힘써 기억하며, 문장을 공교롭게 하고 언사를 화려하게 하도록 가르치고, 일의 공적을 중시하고 명예를 좇게 하여 세상에 팔리기를 구하되 자기에게 체득함이 없는 것은 비록 인재를 기른다는 이름이 있다 하더라도 그 실상이 아니다. 아침저녁으로 부모에게 문안하고 어른에게 읍양(揖讓)의 예절을 지키며, 임금을 사랑하고 벗과 친하며, 사물의 이치를 궁구하여 지식을 넓히고 자신의 잘못을 반성하여 자기의 사욕을 이기도록 가르쳐서 자신에게 덕을 갖추고 남에게 선을 미루어 가게 하는 것은 그 실상이 있고 그 이름에 부합하는 것이다. 이는 진실로 고금의 교육계에서 이미 증험한 허상과 실상이다.그러나 근래에 서구의 학문이 한창 치성하고 풍조가 한번 바뀌게 되어서는 임금이나 어버이가 자신과 평등하다고 말하면서 나라를 어지럽히고 어버이에게 불효하는 무리들이 잇따라 나오고, 늙은 사람은 쓸모없다고 말하면서 능멸과 모욕을 방자하게 행하며, 금전을 숭상해야 한다고 말하면서 간절하게 권면하고 어려움을 위급하게 여기는 풍조가 씻은 듯이 없어졌으며, 이치를 궁구하는 것은 기이한 재주가 되어 하늘과 사람의 도가 어두워졌고, 몸을 닦는 것은 위생으로 간주되어 선왕의 예의가 무너졌다. 무릇 이것들은 모두 사람을 해치고 세상에 화를 끼치는 큰 환란이니, 더욱 통렬한 마음으로 싫어하고, 분한 모습으로 배척하여 물과 불처럼 여기며 밟아서는 안 되고, 독약처럼 여기며 먹지 말아야 하는 것들이다.청컨대 광범은 강인하고 굳세며 순수하고 올바른 사람을 맞이하고 미친 풍조를 잘 막아서 이 서재에서 헛되이 겉만 꾸미는 군자를 끊어 버리고 단단하게 오직 실상만을 가르치길 바란다. 진실함이 쌓이고 오래도록 힘쓴다면 훗날에 큰 덕을 지닌 사람이 이 서재 가운데에서 나오지 않을 줄 어찌 알겠는가. 진실로 그렇게 된다면 광범이 선조의 훌륭한 가업을 잇는 것은 참으로 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고, 교육을 즐거움으로 삼는 공적이 또 어찌 횡거 선생이 영봉인을 허여한 것에 견주겠는가. 맹자가 말한 세 가지 즐거움 중 한 가지를 자신이 직접 소유하는 데에 진실로 방해가 되지 않을 것이니, 장차 눈을 씻고 그 날을 기다린다. 泰仁之西, 龍山之陽, 有故伴圃齋 李公學堂遺址.其五世孫載珩、廣範爲宗黨子弟, 就其址築書齋, 名之以樂育, 請余一言而勖之.余惟得天下英材育之, 鄒孟氏謂其樂, 王天下且爲之下, 此大小大事, 宜若德足爲天下師者, 乃可以當之.而橫渠先生, 又進穎封人而實之.則知一善之化人、一材之成器, 亦足以與此.而凡爲天下後進之父兄師長者, 不容以其樂之大者而自小不居也審矣.廣範其惟深知此義者乎. 蓋伴圃公當英、正盛際, 早捷巍科, 位陞三品, 文章賢能, 必有卓然乎世者.稱此而進, 金紫、銀靑, 何所不可, 乃舍此不取, 退藏林廬, 所設者學舍講壇, 所事者誘掖後進, 所以敎之者, 孝悌忠信、窮理修身之道也, 可謂擇所樂於輕重之間者也.想其嘉惠之及, 蔚然有作者之輩出, 而恨其世遠風邈, 無所槩攷也.今廣範之爲此擧, 固爲子弟敎育地, 而亦所以述先事也.一物而慈孝之道備, 夫孰不嘉尙之也? 雖然, 天下事, 名與實相稱之爲難, 實之不存, 名何有焉? 余於樂育之名, 請得以論育才之實.實之道烏乎在? 亦惟伴圃公所敎孝悌忠信、窮理修身之道是已.夫敎之以博文强記、巧文麗辭, 重事功徇名譽, 求售乎世而無得乎己者, 雖有育才之名, 而非其實也.敎之以定省揖讓、愛君親友、格致省克, 進德乎己而推善於人者, 是則有其實而副其名者也.此固古今敎育界已驗之虛實.至若近日歐學方熾, 風潮一變, 謂君親平等, 而亂賊接踵矣; 謂年老無用, 而凌辱恣行矣; 謂金錢是崇, 而切偲急難之風掃如矣.窮理歸於奇技, 而天人之道晦; 修身看作衛生, 而先王之禮壞.凡此皆戕人禍世之大患, 尤當痛心而惡之, 扼腕而斥之, 如水火之不蹈, 烏喙之勿食者也.請廣範延剛毅純正, 能障狂潮, 絶虛文之君子於是齋, 斷斷然惟實之是敎, 眞之積而力之久, 則安知異日不有大德人出自是齋中也耶? 苟其然者, 廣範箕裘之紹, 固不須言, 其樂育之功, 又豈橫渠所與穎封人比哉? 孟子所謂三樂之一者, 固不害爲身親有之也, 方且拭眸而俟之. 천하의 …… 하였으니 《맹자》 〈진심 상(盡心上)〉에 "군자에게 세 가지 즐거움이 있으니, 천하에 왕 노릇 하는 것은 여기에 들어가지 않는다. 부모가 모두 생존해 계시고 형제가 무사한 것이 첫 번째 즐거움이요, 부모가 다 생존하고 형제가 무고한 것이 첫 번째 즐거움이요, 위로 하늘에 부끄럽지 않고 아래로 사람에게 부끄럽지 않은 것이 두 번째 즐거움이요, 천하의 영재를 얻어 교육시키는 것이 세 번째 즐거움이다.〔君子有三樂, 而王天下不與存焉. 父母俱存, 兄弟無故, 一樂也; 仰不愧於天, 俯不怍於人, 二樂也; 得天下英才而敎育之, 三樂也.〕"라는 내용이 보인다. 횡거 선생(橫渠先生)이 …… 실증하였으니 횡거 선생은 북송(北宋)의 성리학자 장재(張載, 1020~1077)로, 횡거는 그의 호이다. 영봉인은 춘추시대 정(鄭)나라 장공(莊公)의 신하 영고숙(穎考叔)으로, 국경을 지키는 관리[封人]를 지냈기에 영봉인이라 하였다. 영고숙은 장공이 아우 숙단(叔段)의 반역을 편든 어머니 강씨(姜氏)를 유폐하고 황천(黃泉)에 가기 전에는 만나지 않겠다고 맹세하였다가 후회한다는 소문을 듣고 자기의 효심을 미루어서 장공에게 미치게 하여 그 역시 효자가 되게 하였다는 고사가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 은공(隱公) 원년(元年)》에 전해지고, 《시경(詩經)》 〈기취(旣醉)〉에 "효자의 효행은 다함이 없다. 길이 너의 동류에게 주라.〔孝子不匱, 永錫爾類.〕"라는 구절이 있는데, 장재가 이를 인용하여 〈서명(西銘)〉에서 "영재를 기르는 것은 영봉인이 동류에게 효심을 전해 주는 것과 같은 것이다.〔育英才, 潁封人之錫類.〕"라고 하였다. 금자(金紫)와 은청(銀靑) 금자는 금으로 만든 인장(印章)과 자주빛 인끈을 뜻하는 '금인자수(金印紫綬)'의 준말이고, 은청은 은으로 만든 인장과 푸른 인끈을 뜻하는 '은인청수(銀印靑綬)'의 준말로, 모두 고관대작을 나타내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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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음재기 【기미년(1919)】 惜陰齋記 【己未】 임자년(1912) 가을에 구산 선생(臼山先生 전우(田愚))이 경전을 안고 부풍(扶風 부안(扶安))의 계화도(繼華島)20)에 들어가자, 사방에서 속정(束脡)의 예21)를 행하며 찾아오는 선비들이 대체로 수백을 헤아릴 정도였다. 4년이 지난 병진년(1916)에 우리 문하의 부노(父老)들이 모두 말하기를,"계화도의 학사에 수용하지 못하여 우리 자제들이 계화도에 머물며 학업을 익히기가 어렵다."하고서 이내 장인을 불러 조그마한 서재를 세웠다. 서재가 완성된 뒤에 구산옹이 '석음(惜陰)'이라 명명하니, 내가 자제의 반열에 있는 사람으로서 이에 감히 한 마디 말로 함께하는 사람들에게 권면하여 말하였다."서재의 이름이 어찌 대우(大禹)가 촌음(寸陰)을 아낀 뜻22)에서 취한 것이 아니겠는가. '촌음을 아낀다[惜陰]'는 것은 어찌 '쉬지 않고 부지런히 힘쓴다'는 말이 아니겠는가. 내가 생각하건대, 예로부터 성현의 성대한 덕과 위대한 업적은 모두 촌음을 아끼는 가운데에서 나온 것이니, 유독 대우만 그런 것이 아니다. 새벽닭이 울면 일어나서 부지런히 선행을 한 것은 대순(大舜)이 촌음을 아낀 것이고23), 밤을 이어 날이 새도록 우러러 생각하여 터득한 것이 있으면 아침이 되기를 기다린 것은 주공(周公)이 촌음을 아낀 것이며24), 옛것을 좋아하여 부지런히 찾느라 종일토록 밥을 먹지 않은 것은 공자가 촌음을 아낀 것이고25), 의리를 찾기 어려워 세월을 흐르는 강물처럼 여긴 것은 회옹(晦翁)이 촌음을 아낀 것이다.옛 경전의 가르침에서 찾아보면 《주역》의 "종일토록 힘쓰고 저녁까지도 두려워한다."26)라는 것과 《서경》의 "안일함이 없는 것을 처소로 삼는다."27)라는 것, 《시경》의 "날로 나아가고 달로 진보한다."28)라는 것, 《논어》의 "배움은 따라가지 못할 듯이 한다."29)라는 것 등이 어느 것 하나 이러한 뜻 아닌 것이 없으니, 위대하구나! '촌음을 아낀다'는 뜻이여.성현의 언행은 해와 별처럼 밝고, 아버지와 스승의 가르침은 정려(鼎呂)30)보다 무거우니, 이 서재에 거처하는 자들이 어찌 감히 편안함을 짐독(鴆毒)처럼 보고 부지런히 애쓰는 것을 생맥산(生脈散)31)으로 여겨서 밤낮으로 허물을 반성하며 제때에 몸을 완성하지 않고, 한갓 스스로 두려워하고 방종하며 세월만 헛되이 버리겠는가.송독하고 강론하며 글을 엮고 글자를 쓰는 것도 또한 배우는 사람이 폐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만약 선철(先哲)이 생각하고 추구했던 의리와 선행에 그 노력을 다하지 않고, 오직 이런 것에만 힘쓰면서 촌음을 아끼는 데에 할 수 있는 일을 다 마쳤다고 한다면 이는 절대로 부형과 선생의 지극한 뜻이 아닐 것이니, 이를 알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歲壬子秋, 臼山先生抱經入扶風之繼華島, 四方之士行束脡而來者, 蓋百數計. 越四年丙辰, 我門父老咸曰: "華之舍不容矣.吾子弟在華, 其艱乎肄業." 乃召匠, 立小齋.齋旣成, 臼山翁命之曰惜陰.澤述在子弟列者, 乃敢一言勖同人曰: "斯齋之名, 豈非取諸大禹惜寸陰之義乎? 而惜陰云者, 豈非勤勵不息之謂乎? 余惟從古聖賢盛德大業, 皆從惜陰中做出來, 非獨大禹爲然.鷄鳴而起, 孜孜爲善, 大舜之惜陰也; 仰思繼日, 得之待朝, 周公之惜陰也; 好古敏求, 終日不食, 孔子之惜陰也; 義理難尋, 日月如流, 晦翁之惜陰也.求之典訓, 《易》之'日乾夕惕'、《書》之'所其無逸'、《詩》之'日就月將'、《語》之'學不如及', 何莫非此箇義諦, 大矣哉! 惜陰之旨也.聖賢言行, 炳若日星, 父師訓誨, 重於鼎呂.居是齋者, 敢不視燕晏如鴆毒, 服勤苦爲生脉, 夙夜省愆, 及時成身, 而徒自伈俔游泛, 枉獘流光也哉? 至於誦讀講辨, 綴文寫字, 亦學者之不容廢者.然若不於先哲所思所求之義與善者, 致其力焉, 惟是之務, 而曰惜陰之能事已畢, 則絶非父兄先生之至意也, 是不可以不知也." 계화도(繼華島) 부안군 계화면에 있었던 섬 계화도(界火島)를 말하는 것으로, 나라는 망하더라도 도학을 일으켜 국권을 회복하고자 했던 간재(艮齋) 전우(田愚, 1841~1922)가 72세에 이곳에 정착하여 섬 이름을 중화를 잇는다는 의미인 계화도라 부르면서 죽을 때까지 수많은 제자를 양성했던 곳이다. 속정(束脡)의 예 제자가 글을 배우기 위해 스승을 찾아갈 때 간단한 예물을 바치는 예절을 말한다.《논어》 〈술이(述而)〉에서 공자가 "속수의 예를 행한 자 그 이상에 대해서 내가 일찍이 가르쳐주지 않은 적이 없었다.〔自行束脩以上, 吾未嘗無誨焉.〕라고 하였는데, 주자(朱子)의 주에 "수(脩)는 포(脯)이니, 10정(脡)이 1속(束)이다. 속수는 지극히 박한 예물이지만 예를 갖추고 오면 가르치지 않은 적이 없었다."라고 하였다. 대우(大禹)가 …… 뜻 《진서(晉書)》 권66 〈도간열전(陶侃列傳)〉에 "대우는 성인이면서도 오히려 촌음을 아끼셨으니, 보통 사람의 경우는 마땅히 분음을 아껴야 할 것이다.[大禹聖者, 乃惜寸陰, 至於衆人, 當惜分陰.]"라고 하였다. 새벽닭이 …… 것이고 《맹자》 〈진심 상(盡心上)〉에 "새벽닭이 울면 일어나서 부지런히 선행을 하는 자는 순(舜)의 무리이고, 닭이 울면 일어나서 부지런히 이익을 탐하는 자는 도척(盜蹠)의 무리이다. 순과 도척의 구별을 알고자 한다면 다름이 없다. 이익과 선행의 사이인 것이다.〔鷄鳴而起, 孶孶爲善者, 舜之徒也; 鷄鳴而起, 孶孶爲利者, 蹠之徒也. 欲知舜與蹠之分, 無他. 利與善之間也.〕"라고 하였다. 밤을 …… 것이며 《맹자》 〈이루 하(離婁下)〉에 "주공은 세 왕의 덕을 겸비하여 그분들이 행한 이 네 가지 일을 시행할 것을 생각하였다. 부합하지 않는 것이 있으면 하늘을 우러러 생각하기를 밤으로 날을 이어서 하였고, 다행히 터득하시면 그대로 앉아 날이 새기를 기다리셨다.〔周公思兼三王, 以施四事. 其有不合者, 仰而思之, 夜以繼日, 幸而得之, 坐以待旦.〕"라고 하였다. 옛것을 …… 것이고 《논어(論語)》 〈술이(述而)〉에 "나는 선천적으로 아는 사람이 아니라 옛것을 좋아하여 부지런히 구한 사람이다.〔我非生而知之者, 好古敏以求之者也.〕"라고 하였다. 종일토록 ……두려워한다 〈건괘(乾卦) 구삼(九三)〉에 "군자가 종일토록 힘쓰고 힘써 저녁까지도 두려워하면 위태로우나 허물이 없다.〔君子終日乾乾,夕惕若, 厲無咎.〕"라고 하였다. 안일함이 …… 삼는다 〈무일(無逸)〉에서 주공(周公)이 성왕(成王)에게 훈계하기를, "아! 군자는 안일함이 없는 것을 처소로 삼는 것입니다. 먼저 농사일의 어려움을 알고 나서 안일하면 백성들의 의지하는 바를 알 것입니다.〔嗚呼! 君子所其無逸. 先知稼穡之艱難, 乃逸, 則知小人之依.〕"라고 하였다. 날로 …… 진보한다 〈경지(敬之)〉에 "나 소자는 총명하지 못하고 공경하지 못하나 날로 나아가고 달로 진보하여 학문이 계속해서 밝아져 광명에 이르고자 한다.〔維予小子, 不聰敬止, 日就月將, 學有緝熙于光明.〕"라고 하였다. 배움은 …… 한다 〈태백(泰伯)〉에 "공자가 말하기를 '배움은 따라가지 못할 듯이 하면서도 오히려 때를 놓칠까 두려워해야 한다.'라 하였다.[子曰, '學如不及, 猶恐失之.']"라고 하였다. 정려(鼎呂) 하(夏)ㆍ은(殷)ㆍ주(周)의 보기(寶器)인 구정(九鼎)과 주나라 종묘의 큰 종인 대려(大呂)로, 모두 크고 무거운 물건이다. 생맥산(生脈散) 인삼(人參), 맥문동(麥門冬), 오미자로 구성된 처방으로, 원기를 생기게 하는 성질이 있는데, 《동의보감》에 여름철에 이 세 가지 재료에 황기, 감초를 넣어 끓여서 물 대신 마시면 기력이 샘솟고, 폐를 깨끗하게 하며 심장의 열을 내려 준다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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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양재기 【을축년(1925)】 宗陽齋記 【乙丑】 음양(陰陽)이 천지에 있으면서 대대(待對)가 되어 한 해를 이루니, 공이 비록 어느 한 쪽을 빠뜨릴 수 없지만, 그 공을 논하면 양은 폄을 주관하고 음은 움츠림을 주관하며, 양은 생육을 주관하고 음은 살육을 주관한다. 때문에 성인이 《주역》을 말할 때에 항상 양을 부축하고 음을 억제하였으니, 그 뜻을 알 수 있다. 이러한 까닭에 음양으로 사람을 논하면 양은 군자가 되고 음은 소인이 되며, 음양으로 덕을 말하면 양은 선덕(善德)이 되고 길덕(吉德)이 되며, 음은 악덕(惡德)이 되고 흉덕(凶德)이 된다. 이리하여 '음양'이라는 두 글자는 숙특(淑慝 선악(善惡))의 큰 관건이 된다.최군 민열(崔君敏烈)은 만종산(萬宗山)의 남쪽에 거처하면서 지명을 인하여 '종양(宗陽)'으로 그 집의 편액을 삼았으니, 그 또한 성인의 뜻을 받아 이른바 '큰 관건'이라는 것을 안 자이다. 돌아보건대 지금 동서(東西) 두 물결이 일으킨 비바람에 천지가 뒤집혀 삼강(三綱)32)이 무너지고 사유(四維)33)가 사라져서 세상이 이미 순전한 곤(坤)34)의 상태에 들어갔다. 비록 그렇지만 하늘에서 나온 도의 근원은 변하지 않고, 부여 받은 마음의 떳떳한 본성은 떨어지지 않았으니, 이른바 '양(陽)은 다 없어질 이치가 없다'35)라는 것이 이것이 아니겠는가. 이러한 때에 저 음을 곤란하게 하고 이 양을 강하게 하고자하는 뜻을 편액에 담았으니, 최군과 같은 사람은 그 뜻이 어찌 더욱 깊지 않겠으며, 그 관건이 어찌 더욱 크지 않겠는가.또한 군은 일찍이 육양 선생(六陽先生 전우(田愚))을 따라 배우면서 큰 제방이 되는 인도(人道)를 들을 수 있었고, 스승이 돌아가신 뒤로 일단의 음이 더욱 횡행하여 변괴가 관패(冠佩)36)의 사이에서 거듭 나오는 것을 목도하였으니, 비록 이 양을 종주로 삼고 저 음을 배척하지 않고자 하더라도 또한 될 수 있겠는가. 이는 스승을 높이고 도를 지키는 것이 자기에게 절실한 것으로, 단지 천하를 위해서 근심한 것만은 아니다.아, 육양이 바친 자정의 의리는 바로 화양(華陽)37)이 명나라를 존숭한 것이고, 또한 자양(紫陽)38)이 촉한(蜀漢)을 황제의 정통으로 삼고, 추양(秋陽 공자)39)이 중하를 안으로 삼은 것이다. 육양을 종주로 삼은 것은 바로 삼양(三陽)40)을 종주로 삼은 것이니, 어찌 위대하지 않겠는가.비록 그렇지만 양을 종주로 삼은 실상은 편호(扁號)와 기문, 명문 사이에서 기필을 취할 수 없으니, 모름지기 먼저 내 마음 위에서 증험한 폄과 움츠림, 생육과 살육의 생각을 따라 흉덕과 악덕을 제거하고 길덕과 선덕에 나아가서 한 명의 군자다운 사람이 된 뒤에야 거의 종양재의 주인이 되는 것에 부끄럽지 않을 것이다. 군은 힘쓰기 바란다. 陰陽之在天地, 相待而成歲.功雖不可以偏闕, 論其功則陽主舒而陰主慘, 陽主生而陰主殺.故聖人之說《易》也, 常扶陽而抑陰, 其意可知也.是故以之語人, 則陽爲君子, 陰爲小人; 以之語德, 則陽爲善爲吉, 陰爲惡爲凶.於是乎陰陽二字, 爲淑慝之大關矣.崔君 敏烈居萬宗山之陽, 因地名而以宗陽扁其齋, 其亦受聖人之意而知所謂大關者乎? 顧今二洋風雨, 天地翻覆, 三綱頹墮, 四維喪絶, 世已入乎純坤矣.雖然, 出天之道源不變, 降衷之秉彛罔墜, 是所謂陽無可盡之理者非此乎? 于斯時也, 乃欲艱彼而强此, 寓之於扁額, 如崔君者, 其意豈不尤深? 其關豈不尤大乎? 且君曾從學于六陽先生, 得聞人道之大防矣.山頹之後, 一陰滋橫, 目見變怪之疊出乎冠佩間, 則雖欲不宗此而斥彼, 又可得乎? 是則尊師衛道之切己, 不直爲天下憂也.嗚呼! 六陽之獻靖, 卽華陽之尊明, 亦紫陽之帝蜀, 秋陽之內夏也.宗六陽, 乃所以宗三陽也, 豈不偉哉? 雖然, 宗陽之實, 不可取必於扁號、記銘之間.須先從吾心上驗慘舒生殺之念, 去凶惡而就吉善, 成得一箇君子人, 然後庶不愧爲宗陽齋主人.君其勖哉. 삼강(三綱) 유교의 도덕에서 기본이 되는 세 가지 강령(綱領)으로, 임금과 신하, 부모와 자식, 남편과 아내 사이에 마땅히 지켜야 할 도리인 군위신강(君爲臣綱), 부위자강(父爲子綱), 부위부강(夫爲婦綱)을 말한다. 사유(四維) 나라를 다스리는 데 필요한 네 가지 원칙, 즉 예(禮)ㆍ의(義)ㆍ염(廉)ㆍ치(恥)를 이른다. 순전한 곤(坤) 《주역》에서 여섯 효가 모두 음효(陰爻)로 이루어진 〈곤괘〉을 말한다. 양은 …… 없다 《주역(周易)》 〈박괘(剝卦)〉의 정전(程傳)에서 "박괘는 모든 양이 다 떨어져 없어지고 유독 상구 일효만 남아 있어 마치 큰 과일 하나만 먹히지 않아서 장차 다시 생겨날 도리가 있는 것과 같으니, 상구 일효 또한 변하면 순음으로 되어 버리긴 하지만, 양이 완전히 다 없어질 리는 없으므로, 위에서 변하면 아래서 생겨 잠시도 멈출 틈이 없는 것이다.〔剝之爲卦, 諸陽消剝已盡, 獨有上九一爻尙存, 如碩大之果不見食, 將有復生之理. 上九亦變則純陰矣. 然陽無可盡之理, 變於上則生於下, 無間可容息也.〕"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관패(冠佩) 관리들이 착용하는 의관(衣冠)과 몸에 차는 장신구로, 관리를 비유한다. 화양(華陽) 송시열(宋時烈)의 별호로, 그가 60세 때에 충북 괴산의 화양서원에 은둔하며 학문을 연마하고 제자들을 가르친 일로 인해 별호로 사용되었다. 자양(紫陽) 주희(朱熹)의 별호로, 그가 1184년 복건(福建) 숭안(崇安)의 무이산(武夷山)에 자양서원을 짓고 한가로이 지낸 일로 인해 별호로 사용되었다. 추양(秋陽) 공자를 가리키는 말로, 증자가 공자의 덕을 칭송하여 "공자께서는 강한(江漢)으로 씻는 것과 같으며, 가을볕으로 쪼이는 것과 같아서 더할 나위 없이 깨끗하시다.〔江漢以濯之, 秋陽以暴之, 皜皜乎不可尙已.〕"라고 한 것에서 유래한 말이다. 《孟子 滕文公上》 삼양(三陽) 화양 송시열과 자양 주희, 추양 공자를 가리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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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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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재기 【임오년(1942)】 粉齋記 【壬午】 부풍(扶風 부안)에서 남쪽으로 7리 되는 곳에 위치한 석동산(席洞山)은 우리 17대조 고려 봉정대부 지고부군수공(奉正大夫 知古阜郡事公)께서 망복(罔僕)41)으로 은둔하셨던 고을이다. 이것을 인하여 이곳에 장사지내고, 두 아들 대호군공(大護軍公)과 직장공(直長公)을 부장하였는데, 풍수가 아름답다고 남쪽 지역에서 일컬어졌다. 석동산의 한 지맥이 동쪽으로 5리를 달려 간 곳이 분동산(粉洞山)이다. 직장공의 아들 첨지공과 손자 현감공(縣監公)을 이곳에 장사지냈고, 그 아름다움도 또한 석동산에 버금갔으니, 이곳이 우리 분파조(分派祖)의 선영이다.두 산에 모두 병사(丙舍)가 있는데, 석동산의 취성재(聚星齋)는 본디 석천(石川) 임문원공(林文元公 임억령(林億齡))의 "김씨 집안의 덕성이 모였네.[金門聚德星]"라는 시의 뜻을 취한 것이다. 그런데 이 분동산의 재실은 단지 지명을 사용하고 아름다운 이름을 지어준 것이 없으니, 무엇 때문인가? 예전의 기록이 없어 상고할 수 없었다.삼가 일찍이 생각건대, 공자가 "그림 그리는 일은 흰 비단이 있은 뒤에 하는 것이다."라고 하자, 자하가 "예(禮)는 뒤의 일이군요."라고 하였는데, 주자가 이에 대해 주석하기를, "예는 반드시 충신(忠信)을 바탕으로 삼으니, 이는 그림을 그리는 일은 반드시 흰 비단을 우선으로 삼는 것과 같다."라고 하였다.42) 대체로 충신은 예에서 흰 바탕을 마련하는 것에 해당하고, 절의(節義)는 예에서 그림을 그리는 것에 해당하니, 당시 재실을 명명한 뜻이 비록 처한 형편과 환경을 따랐고, 일삼음이 없는 바를 행했다 하더라도 또한 성현의 가르침처럼 실제로 바탕을 숭상하고 꾸밈을 뒤로하는 데에서 나오지 않은 줄 어찌 알겠는가.무릇 '재(齋)'란 것은 '가지런함[齊]'이니, 이곳에서 제사를 지내고 몸과 마음의 가지런함을 다하는 것이다. 제례(祭禮)로 말하면 슬프고 두려하며 마치 눈앞에 조상이 보이는 듯하고 계시는 듯 여기는 것은 충신의 바탕이고, 준조(尊俎)ㆍ변두(籩豆)와 오르내리고 절하며 무릎을 꿇는 것 등은 의절의 꾸밈이니, 만약 조상이 눈앞에 보이는 듯하고 계시는 듯 여기는 정성을 다하지 않는다면 비록 의절의 꾸밈이 있다 한들 장차 어디에 베풀겠는가. 때문에 "성실하지 않으면 사물이 없게 된다."43)라고 하였고, 또 "예는 헛되이 행해지지 않는다."44)라고 하였으니, 이는 힘써야 할 바이다.더욱 일삼을 것이 있다. 첨지공이 나라에 세운 공훈과 현감공이 백성들의 정사에 드러낸 치적부터 군사공이 붙잡아 세운 삼강(三綱)과 오상(五常)의 윤리는 모두 충신(忠信)을 주로 하여 이룩한 것이니, 이 재실에 들어와 몸과 마음을 깨끗이 하고 봉영을 바라보며 추모하는 우리 모든 종족은 마음을 쓰고 말을 하는 것에서부터 고을에서 처신하고 세상에 응하는 것에 이르기까지 행동을 제재하고 몸을 세우는 모든 것들이 선조께서 힘쓰신 것을 주로 하여 겉모습과 본바탕 사이에서 먼저하고 나중에 할 바를 알지 않음이 없어야 한다. 이것이 선조에 대한 제향을 잘하는 것이고, 선조를 생각하여 덕을 닦는 일을 잘하는 것이니, 재실의 이름에 아름다움을 주는 것으로 무엇이 이보다 더 좋을 것이 있겠는가.구구하고 변변찮은 내가 감히 이것을 문미 사이에 기록하여 삼가 스스로 예전에 드러내지 못한 뜻을 드러낸 데에 부치고, 여러 종족들과 함께 힘쓰기를 바란다.재실을 중수한 일이 기사년에 있었는데, 그것이 원릉(元陵 영조) 때인지 인릉(仁陵 정조) 때인지는 자세히 알 수 없고, 당시 육위문(六偉文 상량문(上樑文))이 있지만 그 창작이 어느 때에 있었는지는 더욱 자세히 알 수 없다. 維扶風南七里席洞之山, 我十七世祖高麗 奉正大夫知古阜郡事公罔僕遯鄕, 因葬于此, 而二子大護軍公、直長公祔焉.風水之佳, 稱於南方, 席山一支東走五里爲粉洞之山, 則直長公之子僉知公、孫縣監公藏焉, 其佳亦亞於席山, 而是爲我分派祖塋.二山蓋皆有丙舍, 席之聚星, 固取石川 林文元公"金門聚德星"之詩義, 惟玆粉齋, 但用地名, 而無所嘉錫, 何也? 舊無記, 不可考焉.竊嘗惟孔子曰: "繪事後素." 子夏曰: "禮後乎." 朱子釋之曰: "禮必以忠信爲質, 猶繪事必以粉素爲先." 蓋忠信者, 禮之粉地; 儀節者, 禮之繪事.當日名齋之意, 雖則隨遇因境, 而行所無事, 亦安知不實出於尙質後文, 如先聖賢之敎乎? 夫齋者, 齊也, 行祭而致齊乎此也.今以祭禮言之, 悽愴怵惕, 如見如在, 忠信之質也; 尊俎籩豆, 升降拜跪, 儀節之文也.如不致如見如在之誠, 雖有儀文, 將安所施? 故曰: "不誠無物." 又曰: "禮不虛行." 是所當勉也.更有事在, 僉知公之樹勳國家、縣監公之治著民政, 以至郡事公之扶植綱常, 皆主忠信而成之.凡吾宗族之入是齋而致潔, 瞻封塋而追慕者, 自宅心出言, 至於處鄕酬世, 凡所以制行立身者, 罔不以先祖所務爲主, 知所先後於文質之間, 則是爲能享其祖也, 能念祖修德也.其爲齋名之嘉錫, 孰尙於此? 區區無狀敢以是記之楣間, 竊自附於發前未發之義, 願與僉宗共勖焉.齋之重修在己巳, 其爲元陵、仁陵, 不可詳, 而有當時六偉文, 其創則尤不可詳在何時云. 망복(罔僕) 망국의 신하로서 의리를 지켜 새 왕조의 신복이 되지 않는 절조를 말하는 것으로, 은(殷)나라가 망하려 할 무렵 기자(箕子)가 "은나라가 망하더라도 나는 남의 신복이 되지 않으리라.〔商其淪喪, 我罔爲臣僕.〕"라고 말한 데서 유래하였다. 《書經 微子》 공자가 …… 하였다 《논어집주》 〈팔일(八佾)〉 제8장에 보인다. 성실하지 …… 된다 《중용장구》 제25장에 "성(誠)이라는 것은 물(物)의 처음이자 끝이니 성실하지 않으면 사물이 없게 된다. 그러므로 군자는 성을 귀하게 여긴다.〔誠者, 物之終始, 不誠無物, 是故君子誠之爲貴.〕"라는 구절이 보인다. 예는 …… 않는다 《논어》 〈팔일(八佾)〉 8장의 주에 "양씨가 말하기를 '단맛은 조미를 받아들이고, 흰 것은 채색을 받아들이며, 충신한 사람이라야 예를 배울 수 있는 것이다. 진실로 그 바탕이 없다면 예가 헛되이 행해지지 않으니, 이것이 그림 그리는 일은 흰 비단을 마련하는 것보다 뒤에 한다는 말씀이다.' 하였다.〔楊氏曰:甘受和, 白受采, 忠信之人, 可以學禮. 苟無其質, 禮不虛行, 此繪事後素之說也.〕"라는 말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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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재기 【임신년(1932)】 以承齋記 【壬申】 부안을 본관으로 하는 우리 김(金)은 모두 천성적으로 선조를 사모하여 재실과 묘갈을 크고 웅장하게 하며 향사(享祀)에 진실하고 부지런한 것이 우리나라에서 으뜸이라고 하였으니, 여론이 그러하였다. 그러나 우리 8대조 통덕랑공(通德郞公)이 처음으로 영주(瀛洲 정읍)의 창동(滄東)에 거주하면서 대를 이은 후손들이 이곳에 거주한 지 200년이 지났는데, 호수는 겨우 40호뿐이었고, 일찍이 조정에서 봉록을 받은 사람이 없었으며, 아울러 전답이 이어지고 곡식이 쌓여 있는 집이 별로 없었으니, 비록 문학과 덕행이 가문의 명성을 떨어뜨리지는 않았다 하더라도 선조를 사모하고 받드는 것을 풍성하게 하는 데에는 어떻게 할 방법이 없었다.창동을 빙 둘러 장사지낸 선조는 여러 대가 지나 친진(親盡)45)하였고, 묘사(墓祀)를 지낸 지도 또한 이미 오래되었는데, 지난 신축년(1901)에 선군께서 재계를 다할 곳이 없음을 근심하시고 가옥을 팔아 재실을 마련할 것을 논의하여 거의 성사되려다 바로 중지되었다. 그러나 의론이 일어난 뒤로 또한 진실로 여러 종족의 마음속에 맺혀 있다가 25년이 지난 병인년(1926) 가을에 의논이 비로소 모두 같아졌다. 여러 신위의 묘와 거리가 균등한 곳을 취하여 본 마을 충의공(忠義公)의 묘 아래에 체사(體舍) 오량(五樑) 4칸과 문랑(門廊 대문과 행랑) 삼량(三樑) 5칸을 건립하였는데, 종중의 돈 200원과 두 종파에 배당한 돈 500원, 각 이름으로 낸 의연금 500원, 총 1,200원을 사용하였으니, 아, 힘이 다하였고, 또한 그럭저럭 갖추게 되었다.대저 사람이 선조에 제사를 지내지 않으면 사람이 아니고, 제사를 지내는 데에 재계를 다하지 않으면 제사를 지낸 것이 아니며, 재계할 곳이 없으면 재계할 수 없으니, 이것이 우리가 재실을 힘을 다하여 짓지 않을 수 없는 이유이다. 그래서 내가 《중용》 귀신장(鬼神章) 제3절의 뜻을 취하여 '이승(以承)'이라 편액을 달았다. 이 재실에 들어와 진실하게 공경하여 마치 선조가 앞에 계시는 듯 진실하게 공경하는 도리에 소홀함이 있다면 이는 재실을 세운 본뜻이 아니니, 공경히 생각하기를 바란다.또 생각건대, 제사를 지내는 것은 참으로 사람의 큰일이거니와 반드시 몸을 세우고 덕을 이루어서 조상을 드러내는 것이 바로 참된 효이고, 그 덕을 이루고자 한다면 성현(聖賢)을 배우는 것이 아니고서는 말미암을 방법이 없다. 그러므로 집안의 자제들이 강학하는 일도 또한 이 재실에서 해야 할 것이다. 대체로 배워서 전 성현을 이은 경지에 이른 뒤에야 그 선조를 크게 드러내니, '이승'이라 한 것은 《맹자》 호변장(好辯章) 제12절의 뜻을 겸하여 취한 것이다. 이 재실에서 강학하면서 옛사람이 학문을 하는 방도에 전심하지 않는다면 그 이름과 뜻을 저버리는 것이 또한 클 것이니, 경계하고 두려워하기를 바란다.아, 띠 풀로 지붕을 이고 흙으로 벽을 쌓은 이 하나의 집은 재력이 있는 사람이 웅장함과 화려함을 다하여 보기 좋게 지은 것과 비교하면 누추하다고 이를 만하다. 그러나 이 재실에 거처하는 자가 만약 제사를 지낼 때에 정성과 공경을 다하여 안으로 선조를 잇고, 학문이 덕을 이루는 경지에 이르러 멀리 성현을 이을 수 있다면 그 가문의 창대한 명성이 장차 한 시대의 으뜸이 될 것이니, 조그마한 부귀의 녹속(祿粟)이 있고 없음을 어찌 말할 것이 있겠는가. 내가 이 때문에 종족의 후진들에게 깊은 바람이 있다.재실이 낙성된 뒤 7년, 임신년 정월 상순(上旬)에 나 택술이 기록하였다. 謂吾貫扶之金, 皆性於慕先, 豐壯齋碣、誠勤享祀, 甲於東方, 輿論然也.然惟我八世祖通德郞公始居瀛之滄東, 而後承之居此者, 年歷二百, 戶僅四十, 曾無立朝俸祿之人, 幷乏連田積粟之家, 雖其文行之不墜家聲, 至於慕先豐盛, 則末由焉.環滄而葬者, 累世親盡, 而墓祀亦已久矣.往在辛丑, 先君憂致齋之無所, 議買屋爲齋, 垂成而旋罷.然其議旣發, 亦固結于諸族心中, 越二十五年丙寅秋, 謀始詢同, 取累位墓道里之均, 就本里忠義公墓下, 立體舍五樑四間、門廊三樑五間, 用宗金二百圓、兩派排金五百圓、各名出義金五百圓、總一千二百圓也.噫, 其力殫矣, 亦苟完矣.夫人不祭祖非人; 祭不致齋非祭; 齋無其所, 不能齋.此吾齋所以不得不殫力而作也.故余取《中庸》鬼神章第三節之義, 扁之以以承.入是齋而有忽於誠敬如在之道, 則非立齋之本意也.其尙有以欽念哉.且惟祭固人之大事, 必也立身成德, 以顯其祖, 乃爲眞孝.欲成其德, 非學聖賢, 無由.故門子弟講學, 亦於是齋焉.蓋學而至於繼前聖, 然後大顯其先.其云以承, 兼取《孟子》好辯章第十二節之義也.講是齋而不專心於古人爲學之方, 則其辜負名義亦大矣.其尙有以警惕哉.噫, 此茅覆土築一箇屋, 視諸有力人致壯麗爲觀美者, 可謂陋矣.然居是齋者, 如能祭盡誠敬而內承祖先, 學至成德而遠承聖賢, 其家聲之昌, 將甲於一世, 規規富貴之祿粟有無, 何足道哉?余以是深有望於宗族後進云爾.齋成後七年壬申元月上旬日, 澤述記. 친진(親盡) 사당(祠堂)에 모시고 제사 지내는 대수(代數)가 다한 것을 말하는 것으로, 일반 백성은 4대(代), 왕가(王家)는 5대가 넘으면 친진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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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재토보송림기 【을유년(1945)】 粉齋土堡松林記 【乙酉】 맹자가 말하기를, "이른바 '오래된 나라[古國]'라 하는 것은 드높이 자란 나무가 있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대를 이어 벼슬하는 신하가 있음을 말하는 것입니다."47)라고 하였으니, 이 말은 비록 대를 이어 벼슬하는 신하를 주로 한 것이지만, 그 뜻을 궁구하면 오래된 나라에는 반드시 드높이 자란 나무가 있음을 알 수 있다.나는 일찍이 이 구절을 읽고 "인가(人家)의 고족(故族)이 고족이 된 까닭은 서로 전해온 세덕(世德 대를 이어 쌓아온 덕)에 있고, 경관이 아름다운 조상의 선산에 있지 않다."라고 말하였다. 그러나 고족의 집과 무덤 옆에 또한 반드시 드높이 자란 나무가 있음을 알 수 있으니, 이는 맹자의 뜻과 같다.우리 선조 첨지공(僉知公)과 현감공(縣監公) 두 대를 안장한 곳이 부안의 분토동(粉土洞)에 있고, 그 아래에 재실이 있는데, 재실 뒤에 있는 흙 보루와 소나무 숲은 외손 쌍백당(雙柏堂) 이충숙공(李忠肅公)48)이 본도의 관찰사로 있을 때에 장정들을 징발하여 축조하고 심어서 방어의 허술함을 보완한 것으로, 300년에 걸쳐 이 소나무를 보호하고 길러서 울울창창하였다.아, 이공은 명릉(明陵 숙종) 때 삼간신(三諫臣)49) 중 한 사람으로, 충직한 목소리가 조정과 재야에 진동하였다. 대저 충과 효는 일치하니, 외선조(外先祖)에게 정성을 다하는 것도 또한 부모에게 효도하는 마음을 미루어 가는 것이다. 우리 김씨(金氏)는 진실로 서로 전해온 세덕이 있는데, 외손으로 어진 이공을 얻었으니, 어찌 빛남이 있지 않겠는가? 또 그 분이 심은 높은 나무를 얻어 고족의 일단을 증험했으니, 어찌 거듭 할 말이 있지 않겠는가.대저 어찌된 일인지 근년 이래로 늙은 측백나무를 아끼고 애석하게 여기는 정50)이 점점 쇠퇴하고, 팥배나무를 베어내는 것에 대한 경계51)를 삼가지 않아서 거의 후산(後山)의 〈사정기(思亭記)〉의 염려52)를 범하고 있으니,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여러 종족과 더불어 당시 이충숙의 뜻을 깊이 생각하여 더욱더 아끼고 보호하여 큰 나무들이 더욱 많게 함으로써 이것을 본 사람들이 "효성스럽구나! 김씨여. 분암(墳菴 묘를 보살피기 위해 세운 암자)의 소나무조차 오히려 아끼는데, 하물며 그 선조에 있어서야 더 말할 것이 있겠는가."라고 일컫기를 바라니, 진실로 이와 같이 할 수 있다면 이것이 선조를 생각하고 덕을 닦는 어진 후손이 되는 것이다. 어진 덕을 지닌 후손이 배출된다면 어찌 대를 이어 덕을 쌓아온 오랜 종족이 될 뿐이겠는가. 또한 장차 나라의 큰 나무가 될 것이고 대를 이은 신하가 될 것이다. 이에 기문을 짓는다. 孟子曰: "所謂故國者, 非謂有喬木之謂也, 有世臣之謂也." 此言雖主於世臣, 然究其意也, 故國之必有喬木, 則可知也.余嘗讀此而有言曰: "人家故族之所以爲故族者, 在世德相傳, 不在於祖山觀美." 然故族之家、丘壟之傍, 亦可知其必有喬木, 則若孟子之意也.我先祖僉知公、縣監公兩世之藏, 在扶安粉土之洞, 而其下有齋.齋後土堡松林, 外裔雙柏堂李忠肅公觀察本道時, 爲發民丁, 築之植之, 以補防虛疏者, 而歷三百年, 護養是松, 鬱鬱乎蒼蒼焉.於虖, 李公以明陵三諫臣之一, 忠直之聲, 震於朝野.夫忠孝一致, 致誠外先, 亦其孝親之推也.吾金氏固有相傳之世德, 而得李公之賢爲宅相者, 豈不有光? 又得其所植喬木, 以證故族之一端, 豈不重有辭乎? 夫何邇來, 老柏愛惜之情漸衰, 甘棠剪伐之戒不謹, 幾幾乎后山亭記之慮是犯, 可不懼哉? 願與諸宗深思當日李忠肅之意, 愈加愛護, 使喬木愈多, 觀者稱之曰: "孝哉! 金氏.墳菴之松, 猶愛之, 況於其祖乎? 苟能爾也, 是爲念祖修德之賢.賢德輩出, 豈惟世德之故族, 亦將爲國家之喬木、世臣也.是爲記. 이른바 …… 것입니다 《맹자》 〈양혜왕 하(梁惠王下)〉에 보인다. 쌍백당(雙柏堂) 이충숙공(李忠肅公) 이세화(李世華, 1630~1701)로, 쌍백당은 그의 호이고, 충숙은 그의 시호이다. 본관은 부평(富平)이고, 자는 군실(君實)이다. 1657년(효종8) 식년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황해도ㆍ전라도ㆍ경상도 관찰사와 육조(六曹)의 판서를 두루 역임하였고, 세자빈객에 올랐으며, 청백리로 선정되었다. 저서로 《쌍백당집(雙柏堂集)》이 있다. 삼간신(三諫臣) 이세화와 정재 박태보(定齋 朴泰輔), 양곡 오두인(陽谷 吳斗寅)을 말한다. 이들은 1689년(숙종15) 숙종(肅宗)이 인현왕후(仁顯王后)를 폐위하였을 때에 함께 강력히 반대하는 소장을 올렸다가 분노한 숙종의 친국을 받고 유배되었는데, 훗날에 이들을 충신으로 추앙하며 삼간신이라 일컬었다. 늙은 …… 정 일제에 의해 나라를 잃은 백성이 가져야 할 우국충정을 뜻한다. 당(唐)나라 시인 두보(杜甫)가 제갈량(諸葛亮)의 사당인 무후사(武侯祠) 곁에 있는 오래된 측백나무를 보며 읊은 〈고백행(古柏行)〉에서 "제갈공명의 사당 앞 늙은 측백나무, 가지는 청동 같고 뿌리는 바위 같네.〔孔明廟前有老柏, 柯如靑銅根如石.〕"라고 한 데에서 유래하였다. 팥배나무를 …… 경계 나라와 백성을 위해 선정(善政)을 베푸는 관리가 되도록 권면한 것으로, 주(周)나라 무왕(周武王) 때에 소공(召公)이 남국을 순행하며 정사를 다스리고 팥배나무 아래서 쉬어 갔었는데, 떠난 뒤에 백성이 그 덕화를 생각하고 그 나무를 사랑하여 지어 부른 "무성한 팥배나무를 베지 말고 꺾지 말라. 소백이 쉬시던 곳이니라.〔蔽芾甘棠, 勿翦勿敗, 召伯所憩.〕"에서 유래하였다. 《詩經 甘棠》 후산정기(后山亭記) 북송(北宋)의 문장가 후산(後山) 진사도(陳師道)의 〈사정기(思亭記)〉를 말하는 듯하다. 〈사정기〉는 진사도가 지은 글로 자손들이 조상을 모시는 사당과 재실에서 조상을 추모하는 마음을 갖게 된다는 내용이다. 《古文眞寶 後集 卷10 思亭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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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효비 이건기 【본손을 대신해서 짓다. 기묘년(1939)】 純孝碑移建記 【代本孫作. 己卯】 우리 선조 만휴당 선생은 천성이 지극히 효성스러워 부친이 등에 종기를 앓았을 때에는 입으로 고름을 모두 빼내어 낫게 하였고, 또 혀가 굽어지는 증세를 앓았을 때에는 동짓달에 제비가 날아오는 이변을 불러왔으며, 부모님의 상을 다해서는 시묘살이를 하면서 상제(喪制)를 마 치셨다. 선조가 이를 듣고 가상하게 여기시어 본 고을의 남쪽 문 밖에 순효비(純孝碑)를 세우도록 명하시고 장악원 주부를 제수하자, 상소로 당시의 폐단을 진달하여 두터운 비답을 받았다. 사직으로 옮겨가서는 광해군을 세자로 세우는 날에 대궐문을 밀치고 들어가 홀로 상소하여 불가함을 말하여 제주도로 귀양을 갔다가 삼사(三司)에서 번갈아 올린 상소로 구원을 받고 풀려났다. 임진왜란 때에는 의병을 창도하여 전쟁에 공이 있었고, 의곡(義穀)을 거두어서 행재소(行在所 왕이 임시로 거처하는 곳)로 실어 보냈다.광해군이 즉위하였을 때에는 선생이 이미 돌아가셨는데, 전에 올린 상소를 혐의하여 순효비를 훼손하여 넘어뜨리고, 삼강록(三綱錄)에서 삭출하였으며, 자손들을 금고(禁錮)하였다. 인조반정이 일어나자 감사 김공 존경(金公存敬)의 상소로 인하여 신원되고 금고에서 풀렸다. 정조조(正祖朝)에 비를 회복하라는 은전이 있어 현의 남쪽 5리에 있는 도동사(道東祠) 가까운 곳에 옮겨 세웠으니, 판서 서공 준보(徐公俊輔)의 비명(碑銘)이 있다.고종 갑술년(1874)에 충성과 효성이 뛰어나고 남다르다하여 통정대부 이조참의에 추증하였고, 59년이 지난 임신년(1932)에 또 비를 옮겨 석동산의 취성재(聚星齋) 앞에 세웠으니, 종10대손인 나 택술의 추기(追記)가 있다.아, 선생이 평생 동안 세운 큰 절개에 대해서는 본래 선왕조 때에 포정(褒旌)한 것과 병필가(秉筆家)들이 찬양한 것이 있으니, 진실로 불초한 내가 감히 군더더기를 덧붙여 진술할 것이 아니지만, 다만 마음에 느낀 점이 있다.혼조(昏朝) 때에 선생이 돌아가신 뒤에 당한 화가 참혹했으니, 천지가 청명해진 때에 선생이 수립하신 것으로 절혜(節惠)53)를 내려주고 후손을 등용하는 은혜를 베푸는 것이 마땅하였다. 그러나 돌아보건대 도리어 그렇지 않았으니, 얻은 것이라곤 겨우 신원되고 금고에서 풀린 데에 그쳤다. 비석을 복구하라는 명과 삼품(三品)에 추증한 것도 또한 여러 세대가 지난 뒤에야 있었다. 이것이 무엇 때문인가? 삼가 생각건대, 화를 당한 끝에 두려움에 처하여 본가의 심정을 위로 진달할 길이 없었고, 새로운 교화를 펼치는 초기에 정사를 다스릴 조목이 많아서 이러한 일에 미칠 겨를이 없었기 때문이니, 이것이 매우 한스럽다.비를 세울 때에 전후로 장소를 달리 정한 데에는 까닭이 있다. 처음 현의 관할구역 내 사통팔달의 길 근처에 정한 것은 만백성이 함께 보기를 바란 것이었고, 중간에 사원(祀院)의 학사 근처에 정한 것은 많은 선비들이 흥기하기를 바란 것이었다. 오랜 세월이 지난 뒤에 세상이 달라지고 일이 변하게 되어서는 마지막으로 선대의 묘소 아래 종족이 모이는 곳에 자리 잡은 것은 바로 한 가문의 자손들이 대대로 보고 느끼게 하는 지극한 마음 때문이었다.《시경》에서 말하지 않았는가. "너의 조상을 생각하지 않느냐, 그 덕을 닦을지어다."54)라고 하였으니, 무릇 선생의 자손들이 서로 더불어 이 비를 읽고 몸에 닦아 선생의 덕을 계승하고, 또 한 집안으로부터 고을로 미루어가고 세상으로 미루어간다면 만백성이 함께 보고 많은 선비들이 흥기하는 실상이 또한 여기에 있을 것이다. 惟我先祖晩休堂先生, 天性至孝, 親患背疽, 口吮汁盡而瘳, 又患舌鉤, 致冬月鷰至之異, 內外之艱, 廬墓盡制.宣祖聞而嘉之, 命立純孝碑於本縣南門外, 除掌樂院主簿.上疏陳時獘, 蒙優批.移司直, 光海建儲日, 排門獨疏, 言其不可.竄濟州, 三司交章, 伸救得釋.壬辰之難, 倡義旅, 戰有功, 收義穀, 輸行在.及光海卽位, 先生已沒, 以前疏嫌, 毁踣純孝碑, 削出三綱錄, 禁錮子孫.仁祖改玉, 因監司金公 存敬疏, 伸冤解錮.正祖朝有復碑之典, 移竪於縣南五里道東祠傍近, 有判書徐公 俊輔碑銘.高宗甲戌, 以忠孝卓異, 贈通政大夫吏曹參議, 後五十九年壬申, 又移碑竪於席洞山 聚星齋前, 有從十世孫澤述追記.嗚呼, 先生生平大節, 自有先王朝所褒旌、秉筆家所揄揚, 固非不肖之所敢贅陳, 惟所感則有之.當昏朝之時, 先生身後之禍酷矣.及夫天地淸明之日, 以先生之樹立, 宜有節惠之賜、錄嗣之恩, 而顧乃不然, 所得者, 僅伸冤解錮而止, 復碑之命、三品之亦, 在於累世之後, 何也? 竊意其禍餘懾處, 本家之情, 無由上達, 更化之初, 政目多端, 而不暇及焉, 是可恨者深矣.乃若竪碑之前後異處則有以, 始之於縣治通衢之傍者, 欲萬姓之共覩, 中之於祀院學舍之近者, 欲多士之興起, 是固君師敎民作士之深意也.至於滄桑之餘, 時異事變, 則終而止於先世丘壟之下宗族聚斯之所者, 乃一門子孫世世觀感之至情也.詩不云乎? "無念爾祖? 聿修厥德." 凡爲先生之孫者, 相與讀斯碑而修諸身, 有以繩武乎先生之德, 旣又自一門而推及于鄕于世, 則萬姓共覩多士興起之實, 其亦在斯歟. 절혜(節惠) 시호(諡號)를 뜻하는 것으로, 《예기》 〈표기(表記)〉에 "선왕께서 시호로써 이름을 높이되, 한 가지 선으로써 절취하니, 이름이 행실보다 지나친 것을 수치로 여기기 때문이다.〔先王諡以尊名, 節以壹惠, 恥名之浮於行也.〕"라고 한 데서 나온 말이다. 너의 …… 닦을지어다 《시경》 〈대아(大雅) 문왕(文王)〉에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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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현대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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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빙류

憑後證書右證事은 始興郡(舊安山郡) 秀巖面 物旺里前坪 淡字 六九七-二田 貳百八十六坪二合 同字 六九八田 壹百拾八坪五合五夕 宅地同字 六九七-一 九百四十坪 鱗字 六四一 六四 畓壹千九十五坪一合三夕 合結 㐣 富川郡 蘇內面 茂芝里 族弟宜容이가 證明을 提出인바 此是先山設亨田畓 故로 右畓을 宗中名下로 證明提出리 可ᄒᆞ기로 門議가 齊?ᄒᆞ야 此意을 說渡茂芝里族弟宜容 則事體當然이라 ᄒᆞ고 卽時右田畓證明件을 持來ᄒᆞ기로 此證書을 作成홈大正五年 陰十一月 十一日 全南 寶城郡 文德面 可川里 門長 族兄 冕容 (印)全南○ 長洞里 立會人 敎仁 (印) 敎燮 (印)族弟 和容 善容 (印) 宜容 (印) 福容 前右田畓은 六世祖 五世祖 三位祭田也證明費 七圓을 族弟 宜容가 先用 故計給홈<피봉>全羅南道 寶城郡 文德面 龍岩里 五二○ 李洪淳 殿京畿道 富川郡 蘇萊面 ?? 李百淳 ? 安山勿頃洞移轉文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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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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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간통고류

京鄕路左 拜謁已久 隔歲阻信 鬱陶之懷 曷有其極 伏未審春寒 尙峭靜養 氣體候迓新萬祉 大小宅內諸節 均吉否 並伏溸區區無任之至 族弟 姑依宿昔 而別無大警 是爲私幸耳 就物旺里諸宗 亦爲一安 而所在宗畓 昨年洪水 所敗不小 數次防備 而尙未完築 鄙處宗人 若非?(貧)寒 宜當販費防築 而百尺竿頭 勢無奈何 ??以仰達 以此下諒 費冗條參拾원付送 起境築岸 以爲完畓之地 千萬切企切企耳 餘在續後傳信 姑留不備上丙寅 二月 初八日 族弟 宜容(印) 拜上<피봉>全羅南道 寶城郡 文德面 可川里 李冕容氏 殿 大至急急京富川郡 蘇萊面 茂芝洞 李宜容 大正十五年 舊二月 初八日 出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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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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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구에게 답함 임오년(1942) 答金聖九 壬午 저는 재주가 매우 졸렬하여 세상에서 화합하며 지내는 사람이 적습니다. 때문에 사람들이 처음에는 나와 사귀다가도 좀 지나서는 나에게 취할 만한 점이 없다는 이유로, 혹은 견해가 다르다는 이유로 버려버립니다. 그러나 유독 그대만이 견문이 넓고 교유가 넓음에도 불구하고 오래될수록 더욱 더 친하게 대해주시니, 무엇 때문입니까. 감격하면서도 의심이 없을 수 없습니다. 지금 세상의 유문(儒門) 대가(大家)의 자손들을 살펴보면 선조의 학문을 제대로 계승한 사람으로는 오직 그대가 있으니 이는 진실로 후세에 할 말이 있는 것입니다. 급한 풍조가 뜨겁게 들끓는데도 오히려 주장을 고수하며 60년까지 끌고 온 사람도 드무니, 이 때문에 불쌍히 여기어 같은 심정을 느낀 것입니까. 비록 그렇더라도 저는 실로 늙었습니다. 사람이 태어나 70까지 사는 것은 예부터 드물었으니, 설사 그 나이에 이른다 하더라도 이제 여생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먹는 것이 줄고 살이 빠지며 정신이 나가고 생각이 막히는 것 등은 일일이 말할 겨를도 없습니다. 나이를 따져보고 힘을 헤아려보니 앞날에 가망이 없고, 허물을 반성하고 신세를 슬퍼하니 평소의 뜻은 허위가 되었습니다. 그대는 저보다 15세가 적고 겨우 40세를 넘겼으니 바로 발전하여 큰 성취를 이룰 수 있는 때입니다. 그런데 "나라가 망하여 얼이 빠지고 의리를 구명하기 어려워서 부친과 선사를 저버릴까 두렵다.'는 말씀을 하시면서 저에게 도움을 구하니 무엇 때문입니까? 궁핍한 길을 만난 것으로 말하자면 누가 심하고 누가 심하지 않은지 모르겠습니다. 한쪽은 노인을 섬기고 아이를 기를 책임이 있고, 다른 한쪽은 부친이 죽고 자식이 장성했으니, 근심에 차이가 있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러나 한쪽은 노인이 편안하며 아이가 즐겁고 다른 한쪽은 부인이 비난하고 자식이 어긋납니다. 이것은 또한 깊은 근심 속에 깊은 기쁨이 있는 것이고, 얕은 근심 속에 깊은 근심이 있는 것입니다. 대체로 우리는 이 세상에서 진실로 동병상련하는 심정이 있습니다. 이처럼 한갓 근심하고 한탄하며 범범하게 서로를 구하기보다는 곧바로 눈앞에 행해야 할 일에 대해 진실한 마음으로 강구하고 익혀서 잘못을 빚어내지 않는 것이 더욱 낫지 않겠습니까? 지금 저는 이미 집안의 생계를 잊어버리고 푸른 산속에 살며 문을 닫아걸고 있으니 인사에 관여하지 않는 것이 마땅합니다. 그러나 사는 곳이 오히려 마을과 가까워서 차마 듣거나 보지 못할 일과 편치 않은 의리와 관련한 일이 없지 않습니다. 간절하게 깊은 산이나 먼 바다로 높이 날아가고 멀리 떠나가서 사람들로 하여금 결국 어떻게 됐는지 알지 못하게 하고 싶습니다. 다만 신세가 종손이라서 여러 대의 조상 신위에 제사를 받드는 때에 몸소 참가하지 않는 것은 윤리를 무너뜨릴까 두렵기 때문에 가벼이 감행하지 못합니다.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정밀한 의리로 알려주기 바랍니다. 僕於才最劣, 于世寡合, 故人雖始與之交, 既而以其無可取, 或異見而棄之, 獨以足下聞見博而交遊廣, 久而愈親者, 何也? 不能以感焉而不致疑也.竊觀今世儒門大家子孫, 繼述先學者, 惟足下在, 此固有辭今後, 而急潮熱沸, 猶能撕捱, 而輥到六十者亦鮮, 故爲之矜憐而同情也歟? 雖然, 僕誠老矣.人生七十古來稀, 縱使及之, 今餘幾何? 食減肉敓, 精遁思窒, 不暇枚言.計年量力, 前頭無望; 訟諐悼躳, 素志歸虛.乃以足下少僕十五歲, 僅過強年, 正可進成之日.有"鼎敗神喪, 義理難究, 懼負父師"之語, 而求助於僕, 何哉? 至於竆途之遭, 未知孰甚孰否.而一則有老幼事育之責, 一則既親沒而子壯, 宜其憂之有淺深.然一則老安而幼樂, 一則室讁而庭違.是又深憂中有深喜, 而淺憂中有深憂也.蓋吾人于斯世也, 實同病而相憐也.與其如此徒爾憂歎, 泛泛相求, 曷若直以目下當行, 實心講習, 不至鑄錯之爲愈乎? 今僕既忘家累, 棲碧閉戶, 宜其與人事無關.然所棲尚近家里, 不無聞見之不忍、處義之難安, 切欲高飛遠走於竆山絕海之中, 令人不知所終.但念身爲宗孫, 累世祀板奉祭之時, 身不與祭, 恐乖倫理, 故不敢率爾, 未知如何則可乎? 幸以精義指示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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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계일건익에게 답함 을유년(1945) 答黃啟一 鍵翼○乙酉 경술국치에 나라가 없어진 이후로부터 심장이 무너지고 창자가 뒤틀어져 살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어찌할 수는 없었으니, 다만 삼려대부 굴원처럼 오래 살아서 세상을 벗어나 신선이 되려는 소원79)을 지녔으니 상황이 어떻게 결말이 나는지를 보고 싶었습니다. 천추의 밝은 하늘이 회복되어 한 조각 동토의 땅이 독립을 하니, 온 백성이 춤을 추고 사방에서 환호하였습니다. 진실로 함께 모두 축하할 일이지만, 고통을 참으며 구차하게 산 세월이 36년입니다. 늙어 머리가 세어졌을 때 다시 독립의 오늘을 보게 되니, 비로소 삼려대부의 소원을 이룬 것을 스스로 다행으로 여깁니다. 매우 기쁘고 대단히 통쾌한 것이 홀로 만난 경사인 듯한 느낌이 있습니다. 생각과 꿈이 서로 위로하고 몸뚱이와 그림자가 번갈아 축하하니, 어떻게 마음을 먹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이때에 특별히 은혜로운 편지를 주셔서 국가와 집에서의 공적이고 사적인 기쁨과 다행함을 자세히 진술한 후, 마지막에 '공의 일생이 근심스럽고 울분에 차 있다가 늙어서 이런 경사를 보았다'고 말씀하시니 역시 저 혼자 만난 듯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그러나 저를 알아주고 저를 사랑하는 것이 깊지 않으면 어떻게 이런 말을 할 수 있겠습니까. 비록 그러할지라도 저에 대해 도가 완성되고 식견이 풍부하여 장차 조정의 원로가 될 것이라는 말은 잘못된 것입니다. 생각해볼 때, 산야에서 누추하게 살아서 늙을수록 더욱 황폐해져 처음부터 수기치인의 방법을 터득한 것이 없다는 것을 스스로 매우 분명히 알고 있습니다. 설사 한두 가지 취할만한 천박한 견해가 있다 하더라도 쇠하여 병이 더욱 심해지고 나이는 옛사람이 벼슬을 그만둘 때에 가까워졌으니, 어떻게 조정 일에 참여하여 들을 수 있겠습니까. 다만 당국의 여러 영특하고 용감한 사람들의 부흥에 대한 대책과 박학하고 명철한 사람들의 경제정책에 의지하여 앉아서 태평을 누리면서 일생을 마칠 수 있을 뿐입니다. 고명한 그대의 재주와 식견은 이미 집안을 다스리는 데에서 확인되었으니, 이를 나라에 미룬다면 어디든지 도달하지 못하겠습니까. 나이도 중년에 훨씬 미치지 못했으니 세상에 나가 벼슬하는 것은 바로 이때라 할 수 있습니다. 바라건대 스스로 작게 여기지 말고 더욱 떨쳐 힘을 쓰고, 더욱더 경사(經史)에 공을 들이고 널리 석학들과 교유하여 눈앞에서 실학을 이루고 미래에 위대한 공업을 세우십시오. 저는 큰 기대를 이길 길이 없습니다. 粵自庚戌無國以來, 崩心摧腸, 如不欲生.然亦無如之何, 只有屈三閭長年度世之願, 欲觀其出場.千秋之皓天來復, 一片之青邱獨立, 萬姓鼓舞, 八方歡呼.固所同慶, 而顧此忍痛茍活三十六年, 至老白首, 而復覩今日, 自幸始遂三閭之願, 而深喜大快, 有若獨當之慶, 思與夢相慰, 形與影迭賀, 不知所以爲懷.乃以此時, 特賜惠訊, 既以備陳在國在家公私之喜幸, 終以賤子生平憂憤, 老見此慶喩之, 亦有若一人獨當者.然非相知相愛之深, 烏能及此? 雖然, 謂賤子道成識富, 行將蓍龜乎朝著, 則誤矣.念山野陋生, 老益荒蕪, 初無得乎修己治人之術, 自知甚明.設有一二淺見之可取者, 衰病轉甚, 年近乎古人致事之時者, 何能與聞乎朝著事乎? 只得賴當局諸位英武興復之策․博哲經濟之政, 坐享太平而終身已矣.至於高明才識, 已驗於理家, 推之邦國, 何所不達? 年齡遠不及中身, 出世強仕, 此正其時.幸勿自小, 亟加奮勵, 益用功於經史, 廣從遊於鴻碩, 成實學於當下, 建偉業於前頭, 區區不勝祈望焉. 삼려대부……소원 48쪽 주)80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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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재기 【계미년(1931)】 華山齋記 【癸未】 선조와 인조 시대에 우리 집안의 선조이신 퇴우당(退憂堂) 김공(金公 김해(金垓))과 그 아들 무송당(撫松堂 김이겸(金以謙))은 생존한 당시에 충절로 이름이 드러났고, 돌아가신 뒤에 부풍(扶風 부안)의 이산(梨山) 남쪽 기슭에 안장되었으니, 후대에 그 아래를 지나가는 사람들이 유풍(遺風)을 사모하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여기서 북쪽으로 서로 바라볼 수 있는 곳에 화전(華田) 마을이 있고, 화전 마을로부터 북쪽으로 1리가 채 안 되는 곳에 자리한 4척의 봉분은 무성공 셋째 아들의 부인 □씨의 무덤이고, 여러 신위의 무덤이 이곳에 이어져 있다.예전에 있던 재실은 겨우 재계하고 하룻밤 지낼 수 있을 정도였다. 그래서 임오년 가을에 여러 종족이 함께 의논하여 이 산의 소나무를 벌목하여 재목으로 삼고, 그 나머지는 팔아 돈을 마련해서 옛 재실을 고쳐 새롭게 지었다. 참으로 걸출하게 크고, 완전무결하게 아름다우니, 그 마음과 노력이 또한 진실하고 부지런하였다. 지명을 따라 '화산(華山)'이라 편액하고 나에게 이를 기록하여 이름의 뜻을 돌이켜 생각할 방도를 드러내 주기를 청하기에 내가 "그렇게 하겠다."라고 하였다.'화(華)'는 '화미(華美)'의 '화'와 '화하(華夏)'의 '화'가 있으니, 하나는 숭상하지 않는 바에 있고, 하나는 사모해야 할 바에 있다. 그러나 이 두 가지의 구분은 한갓 사물이나 사람으로써만이 아니다. 움직이고 멈추며 말하고 행하는 등 일상생활에 외면의 꾸밈과 관계되는 것들은 모두 '화미'의 '화'이고, 중도와 정도를 얻은 것들은 모두 '화하(華夏)'의 '화'이다.그러므로 이 재실에 거처하여 제사를 받들 때에는 형편에 걸맞지 않게 제기와 제물을 풍성하게 하는 데에 힘써 남의 구경을 위해 사치를 부렸는지, 정성과 공경을 기울임에 청결함과 엄숙함을 다하여 스스로 자기의 마음을 다할 수 있었는지 스스로 점검해야 한다. 선대의 덕을 칭송할 때에는 또한 벼슬을 성대하게 진술하여 가문을 자랑하였는지, 덕의(德義)를 생각하고 닦음에 자신을 낳아 주신 선조를 욕되게 하지 않았는지 스스로 따져 보아야 한다. 재실에서 물러나서도 이것을 구하여 집에 있을 때나 몸을 다스릴 때나 일 처리를 할 때에 이러한 도를 쓰지 않음이 없다면 그 두 가지를 버리고 취하는 것에 도를 얻었다고 하겠다.대저 퇴우당과 무송당 두 선조의 혁혁한 사업과 그 뒤로 대를 이은 행의(行誼)로부터 근대 성암공(成菴公)의 학문에 이르기까지 또한 모두 이로 말미암아 이루어진 것이니, 여러 어진 종족들이여, 서로 닦고 권면하여 큰 공적을 아뢸 수 있다면 돌이켜 생각함을 다했다고 하겠다. 그러면 욕되게 종족에 있는 나 같은 자도 또한 더불어 영광이 클 것이다. 粤在宣、仁之世, 我族先祖退憂堂 金公與其子撫松堂, 以忠節著於當時, 沒而藏於扶風 梨山之南麓, 後之人過其下者, 莫不慕遺風矣.自是而北可相望, 有華田之里, 自華而北未一里, 有四尺之封者, 撫松公第三子之配□氏之藏, 而累位繼兆在焉.舊有齋僅足以容齊宿, 歲在壬午秋, 諸族協謨, 伐是山松爲材, 斥其餘作錢, 易舊齋而新之, 信宏傑完美, 而其心力誠且勤矣.因地名而扁以華山, 請余記之, 以發其顧思名義者.余曰: "唯." 華有華美之華、華夏之華, 一在所不尙, 一在所當慕.然二者之分, 不徒以物以人而已.凡於動靜云爲之際, 涉於外邊之飾者, 皆華美之華也; 得於中正之道者, 皆華夏之華也.居是齋而奉祭祀, 則當自檢不稱有無而務豊籩豆粢牲, 以侈人觀乎? 用其誠敬而能致蠲潔僾肅, 自盡己心乎? 誦先德, 則亦自勘盛陳簪纓, 誇耀門戶乎? 念修德義, 無忝所生乎? 退而求之, 居家、治身、處事, 莫不用是道焉, 則其於二者之去取得矣.夫以憂ㆍ松二祖之赫赫事業、曁厥後連世行誼, 以及近時成菴公之學問, 亦皆由此而成.僉賢乎, 能交修胥勖, 用奏膚功, 則其爲顧思也盡矣.忝在宗族如余者, 亦與有榮焉大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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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부

봉덕재기 【갑신년(1944)】 鳳德齋記 【甲申】 본조(本朝)가 여씨(麗氏 고려)의 숭불(崇佛)을 이어받은 나머지 선릉(宣陵 성종)의 시대에 이르러서도 폐단이 여전히 혁파되지 않아 온 나라가 문란하였고, 조정에서 심지어 불도(佛道)는 지극히 높아 상대가 없다고 방자하게 말하는 자까지 있었다. 이러한 때에 우부승지 영귀당(咏歸堂) 손공(孫公)과 같은 분이 경연에 입시하여 부처는 영험함이 없고 화복이 사람을 속인다는 것을 반복적으로 말하여 임금이 감동하고 깨달아서 많은 것을 혁파하고 수백 년 유학의 성세를 열게 하였으니, 당시에는 그 분의 말을 마치 봉황이 동쪽 언덕에서 우는 것처럼 들었고, 후대에는 그 분을 마치 상서로운 봉황이 세상에 나온 것처럼 우러러 보았다. 대체로 돌아가신 뒤에 부풍(扶風 부안) 소재지 남쪽 봉덕(鳳德) 마을에 안장되었으니, 지명을 인하여 덕을 상상하면 또한 칭송할 말이 있기에 충분하였다.묘의 동쪽에 옛적부터 4칸짜리 병사(丙舍)가 있었는데, 세월이 오래 지남에 따라 후손의 수가 더욱 번성하여 해마다 제사를 지낼 때에 재계하고 하룻밤 지내는 인원을 수용할 수 없었다. 이에 계미년 겨울에 여러 후손이 함께 의논하여 옛 병사를 고치고 묘 남쪽에 새로운 재실을 도모하여 다음해 봄에 이르러 공사를 마치니, 으리으리하게 크고 넓어서 사람들의 이목을 놀라게 하였다. 대문과 글방으로 호위하고 담장으로 둘러싸자 참으로 완벽하고 아름다웠다.내가 공의 14대손 성호(聖晧)와 성교(聖敎) 두 군의 요청으로 인하여 바로 '봉덕'이라 명명하고 다시 말하였다."들으니, 옛말에 '이름을 돌아보고 그 뜻을 생각한다.'라고 하였고, 또 '조상을 생각하여 덕을 닦는다.'라고 하였다. 대저 승지공은 생전에 성대한 시대를 만나 빛나는 덕을 보고 내려온 봉황으로, 훌륭한 말과 아름다운 행실이 세상의 모범이 되어 후손을 윤택하게 하였기 때문에 이 분을 이어 도봉(道峯)과 한계(寒溪), 초은(楚隱) 등의 어질고 충성스러운 증손과 현손이 있게 되었으니, 이른바 단산(丹山)55)에 평범한 새가 없다는 것이 이러한 것이다.지금 손씨의 여러 현자들이 이 재실에 거처하면서 조상의 자취를 계승할 것을 기약하여 옛 허물을 작은 것까지 다 떨어 없애고 더욱 새로운 덕에 나아가 성대하게 할 수 있다면 그 용감함과 진실함이 또한 재실의 공사를 마치는 것과 같을 것이다. 이렇다면 '봉덕'이라는 두 글자가 어찌 재실에만 있겠는가. 간직한 곧음을 직접 내 몸에 드러내고, 길이 손씨의 세전(世傳)이 될 것이니, 이것을 일컬어 '이름을 돌아보고 그 뜻을 생각한다.'라고 하는 것이며, 이것을 일컬어 '조상을 생각하여 덕을 닦는다.'라고 하는 것이다. 여러 현자들이여, 힘쓸지어다." 本朝承麗氏崇佛之餘, 至于宣陵之世, 獘猶未革, 擧國泯泯, 朝廷之上, 至有恣言佛道之極尊無對者 時則有若右副承旨咏歸堂 孫公, 累侍經筵, 反覆言佛無靈驗, 禍福誑人, 以致君上感悟, 多所革罷, 啓數百年儒學之休運.當時聽其言, 若鳳鳴朝陽; 後世仰其人, 若瑞鳳出世.蓋沒而藏於扶風治南鳳德之里.因地而想德, 亦足以有辭矣.墓之東舊有丙舍四間, 歷世久而麗彌蕃, 則無以容歲祀之齊宿.乃於癸未冬, 諸孫協謀, 易其舊而新是圖于墓南, 至翌年春而功告訖, 輪奐曼碩, 聳人觀瞻.門塾以衛之, 垣墻以周之, 信完且美焉.余因公十四世孫聖晧、聖敎二君之請, 卽以鳳德名之, 復爲之言曰 : "聞之古語有云 : '顧名思義.' 又云: '念祖修德.' 夫惟承旨公, 生當晟際, 而爲覽輝之鳳, 昌言懿行, 範世而裕後.故繼是而有道峯、寒溪、楚隱賢若忠之曾玄, 所謂丹山無凡羽者是已.今孫氏僉賢, 居是齋而期繩祖武, 能盡祛舊瑕之微, 加進新德之盛.其勇且誠, 亦如齋功之訖.是則鳳德二字, 豈惟於齋乎? 存直親見於吾身, 而永爲孫氏之世傳矣.是謂顧思, 是謂念修.僉賢乎, 勉之哉. 단산(丹山) 봉황이 산다는 전설적인 산 이름으로, 단혈(丹穴)이라고도 한다. 《산해경(山海經)》 〈남산경(南山經)〉에 "단혈의 산에……새가 사는데, 그 모양은 닭과 같고 오색 무늬가 있으니, 이름을 봉황이라고 한다.〔丹穴之山……有鳥焉, 其狀如雞, 五采而文, 名曰鳳皇.〕"라고 하였다.

상세정보
저자 :
(편저자)
유형 :
고전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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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부

부망실기 【갑신년(1944)】 不忘室記 【甲申】 옛적에 맹자는 공자가 우인(虞人)을 칭찬하며 지사(志士)는 자신의 시신이 구렁에 버려질 것을 잊지 않고, 용사(勇士)는 자신의 머리를 잃을 것을 잊지 않는다고 말한 것을 인용하여 제후를 만나지 않는 것에 대한 진대(陳代)의 기롱을 배척하였으니, 대체로 어지러운 세상을 만나 출처와 거취를 절도에 맞게 하고자 하는 것은 의리를 죽음으로 지키는 사람이 아니면 할 수 없다. 이것이 공자와 맹자가 특별히 두 가지의 '잊지 않는다[不忘]'는 가르침을 들어서 사람에게 보인 이유이다. 대저 출처와 거취가 어찌 벼슬살이 하는 사람에게만 해당될 뿐이겠는가. 초야의 곤궁한 서민이 한번 거동하고 한번 음식을 먹는 것도 이것이 아닌 것이 없으니, 어찌 소홀할 수 있겠는가.아, 내가 세상이 변한 뒤로 어찌 일찍이 하루라도 살고 싶은 적인 있었겠는가. 그러나 내심 스스로 생각하기에 새로운 나라의 신하와 종이 되지 않고 내 땅에서 난 음식을 먹는 것으로 충분히 자정(自靖)의 도56)를 행할 수 있으리라 여겼다. 그런데 어찌하여 변고가 더욱 심해지고, 일이 더욱 어긋나서 곡식을 강제로 공출하고 양식을 배급받게 된 것인가?57) 먹는 것을 자유롭게 할 수 없고, 의리상 욕을 받을 수 없어 바로 쟁기를 버리고 토실(土室)에 몸을 숨겨 처음에는 솔잎과 마를 채취하여 연명하다가 마지막에는 도랑을 가리켜 돌아갈 곳으로 삼았다. 이에 '불망' 두 글자로 토실을 이름하고 기어코 공자와 맹자의 가르침을 저버리지 않겠다고 스스로 책려하였으니, 훗날의 군자가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겠다.이어서 생각건대, 맹자가 또 "호연지기(浩然之氣)가 천지 사이에 가득 차 있다"라고 말하고, 호연지기를 기르는 것은 의(義)를 모으는 데에 달려 있음을 논하여 "마음에 잊지 말라."라고 말하였으니58), 나는 이에 감히 "의를 모으는 것을 잊지 않는 것이 바로 도랑에 자신의 시신이 있을 것을 잊지 않는 것이다."라고 말하였다.아, 이 몸을 깨끗이 하여 목숨을 다하고 돌아가는 날에 거의 한 줄기 무형의 강대한 기운이 이 사방 1장이 되는 토실을 가득 채우고 천지 사이와 통하여 가지 못할 곳이 없는 혼기(魂氣)와 함께 노닐지 않을까? 갑신년 양의 기운이 회복하는 동지에 나 김택술(金澤述)이 기록하였다. 昔孟子引孔子所贊虞人, 志士不忘在溝壑, 勇士不忘喪其元者, 以斥陳代不見諸侯之譏.蓋當亂世, 欲出處去就之中節, 非死守義理不能.此孔孟所以特揭二不忘之訓, 以示人也.夫出處去就, 豈惟仕者? 草茅韋布之窮, 一起居、一飮食, 無非是已, 豈可忽乎? 嗚呼, 余自世變, 何嘗一日欲生? 然竊自謂罔臣僕食吾土, 足以爲自靖之道.夫何變益甚而事益謬, 穀焉而勒供, 粮焉而配給? 食不能自由, 義不可受辱.於是舍棄耒耜, 竄身土室, 始焉採松薯而延命, 終焉指溝壑而爲歸.乃以不忘二字名室, 而自勵期不負孔、孟之訓, 未知後之君子, 以爲如何? 仍念孟子又曰: "浩然之氣, 塞于天地之間." 其論養氣在乎集義而曰: "心勿忘." 余乃敢曰: "集義之勿忘, 卽在壑之不忘也." 噫, 此身潔淨, 歸盡之日, 庶有一道無形剛大之氣, 充此方丈之室, 而透塞乎兩間, 與無所不之之魂氣俱遊也否? 甲申陽復日, 主人金澤述記. 자정(自靖)의 도 나라가 망했을 때에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을 편안하게 해서 지조를 지키는 도리를 말하는 것으로, 킨다는 뜻으로, 《서경(書經)》 〈미자(微子)〉 편에 "스스로 의리에 편안하여 사람마다 스스로 자신의 지조를 선왕에게 바친다.〔自靖, 人自獻于先王.〕"라고 한 데에서 유래하였다. 곡식을 …… 것인가 일제는 중일전쟁(1937) 전후로 조선을 대륙침략의 인적·물적 보급기지로 만들기 위해 병참 기지화 정책을 시행하면서 1938년에 국가 총동원법을 제정하고 1939년에 미곡 공출제와 식량 배급제를 실시하여 경제를 수탈하였다. 맹자가 …… 말하였으니 《맹자》 〈공손추 상(公孫丑上)〉에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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