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간기록문화
통합검색플랫폼

기관별 검색

검색 범위 지정 후 검색어를 넣지 않고 검색버튼을 클릭하면 분류 내 전체 자료를 볼 수 있습니다

전체 으로 검색된 결과 84193건입니다.

정렬갯수
저자 :
(편저자)
유형 :
고전적
유형분류 :
집부

대암서사에서 여러 군들에게 주는 서문 【당시 최재용의 손자 동선과 김락춘이 나를 따라 학문하였다. 병자년(1936)】 臺巖書社贈諸君序【時崔載鏞孫東宣、金洛春從余遊. 丙子】 학문을 하는 것은 인도(人道)를 배우는 것이고, 명예와 이익을 구하는 것이 아니다. 이런 까닭으로 옛날의 학자들은 얻는 바가 있다고 해서 학문에 부지런하지 않았기 때문에 얻는 바가 없다고 해서 학문을 그만두지도 않았고, 알려지는 바가 있다고 해서 학문에 부지런하지 않았기 때문에 알려지는 바가 없다고 해서 학문에 게으르지도 않았으며, 단연코 도를 구하는 것을 마음으로 삼았으니, 이는 참으로 그러했다.다만 사람은 피와 살로 이루어진 신체를 갖추고 있어 자신을 사사롭게 여기는 이치가 있기 때문에 주(周)나라 때에 빈흥(賓興)의 예145)가 있자 선비들이 학문을 하지 않는 자가 없었고, 진(秦)나라 때에 분서갱유(焚書坑儒)의 화가 있자 사람들이 모두 학문을 꺼려했으니, 이는 인지상정이고, 형세상 반드시 그렇게 되는 것이다.아, 오늘날의 학자들은 모욕을 받고 해침을 당하니, 세상에 용납 받지 못하는 것이 어찌 진나라 시대를 기다린 뒤에만 화가 되겠는가. 제군들은 이러한 때에 도리어 경전을 끌어안고 깊은 산 속에서 머리를 맞댄 채 나에게 청하여 학문을 묻고, 제군들은 나이가 매우 적어서 아직 공부를 쌓고 뜻을 정립한 시기가 없음에도 이러한 일을 잘 해내고 있으니, 어찌 하늘로부터 얻은 본성이 남다른 점이 있어 맹자가 일컬은 호걸의 부류에 버금가지 않겠는가.나는 학문에 대해 스스로 터득한 바가 없기에 제군들의 요청에 응답할 수 없지만, 생각건대 운수에는 막힘과 형통함이 있고 때에는 어둠과 밝음이 있어 막힘이 극도에 이르면 형통하고, 어둠이 극도에 이르면 밝아지게 되는데, 지금 이미 극도에 이르렀으니, 7일 뒤 양이 진동하고 오성(五星)이 규성(奎星)의 자리에 모이는 운수가146) 머지않은 날에 회복되어 도를 배우는 몸에 존귀함과 영화로움을 직접 보게 될 줄 어찌 알겠는가.설사 운수가 막힌 시대라 하더라도 선비의 이른바 명리(名利)는 볼 수 있는 것과 보지 못하는 것, 먼 훗날에 있는 것과 가까운 시기에 있는 것 등의 구별이 있으니, 집안과 나라에 처해서는 훌륭한 명성이 드러나고 조정에 있게 되어서는 두터운 봉록을 누리는 것은 형통하고 밝은 시대를 만났을 때에 볼 수 있는 것으로 가까운 시기에 있는 것이며, 도가 이에 높아져서 백세토록 우러러보고 가르침이 후세에 전해져서 천하가 은택을 입는 것은 막히고 어두운 시대를 만났을 때에 보지 못하는 것으로 먼 훗날에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쇠퇴한 세상에서 얻는 것이 도리어 성대한 시대보다 큼이 있고, 세상이 더욱 쇠퇴하고 곤궁함이 더욱 심해지면 후세에 드러나는 것이 더욱 클 것이다. 대체로 사람들이 도가 쇠퇴하는 것을 보고 학문을 하지 않는 것은 이러한 이치를 모르기 때문이다.그런데 오늘날의 업신여김과 해침을 돌아보지 않는 제군들은 얻음이 없는 옛사람과 같을 뿐만이 아니라 분발하여 도에 뜻을 둔 자들이니, 절로 응당 위하는 바가 없되 학문을 권면하고 학문에 힘쓴다면 반드시 일이 있을 것인데, 내가 어찌 감히 명리의 말에 가탁하여 번거롭게 고하겠는가. 다만 오늘날 사람들은 애초에 교화(敎化)가 없으면 곧 금수(禽獸)가 된다는 경계를 생각하지 않아 학문에 힘써 도를 구하지 않고, 아울러 사물이 극도에 이르면 반드시 돌아온다는 이치를 몰라 몸을 닦아 천명을 기다리지 않으며, 더욱이 지금은 보지 못하지만 먼 훗날에는 큰 명리가 있게 되는 줄 모르고 한갓 가까운 때에 볼 수 있는 작은 명리만을 추구한다. 때문에 이러한 말로 깨우쳐 주어서 돌아가 학문에 근면하지 못하는 예전의 동반자에게 고하게 하니, 또한 납약자유(納約自牖)147)의 뜻이다. 학문을 하는 방법은 제군들이 읽는 경전에 있으니, 또한 나에게 물을 필요가 없을 것이다. 學者學人道, 非求名利也. 是故古之學者, 不爲其有所得而勸, 故不爲其無所得而廢; 不爲其有所聞而勤, 故不爲其無所聞而怠, 斷然惟以求道爲心, 此固然矣. 但人具血肉之身, 便有自私之理. 故周有賓興之禮, 而士無不學; 秦有焚坑之禍, 而人皆諱學. 此人之常情, 勢之必然也. 嗚呼, 今之學者, 受侮見害, 不容於世者, 豈待秦世而後爲禍哉? 諸君乃以此時, 抱經聚首於萬山之中, 請余問學, 諸君年甚少, 尙未有積功定志時節而能辦此, 豈得於天者有異, 而孟子所稱豪傑流亞歟? 余於學, 自無所得, 無以爲對. 但惟運有否泰, 時有晦明, 否極則泰, 晦極則明. 今旣極矣, 安知七日之雷、五星之奎, 行將有復, 而親見尊榮於學道之身乎? 借使否也, 士之所謂名與利者, 有可見不見在近在遠之別, 處家邦而彰令譽, 在廟堂而享厚祿, 此遭泰明之可見而在近者也; 道尊於此而百世仰止, 敎垂諸後, 而天下蒙澤, 此値否晦之不見而在遠者也. 然則衰世之所得, 反有大於盛時, 而世益衰、困益甚, 則發於後者益大矣. 蓋人之見道衰而不學者, 由不知此理也. 余於學, 自無所得, 無以爲對. 但惟運有否泰, 時有晦明, 否極則泰, 晦極則明. 今旣極矣, 安知七日之雷、五星之奎, 行將有復, 而親見尊榮於學道之身乎? 借使否也, 士之所謂名與利者, 有可見不見在近在遠之別, 處家邦而彰令譽, 在廟堂而享厚祿, 此遭泰明之可見而在近者也; 道尊於此而百世仰止, 敎垂諸後, 而天下蒙澤, 此値否晦之不見而在遠者也. 然則衰世之所得, 反有大於盛時, 而世益衰、困益甚, 則發於後者益大矣. 蓋人之見道衰而不學者, 由不知此理也. 若諸君之不顧今之侮害, 不啻若古之無得而已, 而奮發志道者, 自應無所爲, 而勸斯勤斯, 必有事在, 吾何敢託於名利之說而瀆告之? 顧今之人, 初不念無敎卽獸之戒, 而勉學求道, 幷不知物極必反之理, 而修身俟命, 尤不知有不見、在遠名利之大者, 而徒求可見、在近名利之小者. 故爲此說而喩之, 俾歸而告舊日同伴之不勤學者, 亦納約自牖之意也. 至於爲學之方, 有諸君所讀經傳在, 亦不須問余 빈흥(賓興)의 예 인재를 추천하는 예절로, 향대부(鄕大夫)가 그 고을의 소학(小學)에서 어질고 유능한 인재를 천거하여 국학(國學)에 들어가게 하였는데, 이들을 전송할 때에 빈객(賓客)으로 예우한 데서 유래한 말이다. 《周禮 地官 司徒》 7일 …… 운수 원문의 '7일(七日)'의 '일(日)'은 '월(月)'을 뜻하는 것으로, 7개월 만에 양효(陽爻)가 아래에서 하나 생겨남을 말한다. 이는 《주역》 〈복괘(復卦)〉에 "그 도를 반복하여 7일 만에 와서 회복하니, 가는 바를 둠이 이롭다.〔反復其道, 七日來復, 利有攸往.〕" 한 데서 온 말이다. 오성이 규성에 모인다는 것은 금(金), 목(木), 수(水), 화(火), 토(土)의 다섯 별이 문운(文運)을 관장하는 별인 규성의 자리에 모인 것을 말하는 것으로, 문운이 크게 번창하는 것을 나타내는 말ㅇ이다. 이는 송 태조(宋太祖) 건덕(乾德) 5년에 오성이 규성의 별자리에 모인[五星聚奎] 일이 있었는데, 당시 복자(卜者)가 인재가 많이 배출될 조짐이라고 점친 데에서 온 말이다. 납약자유(納約自牖) 상대방이 잘 알고 있어 받아들이기 쉬운 곳으로 이야기하여 차츰 깨닫도록 인도한다는 뜻으로, 《주역(周易)》 〈감괘(坎卦)〉육사(六四)에 "인군에게 아뢸 때에는 인군이 밝은 곳으로부터 하면 끝내 허물이 없으리라.〔納約自牖, 終无咎.〕"라고 한 데에서 유래하였다.

상세정보
저자 :
(편저자)
유형 :
고전적
유형분류 :
집부

권21 卷之二十一

상세정보
저자 :
(편저자)
유형 :
고전적
유형분류 :
집부

기 記

상세정보
저자 :
(편저자)
유형 :
고전적
유형분류 :
집부

권25 卷之二十五

상세정보
저자 :
(편저자)
유형 :
고전적
유형분류 :
집부

행장 行狀

상세정보
저자 :
(편저자)
유형 :
고전적
유형분류 :
집부

통정대부 승정원 우부승지 입암 손공 행장 通政大夫承政院右副承旨笠巖孫公行狀 공의 본관은 경상도(慶尙道) 밀양부(密陽府)이다. 고조의 휘는 책(策)으로 문과에 급제하였으며 수주 목사(樹州牧使)를 역임하였다. 비는 원주(原州) 이씨로 공인(恭人)이다. 증조부의 휘는 계경(季敬)으로 덕을 숨기고 벼슬하지 않았다. 비는 ■씨로 유인(孺人)이다. 조부의 휘는 의화(義和)이니, 통훈대부(通訓大夫)로 단성 현감(丹城縣監)을 지냈다. 비는 ■씨로 숙인(淑人)이다. 선고(先考)의 휘는 민(敏)이니, 통훈대부로 곡성 현감(谷城縣監)을 지냈다. 비는 금산 김씨(錦山金氏)로 숙인이다.성렬(聖烈) 손동선(孫東宣) 군이 그 집안 부로(父老)의 명을 받들어 나에게 와서 청하기를 "선조 입암공(笠巖公)의 행적이 오래되어 대부분 산실되었으니 진사 이언복(李彦復) 공의 행장이 있기는 하지만 참으로 소략함을 면치 못합니다. 송사(松沙) 기우만(奇宇萬)1) 공이 지은 신도비도 이에 기초하여 지었으므로 또한 그러합니다. 근래 제가(諸家)가 편찬한 《동사계고(東史繼考)》와 《국조실록(國朝實錄)》을 보니 자세하지 않은 사실에 대해 자세히 기록하였기에, 별도로 한 행장을 만들어 그것으로 작가에게 글을 부탁하고 비석에 드러내며 문서로 저술할 것을 도모하고 싶습니다."라고 하였다. 내가 스스로 생각하기에 그러한 사람에 대한 그러한 글을 결코 감당할 수 없으나 공을 참으로 평소에 흠모하였으며 게다가 우리 선조 군사공(郡事公) 외손녀의 아들이니, 글을 지어 내 이름을 의탁하는 영광이 있으며 정의(情誼) 또한 마땅히 다져야 한다고 여겼다. 이 때문에 사양하지 못하고 마침내 예전 행장과 비문, 역사와 실록을 참고, 교정하면서 다만 사실만을 기록하였고 마지막에 나의 견해를 덧붙였다. 이에 다음과 같이 행장을 완성하였다.공의 휘는 비장(比長), 자는 영숙(永淑)이며, 입암은 그의 호이다. 손씨는 그 선조가 중국에서 나왔으니, 손승린(孫承麟)이란 분이 바다를 건너 동쪽으로 와서 구사(仇史)에 정박하였는데, 지금의 경주(慶州)이다. 손구례(孫俱禮)는 신라를 도와 그 공으로 모량부대인(牟梁部大人)이 되었다. 세대가 흘러 효자 손순(孫順)이 나왔는데, 곽거(郭巨)와 같은 지성2)으로 아이를 묻다가 종을 얻었는데, 이에 왕이 집과 쌀을 하사하여 모친을 봉양하였다. 중시조 손긍훈(孫兢訓)은 고려 태조가 남쪽을 정벌할 때 도와 광리군(廣理君)에 봉해지고 밀양(密陽)을 채읍으로 삼았으니, 인하여 그곳을 관향으로 삼았다.여러 대를 지나는 동안 모두 벌열이었으니, 태학사(太學士) 손빈(孫贇)은 북쪽 정벌에 공을 세워 밀양군(密陽君)에 봉해졌다. 이 분이 판도 판서(版圖判書) 손광(孫洸)을 낳으셨다. 또 4대를 지나 목사(牧使) 손귀린(孫貴麟)이 나왔으니, 이 분은 수주공(樹州公)이다. 이분의 손자로 공에게 증조가 되는 은덕공(隱德公)이 비로소 부안에 거주하였는데, 3대가 지나 공이 탄생하였다. 공은 영특함이 남보다 뛰어났으며, 10여 세에 경서와 제자백가의 책을 환하게 이해하였다. 약관에 성균관에 올랐는데, 세조(世祖) 임오년(1462년)에 주상께서 사정전(思政殿)에 행차하여 공을 불러서 읽고 있던 책을 강하게 하고서 세자로 하여금 듣게 하였으며, 이윽고 임금에게 올리던 보리밥을 하사하였다. 갑신년(1464년)에 주상께서 온양(溫陽)에 행차하여 과거를 여니, 사론이 '이번 시험에 타도의 선비는 들어오는 것을 허락하지 말아야 한다.'라고 하여 밖으로부터 엄하게 금하니, 공은 시를 지어 시험장에 내던졌다. 그 시는 다음과 같다.문단의 여러 장수가 온양에 진을 쳤는데 文林諸將陣溫陽용과 범이 내달리고 날아올라 전장에서 다투네. 龍虎奔騰走戰場도망간 병졸에 어찌 한신처럼 걸출한 이 없으랴 亡卒豈無韓信傑소하는 모름지기 한중왕에게 고해야 하네.3) 蕭何須告漢中王주상께서 직접 시를 읽고서 하교하여 '금지한 타도의 선비들도 모두 허락하라.'라 하니 공이 마침내 을과(乙科)에 합격하였다. 승문원에 들어갔다가 사간원으로 승진하여 벼슬길에 이름을 떨쳐 명성이 자자하였다.성종(成宗) 원년 경인년(1470년) 4월에 3품 이하 시강하는 신하 가운데서 선발하여 집현전의 고사를 모방하여 임금의 질문에 대답하고 문장을 작성하는데 대비하라고 명하니, 공은 수찬(修撰)이 되어 부제학(副提學) 김지경(金之慶),4) 직제학(直提學) 유권(柳睠), 전한(典翰) 임사홍(任士洪), 응교(應敎) 김계창(金季昌),5) 부응교(副應敎) 최경지(崔敬止),6) 교리(校理) 노공필(盧公弼),7) 홍귀달(洪貴達),8) 부교리(副校理) 김극검(金克儉),9) 정휘(鄭徽), 수찬(修撰) 최숙정(崔淑精),10) 김종직(金宗直), 부수찬(副修撰) 김윤종(金潤宗), 남계당(南季堂),11) 채수(蔡壽)12) 등과 번(番)을 나눠 번갈아 숙직을 하면서 날마다 세 번씩 임금을 접견하여 책의 깊은 뜻을 강론하고 임금의 교화를 보필하였으니, 조정의 다른 신하들이 모두 부러워하면서 '영주에 오른 학사'13)라고 일렀다.술을 하사하고 잔치를 열어주었으며 그러한 모습을 그림으로 그리라고 거듭 명하여 임금의 총애와 영화로움을 길이 보이니, 공과 제학사들은 술에 취해 기쁨에 발을 구르며 춤을 추었다. 다음날 성은에 감사하며 시를 올렸는데, 거듭 외람되이 아름답게 여겨 장려하시니, 이로부터 더욱더 학문을 연마하여 성은을 갚기를 기약하였다. 간간이 동료인 점필재(佔畢齋) 김종직과 학문으로 서로 도움을 주며 시를 수창하기도 하였다. 이 해에 주상께서 또한 양성지(梁誠之)14)에게 명하여 여러 학문을 천문, 풍수, 율려, 의학, 음양, 사학, 시학의 일곱 부분으로 나누고 각 부분에 6명을 두었는데, 나이가 젊은 문신을 각 부분에 배치시켰다. 이에 공은 음양문에 배치되었고 김점필재는 시학문에 배치되었다.신묘년(1471년)에 검토관(檢討官)이 되어 지방에서 돌아왔는데, 주상께서 민간의 질고를 물으시니 공은 전라도 조운(漕運)에서 수군을 부리는 폐단에 대해 아뢰었다. 병신년(1476년)의 중시(重試)에 갑과에 합격하여 전첨(典籤)에서 직급이 승진하여 군자감정(軍資監正)에서 홍문관으로 옮겼으며 승정원에 들어갔다. 이 해 8월에 주상께서 경연에서 《통감강목(通鑑綱目)》을 강론하다가 '대성(臺城)에 유폐(幽閉)된 양나라 군주15)가 채소를 먹다가 그마저 다 떨어지자 이에 계란을 먹었다.'는 부분에 이르러 시종신에게 이르기를 "부처를 믿음이 효과가 없는 것을 이에 더욱 잘 알 수 있다."라고 하니, 공이 참찬관(參贊官)으로 참여하여 대답하기를 "불교를 저처럼 좋아하다가 재앙을 이처럼 받았으니, 후대의 임금은 경계로 삼아야 합니다. 그런데도 오히려 믿는 것은 그 말이 이치에 가깝고 화복의 말이 쉽게 사람을 미혹시키기 때문입니다."라고 하였다. 이윽고 아뢰기를 "지금 법에 정전(丁錢)을 바쳐야 바야흐로 중이 되는 것을 허락하는데, 수령들은 도첩의 유무를 묻지 않고 승려로 받아줍니다. 그러므로 돈을 내는 사람은 백에 한 둘도 없으니, 이 때문에 승도는 날로 늘어나고 군액은 날로 죽어듭니다."라 하였다. 주상께서 "이는 하루아침에 다 개혁할 수 없다."라고 하자, 다시 대답하기를 "이미 잘못된 것을 알았다면 마땅히 속히 제거해야 합니다. 또한 원각사(圓覺寺)는 마땅히 헐어버려야 하는데, 더구나 위병으로 문을 지키게 합니까."라 하였다.이 해 또 예문관 부제학(藝文舘副提學)이 되어 소장을 올려서 재앙을 막는 방법을 논하면서 네 개의 조목을 아뢰었다. 첫 번째는 대간의 말을 즐겨 따르고 훈척들이 국법을 흔들게 놔두지 않게 하는 것이며, 두 번째는 조정 안팎의 여러 벼슬아치 가운데 나이가 어려 학문이 깊지 않은 자는 모두 학문에 나아가게 하고 학문이 이뤄진 뒤에 임무를 맡기는 것이며, 세 번째는 나라의 근본인 백성을 깊이 생각하여 평안도에 사신의 행차할 때 정해진 법 이외의 짐을 지거나 실어서 나르는 폐단을 없애는 것이며, 네 번째는 중들에게 식량을 대주는 비용을 혁파하여 거둬들이고 정병(正兵)이 절 문을 지키는 것을 그만두게 하는 것이다.정유년(1477년) 8월에 도승지(都承旨) 현석규(玄碩圭)16)가 화를 내고 동부승지(同副承旨) 홍귀달(洪貴達)이 팔을 휘두르고 눈을 무섭게 뜨고서 '너'라고 부르며 꾸짖으니, 공은 대사간(司諫)으로서 그들의 무례함을 논박하였다. 10월에 승지로 있으면서 기신재(忌辰齋)의 글 첫머리에 '보살계제자(菩薩戒弟子) 조선국왕 성 아무개.'라고 일컫는 것을 보고서 대단히 놀라 기신재를 파하라고 청하니, 주상이 '보살계제자'라는 말을 없앴다. 11월에 유구국(琉球國)에서 원숭이를 바치자 또다시 승지로써 아뢰기를 "신이 알기로는 전하께서는 완호(玩好)에 마음을 두지 않으시는데, 사관이 '태복시에서 원숭이를 기른다.'라고 적는다면, 훗날 전하께서 기이한 구경거리를 좋아하지 않을 것이라고 어찌 확신하겠습니까."라 하였다.계묘년(1483년) 3월에 정희왕후(貞熹王后)17)가 승하하자, 5월에 주상께서 빈전에 나아가 조전(朝奠)을 행하니 백관들이 곡하였다. 공이 부호군(副護軍)으로 차자를 올려 아뢰기를 "대행대비의 시호를 보니, 깊이 생각하여 능히 성취한 것을 '정(貞)'이라고 하고 백성을 편안히 함에 공이 있는 것을 '희(熹)'라고 하니, 두 글자의 뜻이 비록 모두 아름답지만 다만 공효의 실상만을 드러내고 덕성의 아름다움은 나타내지 못하니 온당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라고 하였다. 을사년(1485년) 7월에 달성군(達城君) 서거정(徐居正) 등과 함께 《동국통감(東國通)》을 편찬하여 진상하니 비단 한 필을 하사받았다. 이후로 두어 해 동안 부안현 요리(蓼里)에 집을 지어 영귀(咏歸)라 편액하고 벼슬에서 물러날 뜻을 굳혔다. 뇌계(㵢溪) 유호인(兪好仁)18)과 대단히 친하였다. 매계(梅溪) 조위(曺偉)19)가 임지로 떠날 때 이별하는 시는 다음과 같다.쓸쓸한 이 신세 시서에 그르쳤나니 蕭條身世誤詩書한 평생 세상과 맞지 않음을 스스로 웃는다. 自笑平生向世疏요리에서는 매양 새 안검20)을 만날 것이고 蓼里每逢新按劎뇌계에서는 다행히 옛 지어21)에 힘입으리. 㵢溪幸賴舊知魚새벽 별은 희미한데 항상 서로 그리워하니 晨星落落長相望세월은 하염없이 흘러 이미 7년 지났네. 歲月悠悠已七除만일 걸상 마주앉아 잠깐 내게 묻는다면 對榻片言如問我늙어가며 담박한 것 다만 처음과 같다 하리. 晩來淡薄只如初이 시는 대개 은거하려는 생각22)을 읊은 작품이다.공은 마침내 요리에서 타계하여 요리의 북쪽 7리에 있는 갈촌(葛村)의 을좌(乙坐) 언덕에 장사지냈다. 배는 숙부인(淑夫人) 전주 최씨(全州崔氏)로 판서 최여달(崔汝達)의 따님이다. 묘는 합봉하였다. 아들로 세기(世基)는 참봉(參奉)이며, 세주(世柱)와 세우(世佑)가 있고, 딸들은 송은손(宋殷孫), 최세준(崔世俊), 윤은찬(尹殷贊), 이광보(李光輔) 등에게 시집갔다. 세기의 아들로 대로(大老)와 충순위(忠順衛) 중로(重老)와 한림(翰林) 숙로(叔老)가 있다. 세주의 아들로 근로(謹老)가 있다. 세우의 아들로 판결사(判決事) 계금(繼錦)이 있다. 송은손의 아들로 홍관(洪寬)이 있다. 최세준의 아들로 륜(崙)이 있다. 윤은찬의 아들로 종원(宗元)과 종형(宗享)이 있다. 이광보의 딸은 진사 김관(金綰)에게 시집갔다. 대로의 아들로 참봉 홍우(弘祐)와 진사 홍복(弘福), 그리고 홍정(弘禎)이 있다. 중로의 아들인 홍적(弘績)은 대교로 호는 도봉(道峰)인데 을사년에 시사(時事)를 곧바로 쓴 일로 귀양을 가서 죽었으며, 홍륜(弘綸), 홍서(弘緖), 홍계(弘繼)는 모두 진사이며, 그리고 홍업(弘業)이 있다. 숙로의 아들로 별제(別提) 홍록(弘祿)의 호는 한계(寒溪)인데 임진왜란 때 태조의 진영을 옮겨 봉안하였으며 《열조실록(列朝實錄)》을 완전히 보호한 공이 있다. 근로의 아들로 장악원 정(掌樂院正)인 대남(大南)이 있다. 계금의 아들로 진사인 순량(舜良)이 있다.삼가 일찍이 논하건대, 공은 일찍이 문장을 성취하여 이른 나이에 중시(重試)에 합격하였으니, 이는 천부적인 재주가 매우 뛰어났기 때문이다. 홍문관 부제학, 예문관 직제학, 좌우 승지와 동부승지, 이조참의, 성균관 대사성, 사간원 대사간을 역임한 것은 모두 청현직(淸顯職)으로 이 또한 문학과 중망으로 이룬 것인데, 임금의 계책을 빛내고 임금의 덕을 성심으로 인도하였다. 그러므로 논하는 자들이 문장은 사마천(司馬遷)과 반고(班固)의 법도를 따르고 학문은 정자(程子)와 주자(朱子)의 문로를 얻었다고 하였으니, 이것은 당시에 어찌 그러한 까닭이 없겠는가.그러나 공의 마음에 답답한 것이 있으니, 도가 밝지 못한 것은 이단이 해치기 때문인데 그 중에서도 불교가 가장 심하다. 공이 조정에 서서 의논한 것으로 강의와 대문(對問)부터 진언과 소차(疏箚)에 이르기까지 마음에 지닌 것과 말로 드러낸 것은 오직 맹자(孟子)가 말한 '힘써 그 임금을 이끌어서 도에 합하게 한다.'23)는 것에 해당하는데, 그에 해당하는 큰일은 바로 불교를 배척하는 것이다. 오호라! 불교의 해로움은 천여 년이 되었기에 성종의 시대에도 그 폐단이 아직 제거되지 않았으니, 조정의 높은 관리로 통유(通儒)라고 일컬어지는 자가 '태극의 위에 있는 무극은 불도가 바로 이것이다.'라는 말까지 하게 되었다. 이 때에 공은 우뚝하게 견해를 견지하고 강건하게 올바름을 지켜 첫째도 불교는 배척해야 하고 둘째도 불교는 배척해야 한다고 주장하여 배척함을 그치지 않았으며, 군주로 하여금 불교에 관한 많은 것을 혁파하게 하였으니 사문에 공을 세운 것이 크다.또한 기미를 보고서 일어나 오랜 시간을 기다리지 않으니, 도에 본 것이 있지 않는 자는 이렇게 할 수 없다. 이 때문에 동한 말기에 어진 선비가 많았으나, 초연히 당고(黨錮)의 화를 면한 자는 몇 사람 되지 않는다. 다만 공은 욕되지 않고 위태롭지 않은 이치를 분명하게 알아 하루아침에 기러기처럼 높이 날아 그물에서 벗어나니, 무오년 제현들로 하여금 손색이 있게 하였다. 이는 소광(疏廣)이 소망지(蘇望之)가 당한 재앙을 일찍 멀리한 것이니,24) 어찌 더욱 어렵지 않으랴.이 두 가지 사실에서 공의 학문이 옛날 현인의 심법에서 전수받은 것이 있음은 속일 수 없다. 마땅히 그가 집에 거처할 때와 세상에 살아가면서 남긴 아름다운 말과 훌륭한 행실을 많이 기록으로 남겼을 것인데, 이미 큰 난리를 겪었고 거듭 화마를 당하여 저술이 흩어지고 잃어버렸기에 그 증거가 아득하다. 예전 행장에서 효성과 우애는 천부적이었다는 한 구절 이외에 조금도 그 대략을 드러낼 수 없으며, 심지어는 생졸년도 없으니 탄식을 견딜 수 있으랴.다만 다행히도 역사책에 실려 있고 비석에 새겨져 있는 것이 해와 별처럼 분명하며, 조정에 남긴 위대한 업적은 남김없이 다 드러났으니, 옛사람의 일을 논하는 자들은 이것으로 미뤄 짐작한다면 크고 작은 삶 전체를 거의 두루 알 수 있을 것이다. 공의 발자취를 이어 도봉(道峰)의 어짊과 한계(寒溪)의 충절이 나왔다. 도봉은 초은(楚隱) 승경(承憬)을 낳았는데 또한 임진왜란 때 순절하였으니, 그가 덕행을 마음으로 깨쳐서 타인에게 미치며 나아가 후손에게 전한 것을 또한 알 수 있다. 한갓 명성과 지위, 업적만이 환하게 빛난 것이 아니니, 오호라 훌륭하도다. 本貫, 慶尙道密陽府.高祖諱策, 文科, 樹州牧使, 妣原州李氏恭人.曾祖諱季敬, 隱德不仕, 妣■氏孺人.祖諱義和, 通訓大夫行丹城縣監, 妣■氏淑人.考諱敏, 通訓大夫行谷城縣監, 妣錦山金氏淑人.孫君聖烈東宣奉其門父老命, 來請于余曰: "先祖笠巖公事行, 舊多遺逸, 有進士李公彦復狀, 而固不免疎略, 松沙奇公宇萬神道碑, 因是而作, 故亦然.近得見諸家所編《東史繼考》·《國朝實錄》, 詳其所未詳, 竊欲別成一狀, 以之謁文作家, 顯之于碑, 著之于牒, 願有以圖之也." 余自惟以人以文, 決非可堪, 然公固平日所景仰, 且吾先祖郡事公外孫女之子, 名可託榮, 誼亦當講.以是辭不得, 終遂以舊狀與碑及史與錄, 參互訂定, 惟實是從, 末附己見, 以成文曰: "公諱比長字永淑, 笠巖其號也.孫氏, 其先蓋出中國, 有承麟浮海而東泊仇史, 今慶州.有俱禮佐新羅, 爲牟梁部大人.傳至孝子順, 有郭巨至誠, 埋兒得鍾, 王賜第米養母.中祖兢訓, 佐麗太祖南征, 封廣理君, 食采密陽, 仍貫焉.歷累世皆顯閥, 太學士贇, 北征有功, 封密陽君, 生版圖判書洸.又四傳而至牧使貴麟, 是爲樹州公.考隱德公始居扶安, 三世而公生焉.穎悟出人, 十餘歲經子百家, 靡不通解, 弱冠登上庠.世祖壬午, 上御思政殿, 召公講所讀書, 使世子聽之, 仍賜御膳麥飯.甲申, 幸溫陽設科, 士論謂'今試他道士勿許入.' 自外嚴禁, 公作詩投獻試庭, 詩曰: "文林諸將陣溫陽, 龍虎奔騰走戰場.亡卒豈無韓信傑, 蕭何須告漢中王." 上親覽下敎'禁止幷許他道士.' 公竟得擢乙科, 入槐院陞柏府, 敭于名塗, 聲譽蔚然.成宗元年庚寅四月, 命選三品以下侍講之人, 倣集賢殿故事, 以備顧問製作, 公爲修撰, 與副提學金之慶·直提學柳睠·典翰任士洪·應敎金季昌·副應敎崔敬止·校理盧公弼·洪貴達·副校理金克儉·鄭徽·修撰崔淑精·金宗直·副修撰金潤宗·南季堂·蔡壽, 分番更直, 日承三接, 講劘奧義, 協贊聖化, 同朝搢紳, 莫不跋羡, 謂之登瀛學士.宣醞賜樂, 申命圖繪, 永示寵榮, 公與諸學士醉歡舞蹈.翼日謝恩進詩, 重叨嘉獎, 自是益加淬礪, 期於報答.間與同僚金佔畢齋, 麗澤相資, 唱和相屬.是歲上又命梁誠之, 分諸學爲天文風水律呂醫學陰陽史學詩學七門, 門置六人, 以年少文臣配之, 公配陰陽門, 金佔畢配詩學門.辛卯, 爲檢討官自外還, 上問民間疾苦, 公奏全羅漕運役水軍之弊.丙申重試, 闡甲科, 以典籤陞秩, 由軍資監正移玉署東壁入銀臺.是年八月, 上於經筵講《綱目》, 至'臺城之閉, 梁主蔬茹皆盡, 乃食鷄子.' 謂侍臣曰: "佛之無驗, 於此益可見矣." 公以參贊官對曰: "好佛如彼, 而受禍如此, 後之人主, 可以鑑矣, 而猶信之者, 以其言近理, 而禍福之說, 易以惑人也." 因奏曰: "今法納丁錢, 方許爲僧, 而守令不問度牒有無, 故納錢百無一二, 是以僧徒日增, 軍額日減." 上曰: "此不可一朝盡革." 對曰: "旣知之, 當速去之.且圓覺寺, 在所當毁, 况使衛兵把門乎." 是月又爲藝文舘副提學, 上疏論弭災之方, 條陳四事, 一曰, 樂從臺諫, 勿以勳戚而撓國法.二曰, 中外庶官, 年少不學者, 幷令就學, 學成而後任之.三曰, 深念邦本, 以袪平安一道使行時法外駄載之弊.四曰, 革收廩僧之費, 罷正兵寺門之守.丁酉八月, 都承旨玄碩圭怒, 同副承旨洪貴達攘臂怒目, 至稱'爾汝'而罵之, 公以大司諫, 駁其無禮.十月, 以承旨奏忌辰齋疏頭稱'菩薩戒弟子朝鮮國王姓諱.' 見之甚駭, 請罷之, 上命去'菩薩戒弟子'語.十一月, 琉球國獻猿公, 又以承旨奏曰: "臣知殿下絶意玩好, 而太史書之曰: '太僕畜猿.' 安知後日不謂殿下好奇玩乎." 癸卯三月, 貞熹王后昇遐, 五月, 上詣殯殿行朝奠, 百官哭臨, 公以副護軍上箚曰: "大行大妃之謚, 大慮克就曰'貞', 安民有功曰'熹', 二字義雖皆美, 只著功令之實, 未見德性之善, 似爲未安." 乙巳七月, 與達城君徐居正等, 編進《東國通鑑》, 蒙賜叚子一匹.自是以後, 數歲築堂于同縣蓼里, 扁以咏歸, 決意休退.與兪㵢溪好仁甚相好, 其別曹梅溪偉赴任詩曰: "蕭條身世誤詩書, 自笑平生向世踈.蓼里每歎新按劒, 㵢溪幸賴舊知魚.晨星落落長相望, 歲月悠悠已七除.對榻片言如問我, 晩來淡泊只如初." 此蓋筮遯之作也.竟卒于蓼, 葬于蓼北七里葛村乙坐原, 配淑夫人全州崔氏, 判書汝達女, 墓合封.男世基參奉, 世柱·世佑, 女適宋殷孫·崔世俊·尹殷贊·李光輔.世基男, 大老, 重老忠順衛, 叔老翰林.世柱男, 謹老.世佑男, 繼錦判決事.宋婿男, 洪寬.崔婿男, 崙.尹婿男, 宗元·宗享.李婿女金綰進士, 大老男, 弘祐參奉, 弘福進士, 弘禎.重老男, 弘績待敎號道峰, 乙巳直書時事謫卒, 弘綸·弘緖·弘繼, 幷進士, 弘業.叔老男, 弘祿別提號寒溪, 壬辰亂有移奉太祖眞像, 保全《列朝實錄》之功.謹老男, 大南掌樂院正.繼錦男, 舜良進士.竊嘗論之, 公之夙就文章, 早捷重試, 自是天才之絶異.弘文副學藝文直提左右同副承旨吏曹參議成均館大司成司諫院大司諫之歷盡淸顯, 亦惟文學重望, 有以致之, 而黼黻皇猷, 啓沃君德, 故論者謂文追遷固軌轍, 學得程朱門路, 此其當時, 豈無所以然哉.抑余有所槩于中者, 道之不明, 異端害之而佛爲甚.公之立朝議論, 自講義對問, 至奏啓疏箚, 心心所存, 言言所發, 惟孟子所謂'務引其君而當道'者是已, 而其大者在乎斥佛, 嗚呼, 佛之爲害, 千有餘年, 宣陵之世, 弊猶未祛, 同朝大官稱爲通儒者, 至有太極之上有無極, 佛道是也之說矣.于斯時也, 公卓然持見, 介然守正, 一則曰佛可斥, 再則曰佛可斥, 斥之不已, 而使君上多所革罷, 其有功斯文大矣.且夫見幾而作, 不俟終日, 非有見乎道者不能.是以東漢之末, 賢士多矣, 超然免於黨錮者, 無幾人焉.惟公洞見不辱不殆之理, 一朝鴻擧, 迴脫網外, 使戊午諸賢有遜色, 此疏廣所以早遠望之之禍者, 豈不尤難哉.于此二者, 公之學有所受於古賢心法者, 不可誣也.宜其居家處世之嘉言懿行, 亦多可書, 而旣經大亂, 重以回祿, 著述散亡, 徵佐遙邈.舊狀孝悌天性一節外, 不少槩見, 甚則生卒無年, 可勝歎哉.惟幸竹帛之載, 金石之藏, 昭如日星, 朝著偉蹟, 畢見無餘, 尙論者以此而反隅, 則全體巨細, 庶可周知.繩公之武而有道峰之賢, 寒溪之忠.道峰生楚隱承憬, 又殉節壬亂, 其德行之得之心及乎人, 而傳諸後承者, 亦可見矣.不徒爲名位事業之炳烺已也, 於虖盛哉." 송사(松沙) 기우만(奇宇萬) 1846~1916. 자는 회일(會一). 호는 송사(松沙)로 호남에서 이름에 높았던 기정진(奇正鎭)의 손자이다. 고종 18년(1881)에 조정에 행정 개혁을 요구하는 만인소(萬人疏)를 올려 호남 소수(湖南疏首)라 불리었다. 명성 황후가 시해되자 의병을 일으키는 등 항일 운동을 하였다. 곽거와 같은 지성 후한(後漢)의 효자 곽거가 가난한 형편에도 노모를 극진히 봉양하였다. 마침 아내가 아들을 낳아 세 살이 되었을 때 노모가 항상 자기 밥을 덜어서 손자를 먹이곤 하였다. 그러자 곽거가 아내에게 말하기를 "가난해서 어버이 봉양을 제대로 할 수 없으니, 우리 함께 저 자식을 묻어 버립시다. 자식은 다시 얻을 수 있지만, 어머니는 다시 얻을 수 없소." 하고, 아내와 함께 아이를 안고 가서 땅에 묻으려 하였다. 땅을 2척 남짓 파내려 가자 갑자기 황금이 가득한 가마솥〔金釜〕 하나가 나타났는데, 그 솥 위에 "하늘이 효자 곽거에게 내린 것이니, 관청에서도 빼앗을 수 없고 다른 사람이 취할 수 없다."라고 쓰여 있었다. 그래서 아이 묻는 일을 중단하고 바로 돌아와서 어버이도 잘 봉양하고 아이도 잘 기를 수 있었다고 한다. 《太平御覽 卷411》 도망간……하네 소하(蕭何)가 한 고조(漢高祖)에게 한신(韓信)을 여러 차례 추천하였는데도 중용하지 않아 한신이 도망치자, 이 소식을 듣고 소하가 고조에게 미처 아뢸 겨를도 없이 한신을 쫓아가서 데려왔다. 《史記 卷92 淮陰侯列傳》 여기서는 과거를 보지 못한 거자(擧子) 가운데 한신 같은 인물이 있다는 것을 비유하고 있다. 김지경(金之慶) 1419~1485. 본관은 선산, 자는 유후(裕後), 시호는 경질(景質)이다. 조선 전기의 문신으로 세종 ·단종 ·세조 ·예종 ·성종 대에 여러 관직을 역임하였으며, 1475년에는 평안도관찰사로 수령의 탐학을 처벌하고 성책을 보수하는 등의 치적을 남겼다. 1485년에는 신병으로 사직하였으나, 성종의 배려로 한직인 호군에 제수되었다. 김계창(金季昌) ?~1481. 본관은 창원, 자는 세 번(世蕃)이다. 1478년 승정원동부승지가 되고, 좌부승지 ·우승지 ·도승지를 역임하고, 1481년 이조참판이 되었다. 시문과 경사에 능통하고, 외교문서 작성과 문풍진흥에 공헌하였다. 최경지(崔敬止) ?~1479. 본관은 경주(慶州)이고, 자는 화보(和甫)이다. 1479년(성종 10)에는 홍문관 직제학으로 있으면서 연산군의 생모인 정현왕후(貞顯王后)의 폐위를 반대하였다. 시문에 뛰어났다. 노공필(盧公弼) 1445~1516. 본관은 교하(交河), 자는 희량(希亮), 호는 국일재(菊逸齋)이다. 1504년 갑자사화 때 무장(茂長)으로 장배(杖配)되었다. 2년 뒤 중종반정으로 우찬성(右贊成)에 영경연사(領經筵事)로 특진하고, 1507년(중종 2) 1차 사절이 실패했던 중종의 승습(承襲)에 관한 승인을 명나라에 가서 얻어내고 귀국, 중추부영사(領事)가 되었다. 홍귀달(洪貴達) 1438~1504. 본관은 부계(缶溪), 자는 겸선(兼善), 호는 허백당(虛白堂) ·함허정(涵虛亭), 시호는 문광(文匡)이다. 1467년(세조 13) 이시애(李施愛)의 난 때 공을 세워 이조정랑에 올랐다. 1479년(성종 10) 도승지로서 연산군의 생모 윤씨(尹氏)의 폐비(廢妃)에 반대하다가 투옥되었다. 1498년(연산군 4) 무오사화(戊午史禍) 때 좌참찬으로서 왕의 난정(亂政) 10여 조목을 들어 간(諫)하다가 좌천당하였다. 1504년 손녀(彦國의 딸)를 궁중에 들이라는 연산군의 명을 거역, 장형(杖刑)을 받고 경원(慶源)으로 귀양가던 도중 단천(端川)에서 승명관(承命官)에게 교살당하였다. 김극검(金克儉) 1439~1499. 본관은 김해, 자는 사렴(士廉), 호는 괴애(乖崖)이다. 1491년 홍문관부제학이 되어 한때 언로(言路)를 주도하였다. 1492년 중추부동지사(中樞府同知事)로 정조사(正朝使)가 되어 중국 명나라에 다녀온 뒤 한성부 우윤과 좌윤, 호조참판이 되고 《성종실록》 편찬에 참여하였다. 학식이 뛰어나고 시문에 능하였다. 최숙정(崔淑精) 1433~1480. 본관은 양천(陽川), 자는 국화(國華), 호는 소요재(趙遙齋) ·사숙재(私淑齋)이다. 1470년 승문원 교리로서 춘추관기주관을 겸직, 《세조실록(世祖實錄)》 《예종실록(睿宗實錄)》 편찬에 참여했다. 한때 탐학한 관리라 하여 파직되었다가 다시 기용되어 부제학이 되었다. 노사신과 함께 왕명을 받들어 《삼국사절요(三國史節要)》를 편찬했다. 남계당(南季堂) 본관은 의령(宜寧), 자는 희정(希正)이다. 담양부사(潭陽府使)를 역임할 때 백성들에게 선정(善政)을 베풀어 성종이 직접 글을 내려 격려하고 포상하였다. 1486(성종 17) 겸 사헌부집의(兼司憲府執義)이 되었으며 안변부사(安邊府使)를 거쳐 1493(성종 24) 남원부사(南原府使)가 되었다. 채수(蔡壽) 1449~1515. 본관은 인천(仁川)이며, 자는 기지(耆之), 호는 난재(懶齋;'懶'는 보통 '라'로 읽어 '나재'로 표기하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그의 문중에서는 본음인 '란'으로 읽어 '난재'로 표기한다), 시호는 양정(襄靖)이다. 이석형과 함께 조선 개국 이래 삼장에서 연이어 장원한 두 사람 중의 한 사람이다. 1478년 응교(應敎)가 되어 도승지(都承旨) 임사홍(任士洪)의 비행을 탄핵하여 좌천시켰다. 1479년(성종 10) 연산군의 생모 윤씨를 폐위하는 데 반대하였다가 파직되었다. 1506년(중종 1) 중종반정에 가담하여 분의정국공신(奮義靖國功臣) 4등에 녹훈되고 인천군(仁川君)에 봉해졌으며, 이후 함창(咸昌)에 은거하여 독서와 풍류로 여생을 보냈다. 산경(山經)·지지(地誌)·시문(詩文)에 능하였으며, 저서에 《난재집(懶齋集)》 2권과 고전소설 《설공찬전(薛公贊傳)》이 있다. 영주에 오른 학사 '등영주(登瀛洲)'의 준말로, 영주는 신선이 산다는 전설 속의 산이다. 당 태종(唐太宗)이 태자로 있을 때 방현령(房玄齡)과 두여회(杜如晦) 등 18인을 학사(學士)로 삼아 정사를 자문하자, 사람들이 그들을 부러워하여 영주에 올랐다고 비유하였다. 《新唐書 卷102 褚亮列傳》 양성지(梁誠之) 1415~1482. 본관은 남원(南原), 자는 순부(純夫), 호는 눌재(訥齋) 또는 송파(松坡)이다. 우리나라 지지(地誌)에 조예가 깊어 단종 때 〈팔도각도(八道各圖)〉를 작성하고, 세조 때 《팔도지리지》와 《동국지도》를 편찬했다. 1481년 홍문관 대제학이 되어 《여지승람(輿地勝覽)》을 편찬하고 각종 서적의 인쇄 · 출판을 건의하는 등 많은 업적을 남겼다. 글씨를 잘 썼는데 특히 초서에 능했다. 대성에……무제 양 무제에 대해서는 《자치통감》 권162 〈양기(梁紀)〉에 보인다. 참고로 양 무제에 대한 평으로 《승정원일기》 영조 즉위년 11월 3일 야대(夜對)에서 사독관 신치운(申致雲)의 말이 주요하다. 즉 "양 무제는 영웅호걸의 재주를 갖고 있었고 지려가 높고 넓었으며, 혈기의 욕심을 끊어 버리고 주색(酒色)이나 놀이와 사냥을 좋아하지 않았고, 독서를 하고 소찬(素饌)을 하면서 오로지 부처를 숭상하였으니, 그의 뜻이 단지 복전(福田)의 이익을 구하는 데에서 나온 것이 아니었습니다. 대개 불학(佛學)은 나라를 다스리는 도(道)와는 별개의 일로 산하(山河)와 일월(日月)을 환상(幻像)으로 보아 천하 국가를 외물(外物)로 여기니, 불학을 숭상하다 나라를 망하게 하는 것은 필연적으로 이르게 되는 형세입니다. 그러므로 하루아침에 후경(侯景)이 이르자 상하가 속수무책으로 어찌할 바를 모른 채 끝내는 대성(臺城)에서 굶어 죽었습니다."라 하였다. 현석규(玄碩圭) 1430~1480. 본관은 창원(昌原), 자는 덕장(德璋), 호는 청단(淸湍), 시호는 정경(貞景)이다. 정직과 청렴으로 공사(公事)를 잘 처리하여 성종의 신임이 두터웠다. 중추부지사로 사은사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온 후, 평안도 관찰사로 선정을 베풀어 백성들의 청원으로 임기가 끝난 후 1년간 더 재직하고 어의(御衣)를 하사받았다. 정희왕후 세조(世祖)의 왕비로 예종이 죽은 뒤에 성종을 왕위에 앉히고 대왕대비로서 8년 동안 수렴청정을 하였다. 뇌계(㵢溪) 유호인(兪好仁) 1445~1494. 자는 극기(克己), 호는 임계(林溪) 또는 뇌계이다. 1474년 식년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여러 벼슬을 지냈으며, ≪동국여지승람≫ 편찬에 참여하였다. 시ㆍ문장ㆍ서예에 뛰어나 삼절(三絕)로 꼽혔다. 매계(梅溪) 조위(曺偉) 성종 때의 학자(1454~1503)로 자는 태허(太虛), 호는 매계(梅溪)이다. 김종직의 문인으로, 도승지를 역임하고 대사성으로 지춘추관사가 되어 ≪성종실록≫을 편찬할 때 김종직의 〈조의제문〉을 실어 무오사화 때 유배되어 죽었다. 저서에 ≪매계집≫이 있다. 안검 《사기》 〈노중련추양열전(魯仲連鄒陽列傳)〉에서 "명월주(明月珠)와 야광벽(夜光璧) 같은 좋은 보배를 몰래 길 가는 사람에게 던지면 칼자루를 잡고 노려보지 않을 사람이 없으니, 그 까닭은 이유 없이 자기 앞에 떨어졌기 때문이다."라 하였다. 여기서는 조위가 자주 시를 보낸다는 의미이다. 지어 장자(莊子)와 그의 친구 혜자(惠子)가 호수(濠水)의 다리 위에서 노닐 때, 장자가 말하기를 "피라미가 나와서 조용히 노니, 이것이 물고기의 즐거움일세.[鯈魚出游從容 是魚樂也]"라고 하자, 혜자가 말하기를 "자네는 물고기가 아닌데 물고기의 즐거움을 어떻게 알겠는가.[子非魚 安知魚之樂也]"라고 하며 서로 이야기를 나누었던 데서 온 말이다. 《莊子 秋水》 여기서는 유호인과 함께 참된 즐거움을 누릴 것이라는 말이다. 은거하려는 생각 '서둔(筮遯)'은 점을 쳐서 둔괘가 나왔다는 말로 은거하려는 생각을 가리킨다. 《주역》 둔괘(遯卦)의 전(傳)에 이르기를 "둔(遯)은 음(陰)이 자라나고 양(陽)이 사라지니, 군자가 은둔하여 숨어 지낼 때이다."라고 하였다. 힘써……한다 《맹자》 〈고자 하(告子下)〉에서 "군자가 임금을 섬길 때는 그 임금을 힘써 이끌어 정도에 부합되게 해야 한다.〔君子之事君也 務引其君以當道〕"라 하였다. 소광이……것이니 소망지는 전한(前漢)의 제10대 황제인 선제(宣帝) 유순(劉詢) 때부터 측근으로 중용되고 있던 중서령(中書令) 홍공(弘恭)ㆍ중서복야(中書僕射) 석현(石顯) 등의 중서(中書) 환관(宦官)들과 대립해 실각했다. 홍공(弘恭)ㆍ석현(石顯) 등의 환관(宦官)들은 대립하던 소망지(蕭望之)를 모함하여 자결하게 하였다. 소광은 선제(宣帝) 때의 태자 태부(太子太傅)를 지냈는데, 황태자였던 원제(元帝)가 12세에 《논어(論語)》와 《효경(孝經)》을 통달하자 태자 소부(太子少傅) 소수(疏受)에게 "내 들으니 '만족할 줄 알면 욕되지 않고 그칠 줄 알면 위태롭지 않다.'라고 하고, '공(功)을 이룬 뒤에는 물러나는 것이 하늘의 도(道)이다.'라고 한다. 지금 벼슬이 이천석(二千石)에 이르러 높은 벼슬에 오르고 명예를 확립하였는데, 이와 같은데도 떠나지 않는다면 후회가 있을까 두렵다."라고 하고는 고향으로 돌아갔다.

상세정보
저자 :
(편저자)
유형 :
고전적
유형분류 :
집부

서주 방공의 행장 정묘년(1927) 西洲房公行狀【丁卯】 공의 성은 방씨(房氏)로 휘는 두재(斗載), 자는 망여(望汝), 호는 서주(西洲), 본관은 남양(南陽)이다. 윗대에 휘 계홍(季弘)이란 분이 있는데, 고려 개국 공신으로 지위는 삼한벽상공신 삼중대광보국(三韓壁上功臣三重大匡輔國)에 올랐다. 그 후 8대 동안 벼슬아치가 연이어 나왔으니, 휘 사량(士良)은 보문각 직제학(寶文閣直提學)을 지냈다. 이 분은 휘 구성(九成)을 낳았으니, 구성은 남원(南原)에서 아내를 얻어 이로 인해 주포촌(周浦村)에 거처하게 되었으며, 벼슬은 정산 현감(定山縣監)에 그쳤다. 이분이 휘 순문(恂文)을 낳았으니, 순문은 경기도 수운판관(京畿道水運判官)을 지냈다. 이분이 휘 귀화(貴和)를 낳으니, 생원, 진사에 모두 합격하여 호조좌랑(戶曹佐郞)을 지냈다. 이분이 휘 한걸(漢傑)을 낳으니, 한걸은 부사직(副司直)을 지냈다. 소재(蘇齋) 노수신(盧守愼)25)이 그의 묘지(墓誌)를 썼으니, 바로 공의 5대조이다. 고조의 휘는 응현(應賢)으로, 월사(月沙) 이정구(李廷龜)가 그의 묘갈명(墓碣銘)을 지었다. 증조의 휘는 덕화(德驊)이다. 조부의 휘는 원정(元井) 호는 지족와(知足窩)로 문과에 합격하여 전적(典籍)을 지냈다. 부친의 휘는 명엽(明燁) 호는 주일와(主一窩)로 진사였다. 부인은 창녕(昌寧) 조씨 감역(監役) 황(熀)의 따님이다. 주일의 아우의 휘는 명흡(明熻)이며, 그 부인은 여주 이씨(驪州李氏 ) 별제 지일(志一)의 따님으로 공의 생부모이다.공은 숙종(肅宗) 을유년(1705년)에 태어났는데, 자태가 청수하고 자질이 뛰어났다. 어려서 어버이를 섬김에 때에 맞게 혼정신성(昏定晨省)하였으며 부드러운 낯빛으로 부모의 뜻을 받들었다. 17살에 독자로써 백부의 후사로 출계하였다. 이 해에 부친상을 당하여 예로써 장사와 제사를 지냈는데, 정성과 의식이 모두 잘 갖춰졌다. 후에 모친상을 당했을 때도 또한 부친상처럼 지냈다. 항상 생부가 후사가 없는 것을 지극한 한으로 여겨 이에 대해 말이 미치면 곧바로 눈물을 흘렸으며 매번 기일을 만나면 더욱 애통하게 생각하였으니, 이것이 공의 효성이다. 이를 미뤄 집안을 바르게 하고 종족을 보존함에 모두 법도가 있었으니, 이로써 한 가문을 이루고 구족(九族)을 화합함에 효성과 조심스러움으로 널리 알려졌다.여러 번 크고 작은 향시에 합격하였다가 기묘년(1699년) 과적(科賊)의 변란26)이 일어나게 되자 과거를 그만두기로 결정하였다. 붕우 가운데 그 까닭을 묻는 자가 있으면 답하기를 "나의 재주가 그렇게 대단히 나쁘지 않고 나의 힘이 아직 과장에 드나들 수 있지만, 이는 대단히 나쁜 구리 냄새27)와 같으니 맡고 싶지 않다."라 하고는 마침내 경전과 성리에 깊이 몰두하였다. 문순공(文純公) 현석(玄石) 박세채(朴世采)28) 공의 문하에서 학문을 배우면서 깊고 정밀한 이치를 파고들고 연마하여 조예가 더욱 깊어졌으니, 추구한 것은 인의의 정묘함과 천인의 깊은 이치가 아님이 없었다. 후진들을 가르침에 친소(親疎)를 따지지 않고 모두 문하에 들어오는 것을 허락하였으며 정성을 다해 인도하였다.그가 학자들에게 가르치기를 "학문의 도는 다른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 구하는 것이다. 격물치지도 자신이 하는 것이며, 성의도 자신이 하는 것이며, 수신제가치국평천하도 또한 자신이 하는 것이다. 자신의 뜻이 진실되지 못하면 어찌 자신을 이루며, 자신이 하는 일이 진실되지 못하면 어찌 그 효과를 거둘 수 있으랴. 밖에 있을 때는 몸가짐을 조심하다가 안에 들어오면 방종하는 것이 바로 자신을 속이는 것이요, 선을 좋아하지 않고 악을 미워하지 않는 것이 바로 자신을 속이는 것이요, 일을 처리함에 잘못을 저지르고서 그 허물을 덮으려 하는 것이 자신을 속이는 것이요, 타인을 기쁘게 하는 것에 힘쓰고 그의 뜻에 아부하는 것이 자신을 속이는 것이다. 그밖에 사물을 대응함에 모두 공교롭게 꾸민다면 무엇을 한들 자신을 속이는 것이 아니겠는가. 참으로 이에 경계하고 이에 잘 살펴서 정신을 일깨우는 방법으로 삼는 것이 옳다. 학문의 종지는 하나로써 꿰뚫는 것이니, 《중용》의 '성신(誠身)'과 《대학》의 '성의(誠意)'는 바로 자신을 속이지 않는 뜻이다. 성(誠)과 경(敬)은 서로 필요하니 원래 안팎의 구분이 없는 것이다."라고 하였다.한 시대의 명사들로, 판서 민진장(閔鎭長), 감사 민진원(閔鎭遠), 참판 김우항(金宇杭), 감사 이진휴(李震休), 참판 이익수(李益壽) 등이 공과 교유하면서 시를 수창하고 학문을 문답하였는으니, 모두들 공이 왕의 계책을 보좌할 것이라 기대하였다.공은 병술년(1766년) 7월 11일에 타계하였으니 62세의 수를 누렸다. 주포의 송곡(松谷) 두 번째 높은 봉우리 임좌(壬坐)에 장사지냈다. 부인은 광산 김씨(光山金氏) 여광(汝鐄)의 따님으로, 묘는 합부(合祔)하였다. 공은 두 아들을 낳았으니, 태관(泰觀)과 태윤(泰潤)이다. 세 딸은 안세복(安世復), 나경천(羅景天), 이수흥(李洙興)에게 시집갔다. 큰 아들은 입양한 윤보(允寶)와 안극겸(安克謙)에게 시집간 딸을 두었다. 작은 아들은 출계한 윤보와 문과에 합격한 윤익(允翼), 윤경(允慶) 등 세 아들과 박민동(朴敏東), 김방(金磅), 조윤탁(曹允鐸)에게 시집간 세 딸을 두었다. 사위 안세복은 아들로 창재(昌再)와 창의(昌毅)를 두었고, 두 딸은 백신원(白信源), 유증범(柳增範)에게 시집갔다. 사위 나경천은 아들로 문과에 급제한 충좌(忠佐)와 위좌(渭佐)를 두었다.공은 온 몸에 덕스런 모습이 얼굴에 드러나고 등에 넘치며29) 바라보면 사랑하는 마음이 일며, 평소의 말은 정성스럽고 신의가 있으니 다가가면 심취하게 된다. 평소에 의대(衣帶)를 단정하게 하고 무릎을 모으고 단정하게 앉아 한 점 방종하는 태도를 보이지 않았다. 학문은 진실무위(眞實無僞)를 위주로 하였으니, 〈위학진위도(爲學眞僞圖)〉를 만들어 자신의 뜻을 보였다. 지은 문장은 비록 부섬(富贍)하지만 다만 뜻이 통하는 것에 주안하고 문장 조탁을 일삼지 않았다. 저술한 〈수청설(水淸說)〉, 〈조수설(潮水說)〉 등은 득의의 작품이며, 〈병계가부설(病戒可否說)〉은 세상에 대해 탄식한 것이다. 일찍이 다음과 같은 시를 지었다.서주의 풍월은 본래 티끌이 없으니 西洲風月本無塵이곳에서 소요하며 봄을 즐기누나. 這裡盤桓樂有春허튼 영화 이르지 않으니 몸이 어찌 욕되랴 浮榮不到身何辱문득 태고의 희황 사람이 되누나.30) 便作羲皇太古人또 다음과 같은 시를 지었다.남아 평소 큰 일 이루려는 뜻 지녔으니 男子平生將大爲문장의 여기는 모름지기 일삼지 않노라. 文章餘技不須爲가난을 즐김은 현인을 따르는 일이니 安貧自是遵賢事어찌 구구하게 속세에 몰두하랴. 何用區區世冗爲이 시를 보면 공의 생각을 대략 알 수 있다.오호라! 지금은 공이 살던 시대와 이백 년이 떨어졌는데, 그 유풍과 여운이 아직도 고을 사람들의 존모하여 외우는 것에서 찾아볼 수 있다. 다만 그 가장(家狀)이 뒤늦게 후대에 나와 소략하다는 탄식을 면치 못하는데, 지금 공의 6대손 환영(煥永)씨가 두 조카 동규(東圭)와 동진(東珍)을 보내 나에게 그 덕을 드러낸 글을 청하였다. 그러나 내가 어찌 자세한 행적을 찾아서 상세하게 논할 수 있겠는가. 일찍이 내가 지족와와 주일와 및 공의 유고를 교열하였으니, 대개 방씨의 학문과 행실은 3대에 걸쳐 그 아름다움을 계승하였는데, 공에 이르러 더욱 드러났다. 선사 간재(艮齋) 전우(田愚)31) 선생께서도 일찍이 공의 학문은 전적으로 의리를 위주로 하였다고 하니 제대로 평가하신 것이다. 이에 감히 가장 및 유고에 나타난 사실에 대략 근거하여 이상과 같이 편차한다. 公姓房氏, 諱斗載字望汝號西洲, 南陽人.上世有諱季弘, 高麗開國功臣, 位至三韓壁上功臣三重大匡輔國.其後八世, 冠冕相繼, 有諱士良, 寶文閣直提學.生諱九成, 受室南原, 仍居周浦村, 官止定山縣監.生諱恂文, 京畿道水運判官.生諱貴和, 俱中生進, 官戶曹佐郞.生諱漢傑, 副司直, 盧蘇齋銘其墓, 公五世祖也.高祖諱應賢, 李月沙銘其碣.曾祖諱德驊.祖諱元井號知足窩, 文科典籍.考諱明燁號主一窩, 進士, 妣昌寧曹氏監役熀女.主一弟諱明熻, 驪州李氏別提志一女, 其本生也.公生於肅廟乙酉, 形貌淸秀, 才質超異, 幼而事親, 定省以時, 愉婉承順.年十七, 以獨子出爲伯父後, 是歲丁外艱, 葬祭以禮, 情文俱備, 後遭內艱, 亦如前喪.常以生父無後爲至恨, 語及輒流涕, 每當諱辰, 尤極哀痛, 此公之孝也.推而至於正家保族, 皆有法度, 是以行成一門, 歡洽九族, 以孝謹風聞.累中大小鄕試, 至己卯科賊之變, 決意廢擧.朋知有問者, 答曰: "吾才不至全疎, 吾力尙可出入場屋, 惟銅臭甚惡, 不欲聞也." 遂寓樂經傳性理.從學于玄石朴文純公之門, 鉤深硏精, 造詣益邃, 所求者, 無非仁義之妙, 天人之蘊.敎誨後進, 不問親疎, 皆許入門, 懇懇誘掖.其訓學者曰: "學之道無他, 求之於己也.格致己也, 誠意己也, 修齊治平, 亦己也.己之意不誠, 惡乎成其己, 己之事不誠, 惡乎食其效.居外飭躳而處內放肆, 則是自欺也.不善善而惡惡, 則是自欺也.處事乖戾而欲掩其過者, 是自欺也.務悅於人而阿附其意者, 是自欺也.其他事物之應, 皆由巧飭, 則安往而不自欺也.誠能警戒於是, 察識於是, 以爲喚醒之方, 則可也.學問宗旨, 一以貫之, 《中庸》誠身, 《大學》誠意, 莫非母自欺意思, 誠敬相須, 元無表裡矣." 一代名流, 如閔判書鎭長·閔監司鎭遠·金叅判宇杭·李監司震休·李參判益壽, 無不與之交遊, 唱酬答問, 皆期公爲黼黻王猷云.卒於丙戌七月十一日, 壽六十二, 葬于周浦松谷第二高峰壬坐, 配光山金氏汝鐄之女, 墓祔.公左1)二男, 泰觀·泰潤, 三女, 安世復·羅景天·李洙興.長房系男允寶女安克謙.次房男允寶出后, 允翼文科, 允慶, 女朴敏東·金磅·曹允鐸.安壻, 男昌再·昌毅, 女白信源·柳增範.羅婿, 男忠佐文科, 渭佐.公德容晬盎, 望之可愛, 雅言誠信, 卽之心醉.平居整朿衣帶, 斂膝端坐, 無一點安肆之態.爲學一以眞實無僞爲主, 作〈爲學眞僞圖〉以示意.其爲文雖富贍, 但主辭達, 不事雕繪.所著若〈水淸說〉〈潮水說〉, 其自得也, 若〈病戒可否說〉, 其慨世也.嘗有詩曰: "西洲風月本無塵, 這裡盤桓樂有春.浮榮不到身何辱, 便作羲皇太古人." 又曰: "男子平生將大爲, 文章餘技不須爲.安貧自是遵賢事, 何用區區世冗爲." 觀此詩文, 槩知公之所存也.嗚呼, 今去公世, 爲二百年所, 遺風餘韻, 尙徵於鄕邦人誦慕, 但其家狀晩出, 不免有疏略之歎, 今於公六世孫煥永, 遣二姪東圭珍, 請余狀德也, 何能追詳而備論乎.曾余校閱知足主一及公遺稿, 蓋房氏文行, 三世濟美, 至公益著, 而先師田艮齋先生, 嘗稱公文爲專主於義理, 可謂得當矣.乃敢略據家狀及見於遺稿者, 撰次如右云爾. 소재(蘇齋) 노수신(盧守愼) 1515~1590. 자는 과회(寡悔), 호는 소재(蘇齋)ㆍ여봉노인(茹峯老人)ㆍ암실(暗室)ㆍ이재(伊齋)이다. 을사사화로 유배되었다가 복귀하여 영의정에 올랐으나 기축옥사로 파직되었다. 저서에 ≪소재집≫이 있다. 기묘년 과적의 변란 기묘년 과거는 숙종 25년(1699) 가을에 단종(端宗)을 복호(復號)한 것을 경하하여 베푼 과거를 가리킨다. 이 해 겨울에 과옥(科獄)이 일어나 여러 사람이 형(刑)을 받고, 파방(罷榜)까지 하였으나, 동왕(同王) 36년(1710)에 이르러 부정에 직접 관련된 사람 외에는 모두 복과(復科)시켰다. 나쁜 구리 냄새 돈으로 관직을 사고파는 것을 풍자하는 말이다. 후한(後漢) 영제(靈帝) 때 최열(崔烈)이 500만 전(錢)을 바쳐 삼공(三公)의 하나인 사도(司徒)의 지위에 오르자, 당시 사람들이 구리 냄새가 난다고 기롱한 '최열동취(崔烈銅臭)'의 고사가 전한다. 《後漢書 卷52 崔駰列傳 崔寔》 현석 박세채 숙종 때의 문신(1631~1695)으로 자는 화숙(和叔), 호는 현석(玄石)ㆍ남계(南溪)이다. 성리학자로서 숙종 20년(1694)에 좌의정이 되었고, 황극 탕평설(皇極蕩平說)을 주장하였다. 저서에 ≪심학지결(心學至訣)≫, ≪이학통록(理學通錄)≫ 등이 있다. 덕스런……넘치며 《맹자》 〈진심 상(盡心上)〉에서 "군자의 본성은 인의예지가 마음에 뿌리박고 있기 때문에, 그것이 밖으로 드러날 때에는 환하게 얼굴에 드러나고 등에 넘쳐흐르며 온몸에 퍼져서 온몸이 말하지 않아도 저절로 깨닫게 된다.〔君子所性, 仁義禮智根於心, 其生色也, 睟然見於面, 盎於背, 施於四體, 四體不言而喩.〕"라고 하였다. 태고의……되누나 희황은 복희씨(伏羲氏)를 가리킨다. 그 시대의 백성들이 근심 없이 순박하고 한적하게 살았으리라 하여 은자들이 자칭 희황상인(羲皇上人)이라 하였다. 도연명이 여름에 북창 아래 누워 있다가 맑은 바람이 불어오자 스스로 복희씨 시대의 사람이라 하였는데, 이백(李白)이 이를 차용하여 지은 〈희증정율양(戱贈鄭溧陽)〉에서 "소금은 본래 줄이 없고, 술 거를 땐 갈건을 사용하지. 맑은 바람 부는 북창 아래 누워, 스스로 태곳적 사람이라 하네.〔素琴本無絃 漉酒用葛巾 淸風北窓下 自謂羲皇人〕"라 하였다. 간재 전우 구한말의 학자(1841~1922)로 초명은 경륜(慶倫)ㆍ경길(慶佶), 자는 자명(子明), 호는 구산(臼山)ㆍ추담(秋潭)ㆍ간재(艮齋)이다. 임헌회의 문인으로, 만년에 전라도 계화도(界火島)에서 후진을 많이 길러 내어 우리나라 유문(儒門)의 최후의 대종(大宗)이라 이른다. 左는 生의 오자인 듯하다.

상세정보
저자 :
(편저자)
유형 :
고전적
유형분류 :
집부

절충장군 첨지중추부사 용강 송공의 행장 경인년(1950) 折衡將軍僉知中樞府事龍岡宋公行狀【庚寅】 어느 날, 송흥진(宋興鎭) 군이 광산(光山)에서 찾아와서 자신의 5대조 용강공(龍岡公)의 행장을 지어달라고 청하였는데, 그의 족형 우진(宇鎭), 사익(士翼)이 함께 소개하였기 때문이다. 사익은 단정한 선비이니, 내가 어찌 감히 사양하랴. 이에 가장(家狀)을 살펴서 다음과 같이 서술한다.공의 휘는 인하(寅夏), 자는 군칠(君七)이며, 그 선조는 홍주(洪州) 사람이다. 시조의 휘는 계(桂)로, 고려 시중(侍中)을 지냈는데, 고려가 망하자 세상에서 은둔하여 조선에 신하가 되지 않았던 두문동(杜門洞) 제현 가운데 한 사람이다. 조선에 들어와 휘 평(枰)은 별시위(別侍衛)를 지냈으며, 휘 기손(麒孫)은 사헌부 감찰(司憲府監察)을 지냈으며, 휘 구(駒)는 열두 고을의 수령을 지냈는데 모두 청덕비가 세워졌다. 휘 정황(庭篁)은 문과에 합격하여 홍문관 정자(弘文館正字)를 지냈으며, 휘 제민(齊民)은 호가 해광(海狂)으로 임진란 때 문열공(文烈公) 김천일(金千鎰), 충렬공(忠烈公) 고경명(高敬命) 등과 의병을 일으켰으며 사헌부 지평(司憲府持平)에 추증되었다. 휘 타(柁)는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으로 또한 지평(持平)에 추증되었다. 이상이 공의 5대조이다. 휘 수(燧), 연(烻), 석견(錫堅), 해흠(海欽) 등은 공으로부터 위로 4대인데, 대대로 학문과 행실이 갖추었다. 선비(先妣)는 함평(咸平) 노씨 일(鎰)의 따님으로 덕과 지식을 갖추었으며, 규방의 법도가 엄정하였다.공은 경종(景宗) 갑진년(1724년)에 태어났는데,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민첩하여 육적(六籍)과 제자백가를 많이 외웠으며 이따금 중요한 뜻을 초선(抄選)하여 몸을 닦고 집을 다스리는 법으로 삼았다. 어버이를 섬길 때 뜻과 몸을 모두 잘 받들었고 사랑과 공경을 지극히 하였다. 어버이가 병이 나면 변(便)을 맛보고 하늘에 기도하여, 병이 나으면 이에 그만 두었다. 술(戌)과 자(子)년 가을에 거듭 부모의 상을 당하였는데, 애곡(哀哭)하며 가슴을 치다가 기절한 것이 여러 차례이며, 염습을 하고 빈소를 차리며 음식을 올려 제사를 지낼 때 반드시 힘써서 예에 맞춰 거행하였다. 이윽고 장사 지낸 뒤에 묘에 여막을 짓고 아침저녁으로 엎드려 곡을 하니 눈물이 흐르는 곳에 풀이 시들었으며 무릎을 댄 곳은 구덩이가 파였다. 손수 심은 소나무가 묘소를 덮어 보호하고 온 산이 울창하였는데, 병충해가 잎을 갈아먹어 사람의 힘으로는 금할 수 없었다. 이에 공이 글을 지어 산신에게 제사를 지내고 숲을 돌아다니며 울부짖으니, 문득 까치 떼가 날아와 벌레를 쪼아대니 얼마 되지 않아 충해가 멈췄다. 산 아래 사람들이 지금도 미담으로 전하고 있다.일찍이 한양에 들어가 교유하던 사람들을 두루 만났는데, 모두 그의 풍모와 위의를 사랑하고 그 국량을 중시하면서 "호남에 이런 사람이 있구나."라고 했다. 그러나 일찍이 한번도 권문세가에 가까이 가지 않고 고향으로 돌아와 학문을 강론하고 의를 행함으로 즐거움을 삼았다. 도사(道司)가 선비를 추천할 때 공도 또한 그 안에 들어갔다. 조정에서 노인을 우대하는 법으로 절충장군 첨지중추부사를 제수하니, 정조 을묘년(1795년)이었다. 공은 덕이 없는데 성은을 받았다고 여겨 황공하며 감격한 뜻을 자주 시문에 드러내었다.등룡산(登龍山) 아래 선영의 곁에 집을 지어 용강정사(龍岡精舍)라 편액한 뒤에 서적을 사서 쌓아두고서 날마다 고을의 벗이나 이웃의 제자들과 학문과 예에 대해 논하였으니, 세상에 득실이나 영욕이 있는 것을 알지 못하는 듯하였다. 손수 가문의 규범 한 권을 써서 해마다 한 번 제사 지내는 제수와 친족의 집과 관의 재목을 직접 심은 소나무 숲에서 마련하게 하였으니, 정연하게 조리가 있어 대대로 지켜 쇠퇴하지 않고 그대로 지키게 하였다.신유년(1801년)에 공의 나이 78세였는데, 아름다운 안색에 학 같은 머리카락이어서 바라보면 신선과 같았다. 숙부인과 해로하여 자손들이 회근연(回巹宴)을 여니 많은 사우들이 시로 읊어 감탄하였다. 향년 81세인 순조 갑자년(1804년) 정월 2일에 돌아가셨다. 묘는 광주(光州) 대촌면(大村面) 등룡산 북쪽 산기슭 곤좌(坤坐)의 언덕에 있다. 부인은 철원 주씨(鐵原周氏) 욱(頊)의 따님으로 공과 같은 해에 태어나 공보다 4년 뒤에 돌아가셨으니, 묘는 분토산(粉土山) 유향(酉向)에 있다. 세 아들은 일영(日榮)과 일제(日躋)와 일선(日璿)이다. 장남은 아들이 없어 의규(懿奎)를 양자로 들였다. 둘째는 심규(心奎), 대규(大奎), 생규(生奎)를 낳았다. 셋째는 도규(道奎), 출계한 의규, 내억(來億), 내만(來萬)을 낳았다. 증손, 현손 이하는 기록하지 않는다.오호라! 공은 천성에 바탕한 효도로 봉양과 장사를 예로써 하였으며, 선영의 소나무를 잘 길러 신령한 까치를 감동시켜 벌레를 쪼아 먹는 기이한 일이 일어났으며, 실제의 학문으로 도를 강론하여 스스로 즐겨 도사의 추천을 받았으며, 선을 쌓은 몸으로 수작(壽爵)의 영광과 회근(回巹)의 경사를 누렸으니, 이는 참으로 공의 덕을 징험할 수 있다. 해광 선생(海狂先生)32)이 〈만언소(萬言疏)〉, 〈와신기(臥薪記)〉, 〈명경제대책(明經濟大策)〉, 〈복수대의(復讐大義)〉 등을 저술하였지만 그 뜻을 행하지는 못하였는데, 선생으로부터 공까지는 6대로 유택이 아직도 사라지지 않았다. 공이 한양에 들어가 벗들을 두루 만난 것은 선생의 뜻 아님이 없다. 당시 교유했던 이들이 공의 국량을 중시하였으니 또한 의리와 계책을 행할 수 없지 않았는데, 한번도 권문세가를 찾아가지 않은 것은 자신을 굽혀 쓰이기를 구하지 않는 선생의 법문이다. 이것은 선조의 뜻과 일을 계술하는 효도가 되니 더욱 기록할 만하다. 日, 宋君興鎭, 自光山來, 謁其五世祖龍岡公狀行文, 因其族兄宇鎭士翼共爲介.士翼莊士也, 吾何敢辭諸.乃按家狀而敘之曰: "公諱寅夏字君七, 其先洪州人.始祖諱桂, 以高麗侍中, 麗亡遯居罔僕, 杜門洞諸賢之一也.入韓朝, 有諱枰, 仕爲別侍衛, 諱麒孫司憲府監察, 諱駒歷郡十二, 皆有淸德碑.諱庭篁, 文科, 弘文正字, 諱齊民號海狂, 壬辰亂, 與金文烈高忠烈倡義旅, 贈司憲府持平.諱柁, 宣武原從功臣, 亦贈持平.公之五世以上.諱燧烻錫堅海欽, 其四世, 世傳文行, 妣咸平魯氏鎰女, 有德識, 閫範嚴正.公以景宗甲辰生, 自幼聰敏, 六籍百家, 多所通念, 往往抄選要義, 爲修身治家之用.事親志體俱養, 愛敬備至, 親癠嘗糞祝天, 癠平乃已.戌子秋, 荐遭兩喪, 哭擗絶蘇者屢, 而斂殯饋奠, 必自强如禮.旣葬, 廬墓, 晨夕伏哭, 淚處草枯, 膝處坎成.手植松庇幽宅, 滿山蓊蔚, 而蟲災傷葉, 人力莫禁, 公爲文祭神, 巡林號哭, 忽有群鵲來啄, 不日災息, 山下人至今傳爲美談.嘗入京周觀交遊, 皆愛其風儀, 重其器局曰: "湖南乃有此人也." 然不曾一近權門, 歸來故山, 以講學行義爲樂.至於道司薦士, 公亦與焉, 朝家以優老典, 授以折衡將軍僉知中樞府事, 時正祖乙卯也.公以無德受恩, 惶恐感激之意, 屢見於詞章.築室登龍山下先塋側, 扁曰'龍岡精舍', 貿貯書籍, 日與鄕朋隣子, 論文談禮, 若不知世間有得喪榮辱焉.手寫門規一卷, 歲一薦祀之供, 族人屋棺之材, 自手植松中辨給, 井井有條, 俾世守無替.辛酉之歲, 公年七十八, 韶顔鶴髮, 望若神仙, 淑夫人偕老, 子孫爲設回巹宴, 士友多以詩咏歎之.享年八十一, 而純祖甲子正月二日終, 墓光州大村面登龍山北麓坐坤原.配鐵原周氏頊女, 生與公同年, 歿後公四年, 墓粉土山酉向.三男, 日榮·日躋·日璿.長房無男, 懿奎繼.二房生心奎·大奎·生奎.三房生道奎·懿奎出·來億·來萬.曾玄以下不錄.嗚呼, 公以根天之孝, 養送以禮, 護養丘松, 感靈鵲啄蟲之異, 以實地之學, 講道自樂, 得道司之薦, 以積善之躳, 致壽爵之榮, 回巹之慶, 是固所以徵公之德也.海狂先生著〈萬言疏〉〈臥薪記〉〈明經濟大策〉〈復讐大義〉, 而不得行其志, 自先生至公六世, 而澤猶不斬, 其入京周觀, 未嘗非先生之志也.當時交遊, 重其器局, 則亦未嘗無義與策之可行, 而一不近權門者, 先生不枉己求售之法門也.是爲繼述先祖志事之孝, 而尤可書者也." 해광 선생 이름은 제민(齊民)으로 초명은 제민(濟民), 자는 사역(士役) 또는 이인(以仁), 호는 해광(海狂)이다. 이지함(李之菡)의 문하에서 공부하였는데 글재주가 뛰어났다. 호방한 성격에 구속을 싫어하여 벼슬을 하지 않았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양산룡(梁山龍)·양산숙(梁山璹) 등과 의병을 일으켜 김천일(金千鎰)의 막하에서 전라도 의병조사관으로 활약하다가 이듬해 다시 김덕령(金德齡)의 의병군에 가담하였다. 김덕령이 옥사하자 종일토록 통곡하고 『와신기사(臥薪記事)』를 저술하였다. 또, 척왜만언소(斥倭萬言疏)를 올려 왜적을 물리칠 여러 방안을 피력하였으나 이것이 감사의 미움을 사게 되어 이후 무등산에 은거하면서 세상을 잊고 살았다.

상세정보
저자 :
(편저자)
유형 :
고전적
유형분류 :
집부

김종현 군이 내 생일에 장수를 바라는 시를 적었기에 차운하여 감사를 표함 金君鍾賢以愚晬日爲詩祈壽次韻謝之 하늘의 명으로 내가 태어났으니 어찌 좋지 않을까마는 帝命我生胡不辰이미 선조의 묘에서 멀어지고 또 부모님과도 이별했네 旣遠先墓幷離親【운명이 좋지 않았다.】 【命不好】칠십사 년 동안 하나의 고질병을 되돌아보니 七十四年懷一疚형체와 기운만 배양하고 정수과 참됨을 저버린 것일 뿐 秪陪形氣負精眞【의로움에 부끄러운 일이 있었다.】 【義有愧】 帝命我生胡不辰, 旣遠先墓幷離親.【命不好】七十四年懷一疚,秪陪形氣負精眞.【義有愧】

상세정보
저자 :
(편저자)
유형 :
고전적
유형분류 :
집부

일산 손공 행장 一山孫公行狀 공의 휘는 종순(鍾純) 자는 치성(致誠)으로 일산(一山)은 그의 호이다. 손씨(孫氏)는 계통이 경상도 밀양부(密陽府)에서 나왔다. 신라 시대에 효자 손순(孫順)이 석종(石鐘)을 얻는 기이한 일이 있어서 왕이 집과 쌀을 하사하여 그 효성을 장려하였다. 죽은 뒤에 시호는 문효(文孝)이니, 이 분이 시조이다. 세대가 전해 내려와 광리군(廣理君) 긍훈(兢訓)은 고려 태조를 도와 높은 공적을 세워 밀양에 봉해졌다. 또다시 8대가 지나 문과에 급제한 사공 변(抃)은 청백리에 뽑혔으며 명신에 들어갔다. 또 4대가 지나 밀성군 빈(贇)이 나왔으며, 또 6대가 지나 문과에 급제한 목사 책(策)이 나왔으니, 바로 조선 시대이다. 목사의 현손(玄孫)인 영귀당(咏歸堂) 비장(比長)은 문과와 증시에 합격하여 부제학을 지냈다. 충간했던 뜨거운 마음은 조정에서 으뜸이니69) 그 일이 《국조실록》에 실려 있다. 영귀당의 증손 도봉(道峰) 홍적(弘績)은 문과에 급제하여 한림을 지냈는데, 명종 을사년에 사국(史局)을 담당하여 당시 일을 곧바로 기술하여 여러 임씨들의 무고에 걸려들어 위원(渭原)70)으로 귀양 갔다가 돌아가시니, 사림들이 그를 추모하여 부안(扶安)의 옹정(甕井)에 서원을 설립하였다. 이 분이 참봉 승경(承憬)을 낳았는데 승경은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켜 양성(陽城)71)에서 순국하였으니, 공에게 8대조가 된다. 조부 경엽(景燁)과 부친 철우(哲宇)는 금곡(錦谷) 송능상(宋能相)72) 공의 문하에서 종유하였는데, 두 분 모두 효도로 정려를 받았다. 모친은 조양 임씨(兆陽林氏)와 나주 나씨(羅州羅氏)로 모두 맑은 덕을 지녔다. 공은 나씨의 소생으로 다섯 명의 형제 가운데 막내이다.공은 철종 갑인년(1854년) 5월 23일에 정읍현(井邑縣) 석산리(石山里) 집에서 태어났다. 본성이 영민하여 14~5세가 되기 전에 사서(四書)를 통하여 또래들이 미치지 못하였으며 부로(父老)들이 대성할 것이라 기대하였다. 정묘년(1867년)에 부친상을 당하였을 때 14살이었는데, 어른처럼 상례를 치렀다. 장지를 정할 때 여러 형과 조카들이 한 방에 모여 필점(筆占)으로 구하였으나 모두 영험하지 않았다. 공은 아직 관례를 하지 않았기에 가장 마지막 차례가 되어 붓을 휘둘렀는데 영험함을 얻어 좋은 무덤의 터를 잡게 되니 사람들이 그 정성에 감응한 것을 기이하게 여겼다. 전곡(奠哭)의 여가에 《가례(家禮)》를 읽기를 멈추지 않으니 공의 예학이 정밀하게 되었다. 대개 이 때부터 일찍 부친을 여의어 봉양하지 못한 것을 한으로 여겨서, 항상 찾으려고 하나 찾지 못한 사람처럼 안절부절 못하였다.73) 기일을 만나면 눈물을 쏟으며 통곡하고 오열하니 마치 처음 초상이 날 때처럼 하였다.가난하여 공부를 할 수 없게 되자 집안을 꾸리며 남은 힘으로 책을 읽어 의문이 나면 곧바로 기록하였다가 경연관 운창(芸牕) 박성양(朴性陽)74) 선생에게 나아가 질정하였다. 선생은 공을 한 번 보고서 그 마음이 표리여일하다는 것을 알고서 순(純), 성(誠) 일(一)의 세 글자로 이름과 자와 호를 지어주면서 가상하게 여겼다. 공은 선생을 깊이 믿고 종유하였으며, 선생이 타계하자 3개월 동안 가마(加麻)75)하였다.모친을 섬김에 사랑과 공경을 지극히 하였다. 병이 나자 조금도 곁을 떠나지 않았으며 밤에 허리띠를 벗지 않았다. 이렇게 석 달을 하니 몸이 수척해져 거의 병이 날 지경이었다. 이에 여러 형들이 중도(中道)에 지나치다고 꾸짖자 이에 잠시 침소에 나아가 쉬었다. 모친의 병이 심해지자 손가락을 찢어 피를 입에 흘려 넣어주니 그날은 넘겼지만, 마침내 무자년(1888년) 11월 9일에 돌아가시게 되었다. 공이 예를 지켜 장사를 치룬 것은 이전 부친상에서 이미 그러하였으니, 현재 정과 예를 다하고 그 법도를 엄하게 한 것은 실로 공에게는 힘들지 않은 일이었다.공은 상을 마치자 종중의 모임에서 의논을 제시하기를 "이처럼 세도가 무너졌으니 영화를 어찌 구하리오. 다만 후생을 교육하여 선대의 업을 실추하지 않는 것이 제일 중요한 일이다."라고 하였다. 이에 돈을 갹출하여 계를 만드니, 불어난 재물이 자못 상당하여 집을 세워서 학문을 익힐 장소로 삼고 책을 구매하여 독서할 바탕으로 삼았다. 자질(子姪) 이외에 원근에서 와서 배우는 자들이 매우 많았는데 가르침을 게을리 하지 않으니, 많은 인재가 양성되어 대단하였다. 사람을 상대할 때는 힘써 그들을 기쁘게 하여 조금도 소홀하게 대하지 않았지만, 그러나 본성은 이단을 물리치는데 엄격하였기에 방술(旁術)로 찾아오는 사람이 있으면 모두 쳐다보지도 않았으니, 저들도 기가 절로 죽어서 감히 자신의 방술에 대해 자랑하지 못하였다. 갑오년(1894년)에 동비(東匪)들의 기세를 올릴 때 호남이 가장 심하였고 그 중에서도 정읍이 더욱 심하였는데, 오직 공이 살던 마을은 침범하지 못하였다.친족의 자녀 가운데 가난하여 혼사를 치르지 못한 자가 있거든 공이 앞장서서 재물을 내었고 이어서 여러 친족에게서 거둬 도와서 때를 놓치지 않게 하였다. 마을에 공부할 때를 놓친 자가 있으면 밤에 공부하기를 권하여 가르치니, 사람들이 손 선생이라 불렀다. 근처에 고용한 노비들도 또한 정강성(鄭康成)의 집안 노비들처럼 글자를 알았다고 한다.76) 공은 조상을 추모함에 정성을 다하여 먼 시대 조상의 분묘의 의물을 험한 길을 찾아가 고생 고생하여 마침내 마련하였다. 평생의 뜻은 다만 선조를 계승하고 후손에 넉넉함 드리우며 자신을 수양하고 남을 성취시키는 것뿐으로, 다른 것은 마음에 두지 않았다. 그러므로 자주 굶주리는 근심을 타인은 감당하기 어려웠는데, 공은 편안하게 받아들였다.물건을 사양하거나 받는 의리에 대단히 엄격하여 만일 마음에 온당하지 않다고 여기면 조금도 취하지 않았으니, 식자들이 만석군(萬石君)77)의 자질로 유공작(柳公綽)의 가법78)을 행하여서 이 둘을 겸하면서도 자신을 바르게 하는 것은 그들보다 낫다고 하였다. 향도(鄕道)의 선비들이 사실을 기록하여 서로 추천하여 읍영(邑營)에서 상과 물건을 내렸는데, 그런 일이 없다고 하면서 상과 물건을 싸서 돌려보낸 것이 여러 차례였다.을사년(1905년)에 간재(艮齋) 전우(田愚) 선생을 찾아뵈었는데, 선생이 평소 공의 이름을 듣고서 오래 친한 이처럼 대하였으며 돌아갈 때 글을 써서 장려하였다. 그 후로 공은 자주 편지를 보내 많은 것을 질정하였다. 공은 항상 문생과 자질(子姪)에게 말하기를 "이 마음이 한결같이 바르면 온갖 이치가 절로 밝아져서 천하에 어려운 일이 없다."라고 하였으며, 또한 "학자는 육행(六行)79)에 한 가지라도 흠결이 없는 연후에 바야흐로 학문이라 할 수 있다."라고 하였다. 이것이 공의 본령(本領)이니, 정성을 다해 사람을 가르친 것도 또한 이와 같다.기미년 11월 1일에 집에서 돌아가셨으니, 향년 66세였다. 원근의 많은 사람들이 탄식하면서 "군자가 떠났구나."라고 하였으며, 붕우와 문생 가운데 가마(加麻)한 자들이 상당하였다. 석산(石山)의 뒷 산록 간좌의 언덕에 장사지냈다. 부인은 남양(南陽) 홍씨 신영(信永)의 따님으로, 가난을 편안히 여기면서 집안을 바르게 다스렸으며 한번도 근심하는 기색이 없었으니, 마땅히 군자의 배필이 될 만하다. 두 아들을 낳았으니, 장남은 덕원(德源)이고 차남은 행원(行源)이다. 덕원의 아들로 성하(聖夏)가 있고 사위로는 고광문(高光文)이 있다. 행원의 아들로는 성환(聖桓), 성훈(聖訓), 성근(聖根)이 있고 사위로는 이동열(李東烈)과 고광조(高光晁)가 있다. 성환의 아들로는 기선(淇宣)과 오선(五)이 있다.오호라! 공은 내 선친의 벗이다. 매번 공이 춘추에 성묘하러 올 때 반드시 길을 둘러서 찾아와 서로 매우 기뻐하였다. 처음에 내가 공에게 절을 올릴 때 나아가 아직 어렸는데, 그러나 공의 청아한 용모는 따뜻하면서도 굳세어 존경함이 일어났고 차분한 말은 도리에 어긋나지 않았으니, 단정하고 장중한 선비임을 알았다. 공이 성묘하러 올 때가 되면 공과 선친이 대화하는 말을 자주 들었으니, 간곡한 진심에서 하는 말에서 학문이 지극하고 덕이 높음을 알 수 있으며 개연히 근심하는 말은 세상의 교화가 풀어지고 도가 사라진 것이었다. 정읍에서 오는 선비들은 대부분 말하기를 '공이 집과 향촌에서 행한 바는 옛날 법도를 따라 지금 세상에 드문 것으로 올바름에서 나오지 않음이 없다.'라고 한다. 이에 공이 마음에 지닌 바와 행한 바가 옛날 법도에 부끄러움이 없음을 알 수 있으니, 이른바 도를 독실하게 믿고 학문을 좋아하는 자라고 하겠다.지금 다시 공의 종손 성철(聖徹)이 지은 가장(家狀)을 얻어서 읽어보니 부모를 섬기고 상에 거하며 지결을 세워 마음을 전한 자세한 실상을 알게 되었으니, 이에 공의 처음부터 끝까지의 전체(全體)를 잘 알게 되었다고 하겠다. 다만 이 가장은 행적에 대해서는 자세히 서술하였지만 학문하는 과정에 대해 소략하며 아울러 논저의 요지 한 둘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기에 학문하는 차례와 조예의 깊음, 귀숙처가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고찰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 가장에서 '성리의 여러 책에 대해 정밀하게 연구하지 않음이 없으며, 《가례》와 《소학》 그리고 《상서》를 대단히 좋아하였다.'라 하였으니, 대저 격물치지의 방법은 성리에서 나오고 제가치국의 정치는 모두 위 세 책에 갖추어져 있으니, 이를 보면 공의 학문이 격물치지에 깊으며 그 아는 바를 미뤄 가정에 행하고 나라에 미친 것을 대략 짐작할 수 있다. 유문(儒門)에서 서로 전하는 정법은 지와 행을 함께 닦는 것이니, 공이 이에 해당하지 않는가.대개 공의 자질은 원래 아름다운데다가 공부까지 지극하였으니, 세상에 크게 드러난 조상인 영귀당(咏歸堂)과 도봉(道峰)의 덕을 마음에 담고 명현인 운창(芸牕)과 간재(艮齋)에게 의심을 질의하였다. 시와 예를 길이 전하여 안으로 행실이 갖춰지고 학문의 문로(門路)가 올바름을 얻어 아름다운 은혜를 남겼으니, 아아! 훌륭하도다. 이 어찌 기록하여 세상의 입언군자에게 고하지 않으랴. 공의 맡아들 덕원이 나에게 행장을 청하였는데, 내가 비록 못났지만 선대의 깊은 우의를 생각하매 감히 사양하지 못하니 삼가 가장을 서술하고 나의 견해를 붙여 이상과 같이 찬술한다. 公諱鍾純字致誠, 一山其號也.姓孫氏, 系出慶尙道密陽府.新羅時有孝子孫順, 得石鍾之異, 王賜宅米褒之, 卒謚文孝, 是爲始祖.傳至廣理君兢訓, 佐麗太祖, 有嵬勳, 得是封.又八傳而文科司空抃, 選淸白, 入名臣.又四傳而有密城君贇, 又六傳而至文科牧使策, 則本朝時也.牧使玄孫咏歸堂比長, 文科重試, 副提學, 忠言偉烈, 卓冠朝端, 事在《國朝實錄》.咏歸曾孫道峰弘績, 文科翰林, 明宗乙巳, 掌史局, 直書時事, 爲群壬所構, 謫渭原卒, 士林追慕立祠扶安甕井.生叅奉承憬, 壬辰亂, 起義旅, 殉于陽城, 於公爲八世祖.祖景燁.考哲宇, 從遊錦谷宋文公門, 兩世幷以孝命旌.妣兆陽林氏, 羅州羅氏, 俱有淑德, 公羅氏出, 兄弟五人, 序居末.以哲宗甲寅五月二十三日, 生于井邑縣石山里第.才性穎悟, 未成童, 通四子書, 儕流莫及, 父老望大成.丁卯丁外艱, 年十四, 執喪如成人, 謀葬地, 諸兄若姪, 聚會一堂, 將以筆占求之皆未靈, 公未冠故最後及之, 乃揮筆得靈, 協吉永窆, 人異其誠感.奠哭之暇, 讀《家禮》不輟, 公之禮學致精.蓋自此日, 以早孤未養爲恨, 恒如有求不得之人.當忌辰, 淚哭嗚咽, 如袒括初.貧無以爲學, 餘力劬書, 疑輒記之, 就質于經筵官芸牕朴先生, 先生一見, 知其心事, 表裏如一, 以純誠一三字, 錫名字號而嘉之, 公服信從遊, 及沒加麻三月.事母夫人, 極其愛敬, 有癠, 少不離側, 夜不解帶, 凡三朔, 羸瘠幾生病, 諸兄責以過中, 乃暫就寢處以自扶.至革, 裂指注血, 得甦一日, 竟以戊子十一月九日, 遭艱.公之執禮, 在前喪已然, 則今之盡情禮嚴防限, 實又疏節也.喪畢立議宗中曰: "世降如許, 榮貴何求.惟敎育後生, 毋墜先業爲第一義." 乃醵金樹契, 其蓄頗鉅, 建齋爲肄業所, 購書爲讀書資.子姪外遠近來學者衆, 敎誨不倦, 因材有成多可觀.接人務用歡心, 不少簡忽, 然性嚴於闢異, 故凡以旁術至者, 幷不假顔, 彼亦氣自餒縮, 不敢售辯.甲午東匪之熾, 湖南最甚, 井邑爲尤, 而惟公一洞無汙.族子女貧未婚嫁者, 自公先捐, 繼排諸族而助之, 俾不失時.里人失學者, 勸夜學而敎之, 人謂孫先生.近地雇傭奴婢, 亦識字有如鄭康成家云.誠於追遠, 遠代墳墓儀物, 跋涉勤楚, 終底有成.平生志業, 惟在承先裕後, 修身成物, 他不念及.故屢空之憂, 人所不堪, 而處之晏如.尤嚴辭受之義, 苟係未安, 一毫不取, 識者謂萬石君質, 行柳公綽家法, 兼有而正己過之.鄕道章甫, 摭實交薦, 至有邑營賞物, 而不以自居, 封還以送者累矣.乙巳, 謁艮齋田先生, 先生素聞公名, 視若夙親, 歸則書以獎之.自後公有累度書面, 多所就質.恒語門生子姪曰: "此心一正, 則萬理自明, 天下無難事." 又曰: "學者, 於六行, 無一欠缺, 然後方可謂學." 此實公之本事, 故丁寧敎人者, 亦如是.己未十一月一日, 考終于家, 壽六十六, 遠近莫不嗟惜曰: "君子逝矣." 朋友門生加麻者, 若干人.葬于石山後麓艮坐原.配南陽洪氏信永女, 固窮宜家, 一不見憂色, 宜其爲君子配也.生二男, 長德源次行源.德源男聖夏, 壻高光文.行源男聖桓·聖訓·聖根, 婿李東烈·高光晁.聖桓男淇宣·五宣.嗚呼, 公, 我先人友也.每公春秋楸行, 必迂路而訪, 甚相歡焉.始余拜公, 年尙幼.然見公淸雅之容, 溫栗可敬, 安定之言, 倫脊無差, 心知其爲端人莊士矣.及其省事, 熟聽公與先人語者, 懇然之誠, 學至而德崇, 慨然之憂, 敎弛而道喪. 曁士從楚南來者, 皆言'公家鄕所行, 絶今遵古, 鮮不出乎正者', 知公所存所發, 無愧乎古, 所謂篤信好學者矣.今又得公從孫聖徹所撰家狀而讀之, 幷悉其事親居憂立訣傳心之詳, 於是乎公之全體始終, 可謂備知矣.但是狀也, 細述行治, 而畧於爲學節度, 幷不及論著要旨之一二, 無由考其進修次第, 造詣淺深, 歸宿在何何4)也.雖然有云'性理諸書, 無不精鍊, 酷好《家禮》《小學》《尙書》.' 夫格致之方, 出於性理, 家國之政, 具在三書, 卽此而觀公之功深格致, 而推其所知, 行之家而可及於邦國者, 槩可想也.儒門相傳定法, 知行交修者, 非此歟.蓋公天資旣美, 人功亦至, 念德乎咏歸道峰之顯祖, 質疑於芸牕艮齋之名賢, 詩禮永傳而內行備, 門路得正而嘉惠存, 猗歟盛矣.是烏可不書之, 以告世之立言家乎.公之嗣子德源, 請余以狀德之文, 顧雖無似, 念先誼之重, 不敢言辭, 謹按叙家狀, 而略附己見, 撰次如右云爾. 충간했던……으뜸이니 그 내용은 앞의 〈통정대부승정원우부승지임압손공행장(通政大夫承政院右副承旨笠巖孫公行狀)〉에 보인다. 위원 평안북도에 있는 군이다. 양성 경기도 안성의 옛 지명이다. 금곡 송능상 1710 ~ 1758. 본관은 은진(恩津), 자는 사능(士能)이며, 호는 운평(雲坪)·동해자(東海子)이다. 한원진(韓元震)의 문인으로, 과거에 뜻을 두지 않고 학문을 쌓아 약관에 명성을 떨쳤다. 윤봉구(尹鳳九)·이재(李縡)·임성주(任聖周)등과 교유를 맺었으며, 문인으로는 조카인 송환기(宋煥箕)가 유명하다. 이른바 호락논쟁(湖洛論爭)이 일어났을 때는 스승 한원진의 설을 좇아 호론의 인물성이론(人物性異論)에 동조하였다. 《주역》을 깊이 연구하였고, 예학에 밝았다. 시문집인 《운평집》이 있다. 찾으려고……못하였다 《예기》 〈단궁 하(檀弓下)〉에서 "노(魯)나라의 안정(顔丁)은 부모의 거상(居喪)을 잘하였다. 부모가 죽은 처음에는 황급히 뛰어다니며 아무리 찾아도 부모를 찾지 못하는 것처럼 하였다. 빈소(殯所)를 차린 뒤에는 부모를 멀리 바라보면서도 따라가지 못하는 것처럼 하였다. 장례(葬禮)를 마치고는 마치 부모가 어디 나갔다가 돌아올 시간이 안 되어서 기다리고 있는 것처럼 슬퍼하였다.〔顔丁善居喪 始死皇皇焉如有求而弗得 旣殯望望焉如有從而弗及 旣葬慨然如不及其反而息〕"라고 하였다. 운창 박성양 1809~1890. 본관은 반남(潘南), 자는 계선(季善), 호는 운창(芸窓)이다. 송근수(宋近洙)의 천거로 1880년(고종 17)에 선공감감역(繕工監監役)에 임명되고, 이어 사헌부지평·호조참의·동부승지·호조참판·대사헌 등을 역임하였다. 가마 문인(門人)이 스승의 상(喪)에 심상(心喪)을 입는 표시로 겉옷에 삼베 조각을 붙이는 것이다. 정강성의……한다 정강성은 후한(後漢) 때의 학자인 정현(鄭玄)으로, 강성은 그의 자이다. 그의 집안 노비들은 책을 읽을 줄 알아 평상시에 《시경》의 말을 인용하곤 하였다고 한다. 《世說新語 文學》 만석군 만석군(萬石君)은 한 문제(漢文帝) 때에 벼슬이 태중대부(太中大夫)가 되고 경제(景帝) 때에 구경(九卿)에 이른 석분(石奮)을 가리킨다. 석분은 본디 공경하고 근신함으로써 임금의 총애를 입었던바, 그의 아들 건(建), 갑(甲), 을(乙), 경(慶) 또한 모두 아버지를 닮아서 착한 행실과 효도하고 근신함〔馴行孝謹〕으로 인하여 각기 이천석(二千石)의 벼슬에 올랐으므로, 경제가 이르기를 "석군 및 네 아들이 모두 이천석이 되었으니, 신하에 대한 높은 대우가 그 가문에 다 모였다.〔石君及四子皆二千石 人臣尊寵乃擧集其門〕"라 하고, 석분을 만석군이라 호칭했던 데서 온 말이다. 《史記 卷103 萬石君列傳》 유공작의 가법 당(唐)나라 하동 절도사(河東節度使) 유공작(柳公綽)에 대해서는 소학 여러 곳에서 언급하였다. 유공작은 동생 유공권(柳公權)과 우애가 깊어 항상 같이 공부하고 생활하였다. 유공작이 죽자 그의 아들 유중영(柳仲郢)은 한결같이 삼촌 유공권을 아버지같이 섬겼으며, 또 아버지의 가법을 받들어 잘 준수하였다. 《小學 善行》 유공작(柳公綽)의 아내 한씨(韓氏)가 고삼(苦蔘)과 황련(黃連)과 웅담(熊膽)을 섞어 환약을 만들게 한 다음 아들들에게 나누어 주고 밤에 공부할 때마다 이 환약을 입에 머금고 부지런히 공부하도록 하였다. 《小學 嘉言》 유변(柳玭)'은 당(唐)나라 유공작(柳公綽)의 손자로, 가풍을 이어 효제(孝悌)와 예법(禮法)을 준수하였다. 자제들을 경계시킨 다섯 가지 조목이 《소학》 권5 〈가언(嘉言)〉에 실려 있는데, 그중에 "내가 보건대, 명문거족은 선조의 충성과 효도와 근면함과 검소함으로 인해 성립되고, 자손들의 완악함과 경솔함과 사치와 오만함으로 인해 전복되었다. 성립하기 어려움은 하늘에 오르는 것 같고 전복되기 쉬움은 터럭을 태우는 것 같다. 이런 말을 하자니 마음이 아프다. 너희들은 뼛속 깊이 명심하도록 하라"라 하였다. 육행 육행은 여섯 가지 행실로 효도함[孝], 우애함[友], 동성간(同姓間)에 화목함[睦], 이성간(異姓間)에 화목함[婣], 이웃간에 신실(信實)함[任], 서로 구휼함[恤]이다 《周禮 地官 大司徒》 이 말은 《소학》 〈입교(立敎)〉에도 보인다. '何'자 한 글자는 衍文으로 보인다.

상세정보
저자 :
(편저자)
유형 :
고문서
유형분류 :
시문류

이현범(李顯泛) 제문(祭文) 고문서-시문류-제문 從弟 從弟 정읍 성주이씨 이유원 후손가 성주이씨 이정순 모년에 종제가 쓴 종형 이현범의 제문 모년에 종제(從弟)가 쓴 종형(從兄) 이현범(李顯泛)의 제문(祭文)이다. 날짜는 미상이다. 종형은 자질이 강명(剛明)하고 행실이 돈독하고 공경스러웠으며 재주는 많았으나 단명(短命)하였다. 자신과 함께 연방(蓮榜, 과거합격자 명부)에 올랐고, 백부는 검소하게 사랑으로 길러주셨고, 선고(先考)께서 애지중지(愛之重之)하셨다. 한 가문을 주관하며 선조를 받들고 효도하며 집을 가지런히 함에 법도가 있었다. 자신에게 어려서부터 매우 자상하게 경책(警責)해 주었으며, 모든 후생들이 의지하였으니, 친척들이 슬퍼하고 사우(師友)들이 탄식하며, 사사로운 정이 배나 깊은 자신은 애통해 하며 추모를 한다는 내용이다.

상세정보
저자 :
(편저자)
유형 :
고문서
유형분류 :
서간통고류

이명찬(李明燦) 간찰(簡札) 고문서-서간통고류-서간 李明燦 李明燦 정읍 성주이씨 이유원 후손가 성주이씨 이정순 모년에 이명찬이 남강 한헌, 토사 임중, 한탑 등으로 표현한 동일 인물이 수신자에게 보낸 3편의 안부편지 모년에 이명찬(李明燦)이 남강 한헌, 토사 임중, 한탑 등으로 표현한 동일 인물에게 보낸 3편의 안부편지이다. 날짜를 적지 않고 발신자의 이름은 적어놓았다. 1. 이명찬(李明燦)이 남강(南崗) 한헌(閑軒)에게 쌓였던 얘기를 펼쳐야 되지 않느냐고 하며, 서로 거리가 심히 멀지 않는 땅인데도 문득 쉽게 얻지 못할 일이니, 속세의 일은 진실로 이와 같다고 하며 서글피 탄식하고, 쇠함이 점점 심해서 연래(年來)로 양 귀밑머리가 하얗게 되었다는 내용이다. 2. 이명찬(李明燦)이 토사(土司) 임중(任中)에게 공무(公務)로 바빠서 창망(悵惘)하리라 생각하고 식구들 안부를 묻고, 자신은 그럭저럭 지내나 진세(塵世)의 어지러움과 짝을 하며 쇠퇴(衰頹)함이 날로 심해지니 앞으로 좋은 재미도 없을 것이 자연의 이치일 것이라는 내용이다. 3. 못난 사람[拙欠]이 한탑(閑榻)으로 곧바로 전한 편지로 여름에 종상(終祥, 대상)할 때에 가려고 했으나 심부름꾼이 두증(痘症)을 앓아 참석을 못하여 혐창(嫌悵)한 마음 그지없고, 자신은 시끄러운 세상이 오히려 겹쳐져 쇠한 모습이 갈수록 심해져 질병을 앓으며 버텨내고 있다는 내용이다.

상세정보
저자 :
(편저자)
유형 :
고전적
유형분류 :
집부

나익부에게 보냄 정묘년(1927) 與羅益夫 丁卯 익부가 나를 종유(從遊)한 지 이미 삼 년입니다. 옛사람은 대개 삼 년으로 하나의 큰 한계를 정하는 경우가 있었으니 예컨대 "삼년유성(三年有成),55) 삼년고적(三年考績),56) 삼년학부지어곡(三年學不至於穀)57) 등의 유가 그것입니다. 익부는 과연 한 가지 소득이 있어서 손에 쥘 만한 것이 있는가요? 그렇지 않다면 익부가 세월을 허비한 것이 애석할 뿐 아니라 내가 사람을 잘못 인도한 것이니 또한 부끄러운 일입니다. 비록 그렇지만 옛사람은 20년 동안 하나의 노(怒)자를 다스리는데도 미진함이 있었다고 했으니, 익부가 만약 하나의 지(志)자를 결정해 옮기지 않았다면 그 공부가 민첩해 옛사람이 노(怒)자를 다스린 것보다 넉넉하여 삼년의 소득이 또한 많다고 할 것입니다. 대저 지(志) 한 글자를 이미 정했다면 백가지 방도가 모두 올곧을 것이니 이를지나 더 나아가면 위로는 성인이 되고, 다음은 현인이 되며, 또 그 다음은 선신(善信)한 사람이 될 것입니다. 오직 그 자질과 기량, 공부와 능력의 크기와 깊이 여하에 달려있습니다. 지(志)가 혹 아직 결정되지 않았다면 비록 삼년 사이에 강변(講辨)의 웅패(雄沛)함이 강하(江河)와 같고, 문장의 아름답고 찬란함이 별자리와 같다 할지라도 어찌 소득이 있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바라건대 익부는 스스로 자신의 뜻을 징험하여 앞날의 성취를 이루십시오. 나는 장차 익부가 삼년의 배움으로 종신토록 덕업을 쌓을 것이라고 예견해보겠습니다. 益夫之從我遊, 已三年矣.古人有爲多以三年定一大限, 如云三年有成, 三年考績, 三年學不至於毅之類是也.益夫果有一副所得可以藉手乎? 否則非惟益夫之費日爲可惜, 我之誤人亦可恥也.雖然昔之人, 有二十年治一怒字未盡者, 益夫若能定一志字, 移易不得, 則其下功敏速, 優於昔人治怒, 而三年之得, 亦已夥矣.夫一志旣定, 百度皆貞, 過此以往, 上而爲聖, 次而爲賢, 又其次而爲善信之人.惟在其才器工力小大淺深之如何爾.志或有未盡定者, 雖使三年之間, 講辨之雄沛若江河, 文章之麗爛若星斗, 尙何足謂有得乎? 請益夫自驗自志, 管取他日成就.吾將以益夫三年學, 卜終身德業. 삼년유성(三年有成) 《논어》 〈자로(子路)〉에 공자가 자신이 등용되지 못함을 한탄하여 "만일 나를 등용해 주는 자가 있다면 1년만 하더라도 괜찮을 것이니, 3년이면 이루어짐이 있을 것이다.〔苟有用我者 朞月而已可也 三年有成〕"라고 하였다. 삼년고적(三年考績) 《서전》 〈순전(舜典)〉의 "3년마다 한 번씩 성적을 고사(考査)하였다.〔三載考績〕"라고 하였다. 삼년학부지어곡(三年學不至於穀) 《논어》 〈태백(泰伯)〉에 "3년을 배우고서도 녹봉에 뜻을 두지 않는 자를 얻기가 쉽지 않구나.〔三年學 不至於穀 不易得也〕"라고 하였다.

상세정보
저자 :
(편저자)
유형 :
고전적
유형분류 :
집부

홍찬오 석규에게 보냄 무진년(1928) 與洪燦五 錫奎 戊辰 대저 옥(玉)이 원석 가운데 있으면 한 개의 돌을 벗어나지 못하고, 목재가 산에 있을 때는 한그루 나무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숙련된 석공이 탁마(琢磨)하고 대장(大匠)이 승착(繩斲) 해야 규(圭 홀), 새(璽 옥새), 장(璋), 찬(瓚 제기) 등으로 각각 그 아름다움을 극진히 하고, 동량(棟樑 마룻대와 들보), 각최(桷榱 서까래) 등으로 각 쓰임에 들어맞게 됩니다. 그리하여 옥은 쪼지 않으면 그릇을 완성할 수 없고, 나무는 먹줄을 따라야 바르게 된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대저 쪼고, 갈고, 먹줄을 대어 깎아냄에 그 헤치고 쳐내는 것이 매우 심하지만, 옥과 나무가 일찍이 원망하지 않는 것은 그 쓰임을 다하게 함으로서 그 본성을 이루어주기 때문입니다. 생각건대 사람 또한 그러합니다. 만일 학문을 하지 않는다면 실로 꿈틀대는 한 동물일 뿐입니다. 반드시 엄한 스승에게 채찍질을 받고 외경하는 벗에게 연마와 질책을 받은 연후에 현성(賢聖), 호걸로 각각 그 그릇을 완성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배우지 않으면 도를 알지 못하고, 간언(諫言)을 따라야 성인이 된다."58)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스승과 벗의 채찍과 질책은 석공과 목수의 갈고 깎아내는 것에 비하면, 가려운 곳을 긁어주거나 안마하는 것보다도 훨씬 미치지 못한 것입니다. 그런데도 채찍과 질책을 받는 자가 자신을 해칠까 의심하여 마음을 편안케 가지지 못한다면 덕업이 무엇을 쫓아 정밀하고 완숙하게 되겠습니까? 그대 형제는 약관의 나이에 두각이 뚜렷하니 진실로 사람 가운데 소중한 보배요, 빼어난 목재입니다. 그러니 원하건대 더욱 깎고 쪼는 다스림을 받아들여서 규장(圭璋)과 동량(棟樑)의 쓰임을 이루기 바랍니다. 그 때문에 이와 같은 말로 진덕수업(進德修業)의 공을 돕고자 합니다. 夫玉之在璞, 未離乎一箇石, 材之在山, 未離乎一箇木.及乎良工琢磨之, 大匠繩斲之, 圭璽璋攢, 各致其美, 棟樑桷榱, 各中其用.故曰 玉不琢, 不成器, 又曰木從繩則正, 夫琢磨之繩斲之也, 其戕賊椓喪, 亦已甚矣, 玉與木之不曾怨者, 以盡其用而遂其性也.惟人亦然.苟不學問, 則實不離乎蠢動一物而已.必也鞭策於嚴師, 淬礪於外友, 然後賢聖豪傑, 各成其器.故曰不學不知道, 又曰從諫則聖.然師友之策礪, 其視工匠之琢斲焉, 不啻爬痒按痛之不若.而受之者, 乃或疑其厲己而不安意焉, 則德業安從而得精熟哉? 君之昆季, 弱冠嶄然, 誠人中之重寶秀木.吾願其益受鑿沙斤錫之治, 俾成圭璋棟樑之用.故爲是說, 助其進修之功. 배우지……된다 "옥은 조탁하지 않으면 그릇을 만들지 못하고 사람은 배우지 않으면 도를 알지 못한다[玉不琢 不成器, 人不學 不知道.]" "나무는 먹줄을 따르면 바르게 되고 임금은 간언을 따르면 거룩해진다[惟木從繩則正, 后從諫則聖.]" 《서경》 〈열명(說命)〉

상세정보
저자 :
(편저자)
유형 :
고문서
유형분류 :
첩관통보류

1914년 이면용(李冕容) 망단자 고문서-첩관통보류-망기 甲寅十月日 雙峯刊所 李冕容 甲寅十月日 雙峯刊所 李冕容 정읍 성주이씨 이유원 후손가 성주이씨 이정순 1914년 10월에 이면용(李冕容)을 학포선생문집교정자로(學圃先生文集校正者)로 삼는다는 망단자 1914년 10월에 이면용(李冕容)을 학포선생문집교정자로(學圃先生文集校正者)로 삼는다는 망단자이다. 발신자는 쌍봉간소(雙峯刊所)이며, 수신자는 이면용이다. 『학포선생문집』은 학포 정훤(鄭喧, 1588~1647)의 시와 글 등을 모아놓은 문집이다. 1814년(순조 14)에 12대손 즙(楫)이 처음 간행했고, 1924년 후손 재경(在慶)이 능주(綾州)에서 중간하였다.

상세정보
저자 :
(편저자)
유형 :
고문서
유형분류 :
서간통고류

1933년 허성환(許聖煥) 간찰(簡札) 1 고문서-서간통고류-서간 癸酉五月二十六日 許性煥 李敎成 癸酉五月二十六日 許性煥 李敎成 정읍 성주이씨 이유원 후손가 성주이씨 이정순 HIKS_Z037_01_A00887_001 1933년 5월 26일에 허성환이 이교성에게 유동의 상태에 대한 자신의 의견을 알려주는 간찰 1933년 5월 26일에 허성환(許聖煥)이 이교성(李敎成)에게 유동(柳童)의 상태에 대한 자신의 의견을 알려주는 간찰이다. 잘 돌아갔는지와 부모님의 안부를 묻고 자신은 그때 수룡동으로 갔다고 하였다. 유동(柳童)은 골격이 건장하고, 얼굴이 검은색에 가까우나 다른 흠은 없고, 다만 눈빛이 드러나서 온화한 기운이 부족한 듯하나, 할 만한 것이 있다고 하였다. 그리고 당신이 만약 나의 육안을 불신하면, 다시 안목 있는 사람에게 보내서 상세히 보게 하여 만에 하나 나중의 근심할 여지를 없게 할 것을 제안하고, 하루 이틀 뒤에 가서 뵙겠다고 하였다.

상세정보
저자 :
(편저자)
유형 :
고문서
유형분류 :
교령류

1886년 유인 이씨(孺人李氏) 정부인(貞夫人) 교지(敎旨) 고문서-교령류-고신 光緖十二年 十二月 日 孺人 李氏 光緖十二年 十二月 日 高宗 孺人 李氏 서울특별시 종로구 施命之寶 정읍 성주이씨 이유원 후손가 성주이씨 이정순 HIKS_Z037_01_A00914_001 1886년 12월에 유인 이씨를 정부인에 봉한다는 일종의 사령장 1886년 12월에 유인 이씨를 정부인에 봉한다는 일종의 사령장이다. 이씨는 이기두의 처이다. 이기두는 직역이 유학(幼學)이었다가 이때 아마도 납속(納粟) 등의 방법으로 관직을 취득한 것으로 보이는데, 처음의 절충장군행용양위부호군에서 가선대부동지중추부사까지 올랐다. 이렇게 남편이 관직을 취득할 경우에 처는 남편의 관직에 준하는 작위를 받을 수 있었다. 유인은 벼슬하지 못한 사람의 아내가 사용하는 호칭이다. 이때의 봉작이 정부인이다. 정부인은 외명부(外命婦) 중 문무관의 적처에게 내리는 정・종 2품의 위호이다. 끝에는 날짜를 기재하였는데, 직인을 찍은 부분을 종이를 붙여 가렸다. 광서는 중국 청나라 광서제의 연호이며, 이는 갑오개혁 이전인 1894년까지 사용되었다. 직인은 연호년 위에다 찍었는데, 흐려서 글자를 식별하기 어렵다. 날짜 왼쪽에는 봉작의 근거를 기재하였는데, 남편인 이기두의 관품이 가선대부동지중추부사이며 그의 처는 법전에 의거하여 남편의 직을 따른다는 것이다. 법전은 『경국대전』 이전(吏典)의 외명부조에서 봉작(封爵)은 남편의 관직을 따른다는 법규를 가리킨다.

상세정보
저자 :
(편저자)
유형 :
고전적
유형분류 :
집부

장문거에게 답함 기사년(1929) 答張文居 己巳 편지에서 "기질을 변화시키는 방법을 필요로 한다."라는 말에서 가히 스스로를 닦는 절실함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동래(東萊) 여조겸(呂祖謙) 선생을 인용해 말한 것에서 반드시 스승삼고 본받을 바를 알았을 터인데, 다시 나의 의견을 구하는 것은 어찌 된 일인가요? 대개 동래(東萊) 선생의 기질은 그 병폐가 치우치고 조급함에 있었습니다. 그리하여 "궁자후박책인(躳自厚薄責人)"63)이라는 한마디 말을 얻어 번연히 고치고 깨달았는데, 그것이 마치 베틀을 돌리는 것처럼 민첩하고 손을 뒤집는 것처럼 쉬웠습니다. 그러니 그대 또한 자신의 기질 병폐가 어디에 있는지 한번 생각해보고, 또 고서(古書) 가운데 어떤 말이 나의 병을 치료할 수 있을 것인가 생각해보세요. 성심으로 그것을 구한다면 반드시 들어맞지 않는 이치가 없을 것입니다. 비록 그렇긴 하지만 바둑판을 맞이한 자는 미혹되고, 곁에서 보는 자는 맑다는 그 이치가 없지는 않으니, 그대가 타인에게 가르침을 구하는 것이 이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내가 그대를 보건대 진밀(縝密)하고, 견실(堅實)하고, 응정(凝靜 의젓함)하고, 간묵(簡默)하여 진실로 물에 두어도 새지 않고 산처럼 움직임이 없을듯합니다. 그러니 학문에 나아가는 아름다운 자질인데 여기에 무엇을 더하겠습니까? 다만 모든 것을 완벽하게 갖추라는 의미에서 질책하자면 그대에게 편체(偏滯), 혼침(昏沈)의64) 병폐가 있는듯합니다. 그리하여 대수(大受)65), 부유(富有)66)에 방해가 있을까 두렵습니다. 그리하여 그대에게 맞는 약재를 구해주자면 《주역》 경문의 관이거지(寬以居之)67), 《논어》의 불가불홍(不可不弘)68), 《중용》의 고명(高明)69), 《맹자》의 대용(大勇)70)이 해당될 것입니다. 그대가 시험 삼아 세월의 공부를 더하여 힘써 나아간다면 동래선생의 한번 변하여 효과를 거둔 것과, 빠르고 느림은 같지 않더라도 평생 터득한 전체의 대용은 동래선생이 거둔 효과에 그치지 않을 것이니, 어찌 더욱 통쾌하지 않겠습니까? 所需變化氣質之法, 可見自修之切實.而其引呂東萊先生而爲說者, 是必知所以師法矣, 乃復求於鄙說何也? 蓋東萊之氣質, 病在偏乖粗急.故得躳自厚薄責人一語幡然改悟, 若轉機之捷, 反手之易.賢亦試思, 我之氣質, 病在何處.古書中何語可藥吾病.心誠求之, 必無不中之理也.雖然當局者迷, 傍觀則淸, 不無其理, 賢所以求之於人者, 無乃以此也歟? 以吾觀於賢者, 縝密堅實, 凝靜簡黙.眞置水不漏, 如山不動.進學美質, 何以加此? 但責備以論, 則似有偏滯昏沈之病.而恐妨於大受富有.若求其對證之劑, 則大易之寬以居之, 論語之不可不弘, 中庸之高明, 孟子之大勇, 其可以當之乎.賢者試可歲月之功, 而力進之, 則其與東萊之一燮奏效者, 遲速雖不同, 其生平全體大用之所得, 又非如東萊已奏之效而止也, 豈不更快哉? 궁자후박책인(躳自厚薄責人) 《논어》 〈위령공(衛靈公)〉에 "몸소 자책하기를 후하게 하고 남을 책하기를 적게 한다면 원망이 멀어질 것이다.(躳自厚而薄責於人, 則遠怨矣.)"라고 한 공자의 말이 있다. 편체(偏滯), 혼침(昏沈) 편체는 치우치고 침체되는 것이며, 혼침은 정신을 놓아서 혼미해지는 것이다. 대수(大受) 《논어》 〈위령공(衛靈公)〉에 "군자는 작은 일에 알 수는 없으나 큰 것을 받을 만하고, 소인은 큰 것을 받을 수는 없으나 작은 일에 알 수는 있다.〔君子, 不可小知而可大受也;小人, 不可大受而可小知也.〕"라는 공자의 말이 있다. 부유(富有) 《주역》 〈계사전 상(繫辭傳上)〉의 "풍부하게 소유하는 것을 대업(大業)이라고 이르고, 날로 새로워지는 것을 성덕(盛德)이라고 이른다.[富有之謂大業 日新之謂盛德]"라는 말이 있다. 관이거지(寬以居之) 《주역》 〈건괘(乾卦)〉에 "군자는 배워서 지식을 모으고 물어서 분별하며, 너그러움으로써 거하고 인으로 실행한다.〔君子學以聚之 問以辨之 寬以居之 仁以行之〕"라고 하였다. 불가불홍(不可不弘) 《논어(論語)》 〈태백(泰伯)〉에 "선비는 그릇이 크고 뜻이 굳세지 않으면 안 된다. 책임이 무겁고 갈 길이 멀기 때문이다.[士不可以不弘毅, 任重而道遠.]"라고 하였다. 고명(高明) 《중용장구》 제27장에 "군자는 덕성을 높이고 학문을 도 삼으니, 광대함을 지극히 하고 정미함을 다하며, 고명을 극진히 하고 중용을 따른다.[君子尊德性而道問學 致廣大而盡精微 極高明而道中庸]"라고 하였다. 대용(大勇) 《맹자》 〈공손추 상〉에 "내 일찍이 대용(大勇)을 부자(夫子)에게 들었다. 스스로 돌이켜서 정직하지 못하면 비록 갈관박(褐寬博)이라도 내 두려워하지 않겠는가? 그러나 스스로 돌이켜서 정직하다면 비록 천만 명이 있더라도 내가 가서 대적할 수 있다.〔吾嘗聞大勇於夫子矣.自反而不縮, 雖褐寬博, 吾不焉? 自反而縮, 雖千萬人, 吾往矣.〕"라고 한 말이 있다.

상세정보
저자 :
(편저자)
유형 :
고전적
유형분류 :
집부

초은기 【계축년(1913)】 樵隱記 【癸丑】 선비는 세상에 태어나 공자와 맹자의 도를 배우고 요순과 같은 임금의 조정에 서서 위로는 임금에게 인(仁)과 의(義)를 진달하고, 아래로는 백성들에게 이로움과 은택을 베푸니, 이것이 선비의 상도(常道)이지만 혹 천하의 변란을 만나 도를 행할 수 없으면 이내 이름과 자취를 감추고 홀로 자신을 선하게 한다. 그러므로 《주역》에 이르기를, "천지가 닫히면 현인이 은둔한다."9)라고 하였다. 그러한즉 은둔은 현인이 즐겨 하는 바가 아니고, 또한 군자가 그만둘 수 있는 바가 아니다. 이 때문에 옛날에 은둔했던 사람 중에는 어염(魚鹽)과 저자 가운데에서 은둔한 자가 있었고, 밭두둑이나 담장을 쌓는 곳 사이에서 은둔한 자도 있었으니10), 이는 모두 그 처한 바에 따라 은둔하지 않음이 없었던 것이다.영주산(瀛洲山)에서 남쪽으로 20리 되는 모의촌(慕義村) 내에서 광산 김공(光山金公)이 몸을 닦고 의를 행한 지 어언 50년이 되었는데, 근래에 오랑캐와 짐승 같은 자가 가득하고 위아래가 전도된 것을 보고서 더욱 자취를 숨긴 채 문을 닫아걸고 세상과 단절하였으며, 이내 거처하는 집에 '초은(樵隱)'이라는 편액을 걸었으니, 거처한 바가 산에 의지하고 있음을 취한 것으로, 나에게 사실을 기록해 줄 것을 청하였다.내가 삼가 생각하건대, 선비가 참으로 세속을 끊을 생각을 품었다면 비록 도시나 시장에 거처한다 하더라도 은둔하는 데에 방해가 되지 않을 것이고, 만일 외물을 사모하는 데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면 비록 구름 속에 눕거나 노을 속에 깃든다 하더라도 다만 헛된 이름만 훔칠 수 있을 따름이니, 이로 말한다면 은거의 실제는 겉으로 내세우는 데에 있지 않고, 그 마음이 어떠한가에 달려 있다 하겠다.내가 알기에 초은공은 산에 올라 나물을 캐고 열매를 주워 모아 동생(董生)처럼 맛있는 음식을 부모에게 바치고11), 땔나무를 하거나 물고기를 삶으며 요부(堯夫)12)에게 주역의 이치를 물어서 이미 효성스럽게 봉양하는 방법을 다하였고, 또 신묘하게 꼭 들어맞는 흥취를 얻었다. 때때로 또 붉은 벼랑과 차가운 시냇물 사이에서 우유자적하여 계수나무 부여잡고 가을바람에 읊조리며 고금의 득실을 비웃고, 거문고를 어루만지며 청상곡13)을 연주하면서 이생의 영욕을 잊어버리고 초연히 세속 밖에서 스스로를 즐기느라 늙음이 장차 다가오는지도 몰랐으니, 비록 소산(小山)14)과 같은 자가 일어나 산중에서 머물기 어렵고 세모에 무료하다는 말로 부른다 하더라도 그의 마음을 움직일 수 없을 것이다. 이것이 바로 《대역(大易) 주역(周易)》의 이른바 현인의 은둔이라는 것에 합치되는 것이니, 그 '초은'이라는 이름과 어찌 그 실상이 부합하지 않겠는가. 士生乎世, 學孔、孟之道, 立堯、舜之朝, 上陳仁義於君, 下加利澤於民, 是其常也, 而厥或値天下變亂, 道不可行, 則乃韜名晦迹, 獨善其身焉.故《易》曰: "天地閉, 賢人隱." 然則隱非賢人之所樂爲, 而亦非君子之所得已也.是以古之隱者, 有於魚鹽市肆之中者, 有於耕稼版築之間者, 此皆莫不因其所處而隱也.瀛洲山南二十里慕義村中, 有光山 金公, 修身行義, 五十年于玆.近見夷獸充斥, 冠屨倒置, 益復韜晦, 杜門謝世, 乃以樵隱扁其居室, 取其所處之依乎山也.請余以記實.余竊以爲士苟抱絶俗之想, 雖城居市處, 不害其爲隱; 苟不免於外慕, 雖雲臥霞棲, 適足以竊虛名.由是言之, 隱居之實, 不在乎標榜, 在乎其心之如何爾.吾知樵隱公, 登山採拾, 供董生之甘旨, 柝薪烹魚, 問易理於堯夫, 旣盡孝養之方, 又得妙契之趣, 而時復優遊自適於丹崖寒流之間, 攀桂樹而咏秋風, 笑古今之得失; 撫枯桐而發淸商, 忘此生之榮辱, 翛然自樂於物表, 不知老之將至.雖有以山中難留歲暮無聊之說招之, 如小山者作, 不足以動其心.則此正合《大易》所謂賢人之隱也.其於樵隱之名, 豈不副其實也哉? 천지가 …… 은둔한다 《주역》 〈곤괘(坤卦) 문언(文言)〉에 "천지가 변화하면 초목이 무성하고 천지가 닫히면 현인이 은둔한다.〔天地變化, 草木蕃, 天地閉, 賢人隱.〕" 라는 내용이 보인다. 옛날에 …… 있었으니 《맹자》 〈고자 하(告子下)〉에 "순(舜)은 밭두둑 사이에서 발신하였고, 부열은 담장 쌓는 곳에서 등용되었고, 교격은 어물과 소금을 파는 가운데에서 등용되었고, 관이오는 사관(士官)에 갇혔다가 등용되었고, 손숙오는 바닷가에서 등용되었고, 백리해는 시장에서 등용되었다.〔舜發於畎畆之中, 傅說擧於版築之間, 膠鬲擧於魚鹽之中, 管夷吾擧於士, 孫叔敖擧於海, 百里奚擧於市.〕"라는 내용이 보인다. 동생(董生)처럼 …… 바치고 당나라 때 안풍(安豐)에 은거하였던 동소남(董邵南)을 말한다. 진사과에 낙방한 다음 고향으로 돌아와 주경야독하면서 효성을 다해 부모를 편안하게 모시고 처자식이 근심이 없게 하자, 그의 벗 한유가 〈동생행(董生行)〉을 지어 "아! 동생이여. 아침이면 나가 밭 갈고, 밤이면 돌아와 옛사람의 책을 읽도다. 종일토록 쉬지 못하였으니, 혹은 산에서 나무하며, 혹은 물에서 고기 잡네. 부엌에 들어가 맛있는 음식을 장만하고 당(堂)에 올라 안부를 물으니, 부모는 근심스러워하지 않고, 처자식은 원망하지 않도다.〔嗟哉董生, 朝出耕, 夜歸讀古人書. 盡日不得息, 或山而樵, 或水而漁. 入廚具甘旨, 上堂問起居. 父母不慼慼, 妻子不咨咨.〕"라고 칭찬하였다. 《小學 善行》 요부(堯夫) 송(宋)나라의 유학자 소옹(邵雍, 1011~1077)의 자로, 이정지(李挺之)에게서 도가(道家)의 학문을 배우고 상수학(象數學)을 정립하여 역학(易學)의 대가가 된 인물이다. 저서로 《황극경세서(皇極經世書)》 등이 있다. 청상곡(淸商曲) 궁ㆍ상ㆍ각ㆍ치ㆍ우(宮商角徵羽)의 오음(五音) 가운데 가을에 속하는 상음(商音)의 맑고 구슬픈 노래를 말한다. 소산(小山) 소산은 회남왕(淮南王) 유안(劉安)의 문객들을 가리키는 것으로, 회남왕에게 초사류(楚辭類)의 사부(辭賦)를 많이 지어 바쳐 자신들을 불러준 은혜에 보답하였다. 그중 굴원(屈原)에 가탁하여 산속은 군자가 거처할 곳이 못 되므로 속히 나오라는 내용의 〈초은사(招隱士)〉라는 작품이 현재 전해지고 있다.

상세정보
저자 :
(편저자)
유형 :
고전적
유형분류 :
집부

한후당기 【기미년(1919)】 寒後堂記 【己未】 평상시에 법도를 잃지 않는 것은 쉽고, 변란을 만나 지조를 바꾸지 않는 것은 어려우니, 어려운 것과 쉬운 것을 모두 잃은 자는 반드시 소인이고, 어려운 것과 쉬운 것을 모두 얻은 자는 반드시 군자인(君子人)이다. 이 때문에 쉬운 것을 얻고 어려운 것을 잃은 자는 있지만, 어려운 것을 얻고 쉬운 것을 잃은 자는 없다.고금을 두루 살펴보건대, 시골의 훌륭한 선비와 나라의 대인이 평소에 전철을 잘 따라서 세상에 이름이 성대하게 알려진 경우를 어찌 한정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추위와 굶주림이 뼈에 사무치고 재앙이 피부에 임박하며, 혹 이단의 학설이 치성하여 천하를 바꿈에 미쳐서는 기가 꺾이고 현혹되어 그 지켜 왔던 것을 잃지 않을 수 있는 자는 드무니, 어찌 참으로 어렵지 않겠는가.대저 여름철의 기후가 한창 기세를 부릴 때에는 온갖 수목의 잎이 무성하여 온통 청록색 일색이 완상할 만하더니 조금 있다가 매서운 서리가 거듭 내리고 북풍이 성난 듯 세차게 불어대면 지난날 청록색 일색으로 완상할 만하던 것들이 쓸쓸하게 더 이상 생기가 없어지고, 단지 소나무 가지와 잣나무 잎만이 한 겨울에도 창창하게 우뚝 서 있는 것을 보게 된다.군자가 변란을 만나 변하지 않는 것이 대체로 이와 비슷하니, 뜻이 깊구나!  우리 부자께서 날씨가 추워진 뒤에도 시들지 않는다고 탄식함이여. 뜻이 있구나! 정의 이공(精毅李公)이 한후당(寒後堂)이라 명명함이여.아, 공 또한 어찌 쉽게 얻을 수 있는 사람이겠는가. 물을 마시며 책을 읽을 때에 글 읽는 소리가 맑게 울렸고, 사방 이웃이 곡식을 산더미처럼 쌓아 놓고 있어도 집사람이 꾸어 오는 것을 절대로 허락하지 않았으니, 우뚝하도다! 가난함을 편안하게 여기는 굳센 마음이여. 삿되고 편벽된 말이 세상에 가득하고 온갖 갈림길이 사람을 현혹함에도 칠순의 나이에 책 보따리를 짊어지고 나아가 질정할 곳을 두고서 남아 있는 수명이 부족한 줄 잊어버리는 데에 이르렀으니, 확고하도다! 도를 믿는 독실한 마음이여.다만 지금 천지가 막혀 우리의 도에 닥친 재앙이 헤아릴 수 없는 점이 있으니, 공이 이미 잘하는 것을 인하여 훗날까지 미루어 적용할 수 있다면 곰 발바닥처럼 두꺼울지 생선처럼 얇을지, 기러기 털처럼 가벼울지 태산처럼 무거울지는 반드시 미리 계산하고 앞서 정한 바가 있을 것이다.15) 참으로 그렇게 된다면 어찌 다만 당(堂)에 명명한 것이 뜻에 걸맞을 뿐이겠는가. 바로 사람 중의 소나무와 잣나무라 일컬어도 거의 부끄러움이 없을 것이다.내가 장차 푸른 가지 부여잡으며 기풍 아래로 달려가고, 푸른 솔잎을 어루만지며 남은 그늘에 의탁하여 배회하고 서성거리며 한 해를 마칠 것이니, 바라건대 평범한 나무라고 해서 멀리하지 않는다면 더불어 영광스러움이 크겠다. 處常而不失度易; 遇變而不易操難.難易俱失者, 必小人也; 難易俱得者, 必君子人也.是故得於易而失其難者有矣夫, 未有得其難而失乎易者也.歷觀今古, 鄕黨善士、邦國大人, 能循塗轍於平日, 蔚然聞達乎世者, 何限? 及乎凍餒切骨, 禍災剝膚, 厥或異說熾而易天下, 能不隕穫驚惑, 以喪其守者鮮焉, 豈不誠難矣乎? 夫夏令方殷, 萬木敷葉, 羣靑衆綠, 一色可玩, 少焉霜威疊降, 朔風怒號, 向之靑綠一色可玩者, 索然無復生意, 只見松柯柏葉, 蒼蒼特挺於大冬中.君子之遇變, 不變蓋似之.旨哉! 吾夫子歲寒後凋之歎也; 有志哉! 精毅 李公 寒後堂之命名也.噫, 公亦豈易得哉? 歠水讀書, 書聲淸越, 四隣積粟如山, 絶不許家人借貸, 卓乎其安貧之固.邪詖盈世, 百岐眩人, 七耋負笈, 就正有所, 至忘年數之不足, 確乎其信道之篤.第今天地閑塞, 吾道之禍, 有不可測者, 公能因其所已能, 而推用於異日, 則熊厚魚薄, 毛輕山重, 必有所宿算而前定者矣.誠有然者, 奚但命堂之稱志而已哉? 直謂人中之松柏, 殆無愧矣.吾將攀翠柯而趨下風, 撫蒼髥而庇餘蔭, 盤桓徜徉而卒歲也.幸無以凡木而遠之, 則與有榮也大矣. 공이 …… 것이다 《맹자》 〈고자 상(告子上)〉의 "생선 요리도 내가 원하는 것이요, 곰 발바닥 요리도 내가 원하는 것이다. 그러나 두 가지를 동시에 얻을 수 없다면, 나는 생선을 버리고 곰 발바닥을 택하겠다. 삶도 내가 원하는 것이요, 의리도 내가 원하는 것이다. 그러나 두 가지를 동시에 얻을 수 없다면, 나는 삶을 버리고 의리를 택하겠다.〔魚我所欲也, 熊掌亦我所欲也, 二者不可得兼, 舍魚而取熊掌者也; 生亦我所欲也, 義亦我所欲也, 二者不可得兼, 舍生而取義者也.〕"라는 구절과 사마천(司馬遷)의 〈보임소경서(報任少卿書)〉의 "사람은 언젠가 한번 죽지만, 어떤 죽음은 태산보다 더 무겁고, 어떤 죽음은 기러기 털보다 더 가볍다.〔人固有一死, 或重於泰山, 或輕於鴻毛.〕"라는 구절의 내용을 인용하여 후한당의 주인인 이공이 죽는 날까지 일제의 압력에 굴복하지 않고 절개와 의리를 지킬 것을 예상한 말이다.

상세정보
84193건입니다.
/4210
상단이동 버튼 하단이동 버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