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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이구 민열에게 보냄 을해년(1935) 答崔以求 敏烈 乙亥 나의 문장을 그대가 전할 만하다고 여겨서 선사(繕寫)하여 소장하려고 한다는데 아마도 꼭 그럴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스스로 생각해 보건데 본디 문장에 재주와 식견도 없고 또 힘을 쏟아 붓지도 않았습니다. 나아가 유학자의 이치가 뛰어난 문장으로 세교(世敎)에 보탬이 되지도 못했고, 물러나 문인의 기교있는 말로 남의 이목을 즐겁게 하지도 못했습니다. 그러니 장차 누구에게 보일 것이며 누구에게 전하겠습니까? 대저 고금의 문장에 진력했던 자들에 대해서도 육일옹(六一翁 구양수)은 오히려 다 사라졌다고 슬피 탄식했는데, 하물며 나 같은 사람이겠습니까? 오직 맹자(孟子), 한유(韓愈), 주자(朱子), 송시열(宋時烈) 네 현인의 문장만이 오늘날까지 전해져 밝게 빛나고 있습니다. 그 전해지는 실체를 궁구해보면, 맹자는 양주(楊朱)와 묵적(墨翟)을 변별했고, 한유는 노자와 불가를 변별했고, 주자는 육상산(陸象山 육구연)을 변별했고, 송시열은 흑수(黑水)1)를 변별했으니, 이처럼 이단을 변별한 것을 제이의(第二義)로 보아서는 안 될 것입니다. 나는 오씨와 김씨가2) 무함(誣陷)과 배신의 변을 일으켜 사도(師道)가 밝혀지지 못함을 통분해하고 사벽(辭闢)3)할 사람이 없음을 개탄하여 허다한 심력을 소비해 수많은 문장을 썼습니다. 확연한 효과를 올리지는 못했지만 이단을 물리치는 무리라는 점에 있어서는 일찍이 많이 양보할 수 없어서 스스로 맹자, 한유, 주자, 송시열 네 현인의 마음을 본받았다고 여기고 있습니다. 저 맹자께서 우(禹)임금, 주공(周公), 공자, 삼성의 공을 이은 것도 실로 이점(이단을 물리친 것)에 있습니다. 또 스스로 생각하기를 평생의 학문은 하나도 성취한 바가 없지만 오직 이 일만큼은 가히 손에 쥐고 선사를 만날 수 있을 것입니다. 아! 간옹의 도가 끝내 어두워질 이치가 없으니, 나의 변문도 사라지지 않을 것을 보증할 수 있습니다. 때문에 태양 빛에 의지하고 천리마 꼬리에 붙어서 함께 비추고 아울러 이르는 것도 또한 여기에 있습니다. 그 밖의 부수적인 글들은 오직 변문에 의지해 함께 전해질 것입니다. 그대가 써서 소장하여 뜻밖의 일에 대비하고자 하는 것도 이런 점을 보셨기 때문이겠지요. 鄙文君以爲可傳, 欲繕寫而藏之, 恐不必爾也.自念於此, 素無才識, 又不致力.進不得爲儒者理勝之文之裨蓋世敎退, 不得爲文人巧麗之辭之悅人耳目.將誰觀而誰傳? 夫以古今盡心於文字間者, 六一翁猶發泯滅可悲之歎, 况如余者哉? 惟是孟韓朱宋四賢之文, 傳至于今炳炳如也.而究其可傳之實, 則辨楊墨, 辨老佛, 辨象山, 辨黑水者, 不可作第二義看矣.吾於吳金誣倍之變, 痛師道之不明, 慨辭闢之無人, 費了許多心力, 立了許多文字.廓如之效, 雖不能奏, 言距之徒, 曾不多讓, 自以爲法孟韓朱宋四賢之心. 如孟子承禹周孔三聖之功者, 實在於此.又自以爲平生爲學, 無一所就, 惟此事可以藉手見先師也.噫! 艮翁之道, 無終晦之理, 則吾之辨文, 亦可保其不泯.所以依光附尾, 同照并致者, 又在於此.而外此漫著, 惟賴辨文而并傳歟.君之欲寫藏而備不虞者, 其有見於此耶. 흑수(黑水) 윤휴를 가리킨다. 윤휴가 살았던 경기 여주(驪州)의 '여(驪)' 자가 '검은 말 여' 자로 검다는 뜻이 있고 거기에 여강(驪江)이 있으므로 윤휴를 배척하는 측에서 그의 별칭으로 사용하였다. 오씨와 김씨 간재의 문인이었던 오진영과 김용승으로 보인다. 사벽(辭闢) 말로 밝혀 물리친다는 뜻이다. 한유(韓愈)의 〈여맹간상서서(與孟簡尙書書)〉에 "양자운(揚子雲)이 이르기를 '옛날에 양주와 묵적이 정도(正道)를 막으므로 맹자가 말로 밝혀 물리쳐서 환하게 터놓았다.[古者楊墨塞路 孟子辭而闢之廓如也]'"라고 하였다. 《古文眞寶後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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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이구에게 보냄 을해년(1935) 與崔以求 乙亥 지난날 돌아오는 길에 당신의 족형인 원숙(元淑)씨를 방문했습니다. 원숙이 이르기를 '그대의 집례(執禮)와 여묘(廬墓)가 나의 가르침에서 흥기한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뒤이어 근래에 지은 〈과족제최효자여묘(過族弟崔孝子墓廬)〉라는 시를 보여주며, 그 가운데 "'상(喪)을 만나서 예를 행하는데 어진 기풍이 있다(丁憂執禮有仁風)'라는 구절에서 말하는 어진 기풍은 실로 그대 후창을 이르는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이에 내가 "이 무슨 말인가요? 나의 행의(行義)는 진실로 남을 교화시킬 만한 것이 없습니다. 그것은 집안 대대로 효성이 지극하고 거상(居喪)을 잘하는 가풍이 있어서일 것입니다. 어찌 대대로 내려오는 가풍을 버리고 타인의 가르침에 흥기되어서이겠습니까? 그것은 형께서 잘못 아신 것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대개 이 말은 이미 실질을 잃은 것인즉 다시 말하지 않겠습니다. 다만 그러했던 까닭은 그대가 나를 오랫동안 종유하여 깊이 믿었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이로 인해 생각해보건대 그대가 만일 처음도 잘하고 마지막 끝도 잘 맺어서 세상에 이름이 거론되기를 소련(小連)과 대련(大連)5)처럼 한다면 어찌 나에게도 영예가 되지 않겠습니까? 또한 이를 반대로 생각해보면 그대가 만일 정문(情文)6)을 다하지 못하여 사람들이 뒷말을 두게 된다면 나에게도 어찌 좋은 소식이겠습니까? 이러한 일은 이미 그렇다 하고, 또 생각해보니 집상(執喪)의 예를 다해서 부모의 은혜에 보답하는 것은 효 가운데 한 가지 일이요, 학문을 하여 덕을 세워서 부모가 남겨주신 몸을 성취하는 것은 효의 전체입니다. 그러니 치우치거나 온전히 다하는 사이에 소효(小孝)와 대효(大孝)가 갈리는 것입니다. 지금 심산 외로운 여막 가운데서 만 가지 인연을 끊고 오직 어버이 효도 일념만을 자석이 남쪽을 가리키듯 할 것입니다. 같은 효라고 하면 어찌 편소한 효만 일삼고 온전하고 큰 효는 힘쓰지 않겠습니까? 모름지기 삼년간 독례(讀禮)7)의 여가에 경전을 읽고 의리를 생각하고 궁구하여 많은 근본자리를 세운다면 일생동안 덕을 세우고 몸을 닦는 효에 있어서도 힘쓰기 쉬울 것이니, 그렇게 하는 일이 지극히 옳을 것입니다. 진실로 이와 같이 한다면 남들이 나에게 이택(麗澤)8)의 공이 많다고 할지라도 결코 양보하지 않을 것입니다. 만일 가르침의 근원을 묻는다면 그것은 옛날 구산옹(臼山翁)9)의 교화를 친히 받들어 흥기한 것임을 속일 수 없을 것이니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별지)조석(朝夕)의 곡(哭)은 생전의 혼정신성(昏定晨省)을10) 본뜬 것입니다. 혼정신성에는 절을 하지 않는 것이니 조석의 곡도 마땅히 하지 않아야 합니다. 그러나 여묘(廬墓)에는 묘소에 궤전(饋尊)이 없는데 조석의 절까지 아울러 없앤다면, 이는 끝내 종일토록 묘소에 절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니 옳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니 조석으로 묘소에 올라갈 때에는 마땅히 절하고 곡을 해야 합니다. 이 절하고 곡하는 선후는 소학(小學)에 "왕부(王裒)가 조석으로 절하고 꿇어앉아 비통하게 호곡했다."라는 문장에 근거함을 볼 수 있습니다. 向日歸路, 訪貴族兄元淑氏.淑謂哀之執禮廬墓爲興賤子之風.因出其近作〈過族弟崔孝子墓廬〉詩, 丁憂執禮有仁風之句曰, 此所謂仁風, 實指後滄而言.余曰惡是何言? 吾之行義, 固無可以風人者.設有之, 其家自有篤孝善居喪之世風.安得舍其世風而興他人風? 兄誤矣誤矣.蓋此言旣失實際, 則不必再道.但其所以來此, 則豈非以哀從我久而信之深也乎.因此而思之, 哀能克始有終, 稱名於世若小大連之爲, 則豈不有榮於我乎? 又反此而思之, 哀若未盡情文, 人得以議其後, 則於我亦豈好聞乎? 此旣然矣, 抑又念之, 執喪盡禮以報劬勞之恩, 孝之一事, 爲學入德以成親之遺身, 孝之全體.偏全之間, 大小分矣.今於深山孤廬之中, 萬緣潛息, 惟有孝親一念如鐵指南.等是孝也, 豈容徒事偏小而不勉全大乎? 須於三年讀禮之暇, 看取經傳, 念究義理, 立得幾多本地, 其於一生立德成身之孝, 庶易爲力, 至可至可.苟如是也, 人 謂我麗澤有功, 不欲多讓.若問風之所自, 自是舊日親承臼山翁之風而興之者, 有不可誣也, 如何如何?(別紙)朝夕哭, 是象生時定省.定省不拜者, 朝夕哭亦當無拜.然至於廬墓, 墓旣無饋尊, 而并無朝夕拜, 則是終日無拜於墓也.其可乎? 朝夕上墓當拜哭.拜哭先後, 據小學王裒朝夕拜跪悲號之文, 可見. 소련(小連)과 대련(大連) "소련과 대련이 거상을 잘하여 3일을 게으르게 하지 않고, 3개월을 해이하게 하지 않고, 1년을 슬퍼하고, 3년을 걱정하였는데, 이들은 동이(東夷)의 사람이다."《예기(禮記)》 〈잡기(雜記)〉 정문(情文) 내용과 형식으로, 예를 들면 제사(祭祀)에 있어서 조상을 사모하는 것은 정(情)이고, 제사를 드리는 의식(儀式)은 문(文)에 해당한다. 독례(讀禮) 거상(居喪) 중에는 상례 및 제례와 관련된 예서(禮書)만 읽어야 해서 상중에 있음을 말한다. "장사 지내기 전에는 상례를 읽고, 장사 지낸 뒤에는 제례를 읽는다.[未葬讀喪禮, 旣葬讀祭禮.]"《예기(禮記)》 〈곡례(曲禮)〉 이택(麗澤) 붕우(朋友)가 함께 학문을 강습하여 서로 성장해 감을 뜻한다. 구산옹(臼山翁) 구산은 간재 전우의 호 가운데 하나이다. 혼정신성(昏定晨省) "자식이 된 자는 어버이에 대해서, 겨울에는 따뜻하게 해 드리고 여름에는 시원하게 해 드려야 하며, 저녁에는 잠자리를 보살펴 드리고 아침에는 문안 인사를 올려야 한다.[凡爲人子之禮 冬溫而夏凊 昏定而晨省]"《예기》 〈곡례(曲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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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유 한응에게 답함 경오년(1930) 答李士裕 漢膺 庚午 내가 처음 여행하던 숙소에서 그대를 만났을 때에 단결한 용모와 청아한 자태, 굳은 지조와 화락한 말을 보니 타고난 유자(儒者)의 기상이었습니다. 그리하여 그대와 며칠 이야기를 하는 사이 나도 모르게 경도됨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세간에 어찌 이처럼 좋은 자질의 사람이 있었단 말인가? 이는 반드시 마음속에 뜻으로 숭상함이 있을 것이니 함께 도에 나아갈만한 자이다.'라고 여겼습니다. 그리하여 진실로 마음으로 흠복하고 거의 일 년이 지나도록 잠시도 잊지 못했습니다. 그러다 홀연 그대의 편지를 받아보니 스스로 말하길 '일찍 고아가 되었으나 학문을 하고 싶어 주경야독 하였고, 근자에는 객지생활의 고통 속에서도 도를 향한 일념이 불길처럼 타올라 스스로 그만두지 못한다.'라고 하셨습니다. 제가 편지를 받들고 세 번 탄식하기를 "이러했구나! 이 사람이" 하면서, 어려서부터 뛰어난 자질이 있었고 궁함을 당해 뜻이 더욱 견고해졌음을 믿게 되었습니다. 이 편지가 없었다면 나는 여전히 그대를 얕게 알았을 것입니다. 아! 나 또한 25세 이후로 농사지으며 독서하면서 온갖 곤고를 겪은 세월이 7년이었습니다. 아버지를 잃고 가업을 그르쳐서 노모를 모시고 살아가기 어려웠기 때문입니다. 이때는 나이가 젊고 힘이 강해서 정신을 가다듬어 독서에 정진할 시기인데, 농사일로 몸을 수고롭게 하고 먹고 살아야할 계산이 마음을 어지럽힌 것이 이처럼 오래된다면, 학문을 쌓고 학업을 늘리기 어렵다는 것이 분명합니다. 비록 그러하나 금일에 이르도록 '오류(汙流)들을 부끄러워하여 함께 하지 아니하고 구학(溝壑)을 가리켜 잊지 않는 뜻'을 대략이나마 세운 것은 일찍이 곤궁을 당하던 날의 힘이 아님이 없습니다. 이제 온 편지를 읽어보니 나와 그대가 겪었던 일과 뜻한 바가 너무나 흡사하여 이미 동병의 탄식이 절실합니다. 처음에 더불어 도에 갈만하다고 여겼던 자가 끝내 함께 돌아갈 수 있어서 더욱 다행으로 여깁니다. 아! 천하에 얻기 어려운 것이 동지인데, 이미 동지를 얻었으니 진실한 마음으로 서로 힘쓰게 하여 이른바 도학을 구하고자 생각지 않는다면 어찌 안타까운 일이 아니겠습니까? 대개 진실한 마음은 성심(誠心)입니다. 옛날 사마온공(司馬溫公)이 원성을 가르칠 때에12) 성심으로 하였고 망언하지 않는 것을 우선으로 삼았습니다. 이제 그대의 편지에서 '나를 선생 대군자라 칭하고 쇄소(灑掃 물 뿌리고 비로 쓰는 일)의 일을 제공하겠다.'라는 말씀을 하셨는데, 이는 나의 실제 모습을 마주하면 진실로 실질과 맞지 않는 망언이 될 것입니다. 간절히 청하건대 향후 편지를 보낼 때에는 이런 넘치는 칭찬은 삭제하시고, 정성스럽고 진정으로 교유하여 함께 귀숙(歸宿)할 곳을 찾는 것이 매우 옳을 것입니다. 제가 생각하건데 귀숙할 곳 또한 쉽게 찾아지지는 않을 것입니다. 모름지기 평생토록 몸가짐에 있어서나 일을 처리함에 있어서, 밝게 착안하고 마음을 오로지하여 용기 있게 발걸음을 디딘 연후에 거의 참된 경지의 소재를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이제 그대와 몇 건의 서약을 세우고자 합니다. 궁리(窮理)는 절근(切近)한 것을 먼저하고 현원(玄遠)을 멀리합시다. 마음 닦는 것은 작은 악(惡)도 끊고 은독(隱獨)을 삼갑시다. 자기를 닦는 것은 허명을 멀리하고 실덕을 힘씁시다. 가정을 다스리는 것은 근검에 힘쓰고 영리추구를 그치며, 세상을 부지하는 것은 윤리를 숭상하고 물욕과 이익을 낮추며, 사람을 가르치는 일은 문사를 경시하고 경학을 중시합시다. 이로 말미암아 추구해나가서 "얻지 못하면 그만두지 않는다."13)면 비록 진리에 딱 들어맞지 않더라도 그리 멀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대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僕始遇高明於旅次也, 見其端潔之容, 淸雅之態, 介然之操, 藹然之言, 天來是儒者氣像.與之語數日, 不覺傾倒.以爲世間安得有好資質若此? 是必中有志尙, 可與適道者也.心固欽服, 蓋經歲而未嘗暫忘也.忽承辱牋, 奉審自道早孤欲學, 中兼耕讀, 近作舘苦之狀, 而向道一念, 如火益烈, 自有不可遏者.僕奉簡而三歎曰, 有是哉! 若人也, 於是乎益知其自幼絶異之質, 蓋信其當窮益堅之志, 微此書, 吾猶淺知夫若人也.噫! 僕亦二五以後, 且耕且讀, 備經困苦爲七年者.爲其失怙敗業奉老艱食故也.此正年壯力强致精劇讀之時, 而犂鋤之役勞其身, 粟帛之筭撓其心, 若此之久, 其不能積學而富業也審矣.雖然至于今日, 粗立羞汙流而不同, 指溝壑而不忘之志者, 未始非當日困衡之力也.今讀來書, 僕與高明所遭所志, 恰恰相似.旣切同病之歎.復辛始之可與者終之同歸矣.嗟乎! 天下難得者同志也, 旣得同志, 而不思所以實心交勗以求所謂一箇道學, 豈不可惜? 夫實心者誠心也.昔溫公敎元城以誠也以不妄語爲先.今惠書之稱僕以先生大君子供灑掃之役等說, 果當於僕之眞狀而爲誠實不妄之語乎.切乞向後書來, 刪却此等溢獎, 斷斷以眞情相, 與同尋歸宿之地, 至可至可.僕又竊念歸宿之地, 非容易可尋.須於生平行己處事, 明著眼, 專著心, 勇著步然後, 庶可識眞境所在.今欲與高明立數件誓約曰: 窮理則先切近而後玄遠.治心則絶纖惡愼隱獨. 修己則遠虛名而勉實德.理家則務勤儉而息營求.扶世則尙倫理而下物利. 敎人則輕文辭而重經術.由此求之, 不得不措則雖不中不遠矣.高明以爲如何? 사마온공……때에 사마온공은 송(宋)나라의 사마광(司馬光, 1019~1083)으로 죽은 뒤 온국공(溫國公)에 봉해졌기 때문에 사마온공(司馬溫公)이라고 부른다. 원성은 북송의 명신인 유안세(劉安世, 1048~1125)로 그가 원성 사람이므로 그렇게 칭한 것이다. 사마광(司馬光)의 문인이다. 《宋史》에 〈劉安世列傳〉이 있다. 얻지……않는다. 《중용장구》 제20장에 "생각하지 않음이 있을지언정 생각할진대 얻지 않으면 그만두지 않는다.〔有不思, 思之, 不得不措也.〕"라는 말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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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군【병노】을 전송하는 서문 【갑자년(1924)】 送李君【炳魯】序 【甲子】 "맹자 뒤에 태어나 성인의 도를 밝히고 이단(異端)을 물리친 사람으로 공이 창려 한자(昌黎韓子)119)보다 더 큰 사람이 없는데, 맹자의 도통을 계승한 자를 거슬러 올라가 논할 때에 한자를 논하지 않고 주(周)ㆍ정(程)120)을 논하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답하기를,"그의 문장이 너무나 성대하기 때문입니다."하니, 내가 말하였다."이것이 무슨 해가 되겠는가. 문장은 도학이 숭상하는 바가 아니지만, 또한 버리는 것도 아니다. 만약 그 도통을 계승할 수 있다면 문장의 성대함이 비록 이보다 더 아름다울 수 없다 하더라도 어찌 병통으로 여길 수 있겠는가. 잠시 틈을 내줄 수 있다면 그 이유를 말해보겠네.대저 한자의 문장은 기운이 창성하고 뜻이 잘 전달되며, 이치가 명확하고 의미가 장대하였으니, 비유하면 순풍을 만난 돛대이고 잘 달리는 말의 발굽이며, 해처럼 빛나고 못처럼 깊네. 한자가 삿된 학설을 배척한 것은 마치 용문(龍門)을 뚫고 구하(九河)를 소통시킨 것121)처럼 확연히 통하고 흡연히 안정되었네. 문장으로 인해 도를 밝히고, 도가 밝혀짐에 문장이 더욱 드러났으니, 서로 병통이 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실제로 서로 도움이 되었네. 그러니 문장의 성대함이 도통을 계승하지 못한 것에 무슨 상관이 있겠는가.아, 한자의 문장은 진실로 성대하였으니, 주ㆍ정이 미치지 못한 바이고, 세도(世道)에 대한 한자의 공이 또한 위대하였으니, 어찌 대번에 주ㆍ정보다 낮다고 하겠는가. 그러나 그 도통이 한자에게 있지 않고 주ㆍ정에게 있는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네.성인의 도는 격치(格致)122)를 귀하게 여기고 실천을 요체로 삼는데, 애석하게도 한자는 이 두 가지를 궁구하지 않았네.123) 때문에 성삼품(性三品)124)을 말한 것은 도의 근원을 알았다고 할 수 없고, 서장(書狀)을 투척하여 천거를 구한 것125)은 자중하는 도리를 알지 못한 것이네. 이것이 맹씨(孟氏)의 도통을 접하지 못한 이유이네.오늘날 선비 중에 문장을 가지고 놀며 조충소기(雕蟲小技)126)를 공교롭게 하는 자는 실로 말할 것도 없고, 대가(大家)의 법도를 좇아 답습하며 백세토록 화려한 명성을 드러내고자 하는 자들은 모두 한자에 뜻을 두지 않는 자가 없네. 한자는 진실로 호걸스러운 선비이니, 한자에 뜻을 둔 것을 나는 옳지 않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네. 다만 한갓 그의 못처럼 깊고 고색창연한 문장만을 기뻐하되 성인의 학문을 보호하고 이단을 물리치는 것이 공적이 되는 줄 모르는 것은 옳지 않으며, 그의 공적이 사문(斯文)에 있음을 알고서 사모하되 도통을 계승하지 못한 데에 이유가 있음을 알지 못하는 것도 또한 옳지 않네.그래서 나는 한자에 뜻을 둔 세상의 선비들이 문장이라면 내가 대적할 수 있고, 공적이라면 내가 맡을 수 있으며, 또 격치와 실천에 착수하여 한자가 궁구하지 못한 것을 궁구하되 정밀하고 익숙하게 할 수 있기를 바라네. 이와 같이 한다면 한자의 문장을 문장으로 삼고, 주ㆍ정의 도를 도로 삼아서 도통이 진실로 나에게 있게 될 것이니, 문장도 또한 도에서 빛남이 있지 않겠는가."나를 따라 공부한 이군 병노(李君炳魯)는 도학에 뜻을 두었고, 아울러 문장을 닦는 자이기에 그가 돌아갈 때에 특별히 이러한 말을 주어서 문장이 비록 도에 도움이 된다 하더라도 도통이 문자에 있지 않고, 공이 비록 도를 보호할 수 있다 하더라도 반드시 실천을 지극히 다하는 것이 성인의 도가 됨을 알게 하였다. 後孟子而明聖道、闢異端者, 功莫尙乎昌黎 韓子, 而尙論繼孟子統者, 不于韓而于周、程, 何哉? 曰: "爲其文章之太盛也. " 曰: "是何傷哉? 文非道之所尙, 亦非其所棄, 苟可以繼其統, 文之盛, 縱不足增美, 庸可以爲病乎? 請得間而爲之說. 夫韓子之文, 氣昌而辭達, 理明而意長, 譬如風檣駿蹄, 日皦淵深. 韓子之斥邪說, 如鑿龍門而疏九河, 廓然而通, 翕然而定, 因文而明道, 道明而文益彰, 不惟不相病, 實爲之相資. 文盛之於統不繼, 奚涉哉? 噫, 韓子之文, 固盛矣, 或周、程之所未逮也. 韓子世道之功, 亦偉矣, 何遽讓乎周、程? 然其道統之不于韓而于周、程者, 厥有由焉. 聖人之道, 以格致爲貴, 踐履爲要, 惜乎韓子之未究乎此二者也. 故說性三品, 未足爲知道之源, 投書求薦, 不知其自重之道. 此其所以未接乎孟氏之統也. 今之士之操弄觚墨、雕蟲小技之是工者, 固不足道, 其欲追步大家軌範, 彰華聞于百世者, 擧莫不志乎韓子. 韓子誠豪傑之士, 志韓子, 吾不曰'不可', 但徒喜其淵然蒼然之文, 而不知閑聖闢異之爲功, 則未可也; 知慕其功在斯文, 而不究其不繼統之有由, 亦未可也. 故余欲世之志韓子者, 文乎其能吾敵矣, 功乎其能吾任矣, 又能實下手於格致踐履, 究韓子之所未究而精熟之. 是則文韓子之文, 道周、程之道, 道之統, 固在我矣, 文亦不于道有光乎. " 從余遊者李君 炳魯, 志於道而兼治文者, 於其歸也, 持此說而贈之, 使知文雖資乎道, 而道之統不在文; 功雖足以衛道, 而必極踐履之爲聖道. 창려 한자(昌黎韓子) 당나라의 문학가이자 사상가인 한유(韓愈)로, 창려는 그의 호이다. 주(周)ㆍ정(程) 주는 주돈이(周敦頤)를, 정은 정호(程灝)와 정이(程頤) 형제를 말한다. 용문산(龍門山)을 …… 것 우(禹) 임금이 이 아홉 물줄기의 길을 내어 범람을 막은 일을 말하는 것으로, 《사기(史記)》 권87〈이사열전(李斯列傳)〉에 "우 임금이 용문을 뚫고 구하를 소통시킬 때에 손발이 부르트고 얼굴이 누렇게 초췌하였다.〔禹鑿龍門, 疏九河, 手足腁胝, 面目黧黑.〕"라는 구절이 보인다. 격치(格致) 격물(格物)ㆍ치지(致知)를 가리키는 것으로, 《대학》의 '팔조목(八條目)'인 격물ㆍ치지ㆍ성의(誠意)ㆍ정심(正心)ㆍ수신(修身)ㆍ제가(齊家)ㆍ치국(治國)ㆍ평천하(平天下) 가운데 첫 번째에 해당한다. 애석하게도 …… 않았네 한유는 〈원도(原道)〉에서 《대학》의 '팔조목'을 언급하면서 격물ㆍ치지를 제외시켰다. 성삼품(性三品) 한유는 〈원성(原性)〉에서 "성의 품등에는 상중하 세 가지가 있다. 상품은 선할 뿐이고, 중품은 인도하여 위나 아래로 가게 할 수도 있으며, 하품은 악할 뿐이다.〔性之品有上中下三, 上焉者善焉而已矣, 中焉者可導而上下也, 下焉者惡焉而已矣.〕"라고 하여 성삼품설(性三品說)을 주장하였다. 《昌黎文集 卷11》 서장(書狀)을 …… 것 〈위인구천서(爲人求薦書)와〈상재상서(上宰相書)〉 등을 말한다. 《古文眞寶 後集》 조충소기(雕蟲小技) 벌레 모양이나 전서(篆書)를 조각하듯이 미사여구(美詞麗句)로 문장만을 꾸미는 조그마한 기교를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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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군 중립【남주】에게 주는 서문 【기사년(1929)】 贈白君中立【南柱】序 【己巳】 "자사(子思)의 곁에 사람이 없다."에서의 사람은 보살피고 뜻을 전달하는 사람이고, "목공(繆公)의 곁에 사람이 없다."에서의 사람은 유지하고 보호하는 사람이니127), 한 사람은 평범한 사람이고, 한 사람은 어질고 지혜로운 사람이다.백군 중립(白君中立)이 나에게 편지를 부쳐 선생 곁에 사람이 없을까 근심하였는데, 이것이 어찌 물품을 공급하고 심부름을 담당하는 평범한 사람이 내 곁에 없음을 말한 것이겠는가. 아마 학문에 힘쓰고 도를 구하여 어질고 지혜로운 자가 되기를 바라는 사람이 없음을 말하였을 것이니, 중립의 근심은 한 개인의 사사로운 근심이 아니라, 바로 학계에서 공공으로 근심하는 것이다. 비록 그렇지만 한갓 근심할 줄만 알고 근심을 제거하는 방도를 모르면 안 될 것이다.중립도 또한 일찍이 내 곁에 있다가 지금은 비록 한가로운 곳에서 홀로 지내고 있지만, 그대의 마음과 힘을 전일하게 하고, 그대의 보고 듣고 말하고 행동하는 것 등을 단정하게 하여 예전에 스승에게 배운 것으로 그대의 앎을 이루고, 그대의 실천을 채워가면서 날마다 위로 도달해 마지않을 수 있다면 나와 그대가 비록 북과 남으로 멀리 떨어져 일 년쯤 서로 만나지 못한다 하더라도 정신이 함께 나아가고 마음이 함께 모여서 화락한 즐거움이 종고(鍾鼓)와 금슬(琴瑟)이 한 자리에서 연주되는 것과 같을 것이다.그러나 만약 중립이 날마다 내 곁에 있으면서 무리를 따르고 대열을 쫓되 일정함이 없이 하다 말다 하면서 큰 새가 날아오거든 활을 쏘아 잡을 것만 생각한다면 학문을 강론하고 설명하는 것이 책상 위에서 떠들썩하게 일어나고, 절을 하고 읍을 행하는 예절이 술잔과 제기 앞에서 어지럽게 행해진다 한들 한갓 형식일 뿐이고 즐거움이 될 수 없을 것이다. 이와 같은 사람이 만약 더해져서 열이 되고 백이 된다면 나의 귀를 시끄럽게 하고 나의 마음을 소란스럽게 함으로써 그 괴로움을 이기지 못하고 도망치게 될 것이니, 또한 어찌 내 곁에 사람이 있기를 바라겠는가.중립이여! 다른 사람이 스승의 곁에 있기를 구하지 말고 스스로 몸이 아닌 마음으로 스승의 곁에 있을 방법을 꾀하여 그대부터 먼저 행함으로써 이와 같은 자가 많아진다면 나는 날마다 형체가 없는 데에서 서로 성장하는 즐거움을 얻어서 외롭지 않을 것이니, 이 글을 중립에게 주는 것이 어찌 중대한 일이 아니겠는가. 無人乎子思之側之人, 伺候道達之人; 無人乎繆公之側之人, 維持調護之人, 一是凡衆之人; 一是賢智之人也. 白君 中立寄余書, 以無人乎先生之側爲憂. 此豈謂供給使令凡衆人之無吾側哉? 蓋云力學求道希賢智者之無有也. 中立之憂, 非爲一人之私, 乃爲學界公共而憂之也. 雖然, 徒知憂之, 而未知所以去憂之方, 則未也. 中立亦嘗在乎吾側矣. 今雖索居燕處, 能專爾心力, 端爾視聽, 將前日所受乎師長者而致爾知實爾踐, 日進上達而不已焉, 則吾與子雖朔南遠而歲年睽, 神與之往, 心與之會, 融融之樂, 若鍾鼓琴瑟之作於座矣. 使中立日在乎吾側, 隨羣逐隊, 作輟無常, 鴻鵠將至, 思授弓繳而射之, 則講說騰乎几案, 拜揖紛乎樽俎, 徒爲文具, 未足以爲樂矣. 如此者, 若加而爲十百, 則將聒聒乎吾耳, 擾擾乎吾心, 不勝其苦而走之也, 亦奚願有人乎吾側哉? 中立乎, 無求別人之在師長側, 自圖所以在師長側之以心而不以身, 從子先之, 而若是者衆, 則吾將日獲相長之樂於無形, 而不見其孤也. 是爲中立賜, 顧不大歟? 자사(子思)의 …… 사람이니 《맹자》 〈등문공 하(滕文公下)〉에 "옛날에 노나라 목공은 자사의 곁에 자신의 성의를 전달해 줄 사람이 없으면 자사에 대하여 편안히 여기지 못하였고, 설류(泄柳)와 신상(申詳)은 목공의 곁에 보좌할 만한 사람이 없으면 그 몸을 편안하게 하지 못하였다.〔昔者, 魯繆公無人乎子思之側, 則不能安子思, 泄柳、申詳無人乎繆公之側, 則不能安其身.〕"라는 구절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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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석유고》 서문 《可石遺稿》序 맹자가 이미 당세의 군자를 얻는 것을 어렵게 여기고 말하기를, "옛 시대로 거슬러 올라가서 천고의 사람과 벗한다."128)라고 하였고, 양웅(揚雄)도 또한 현 시대의 자기를 알아주는 사람을 만나지 못하고 후대의 자운(子雲)을 기다렸으니129), 아, 고금 상하에 자기를 알아주는 한 명의 사람을 얻는 것이 이처럼 어려운 것인가? 종자기(鍾子期)가 죽자 백아(伯牙)가 다시는 거문고를 타지 않은 것130)이 진실로 이 때문이다.옛적을 추억하건대, 나와 공은 요행히 같은 세상에 태어났고, 학업도 또한 유학으로 같았기에 서로 다투어 따르고 쫓으면서 글을 주고받고 술잔을 나누는 즐거움에 유람하며 완상하는 정취를 더하여 경전(經傳)의 대지(大旨)와 천인(天人)의 성명(性命)을 변별하고 분석하는 이치에 이르렀으니, 나는 공이 군자다운 사람임을 알아보고서 스스로 지기(知己)라 이르며 후대의 자운을 기다리지 않았다. 그러던 중 눈 깜짝할 사이에 공은 이미 구천(九泉)에 있고, 나도 또한 노쇠하였으니, 난세에 선인 군자(善人君子)를 얻기 어렵고 잃기 쉬울 뿐만 아니라, 친구와 지기가 시들어 떨어지는 것이 어찌하여 이와 같단 말인가.얼마 뒤에 유고(遺孤) 진호(珍浩)가 부친이 평생토록 저술한 것들을 모아 나에게 주고 교정하게 하니, 내가 교정과 편찬을 마치고 진호에게 주면서 말하였다."훌륭하다! 옹의 문장이여. 대저 문장을 알기 어려움은 사람을 알기 어려움만 못하니, 이른바 문장이라는 것에 대해 내가 오히려 능숙하게 통달했는지도 모르는데, 사람에 대해 또한 어찌 참으로 군자인지 알 수 있겠는가. 지난날 지기라 일컬으며 자운을 기다리지 않은 것은 자못 스스로를 속인 것에 가깝지 않겠는가.아, 옛적에 알지 못했던 것을 오늘날에 알게 되었고, 당시에 보지 못했던 것을 죽은 뒤에 보게 되었으니, 공으로 보면 후대의 자운 한 명을 얻게 되어 구천에서 유감이 없을 뿐만 아니라, 나에게 있어서도 또한 알지 못했던 잘못을 조금이나마 보상하여 종자기와 백아의 풍모에 부끄러움이 없게 된 것인가? 훗날 이 문집을 보는 사람들이 그의 간결한 시문(詩文)을 보고서 의론이 바르고 확실함을 자세히 살핀다면 거의 나의 말이 거짓이 아님을 알 수 있을 것이다." 孟子旣難得當世君子而曰: "尙友千古. " 楊雄亦未見現代知己, 以待後世之子雲. 嗚呼, 古今上下, 得一知己, 若是之難耶? 鍾子期死, 伯牙不復彈琴, 良以是也. 夫憶昔余與公, 幸生一世, 業亦同儒, 爭相追逐, 文墨杯酒之歡, 加以游賞之情, 以至辨柝經傳大旨、天人性命之理. 吾知公爲君子人, 而自謂知己, 不待後世之子雲也. 於焉轉眄之頃, 公已九原, 而余亦衰老矣. 不惟亂世善人君子, 難得易失, 而朋舊知己之凋落, 何如是也? 未幾, 遺孤珍浩, 輯厥考生平著作, 投余而較之. 余旣校旣編, 授珍浩而告之曰: "善哉! 若翁之文. 夫文之難知, 不若人之爲難知, 而所謂文者, 吾尙未知其能達焉, 人亦安知其眞爲君子耶? 向稱知己焉, 不待子雲者, 殆不近於自誣耶? 噫, 昔年之所未知也, 而知之於今日, 當時之所不見也, 而見之於死後. 不惟公之得一後世子雲, 可以無憾於九泉之下, 而在余亦可以少償不知之過, 而無愧於鍾、伯之風也耶? 後之覽是集者, 見其詩文之簡, 而委議論之正且確, 庶知余言之不誣也. " 옛 …… 벗한다 《맹자》 〈만장 하(萬章下)〉에 "이 세상의 훌륭한 선비와 벗하는 것으로 충분하지 못하면 다시 옛 시대로 올라가서 옛사람을 논한다. 그의 시를 낭송하고 그의 글을 읽으면서도 그가 어떤 사람인지 몰라서야 말이 되겠는가. 그렇기 때문에 당시의 그의 삶을 논하게 되는 것이니, 이것이 바로 옛 시대로 올라가서 벗하는 것이다.〔以友天下之善士爲未足, 又尙論古之人, 頌其詩讀其書, 不知其人可乎? 是以論其世也, 是尙友也.〕"라는 구절이 보인다. 양웅(揚雄)도 …… 기다렸으니 양웅은 전한 시대의 학자이자 문인으로, 자운은 그의 자이다. 한유(韓愈, 768~824)의 글에 "양웅이 《주역》에 비겨서 스스로 《태현경(太玄經)》을 짓고 나서 사람들이 알아보지 못하고 비웃자, '세상에서 나를 알아주지 않는 것은 해로울 것이 없다. 후세에 다시 양자운이 나오면 반드시 이 글을 좋아할 것이다.〔世不我知無害也, 後世復有揚子雲必好之.〕'라고 했다."라는 말이 전해진다. 《唐宋八大家文抄 卷4 與馮宿論文書》 종자기(鍾子期)가 …… 것 춘추 시대에 백아(伯牙)가 산을 생각하며 거문고를 타면 종자기가 "좋구나. 우뚝 솟은 것이 태산 같도다.〔善哉! 峩峩兮若泰山.〕"라고 하고, 백아가 물을 생각하며 거문고를 타면 종자기가 "좋구나. 물이 넘실넘실하는 것이 강하 같도다.〔善哉! 洋洋兮若江河.〕"라고 하여 그 소리를 잘 알아들었는데, 종자기가 죽자 백아는 자신의 거문고 소리를 알아주는 사람이 더 이상 없음을 한탄하며 거문고 줄을 끊고 버려 죽을 때까지 다시는 거문고를 타지 않았다는 고사가 전해진다.《列子 湯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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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5년 윤기섭(尹璂燮) 간찰(簡札) 2 고문서-서간통고류-서간 乙梧秋旬七 尹璂燮 東床 乙梧秋旬七 尹璂燮 東床 정읍 성주이씨 이유원 후손가 성주이씨 이정순 HIKS_Z037_01_A00935_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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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5년 윤재진(尹在晉) 간찰(簡札) 고문서-서간통고류-서간 乙梧月十七日 尹在晉 乙梧月十七日 尹在晉 정읍 성주이씨 이유원 후손가 성주이씨 이정순 HIKS_Z037_01_A00940_001 1925년 7월 17일에 족질 윤재진이 수신자의 안부를 물은 후에 가을바람이 점점 서늘해지면 학문하는 여가에 한 번 왕림해 달라고 한 간찰 1925년 7월 17일에 족질(族姪) 윤재진(尹在晉)이 수신자의 안부를 골고루 물은 뒤에, 자신은 점점 게을러져서 전진(前進)함에 가망이 없어 걱정스럽다고 하였다. 탄식한들 어찌하겠는가 하고, 오직 다행인 것은 긴 여름 이래로 거듭 숨이 막히는 것은 면했다는 것이다. 가을바람이 점점 서늘해지면 학문하는 여가에 부디 한 번 왕림해 달라고 당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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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백종락에게 답함 정해년(1947) 答金周伯 宗洛 ○丁亥 일전에 형님께서 오사익(吳士益)과 함께 보낸 안부편지를 받았는데, 저에게 "최근에 권모씨가 방문하여 나에게 간재선생을 위하여 사당을 건립하는 통문에 서명할 것을 청하기에 내가 후창과는 서로 상의했냐고 물으니, 권씨가 미처 하지 못했다고 하였소. 내가 지척 간에 있는데 어찌하여 미처 하지 못하였느냐고 말하였으나 마음속으로 몹시 이상하게 여겼소."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아마도 형님이 우리 문하에서 발생한 호남과 영남의 시비에 대하여 일찍이 대강 들었다 하더라도 아직은 그 곡절을 깊이 알지 못하였기 때문일 것입니다. 영남에서 주장하는 것은 선사께서 간행을 인가하는 교시를 하였고, 유서는 위조되었다고 하면서 스승의 원고를 고쳐서 어지럽게 만들고 끝내 간행을 인가받는 것이고,【권순명은 오씨와 강씨가 고소한 변고에 검찰국에 가서 그들의 증인이 되었다】호남에서 주장하는 것은 스승의 무함을 분별하고 원고의 혼란을 바로잡으며, 유훈을 지켜서 원고를 베껴 받들어 보관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얼음과 숯처럼 서로 의견이 상반되어서 양립할 수 없게 된 지가 20여년이나 되었습니다.몇 해 전에 영남으로부터 시비를 덮어두고 화해하자는 요청이 있었지만 끝내 그렇게 하지 못했습니다. 지금 의논하러 오지 않는 것은 바로 거절하면서 만나주지 않을까 두려워서인데 그들은 "우선 미처 만나지 못했다"고 말을 합니다. 어쩌면 그렇게도 어리석게 거짓을 꾸며 속입니까? 저의 의리로는 저 무리들이 마음을 고쳐 죄를 인정하기 전에는 절대 함께 일을 할 수 없습니다. 다른 사람에게 질문을 받는다면 마땅히 "도의는 중대한 사안이고 사후의 문집 간행은 사소한 사안인데 저들이 이미 스승의 큰 것을 깨뜨렸으니 어찌 작은 것을 이루기 위하여 그들과 화해할 수 있겠습니까?"라고 말할 것입니다. 이런 측면에서 피차간의 시비를 분명하게 볼 수 있습니다. 잘 모르겠지만, 형님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日前承尊駕同吳士益枉存, 語弟曰"近權某見訪, 請余參名, 爲艮翁建祠通文, 余問已與後滄相議乎? 權曰姑未及, 余曰咫尺之地, 有何未及也? 然心甚恠之云云." 此盖兄於鄙門湖嶺是非 雖曾畧聞, 尚不深知其曲折故也. 盖嶺之所主謂先師有認教, 謂遺書偽造, 改亂大稿而終於認刊也.【權於吳姜告訴之變, 往檢局爲其證人】湖之所主, 辨師誣, 正稿亂, 守遺訓而鈔出奉藏也. 水炭相反, 不能兩立者, 爲二十餘年.年前自嶺有盖是非講和之請, 而竟不得矣. 今不來議者, 正恐拒不相見, 乃曰"姑未及." 何其糊塗而詐僞也? 在吾之義, 則彼輩革心服罪之前, 斷不與同事. 被人問則當曰"道義大者, 後事少者, 彼既破師大者, 則安可爲成其少者, 而合之乎云矣?" 於此益可見彼此之是非也, 未知兄以爲如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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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구노동에게 보냄 경신년(1920) 與金聖九 魯東○庚申 저는 일찍이 그대가 순씨(筍氏)의 용1)이며 사씨(謝氏)의 보배2)라고 들었는데, 진실로 묘령(竗齡)의 영재로서 그 재주와 뛰어난 식견과 돈독한 행실이 이와 같이 탁월할 줄은 생각지도 못했습니다. 이를 채워 전진한다면 사씨의 보배나 순씨의 용도 비루할 것이니 어찌 말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유문(儒門)에서 석진(席珍)3)을 중시하고 문명의 세계에서 현룡(見龍)4)을 우러르니, 한 집안의 경사스러운 복은 굳이 축하할 필요도 없고, 축하할 만한 것은 세도(世道)에 다행스럽다는 것입니다. 아, 도가 천하에 밝혀지기 어려운 것이 오래되었습니다. 지혜로운 자는 지나치고 어리석은 자는 미치지 못하여 중도를 행하는 사람을 얻기 어렵고, 의론의 동이(同異)가 부류에 따라 달리하여 공평한 마음을 지닌 사람을 만나기 어렵습니다. 과불급의 차이 때문에 대도가 실행되지 못하고, 의론의 동이에 대해 자신을 옳다고 여기기 때문에 정밀한 의리가 항상 어둡습니다. 지금 그대는 치우치지 않고 기울어지지 않은 재주로 편당도 없고 치우침도 없는 마음을 보존하고 있으니, 도를 밝히는 일에 있어서는 절반 넘게 깨달은 것입니다. 그러나 중도를 행하는 사람도 또한 학문을 좋아해야 하고, 공평한 마음을 지닌 사람도 또한 반드시 견해를 올바르게 해야 합니다. 자질은 아름다운데 배우는 것을 좋아하지 않으면 큰 도를 깨우치기 어려우니 이것이 근심거리이고, 마음은 공평한데 견해가 바르지 않으면 쇳덩이를 은이라 부르게 되니 이것이 두려운 점입니다. 그렇다면 재주가 치우쳐 중도를 잃은 자, 스스로 옳다고 하여 이치에 어두운 자와 더불어 똑같이 도를 밝힐 수 없는 데에 귀결됩니다. 학문을 좋아하는 것은 견해를 바르게 하는 바탕이 되고 견해가 바른 것은 학문을 좋아한다는 증거입니다. 학문을 좋아하여 하나의 이치도 궁구하지 않음이 없는 수준에 이르고, 견해가 바르게 되어 터럭만큼도 오차가 없는 경지에 이르러야 비로소 도를 밝힌 지극한 공이요, 우리 유자들의 능사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는 일생의 많은 일들 중에서도 큰일이니 힘쓰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감히 힘쓰기를 바라니 그대는 이를 도모하기 바랍니다. 저 같은 사람은 학문을 논하자면 빙산의 일각처럼 초라하고 그림속의 떡처럼 실질이 없으며, 그 병폐를 말하자면 구멍이 백 개이고 상처가 천개입니다. 외람되게 교유하게 되었으니, 경계의 말을 기다릴 겨를도 없어야 합니다. 다만 그대에게 일시의 금란지교(金蘭之交)5)를 생각하지 않고 오직 세한송백(歲寒松柏)6)을 의탁하기 때문에 참람됨과 망령됨을 깨닫지 못하고 먼저 작은 정성을 바쳐 애오라지 종신토록 학업을 권면하고 과실을 바로잡고자 했습니다. 너그럽게 헤아리고 꾸짖지 않기를 바랍니다. 僕曾聞足下爲荀氏之龍、謝氏之寶, 實未圖竗齡英材, 超識敦行, 若是其卓卓也.充此而進, 謝寶荀龍, 陋矣奚道? 儒門之席珍是重, 文明之見龍是仰, 一家慶福不須賀, 所可賀者世道幸.鳴呼, 道之難明於天下也久矣.知愚之過不及也, 而中行之難得, 同異之殊倫也, 而公心之罕覯.過不及之差也, 故大道不行; 同異之自是也, 故精義常晦.今足下以不偏不倚之材, 存無黨無偏之心, 其於明道也, 思過半矣.然中行矣, 又須好學; 公心矣, 又須正見.質美而不好學, 則大道難聞是患; 心公而見不正, 則喚鐵作銀可畏, 其與偏材之失中、自是之昧理者, 同歸於不能明道一也.蓋好學者, 所以爲正見地也; 見正者, 乃好學之驗也.好學而至於無一理之不究, 見正而至於無一毫之或差, 然後始可謂明道之極功、吾儒之能事.此是一生大小大事, 不容不加勉者, 故敢以仰勗, 惟足下圖之.至如僕者, 論其學則氷山畵餅, 語其病則百孔千瘡, 既蒙辱交, 宜俟箴砭之不暇, 而特於足下不欲以一時之金蘭相擬, 惟歲寒之松柏是託.故不覺僭妄, 先效微忱, 聊作終身業勸過規之地, 惟冀恕究不讁. 순씨의 용 후한(後漢) 순숙(荀淑)의 여덟 아들인 순검(荀儉), 순곤(荀緄), 순정(荀靖), 순도(荀燾), 순왕(荀汪), 순상(荀爽), 순숙(荀肅), 순전(荀專)을 가리킨다. 이 여덟 사람이 모두 재덕(才德)이 출중하였기 때문에 당시에 팔룡(八龍)이라고 일컬었다. 《후한서(後漢書)》 권62 〈순숙열전(荀淑列傳)〉이후 다른 사람의 재주 있는 자제를 일컫는 말로 쓰이게 되었다. 사씨의 보배 동진(東晋)의 재상 사안(謝安)의 자질들을 비유한 말이다. 진(晉)나라 때 큰 문벌을 이루었던 사안이 자질(子姪)들에게 "어찌하여 사람들은 자기 자제가 출중하기를 바라는가?" 하고 묻자, 조카 사현(謝玄)이 "비유하자면 마치 지란(芝蘭)과 옥수(玉樹)가 자기 집 뜰에 자라기를 바라는 것과 같습니다."라고 한 데서 유래한 말로, 훌륭한 자제가 많음을 뜻한다. 《진서(晉書)》 권79 〈사현전(謝玄傳)〉 석진(席珍) 좌석 위에 앉아 있는 보배[席上之珍]라는 뜻으로, 아름답고 뛰어난 재주와 학문이 있는 유자(儒者)를 뜻하는 말이다. 《예기(禮器)》 〈유행(儒行)〉에 "선비는 자리 위의 보배를 갖추어 두고 나라의 초빙을 기다린다.〔儒有席上之珍, 以待聘〕" 하였다. 현룡(見龍) 아직 뜻을 얻지 못한 인재를 상징한다. 《주역(周易)》 〈건괘(乾卦)〉 구이효(九二爻)에 "나타난 용이 밭에 있으니 대인을 보아야 이롭다.〔見龍在田, 利見大人〕" 하였다. 금란지교(金蘭之交) 《주역(周易)》 〈계사전 하(繫辭傳下)〉에서 "두 사람이 마음을 함께하니, 그 날카로움이 쇠를 절단한다. 마음을 함께하는 말은 그 향기로움이 난초와 같다.〔二人同心 其利斷金 同心之言 其臭如蘭〕"라고 하였다. 세한송백(歲寒松柏) 추운 계절을 꿋꿋이 견뎌내는 절조(節操)를 말한다. 추운 계절에도 늘 푸른 송백처럼 아무리 어려운 환경에서도 자신의 신념을 지켜 나간다는 말이다. 《논어(論語)》 〈자한(子罕)〉에 "날씨가 추워진 뒤에야 소나무와 잣나무가 뒤늦게 시듦을 알 수 있다.〔子曰 歲寒 然後知松柏之後彫也〕"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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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구에게 답함 경신년(1920) 答金聖九 庚申 편지에서 말한 것을 받들어 살펴보니 지행이 해이하여 빼어난 것이 없다는 등의 말이 있었는데 스스로 겸양하는 의례적인 말에서 나왔다는 것을 알겠습니다. 그러나 질문을 하여 보탬이 되는 것을 구하는 것이라면, 이를 통하여 참된 마음을 바쳐서 서로 함께 하는 일단으로 삼기를 바랍니다. 뜻을 굳건히 세워서 해이해지지 않게 하고 행실을 독실이 정진시켜 느슨해지지 않게 하는 것이 어찌 학자가 원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끝내 어찌할 수 없이 이치와 의리를 드러내는 것은 미약해지고 은미해졌으며 기욕의 폐단은 강성해지고 무성해져서, 하루아침에 분발한다고 한들 긴 시간 동안에 안이하게 지낸 것을 이길 수 없고, 천리를 가는 배는 항상 대부분 도중에 그쳐서 잠시 뜻을 세웠다가도 곧바로 해이해지고 또 잠시 나갔다가도 곧바로 느슨해지는 사이에 유유한 세월은 나를 기다려주지 않으니, 이것은 천고의 공통된 근심거리입니다. 제가 옛날 약관이었을 때 뜻한 바와 행한 바는 비록 말할 것은 못되지만, 일찍이 옛사람에 뜻을 두고 배우려 하지 않은 적이 없어서, 매번 마음속으로 스스로 믿어 말하기를 "옛날에 특별히 통달한 사람은 비록 일찍 성취했다 하더라도 모두 장성한 이후에 세운 것 있었다. 나는 아직도 약관의 젊은 나이이니 또한 십여 년의 공부를 한다면 옛사람을 따라잡는 데 있어서 반절은 된 것이다."라고 생각했습니다. 순식간에 십 년이 흘러서, 가만히 내가 한 말과 행위를 옛사람이 30세 때 했던 성취와 비교해보니, 언덕이 태산과 화산을 마주 보고 있는 것처럼 현격한 차이가 있는 듯했습니다. 그래서 스스로 후회하고 한탄하며 "내가 가졌던 옛날의 지행은 진실로 대부분 해이해졌다."라고 되뇌었습니다. 그런데도 오히려 스스로를 위로하며, "옛 사람들이 덕을 완성한 것은 대부분 40세 때나 50세 때였으니, 내가 비록 몇 년 어그러졌으나 이제라도 힘써 정진한다면 오히려 미칠 수 있을 것이다."라고 여겼습니다. 그러나 신선이 될 금단의 소식은 아직 없고 서릿발 같은 흰 머리가 먼저 침범할 줄 누가 알았겠습니까. 40세 전에는 아득하고 망망하였으니 한문공(한유)만 그런 것이 아니었습니다. 오묘한 도와 정미한 의리는 비록 기미를 살피고 마음에 깨닫고 싶으나 이미 젊은 날의 총명이 아니요, 중임과 대업은 비록 멀리 끝까지 궁구하고 싶었을지라도 장년의 역량이 없음을 어찌할 수 없어서, 지난날에 떠돌며 논 것을 슬퍼하고 초심에 부합하기 어려움을 개탄하여, 때때로 눈물을 흘렸습니다. 수레가 뒤집힌 이후에 큰 길을 살피는 것이니 팔이 부러지기 전에 좋은 의사를 어찌 구할 수 있겠습니까. 그대는 이 한량이 경험한 바를 거울과 경계로 삼아서, 세월이 많다는 것을 믿는다 말하지 말고, 지극한 도를 듣기 어렵다는 것을 항상 두려워하여, 더욱 큰 뜻에 힘을 쓰고 큰일을 궁구하여, 가깝게는 부모의 유체를 보존하고, 멀리는 성현의 일맥을 잇기를 바랍니다. 저는 비록 때를 잃었지만, 속으로는 천리마 꼬리에 붙은 파리나 삼대 속의 쑥대가 되기를 원합니다. 나는 그대에 대해 얼굴은 비록 새로이 알았을지라도 마음만은 옛날부터 사귄 것 같습니다. 헛된 칭찬으로 사람에게 아첨하고 싶지는 않고, 거듭 참된 마음으로 서로를 도와준다는 비유에 느끼는 바가 있어서 나도 모르게 속마음을 다하여 여기에 이르렀으니, 이해하여 잘 들어줄 것이라 생각합니다. 奉審書中所自道, 有志行懈弛, 無以聳拔等語, 知是出自撝謙例語.然既係下問而求益者, 則請得以因此, 而效實心相與之一端也.夫志之欲其堅立而不懈, 行之欲其篤進而不弛, 豈不是學者之所願? 終無奈理義之發弱而微, 氣欲之蔽強而繁, 一日之奮發, 不能勝長時之燕晏, 千里之輈, 常多半途之廢, 乍立乍解乍進乍弛之間, 悠悠歲月不待我矣, 此千古之通患也.僕之昔在弱冠也, 所志所行, 雖不足道, 亦未嘗不欲古之人是志是學, 每有自恃于中者曰: "往昔特逹之人, 雖云夙就, 皆壯而後有立焉.我尚弱而少矣, 且用十許年工夫, 其於追古人也, 思過半矣." 焂忽之間, 十霜已周, 靜把己之云爲, 視古人三十時所就, 則懸乎若丘垤之於泰華矣.乃自悔懊曰: "我向來志行, 固多解弛也." 然猶有所自慰者曰: "古人之成德, 多在於四十五十, 我雖蹉, 却幾年迨此, 勉進尚可及也." 孰知金丹無信霜白先侵? 四十前茫茫蒼蒼, 非獨韓文公然也.竗道精義, 雖欲研幾悟, 心而已, 非少日之聰明.重任大業, 雖欲遠致極究, 而奈無壯年之力量, 悼往日之游泛, 慨初心之難副, 有時乎泫然而泣下.覆轍之後, 坦途亦審, 折肱之前, 良醫何求? 幸足下以此漢之所經歷者爲鑑戒, 勿謂富年之可恃, 恒懼至道之難聞, 益勵大志, 勉究大事, 近以成父母之遺體, 遠以紹賢聖之一脈也.僕雖失時, 竊願爲驥尾之蠅, 麻中之蓬也.僕於足下, 面雖新知, 心惟舊交.既不欲以虛譽媚人, 而重有感於實心相與之喩, 不覺罄竭至此, 想亦見諒而樂聞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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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구에게 답함 신유년(1921) 答金聖九 辛酉 "현명하고 도량이 넓으며 치우치지 않는 사람은 집사 한 명뿐이다."고 하였는데, 어쩌다가 현명한 견해가 있는 당신에게 이런 평가를 받게 되었는지 전혀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스스로 생각건대 어리석고 비루하여 사람들 중에 가장 못났는데, 다만 타고난 성격이 가볍고 재빨라서 한두 가지 얻어들은 것이 있으면 곧장 감히 강론의 말석에 쏟아놓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실제로 터득한 것이 없기 때문에 또 감히 자신도 독실하게 믿고 타인을 급박하게 배척하지 못하였습니다. 이 때문에 다른 사람의 선을 즐겨 말하는 그대가 자세히 살피지 못하여 현명하고 도량이 넓다는 것으로 저를 잘못 칭찬한 것이니, 사실은 그대의 잘못이 아니라 제가 다른 사람을 속인 죄입니다.치우치지 않았다고 말씀하신 경우는 잘한다는 것이 아니라 배우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근래에 유문(儒門)이 찢어지고 의론이 대립되었는데, 윗사람은 이미 이를 벗어나지 못하고 아랫사람들은 그 정도가 더욱 심합니다. 일의 시비와 말의 득실을 규명하지 않고, 자기 스승에게서 나왔다면 높이고 떠받치는 것이 너무 지나쳐 태산과 화산도 오히려 낮다고 의심하고, 다른 문하에서 나왔다면 씻어내고 불어내는 것이 너무나 가혹하여 단점이 혹시라도 숨겨질까 두려워하니, 이것은 제가 깊이 미워하면서 통렬하게 징계하는 것입니다. 조석으로 덕을 살펴서 시종 바뀌지 않는 것은 어찌 그대가 저에게만 바라는 것이겠습니까. 제가 그대에게 바라는 것도 이것입니다.화도(華島)7)의 차서(車書)8)에 대해 지난번에 줄곧 의심했던 것은 그것이 다만 서로를 친애하는 뜻을 저버렸기 때문이었습니다. 선생에게 여쭈자 과연 생각한 바와 같았지만, 선생은 '그 편지에서 한 말이 너무나 무거우니 온당치 않다'고 말씀하셨을 뿐이었습니다. 유자가 삭발을 당하게 되었을 때 자결하는 자에 대해서는 그가 의를 취했는지를 여부를 허여할 뿐입니다. 일찍이 선생에게 여쭈었는데, "비록 문묘에 배향할 수는 없어도 사숙(私塾)에서 제사지내는 것은 가능하다."9)고 하였습니다. 이미 사숙에서 제사지내는 것을 허여했는데, 어찌 일찍이 그 의리를 인정하지 않았겠습니까? 그러니 "한 번 삭발을 당한 것이 모두 쓸모가 없다."는 말은 아마도 전한 사람의 잘못임을 알 수 있습니다. 겁탈을 당하여 자결한 열부(烈婦)에 관한 글을 《약재집(約齋集)》에서 삭제한 것은 혹 한결같이 찬양만 하고 억양(抑揚)과 포폄(褒貶)의 뜻이 없기 때문입니까? 《약재집》을 교정할 때 유영선(柳永善)이 명을 받아 삭제했으니, 유영선이 일찍이 "때때로 한 번씩 이를 생각할 때마다 마음이 항상 편치 않다."라고 하였습니다.'청나라 유자[淸儒]' 운운한 것은 마땅히 말씀을 그대로 전달하여 여쭈어야 합니다만 질문한 본뜻을 자세히 알지 못하겠습니다. 본래 명나라 사람인데 청나라 유자가 된 자를 말하는 것입니까? 아니면 본래 청나라 사람으로서 청나라 유자가 된 자입니까? 국초의 청나라 유자를 말한 것입니까? 또는 나라를 세우고 오래 시간이 지난 뒤의 청나라 유자를 말한 것입니까? 또한 청나라 유자가 스스로 처신한 의리를 말하는 것입니까? 아니면 후세 사람이 청나라 유자를 처리하는 의리입니까? 다음 편지에서 다시 가르쳐주시기 바랍니다. "明洪不偏, 執事一人"之喩, 何以得此於明見? 殊不可曉.自惟昏滯隘陋, 最出人下, 而但姿性輕儇, 才有一二口耳之得, 輒敢傾瀉於講論之末.然惟其無實得也, 故又不敢信己篤而排人急.是故足下樂道人善, 而未及細察, 誤以明且洪稱之, 實則非足下之誤也, 乃僕欺人之罪也.至於不偏之云, 非曰能之, 而願學焉者也.近世儒門岐裂, 議論角立, 上既不免, 而下益甚焉.不究事之是非、言之得失, 出自其師, 則尊戴太崇, 嫌泰華之猶卑; 出於他門, 則洗吹太苛, 恐疵瘢之或隱, 此僕所深惡而痛懲者也.朝夕觀德, 終始不替, 豈惟足下之所望於僕? 僕之望於足下者亦此也.華島車書向固疑, 其爲只謝相愛之意, 及稟先生則果如所料, 而但以那書命語太重, 爲未穩云矣.儒者被削自裁者, 許其取義與否.曾己稟質師門, 答謂雖不可從享文廟, 而祭之私塾則可也.既許其祭之私塾, 則何嘗不與其義乎? 乃知"一被削都無用"之語, 蓋傳者之過也.若其删"遇劫自裁之烈婦"文字於《約齋集》者, 或以其一味贊揚, 而無抑揚褒貶之意故耶?《約集》之校也, 柳永善承命删出, 而柳嘗言"時一念此, 心常不安"云矣."清儒"云云, 當依敎轉稟, 而不詳發問本意, 謂自明人而爲清儒者耶? 本清人而清儒者耶? 謂國初之清儒耶? 立國久後之清儒耶? 且謂清儒自處之義耶? 後人處清儒之義耶? 後囬更示爲仰. 화도(華島) 전라북도 부안군에 있는 계화도(界火島)인데, 간재가 이곳에 정착하여 수학을 하며 중화(中華)를 계승한다는 뜻에서 계화도(繼華島)라고 고쳐 불렀다. 차서(車書) 車氏가 보내온 편지를 이른 듯하다. 비록……가능하다 간재는 "선비가 삭발당하여 자살하는 것은 욕을 당한 부녀와 의리가 동일한 것이니, 그 문도들이 사숙에서 제사지내는 것은 가능하다.〔士子被削而卽自裁者.亦宜與受辱婦女同一義理.其門徒祭之私塾則可〕"라고 하였다. 《간재집(艮齋集)후편》 권17 〈華島漫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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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구에게 답함 신유년(1921) 答金聖九 辛酉 간옹(艮翁)이 유자가 삭발을 당하여 자살하는 것10)을 의론한 설은 지난번 편지에 대략 이미 제기해 말하였으니, 보시고 다 아셨으리라 생각됩니다. 천근하고 비루한 저는 진실로 정밀한 의리를 더불어 논하기에 부족하지만 만일 반드시 한 말씀을 해주기를 바란다면 한 가지가 있습니다. 저 삭발을 당하여 자살한 자는, 그 덕망과 품행이 높은지 낮은지는 논하지 않더라도 중화를 존중하고 오랑캐를 천시하는 마음은 과연 진실하고 간절했습니다. 이것은 그가 평상시 말마다 반드시 중화와 오랑캐를 분별하고, 일마다 반드시 중화를 따르고 오랑캐를 등졌기 때문입니다. 그가 삭발을 당할 때 정색하고 엄한 말로 거절하였으니, 마땅히 하지 못할 것이 없었을 것입니다.그러나 사람들의 위협이 우레와 같고 날카로운 칼날은 번개와 같음에 속수무책이고 죽으려고 해도 죽지 못하니 어쩔 것입니까? 이때에는 만약 만 명을 당할 힘이 있지 않으면 비록 성인의 큰 덕이라 할지라도 아마도 역시 어찌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저 사람은 또 분노와 수치심을 깊이 품고 즉시 한 번 죽는 것으로 스스로 밝혔으니, 그 심사의 명백하고 곧음은 조금도 의심할 것이 없습니다. 만약 겉모습이 억지로 바뀐 것을 이유로 더 나아가 절개를 잃었다고 결론을 내린다면 사람을 너무 가혹하게 논하여 그로 하여금 너무 억울하게 만드는 것이 어찌 아니겠습니까?김씨의 일과 같은 경우는, 죽음에 임했을 때 쓴 한 장의 유언과 의론하는 자들의 조소를 모두 아직 보지 못했으니, 제가 어찌 감히 알겠습니까. 다만 보내온 편지를 참작하고 제 소견으로 헤아려 본다면 김씨의 잘못은 죽음에 임했을 때 쓴 유언에 있지 않고, 아마도 자결이 너무 늦은 것에 있는 것 같습니다. 의론하는 자들의 비웃음은 삭발을 당하여 자결한 것에 있지 않고 아마도 삭발 이후에 의리를 너무 크게 말함에 있는 것 같습니다. 그대가 보기에 다시 이를 다시 어떻게 여길지 모르겠습니다. 艮翁所論儒者被削自死之說, 向書畧已提陳, 想經覽悉.至於淺陋, 固不足與議於精義, 而如欲言之無已, 則有一焉.蓋彼被削自死者, 未論其德望品行之或高或下, 其尊華賤夷之心, 則果眞切矣.是其平日, 言言必華夷之辨別, 事事必華夷之向背也.方其被削也, 正色嚴辭之拒斥, 宜亦無所不至矣.其柰衆脅如雷, 利械如電, 束手無策, 求死不得何? 當此之時, 如非有萬夫不當之力, 雖聖人之大德, 恐亦無如之何也.彼又深懷憤恥, 即以一死自明, 是其心事白直, 無少疑也.若以外形之強變, 進而歸之失節, 豈非論人太苛, 令人太冤乎? 至若金氏事, 其臨死之一紙、論者之嘲笑, 俱未及見, 吾何敢知? 但參之來書, 揣乎鄙見, 金氏之失, 不在於臨死之一紙, 恐在於自裁之太晚也.論者之笑, 不在於被削而自裁, 恐在於削後之大談義理也.未知盛見復以爲如何. 간옹이……것 간재는 "삭발을 당하고 대의를 말하는 자는 그 가소로운 것이 여기에 있지 훗날 자결하는 데에 있지 않다. 성구는 매우 마땅하다고 운운하는데 이는 좋다. 그 대인의 뜻도 그러한가?〔被削而談大義者, 其可笑在此, 非在後日自裁. 聖九甚當甚當之云, 善矣, 未知其大人之意亦然耶〕"라고 하였다. 《간재집(艮齋集)후편》 권7 〈답김택술(答金澤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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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림동131)에서 돌아오는 길에 이사유 【한응】과 이별하며 주는 서문 【신사년(1941)】 花林洞歸路贈別李士裕【漢膺】序 【辛巳】 산과 강에서 바람 쐬고 시 읊는 즐거움에 대해 공자가 증점(曾點)을 허여했을 뿐만 아니라, 직접 자신이 태산(太山)과 동산(東山)을 유람하기까지 하였으니,132) 옛 현인들은 대체로 그러하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주자가 형악(衡岳 형산(衡山))과 여부(廬阜 여산(廬山))에 오르고, 율곡(栗谷)과 농암(農巖)이 금강산을 유람한 것은 또 그 중에 드러난 것이니, 이렇게 유람을 하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증점의 즐거움에 대해서는 선유(先儒)가 진실로 이미 말했고, 공자와 주자, 율곡, 농암도 그 도가 똑같으니, 성현을 배우는 자라면 어찌 그에 대한 생각이 없을 수 있겠는가.또한 긴장만 하고 이완하지 않는 것은 문왕이나 무왕이라도 할 수 없는 것이고, 이완만 하고 긴장하지 않는 것은 문왕이나 무왕이라도 하지 않는 것이었으니133), 긴장과 이완 사이에 도가 존재한다. 그러므로 한 번씩 유람하고 즐기는 것이 일 아닌 것이 없다. 이것이 내가 사유와 함께 화림동에 간 이유이다. 그런데 몽매한 자들이 이것을 알지 못하고 나더러 선비로서 교만하다고 하면서 말하기를,"이러한 때에 의리상 어찌 태사공(太史公)의 장대한 유람을 배울 수 있겠는가."하였다. 그러한가? 어찌 그렇겠는가. 상전벽해처럼 시대가 바뀐 뒤로 인심이 완전히 변하고 온 세상이 혼탁해져서 더불어 이야기할 만한 사람은 없는데, 태고의 모습을 보존하고 본연의 맑은 색을 띠고 있는 것은 오직 산수뿐이다. 이로 보면 세상 사람은 무상하지만, 산수는 무상하지 않다. 이에 정(情)이 있는 것은 무상하고, 정이 없는 것은 무상하지 않음을 알 수 있으니, 내가 어찌 정이 있는 것을 버리고 정이 없는 것을 취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옛 시에 이른바 '세상의 교제하는 도가 무정물에 있네.[世間交道在無情]'134)라는 것이 나보다 먼저 이러한 점을 알았던 것이니, 이러한 때를 당하여 더욱 이러한 유람이 없을 수 없다.옛적에 매월당(梅月堂 김시습(金時習))이 구름 낀 산림 속으로 떠나 은둔했던 것이나 명나라 말기에 여러 현인들이 황량한 언덕에서 통곡했던 것들이 모두 이러한 것들인데, 성현의 절의와 많은 행적들을 버려두고 태사공 한 가지 일만을 들어서 조롱하는 저 사람은 또한 유독 무슨 마음이란 말인가? 이것으로 그 조롱에 해명하고, 또 우리들이 앞에서 말한 성현의 바람 쐬고 시 읊는 즐거움과 이완시키고 긴장하는 데에 도가 있는 것, 유람하고 즐기는 데에 일이 있는 것 및 교제의 도가 무정물에 있는 것, 은둔하고 통곡했던 것 등의 뜻을 배우고자 하는 데에 체득한 바가 없이 단지 조롱자의 말을 실증시킬까 염려되었기 때문에 이 글을 지어 서로 더불어 반성하는 바탕으로 삼는다. 山水風咏之樂, 孔子非惟與點, 親自有泰山、東山之遊焉. 古之賢者, 蓋莫不然. 至於朱子之衡岳ㆍ廬阜、栗谷ㆍ農巖之金剛, 則又其著者. 此何以故? 曾點之樂, 先儒固已言之. 孔、朱、栗、農, 其揆一也. 學聖賢者, 豈無意乎? 且也張而不弛, 文、武不能, 弛而不張, 文、武不爲, 弛張之間, 有道存焉. 故一遊一豫, 無非事者. 此吾與士裕有花林之行也. 昧者不知, 謂我士驕而曰: "當此時, 義豈可學太史公壯觀也?" 噫, 其然? 豈其然乎? 滄桑之後, 人心百變, 擧世混濁, 無可與語者, 其存太古之顔, 帶本淸之色者, 惟山與水. 是則世人無常, 而山水有常. 乃知有情者無常, 而無情者有常, 吾寧可舍有情而取無情焉? 古詩所謂世間交道在無情者, 先獲之矣. 當此日也, 尤不可以無此行. 昔梅月堂之放遯雲林, 明末諸賢之痛哭荒岡, 皆是也. 彼之舍却聖賢節義、許多已迹, 擧一太史公事而嘲之者, 亦獨何心? 旣以此解其嘲, 又恐吾輩於所謂欲學聖賢風咏之樂、弛張有道、遊豫有事及交在無情、放遯痛哭之意, 無有所得, 而適以實嘲者之言. 故作是序, 以爲相與反省之資. 화림동 경상남도 함양군의 안의면 월림리 일대에 걸쳐있는 계곡으로, 농월정(弄月亭)ㆍ동호정(東湖亭)ㆍ거연정(居然亭)ㆍ군자정(君子亭) 등의 정자가 있는 곳이다. 산수(山水)에서 …… 유람하였으니 《논어》 〈선진(先進)〉에 증점(曾點)이 "늦봄에 봄옷이 이루어지거든 관자 대여섯 사람과 동자 예닐곱 사람과 함께 기수에 목욕하고 무우에서 바람을 쐬고 시를 읊으며 돌아오겠다.〔莫春者, 春服旣成, 冠者五六人, 童子六七人, 浴乎沂, 風乎舞雩, 詠而歸.〕"라고 말하자, 공자가 그 기상에 감탄을 하며 "나는 점과 함께 하겠다.〔吾與點也.〕"라고 허여한 것과 《맹자》 〈진심 상(盡心上)〉에 "공자가 노(魯)나라 동산(東山)에 올라가서는 노나라를 작게 여겼고, 태산(太山)에 올라가서는 천하를 작게 여겼다."라는 구절이 보인다. 긴장만 …… 것이니 《예기(禮記)》 잡기 하(雜記下)에 긴장만 하고 이완하지 않는 것은 문왕이나 무왕이라도 할 수 없는 것이고, 이완만 하고 긴장하지 않는 것은 문왕이나 무왕이라도 하지 않는 것이니, 한번 긴장하고 한번 이완하는 것은 문왕과 무왕의 도이다.〔張而不弛, 文武弗能也, 弛而不張, 文武弗爲也. 一張一弛, 文武之道也.〕"라는 구절이 보인다. 세상의 …… 있네 《율곡선생전서(栗谷先生全書)》 권14 〈답송운장(答宋雲長)〉에 "강가의 가을 산이 나를 싫어하지 않으니, 세상의 교제하는 도가 무정물에 있네〔江上秋山不相厭, 世間交道在無情.〕"라는 구절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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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하당계안의 서문 【무자년(1948)】 台下堂契案序 【戊子】 옛적에는 위로 정치가 융성하고 아래로 풍속이 아름다워 사람들이 권면할 필요도 없이 저절로 선에 교화되었다. 그런데 후대로 내려와서는 정치와 풍속이 모두 쇠퇴하여 백성들이 흥기하여 행하는 경우가 드물어졌다. 이에 뜻이 있는 자가 이를 근심하여 백성들을 이끌고 감발시킬 방법을 생각하였으니, 여남전(呂藍田)이 덕업을 서로 권면한 향약(鄕約)115)과 같은 것이 이것이고, 향약을 간략히 하여 계(契)를 만든 것으로는 근대의 문회계(文會契)와 위친계(爲親契), 존사계(尊師契), 목인계(睦婣契) 등이 있다. 대체로 모두 서로 수양하여 선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것이니, 또한 성대한 일인데, 오늘날의 태하당계안(台下堂契案)과 같은 것은 더욱 말을 하면 듣기에 흡족하였다.태하 거사(居士) 심관국(沈觀國)은 경재(敬齋)의 문인으로, 연옹(淵翁 김창흡(金昌翕))을 사숙하여 은거한 채 영달을 구하지 않았고 인륜을 좋아하였으니, 사람들이 대부분 그의 덕과 선에 감복하였다. 지난번에 고을의 나이 어린 수십 사람이 그의 자제와 조카, 친족과 인척에게 나아가 서로 함께 돈을 갹출하고 계를 세워 노년을 부양할 물자를 돕고, 일제히 당중(堂中)에 모여 격언(格言)을 가슴에 새기고 자신의 몸을 지키는 부절로 삼았으니, 무릇 이 계에 들어간 사람으로 자제와 조카들에게는 어버이를 위하는 계가 되고, 문도에게는 스승을 위하는 계가 되며, 친족과 인척에게는 화목의 계가 되고, 나머지 사람들에게는 어른을 공경하는 계라 이르는 것도 또한 괜찮을 것이며, 강론하고 예를 펴는 것으로 총괄하여 말하면 또한 문회계라 이를 수 있다. 한 가지 일을 행함에 많은 선이 갖추어져 있으니, 이는 실로 영주(瀛洲 정읍) 남쪽의 아름다운 풍속이라 하겠다. 그러나 태하당의 덕이 아니면 어찌 이런 일을 이룰 수 있겠는가.돌아보건대, 지금 서양의 물결이 우리나라에 밀려 들어와 떳떳한 인륜이 무너져 없어진 것은 전에 없던 일로, 국정(國政)의 초창기에 바로잡을 겨를이 없었는데, 여러 군이 먼저 효도와 공경, 신뢰와 화목의 도를 닦는 데에 이처럼 근면하니, 이로 말미암아 나아가서 고을에서 도로, 도에서 나라로 점점 다른 사람에게 미쳐 간다면 어찌 아름다운 풍속이 융성해지고 절로 교화되는 나라가 될 징조가 되지 않을 줄 알겠는가. 그렇지 않고 유명무실하거나 시작은 있되 끝이 없다면 여러 군들에게 수치일 뿐만 아니라, 태하당에게도 누가 됨이 적지 않을 것이니, 힘써야 할 것이다.나는 태하당과 어렸을 적부터 서로 알고 지내는 사이였고, 늙어서는 더욱 친하게 지냈기에 그 일을 기쁘게 듣고서 계안의 서문을 지었다. 古者, 治隆於上, 俗美於下, 人不待勸而自化於善. 降及後世, 政俗俱頹, 民之興行者鮮矣. 於是有志者憂之, 思所以導率感發之方, 若呂藍田德業相勸之鄕約是也. 自鄕約而畧之以爲契, 則有近世之文會契、爲親契、尊師契、睦婣契. 蓋皆欲交修而歸善, 亦盛事也. 若今日之台下堂契案者, 尤言足聽聞也. 台下居士 沈觀國, 以敬齋門人, 淵翁私淑, 隱居無求, 愛好人倫. 人多服其德善. 迺者鄕黨年少數十人, 就其子姪、族戚, 相與醵金樹契, 助暮年扶養之資, 齊會堂中, 服膺格言, 作自身持守之符. 凡入玆契者, 在子姪則爲爲親, 在門徒則爲尊師, 在族戚則爲睦婣, 其餘則謂敬長之契亦可, 總其講論敍禮而言, 則亦可謂文會契也. 行一物而衆善備, 是固瀛南風俗之美. 然非台下之德, 烏能致此? 顧今西潮東盪, 彛倫喪敗, 前所未有, 國政草創, 不遑救正. 諸君能先修孝敬信睦之道, 其勤如此. 由此而進, 漸及於人, 自鄕而省, 自省而國, 安知不爲兆於隆美自化之域乎? 不然而存名去實, 有始無終, 不惟諸君之可恥, 其爲累於台下也不少矣, 勉之哉. 余與台下少相知而老益親, 喜聞其事而序其案. 여남전(呂藍田)이 …… 향약(鄕約) 여남전은 중국 북송(北宋) 때의 학자인 여대림(呂大臨, 1046~1092)으로, 그는 산서성(山西省) 남전현(藍田縣)에 살면서 자신의 형제인 여대충(呂大忠)ㆍ여대방(呂大防)ㆍ여대균(呂大鈞)과 함께 향촌(鄕村)을 교화하고 선도하기 위해 《여씨향약(呂氏鄕約)》을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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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성만【동필】에게 주는 서문 【뒤에 동건으로 개명하였으며, 자는 중일이다. 병인년(1926)】 贈蔡聖萬【東必】序 【後改名東建, 字中一. 丙寅】 내가 일찍이 천하의 물을 살펴보건대, 졸졸 흐르는 샘물이나 콸콸 쏟아지는 계곡물부터 도도하게 흐르는 강물과 세차게 흐르는 하수에 이르기까지 온갖 물줄기와 물갈래가 혹 멀리 돌아 흐르기도 하고 혹 가까이 곧바로 흐르기도 하면서 비록 각기 다르게 흐르지만, 그 귀착한 곳을 궁구해 보면 천 번 만 번 휘돌고 굽이져 흐르되 반드시 동쪽 바다로 모여들었다.또 일찍이 옛적의 성현(聖賢)과 절열(節烈)을 살펴보건대, 세상의 모든 험담과 칭찬, 영광과 치욕, 기뻐할 만한 것과 슬퍼할 만한 것, 상도(常道)와 변도(變道)에서부터 도랑에 버려지고 목숨을 잃은 것에 이르기까지 비록 만나는 바가 만겁토록 같지 않다 하더라도 의리에 귀의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대체로 만 번 굽이져도 반드시 동해로 흐르는 것은 물의 본성이고, 만겁토록 의리에 귀의하는 것은 선비의 분수이다.아, 물은 사사로운 정이 없는 사물이기에 아래로 흘러 나아가고 동해로 귀의할 때에 스스로 주저함이 없고, 스스로 그침이 없이 자연의 본성을 따라 쉽게 흘러간다. 그런데 사람은 그렇지 않아서 밖으로는 기호와 안일에 이끌리고, 안으로는 지혜와 기교, 계략과 요량이 발생하기 때문에 천사만종(千駟萬鍾)116)과 도거정확(刀鋸鼎鑊)117)이 앞에 번갈아 다가올 때에 평탄한 한 줄기의 바른 길을 어리석게도 보지 못하니, 이것이 어짊과 절개를 얻기 어려운 이유이다.돌아보건대, 지금은 천하가 혼란하여 이욕(利欲)이 하늘까지 넘쳐나고, 의리가 땅을 쓴 듯 사라져서 마침내 자식이 번번이 부모를 버리고, 신하가 번번이 나라를 팔며, 제자가 번번이 스승을 모함하는 것을 마치 다반사처럼 여기고, 사람들도 또한 태연하게 바라보면서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지경에 이르렀다. 세상의 도가 이런 지경에 이르렀으니 어찌 한심하지 않겠는가.채군 성만(蔡君聖萬)의 거처가 송정천(松汀川) 가에 있는데, 대저 송정(松汀)의 냇물이 줄기차게 장구히 흘러 밤낮을 쉬지 않고 동진강(東津江)118)으로 들어가니, 성만이 항상 이 냇물을 따라 거닐고, 이 냇물에서 씻으면서 사물을 보고 감흥을 일으키는 바에 어찌  스승으로 삼아 본받을 것이 없겠는가. 바라건대 성만은 홀로 가는 뜻을 떨쳐 이 일을 향해 전력하여 의리와 이욕을 매우 미세한 부분까지 정밀하게 변별하고, 그릇됨과 올바름을 칼로 자르듯 구분하여 만겁토록 의리에 귀의한 현절인(賢節人)이 되게나. 나는 이미 바다에서 반드시 동쪽으로 흘러가는 물을 보았고, 또 사람에게서 고상한 선비인 성만을 보았으니, 성만이여! 힘쓸지어다. 余嘗觀乎天下之水矣. 涓涓㶁㶁之泉澗, 以至滔滔浮浮之江河, 支支派派, 或遠或近, 雖各不同, 究其歸, 則千回萬折, 而必朝宗于東海. 又嘗觀乎古之賢聖節烈人矣. 凡世間毁譽榮辱, 可欣可慽, 若常若變, 以至於溝壑喪元, 雖所遭萬劫之不同, 莫不歸乎義. 蓋萬折必東, 水之性也; 萬劫歸義, 士之分也. 嗚呼, 水無情私之物, 其就下而歸東也, 無自沮焉, 無自息焉, 順其性之自然而易如也. 至於人則不然, 嗜好安佚牽乎外, 智巧計量生乎內. 故當其千駟萬鍾、刀鋸鼎钁之迭臨乎前也, 坦然一條正路, 矇不見焉. 此其賢與節之難得者乎. 睠今天下淆亂, 利欲之滔天, 義理之掃地, 乃至於子輒棄父, 臣輒賣國, 弟輒陷師, 若茶飯然, 而人亦恬視不怪. 世道至此, 寧不寒心?蔡君 聖萬之居在松汀川上. 夫松汀之水, 滾滾長逝, 不舍晝夜, 入于東津. 聖萬之所常沿斯濯斯者, 覽物起興, 豈無所師法者乎? 願聖萬奮獨往之志, 專力向此事, 銖精乎義利之辨, 刀截乎邪正之分, 作萬劫歸義之賢節人也. 吾旣於海而見必東之水矣, 又將於人而見聖萬之高士也. 聖萬乎勉哉. 천사만종(千駟萬鍾) 많은 녹봉을 비유하는 말로, 말 네 마리를 사(駟)라 하고, 쌀 6석(石) 4두(斗)를 1종(鍾)이라 한다. 도거정확(刀鋸鼎鑊) 원문의 '鼎钁'은 문맥에 근거하여 '钁'을 '鑊'으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도거정확은 죄수에게 형벌을 가하거나 사형을 시킬 때 사용하는 기구로, 도(刀)는 궁형(宮刑)에 쓰는 칼이고, 거(鋸)는 월형(刖刑)에 쓰는 톱이며, 정확(鼎鑊)은 사람을 삶아 죽이는 가마솥이다. 동진강(東津江) 전라북도 정읍시 산외면 풍방산에서 발원하여 전라북도 남부를 북서쪽으로 흘러 황해로 들어가는 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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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군 태원【인수】에게 주는 서문 【신미년(1931)】 贈李君 台元【仁洙】序 【辛未】 주(周) 나라는 후직(后稷)과 공유(公劉)가 백성들의 생활을 넉넉하게 하고 나라를 안정시킨 지 수백 년이 지나고, 태왕(太王)과 왕계(王季)에 이르러 왕업의 자취를 닦기 시작하였으며, 문왕(文王)에 이르러 더욱 크게 성대해져서 비로소 천명을 받았다. 때문에 《시경》에서 말하지 않았는가? "주나라는 비록 오래된 나라이지만, 그 천명은 새로워졌도다."135)라고 하였다.이군 태원(李君台元)은 선대 소심재(小心齋)로부터 산오(山塢)와 남강(南岡)을 거쳐 대인(大人) 양산(陽山)에 이르기까지 모두 학식과 문장을 쌓고 몸가짐과 행실을 닦아 후대 자손이 대유(大儒)로서의 자취를 밟는 터전을 마련하였으니, 비록 집안과 나라의 차이가 있고 대소가 같지 않지만, 그 쌓아온 자취로 말하면 또한 한 집안에서 있어서 주나라에 해당한다. 태원이 만약 덕행을 성대히 쌓고 유학(儒學)을 대성하여 선조를 빛낼 수 있다면 어찌 이씨(李氏) 집안의 문왕이 될 수 없겠으며, "이씨는 비록 오래된 집안이지만, 그 덕은 새로워졌도다."라는 노래가 어찌 시인에 의해 지어지지 않을 줄 알겠는가. 내가 그대를 위해 말해 보겠다.《시경》에서 또 말하지 않았는가. "오직 이 문왕만이 조심하여 공손하고 삼가셨네."136)라고 하였고, 또 "거룩하신 문왕이여, 아, 끊임없이 공경을 밝히셨네."137)라고 하였으니, '공경[敬]'이라는 한 글자가 대체로 평생의 본령이었다.《서경》에 "문왕은 아침부터 해가 중천에 이르고 기울 때까지 밥 먹을 겨를도 없었네."138)라고 하였고, 전(傳)에 "문왕은 도를 보고도 아직 보지 못한 듯이 하였다."139)라고 하였으니, '근면[勤]'이라는 한 글자가 또 공부의 시작과 끝이었다.아, 문왕과 같은 생지안행(生知安行)140)의 성인으로도 오히려 '공경'과 '근면'이라는 두 글자를 버릴 수 없었는데, 하물며 학문하는 사람에게 있어서야 더 말할 것이 있겠는가. '공경'을 학문의 본체로 삼고, '근면'을 학문의 작용으로 삼아야 하니, '공경'이 아니면 학문을 통괄할 수 없고, '근면'이 아니면 학문을 이룰 수 없다.맹자가 "문왕을 본받으면 반드시 천하에 정사를 하게 될 것이다."141)라고 하였는데, 나도 또한 "학문하는 사람이 문왕의 '공경'과 '근면'을 본받는다면 반드시 천하에 덕을 이룰 수 있을 것이다."라고 말하겠다.태원은 진실로 학문에 근면한 사람이니, 내가 '근면'에 대해서는 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다만 '공경'은 성학(聖學)의 근본이 되는 핵심으로 쉽게 말할 수 없는 점이 있다. 그래서 그가 말을 구할 때에 '공경'과 '근면'을 함께 들어 힘쓰게 하여 어느 한 쪽에 치우지지 않게 한다. 周自后稷、公劉厚民安邦累百年, 而至太王、王季, 肇基王跡, 又至于文王而益大以盛, 始受天命. 故《詩》不云乎? "周雖舊邦, 其命維新. " 李君 台元, 自先世小心齋以下, 歷山塢、南岡, 而至其大人陽山, 皆種學績文, 飭躬修行, 以基後昆大儒之迹. 雖家國有殊, 大小不同, 語其所以積累者, 則亦人家周邦也. 台元如能盛其德大其儒, 用光祖先, 則豈不得爲李門之文王? 而李雖舊家, 其德維新之頌, 安知不作於詩人乎? 吾請爲子申之. 《詩》又不云乎? "維此文王, 小心翼翼. " 又云: "穆穆文王, 於緝熙敬止. " 敬之一字, 蓋其平生本領. 《書》曰: "文王自朝至于日中昃, 不遑暇食. " 傳曰: "文王望道, 如未之見. " 勤之一字, 又其始終工夫. 噫, 以文王生知安行之聖, 猶舍不得敬、勤二字, 况在學者乎? 敬以爲其體, 勤以爲其用, 非敬無以統之, 非勤無以成之. 孟子曰: "諸侯師文王, 必爲政於天下. " 吾亦曰: "學者師文王之敬、勤, 必成德於天下矣. " 台元固勤於學者, 吾不須贊, 但敬爲聖學原腦而有未易言者. 故於其有求也, 幷擧敬勤而勖之, 俾其不偏云爾. 주나라가 …… 새로워졌도다 《시경》 〈대아(大雅) 문왕(文王)〉에 보인다. 오직 …… 삼가셨네 《시경》 〈대아(大雅) 대명(大明)〉에 보인다. 거룩하신 …… 밝히셨네 《시경》 〈대아(大雅) 문왕(文王)〉에 보인다. 문왕은 …… 없었네 《서경》 〈무일(無逸)〉에 보인다. 문왕은 …… 하였다 《맹자(孟子)》 〈이루 하(離婁下)〉에 "문왕은 백성들을 볼 때에 다친 데가 있지 않은가 걱정하였으며, 도를 보고도 보지 못하는 것처럼 하였다.〔文王視民如傷, 望道而未之見.〕"라는 구절이 보인다. 생지안행(生知安行) 태어나면서부터 알고[生而知之], 편안하게 행한다[安而行之]는 말로, 성인의 자질을 뜻하는 말이다. 《中庸章句 20章》 문왕을 …… 것이다 《맹자》 〈이루 상(離婁上)〉에 "문왕을 본받으면 큰 나라는 5년, 작은 나라는 7년이면 반드시 천하에 정사를 하게 될 것이다.〔師文王, 大國五年, 小國七年, 必爲政於天下矣.〕"라는 구절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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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도형에게 주는 서문 【을해년(1935)】 贈李【道衡】序 【乙亥】 사람들은 항상 도(道)와 문장을 말하는데, 내가 생각하기에 지극한 경지에 미쳐서는 도 또한 문장이고, 문장 또한 도이니, 이것을 둘로 여기는 것은 옳지 않다. 행위가 선(善)을 다한 것을 지극한 도[至道]라 이르고, 말이 이치를 다한 것을 지극한 문장[至文]이라 이르니, 문장은 도에 근본하고, 도는 문장에 나타난다. 도가 아니면 문장이 근거할 바가 없고, 문장이 아니면 도가 밝혀질 수 없다. 그러므로 행위가 선을 다한 자는 지극한 문장을 지니고, 말이 이치를 다한 자는 지극한 도가 있다.시험 삼아 살펴보건대, 육경(六經)과 사자(四子)142)의 문장은 말이 이치를 다하였으니, 그 차례는 사계절과 같고, 그 작용은 물이나 불과 같으며, 그 앎은 귀신과 같다. 때문에 그 화려한 빛이 밖으로 드러나는 것이 해와 별처럼 빛나니, 당우 삼대(唐虞三代) 성현(聖賢)의 지극한 도가 아니면 어찌 그럴 수 있겠는가.또 살펴보건대, 한(漢)ㆍ당(唐)ㆍ송(宋)ㆍ명(明) 시대 작가들의 문장은 쟁쟁하게 울림이 있고 찬란하게 빛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이치를 다한 문장을 법으로 삼아 비교하면 도를 터득함이 없다고 말하는 것을 제외하더라도 터득함이 있다고 말하는 것도 또한 흠결이 사이사이 나와서 교훈으로 삼기 어려우니, 어찌 도가 지극하지 못해서 그런 것이 아니겠는가.나는 그래서 "양웅(楊雄)이나 왕수인(王守仁)의 문장과 같은 것은 문장이되 문장이 아니고, 창려(昌黎 한유(韓愈))나 여릉(廬陵 구양수(歐陽修))의 문장과 같은 것은 문장이되 지극하지 못하니, 천하의 지극한 문장을 구한다면 오직 육경과 사자일 뿐이다."라고 말한다. 그런데도 오늘날 문장을 배우는 자들은 오직 한ㆍ당 이후의 작가만을 사모하고, 옛 성현의 글에서 돌이켜 구하지 않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지극한 문장으로 배우지 않고, 도와 별개로 여기기 때문이다.우리 무리 중에 이군 도형(李君道衡)은 도와 문장을 배우는 자로, 두 가지가 지극한 경지에 이른 자이다. 이는 뜻이 진실한 준사(儁士)이니, 사람으로 하여금 흠모하여 숭상케 하였다. 그러나 도와 문장이 하나인 줄 모른 채 문장에서 문장을 구하고 도에서 구하지 않을까 염려되었다. 때문에 이 말을 지어 주어서 지극한 도를 얻어 행위가 선을 다한다면 말이 이치를 다한 지극한 문장이 그 가운데 있음을 알게 한다. 도에 들어가는 방법과 선을 다하는 술책은 선현의 글 속에 갖추어져 있으니, 돌아보건대 내가 비록 재주는 없지만 바라는 바가 같기에 그와 더불어 서로 힘쓰면서 일생을 마치기를 바란다. 人恒道道與文, 余謂及其至也, 道亦文, 文亦道, 二之則不是. 行盡善之謂至道, 言盡理之謂至文, 文本乎道, 道見乎文, 非道則文無所據, 非文則道無以明. 故行盡善者有至文, 言盡理者有至道. 試觀六經四子之文, 言之盡理, 其序如四時, 其用如水火, 其知如鬼神. 故其光華發於外者, 日星如也. 非唐虞三代聖賢之至道, 其何能爾? 又觀漢、唐、宋、明作家之文, 非不鏘然有聲, 燁然而光. 律之以理盡者, 舍曰無得乎道者, 其云有得者, 亦罅漏間出, 難以爲訓, 豈非道之未至而然乎? 余故曰: "若楊雄、王守仁之文, 文而非文也; 若昌黎、廬陵之文, 文而未至者, 求天下之至文, 其惟六經四子乎. " 然而今之學文章者, 惟漢、唐後作家之是慕, 不反求之於古聖賢書, 何哉? 曰學之不以至者而二之於道也. 吾黨中李君 道衡, 學道與文者而二者之至焉者. 是志誠儁士也, 令人欽尙, 尙恐不知道與文之爲一, 而求文於文, 而不求於道也. 故爲此說而贈之, 俾知得至道而行盡善, 則言盡理之至文, 在其中也. 若其入道之方, 盡善之術, 具在聖賢書中. 顧余雖不才, 所望則同, 願與之交勖而終身焉. 육경(六經)과 사자(四子) 육경은 《주역》ㆍ《시경》ㆍ《서경》ㆍ《춘추》ㆍ《예기》ㆍ《악기》를 말하고, 사자는 사서(四書), 즉 《대학》ㆍ《논어》ㆍ《맹자》ㆍ《중용》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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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화국통정변유무년표》의 서문 《中華國統正變有無年表》序 세상에서 정통(正統)이라 인식하는 것은 오직 천하를 통합한 때문이고, 그 통합이 바른지 바르지 않는지는 따지지 않는다. 어진 덕을 지닌 온공(溫公 사마광(司馬光))의 역사 기술이 이와 같고, 문장가인 동파(東坡 소식(蘇軾))의 의논이 이와 같으니, 그 나머지는 어느 겨를에 일일이 거론하겠는가. 오직 주자만이 이를 되돌려 바로잡았으니, 예를 들면 촉한(蜀漢)을 제(帝)로 삼고 위(魏)를 축출한 것이 이것이다. 그러나 여전히 다 바로잡지 못했으니, 예를 들면 진(秦)ㆍ진(晉)ㆍ수(隋)ㆍ당(唐)ㆍ송(宋)이 천하를 얻은 것이 바르지 않음에도 정통이 될 수 있었고, 동주(東周)의 임금들이 정통이 될 수 없었던 것은 무엇 때문인가?대저 《시경》에서 성정(性情)의 바름을 얻은 것을 정풍(正風)ㆍ정아(正雅)라 하고, 성정의 바름을 얻지 못한 것을 변풍(變風)ㆍ변아(變雅)라 한다. 이것을 기준으로 삼아 예를 들면 제왕이 바름으로 천하를 얻은 것을 정통이라 하고, 바름으로 얻지 못한 것을 변통(變統)이라 하니, 방정학(方正學 방효유(方孝孺))이 명명한 것과 같은 것이 당연히 바꿀 수 없는 의론이다. 이것은 비록 주자가 정한 것과는 다르지만, 실제로는 주자의 뜻을 적용한 것이니, 촉한을 제로 삼고 위나라를 축출한 것이 이것이다. 만약 《강목(綱目)》143)을 편정(編定)한 날에 명백하게 진술했다면 빙그레 웃으며 따르지 않았을 줄 어찌 알겠는가.혹자가 이르기를,"당ㆍ송과 같은 선정(善政)과 인덕(人德)으로도 또한 변통에 들어갈 수 있는 것인가?"하니, 답하기를,"바르지 않으면 비록 있더라도 매우 아니고, 인덕과 선정이 비록 일컬을 만한 점이 있다 하더라도 천하를 얻음이 이미 정대함에서 나오지 않았다면 변통에 귀착될 수밖에 없다. 이는 《시경》의 변아가 비록 현인과 군자의 충직하고 온후하며 가엾게 여기는 뜻에서 나왔다 하더라도 끝내 그 이름을 바꿀 수 없는 것과 같으니, 누가 그 이름 때문에 아울러 인덕과 선정을 취하지 않겠는가? "하였다. 공자가 말하기를, "반드시 명분부터 바로잡겠다."144)라고 하였으니, 구구한 내가 이글을 짓는 것은 이름과 호칭 사이에서 선을 권장하고 악을 징계하는 뜻을 부쳐 공자와 주자의 뜻을 체득하기 위해서이다. 世之認正統者, 惟以其統合天下, 不問其正不正. 溫公之賢德筆史如此, 東坡之文章著論如此, 餘何暇枚擧哉? 惟朱子反之正焉, 如帝蜀而黜魏是也. 然猶未盡正, 如秦、晉、隋、唐、宋之得天下不正, 而得爲正統, 東周君之不得爲正統, 何也? 夫《詩》之得性情之正者, 謂之正風、正雅, 不得性情之正者, 謂之變風、變雅. 準此而例之, 帝王之得天下以正者, 謂之正統, 得不以其正者, 謂之變統. 如方正學所名, 當爲不易之論. 此雖異乎朱子所定, 實用朱子之意, 卽帝蜀黜魏是也. 如使編定《綱目》之日, 明白陳達, 安知不莞爾而從之乎? 或曰: "以若唐、宋之善政仁德, 亦可入於變統乎? " 曰: "不正, 雖有, 甚否, 德政雖有可稱, 其得之旣不出於正大, 則不得不歸於變統. 此如《詩》之變雅, 雖出於賢人君子忠厚惻怛之意, 終難得易其名也. 誰復有以其名而幷不取其德政乎?" 孔子曰: "必也正名. " 區區之編此書者, 所以寓勸懲於名號之間而體孔、朱之意云爾. 강목(綱目) 《자치통감강목(資治通鑑綱目)》으로 사마광(司馬光)이 지은 《자치통감(資治通鑑)》을 주희(朱熹)가 강목 체제로 바꾸어 편찬한 책으로 알려져 있다. 반드시 …… 바로잡겠다 《논어집주》 〈자로(子路)〉 제3장에 "자로가 말하기를, '위나라 임금이 선생님을 기다려 정사를 하려고 하는데, 선생님께서는 무엇을 우선하시겠습니까?'라고 하자, 공자가 대답하기를, '반드시 명분을 바로잡겠다.'라고 하였다.〔子路曰: '衛君待子而爲政, 子將奚先?' 子曰: '必也正名乎!'〕"라는 내용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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