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학(李承鶴) 간찰(簡札) 8 고문서-서간통고류-서간 개인-생활-서간 閏八卄四日 父 閏八卄四日 李承鶴 李光秀 전남도청(2020년 구입 의병자료) (재)한국학호남진흥원 이승학(李承鶴)이 서울에 기거하는 아들에게 여러 가지 소식과 당부를 전한 간찰. 이승학(李承鶴)이 서울에 기거하는 아들에게 여러 가지 소식과 당부를 전한 편지이다. 편지 서두는 편지의 전달 여부와 답장을 기다린다는 말로 채웠다. 이승학은 이달 7월에 우체국으로 편지를 보내고 이후로 인편이 없어 부치지 못하고 있다가 이씨(李氏) 친구 편에 편지를 보냈는데 아직 답장이 없어 답답하다는 말을 전하며 아들 소식을 바라는 마음을 드러냈다. 이어 겨울이 깊어가는 생활은 어떠하냐며 묻고, 겨울 채비를 위해 침구류 등을 순도(順道)에게 보낸다는 말을 전했다. 다음으로 문중에서 간행 중인 것으로 짐작되는 족보(族譜)에 관한 내용이 이어진다. 족보의 진행은 어떠하며 정서(正書)는 마쳤는지 묻고, 지난번 순천(順天) 종인(宗人)의 일은 담양의 백동(栢洞) 족숙(族叔)이 변통하여 처리할 방도가 있는 것인지, 그렇지 않다면 투필(投筆)하고 물러나 후일의 구설을 면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이어 문중의 갈등과 관계된 일을 처리할 때는 더욱 신중히 하고 가볍게 넘겨서는 안 된다며 신신당부한 내용이 보이는데, 아마도 이광수가 문중의 족보 일에 관여하고 있었는데 문중에서 적지 않은 갈등이 있었던 듯하다. 이승학은 아들이 곧 볼 과거 시험을 언급하기도 했다. 다음 달에 네가 소원하던 바가 있을 것인데, 합격 여부는 운수와 관계된 것이지만 사람의 일이기에 전력하다 보면 성취할 수 있으니 기회를 놓치지 말라며 시험을 앞둔 아들의 마음을 달래주기도 했다. 아들의 안부를 두루 물은 다음 이승학은 본인의 최근 근황을 상세히 알렸다. 이달 15일에 연재(淵齋) 송병선(宋秉璿) 선생이 강회(講會)에 참석하려고 왔는데 유생(儒生)들의 참여가 적어서 강회를 열지 못하고 향음주례로 대신했다는 것, 이승학이 갑자기 찬례(贊禮)를 맡게 되었다는 것, 연재 선생을 모시고 내장사(內藏寺)를 방문했다는 내용 등을 두루 전했다. 스승이자 인척(姻戚)인 송사(松沙) 기우만(奇宇萬) 집안의 장례 일에 관한 소식도 알렸다. 장삿날이 모레 있는데, 묘소가 담양(潭陽) 용추사(龍湫寺) 부근으로 잡았으며, 내일은 상례 행차가 우리 쪽 경계를 지난다는 것이다. 그때 본인이 장례에 참석하여 역부(役夫)들에게 술을 대접할 예정이라고 하였다. 집안의 혼례 소식도 알렸다. 장성(長城) 봉덕(鳳德)으로 시집가는 딸의 우귀(于歸, 신부가 처음으로 시집에 들어가는 일) 날짜가 다음 달 27일로 정해졌는데, 기씨(奇氏) 사위를 아직 보내지 않고 있으니 무슨 연유인지 모르겠다면 속상함을 드러냈다. 이승학은 장녀를 기우만의 손자인 기낙도(奇洛度)에게 시집보냈고, 차녀는 기재(奇宰)의 손자인 기인도(奇人度)에게 시집보냈는데, 이때 언급한 신랑은 누구인지 정확히 알 수 없다. 이어 이승학은 딸을 시댁에 보내면서 준비할 물건들에 대한 걱정을 드러냈다. 특히 홍롱(紅籠)과 승혜(繩鞋, 미투리), 면구(緬具)는 서울에서 준비하려고 하여 돈이 모이면 순도(順道)와 상의하여 구할 계획이라는 말과 수침(水砧)이 팔리지 않아 갈등을 겪고 있다고 덧붙였다. 친인척과 관련된 황당한 사건에 대해 전한 내용도 확인된다. 지난달 말에 하동(河東) 횡월리(橫月里)에 사는 월초(月樵) 어른이 이곳으로 왔다가 장성(長城) 쪽으로 갔는데, 그 어른과 작별하면서 들었는데, 봉덕의 자인(子仁)이 논 판 돈 300냥을 그 아버지께 고하지도 않고 가지고 떠나버렸다는 것이다. 이 일에 관해 이승학이 당부하기를 만일 자인과 서울에서 상봉한다면 충효(忠孝)의 도리로 잘 회유하라고 전했다. 편지 하단은 보채(報債) 및 문중의 서당 등에 관한 내용, 아들이 부탁한 비용 마련에 대한 어려움, 족보의 명하전(名下錢) 문제, 윤홍(允弘) 숙질(叔姪)에 관한 당부, 본관(本官)의 수령에 관한 내용 등을 언급했다. 이 편지는 필사본으로 보인다. 편지 상단에 먹선으로 두 줄을 지운 흔적 등이 있고, 편지지 앞뒷면으로 내용이 채워진 것으로 보아 집안에서 필사한 것으로 추측된다. 또 편지 작성 일자가 '윤달 8월 24'로 적혀졌으나 내용에는 '서리의 위력이 높아지고 추위가 점점 심해진다'는 말로 보았을 때 이 편지는 여름에 작성된 것이 아닐 것이다. 아마도 몇 편의 편지 내용을 모아 수정하여 필사했을 가능성도 있다. 또 간지가 생략된 채 일자가 적혀 있어서 연도를 잘 알 수 없으나 이광수가 과거 시험을 앞두고 있다는 말과 윤월(閏月)이라는 내용 등으로 보아 1900년에 쓰인 내용으로 추측된다. 이광수는 1901년에 경의문대(經義問對) 시험으로 성균관(成均館) 박사(博士)가 되었다. 1900년은 이광수가 시험을 보았던 해이고, 이해 8월에 윤달이 들었다. 이승학(1857∼1928)의 본관은 전주(全州)로, 양녕대군의 후손이며, 자는 자화(子和), 호는 청고(靑皋)이다. 전남 담양 장전리(長田里)에서 출생하였다. 아버지는 기정진(奇正鎭)의 문인인 진사 이최선(李最善)이고, 이승학 본인도 기정진의 문하에서 배웠다. 아들 이광수(李光秀)는 송사(松沙) 기우만(奇宇萬)의 제자이다. 을미사변(乙未事變) 때 팔도에 격문을 보내어 의병을 일으키기도 했다. 문집으로 ?청고집(靑皋集)? 4권을 남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