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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계유고》 서문 【을축년(1925)】 《德溪遺稿》序 【乙丑】 맹자가 말하기를, "그 시를 외우고 그 글을 읽으면서도 그 사람을 알지 못하면 되겠는가?"라고 하였으니, 삼가 일찍이 생각건대 이미 그 사람의 어짊을 알고 있으면서 그 시와 글을 외고 읽지 않는다면 더더욱 안 될 것이다. 기억하건대, 옛적에 선인(先人 선친)의 가르침을 공경히 받들고 있었을 때에 말씀하시기를, "근래 고 덕계(德溪) 최공(崔公)은 효성이 도타운 사람이다."하셨고, 얼마 뒤 여러 장로(長老)들에게 들었을 때에도 또한 말이 한결같고 이간하는 말이 없었기에 당시 나이가 어렸음에도 마음속으로 삼가 앙모할 줄 알았다.몇 해 전에 공의 자손 경렬(暻烈)과 인렬(寅烈) 두 어른을 따라 공의 장(狀)ㆍ전(傳)ㆍ천(薦)의 글을 보고서 어린 시절에는 온청(溫凊)을 살피는 일46)에 부지런했고, 상사(喪事)와 제사에 마음과 의례가 모두 극진했으며, 백발의 노령 때에는 어린아이 때처럼 부모를 사모하는 마음이 지극했던 것이 참으로 '효성이 도타웠다'는 일컬음에 부합하였음을 자세히 알게 되었는데, 덕(德)을 아는 말에 감복하면서도 오히려 공의 글을 미처 읽지 못한 것을 한스럽게 여겼다. 그러다가 이 해 가을에 또 공의 종손 민렬(敏烈) 군을 따라 공의 시와 글을 모두 다 읽을 수 있었는데, 영탄(咏歎 시)과, 기(記), 차(箚)의 사이에 드러난 것들이 대체로 육아(蓼莪)와 풍수(風樹)47)에 관한 뜻이 많았으니, 이른바 '한 번 말을 할 때에도 감히 부모를 잊지 않는다.'라는 것처럼 공이 그런 사람이었다. 그 나머지도 또한 모두 인륜을 바로잡고 의리를 독실하게 하며, 풍속을 교화시키고 후배를 권장하는 말이었는데, 겸손하고 온화하며 간절하고 진실한 것이 사람으로 하여금 감동하여 떨쳐 일어나게 하였으니, 이른바 효자와 어진 사람의 말이 이와 같은 것인가?아, 공의 글은 적막하다고 이를 만하니, 그 저작이 또한 걸출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몸소 실천한 끝에 터득하여 다른 사람에게 미쳐가는 바탕으로 사용되었기 때문에 아내에게 모범이 되어 맹광(孟光)48)과 같은 현숙한 부인이 있고, 형제간에 우애하여 계방(季方)49)과 같은 동생이 되기 어려운 동생이 있었으니, 한 가지 의절로 공을 총괄할 수 없음이 또 분명하다. 그런데 저 높다란 관을 쓰고 패옥을 늘어뜨린 채 세상에 자신을 내세우는 자들은 그 뛰어난 의론과 풍부한 작품이 의당 세도에 도움이 있을 것 같은데, 그 귀결을 궁구하면 혹 윤리를 거스르고 도의를 해치거나 풍속을 무너뜨리고 후배를 잘못되게 하는 것을 면치 못하고 마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자신의 몸으로 실천한 데에서 터득함이 없어 학문이 진실하지 못한 때문이다.나는 공에게 통가(通家 인척(姻戚)의 후생이 되기에 서문을 짓는 일을 감히 사양하지 못하였는데, 다행히 공의 글을 읽고서 더욱 깊이 공을 알게 되었으니, 일찍이 감탄했던 바를 써서 오늘날과 훗날의 상론가(尙論家 비평가)로 하여금 시와 글을 암송하고 읽는 것이 그 사람 때문이고, 그 문장 때문이 아님을 알게 하며, 삼가 추부자(鄒夫子 맹자)의 말 밖에 숨어 있는 뜻을 드러낼 따름이다. 孟子曰: "誦其詩讀其書, 不知其人可乎?" 竊嘗以爲旣知其人之賢, 而不誦讀其詩、書, 則尤不可也. 記昔敬承先人敎, 有曰: "近故德溪 崔公, 純孝人也. " 旣而聞諸諸長老, 亦一辭而無間, 時年尙幼, 然心竊識慕矣. 年前從公之孫暻烈、寅烈二丈, 得見公狀、傳、薦文, 備知齠齔溫凊之勤、喪祭情文之盡、白首孺慕之至, 允合純孝之稱, 而服知德之言矣. 猶以未及讀公之文爲恨, 是歲秋, 又從公從孫敏烈君, 盡得公詩若文而讀之. 其發於咏歎、記、箚之間者, 大抵多蓼莪、風樹之意. 所謂一出言而不敢忘父母者, 公其人焉. 其餘亦皆正倫篤義, 化俗獎後之言, 而謙和懇實, 令人感發, 所謂孝子仁人之辭者此耶? 噫, 公之文, 可謂寂寥矣, 其作亦非傑然者. 然惟其得於躬行之餘, 用於及人之地. 故刑于而有孟光之賢, 友于而有季方之難, 其不可以一節蔽公也又審矣. 彼岌冠委佩, 標榜乎世者, 其偉論豊作, 宜若有裨益世道, 而究其歸, 或不免乖倫害義, 敗俗誤後而止, 何哉? 無得乎躬行而學之不實故也. 余於公爲通家後生, 不敢辭弁卷之役. 旣幸讀公之文而知公益深, 且書所嘗感慨者, 使今與後尙論家, 知誦讀詩書之以其人, 不以其文, 竊以發鄒夫子言外之意云爾. 온청(溫凊)을 …… 일 부모님을 모시는 예절로, 추위와 더위에 손상되지 않도록 겨울에는 따뜻하게, 여름에는 시원하게 해드리는 것을 말한다. 육아(蓼莪)와 풍수(風樹) 육아는 《시경》 〈소아(小雅)〉의 편명으로, 부모가 세상을 떠난 뒤 생전에 효도하지 못한 슬픔과 추모를 노래한 것이며, 풍수는 어버이가 세상을 떠나 다시는 봉양할 수 없는 슬픔을 말한 것으로, 《한시외전(韓詩外傳)》에 "나무가 고요하고자 하나 바람이 그치지 않고, 자식이 봉양하고자 하나 어버이가 기다리지 않는다.〔樹欲靜而風不止, 子欲養而親不待.〕"라는 말에서 유래하였다. 맹광(孟光) 후한(後漢) 때 양홍(梁鴻)의 아내로, 현숙한 아내의 모범이 되는 인물이다. 본디 부유한 집안 출신이었으나 학문을 좋아하고 벼슬을 구하지 않는 남편을 따라 패릉산(覇陵山)에 은둔하며 검소한 생활을 하였으며, 남편을 지극히 공경하여 밥을 지어 남편에게 올릴 때마다 밥상을 자기 이마의 높이까지 들어 올렸다는 거안제미(擧案齊眉)의 고사가 전해진다. 《後漢書 卷113 逸民列傳 梁鴻》 계방(季方) 동한(東漢) 때 진식(陳寔)의 둘째 아들인 진심(陳諶)의 자로, 그의 형 진기(陳紀 원방(元方))과 함께 총명하고 효성스럽기로 유명하여 "원방은 아우가 되기 어렵고, 계방은 형이 되기 어렵다.〔元方難爲弟, 季方難爲兄.〕"라는 난형난제(難兄難弟)의 고사가 전한다. 《後漢書 卷62 陳寔列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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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초유고》50) 서문 【신사년(1941)】 《瑞樵遺稿》序 【辛巳】 선비들이 빈흥(賓興)51)의 법이 폐지되면서부터 모두 과거를 통해 벼슬에 나아갔고, 도를 지켜 자중하는 자는 사람들이 도학(道學)이라 지목하였기 때문에 선비들에게 '도학'과 '과학(科學)'이라는 다른 칭호가 있게 되었다. 그러나 도를 행하고자 하는 자는 과거가 아니면 그 지위에 나아갈 수 없기 때문에 주자(朱子)는 심지어 오늘날과 같은 세상에 처한다면 설사 공자께서 다시 태어나시더라도 과거에 응시하는 것을 면하지 못할 것이라 여기며 말하기를, "급제 여부를 생각 밖에 둘 수 있다면 또한 허물이 되지 않는다."라고 하였고, 정자(程子)는 또 배우는 사람으로 하여금 시간을 나누어 과거 공부를 하도록 하면서 말하기를, "공부에 방해가 되는 것을 근심하지 말고, 뜻이 빼앗길까 근심하라."고 하였다. 그렇다면 선비가 진실로 뜻을 빼앗기지 않고, 바깥 사물에 얽매이지 않을 수 있다면 괜찮은 것이니, 인물을 논하는 자들이 굳이 '도학'과 '과학'의 칭호에 구애되어 우열을 가릴 필요는 없을 것이다.내가 근고(近故)의 선비를 보건대, '과학'으로 이름이 나면서도 '도학'의 실제가 있는 사람은 서초 선생(瑞樵先生) 이공(李公)이 그런 사람일 것이다. 공은 학문이 이미 뛰어났고, 친족이 또 현달하였으니, 만약 조금만 뜻을 굽히고 세속을 따랐다면 지름길로 벼슬에 나아가 한자리를 차지할 여지가 없는 것도 아니었고, 높은 점수로 과거에 급제하는 것이 쉽지 않은 일도 아니었다. 그럼에도 도리어 벼슬을 구하는 것을 엄격하게 단절한 채 시종 한결같은 마음으로 절의를 지키며 백발의 노령에 이르도록 얻은 적이 없었다. 사람들이 혹 나이를 올리는 것[加年]으로 도모할 것을 권하면 성난 목소리로 말하기를, "내가 누굴 속이겠는가? 하늘을 속이겠는가?"라고 하였으니, 이것이 어찌 허물이 될 만큼 뜻을 빼앗기지 않아서 '도학'을 하는 데에 부끄러움이 없는 것이 아니겠는가.오직 마음에 보존한 것이 이와 같았다. 그러므로 발현한 언사도 또한 이에 걸맞았으니, 일찍이 향시(鄕試)에 장원으로 합격하였을 때에 시험을 주관했던 사람이 "공의 문장은 학문 속에서 나온 것이다."라고 하였고, 전재(全齋) 임문경공(任文敬公 임헌회(任憲晦))은 공이 지은 유소(儒疏)를 보고 말하기를, "의리가 명백하니, 과거를 보는 유생의 말투가 아니다."라고 하였다. 그 행한 일은 어버이를 섬겨 상사(喪事)와 제사의 예절을 다한 것과 학문을 강론하여 후배의 선비를 성취시킨 것, 중화를 존숭하여 만동묘(萬東廟)를 복원할 것을 상소로 청한 것, 사직을 지키기 위해 병인년에 의병을 일으킬 것을 도모한 것들이 또 모두 도의상의 일 아닌 것이 없었다. 이와 같은데도 공을 '과학'의 선비라고 일컬을 뿐이라면 인물을 평론하는 공이 아닐 것이다.아, 지금 이 유고는 과거 문장 이외에 공이 평소 저술한 것들을 편찬한 것이니, 나의 고루함으로 어찌 감히 그 글을 알겠는가. 나 또한 "의리가 명백하고 학문 속에서 나왔다."라고 말한 것은 당시 공에 대한 평론과 같을 뿐이고, 교지에 응하여 바친 〈삼정책(三政策)〉은 식자들이 공이 도를 행하는 방법들이 모두 여기에 있다고 여기면서 당시에 사용될 수 없었던 것을 탄식하였다.아, 공의 덕행과 학문으로 일찍이 당대 유림의 종사에 가탁하여 스스로 일컫지 않았기 때문에 공을 아는 사람이 드물었다. 이것이 비록 한스럽게 여길 만한 것 같지만 이름과 실상이 서로 부합하지 못한 지 오래되었으니, 이 때문에 군자는 차라리 실상이 있고 이름이 없기를 바랄지언정 실상이 없이 이름만 남아 있는 것을 매우 부끄럽게 여겼다. 그런데 공은 이름 이외의 실상이 있으니, 이는 매우 귀하게 여길 만한 것이다. 무엇을 근심하겠는가. 나는 그래서 공의 손자 서산(瑞山) 어른 이풍호(李灃鎬)와 증손 이한응(李漢膺)이 서문을 청함에 다만 위와 같이 공을 논하여 세상 사람들이 도학을 자처하되 누가 됨을 면치 못하고, 명예와 이익에 그 뜻을 빼앗겨서 하늘과 사람을 속이는 지경에 이르는 것을 경계하고자 한다.공의 휘는 희석(熙奭)이고, 자는 주보(周輔)이며, 전의(全義) 사람이다. 8세조(八世祖) 문정공(文貞公) 석탄 선생(石灘先生 이신의(李愼儀))은 나라의 저명한 신하였고, 문과에 급제하여 승지를 지낸 고조 이엽(李爗)은 한 시대에 중망을 받았으니, 공은 이미 위로 계승할 선조가 있고, 지금 이서산과 이한응이 행의(行義)로 가문의 대를 이을 수 있으니, 또한 아래로 전할 후손이 있다. 아! 성대하다. 士自賓興之法廢, 皆由科擧出身, 其守道自重者, 則人以道學目之. 故士乃有道學科學之異稱. 然欲行道者, 非此無以進乎其位. 故朱子至謂居今之世, 使孔子復生, 不免應擧, 而曰: "得失置之度外, 亦不累也. " 程子則又使學者, 分治擧業, 而曰: "不患妨功, 惟患奪志. " 然則士苟能不奪志, 爲累於外物, 斯可耳. 論人者, 不必拘於道、科之稱, 而有所軒輊也審矣. 以余觀於近故之士, 以科學名而有道學實者, 惟瑞樵先生 李公其人歟. 公學旣優而族又顯, 如使少屈其志以徇俗, 則席藉蹊徑, 非無地也, 高占嵬捷, 非不易也, 乃嚴絶干售, 終始一節, 以至老白首無得. 人或勸以加年以圖, 則厲聲言: "吾誰欺? 欺天乎? " 斯豈非不奪志爲累, 而無愧其爲道學者乎? 惟其存諸心者如此, 故發之爲辭亦稱是. 嘗首選鄕試, 主試者謂: "公文從學問中來. " 全齋 任文敬公見公所製儒疏曰: "義理明白, 非科儒口氣. " 其行之爲事, 則事親而盡喪祭之禮、講學而成後進之士、尊華而疏請復萬東之廟、衛社而謀起丙寅之旅, 又皆罔非道義上事. 如是而稱公爲科學之士已者, 非月朝之公也. 今此遺稿, 編公平日功令外著作者. 以余固陋, 何敢知其文? 亦惟曰"義理明白, 從學問中來"者, 如當日公評已矣. 至於應旨所獻〈三政策〉, 識者謂公行道之具在此, 而歎時不能用焉. 嗚呼, 以公德學未嘗託當世儒宗以自名. 故知之者鮮. 雖若可恨, 然名實之不相副也久矣. 是以君子寧欲有實而無名, 深恥實去而名存. 公乃有名外之實, 則是甚可貴者, 庸何病也? 余故於公之孫瑞山丈 灃鎬、曾孫漢膺之請弁文也, 特論公如右, 欲以警夫世之自居以道學而不免累, 名利奪其志, 以至於欺天、人者. 公諱熙奭, 字周輔, 全義人. 八世祖文貞公 石灘先生爲國朝名臣. 高祖文科承旨爗, 望重一世. 公旣上有所承. 今瑞山、漢膺以行義能世其家. 亦下有所傳. 於虖盛哉. 서초유고 조선후기 학자 이희석(李熙奭, 1820~1883)의 시가와 산문을 엮어 시문집. 1941년 이희석의 증손 이한수(李漢秀)ㆍ이한섭(李漢燮) 등이 편집·간행하였다. 권두에 김택술(金澤述)의 서문과 권말에 이한수의 발문이 있다. 2권 1책이고, 석인본이다. 빈흥(賓興) 빈객으로 예우한다는 뜻으로, 훌륭한 인재를 천거하는 제도이다. 주(周)나라 때에 향대부가 소학(小學)에서 어질고 능력 있는 인재를 천거할 때 그들을 향음주례(鄕飮酒禮)에서 빈객으로 예우하며 국학에 올려 보낸 것에서 유래하였다. 《周禮地官 大司徒》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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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암유고》 서문 【경오년(1930)】 《省菴遺稿》序 【庚午】 옛적에 우리 구산 선사(臼山先師 전우(田愚))께서 '심을 작게 여기고 성을 존숭한다.[小心尊性]'는 것으로 가르침과 배움의 주요 핵심을 만드시고, 이내 대중들에게 크게 부르짖어 말씀하시기를, "성이 스승이고, 심이 제자이다."라고 하시자, 당시 심을 종주로 여기는 제가(諸家)들이 거의 나라 안에 널리 퍼져 있었는데, 그 학설을 듣고 크게 놀라고 조금 괴이하게 여기지 않는 사람이 드물었다. 오직 문하의 선비들만이 믿고 복종하였으며, 배움의 경지에 따라 또한 얕고 깊음의 구분이 있었는데, 지금 《성암유고(省菴遺稿)》을 보건대, 독실하게 믿고 기쁘게 복종한 사람으로 김공 용선(金公容璿)만한 사람이 없으니, 성암은 그의 호이다.무릇 성은 본말이 순전한 선(善)이고, 심은 근본이 선하지만 말단이 간혹 선하지 않다. 때문에 성을 근본으로 하면 성인이 되고, 심을 근본으로 하면 석씨(釋氏 부처)가 되니, 이것이 정도와 이단의 큰 판별이 된다. 그러나 성은 순수하고 심은 맑아서 색상을 혼동하기 쉽기 때문에 '심과 성은 동일한 물건이다.[心性一物]'라는 설이 있게 되었고, 성은 작위(作爲)가 없고 심은 작위가 있어 운용이 심에 달려 있기 때문에 심지어 '심은 군주이고 성은 백성이다.[心君性民]'라는 설까지 있게 되었으니, 본디 이치를 보는 것이 투철하지 않으면 이러한 요결을 세울 수 없고, 공부가 정밀하지 않으면 이러한 요결을 믿을 수 없다.대체로 공은 어려서부터 과거 문장을 익혀 용을 잡고 여주(驪珠)를 얻는 데52) 그보다 앞선 사람이 없었지만, 만년에 실제적인 학문에 뜻을 두어 일찍이 지었던 과거 문장을 모두 불태우고, 예물을 안고 선사를 뵈었다. 한번 심과 성에 관한 설을 듣고서는 말을 하자마자 깊이 이해하였고, 물러나 서신과 차자의 사이에 발론한 것들은 '심을 작게 여기고 성을 존숭한다.'와 '성이 스승이고 심이 제자이다.' 등의 뜻을 드러내 밝히지 않는 것이 없었으며, 원고 속에 나타난 것들이 태반이 모두 이 학설에 관한 것들이었으니, 이로 볼 때 공의 타고난 자질과 총명함이 남보다 훨씬 뛰어난 점이 있음을 속일 수 없다. 만약 공이 어려서부터 도학을 추구하고, 혹 하늘이 긴 수명을 빌려주었다면 반드시 견해가 더욱 밝아지고, 의론이 더욱 적절하여 비단 원고에 실린 것이 단지 지금과 같을 뿐만이 아니었을 것이니, 비록 오직 선사에게만 전해져 오는 하나의 정통을 계승하고, 그것에 의거하여 心을 종주로 여기는 이단의 의론을 옛사람의 이른바 '말끔하게 없앴다'는 것처럼 배척할 수 없을 것이라 이르더라도 나는 믿지 않는다.공의 아들 김인기(金仁基)가 공의 원고를 차례대로 편집하고 한마디 말을 하여 도와 줄 것을 청하니, 나는 실로 글재주가 없기에 공의 시와 글 등 여러 작품에 대해 망령되이 논찬(論贊)을 둘 수 없었고, 단지 심ㆍ성의 단안을 이 편집의 총괄적인 요지로 여겼기 때문에 책머리에 그 대체를 특별히 기록할 따름이다. 昔我臼山先師, 以小心尊性, 作敎學主腦, 乃大呼於衆曰: "性爲師而心爲弟也. " 時則心宗諸家, 幾遍域中, 聞其說, 鮮不大驚而小怪者, 惟及門之士信服, 而隨學所至, 亦有淺深之分矣. 今觀《省菴遺稿》, 其篤信而悅服者, 莫若金公容璿焉, 省菴公之號也. 夫性者, 本末純善也; 心者, 本善而末或不善也. 故本性則爲聖人; 本心則爲釋氏. 此正道異端之大判也. 然性粹然而心瑩然, 色相易混, 故乃有心性一物之說焉. 心有爲而性無爲, 運用在心, 故至有心君性民之說焉. 自非見理透徹, 不能立此訣, 非用功精密, 不能信此訣矣. 蓋公早事公車, 屠龍探驪, 人莫或先, 晩志實學, 悉焚曾著功令文, 懷贄謁師, 一聞心、性之說, 輒言下深會, 退而發於書箚之間者, 無非著明小心尊性、性師心弟之旨, 而其見於稿中者, 太半皆此說也. 是其天資穎悟之有大過人者, 不可誣矣. 若使公早年求道, 或天假遐齡, 必其見益明, 論益切, 不但如今載稿者而已. 雖謂之不足以承先師單傳一統, 而據以斥心宗異論, 若古人所謂廓如也, 吾不信也. 公子仁基編次公稿, 請一言而相之. 余固不文, 其於詩文諸作, 不能妄有論贊, 但以心、性之案, 爲是編總旨也, 故特識其大者於卷首云爾. 용을 …… 데 과거 시험에 필요한 문장이나 시문을 짓는데 기교가 뛰어남을 비유하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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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해황씨세적》 서문 【을유년(1945)】 《平海黃氏世蹟》序 【乙酉】 《예기》에서 말하기를, "선조에게 선한 행실이 있는데도 알지 못하는 것은 밝지 못한 것이고, 그것을 알면서도 전하지 않는 것은 어질지 못한 것이다."53)라고 하였고, 또 말하기를, "자신의 이름이 선조 다음에 있는 것은 순종함이요, 후세에 밝게 보여 주는 것은 가르침이다.54)"라고 하였으니, 대체로 선조의 선한 행실을 칭송하고 찬양하여 천하에 밝게 보이는 것은 진실로 효이거니와 그 선한 행실을 본받아서 몸을 정숙하게 하고 후손에게 전하는 것은 더욱 그 효를 드러내는 것이다.무릇 본받을 만한 선한 행실은 본디 예로부터 성현(聖賢)이 있지만, 멀지 않고 가까우며 소원하지 않고 친밀하여 취하는 데에 어렵지 않은 사람으로 또 누가 그 선조와 같겠는가. 이것이 옛적 이윤(伊尹)과 주공(周公)이 임금에게 고할 때마다 걸핏하면 탕(湯)과 문무(文武)를 일컬었던 이유이고, 오늘날 황군 건익(黃君鍵翼)이 《세적》을 만든 이유이다. 황씨의 문헌이 나라 초기부터 근세에 이르기까지 끊어지지 않은 것은 참으로 훌륭한 일이거니와 군이 지(誌)ㆍ갈(碣)ㆍ장(狀)ㆍ서(序)에 있는 선한 행실을 기록하여 빠짐없이 합쳐서 한 번 보면 훤히 알 수 있게 한 것도 또한 부지런한 일이었다.아, 인간의 어떤 세상에 경전이 나라를 망친 도구가 되고, 유가의 무리들이 사람에게 해를 끼치는 물건이 되어 꾸짖음과 욕이 산처럼 쌓인 적이 있었던가? 생존해 있는 아버지와 할아버지를 들어 아는 것이 없다고 이미 배척하였으니, 오랜 세월이 지난 선대를 배척하는 데에 무슨 어려움이 있겠는가. 군은 이러한 때에 경전과 유학을 생각했던 조상을 사모하고 본받는 데에 부지런하였으니, 이것이 세속 사람은 어질지 못하고 밝지 못한데다 순종하지 못하고 가르치지 못하여 불효가 되고, 군은 어질고 밝은데다 순종하고 가르쳐서 효가 될 수 있는 이유이다.이른바 "세상 사람은 떳떳함이 없고, 서군(徐君)은 떳떳함이 있다."55)는 것을 나 또한 말하니, 황씨의 후손되는 사람들이 어찌 편집의 뜻을 체득하여 떳떳함이 있는 도에 힘쓰지 않겠는가. 게다가 우리 조정은 중세 이후로 단지 벌열(閥閱)과 문화(文華)56)만을 서로 숭상하고 내실이 없었으니, 이것이 멸망을 취하고 꾸짖음과 욕을 가져오게 된 이유이다. 만약 "관습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이 편찬으로 남들보다 뛰어남을 구하려 했다."라고 말한다면 나는 군에게 결단코 이러한 마음이 없음을 알고 있으니, 자신의 몸으로 보존하기를 바란다. 《記》曰: "先祖有善而不知, 不明也; 知而不傳, 不仁也. " 又曰: "身比焉, 順也; 示後世, 敎也. " 蓋稱揚先祖之善, 明著天下, 固孝也, 而取則其善, 淑身而裕後, 則尤見其孝. 夫善之可則, 固有從上聖賢, 然不遠伊邇, 不疎伊親, 取之不難, 又孰若其祖乎? 此昔之伊、周所以告君動稱湯、文而今日黃君 鍵翼《世蹟》之所由作也. 黃氏文獻, 自國初至于近世而不絶, 固盛矣. 君於紀善之誌、碣、狀、序, 聯輯無遺, 一覽瞭然, 亦勤矣. 嗚呼, 人間何世, 經傳爲亡國之具, 儒流爲誤人之物, 詬罵之積山如也? 生存之父祖, 已斥以無聞知, 則何有於已久之先世乎? 君乃以此時, 惟經惟儒之祖, 是慕是則之勤. 此世俗所以不仁明不順敎爲不孝, 而君得爲仁明順敎而孝者也. 所謂世人無常而徐君有常者, 吾亦云爾. 爲黃氏後進者, 盍體編輯之意, 勉有常之道乎? 抑我朝中世以降, 徒以閥閱文華相尙而無其實. 此所以取滅亡而來詬罵者. 如曰: "不免慣習, 將以是編求多于人. " 則吾知君之決無是也, 請以身保之. 선조에게 …… 것이다 《예기》 〈제통(祭統)〉에 보인다. 자신이 …… 가르침이다 《예기》 〈제통(祭統)〉에 보인다. 세상 …… 있다 서군은 삼국 시대 위(魏)나라의 서막(徐邈)을 가리킨다. 당시 사람들이 권력자의 취향이나 사회 풍조에 따라 변하였지만, 서막은 평소의 생활 방식을 유지하였는데, 진(晉)나라 노흠(盧欽)이 평하기를 "세상 사람들은 떳떳함이 없고, 서공은 떳떳함이 있다.〔世人之無常, 而徐公之有常也.〕"라고 하였다. 《三國志 卷27 魏書 徐邈傳》 벌열(閥閱)과 문화(文華) 벌열은 나라에 공로가 많고 벼슬이 성대한 것을 말하고, 문화는 내실이 없이 외면만 화려한 것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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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심재유고》57)의 서문 【열재 소 어른58)을 대신해서 지음. 무인년(1938)】 《小心齋遺稿》序 【代悅齋 蘇丈作. 戊寅】 글이 세상에 도움이 될 수 없다면 비록 많다고 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나는 동문 소심재(小心齋) 황공(黃公)이 남긴 글에서 대략 느낀 점이 있다. 대체로 천지 사이에는 음(陰)과 양(陽)이 있으니, 양이 성장하면 음이 소멸하고, 음이 성장하면 양이 소멸한다. 성인께서는 이것을 군자와 소인의 진퇴에 비유하여 《주역》의 태(泰) 괘와 비(否) 괘에서 둘로 나누어 상대적으로 말하면서 음을 억제하고 양을 부양하는 뜻을 곡진하게 다하였으니, 후세를 걱정하는 마음이 지극하다고 이를 만하다. 그러한즉 성인의 뜻을 체득하여 의리(義理)를 강론하고 인사(人事)를 논할 때에 공정함을 숭상하고 사사로움을 제거하는 것과 정도를 지키고 사도를 물리치는 것, 선을 좋아하고 악을 미워할 수 있는 것들은 모두 세상을 돕는 글이 될 수 있을 것이다.공은 강학(講學)에 전심한 60년 중에 간재(艮齋) 전 선생(田先生)을 스승으로 섬긴 것이 거의 4분의 3이나 된다. 무릇 학문의 요체 다섯 가지59) 가운데 독실하게 행하는 것이 한 가지를 차지하고, 학(學)ㆍ문(問)ㆍ사(思)ㆍ변(辨) 네 가지는 모두 변별하는 일로 앎을 진실하게 하는 것이니, 앎이 진실하기 때문에 행함이 독실한 것이다. 이것이 공성(孔聖 공자)의 종지(宗旨)이다.선생의 학문은 이러한 종지를 터득하였다. 근원을 말하면 성리(性理)를 근본으로 주요 핵심을 삼아서 겉으로 존숭하되 속으로 폄하하는 심종(心宗)을 변박하였다.60), 담당한 일을 말하면 종신토록 스승에 대한 윤리를 보호하여 겉으로 칭찬하되 속으로 기롱하는 가뢰(嘉誄)를 변박하였다.61) 그 나머지 의리를 강론하고 일을 논한 것들도 이에 걸맞지 않은 것이 없었다. 이것이 모두 보호하고 물리치며 좋아하고 미워하는 데에 그 마음을 공변되게 하여 세상을 근심하고 돕는 것이 되는 이유이다.공의 학문은 또 선생의 요지를 얻었고, 아울러 공변된 마음을 얻었으니, 명칭이 애매모호하고 형상이 다른 천지의 이(理)와 기(氣), 인물의 심(心)과 성(性)에 대해 모두 학ㆍ문ㆍ사ㆍ변의 공부를 이미 다하여 기어코 분명하지 않으면 그만두지 않았고, 가부(可否)에 관계된 의리나 시비(是非)에 연관된 일을 논할 때에는 못과 쇠를 자르듯 더욱 분명하여 물과 진흙이 뒤섞인 것과 같은 애매모호한 태도가 없었다.사문(斯文)의 변고가 문하 내에서 나왔을 때에는 사는 곳이 가깝고 안면이 친숙한 이들의 사사로운 정을 버리고 천 리 밖의 교유가 소원한 이들의 공정한 의론에 응하여 단호하게 삿된 설을 물리쳤다.62) 이에 좋아하고 미워하는 것에 합당함을 얻은 공 때문에 사람들이 모두 스승을 무함하고 문고(文藁)를 어지럽힌 자들의 죄를 알게 되어 시비가 크게 진정되었다. 이것으로 양을 성장시키고 음을 소멸하는 천도를 돕고, 양을 부양하고 음을 억제하는 성인의 뜻을 체득하여 저 진실하게 알고 독실하게 행하는 학문의 요지를 떨어뜨리지 않았으니, 공의 글은 세상에 도움이 될 수 있다고 말하는 데에 참으로 이견이 없고, 때가 마침 그러했기 때문에 공효가 더욱 드러났다.공은 집안에서의 행실이 지극히 순박하였고, 마음을 보존하고 성찰함이 정밀하여 무릇 논하고 저술한 것들이 모두 마음으로 얻은 것에 근본을 두었으며, 글을 지음에 공교롭게 다듬지 않고 곧바로 자기의 생각을 쏟아냈으니, 이른바 "말은 뜻이 통하면 될 뿐이다."63)는 것이 이러한 것이다. 무함을 변박한 글은 마치 대나무를 쪼개고 병에 든 물을 쏟아 내는 것처럼 더욱 조리가 있고 유창한데다 시원스러워 사람의 입에 회자되었다.생각건대 공이 별 탈이 없었을 때에 나는 매번 편지를 받을 때마다 엄숙하게 읽고 높은 의기에 감복하였는데, 지금 공의 아들 신연(信淵)이 온전한 유고를 보여주고 서문을 청하니, 더욱 그 깊은 경지를 자세히 알 수 있었고 더욱 공경하게 되었다. 옛날과 오늘을 우러러보고 굽어보매 지하에서 공을 일으켜 우리 유가를 진작시킬 수 없는 것을 한스럽게 여기니, 이 때문에 눈물을 흘리며 삼가 서문을 쓴다. 文而不能有補於世, 雖多亦奚以爲? 吾於同門小心齋 黃公遺文有槩焉. 蓋天地間, 有陰有陽, 陽長則陰消; 陰長則陽消. 聖人以之比類於君子、小人之進退, 於《易》否、泰之卦, 兩下對說, 而惓惓致意於抑陰扶陽, 其憂患後世, 可謂至矣. 然則體聖人之意, 凡於講義理論人事之際, 能尙公去私、衛正闢邪、好善惡惡者, 皆得爲補世之文也. 公專心講學六十年, 師事艮齋 田先生之日, 殆四之三焉. 夫學之要五, 篤行居一, 學問思辨四者, 皆辨之事, 而爲知之眞, 眞知故篤行. 此孔聖宗旨, 先生之學得其旨. 語源頭, 則本性理爲主腦, 辨陽尊陰貶之心宗, 語當務, 則閑師倫以終身, 辨陽贊陰譏之嘉誄, 其餘講義論事, 莫不稱是, 皆所以公其心於衛闢好惡, 而爲憂世補世者也. 公之學, 又得先生之旨, 而幷得其公心, 於天地理氣、人物心性之名目疑似色相同異, 旣皆致學問思辨之功, 期於不明不措, 其論義係可否、事關是非者, 則尤釘斬鐵截而無和泥帶水之象矣. 及其斯文之變, 出於門墻之內也, 則舍近居親面之私情, 應千里疎知之公論, 惟斷斷邪說之闢焉. 於是以公好惡之得當, 人皆知誣師亂稿者之罪, 而是非大定, 以之贊長陽消陰之天道, 體扶陽抑陰之聖意, 而不墜夫眞知篤行之學旨. 若公之文, 謂之能補乎世者, 信無異辭, 而時適然, 故效益著焉. 公內行淳至, 存省精密, 凡所論著, 皆本心得, 而爲文不工鍊琢, 直寫己意, 所謂辭達者是也, 而辨誣之文, 尤條暢滂沛, 如破竹建瓴, 膾炙人口矣. 念公無恙日, 每得書莊讀, 而感服高義. 今公子信淵之示以全稿而請弁文也. 益悉其蘊而愈加敬焉. 俯仰今昔, 恨不得起九原振吾黨也. 爲之慨涕而謹書之. 《소심재유고》 근세 유학자 황종복(黃鐘復, 1858~1935)의 문집이다. 소심재(小心齋)는 그의 호이고, 충청도 출신으로 간재(艮齋) 전우(田愚)의 문인이다. 열재 소 어른 근세 유학자 소학규(蘇學奎: 1859∼1948)로, 열재(悅齋)는 그의 호이고, 자는 정습(正習)이다. 전라북도 익산(益山) 출신으로 간재(艮齋) 전우(田愚)의 문인이다. 학문의 …… 가지 널리 배우며[博學], 자세히 물으며審問, 신중히 생각하며[愼思], 밝게 분변하며[明辯], 독실하게 행하는[篤行] 것을 말한다. 《中庸集註 20章》 성리(性理)에 …… 변박하였다 홍직필ㆍ임헌회로 이어져 온 전우(田愚)의 간재학파(艮齋學派)는 성(性)을 이(理)로, 심(心)을 기(氣)로 인식한 데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  '성은 스승이고 심은 제자이다[性師心弟]', '성은 존귀하고 심은 비천하다[性尊心卑]' 등의 독특한 학설을 주장하였는데, 이는 '심이 성정을 통솔한다[心統性情]'라는 기존의 정통적 성리학설과 배치되었다. 때문에 심을 이로 파악하는 학파[心宗]들의 거센 반론을 받게 되었는데, 이러한 반론에 대항하여 스승 간재의 주장을 적극 옹호하며 변론한 것을 말한다. 종신토록 …… 변박하였다 간재 전우가 김평묵(金平默)이 임헌회에게 올린 제문(祭文) 가운데 기롱(譏弄)의 뜻이 숨겨져 있다고 하여 제문(祭文)을 돌려보내고 김평묵의 문인 유중교(柳重敎)와 홍재귀(洪在龜) 등으로부터 절교(絶交)의 편지를 받았을 때에 스승 간재를 도와 김평묵의 만사[嘉誄]에 숨겨진 기롱을 변박한 일을 말하는 듯하다. 사문(斯文)의 …… 물리쳤다 간재 전우 사후에 문집의 간행을 두고 오진영(吳震泳)을 중심으로 한 영남과 충청에 거주하는 문인들은 일제의 인허를 받는 데 문제가 되는 부분을 제외하고 나머지 부분만을 간행하자 주장하였고, 김택술(金澤述)을 중심으로 한 호남에 거주하는 문인들은 '일제의 인허를 받아 간행하지 말라'는 스승의 유언을 받들어 문집의 간행을 반대하였을 때에 황종복은 충청에 거주하면서 호남 쪽 문인의 주장을 옹호하며 문집의 간행을 반대한 일을 말한다. 말은 …… 뿐이다 《논어》 〈위령공(衛靈公)〉에서 "말은 뜻이 통하면 될 뿐이다.〔辭達而已矣.〕"라는 공자의 말로, 글은 아름다운 수사보다는 의미를 정확하게 전달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의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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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봉(草峰) 유공(劉公) 묘명 –계사년(1953)- 草峰劉公墓銘【癸巳】 유씨는 대성이라 劉爲大姓천하에 두루 있으니 遍于天下한나라 때 크게 번창하여 漢時大昌중국의 황제가 되었지 帝于華夏태상황제의 太上皇帝40세손인 四十世孫문양공 전은 文襄公荃송나라에서 고려로 왔다네 自宋而鮮누구와 동쪽으로 건너왔는가 孰與東渡칠학사가 함께 왔네33) 七學士同거타군(거창(居昌))에 거처하였으니 居居佗郡고려 문종 때였네 時麗文宗8세를 내려와 승비는 八傳承備복야의 높은 관직에 올랐네 僕射官崇3세를 내려와 창은 三世而敞시호가 문희공으로 謚文僖公다섯 고을의 사우에서 五郡祠宇성대하게 제향을 받들고 俎豆其豊강릉을 본관으로 삼았으니 江陵爲貫공훈으로 봉해져서라네34) 以其勳封3세를 내려와 한량은 三傳漢良무장 현감에 제수되었고 授官茂長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龍蛇之亂진양(진주(晉州))에서 순절하였으니 殉節晉陽고창 검암사에서 향사(享祀)하였네 享于高敞儉巖之祠2세를 내려와 덕부는 再傳德部정읍으로 이주하니 井邑之移원종공신이었네 原從功臣4세를 내려와 학련은 四傳鶴連아들 태우를 두었는데 有子泰祐고부에서 역병을 피해 古阜避疫오곡의 초장으로 옮겼으니 梧谷草庄자손이 여기에 거처를 정했네 子孫奠宅조정에서 벼슬을 내리니 天爵有隕통정대부의 노직이었네 通政老職4세를 내려와 제윤은 四傳濟允당호를 초봉이라 지으니 草峰扁室초명은 윤갑이고 初諱允甲자방은 자라네 子房表德부친은 만진이니 考維萬鎭대를 이어 문학이 있었고 繼世文學모친은 개성 왕씨로 妣開城王부친은 소택이네 其父昭澤공은 순조 公生純祖갑자년(1804, 순조4) 9월에 태어났으니 甲子九月나면서부터 뛰어난 자질 지녀 生有異質어버이 섬기는 법 알았지 知事親法학문할 나이가 되어 及其就學《효경》을 숙독하였고 熟讀孝經부친이 중병 앓을 적에는 大人沈疾근심하는 기색 드러냈지 憂色于形뒤뜰에 제단 쌓아 築壇後園하늘과 귀신에게 빌었고 祝天禱神끝내 큰 변고를 당해서는 竟當大故하늘이 무너진 듯하였네 若崩其天가슴 치고 곡하며 애도하느라 擗哭攀號얼굴이 새카맣게 되니 深墨其顔상을 견디지 못할까 염려하여 慮不勝喪도리어 자신 책망하였네 反責其身눈물 흘리며 통곡하면서 痛哭泣下예가에게 묻기를 問於禮家"삼년상의 제도는 三年之制박정하지 않은가" 其不薄耶예가가 안타까워하며 禮家憮然위로하고 답하기를 慰而答云"효성스럽구나, 그대의 말이여 孝哉汝言그러나 예는 따라야 한다네" 然禮當遵후에 모친상을 당해서도 後丁妣憂부친상과 똑같이 하였지 前喪一轍평생토록 어버이의 기일 만날 때면 平生每値考妣夫日초상을 치를 때처럼 슬퍼하여 哀同袓括살아계실 때 같이 지극히 삼갔네 致如在恪제사 받들 적에는 凡於奉祀제수(祭需) 넉넉하고 깨끗하였으니 豊潔粢牲죽은 이 섬기고 산 사람 후히 모심에 事死厚生깊이 바른 도를 얻었다고 하겠네 深得乎程늦도록 아들 보지 못해 嗣續遲遲근심으로 애태웠으니 憂心惸惸후사 없는 것이 불효35)라는 無後不孝성인의 가르침 경계할 만하네 聖訓可驚세 아들을 낳으니 三龍矯矯꿈에서 선조의 영령에 감응한 것이리라36) 夢感先靈순임금이 종신토록 부모 사모한 일37) 舜終身慕공에게서 다시 보았으니 於公復覿향리에 추천이 있어 鄕有剡薦여론이 일제히 일어났네 輿論齊發공은 걸맞은 사람 아니라며 公謂非人추천장 손으로 찢었으니 手裂狀紙자처한 바를 논하면 論其自處진실로 또한 고매한 선비로다 誠亦高士초장동에 草庄之洞정려가 내리지 않는 것은 不表宅里서울과 지방의 유사가 京鄕有司불민하여 이리 된 것이로다 不敏致此천수 누리고 돌아가시니 考終正寢회갑의 다음 해이고 周甲之翼거마산 巨馬之山효죽 기슭 孝竹之麓병좌(丙坐) 언덕이 負丙之原공의 묘역이로다 惟公隧域공의 현량한 부인은 公之良配전주 이씨로 全州之李정수의 따님이니 正壽之女부덕이 아름다웠지 婦德克美공은 비록 없었으나 公雖沒矣아들들 모두 가르치고 畢敎諸子8년 뒤에 돌아가셨으니 後八年沒때는 임신년(1872, 고종9)이로다 玄黙涒灘공의 왼편에 합장하였는데 墓祔公左오곡으로 이장하였도다 梧谷緬遷아들 세 사람은 諸子三人권, 영, 로이니 曰權英魯세 '병' 자를 보태면 加以三秉항렬의 순서를 볼 수 있네 行序是覩공, 학, 형, 성과 孔鶴炯星창, 대 여섯 사람은 閶大六人손자 항렬로 '열' 자를 쓰니 孫行以烈이렇게 해서 순서를 볼 수 있네 如是而觀이름 위에 '재' 자를 보탠 加載名上증손이 16인인데 曾孫十六한 사람이 쌍둥이를 낳았네 一龍二佰순, 동이 연달아 태어나고 淳東連茁원, 금이 재롱을 부리고 元金繞膝관, 현이 나란히 서 있으며 冠現比立그 다음은 남, 두이고 其次南斗그 다음은 만, 철이며 其次晩喆근, 근, 숙, 문 등 瑾根淑文창대하여 다 남기지 못하네 昌大未畢아, 모든 행실의 근원인 효는 嗚呼 百行之源공이 간직한 것이니 公之所存이는 옛날에도 此在古先명철한 임금이 중시했도다 明王重焉선을 표장하여 旌淑彰善풍성을 수립했건만 樹之風聲후세는 경시하여 後世輕之치화가 밝혀지지 않았도다 治化不明후손이 한으로 여기다가 后孫爲恨묘소를 이장하면서 有事佳城열 자 비석으로 十尺貞珉공의 실정을 드러내려 하기에 表公實情학렬과 재순이 鶴烈載淳나에게 명을 지어 달라 부탁하였네 屬余爲銘초야에 있다 하여 莫曰草野말이 가볍고 사람이 못났다 하지 말라 言輕人䢇자고로 사론은 自古士論또한 중히 여길 만하도다 亦足爲重 劉爲大姓, 遍于天下。漢時大昌, 帝于華夏。太上皇帝, 四十世孫。文襄公荃, 自宋而鮮。孰與東渡? 七學士同。居居佗郡, 時麗文宗。八傳承備, 僕射官崇。三世而敞, 謚文僖公。五郡祠宇, 俎豆其豊。江陵爲貫, 以其勳封。三傳漢良, 授官茂長。龍蛇之亂, 殉節晉陽。享于高敞儉巖之祠。再傳德部, 井邑之移, 原從功臣。四傳鶴連, 有子泰祐, 古阜避疫。梧谷草庄, 子孫奠宅。天爵有隕, 通政老職。四傳濟允, 草峰扁室。初諱允甲, 子房表德。考維萬鎭, 繼世文學。妣開城王, 其父昭澤。公生純祖, 甲子九月。生有異質, 知事親法。及其就學, 熟讀《孝經》。大人沈疾, 憂色于形。築壇後園, 祝天禱神。竟當大故, 若崩其天。擗哭攀號, 深墨其顔。慮不勝喪, 反責其身。痛哭泣下, 問於禮家: "三年之制, 其不薄耶?" 禮家憮然, 慰而答云: "孝哉汝言! 然禮當遵。" 後丁妣憂, 前喪一轍。平生每値考妣夫日, 哀同袓括, 致如在恪。凡於奉祀, 豊潔粢牲。事死厚生, 深得乎程。嗣續遲遲, 憂心惸惸。無後不孝, 聖訓可驚。三龍矯矯, 夢咸*(感)先靈。舜終身慕, 於公復覿。鄕有剡薦, 輿論齊發。公謂非人, 手裂狀紙, 論其自處, 誠亦高士。草庄之洞, 不表宅里, 京鄕有司, 不敏致此。考終正寢, 周甲之翼。巨馬之山, 孝竹之麓。負丙之原, 惟公隧域。公之良配, 全州之李。正壽之女, 婦德克美。公雖沒矣, 畢敎諸子。後八年沒, 玄黓涒灘。墓祔公左, 梧谷緬遷。諸子三人, 曰權英魯。加以三秉, 行序是覩。孔、鶴、炯、星, 閶、大六人。孫行以烈, 如是而觀。加載名上, 曾孫十六。一龍二佰, 淳、東連茁。元、金繞膝, 冠、現比立。其次南、斗, 其次晩、喆。瑾、根、淑、文, 昌大未畢。嗚呼! 百行之源, 公之所存。此在古先, 明王重焉。旌淑彰善, 樹之風聲。後世輕之, 治化不明。后孫爲恨, 有事佳城。十尺貞珉, 表公實情。鶴烈、載淳, 屬余爲銘。莫曰草野, 言輕人䢇。自古士論, 亦足爲重。 송나라에서……왔네:칠학사는 임팔급(林八及), 설인검(薛仁儉), 허동(許董), 송규(宋奎), 최호(崔沍), 권지기(權之奇), 공덕수(孔德狩)를 말한다. 송나라 신종(神宗) 때 유창이 병부 상서(兵部尙書)로 있으면서 올린 각종 간언(諫言)이 간신들의 모함을 입자, "진실한 직언을 용납지 않는 이 땅에서는 더 머물 수 없다" 하고, 평소 뜻을 같이하던 칠학사와 함께 1082년(문종36)에 바다를 건너 현 경상북도 포항시 북구 기계면에 이르렀다. 공훈으로 봉해져서라네:유창은 조선 개국공신 2등에 녹훈(錄勳)되고 옥천부원군(玉川府院君)에 봉해졌다. 옥천은 강원도 우계(羽溪)의 별칭인 옥당(玉堂)에서 따온 듯한데, 강릉의 속현(屬縣)이다. 후사……불효:《맹자(孟子)》 〈이루 상(離婁上)〉에 "불효에는 세 가지가 있으니, 그중에 후사를 잇지 못하는 것이 가장 큰 불효이다.[不孝有三 無後爲大]"라고 하였다. 꿈에서……것이리라 원문은 '夢咸先靈'이다. 문맥에 근거하여 '咸'을 '感'으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순임금이……일:《맹자》 〈만장 상〉에 "큰 효자는 평생 부모를 사모하는 법이니, 나이 50이 되어도 부모를 사모한 경우를 나는 위대한 순에게서 보았다.[大孝終身慕父母 五十而慕者 予於大舜見之矣]"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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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두 조공 묘명 斗北趙公墓銘 북두 조공은 斗北趙公인환이 휘이고 麟煥其諱치휴가 자일세 致休其字벽성(김제(金堤)의 옛날 이름)을 본관으로 삼았으니 貫于碧城문량(文良 조간(趙簡)의 시호)으로부터 나왔고 文良自出부친은 상렬이로다 考曰相烈모친은 누구인가 其妣維何함양 박씨와 朴籍咸陽인동 장씨이지 仁同維張부친은 가선대부에 추증되고 考贈嘉善모친은 정부인에 봉해졌으니 妣貞夫人박씨가 공을 낳았다네 朴擧公身순조 경진년(1820, 순조20)과 純祖庚辰고종 정묘년(1867, 고종4)이 高宗丁卯생몰 연표로다 生卒年表몸소 고기 잡고 나무하며 躬執漁樵몸과 마음 극진히 봉양하여 養盡體志자식의 직분 다하였네 子職克備.부모상 당해서는 內外丁艱예제를 준수하였고 遵用禮制제사도 정성 지극하였네 追遠亦至독서하고 몸 단속하였으니 劬書飭躬학문에 전심하는 서재가 藏修有室두산 북쪽에 있었다네 斗山之北세상사 관여치 않고 不關塵累시 읊으며 자적하였으니 嘯咏自適오직 풍월만이 있었도다 惟有風月젊은 유생이 배움을 청하러 오면 襟佩踵門정성을 게을리 하지 않고 不倦厥誠후생에게 은혜 베풀었지 嘉惠後生의성 김씨는 義城氏金진실로 현량한 배필이라 實惟良配부덕(婦德)이 매우 아름다웠네 閨範孔懿아들은 철규요 男惟澈圭딸은 송영식과 女宋榮植김영표에게 시집갔네 金永表室달식과 일식이 達植日植두 손자이니 是曰二孫그 후손이 매우 번성하였지 其後彌蕃섭, 국, 홍, 문과 燮國洪汶봉, 경, 서, 명이 琫卿絮明손자의 아들인 증손이라네 孫之子曾'찬'을 항렬자로 삼아 以燦爲行모두 이름에 보탰으니 皆加其名나머지는 많아서 쓰지 못하노다 餘繁不登천태산 기슭 天台之麓와우 언덕에 臥牛之岡엄숙한 봉분 있다네 有肅斧堂명을 지은 자 누구인가 銘之者誰나는 실로 같은 마을 사람이라 余實同里그 말에 거짓 없도다 其言匪詭. 斗北趙公, 麟煥其諱, 致休其字。貫于碧城, 文良自出, 考曰相烈。其妣維何? 朴籍咸陽, 仁同維張。考贈嘉善, 妣貞夫人, 朴擧公身。純祖庚辰, 高宗丁卯, 生卒年表。躬執漁樵, 養盡體志, 子職克備。內外丁艱, 遵用禮制, 追遠亦至。劬書飭躬, 藏修有室, 斗山之北。不關塵累, 嘯咏自適, 惟有風月。襟佩踵門, 不倦厥誠, 嘉惠後生。義城氏金, 實惟良配, 閨範孔懿。男惟澈圭, 女宋榮植, 金永表室。達植、日植, 是曰二孫, 其後彌蕃。燮、國、洪汶, 琫、卿、絮、明, 孫之子曾。以燦爲行, 皆加其名, 餘繁不登。天台之麓, 臥牛之岡, 有肅斧堂。銘之者誰? 余實同里, 其言匪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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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표 墓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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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6년 유인 이씨(孺人李氏) 정부인(貞夫人) 추증교지(追贈敎旨) 고문서-교령류-고신 光緖十二年 十二月 日 孺人 李氏 光緖十二年 十二月 日 高宗 孺人 李氏 서울특별시 종로구 施命之寶 정읍 성주이씨 이유원 후손가 성주이씨 이정순 HIKS_Z037_01_A00914_001 1886년 12월에 유인 이씨를 정부인에 추봉한다는 일종의 사령장 1886년 12월에 유인 이씨를 정부인에 추봉한다는 일종의 사령장이다. 이씨는 이기두의 처이다. 이기두는 직역이 유학(幼學)이었다가 이때 아마도 납속(納粟) 등의 방법으로 관직을 취득한 것으로 보이는데, 처음의 절충장군행용양위부호군에서 가선대부동지중추부사까지 올랐다. 이렇게 남편이 관직을 취득할 경우에 처는 남편의 관직에 준하는 작위를 받을 수 있었다. 유인은 벼슬하지 못한 사람의 아내가 사용하는 호칭이다. 이때 추봉된 작위가 정부인이다. 정부인은 외명부(外命婦) 중 문무관의 적처에게 내리는 정・종 2품의 위호이다. 정부인 앞의 증(贈) 자는 죽은 사람에게 관직을 내릴 때 붙이는 글자이다. 끝에는 날짜를 기재하였는데, 직인을 찍은 부분을 종이를 붙여 가렸다. 광서는 중국 청나라 광서제의 연호이며, 이는 갑오개혁 이전인 1894년까지 사용되었다. 직인은 연호년 위에다 찍었는데, 흐려서 글자를 식별하기 어렵다. 날짜 왼쪽에는 추봉의 근거를 기재하였는데, 남편인 이기두의 관품이 가선대부동지중추부사이며 그의 비(妣)는 법전에 의거하여 증직한다는 것이다. 법전은 『경국대전』 이전(吏典)의 외명부조에서 봉작(封爵)은 남편의 관직을 따른다는 법규를 가리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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住所同一證明願變更前住所 富川郡 蘇萊面 茂芝洞 參統九戶變更後住所 富川郡 蘇萊面 茂芝里 貳百七拾參番地右ハ 同一ノ住所ニシテ 茂芝洞ト 茂芝里ト 大正四年四月一日 行政區域實施ノ結果ニ因リ 且參統九戶ト 貳百七拾參番地ト 大正五年 九月 一日 蘇萊面告示第一號ニ 因リ 變更シタル事 御證明相成度候也大正五年 拾貳月 九日 富川郡 蘇萊面 茂芝里 貳百七拾參番地 願人 李宜容 (印)蘇萊面長 殿右相違ナキコトテ證明ス大正五年 拾貳月 九日 富川郡 蘇萊面長 南吉祐 (印)<피봉>宜容住所同一證明 李宜容 殿蘇萊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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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현대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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印鑑證明願大正年月 富川郡 蘇萊面 茂芝里 貳七三番地(印)(印) 印鑑 李宜容開國四百八拾貳年 拾貳月 拾貳日生右ハ 拙者使用ノ印鑑ニ相違無之旨 御證明相成度奉願候也大正五年 拾貳月 九日 富川郡 蘇萊面 茂芝里 貳百七拾參番地 右願人 李宜容 (印)蘇萊面長 南吉祐 殿面第貳參參號印鑑臺帳ニ照シ 右印鑑ト 相違ナキコトテ證明ス大正五年 拾貳月 九日 富川郡 蘇萊面長 南吉祐 (印)<피봉>茂芝里 李宜容 處 宜容印鑑證蘇萊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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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부기록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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족제 사의에게 답함 정묘년(1927) 答族弟士毅 丁卯 편지에서 말한 권순명(權純命)의 일은 자세하게 알았습니다. 그가 아버지를 잃고 보름도 되기 전인 사람과 혼인을 한 것은 허물이 아니고 바로 악(惡)입니다. 하물며 김희중(金熙中)씨가 전한 바로는, 저 상중(喪中)인 사람이 바라는 것이 아니고, 권씨가 강요했다는 설이 나오게 되어서는 그 정상(情狀)이 다 드러나게 되었습니다.증자가 말하기를, "만약 그 실정을 얻으면, 애긍히 여기고 기뻐하지 말라"150)고 하셨으니 그 권순명의 행위를 궁구해보면 참으로 가련합니다. 대개 상중을 틈타서 처를 취하는 것은 이것은 아비가 없는 짓입니다. 또 더불어 동일한 죄를 받는다는 것은 예율(禮律)에 공통된 것입니다. 이러한 윤리가 사라진 시대를 만나서 몸소 유자의 의관을 입고 친히 아비 없는 짓을 범하니, 그 죄를 생각하건대 가련한 것이 아니고 통분한 일입니다. 비록 그렇지만 저 권순명이 오진영에게 붙어서 스승의 의리를 무함하고 사인(士仁)을 구속시키고, 또 선사의 손자에게 화를 끼치는 것은, 이는 스승을 업신여기는 것이 오래되었기 때문입니다.그러니 끝내 아비를 없이 여기는 것도 어찌 괴이할 것이 있겠는지요! 또 김종희(金鍾熙)가 이현기(李鉉璣)씨를 마주하여 이곳 후창 쪽 사람을 매도하여 말하기를, "차라리 이완용과 조정을 함께 할지언정, 이 도적들과 세상을 나란히 하지 않겠다"고 전했는데, 참으로 비웃을 만합니다. 저 김종희가 진실로 이러한 큰 바람이 있다면, 어찌하여 샘이 나올 때까지 땅을 파서 스스로 매장하지 아니하며, 또 어찌하여 빨리 매국노의 발 아래로 달려가서 조정을 함께 하지 않습니까?아아! 스승을 위하여 변무(辨誣)한 사람을 미워하고, 매국노와 조정을 함께 하기를 원하는 자가 임금을 업신여기는 마음이 아니겠습니까? 이 때문에 법을 무릅쓰고 인산(因山)151) 전에 혼례를 행하여 무군(無君)의 자취를 즐겨 밟았던 것입니다.152) 대개 김종희 또한 오진영의 스승을 업신여김에 붙어서 권순명과 자취를 같이한 자입니다. 스승이란 만법(萬法)의 근원이니 이미 스승을 업신여기는 자라면, 아비도 없고 임금도 없는 것이 어찌 일관(一串)된 일이 아니겠는지요! 오호라, 참혹합니다. 示權純命事備悉.其與喪父望者爲昏, 非過也乃惡也.而况金氏熙中所傳非彼之欲, 乃權之强之之說出, 而其情狀暴露矣.曾子曰如得其情, 則哀矜而勿喜, 究厥所爲, 眞可哀也.蓋乘哭娶妻, 是爲無父.與受同罪, 禮律通然.當此蔑倫之世, 身被縫章, 親犯無父, 言念其罪, 非可哀也, 又可痛也.雖然彼黨震泳, 而誣師義械士仁而禍師孫者, 則其無師也久矣.終以至於無父者, 何足怪乎.又示以金鍾熙對李氏鉉璣罵此中人曰, 寧與完用同朝, 不與此賊幷世, 極可好笑.渠信有此所大願也, 何不掘地及泉而自葬, 又何不疾趣賣國賊脚下而同朝也.噫疾爲師辨誣人, 願與賣國賊同朝者, 非無君之心乎.此所以冒法行婚於因山前, 甘蹈無君之跡也.蓋熙亦黨震無師, 與命同轍者.師者萬法之原也, 旣爲無師者, 則無父無君, 豈非一串事乎.嗚呼慘矣. 만약……말라 《논어(論語)》 〈자장(子張)〉에, 맹씨의 사사로 임명된 양부(陽膚)가 증자에게 옥사를 처리하는 방법에 대해 묻자 증자가 "윗사람이 도리를 잃어 민심이 떠난 지 오래되었다. 만일 범법한 실정을 파악했으면 불쌍히 여기고 기뻐하지 말라.〔上失其道, 民散久矣. 如得其情, 則哀矜而勿喜.〕"라고 하였다. 인산(因山) 조선 시대, 태상왕(太上王)과 그 비(妃), 왕과 왕비, 왕세자와 그 빈(嬪), 왕세손(王世孫)과 그 빈의 장례이다. 이 때문에……것입니다 이 말은 "스승을 위해 변무한 사람을 미워하고 이완용과 조정에 함께하기를 원하니, 이러한 무리들이야말로 임금을 업신여기는 자들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니 고종황제 인산 전에 혼례를 할 수 밖에 없지 않겠습니까?"라고 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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족제 사의에게 보냄 정묘년(1927) 與族弟士毅 丁卯 초육일에 정재(精齋) 어른153)이 와서 말하기를, "고윤거(高允擧)에게 들어보니, 고윤거가 말하기를 '권순명이가 나의 집안의 부음을 듣고도 혼기를 물리지 않고 발행(發行)154)한 날에 가서 비로소 말을 하고 또 혼례한 후에 귀가하였다'고 하였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이 한결같이 근자에 들은 것과 서로 부합하니, 교묘하게 하려다 도리어 졸렬하게 된 간악한 상황이 참으로 우습습니다. 자기 아버지에게 죄를 돌리는 악한 태도도 참으로 가증스럽습니다. 듣자니 권순명은 여전히 석농(石農)155)이 선사의 원고를 고친 것이 뚜렷하게 근거가 있다고 큰소리칩니다. 또 권순명이 말하기를, "원재(遠齋)가 한번은 석농의 필주(筆誅)156)를 겪고 나서는 염상(鹽霜)의 풀이 되었다"고 말하니 더욱 가소롭습니다.157) 初六日靜丈來言, 聞諸高允擧, 則命也聞高訃而不退婚期, 始往言於發行之日, 又歸家於?禮之後.一與此近所聞相符, 欲巧反拙之奸狀可笑也.歸罪其父之惡態可憎也.聞權猶大言石農改師稿,鑿鑿有據.又言遠齋一經石農筆誅, 爲鹽霜之草, 尢可笑也. 정재(精齋) 어른 오병훈(吳秉勳, 1870~1964)으로 호가 정재(精齋)이다. 간재 전우의 문인으로 간재에게 받은 서신 40여 통이 전한다. 발행(發行) 상여가 출발한 날이다. 석농(石農) 오진영이다. 필주(筆誅) 글로 하는 성토로 필삭(筆削)과 같은 뜻이다. 죄 있는 자를 실제로 죽일 권한이 없어서, 그 죄상을 명백하게 기록하여 세상에 남기는 것을 말한다. 죄악을 글로 써서 비판하는 것이다. 또……가소롭습니다 원재는 후창 쪽의 사람인데, 권순명은 "원재가 우리를 그렇게 성토하더니 오진영이가 한번 성토하니 풀이 소금에 절여지고 서리에 시든 것과 같이 되었다"라고 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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족제 사의에게 답함 무인년(1938) 答族弟士毅 戊寅 지난번에 보계(譜系)158)의 범례를 물어보았는데, 가만히 생각하니 대보공(大輔公)에게 이미 시조라고 쓰고 또 이부공(吏部公)에게도 시조라고 쓴다면, 한 성(姓)의 계보에서 두 시조가 있게 되니 진실로 불가합니다. 그렇다고 이부공을 중조(中祖)라고 쓴다면 부안에 본관을 둔 김씨의 족보가 여기서 시작되는데, 중시조라고 일컫는 것도 또한 마땅하지 않는 듯합니다. 이 때문에 이부공을 기술하는 부분에서 시조라고 쓰고 궐초(厥初)159)를 대보공이라 쓴다면 '궐초'라는 두 글자는 살아있는 시대의 사람을 가리키는 말이고, 그대를 가리키는 말이 아니기 때문에 적절하지 않습니다. 원조(遠祖)라는 말에 이르러서는 가리키는 것이 광범위하여, 그러므로 주자가 8대조까지 원조라고 칭했으니, 성씨을 얻고 관을 나눈 조상 이부공에게는 가히 쓸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어찌하면 좋겠습니까? 대보공은 본디 우리 김씨를 처음 있게 한 조상이니, 시조라고 〈김씨세계(金氏世系)〉 편에 쓰고, 이부공은 모조(某祖)라고 쓰지 말고, 다만 〈부녕김씨세계(扶寧金氏世系)〉 편에 일세(一世)라고 쓰고, 신라(新羅) 경순왕(敬順王)의 후예라고 주(註)를 달면 아마 잘못이 아닐 듯한데, 어떨는지 모르겠습니다. 向詢譜系書例, 竊思之, 於大輔公旣書始祖, 又書始祖於吏部公, 則一姓之系, 有兩始祖者, 固爲不可.於吏部公欲書以中祖, 則貫扶之金譜, 始於此, 而謂之中祖者, 亦恐未當.以此而書始祖於吏部公, 以厥初書於大輔公, 則厥初二字, 是指生人時代之言, 非指祖上當身之言, 亦不親貼.至於遠祖,所指泛廣, 故朱子於八代祖亦稱之, 則非可書於得姓與分貫之祖也.然則如之何而可也.大輔公固始生之祖,以始祖書之於金氏世系之篇.吏部公則不書某祖,只書一世於扶寧金氏世系之篇,而註以新羅敬順王之后, 恐不爲朱, 未知如何. 보계(譜系) 한 집안의 혈통과 역사를 적은 책이다. 궐초(厥初) 어떤 일의 맨 처음이라는 뜻이다. 《시경》 〈생민(生民)〉에 "처음 주(周)나라 사람을 낳은 것은, 바로 강원이었나니, 낳을 때 어떻게 했느냐 하면, 마음을 깨끗이 하고 제사를 올렸다오.〔厥初生民, 時維姜嫄, 生民如何, 克禋克祀.〕"라는 말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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족제 사의에게 보냄 기묘년(1939) 與族弟士毅 己卯 근일 들어 서풍이 점차 높아지니 세월이 빨리 흘러감을 개탄하고, 학업이 황폐함을 한탄합니다. 선비가 가을을 슬퍼하는 것은 예로부터 그러했습니다. 게다가 옛날 학업을 함께 하던 동지들이 시대 따라 변하기도 하고, 혹은 형편에 끌리기도 하고, 혹은 음적(陰賊)에 변화되기도 하였으니, 돌아보면 서로 상장(相將)할 사람이 없습니다. 생각이 있으면 나 혼자 스스로 마음에서 말하니 이러한 때 이러한 회포를 어떻게 형용할 수 있겠습니까? 이러한 때 근자에 한번 방문하고 싶다는 소식을 들으니, 마음 가득 기쁘고 위로되어 날마다 그대를 기다립니다. 인하여 생각건대 우리 아우는 좋은 자질과 좋은 재성(才性)을 지녔으니, 어찌 이것이 근자의 사람들이 칭찬하는 아무개 아무개 무리들에 미칠 바이겠습니까? 매번 상자 속에 소장된 갑을연간에 아우가 지은 오진영을 배척하는 문자를 읽을 때면, 그때마다 그 의리가 밝고 문사가 탁 트임을 감탄하여, 갑자기 가슴속이 청쾌(淸快)해짐을 느낍니다. 그러나 집안이 몰락하고 어버이가 늙음으로 인하여, 뜻이 나뉘고 공부가 소활해짐을 면치 못했으니, 아까 이른바 '형세에 이끌린다'는 말이 이 때문입니다. 옛날에도 또한 어버이를 위하여 자신의 뜻을 굽히고 봉록을 받기 위해 벼슬을 한 자가 있었는데, 현재의 정세도 어찌 그렇지 않을 수가 있겠습니까? 다만 선현이 논한바 '안자(顔子)는 도의(道義)로써 어버이를 모셨기 때문에 안로(顔路) 또한 굶주려도 기뻐했다'는 설로써 보건대, 사람의 자식으로서 어진 부모를 둔 우리 아우와 같은 자는, 피차 경중의 사이에 마땅히 취사할 바를 알아야 합니다. 하물며 맹자는 부귀영화를 얻은 것은 명(命)이 있으니, 밖에 있는 것을 구하지 말라는 훈계를 주셨습니다. 아우가 일찍이 말하기를 "몇 년 동안 집안 살림을 꾸리다가 조금 여유를 얻으면 사십 후에 학문에 전념할 수 있겠습니다"라고 했는데, 이제 몇 년이 지나 사십이 넘었는데도 과연 어떠합니까? 지나간 일을 인하여 미루어보면 미래를 알 수 있으니, 다시 몇 년이 지나면 세월이 너무 늦어서 단약(丹藥)을 완성할 기약160)도 없으니, 외물을 추구하다 얻지 못하고 안으로 초심만 어기게 되는 격이라 어찌 한스럽지 않겠습니까? 오직 바라노니, 아우는 오늘부터 옛 생각을 통렬하게 쓸어버리고, 새로 심력을 굳혀서 초년에 실수를 후회하고 만년의 공을 거두기를 바랍니다.161) 여기에 맹자가 말한 "구하면 얻을 수 있으니, 이것은 나에게 있는 것을 구하기 때문이다"162)라는 훈계가 있은 즉, 반드시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무엇이 괴로워서 반드시 얻을 수 있는 것을 버리고 그 반드시 얻을 수 없는 것을 구하여 끝내는 둘 다 얻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려고 합니까? 바라건대, 하늘이 아름다운 자질을 주신 은혜를 저버리지 말 것을 생각하여, 평일에 뜻과 사업을 이루기를 원합니다. 또한 나의 고립(孤立)한 형세를 도와서 조금이나마 무너진 세상의 학문을 부축하기를, 나는 간절히 바라는 마음을 가누지 못하겠습니다. 比日來西風正高, 慨年矢之邁往, 歎學業之荒無.士之悲秋, 從古而然.加以舊學同志, 或爲時變, 或爲勢製, 或爲陰化, 環顧而無人相將.有思而獨自語心, 比時此懷, 如何形喩.際玆聞近欲一顧之報, 滿心欣慰, 惟日望之.仍念賢弟好禀質好才性,豈此近人稱某某輩之所可及者.每讀獘篋所藏甲乙年間斥陰文字, 輒歎其義明辭暢, 頓覺胸中淸快也.然而坐於家落而親老, 不免志分而功踈, 向所謂或爲勢掣者此也.古亦有爲親而屈志祿仕者, 則賢弟情勢, 安得不然.但以先賢所論顔子以道義養親顔路雖飢亦喜之說, 觀之, 人子之有賢父母如賢弟者, 於彼此輕重之間, 宜知所取舍.而况孟子有得之有命求在外者之訓乎.賢弟嘗言幾年經理, 稍得贏裕, 則四十後專意學問, 今幾年過而四十餘矣, 果如何也.因往推之, 來者可知, 更過幾年, 則歲月太晩, 成丹無期, 外求未得, 而內負初心, 豈不可恨.惟望賢弟斷從今日, 痛掃舊念, 新著心力, 悔東隅之失, 而收桑楡之功也.此有孟子求則得之求在我者之訓,則其可得也必矣.何若而舍其必得而求其不可必得,竟至於兩無所得也.願思所以不負天與美質之思, 而償得平日之志業.亦以助得淺陋孤立之勢, 少扶世擧之頹, 區區不勝懇至之心. 단약을 완성할 기약 학문의 업적을 성취한다는 뜻이다. 초년에……바랍니다 동우(東隅)는 해가 뜨는 곳이고 상유는 해가 지는 곳으로, 동우는 인생의 초년을, 상유는 인생의 만년을 뜻한다. 마원(馬援)이 "처음에는 비록 회계에서 날개를 드리웠지만 마침내 민지에서 날개를 떨칠 수 있었으니, 동우에서는 잃었지만 상유에서 거두었다 이를 만하다.〔始雖垂翅回谿, 終能奮翼黽池, 可謂失之東隅, 收之桑榆.〕" 하였다. 《後漢書 卷24 馬援列傳》 구하면……때문이다 맹자가 "구하면 얻고 버리면 잃는다. 이 구함은 얻음에 유익하니 자신에게 있는 것을 구하기 때문이다. 구함에 도가 있고 얻음에 운명이 있다. 이 구함은 얻음에 무익하니 밖에 있는 것을 구하기 때문이다.〔求則得之, 舍則失之, 是求有益於得也, 求在我者也, 求之有道, 得之有命, 是求無益於得也, 求在外者也.〕"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孟子 盡心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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족질 문경 형익에게 답함 을축년(1925) 答族姪文卿 炯翼 乙丑 족질이 근일에 진걸(震杰)163)의 변란에 곧바로 변명하여 배척하고 죄를 성토한 것은, 맹자가 변론을 좋아했던 마음164)입니다. 족질이 서검(書檢)165)으로 자수한 것은 황보규(皇甫規)166)의 장한 의리요, 분주히 소식을 전한 것은 탁계순(卓契順)167)의 고풍(高風)과 같습니다. 총괄하면 간옹(艮翁)의 한 가지 일을 위한 정성으로 분수가 정해지지 않았다고 하여 틈을 주지 않았고, 호남의 선비와 환난을 함께 하겠다는 뜻이 통문에 참여되지 않았다고 하여 조금도 그치지 않았으니 어찌 그리 씩씩한지요! (족질이 간재에게 배우지 않았다. 오진영을 성토하는 통문에 이 조카의 이름이 들어가 있지 않다)전일(前日)에 1500명 제자들 가운데 이름을 날려 영예를 드러낸 자와 59명의 반열에 의를 분발하고 공을 과시하는 자들과 이에 혹 두려운 마음으로 움츠리거나 또 기쁜 마음으로 연락(燕樂)만을 즐기는 자들도 족질에게 비교해보면 능히 부끄러움이 없겠습니까? 이에 그대가 근년에 힘써 법도를 지키고 진실 되게 공부를 해 나간다는 것을 믿게 되었으니, 이것은 간옹의 가르침을 저버리지 않는 효과입니다. 이로부터 더욱 극진함을 궁구해나가면 간옹의 자취가 그 장차 그대에게서 이어질 것이니, 누가 사제의 교분이 미처 정해지지 않았다고 하여 간재의 전술(傳述)을 얻지 못했다고 이르겠습니까? 또한 어찌 사제의 교분이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하여 스스로를 겸연쩍게 여기겠습니까? 원컨대 더욱 힘쓰고 힘쓰십시오. 賢於近日震杰之, 變立辨討罪, 孟子好辯之心也.書檢自首, 皇甫規之壯義也, 奔走通信, 卓契順之高風也.總之爲艮翁一事之誠, 不以分不定而有間, 與湖士同難之志, 不以通不參而小歇, 何其偉哉.彼前日之楊名榮於千五百之中, 奮義誇功於五十九之列者, 乃或惴惴然龜縮, 呴呴然燕樂, 視賢能無愧乎.於是乎益信賢之年來力守規模,實下工程,不負艮翁之敎之效也.從此益究其至也, 則艮翁之緖, 其將於賢焉見紹矣, 孰得以分未及定.謂非得其傳, 亦何可以此而自歛也.願益加勉旃. 진걸(震杰) 오진영(吳震泳)과 강태걸(姜泰杰)을 이른다. 강태걸은 오진영의 제자로, 간재의 선집을 만들어 서울에 가서 인가를 받는 일을 도맡아 하였다. 이 일에 반대하는 김택술과 최병심 등을 진천서에 고소한 인물이다. 변론을 좋아했던 마음 《맹자》〈등문공 하(滕文公下)〉에 공도자(公都子)가 외인(外人)들이 모두 부자더러 변론하기를 좋아하는데 어째서 그런가라고 하자, 맹자가 말하기를 "내 어찌 변론하기를 좋아하겠는가. 내 부득이해서이다. 천하에 인간이 살아 온 지 오래되었는데, 한 번 다스려지고 한 번 혼란하였다.〔予豈好辯哉. 予不得已也. 天下之生久矣, 一治一亂.〕"라고 하였다. 서검(書檢) 봉함한 곳에 도장을 찍고 글을 쓴 것이다. 황보규(皇甫規) 중국 후한의 장수로, 강(羗)을 정벌한 공을 인정받아 도요장군에 올랐다. 환제 때 당고의 화가 일어나 진번, 이응 등 당대의 명현들이 다수 체포되었는데 황보규는 이에 연루되지 않았다. 그는 이를 수치스럽게 여겨 스스로 상언하기를 "신이 지난번에 고 대사농 장환을 천거한 것은 곧 신이 당을 붙좇은 것이요, 또 옛날 신을 좌교로 좌천시킬 것을 논할 때에 태학생 장봉 등이 글을 올려 신을 변호해 준 것은 바로 당인들이 신을 붙좇은 것이었으니, 의당 신도 이 당옥에 연좌되어야 합니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조정에서는 이를 불문에 부쳤다고 한다. 《後漢書 卷65 皇甫規列傳》 탁계순(卓契順) 당나라 정혜사 수흠의 문도이다. 《소동파시집(蘇東坡詩集)》 권39 차운정혜흠장로견기(次韻定慧欽長老見寄)의 서(序)에 "소주(蘇州) 정혜사 장로 수흠이 그 문도 탁계순을 혜주(惠州)로 보내 나의 안부를 묻고" 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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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세조 죽계 선생 묘표 기축년(1949) 十一世祖竹溪先生墓表【己丑】 죽계 선생의 묘소에는 이미 묘갈을 세우고 명을 지었는데 지금 다시 묘표를 세우고 사적(事跡)을 기록하는 것은 주자(朱子)의 편지가 실린 《주자대전(朱子大全)》과 《주자서절요(朱子書節要)》38)가 상세함과 간략함을 상호 보이는 것과 같다.우리나라의 문장은 목릉(穆陵 선조(宣祖)의 능호(陵號))의 세대가 가장 성대하였는데 선생은 장년(壯年)에 성균관에서 문예를 다투어 많은 유생들 중에서 두 번 급제하여 진사시(進士試)에서 수석을, 생원시(生員試)에서 2등을 차지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벼슬에 나아갔다면 높은 관작으로 몸을 영화롭게 하고 훌륭한 문장 솜씨로 나라를 빛내는 것을 기필할 수 있었는데 오히려 마음에 두지 않았다.궁구한 것은 천인(天人)과 성명(性命)에 대한 깊은 뜻이었고 힘쓴 것은 효제(孝悌)와 윤상(倫常)의 도리로, 부귀는 뜬구름처럼 여기고 인의(仁義)는 맛있는 음식처럼 여겼다. 명망과 실제가 드높았기에 조정에서 선발하였고, 후학(後學)에게 공을 남겼기에 사림이 제사를 지내니, 이는 정자(程子)가 말한 "위기지학(爲己之學)은 끝내 남을 성취시키는 데 이른다."라는 것이다.저술은 임진년 병화(兵火)에 모두 소실되어 시편 약간이 있을 뿐이라, 비록 매우 한스럽지만 홍 모당(洪慕堂)39) 선생은 지혜가 덕을 알기에 충분한데 〈소아(小雅) 백구(白駒)〉의 시40)를 그대로 인용하여 선생과 증별(贈別)하였다. 대저 시인이 읊은 대상은 공(公)이나 후(侯)가 될 만한 현인으로 필시 《대학(大學)》의 치국(治國)과 평천하(平天下)의 도를 얻은 자일 것인데 모옹이 이런 사람에 선생을 견주었으니, 선생의 학문과 현명함을 깊이 아는 것이 아니라면 어찌 그럴 수 있었겠는가. 평소 선생이 지은 글과 학문과 정사에 대한 정밀하고 해박한 논의가 거의 여기에 있었음을 알 수 있으니, 이 점은 기록할 만하다.선생의 휘는 횡(鋐)이고, 자는 여기(汝器)이며, 성은 김씨이다. 선조의 계보, 생몰, 배위(配位), 자손은 모두 김 참판이 지은 묘갈명에 있기에 여기에 기록하지 않는다. 竹溪先生之墓, 旣碣以銘之矣, 今又改竪表而識之者, 是猶朱書之《大全》、《節要》, 詳略互見也。我國文詞, 莫盛於穆陵之世, 而壯年戰藝國學, 再捷群儒, 進魁生二, 由此而進, 榮身靑紫之秩, 華國黼黻之手, 在所可必, 乃不以爲意。所究者, 天人性命之蘊; 所勉者, 孝弟倫常之道, 浮雲富貴, 芻豢仁義。望與實隆, 朝廷選之; 功存後學, 士林祀之, 此程子所謂"爲己之學, 終至成物"也。惟其著述, 蕩逸於壬燹, 只有詩什若干。雖甚可恨, 然洪慕堂先生, 智足以知德, 而純用〈白駒․小雅・(小雅白駒)〉之詩, 贈別先生。夫詩人之所爲賦, 是可公可侯之賢人, 必其有得乎《大學》治平之道者, 而慕翁乃擬先生於此, 非深知其學其賢, 豈得然乎? 可知其平日文字論學、論政之精博者, 庶在此矣, 是可以書也。先生諱鋐, 字汝器, 姓金氏。先系、生卒、配位、子孫, 俱在於金叅判撰碣, 玆不書。 주자서절요(朱子書節要):1543년(중종38) 중종(中宗)의 명으로 이황(李滉)이 주희(朱熹)의 《주자대전》 중에서 서간문을 편집한 책으로, 20권 10책이다. 《주자대전》 가운데 1700여 편의 서간 중 1008편을 실었다. 이 책은 주희의 사상을 총 정리한 것으로 우리나라 성리학 발달의 근간이 되었다. 홍 모당(洪慕堂):홍이상(洪履祥, 1549~1615)으로 모당은 그의 호이다. 본관은 풍산(豊山)이고, 초명은 인상(麟祥)이며, 자는 군서(君瑞)·원례(元禮)이다. 시호는 문경(文敬)이다. 임진왜란 때 공을 세웠고, 이조 참의, 대사성, 대사헌 등을 역임하였다. 1612년(광해군4) 이이첨(李爾瞻), 정인홍(鄭仁弘) 일파에게 밀려나 개성유후사 유후(開城留後司留後)로 좌천된 뒤 그 곳에서 죽었다. 저서로 《모당유고(慕堂遺稿)》가 있다. 고양의 문봉서원(文峯書院)에 제향되었다. 소아(小雅) 백구(白駒)의 시:원문은 '白駒小雅'이다. 문맥에 근거하여 '白駒'와 '小雅'의 순서를 바꾸어 번역하였다. 백구는 현자가 떠나는 것이 아쉬워 떠나지 못하게 만류하는 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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