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令允謂謝見訪袖傳惠書辭指隆重存撫純摯不知疾劣何以得此第切感戢不容名喩仰審比寒精體度旣壽且康曷勝賀祝 駿善 獲戻于天近遭毒慽慘不忍言入山之計非直爲潔身地祗爲無可安身處出可不得已者也令 蒙過葬還深歉愧耳 疾病侵尋無由晉軒候而尤不勝悚然餘萬眩甚不備餘謝狀上乙卯十月二十五日生吳駿善拜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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聽取書訂正申請書鐵匣臺帳은朝鮮最初에田畓과林野을統히記載한臺帳인바席洞崔山이字番號은聖字요奴名은乙之로結卜을懸錄하여ᄂᆞᆫᄃᆡ後來에朝鮮通行의例法으로林野結卜은削除된事實이傳來의公認한바라年前量地衙門設置後에右臺帳이廢止홈水營量案은古來林野가水營의管轄所屬으로松禁과松贖을全部管理한바席洞崔山이右量案에奴名乙之로記載된事實은傳來의公認한바라今量案有無은未詳홈昭和五年四月十五日全北道扶安郡扶寧面瓮中里一九四番地申請人 崔基洪[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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烟村先生遺事序昔我先祖尤菴文正公嘗作烟村先生遺事跋余以未見其遺事尋常致恨矣一日先生後孫爀趾欽兩君以遺事新件一冊來示余卽其以舊本重刊者也遺稿散逸於兵燹之餘惟一䟽二詩載存於卷首固可爲一臠而知全鼎矣若其所附諸賢詩文一繙閱而有以見先生德望之隆爲一世所景仰也貢院之唱和退休時贈別曁存養樓題詠一何盛哉後之有題跋於錄後者亦皆珍重至若李澤堂極其誦慕乃以淳德高節正學稱之吾先祖亦以先生文字有出於朱書語句爲正學之一端噫觀此前後所稱揚益使人興歎靡已繼玆編錄不啻如遺文之攟輯豈不善矣乎况叅議公事蹟之共編山堂公文集之繼修尤不偶尒(爾)先生世德有如是焉世之覽此者亦孰不欽聳哉今兩君之問序意甚勤有不可孤遂書此以致崇慕之私云崇禎後三乙丑孟冬德殷宋煥箕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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春谷序余老且病閣筆硯久何敢人號哉然得聞鄭友寅韶之口則崔處士秉禹眞君子人序號春谷烏可辭夫春其氣和谷其地幽幽谷和春乃萬物發生之始餘何可量也盖嘗聞秉禹氏卓然湖南名士容用余老毫贊然不阿好故爲之序系之以詩曰谷有盤君子之居李愿去矣秉禹攸廬谷有口君子之扃鄭眞去矣秉禹攸耕號始鬼春谷亦谷我有所祝幽遷喬木己巳冬十一月旣望資憲大夫掌禮院卿弘文館學士碧珍李愚冕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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消滅証明書下付申請大正拾壹年民申第貳八号借諸?因保扶安郡保安面牛東里申請人崔炳郁右死亡ニ付家督相續人崔東漢仝郡東津面鳳凰里被申請人金珪相仝郡仝面內基里被申請人金錫述右申請人ハ右被申請人等ヨリ申請人ニ對スル當廳大正十年申第一一ニ六号動産假處分事件ニ對スル右仝廳大正十一年民申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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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학(李承鶴) 간찰(簡札) 8 고문서-서간통고류-서간 개인-생활-서간 閏八卄四日 父 閏八卄四日 李承鶴 李光秀 전남도청(2020년 구입 의병자료) (재)한국학호남진흥원 이승학(李承鶴)이 서울에 기거하는 아들에게 여러 가지 소식과 당부를 전한 간찰. 이승학(李承鶴)이 서울에 기거하는 아들에게 여러 가지 소식과 당부를 전한 편지이다. 편지 서두는 편지의 전달 여부와 답장을 기다린다는 말로 채웠다. 이승학은 이달 7월에 우체국으로 편지를 보내고 이후로 인편이 없어 부치지 못하고 있다가 이씨(李氏) 친구 편에 편지를 보냈는데 아직 답장이 없어 답답하다는 말을 전하며 아들 소식을 바라는 마음을 드러냈다. 이어 겨울이 깊어가는 생활은 어떠하냐며 묻고, 겨울 채비를 위해 침구류 등을 순도(順道)에게 보낸다는 말을 전했다. 다음으로 문중에서 간행 중인 것으로 짐작되는 족보(族譜)에 관한 내용이 이어진다. 족보의 진행은 어떠하며 정서(正書)는 마쳤는지 묻고, 지난번 순천(順天) 종인(宗人)의 일은 담양의 백동(栢洞) 족숙(族叔)이 변통하여 처리할 방도가 있는 것인지, 그렇지 않다면 투필(投筆)하고 물러나 후일의 구설을 면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이어 문중의 갈등과 관계된 일을 처리할 때는 더욱 신중히 하고 가볍게 넘겨서는 안 된다며 신신당부한 내용이 보이는데, 아마도 이광수가 문중의 족보 일에 관여하고 있었는데 문중에서 적지 않은 갈등이 있었던 듯하다. 이승학은 아들이 곧 볼 과거 시험을 언급하기도 했다. 다음 달에 네가 소원하던 바가 있을 것인데, 합격 여부는 운수와 관계된 것이지만 사람의 일이기에 전력하다 보면 성취할 수 있으니 기회를 놓치지 말라며 시험을 앞둔 아들의 마음을 달래주기도 했다. 아들의 안부를 두루 물은 다음 이승학은 본인의 최근 근황을 상세히 알렸다. 이달 15일에 연재(淵齋) 송병선(宋秉璿) 선생이 강회(講會)에 참석하려고 왔는데 유생(儒生)들의 참여가 적어서 강회를 열지 못하고 향음주례로 대신했다는 것, 이승학이 갑자기 찬례(贊禮)를 맡게 되었다는 것, 연재 선생을 모시고 내장사(內藏寺)를 방문했다는 내용 등을 두루 전했다. 스승이자 인척(姻戚)인 송사(松沙) 기우만(奇宇萬) 집안의 장례 일에 관한 소식도 알렸다. 장삿날이 모레 있는데, 묘소가 담양(潭陽) 용추사(龍湫寺) 부근으로 잡았으며, 내일은 상례 행차가 우리 쪽 경계를 지난다는 것이다. 그때 본인이 장례에 참석하여 역부(役夫)들에게 술을 대접할 예정이라고 하였다. 집안의 혼례 소식도 알렸다. 장성(長城) 봉덕(鳳德)으로 시집가는 딸의 우귀(于歸, 신부가 처음으로 시집에 들어가는 일) 날짜가 다음 달 27일로 정해졌는데, 기씨(奇氏) 사위를 아직 보내지 않고 있으니 무슨 연유인지 모르겠다면 속상함을 드러냈다. 이승학은 장녀를 기우만의 손자인 기낙도(奇洛度)에게 시집보냈고, 차녀는 기재(奇宰)의 손자인 기인도(奇人度)에게 시집보냈는데, 이때 언급한 신랑은 누구인지 정확히 알 수 없다. 이어 이승학은 딸을 시댁에 보내면서 준비할 물건들에 대한 걱정을 드러냈다. 특히 홍롱(紅籠)과 승혜(繩鞋, 미투리), 면구(緬具)는 서울에서 준비하려고 하여 돈이 모이면 순도(順道)와 상의하여 구할 계획이라는 말과 수침(水砧)이 팔리지 않아 갈등을 겪고 있다고 덧붙였다. 친인척과 관련된 황당한 사건에 대해 전한 내용도 확인된다. 지난달 말에 하동(河東) 횡월리(橫月里)에 사는 월초(月樵) 어른이 이곳으로 왔다가 장성(長城) 쪽으로 갔는데, 그 어른과 작별하면서 들었는데, 봉덕의 자인(子仁)이 논 판 돈 300냥을 그 아버지께 고하지도 않고 가지고 떠나버렸다는 것이다. 이 일에 관해 이승학이 당부하기를 만일 자인과 서울에서 상봉한다면 충효(忠孝)의 도리로 잘 회유하라고 전했다. 편지 하단은 보채(報債) 및 문중의 서당 등에 관한 내용, 아들이 부탁한 비용 마련에 대한 어려움, 족보의 명하전(名下錢) 문제, 윤홍(允弘) 숙질(叔姪)에 관한 당부, 본관(本官)의 수령에 관한 내용 등을 언급했다. 이 편지는 필사본으로 보인다. 편지 상단에 먹선으로 두 줄을 지운 흔적 등이 있고, 편지지 앞뒷면으로 내용이 채워진 것으로 보아 집안에서 필사한 것으로 추측된다. 또 편지 작성 일자가 '윤달 8월 24'로 적혀졌으나 내용에는 '서리의 위력이 높아지고 추위가 점점 심해진다'는 말로 보았을 때 이 편지는 여름에 작성된 것이 아닐 것이다. 아마도 몇 편의 편지 내용을 모아 수정하여 필사했을 가능성도 있다. 또 간지가 생략된 채 일자가 적혀 있어서 연도를 잘 알 수 없으나 이광수가 과거 시험을 앞두고 있다는 말과 윤월(閏月)이라는 내용 등으로 보아 1900년에 쓰인 내용으로 추측된다. 이광수는 1901년에 경의문대(經義問對) 시험으로 성균관(成均館) 박사(博士)가 되었다. 1900년은 이광수가 시험을 보았던 해이고, 이해 8월에 윤달이 들었다. 이승학(1857∼1928)의 본관은 전주(全州)로, 양녕대군의 후손이며, 자는 자화(子和), 호는 청고(靑皋)이다. 전남 담양 장전리(長田里)에서 출생하였다. 아버지는 기정진(奇正鎭)의 문인인 진사 이최선(李最善)이고, 이승학 본인도 기정진의 문하에서 배웠다. 아들 이광수(李光秀)는 송사(松沙) 기우만(奇宇萬)의 제자이다. 을미사변(乙未事變) 때 팔도에 격문을 보내어 의병을 일으키기도 했다. 문집으로 ?청고집(靑皋集)? 4권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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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皮封]石初 惠啓靑皐候緘徂歲邂逅遇我同庚浮生良慰半夜傳燭呼酒阿凍其樂孔嘉俾也可忘春已仲矣更惟體事珍腴到處酒泉能無恙痛飮消遣臨風溸祝記下新舊之交又添寒感只作喀喀聲度日欲政專却不是陽界好況耳甘蔘湯試服有效而以痰蹙中止者累矣此去金友聞其高風方進去暫此探候不備上豊洞諸節泰平耶新年未聞泄泄爲傳此意否耶忙未修候耳戊戌二月四日記下李承鶴拜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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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6년 이광수(李光秀) 간찰(簡札) 고문서-서간통고류-서간 개인-생활-서간 丙申臘月二十一日 宗生 光秀 丙申臘月二十一日 李光秀 宗人 전남도청(2020년 구입 의병자료) (재)한국학호남진흥원 1896년에 이광수(李光秀)가 강화도(江華島)에 있는 종인(宗人) 이건창(李建昌)께 찾아뵙지 못한 사연과 안부를 전한 간찰. 1896년 12월에 이광수(李光秀)가 강화도(江華島)에 있는 종인(宗人) 이건창(李建昌)께 찾아뵙지 못한 사연과 안부를 전한 편지이다. 편지 상단에서는 그동안 이건창 선생을 뵙지 못한 그리움과 시세(時世)에 대한 근심 등을 실었다. 지난겨울에 보낸 편지는 잘 도착했는지 묻고 강화도와 담양(潭陽)으로 서로 떨어져 2년 동안 뵙지 못해 아쉽다는 내용, 온 세상이 풍우(風雨)로 가득하여 애통하다는 내용, 이러한 혼란의 때에 친우들도 우려하는데 선생과 같은 대인(大人)과 군자(君子)들의 근심은 어떠하겠느냐며 그 마음을 위로한 내용이 보인다. 이어 사람의 생사가 중요하나 이보다 중요한 것이 있다는 것을 알고 항상 선생께 배우려고 했으나 아득한 운산으로 막혀 끝내 이룰 수 없어서 날마다 조보(朝報)로만 소식을 접했다고 전했다. 또 지난 6월에 선생께서 정기(正氣)를 짊어지고 대의(大義)를 위해 송(宋)나라 정이(程頤)가 부주(涪州)로 유배를 떠나듯이 처신했다는 말을 들었는데, 처음엔 그 소식을 듣고 믿지 않았으나 지금 사변을 보니 과연 그러했을 것이라고 짐작했고, 보당(葆堂) 서병수(徐丙壽)의 편지를 얻어 선생께서 유배되었다는 것을 확인했다고 하였다. 이광수는 이 소식을 접하고 선생을 뵙기 위해 길을 나서려고 계획했으나 관보(官報)를 보고 선생께서 유배에 풀려나왔다는 소식을 접해 뵙지 못했다며 아쉬움을 표했다. 이 구절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1896년 4월에 이건창이 해주부 관찰사(海州府觀察使)를 제수받았으나 개화파의 득세와 을미사변(乙未事變)의 처리 문제 등을 들어 상소를 올리고 극구 사양하다가 고종과 조종의 노여움을 사 고군산도(古群山島, 현재 전북 군산시 소재)로 유배되었다가 특별 사면으로 2개월 후에 풀려난 사건을 말한다. 이광수는 이건창 선생이 군산으로 유배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담양에서 군산으로 찾아뵐 계획을 세웠으나 실행하기 전에 선생이 해배(解配) 되어 만나지 못하고 말았다. 계속해서 이광수가 편지에서 이르기를 '선생께서 해배 된 후에 장성(長城)의 식재(植齋) 기재(奇宰) 어른께 가서 선생의 편지를 얻어 보았더니 처신하는 명백한 의리가 분명하였다'고 전했다. 더불어 선생의 편지 끝에 '가군(家君)에게 편지를 쓴다'는 말이 있었는데, 끝내 그 편지를 잃어버려 암담한 심정이라고 아쉬움을 전했다. 편지 하단은 선생의 근래 안부를 묻고 자신의 안부를 전한 내용으로 채워졌다. 새말에 건강은 어떠하며, 두문불출하며 책을 읽으면서 묘책을 얻고 있는지, '벼슬에 나가서도 나라를 걱정하고 물러나서도 나라를 걱정한다는 말'이 선생께 해당한다고 하면서 심정을 헤아려 보기도 했다. 이어 이광수 자신의 안부를 전하기를, 본인은 조부모님과 부모님을 모시고 예전과 같이 지내고 있으나, 지난번 한 번 찾아뵌 이후로 세상이 상전벽해(桑田碧海)와 같이 변해서 책에 마음을 쏟지 못하고 있고, 지기(志氣)가 한결같이 혼란하고 태만하여 진취하는 것이 비루하다며 자신의 상황을 한탄했다. 지난번 선생께서 주신 시(詩)와 서(序), 간독(簡犢) 등 여러 편의 글은 정문일침(頂門一針)과 같이 매섭기도 하지만 사람을 아껴주는 성대한 덕이 담겼다고 고마움을 전했다. 더불어 선생을 모시고 그동안 듣지 못한 가르침을 배워 마음과 눈을 밝게 하기를 원한다고 덧붙였다. 편지 끝에는 나라를 위해 더욱 몸을 아끼시고 도(道)를 위해 보중(保重)하시기를 바란다는 말을 전하며 선생에 대한 존경을 드러냈다. 이광수(1873~1953)의 호는 옥산(玉山), 자(字)는 미중(美中)이다. 부인 죽산안씨(竹山安氏)와의 사이에 외아들 혁(爀, 1898~1977)을 두었다. 노사학파의 일원인 송사(松沙) 기우만(奇宇萬)의 문인이다. 1900년에 경의문대(經義問對)로 성균관박사(成均館博士)로 되었으며, 계몽운동가인 양한묵(梁漢黙) 등과 교유하면서 신학문에 뜻을 두고 개화(開化)에 앞장섰다가 송사에게 파문(破門)을 당하기도 했다. 일제의 강제 병합을 목격하고 고향에 돌아와 후학을 양성하며 여생을 보냈다. 이건창(李建昌, 1852~1898)의 본관은 전주(全州)로, 조선 2대 왕인 정종의 아들인 덕천군(德泉君)의 후손이며, 병인양요(丙寅洋擾) 때 순절한 이시원(李是遠)의 손자이다. 자는 봉조(鳳朝), 호는 영재(寧齋), 명미당(明美堂)이다. 1866년 별시 문과(別試文科)에 급제하였다. 1874년에 서장관(書狀官)으로 청(淸)나라에 가서 여러 문장가와 교유하여 문장으로 이름을 떨쳤고, 강위(姜瑋) · 김택영(金澤榮) · 황현(黃玹) 등과 교분이 두터웠다. 충청우도 암행어사(忠淸右道暗行御史), 승지 등의 벼슬을 했으며, 1896년 해주부 관찰사에 제수되었으나 사양하다가 고군산도로 유배되었다. 그 뒤 고향인 강화에 내려가서 서울과는 발길을 끊고 지내다가 2년 뒤에 47세로 세상을 떠났다. 대표적인 저술로 ?당의통략(黨議通略)?이 있으며, 문집으로 ?명미당집(明美堂集)?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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