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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인 강씨 묘표 병술년(1946) 孺人姜氏墓表【丙戌】 부인(婦人)에게 사군자(士君子)의 언행이 있으면 이를 여사(女士)라고 하니, 평택(平澤) 임덕(林德) 공의 계배(繼配)인 유인 진주 강씨(晉州姜氏)가 그런 사람이다. 어릴 때부터 문밖을 나가지 않고 부모 곁에서 날을 마쳤으며, 아버지가 등창을 앓을 적에는 입으로 빨아서 치료하면서도 미간을 찌푸린 적이 없었다. 평소에는 비록 다급한 상황이라도 큰소리를 내거나 매서운 안색을 보이는 일이 없었다. 아버지가 특별히 사랑하여 남자로 태어나지 않은 것을 애석해하였으니 유인에게 이미 사군자의 자질이 있음을 안 것이다.시집가서는 시부모를 직접 뵈지 못한 것을 지극한 한으로 여겨 제삿날마다 3일 동안 고기와 훈채(葷菜)를 먹지 않았고, 비록 설한(雪寒)이라도 목욕하여 몸을 정결하게 하였다. 제사가 끝나면 남은 슬픔으로 날을 마쳤고, 반드시 소복을 착용한 채로 종사한 것은 기일(忌日)에는 소복을 입어야 한다는 예학가(禮學家)의 논의에 부합하였다.남편의 병이 위독해지자 자신이 대신 앓기를 기도하고 약을 지어 올려 정성을 다하지 않음이 없었다. 끝내 불행을 당하게 되어서는 하종(下從)하겠다고 마음먹고 6일 동안 물을 마시지 않았으나 아주버님이 간절하게 울면서 타일렀으므로 선뜻 마음을 돌리고 아들을 가리켜 말하기를, "따라야 할 사람이 여기에 있습니다."라고 하고는 일어나 장례를 살피고 예를 따라서 상을 마쳤으니 맹자의 죽지 말아야 하는 정밀한 의리136)를 잘 본 것이다.임종 때 아들에게 이르기를, "효는 덕의 근본이니 한 사람이 효도하면 한 집안이 화목하고 집안이 화목하면 백복(百福)이 이른다."라고 하였으니 이 말은 또 《대학(大學)》의 "한 집안이 인(仁)하면 한 나라가 인을 일으킨다."라는 뜻과 서로 표리가 된다. 이러하였다면 여사라고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아, 오늘날은 예의(禮義)가 땅을 쓸 듯 사라져 서로 오랑캐가 되었는데 부녀자들 또한 심하니 진실로 한심스럽다. 어떻게 하면 구원(九原)에서 유인을 다시 살려 세상의 모범으로 삼아 점점 명철한 부인이 많이 나타나게 할 수 있겠는가.유인의 증손 양호(讓鎬)가 70세의 나이로 재차 나에게 와서 묘문(墓文)을 청하면서 가장을 보여주었는데 가장이 간략하고 엄정하여 믿을 만하였다. 이 때문에 큰 행적을 써서 나머지를 보여 부안 시어산(侍御山) 남쪽 곤좌(坤坐) 묘소에 새기게 하였으니 이곳을 지나가는 사방의 부녀자들이 이곳이 여사가 안장된 곳임을 알고 사모하며 본받기를 바란다.유인은 참의(參議) 극문(克文)의 후손이고, 사인(士人) 문상(文相)의 따님이다. 순조(純祖) 경인년(1830, 순조30)에 태어났고 홍릉(洪陵 고종(高宗)의 능호(陵號)) 임오년(1882, 고종19)에 졸(卒)하였다. 임공은 충정공(忠貞公) 언수(彦修)와 직제학(直提學) 맹의(孟義)의 후손이고, 학생(學生) 종효(宗孝)의 아들이다. 3남을 두었으니 석황(錫黃), 출계(出繼)한 석오(錫伍), 석상(錫祥)이다. 3녀는 연안(延安) 이덕형(李德亨), 고흥(高興) 유광진(柳光鎭), 전주(全州) 최규영(崔奎永)에게 시집갔다. 장남의 손자는 태순(泰淳)이고, 삼남의 손자는 치순(致淳)이다. 증손과 현손 이하는 다 기록하지 못한다. 婦人有士君子言行, 則是之謂女士。若平澤林公德之繼配孺人晉州姜氏, 其人也。自幼跡不出門, 及日親側。大人患疽, 口吮而愈之, 未嘗皺眉。平居雖倉卒, 無疾遽聲色。大人鍾愛, 惜其不爲男子子, 則知其已有士君子姿質。及適人, 以未顔舅姑爲至恨, 每諱辰, 三日不肉不葷, 雖雪寒, 沐浴致潔。祭畢, 餘哀彌日, 其必以素服從事者, 合於禮學家忌日縞素之論。夫子疾㞃, 禱代致藥, 靡不殫誠。竟至無幸, 矢心下從, 絶水漿者六日, 因夫兄之泣喩剴切, 幡然回心, 指其子曰: "所從在此。" 起視送終, 遵禮畢喪, 則能見得鄒孟氏可以無死之精義。臨終謂其子曰: "孝爲德本, 一人孝則一家和, 家和百福至。" 此又與《大學》"一家仁, 一國興仁"之旨相表裏。夫如是, 可不謂女士矣乎? 嗚呼! 今之日, 禮義掃地, 淪胥爲夷, 而婦女亦甚, 誠可寒心, 安得起孺人於九原, 而柯則乎世, 馴致哲媛之多見也? 其曾孫讓鎬七耋, 再造請墓文, 而示以狀, 狀簡嚴可信, 爲之書大者, 而見其餘, 俾鐫于扶安侍御山南枕坤之阡, 庶域中巾幗之過此者, 知其爲女士之藏, 而有以慕效也夫。孺人, 叅議克文後, 士人文相女。生以純祖庚寅, 卒以洪陵壬午。林公, 忠貞公彦修、直提學孟義後, 學生宗孝子。三男: 錫黃, 錫伍出繼, 錫祥。三女: 延安李德亨、高興柳光鎭、全州崔奎永。長房孫泰淳, 季房孫致淳。曾玄以下不盡錄。 죽지……의리:《맹자》 〈이루 하(離婁下)〉의 "얼핏 보면 죽을 만하고, 자세히 보면 죽지 말아야 할 경우에 죽으면 용맹을 상한다.[可以死 可以無死 死 傷勇]"라는 구절을 가리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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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열부 유인 김씨 묘표 정축년(1937) 孝烈婦孺人金氏墓表【丁丑】 내가 일찍이 남양(南陽) 홍군(洪君) 석규(錫奎), 석모(錫模) 형제를 본 적이 있는데 총명하고 준수함이 대단해 빠른 시일에 대성할 듯하였다. 얼마 뒤에 형제가 사는 마을을 들렀는데 집안이 풍족하고 사람이 넉넉하였으니 내가 그 선조 중에 선을 행한 사람이 있어서 하늘이 후손에게 보답한 것이라 생각하였다. 어느 날 홍석규가 부친 홍덕의(洪德義)의 명을 받들고 증조비(曾祖妣) 유인 김씨의 행록(行錄)을 보여주고는 묘표를 청하였는데 내가 그 행록을 보니 다음과 같았다.유인은 29세 때 남편이 병이 들자 하늘에 기도하여 자신이 대신 앓기를 원하였고, 병이 심해지자 손가락을 째어 피를 흘려 넣어 3일 동안 회생할 수 있게 하였다. 거의 숨이 끊어지려 할 적에 다시 손가락을 잘라 피를 흘려 넣어 3일 동안 연명하게 하였다. 고복(皐復)을 마친 뒤에는 물과 곡식을 끊어 물을 쏟아내듯 피를 토하고 누차 하종(下從)하려 하였으나 구조를 받아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이윽고 선뜻 마음을 바꾸고 말하기를, "내가 이렇게 죽으면 육순인 시부모는 누가 봉양하겠으며, 여덟 살배기 아이는 누가 키우겠는가. 나는 차라리 늙은 시부모를 봉양하고 어린 아이를 키워 죽은 남편의 마음을 이루어 종부(從夫)의 큰 일로 삼는 것이 낫다."라 하고 이에 집안일을 다스리는 데 부지런하여 시부모를 섬기는 데 살아서나 죽어서나 예로써 하고 올바른 방도로 자식을 가르쳐 사군자(士君子)의 문하에서 학문하게 하였다. 평소 아들을 경계하여 말하기를, "공경으로 몸가짐을 하면 치욕을 멀리 할 수 있고 검소함으로 가산을 다스리면 패가(敗家)를 면할 수 있을 것이다."라고 하였다.아, 사람의 선은 효(孝)가 그 근본이고 부인의 선은 또 정렬(貞烈)보다 큰 것이 없다. 유인이 한 일로 말하면 진실로 사람으로서 지극히 근본적이고 가장 큰 선이다. 또 선뜻 마음을 고쳐 위로 계승한 바가 있고 아래로 전한 바가 있어 50년을 한결같이 하여 가문이 백세, 천세 동안 이어질 기반을 세웠다. 이것이 어찌 한때 원통한 마음이 격해져 자신의 몸을 죽임으로써 절개와 열행이라는 이름을 널리 알려지게 하고 그만인 것과 비교할 만한 일이겠는가. 대개 유인이 이런 선을 행한 것은 스스로 그 도리를 다했을 뿐이니 어찌 보답을 바랐겠는가. 자연히 그렇게 하여 다른 것을 기대하지 않고, 좌계(左契)를 갖고서137) 후세를 기다려 몸이 남은 복을 받아 생전에 자손의 효성스러운 봉양을 받았다. 선을 행한 자에게는 하늘이 복으로 보답한다는 옛사람의 말을 어찌 믿지 않겠는가.나는 원컨대 유인의 후손이 된 자는 마땅히 오늘날의 성대함이 모두 유인의 덕이라는 점을 알아 〈대아(大雅)〉의 염수(念修)의 의미138)를 생각하여 선을 행하는 데 힘써 유인이 스스로 그 도리를 다했던 마음을 자신의 마음으로 삼아야 한다. 또 나아가 공경하면 치욕을 멀리하고 검소하면 패가를 면한다는 평소의 경계가 "공손하면 치욕을 멀리하고139) 자신을 단속함으로써 잘못되는 경우는 드물다.140)"라는 성현(聖賢)의 가르침에 은연중에 부합한다는 것을 알아 늘 이 점을 생각해야 한다. 그리하여 가문을 창대하게 하기를 오늘날과 같게 할 뿐만 아니라 무궁한 세월 동안 유인의 덕을 받도록 해야 한다.유인의 본관은 강진(康津)이고, 충민공(忠敏公) 회련(懷鍊)의 후손이다. 부친은 영표(永杓)이고, 남편은 인표(麟杓)이니 익원군(益原君) 경림(景霖)의 후손이다. 아들은 성연(性然)이고, 딸은 청송(靑松) 심태한(沈泰漢)에게 시집갔다. 덕의의 아우는 진의(鎭義)이다. 석원(錫元), 석춘(錫春), 석률(錫律)은 덕의의 삼남, 사남, 오남이다. 춘택(春澤), 정택(正澤), 형택(炯澤)은 석규의 아들이다. 나머지는 많아서 기록하지 못하니, 번성함이 끝이 없다. 유인은 을축년(1925)에 졸(卒)하였으니 태어난 철종(哲宗) 신해년(1851, 철종2) 4월부터 75년의 수명을 누렸다. 부안군 산내면(山內面) 자미동(滋味洞) 동북쪽 산기슭 간좌(艮坐) 언덕에 묘소가 있다. 余嘗見南陽洪君錫奎、錫模兄弟, 聰俊發越, 若將一日而千里。旣而過其里, 蓋家溫而人足, 余意其先有爲善, 而天報之於其後也。日, 錫奎奉其大人德義命, 示以其曾祖妣孺人金氏行錄, 而請表墓之文。余觀其錄, 孺人年二十九, 夫病, 禱天願代。其革也, 裂指注血, 得回甦三日。其垂絶也, 又斷指延命三日。旣皐復, 絶水穀, 吐血如注, 累欲下從, 被救未遂。旣而幡然改曰: "我之若此, 六旬舅姑疇養? 八歲兒子疇成? 我豈若奉老成幼, 遂亡夫之心, 爲從夫之大者乎?" 乃勤於治家, 事舅姑, 生死以禮, 敎子以義方, 使遊學士君子門。雅戒其子曰: "敬以持身, 則辱可遠矣; 儉以治産, 則敗可免矣。"嗚呼! 人之善, 孝爲其本, 婦人之善, 又莫大乎貞烈。若孺人之爲, 固人極本最大之善, 而其幡然改心, 上有所承, 下有所傳, 五十年如一, 而樹人家千百世之基者, 豈一時寃激殺身, 以博節烈之名而已之可比哉? 蓋孺人之爲此善也, 自盡其道而已, 豈望報乎? 天然而不待, 執左契以俟異世, 而身受餘慶, 孝養於生前。爲善者天報以福, 古人之言, 豈不信哉? 余願爲孺人之後者, 當知今日之盛, 皆孺人之德, 而思〈大雅〉念修之義, 勉於爲善, 而以孺人自盡其道之心爲心。又進而知敬則遠辱、儉則免敗之雅戒, 暗合於聖賢恭遠恥辱、以約失鮮之訓, 而念念在玆, 俾其門昌大, 不但如今日, 而受孺人之德於無窮也。孺人籍康津。忠敏公懷鍊后。其父永杓, 其夫麟杓, 益原君景霖后。其子性然。女靑松沈泰漢。德義弟鎭義。錫元、錫春、錫律, 德義之三四五房男也。春澤、正澤、炯澤, 錫奎男。而餘煩不錄, 其盛未艾也。孺人卒以乙丑二月二十三日, 距其生哲宗辛亥四月, 得年七十五。墓于扶安郡山內面滋味洞東北麓坐艮之原。 좌계(左契)를 갖고서:좌계는 《노자(老子)》 79장에 "성인은 좌계를 갖고 있더라도 남에게 빚을 갚으라고 추궁하지 않는다.[聖人執左契 而不責於人]"라고 한 데서 따온 말로, 채권자가 가지고 있는 문서이다. 여기서는 유인 김씨가 후일 보답을 받을 만한 선행을 쌓았다는 뜻으로 사용하였다. 염수(念修)의 의미:《시경》 〈대아 문왕(文王)〉에 "너의 조상을 생각하지 않느냐. 그 덕을 닦을지어다. 길이 천명에 짝하는 것이 스스로 많은 복을 구하는 길이니라.[無念爾祖 聿修厥德 永言配命 自求多福]"라고 한 데서 따온 말로, 조상의 덕을 생각하여 자신도 덕을 닦는다는 의미이다. 공손하면 치욕을 멀리하고:《논어》 〈학이(學而)〉에 유자(有子)가 "공손함을 예에 가깝게 하면 치욕을 멀리할 수 있다.[恭近於禮 遠恥辱也]"라고 한 말을 가리킨다. 자신을……드물다:《논어》 〈이인(里仁)〉에 보이는 공자의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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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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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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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부

열부 유인 이씨 묘표 갑술년(1934) 烈婦孺人李氏墓表【甲戌】 왕촉(王蠋)이 말하기를 "충신은 두 임금을 섬기지 않고 열녀(烈女)는 두 남편을 섬기지 않는다."141)라고 하였으니 진실로 두 사람을 섬기지 않는다면 이미 충(忠)이고 열(烈)이다. 돌아보건대 세상 사람은 꼭 임금을 위해 죽고 남편을 위해 죽는 것만을 가장 뛰어난 일로 여기고 처한 상황의 당부(當否)는 논하지 않으니 이상한 일이다. 만약 왕촉이 군대로 협박을 당하지 않았다면 그는 절대 목을 매어 죽지 않았을 것임을 나는 알겠다. 또 이 점을 통해 남편이 죽으면 곧 하종(下從)하는 것이 꼭 옳지는 않다는 것도 알겠다.유인 함평 이씨(咸平李氏)는 함성군(咸城君) 극해(克諧)의 후손이고, 탐진(耽津) 안성용(安性用) 공의 아내이다. 시집을 갔을 때 시부모와 동서가 없어서 홀로 집안일을 맡아 여름에는 농사짓고 겨울에는 길쌈하였으며, 죽을 먹으며 지내도 근심하고 슬퍼하지 않았으며, 예로 남편을 받들었다. 어느 날 남편이 100리 밖으로 출타하였는데 흉음(凶音)이 갑자기 도착하니 곡하고 혼절했다가 깨어났다. 초종(初終)이 지난 뒤에 마음에 맹세하여 말하기를, "나의 명운이 박하니 죽느니만 못하다."라 하고는 집 뒤에 있는 큰 나무 아래에 가서 목을 매 죽으려고 하였다. 이때 아직 돌이 되지 않은 어린 아들이 응애응애 울자 선뜻 마음을 고치고 말하기를, "내가 죽으면 이 아이는 끝이고 안씨의 대는 끊어지니 무슨 얼굴로 구천(九泉)에서 남편을 보겠는가."라고 하였다. 이로부터 더욱 부지런히 집안을 다스렸으니 당시 나이가 23세였다. 고생을 겪으며 정절을 지키고 성실하게 30년을 살다가 임술년(1922, 철종13) 3월 6일에 졸(卒)하였다.아들 재욱(在旭)은 지금 장년으로 곧 노년이다. 두 아들을 두었으니 병길(炳吉), 병엽(炳葉)이다. 기업(基業)을 세우고 명성을 보존하였으니 사람들이 아무개 집안이 있는 것은 모두 유인의 공임을 안다. 비유하자면 약한 나라의 신하가 선왕(先王)의 부탁에 마음을 다해 수고하여 구업(舊業)을 잇고 복원한 것과 같으니 아, 어질도다.옛날 조씨(趙氏)에게 난이 있을 때 저구(杵臼)는 죽고 정영(程嬰)은 고아를 보호하였다.142) 저구가 죽었기 때문에 정영이 고아를 보호할 수 있었던 것인데도 오히려 죽음을 쉬운 일로 여기고 고아를 보호한 것을 어려운 일로 여겼으니, 하물며 한갓 죽기만 하는 경우이겠는가. 만약 유인이 쉬운 일을 취하고 어려운 일을 버렸다면 안씨가 안씨가 되는 것은 장담할 수 없는 일이다. 이에 처한 상황을 무시하고 한갓 죽기만 하는 것은 매우 쉽고 또 완전히 좋지는 않다는 것을 더욱 확신한다. 또 집안과 나라를 보호하여 임금과 남편을 위로하지 않는 것을 비록 충렬이 되기에 부족하다고 말하더라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안재욱이 부안 우산(右山) 안 대소(大沼) 북쪽 갑좌(甲坐) 언덕에 유인을 장사 지내고 비석을 마련해 나에게 글을 청하였다. 나는 유인의 정절과 현명함이 드러나지 못할까 두렵고 세상의 논의가 보이지 않는 것을 거듭 탄식하여 특별히 써서 드러낸다. 王蠋有言: "忠臣不二君, 烈女不二夫。" 苟其不二, 斯已忠烈矣。顧世之人, 必以死君死夫爲其尤, 而不論其所處當否, 則惑矣。使蠋而不遭兵劫者, 吾知其頸必不經矣, 又以是知夫死輒下從者之未必爲是矣。孺人咸平李氏, 咸城君克諧之後, 耽津安公性用之妻。旣歸, 無舅姑娣姒, 獨當家務, 夏畦冬績, 歠粥不戚戚, 奉夫子以禮。一日, 夫子出百里外, 凶音忽至, 哭絶而甦。經初終, 矢之心曰: "吾之薄命, 不若死。" 至家後大樹下, 欲結項而死。時有幼子, 生未期, 呱呱泣, 乃幡然改曰: "吾死, 此兒休矣, 安氏絶矣, 何顔見夫子於泉下?" 自是尤勤治家, 時年二十三。辛苦貞信, 積三十年, 以壬戌三月六日卒。男在旭, 今壯且老。有二子, 炳吉、炳葉。樹立基業, 保存聲名, 人知有某家, 皆孺人功。譬如弱國之臣, 盡瘁付託, 纘復舊業。猗歟賢哉! 昔趙氏有難, 杵臼死之, 程嬰保孤, 杵之死, 所以成程之保孤, 猶易其死, 而難保孤, 况徒死者乎? 向使孺人取其易而舍其難, 安氏之爲安氏, 未可知也。於是乎益信無所處而徒死, 甚易且未善。又以其不保家國慰君夫, 雖謂不足爲忠烈, 不爲過矣。在旭葬孺人於扶安右山內大沼北甲坐原, 伐石而請余文。余旣懼貞賢之未闡, 重歎世論之無見也, 特書而表之。 왕촉(王蠋)이……않는다:왕촉은 전국 시대 제(齊)나라 화읍(畫邑)의 현인으로, 왕에게 올린 간언이 받아들여지지 않아 초야에서 농사하며 지냈다. 연(燕)나라 장수 악의(樂毅)가 제나라를 공격했을 때 왕촉을 연나라 장수로 삼고 만호(萬戶)의 식읍을 주겠다고 제안했으나, 왕촉이 사양했다. 이에 악의가 삼군(三軍)을 거느리고 화읍을 도륙하겠다고 협박하자, 왕촉이 "충신은 두 임금을 섬기지 않고 정녀(貞女)는 두 지아비를 섬기지 않는다.[忠臣不事二君 貞女不更二夫]"라고 하고 목을 매어 자결했다. 《史記 田單列傳》 조씨(趙氏)에게……보호하였다:춘추 시대 진(晉)나라 경공(景公) 3년 대부 도안가(屠岸賈)가 대신 조삭(趙朔)의 집안을 몰살하였다. 이때 조삭의 부인이 임신한 상태로 궁중에 숨어 유복자를 낳았는데 조삭의 벗인 정영과 저구(杵臼)가 조삭의 아이를 보호할 계책을 세웠다. 정영은 조삭의 진짜 아들인 조무(趙武)를 안고 산속으로 달아나 숨고, 저구는 다른 사람의 아이를 조삭의 아이로 꾸며 숨어 살다가 도안가에게 잡혀 살해당하였다. 경공 15년 한궐(韓厥)의 주선으로 조무를 조씨의 후계자로 삼아 조씨의 종사를 다시 계승하게 하였는데, 정영은 조무가 관례를 올리던 날 저구의 죽음에 보답하기 위하여 자살하였다. 《史記 趙世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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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열부 유인 김씨 묘표 경인년(1950) 孝烈婦孺人金氏墓表【庚寅】 부안군(扶安郡) 상림리(上林里)의 임기삼(林基三) 군이 재차 나의 집에 찾아와 울면서 고하기를, "나의 선비(先妣)는 효열과 지극한 행실이 있었는데 졸(卒)한 지 29년이 되었는데도 시대가 변해 이미 정표(旌表)할 곳이 없고, 자손은 식견이 우매하여 명망 있고 박학한 사람의 찬양도 받지 못하였습니다. 그런데 나의 나이는 이미 육순이니 지금 이를 처리하지 못하면 행적이 민멸되어 전해지지 못할까 깊이 두렵습니다. 바라건대 그대는 묘표에 새길 말 한마디를 써 주십시오."라고 하였는데 임기삼의 이웃에 사는 벗인 이장일(李章一)이 함께 와서 증명해 주었다. 이장일은 내 종조고(從祖姑)의 사위로 순수하고 진실한 고가(故家)의 후예이다. 이에 가장을 살펴 읽어보니 다음과 같았다.유인은 부안 김씨로 문정공(文貞公) 구(坵)의 후손이며, 고려 말의 충신인 광서(光叙)의 17세손이며, 화곡 선생(火谷先生) 명(銘)의 11세손이며, 학생(學生) 석록(錫祿)의 따님이며, 시집가서 보안(保安) 임지환(林祉煥) 공의 부인이 되었다. 임공은 서하(西河) 절의공(節義公) 춘(椿)의 후손이며, 진사(進士) 상학(相鶴)의 아들이다.유인은 시부모를 효성으로 섬겨, 비록 집이 가난하였으나 맛있는 음식을 빠뜨리는 일이 없었으니 사방의 이웃이 칭송하였다. 무자년(1888, 고종25)에 흉년이 들어 기축년(1889) 봄에 임공이 어머니를 모시고 가솔을 이끌고서 진안(鎭安)으로 이사하였다. 4년이 지난 계사년(1893)에 임공의 병이 위독해지자 유인이 손가락을 째어 수명을 연장하려고 하였으나 그렇게 하지 못하니 애통하여 혼절했다가 막 깨어나서 하종(下從)하겠다고 맹세하였다. 그러다가 곧바로 자신이 죽으면 어린 아들을 보호하지 못해 남편 집안의 후사가 없어진다고 생각하여 마침내 선뜻 생각을 고치고 삼가 염(殮)하고 장사 지내는 것을 살폈다.또 생각하기를, "타향 출신의 과부라 외인의 겁탈이 있을까 두렵다."라고 하여 이에 갈고리로 입 언저리를 끌어당겨 추한 얼굴로 바꾸었다. 그러나 또 생각하기를, "만전을 기하는 방도로 보면 이곳에서 거처해서는 안 된다."라 하여 집 뒤쪽 깨끗한 곳에 시아버지의 진사 교지(敎旨)와 방목(榜目)을 매안(埋安)한 뒤 칠순인 시어머니를 모시고 10세 아들과 8세 딸을 데리고 세 살배기 아들을 안은 채로 진안을 떠나 부안으로 돌아왔다.2년이 지난 을미년(1895)에 혼자서 370리 떨어진 진안에 가서 교지와 방목을 도로 모셔 옷깃 안에 감추고 남편의 유해를 파서 수습해 물건을 포장한 것처럼 싸서 짊어지고서 길을 나섰다. 그런데도 남에게 들킬까 염려하여 밤에는 유해를 베고 누워 새벽이 될 때까지 잠을 자지 않았다. 이렇게 15일이 지나서 고산(故山)에 반장(返葬)하였다. 전후로 떠도느라 답답하고 죽을까 두려운 심정과 쇠와 돌처럼 단단한 백절불굴의 뜻은 형언할 수 없는 점이 있다. 만년에는 집안 사정이 더욱 어려워졌으나 어머니를 봉양하고 어린 자식을 기르는 일부터 장사, 제사, 혼례에 이르기까지 마음과 예절을 다하여 고단하고 쇠약한 가문을 일으켜 세웠으니, 아, 장대하도다.71세가 되어 임술년(1922) 9월 28일에 임종하였다. 태어난 날은 철종(哲宗) 임자년(1852, 철종3) 9월 5일이다. 묘소는 상림리 선영 아래 간좌(艮坐) 언덕이다. 아들은 기술(基述), 기삼이고, 딸은 청도(淸道) 김한주(金漢湊)에게 시집갔다. 손자 을진(乙鎭), 길진(吉鎭)은 장남 소생이고, 길진은 차남의 양자로 나갔다. 외손은 김기홍(金璣洪), 기철(璣哲), 기오(璣五)이다.대개 옛날에 효열을 모두 갖춘 사람으로는 한(漢)나라 진씨(陳氏) 부인143)보다 나은 사람이 없다. 그러나 지금 유인의 일로 비교해 논하면 가난하고 고생하며 떠도는 가운데 시어머니를 진심으로 봉양한 것은 전택과 재산이 있었던 진씨와 비교하여 유인이 더 어렵고, 위로 받고 의지할 만한 자녀 하나 없이 한결같은 마음으로 의를 지킨 것은 2남 1녀를 둔 유인과 비교하여 진씨가 더 어렵다. 그러나 얼굴을 추하게 바꾸고 먼 길을 오가며 반장하여 처지가 곤궁하고 다급한 때에 선인의 사적을 보전한 것으로 말하면 고금을 두루 꼽아도 보기 드문 일이다.삼가 생각건대 유인은 진씨에 비해 더 나은 점만 있고 미치지 못하는 것은 없다. 그러나 진씨는 태수(太守)가 이를 보고하여 조정에서 상을 내리고 주자(朱子)가 사적을 기록하여 명성이 오랜 세월 전해지게 하였는데, 유인은 알려진 바 없이 조용하고 겨우 궁벽한 시골에 사는 나 같은 사람이 지은 변변찮은 묘표를 얻었으니 슬퍼할 만하다. 후세 사람은 부디 이곳이 효열부가 안장된 곳임을 알아서 공경을 표할지어다. 扶安郡上林里林君基三, 再踵余門, 泣而告之曰: "吾先妣有孝烈至行, 而其卒爲二十九年, 時世移易, 旣無處乎褒旌, 子孫識昧, 幷未得名碩贊揚, 而賤齒已六旬, 及今無以爲所, 則深恐泯而無傳, 願吾子幸惠一言于阡表。" 其隣友李章一偕來證之。李, 余從祖姑之婿, 而淳眞故家裔也。乃按狀而讀之。孺人, 扶寧金氏, 文貞公坵之後, 麗末忠臣光叙十七世孫, 火谷先生銘十一世孫, 學生錫祿女, 嫁爲保安林公祉煥之配。林公, 西河節義公椿后, 進士相鶴子也。事舅姑孝, 雖貧, 甘旨無闕, 四隣稱頌。戊子歲大無, 己丑春, 林公奉母率眷, 移居鎭安。粤四年癸巳, 疾革, 孺人裂指乞命而不得, 則慟絶方蘇, 矢心下從, 旋思我死, 幼子不保, 夫家無後, 遂幡然改圖, 謹視斂葬。又思他鄕孀婦, 恐有外劫, 乃鉤引口頰, 變作醜容, 然又思萬全之道, 此不可居。埋安皇舅進士敎旨、榜目於家後潔地, 陪七耋皇姑, 率十歲子、八歲女, 抱三歲乳男, 棄鎭還扶。經二年乙未, 隻身往鎭三百七十里, 還奉敎榜, 藏之衣襟中, 掘斂夫子骸體, 裹作物包樣, 擔負以行。猶恐被人發露, 夜則枕骸而臥, 達曙不寐。凡十有五日, 而返葬故山。其前後瑣尾拂鬱, 死喪憂懼之情, 鐵肝石腸, 百折不回之志, 有不可形言者。晩而家益艱, 奉母鞠幼, 以至葬祭婚嫁, 能盡情節, 樹立孤弱之門戶, 噫其壯矣! 壽七十一而終于壬戌九月二十八日, 其生則哲宗壬子九月五日。其墓上林里先塋下艮原, 其男基述、基三, 女淸道金漢湊。孫乙鎭、吉鎭, 長房出, 吉繼次房。外孫金璣洪、璣哲、璣五也。蓋古之孝烈俱備者, 莫尙於漢陳氏婦, 然今以孺人之事比論, 則貧苦流離之中, 忠養其姑, 視陳氏之有田宅財物, 孺人爲難; 無一箇子女可慰藉, 而一心守義, 視孺人之有二子一女, 陳氏爲難。至於變作醜容, 返葬千里, 保全先蹟於顚沛奔走之時, 歷選今古而罕覯者。竊謂孺人於陳氏, 有過之, 無不及焉。然而陳氏, 太守以聞, 朝廷賞賜, 朱子錄之, 聲名永世, 孺人則寥寥無聞, 僅得窮鄕陋文, 如余者筆而表其墓, 亦足悲夫! 後之人, 尙識其爲孝烈婦藏而式之哉!後滄先生文集卷之二十四 終 진씨(陳氏) 부인:16세에 시집을 왔다가 수자리 서러 떠난 남편이 죽어 젊은 나이에 과부가 되었는데, 늙은 시어머니가 죽을 때까지 개가하지 않고 정성으로 모셨다. 《小學 善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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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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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간통고류

척종(戚從) 간찰(簡札) 고문서-서간통고류-서간 戚從 戚從 정읍 성주이씨 이유원 후손가 성주이씨 이정순 모년 척종 아무개가 오랫동안 만나지 못한 것을 아쉬워하고 내년 봄에 만나기를 갈망한다는 간찰 모년 척종(戚從) 아무개가 오랫동안 만나지 못한 것을 아쉬워하고 내년 봄에 만나기를 갈망한다는 편지이다. 어린 날의 깊은 정을 느끼지만 두 곳이 떨어져 있어 만나 이야기할 기약이 견우(牽牛)와 직녀(織女)가 1년에 한 번 만나는 것보다 못하다고 하고, 독서에 흠은 없는지 궁금해 하였다. 여름 동안 끽긴(喫緊)하게 공부하여 주옥같은 글귀를 달빛 이슬 아래서 소리 내어 읊조리는 것을 매우 부러워한다고 하고, 자신은 부모님이 편찮으시고 형님은 아프셔서 근심으로 속이 매우 타고 있으나 대소가는 무탈하여 다행이라고 하고, 새봄에 만날 수 있기를 갈망한다는 내용이다. 여러 군데 수정한 곳이 있으며, 말미에 문장 종결이 되지 않아 낙장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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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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족제 사의 홍재에게 보냄 을축년(1925) 與族弟士毅 弘梓 乙丑 어제 어떤 사람이 나를 위하여 시초점을 쳐서 항괘(恒卦)에서 해괘(解卦)로 가는 괘를 얻었고, 또한 금귀(金鬼)가 왕성하여 비록 변괘가 되어 복덕(福德)을 등지는 곳으로 나아가나 매우 힘이 없습니다. 현제(賢弟)가 시초점을 쳐서 진괘(震卦)에서 풍괘(豐卦)로 가는 괘를 얻은 것과 흡사 서로 동일하니 누가 점을 믿을 수 없다고 말하겠습니까?대개 화복(禍福)은 하늘이 정한 것이라 물을 필요가 없고, 다만 나의 의리를 극진히 할 뿐입니다. 그 효사를 보며 말하기를, "그 덕을 항상(恒常)하지 않으면 곧 부끄러움이 닥치게 된다"139)라고 하였으니, 이 말은 공자께서도 평소에 칭하였던 것인즉 신명(神明)이 우리들에게 훈계한 것이 깊고 절실했습니다. 만약 삶을 탐하고 죽음을 두려워하여 의리에 미진한 바가 있다면, 이는 덕이 항상하지 못하여 부끄러움이 큰 것이니, 선사께 죄를 얻게 되고 신명에게도 죄를 얻게 되는 것이니, 가히 경계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에 두려운 마음으로 더욱 성찰하여 드디어 '항'이라는 글자로 나의 서재에 편액으로 삼았으니, 대개 주자가 자호한 돈옹(遯翁)의 고사140)를 외람되게 본뜬 것입니다. 비록 주자는 일이 자신에게 관계되니 자신의 원고를 불사르고 그 자취를 숨긴 것은 마땅할지라도, 우리들은 일이 선사에 관계되니 마땅히 선사의 의리를 밝혀서 그 덕을 떳떳하고 지속해야 합니다.감추고 드러내는 것이 비록 다르지만, 처신하는 도리는 일찍이 동일하지 않음이 없으니, 이 또한 알지 않아서는 안 됩니다. 전날 밤에 객관(客館)에서 우리 아우가 운운한 말이 나의 마음에 합치되는 바가 있었습니다. 마침 항덕(恒德)의 훈계를 신명에게 얻어 그로써 느낀 것을 적어 언급하니, 생각건대 깊이 헤아려 주리라 봅니다. 昨有人爲余筮, 得恒之解.亦金鬼旺盛雖變出午福德而太無力.與賢弟筮得震之豊, 恰恰相同, 孰謂占不可信也.蓋禍福天定不須問, 只要盡吾義而己.觀其爻辭曰, 不恒其德, 或承之羞, 而此爲孔子之雅稱者, 則神明之所以戒吾輩者, 深且切矣.若貪生惡死, 義有所未盡, 是德不恒而羞之大, 得罪先師矣, 得罪神明矣.可不戒哉.於是惕然加省, 遂以恒字扁吾齋, 蓋僭擬朱子自號遯翁故事也.雖然朱子事關當身, 焚己稿而遯其跡固也, 吾輩則事關先師, 當明師義, 恒其德也.晦顯之雖殊, 道未嘗不同, 此又不可不知也.前夜客館, 賢弟有所云云, 有會于心.適得恒德之戒于神明, 因以識感者告及, 相深見諒也. 《주역》恒卦 九三爻의 爻辭에 "그 덕이 항구하지 않은지라 혹 부끄러움으로 이어지리라.〔不恒其德, 或承之羞.〕"라고 하였다. 주자가 자호한 돈옹(遯翁)의 고사 송 영종(宋寧宗) 경원(慶元) 연간에 한탁주와 조여우가 권력 쟁탈전을 벌일 때 주희 등이 조여우의 편을 들었는데, 한탁주가 득세한 뒤에 승상 조여우 이하 59인을 모조리 몰아내는 한편, 도학을 위학(僞學)이라고 규정하고는 주희의 학문을 일체 금지시키도록 하였다. 이때 주희가 수만 언의 봉사를 작성하여 조여우를 변호하려고 하였는데, 문인 채원정이 점을 쳐 보니 둔괘(遯卦)가 동인괘(同人卦)로 변하였으므로, 주희가 잠자코 초고를 불사르고는 마침내 둔옹(遯翁)이라고 호를 바꿨다는 기록이 전한다. 《周易筮述 卷8》《吹劍錄外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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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간도로 돌아가는 장명숙【진우】을 전송하는 서문 【임자년(1912)】 送張明叔【鎭宇】歸北艮序 【壬子】 옛날 주(周)나라가 점차 쇠약해지는 말기에 난신적자(亂臣賊子)가 뒤를 이어 나타나고 변방의 오랑캐가 중국을 침범하자, 이에 우리 부자(夫子)께서 도가 행해지지 않음을 개탄하고 바다를 건너 오랑캐 나라에 살고 싶다는 말씀을 하셨으니8), 백대가 흘러 내려온 뒤에 그 말씀을 듣고 그 시대를 상상하면 아직도 사람으로 하여금 슬피 탄식하게 하는데, 하물며 혼란스럽고 멸망해 버린 우리나라는 주나라 말기에 비하면 어떠하겠는가. 짐승 같은 오랑캐가 사람을 핍박하고 예의는 땅을 쓴 듯 없어져서 우리 유자(儒者)는 도가 행해지지 않을 뿐만 아니라 몸조차 세상에 용납을 받지 못하고 있으니, 만약 부자께서 살아 계셨다면 멀리 떠나갈 것이 틀림없고, 한갓 말 사이에 드러낼 뿐만이 아니었을 것이다.돌아보건대, 우리나라의 사류(士類)들은 대부분 구차하게 인습을 그대로 따르고 과감하게 결단하여 용감하게 행동하지 못하였기에 노예의 치욕에서 벗어나지도 못하였고, 멸망의 재앙을 또 장차 밟게 되었으니, 이 때문에 늘 동지를 위해 개탄하며 애석하게 여겼고, 또한 마음속으로 부끄러워하며 탄식하였다. 그런데 임자년(1912) 여름에 사문(斯文) 장명숙(張明叔)이 폐사(弊社)로 나를 찾아왔기에 그와 이야기를 나누어보니, 대체로 걸출하여 지조와 절개가 있는 사람이었다. 얼마 뒤에 듣건대, 대대로 부령(富寧)에 살면서 가문의 명망이 매우 성대했는데, 지난해 합방(合邦)의 변고를 만나 원수 왜노의 백성이 되는 것을 부끄럽게 여기고 마침내 가족을 데리고 북간도(北間島)로 들어가 거주하였고, 관북(關北 함경도)의 여러 공들도 또한 함께 간 사람이 많았다고 하니, 내가 말하였다."용감하구나. 이 일이여. 무릇 사람의 보편적인 감정은 멀리 있는 재앙에 대해서는 느긋해 하고 가까이 있는 재앙에 대해서는 급하게 여기니, 본래 피부에 와 닿을 만큼 매우 가까운 재앙이 있는 경우가 아니면 고향을 편안하게 여기고 타향으로 이주하는 것을 어렵게 여기기 마련이다. 지난해의 변고는 참으로 나라를 위해 통곡할 만한 것이었지만, 내 한 몸에 미칠 재앙으로 치자면 눈앞에 바로 닥칠만한 것은 아니었다. 그런데 오직 대의(大義)를 보고 고상한 뜻을 숭상하여 친척이나 벗들과 왕래하는 즐거움을 버리고 좋은 논과 큰 집에서 편안히 지내면서 배불리 먹는 이로움을 포기한 채 머나먼 지역인 궁벽한 땅 밖에서 종적을 감추고 풀뿌리와 나무껍질 사이에 삶을 부치며 죽을 때까지 후회하지 않을 것처럼 하였으니, 실로 의리가 중요하고 이해(利害)가 가볍다는 것을 실제로 터득하여 알지 않았다면 어찌 이런 노예의 치욕과 멸망의 재앙에 대처할 수 있었겠는가. 나는 그가 초연하게 홀로 서서 참으로 공자의 무리에 부끄러움이 없는 사람임을 알겠다.그러나 이로 인하여 삼가 권면할 것이 있다. 옛날 부자께서 구이(九夷)에 살고자 하실 때에 어떤 사람이 비루하여 거주할 수 없을 것이라고 의심을 보이자, 부자께서는 '군자가 거주한다면 무슨 비루함이 있겠는가.'라고 답하였다.9) 대저 오랑캐의 풍속은 진실로 비루한데, '군자가 거주한다면 비루하지 않다'라고 한 것은 무엇 때문인가? 참으로 덕이 자신에게 닦여지고 교화가 남에게 미쳐 옛 습관을 버리고 마침내 아름다운 풍속이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지금 이 간도 한 구역은 북쪽 모퉁이에 치우쳐 있어 역대 성인의 교화가 미치지 못하고, 선대 현인의 유풍이 알려지지 않은 곳이니, 그 풍속이 비루하지 않다고 이를 수 없다. 바라건대 그대와 제공은 단지 뜻을 숭상하고 의리를 지키며 치욕을 멀리하고 재앙에서 벗어나는 것만으로 할 수 있는 일을 이미 끝마쳤다고 여기지 말고, 또 자기에게 보존된 것을 깊게 하고 남에게 베푸는 것을 넓혀서 덕으로 이끌고 예(禮)로 거느리며 인(仁)으로 적셔 주고 의(義)로 연마하여 백성들의 풍속을 크게 바꾸어 도에 이를 수 있게 함으로써 성학(聖學)의 일파가 북간도에서 창도되고 밝혀지게 해야 할 것이다. 그런 뒤에야 비로소 부자께서 바다를 건너 오랑캐 땅에 거주하려 했던 지극한 뜻을 받들어 좇았다고 이를 수 있으니, 청컨대 그대는 돌아가서 더욱 힘쓰고, 또한 이것으로 제공에게 질정하라." 昔周末之浸衰也, 亂賊接踵, 裔戎猾夏. 於是吾夫子慨道之不行, 而有浮海居夷之語. 百世之下, 聞其語, 想其時, 尙能使人悲歎而涕零, 矧玆我邦之亂亡, 視周末何如也? 夷獸逼人, 禮義掃地, 爲吾儒者, 非惟道之不行, 身且不見容於世, 如使夫子而在者, 其遐擧遠引也必矣, 不徒發於言辭之間而已也. 顧此我邦士類, 類多因循苟且, 不能果決勇行, 奴隷之辱, 旣不能免, 而滅亡之禍, 又將蹈焉. 是以常爲同志慨惜, 而亦自愧歎于中. 壬子夏, 張斯文 明叔訪余於弊社, 與之語, 蓋傑然而有志節者也. 旣而聞其世家富寧, 族望甚盛, 而値往年合邦之變, 恥作讎奴之民, 遂挈家入北艮島居焉, 而關北諸公, 亦多同往者. 余曰: "勇哉此擧也. 夫人之常情, 緩於遠而急於近. 自非有剝膚切近之災, 不免安土而重遷. 往年之變, 誠可爲國家痛哭, 而在一身之禍, 非目下切近者. 而惟大義是睹, 高志是尙, 舍親戚朋友過從之樂, 棄良田厦屋安飽之利, 鏟跡於絶域荒陬之外, 寓生於草根木皮之間, 若將終身而不悔. 苟非實見得理義之重而利害之輕, 烏能辦此奴隷之辱、滅亡之禍? 吾知其超然獨立而誠無愧孔子之徒也. 然因此而竊有奉勉者. 昔夫子之欲居九夷也, 或有以陋不可居見疑者, 則夫子答以'君子居之, 何陋之有?' 夫夷狄之俗固陋矣, 而其曰'君子居之則不陋'者何也? 誠以其德修于己, 而化及於人, 使去其舊習, 遂成美俗也. 今此艮島一區, 僻在北陲, 列聖聲敎之所不曁, 先賢遺風之所未聞, 其俗不可謂不陋. 願明叔與諸公, 毋但以尙志守義, 遠辱免禍, 爲能事已畢, 又能存乎己者深而施諸人者廣, 導之以德, 率之以禮, 漸之以仁, 摩之以義, 丕變民俗, 以至乎道, 使聖學一派, 倡明於北艮. 然後乃可謂奉遵夫子浮海居夷之至意也. 請明叔歸而勉旃, 亦以奉質於諸公. " 부자(夫子)께서 …… 하셨으니 부자는 공자를 말하는 것으로, 《논어》 〈공야장(公冶長)〉에서 공자(孔子)가 "도가 행해지지 않으니, 뗏목을 타고 바다로 나갈까 보다.〔道不行, 乘桴, 浮于海.〕"라고 하였고, 〈자한(子罕)〉에 "공자께서 구이(九夷)에 살고 싶어 하셨다.〔子欲居九夷.〕"라는 구절이 보인다. 옛날 …… 답하였다 《논어》 〈자한(子罕)〉에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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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우 선생 문집10)의 서문 遜愚先生文集序 《예기》에 이르길, "사람이 사람인 이유는 예(禮)와 의(義)가 있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사람이 진실로 의를 지키고 예를 밝힐 수 있다면 사람으로서 지켜야 할 도리의 대체가 이에 확립된 것이니, 예를 들면 세손익위사 사어(世孫翊衛司司禦)를 지냈고, 이조 판서에 추증되었으며, 시호가 정민(貞敏)인 손우 선생(遜愚先生) 홍공(洪公)이 바로 그런 사람이다.공은 청음(淸陰) 김 문정공(金文正公 김상헌(金尙憲))을 스승으로 섬겨 《춘추(春秋)》의 의리를 들었기에 정축년(1637) 이후로 개연히 바닷가에 은둔할 뜻을 두었다가 마침내 태백산(太白山)으로 들어가 정공 양(鄭公瀁)ㆍ강공 흡(姜公恰)ㆍ홍공 우정(洪公宇定)ㆍ심공 세장(沈公長世)과 더불어 벗이 되었는데, 세상에서 이들을 '태백오현(太白五賢)'이라 일컬었고, 동춘 선생(同春先生 송준길(宋浚吉))은 시를 지어 주어 세상을 피해 정절을 지키도록 권면하였으니, 의리를 지켰다고 이르지 않을 수 있겠는가. 예서(禮書)에 전념하여 책을 이룰 만큼 글을 모으고 기록하여 집안에서 시행하는 것이 이미 도타웠고, 다른 사람에게 은혜를 베푸는 것도 또한 넓었기 때문에 우암 선생(尤菴先生 송시열(宋時烈))이 공을 예학(禮學)으로 추천하며 동지 중에 으뜸이라고 하였으니, 예를 밝혔다고 이르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의가 있고 예가 있으니, 대체를 확립했다고 이르지 않을 수 있겠는가. 대체로 문정공(文正公)은 평범한 선비를 천거할 사람이 아니고, 우암은 차례를 밟지 않고 승급시켜 등용할 후보자로 추천한 것을 보건대, 또한 공이 세상을 경영할 인재임을 알 수 있다.문예(文藝)는 군자에게 지엽적인 일인지라 진실로 중시하거나 경시할 만한 것이 못 되지만 공이 오직 숭상했던 것은 예와 의였기 때문에 평소 저술한 것이 이 두 가지 사이를 넘지 않았음에도 인륜의 명분을 가르치는 유교(儒敎)를 크게 돕기에 충분하였으니, 유집(遺集)의 간행을 또 어찌 그만 둘 수 있겠는가. 다만 지금 예와 의가 사라지고 천지가 뒤집히는 재앙이 그칠 날이 없어 혼자서는 힘쓰기 어렵게 되었음을 개탄하고, 앞선 시대에 닦아놓은 공덕이 이미 멀어졌음을 슬퍼하였는데, 이러한 때에 비로소 공의 예와 의에 관한 책이 세상에 나와 퍼지게 되었으니, 300년의 오랜 세월 동안 미처 간행하지 못한 것은 하늘이 어쩌면 오늘날을 기다려 때에 맞는 쓰임으로 삼아 천운이 돌아오고 양기가 회복되는 징조로 삼아서일 것이다. 공의 10세 손 사목(思穆)과 사철(思哲)이 나에게 서문을 부탁하였기에 내가 공의 평생 대업과 마음속에 느낀 바를 위와 같이 간략하게 쓸 따름이다. 《記》曰: "人之所以爲人者, 禮、義也. " 人苟能秉義而明禮, 人道之大體斯立矣. 若司禦贈吏判謚貞敏 遜愚先生 洪公, 卽其人乎. 公師事淸陰 金文正公, 聞《春秋》之義, 丁丑以後, 慨然有蹈海之志, 遂入太白山, 與鄭公 瀁、姜公 恰、洪公 宇定、沈公 長世爲友, 世稱太白五賢. 同春先生贈詩, 有遯世守貞之奬. 可不謂之秉義乎? 專精禮書, 裒輯成編, 行之家者旣敦, 惠諸人者亦廣. 故尤菴先生推公禮學, 爲同志中第一, 可不謂之明禮乎? 義且禮焉, 可不謂大體之立乎? 蓋觀乎文正公非尋常士子之薦, 尤翁不次陞用之擬, 亦可以知公經世之才矣. 至於文藝, 是君子之末務, 固不足重輕. 公惟其所尙者, 禮、義也. 故其平日所著, 不越乎二者之閒, 而有足以大裨名敎者. 遺集之刊, 又烏可已乎? 顧今禮、義滅亡, 天地翻覆之禍, 靡所止屆, 慨隻手之難力, 悼前修之已遠. 于斯時也, 乃得公禮義之書, 出而行之世. 其所以未遑於三百年之久者, 天其或者留待今日, 以爲適時之用, 而作天返陽復之兆也歟. 公十世孫思穆、思哲, 屬愚以序. 余略書公生平大致及所感于中者, 如右云爾. 손우 선생의 문집 손우 선생(遜愚先生)은 홍석(洪錫, 1604~1680)으로, 손우는 그의 호이며, 문집은 그의 저서인 《손우문집(遜愚文集)》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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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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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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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으로 돌아가는 김예옥【선진】을 전송하는 서문 【병오년(1906)】 送金睿玉【璿鎭】北歸序 【丙午】 무릇 사람이 벗을 사귈 적에 거처의 멂과 가까움으로 인하여 감정의 친근함과 소원함이 있으니, 이는 이치와 형세상 당연한 것이다. 그런데 나의 동문인 벗 김예옥(金睿玉)은 나와의 거리가 천여 리가 되는데도 4년 사이에 두 차례나 찾아왔으니, 거처하는 곳이 매우 먼데도 감정의 친근함이 또 이와 같은 것은 무엇 때문이겠는가? 사람이 서로 찾는 것은 소리와 기운[聲氣]1)이 같기 때문이다. 소리와 기운이 진실로 같다면 비록 남쪽과 북쪽으로 멀리 떨어져 있고 월나라와 진나라처럼 소원할지라도 도리어 한 눈에 바라보이는 거리만큼이나 가깝게 느껴지고 정분이 두터운 친척처럼 친근하게 여겨질 뿐만이 아닐 것이니, 이 또한 필연의 이치이다.오늘날 사람과 벗하는 것만 그러할 뿐만 아니라, 시대를 거슬러 올라가 옛 사람과 벗하는 것도 또한 그러하다. 대저 옛사람이 뜻을 두었던 것은 도학(道學)이고, 보존했던 것은 인애(仁愛)이며, 지켰던 것은 의리(義理)이니, 후대 사람이 진실로 성명(性命)과 윤상(倫常)의 도학을 구해서 문장이나 일의 공적과 같은 허물에 동요되지 않고, 만물을 한 몸처럼 여기는 인애를 이루어서 남과 나의 서로 다른 형체의 사사로움에 부림을 당하지 않으며, 굳세고 변하지 않는 의리를 세워서 빈천이나 위력의 곤란에 옮겨가지 않을 수 있다면 이는 후대 사람이 옛사람과 또한 소리와 기운이 같게 되는 것이다. 소리와 기운이 같다면 세대가 서로 멀다 한들 또 어찌 그 친근함에 틈을 낼 수 있겠는가.지금 나와 예옥은 비록 말세에 태어났지만 벗하고자 하는 것은 바로 옛사람이고, 하고자 하는 것은 바로 옛사람의 학문이니, 하고자 하는 것이 이미 같다면 이는 소리와 기운이 같은 것이다. 이것이 거처하는 곳이 멀어도 감정이 친근한 이유이다. 다만 옛사람의 학문에 대해 안목이 어두워 명철하지 못한데다 입장이 확고하지 못하여 안주하는 것도 어려워 하니, 이것이 또 우리 두 사람이 함께 힘써야 할 것이다. 끊임없이 힘써 각기 그 소원을 이룬다면 거처의 멂은 멀게 여겨지지 않고 더더욱 가깝게 느껴지며, 친근한 감정은 더더욱 친근해지고 소원해지지 않아서 옛사람과 더불어 세 벗이 될 것이니, 어찌 다행한 일이 아니겠는가. 이에 서문을 지어 서로 더불어 돌아가 그렇게 되기를 기다린다. 凡人之爲友也, 因居之遠近而有情之親疏, 此理勢然也. 余同門友金睿玉, 與余相去也, 凡千有餘里, 而得見再訪於四載之間, 居之甚遠而情之相親, 又若此何也? 人之所以相求者, 以聲氣之同也. 聲氣苟同, 雖朔南之遠, 越秦之踈, 反不啻莽蒼之近, 懿戚之親, 此亦必然之理也. 非惟與今人友爲然, 尙而與古人友亦然. 夫古人之所志者道學也, 所存者仁愛也, 所守者義理也. 後之人誠能求得性命倫常之道, 而不動乎文章事功之累, 成得萬物一體之仁, 而不役乎人我相形之私, 立得强矯不變之義, 而不移乎貧賤威武之困焉, 則是後人之於古人, 亦同一聲氣也. 聲氣之所同, 世之相遠, 又何以間其親也? 今余與睿玉, 雖生於叔季之世, 然所欲友者, 乃古人也, 所欲爲者, 乃古人之學也, 所欲者旣同, 則是聲氣之同爾, 此所以居遠而情親者也. 第於古人之學, 眼力黭黮而未明, 脚跟依違而難住, 是又吾二人之所共勉者. 勉之不已, 至於各遂其願, 則居之遠也, 不遠而愈近, 情之親也, 愈親而不踈, 直可與古人而幷爲三友矣, 豈非幸哉? 於是乎書之, 相與歸而俟之. 소리와 기운[聲氣] 친구 사이에 함께하는 뜻이나 취향을 비유하는 말로, 《주역》 〈건괘(乾卦) 문언(文言)〉에 "같은 소리는 서로 응하고, 같은 기운은 서로 구한다.〔同聲相應, 同氣相求.〕"라는 말에서 유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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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령 김씨 문계안의 서문 【신유년(1921)】 扶寧 金氏門契案序 【辛酉】 《시경》에 "부모가 심은 뽕나무와 가래나무도 반드시 공경한다.11)"라고 하였으니, 뽕나무와 가래나무조차 선조의 손때가 남아 있다 하여 오히려 공경하였는데, 하물며 선조의 넋이 의탁하고 있는 묘소야 더 말할 것이 있겠는가. 이것으로 봉분을 하지 않고 나무를 심지 않는 것은 태고의 풍속이 됨을 면치 못하고 무덤가의 나무를 베지 않는 것이 바로 선왕의 제도가 됨을 알 수 있다.한(漢)나라와 당(唐)나라 이후로 우리 왕조에 이르러 더욱 묘소에서 지내는 제사에 마음을 다하여 이슬과 서리가 내리는 봄ㆍ가을과 세시(歲時)ㆍ속절(俗節)마다 가까이로는 조부와 부친으로부터 멀게는 시조까지 미루어서, 성묘하는 의식과 분향하는 제사를 때에 맞게 하고 공경하게 하지 않음이 없었으니, 이것은 진실로 천리와 인정에 그만둘 수 없는 것이다.내가 생각하기에 사대부가(士大夫家)의 제사를 지내는 예법은 제왕가(帝王家)와 다르니 체협(禘祫)12)은 감히 할 수 있는 바가 아니고, 제사는 친진(親盡)13)하지 않았더라도 때로 기피하는 경우가 있으니 묘소에서 지내는 제사는 오히려 그만 둘 수 있다. 그러나 종친 관계가 이미 끝나고, 묘소에서 또 제사를 지내지 않는다면 끝내 조상에 대한 마음을 드러낼 곳이 없게 된다. 이로 보면 친진에 1년에 한 번 묘소에서 제사지내는 것[歲一祭]이 예의 중도에 맞는 제도가 되니, 더욱 정성을 다 해야 한다. 그러나 매번 보건대, 잔약한 자손과 가난한 종족의 집안은 해마다 여러 신위에 올리는 제물을 공급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이 있으니, 중유(仲由)가 예를 행할 수 없다고 탄식하고14), 맹자가 기뻐할 수 없다고 훈계한 것15)은 진실로 까닭이 있었다.종친의 영재인 인술(仁述)이 이러한 것을 근심하여 여러 친족과 의론하여 약간의 자본을 모으고 하나의 계를 설립하여 먼 훗날을 경영할 계책을 도모하면서 나에게 한마디 말을 권면해 줄 것을 청하였다. 내가 생각하기에 천하의 일은 비록 진실하지 않으면 사물이 성립될 수 없다16) 하더라도 사물이 없으면 또한 그 진실함을 볼 수 없다. 지금 제사로 논하면 재계(齋戒)와 애정, 정성은 진실함이고, 제수 물품[牲羞]과 제기[籩豆]는 사물이다. 한낱 사물만 있고 진실함이 없다면 진실함도 또한 헛된 것이고, 만약 사물이 없다면 비록 진실함이 있다 하더라도 어디에 담기겠으며, 선조가 어디에서 흠향하겠는가. 그렇다면 사물과 진실함 둘 다 지극하여 어느 한 가지도 폐해서는 안 되는 것이 참으로 바꿀 수 없는 완전한 의론이며, 그 중에서 본말과 경중을 말한다면 《주역》에 "동쪽 이웃집에서 소를 잡아 성대하게 제사지내는 것이 서쪽 이웃집에서 검소하게 제사를 지내는 것만 못하다.17)"라는 경계가 있으니, 이것이 또 마땅히 살펴야 할 바이다. 만약에 혹 서쪽 이웃의 검소한 제물마저 없게 된다면 효자와 효손의 마음이 다시 어떠하겠는가? 나는 그래서 한마디 말로 결단하여 말하기를, "무릇 선조에게 제사를 지내되 사물에 힘을 다하지 않는 것은 반드시 진실함이 없는 것이다."라고 할 것이니, 그대는 이러한 데에서 거의 벗어났음을 알겠다.또 생각하건대, 사람이 선조에게 제사를 지내는 것에 진실함을 다하는 것은 내 몸이 태어난 근본을 위해서이다. 그러므로 공자가 말하기를, "자기 몸을 공경하지 않으면 이는 근본을 상하게 하는 것이다.18)"라고 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말한다면 몸을 해치고 근본을 상하게 한 것이 죄가 될 만함은 일찍이 제사를 지내지 않고 근본을 잊는 것보다 심하지 않은 적이 없다. 내가 바라건대, 이 계안에 들어간 사람은 제물을 잘 갖추어 해마다 선조의 묘소에 제사지내는 것으로 후손으로서 할 수 있는 일을 다했다고 여기지 말고 반드시 '자신을 공경하라'는 성인의 가르침에 종사하여 간단한 말과 걸음걸이 등의 작은 언행부터 몸을 세우고 세상일에 응대하는 등의 큰일에 이르기까지 만약 선왕의 도와 옛 현철의 법규에 어긋난 점이 있거든 전전긍긍하여 감히 잠시라도 거기에 거처하지 않음으로써 선조에게 욕됨이 없기를 구한다면 그것이야 말로 몸을 공경함이 클 것이고, 선조를 선양한 초손(肖孫)이라 이를 수 있을 것이다. 선조의 묘소를 공경히 닦고 때마다 제사를 경건히 받드는 것은 다만 인사의 한 가지 소략한 항목에 지나지 않을 뿐이니, 어찌 이에 힘쓰지 않을 수 있겠는가. 서문으로 인해 이렇게 말하여 책머리에 쓰게 한다. 《詩》云: "維桑與梓, 必恭敬止. " 桑梓以祖先手澤之存, 而猶加敬焉, 況於祖先體魄攸託之丘壟乎? 是知不封不樹, 不免爲荒古之俗, 而不斬丘木, 乃得爲先王之制也. 自漢、唐以降, 逮夫我朝, 尤盡情於墓祭, 春露秋霜, 歲時俗節, 近自祖禰, 遠推其所自, 瞻掃之儀, 香苾之奉, 罔不惟時惟虔, 是固天理人情之不容已者也. 余謂士夫家祭禮, 與帝王異, 禘祫非所敢, 祭則親未盡而有時忌者, 墓祭猶可已也. 宗已毁而墓又不祭, 則終無所用其情也, 是則親盡歲一祭, 爲禮之中制, 而尤當盡誠者也. 然每見人家孱孫貧族, 多有不給於每歲累位之薦者, 仲由之歎無以爲禮, 孟子之訓不可爲悅, 良有以也. 宗英仁述, 爲是之憂, 議與諸族, 合若干資, 立一契, 以圖經遠計, 請余一言以勖之. 余惟天下之事, 雖不誠無物, 而無物亦無以見其誠. 今以祭祀論之, 齋戒愛慤, 其誠也; 牲羞籩豆, 其物也. 徒有其物而無其誠, 則誠亦虛矣, 若無其物焉, 則雖有誠, 何所寓乎? 而祖先安所享乎? 然則物、誠兩至, 不可偏廢者, 固不易之完論, 就中而語本末輕重, 則《易》有"東鄰殺牛, 不如西家礿"之戒, 此又在所當審. 若或幷與西礿之物而闕焉, 則孝子慈孫之心, 復如何哉? 余故斷之以一言曰: "凡祭先而不盡力於物者, 必其無誠者也. " 而子於此, 庶知其免矣夫. 抑又念之, 人之所以盡誠於祭先者, 爲吾身所生之根本也. 故孔子曰: "不能敬其身, 是傷其本. " 由此言之, 戕身傷本之爲可罪, 未嘗不甚於不祀而忘本也. 吾願入此契者, 勿以克備粢牲, 歲祀先墓, 作後承之能事, 更須從事乎聖人敬身之訓, 自片言尺步之細, 以至立身酬世之巨, 苟有背於先王之道、前哲之規者, 兢兢然不敢須臾處焉, 以求無忝乎所生, 則其爲敬身也大矣, 而可謂揚先之肖孫也. 其在敬修丘壟, 虔奉蒸嘗, 特不過爲人事之一疏節爾, 盍於是勉乎哉? 因序此語, 俾書其卷首云. 부모가 …… 공경한다 《시경》 〈소아(小雅) 소반(小弁)〉에 보인다. 체협(禘祫) 조상의 신주를 한곳에 모셔 놓고 지내는 제사를 말한다. 친진(親盡) 제사를 지내는 대수(代數)가 다 된 것을 이르는 것으로 임금은 5대, 일반인은 4대 조상까지 제사를 지낸다. 중유(仲由)가 …… 탄식하고 중유는 공자의 제자 자로(子路)의 이름으로, 《예기(禮記)》 〈단궁 하(檀弓下)〉에 자로(子路)가 "가난하게 사는 것은 가슴 아픈 일이구나. 어버이가 살아 계실 때에는 제대로 봉양할 수가 없고, 돌아가시고 나서는 제대로 예를 행할 수가 없다.〔傷哉貧也, 生無以爲養, 死無以爲禮.〕"라며 탄식하였다. 맹자가 …… 것 《맹자》 〈공손추 하(公孫丑下)〉에 맹자가 노(魯)나라에서 어머니의 장례를 마치고 제나라로 돌아올 때 충우(充虞)가 맹자에게 "모친상에 관목(棺木)이 너무 아름다운 듯하였다."라고 말하자, 맹자가 "법 제도상 할 수 없으면 마음이 기뻐할 수 없고, 재력이 없으면 마음이 기뻐할 수 없다. 할 수 있고 재력이 있으면 옛사람들이 모두 사용했으니, 내 어찌 홀로 그렇게 하지 않겠는가.〔不得, 不可以爲悅, 無財, 不可以爲悅. 得之爲有財, 古之人皆用之, 吾何爲獨不然.〕"라고 하였다. 진실하지 …… 없다 《중용장구》 제25장에 "진실함은 사물의 시종을 이루는 것이니, 진실하지 않으면 사물이 성립될 수 없다. 이런 까닭에 군자는 진실함을 귀중하게 여기는 것이다.〔誠者物之終始, 不誠無物, 是故君子誠之爲貴.〕"라는 구절에서 인용한 말이다. 동쪽 …… 못하다 《주역》 〈기제괘(旣濟卦) 구오(九五)〉에 "동쪽 이웃집에서 소를 잡아 성대하게 제사 지내는 것이 서쪽 이웃집에서 의 검소하게 제사를 지내어 실제로 그 복을 받는 것만 못하다.〔東鄰殺牛, 不如西鄰之禴祭, 實受其福.〕"라는 구절이 보인다. 자기 …… 것이다 《예기(禮記)》 〈애공문(哀公問)〉에 "군자는 공경하지 않음이 없지만 몸을 공경하는 것이 큰일이 된다. 몸이라는 것은 아버지의 가지이니, 감히 공경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 몸을 공경하지 못하면 이것은 어버이를 상하게 하는 것이요, 그 어버이를 상하게 하는 것은 그 뿌리를 상하게 하는 것이다. 그 뿌리를 상하게 하면 가지도 따라서 죽는다.〔君子無不敬也, 敬身爲大. 身也者, 親之枝也, 敢不敬與?  不能敬其身, 是傷其親. 傷其親, 是傷其本. 傷其本, 枝從而亡.〕"라는 공자의 말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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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의계안 서문 【갑자년(1924)】 尊義契案序 【甲子】 간재(艮齋) 전 선생(田先生 전우(田愚))이 돌아가신 지 3년이 되는 갑자년 9월9일에 문하의 제자들이 현동(玄洞)의 묘사(墓祀)에 나아가 참여하고서 제사가 끝나자 모두 한숨을 지으며 말하기를,"선생은 도가 높고 의리가 정밀한데다 학문이 바르고 가르침이 갖추어져 학문하는 자에게 아름다운 은혜를 베풂이 지극하였다. 그런데 용과 뱀이 위험을 알림에 산이 이미 무너졌고19), 오토(烏兎)가 번갈아 달려감에 영실(靈室)이 또 철거되었다20). 봄바람이 부는 자리가 아득하니21), 가을달의 마음22)을 누가 전해주겠는가? 오직 이 현동 한 언덕은 선생께서 만년토록 의탁할 곳으로, 넋이 아래에서 영원히 편안하고, 정령이 위에서 오르내리실 것이니, 우리 무리들이 국과 담장[羹墻]에 어른거리는 모습을 보거나 강한(江漢)을 그리워함에23) 이곳을 버려두고 어디로 가겠는가. 이곳에서 제사를 지내고 이곳에서 강학하여 선생의 전함을 영구히 하는 것이 여기에 있을 것이니. 어찌 서로 안(案)을 연합하여 규례을 세우고 의연금(義捐金)을 내어 계를 수립함으로써 장구토록 추모하고 강학하는 데 필요한 것들을 도모해 구비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하니, 이것을 힐난하는 자가 말하기를,"대저 추모는 마음에 달려 있고, 학문은 자기 자신에게 달려 있기 때문에 '마음속에 간직하고 있으니, 어느 날인들 잊으리오.24)'라고 하였으며, 또 '인을 행하는 것은 자기에게 달려 있으니, 남에게 달려 있겠는가.25)'라고 하였다. 스스로 진실하고 스스로 힘쓸 수 있다면 한 꽃님 만큼의 조그마한 향기를 피우는 공경을 오히려 펼 수 있을 것이며, 문왕(文王)과 무왕(武王)의 도(道)가 땅에 떨어지지 않을 것이니, 무엇 때문에 사물을 빙자하여 진실함을 드러내고 남에게 가탁하여 공효를 바라는 일을 일삼겠는가."하였다. 바른말로 질책하는 자가 말하기를,"아니, 그렇지 않다. 훌륭한 일은 권면해야 하고 잘못된 일은 경계해야 하는 것이 옛날의 도이니, 만약 홀로 공부한다면 이는 권면하고 경계해야 하는 도를 사용할 곳이 없게 된 지 오래되었을 것이고, 만약 마음으로 추모하고 저 사물을 사용하지 않는다면 뒤에 죽을 사람이 숭상하여 받드는 책무는 어디에 그 정성을 다하겠는가? 더욱이 지금 사문(師門) 내에 변괴가 갖가지로 나와서 인허에 대한 무함26)이 유행함에 태양처럼 빛나던 고결함이 거의 어두워졌고, 제토(祭土 제전(祭田))을 팔아버림에 제물[粢牲]을 갖추지 못하여 요행을 바랄 수 없게 되었으니, 우리 소자들이 서로 닦고 힘을 합쳐 평소 지극히 정대했던 가르침을 복종하여 지키고 아울러 사후(死後)의 대사를 이루지 않는다면 어떻게 선생께서 전수하신 한 학맥을 이어 밝혀서 부처와 같은 은혜를 만분의 일이나마 갚을 수 있겠는가? 오늘의 이 일은 단연코 그만 둘 수 없다."하니, 힐난했던 자가 예! 예! 하며 수긍하였다. 이에 여러 사람의 의론이 모두 동일하자 규례를 수정하고 이름을 차례대로 앞뒤에 기록해 넣었으며, 물건은 힘에 따라 마련하고 회강(會講)은 봄가을의 향사(享祀)를 이용하기로 했다. 다음날 계안이 완성한 뒤에 '존의계(尊義契)'라 명명하였으니, 대체로 이 계안에 참여하는 문인과 후학들로 하여금 모두 선생의 도의를 추존하여 앙모할 수 있게 하고, 만나는 변고도 오직 그 의리를 존숭하여 대응하게 할 따름이다. 惟艮齋 田先生旣沒之三年甲子九月九日, 門弟子進參於玄洞之墓祀. 祀畢, 衆皆咨嗟而言曰: "先生道尊而義精, 學正而敎備, 嘉惠學者至矣. 龍蛇告厄, 山已頹矣, 烏兎迭奔, 靈又撤矣. 春風之坐邈焉, 秋月之心孰傳? 惟玆玄洞一邱, 先生萬年之宅, 體魄永安于下, 精靈陟降乎上, 吾儕羹墻之見, 江漢之思, 捨此焉奚之? 祀於斯, 講於斯, 以永先生之傳, 其在斯矣, 盍相聯案立規, 出義樹契, 圖夫慕之講之之具於久遠也乎?" 有難之者曰: "夫慕在乎心, 學在乎己. 故曰: '中心藏之, 何日忘之?' 又曰: '爲仁由己, 而由人乎?' 能自誠而自力, 一瓣之敬, 尙可伸也. 文武之道, 庶不墜地, 何事乎藉物而見誠, 假人而責效乎?" 有正言而質之者曰: "否, 不然. 善之當勸, 過之當戒, 古之道也. 如獨學之, 是當勸戒之道之無所用也久矣. 苟慕之以心, 而不用夫物, 後死者崇奉之責, 安所盡其誠乎? 況今門墻之內, 變怪百出, 認誣行而日光之潔幾晦矣, 祭土斥而粢牲之闕無幸矣. 不有我小子輩, 交修協力, 服守平日至正之敎 幷濟身後之大事, 其何以紹明先生一脈之傳, 而報佛恩之萬一乎? 今日此擧, 斷不可已也. " 難者唯唯. 乃僉議詢同, 修定規例, 序名以入錄 先後, 而物則隨其力, 會講用春秋享祀. 翼日案旣成, 命名曰尊義契, 蓋欲使門人後學之參是案者, 皆有以尊仰先生之道義, 而所値之變, 亦惟尊其義而應之云爾. 용과 …… 무너졌고 간재(艮齋) 전우(田愚)의 죽음을 예언하고 비유한 말이다. 용과 뱀이 위험을 알렸다는 것은 현인군자의 죽음을 예언하는 말로, 후한의 대유(大儒)인 정현(鄭玄)의 꿈에 공자(孔子)가 나타나 이르기를 "빨리 일어나라. 금년은 용의 해이고 내년은 뱀의 해이니라.〔起起! 今年歲在辰, 來年歲在巳.〕"라고 하자, 잠을 깨고서 자신이 죽을 것을 알았으며, 그해 6월에 죽었다는 고사에서 유래하였으며, 《後漢書 卷35 鄭玄列傳》 산이 이미 무너졌다는 것은 스승의 죽음을 비유하는 말로, 공자가 자신이 죽을 꿈을 꾸고 아침에 일찍 일어나 뒷짐을 지고 지팡이를 짚은 채 문 앞에서 한가로이 거닐며 노래하기를 "태산이 무너지겠구나, 들보가 부러지겠구나, 철인이 죽겠구나.〔泰山其頹乎, 梁木其壞乎, 哲人其萎乎.〕"라고 한 데서 유래하였다. 《禮記 檀弓上》 오토(烏兎)가 …… 철거되었다 세월이 흘러 3년상이 끝났음을 비유한 말이다. 오토(烏兔)는 해 속에 세 발 달린 까마귀가 있고 달 속에 옥토끼가 있다고 하는 신화에서 유래하여 세월을 가리킨다. 봄바람이 …… 아득하니 봄바람처럼 온화한 스승이 세상에서 떠났음을 비유한 말이다. 송(宋)나라 때 주광정(朱光庭)이 정호(程顥)를 찾아뵙고 돌아와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나는 봄바람 속에서 한 달을 앉아 있었다.〔某在春風中坐了一箇月.〕"라고 한 데서 유래하였다. 《近思錄 卷14》 가을달의 마음 스승의 고결한 인품을 형용한 말이다. 등적(鄧迪)이 주자(朱子)의 스승인 연평(延平) 이통(李侗)의 인품을 말하면서 "마치 빙호추월(氷壺秋月)과 같아 티 없이 맑고 깨끗하니 우리들이 미칠 수 없다."라고 한 데에서 유래한 것으로, 빙호추월은 얼음으로 된 호로병에 맑은 가을 달이 담겼다는 뜻이다. 《宋史 卷428 李侗列傳》 국과 …… 그리워함에 돌아가신 스승을 경모(敬慕)하고 추념(追念)하는 것을 말한다. 《후한서(後漢書)》 권63 〈이고열전(李固列傳)〉에 "옛적에 요 임금이 돌아가신 뒤에 순 임금이 3년 동안 우러러 그리워하여 앉으면 담장에서 요 임금을 보았고, 밥을 먹으면 국에서 요 임금을 보았습니다.〔昔堯殂之後, 舜仰慕三年, 坐則見堯於墻, 食則睹堯於羹.〕"라고 하였고, 공자 사후에 문인(門人)인들이 공자를 추모하여 유약(有若)이 공자와 비슷하다는 연유로 그를 공자를 섬기던 예로 섬기려고 하자, 증자(曾子)가 "옳지 않다. 부자의 도덕은 마치 강한의 물로 씻고 가을볕으로 쬔 듯이, 하도 희고 깨끗하여 더할 수가 없다.〔不可. 江漢以濯之, 秋陽以暴之, 皜皜乎不可尙已.〕"라고 한 데에서 유래하였다. 《孟子 滕文公上》 마음속에 …… 잊으리오 《시경》 〈소아(小雅) 습상(隰桑)〉에 보인다. 인을 …… 있겠는가 《논어집주》 〈안연(顔淵)〉 1장에 보인다. 인허에 …… 무함 전우가 생전에 일제하에서 자신의 문집를 간행하지 말도록 유언하였는데, 문인 오진영(吳震泳)이 스승으로부터 일제의 인허를 받아 간행하도록 가르침을 받았다고 말한 일을 가리킨다. 《後滄先生文集 券14 徧告同門僉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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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현재27)에서 제군들을 전송하는 서문 【갑자년(1924)】 慕賢齋送諸君序 【甲子】 남산(南山)28)의 꼭대기에서 한스러운 마음을 읊고 영파(映波)의 강물29)에 이별의 정을 실어 보내니, 암담하게 넋이 나가고자 하는 것은 오늘 이별의 모습이 아니겠으며, 간절하게 나에게 한마디 말을 해 줄 것을 바라여 산중고사(山中故事)로 삼으려고 하는 것은 제군(諸君)들의 마음이 아니겠는가. 내가 비록 인자(仁者)가 아닌 것이 부끄럽긴 하지만 기어이 말하라고 한다면 청컨대 산과 물의 비유를 사용함으로써 행신(行贐 노자(路資))을 대신해도 되겠는가?무릇 산은 높고 큰 것을 바라지 않겠으며, 물은 깊고 드넓은 것을 바라지 않겠는가. 남산의 높은 봉우리가 우뚝하게 솟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반드시 곤륜산(崑崙山)을 이고 있어야 조종(祖宗)이 되고, 영파의 물이 드넓고 깊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반드시 좌해(左海 동해(東海))라야 조종으로 삼을 바가 되니, 고대 성인이 천하를 작게 여기고 물이 되기 어렵다고 탄식한 것30)은 어찌 진실로 그렇지 않겠는가.아, 옛 사람으로부터 감흥을 일으켜 준칙으로 삼은 선비만 어찌 홀로 그렇지 않겠는가. 남산을 돌아보고 저 영파를 바라봄에 천 년의 세월이 지나도록 풍모가 사라지지 않은 자는 신무장(申武壯 신호(申浩))과 이문정(李文靖 이식(李植))이 아니겠는가. 교룡산성(蛟龍山城)에서 왕의 일이 몹시 위급하여 옷과 치아를 집으로 보내고 죽음을 마치 집으로 돌아가듯 편안하게 여긴 것31)은 열렬한 충성이 아니겠는가. 택풍당(澤風堂)에서 홀로 덕을 세워 대가(大家)의 보불(黼黻 문장(文章))이 온 나라에 화려하게 빛난 것은 찬란한 문장이 아니겠는가. 두 공은 진실로 이 땅에서 나고 자랐으니, 이 땅에서 옛사람의 일을 논하는 자라면 두 공을 버려두고 누구를 논하겠는가.그러나 이는 친근하고 감동하기 쉬운 사람으로 말한 것이니, 이러한 단계를 지나 더 나아가서 등급에 따라 위로 올라가고 먼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 구한다면 반드시 성인에게 극처를 귀결시킨 뒤에 그쳐야 할 것이네. 때문에 "인(仁)이 요(堯) 임금만 못하고, 효가 순(舜) 임금만 못하고, 학문이 공자만 못하면 스스로 버리는 것이다.32)"라고 하였으니, 배우는 자가 뜻을 세우는 것이 다만 이와 같아야 하지 않겠는가.비록 그렇다 하더라도 군자의 도는 작은 것을 먼저 하고 큰 것을 뒤로 하며, 아래로부터 사람의 일을 배워 위로 하늘의 이치를 통달하는 것이네. 그러므로 인은 반드시 만물이 각기 제자리를 얻게 되기를 바라고, 효는 반드시 신명(神明)과 통하고 사해(四海)에 빛나기를 바라며, 학문은 반드시 힘쓰지 않고 생각하지 않아도 얻게 되기를 바라는 것이네. 그러나 또한 어린아이를 사랑하고 보호하는 것과 겨울에 따뜻하게 해드리고 여름에 시원하게 해드리는 것, 앉아 있을 때는 시동처럼 하고 서 있을 때는 재계하는 것처럼 하는 것 등의 따위를 버려둔 채 단번에 이러한 경지에 이를 수 있는 자는 있지 않으니, 청컨대 제군들은 돌아가 가정 안에서 구하고 마음과 육체 사이에서 살펴서 그 규범을 크게 하고 그 공효를 세밀하게 함으로써 끝내 변화하여 천지가 제자리를 잡고 만물이 길러지는 묘리를 이루어야 할 것이다.경전에서 말하지 않았는가. "먼 곳을 가려면 반드시 가까운 곳으로부터 시작하고, 높은 곳을 오르려면 반드시 낮은 곳으로부터 시작한다.33)"라고 하였네. 또 말하지 않았는가. "흐르는 물의 속성은 구덩이를 다 채우지 않으면 흐르지 않는다.34)"라고 하였네. 나는 이로 인해 단정하여 "곤륜산을 오르는 것은 남산에서 시작될 것이고, 동해에 도달하는 것은 영파에서 시작될 것이다."라고 말하니, 제군들이여, 내 말을 믿고 힘쓰기를 바란다. 賦恨乎南山之巓, 送情乎映波之流, 黯然其欲銷魂者, 非今日別離景色乎? 懇懇乎其欲我一言有贈, 擬作山中故事者, 非諸君之意乎? 我則縱愧非仁者, 無已則請以山水喩喩之用, 替行贐可乎? 夫山不欲其高大乎? 水不欲其深廣乎? 南山之高. 非不聳拔超卓, 必戴崑崙而爲祖; 映波之水, 非不汪然而深, 必左海爲其所宗. 前聖所歎小天下、難爲水者, 豈不信然乎? 噫. 士之興感乎古人而準則之者, 奚獨不然? 睠焉南山, 瞻彼映波, 閱千秋而風不沫者, 非申武壯、李文靖乎? 蛟龍有城, 王事孔棘, 衣齒送家, 視死如歸者, 非烈烈焉忠乎? 澤風有堂, 獨立闕德, 大家黼黻, 華國光邦者, 非煥煥乎文乎? 二公固生且長乎玆地, 于玆地, 欲尙論者, 舍二公, 其誰乎? 然此自其親近易感者言, 過此以往, 等而上之, 遠而求之, 則必要其歸極於聖人而後已. 故曰: "仁不如堯, 孝不如舜, 學不如孔子, 皆自棄也. " 學者立志, 顧不當若是乎? 雖然, 君子之道, 先小而後大, 下學而上達. 故仁必欲其萬物各得其所, 孝必欲其通神明光四海, 學必欲其不勉不思而得. 而亦未有舍棄愛保赤子、冬溫夏凊、坐尸立齊之類, 而能一蹴而至焉者. 請諸君歸而求之家庭之際, 察之心身之間, 大厥規而細厥功, 終以致乎變化位育之妙也. 傳不云乎? "行遠必自邇, 登高必自卑. " 又不云乎? "流水之爲物, 不盈科不行. " 余乃因此而斷之曰: "陟崑崙者, 其自南山而始; 達東海者, 其自映波而始. " 諸君乎, 其尙信及而勉乎哉. 모현재(慕賢齋) 전라북도 정읍시 북면 남산리에 있는 사당으로, 임진왜란 때 전라관찰사를 지낸 이광(李洸)이 향풍을 바로잡고 학문을 권장하기 위하여 조직한 남산동 백발회(南山洞白髮會)에서 유래하였다. 그 뒤 이식(李植)이 종조부인 이광의 백발계(白髮契)를 다시 조직하여 향풍을 길러 향약을 실천하였는데, 한동안 기능이 약화되었다가 1862년(철종 13) 옛날 백발회 유지에 모현재를 창건하고, 동계(洞契)를 다시 실시하여 학문을 권장하였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남산(南山) 전라북도 정읍시 고부면 고부리에 있는 산으로 높이는 100.1m이다. 고부면소재지 남쪽에 있는 산이라서 남산으로 불린다. 영파(映波)의 강물 전북 정읍시 영파동에 위치한 영파정(映波亭) 근처에 흐르는 현 정읍천을 가리키는 듯하다. 영파정은 1601년(선조34) 이광(李洸 1541~1607)이 벼슬에서 물러난 뒤 고향으로 돌아와 창건한 누정으로 이곳에서 백발계회(白髮契會)를 조직하여 향풍을 기르고 학문을 권장했던 곳으로 전해진다. 고대 …… 것 《맹자》 〈진심 상(盡心上)〉에 "공자가 동산에 올라가서는 노(魯)나라를 작게 여겼고, 태산에 올라가서는 천하를 작게 여겼다. 그러므로 바다를 본 사람에게는 다른 물은 물이 되기 어렵고, 성인의 문하에 종유한 사람 앞에서는 다른 사람의 말은 말이 되기 어려운 것이다.〔孔子登東山而小魯, 登太山而小天下. 故觀於海者難爲水, 遊於聖人之門者難爲言.〕"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교룡산성(蛟龍山城)에서 …… 것 신호는 정유재란 때 남원(南原) 교룡산성(蛟龍山城) 수어장(守禦將)으로서 성 안으로 쳐들어오는 왜군과 끝까지 싸우다가 전사했는데, 죽기 전에 말고삐를 잡고 다니는 노비에게 입고 있던 옷과 치아 하나를 노비에게 주고서 집으로 돌아가 오늘이 바로 내가 죽는 날임을 알리게 했다고 한다. 《息庵遺稿 樂安郡守贈刑曹判書申公諡狀》 인(仁)이 …… 것이다 《맹자집주》 〈진심장 상(盡心章上)〉 29장 주에 여시강(呂侍講)이 "인이 요임금만 못하고, 효가 순임금민 못하고, 학문이 공자만 못하면 끝내 성인의 경지에 들어갈 수 없고, 마침내 천도에 이르지 못할 것이니, 중도에 폐하여 스스로 앞의 공을 버리게 됨을 면치 못할 것이다.〔仁不如堯, 孝不如舜, 學不如孔子, 終未入於聖人之域, 終未至於天道, 未免爲半塗而廢, 自棄前功也.〕"라고 말한 구절에서 인용한 말이다. 먼 …… 시작한다 《중용장구》 제15장에 보인다. 흐르는 …… 않는다 《맹자집주》 〈진심장 상(盡心章上)〉에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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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제를 배송하는 서문 【을축년(1925)】 拜送靑帝序 【乙丑】 전몽적분약(旃蒙赤奮若 을축년) 건진월(建辰月 3월) 30일 병자(丙子) 날에 청제(靑帝)35)가 정령(政令)를 펼쳐 시행한 지 90일이 되어 공적이 이루어지고 임기가 만료됨으로써 적제(赤帝)에게 자리를 물려주고 수레를 타고 돌아가자, 만백성이 그의 공덕을 생각하고 차마 떠나보내지 못하여 허둥지둥 나와 전송하는 자가 산천을 뒤덮고 거리를 메우니, 천지의 조화 중에 살아가는 내가 두견새 우는 봉우리36)에 올라 맑은 물을 떠서 조전(祖奠)을 차려 놓고 두 손 모아 절한 다음에 글을 올려 청하기를,"아, 청제(靑帝)께서 군주가 되셨을 때에 인자하고 온화하시어 살리기를 좋아하는 덕이 만물에 두루 미쳤습니다. 이에 만물이 즐겁고 화락하여 모두 그 은택을 입은 것이 마치 자애로운 그물에 걸린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지금 갑자기 버리고 떠나시니, 모든 사람이 어떻게 마음을 가눌 수 있겠습니까. 부디 힘써 머물러서 큰 은혜를 끝까지 베풀어 주소서."하니, 청제가 말하기를,"아니다. 오직 황천(皇天)께서 사계절을 정하여 만물을 이루고, 이에 사방의 군주를 명하여 각기 그 운행에 따라 그 공덕(功德)을 이루게 하셨다. 춘목(春木)에 만물을 낳는 것은 청제의 공이니, 그 덕은 인(仁)이다. 하화(夏火)에 만물을 자라게 하는 것은 적제(赤帝)의 공이니, 그 덕은 예(禮)이다. 추금(秋金)과 동수(冬水)에 만물이 이루어지고 만물이 저장되는 것은 백(白)과 흑(黑) 두 제(帝)에게 공이 있으니, 의(義)와 지(智)가 그 덕이다. 인과 생(生)에 비록 내가 능하다고 하지만, 의ㆍ예ㆍ지와 장(長)ㆍ성(成)ㆍ장(藏)은 각각의 유사(有司)에 있는 것이고, 내가 실제로 부여한 것은 없다. 가는 것이 지나가고 오는 것이 이어지는 것은 도의 본체이고, 옛 것이 물러나고 새로운 것이 대신하는 것은 이치에 당연한 것이다. 나는 갈 것이니, 너는 슬퍼하지 말라."하였다. 내가 또 청제에게 두 손 모아 절하고 대답하기를,"봄은 사계절의 시작이고, 인은 사덕(四德 인의예지) 중에 으뜸입니다. 만물을 낳아주는 봄이 아니면 무엇에 의지하겠으며, 성장하고 수장(收藏)하는 공은 사사로움이 없는 인이 아니면 어느 곳에 예ㆍ의ㆍ지의 덕을 보이겠습니까? 그러므로 자라게 하는 것은 이 낳은 것을 자라게 하는 것이고, 거두는 것은 이 낳은 것을 거두는 것이고, 저장하는 것은 이 낳은 것을 저장하는 것이며, 이 인을 절제하는 것이 예이고, 이 인을 마땅하게 하는 것이 의이고, 이 인을 아는 것이 지이니, 공과 덕은 청제께서 그 조종이 되고, 세 방위는 그 갈래가 됩니다. 그런데 그 아름다움을 독차지하지 않고 각기 그 권능을 돌리시니, 이것이 인이 되는 이유입니다.아, 운명에 맡기고 천리를 따르는 것은 위대한 지혜이고, 현인을 추대하여 자기를 대신하게 하는 것은 성대한 덕이니, 청제의 거취를 어찌 감히 고집스럽게 청하겠습니까. 다만 한 가지 청이 있습니다. 현재 천지의 기운이 막혀 예의가 땅에 떨어져 똥이 되고 피와 살이 도탄에 빠진 것은 또한 한 시대의 기운 중에 한겨울에 해당하니, 원컨대 청제께서는 돌아가 황천을 모시는 날에 청제처럼 큰 인덕(仁德)의 성인을 빨리 태어나도록 간절하게 청하여 팔방의 요사한 기운을 쓸어버리고 온 세상을 천수를 누리는 태평한 세상으로 올려주기를 마치 청제께서 곡풍(谷風 동풍)을 불어넣어 얼음을 풀리게 하고 단비를 내려 여러 무리에게 은혜를 베푸는 것처럼 하소서. 황천은 지극히 인자한지라 어진 말을 반드시 들어줄 것이니, 청제께서는 도모하소서. 그러면 비록 하루를 행하더라도 오히려 일 년을 머무르는 것과 같을 것입니다."하니, 청제께서 이를 듣고서 측은해 하는 것이 마치 가엾게 여기는 점이 있는 듯하고, 잠자코 있는 것이 마치 생각하여 수긍하는 점이 있는 듯하였다. 이윽고 가벼운 바람이 잠깐 일어나더니 수레를 재촉해 서둘러 떠나가시자 하직하고 물러나 돌아오니, 산의 두견새는 울음을 그치고, 날은 저물어 갔다. 惟旃蒙赤奮若建辰月三十日丙子, 靑帝布政行令之九旬, 以功成期滿, 禪位赤帝, 駕言退歸. 惟萬衆民庶, 思其德, 不忍去, 望望焉出餞者, 蓋遍山塡街. 化中生金澤述, 登望帝之峯, 酌淸泉而設祖, 拜手進文而請曰: "於戲, 靑帝之爲君也, 乃仁乃和, 好生之德, 洽于萬物. 萬物熙皞, 咸沐厥澤, 若嬰乎慈. 今忽舍去. 凡厥衆生, 何以爲心? 願且勉留, 以卒大惠. " 靑帝曰: "否. 惟皇天定四時遂萬物, 乃命四方主君, 各用厥行, 成厥功德. 春木生物, 靑帝功也, 厥德仁; 夏火長物, 赤帝功也, 厥德禮; 秋金冬水, 物成物藏, 白、黑二帝有功, 義、智, 其德也. 夫功惟集衆, 德難兼全. 惟仁惟生, 雖曰'予能', 義、禮與智, 長、成且藏, 各司攸存, 予實無與. 且往過來續, 道之體也; 舊謝新代, 理之常也. 予其逝矣, 爾其勿悲. " 澤述又拜手復于帝曰: "春爲四時之首, 仁爲四德之長, 非春之生物, 何資? 而成長收藏之功, 非仁之無私, 安所見禮義智之德乎? 故長者, 長此生, 收者, 收此生, 藏者, 藏此生, 節斯仁者爲禮, 宜斯仁者爲義, 知斯仁者爲智. 惟功惟德, 惟帝其宗, 三方其支, 乃不專其美, 各歸其能, 此其所以爲仁歟. 嗚呼, 任運順理, 大智也, 推賢代己, 盛德也. 惟帝去就, 豈敢固請? 但有一焉, 見今天地閉塞, 禮糞義壤, 血塗肉炭, 亦一世運之大冬. 願帝歸侍皇天之日, 懇懇請亟生大仁德聖人如帝者, 掃八宇之妖沴, 躋一世於仁壽, 若帝之噓谷風而解氷凍, 降甘雨而惠群類也. 皇天至仁, 仁言必聽, 帝其圖之. 雖行之日, 猶留之年也. " 靑帝聞之, 惻然若有所㦖, 黙然若有所思而首肯者. 俄而輕風乍起, 趣駕翛然而行. 辭退歸來, 山鵑啼罷, 日之夕矣. 청제(靑帝) 봄을 주관하는 동쪽의 신(神)을 가리킨다. 오행설(五行說)에 의하면 청색과 봄은 모두 목(木)에 속한다. 적색(赤色)과 여름은 화(火)에 속하여 여름을 주관하는 남쪽의 신을 적제(赤帝)라 하고, 가을과 백색(白色)은 금(金)에 속하여 가을을 주관하는 서쪽의 신을 백제(白帝)라 하고, 겨울과 흑색(黑色)은 수(水)에 속하여 겨울을 주관하는 북쪽의 신을 흑제(黑帝)라고 한다. 두견새 …… 봉우리 원문의 '망제(望帝)'는 전국 시대 말엽의 촉(蜀)나라 왕 두우(杜宇)로, 억울하게 왕위를 선양한 뒤에 서산(西山)에 들어가 은거하다가 죽었는데, 그의 원통한 넋이 두견새가 되어 봄이면 밤낮으로 애절하게 피를 토하며 운다는 전설로 인해 두견새를 비유하기도 한다. 《華陽國志 卷3 蜀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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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찰(簡札) 고문서-서간통고류-서간 정읍 성주이씨 이유원 후손가 성주이씨 이정순 모년에 미상인이 상대방의 빛나는 재주에 앞길이 창창하기를 빌고 그동안 회포를 풀지 못했으나 다음 달초에 찾아가겠다고 한 간찰 모년에 미상인(未詳人)이 상대방의 빛나는 재주에 앞길이 창창하기를 빌고 그동안 회포를 풀지 못했으나 다음 달초에 찾아가겠다고 한 간찰이다. 날짜와 발·수신자는 미상이다. 내용을 살펴보면, 정(情)이 아니면 이렇게 편지를 써서 정서를 펴지도 못할 것이며, 이것은 몇 백 리에 떨어져 있는 안범(顔範)을 대신할 수 있어서 매시간 읽고 두터운 우의를 느끼고 실감한지 여러 날이 되었다. 여러분들의 안부를 묻고, 자신은 원외에서 서로 바라보기만 하고 나갈 수 없는 처지다. 빛나는 재주를 논하자면 축하할 것도 없지만, 정원의 난초가 계속 피는 가운데 독서하고 새집을 지은 것을 돌아보면 그대의 앞길은 춘색이 더욱 아름다워 끝이 없을 것이니 정으로 두 손 모아 빈다. 진즉 직접 가서 막혔던 회포를 풀어야 했는데 못했다. 저 좋은 땅을 골라서 집을 지었는가 물어보고, 노인을 모시는 인사는 매번 뜻과 같지 못하다고 하고서 다음 달 초에 미리 기약할 수는 없지만 찾아가겠다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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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부기록류

1911년 이교성(李敎成) 소유 산림의 민유산림약도(民有山林略圖) 고문서-치부기록류-지도 明治四十四年十二月日 李敎成 明治四十四年十二月日 李敎成 정읍 성주이씨 이유원 후손가 성주이씨 이정순 1911년 12월 이교성(李敎成) 소유 산림의 약도인 민유산림약도(民有山林略圖) 1911년 12월 이교성(李敎成) 소유 산림의 약도인 민유산림약도(民有山林略圖)이다. 1500분의 1 축척이다. 산림 소재지는 전라남도 보성군 문전면 가천리 뒤의 기동산(基洞山)이다. 면적은 7반(反) 2무(畝) 27보(步)이다. 소유주는 이교성(李敎成)이다. 소재지는 여러 기호와 자번(字番)을 사용하여 표시하였다. 여러 기호는 범례라고 하여 소개하고 있다. 끝에는 날짜가 있다. 피봉이 있는데, 삼림가지번건(森林假地番件)이라 적혀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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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간통고류

1928년 이남섭(李南燮) 간찰(簡札) 고문서-서간통고류-서간 戊辰陰閏二月八日 李南燮 李生員日彦宅 戊辰陰閏二月八日 李南燮 李生員日彦宅 전라남도 곡성군 정읍 성주이씨 이유원 후손가 성주이씨 이정순 1928년 윤2월 8일에 상중인 족종 이남섭이 아무개에게 묘각과 면사무소 담 수선과 기와에 대한 구매 상황을 전하는 간찰 1928년 윤2월 8일에 상중인 족종 이남섭(李南燮)이 아무개에게 묘각(墓閣)과 면사무소 담[墻垣] 수선(修善)과 기와에 대한 영업 상황을 말한 편지이다. 상중인 자신은 비봉(飛鳳)의 묘각(墓閣)의 모든 일을 이미 상의하는 중에 판매(販賣)할 계획인데 아직 적절한 방도가 없다. 가까운 곳에 면사무소의 담을 수선하는 것에 대하여 매도할 결의를 타협하고, 수키와와 암키와 3천 장을 바라고 있지만 9, 10월에 내지 못할 것이니 깊이 헤아려 계산해야 한다. 지금의 소액(少額)은 뒤에 쓸모가 없는 것 보다는 낳으니 만약 원하는 가격이 있으면 이 약속을 잊지 말고 사람을 보내어 대신 수습하게 한 뒤에 줄 계획이 좋을 듯하다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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족제 사의에게 답함 병인년(1926) 答族弟士毅 丙寅 세상에서는 바야흐로 내가 밤에 꿈꾼다고 여기는데, 나는 낮에 참된 일을 겪는다고 여깁니다. 참과 꿈, 낮과 밤을 과연 어떻게 결정할 수 있겠습니까? 천지에 일도(日度)141)와 성전(星躔)142)이 이미 만고에 바뀌지 않는 즉, 갑이 낮과 밤이라고 주장하는 것과 을이 잠자는 것과 꿈꾼다고 하는 것을 하늘이 실로 살피실 것이니, 절로 마땅히 그 득실을 변정(辨定)할 수 있을 것입니다. 낮에 생각하는 것은 반드시 밤에 꿈이 되니, 꿈에서 주공을 뵙는 것은 항상 이 도를 행하려는 마음을 보전하기 때문입니다. 또 낮에 외물에 곡망(梏亡)143)되면 어찌 밤의 꿈이 편안하기를 보장할 수 있겠습니까?사람이 능히 낮에 하는 일을 반드시 바르게 하고, 꿈꾸는 일을 반드시 맑게 한다면, 이것으로 극진할 것입니다. 우리 아우가 별지에서 "낮과 밤이 서로 어긋나서 낮에는 수고로워도 꿈은 맑다"고 하는 말은, 혹 일시의 어떤 이유에서 나왔지, 정답 되는 말은 아니기에 그러므로 이렇게 언급해둡니다. 世方處我以夜以夢, 自處以晝以眞.眞夢晝夜, 果惡乎定.天地之日度星躔, 旣萬古不易, 則甲之是晝是夜, 乙之是寐是寤, 天實鑑只, 自應辨定其得失也.且晝之所思, 夜必爲夢, 夢見周公, 以其常存行此道也.朝晝梏亡, 亦安保其夜夢之安也.人能晝眞之必正, 而夜夢之必靑, 斯其至矣.別幅晝夜相違晝勞夢淸之喩, 或出一時有爲, 而究非竟語, 故玆及之. 일도(日度) 해가 다니는 길로 황도(黃道)라고도 한다. 진(晉)나라 육기가 나이 사십에 친구들 대부분이 세상을 떠난 허전함을 비탄조로 읊은 〈탄서부(歎逝賦)〉에서 "슬프다. 강물은 온갖 물줄기를 모아 큰 흐름을 이루는데, 그 물줄기는 날마다 도도하게 흘러가고, 세상은 온갖 사람들을 겪으면서 세대를 이루는데, 그 사람들은 하나둘씩 늙어서 사라지는구나.〔悲夫. 川閱水以成川, 水滔滔而日度, 世閱人而爲世, 人冉冉而行暮.〕"라고 하는데서 일도가 나온다. 《文選 卷16》 성전(星躔) 별자리로 성좌(星座)이다. 곡망(梏亡) 《孟子 告子上》 에, 물욕의 구속을 받아 본성을 잃어버리는 것이다. 맹자가 말하기를 "밤낮으로 생장시킨 바와 이른 새벽의 맑은 기운에 의해 호오(好惡)의 본성이 남들과 비슷하게나마 겨우 되살아났지만, 낮의 소행이 이를 곡망함이 있으니, 곡망함이 반복되면 야기(夜氣)가 족히 보존될 수 없다.〔其日夜之所息, 平旦之氣, 其好惡與人相近也者幾希, 則其旦晝之所爲, 有梏亡之矣. 梏之反覆, 則其夜氣不足以存.〕" 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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족제 사의에게 답함 병인년(1926) 答族弟士毅 丙寅 어제 대암(坮巖)에서 돌아오니 정겨운 편지가 책상에 놓여있었습니다. 바삐 편지를 열어 읽어보니 그 기쁨이 어찌 끝이 있겠습니까? 그러나 반도 읽기 전에 나도 모르게 망연자실하였습니다. 마음이 갈피를 잡지 못해 가눌 수 없었으니, 그 까닭이 무엇 때문이겠습니까? 우리 아우의 언론과 사상이 전일과 문득 달라졌기 때문입니다. 우리 아우는 오당(吾黨) 중에서 평소 강의(剛毅)하다고 칭찬받던 사람이 아니었습니까! 어찌하여 굳건한 소나무와 오래된 잣나무와 같은 그대가 세찬 눈바람에 압박되어 꺾이고 좌절되려하십니까! 혀 차는 소리로 괴이한 일이라며 밤에 잠을 이루지 못하고, 이윽고 천천히 생각해보니 이는 아마도 우리 아우가 때를 만나 마땅함을 제제하여 평상시와 변화시에 처할 의리의 취지를 지극히 하려고 한 것일 것입니다.그대가 먼저 이미 생각해서 얻고, 틈 없는 사이인 나에게 토로하고, 자신이 몸소 어떻게 하겠다는 것을 일컫는 말이 아닌즉, 그 갈피를 못 잡는 마음은 대개 과도한 우려였습니다. 또 밤에 능히 편안히 누울 수 있었습니다.비록 그렇지만 또 돌이켜 생각해보니, "마음은 몸의 주인으로 생각은 마음에서 나오고, 말은 또 마음의 소리인지라 그 마음에서 발생해서 그 일을 해치게 된다."144)라고 맹자께서 이미 말씀하셨고, 성인이 이 말을 바꾸지 못한다고 말씀했는데, 내가 어찌 감히 마음이 풀리겠습니까? 청컨대 그대의 편지에서 거론한 바를 근거해서 대략 논하겠습니다. 대저 하늘의 호오(好惡)는 진실로 나의 뜻한 바가 아니요, 또한 저들의 뜻한 바도 아닙니다. 대개 하늘은 선을 좋아하고 악을 미워할 따름입니다. 나와 저들의 선악이 과연 어디에 있는가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만약 하늘이 우리에게 재난을 내리고 저들을 형통하게 한다고 하여, 하늘이 우리의 악을 싫어하고 저들의 선을 좋아한 것을 의심하여 끝내 의리에 안주할 바를 궁구하지 아니하고 우리의 뜻을 버리고 저들을 따른다면, 이것은 그릇된 것입니다.대저 기수(氣數)145)의 어긋남은 하늘이 홍수나 큰 가뭄같이 원래 자가(自家)의 일에 속한 것도 오직 하늘도 어찌하지 못하거늘, 하물며 인사의 득실에 있어서야 어찌하겠습니까! 이로써 아우는 '의를 따라 함께 하는 것은 진실로 군자가 되고, 세상과 함께 변하여 옮겨가는 것146)'은 결코 떳떳한 훈계가 아니라는 것을 알 것입니다. 또 시대와 형세를 아는 것을 정자(程子)는 "역을 배우는 방법"이라고 일렀지만, 또 말하기를 "시세가 비록 변하더라도 내 어찌 감히 현재의 왕의 제도를 변화시키거나 어기겠습니까?"라고 하셨습니다.공자는 반고(反古)147)를 훈계하여 선왕의 덕행이 아니면 감히 행하지 않았습니다. 효성스러운 우리 아우의 오늘날 시대를 알고 옛 도리에 반하는 행동을 하면 안 되겠느냐는 훈계를 생각해 보니, 공자와 정자의 취지를 놓친 게 아니겠습니까? 또 우리가 마땅히 해야 할 바에 이르러서는 선성인 공자와 선현인 정자의 학문을 생각하고 힘써서, 세도에 만분의 일이라도 보탬이 되기를 기약하는 것이 이 일입니다. 만약 유자가 졸렬한 법도를 고수하는 것을 깊이 애석하게 여긴다면, 나는 아우가 말하는 '졸렬한 법도를 지키는 것'이 무엇을 말하는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만약 그 졸렬한 법도라는 것이 천하의 왕 노릇하는 도리가 있음을 알지 못하는 것으로 관중(管仲)의 기량이 작은 것 같다148)고 한다면, 그것은 옳거니와, 혹 제멋대로 걷고 시속을 쫓는 일을 못하는 것을 가리켜 졸렬하다고 한다면, 이는 천하를 이끌어서 금수로 만든 것입니다. 그러나 그대의 고견이 어찌 이 지경에 이르겠습니까?우리 아우가 한번 소회를 토로하여 그 씩씩한 마음을 한번 통쾌히 한 것인데, 나는 한번 그대의 의론을 듣고 가히 우려하여 질병이 되었으니, 인정이 같지 않고 어찌 상반되는지요? 이는 반드시 그 까닭이 있을 것입니다. 부디 깊이 생각하고 멀리 보고서 끝내 한마디 말149)로써 실수가 되지 않게 하는 것이 어떠하겠습니까? 昨自坮巖歸, 情翰留案.忙手披讀, 其喜何旣.然讀之未半, 不覺惘然如有所矣.恍然惚然, 無以爲懷, 其故何哉.以吾弟言論思想, 忽異於前日也.吾弟非吾黨中素剛毅稱者乎.胡爲乎貞松古柏,爲虐雪獰風之壓迫而欲摧折也.咄咄怪歎, 夜不能寐, 旣而徐思之, 此殆吾弟欲因時制宜, 以極常變義理之趣.旣得之於思, 試一吐於無間, 非謂身親如何也, 則其惘然恍惚者.蓋過慮也.於是又夜能安寢.雖然又反思之,心身之主也,思出於心, 言又心聲也, 發於其心, 害於其事, 孟子旣云, 聖人不易斯言, 則吾何敢釋然如也.請就來喩所擧而略論之.夫天之好惡, 固非吾之所志, 亦非彼之所志.蓋好善而惡惡而已.吾與彼之善惡,果未知安在.然若以天之厄吾而通彼, 疑天之惡吾惡而好彼善, 遂不究義理之攸安, 而舍吾從彼則左矣.夫氣數之舛差, 天於洪水太旱之元屬自家事者, 尙且柰何不下, 况於人事之得失乎.是知義之與比, 固爲君子, 而與世推移, 決非經訓也.且知時識勢, 程子謂學易之方, 而又謂時勢雖變, 某安敢變違時王之制.孔聖戒以反古, 而非先王之德行, 不敢行.又以爲孝吾弟今日識時反古之訓, 無乃失孔程之旨乎.至於吾所當爲者, 思勉先聖賢之學, 期補世程之萬一是也.若以儒者膠守拙規爲深惜. 則不省其拙規者指何也.若謂不知有王天下之道, 如管仲之器小則可矣, 或指不能闊步趨時而爲拙, 則此率天下而爲獸也, 高見豈至此乎.吾弟則一吐所懷, 壯心爲之一快, 而吾則一聞高論, 過憂爲成一疾, 人情不同, 何若是相反, 是必有其故也.幸惟深思遠覽, 無終爲一言之失如何. 《맹자》〈공손추 상(公孫丑上)〉 에 "마음속에서 생각을 일으켜 급기야는 정사에 해를 끼치고 만다.〔發於其心 害於其政〕"라고 하였다. 기수(氣數) 길흉ㆍ화복의 운수이다. 《춘추좌전(春秋左傳)》 희공(僖公) 15년조에 "귀갑(龜甲)으로 점을 치는 것은 사물을 상징하는 것이고, 서초(筮草)로 점을 치는 것은 기수(氣數)를 대표하는 것이다. 사정이 발생한 뒤에 현상이 있게 되고, 현상이 있으면 사정이 더 발생하고, 사정이 더 발생한 뒤에 기수가 있게 된다."라고 하였다. 의를 따라……옮겨 가는 것 본문의 '義之與比'는《논어》〈이인(里仁)〉에 "군자는 천하의 모든 일에 대하여 무조건 찬성하는 것도 없고 무조건 반대하는 것도 없어서 오직 의로운 것을 따를 뿐이다.〔君子之於天下也, 無適也, 無莫也, 義之與比.〕"라고 하였다. 또한 '與世推移'는 《사기(史記)》권84 굴원열전(屈原列傳)의 어부사(漁父辭)에, "성인은 사물에 막히거나 얽매이지 않고 세상을 따라 미루어 옮겨가나니, 온 세상 사람이 혼탁하거든 어찌 그 흐름을 따라서 그 물결을 일으키지 않는고?〔夫聖人者, 不凝滯於物, 而能與世推移, 擧世混濁, 何不隨其流已揚其波.〕"라고 하였다. 반고(反古) 《중용》 에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어리석으면서 자기 생각대로 행하기를 좋아하고, 천하면서 자기 마음대로 하기를 좋아하고, 지금 세상에 태어나서 옛날 방식으로 돌아가려 한다면, 이런 사람은 재앙이 그 몸에 닥칠 것이다.' 〔子曰:愚而好自用, 賤而好自專, 生乎今之世, 反古之道, 如此者,烖及其身者也.〕"라고 하였다. 옛 도리에 반하지 말라고 경계함을 이른다. 관중의……같다 《논어》 〈팔일(八佾)〉에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관중(管仲)은 그릇이 작구나.' 이 말을 듣고 어떤 사람이 '관중은 검소했습니까?'라고 묻자,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관중은 삼귀대를 지었으며 가신의 일을 겸직시키지 않았으니, 어찌 검소하다고 할 수 있겠는가?'〔子曰:'管仲之器, 小哉!' 或曰:'管仲儉乎?' 曰:'管氏有三歸, 官事不攝, 焉得儉?'〕"라고 하였다. 한 마디 말 《논어》 〈자로(子路)〉에 "정공이 '한 마디 말로 나라를 잃을 수 있다 하니, 그러한 것이 있습니까?'라고 하자, 공자께서 '말은 이와 같이 기필할 수는 없거니와 사람들 말에 「나는 임금된 것은 즐거울 것이 없고, 오직 내가 말을 하면 어기지 않는 것이 즐겁다.」고 합니다.'라고 하였다.〔曰 一言而喪邦, 有諸, 孔子對曰, 言不可以若是其幾也, 人之言曰, 予無樂乎爲君, 唯其言而莫予違也.〕"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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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은유고》37) 서문 《晩隱遺稿》序 삼가 일찍이 보건대, 예나 지금이나 가문에서 뛰어난 선비와 석학을 배출하여 집안의 명성을 창성케 한 것은 대체로 그 선대의 학문을 바탕으로 하여 나온 경우가 많은데, 지금 만은 처사(晩隱處士) 황공(黃公 황전(黃㙻))에게서 그것이 진실로 그렇다는 것을 더욱 증험할 수 있다. 우리 호남의 황이재 선생(黃頤齋先生 황윤석(黃胤錫))은 온 나라의 석학이고, 공은 바로 그의 대인(大人 부친)이니, 위로는 취은(醉隱)ㆍ산촌(山村)ㆍ구암(龜巖)38)의 학문을 계승하고 아래로는 이재의 어짊을 열어 주었다. 만약 이재만 있는 줄 알고 만은이 있는 줄 모른다면 이는 비유하자면 한낱 서산(西山)의 학문이 정심하고 해박한 것만 알고 목당노인(牧堂老人)이 있는 줄 모르는 것이니39), 어찌 옳겠는가.공은 어려서부터 과거 공부를 하여 공부가 이미 정밀하고 지극하였으나 일곱 차례 과거에 응시하여 급제하지 못하자 만년에 선포(仙浦) 구양(龜陽)의 거처에 은둔하여 영화로운 벼슬길에 대한 생각을 끊고 경학(經學)에 마음을 침잠하여 백수(白水)ㆍ목산(木山)ㆍ두호(杜湖 조정(趙晸)) 등 명성과 덕망이 있는 여러 사람들로부터 장려와 인정을 받았으며, 일대 유림의 종장인 미호(渼湖 김원행(金元行))와 병계(屛溪 윤봉구(尹鳳九))와 같은 두 선생께서 학문을 좋아한다고 칭찬하는 데에 이르렀으니 여기에서 공을 알 수 있다.수사(修辭)에 드러난 것은 소박하고 진실한데다 상세하고 분명하여 일에 나아가 실정을 논하고 사물로 인하여 이치를 말했을 뿐, 기이함을 숭상하거나 꾸밈을 다하여 사람의 눈과 귀를 기쁘게 하는 모습이 없었으니, 대체로 이른바 '말은 뜻이 통하게 하면 그만이다.40)'라는 것이 이것일 것이다. 언지(言志)의 작품41)은 천기(天機)에서 얻은 것이 깊었기 때문에 경우에 따라 즉시 쏟아 내면서도 태연자약하여 여유가 있었고, 다듬고 수식하지 않아도 청아하고 울림이 있어 사람으로 하여금 외고 읊조림에 저절로 흥이 느껴지는 정취가 있었다. 늘 말하기를, "시는 모든 문장 체재의 조종이다."라고 하였으니, 어쩌면 성정(性情)의 발현에 통하지 않은 데가 없는 묘리를 스스로 징험했을 것이다. 총괄하면 공은 덕행과 학문, 식견이 성대하게 모범이 되었으니, 당시에 비록 이옹(頤翁)의 높은 재주로도 또한 공의 영향을 받아 성취한 것이 있었음은 속일 수 없다.임오년(1942) 봄에 구양(龜陽)에 와서 이재 속집(頤齋續集)의 교정을 끝내고, 아울러 공의 유문(遺文)을 교정하였는데, 8대손 서구(瑞九)가 이 일로 인하여 서문을 지어 줄 것을 청하니, 내가 일어나 말하기를,"아, 또한 성대한 일이 아니겠는가. 이옹은 진실로 더 말할 것도 없거니와 황씨(黃氏)의 선학(先學)이 공에 이르러 더욱 완비된 것이 또 이와 같으니, 아버지가 북돋우고 아들이 창달시켜 서로 뜻을 얻음이 더욱 빛나고 아름답구나. 이것을 어찌 크게 써서 서문으로 삼지 않을 수 있겠는가."하였다. 《시경》에서 말하지 않았는가? "너의 조상을 생각하지 않느냐, 그 덕을 닦을지어다.42)"라고 하였으니, 내가 바라건대, 이 유고를 읽은 후손들은 가문의 명성이 창성한 근본을 생각하여 가업[箕裘]을 무궁토록 이어가야 할 것이다. 《주역》에서 말하지 않았는가? "자식이 있으면 돌아가신 아버지가 허물이 없게 된다.43)"라고 하였으니, 내가 바라건대, 이 유고를 읽은 후생들은 전대 현인들이 입신양명하여 어버이를 현양한 자취를 생각하여 힘써 따라야 할 것이다. 竊嘗觀夫古今人門之出鴻儒碩匠而昌家聲者, 蓋多本其先學而來. 今於晩隱處士 黃公, 益驗其信然矣. 我湖之黃頤齋先生, 通國之鴻碩, 而公卽其大人, 上承醉隱、山村、龜巖之學, 下以啓頤齋之賢. 如使知有頤齋而不知有晩隱, 則是譬之徒知西山之精博而不知有牧堂老人, 豈可乎哉? 公少治科業, 業旣精至, 七擧而猶不中, 晩而隱於仙浦 龜陽之居, 絶意榮途, 潛心經學, 爲白水、木山、杜湖諸名德所獎與, 一代儒宗如渼湖、屛溪二先生, 至以好學稱之, 斯可以見公矣. 其著於修辭, 則平實詳明, 就事論情, 因物說理而已, 無尙奇致飾, 悅人耳目之態, 庶所謂辭達者是也. 至於言志之作, 得之天機者深. 故卽寫境遇而紆餘有地, 不事雕琢而淸越有響, 使人諷詠, 自有興感之趣. 常曰: "詩者, 文章百體之宗. " 抑有以自驗性情之發, 無往不通之妙也歟. 總之公德行文識, 蔚然望範乎. 當時雖以頤翁高才, 亦有所受而成, 不可誣也. 壬午春余來龜陽, 校訖頤齋續集, 而幷及公遺文. 八世孫瑞九, 因請序之. 余作而曰: "吁, 不亦盛乎. 頤翁固尙矣, 黃氏先學, 至公益備者又如此, 父而培之, 子而達之, 相得益章猗歟哉. 是烏可不大書之, 以爲序乎?" 《詩》不云乎? "無念爾祖, 聿修厥德. " 吾願後孫之讀是稿者, 宜思家聲所昌之本, 紹箕裘於無窮也哉. 《易》不云乎? "有子, 考无咎. " 吾願後生之讀是稿者, 宜思勉追前修立揚而顯其親也哉. 《만은유고》 조선후기 학자 황전(黃㙻, ?~1771)의 시·서(書)·제문·만사 등을 수록한 시문집이다. 4권 2책. 석인본. 1943년 8대손 서구(瑞九)가 편집ㆍ간행하였다. 취은(醉隱)ㆍ산촌(山村)ㆍ구암(龜巖) 취은은 황전의 조부인 황세기(黃世基)의 호이고, 산촌은 황전의 부친인 황재만(黃載萬)의 호이다. 구암은 미상이다. 서산(西山)의 …… 것이니 서산은 남송 때 경학가인 채원정(蔡元定, 1135~1198)의 호이고 목당노인은 채원정의 아버지인 채신여(蔡神與, 1089~1152)의 호이다. 채신여로부터 아들 원정, 손자 연(淵)ㆍ원(沅)ㆍ침(沉), 증손자 격(格)ㆍ모(模)ㆍ항(杭)ㆍ권(權)에 이르기까지 남송의 대유(大儒)로, 이들을 아울러 "채씨사세구유(蔡氏四世九儒)"라 불렀다. 말은 …… 그만이다 《논어집주》 〈위령공(衛靈公)〉에 보인다. 언지(言志)의 작품 시를 말하는 것으로, 《서경)》 〈순전(舜典)〉에 "시는 뜻을 말한 것이요, 노래는 말을 길게 읊은 것이요, 소리는 길게 읊음에 따른 것이요, 음률은 읊는 소리를 조화시키는 것이다.〔詩言志, 歌永言, 聲依永, 律和聲.〕"라고 한 데에서 유래하였다. 너의 …… 닦을지어다 《시경》 〈문왕(文王)〉에 "너의 조상을 생각하지 않느냐, 그 덕을 닦을지어다. 길이 천명에 짝하는 것이, 스스로 많은 복을 구하는 길이 되느니라.〔無念爾祖? 聿修厥德. 永言配命, 自求多福.〕"라고 하였다. 자식이 …… 된다 《주역》 〈고괘(蠱卦) 초육(初六)〉에 "초육은 아버지의 일을 주관함이니, 자식이 있으면 돌아간 아버지가 허물이 없게 된다.〔初六, 幹父之蠱, 有子, 考无咎.〕"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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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옹집44) 중간 서문 【을축년(1925)】 栗翁集重刊序 【乙丑】 사람들은 언제나 글이 사람 때문에 전해진다고 말하는데, 이는 참으로 옳은 말이거니와 나는 삼가 사람이 글 때문에 전해진다고 생각하니, 이것도 또한 옳을 것이다. 율옹 선생(栗翁先生) 송공(宋公 송징(宋徵))은 충효(忠孝)와 대절(大節)로 《춘추(春秋)》의 대의(大義)를 밝혔으니, 선조(宣祖) 임진년(1592)에 어머니를 모시고 난리를 피할 때에는 험한 일을 두루 겪으면서도 한결같은 마음으로 정성껏 봉양하면서 난리 가운데에 있음을 잊게 하였고, 광해군의 조정에서 모후(母后)를 폐하자는 논의가 일어났을 때에는 상소를 올려 이이첨(李爾瞻)을 배척하고 그날로 고향으로 돌아왔으며, 인조 갑자년(1624) 이괄(李适)의 변란 때에는 의병을 모집하여 왕의 일에 힘썼고, 병자년(1636) 태학(太學 성균관)에 있을 때에는 오랑캐의 사신을 참수할 것을 청하였으며, 정축년(1637) 이후로는 문을 닫고 자취를 감춘 채 세상에 나아가 공명을 이루는 것을 구하지 않았다. 공이 천지를 지탱하고 인륜의 기강을 부지하는 데에 수립한 것이 이미 이와 같았으니, 공의 손에서 나온 문장은 비록 천년의 오랜 세월이 지난다 하더라도 어느 누가 사랑하고 소중하게 여기며 마치 공을 보듯 하지 않겠는가. 이것이 이른바 글이 사람 때문에 전해진다는 것이다.정축년 이후에 저술한 것들은 중화를 높이고 오랑캐를 물리치는[尊華攘夷] 의리 아닌 것이 없었으니, 〈종루(鍾樓)〉라고 제목한 시에서 "어찌 차마 신종황제의 덕을 배반하며, 무슨 얼굴로 선조대왕의 영령을 대하겠는가[忍背神宗皇帝德, 何顔宣祖大王靈]"라고 한 것이 더욱 절실하고 통쾌하여 사람들이 비록 공의 손에서 나온 작품인 줄 미처 알지 못했지만 먼저 입에 오르내렸으니, 공의 시가 사람의 마음을 감동시켜 움직이게 하는 것이 또 이와 같다. 지금 300여 년에 이르기까지 사람들이 다투어 그 시를 암송하면서 그 사람을 알게 된다면 이는 사람이 글 때문에 전해진다고 이를 수 있으니, 그렇지 않은가?요약하면 공의 글은 사람과 글 때문에 모두 전할 만 하니, 이것이 인릉(仁陵 순조(純祖)) 병술년(1826)에 이미 간행하고, 갑자(甲子)가 두 번 지난 올 해 기축년(1949)에 다시 간행하는 이유이다. 나는 더욱 오래될수록 더욱 간행되어 전하는 데에 쇠퇴함이 없을 줄 알겠다. 추월산은 무너지지 않고, 담양의 강물은 장구히 흐르면서 공의 인품과 글이 함께 존재할 것이니, 또 어찌 흩어지고 빠진 나머지 권부(卷部)가 적다고 개탄할 수 있겠는가. 《시경》에 이르기를, "높은 산을 우러러 보며, 큰 길을 따라간다.45)"라고 하였는데, 나는 공에게 실로 이러한 마음을 가지고 있는지라 10대손 환욱(煥郁)이 와서 중간(重刊)의 서문을 청하기에 공경하고 앙모하는 마음을 써서 돌려보낸다. 人恒言文以人傳, 此固然也. 余竊謂人以文傳, 亦可也. 栗翁先生 宋公, 有忠孝大節, 明《春秋》大義. 宣祖壬辰, 奉母避難, 備經險阻, 而一心忠養, 使之忘在難中. 昏朝廢母議起, 疏斥爾瞻, 卽日還鄕. 仁廟甲子适變, 募義旅以勤王事, 丙子在太學, 請斬虜使. 丁丑以後, 杜門遯跡, 不求進取, 公之所樹立撑天地扶人紀者, 旣如此, 則文之出自公手者, 雖曠千載之遠, 孰不愛重之, 若見公乎? 此所謂文以人傳也. 丁丑後述作, 無非尊華攘夷之義, 而其題〈鍾樓〉詩, "忍背神宗皇帝德, 何顔宣祖大王靈?" 尤深切痛快. 人雖未及知出自公手, 而先已膾炙于口, 公之詩感發人心, 又如此. 至今三百有餘年, 人爭誦其詩, 而知有其人, 則此可謂人以文傳者, 不其然乎? 要之公之文以人以文, 皆可傳焉. 此所以旣刊於仁陵丙戌, 而重刊於再周甲今年己丑者也. 吾知其愈久愈刊, 傳之無替矣. 秋山不崩, 潭水長流, 公之人、文, 與之俱存, 又烏足以散逸餘卷部之少致慨也哉? 《詩》云: "高山仰止, 景行行止. " 吾於公實有之. 十世孫煥郁來請重刊序,. 爲之書敬慕之意而歸之. 율옹집 송징(宋徵, 1564~1643)의 저서인 《율옹유고(栗翁遺稿)》를 가리킨다. 초판본은 불분권 1책이고, 목판본이며, 1826년(순조 26) 6대손 재일(在一)과 이신(以新) 등이 처음 편집ㆍ간행하였고, 권두에 송치규(宋穉圭)의 서문과 권말에 이헌승(李憲承)의 발문이 있다. 높은 …… 따라간다 《시경》 〈거할(車舝)〉에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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