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1년 이승학(李承鶴) 간찰(簡札) 고문서-서간통고류-서간 개인-생활-서간 辛卯至月卄九日 族下 承鶴 辛卯至月卄九日 李承鶴 전남도청(2020년 구입 의병자료) (재)한국학호남진흥원 1891년 11월에 이승학(李承鶴)이 족인(族人)께 안부를 전하고 과거(科擧) 등의 서울 소식을 물은 내용의 간찰. 1891년 11월에 이승학(李承鶴)이 족인(族人)에게 안부를 전하고 과거(科擧) 등의 서울 소식을 물은 내용의 편지이다. 이승학은 편지 첫머리에서 족인에 대한 그리움을 표했다. 지난 1년간 곁에서 지내다가 고향으로 돌아와 그때를 회상해 보니 꿈만 같지만, 항상 마음속으로 떨치지 않고 있다고 하였다. 이 구절을 보면 이승학이 서울에 있는 동안 이 족인의 집에서 머물렀거나 근처에서 지낸 것임을 알 수 있다. 이승학은 과거 시험을 위해 1890년 9월에 서울로 가서 근 1년간을 지냈다. 이어서 이승학은 벼슬길에 있는 족인과 그 아들의 안부를 묻고 서울 상황을 두루 확인하였다. 지난번 여관(汝寬) 족인의 편지에 녹림(綠林, 반정부 세력)의 혼란이 있었다고 들었는데, 이는 매우 놀라운 일로 도시에서도 이러한데 외방(外方)의 경우는 어떠하겠느냐며 세상의 변란을 근심하였다. 계속해서 이승학은 자신의 최신 상황을 전하였다. 본인은 추위(秋圍, 가을 향시(鄕試))에 낙방했는데, 이는 명운(命運)이기도 하지만 소홀히 준비했기에 빚어진 결과라며 반성하기도 했다. 또 귀향하고서 비 때문에 병을 얻어 고생하고 있다는 안부를 전하고, 경향(京鄕)에 있는 족인들이 추향(秋享)에 참석을 많이 하지 않았다는 말을 전하며 문중 일을 걱정하기도 했다. 이승학이 과거 시험 일정을 묻는 내용도 보인다. 그는 내년 봄에 증광시(增廣試)가 있다는 소문을 들었다고 하면서 과연 그러한지 확인했다. 본인은 과거를 포기한 것도 아니지만 그렇다고 진작(振作)할 기운도 없다며 탄식과 미련을 드러내기도 했다. 편지 말미에서 여관(汝寬) 족인에 대한 안부를 묻고 인편이 없어 편지를 올리지 못하고 있다고 죄송한 마음을 전하고, 씨 뺀 솜 2근을 함께 보낸다는 말을 추신으로 적었다. 이승학(1857∼1928)의 본관은 전주(全州)로, 양녕대군의 후손이며, 자는 자화(子和), 호는 청고(靑皋)이다. 전남 담양 장전리(長田里)에서 출생하였다. 아버지는 기정진(奇正鎭)의 문인인 진사 이최선(李最善)이고, 이승학 본인도 기정진의 문하에서 배웠다. 아들 이광수(李光秀)는 송사(松沙) 기우만(奇宇萬)의 제자이다. 을미사변(乙未事變) 때 팔도에 격문을 보내어 의병을 일으키기도 했다. 문집으로 ?청고집(靑皋集)? 4권을 남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