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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부

송암 김공 묘표 경인년(1950) 松菴金公墓表【庚寅】 근고(近古)에 봉산(蓬山) 아래 부풍(扶風 부안(扶安))에 덕을 숨겨 벼슬하지 않고 의(義)를 행해 세상에 모범이 된 선비가 있으니 송암 김공이 그 사람이다. 공의 말에 "서리와 눈에도 끄떡없이 홀로 서 있는 것은 소나무와 잣나무이니, 이 때문에 하늘 아래 높이 서서 해를 가릴 수 있다."라고 하였는데 공이 호를 취한 것이 여기에 있으며 진실로 공자가 말한 "날씨가 추워진 다음에야 늦게 시든다."75)라는 뜻으로 공의 뜻과 행실의 전체를 볼 수 있다.공이 돌아가시고 부안 하서면(下西面) 석하리(石下里) 경좌(庚坐) 언덕에 장사 지낸 지 지금 거의 백 년인데 증손 김기술(金基述)이 비로소 묘표를 세워 나로 하여금 글을 짓게 하면서 말하기를, "그대는 비록 먼 친족이지만 어려서는 창동(滄東)의 글방을 함께 다녔고 늙어서는 성재(星齋)76)에서 함께 거처하여 동당형제(同堂兄弟)처럼 친해 내 증조의 일과 행적에 대해 익히 들어 상세히 알기 때문에 부탁하는 것이네."라고 하였다. 이에 내가 말하기를, "사람의 글재주를 이유로 청하지 않고 이를 이유로 청하니 내가 어찌 사양할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다.공의 휘는 유성(維聖)이고, 자는 성춘(聖春)이다. 부안 김씨는 가계(家系)77)가 신라 경순왕(敬順王)의 태자(太子) 휘 일(鎰)에게서 나왔다. 세대를 전하여 고려 때 평장사(平章事)를 지낸 문정공(文貞公) 휘 구(坵)에 이르러서는 문장과 도덕이 당세에 으뜸이었다. 6세를 내려와 고부군사(古阜郡事) 휘 광서(光敘)에 이르러서는 고려가 망하자 팔판시동(八判寺洞)78)에 들어갔다가 끝내 관향(貫鄕)으로 돌아갔으니, 일이 《충렬록(忠烈錄)》79)과 《송경지(松京誌)》80)에 실려 있다. 3세를 내려와 직손(直孫)에 이르러서는 한조(韓朝)81)에서 문과(文科)에 급제하고 첨정(僉正)을 지냈으며 도승지에 추증되었다. 율곡(栗谷) 이 선생(李先生)이 신도비명(神道碑銘)을 지었다.82) 아들 휘 석홍(錫弘)은 군수(郡守)를 지냈고 이조 참의에 추증되었다. 이분은 기묘명현(己卯名賢)83)이다. 아들 휘 서성(瑞星)은 문과에 급제하고 검상사인(檢詳舍人)을 지냈으며 외직(外職)으로 나주 목사(羅州牧使)를 지냈다. 아들 휘 만복(萬福)은 봉사(奉事)를 지냈는데 공의 8세조이다. 휘 억귀(億龜)와 휘 몽열(夢說)은 증조와 조부이다. 부친의 휘는 상환(商煥)이고 모친은 해주 오씨(海州吳氏)로 달인(達仁)의 따님이다.공은 정조(正祖) 신해년(1791, 정조15) 1월 9일에 태어났다. 효성스럽고 우애가 있으며 근검(勤儉)하여 비록 장가들어 분가한 뒤에도 고기 잡고 나무하여 부모와 큰형을 봉양하고, 따로 사는 막내 동생을 보살피고 자신을 돌보는 데는 매우 박하였으나 속으로 원망하는 소리가 없었다. 남은 힘으로 학문하여 일용할 거리로 삼고, 농사에 힘쓰고 집안을 다스려 가계(家計)가 자못 여유로워졌다. 일찍이 성년이 되지 않은 여자84)가 물에 빠지자 즉시 손을 잡아 구하는 것을 보고 혹자가 남녀 간에 구별이 없는 것인지 의심하였는데 공이 말하기를, "서열이 높은 혐의가 있는 형수도 오히려 손을 잡아 구할 수 있는데85) 하물며 성인이 되지 않은 다른 집의 여자이겠는가."라고 하였다.흉년이 들었을 때는 인근의 의지할 데 없는 사람에게 곡식을 흩어 나누어 주면서 말하기를, "나만 홀로 따뜻하게 입고 배불리 먹으면서 다른 사람의 죽음을 좌시한다면 이것이 어찌 인심이겠는가."라고 하였다. 임인년(1842, 헌종8)과 계묘년(1843)에 부친상과 모친상을 연이어 당했는데 당시에 나이가 50이 넘었는데도 상제(喪制)를 지켜 예(禮)을 준수하였다. 상복을 벗고 나서는 자식들에게 이르기를, "나는 기애(耆艾)86)인데도 간고(幹蠱)87)에 부지런한 것은 자식의 도리가 그러하기 때문이다. 이제는 어찌 처자식을 위해 바쁘게 집안일을 돌보겠느냐."라고 하였는데, 이후로는 오직 서적을 가지고 스스로 즐겼다. 간혹 지구(知舊)나 집안의 친족과 함께 서로 만나 화락하게 지냈다.만년에 노비 두 사람을 불러 이르기를, "하늘이 사람을 냄에 본래 차이가 없다. 나는 너희들이 대대로 노비인 것을 차마 볼 수 없다." 하고는 재산을 넉넉히 주고 보내면서 말하기를, "몸을 닦고 행동을 삼가며 부지런히 힘쓰고 씀씀이를 절약하여 양인(良人)이 되어라."라고 하였다. 철종(哲宗) 기미년(1859, 철종10) 3월 25일에 졸(卒)하였으니 향년 69세이다.부인은 전주 유씨(全州柳氏)로 기영(基英)의 따님이다. 장남은 우익(友翼)이고, 차남은 우현(友賢)이며, 고부(古阜) 이농술(李瓏述)은 사위이다. 우익의 양자는 세감(世鑑)인데 아들 하나로 기술(基述)을 두었다. 형렬(炯烈), 형면(炯冕), 형삼(炯三), 형창(炯昌)과 김해(金海) 김갑곤(金甲坤), 김해 김용석(金龍錫)은 기술의 아들과 사위이다. 우현은 2남 3녀를 두었는데 세감은 백부(伯父)의 양자로 나갔고, 시감(始鑑)은 아들로 정술(政述), 길술(吉述)을 두고, 전주 이규학(李奎鶴), 해주(海州) 오영권(吳永權), 고령(高靈) 신문구(申文求)는 사위이다.아, 공은 진실로 효성스럽고 우애가 있는 어진 사람이다. 이웃을 구휼하고 노비를 풀어 준 일이 모두 인(仁)인데 인은 사덕(四德)을 포함하니 모든 행실과 선이 무엇인들 갖추어지지 않았겠는가. 미처 다 기록하지 못한 공의 여러 행적을 미루어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또 공이 소나무[松]로 암(菴)에 편액한 것을 보면 평소 숭상한 바는 강하고 굳세며 우뚝히 서는 데에 있을 듯한데 드러난 일이 없는 이유는 무엇인가? 대개 인자(仁者)는 사욕(私欲)을 극복하니 사욕이 극복되면 항상 만물 위에서 자신의 뜻을 펼칠 수 있어 강하고 굳셈이 저절로 생겨나 의(義)가 되는 것이다. 사람들이 공의 인덕(仁德)이 사욕을 극복한 데서 나왔다는 사실을 안다면 그 의가 이보다 잘 드러나는 것이 없음을 알 것이다. 그러므로 내 생각에는 공을 어질고 의로운 사람이라 하여도 옳다고 하겠다. 近古蓬山之下, 扶風之鄕, 有隱德不仕, 行義範世之士, 松菴金公, 其人也。公之言曰: "傲霜雪而獨立者, 松柏也, 所以能叅天蔽日。" 其取號者在此, 而實孔子所稱歲寒後凋之意, 可見公志行全體矣。沒而葬于扶安下西面石下里庚坐之原者, 今且百年, 曾孫基述, 始樹阡表, 俾澤述文之曰: "子雖遠族, 少而同滄塾, 老共處星齋, 親若同堂昆弟, 於吾曾祖事行, 稔聞而詳知, 故屬之也。" 余曰: "不以人文而以是, 則吾何能辭爲?"公諱維聖, 字聖春。扶寧金氏, 繼・(系)出新羅敬順王太子諱鎰。傳至高麗平章事文貞公諱坵, 文章道德冠一世。六傳至古阜郡事諱光敘, 麗亡, 入八判寺洞, 終歸貫鄕, 事載《忠烈錄》、《松京誌》。三傳至諱直孫, 韓朝文科, 僉正, 贈都承旨。栗谷李先生, 撰神道碑銘。有子諱錫弘, 郡守, 贈吏曹叅議。是爲己卯名賢。有子諱瑞星, 文科, 檢詳舍人, 外守羅州牧。有子諱萬福, 奉事, 公八世祖。諱億龜, 諱夢說, 曾祖若祖也。考諱商煥, 妣海州吳氏, 達仁女。公生以正祖辛亥正月九日。孝友勤儉, 雖析箸後, 漁樵以供父母及伯兄, 周護季弟之異居者, 自奉甚約, 內無怨聲。餘力問學, 以資日用, 明農治家, 調度頗裕。嘗見及・(未)笄女溺水, 卽以手援, 或疑以男女無別。公曰: "嫂之尊嫌, 猶可手援, 况他家女未成人者乎?" 凶年散穀於隣近之無告者曰: "吾獨溫飽, 而坐視其死, 是豈人心哉?" 壬寅癸卯, 連丁內外艱, 時年五十以上, 猶能執制準禮。及至免喪, 謂諸子曰: "吾在耆艾, 猶勤幹蠱者, 子道然也。今則豈可爲妻孥役役營産也?" 自後惟以書籍自娛。間與知舊宗族相會和樂。晩年招謂奴婢二人曰: "天之生人, 本無差異。吾不忍汝等之世爲奴婢。" 資給産業, 而送之曰: "修身謹行, 勤力節用, 以成良人也。哲宗己未三月二十五日卒, 享年六十九。配全州柳氏, 基英女。男長友翼, 次友賢, 古阜李瓏述, 婿也。友翼繼男世鑑, 有一子基述。曰炯烈、炯冕、炯三、炯昌, 金海金甲坤、金海金龍錫, 基述子婿也。友賢二男三女: 世鑑出繼伯父, 始鑑有子政述、吉述, 全州李奎鶴、海州吳永權、高靈申文求, 婿也。嗚呼! 公固孝友仁人也, 恤隣放奴, 無非是仁。而仁包四德, 百行萬善, 何所不備? 公之羣行不及悉書者, 可推而知矣。然又觀公之扁菴以松, 則平日所尙, 似在剛毅特立, 而無所著見何也? 蓋仁者克私, 私克則常伸於萬物之上, 剛毅自生而爲義。人知公之仁德, 出於克私, 則知其爲義也莫著乎此矣。故余謂謂公爲仁義之人, 亦可也云爾。 날씨가……시든다:《논어(論語)》 〈자한(子罕)〉에 "나는 날씨가 추워진 다음에야 소나무와 잣나무가 늦게 시든다는 것을 알았다.[歲寒然後 知松柏之後彫也]"라고 한 공자의 말을 인용한 것이다. 군자의 지조는 환난을 당한 뒤에 비로소 알 수 있다는 뜻이다. 성재(星齋):전라북도 부안군 부안읍에 있는 김광서(金光叙) 묘의 재실인 취성재(聚星齋)이다. 취성재라는 이름은 명종조(明宗朝)의 문신 임억령(林億齡)이 부안 김씨가 살고 있는 옹정리(瓮井里)를 찾아서 "옹정에는 군자가 많은데 김씨 가문에는 덕성(德星)이 모였다."라고 칭찬한 글의 '취덕성(聚德星)'에서 유래한 것이라 한다. 1819년(순조19)에 세워진 것이 화재로 소실되고 1826년에 중건하여 지금에 이른다. 예전에는 이 재실에서 사방의 선비들이 모여 들어 학문을 강론하였다고 한다. 가계(家系):원문은 '繼'이다. 문맥에 근거하여 '系'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팔판시동(八判寺洞):〈조고 우신재 부군 묘표(祖考又新齋府君墓表)〉과 〈십칠세조 고려 봉정대부 지고부군사 부군 가장(十七世祖高麗奉正大夫知古阜郡事府君家狀)〉 등에는 '팔판동(八判洞)'이라 되어 있다. 아래에 보이는 《송경지》에는 팔판시동이라는 지명을 언급하는데 개성 성거산(聖居山) 아래에 있고 고려 신하 8인이 이곳에 들어와 분신자살을 했다고 한다. 충렬록(忠烈錄):정확히 어떤 책인지는 미상이다. 〈화전 김공 묘표(花田金公墓表)〉와 〈선고 벽봉 부군 가장(先考碧峰府君家狀)〉 등에는 〈충의록(忠義錄)〉이라고 하였다. 다만 〈십칠세조 고려 봉정대부 지고부군사 부군 가장〉에서 《여조충렬록(麗朝忠烈錄)》이라고 하였는데 이는 채동열(蔡東說)이라는 인물이 두문동 칠십이현(杜門洞七十二賢)과 관련된 기록을 모은 책이다. 이 책의 부록에 김광서의 이름이 있는데, 역임한 직임과 본관 정도의 짤막한 내용만 실려 있다. 송경지(松京誌):1830년(순조30)경에 서희순(徐憙淳, 1793~1857)이 편찬한 개성부(開城府)의 읍지이다. 개성 유수(開城留守)를 지낸 김육(金堉), 이돈(李墩), 엄집(嚴緝), 오수채(吳遂采), 정창순(鄭昌順), 서유방(徐有防), 윤숙(尹塾), 김문순(金文淳), 김이재(金履載), 서희순의 서(序)・발(跋)이 실려 있다. 개성이 고려의 도읍지였기 때문에 고려세기(高麗世紀)를 가장 먼저 편성하였고, 국조기사(國朝紀事)에서는 조선 태조(太祖) 대부터 편찬 당시의 순조 대까지 송경과 관련된 기사를 편집하였다. 유수 조(條)에는 판부사(判府事)를 지낸 정지(鄭地)부터 1829년에 부임한 서희순까지 총 302명의 지방관이 수록되어 있다. 한조(韓朝):보통 조선 시기의 사람이 서술한 글은 조선조(朝鮮朝)를 본조(本朝)라고 하는데 '대한제국(大韓帝國)'의 '韓'을 따와 조선조의 의미로 이렇게 칭한 듯하다. 율곡(栗谷)……지었다:《율곡선생전서(栗谷先生全書)》 권17에 〈정언 증 도승지 김공 신도비명(正言贈都承旨金公神道碑銘)〉이 실려 있다. 기묘명현(己卯名賢):중종(中宗) 14년(1519) 기묘사화로 죽거나 유배 및 파직을 당한 사람과 사림(士林)을 두둔한 사람들을 가리킨다. 성년이 되지 않은 여자:원문은 '及笄女'이다. 문맥에 근거하여 '及'을 '未'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형수도……있는데:《맹자(孟子)》 〈이루 상(離婁上〉에 보인다. 기애(耆艾):노인을 가리키는 말로, 60세를 기라 하고, 50세를 애라 한다. 《예기(禮記)》 〈곡례 상(曲禮上)〉에, "50세를 애라 하니 관복을 입고 정사에 참여하며, 60세를 기라 하니 사람을 부린다.[五十曰艾 服官政 六十曰耆 指使]"라고 하였다. 간고(幹蠱): 《주역(周易)》 〈고괘(蠱卦) 초육(初六)〉에 "아버지의 일을 주관함이니, 훌륭한 자식이 있으면 돌아간 아버지가 허물이 없을 것이다.[幹父之蠱, 有子, 考无咎.]"라고 한 데서 온 말로, 자식이 아버지의 뜻을 잘 계승하여 아버지가 미처 다 이루지 못한 사업을 완성하는 것을 말한다. 여기서는 범범하게 집안일을 주관하여 다스린다는 뜻으로 쓰인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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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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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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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부

화전 김공 묘표 을유년(1945) 花田金公墓表【乙酉】 과거에 내가 부풍(扶風)의 화전(花田)에서 족형(族兄) 성암공(成菴公 김연술(金淵述))을 따라 노닐 적에 성암공의 둘째 아우가 예복(禮服)을 입고서 성암공에게 나아가 따라서 가묘(家廟)에 배알하고 이윽고 다시 형에게 절하는 모습을 보았는데 아버지처럼 지극히 공경하여 엄연하게 법도 있는 집안의 풍도가 있었다. 이에 성암공은 진실로 유학자들의 중망(重望)을 받는 분이고 둘째 아우 역시 양가(楊家)의 나한(羅漢)88)과 같은 부류라고 생각하였는데 지금 40여 년이 지나서도 잊을 수 없다. 어느 날 족질(族姪) 김형해(金炯海)가 그의 아우 김형주(金炯周)의 아들 김환철(金環喆)을 보내 선고(先考)인 화전공의 묘문(墓文)을 청하였는데 공이 바로 성암공의 둘째 아우이다. 그 가장을 살펴보고 공을 더욱 자세히 알았으니 또한 행운이다.공의 휘는 복술(馥述)이고 자는 내관(乃寬)이다. 부안 김씨(扶安金氏)는 경순왕(敬順王)의 태자 휘 일(鎰)에게서 나왔다. 태자의 충의(忠義)에 대해서는 고금의 논하는 자들이 한(漢)나라 북지왕(北地王)89)에 비기며 더 낫다고 하였다. 고려 때는 평장사(平章事) 문정공(文貞公) 휘 구(坵)가 문장과 도학(道學)으로 크게 이름이 드러났다. 고려가 망했을 때는 군사(郡事) 휘 광서(光叙)가 망복(罔僕)90)의 큰 절개를 지켰으니 일이 《충의록(忠義錄)》에 실려 있다.본조에 들어서는 도승지 휘 직손(直孫)이 있으니 율곡 선생(栗谷先生)이 신도비명(神道碑銘)을 지었다. 이조 참의 옹천(甕泉) 휘 석홍(錫弘)은 기묘명현(己卯名賢)이다. 사인(舍人) 청수재(淸修齋) 휘 서성(瑞星)은 청현직(淸顯職)을 역임하였다. 주부(主簿) 퇴우당(退憂堂) 휘 해(垓)는 임진년(1592, 선조25)과 갑자년(1624, 인조2)91) 두 차례의 난리에 의병(義兵)을 일으켜 왕사(王事)에 부지런하였다. 이분들이 공의 10세조 이상이다. 부친 휘 한일(漢鎰)은 굳세고 발라 마음이 곧았던 옛사람의 유풍(遺風)이 있었으며, 모친 장흥 고씨(長興高氏)는 여사(女士)의 행실이 있었으니 간재(艮齋) 전 선생(田先生)이 묘갈명을 지었다.92) 이를 보면 공의 현명함은 대개 근원이 있는 것이다.공은 태어나면서 독실하였다. 부모상을 당했을 적에는 한결같이 예제(禮制)를 따랐으니 비록 비바람이 몰아치는 날이라도 반드시 형과 함께 성묘하였다. 상복(喪服)을 벗은 뒤에는 기제사(忌祭祀)와 묘사(墓祀), 삭참(朔參)과 망참(望參)93)을 지낼 적에 부모가 살아 계신 것처럼 정성을 지극히 하였다. 형을 정성으로 섬겨 온공(溫公)이 백강(伯康)에게 한 것처럼94) 공경하고 보호하였다. 부모의 묘소에 세울 석물(石物)을 땅을 팔아 스스로 마련하니 형이 "이는 내가 해야 하는 일이다."라고 제지하자 "지파(支派)가 종파(宗派)를 섬기는 것은 예로 볼 때 또한 당연합니다."라고 대답하였다. 글을 읽을 때는 《소학(小學)》을 위주로 하였는데 "이 책은 입신(立身)의 근본이니 진실로 능통할 수 있다면 학문은 과반이 이루어진 셈이다."라고 하여 자식과 조카를 가르칠 적에 다른 책을 쓰지 않았다. 이에 사람들이 "한훤(寒暄)과 하서(河西)95)를 잘 배운 사람은 아무개이다."라고 하였다.몸을 단속하는 데 엄정하여 평소 장난치며 웃거나 눕는 일이 없었고 역(役)에 복무할 때도 상투를 드러내지 않았다. 청렴과 과묵함으로 스스로를 단속하여 뜻은 세상의 영욕(榮辱)에 빼앗기지 않고 입으로는 다른 사람의 허물과 나쁜 점을 말하지 않았다. 자식을 경계하여 "학문에 힘쓰고 농사에 부지런한 것이 본분상의 일이니, 부정한 학설과 잡스러운 종교는 몹시 혹세무민하는 것이다."라고 하였다.무오년(1918) 7월 24일에 병으로 임종하였으니 태어난 철종(哲宗) 계해년(1863, 철종14) 2월 19일부터 누린 수명이 56년이다. 화전 뒤 해방(亥方)을 등진 언덕에 장사 지냈다. 부인은 전주 최씨(全州崔氏)로 부덕(婦德)이 있었다. 삼남을 두었는데 장남과 차남은 형해, 형주이고, 막내는 형문(炯文)이다. 딸은 반남(潘南) 박문서(朴文緖)에게 시집갔다. 환철, 관철(貫喆), 명철(明喆), 준철(峻喆), 희철(熙喆), 휴철(烋喆)은 손자이다.아, 맹자(孟子)가 말하기를, "사람마다 자신의 어버이를 사랑하고 어른을 공경하면 천하가 평안해질 것이다."96)라고 하였는데, 지금 우리나라는 비록 큰 적이 이미 물러나고 강토는 잃은 것이 없으나 여러 당파가 서로 다투어 기강이 수립되지 않았다. 만약 나라를 온전히 지켜 사람마다 모두 공처럼 효제(孝悌)를 근본으로 삼고 학문과 농사를 아울러 힘써 자신을 수양해 외물을 부러워하지 않고 바른 도를 지켜 부정한 도에 흔들리지 않는다면 이것이 바로 이른바 민족자치(民族自治)라는 것이니 하나로 정해져 기강을 수립하는 데 무슨 문제가 있겠는가. 그러나 지금 공이 죽은 때부터 또 거의 한 세대가 지나 풍조가 더욱 변한 탓에 원래대로 되돌리기 어렵다. 아, 어찌 구인(舊人)으로서의 감개가 없을 수 있겠는가. 始余遊從族兄成菴公于扶風之花田也, 見其二弟服上服, 詣成菴從謁家廟, 已又拜兄, 極其敬如父, 凜然有法家風, 意謂成菴固儒學重望, 而二弟亦楊家羅漢之流, 至今閱四十年餘, 而不能忘。日, 族姪炯海, 遣其弟炯周子環喆, 請其先考花田公墓文。公卽成菴公仲弟也。按其狀而知公益悉, 亦幸矣。公諱馥述, 字乃寬。扶寧之金, 出於敬順王太子諱鎰。太子忠義, 古今論者, 謂擬漢北地王而加善。在麗, 平章事、文貞公諱坵, 以文章道學大顯。麗之亡也, 郡事諱光叙, 守罔僕大節, 載《忠義錄》。入本朝, 有都承旨諱直孫。栗谷李先生撰神道碑。吏曹叅議甕泉諱錫弘, 是爲己卯名賢。舍人淸修齋諱瑞星, 歷敭淸顯。主簿退憂堂諱垓, 壬、甲二亂, 倡義勤王事。公十世以上。考諱漢鎰, 剛正有遺直風。妣長興高氏, 有女士行, 艮齋田先生銘墓。公之賢蓋有所自也。生而克篤。內外艱, 一遵禮制, 雖風雨日, 必同長公省墳。旣吉則忌․墓祀、朔․望叅, 致如在。誠事長公, 敬保之, 若溫公之於伯康。考妣墓石儀, 斥土自備, 長公止之曰: "此吾所當爲。" 對曰: "支之事宗, 禮亦當然。" 讀書以《小學》爲主, 曰: "此立身之本, 苟能通透, 成學過半。" 課子姪, 不以他書。人謂"善學寒暄、河西者某也"。律己嚴正, 平生無嬉笑偃臥, 執役亦不露髻。淸默自持, 志不奪世之榮辱, 口不言人之過惡。戒其子曰: "力學勤農, 本分上事, 邪說雜敎, 誣惑之甚者。"戊午七月二十四日, 以疾終, 距其生哲宗癸亥二月十九日, 壽五十六。葬于花田後負亥原。配全州崔氏, 有婦德。三男: 長次卽炯海、炯周, 季炯文。女適潘南朴文緖。環喆、貫喆、明喆、峻喆、熙喆、烋喆, 孫也。嗚呼! 孟子有言曰: "人人親其親, 長其長, 天下平。" 今我國家, 雖鉅敵旣退, 彊土無損, 列黨互爭, 統紀不立, 若得全邦, 人人皆如公孝悌爲本, 學農兼務, 自修而不慕乎外, 守正而不撓乎邪, 是卽所謂民族自治者, 其於定一而立紀也, 何有? 今去公沒, 又將一世, 風潮益變, 難於回障。嗟夫! 安得無舊人物之感焉爾? 양가(楊家)의 나한(羅漢):나한은 중국 북조(北朝) 때 사람인 양진(楊津)의 자이다. 양진은 형인 양춘(楊椿)과 우애가 두텁고 지극히 공경하였는데, 형이 없으면 맛있는 음식이 있어도 먹지 않았고 형이 취해서 돌아오면 부축해 방에 눕힌 뒤 자신은 방문 앞에서 옷을 벗지 않고 안부를 살폈다. 《小學 善行》 북지왕(北地王):촉한(蜀漢)의 후주(後主) 유선(劉禪)의 아들인 유심(劉諶)이다. 후주가 성도(成都)에 침공한 위(魏)나라 등애(鄧艾)의 군대에 싸우지도 않고 항복하려 하자 유심은 화를 내면서 "만일 꾀가 없고 힘이 없어 반드시 패배하더라도 부자 군신이 성을 등지고 끝까지 싸워서 사직을 위하여 함께 죽어야 합니다."라고 하였다. 후주가 듣지 않자 선주(先主) 유비(劉備)의 사당에 가서 고하고 먼저 처자식을 죽인 다음 자신도 따라 죽었다. 《三國志 蜀書 後主禪傳》 망복(罔僕):망국의 신하로서 의리를 지켜 새 왕조의 신하가 되지 않겠다는 뜻이다. 상(商)나라가 망하기 직전에 기자(箕子)가 "상나라가 망하더라도 나는 남의 신하와 종이 되지 않을 것이다.[商其淪喪, 我罔爲臣僕.]"라고 했던 말에서 유래하였다. 《書經 微子》 임진년과 갑자년:임진년은 임진왜란이 일어난 해로 선조(宣祖)가 의주(義州)로 몽진(蒙塵)한다는 소식을 듣고는 서울로 달려가 의주까지 어가(御駕)를 호위하였다. 갑자년은 이괄(李适)의 난이 일어난 해로 이때에도 인조(仁祖)의 어가를 호위하였는데 이 공으로 장악원 주부(掌樂院主簿)에 제수되었다. 간재(艮齋)……지었다:《간재집(艮齋集)》 전편 속(前編續) 권6에 〈유인 고씨 묘갈명(孺人高氏墓碣銘)〉이라는 제목으로 실려 있다. 삭참(朔參)과 망참(望參):모두 조상에 지내는 간략한 제사인데 삭참은 초하루에, 망참은 보름에 지낸다. 온공(溫公)이……것처럼:온공은 송(宋)나라 사마광(司馬光)의 봉호(封號)이고, 백강은 사마광의 형인 사마단(司馬旦)의 자이다. 두 사람은 우애가 돈독하였는데 백강이 80세가 되자 온공은 형을 엄한 아버지처럼 모시고 어린아이처럼 보호하였다.[伯康年將八十 公奉之如嚴父 保之如嬰兒] 《小學 善行》 한훤(寒暄)과 하서(河西):한훤은 김굉필(金宏弼, 1454~1504)의 호이고, 하서는 김인후(金麟厚)의 호이다. 김굉필은 '소학동자(小學童子)'로 불릴 만큼 《소학》에 심취하였고, 김인후는 김안국(金安國)에게 《소학》을 배웠는데 김안국은 김굉필 문하에서 학문하였다. 사람마다……것이다:《맹자(孟子)》 〈이루 상(離婁上)〉에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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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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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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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부

학생 송공 묘표 學生宋公墓表 나의 동문(同門)인 벗 송사익(宋士翼) 우진(宇鎭)은 단정한 선비이다. 나는 그렇게 된 내력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였는데 근세에 알려진 사람이 있다는 사실을 듣지 못하여 매우 의심하였다. 어느 날 송우진이 선대인(先大人)의 가장(家狀)을 가지고 와서 묘표를 청하였다. 내가 받아서 공경히 읽어보니 심지(心志)가 바르고 전일하며, 실천이 과감하고 독실하며, 식견이 높고 원대하며, 의리가 엄정하고 분명하여 유업(儒業)을 전문으로 익힌 사람도 미치지 못하는 바가 있었으니, 진실로 내가 이른바 알려진 사람이었다. 다만 세속에서는 문장을 숭상하는데 공은 문장이 적었기 때문에 이름이 알려지지 않았으나 그 실제에 어찌 손상이 있겠는가. 단맛이 나는 샘물에 근원이 없다고 하는 사람들의 말은 진실로 망언이니, 지금 묘표를 짓는 일에 대해서는 사양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바라는 바이다.공의 휘는 재규(在奎)이고, 자는 자성(自成)이다. 송씨는 홍주(洪州)를 본관으로 삼는다. 상세(上世)에 휘 평(枰)이 있으니 별시위(別侍衛)를 지냈다. 이후로는 대대로 고관(高官)을 지낸 사람이 있었다. 천계(天啓) 갑자년(1624, 인조2) 인조(仁祖) 때에 이르러서 휘 두문(斗文)이 사마시(司馬試)에 급제하고 연이어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내외의 청현직(淸顯職)을 역임하였으니 공의 8세조이다. 부친의 휘는 덕기(德基)이고, 원배(元配)는 광산 노씨(光山盧氏)로 만권(萬權)의 딸이니 열행(烈行)으로 사림의 추천장이 있었다. 계배(繼配)는 김해 김씨(金海金氏)이니, 이분이 공을 낳았다.공은 말수가 적고 약속을 지키는 것을 중히 여겼으며 남을 위해 일을 도모하면 자신의 일처럼 마음을 다하였다. 일은 반드시 시작을 삼가고 마무리를 잘하였다. 심력(心力)이 견고하여 한번 행하겠다고 다짐한 일이 있으면 만 마리 소도 되돌릴 수 없었다. 출입할 때 법도가 있어 찻집이나 술집에는 전혀 들어가지 않았다. 소싯적에 집이 가난하여 품팔이를 하였는데 계집종들과 함께 김매기를 할 때 요염한 모습을 드러내 보이고 추파를 던져 못하는 짓이 없는 계집종이 있는데도 전혀 돌아보지 않으니 동년배들이 돌부처라고 조롱하였다.일찍 아버지를 여의어 학문하지 못한 것을 항상 한스러워 하였는데 아들이 입학한 뒤에는 매번 날이 저물어 돌아올 때마다 그날 배운 글을 물어서 알고는 함께 수차례를 외워, 비록 힘들고 바쁘더라도 혹여 폐한 적이 없었다. 이 때문에 사람들이 칭찬하여 "손가락으로 바위를 뚫는다."라고 하였다. 3년 뒤에 문리(文理)에 통하여 공사(公私) 간의 문서를 막힘없이 볼 수 있었다.농사에 힘써 좋은 밭을 얻어 경작하였는데 무자년(1888, 고종25)의 흉년 때 유독 수확이 있었다. 과부가 된 손윗누이와 아버지를 여읜 세 조카와 함께 한솥밥을 먹었고,97) 쌀을 덜어 별도로 비축하여 몹시 가난한 집이 아이를 낳거나 병이 들었을 때 주급(周急)하는 데 대비하였다. 임진년(1892)에 동향(同鄕)의 김 아무개라는 관리가 와서 공명첩(空名帖)을 주자 고사하며 말하기를, "이씨(李氏)의 백성이 어찌 김씨가 마음대로 주는 벼슬을 받을 수 있겠는가."라고 하니 김 아무개가 말이 막혀 손을 떨었다.갑오년(1894) 동란(東亂 동학혁명) 때 집안사람과 맹세하기를, "저들의 사술(邪術)이 백성을 미혹하는 것은 우선 따지지 않더라도 왕사(王師)에 저항하고 거스르면 반드시 큰 치욕을 당할 것이니 비록 죽더라도 결단코 사술에 물들지 않고 삼가 피해야 한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끝내 강요를 받아 당(黨)에 들어갔는데, 3일 동안 구금하고서 여섯 차례 맹렬하게 구타한 탓에 기절했다가 겨우 소생하였으나 끝내 동요하지 않았고 가산(家産)을 탕진하여 수개월 동안 와병하였다. 을미년(1895) 왕법(王法)이 다시 밝혀지자 집안 살림을 다스려 복구하였다.무술년(1898)에 모친상을 당하여 마음을 다해 애통해하였다. 무신년(1908, 순종1)에 간재(艮齋) 전 선생(田先生)이 땅을 피해 산으로 들어갔다는 소식을 듣고는 아들에게 명하기를, "세도(世道)의 혼란이 이때보다 심한 적이 없었으나 다행히 대군자(大君子)와 같은 세상을 사니, 따라가 학문할 생각을 하지 않는다면 이는 스스로 몸을 버리는 짓이다. 또 네가 《논어》를 읽는 것을 보았는데 거기에 '의탁함에 있어 친애할 만한 사람을 얻는다면 또한 그를 주인으로 섬길 수 있을 것이다.'98)라는 말이 있었으니 책을 읽기만 하고 행하지 않는다면 또한 무슨 보탬이 있겠느냐. 우리 집안이 유리(流離)하여 자손이 쇠잔한 나머지 선세(先世)의 유업(儒業)을 상실하는 데 이르렀으니 이는 내가 가장 한으로 여기는 바이다. 너는 모름지기 부지런히 공부하고 학문하여 나의 한스러운 마음을 네가 뜻을 확립할 부신(符信)으로 삼아 자신과 집안을 이루도록 하라."라고 하고서 마침내 예물을 마련해 익산(益山)의 미륵산(彌勒山)으로 보내 귀의할 곳을 정하였다.하루는 아들이 《소학(小學)》의 위장공취제동궁득신지매 장(衛莊公娶齊東宮得臣之妹章)99)을 읽고 있었는데 공이 묻기를, "말이 어찌하여 번다하고 간결하지 않느냐?"라고 하니, 아들이 상세히 고하지 못하였다. 그러자 "아마 정궁(正宮)의 소생이라는 뜻을 보이기 위함일 것이다."라고 하였다. 훗날 전 선생에게 질정하니 과연 그러하였다. 경술년(1910)의 변이 일어나자, 나라가 망하고 임금이 없어진 날에 죽지 않았다고 전 선생을 비난하는 자가 있었는데 공이 변론하여 말하기를, "기자(箕子)와 미자(微子)는 주(紂)의 친족100)으로, 은(殷)나라가 망한 날에 죽지 않았는데도 공자(孔子)가 어진 사람이라고 허여하였다.101) 하물며 재야의 지위가 없는 유자(儒者)이겠는가."라고 하니, 들은 사람들이 모두 승복하였다. 대개 이를 보면 공의 뜻은 언행을 숭상하였으니, "심지가 바르고 전일하며, 실천이 과감하고 독실하며, 식견이 높고 원대하며, 의리가 엄정하고 분명하다."라고 한 나의 말이 참으로 그렇지 않은가.공은 철묘(哲廟) 신해년(1851, 철종2) 10월 11일에 태어나 정사년(1917) 4월 24일에 졸(卒)하였으니 누린 수명이 67년이다. 정읍군(井邑郡) 산내면(山內面) 양하동(讓賀洞) 해좌(亥坐) 언덕에 장사 지냈다. 부인은 연안 김씨(延安金氏)로 의수(義秀)의 딸이다. 장남은 우진이고 차남은 석진(碩鎭)이다. 딸은 연일(延日) 정대중(鄭大中), 전주(全州) 이병택(李炳澤)에게 시집갔다. 태환(泰煥), 태형(泰衡), 태우(泰釪)는 장남 소생이고, 태섭(泰燮), 태옥(泰鈺)은 차남 소생이다. 증손과 현손은 기록하지 않는다. 명(銘)은 다음과 같다.아, 이 양하동의 네 자 높이 봉분(封墳)에 嗚呼 此讓賀洞四尺之墳이름은 없고 실지가 있는 문인을 안장하였네 好藏無名有實之聞人 余同門友宋士翼宇鎭, 莊士也。余意其有來處, 而未聞其近世有聞人, 則甚疑之。日, 宇鎭以先大人家狀, 請表阡之文。余受而敬讀, 其心志正專, 踐履勇篤, 見識高遠, 義理嚴明, 有專門儒業之所不及者, 實余所謂聞人也。但以世尙文而公少文, 故名不聞, 然何損於其實? 人謂醴泉之無源者, 眞妄也。今於表文, 非惟不辭, 乃所願焉。公諱在奎, 字自成。宋氏貫洪州。上世有諱枰, 別侍衛。自後世有簪纓。至天啓甲子仁祖時, 諱斗文中司馬, 連登文科, 歷敭內外淸顯, 公之八世也。考諱德基, 元配光山盧氏, 萬權女, 以烈行有士林薦狀。繼配金海金氏, 生公。公寡言語重然諾, 爲人謀則盡心若己事, 事必謹始而克終。心力堅固, 一有所爲, 萬牛莫回。出入有方, 絶不入茶酒肆。少貧行傭, 與婢輩同耘, 有呈艶獻情, 無所不至者, 頓然不顧, 儕輩以石佛嘲之。常恨早孤失學, 及其子上學, 每於暮歸, 將其當日課文, 問而知之, 共誦數遍, 雖勞且忙, 未嘗或廢。人稱曰: "指穿石。" 三年通文理, 能看公私文簿, 無滯。力於稼穡, 得佃良田, 戊子大無, 特得大有。與寡姊三孤甥同釁・(爨)。捐米別貯, 待極貧家産娩及疾病時周急。壬辰, 同鄕金某官來授空名帖, 固辭曰: "李氏之民, 豈可受金氏擅爵乎?" 金語塞手戰。甲午東亂, 與家人誓曰: "姑勿論彼之邪術惑民, 抗逆王師, 必伏大戮, 雖死, 決不染。當謹避之。" 終被其勒要入黨, 三日拘囚, 六次猛打, 氣絶僅甦, 竟不動蕩, 盡家産累月臥病。乙未, 王章復明, 治産復舊。戊戌, 丁內憂, 哀痛盡情。戊申, 聞艮齋田先生避地入山, 命其子曰: "世道板蕩, 莫甚此時, 而幸得大君子幷世, 不思從學, 是自棄其身。且見汝讀《論語》, 有曰'因不失其親, 亦可宗也', 徒讀而不行, 亦何益哉? 吾家流離殘子之餘, 至失先世儒業, 吾所最恨。汝須勤攻學問, 以吾所恨之心, 爲汝立志之符, 成己及家也。" 遂辦下贄具, 送于益山彌勒山中, 定依歸。一日, 其子讀《小學》衛莊公娶齊東宮得臣之妹章。問之曰: "語何煩而不簡乎?" 其子不能詳告。則曰: "疑示正宮所出之義也歟?" 後質田先生, 則果然。庚戌之變, 有譏田先生以不死國破君亡之日者, 則辨之曰: "箕子微子, 紂之親族, 不死殷亡之日, 而孔子許之以仁, 况在野無位之儒乎?" 聞者咸服。蓋觀乎此, 公之志尙言行, 則吾所謂正專、勇篤、高遠、嚴明者, 不其然乎? 公生于哲廟辛亥十月十一日, 卒于丁巳四月二十四日, 壽六十七。葬于井邑郡山內面讓賀洞亥原。配延安金氏, 義秀女。男長宇鎭, 次碩鎭。女適延日鄭大中、全州李炳澤。泰煥、泰衡、泰釪, 長房出; 泰燮、泰鈺、次房出。曾玄不記。銘曰:嗚呼! 此讓賀洞四尺之墳, 好藏無名有實之聞人。 한솥밥을 먹었고:원문은 '同釁'이다. 문맥에 근거하여 '釁'을 '爨'으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의탁함에…것이다:《논어》 〈학이(學而)〉에 보인다. 위장공취제동궁득신지매 장(衛莊公娶齊東宮得臣之妹章):《소학》 〈계고(稽古)〉에 보이는데 《좌전(左傳)》 은공(隱公) 3년 조의 기사를 수록하였다. 《소학》에 실린 내용은 대략 다음과 같다. 위장공이 제(齊)나라 세자 득신의 여동생을 아내로 맞이하였는데 장강(莊姜)이다. 아름다웠으나 아들을 두지 못하였다. 위장공은 대규(戴嬀)에게서 아들을 보았는데 이 사람이 위환공(衛桓公)으로, 장강이 자기의 아들로 삼았다. 또 공자 주우(州吁)라는 아들이 있었는데 폐인(嬖人)의 자식으로, 위장공의 총애를 받아 교만하고 사치스러웠으며, 병기(兵器)를 가지고 노는 것을 좋아하였는데 위장공은 금지하지 않았고 장강은 이를 미워하였다. 석작(石碏)이 위장공에게 주우를 금지하고 단속하지 않으면 화를 초래할 것이라고 간언하는 내용으로 마무리된다. 기자(箕子)와……친족:기자는 주의 백부(伯父)이고 미자는 주의 서형(庶兄)이다. 공자(孔子)가……허여하였다:주가 폭정을 일삼자 기자는 노예가 되고 미자는 나라를 떠났는데, 이 둘과 간하다가 죽은 주의 숙부 비간(比干)까지 아울러 공자가 은나라에 세 어진 사람[三仁]이 있었다고 하였다. 《論語 微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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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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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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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부

영은 김공 묘표 을유년(1945) 瀛隱金公墓表【乙酉】 우리 고을의 명망 있는 일족으로는 언양 김씨(彦陽金氏)가 으뜸이다. 가계(家系)102)는 고려 평장사(平章事) 위열공(威烈公) 취려(就礪)에게서 나왔다. 서울에서 남쪽으로 고부(古阜)로 내려온 사람은 보성 군수(寶城郡守) 약흠(若欽)이다. 보성 군수로부터 5세를 내려와 안주목사 겸 방어사(安州牧使兼防禦使) 증 좌찬성(贈左贊成) 장무공(莊武公) 준(浚)은 왕사(王事)에 죽고,103) 아들과 첩이 따라 죽으니 삼강(三綱)이 혁혁히 빛나 이름이 화이(華夷)에 알려졌다. 장무공으로부터 9세를 내려와 휘 두환(斗煥), 자 사형(士衡)이 있으니 이분이 바로 영은공이다.공은 갑오년(1894, 고종31) 동비(東匪 동학군(東學軍))가 난리를 일으켜 화살과 돌이 어지러이 빗발치던 날에 많은 선비들을 이끌고 성전(聖殿)을 엄히 수호하여 침범할 수 없게 하였으니, 만약 도를 지키려는 단연한 성심과 적을 물리치려는 굳센 의리가 있는 사람이 아니라면 이렇게 할 수 있었겠는가. 이런 마음을 미루어나가 출사해 임금을 섬겨 장무공의 지위에 있었다면 장무공이 한 일을 어찌 하지 못하였겠는가. 하물며 현명한 사람은 가문과 관계가 있는 경우이겠는가.공은 의용(儀容)이 단정하고 우아하며, 말소리가 우렁찼다. 집이 가난하였으나 독서를 좋아하여 경전(經傳)과 제자(諸子)의 서적을 모두 손으로 스스로 베꼈다. 자식과 조카들에게는 반드시 예(禮)와 의(義)로 가르쳤다. 공이 품부 받은 자질과 함양한 것이 이미 이러하였으니 일에 임해 의기(義氣)를 떨친 것은 여기에서 나온 것이지 외부의 영향을 받아서 그런 것이 아니다.삼남을 두었는데 장남 기남(基南)은 요절하고 딸 하나를 두었다. 차남 인석(仁錫) 역시 요절하고 아들 하나를 두었다. 삼남 기승(基承)은 아들 세 사람을 두었다. 매번 공의 묘소를 성묘할 때마다 추위나 더위를 꺼리지 않았고 늙어서도 똑같이 하니 내가 마음으로 공경하였는데, 김기승이 누차 묘표를 청하였다. 나는 어렸을 때 장로(長老)에게 공의 이름을 들었고 약관에 교궁(校宮)에서 공을 한 번 배알하였다. 사양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아 이에 듣고 본 것을 가지고 호정(湖亭) 유인택(柳寅澤)이 지은 가장도 근거하여 이상과 같이 대략 써서 준다. 吾鄕望族, 彦陽之金居一焉。繼・(系)出高麗平章事、威烈公就礪。自漢師南下古阜者, 寶城郡守若欽也。寶城五世, 而安州牧使、兼防禦使、贈左贊成、壯武公浚, 死王事, 子與副室從殉, 赫赫三綱, 名聞華夷。壯武九世, 而有諱斗煥, 字士衡, 卽瀛隱公也。公當甲午東匪搶攘, 矢石旁午之日, 倡率多士, 嚴守聖殿, 使不得侵犯, 如非有斷然衛道之誠, 毅然却賊之義, 能如是乎? 推是心也, 如使出而事君, 處壯武之地, 則豈不爲壯武之所爲乎? 而况賢者世類之係乎? 公儀容端雅, 語音洪亮, 家貧好讀書, 經傳諸子, 皆手自抄。敎訓子姪, 必以禮義。其所稟與養, 旣如是, 臨事奮義, 從此出焉, 非外襲而取也。有三男: 長基南夭, 有一女。次仁錫亦夭, 有一子。季基承, 有子三人, 每省公墓, 不憚寒暑, 老而猶然。余心敬之。累請以阡表之文。余幼時, 聞公名於長老, 弱冠一拜校宮矣, 辭旣不獲, 乃以瞻聆攸及, 且據湖亭柳丈寅澤狀, 略書如右而歸之。 가계(家系):원문은 '繼'이다. 문맥에 근거하여 '系'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왕사(王事)에 죽고:1627년(인조5) 정묘호란(丁卯胡亂) 때 후금(後金)의 군대가 안주성(安州城)을 함락하자 분신 자결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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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저자)
유형 :
고전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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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부

족제 행원 효술에게 답함 갑인년(1914) 答族弟行源 孝述 甲寅 과오만 날로 쌓인다는 말은 휘겸(撝謙)110)에서 나왔다는 것을 알 수 있고, 또한 학문을 근심하는 간절함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은 상성(上聖)111)이 아니니 누가 과오가 없겠습니까? 오직 고치는 것이 어렵고 두 마음 갖지 않는 것이 더욱 어렵습니다. 이제 학인(學人)이 종신토록 독실하게 공부하는 것은 무엇을 하기 위함이겠습니까? 그 과오를 고쳐서 다시 짓지 않는 것입니다. 이 과오를 짓지 않는 경지를 지나가면 곧 아무 일이 없게 됩니다.청컨대 과오가 쌓인다는 이유로 한갓 근심과 걱정을 품지 말고, 더욱 모름지기 심지를 크게 하고 마음속을 너그럽게 하십시오. 독서를 익숙하게 하며 함양을 두텁게 하여 맹렬히 성찰하고 진실 되게 실천하길 바랍니다. 이와 같이 참됨을 쌓고 힘쓰기를 오래하면112) 그 과오도 참되게 될 것이며, 쌓인 것도 사라지게 될 것이니, 어찌 크게 쾌활하지 않겠습니까? 세상이 후세로 올수록 운수가 쇠퇴하여 인물이 묘연하니 집안의 자제로서 좋은 자리를 품수 받아서 가히 유학의 도를 짊어질 자가 참으로 적습니다. 만약 모처에 훌륭한 사람이 있다면 누가 식량을 전대에 싸고 발을 묶어서 가서 만나기를 바라지 않겠습니까?이제 아우 행원은 명민한 자질과 강의(剛毅)한 바탕을 지녔으니 이 도를 짊어질 수 없다고 이를 수 없습니다. 근자에 우리 가족 가운데서 이런 현자를 보게 되니 그 환희와 다행스러움이 어찌 단지 입에서 나올 뿐이겠습니까?113) 오직 바라건대 힘써 더욱 노력하여 높은 덕을 세우고 넓은 공업을 닦아서, 안으로는 가문의 명망을 더욱 번창하게 하고, 밖으로는 세도(世道)를 구축하여, 나의 바람에 부응하게 하십시오.나 같은 사람은 옛날에 일찍이 외람되게 수사(洙泗)의 근원을 탐색하고 염락(濂洛)114)의 흐름을 따라서 7척 되는 작은 몸을 가지고도 수많은 성현들의 지극히 무거운 도를 감당하려 하였습니다. 그러나 하루아침에 풍수(風樹)115)의 환난을 만나서 혼백을 잃고 많은 식구들의 먹고 마시는 것을 마련하느라 손발이 부르트고 못이 박혀서 나이가 장년인데도 마음이 먼저 쇠퇴하였고 늙기도 전에 정기가 이미 짧아졌습니다. 그래서 매번 경서를 마주하여 완미하고 뜻을 찾을 때마다 새로 아는 것을 얻지 못했을 뿐 아니라, 옛날에 본 것까지 잇달아 잃게 되니 어찌 슬프지 아니하겠습니까?이제 그대의 편지를 받아보니 학문과 살림하는 일을 합쳐 한 가지 일만 하라고 알려주시니, 이것은 진실로 지극한 논의라 참으로 알아서 명심하겠습니다. 다만 한스러운 일이 있으니 옛날의 성인으로서 공맹(孔孟)과 정주(程朱)의 경우 몸소 생업을 다스렸다는 분을 듣지 못했습니다. 비록 있었더라도 어찌 우리들처럼 아래로 일반 백성들과 동일하게 몸을 땀으로 적시고 진흙으로 발을 더럽히는 경우가 있겠습니까?아관(兒寬)116)처럼 경서를 끼고 호미질을 하는 경우와 동생(董生)117)과 같이 낮에 밭 갈고 밤에 책 읽는 경우는 그들의 지조가 견고하여 족히 천년 후의 사람들을 감동시켰지만 끝내 대도(大道)를 들었다는 것은 듣지 못했습니다. 예전에 공맹과 정주를 기약했던 것이 이제는 마침내 아관과 동생의 무리가 되는 것에 그쳤으니 이것이 가히 크게 한스러운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 때문에 나는 일찍이 말하기를, 독서와 농사를 아울러 행하는 자를 능히 독행(篤行)이라고 일컫는 것은 가하지만 능히 도를 알았다고 일컫는 것은 아니라고 하였습니다.118) 대저 학문하는 도리는 식견이 우선이고 팔조(八條)의 우선은 격물치지(格物致知)가 으뜸입니다. 때문에 옛날의 군자는 반드시 익숙히 읽고 넉넉히 생각하여 여유를 두고 맘껏 학문하여 천하의 이치를 궁구하고 천하의 변화를 곡진히 알아야 합니다. 그런 연후에 실제적인 일에 증험하여 좌우에서 그 근원을 맞닥뜨리지 않음이 없으니,119) 이를 아는 것을 일컬어 도(道)라 합니다. 그런데 이제 내 한 사람의 신분으로 독서와 농사의 힘을 나누게 되어 일찍이 하루하루 편하게 앉아 감투할 겨를이 없이, 한 가지 이치를 궁구하고 연구하여 자득한 흥취를 못 보게 되니, 그 도를 아는데 또한 멀어지지 않겠습니까? 이미 도리를 알지 못하게 되면 일상생활에 행하는 바가 끝내 곁길로 떨어지는 것을 면치 못하게 되어, 그 이른바 독행이라는 것도 끝맺음을 잘 할 수 있으리라는 것을 어찌 보장할 수 있겠습니까? 이것이 또한 더욱 한스럽습니다.대개 인사는 기필할 수가 없고 기회는 놓칠 수가 없습니다. 이것은 모두 내가 절굉(折肱)120)하여 스스로를 징계하는 것이기 때문에 이렇게 그대에게 말씀을 드리니 한가할 때 더욱 채찍을 가하여 하루에 천리를 가도록 하십시오. 그대가 논하여 "제위(諸位)의 묘사(墓祀)121)에서 같은 날 함께 천향(薦享)122)하는 것은 불경스럽고 게을러서 선조를 공경하는 체제에 손상됨이 있다"고 말씀하신 것은 지극히 옳고 옳습니다.123) 이것이 곧 부자(夫子)가 이른바 "체제에서 관주한 이래로 내가 보고 싶지 않다"는 뜻입니다.124) 나도 또한 종전에 이 점을 불안하게 여겼지만 개정하자는 의론을 감히 발의하지 않는 것은, 진실로 나의 행실이 평소에 비루하고, 나이가 낮아서 스스로 나서지 못하고 뒤로 쳐졌기 때문입니다.이제 우리 행원(行源)이 비로소 발의하게 되었으니 우리 행원의 그 선조를 공경하는 절실함과 의에 옮겨 실천하는 용기125)는 평범한 사람이 미칠 바가 아닙니다. 그러나 주자가 말한 바, "적손이 차례대로 연일 제사를 행하자"고 하신 말씀은, 종묘의 위패가 훼철되지 않는 자의 입장에서 말한 것입니다. 그러나 애초에 친족관계가 다해서 묘지에서 제사지내는 것은 거기에서는 논할 바가 아닙니다. 다만 우리 가문의 오늘날의 일로 논하건대, 제위의 자손들이 각각의 조상을 제사지내되, 종파(宗派)와 지파(支派)의 선후를 구애받지 말고, 아울러 날짜의 고르지 못한 것도 관여하지 않았으면 합니다.갑위(甲位)의 자손은 갑위에게 성의를 다하고, 을위(乙位)의 후손은 그 을위에게 정성을 다하면, 그 정례(情禮)의 올바름을 얻고 또한 인사에 있어서도 어려운 점이 없습니다. 나의 뜻은 이미 그대의 뜻과 대체로 서로 부합되니 자세하게 설파하진 않겠습니다. 행여 부디 문중이 모인 날에 모름지기 이 뜻을 가지고 들러서 완곡하게 어른들 앞에서 진달하여 기어이 듣고 따라서 실행할 수 있도록 한다면, 일시에 편리함만을 취하는 습속을 씻고, 백세(百世) 후에도 예(禮)를 다하는 규범을 세우는 것이 진실로 오늘에 달렸을 것입니다. 이렇게 된다면 어찌 성대한 거사가 아니겠습니까? 過誤日積, 認出撝謙, 而亦可以見憂學之勤也.然人非上聖, 孰無過誤.惟改之爲難, 不貳爲尢難.今夫學人終身慥慥者, 欲何爲也.改其過誤, 不復作爾, 過此便沒事.請勿以過誤之積, 徒懷憂疚, 更須大心志寬胸次.熟讀書厚涵養, 猛省察實踐履.如此眞積力久, 則過者其誠矣, 積者其消矣.豈不大快活乎.世降運衰, 人物眇然, 人家子弟, 禀得好資質, 可能負荷此道者絶少.如曰某處有斯人焉, 孰不欲槖糗裏足而往見之哉.今行源明敏之資, 剛毅之質, 不可謂不任此道者.而乃近於吾族見之, 其歡喜慶幸, 豈啻若自其口出哉.惟願勉加努力, 立崇德修廣業, 內而昌族望, 外而扶世道, 用副區區之望也.如澤述者, 昔嘗妄擬探洙泗之源, 浯濂洛之派, 將七尺眇然之軀, 任千聖至重之道.一朝風樹, 喪魂遞魄, 百口喫着, 胼手胝足, 年壯而心先頹, 未老而精已短.每對經玩索, 不惟新知之無得, 幷與舊見而隨失, 豈不哀哉.今承惠書, 乃以學問治産, 合爲一道見喩, 此誠至論, 固知佩服.但所恨者則有之, 古之聖賢, 如孔孟程朱, 未聞有躬治産業者也.雖或有之, 豈至如吾輩之下同編氓, 沾體塗足乎.若乃兒寬之帶經而鋤, 董生之朝耕暮讀, 其志操堅確, 足以感人於千載, 而未聞其終聞大道也.向之自期乎孔孟程朱者, 今究不過作兒董之流而止, 則此非大可恨者耶.故吾嘗曰書農兼治者, 謂之能篤行則可, 謂之能知道則未也.夫學問之道, 識見爲先, 八條之敎, 格致居首.故古之君子, 必熟讀剩思, 優遊厭飫, 窮天下之理, 盡天下之變.然後驗之行事, 無不左右逢其源, 此之謂知道.今乃以一人之身, 分力於書農, 曾無一日安坐講討之暇, 不見一理窮硏自得之趣, 其於知道不亦遠乎.旣不知道, 則日用所行, 終不免旁蹊之墮, 而其所謂篤行者, 安能保其克終乎.是又重可恨也.蓋人事不可必, 機會不可矣.此皆鄙所折肱而自懲者, 故聊以奉似, 幸於無事之時, 益加鞭策一日千里也.所論諸位墓祀, 同日幷薦, 煩褻懈怠, 有傷敬先之體者, 極是極是.而此正夫子所謂禘自旣灌而往者, 吾不欲觀之者也.區區亦從前不安於此, 而不敢發改正之議者, 誠以行卑年淺而自後也.今得吾行源而始發之, 其敬先之切, 徙義之勇.匪夷所及也.然朱子所云, 嫡孫次第連日行祭, 此以宗未毁者言之.則初非擬論於親盡墓祀者.只以吾門今日之事論之, 諸位子孫, 各祭其祖, 不拘宗支派先候, 幷不關日子參差.甲位之孫, 盡其誠于甲位, 乙位之孫, 盡其誠于乙位, 則其於情禮, 旣得其正, 而亦無人事之難便矣.鄙意旣與高見大槩相符, 不須細破.幸於門會之日, 須將此意, 宛轉委曲, 陳達於長老前, 期於聽從而實行焉, 則洗一時取便之習, 立百世盡禮之規, 亶在於今日矣.豈非盛擧乎. 휘겸(撝謙) 겸손을 이른다. 《주역》〈겸괘(謙卦) 육사(六四)〉에 "겸손을 베풂에 이롭지 않음이 없다.[無不利, 撝謙.]" 하였는데, 그 전(傳)에 "휘(撝)는 펴는 상(象)이니, 사람이 손으로 펴는 것과 같다. 동식(動息)하고 진퇴(進退)함에 반드시 겸손(謙巽)함을 펴야 한다.〔撝, 施布之象, 如人手之撝也. 動息進退, 必施其謙.〕" 라고 하였다. 상성(上聖) 으뜸가는 성인이다. 후한의 공융은 조조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요 임금은 천종의 술이 아니면 태평 시대를 세울 수 없었고, 공자는 백고의 술이 아니면 지고의 성인이 될 수 없었다.〔堯不千鍾, 無以健太平, 孔非百觚, 無以堪上聖.〕"라고 하였다. 《孔北海集 書 與曹操論酒禁書》 이와 같이……오래하면 본문의 진력역구(眞積力久)는《순자(荀子)》 권학(勸學)에 "참되게 쌓아 가며 오래도록 노력해야만 학문의 경지에 들어서게 되는데, 학문은 죽음에 이른 뒤에야 그만두는 것이다.〔眞積力久則入, 學至乎沒而後止也.〕"라고 하였다. 근자에……뿐이겠는가 《서경》 〈진서(秦誓)〉에 "어떤 한 신하가 있는데, 그는 한결같이 정성스럽기만 할 뿐 다른 특별한 재주는 없으나, 그 마음이 널찍하여 모두 받아들이는 것과 같아서, 남이 재능을 지니고 있으면 자기가 지닌 것처럼 기뻐하고, 남에게 훌륭한 점이 있으면 자기 마음속으로 좋아하여, 마치 자기 입에서 나온 것처럼 여길 뿐만이 아니다. 그런 자는 진실로 남을 잘 포용하여, 우리 자손과 백성을 보전할 수 있을 것이다.〔若有一个臣, 斷斷兮無他技, 其心休休焉, 其如有容焉, 人之有技, 若己有之, 人之彦聖, 其心好之, 不啻若自其口出. 寔能容之, 以能保我子孫黎民,〕"라는 말이 나오는데, 《대학장구(大學章句)》 전(傳) 10장에도 이 말이 인용되어 있다. 수사(洙泗)……염락(濂洛) 수사는 노나라 곡부(曲阜)에 있는 수수(洙水)와 사수(泗水)를 아울러 일컫는 말로, 이곳은 공자가 강학 활동을 했던 곳이다. 여기서는 공자의 가르침을 뜻하는 말로 사용되었다. 염락(濂洛)은 송대의 성리학을 뜻하는 염락관민(濂洛關閩)의 준말로, 염계(濂溪)의 주돈이(周敦頤), 낙양(洛陽)의 정자(程子), 관중(關中)의 장재(張載), 민중(閩中)의 주자(朱子)를 통칭한다. 풍수(風樹) 부모가 돌아가셔서 봉양할 수 없다는 말이다. 《한시외전(韓詩外傳)》 제9권에, "고어가 말하기를, '나무는 가만히 있고자 하나 바람이 그치지 않고, 자식은 봉양하고자 하나 부모가 기다려 주지 않는다.' 〔樹慾靜而, 風不止. 子慾養而, 親不待.〕"라고 하였다. 아관(兒寬) 한(漢)나라 무제때 사람으로 《漢書 兒寬傳》에 "아관이 품팔이를 할 적에 늘 경서를 몸에 지니고 밭일을 하다가 휴식할 때면 독송을 했다. [時行賃作, 帶經而鋤, 休息輒讀誦.]"라고 하였다. 동생(董生) 동소남(董召南)을 말한다. 안풍에 은거하여 주경야독하며 부모를 받들고 처자를 거느리며 살았다. 한퇴지가 그의 이러한 삶을 두고 〈동생행(董生行)〉이란 글을 지었다. 이 때문에……아닙니다 이 말은 주경야독하며 행실이 도탑다고 평한 것은 옳지만, 주경야독하며 도를 알았다고 평가하는 것은 아니며 농사보다는 학문만 하고 싶은 마음을 나타내고 있다. 좌우에서……없으니 《맹자(孟子)》〈이루 하(離婁下)〉에 맹자가 학문에 있어서는 스스로 터득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하면서 "몸의 좌우에서 취하여 쓸 때 그 근원을 만날 수 있게 된다.〔取之左右逢其源.〕"라고 하였다. 절굉(折肱) '팔을 분지른다'는 뜻으로 친히 겪은 것을 말한다. 원문은 삼절굉(三折肱)으로 여러 차례의 어려움을 겪음으로써 결국 이를 극복하게 된다는 말이다.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 정공(定公) 13년 조에, 범씨(范氏)와 중항씨(中行氏)가 군주를 치려 하자, 제(齊)나라의 고강(高彊)이 "세 차례 팔뚝이 부러지는 부상을 당하고 나서야 좋은 의사가 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三折肱, 知爲良醫.〕"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묘사(墓祀) 묘지에서 지내는 제사이다. 천향(薦享) 제사를 올리는 것을 말한다. 그대가……옳습니다 족제 행원이 후창에게 보낸 편지에서 "여러 조상들의 묘 제사에서 전날 고조부 따로 하고 다음날 증조부를 모시는데, 같은 날 천향하는 것은 좀 불경스럽고 게을러서 선조를 공경하는 예를 손상시킨 점이 있습니다" 라고 말했던 것을 이른다. 이것이……뜻입니다 《논어》〈팔일(八佾)〉에, 공자가 말하기를 "큰 제사를 지낼 때 강신(降神) 이후의 의식은 내가 보고자 하지 않는다.[禘自旣灌而往者, 吾不欲觀也.]"라고 하였다. 이것은 처음에는 정성과 공경을 다하지만 나중에 가서는 성의가 점점 해이해지기 때문에 한 말이다. 본문의 사의(徙義)는 《논어》 〈안연편〉 에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충신을 위주로 하고 불의에서 정의로 옮겨 가는 것이 덕이 높아지는 길이다.〔孔子曰, 主忠信徙義崇德也.〕"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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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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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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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부

족제 행원에게 답함 병진년(1916) 答族弟行源 丙辰 부순(俯詢)126)하신 "사물에도 명덕(明德)의 본체(本體)가 있습니까?"하는 설(說)에서 족히 사물의 이치를 밝히지 않으면 그만두지 않는 공부를 찾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다만 《대학장구(大學章句)》와 《대학혹문(大學或問)》에 근거해서 논하자면, 그대의 설은 끝내 따르기 어려운 점이 있는 듯합니다. 가만히 생각건대 명덕이란 인심의 허령(虛靈)한 기(氣)를 하늘에 얻어서 이치를 갖추어 만사에 응하는 것으로, 만물일원(萬物一原)의 성(性)을 오로지 이(理)로써 말하는 것과는 같지 않습니다.비록 기의 분수를 마음이 점유하였으나 그 마음속의 기라는 것이 다른 것과 달리 확연히 확 뚫려 흠 없이 만선(萬善)을 모두 갖추었고, 또 기질의 기가 만 가지로 고르지 않는 것과는 같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사물에 있어서는 지극히 지혜로운 것도 이 마음에 참여할 수가 없고 또 기질의 기가 만 가지로 고르지 않는 것과 같지 않기 때문에, 사람에게 있어서는 비록 지극히 어두운 자라 할지라도, 일찍이 그 본체가 손상되지 않습니다. 대개 사람과 사물이 태어날 때에는 고르게 천지의 이기(理氣)를 받으니, 이른바 명덕이라는 것은 불과 이기의 테두리 내의 한 사물에 불과한 즉, 마땅히 사람과 사물이 고루 소유하는 것 같지만 유독 사람만 독점하고 사물은 참여할 수 없다고 일컫는 것은 무엇 때문이겠습니까?이것은 바로 그 사람이 태어날 때에 기의 바르고 통한 것을 얻어서, 그 형체가 평정(平正)하고 단직(端直)하고, 사물이 태어날 때는 기의 치우치고 막힌 것을 얻어서 그 형체가 가로눕고 뒤집어져서, 형기(形氣)의 동일하지 않는 것에 근거하여, 리(理)의 전체가 충만하거나 충만하지 않는 차이가 있기 때문입니다. 이는 바로 사람과 사물에 명덕이 있고 없고의 큰 차이점입니다.보내온 편지에서는 이에 인과 사물을 리의 한 가지 근원에서만 궁구하고, 또 금수를 기의 본래 청한 것으로 이끌어서 사물에도 명덕의 본체가 있다는 것으로 삼았으니, 첫 번째는 성을 명덕으로 인식한 견해이고, 두 번째로는 기질을 명덕으로 인식한 견해입니다.하물며 이 금수의 기가 본래 맑다고 운운한 말은 더욱 감히 믿을 수가 없습니다. 기질의 청탁(淸濁)과 수박(粹駁)127)을 주자는 다만 정통한 기를 받은 사람 가운데서 말했거늘, 이제 행원은 기질의 청탁수박을 동식물에게까지 언급하여 헛되이 청하였으나 끝에 가서는 탁하다는 사이에서 변명하니, 이것은 이미 불안함이 큰 것입니다.명덕의 본체를 주자는 단지 기에 구속되고 욕망에 가려진 사람에게만 말했습니다. 이제 행원은 아울러 지극히 완악하고 지극히 어두운 금수에게까지 언급하였습니다. 주자는 사람이 모든 이치를 갖추고 만사에 응하는 것을 명덕이라고 여겼거늘, 이제 행원은 도리어 금수에 한 점 밝은 곳을 명덕이라고 여기니, 만일 행원의 말과 같다면 주자가 이른바 사람이 금수와 다른 점이 정히 명덕에 있다고 말한 것은 도리어 쓸모없는 불필요한 말이 될 것입니다. 그러니 어찌 매우 불안한 점이 아니겠습니까? 俯詢物有明德本體之說, 足見不明不措之功.然但據大學章句或問而論之, 高明之說, 似終有難從者.竊以爲明德者, 人心虛靈之氣之得乎天而具理應事者也, 非如萬物一原之性之專以理言者也.雖曰占得氣分, 而其爲氣也, 洞徹無瑕, 萬善咸備, 又非如氣質之氣之有萬不齊者也, 惟其非如萬物一原之性.故在物則雖至慧者, 不得與焉, 惟其非如氣質之有萬不齊, 故在人則雖至昏者, 未嘗損其本體.蓋人物之生.均受天地之理氣, 所謂明德者, 不過理氣圈內一物, 則宜若人物之均有, 而其謂獨專於人而不與於物者何也.正以其人之生也, 得氣之正且通者, 而其形平正端直, 物之生也.得氣之偏且塞者, 而其形橫倒反側, 卽此形氣之不同, 而此理全體有充不充之異焉, 是乃人物明德有無之大分也.來書乃推原人物於理之一本, 又引進禽獸於氣之本淸, 以爲物有明德本體之證, 一則認性爲明德之見也, 一則認氣質爲明德之見也.矧此禽獸氣本淸之云, 尢所未敢信也.氣質淸濁粹駁, 朱子只言於正通者之中, 今行源乃幷及於偏塞者, 而枉費分䟽於本淸末濁之間, 此旣不安之大者.明德本體,朱子只言於氣拘慾蔽之人.今行源乃幷及於至頑至冥之禽獸.朱子以人之具衆理應萬事爲明德,今行源乃以禽獸之一點明處爲明德, 若果如行源之言,朱子所謂人之所以異於禽獸.正在於明德者.乃爲無用之贅言矣.豈非不安之尢者乎.明德本體.朱子只言於氣拘慾蔽之人.今行源乃幷及於至頑至冥之禽獸.朱子以人之具衆理應萬事爲明德,今行源乃以禽獸之一點明處爲明德,若果如行源之言,朱子所謂人之所以異於禽獸, 正在於明德者, 乃爲無用之贅言矣.豈非不安之尢者乎. 부순(俯詢) 상대방이 나에게 묻는 것이다. 수박(粹駁) 순수한 것과 순수하지 못한 것이다. 장재가 본성을 구별할 때 사람과 동물은 기(氣)의 편전통색(偏全通塞)에 따라 구별되는 반면, 인간 사이에는 청탁수박(淸濁粹駁)에 따라 구별되는 것으로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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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옥경 관에게 답함 기축년(1949) 答房玉慶 琯 己丑 옛날 간재 선생을 모시고 그대의 병사(丙舍)98)에 머물러 공부 할 적에 그대는 관각(丱角)99)이었고, 나는 약관(弱冠)이었습니다. 약관과 동자는 비록 다르지만 나이는 실로 견수(肩隨)100)인지라, 나의 생각에 피차 나이가 넉넉하고 거처하는 곳이 멀리 떨어져 있지 않아서,101) 거의 해마다 상종하여 종신토록 서로 힘쓰게 할 수 있으리라 여겼습니다.그런데 중간에 이별은 많고 모임은 적어 이삭(離索)102)한 것이 오래되어 관선(觀善)103)이 드물게 될 줄 누가 알았겠습니까? 근자에 길이 막혀 그대를 만나지 못한 것이 이전에 비해 더욱 심합니다. 그런데 뜻밖에도 내 아이가 남쪽으로 가서 그대를 알현하게 되어 근년에 안부를 갖추어 알게 되었고, 또 그대의 편지까지 받들고 와서 나에게 묻는 안부가 주밀하고 진지하여 정의(情誼)가 많이 넘치는 것을 보게 되니, 여러 번 완미하고 송독함에 은혜에 감사하는 마음이 싫증나지 않습니다.104)말씀하시기를, "국정이 실마리를 이룰 길이 없고, 또 예의가 전일과 같지 않으며, 세속이 오랑캐의 지경으로 들어간다"고 하셨는데, 진실로 옳고 옳습니다. 그러나 우리들은 재주도 없고 지위도 없어서, 한갓 근심만 할 뿐 이익 됨이 없습니다. 다만 제공(諸公)이 오묘한 계책을 내서 시대의 폐단을 잘 구하여, 나라의 운명을 더욱 새롭게 하시기를 바랄 뿐입니다.그러나 "한 겨울의 절개를 우뚝 세우고, 세상을 구제할 경륜을 품으라"는 말씀에 이르러서는, 천루한 제가 어찌 다 감당하겠습니까? 그만 두십시오. 그만 두십시오. 대개 세상의 변란은 무궁하니 우리 힘으로 능히 어찌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덕과 학문은 진보하기 어렵지만 우리 마음에 마땅히 더욱 면려하기에 달려있습니다.저는 항상 제 자신에 예의가 없고, 오랑캐의 풍속을 범하고, 학문의 실마리를 성취하지 못할까를 두려워하는 외에는, 감히 다른 생각을 두지 않습니다. 또한 마원(馬援)105)과 범익겸(范益謙)106)의 훈계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으니 당신의 뜻은 어떠한지 모르겠습니다. 그대와 저는 모두 늙었습니다. 오늘 여러 해 만에 처음 받은 편지인데, 왕복하는 관례적인 말로 답하고 싶지 않습니다. 적이 경개(傾蓋)107)의 초심에 부응하기를 기약하려는데, 나도 모르게 세세한 말이 여기에 이르렀으니 행여 저를 헤아려 줄 수 있겠는지요. 昔倍先師留學尊門丙舍也, 尊則丱角, 我則弱冠.冠童雖殊, 年實肩隨, 意謂彼此年富, 居不燕越, 庶可課年相從, 終身交勖矣.孰謂中間別多會少, 離索久而觀善稀也.邇來阻閡, 比前尢甚.不意兒子南行, 獲拜門屛, 備審近年之安矦, 又奉尊函而來, 有以見問訊周摯, 情誼譪溢, 屢回玩誦, 感荷無斁.所喩國政之就緖無路, 禮義之無復前日, 世俗之入於夷虜, 誠然誠然.然吾輩無才無位, 徒憂無益.只望諸公之妙出籌策, 善救時弊, 益新國命而已.至於挺立大冬之節, 濟世經綸之懷, 尢何敢當於淺陋哉, 已之已之.蓋世變無窮, 非吾力之所能如何.德學難進, 在吾心之所當加勉.弟常恐吾身之無禮義, 犯夷虜, 而學無就緖外, 不敢有他念.亦以馬援范益謙之戒, 不可不思也, 未知尊意以爲如何.尊與我俱老矣.今於積歲初書, 不欲以往復例語仰答.竊期終副傾蓋初心, 不覺覼縷至此, 幸得見諒否. 병사(丙舍) 원래 무덤 가까이에 지은 집이지만 여기서는 곁채를 뜻한다. 관각(丱角) 총각, 동자(童子)이다. 견수(肩隨) 윗사람과 함께 걸을 때, 예를 갖추는 뜻으로 윗사람보다 조금 뒤에 떨어져서 따라가는 것이다. 《예기 곡례(禮記 曲禮)》 상편에 "내 나이보다 10년 이상이면 형님으로 모시고, 5년이 많으면 어깨를 나란히 따라 간다.〔十年以長則兄事之, 五年以長則肩隨之.〕" 라고 하였다. 본문의 연월(燕越)은 원래 북쪽 끝 연(燕) 나라와 남쪽 끝 월(越) 나라로 멀리 떨어져 있다. 이삭 (离索) 이군삭거(离群索居)의 줄임말로, 《예기(禮記) 단궁(檀弓)》에 친지나 벗들과 헤어져서 혼자 외로이 사는 신세를 말한다. 자하(子夏)가 "내가 벗을 떠나 쓸쓸히 홀로 지낸 지가 오래이다.〔吾離群而索居, 亦已久矣.〕"라고 한 데서 유래하였다. 관선(觀善) 상관이선相觀而善의 줄임말로, 친구들끼리 서로 좋은 점을 보고 배우는 것을 말한다. 《예기(禮記)》 〈학기(學記)〉에 "대학의 교육 방법은 좋지 않은 생각을 미연에 방지하는 것을 예(豫)라 하고, 적절한 시기에 가르치는 것을 시(時)라 하고, 감당할 수 있는 한도 내에서 가르치는 것을 손(孫)이라 하고, 서로 좋은 점을 보고 배우도록 하는 것을 마(摩)라고 한다. 이 네 가지가 교육이 흥한 이유이다.〔大學之法, 禁於未發之謂豫, 當其可之謂時, 不陵節而施之謂孫, 相觀而善之謂摩, 此四者敎之所由興也.〕"라고 한 데서 나온 말이다. 본문의 무두(無斁)는 《시경》 국풍(國風)의 주남(周南) 〈갈담(葛覃)〉의 두 번째 구절에 "칡덩굴이 쭉쭉 뻗어, 골짜기 가운데에 뻗어가서, 그 잎새가 빽빽하거늘, 그 덩굴을 베어 삶아서, 굵고 가는 갈포옷 지으니, 입으매 싫지가 않도다.〔葛之覃兮, 施于中谷. 維葉莫莫, 是刈是濩. 爲絺爲綌, 服之無斁.〕"라고 하였다. 마원(馬援) 중국 후한(後漢) 때의 장군이다. 마원이 호협(豪俠)하여 의리를 중시하는 두보(杜保)를 자기가 애지중지하지만, 사람들이 그를 제대로 본받지 못할 경우에는 그지없이 경박한 사내가 되고 말 것이니, 이는 이른바 "범을 그리다가 제대로 되지 않으면 거꾸로 개같이 되고 마는 것이다.〔畫虎不成反類狗〕"라고 조카들을 경계시키면서 아예 그를 본받지 말라고 훈계한 고사가 있다. 《後漢書 卷24 馬援列傳》 범익겸(范益謙) 송나라 사람 범충(范沖)으로, 익겸은 그의 자이다. 범익겸은 열네 가지 좌우명을 쓴 것으로 유명하다. 경개(傾盖) 수레를 멈추고 일산을 기울인다는 뜻으로, 길에서 잠깐 만나는 것을 뜻한다. 《사기(史記)》 권83 〈추양열전(鄒陽列傳)〉에 "속어에 '백발이 되도록 오래 사귀어도 처음 사귄 듯하고, 수레를 멈추고 잠깐 만났어도 오래 사귄 듯하다.'라고 하였으니, 그 까닭은 무엇인가. 서로를 아느냐 모르느냐에 달려 있다.[諺曰, 白頭如新, 傾蓋如故, 何則, 知與不知也.]"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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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하중 봉화에게 답함 기묘년(1939) 答姜和中 鳳和 己卯 저는 재주가 남에게 미치지 못하고 학문의 방법도 알지 못하여 사람들이 저를 끼어주지 않습니다. 다만 떳떳한 성품이 사라지지 않아서 여전히 능히 호오(好惡)128)를 알기 때문에 원수와 적들이 앞에 가득하고 화와 근심이 뒤를 따르니, 사람들이 모두 자기에게 허물이 될까 두려워하여 저를 멀리합니다.오직 그대만이 멀리서 돌아봐주시고 또 편지를 보내시어, "총명하고 특달(特達)함이 남쪽 조선에서 뛰어나고, 신독(愼獨)하고 진실함이 후진들의 법칙이 된다"는 등의 말로 칭찬해 주셨습니다. 좌하(座下)께서는 구차하게 사람을 칭찬하시는 분이 아니시니, 이는 반드시 모든 사람이 미워해도 살피시는 공정한 마음에서 나왔습니다.129)그러나 살펴도 가히 취할만한 것이 없으면 한마디 말로 지혜롭지 못하다는 것에 끝내 귀결되지 않겠습니까?130) 심지어는 지나치게 스스로에게 겸손하시어 천근(淺近)한 저의 학문에서 얻은 것을 살펴보기에 이르러서는, 이는 진실로 옛날 군자가 학문에 민첩하고 하문(下問)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일입니다. 그래서 비록 돌이켜보면 내 마음에 얻은 바는 없지만 어찌 이로 인하여 평일에 듣는 것을 받들어 올려서 성대한 뜻을 체인(體認)131)하고, 아울러 저의 소견을 그대에게 질문하지 않겠습니까?주자가 훈계하여 이르시기를, 대체로 학문을 할 때는 다만 한 개의 시(是)와 비(非)를 분별하기를 요하여, 저것인 비(非)를 버리고 이것인 시(是)를 취하기를 요할 뿐입니다. 가만히 생각건대, 시(是)와 비(非)는 마음이 있을 때는 천리와 인욕의 기미(機微)이고, 일에 있어서는 득실의 관문이 되며, 말을 들을 때는 사특함과 정도의 차이이며, 사람을 볼 때는 군자와 소인의 구별입니다. 그러니 이 네 가지에 있어서 분명하게 눈을 붙여서 어떤 것이 리이고, 득이고, 정도이고, 군자이며, 어떤 것이 인욕이고, 실이고, 사특함이고, 소인인가를 간파하여야 합니다.진실 되게 힘을 써서 극복하고 또 행하거나 그치며, 부척하거나 물리치며 친하거나 소원하게 한다면, 이것이 이른바 분별하여 옳은 것을 취하고 그른 것을 제거하는 것입니다.132)이 말이 주자의 본 뜻에 어긋나지는 모르겠습니다. 제가 스스로 힘쓰는 나머지, 또한 이 말로 그대의 요청에 우러러 색책(塞責)133)하고자 합니다. 진실로 그대가 이미 알고 있다는 것을 알지만,134) 예로부터 세속의 풍습에 갇히고 기질을 변화시키는 것은 다 하기 어려우니, 혹 조금이라도 거기에 갇혀 있는 것이 있으면, 행여 그릇된 견해와 망령된 말이라고 여기지 마시고, 이 네 가지에 뜻을 더하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僕材不逮人, 學不知方, 人所不齒.徒以彝性不泯, 猶能知好惡, 故仇敵滿前, 禍患隨後, 人皆恐爲所累而遠之.惟座下旣垂遠顧, 又致耑書, 以聰明特達, 出於南鮮, 愼獨眞實柯則後進等語稱之.座下非苟譽人者, 是必出於衆惡必察之公心.然察之而無可取, 則不終歸於一言之不知乎.至於過自撝謙而求見淺學之所得,則是固古之君子敏學下問之事.顧雖無自心之所得, 豈可不因是而奉獻乎日之所聞.以體盛意而幷質所見也哉, 朱夫子有訓曰, 大凡爲學只要分別一箇是非, 去彼而取此耳.竊惟所謂是與非者, 在心則爲理慾之幾, 在事則爲得失之關, 聽言則邪正之異也, 觀人則君子小人之別也.於此四者, 明著眼而見得熟爲理得正與君子, 孰爲慾失邪與小人.實用力而克復之, 行止之, 扶斥之, 親疎之, 則是所謂分別而去取也.不知此不爽朱子本旨否乎.而區區自勉之餘,亦欲以此仰塞尊請.固知其爲已見之昭陵, 從來世風易囿, 化質難盡, 或有一分坐在者, 幸勿以爲錯見妄言, 而不妨加意於此否. 호오(好惡) 《논어》 〈이인(里仁)〉에 공자가 말하기를 "오직 인자라야 능히 사람을 좋아할 수 있으며, 능히 사람을 미워할 수 있다.〔惟仁者, 能好人, 能惡人.〕"라고 하였다. 본문의 중오필찰(衆惡必察)은 《논어》 〈위령공(衛靈公)〉에 "많은 사람들이 미워하더라도 반드시 살펴보아야 한다.〔衆惡之 必察焉〕"라고 하였고,《맹자》〈양혜왕 하(梁惠王下)〉에 "나라 사람들이 모두 죽일 만하다고 말한 뒤에 살펴보아 죽일 만한 점을 발견한 뒤에 죽여야 합니다.〔國人皆曰可殺然後, 察之 見可殺焉然後, 殺之.〕"라고 하였다. 한마디 말로……않겠습니까 《논어》〈자장〉에 "군자는 한 마디 말로 지혜롭게 되기도 하고, 한 마디 말로 지혜롭지 못하게 되기도 하므로 말은 삼가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君子一言以爲知, 一言以爲不知, 言不可不愼也.〕"라고 하였다. 체인(體認) 마음속으로 깊이 이해하여 부응함이다. 진실……것입니다 극복한다는 말은 극은 인욕을 극복하고 천리를 회복하는 것이다. 행지(行止)한다는 것은 득 있는 것을 행하고 실수한다는 것을 그친다는 것이고 부척(扶斥)한다는 것은 정도를 붙들어 올리고 사특함을 배척한다는 것이며, 군자를 친애하고 소인을 멀리한다는 것이다. 색책(塞責) 책임을 벗기 위하여 겉만 둘러대어 꾸미는 것이든지, 어떤 요청에 부응하여 책임을 면하는 것이다. 본문의 소릉(昭陵)은 《新唐書 卷97 魏徵列傳》에 나오는 말로, '이미 알고 있다'는 뜻이다. 당 태종이 문덕황후를 그리워한 나머지 그녀가 묻힌 소릉을 바라보려고 원중(苑中)에 층관(層觀)을 지어 놓고는 때때로 관망하다가 하루는 위징(魏徵)과 함께 올라갔는데, 위징이 "신은 눈이 어두워서 볼 수가 없습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태종이 손으로 소릉을 가리켜 보여 주자, 위징이 "이 소릉 말입니까?"라고 반문하기에 태종이 그렇다고 대답하니, 위징이 "신은 폐하께서 멀리 있는 헌릉을 바라보시는 줄 알았습니다. 소릉과 같은 것은 신이 벌써 보았습니다.〔臣以爲陛下望獻陵, 若昭陵, 臣固見之.〕"라고 답하였는데, 태종이 그 말을 듣고는 눈물을 흘리며 층관을 헐어 버린 고사가 전한다. 헌릉(獻陵)은 태종의 부친인 당 고조의 능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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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경함 동영에게 답함 임오년(1942) 答姜敬涵 東泳 ㅇ壬午 만년에 공부의 효과를 거둔다는 말씀에서 족히 진학을 부지런히 하신 뜻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대개 우물을 팔 때에도 샘을 얻기에 도달하기 어렵고, 석가산을 쌓을 때도 한 삼태기 때문에 쉽게 그르칩니다. 이와 같이 선비는 항시 만년에 이지러집니다. 《시경》에서 이르길, "모두가 시작은 있지만 끝은 능히 마치기가 어렵다"라고 했습니다.135)애시(哀侍)136)는 이미 이것으로 스스로를 경계하고 맹서할 줄 아시니, 마땅히 다른 사람에게 의지할 것이 없어야 할 터인데도, 이에 은혜로운 가르침을 이 과루(寡陋)한 자에게 바라는 것은 무엇 때문이겠습니까? 비록 그러나 일찍이 공자께서 훈계하여 이르시기를, "노년에 이르러서는 경계함이 득실에 있다"137)라고 하셨습니다.애시는 나이가 오순(五旬)에 가까운즉, 역시 점차 늙어갑니다. 가정의 일을 짊어지는 것은 비록 그만 둘 수는 없지만, 일상생활의 생각과 일에서 항상 모름지기 재산을 보존하고 생계를 꾸리는 일을 줄이고 학문을 쌓고 덕을 세우는 분수를 더해나가야 합니다. 요컨대 한가지의 일삼음이 있은 연후에138) 거의 가히 만년의 공을 거둘 수가 있을 것이니, 행여 이 말로써 뜻을 더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收功晩節之喩, 足見進學彌勤之意.蓋井難及於得泉, 山易虧於一簣.士常失於晩節.詩所謂鮮克有終者此也.哀侍旣以此自知戒誓,則宜無靠於別人, 乃以惠敎望此寡陋者何哉.雖然竊嘗聞孔子之訓曰, 及其老也, 戒之在得.哀侍年近五旬, 則亦己向老矣.擔任家務, 雖不可己, 於日間意念事行,常須减却保産營生分數.添却積學立德分數,要有一段必有事焉然後, 庶可以收晩節之功矣, 幸以此加意如何. 시에서……했습니다 《시경(詩經)》 대아(大雅) 탕(蕩) 편에, "하늘이 뭇 백성을 내시니 그 명을 믿을 수 없도다. 처음이 없는 사람은 없으나 그 끝을 잘 맺는 사람은 드물도다.〔天生烝民, 其命匪諶. 靡不有初, 鮮克有終.〕"라고 하였다. 애시(哀侍) 서간문에서 흔히 쓰는 말로, 거상(居喪) 중에 있으면서 홀아버지나 홀어머니를 모시는 사람을 말한다. 여기서는 어머니 상 중에 아버지를 모시고 있다. 노년에……있다 《논어》 〈계씨(季氏)〉에 "군자에게 세 가지 경계함이 있으니, 젊을 때엔 혈기가 정해지지 않았으므로 경계함이 여색에 있고, 장성해서는 혈기가 한창 강하므로 경계함이 싸움에 있고, 늙어서는 혈기가 쇠하므로 경계함이 얻음에 있다.〔君子有三戒, 少之時, 血氣未定, 戒之在色, 及其壯也, 血氣方剛, 戒之在斗, 及其老也, 血氣既衰, 戒之在得.〕"라고 하였다. 본문의 '필유사언(必有事焉)'은 《맹자》 〈공손추 상(公孫丑上)〉의 호연장(浩然章)에 보이는 말로, 호연지기(浩然之氣)를 기르는 일에 반드시 종사하여야 함을 강조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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족제 희숙에게 보냄 계유년(1933) 與族弟希淑 癸酉 전서(前書)에서 유시하기를 "창응(蒼鷹)은 시렁에 있어도 청산에서 날기를 꿈꾸고, 늙은 천리마는 마구에 엎드려 있어도 뜻은 먼 길에 있다."라고 하였다. 이 뜻과 이 꿈은 곧 공자(孔子)가 도(道)를 행하고자 하여 주공(周公)을 본 것과 같다. 선비가 이 세상에 나서 어려서 배우는 것은 장성해서 행하고자 함이니, 어찌 이 뜻과 꿈이 없겠는가. 그러나 만약 추풍(秋風)이 높지 않은데 창응이 산에서 날고, 얼음이 녹지 않았는데 천리마가 길에서 달린다면 병들지 않는 경우가 거의 드물 것이다. 그러니 우선 그 날개를 다듬고 그 발을 가뿐하게 하여 기다리는 것이 옳을 것이다. 옛날의 현재(賢才)가 재덕(才德)을 감추고 은둔하면서 태평을 기다린 것도 이 때문이다. 생각건대 그대의 견해도 이렇게 마음에 정산(定算 결정함) 한지 오래되었을 것이다.듣자 하니 여산(黎山)에 사는 동족 기백(基伯)이 나에게 문장을 지어서 군(郡)의 일로 선조(先祖)의 사당을 건립하는 의론을 발기하라고 말해놓고, 조정의 명령으로 서원을 철폐했는데, 옥사(屋社)22) 후에 신설하는 것이 편치 않다고 말했다고 한다. 문장을 쓰거나 의론을 일으키는 것 모두 나에게 이런 일은 없었다. 그러나 그가 편치 않다고 말한 것은 실로 나의 뜻과 같다. 일찍이 이 일을 다른 사람에게 물었더니, 그 사람은 이미 철폐된 서원을 다시 회복할 수 없다고 하였다. 그러나 '신설의 경우 조정의 명령과 관계가 없으니 행할 수 있다.'고 한 것은 나재(懶齋)와 함재(涵齋) 두 어른의 설이고, '이미 철폐된 것도 오히려 회복할 수 없는데 하물며 신설할 수 있겠는가.'라고 한 것은 김성구(金聖九)의 설이다. 선사(先師)께서 어떤 사람에게 서원의 터에서 단향(壇享)하는 것을 허여한 것이 〈연재설(淵齋說)〉에 보이는데, 다시 그 사람에게 편지를 보내서 말린 일이 대고(大稿)에 보인다. 신설 여부에 대해서는 선사의 정론을 당일에 듣지 못했으니, 부디 잘 생각해서 고견을 알려주는 것이 어떠한가? 前書喩以蒼鷹在架, 夢飛靑山, 老驥伏櫪, 志在長途.此志此夢, 卽孔子之欲行道而見周公也.士生斯世, 幼而學之, 壯而欲行之, 安得無此志此夢也? 然若秋風未高, 鷹飛于山, 氷凍未解, 驥走乎程, 其不見病也者幾希.且可刷其翮輕其足而俟之.古之賢才, 所以抱藏才德隱遯俟淸者此也.想高見以此定算于中者久矣.聞黎山族基伯, 謂我作文發起於郡事先祖建祠之議, 而以朝令掇院, 屋社後新設爲未安云.以文以發, 俱我無是.然其所云未安者, 實吾意也.嘗以此問人, 則以爲旣掇之院不可以復.若新設則非關朝令, 可爲之者, 懶涵兩丈說也.旣掇者猶不敢復, 况新設乎者, 金聖九說也.先師許人以院址壇享, 見淵齋說, 復以書止之事, 見大稿.而新設與否, 未聞定論於當日矣, 幸入思議, 示以高見如何? 옥사(屋社) '옥사(屋社)'는 패망한 나라의 사직에 지붕[屋]을 설치하여 햇볕을 막는 것으로, 나라가 망한 것을 지칭하는 말이다. 《예기(禮記)》 〈교특생(郊特牲)〉에 "천자의 대사(大社)는 지붕을 덮지 않아 서리ㆍ이슬ㆍ바람ㆍ비를 직접 맞게 하여 천지의 기운이 통하게 한다. 이런 까닭에 망한 나라의 사직에는 지붕을 만들어 하늘의 양기를 받지 못하게 한다.〔天子大社 必受霜露風雨 以達天地之氣也 是故喪國之社屋之 不受天陽也〕 "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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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령으로 돌아가는 윤경습【영학】을 전송하는 서문 【병오년(1906)】 送尹卿習【永學】歸會寧序 【丙午】 지난 융경(隆慶) 기사년(1569)에 선조(宣祖)께서 나의 12대 종조(從祖) 운강공(雲江公 김계(金啓))에게 명하여 회령 부사(會寧府使)로 삼았는데, 대간(臺諫)이 자격이 미달한다고 논하자, 임금께서 이를 굳게 거부하였고, 고봉(高峯) 기문헌공(奇文憲公 기대승(奇大升))이 또한 말하기를,"회령은 무관 당상(堂上)의 직임이니, 김모(金某)의 직임은 품계를 뛰어넘었고, 문관을 무관의 직책에 등용하는 것은 문신을 대우하는 법도가 아닙니다."라고 하자, 임금께서 말씀하시기를,"변방의 근심이 이미 깊으니, 실로 그 직임이 어렵다. 지금 적합한 사람을 얻었으니, 어찌 품계의 차서를 논하겠는가?"하시고 끝내 윤허하지 않았다. 내가 일찍이 이것을 보고 변방의 근심이 되는 회령이 과연 어떠하기에 임금께서 조정의 의론을 굳게 거부하고 마음속으로 판단하여 이와 같이 결정하신 것인가 의아해 하였다.어느 날 벗 윤경습(尹卿習)이 회령에서 나를 방문하자, 내가 회령의 경계와 형세에 대해 듣기를 원하니, 경습이 말하기를,"회령부는 두만강이 서북쪽으로 흐르는데, 이 강 밖으로 후춘(後春), 금굴(金窟) 등과 같은 지역은 지금 모두 청나라와 러시아의 소굴이 되었고, 목릉(穆陵) 연간에는 몽고와 여진의 유민들이 뿔을 당기며 서로 자웅을 겨루어 두만강 이북이 하루도 전쟁이 그칠 날이 없었으며, 우리의 경계에 거주하는 여러 오랑캐들이 또 회령과 경흥(慶興) 사이에서 재앙을 일으키니, 우리 회령이 외부의 침입을 근심한 지가 오래 되었다."하였다. 내가 그 지세를 듣고 시대를 참고하니 근심스럽게 여길 만한 점이 있음을 알 수 있었고, 성조(聖祖)께서 이런 사정을 속속들이 알고서 결정한 계책이 진실로 마땅하였다. 이윽고 경습이 돌아갈 때에 시를 지어 나를 권면하니, 내가 한 마디 말로 보답하였다."회령은 그대가 사는 곳이니, 내가 청컨대 변방의 근심에 대한 설로 비유하겠네. 융경의 시대에 변방의 근심이 회령에 있었으나 성조께서 낸 계책에 힘입었는데, 오늘날에 이르러서는 조정과 재야, 국내와 국외에 변방과 같은 근심이 아닌 것이 없지만 나에게 관직이 없으니 내가 감히 말하지 못하네. 그러나 나에게 있는 변방의 근심은 내가 그 책임을 사양할 수가 없네.나에게 있는 변방의 근심이 무엇이겠는가? 바로 외부의 유혹이요, 객기(客氣)라네. 외부의 유혹은 외적(外敵)이 속이는 것이고, 객기는 외적이 침략하는 것이니, 방종하여 다스리지 않고 자라나도록 내버려 둔다면 속이는 것들은 장차 나를 능욕하고 압박하려 할 것이며, 침략하는 것들은 나를 발로 차고 짓밟으려 할 것이니, 근심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대저 군주가 외적을 막는 것과 학문을 하는 자가 자기 자신을 이기는 것은 그 이치가 같다네. 나에게 뜻이 있는 것은 군주에게 장수가 있는 것과 같고, 나의 모든 신체는 군주의 삼군(三軍)과 같으니, 먼저 반드시 나의 뜻을 정립하는 것은 왕이 남중(南仲)에게 명하여 삭방(朔方)에 가서 성을 쌓게 하는 것2)과 같고, 뜻이 정립됨에 따라 모든 신체가 명령을 따르는 것은 목야(牧野)에서 군사에게 맹세함에 따라 천 명 백 명의 군사가 짧은 창을 들고 긴 창을 세우는 것3)과 같네. 속이는 것들은 나의 정대함을 지켜 제압하고 복종시키되 마치 문덕(文德)을 크게 펴자 유묘(有苗)가 와서 복종하는 것처럼 하고4), 침입하는 것들은 나의 의리를 행하여 쓸어버리고 깨끗하게 하되 마치 함곡관(函谷關)에 들어가 법을 간략하게 하여 진나라의 포학한 정치를 없애는 것처럼 해야 하네.5)진실로 이와 같이 할 수 있다면 나에게 있는 변방의 근심이 어찌 걱정할 것이 있겠는가. 학문을 하는 자는 여기에서 힘써야 할 바를 알 수 있네. 또 회옹(晦翁)의 말을 기억하건대, '중원 땅의 오랑캐는 쫓아내기 쉽지만, 내 한 몸의 사사로운 생각은 없애기 어렵다.'라고 하였으니, 이것으로 보건대, 자기 자신을 잘 다스릴 수 있는 자는 반드시 외적을 막을 수 있지만, 외적을 막을 수 있는 자가 반드시 자기 자신을 이기지는 못한다는 것을 또한 알 수 있네.지금 우리 그대는 뜻이 정해지고 사학(斯學)의 본원이 이미 확립되어 외부의 유혹과 객기의 근심이 적을 것임을 나는 진실로 알고 있네. 그러나 하늘까지 넘쳐나는 물과 온 들판을 태우는 불은 졸졸 흐르는 물과 살살 타오르는 불꽃에서 시작하지 않은 적이 없으니, 우리 그대는 돌아가서 더욱 자기 자신을 이기는 공부에 힘써서 외유와 객기의 싹이나 맥락이 내 몸 한 쪽에 몰래 숨어 있는 것을 용납하지 않는다면 회옹의 이른바 '없애기 어렵다'는 것이 또한 어렵지 않을 것이니, 하물며 쉬운 것이야 더 말할 것이 있겠는가.만약 조정에 섰을 때에 나라에 변방의 근심이 있게 된다면 그것이 만연하여 도모하는 것이 어렵지 않도록 조처하는 것이 오늘날 뽕나무 뿌리를 벗겨서 둥지를 얽을 수 있는 것6)처럼 하고, 우리 선조가 운강공에게 회령을 맡긴 것처럼 할 것이 틀림없음을 나는 알고 있으니, 우선 이렇게 써서 그렇게 되기를 기다리겠네." 往在隆慶己巳, 宣祖命我從十二世祖雲江公爲會寧府使. 臺諫論以資格未準. 上牢拒之. 高峯 奇文憲公, 亦言: "會寧武夫堂上之任, 金某仕越其階, 文用武職, 非待文臣之揆也. " 上曰: "邊憂旣深, 實難其任. 今得其人, 何論階次?" 終不允余. 嘗觀此疑會之爲邊憂, 果何如, 而上之牢拒廷議, 斷自宸衷, 如是之決也. 一日尹友 卿習, 自會寧過余. 余願聞會之疆域形勢. 卿習曰: "會之爲府, 豆滿之江, 經其西北, 此江以外, 如後春、金窟等地, 今皆爲淸、俄窟宅. 在穆陵年間, 蒙古、女眞之遺種, 猗角相雄, 豆滿以北, 無日不風塵. 諸胡之居我界者, 又作孼於會寧、慶興之間. 蓋吾會之憂外寇者久矣. " 余聞其地勢, 參以時代, 其有可憂者可知, 而聖祖綜覈之算, 固其宜也. 已而卿習將歸, 贈詩以勖余, 余報之以一言曰: "會寧子之居也, 我請以邊憂之說喩之. 隆慶之世, 邊憂在於會寧, 而賴聖祖之成算. 逮夫今日, 朝野中外, 無非邊憂, 而我無官守, 則我不敢言. 至若邊憂之在我, 則我不得辭其責也. 邊憂之在我者何? 乃外誘也, 客氣也. 外誘, 寇之詐譎者也; 客氣, 寇之衝突者也. 縱而不治, 任其滋長, 則詐譎者, 將陵壓矣; 衝突者, 將蹴踏矣, 可不憂哉? 夫人主之禦寇, 學者之克己, 其理一也. 吾之有志, 如君之有帥; 吾之百體, 如君之三軍. 先要立定吾志, 如王命南仲, 往城于方; 志立而百體從令, 如誓軍牧野, 千夫百夫, 稱戈立矛. 詐譎者, 守吾正大而制服之, 如誕敷文德, 有苗來格; 衝突者, 行吾義理而掃淸之, 如入關約法, 除秦暴虐. 苟能若此, 邊憂之在我者, 何足憂乎? 學者於此, 可以知所勉矣. 抑又記晦翁之言曰: '中原之戎虜易逐, 而一己之私意難除. ' 由此觀之, 克治其己者, 必禦外寇; 能禦外寇者, 未必克己, 亦可知已. 今吾子志定, 斯學本原旣立, 外誘客氣之憂, 吾固知其小. 然滔天燎原, 未嘗不始於涓涓焰焰. 吾子歸而益加克己之功, 使二者之苗脈, 不容潛藏於一邊, 則晦翁所謂難除者, 亦將不難矣, 況其易者乎? 如使立人之朝, 而國有邊憂, 則吾知其不使蔓延難圖, 如今日之爲能撤桑綢戶, 如我宣祖之任會寧於雲江公也必矣, 姑書此而俟之. " 왕이 …… 것 《시경》 〈소아(小雅) 출거(出車)〉에 "왕이 남중(南仲)을 명하사 삭방에 가서 축성하게 하시니 수레를 냄이 많고 많으며 깃발이 선명하도다."라는 구절을 인용한 말이다. 목야(牧野)에서 …… 것 주(周)나라 무왕(武王)이 은(殷)나라 제후들을 규합하여 목야에서 은왕(殷王) 주(紂)와 싸우기 전에 군사들에게 맹세했던 고사를 인용한 말이다. 《書經 牧誓》 속이는 …… 하고 순(舜) 임금이 우(禹)를 시켜 유묘를 정벌하게 하였는데, 유묘가 완강히 저항하자 군대를 거두어 돌아오게 하고  문덕(文德)을 더욱 닦고 양쪽 섬돌에서 춤을 추니, 70일 만에 유묘가 와서 항복하였다는 고사를 인용한 말이다. 《書經 大禹謨》 침입하는 …… 하네 유방(劉邦)이 함양(咸陽)으로 들어가 진(秦)나라의 보물 창고를 봉하고서 그곳의 장로들에게 살인자는 사형에 처하고, 사람을 다치게 한 자와 물건을 훔친 자는 그 죄에 맞게 처벌하겠다는 세 가지 약조를 맺어 진나라의 가혹한 정치를 일소하고 민심을 크게 얻은 고사를 인용한 말이다. 《史記 卷8 高祖本紀》 뽕나무 …… 것 《시경》 〈치효(鴟鴞)〉에 "하늘이 장맛비를 내리기 전에 저 뽕나무 뿌리를 가져다가, 둥지의 문을 칭칭 감는다면, 이제 너희 아래 사람들이 혹시라도 나를 업신여기랴.〔迨天之未陰雨, 徹彼桑土, 綢繆牖戶, 今女下民, 或敢侮予.〕"라고 한 구절을 인용한 말로, 환란이 일어나기 전에 미리 대비하는 것을 비유하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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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주이씨족보》 서문 【간재 선생을 대신하여 짓다. 임자년(1912)】 《星州李氏族譜》序 【代艮齋先生作. 壬子】 씨족이 족보를 둔 것은 그 유래가 오래되었으니, 주관(周官)은 나라의 세대를 잇는 직책을 맡았고7), 정자(程子)는 친족을 수록하여 풍속을 도탑게 하라는 가르침을 두었다. 대체로 위로는 유래를 따라 거슬러 올라가 그 근원을 돈독히 하고, 옆으로는 분파(分派)까지 그 은혜를 독실하게 하는 것으로는 족보보다 절실한 것이 없으니, 씨족이 있는 사람에게는 그만둘 수 없는 것이다.성산 이씨(星山李氏)가 우리나라에 드러난 것은 신라(新羅)와 고려(高麗) 때부터 이미 그러하여 이름난 정승[名卿]과 큰 스승[碩匠]이 역사서에 빛나고, 예천(醴泉)의 근원과 영지(靈芝)의 뿌리에서 갈래가 많아지고 가지가 번성하듯 훌륭한 조상에서 수많은 자손이 나와 각 도에 흩어져 있는 자들이 수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았다. 지난 날 순조(純祖) 경인년(1830)에 대보(大譜)를 만든 뒤로 다시 수찬할 겨를이 없게 된 지 지금 80여 년의 오랜 세월이 지남에 따라 먼 후손들이 더욱 번창하여 갑자기 모이기 어렵게 되었으니, 친함이 다하여 길가는 사람이 되었다는 탄식이 진실로 염려할 만하였다. 이것이 오늘날 이씨의 제공(諸公)들이 파보(派譜)를 편찬한 이유이니, 친한 종족으로부터 먼 종족까지 당연히 해야 할 일을 급선무로 삼았다고 이를 만하다.족보를 수찬하는 중요한 뜻이 삼가 생각건대, 여기에만 있지 않을 것이니, 반드시 선대의 아름다움을 이어 자신에게 두터이 하고 후손에게 넉넉하게 해야 비로소 선(善)을 다하는 것이 된다. 그러므로 《시경》에 이르기를, "너의 조상을 생각하지 않느냐, 그 덕을 닦을지어다.[無念爾祖, 聿修厥德.]"라고 하였다. 내가 이씨 선대의 덕행을 살펴보건대, 농서공(隴西公)의 공경과 검약ㆍ문열공(文烈公)의 충성과 정직ㆍ경원공(敬元公)의 겸양ㆍ문경공(文敬公)의 도학(道學)ㆍ 귀암공(龜巖公)의 효성과 우애와 같은 것들은 모두 후대의 본보기가 될 만한데, 하물며 후손에게 있어서야 더 말할 것이 있겠는가.지금 이 족보에 기록된 제공들이 가깝게는 자신의 몸가짐과 집안에서의 처신으로부터 조정에 서서 세상에 보답하는 것에 이르기까지 진실로 선대의 덕행을 생각하고 또 생각하여 욕됨이 없기를 기약한다면 말과 행실에 나타나는 것들이 저절로 응당 예의에 위배되지 않을 것이고, 사업에 조처하는 것들이 반드시 도의에 꼭 맞게 될 것이다. 이것을 후손들에게 미루어 가서 모두 그렇게 하지 않는 사람이 없게 된다면 선대의 공열을 빛나게 드러내고 후손들을 편안하게 살도록 도와주는 도가 이에 성대해질 것이다. 이것으로 보건대, 또 어찌 계통을 밝히고 친족을 수록하는 것으로 근본을 돈독히 하고 은혜를 도탑게 하는 바탕을 삼아서 족보를 수찬하는 것이 할 일을 다 했다고 할 수 있겠는가. 이에 서문을 써서 이공 병민(李公秉玟)의 청에 부응한다. 族之有譜, 其來遠矣. 周官掌邦國繫世之職, 程子有收族厚俗之訓. 蓋上溯所自, 以敦其本, 旁及所分, 以篤其恩者, 莫切於譜, 而有族之不容已者也. 星山 李氏之顯於東方者, 自羅、麗已然, 而名卿碩匠, 光史耀乘, 醴源芝根, 派衆枝繁, 散在各省者, 不億其麗矣. 往在純廟庚寅大譜之後, 不遑再修者, 今爲八十餘年之久, 而雲仍彌蕃, 猝難湊合而親盡塗人之歎, 誠爲可慮. 此今日李氏諸公派譜之所爲編也, 可謂由親及遠而當務爲急矣. 至於修譜之要義, 竊謂不在於此而已. 必也紹厥先懿, 禔之於身, 而裕之於後, 乃爲盡善也. 故《詩》曰: "無念爾祖, 聿修厥德. " 余觀李氏世德, 如隴西公之恭儉、文烈公之忠直、敬元公之謙退、文敬公之道學、龜巖公之孝友, 皆可爲來世之準繩, 況在於後承乎? 今諸公之譜於斯者, 近自持身處家, 以至立朝酬世, 苟能念念先德, 期於無忝, 則發於言行者, 自應不背於禮矣, 措諸事業者, 必將脗合於道矣. 以此推及於後承, 而莫不皆然, 則其光闡先烈燕翼來昆之道, 於斯爲盛. 此又豈可以明系收族爲敦本篤恩之地, 作修譜能事而已哉? 於是乎序之, 以副李公 秉玟之請. 주관(周官)은 …… 맡았고 주관은 《주례(周禮)》 〈소사(小史)〉에 "소사는 나라의 기록을 관장하여 계세(繫世)를 정하고 소(昭)와 목(穆)을 분변한다.〔小史掌邦国之志. 奠繫世, 辨昭穆.〕"라는 기록에 의하면 소사(小史)를 가리키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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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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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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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부

백천 노공 묘표 계사년(1953) 百泉盧公墓表【癸巳】 옛날 나의 선사(先師) 간옹(艮翁 간재(艮齋) 전우(田愚)) 선생은 학문이 주밀하고 도가 정밀하여 당세의 종장(宗匠)이 되었는데 그 종지(宗旨)로 말하면 '성사심제(性師心弟)'104) 네 글자뿐이니, 스승도 이것을 가르치고 제자도 이것을 배웠다. 선생이 평소 말하기를, "돌아가 구하면 성사가 있고 겸허히 받아들이는 것은 심제에서 말미암는다. 이 이치가 오묘하여 남은 것이 없으니 응당 철저히 궁구해야 한다."라고 하였다.백천 광산(光山) 노공 휘 철수(澈秀), 자 형일(瑩一)이 실지의 학문에 뜻을 두어 성사심제의 설을 보기를 구한 뒤에 곧장 부안의 계화도(繼華島)에 들어가 폐백을 가지고 선생을 배알(拜謁)하였다. 기쁘게 열복하여 마음을 수립하고 행실을 제어하여 오로지 사문(師門)을 표준으로 삼았다. 자신을 단속하는 것은 날마다 반드시 관대(冠帶)를 착용함으로써 스스로를 단속해 몹시 춥거나 더울 때라도 편의를 취한 적이 없었다. 편안히 거처하며 일이 없을 때는 경전의 뜻에 잠심(潛心)하고 사리(事理)를 묵묵히 궁구하였으며, 밤에도 인정(人定)이 된 뒤에 잠자리에 들었다.사람을 가르칠 때는 먼저 《소학(小學)》과 《격몽요결(擊蒙要訣)》로 가르쳤고 그 다음에 사서삼경을 가르쳤는데 "아래로 인사(人事)를 배우는 데 힘쓰지 않고 등급을 뛰어넘어 위로 천리(天理)를 배우는 경지에 오르는 것은 근본을 세우고 실지를 힘쓰는 뜻이 아니다."라고 하였다. 집에 있을 때는 집에는 반드시 사당을 두었고 사당에는 반드시 신주를 두었으며, 관은 반드시 세 번 갈아 씌우고,105) 혼례가 있을 때는 반드시 친영(親迎)하였다. 남자는 위모(委貌)에 도포(道袍)를 착용하고 부인은 화관(華冠)에 심의(深衣)를 착용하였다. 생일에도 장수를 축원하는 하례를 받지 않고 상장(喪葬)에는 술과 고기로 조문객을 대접하지 않았다.세상이 변한 뒤에는 노중련(魯仲連)이 바다에 빠져 죽겠다는 말로 칭제(稱帝)를 거부한 의리106)와 서부원(徐孚遠)이 땅을 피해 머리카락을 온전히 지킨 절개107)로 자신에게 맹세하고 사람을 가르쳤으니 이 또한 간옹의 특별한 뜻이었다. 이 때문에 당시 무리들의 눈엣가시가 되어 먼저 공의 머리를 억지로 깎아서 온 세상을 위협하려고 하니 공이 이에 달아나 장수(長水)의 노곡산(蘆谷山)으로 들어갔다. 훗날 나라가 회복된 뒤에는 돌아와 노년을 보내니, 공의 학문이 이에 명망과 실제가 모두 사문에서 드높았다. 신묘년(1951) 3월 2일에 임종하였으니 함평군(咸平郡) 초동(草洞) 동쪽 대동(大洞)의 묘좌(卯坐) 언덕에 장사 지냈다.대개 성사심제란 무릇 학문하는 사람이 모두 성사의 순선(純善)을 표준으로 삼아야 한다는 뜻이고, 사문을 표준으로 삼는 것은 먼저 깨달은 사람의 현명함을 따라 스승으로 섬겨 그 선(善)을 취하는 것이다. 성사와 인사(人師)는 비록 천인(天人)의 구분이 있으나 학문하는 사람에게는 스승으로 삼아 선을 취하니, 덕을 이룬다는 점은 똑같다. 공이 간옹을 표준으로 삼은 것이 이미 전일하고 또 오래되어 마침내 덕과 행실을 이루었으니 간옹이 주장한 성사심제의 도에 대해 아는 것이 어찌 요연하지 않겠는가. 세상에 노공(潞公)과 이천(伊川)이 있었더라면 송(宋)나라 원풍(元豊)의 정백자(程伯子)처럼108) 공이 사도(師道)를 잘 밝혔다고 묘비에 쓰지 않았을 것이라 어찌 장담하겠는가. 이 점은 기록할 만하다.공은 고려 대호군(大護軍) 서(恕)가 시조이다. 본조의 우의정 경평공(敬平公) 숭(嵩), 이조 참의 상의(尙義), 안찰사(按察使) 의(毅), 대사헌 자원(自元)이 드러난 조상이다. 수직(壽職)으로 통정대부(通政大夫)가 된 봉령(鳳齡) 및 정윤(鼎允), 건순(建淳), 문한(文漢)은 고조, 증조, 조부, 부친이다. 문한은 효행(孝行)이 있었다. 모친은 하동 정씨(河東鄭氏)로 동순(東淳)의 따님이니 부덕(婦德)이 있었다.공은 고종(高宗) 신미년(1871, 고종8) 6월 7일에 태어났다. 재주가 총명하고 성품이 굳세고 과감하여 어릴 때부터 행동거지가 우뚝히 거인(巨人)과 같았다. 효성스럽고 우애가 있어 거상(居喪)을 잘 치르고 선인(先人)의 유지(遺志)를 정성으로 받들고 이전의 일을 배웠다. 부인은 함평 모씨(咸平牟氏)로 대엽(大燁)의 따님이며 장령 달겸(達兼)의 현손이다. 아들은 병채(炳寀), 병우(炳㝢)이고 딸은 함평 이계근(李啓根), 해주(海州) 정학근(鄭學根)에게 시집갔다. 장남의 양자는 학귀(鶴貴)이고, 차남의 아들은 학귀인데 양자로 나갔고, 홍귀(鴻貴), 응귀(鷹貴), 난귀(鸞貴)이다. 서범(書範), 복범(復範)은 사위 이계근의 소생이고, 관섭(寬燮), 중섭(重燮)은 사위 정학근의 소생이다.문인 서인남(徐仁楠)이 가장을 지어 천 리 길을 오가며 나에게 묘표를 청하였으니 그 정성이 매우 간절하고 또한 공의 학문이 전해진 바가 있음을 볼 수 있다. 昔我先師艮翁先生, 學熟而道精, 爲世宗師。若其主腦所存, 則"性師心弟"四字是已。師以是敎, 及門者亦以是學。先生雅言曰: "歸求有性師, 虛受由心弟。此理妙無餘, 直須窮到底。" 百泉光山盧公諱澈秀字瑩一之志實學也, 求見性師心弟之說, 然後卽入扶風之繼華嶹, 贄謁先生, 欣欣然說服, 立心制行, 專以師門爲標準。律身則日必冠帶以自飭, 極寒酷暑, 未嘗取便。燕居無事, 則潛心經義, 默究事理, 夜亦人定而後就寢。敎人則先以《小學》、《要訣》, 次及四書三經, 曰: "不務下學, 而躐上上達, 非立本務實之意。" 居家則家必有廟, 廟必有主, 冠必三加, 婚必親迎。男子委貌道袍, 婦人華冠深衣。晬日不受壽賀, 喪葬不以酒肉待吊客。世變以後, 則以魯仲連蹈海却帝之義、徐孚遠避地全髮之節, 自誓與敎人, 此又艮翁之特志也。以是爲時輩眼釘, 欲先加勒削於公, 而威脅一世, 公乃走入長水之蘆谷山中, 復國後, 歸還終老, 公之學, 於是乎望實俱隆於師門矣。考終以辛卯三月二日, 藏于咸平郡草洞東大洞卯坐原。蓋性師心弟者, 凡學者皆當標準乎性師之純善也, 標準師門者, 從師先覺之賢而取其善也。性師、人師, 雖有天人之分, 在學者師之而取善, 成德則一也。公之標準艮翁, 旣專且久, 竟成德行, 則其明於艮翁所主性師心弟之道者, 豈不瞭然矣乎? 世有潞公伊川而在者, 安知其不以公之能明師道題其墓, 若有宋元豊之程伯子乎? 是可以書之也。公, 高麗大護軍恕, 其始祖。本朝右相敬平公嵩、吏曹參議尙義、按察使毅、大憲自元, 其顯祖。壽通政鳳齡及鼎允、建淳、文漢, 其高、曾、祖、禰。文漢有孝行。妣河東鄭氏, 東淳女, 有婦德。公生以高宗辛未六月七日, 才性聰明剛果, 自幼動止, 屹如巨人。孝友善居喪, 誠奉先志, 學前事也。配咸平牟氏, 大燁女, 掌令達兼玄孫。子炳寀、炳㝢, 女適咸平李啓根、海州鄭學根。長旁繼男鶴貴, 次房男鶴貴, 出。鴻貴、鷹貴、鸞貴。書範、復範, 李壻出; 寬燮、重燮, 鄭壻出。門人徐仁楠, 撰成狀德文, 往返千里, 請余表阡, 其誠甚勤, 而亦可見公之學有所傳也。 성사심제(性師心弟):성은 스승이고 심은 제자라는 뜻이다. 간재는 주자와 율곡의 이기(理氣)에 대한 관점을 따라 성을 이로 심을 기로 보았다. 심은 기이지만 기의 정상(精爽)이기 때문에 거울이 본래 밝은 것과 같으면서도 기질의 영향을 받기 때문에 거울의 티끌에 의해 부식되어 때때로 밝지 않은 것과 같다. 반면 성은 혼연지선(渾然至善)하므로 심은 믿을 수 없고 성을 스승으로 삼고 높여야 한다고 보았다. 《임옥균, 艮齋 性師心弟와 性尊心卑의 韓國心性論上의 位置, 간재학논총, 간재학회, 2008》 관은……씌우고:관례(冠禮) 때 행하는 의식으로 치포관(緇布冠), 피변(皮弁), 작변(爵弁)의 순으로 관을 갈아 씌운다. 《禮記正義 冠義》 노중련(魯仲連)이……의리:노중련은 전국 시대 제(齊)나라의 고사(高士)이다. 진(秦)나라 군대가 조나라 한단(邯鄲)을 포위하고서 위(魏)나라 장군 신원연(新垣衍)을 보내 진나라를 제국(帝國)으로 섬기면 포위를 풀겠다고 요구하였다. 이때 노중련은 조(趙)나라에 있었는데 신원연에게 가서 진나라가 칭제하여 천하를 다스리면 차라리 동해에 빠져 죽을지언정 백성은 되지 못하겠다고 하였다. 《史記 魯仲連鄒陽列傳》 서부원(徐孚遠)이……절개:서부원은 명(明)나라 말기 사람으로 자는 암공(闇公)이다. 명나라가 청(淸)나라에 망한 뒤 진자룡(陳子龍), 하윤이(夏允彜) 등과 함께 의병을 일으켜 청나라에 항거하였으나 패배하고 대만(臺灣)으로 들어가 죽었다. 《明史 陳子龍列傳》 노공(潞公)과……정백자(程伯子)처럼:노공은 문언박(文彦博)의 봉호(封號)이고, 이천은 정이(程頤)의 호이다. 원풍은 신종(神宗) 때 사용한 연호이고, 정백자는 정호(程顥)를 가리킨다. 원풍 8년(1085)에 정호가 죽자 문언박이 중론을 수렴하여 묘표에 '명도 선생(明道先生)'이라 하였다. 또 정호의 아우 정이가 그 서문을 썼는데 "성인의 도로 하여금 환하게 다시 세상에 밝혀지게 하셨다.[使聖人之道煥然復明於世]"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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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저자)
유형 :
고전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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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부

학생 김공 묘표 병인년(1926) 學生金公墓表【丙寅】 내가 옛날에 할머니 김씨를 곁에서 모실 적에 할머니가 가르치기를, "우리 영광 김씨(靈光金氏)는 대대로 효를 서로 계승하였다. 나의 아버지 휘 택려(宅麗)는 산송(山訟)을 당해 원통함을 설욕하겠다고 혈서를 쓰고 이로 인하여 묘소의 의절(儀節)에 정성을 다하였다. 어진 자는 장수하는109) 이치가 실현되어 조정에서 은혜롭게 통정대부(通政大夫)를 내려주었다. 내 오라버니 우성(佑聲)은 매번 맛있는 반찬을 소매에 넣어 어버이에게 바쳤는데 소매가 이 때문에 해지고 너덜너덜해지니 사람들의 말에 이견이 없었다. 나의 조카 석종(錫宗)은 선대의 아름다움을 잘 계승하였고 그 아내 송씨(宋氏)도 부녀자의 도리를 지켰으니 너는 알아두어라."라고 하였다. 소자(小子)가 삼가 기억하여 감히 잊지 못하였으니, 대개 이 3세가 바로 공의 부친과 조부, 증조이다.공의 휘는 기현(琦鉉)이고 자는 국서(國瑞)이다. 타고난 자질이 순박하고 후하며 심지(心地)가 돈독하고 진실하였으니 효성과 사랑은 하늘이 내린 것이고 집안에서 대대로 전해진 것이다. 어렸을 때 어머니를 여읜 것을 지극히 한스럽게 여겼기에 성심으로 아버지를 섬겨 농사와 고기잡이로 봉양하였다. 시병(侍病)할 때는 잠시도 곁을 떠나지 않았고, 병이 위독해졌을 때는 밤에 하늘에 기도를 올렸으며, 상을 당해서는 몹시 슬퍼하였으니 이는 약관 때 있었던 일이다.형인 경현(卿鉉), 종현(綜鉉), 옥현(玉鉉)과는 우애와 공경이 더욱 독실하여 있는 것과 없는 것을 함께하고 조카들을 자신이 낳은 자식처럼 보았으니 형제간에 친밀하여 화목한 기운이 가득하였다. 성품이 너그럽고 대범하여 겉치레가 없어 순수하고 진실한 기운이 말과 용모에 드러났으니 이는 또 향리에 있으면서 남을 대하는 것이 이와 같았다.공이 태어난 날은 고종(高宗)이 즉위한 지 9년째인 임신년(1872) 12월 12일이고, 졸(卒)한 날은 53년 뒤인 갑자년(1924) 5월 15일이며, 장지는 정읍군(井邑郡) 우순면(雨順面) 사거리(四巨里) 선영(先塋) 아래 유좌(酉坐) 언덕이고, 부인은 재신(在愼)의 따님인 우주 황씨(紆州黃氏)와 우현(禹鉉)의 따님인 광산 김씨(光山金氏)인데, 우순면 외장리(外墻里) 뒤 간좌(艮坐) 언덕이 전배(前配)의 묘소이다. 아, 나는 공에게는 중표제(中表弟)110)가 되는데 친종형제(親從兄弟)111)처럼 서로 알고 지냈으니, 공과 같은 분은 아마도 옛날의 이른바 종족과 향당(鄕黨)이 칭찬하고 십실(十室)에도 충신(忠信)한 사람이 있다112)는 말에 해당할 것이다.영광 김씨는 고려조(高麗朝) 문안공(文安公) 휘 심언(審言)을 상조(上祖)로 삼는다. 우리 세종조(世宗朝)의 병마사(兵馬使) 휘 해(該)는 왜적을 토벌하다가 순절(殉節)하였으니 충렬(忠烈)이 역사에 밝게 드러나 있다. 공의 현명함은 단맛이 나는 샘물은 근원이 깊다는 것을 더욱 믿겠다. 후사가 없어서 백형(伯兄)의 셋째 아들 원표(源表)을 데려와 후사로 삼았다. 천도(天道)의 보답이 인색하다는 의문이 있었으나 원표는 봉양하고 장례를 치르는 데 자식의 직분을 잘해냈다. 두 아들을 두었으니 관식(觀植), 정식(廷植)이다. 그 후손이 번창하여 다하지 않으니 선한 사람에게 복을 내리는 이치113)가 아마도 여기에 해당할 것이다. 김 유인(金孺人)이 재산을 털어 비석을 세워 공의 아름다움을 드러내었으니 또한 공의 모범이 되는 행실이 영향을 끼쳤다는 점을 볼 수 있다. 余昔侍王母金氏側, 有敎曰: "吾靈光氏, 世孝相承, 吾父諱宅麗, 遭山變, 血書雪寃, 因竭誠墓儀。仁壽有諶, 恩錫通政。吾兄佑聲, 每袖美饌獻親, 袖爲之弊爛, 輿誦無異辭。吾姪錫宗, 能趾先美, 而其妻宋氏, 亦執婦道, 汝知之乎!" 小子敬識而不敢忘。蓋玆三世, 卽公之父若祖曾也。公諱琦鉉, 字國瑞。生質樸厚, 心地敦實, 其孝愛, 天植也、家傳也。幼喪母爲至恨, 事父以誠, 耕漁爲養。侍病暫不離側, 至革, 夜禱天, 及喪, 哀戚甚, 此在弱冠時也。與兄卿鉉、綜鉉、玉鉉友悌尤篤, 有無共之, 視諸姪猶己出, 棣陰塤箎, 和祥藹蔚。性坦率, 袪邊幅, 淳實之氣, 形於言貌, 此又居鄕接物者然也。其生高宗踐阼九年壬申十二月十二日, 其卒後五十三年甲子五月十五日, 其葬井邑郡雨順面四巨里先塋下枕酉原, 其配紆州黃氏, 在愼女; 光山金氏, 禹鉉女, 雨順面外墻里後艮坐原, 其前配墓也。噫! 余於公爲中表弟, 而相知如親從昆季矣, 若公者庶幾古所謂宗黨之稱、十室之有歟。靈光之金, 以麗朝文安公諱審言爲上祖。我世宗朝, 兵馬使諱該, 討倭殉節, 忠烈炳史。公之賢又益信醴泉之遠源也。無嗣, 取伯兄第三子源表爲後。有疑天道之報嗇, 而源表能供子職於養送。有二子, 觀植、廷植。其昌未艾, 福善之理, 其在斯乎! 金孺人殫財樹石, 用表公懿, 亦見刑于攸及也。 어진 자는 장수하는:《논어》 〈옹야(雍也)〉에 "지혜로운 자는 즐겁고, 어진 자는 장수한다.[知者樂 仁者壽]"라고 한 공자의 말이 보인다. 중표제(中表弟):중표는 조부나 부친의 자매의 자식과 조모나 모친의 형제자매의 자식을 뜻한다. 김택술은 김기현에게 6촌 아우가 된다. 친종형제(親從兄弟):친사촌 혹은 친형제를 가리키는 듯하다. 십실(十室)에도……있다:《논어》 〈공야장(公冶長)〉에 "10호의 작은 고을에도 반드시 나처럼 충신한 자는 있지만 나처럼 배우기를 좋아하지는 못할 것이다.[十室之邑 必有忠信如丘者焉 不如丘之好學]"라고 한 공자의 말을 가리키는 듯하다. 선한……이치:《서경(書經)》 〈탕고(湯誥)〉에 "하늘의 도는 선한 사람에게 복을 내리고 음탕한 사람에게 화를 내린다.[天道福善禍淫]"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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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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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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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계 황공 묘표 龜溪黃公墓表 지난 광무(光武) 갑진년(1904, 고종41)에 간재(艮齋) 전 선생(田先生)이 남쪽으로 가면서 태인(泰仁)을 지날 적에 학문에 뜻을 둔 황 사문(黃斯文) 경삼(景三) 보(甫)가 마침 이 고을에 머물고 있어서 전 선생이 행차하는 수레에 와서 배알하고는 보고 감화되어 경복(敬服)하여 수일이 지나도 해이하지 않았다. 사람됨이 헌걸차고 수려하며 성품이 쾌활하고 말에 호방한 기상이 있었으니 전 선생이 매우 아꼈다. 내가 전 선생을 모시고 있어서 황공과 교유할 수 있었는데 매우 즐거웠다. 이후로는 다시 서로 보지 못하였으나 매번 그리운 생각을 그만둘 수 없었다.임오년(1822, 순조22) 봄 내가 흥성(興城)에 와서 《이재선생속집(頤齋先生續集)》을 편집하고 교정하였는데 황군 하영(河永)이 그 사이에 본생(本生) 선고(先考)인 구계공의 가장(家狀)을 가지고 내게 묘문(墓文)을 부탁한 적이 있었다. 내가 받아서 읽어보니 구계는 바로 지난 날 내가 즐겁게 교유했던 경삼 보의 자호(自號)였다. 생각건대 이때 공은 한창 장년이었고 나는 약관 남짓이었는데 지금은 어느덧 39년이 지나 공의 묘소에 있는 나무가 이미 한 아름이 되었고114) 나도 머리카락이 짧아졌으니 슬프구나. 옛날과 지금을 조용히 생각해보면 어찌 감히 사양할 수 있겠는가.공의 휘는 종태(鍾台)이니 이재(頣齋)의 5세손이다. 이옹의 학문은 천지의 깊은 뜻을 궁구하고 윤상(倫常)의 도리를 강론하여 널리 배워서 핵심을 요약하는 데로 돌아가고 체(體)를 밝혀 용(用)으로 나아가 종장(宗匠)의 고족제자(高足弟子)115)이자 온 나라의 명류가 되었으니 이것이 이른바 유자의 학문이고 공이 뜻한 바도 바로 이것이었다. 가업을 계승하는 일이 후손에게는 더욱 중한 책임이라 맹세코 장차 간옹을 한 번 섬겨 이 일에 전심하여 얻지 못하면 놓아버리지 않겠다는 것이 바로 당장의 공정(工程)이었는데 갑자기 2년 뒤 3월 20일에 병으로 일어나지 못하였으니 아, 애석하다.간옹이 영전에 나아가 슬피 곡하고 추후 〈교경당기(敎經堂記)〉116)를 지어 간절하게 공의 뜻을 말하여 그 아버지를 위로하고 아들을 면려하였으니 여기에서 공의 대략을 볼 수 있다. 지금 상세한 행적이 이 가장에 보이니 연재(淵齋) 송 선생(宋先生 송병선(宋秉璿))이 고암서원(考巖書院)에서 청강(聽講)하고 시로 술회한 일과 교경당에 학계(學契)를 세워 정규(定規)로 차서(次序)를 정한 것을 참고하면 진실로 현인을 사모하고 후학을 장려하는 선비의 본분이었다. 심지어 권세가가 당시 수령과 결탁하여 이치에 어긋나는 짓을 하여 위세와 화기(禍機)가 번갈아서 목전에 임박하였는데 조금도 마음이 꺾이지 않고 천천히 이치에 근거한 말 한마디로 포악한 짓을 함부로 일삼는 순검(巡檢)을 굴복시켰으니 이는 또 임기응변의 지혜와 재간이다.대개 공은 성품이 효성스러워 일찍이 어버이가 병이 들었을 때 집은 비록 가난하였으나 개고기 13마리를 연이어 써서 병을 낫게 하였다. 매번 조상의 제사가 있을 때면 비록 큰 설한(雪寒)을 만나도 반드시 60리 떨어진 곳에 달려가 참석하였다. 또 형을 섬기는 데 지극히 공손하였으니 사람의 큰 근본이 이미 수립되었다. 이러한 재주와 뜻에 격물(格物), 치지(致知), 성의(誠意), 정심(正心)의 학문을 축적하였다면 어찌 도가 생겨나지 않을 수 있겠으며 어찌 등용되어 뜻을 행할 수 없었겠는가. 가학(家學)을 잇기에 충분할 뿐만 아니라 또한 장차 세상에 보탬이 되었을 터인데 수명이 막아 그 바람을 이루지 못하였으니 이른바 천지가 광대하여도 사람이 오히려 유감이 있다117)는 말이 이런 경우일 것이다.평해 황씨(平海黃氏)는 먼 윗대부터 세계(世系)가 있는데 대대로 현귀(顯貴)한 관직118)을 계승하였으니 모두 매산(梅山) 홍 선생(洪先生 홍직필(洪直弼))이 지은 이재의 묘명(墓銘)에 있다.119) 고조, 증조 이하도 또한 가업을 계승하였다. 부친은 휘 재진(在鎭)이니 사람을 살린 음덕(陰德)이 있었다. 모친은 울산 김씨(蔚山金氏)로 하서(河西 김인후(金麟厚)의 호) 선생의 후손이다. 부인은 의성 김씨(義城金氏)로 현명하여 바른 행실이 있었다. 공이 죽은 뒤 곡을 할 때 소리를 내지 않음으로써 시부모의 마음을 편안히 하였으며 자녀를 가르치는 데 법도가 있었다.장남은 하영인데 중부(仲父)의 후사로 나갔다. 그 다음은 하준(河準), 하운(河雲)이다. 딸은 홍순석(洪淳錫)에게 시집갔다. 하영은 4남 4녀를 두고, 하준은 1남 1녀를 두고, 하운은 4남 1녀를 두고, 딸은 3남 3녀를 두었다. 내외의 손자가 번창하여 다하지 않으니 하늘이 공이 생전에 누리지 못한 복을 보답한 것이 여기에 드러났다. 내가 이에 공의 평소 뜻과 사적을 모아 드러내어 부안 변산(邊山) 성공봉(成功峰) 임좌(壬坐) 묘소에 새겨서 행여 지나가는 사람이 보고서 공경해야 할 바를 알게 한다. 往在光武甲辰, 艮齋田先生之南駕, 歷泰仁也, 有黃斯文景三父志於學者, 適寓居是郡, 來拜行幰, 觀感敬服, 累日而靡懈。爲人頎而秀, 性豁如快, 言論有豪邁氣, 田先生甚愛之。余陪間席, 獲與遊甚歡, 後不復相見, 然每思之不能已。歲壬午春, 余來興城, 編校《頣齋先生續集》也。黃君河永, 間嘗以其本生先考龜溪公家狀, 屬余墓文。受而閱之, 龜溪卽曩余所歡景三父自號也。念是時, 公方壯年, 余弱冠餘, 至今忽忽爲三十九年, 而公之墓, 木已拱, 余亦鬂髮種種, 悲夫! 俯仰今昔, 其何敢辭? 公諱鍾台, 頣齋五世孫也。頣翁之學, 究天地之蘊, 講倫常之理, 由博而反約, 明體而適用, 爲宗師高足, 通國名流, 是所謂儒者之學, 而公所志者卽此也。其箕裘之業, 在後承尤爲重責, 誓將一事艮翁, 專致斯事, 不得不措, 卽目前工程, 而遽以再明年三月二十日, 不起疾, 嗚呼惜哉! 艮翁臨靈哭哀, 追作〈敎經堂記〉, 眷眷言公志, 而慰其父, 勉其子, 此可以見公之槩也。今其詳見於是狀, 則參淵齋宋先生之聽講考巖, 而詩以述懷, 設興學契于敎經堂, 而序以定規者, 固慕賢獎後士子之本事。至於遭勢家之締結時宰, 加以橫逆也, 威熖禍機, 交迫於前, 而不少挫沮, 徐以據理一言, 折服肆暴方張之巡檢, 是則又臨遽應變之智幹也。蓋公性孝, 嘗有親癠, 家雖貧, 連用犬肉十三首而愈。每値先祀, 雖大雪寒, 必奔參於六十里地, 而又事兄極恭, 人之大本旣立矣。以若才志, 積以格致誠正之學, 則何道之不可生? 何用之不可行哉? 非惟足以紹家學, 亦將見裨益人世, 而大命限之, 莫遂其願, 所謂天地之大, 人猶有憾者, 此歟? 平海氏, 遠有代序, 世承簪獻・(軒), 俱在梅山洪先生所撰頣齋墓銘。高曾以下, 亦世其家。考諱在鎭, 有活人陰德。妣蔚山金氏, 河西先生后。配義城金氏, 賢有行。公之沒, 哭不以聲, 安尊章心。敎子女有法。男長河永, 出爲仲父后。次河準、河雲。女適洪淳錫。河永四男四女, 河準一男一女, 河雲四男一女, 洪室三男三女。內外孫熾昌未艾, 天所以報公不食者, 於是乎著焉。余乃撮公平生志事而表章之, 俾刻于扶安邊山成功峰壬坐之阡, 庶過者觀之, 而知所敬焉。 묘소에……되었고:사람이 세상을 떠난 지 오래된 것을 개탄하는 말이다.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 희공(僖公) 32년 조에 진 목공(秦穆公)이 진(晉)나라를 공격하러 떠나는 진(秦)나라 군대를 곡한 건숙(蹇叔)에게 사람을 보내 "네가 중수만 살고 죽었더라도 네 무덤가에 심은 나무가 이미 한 아름은 되었을 것이다.[中壽 爾墓之木拱矣]"라고 한 데서 연유하였다. 종장(宗匠)의 고족제자(高足弟子):황윤석은 미호(渼湖) 김원행(金元行)의 문하에서 학문하였다. 교경당기(敎經堂記):현재 《간재집》에는 실려 있지 않다. 천지가……있다:《중용장구(中庸章句》 제12장에 "성인이라도 능하지 못한 바가 있으며, 천지가 광대하여도 사람이 오히려 유감스러워하는 바가 있다.[雖聖人 亦有所不能焉 天地之大也 人猶有所憾]"라고 하였다. 현귀(顯貴)한 관직:원문은 '簪獻'이다. 문맥에 근거하여 '獻'을 '軒'으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매산(梅山)……있다:현재 《매산집》에는 실려 있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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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동 최공 묘표 무자년(1948) 果東崔公墓表【戊子】 우리 당(黨)에 뛰어난 재주와 우뚝한 뜻을 지녔는데 오랫동안 고질병을 앓아 학문을 성취하지 못하고 죽은 이가 있으니 과동 거사 최공 장렬(長烈) 자 성무(性武), 또 개자(改字) 성귤(性橘)이 그 사람이다. 그 선조는 전주(全州) 사람으로 고려의 시중(侍中) 문성공(文成公) 아(阿)의 후손이고, 서산사(書山祠)에서 제향(祭享)을 받는 본조의 판관(判官) 증 참판(參判) 희정(希汀)의 13세손이며, 참봉(參奉) 병우(秉宇)의 아들이다. 모친은 여산 송씨(礪山宋氏)와 여흥 민씨(驪興閔氏)인데 민씨가 공을 낳았다. 태어난 날은 고종(高宗) 정해년(1887, 고종24) 4월 13일이다.공은 어려서부터 재주와 성품이 남보다 뛰어나 장로(長老)들이 대기(大器)가 될 것이라 기대하였다. 을사년(1905) 겨울 《시경(詩經)》을 가지고 나에게 와서 함께 공부하였는데 하루 만에 〈주남(周南)〉과 〈소남(召南)〉 20편을 마쳤고, 〈패풍(邶風)〉 이하도 이와 같았다. 간혹 사서(史書)를 보았는데 눈으로 훑고 지나가도 잊지 않았다. 문장을 짓는 재사(才思)가 뛰어나 말을 하면 문리(文理)를 이루었다. 당시 나이가 19세였기 때문에 내가 보기 드문 인물이라 경탄하고 인하여 도학(道學)의 존귀함과 오늘날 세상에서 도학의 종장(宗匠)으로는 간재(艮齋) 전 선생(田先生)이 있다고 말해주니 공이 즉시 기뻐서 말하기를, "저는 마땅히 도학에 종사하여 간옹을 스승으로 섬길 것입니다."라고 하였다.이로부터 뜻은 날로 더욱 높아지고 힘쓰는 것은 날로 더욱 부지런해졌는데 다음 해에 병이 생겼다. 비록 존성(存省)하고 궁구하는 것은 멈추지 않았으나 병이 심해 직접 선생을 찾아가 질정하는 것은120) 형편상 억지로 하기 어려웠다. 그러나 최후에는 선뜻 마음을 바꾸고 일어나 말하기를, "만약 이대로 시일만 보낸다면 평소의 뜻을 저버리고 일생을 헛되이 보내는 것이다."라 하고는 이에 신유년(1921) 봄 나와 함께 병든 몸을 이끌고 바다를 건너 폐백을 갖추어 화도(華島)에서 전 선생을 뵙고 제자의 예를 행하니 선생이 아끼고 소중히 여겨 〈귤송(橘頌)〉의 "나이는 비록 젊으나 스승과 어른으로 삼을 만하네."121)라는 글귀의 뜻을 취해 성귤로 자를 고쳐 이름과 조응(照應)하게 하였다. 공이 받은 기대가 이러하였으나 오래지 않아 선생이 돌아가시고 공도 끝내 갑자년(1924) 4월 22일에 일어나지 못하였으니, 슬프구나.부인은 울산 김씨(蔚山金氏)로 영중(永中)의 따님이니 하서(河西 김인후(金麟厚)의 호)) 선생의 후손이다. 아들은 재익(載翊), 재철(載哲), 재용(載鏞)이다. 세 아들이 낳은 남녀는 도합 십수 인이다.공은 재주와 학문으로 부모의 마음을 기쁘게 하였다.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병중에서 거상(居喪)을 잘 치러, 간옹이 선인(先人)의 유체(遺體)를 생각하지 않느냐는 경계까지 하였다. 선인을 위한 일에 정성을 다해 간옹에게 명(銘)을 청하던 날 비오듯 눈물을 흘렸으니 효성스러운 자손이라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큰 근본이 이미 수립되었으니 나머지 행실은 이를 미루어 알 수 있다. 학문하는 절도로 말하면 바야흐로 거친 데에서 정밀한 경지에 들어가려 하였는데 수명에 막혀 큰 성취를 이루지 못하였으니 거듭 유감스럽다.아, 공은 내가 마음으로 사귄 사람이다. 평소 강론하고 토론할 적에 나의 변변찮은 말을 한결같이 믿고 의심하지 않은 것은 나를 사사로이 아껴서가 아니라 스승에게서 얻은 것을 믿었기 때문이고, 공이 죽은 뒤 내가 세월이 지날수록 더욱 슬퍼하는 것은 공을 사사로이 아껴서가 아니라 유학(儒學)이 흥성하지 못하는 것을 슬퍼해서이다. 그러니 지금 묘표를 지어 달라는 김재익의 요청에 대해 어찌 차마 사양할 수 있겠는가. 이에 재주와 뜻은 있었으나 좋은 운수가 없었던 사실을 갖추어 써서 정읍군(井邑郡) 산내면(山內面) 송장동(送將洞) 유좌(酉坐) 언덕을 지나가는 후세 사람들로 하여금 일찍이 이런 사람이 있어 여기에 안장되었다는 것을 알아서 대대로 알려지게 한다.122) 吾黨有以儁才卓志, 久抱貞疾, 學不充量而沒者, 果東居士崔公長烈字性武, 又改字性橘, 其人也。其先全州人, 高麗侍中、文成公阿後, 本朝判官、贈參判享書山祠希汀十三世孫, 參奉秉宇子。其妣礪山宋氏、驪興閔氏, 而閔氏出。其生高宗丁亥四月十三日。幼而才性超人, 長老以大器期之。乙巳冬, 挈《詩經》就余同業, 一日而畢〈周〉、〈召〉二什, 自〈邶〉以下亦如之。間覽史書, 過目不忘。藻思發越, 吐辭成理。時年十九, 余旣驚歎其罕覯, 因告以道學之尊貴, 今世道學宗師, 有艮齋田先生在, 公卽欣然曰: "吾當從事道學而師艮翁。" 自是志日益高, 力日益勤, 而至翼年, 疾祟已作, 雖存省窮硏無間, 病健奈負笈就正, 其勢難强。最後幡然而作, 曰: "若因循如此, 靠負素志, 枉過一生。" 乃以辛酉春, 伴余舁疾, 涉海具贄, 謁田先生于華島, 行弟子禮, 先生愛重之, 取〈橘頌〉年歲雖少可師長之義, 改字以性橘而應其名。其見期待如此, 然而不久, 而先生棄後學, 公亦竟以甲子四月二十二日不起, 悲夫! 配蔚山金氏, 永中女, 河西先生後。男載翊、載哲、載鏞。三房所生男女, 合十數人。公以才學悅父母心。母沒而善居喪於病中, 至有艮翁不念先人遺體之戒。盡誠先事, 謁銘艮翁之日, 淚下如雨, 可不謂孝子孫乎? 大本旣立, 餘行可推。至於爲學節度, 方且由粗入精, 而阨於命數, 未克大就, 重可憾也。嗚呼! 公余心交也。平日講討, 一信瞽說而靡他者, 匪私我也, 信其得之乎師也; 公沒而余過時愈悲者, 匪私公也, 悲吾軍之不張也。今於載翊阡表之請, 其何忍辭? 乃備書其有才志無運命, 俾後人之過井邑郡山內面送將洞枕酉原者, 知世聞曾有斯人而藏于此也。 병이……것은:원문은 '病健奈負笈就正'이다. 문맥에 근거할 때 '奈'가 잘못되었거나 탈자가 있는 듯하다. 우선 '奈'를 빼고 번역하였다. 나이는……만하네:《초사(楚辭)》 〈귤송〉에 "귤의 나이는 나보다 젊으나 스승과 어른으로 삼을 만하네. 고결한 행실이 백이에 견줄 만하니 법상으로 만들어 모시고파라.[年歲雖少 可師長兮 行比伯夷 置以爲像兮]"라고 하였다. 〈귤송〉은 초(楚)나라 굴원(屈原)이 강남(江南)으로 쫓겨난 후 자신의 고결하고 변하지 않는 지절을 귤에 빗대어 읊은 노래이다. 일찍이……한다:원문은 '知世聞曾有斯人而藏于此也'이다. 문맥에 근거할 때 '世聞'이나 다른 곳에 오류가 있는 듯한데 확인할 수 없어 우선 원문대로 번역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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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인 김씨 묘표 경인년(1950) 恭人金氏墓表【庚寅】 공인 부안 김씨(扶安金氏)는 문정공(文貞公) 지포(止浦) 선생 구(坵)의 후손이며, 고려 말의 충신 군사(郡事) 광서(光叙)의 7세손이며, 첨정(僉正) 증 도승지 직손(直孫)의 현손이며, 기묘명현(己卯名賢)인 옹천(甕泉) 석홍(錫弘)의 증손이며, 사인(舍人) 청수재(淸修齋) 서성(瑞星)의 손자이며, 현감(縣監) 수복(壽福)의 따님으로, 통덕랑(通德郞) 도곡 처사(桃谷處士) 함풍(咸豊) 이유(李瑜) 공의 부인이다. 이공은 장릉(莊陵 단종(端宗)의 능호(陵號))의 충신인 참봉(參奉) 안(岸)의 현손이며, 진사(進士) 낭곡(浪谷) 억영(億榮)123)의 아들이며, 대사간 죽곡(竹谷) 선생 장영(長榮)의 출후자(出後子)124)이다.공은 목릉(穆陵 선조(宣祖)의 능호) 정유년(1597, 선조30) 섬의 오랑캐가 다시 침입한 날에 부안 청등(淸嶝)의 들판에서 싸우다가 순절(殉節)하였다. 공인도 같은 날 사로잡혔으나 역시 굴복하지 않고 순절하였다. 두 사람의 순절이 이루어진 것이 지주(池州)가 포위되었을 때의 조묘발(趙卯發) 공125) 부부와 같은 점이 있으니, 아, 열렬하도다. 아, 장렬하도다. 옷과 신발을 부안 상서면(上西面) 도화동(桃花洞) 오좌(午坐) 언덕에 함께 매장하여 묘소로 보이게 만드니 지나가는 사람들이 공경을 표하였다.삼가 생각건대 공인이 이룬 의(義)는 진실로 천성이 올곧고 굳세기 때문이니 역시 남편의 모범이 되는 행실이 영향을 끼쳤음을 볼 수 있다. 그러나 근본을 미루어 논하면 태어난 곳과 시집간 곳이 모두 명문(名門)이고 법도 있는 가문이라 문정공의 유풍(遺風)이 여전히 전해지고 죽곡의 가르침이 당시까지 현존하였다. 그리하여 평소에 그 영향을 받았으니 어려움에 임했을 때 무엇을 버리고 취해야 할지를 어찌 분명하게 알지 못하였겠는가. 시인이 석인(碩人)의 현명함을 읊으면서도 오히려 족류(族類)의 현귀(顯貴)함을 하나하나 일컬었는데126) 하물며 공인의 선조의 성대한 아름다움이겠는가. 어찌 칭송하는 말이 없을 수 있겠는가.아들 홍순(弘詢)은 진사이고 홍의(弘誼)는 통덕랑이고 홍원(弘源)은 후사로 나갔다. 딸은 참봉 이형(李逈), 진사 송후옥(宋後玉)에게 시집갔다. 홍순의 아들은 환(晥)이고 홍의의 아들은 시(時), 환(㬇)이다. 나머지는 기록하지 않는다. 지금 후손들의 숫자가 더욱 많아져 헤아릴 수 없을 정도에 이르렀다. 부인(婦人)의 선은 열행(烈行)보다 큰 것이 없으니 선으로 인한 남은 복이 마땅히 이러한 것이다.10세손 윤환(潤煥)이 내가 공인과 동종(同宗)인 후세라 하여 족질(族姪) 양범(陽範)과 주범(周範)을 보내 묘표에 새길 글을 청하였다. 그 청이 글솜씨 때문이 아니기에 끝내 사양하지 못하고 이에 입절(立節)한 사실을 쓰고 그것이 가문에 근본하고 후손에게 보답이 미쳤다는 것도 아울러 써서 시종(始終)을 보인다. 恭人扶寧金氏, 文貞公、止浦先生坵后, 麗末忠臣郡事光叙七世孫, 僉正、贈都承旨直孫玄孫, 己卯名賢甕泉錫弘曾孫, 淸修齋、舍人瑞星孫, 縣監壽福女, 爲通德郞、桃谷處士咸豊李公瑜之配。公莊陵忠臣叅奉岸玄孫, 進士、浪谷億齡·(榮)子, 大司諫、竹谷先生長榮出後子。公於穆陵丁酉島夷再猘之日, 戰殉于扶安淸嶝之野。恭人同日被執, 亦不屈而殉。殉節雙成, 有若池州之圍, 趙公昂發夫妻, 嗚呼烈哉! 嗚呼壯哉! 以衣履合藏於扶安上西面桃花洞負午原, 視以爲墓, 過者式之。竊惟恭人所就, 固以天性貞毅, 亦見君子之刑于攸及。然推本而論, 所生所適, 皆名門法家, 文貞之風韻猶傳, 竹谷之謨訓現存, 平日之所擩染, 豈不能明取舍於臨難乎? 詩人賦碩人之賢, 猶歷稱族類之貴顯, 而况於恭人先懿之盛乎? 其可以無辭矣乎? 男弘詢, 進士; 弘誼, 通德郞; 弘源, 出後。女適叅奉李逈、進士宋後玉。弘詢男晥, 弘誼男時、㬇。餘不錄。今後麗彌繁, 至不可數。婦人善莫大於烈, 善之餘慶, 宜其然也。十世孫潤煥, 以余爲恭人同宗後人, 遣族姪陽範、周範, 請表墓之文, 其請也不以文, 則不以終辭, 乃旣書立節實事, 幷書其本乎世類, 報於後昆者, 以見始終云爾。 억영(億榮):원문은 '億齡'이다. 《국조문과방목(國朝文科榜目)》에 근거하여 '齡'을 '榮'으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출후자(出後子):다른 사람의 후사로 나간 아들이라는 뜻으로 형인 이억영의 양자로 나갔다. 조묘발(趙卯發) 공:원문은 '趙公昂發'이다. 《송사(宋史)》 〈충의열전(忠義列傳)〉에 근거하여 '昂'을 '卯'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남송이 멸망할 무렵인 1274년에 지주 통판(池州通判)을 지내고 있었는데 원(元)나라 군사가 양자강을 건너 침입하자 달아난 지주(知州)를 대신하여 성을 지키다가 항복을 권유받고 부인 옹씨(雍氏)와 함께 자신의 서재인 종용당(從容堂)에서 자살하였다. 《宋史 卷450 忠義列傳5》 시인이……일컬었는데:석인은 춘추 시대 위(衛)나라 장공(莊公)의 부인인 장강(莊姜)을 가리킨다. 족류의 현귀함을 일컬었다는 것은 《시경(詩經)》 〈위풍(衛風) 석인(碩人)〉 첫 장에서 "제나라 임금의 따님이요 위나라 임금의 아내이며, 태자의 누이이고 형나라 임금의 처제이며, 담나라 임금은 형부가 되신다네.[齊候之子 衛候之妻 東宮之妹 邢侯之姨 譚公維私]"라고 하여 장강의 친족이 누구인지 읊은 것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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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인 김씨 묘표 갑신년(1944) 孺人金氏墓表【甲申】 위(衛)나라의 시인은 장강(莊姜)의 현명함을 찬미하면서 "제(齊)나라 임금의 따님이요 위나라 임금의 아내이며, 태자의 누이이고 형(邢)나라 임금의 처제라네."라고 하였다. 저 시인은 작위가 높은 사람은 친속(親屬)도 오히려 칭송할 대상에 들어간다고 여긴 것이니, 하물며 그 친속이 도덕, 문장, 충의, 학행과 같은 천작(天爵)127)이 높은 어진 자에 해당하는 경우이겠는가.고창군(高敞郡) 고사방(古砂坊) 수랑동(水浪洞) 안산(案山) 갑좌(甲坐) 언덕에 안장된 유인 부안 김씨는 문정공(文貞公) 지포(止浦) 선생 구(坵)와 충경공(忠景公) 익복(益福)의 후손이며, 평해(平海) 황 이재(黃頤齋) 선생 윤석(胤錫)의 손자며느리이며, 수촌(壽村) 처사(處士) 일한(一漢)의 맏며느리이다. 명문가에서 태어나고 법도 있는 가문에 시집갔으니 안으로 받은 가르침과 밖으로 이룬 것이 진실로 자연히 보통과 차이가 있다. 단옹(檀翁) 수경(秀瓊)을 남편으로 삼고 회와(晦窩) 중섭(中燮)을 아들로 삼았으니 단옹이 덕을 숨기고 벼슬하지 않은 것과 회와가 집안일을 잘 맡아 다스리고 행실을 독실하게 한 것이 또한 어찌 내조(內助)에 힘입고 모의(母儀)가 이루어 준 것이 아니겠는가. 유인의 어짊을 더욱 알 수 있다.태어난 날은 정조(正祖) 임인년(1782, 정조6) 3월 20일이고, 3세조는 계열(啓烈), 수극(壽極), 인감(仁鑑)이며, 외조부는 생원(生員)인 화순(和順) 최강우(崔綱宇)이며, 졸(卒)한 날은 헌종(憲宗) 을사년(1845, 헌종11) 6월 23일이다. 아들은 바로 중섭이고 딸은 전의(全義) 이봉년(李鳳年)에게 시집갔다. 병택(炳宅)은 외손자이다.5세 적손(嫡孫)인 서구(瑞九)가 재종숙(再從叔) 건익(鍵翼)이 장차 표석(表石)을 세우려 하는 것 때문에 내가 유인의 동종(同宗)이라 하여 음기(陰記)을 부탁하는 한편 애초에 행적을 기록한 글이 없는 것을 부끄럽게 여겼다. 내가 말하기를, "문제없습니다. 옛말에 이르기를 '그 사람을 보지 못하면 그 벗을 본다.'라고 하였습니다. 지금 보건대 유인의 그 법도가 매우 가까우니128) 어찌 다만 옛말과 같을 뿐이겠습니까. 인가(人家)에서 으레 부덕(婦德)이 지극하였다는 등의 말을 기록하는데 또 어찌 견주어 논할 것이 있겠습니까. 이는 기록해 후세에 보여줄 만합니다."라고 하였다. 衛之詩人, 美莊姜之賢, 而曰: "齊侯子, 衛侯妻, 東宮妹, 邢侯姨。" 彼以爲爵位隆顯者, 親屬猶在所稱。况乎其屬在道德、文章、忠義、學行天爵尊之賢者乎?若高敞郡古砂坊水浪洞案山枕甲原所藏孺人扶安金氏, 文貞公、止浦先生坵, 忠景公益福之後, 平海黃頣齋先生胤錫之孫婦, 壽村處士一漢之冡婦。生乎名族, 入乎法門, 內而所受, 外而所成, 固自有異。以檀翁秀瓊爲夫, 晦窩中燮爲子, 檀翁之隱德不仕, 晦窩之克家篤行, 亦豈無內助之須、母儀之成? 其賢尤可知也。其生, 正祖壬寅三月二十日, 其三世, 啓烈、壽極、仁鑑, 外祖生員和順崔綱宇, 其卒, 憲宗乙巳六月二十三日, 其男卽中燮, 女適全義李鳳年, 炳宅, 其外孫。五世嫡孫瑞九, 以其再從叔鍵翼將樹表石, 謂余爲孺人同宗, 屬以記陰, 且以初無狀行文爲歉。余曰: "無傷也。古語云'不見其人, 見其友', 今見孺人之其則甚近, 豈但如古語已也? 而人家例狀婦德備至等語, 又何足比論哉? 是可以書之視後。" 천작(天爵):천연(天然)의 작위라는 뜻으로 도덕을 수양하여 사람들의 존경을 받기 때문에 천작이라고 한다. 《맹자(孟子)》 〈고자 상(告子上)〉에 "인의와 충신을 지니고 선을 좋아하여 게을리 하지 않는 것이 천작이고, 공경대부는 인작이다.[仁義忠信 樂善不倦 此天爵也 公卿大夫 此人爵也]"라고 하였다. 유인의……가까우니:《시경(詩經)》 〈빈풍(豳風) 벌가(伐柯)〉에 "도끼 자루를 벰이여, 도끼 자루를 벰이여. 그 법이 멀리 있지 않도다.[伐柯伐柯 其則不遠]"라고 하였는데, 본보기로 취할 수 있는 법칙, 기준 등이 가까이 있다는 뜻이다. 여기서는 유인에 대한 직접적인 기록은 없으나 유인의 훌륭한 가족과 자손을 보면 유인의 훌륭함을 자연히 알 수 있다는 뜻으로 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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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조비 유인 송씨 묘표 曾祖妣孺人宋氏墓表 부안군(扶安郡) 주산면(舟山面) 둔계리(遯溪里) 상천동(上泉洞) 임좌(壬坐) 언덕은 나의 증조비 유인 여산 송씨(礪山宋氏)의 장지로, 나의 증조고(曾祖考) 천태 부군(天台府君) 부안 김공 휘 석규(錫圭) 자 내삼(乃三)의 묘소 동쪽에서 20보 떨어진 곳에 따라서 장사 지낸 곳이다. 천태 부군은 높은 재주와 지극한 행실이 있었으나 불행히도 안연(顔淵)과 똑같은 수명을 누리고129) 돌아가셨으니 사람들이 슬퍼하며 애석해하였다.유인은 바야흐로 군자가 처자식에게 모범이 되는 교화를 입어 배필로서의 덕에 어긋남이 없었는데 갑자기 남편을 잃어 끝없는 애통함으로 마치 살고 싶지 않은 듯했다. 그러나 위로 시부모를 염려하여 애통한 심정을 견디며 나아가 위로하고 아래로는 자녀를 돌아보아 눈물을 머금고 길렀으니 남편의 유지를 헤아린 것이다. 이해에 시아버지가 세상을 떠나고 또 여섯 번의 상이 줄지어 나와 집안의 명운이 쇠락하고 남은 재산도 지가(支家)에서 차지하여 생계를 꾸릴 길이 없었다. 이에 유인이 추위에 떨고 굶주림에 허덕이는 가운데 빙옥(氷玉)과 같은 절개를 지켜 종사(宗事)를 계승하고 문호(門戶)를 세우니 수명이 팔순을 넘기자 손자와 증손들이 앞에 늘어설 만큼 많아졌다.아, 《서경(書經)》에 말하기를, "하늘의 도는 선한 사람에게 복을 내린다."130)라고 하였는데, 부인의 선으로는 열행(烈行)이 가장 크다. 유인은 이미 천서(天敘)를 따르고 인륜을 다하였으니 끝내 복을 얻는 것이 당연하다. 그러나 유인의 선이 어찌 보답을 바란 것이었겠는가. 다만 의(義)가 있음을 알았을 뿐이니, 이것이 열행이 되는 까닭이다.선대에 고려 호산군(壺山君) 유익(惟翊)이 있으니 이분이 비조(鼻祖)이고, 정렬공(貞烈公) 송례(松禮)가 현조(顯祖)이며, 본조 기묘명현(己卯名賢)인 도봉(道峰) 세정(世貞)이 12세조이다. 부친은 학생(學生) 현석(顯錫)이고 모친은 문화 유씨(文化柳氏)로 성환(星渙)의 따님이다. 순조(純祖) 경신년(1800, 순조즉위)에 태어났고, 고종(高宗) 기묘년(1879, 고종16) 12월 7일에 졸(卒)하였다. 천태 부군의 세계(世系)와 덕은 부군의 묘표에 있다.과거 유인이 시집올 때 70여 세인 조고(祖姑 남편의 조모)가 있었는데 봉양을 전담하는 책임을 맡았다. 조고가 파를 좋아하였는데 비록 한겨울이라도 파를 얻어131) 갖추어 올렸다. 매일 밤중이나 꼭두새벽에 반드시 일어나 육병(肉餠)과 탕(湯)을 마련해 올렸는데 아침마다 이 때문에 머리를 빗었다. 몸에 닿는 속옷을 무시로 세탁하면서도 난색을 보이는 일이 조금도 없었고 10년을 하루처럼 하니, 조고가 항상 말하기를, "이 아이는 나를 효성으로 섬긴다."라고 하였다. 이에 효부(孝婦)라는 칭찬을 다른 사람이 지적하지 못하였으니, 이는 또 기록할 만한 일이다.아, 충, 효, 열(烈)은 사람의 삼강(三綱)이라 우주를 지탱하고 일월(日月)을 비추니 한 가지도 얻기 어려운데 유인은 그 중 두 가지를 가졌다. 세상에 주자(朱子)의 뒤를 잇는 사람이 나와 《소학(小學)》을 엮는다면 유인의 사행(事行)이 어찌 뒤에 있겠는가. 이에 삼가 묘비의 뒤쪽에 드러내 써서 그렇게 될 날을 기다린다. 자손에 대한 기록 역시 천태 부군의 묘표에 있다. 유인이 돌아간 지 60년이 되는 날에 증손 택술이 삼가 짓는다. 【글이 완성된 뒤 14년이 지난 임진년(1952) 10월에 천태 부군의 묘소에 합장하였다.】 惟扶安郡舟山面遯溪里上泉洞負壬之原, 我曾祖妣孺人礪山宋氏之藏, 而從葬我曾祖考天台府君扶寧金公諱錫圭字乃三之墓東二十步者也。天台府君, 有高才至行, 不幸壽同顔淵而歿, 人感惜之。孺人方被刑于之化, 配德無違, 而遽喪所天, 慟霣罔極, 如不欲生。然上念舅姑, 忍痛進慰, 下顧子女, 含淚撫育, 惟夫子遺志是體。是歲, 皇舅背世, 又六喪繼出, 家道索然, 餘存爲支家所占, 資生無由。乃孺人守氷玉之節於凍餒之中, 以承宗事, 以樹門戶, 壽躋八旬, 而孫曾列前。嗚呼! 《書》曰: "天道福善。" 婦人善行, 烈爲最大。孺人旣順天叙, 而盡人倫, 則卒以獲福, 宜矣。然其爲善也, 豈望報乎? 只知有義而已, 此其所以爲烈也。其先有高麗壼山君惟翊, 是爲鼻祖。貞烈公松禮爲顯祖。本朝己卯名賢道峰世貞, 爲十二世祖。考學生顯錫。妣文化柳氏, 星渙女。生以純祖庚申, 卒以高宗己卯十二月七日。天台府君世德, 在其墓表。始, 孺人之于歸也, 有祖姑年七十餘, 任專養之責, 祖姑嗜蔥㵩, 雖隆冬, 亦護・(獲)蔥具進。每夜中或曉頭必起, 供肉餠湯獻之, 每朝爲之櫛髮。親身褻衣, 無時洗濯, 少無難色, 十年如一日。祖姑常曰: "是事我孝。" 於是乎孝婦之稱, 人無間然, 此又可書者也。嗚呼! 惟忠孝烈, 爲人三綱, 撑拄宇宙, 輝暎日月, 一猶難得, 而有其二焉。世有後朱子作, 編《小學》之書, 則孺人事行, 豈在後乎? 玆謹表書于阡碑之陰而俟之。子孫錄亦在天台府君之表。孺人下世周甲日, 曾孫澤述謹撰。【文成後十四年壬辰十月, 合窆于天台府君墓。】 안연(顔淵)과……누리고:안연은 32세에 요절하였다. 하늘의……내린다:《서경》 〈탕고(湯誥)〉에 보인다. 얻어:원문은 '護'이다. 문맥에 근거하여 '獲'으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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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비 유인 김씨 묘표 祖妣孺人金氏墓表 아, 나의 조비 유인 김씨는 춘추 94세가 되어 병진년(1916) 3월 13일에 졸(卒)하였다. 나의 선고(先考)가 7년 먼저 임종하여 내가 삼가 승중복(承重服)을 입었는데 때에 구애를 받아 예월(禮月)을 기다려 안장하지 못하고 신산(新山)을 겨우 마련해 성복(成服)하고서 부장(赴葬)132)하고 정읍군(井邑郡) 덕천면(德川面) 달천리(達川里)에 있는 조고(祖考) 우신재(又新齋) 부군(府君)의 묘소에 합장(合葬)하였다.아, 나의 조비의 품행으로도 죽어서 효자의 집상(執喪)을 받지 못하고 또 예로 장사 지내지도 못하였으니 애통하도다. 내가 선군(先君)의 평소 뜻을 대신 이루어 묘소 곁에서 3년 동안 여묘(廬墓)하고 상복을 벗은 뒤 7년째인 병인년(1926) 4월 13일에 같은 군 이평면(梨坪面) 한수리(漢水里) 뒤 건좌(乾坐) 언덕에 이장하였다.유인은 성품이 올곧고 전일하며 몸가짐은 단정하고 장중하여 시집가기 전부터 아름다운 명성이 있었다. 20세 때 나의 조고에게 시집왔는데 며느리로서, 아내로서 모두 알맞은 도리를 얻었다. 집이 가난하여 생계를 이을 수 없자 길쌈에 부지런하였는데 밤새도록 길쌈하느라 등불을 피워놓았고 그 불을 이용해 아침밥을 지었으니, 20여 년을 이렇게 하여 8섬지기 밭을 사서 가계(家計)가 조금 여유로워졌다. 그런데 어찌하여 하늘이 가엾게 여기지 않아 갑자기 남편 상을 당하였는가. 당시 나의 선고는 겨우 9세로 혈혈단신이었는데 집안의 기둥이 무너졌으니 오히려 무슨 말을 하겠는가. 애통한 심정이 간절하여 기절했다가 소생하였다. 그러나 유인 자신은 반함(飯含), 염(殮), 장례, 제사를 모두 예로써 치렀다. 남편의 유지를 잘 헤아려 더욱 근검하여 하인을 독촉해 힘써 농사짓게 하고 자신도 길쌈을 하니 재산이 날로 더욱 여유로워졌다. 맛있는 음식을 모두 갖추어 시어머니를 편안히 봉양하였으며, 스승을 맞이해 자식을 가르쳐 학문이 성취되어 이름이 드러났으니 옛날에 이른바 "선대의 뜻과 사업을 잘 계승한다."라는 것이 어찌 아버지에게만 그러한 것이겠는가.위로 선조의 제사를 받들고 시어머니를 섬기는 일부터 아래로 하인을 부리고 이웃과 사귀는 일까지 평소 경서나 역사서를 배운 일이 없는데도 자연히 절도에 맞았다. 안으로는 기름, 소금, 메주, 채소 등 사소한 물건부터 밖으로는 전토(田土)와 금곡(金穀) 등 크고 번잡한 것까지 또한 사령(使令)을 의지하지 않고 친히 그 수량을 다 헤아렸다. 이는 대개 뜻이 견고하고 힘이 안정되어 이미 수절(守節)하는 우뚝함이 있었고 집안을 보호하는 어려운 일을 해내었으며, 식견이 밝고 재주가 민첩하여 역시 일을 처리하는 법칙이 있었고 남을 응대하는 지혜가 있었다.아, 나의 조비는 처음에는 부지런하고 수고하여 가업을 일으키고 만년에는 또 정절(貞節)을 수립하여 위로는 조종(祖宗)이 길이 제향(祭享)을 받고 아래로는 자손이 그 은혜를 받았으니 조비의 공과 덕으로 이보다 큰 것이 없다. 시인의 "아, 잊지 못하겠네."133)라는 시구(詩句)가 어찌 왕가(王家)만 그러한 것이겠는가. 또 대저 사람은 삼강(三綱)이 있는데 열행(烈行)이 그중 하나를 차지한다. 유인의 열행이 인도(人道)를 극진히 하고 강상(綱常)을 부지할 수 있었으니 마땅히 일을 기록하는 자가 그 점을 써서 후세에 본보기를 전해야 하고, 비단 후손이 잊지 않는 것으로 그쳐서는 안 된다.세계(世系)는 영광(靈光)에서 나왔다. 고려조의 명신(名臣)인 문안공(文安公) 심언(審言)의 후손이고, 본조의 충신인 대호군(大護軍) 해(該)의 9세손이고, 효자(孝子) 통정대부(通政大夫) 택려(宅麗)의 따님이다. 모친은 함양 박씨(咸陽朴氏)로 근혁(根爀)의 따님이다. 태어난 날은 순조(純祖) 계미년(1823, 순조23) 12월 4일이다. 나의 조고인 부안 김공 휘 경순(景淳) 자 명헌(明憲)은 세계가 그 묘표에 갖추어져 있다.1남 낙진(洛進)은 학행이 있었고 유집(遺集)이 간행되었다. 3녀를 두었으니 장녀는 광산(光山) 김재호(金在浩)에게 시집갔고, 차녀는 의성(義城) 김귀재(金貴載)에게 시집갔는데 열행이 있었고, 계녀(季女)는 함안(咸安) 조기용(趙基鏞)에게 시집갔다. 내외 손자에 대한 기록도 역시 조고의 묘표에 상세하다.아, 유인의 성품과 행실은 진실로 장중하고 꿋꿋하고 굳세었으나134) 마음 씀씀이는 도리어 관대하고 화평하였으며 자애롭고 은혜로웠다. 이 때문에 종복이 잘못을 저지르면 비록 엄하게 꾸짖고 용서하지 않았으나 곧바로 부드러운 얼굴을 하고 이치로 깨우쳤다. 일상에서 먹고 입는 것은 비록 터럭만큼도 함부로 낭비하지 않았으나 가난한 집안이나 곤궁한 이웃은 모두 은혜에 감격하였으니 이에 인덕(仁德)을 볼 수 있고, 수명이 90여 세에 이른 것은 성인의 말에서 징험할 수 있다.135)손주를 지극히 사랑하였는데 나에게는 더욱 그러하였다. 어렸을 때는 성취를 기대하고 장성해서는 편안하고 왕성하기를 바라 모든 말과 염려가 지극하지 않은 바가 없었다. 그러나 나는 형편없어 학문은 몸을 수양하지 못하고 가업은 남겨 주신 것을 지키지 못해 지극한 은혜를 저버렸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대신 봉양할 때는 맛있는 음식을 조금밖에 올리지 못하였고 땅을 골라 이장할 때는 계획이 엉성하였으니 더욱 매우 애통하고 한스러웠다. 나의 나이가 60에 가까워 질병이 점점 심해져서 하루아침에 죽어 조비의 평소 사행(事行)과 함께 전해지지 않고 민멸될까 깊이 두려웠다. 이 때문에 일찍이 보고 들은 것을 드러내 써서 묘비 뒤쪽에 갖추어 새긴다. 기묘년(1939) 계동(季冬) 유인의 생신에 손자 택술이 삼가 짓는다. 嗚呼! 我祖妣孺人金氏, 春秋九十有四, 而卒於丙辰之三月十三日。以我先考先七年而歿, 不肖祗服承重, 以時拘, 不能待禮月窆, 新山僅經, 成服赴葬, 合封於井邑郡德川面達川里祖考又新齋府君之墓。嗚呼! 我祖妣之行治也, 而沒不得孝子之執喪, 又不得葬之以禮, 痛矣哉! 不肖替遂先君素志, 廬墓側三年, 服闋後七年丙寅四月十三日, 移葬于同郡梨坪面漢水里後坐乾原。孺人稟性貞一, 持身端莊, 自在家時, 有令譽。年二十, 歸我祖考, 爲婦爲妻, 咸得其道。家貧無以爲生, 則勤於紡績, 績燈達夜, 因其火朝炊者, 餘二十年, 買得八石種落, 調度稍裕, 夫何遭天不吊, 遽當晝哭? 時我先考甫九歲, 孑然單矣, 大厦棟摧, 尙何言哉? 痛崩迫切, 絶而復甦。己則含歛葬祭俱以禮。克體夫子遺志, 益復勤儉, 課僮力穡, 身且執績, 業日加裕, 甘旨畢備, 尊姑安養, 延師敎子, 成學彰聞, 古所謂善繼述者, 豈獨於父然也? 上自奉先事姑, 下至御僕交隣, 素無資書史, 而能自中節, 內自油塩豉菜之微末, 外至土田金穀之巨煩, 亦不待使令, 親悉其數, 蓋志堅力定, 旣有守節之卓, 保家之難; 識明才敏, 亦有處事之則, 應物之智也。嗚呼! 我祖妣始而勤勞起業, 晩又樹立貞節, 上而祖宗永其享, 下而子孫受其賜, 惟功與德, 莫與之京, 詩人之於戲不忘, 豈惟王家然也? 且夫人有三綱, 烈居其一, 孺人之烈, 能盡人道扶綱常, 則宜有秉筆者書其事, 垂法來世, 不但後承之不忘已也。系出靈光。麗朝名臣文安公審言後, 本朝忠臣大護軍該九世孫, 孝子通政宅麗女。妣咸陽朴氏, 根爀女。其生純祖癸未十二月四日。我祖考扶寧金公諱景淳字明憲, 世系具在其墓表。一男洛進, 有學行, 遺集刋行。三女: 長適光山金在浩, 次適義城金貴載, 有烈行, 季適咸安趙琪鏞。內外孫錄, 亦詳祖考墓表。嗚呼! 孺人性行, 固莊毅堅拙, 乃其用心, 却寬和慈惠, 是以家衆有過, 雖嚴訶不貸, 而旋卽解顔, 喩之以理。日用喫著, 雖毫不妄費, 而貧族窮隣, 莫不懷恩, 斯可以見仁德, 而其壽至耄期者, 有徵於聖言也夫! 愛孫切至, 於不肖尤焉。幼而期望成就, 長而冀祝安旺, 言言念念, 無所不至, 而不肖無狀, 學不成身, 業未守遺, 靠負至恩。父沒替養, 甘旨薄略, 擇地緬襄, 局面低拙, 尤極痛恨。年近六旬, 疾病侵尋, 深恐一朝溘然, 幷與平日事行, 而泯沒無傳。故玆表書所嘗見聞者, 用備刻于墓碑之陰。己卯季冬孺人生辰, 孫澤述謹撰。 부장(赴葬):가난이나 다른 사정으로 빨리 장사 지내는 것이다. 《예기(禮記)》 〈상복소기(喪服小記)〉의 소(疏)에 보인다. 아 잊지 못하겠네:시인이 문왕(文王)과 무왕(武王)의 은혜를 잊지 못하여 "아, 전왕을 잊지 못하겠네.[於乎 前王不忘]"라고 읊은 시에서 따온 말이다. 《詩經 周頌 烈文》 굳세었으나:원문은 '堅拙'이다. 문맥에 근거할 때 '拙'은 오류가 있는 듯하다. '拙'은 원문의 문제로 번역하지 않았다. 성인의……있다:《논어》 〈옹야(雍也)〉에 "어진 자는 장수한다.[仁者壽]"라고 한 공자의 말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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