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소련에게 답함 신유년(1921) 答金巢蓮 辛酉 이전 편지에서 물으신 말씀은 내가 감히 선사의 가르침에 두 마음을 둔 것이 아니라, 다만 의심이 축적되어서 부득불 생각하고 묻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대개 만일 기질성(氣質性) 세 글자를 기운성(氣運性)이라고 간주한다면 누가 감히 의심하겠습니까? 이제 기질성 가운데 성(性)이라는 한 글자를 기운성이라고 간주하기 때문에 이해하지 못한 바가 있습니다. 이것은 무엇 때문이겠습니까?기질성 세 글자를 기운성으로 간주하면, 성(性)과 기(氣)가 각각 한 글자씩 점유하여 성은 이치(理致)의 실자(實字)가 되니, 이는 기질에 구애되는 이치가 됩니다. 만일 기질성의 성의 한 글자로써 기운성으로 간주한다면, 성과 기가 한 글자로 합성되어 성은 자음의 허자(虛字)에 불과하게 되니, 이는 기질의 기운을 일컫는 것이 됩니다. 실리(實理)와 사법(詞法)에 구해보아도 온당치 못한 바가 있는 듯합니다. 이제 보내온 편지를 보니 기운성이 세 글자를 해석한 것인지, 한 글자를 해석한 것인지, 분간하지 않고 일괄적으로 기의 측면에서 말한 것으로 해당시켰으니, 아마도 간재선생의 뜻을 살피지 못한 듯합니다. 만약에 기의 측면에 나아가 말한 것을 가지고 기운성이라고 일컫는다면, 그 말한 것이 어찌 리가 아니겠습니까? 이렇게 되면 도리어 기질에 구애되는 리라는 설이 됩니다. 어찌 선사가 침묵하여 리를 말하지 않는 본뜻이겠습니까? 만약 또 이와 같다면 종전에 설한바, 기질성 세 글자도 무엇인들 기의 측면에 나아가 말하지 않는 것이 있건대, 따로 기운성이라는 제목을 세워서 사람을 불러 일깨우려하겠습니까? 부디 자세히 헤아려서 교시해 주시기 바랍니다.노주(老洲)181)는 천명지성(天命之性)과 기질지성(氣質之性) 두 가지 성을 체일(體一)182)과 용수(用殊)183)로 나누었습니다. 체일은 이미 리의 체일인즉, 용수도 유독 리의 용수가 아니겠는지요. 간재선생 문하에서 기질성의 성이라는 글자를 기운성이라고 간주한 것은 곧 사람들이 리라는 글자를 겸대(兼帶)하여 볼까 꺼려하기 때문이 아니겠는지요. 여기에서 의심스럽다고 말하는 것은 또한 유사하지 않는 듯합니다. 보낸 편지에서 "리가 없는 기는 애매모호한 어법이고, 사문의 본의도 아니다"라고 말하지 않았으니 만약 이와 같다면, 천하에 어찌 리가 없는 와석(瓦石)이 있겠으며, 리가 없는 분양(糞壤)이 있겠습니까?184) 리는 어디에도 있지만, 와석과 분양을 가리켜 리라 이름 한다면, 또한 어찌 올바른 말이겠습니까? 보내온 편지에서 "이 성(性)이 악(惡)에 어지럽혀지면 마땅히 기질성이라고 말해야 하고, 이 물이 진흙에 탁해지면 마땅히 진흙물이다"라고 말하였습니다. 이 두 구절은 정히 나의 설과 같습니다. 만약 성을 기운이라고 해석하면, 다만 마땅히 기질이라고 말해야지, 기질성이라고 말해서는 안 되고, 다만 마땅히 진흙이라고 말해야지, 진흙을 진흙물이라고 말해서는 안 됩니다. 본래 맑은 물이라고 일컬으면 안 된다고 하는 것은 진실로 노주의 설과 같습니다. 만일 이 또한 "원초의 물이다" 라고 말한다면 어찌 이치에 해가 되겠습니까? 만약 혼탁하기 때문에 침묵하여 원초의 물이라고 말하지 않으면 이 물은 과연 샘 가운데의 물이 아니고 중간에 사람이 만든 물이라는 뜻입니까? 그러므로 나의 견해로는 가만히 생각하기를 기질성이 비록 잡박하지만 성은 성이고 또 진흙물이 비록 혼탁하지만 물은 물입니다.노주가 논한 기질성은 기의 측면에서 설한 것이라는 것을 누가 감히 그렇지 않다고 말하겠습니까? 다만 그 결론은 요컨대 기라고 말하지 않고 요컨대 성이라고 말하였은즉, 그 이름을 세우고 조목을 결정하는 것이 리에 있습니까? 기에 있습니까? 했을 때, 리에 있는 것입니다. 기질성의 경계를 말하자면 마땅히 기라고 말해야 하고, 본연성의 경계를 말하자면 마땅히 리라고 해야 함을, 내가 비록 자질과 재주가 둔하지만 어찌 모르겠습니까? 다만 이미 그 성이 되는 바는 기질성도 성이 되고, 본연성도 성이 되는 것은 같기 때문에, 진실로 그 기를 겸하여 가리켰다고 하여 성이라는 명칭을 불허해서는 안 됩니다. 선사의 가르침대로 한다면, 아마도 다만 기질성과 본연성이라는 경계의 구별만 주장하고, 그 성이 동일하여 하나라는 것을 빠뜨리는 혐의가 없지 않을 듯합니다. 견우인성(犬牛人性)의 성을 《주자대전》에서는 비록 기질성이라고 간주했지만,185) 《주자집주》의 인의예지(仁義禮智)의 순수함은, 사람과 물(物)이 다르다는 글로써 보자면, 이는 기를 따라 달리 나타나는 본연성으로, 선악을 겸한 불성(不性)의 성186)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외람되게 이 견우인성의 성(性)이라는 글자는 기질성으로 보아도 맞고 본연성이라 간주해도 옳다고 생각합니다.지금 이를 인용하여 사문에서 지척한 것이 악에 물들여진 성이라 논한다면 그것은 층위가 다른 듯하니, 이 내용은 마땅히 따로 논해야 할 것입니다. 대저 리와 기를 밝히는 것을 귀하게 여기는 것은 어찌 식견을 증장하고 실천에 보탬이 되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매번 근일에 이기(理氣)를 설파하는 자들의 체신과 처사를 보면, 반드시 나머지 사람들보다 더 낫지 못하고, 혹은 미치지도 못하니 참으로 괴이합니다. 어찌 성인이 이른바 "덕이 있는 사람은 반드시 말을 잘하지만, 말을 잘한다고 꼭 덕이 있는 사람은 아니다"187)라는 것이 이 경우가 아니겠습니까? 나는 이런 사람들의 말을 들으면 가만히 그들의 전철을 밟고 싶지 않습니다. 매번 사람들과 명리를 강론하고 변명하는 즈음에는 나의 마음을 돌이켜 돌아보고 전전긍긍하는 일이 있는 것입니다.유자(儒者)의 강변(講辨)은 시대의 폐단을 구하고 세상의 화를 그쳐 힘쓰게 하는데 있습니다. 그런데 성과 심을 논하면서 심하게 다투는 것이 근세 유문(儒門)의 폐단이 아니겠습니까? 풍속은 금수와 같게 되어서 윤리강상(倫理綱常)이 끊어지고 파괴된 것이 금일 천하의 화란이 아니겠습니까? 오늘날의 계책으로는 절대로 명목(名目) 사이의 부질없는 쟁변에 힘을 쏟아서 오래 쌓인 시대의 폐단을 조장해서는 안 됩니다. 바로 마땅히 윤리강상 위에 급급하게 뜻을 쏟아서, 크게 일을 처리할 방도를 세워 절반이라도 세상의 화란을 그치게 해야 합니다. 이 뜻을 우리들이 알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대는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前書之詢, 非敢有貳於師訓, 但以疑之蓄也, 故不容不思問.蓋如以氣質性三字作氣運性,則孰敢疑之.今以氣質性性之一字, 作氣運性, 故有所未達.何也.以氣質性三字作氣運性, 則性與氣, 各占一字, 而性爲理致之實字, 是謂氣質所拘之理致也.以氣質性性之一字, 作氣運性, 則性與氣, 合成一字, 而性不過爲字音之虛字, 是謂氣質之氣運也.求之實理與詞法, 恐有所未䌥也.今承來喩,不分氣運性是解三字與一字, 槩以就氣上言者當之, 似未察先生之旨也.若以就氣上言者, 謂祉氣運性.則其所言者, 豈非理乎.是則還是氣質所拘之理之說也.豈先生禁不言理之本意乎.且若如此, 則從前所說氣質性三字, 孰有不就氣上言者, 另立氣運性題目, 欲以喚醒人乎,幸細商而更敎也.老洲以天命氣質兩性, 分體一與用殊.體一旣是理之體一, 則用殊獨非理之用殊乎.師門之以氣質性性字, 作氣運性者, 非正恐人帶着理字看乎, 此之謂疑.若不相似然者.來喩, 非謂無理之氣是混淪語法, 又非師門本意, 若如此則天下又安有無理之瓦石, 無理之糞壤乎.然指瓦石糞壤而名之曰理, 則豈成說乎.來喩此性爲惡所汨, 則當曰氣質性, 此水爲況所混, 則當曰沙泥水.二句正鄙說也.若必訓性以氣運, 則只當曰氣質, 不當曰氣質性, 只當曰沙泥, 不當曰沙泥水也.謂之本淸之水則不可者, 誠如老洲說.如曰此亦, 原初之水, 則又何害理.苟以混濁之故, 禁不言原初之水.則此水果非泉中之水, 乃中間人造之水耶.故淺見竊以爲氣質性雖雜, 而性則性爾, 沙泥水雖, 混而水則水爾.老洲之論氣質性, 就氣上說去者, 孰敢曰不然.但其決案, 不曰要之是氣, 而曰要之是性, 則其所以立名定目者, 在理乎在氣乎, 言氣質性地頭, 當曰氣.言本然性地頭, 當曰理.鄙雖鈍根, 亦豈不知.但旣曰其所以爲性者,一則固未嘗以其兼指氣而不許性之名也.如師訓, 則恐不無但主地頭之別, 而遺却其性一之嫌也.犬牛人性之性, 大全雖作氣質性, 以集註仁義禮智之粹然, 人與物異者觀之, 是隨氣異見之本然性, 非兼善惡之不性之性也.故妄以爲此性字, 做氣質性亦得, 做本然性亦得.今引此以論師門所指爲惡所汨之性, 似非其倫, 此則又當別論也.夫所貴乎明理氣者, 豈非欲長識見而資踐履乎.然而每見近日能說理氣者之行已處事, 未必有勝於餘人, 而或不及爲, 絶可怪也.豈聖人所謂有言者不必有德者此耶.僕見此等人, 心竊恥之, 不欲蹈其餘轍.每與人講辨名理之際, 反顧于己心, 有所兢兢也.儒者之講辨, 務在救時之獘.而息世之禍,性鬪心戰飛失揮戟者, 非近世儒門之獘乎.禽風獸俗, 絶綱破常者, 非今日天下之禍乎.爲今之計, 絶不可肆力於名目間閒爭辨, 以助積久之時獘.正宜汲汲注意於倫綱上大理會,息得一半分世禍也.此意吾輩不可以不知也.高明以爲如何. 노주(老洲) 오희상(吳熙常, 1763~1833)이다. 인물성동이론에 있어서는 인(人)과 물(物)은 근본적으로 이(理)가 같을 뿐만 아니라 신(神)도 동일하다고 전제하고, 그 동일하지 않게 나타나는 이유는 형기(形氣) 때문이라 하여 호론의 인물성이설(人物性異說)을 반대하고, 낙론의 인물성동설(人物性同說)을 일원분수(一原分殊)로 설명했다. 체일(體一) 본체가 하나라는 말이다. 용수(用殊) 작용이 다르다는 말이다. 천하에……있겠는가 와석분양(瓦石糞壤)은 《장자(莊子)》 지북유(知北遊)에서 동곽자가, "이른바 도(道)란 어디에 있느냐?고 묻자, 장자는 없는 데가 없다고 하면서, 땅강아지나 개미에도 있고, 피에도 있고, 기와나 벽돌에도 있고, 똥이나 오줌에도있다네.〔東郭子問於莊子曰, 所謂道,惡乎在? 莊子曰, 無所不在. 東郭子曰, 期而後可. 莊子曰, 在螻蟻. 曰,何其下邪?曰,在稊稗. 曰,何其愈下邪?曰, 在瓦甓. 曰, 何其愈甚邪?曰, 在屎溺.〕"라고 하였다. 견우인성(犬牛人性)……간주했지만 《맹자집주(孟子集註)》 〈고자 상(告子上)〉의 '생지위성장(生之謂性章)' 가운데 '사람과 사물의 성에 차별이 없다'는 고자의 논리를 반박하여 맹자가 말한 "그렇다면 개의 성이 소의 성과 같으며 소의 성이 사람의 성과 같은가?〔然則犬之性, 猶牛之性, 牛之性, 猶人之性與?〕"라고 한 대목에 주자의 주(註)는 "맹자가 또 말하기를 '만약 과연 이와 같다면 개와 소와 사람이 모두 지각이 있고 능히 운동을 하니 그 성이 다를 것이 없다.'고 하니, 이에 고자가 스스로 그 말이 그른 것을 알고 능히 대답하지 못하였다.〔孟子又言, 若果如此, 則犬牛與人, 皆有知覺, 皆能運動, 其性皆無以異矣. 於是告子自知其說之非, 而不能對也.〕"라고 하였다. 선악을 겸한 불성(不性)의 성 기질지성 (氣質之性)이다. 이는 선천적으로 타고난 인간 본래의 성품을 본연지성 또는 천지지성(天地之性)이라고 했을 때, 이에 대하여 후천적으로 형성되는 성품을 말한다. 장재((張載,1020~1077)는 저서 《정몽(正蒙)》 〈성명(誠明)〉편에서 "형체가 있은 뒤에 기질의 성이 있으니, 이를 잘 회복하면 천지의 성이 그대로 보존된다[形而後有氣質之性,善反之則天地之性存焉.]"라고 하였다. 즉,'기'는 궁극적인 실재인 '태허'로 정의되며 기가 양의 영향을 받으면 표면으로 떠올라 그 기운을 퍼뜨리며, 음의 요소가 강하면 기는 침잠하여 물질세계의 구체적인 것들을 응축·형성한다고 말했다. 덕이……아니다 《논어》 헌문(憲問)에 "덕을 소유한 사람은 반드시 이에 합당한 말을 하게 마련이지만, 그럴듯한 말을 한다고 해서 그 사람에게 꼭 덕이 있다고는 말할 수 없다.〔有德者, 必有言, 有言者, 不必有德.〕" 라는 공자의 말이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