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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극명에게 답함 계해년(1923) 答楊克明 癸亥 오늘 동짓날 그대의 편지를 받고 학업과 밝은 덕이 아울러 빛나고 분수에 따라 깊이 독서하시어 여행 중에도 조금도 느슨해지지 않음을 알고서 나의 마음에 족히 위로가 되었습니다. 또 나아가 "계구(戒懼)하는 것이 부족하고 작은 사특함을 제거하기 어려워 날로 허물이 쌓인다."라고 근심하시었는데 그것이 곧 공자가 말한 극기(克己)이고, 맹자가 말한 구방심(求放心)입니다. 그것을 일관되게 꿰뚫으면 우리는 능히 일을 마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 벗은 간절히 그것을 근심하시니 스스로 기약한 제이등인을 범치 않으려는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한 것을 듣고 기뻐서 거의 잠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또 나를 쫓아 절차탁마하겠다는데 이르러서는 구익(求益)을 급히 하여 먼저 외(隗)로부터 시작한다는37) 뜻을 알 수 있습니다. 돌아보면 비록 내 몸이 미치지 못하지만 어찌 감히 끝내 침묵하여 그대의 은근한 뜻을 저버리겠습니까? 오호라! 기(己)는 사사로움입니다. 한번 사사로움이 행해지면 억만의 선행이 사라지고 그것을 몸에 두면 몸이 망하고, 가정에 두면 가정이 망하고, 국가에 두면 국가가 망하고, 천하에 두면 천하가 망하니 어찌 두렵지 않겠습니까? 아성인 안자(顔子)께서 일삼은 것이고 정자(程子)께서 경계하신 것으로 그와 같이 명백한데도 저 어두운 이들은 일찍이 알려고 하지 않습니다. 달게 그 욕망을 따르는 자들은 그만이라 말할 것도 없거니와 간간이 사공(事功)에 뜻을 둔 자들도 가정, 국가, 천하에 급급하여 예(禮)가 아닌데 움직이고, 의(義)가 아닌데 일삼는 것을 걱정할 겨를이 없습니다. 비록 요행히 일을 이루고 공(功)이 이루어진다 하더라도 자신의 진실한 덕을 잃고 성현의 법문(法門)을 잃은 것이니 도리어 큰 일이 아니겠습니까? 요컨대 동중서(董仲舒)가 이른바 "그 의만을 바르게 행하고 그 이익은 꾀하지 않는다. 그 도만 밝히고 그 공은 계산하지 않는다."38)라는 두 마디가 족히 최고의 목표가 될 수 있으니 이것이 극기의 극치가 아니겠습니까? 공자께서는 "안회(顔回)는 그 마음에 삼 개월 동안 인(仁)을 어김이 없다."라고 말씀하셨는데, 삼 개월 이후에는 때때로 인을 어기는 것을 면치 못한 즉 이는 마음을 놓친 것입니다. 이를지나 더 나아갔다면 변화해 성인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리하여 맹자께서는 "학문의 도는 다름이 아니라 그 놓친 마음을 구할 따름이다."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사람들은 모두 방일자자(放逸自恣)한 것이 방심(放心)임을 알지만, 마음이 조금이라도 불합리(不合理)한 것이 방심이라는 것은 알지 못합니다. 그렇다면 그것을 구하는 도는 마땅히 어떠해야 하겠습니까? 기(記)에는 구용(九容)39)이 있고 어(語)에는 구사(九思)40)가 있습니다. 구용을 갖추어 불면이중(不勉而中)에 이르고, 구사를 갖추어 불사이득(不思而得)에41) 이른다면 그것이 곧 구방심(求放心)의 극치가 아니겠습니까? 부디 도(道)와 의(義)에 힘쓴다는 동중서의 훈계와 구용(九容), 구사(九思)의 방도에 뜻을 더한다면 전날의 근심이 족히 근심이 되지 못할 것입니다. 비록 그러하나 이는 모두 생각을 분별하고 행동을 독실하게 하는 일이니, 이에 앞서 박학심문(博學審問)의 공부가 있습니다. 이는 우리 벗처럼 천분이 약간 노둔한 사람으로서는 결코 빠뜨려서는 안 됩니다. 편지 중 "가난하여 유학할 수 없는 이 상재(傷哉)의 탄식42)은 어찌하겠습니까?"에 이르러서는 천고지사의 눈물을 떨구게 합니다. 그러나 또한 천명이 있으니 분수 밖에서 구해서는 안 됩니다. 옛사람들이 "다만 자신이 알고 있는 것에서 힘써 행한다면 일이 절반은 넘을 것이다."라고 하였고, 또 "총명예지(聰明睿知)는 모두 경(敬)으로부터 나온다."43)라고 했으니 이는 모두 우리 벗의 분수에 들어맞아서 수용해야할 훈계인데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나는 나이 40에 성취도 없이 또 세모를 맞이하여 다만 형주(荊州)자사 도간(陶侃)의 "살아서는 무익하고 죽어서는 알려짐이 없다."라는 한 구절을 쓸쓸히 읊을 뿐입니다. 그러나 이 몸을 세간에 남겨두어 후진들에게 전거(前車)의 거울이 될 수 있다면 또한 무익하지만은 않을 것입니다. 卽承南至日惠函, 知學體有相, 與陽德幷昭, 隨分劇讀, 不以旅遊而少弛, 已足以慰相愛者心.又進而憂戒懼之未實, 隱慝之難除, 尤悔之日積, 此正孔子所謂克己, 孟子所謂求放心.透此一關, 吾人之能事畢矣.吾友切切然惟是之憂, 其不犯第二等人自期者斷斷矣.聞此而喜, 幾乎不寐.至於欲從淺陋而淬礪之, 則亦可見急於求益, 先從隗始之意也.顧雖躬之不逮, 安敢終於噤嘿以孤勤意乎? 嗚呼! 己者私也.一私之行, 億萬衆亡矣, 在身亡身, 在家亡家, 在國亡國, 在天下亡天下, 豈不畏哉? 顔聖之所事, 程子之所箴, 若是其明切, 而彼昏狂之曾不念知.而甘循其慾者, 已矣不足道, 間有有志事功者, 急於家國天下, 不暇恤於一動之非禮.一事之不義, 雖其幸而事成而功立, 其亡己之實德, 亡聖賢之法門, 則顧不大歟? 要之董子所謂, 正其誼不謀其利, 明其道不計其功兩語, 足以爲究竟法, 此豈非克已之極致乎? 孔子曰, 回也其心三月不違仁, 三月之後, 不免有時乎違仁, 卽此是心之放也.過此以往, 乃化之之聖也.故孟子曰學問之道無他, 求其放心而已.人皆知放逸自恣之爲放心, 而不知心之少不合理者, 卽是放也, 求之之道, 當如何? 記有之曰九容, 語有之曰九思, 九容而至於不勉而中, 九思而至於不思而得, 則此豈非求放心之極致乎? 幸於道誼之訓, 二九之方, 加之意焉, 則向之所憂者, 不足憂矣.雖然此皆思辨行篤之事, 前此有博學審問工夫.而如吾友之天分稍魯者, 最不可闕.其於貧無以遊學, 何此傷哉之歎? 所以墮千古志士之淚也.然亦有命焉, 不可分外求之.古人云但於己知處, 力行之, 則思過半矣, 又曰聰明睿智.皆由敬出, 此又爲吾友分上適中受用之訓也, 如何如何? 澤述四十無成, 又此歲暮, 怛然而傷心, 只誦陶荊州生無益死無聞之句耳.然留此物於世間, 作後進前車之鑑, 則亦不爲無益也耶. 외(隗)로부터 시작한다 선종외시(先從隗始)의 의미이다. 《史記 卷34 燕召公世家》 그 의만을……않는다 동중서는 천인책(天人策)에서 "대개 인인(仁人)은 그 의리를 바르게 하고 이익은 도모하지 않으며, 그 도를 밝히고 그 공은 생각지 않는다.[正其誼不謀其利 明其道不計其功]" 《漢書 卷56 董仲舒傳》 구용(九容) 군자가 수신하는 아홉 가지 몸가짐으로 "발은 무겁게, 손은 공손하게, 눈은 바르게, 입은 신중하게, 말소리는 고요하게, 머리는 똑바르게, 숨소리는 고르게, 설 때는 의젓하게, 낯빛은 단정하게 한다.[足容重 手容恭 目容端 口容止 聲容靜 頭容直 氣容肅 立容德 色容莊]" 《禮記 玉藻》 구사(九思) 군자가 생각하는 아홉 가지로 "볼 때는 밝게 보기를 생각하고, 들을 때는 밝게 듣기를 생각하고, 얼굴빛은 온화하기를 생각하고, 용모는 공손하기를 생각하고, 말할 때는 충성되기를 생각하고, 일할 때는 집중하기를 생각하고, 의심날 때는 묻기를 생각하고, 분노할 때는 어려움을 생각하고, 얻을 것을 보고서는 의리를 생각한다.[視思明, 聽思聰, 色思溫, 貌思恭, 言思忠, 事思敬, 疑思問, 忿思難, 見得思義.]" 《논어》 〈계씨(季氏)〉 불면이중(不勉而中), 불사이득(不思而得) "성(誠)의 경지에 이르면 억지로 힘을 쓰지 않아도 과불급(過不及)이 없고, 굳이 생각을 하지 않아도 터득해서 자연히 도에 합치되는데, 이런 분이 바로 성인이다.〔誠者 不勉而中 不思而得 從容中道 聖人也〕" 《중용장구》 〈제20장〉 상재(傷哉)의 탄식 "가슴 아프구나! 살아서는 봉양도 제대로 못했고, 죽어서는 예를 갖추지도 못하였네.〔傷哉貧也 生無以爲養 死無以爲禮也〕" 《예기》 〈단궁 하(檀弓下)〉에 나오는 말로 가난을 매우 안타까워하며 슬퍼한다는 뜻이다 총명예지(聰明睿知)……나온다 "총명예지가 모두 이 공경으로 말미암아 나오니, 이로써 하늘을 섬기고 상제에 제향하는 것이다.[聰明睿知皆由是出, 以此事天饗帝.]" 《논어집주》 〈헌문(憲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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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극명에게 답함 경오년(1930) 答楊克明 庚午 그리워하던 차에 받은 편지 한통은 백붕(百朋)도 어찌 이보다 값지다고 하겠습니까? 다만 "물음이 있었는데 답이 없으니 아마도 저를 버리셨네요?"라는 말에 대해서는 제가 저버린 것이 부끄럽고 무거워 천금 또한 가볍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옛 상자를 열어보니 과연 봄에 온 편지가 있었습니다. 서신 가운데 나를 일깨우는 말이 있어서 곧바로 답장을 썼을 터인데, 지금 무슨 말을 썼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 것으로 보아 아마도 답장을 하지 않았는지 모르겠습니다.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망망하여 답장의 유무를 뚜렷이 기억하지 못하겠습니다. 이렇게 타고난 자질이 혼약하여 50이 되기도 전에 정신이 막히고 혼미함이 이와 같습니다. 그러니 가련히 여겨 용서해주시고 노여워 마십시오. 비록 그러하나 나의 어두움은 자질의 병이지 몸의 병이 아닙니다. 그러니 마땅히 스스로 다스려야 하는데, 다스리는 것 또한 쉽지 않습니다. 그대가 말씀하신 병은 자세히 헤아려보니 곧 몸이 받은 절실한 병폐로 다스리지 않으면 낫지 않고, 약을 쓰지 않으면 다스릴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다스림은 심히 어려운 것이 아니고 다만 급히 도모하는 것의 여하에 달려있습니다. 통쾌하게 보고 통쾌한 말을 들어서 제거하는 것도 한 가지 방법입니다. 그대가 나에게 오(吳)객, 태자(太子)의 고사44)를 요구한 것도 이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나 나에게 어찌 〈7계(七啓)〉45)의 수단이 있겠습니까? 그만두지 않겠다면 한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나는 일찍이 금강산을 노닐었는데 비로봉(毗盧峯)에 올라서 창해를 굽어보니 마치 작은 연못 같았고, 저 열도(列島)에 웅거해서 각자 주인 노릇하는 이들은 작고도 작아보였습니다. 구룡폭포를 보니 천장길이의 흰 비단에 만곡(萬斛)의 진주인 양, 멀리서 바라보니 눈을 놀라게 하였고 가까이서 바라보니 정신이 혼미하여, 진실로 천하의 장관이었고 평생의 통쾌한 일이었습니다. 그리하여 최칠칠(崔七七 최북)46)의 광우(狂愚)함을 비웃었으나 또한 그 절속(絶俗)함을 찬탄하였습니다. 또 정양사(正陽寺)에 오르니 만이천봉이 모두 반쯤 얼굴을 노출하여 운하가 걷히고 펼쳐지는 가운데 출몰하였습니다. 아침저녁의 변화가 황홀하여 기이한 형상을 형용하기 어려웠는데, 우암 송시열의 "산과 구름이 함께 흰색이라, 구름인가 산인가 구분하기 어렵더니. 구름은 돌아가고 산만 우뚝하니, 일만이천 봉우리로다."라는 시가 거의 잘 비유했다 할 수 있겠습니다. 산을 떠나 멀리서 전체를 조망하니 하얗기는 한겨울의 눈을 뒤집어쓴 것 같았고, 뾰족하기는 연꽃이 물위에 솟은 것 같아서 깨끗하고 맑고 상쾌하여 반점의 티끌도 보이지 않아 사람의 심신(心神)을 깨끗하게 씻어줌이 무릇 인간세상의 슬픔과 번뇌를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일시에 씻어 내렸습니다. 고질병이 든 자가 금강산을 맞이한다면 그 고질병이 반드시 떠날 것입니다. 이것은 내가 실제로 겪은 일이라 오객(吳客)이 광릉의 파도를 가지고 비유를 설파한 것과는 다르니 그대도 그럴 뜻이 없는지요? 발과 눈이 이르는 것을 갑자기 실행하기 어렵다면 먼저 마음으로 그 청쾌한 기상을 상상하여 그대의 가슴 사이로 흘려보낸다면, 아마도 신기(神氣)가 평안해짐을 느낄 것이니 무익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대의 견해는 어떤지 알지 못하겠습니다. 懸念頭一書, 百朋何足多也.但有問無答遐棄等語, 愧負之重, 又千金反輕也.發視舊筴, 果有殷春書.而語多警發, 想必隨卽修謝, 而今不記將何語奉答, 則亦無有乎爾否.追想茫茫, 莫辨有無, 生稟昏弱, 未五十而精魄之遁已若此, 可哀恕而勿怒也.雖然賤子之昏, 質病非身病也.只當自治, 治亦未易.細審所示美愼, 乃肌膚所受切近災者, 不治不瘳, 不藥不治, 治亦不甚難, 只在亟圖之如何爾.見快事聞快語以祛之, 亦或一道.高明之求我以吳太子故事者, 以此也.然僕安有七啓手段耶? 無已則有一焉.僕曩遊金剛山矣, 上毘盧之峰, 俯視滄海, 小若曲沼, 彼雄據列島而各伯者, 又小之小者也.觀九龍之瀑, 千丈白練, 萬斛眞珠, 遠望駭眼, 迫視眩精, 眞天下壯觀, 生平快事.笑崔七七之狂愚, 而亦歎其絶俗.登正陽之寺, 萬二千峰幷露半面, 而出沒於雲霞卷舒中.朝暮變幻, 奇形莫狀, 宋尤菴山與雲俱白, 雲山不辨容, 雲歸山獨立, 一萬二千峰之詩, 差可謂善喩也.離山而遠, 通看全體, 則晧晧若大冬之封雪也, 尖尖若芙蓉之出水也, 潔淨明爽, 不見半點埃氛, 令人心神灑落.凡世間諸相可悲可惱者, 幷不覺一時消下.使有沈痾者當之, 其祛體也必矣.此又皆實事, 而非如吳客廣陵濤之設諭者, 高明其無意乎.足目之到, 如難猝辦, 先須心到, 想其淸快氣像, 而流注於胸隔間, 則庶覺神氣平怡, 不爲無益矣.未知雅見以爲如何? 오(吳)객, 태자(太子)의 고사 한(漢) 나라 매승(枚乘)이 오객(吳客)과 초 태자(楚太子)의 문답 형식으로 지은 '칠발 팔수(七發八首)'에 광릉(廣陵) 곡강(曲江)에 이는 파도의 장관을 멋지게 묘사한 내용이 나온다. 《文選》 7계(七啓) 문체의 하나로 위(魏) 나라 조식(曹植)이 지은 글이다. 이러한 문체로 칠발(七發), 칠격(七激) 등의 명문이 있다. 자연의 장관을 멋지게 묘사하여 이를 통해 병을 치료한다는 뜻이 내포되어 있다. 최칠칠(崔七七) 최북(崔北)이다. 칠칠은 최북이 자신의 이름 '북(北)'자를 파자한 것이다. 술과 유람을 매우 좋아하여 금강산 구룡연(九龍淵)에서 술에 취해 "천하의 명인(名人) 최북은 마땅히 천하의 명산(名山)에서 죽어야 한다."라고 하면서 물에 빠져 죽으려고 했던 일화가 전한다. 《金陵集 卷13 崔七七傳, 韓國文集叢刊 272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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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간통고류

1902년 윤기섭(尹璂燮) 간찰 1 고문서-서간통고류-서간 壬之二月五日 尹璂燮 壬之二月五日 尹璂燮 정읍 성주이씨 이유원 후손가 성주이씨 이정순 HIKS_Z037_01_A00936_001 1902년 2월 5일에 사제 윤기섭이 가천의 사돈께 안부를 묻고 자신의 생활을 대략 알려준 간찰 1902년 2월 5일에 사제(査弟) 윤기섭(尹璂燮)이 가천(可川)의 사돈께 안부를 묻고 자신의 생활을 대략 알려준 답장 편지이다. 피봉이 있다. 2월에 아드님이 직접 편지를 가지고 와서 위로가 되었다고 하고, 형제분과 가족들의 안부를 물었다. 자신은 어버이는 다행히 편안하신데, 맏형이 아프셔서 여러 지방의 약이 되는 음식을 부수적으로 먹고 있다. 일간 나아가 뵈올 계획이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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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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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2년 윤기섭(尹璂燮) 간찰(簡札) 2 고문서-서간통고류-서간 壬寅二月五日 尹璂燮 壬寅二月五日 尹璂燮 정읍 성주이씨 이유원 후손가 성주이씨 이정순 HIKS_Z037_01_A00936_001 1902년 2월 5일에 사생 윤기섭이 양가의 가족 안부를 여쭙는 간찰 1902년 2월 5일에 사생(査生) 윤기섭(尹璂燮)이 가천의 사돈댁에 보내 양가의 가족 안부를 여쭙는 편지이다. 사돈의 안부를 여쭙고, 자신은 어버이께서는 겨우 편안하시고, 형님은 치발(致發)한 지 오래되어 앙모하는 마음 더욱 간절하다. 며느리이자 자신의 딸이 무탈하다니 매우 다행이고, 아드님은 공부를 부지런히 하여 대성하기를 바란다는 내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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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백원동기에게 보냄 갑신년(1944) 與柳伯源 東起○ 甲申 옛날 완주에 있었을 때는 해마다 우리 누나에게 문후를 드리는 것이 관례가 되었습니다. 한번은 기묘년 가을에 인사드리고 돌아왔는데, 그 겨울에 막내 며느리가 크게 병이 나서 가산을 탕진하여 구원하는 바람에 이듬해 봄에는 농토가 없어 여덟 식구가 기아에 허덕였으며, 게다가 나이가 들수록 병은 더욱더 심해졌고, 시대가 소란스러워질수록 길은 더욱 막혀서 힘도 없고 경황도 없어서 문을 닫고 5, 6년 동안 쓰러져 있었으니, 우리 누나에게 문후를 드리지 못한 것은 이 때문이었습니다. 매번 동생과 아이들에게 "나는 비록 이와 같다지만 너희들은 어찌 가서 문후를 드리지 않는가?"라고 말했지만, 한 번도 말을 들어주지 않았습니다. 종합해보면 동기(同氣)94) 간에 인륜의 정이 박한 허물은 실제로 제가 우리 누나 내외가 멀리 나를 버리고 만 리의 먼 곳으로 집을 옮긴 뒤 한 번도 편지를 보내지 않은 것을 초래했다는 점에 있으니, 다시 누구를 원망하겠습니까?잘 모르겠으나, 풍토로 인하여 기후가 다른 곳에서 칠순을 바라보는 노년에 다행히 건강에 이상은 없습니까? 고향을 생각하는 그리움은 어떻게 견디십니까? 북쪽을 바라보며 달려가는 마음에 혼백이 녹고 애가 끊는 것은 하루에도 여러 번이었습니다. 생각해 볼 때, 우리 형제 여섯 명은 부모를 오래도록 모시는 복은 없을지라도, 지금 나이가 든 사람은 67세이고 젊은 사람은 46세인데 모두 생존해 있고, 아울러 배우자를 잃거나 자손이 없는 사람은 없으니, 형제의 복은 또한 드문 경우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매번 어머니의 기일이 있는 따뜻한 봄에 모두 모여서 제사 지내기를 부모가 살아 계실 때 똑같이 슬하에 있는 것처럼 하여 화락한 즐거움을 다하고자 하지만, 이것은 역시 궁핍한 사람이 봄이 다 가는 때에 쉽게 마련하지 못하는 일입니다. 금년 6월 6일이 되어 이 몸이 태어난 회갑의 아침에 반드시 이를 하려고 기약했는데, 우리 누나가 갑자기 이렇게 멀리 이사 갈 줄을 어찌 생각이나 했겠습니까? 이제는 끝났습니다. 이것뿐만이 아닙니다. 또한 잘 모르겠으나, 생전에 다시 서로 얼굴을 볼 기약이 있겠습니까? 이 몸은 농사를 짓지 않고 생산한 것도 없어서 몸을 거친 골짜기에 붙여 살면서 안으로는 처자식의 봉양이 없고 밖으로는 사귈 벗도 끊었습니다. 이렇게 지낸 것이 이제 몇 년이 되었는데, 이런 상황을 가지고 생각할 때 그 감정을 어찌 다시 낱낱이 말하겠습니까? 만약 끝내 버리지 않으셨다면 행여 답장이라도 주시기 바랍니다. 昔在完城日間, 年候我姊氏, 便成課例矣. 一自己卯秋拜辭而歸, 是冬而季子婦大病, 蕩產救護, 翼春而農土沒落, 八口飢餓, 加之年益衰而病益深, 時益騷而路益梗, 無力無况, 杜門自廢五六年, 闕侯我姊氏者, 是也. 每謂弟輩兒曹, 曰: "我雖如此, 汝等豈不可以往候乎?" 而一不見聽. 總言之, 同氣間薄倫, 咎實在我所以致我姊氏內外之遐棄, 移家萬里之遠, 而并無一書之及, 復誰之怨尢? 未知風土異候, 望七老年, 幸無損攝? 越鳥南柯之思, 何以堪之? 北望馳情, 魂銷而腸斷者, 一日而屢回也. 念吾同腹六人, 雖無久待父母之福, 然今老者六十七, 少者四十六, 皆得生存, 并無喪配偶無子孫者, 兄弟之福, 亦可謂罕觀矣. 每欲於先妣忌日春和之時, 齊會行祀, 若父母生時同在膝下, 而盡湛樂之歡, 是亦竆人竆春所未易辧者. 期至今年六月六日, 此身回甲生朝而必遂之, 孰謂我姊氏遽此遠移? 今焉已矣. 非惟此焉. 亦未知生前復有相靣之期否? 此身不農不產, 栖身荒谷, 內無妻子之養, 外絕賓朋之交者, 今爲數歲, 即此而可想, 其情復何枚道? 如不終棄, 或賜回音. 동기(同氣) 《주역(周易)》 〈건괘(乾卦) 문언(文言)〉에 "같은 소리끼리 서로 호응하고 같은 기운끼리 서로 찾는다.〔同聲相應 同氣相求〕"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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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극명에게 답함 경진년(1940) 與楊克明 庚辰 옛날 현자는 난세를 만나면 깊이 은둔하거나 멀리 떠나서 끝내 화를 면했습니다. 예컨대 하복(夏馥)이 임려산(林慮山)에서 나무를 가옥으로 삼은 것과47) 신도반(申屠蟠)이 양탕(梁碭)지역에서 자취를 끊은 것48) 등입니다. 오늘날이 그런 시절임에도 여전히 뒤처져 있습니다. 다만 그대는 날이 마치기를 기다리지 않고 분연히 해냈으니 어찌 그리 용감하신지요? 올 여름 풍우로 그대의 정원에 감과 밤이 크게 손상되었을 것입니다. 아마도 하늘이 이것조차도 한미한 선비의 먹을거리로는 사치라고 여겨서 그것을 덜고자 했는가 하여 웃어봅니다. 나 또한 덕유산과 두류산, 두 산 사이에 뜻을 둔지 오래되었습니다. 다만 한스럽게도 늙어서 이미 농사지을 힘도 없고 자손 또한 따르는 이가 없으니 어찌해야 하는지요? 한갓 간절히 그대를 부러워할 뿐입니다. 비록 그러하나 이 또한 선비가 변란에 처하는 것이니 이치를 궁구하고 식견에 전진하여 몸을 완성하고 세상을 선하게 하는 유업(儒業)의 성취를 어찌 잠시라도 잊겠습니까? 바라건대 모름지기 성인의 훈계인 "즉이학문(則以學文)"에서 즉(則)자의 뜻을 체인하여 농사짓고 나무하는 여가에 부지런히 서적을 가까이하십시오. 그리하여 날로 성실하게 공부하여 얻은 것과 의심나는 것을 풍(風)편에 보여주시어 강론상장(講論相長)의 이익에 보탬이 되도록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古之賢者, 遭亂世, 深藏遐擧, 卒以免禍.如夏馥之林慮樹屋, 申屠蟠之粱碭絶迹.今其時也, 而尙屬晩矣.惟賢不俟終日, 奮然能之, 何其勇也? 今夏風雨, 貴園柿栗想大損, 豈天以此謂寒士食侈而欲減之耶, 奉呵奉呵, 僕亦留意德裕頭流兩山之中久矣.但恨老矣, 旣不能服田, 子孫又無可從者, 柰何柰何? 徒切健羡而已.雖然此皆士之變處, 處變則然, 而至於窮理進識, 用究成身淑世之儒業, 何可須臾忘也? 望須深體聖訓則以學文則字之意, 耕樵餘力, 勤親簡編.日有慥慥, 以所得所疑, 因風示及, 資講論相長之益如何? 하복(夏馥)……것과 하복은 후한 때 사람이다. 영제(靈帝) 때 국정의 잘못을 거침없이 말했다가 당시 권력을 잡고 있던 환관들의 미움을 사 체포령이 내린다. 이에 성명과 모습을 바꾸고 임려산(林慮山)에 들어가 품팔이꾼이 되어 살다가 죽었다. 《後漢書 卷67 黨錮列傳 夏馥》 신도반(申屠蟠)……끊은 것 은사인 신도반은 한나라가 쇠퇴해지는 것을 보고 양탕(梁碭) 지역에 자취를 숨기고 은둔하여 살았다. 《後漢書 卷53 申屠蟠列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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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여중 태일에게 보냄 병인년(1926) 與崔汝重 泰鎰 丙寅 근래에 비로소 그대가 봄날 용동(龍洞)의 간소(刊所)에 답한 편지를 얻어 읽어보니 명분이 바르고 말이 순하며, 뜻이 간곡하고 의리가 엄격하며, 문장 또한 넓고 넓어서 사회적 지위가 있으니 그대의 진취와 수립이 이와 같은 줄 알지 못했습니다. 지난날 내가 어떤 사람에게 그대를 언급하여 "뭇사람들이 바야흐로 머리를 움츠릴 때에 서검(書檢)의 화를 함께 하였고, 동문들이 서로 무관심할 때에 제일 먼저 환난에 달려와 이치에 근거해 사람을 질책하여 스승을 어긴 죄를 바로잡아 시비(是非)를 드러내었고, 바른 도(道)로써 아버지를 깨우쳐 공사(公私)의 슬픔을 극진히 하니 예제(禮制)가 밝아졌다. 그러니 근자의 선비들 중 실제 학문에 힘쓰는 것을 나는 이 사람에게서 보았다."라고 말했더니 듣는 사람들이 모두 그렇지 않다고 여기지 않았습니다. 대개 그대의 평소 자질은 겸손하고 겸손하여 말을 몸에서 내지 못하고, 몸이 옷을 이기지 못하는 자와 같지 않았던가요? 말없이 몸소 실천하는 것이 만석군(萬石君)49)의 순수한 자질이며, 말 많은 자가 덕이 없다는 것이 공성(孔聖)의 지극한 훈계입니다. 자장(子張)의 기세당당함은 함께 인을 행하기 어렵고50), 신정(申棖)의 분노는 강함이 될 수 없다는51) 것을 더욱 믿게 되었습니다. 대저 하늘이 사람에게 순수지선(純粹至善)의 성(性)을 부여했으니, 비록 신명에 통하고 사해를 빛나게 하는 덕이라 할지라도 결국은 내면의 일에 불과하여 본래 기이한 일이 아닙니다. 다만 기욕(氣欲)에 가려져 그 본성을 상실한 자가 많습니다. 고로 어버이를 사랑하지 않는 자가 있기 때문에 효자를 기리고, 군주를 공경하지 않는 자들이 있기 때문에 충신을 포상합니다. 만일 오늘날 유적(儒籍)에 이름이 들어있는 자들이 모두 의(義)를 따르고 예(禮)로 행동한다면 그대가 비록 현명하다 해도 누가 그대를 이같이 특별히 공경하겠습니까? 바라건대 그대는 더욱 힘써서 순수지선의 성분을 확충하여 대덕(大德)의 성취를 기약하고, 소성(小成)에 안주하지 말아서 오늘날의 선비 가운데 돈실한 학문을 이루어주길 바랍니다. 나는 그대와 일찍이 동사(同社)에서 교학상장의 의가 있었기에 무릇 다른 동문들과 견줄 수 있는 것이 아니어서 그대의 선을 보고 기뻐하여 나도 모르게 세세히 여기에 이르렀으니 깊이 진심을 헤아려 주리라 생각합니다. 近始得哀春間所答龍刋書, 讀之名正言順, 意懇義嚴, 文章亦恢恢然有地步, 不圖哀進就修立之如許也.日者鄙與人語及於哀曰, 書檢同禍於衆方縮首之時, 首先急難於同室越視之際, 據理責人, 正違師之罪, 是非以著, 以道喩親, 盡公私之哀, 禮制以明.近日衿紳中, 實地敦學, 吾於斯人見之矣, 聽者不以爲不然.蓋哀之素質, 非謙謙然言若不出身若不勝者乎? 益信不言躬行爲萬石君淳質, 而有言無德爲孔聖之至訓.子張之堂堂, 難與爲仁, 而申棖之悻悻, 未得爲剛也.夫天旣賦人以純粹至善之性, 雖通神光海之德, 究不過分內事, 本非異事.但爲氣欲之蔽, 而喪失其性者多矣.故以其有不愛其親者也, 而孝子旌以其有不敬其君者也, 而忠臣褒.如使今之托名儒藉者. 擧皆由之以義, 動之以禮.哀雖賢, 誰敬異之若此哉? 惟哀勉之, 充盡性分, 期就大德, 毋安小成.而作今士中敦實學也, 鄙於哀, 曾有同社相長之誼, 非比凡他同門故, 見其善而喜, 不覺縷縷至此, 想深諒實體也. 만석군(萬石君) 석분(石奮)은 한 경제(漢景帝) 때의 대부(大夫)인데 공경과 근신으로 이름이 높았다. 네 명의 아들이 모두 현달하여 만석군(萬石君)으로 불리었는데, 자식들을 훈계할 때 밥상을 마주한 채 가만히 먹지 않고 있으면 자식들이 서로를 책망하며 사죄하였다고 한다. 《史記》 〈卷103 萬石君列傳〉 자장(子張)…어렵고 자장은 춘추 시대 전손사(顓孫師)의 자이다. 《논어》 〈자장(子張)〉에 "증자(曾子)가 말하기를 '당당하구나, 자장이여! 함께 인(仁)을 행하기 어렵다.'"라고 하였다. 신정(申棖)…없다 "공자가 '나는 아직 강(剛)한 자를 보지 못하였다.'라고 하자, 혹자가 '신장(申棖)입니다.'라고 대답하였다. 공자가 말하기를 '신장은 욕심으로 하는 것이니, 어찌 강일 수 있겠는가.' 하였다."라고 하였다. 《論語》 〈공야장(公冶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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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여중에게 답함 계유년(1933) 答崔汝重 癸酉 '흑치(黑薙)의 재앙'52)에 보는 것마다 마음을 상하니 말도 차마하지 못하겠습니다. 보내온 편지에서 이른바 "복장을 변하게 하는 것이 장차 제도까지 변하게 하여 오랑캐 세상으로 몰아간다."라고 하신 말씀이 진실로 밝은 견해입니다. 저들이 색깔 옷을 조선의 옛 제도라 하여 권하는 것은 진실로 우리를 거짓으로 유인하는 술수입니다. 우리가 그것을 우리나라의 옛 복식이라 하여 따르는 것은 크게 생각이 밝지 못한 것입니다. 무릇 이 백의(白衣)는 고례(古禮)를 고찰해보아도 정색이 아니요, 국전(國典)을 참고해 보아도 숭상할 것이 아니어서 본래 구구하게 이것을 지켜야 할 이치는 없습니다. 그러나 오늘날에 있어서는 시국이 바뀐 후 저들에게 심복하지 않겠다는 특별한 색상이 되었습니다. 또한 기자(箕子)도 백색을 숭상하여 수천 년의 유풍이 되었으니 족히 천하만국에 떳떳함이 되고 훗날 양기를 회복하는 기반이 될 것입니다. 그러니 이 관계가 어찌 중차대하지 않겠습니까? 그대가 편지에서 "구한말의 유족(遺族)이 희미한 잔영으로 남고 오직 백의(白衣) 두 글자가 있는데 저들은 통쾌하게 아울러 말살하려고 한다."라고 했는데 그것이 또한 나의 말이기도 합니다. 나머지 사람들은 질책할 것이 없고 우리 유자(儒者)된 자들은 죽음이 있을 뿐 어찌 차마 따르겠습니까? 오언절구 시의 비분한 묘사와 굳센 맹서는 세 번 반복하여 읽고 난 후에도 감격이 그치지 않아 나도 모르게 문득 보내온 시운을 따라 나의 뜻을 보입니다. 그러나 서로가 같은 뜻이기에 시가 이루어져도 다른 언사가 없으니 어찌 꼭 보위(步爲)할 것입니까? 비유컨대 새장에 갇힌 새가 서로 슬프게 호소할 따름이니 도리어 맥없이 웃습니다. 근자에 우리들 중 시에 뛰어난 자는 그대만한 이가 없습니다. 묘사가 정밀하고 결속이 견고하여 환히 빛나고 엄숙하게 울려서, 나는 실로 눈을 부릅뜨고 뒤쫓을 뿐이니 지적해 달라는 부탁은 논할 것이 못됩니다. 다만 시(詩)의 도(道)는 귀결점이 완순자적(婉順自適)에 있습니다. 그대는 현재 시의 용공이 비록 이와 같더라도 구경일착(究竟一着)에 종사하는 것을 생각지 않아서는 안 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참각초절(鑱刻峭絶)한 뜻은 넘치고 우유부진(優遊不盡)한 흥취가 적을까 두렵습니다. 비록 그러하나 시는 작은 도(道)이니 어찌 족히 말할 것이 있겠습니까? 가장 중요한 것은 편지 가운데 "처음 뜻을 저버릴까 근심한다."라는 공부초지(恐負初志) 4글자로 이는 사람의 심목(心目)을 깨웁니다. 생각건대 근자의 동지들 중 나보다 나이가 아래인 사람으로 가히 믿을만한 사람은 희숙(希淑), 자유(子由), 그대, 그리고 여안(汝安)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여안은 목숨을 부지하는 데도 힘이 넉넉지 않으니 어느 겨를에 학업을 다스리겠으며, 자유 또한 빈궁하여 진덕수업에 방해가 될까 두렵습니다. 오직 희숙과 그대만이 다행히 이런 근심을 면하여 학업에 힘쓸 수 있는데, 희숙은 바야흐로 순풍에 돛단 듯 그 나아감을 헤아릴 수 없습니다. 이제 공부초지(恐負初志) 4글자를 그대에게서 얻어 이 학문이 사망하는 날에 도를 지키려는 마음이 더욱 견고함을 우러를 수 있으니 어떤 기쁨이 이와 같겠습니까? 비록 그러하나 뜻을 저버릴까 근심하지 않는다면 그만이거니와 진실로 저버릴까 근심한다면 처자의 허물이 어찌 그대를 구속시킬 수 있겠습니까? 구속이 되지 않을 뿐 아니라 바로 덕에 나아가고 뜻을 지키는 터가 될 것입니다. 또한 "몸이 묶여 자주 사우(師友)를 따르지 못한다."라는 것으로 근심으로 삼는다면 옛사람은 "모름지기 자기 힘을 써야지 타인에 의지해서는 안 된다."라는 말을 두었습니다. 그러니 어찌 자주 만나고 덜 만나는 일을 급급해하겠습니까? 대개 공(恐) 한 글자 가운데 무한한 공부가 들어있습니다. 궁극적으로 성인의 우근척려(憂勤惕慮)도 여기에서 벗어나지 않습니다. 그 사이에 공부하는 절차는 그대 또한 마땅히 알고 있을 터이니 자세히 설명하지 않겠습니다. 오직 마음을 모으고 뜻을 더하는 여하에 달려있을 따름입니다. 黑薙之禍, 觸目傷心, 言之不忍.來喩所謂變黑將爲變制, 而驅之於左袵者, 眞明見也.彼以色衣謂朝鮮舊制而勸之者, 固詐誘我人之術也.我人之亦以爲故國服用而從之者, 何見義之不明也.蓋此白衣, 考之古禮而非定色.參之國典而非所尙, 本無區區守此之理.但在今日, 則爲換局後不心服之特色.而亦箕聖尙白, 數千年之遺風, 足以有辭於天下萬國.而爲他日陽復之基.是其關係, 豈不重且大歟? 來喩所謂舊韓遺族, 迷痕殘影, 惟有白衣二字, 而彼快於并滅者, 亦吾言也.餘人可無責, 爲吾儒者, 有死而已, 何忍於從之也? 五絶詩悲憤之寫, 剛毅之誓, 三復以還, 令人感激無已, 不覺輒步來韻以示志.然要之彼此一志, 詩成而無他詞, 亦何須步爲? 誓如籠鳥之相呼以訴悲爾, 還呵還呵, 第近日吾黨中工詩者, 無如賢者, 模寫精切, 結束緊固, 燁然而光, 鏘然而鳴, 吾實瞠乎後矣, 斤正非所論.但詩之道, 歸在婉順自適.今賢者見在用工, 雖不得不如此, 然有事於究竟一着, 不可不念.不爾恐鑱刻峭絶之意勝, 而少優遊不盡之趣耳.雖然, 詩是小道, 亦何足說? 最是書中恐負初志四字, 醒人心目, 念此近同志中.年下余而可恃者, 非希淑子由與賢者及汝安乎? 而安弟救死不贍, 奚暇治業, 由亦貧窮, 恐妨進修.惟希與賢者, 幸免此憂, 可以有爲, 希方順風張帆, 其進難量.而今又得此四字之喩於賢者, 可仰守道之心彌堅於斯文喪亡之日, 何喜如之? 雖然, 吾則以爲如不恐負則己, 苟能恐負, 妻孥之累, 烏得以覊絆之? 不惟不得以覊絆, 正所以爲進德酬志之地也.如以絆身而未得頻從師友爲憂, 則古人又有須用己力難仰他人之語.亦何必切切於頻踈之間也? 蓋恐之一字中, 有無限工夫在.究而論之, 聖人之憂勤惕勵, 亦不過此.其間工程節度, 在賢者亦當爲已見昭陵.玆不縷陳, 惟在會心加意之如何爾. 흑치(黑薙)의 재앙 서양문물이 밀려들어오면서 강압적으로 시행된 단발령과 검은 서양 복장으로 갈아입어야 했던 사실을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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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여중에게 드림 을해년(1935) 與崔汝重 乙亥 무릇 사우(祠宇)는 서원이라 통칭하는데, 서원은 본디 독서 때문에 이름을 얻은 것이고, 독서는 의리를 강론하는 것입니다. 때문에 서원은 반드시 강학하는 곳이 있고, 그 강의하는 것은 선현의 도(道)입니다. 이제 무함(誣陷)하여 인가를 내고 원고를 고쳐서 선사의 도의(道義)를 말살하려는 족속들과 더불어 사우의 일을 함께 한다면, 서원의 강당에서 독서하고 강의하는 것이 무명무실(無名無實)할 뿐 아니라 도리어 선사(先師) 도의(道義)의 명과 실을 이 서원 강당에서 무너뜨리게 되는 것이니, 나는 그 마음가짐이 어떤 것인지 알지 못하겠습니다. 이제 여러 어른들이 저 무리들을 마주하여 선사의 진영이 엄숙하게 굽어보는 아래에서 무함하여 인가한 것과 원고 고친 것을 바로잡고 성토한다면 저들이 스스로 그 죄를 알아서 창을 되돌리고 음성을 배척한다면 다행일 것입니다. 만일 그렇지 않고 장차 마간지론(馬肝之論)54)에 부쳐서 성리설이나 경전의 뜻을 두루 뭉실하게 논하면서 이것을 독서 강의라고 한다면, 그것은 지극히 무위할 것입니다. 나는 또 여러 어른들이 애초에 저들과 변론할 뜻이 없음을 알았고, 도리어 타인들이 무함하여 인가를 내고 원고를 고쳤다는 설을 끄집어내었으니, 화사(華祠)의 여러분들이 사우(祠宇)의 일에 방해를 초래할까 두려워했다고 여깁니다. 그런즉 그들의 마음가짐을 아는 것이 어렵지 않습니다. 夫祠宇通稱書院, 書院本以讀書而得名, 讀書所以講義.故院必有講堂, 所講者乃先賢之道也.今與誣認改稿, 蔑先師道義者之血黨, 與同祠事, 則所謂讀書講義于院于堂者, 非惟無名無實, 反壞了先師道義之名實于院于堂, 吾不知其宅心如何也.今諸丈若對彼輩, 辨誣認討改稿於先師眞像儼臨之下, 彼自知其罪, 而倒戈斥陰則幸矣.如其不然, 則其將以是付之馬肝之論, 與之泛論性理經義而曰, 此是讀書講義, 則已極無謂.吾則以爲又知諸丈之初無意於與彼辯論, 而反恐他人惹出誣改之說, 而華祠僉席致妨祠事也, 然則其所宅心, 不難知也. 마간지론(馬肝之論) 말의 간(肝)은 원래 독이 있어서 먹지 못한다. 고기를 먹을 때에 말의 간을 먹지 않더라도 맛을 모르는 것이 되지 않는다고 한 데에서 인용한 말이다. 즉 성인이 하는 일은 범인이 이해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니, 우선 제쳐 두고 논하지 않더라도 의리를 모르는 것이 되지 않는다는 뜻이다. 《晦庵集》 〈卷57 答陳安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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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3 後滄先生文集卷之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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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산 김장복한 에게 올림 경신년(1920) 上志山金丈(福漢) ○庚申 제가 일찍이 들으니, 선비 중에 인을 실천하고자 하는 사람은 반드시 그 나라의 대부 가운데 현명한 이를 섬긴다1)고 합니다. 사람은 본래 현명한 사람과 현명하지 못한 사람이 있으니 그 대부 가운데 현명한 사람이 있다고는 기필할 수는 없고, 현명함에도 분수(分數)가 있으니 그 현명함이 완벽히 구비되었다고는 기필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만약에 대부의 신분이면서 현명함이 없는 자라면 참으로 어찌할 수 없거니와, 혹시라도 현명하기는 하지만 그 현명함이 완벽히 구비되지 못한 자가 있다면 마땅히 그 나라에서 섬길만한 사람을 택하여 섬겨야 할 뿐입니다. 만일 현명한 대부가 여기에 있는데 우뚝히 큰 절개를 지니고 학문까지 겸비하고 있다면 그 현명함은 어찌 한 나라에서만 찾기 어려울 뿐이겠습니까? 거의 한 시대에 짝할 자가 드물 것입니다. 그렇다면 선비 가운데 이 나라에 살면서 이와 같은 현명한 이를 모시게 된다면 어찌 하나의 큰 행복이 아니겠습니까?위아래가 전도되고 멸망한 나라2)의 산천의 경관이 달라진 이후로 중화의 문화권에서 태어났어도 오랑캐 행실을 하고, 벼슬을 하면서도 효경(梟獍)3)같이 하는 자는 참으로 말할 필요도 없거니와 간혹 고가(故家)의 세족으로 옛 음덕을 누리면서 명망을 지닌 자도 끝이 선한 자가 드물게 되었습니다. 거센 바람이 천리에서 불어오면 풀들이 이리저리 쓰러지고, 장강이 백 번 굽이치면 파도는 출렁출렁 뒤로 물러가건만, 오직 문하(門下)께서 나라를 위하는 일념이 단사(丹沙)처럼 찬란하여, 굳은 절개는 처음부터 끝까지 변함없어 백 번 죽더라도 후회하지 않고, 임천(林泉)에서 도를 강론하되 머리가 셀수록 더욱 돈독히 하니, 우뚝 유문(儒門)의 영광(靈光)이 되었습니다. 지난날 이른바 절개를 지니고 학문을 갖추고 있어 한 세대의 현자가 되었다고 한 경우가 바로 그런 사람입니다. 그러니 나라 안의 지식인들이 누군들 높은 산처럼 우러러보고 동량처럼 믿으면서 현자를 섬기는데 마땅한 분을 얻은 것을 다행으로 여기지 않겠습니까?심지어 저처럼 어리석은 사람조차도 이에 의지하여 타고난 성품이 민멸(泯滅)되지 않았으니, 이 때문에 자나 깨나 어르신을 우러러 사모한 지 여러 해 되었습니다. 그러나 가난과 근심에 얽매이고 압박당하여 멀리 노닐려던 큰 뜻이 사그라들어 거의 다 사라진 채 목을 빼고 서쪽을 바라보면서 때때로 길게 탄식만 하였습니다. 그러던 차에 일전에 찾아뵙고 통자(通刺)하였으니 참으로 숙원을 이룬 것이고, 넉넉히 포용해주심을 입고 후하게 계발을 받은 것은 생각지도 않은 일이라 몹시 감격스러웠습니다. '무실(務實)'4)이란 두 글자를 내려주신 것은 참으로 제 자신의 증상에 꼭 맞는 훌륭한 처방이므로 더욱 가슴에 새기고 싫증내지 않았습니다. 이로 인하여 저는 삼가 마음속으로 감탄한 바가 있으니, 명분만 좇고 실질을 잊는 것이 선비들에게 나타나는 보편적인 문제이지만, 이런 현상이 오늘처럼 심한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심(心)과 성(性)에 대하여 같다고도 하고 다르다고도 하면서 능사(能事)가 이미 끝났다고 말하지만, 존심양성(存心養性)5)에 대해서 말하면 아무것도 모르면서 입으로 쏟아내는 웅변은 황하물이 터진 것과 같고, 붓으로 써내는 씩씩한 글은 찬란하게 문장을 이룹니다. 그러나 그 평소의 말과 행동6)을 돌아보면 대부분 비난받을 만한 것들입니다. 이윤(伊尹)ㆍ주공(周公)의 사업과 관중(管仲)ㆍ제갈량(諸葛亮)의 정치에 대하여 손가락으로 손바닥을 가리키듯, 땅에 그릴 듯이 훤히 알아 실책이 없는 듯 하지만 작은 일에 대한 조처를 살펴보면 맞는 것이 없습니다. 속수(束脩)7)의 예를 행하고 명첩을 지니며, 스승과 벗을 좇을 때는 예절을 법도에 맞게 하지만, 집으로 돌아가 형제들 사이에 예의를 베풀 때에는 크게 잘못합니다. 이것은 모두 근래 선비들의 폐단에 대한 대략인데 문하께서 깊이 걱정하여 바로잡고자 하시는 것입니다.스스로 우둔한 저를 돌아볼 때, 세상 유자들이 자랑스럽게 여기는 점은 부족하고, 근심할 바의 폐단은 본래부터 갖고 있습니다. 이것이 이른바 재주는 없고 병폐만 있는 경우이니, 천하의 버릴 물건입니다. 비록 그러할지라도 또한 어찌 자포자기하고서 현명한 가르침에 마음을 다하지 않겠습니까. 오직 더욱더 저를 엄격히 가르쳐 마침내 성취할 수 있도록 해주시기를 깊이 바랍니다. 竊嘗聞士之欲爲仁者, 必事是邦大夫之賢者. 夫人固有賢否, 未可必其大夫之有賢, 賢固有分數, 未可必其賢之具備. 使其大夫而無賢者也, 則固無如之何矣, 其或賢而有不具備者, 則只當於是邦中擇其可事者, 事之已矣. 如有賢大夫於此, 卓乎其有大節, 而兼之以學問, 其爲賢也, 豈直一邦而已? 殆一世而寡儔也. 然則士之居是邦而得是賢, 豈非一大幸福也耶?一自冠屨易位, 風泉異觀, 華產而夷行, 冠紳而梟獍者, 固不足道, 間有故家世族食舊而佩望者, 亦且鮮終. 疾風千里, 靡靡草偃; 長江百折, 滔滔波頹, 惟門下爲國一念, 炳然如丹, 一節終始, 九死靡悔, 講道林樊, 皓首彌篤, 巋然作儒門靈光. 向所謂有節有學而爲一代之賢者, 即其人焉. 凡在域中士類, 孰不山仰樑恃, 幸其事賢之得所也?至如澤述之蠢蒙者, 賴有不泯彝性, 是以寤寐景慕, 積有年所. 而貧與憂謀, 纏之壓之, 遠遊壯心, 澌滅殆盡, 引領西望, 時發長喟. 日前獻刺, 寔償夙願. 而優蒙容納, 厚受開發, 思出不圖, 固已感沐. 至若務實二字之贐, 實係此身對證之良劑. 尤當佩服無斁. 因此而竊有所感歎于心者, 蓋徇名而忘實, 士之通患, 而未有若近日之甚也.曰心曰性, 是同是異, 自謂能事已畢. 而以言乎其存養則蔑如也, 口頭雄辯, 沛然河決; 筆下健辭, 爛然成章. 顧其庸言庸行, 則多可訾也. 伊周事業, 管葛政治, 指掌畫地, 若無遺筭, 觀其措諸微事․細務, 則郎當也. 束脩齎刺, 從師追友, 禮序秩然, 歸而施措唱喏塤箎之間則大謬也. 此皆挽近士弊之大畧. 而門下之所深憂而思矯之也.自顧鈍拙, 幷乏世儒之所炫耀者, 其所患之弊則固自在也. 是所謂無是才而有是病, 天下之棄材也. 雖然, 亦安敢自處暴棄而不盡心於明訓? 惟乞益加箝錘, 有以卒成之也. 선비……섬긴다 자공이 인(仁)을 하는 방법을 묻자, 공자가 말하기를 "공인(工人)이 자신의 일을 잘 하려면 반드서 먼저 그 기구(器具)부터 예리하게 수리하니, 이 나라에 살면서 대부(大夫) 중에 어진 이를 섬기고 선비 중에 인(仁)한 이를 벗해야 한다〔子貢問為仁, 子曰, 工欲善其事, 必先利其器, 居是邦也, 事其大夫之賢者, 友其士之仁者〕"라고 하였다. 《논어(論語)》 〈위령공(衛靈公)〉 멸망한 나라 원문의 '風泉'은 《시경(詩經)》의 편명인 〈비풍(匪風)〉과 〈하천(下泉)〉을 지칭하는 것으로, 모두 쇠망하는 나라를 서글퍼하는 감회를 읊은 시이므로 쇠망하는 나라를 걱정하거나 멸망한 조국을 그리워하는 것을 뜻한다. 효경(梟獍) 부모를 잡아먹는 새와 짐승을 말한다. 효(梟)는 흉악한 새로, 태어나자마자 어미를 잡아먹고, 경(獍)은 흉악한 짐승으로 태어나자마자 아비를 잡아먹는다. 은혜와 의리를 저버리고 배신한 사람을 비유하는 말이다. 무실(務實) 실제적인 일에 힘쓴다는 의미이다. 존심양성(存心養性) 맹자가 말하기를 "그 마음을 다 하는 자는 그 성을 알 수 있고, 그 성을 알면 하늘을 알 수 있게 된다. 그 마음을 보존하여 그 성을 기르는 것은 하늘을 섬기는 것이다〔孟子曰, 盡其心者, 知其性也, 知其性, 則知天矣. 存其心, 養其性, 所以事天也〕"라고 하였다. 즉, 인간이 도덕을 실천하기 위해서는 양심(良心)을 잃지 말고 그대로 간직하여, 도덕 본성을 키워 나가야 함을 의미한다. 《맹자(孟子)》 〈진심 상(盡心上)〉. 평소의 말과 행동[庸言庸行] 〈문언전(文言傳)〉에서 "구이에서 '나타난 용이 밭에 있으니 대인을 보는 것이 이롭다'라고 한 것은 무슨 말인가? 공자가 말하였다 '용의 덕으로 딱 알맞은 자이다. 평상시의 말을 미덥게 하고, 평상시의 행동을 삼가며, 간사함을 막고 정성을 보존하여 세상을 좋게 만들고도 자랑하지 않으니, 덕이 넓어서 교화한다. 《주역(周易)》에서 나타난 용이 밭에 있으니 대인을 보는 것이 이롭다고 하였으니, 이는 임금의 덕이다.'〔九二曰, 見龍在田利見大人, 何謂也. 子曰, 龍德而正中者也, 庸言之信, 庸行之謹, 閑邪存其誠, 善世而不伐, 德博而化. 易曰, 見龍在田利見大人, 君德也〕" 용언(庸言)과 용행(庸行)은 평상시의 말과 행동을 의미한다. 《주역(周易)》 〈건괘·문언전(乾卦·文言傳)〉 속수(束修) 공자가 "속수 이상의 예를 행한 자에게 나는 일찍이 가르쳐 주지 않은 바가 없었다〔自行束脩之以上, 吾未嘗無誨焉〕"라고 하였다. 스승을 처음 만나 가르침을 청할 때 작은 선물을 함으로써 예절을 갖추는 것을 말한다. 《논어(論語)》 〈술이(述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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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산 김장에게 올림 경신년(1920) 上志山金丈 庚申 저는 호남의 비루한 유생입니다. 한 번 만나주시는 은혜를 입은 것으로도 이미 용문(龍門)에 오른 것처럼 영광스러운데 다시 사랑의 편지까지 내려주셨으니, 이는 상례를 벗어난 특별한 사랑에서 나온 것입니다. 구부러진 재목이 큰 장인의 먹줄을 따르고 완고한 철이 훌륭한 대장장이의 용광로에 들어간 것과 같으니, 저에게는 참으로 행운이 아닐 수 없습니다. 다만 이 때문에 말거리를 삼는 자들이 저를 지나치게 후하게 대접하는 실수를 범했다고 문하를 의심하게 하여 누를 끼쳤으니, 저 또한 죄가 있습니다.옛날에 공자와 맹자가 사람을 가르칠 때 무언지교(無言之教)8), 불설지회(不屑之誨)9)와 같이 어떤 목적을 가지고 말씀하신 것 이외에는 혹시라도 말을 그만두는 것을 보지 못했으니, 이른바 간곡하게 잘 타이르면서 이끈다는 것과 의문 나는 점을 서로 문답한다는 것이 이에 해당할 뿐입니다. 삼가 근세에 대인(大人)과 큰 덕을 지닌 사람을 살펴보니, 혹은 엄숙하게 우뚝 서있기도 하고 혹은 깊은 생각으로 묵좌하기도 하니, 방문하여 무엇을 청하려는 자가 머뭇거리며 감히 나아가지 못하고, 의문 나는 점이 있어 질문하려는 자가 말을 머뭇거리다가 스스로 그만두기도 합니다. 그리하여 평소에 발원(發願)한, 지팡이 짚고 천리길을 나서려던 뜻이 자리 앞에서 잠깐 사이에 시들시들 꺾이기도 하니, 아마도 그들을 진작시키고 고무시키는 방법은 아닌 듯합니다.문하께서 사람을 대하는 것은 이들과 다릅니다. 온화한 말투는 마치 지초와 난초가 향기를 풍기는 것과 같고, 넘치는 화기(和氣)는 순한 막걸리에 취한 듯합니다. 그리고 충성스런 지조와 굳센 절개는 어떻습니까. 서리와 눈 속에서도 꿋꿋한 대나무ㆍ잣나무와 같은 지조를 지닌데다가 또 봄날의 따뜻한 햇볕과 같은 덕으로 보완하셨으니, 두터운 인(仁)과 애(愛)가 이처럼 겸비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국내의 선비들이 기꺼이 문하께 달려와 마음속으로 기뻐하고 성심으로 복종하는 이유이니, 제가 어리석더라도 역시 인의를 채우게 되어 지난날 인사드리고 물러나왔던 때에 갑자기 떠나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 감격스럽고 다행스러움은 참으로 세도(世道)와 관계가 되니 저의 사사로운 이익만을 위해서가 아닙니다.보내주신 편지에서 맹자의 큰 공은 성선(性善)에 있고 심선(心善)에 있지 않다고 하셨습니다. 옛날 스승께 여쭈었을 때 마침 바삐 물러나오느라 끝까지 논의하여 결정된 답을 듣지 못했습니다만, 계발을 받고 대략 스승의 뜻을 짐작한 바가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감히 먼저 제 뜻을 펴서 아뢰고 가르침을 구합니다.맹자의 큰 공이 성선에 있다고 하신 것은 실로 천고에 이미 정해진 공론이니 말해주길 기다리지 않아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모두 성선의 의론이 큰 공인 줄만 알고 심선의 의론 또한 큰 공이라는 것에 대해서는 모르므로, 마침 드러내어 사람들로 하여금 알게 하고자 합니다. 맹자의 심선 의론이 어찌 〈부세자제다뢰(富歲子弟多賴)〉장에서의 "성인은 사람들이 마음속으로 똑같이 옳다고 여기는 것을 먼저 알았다"10)는 말에 있을 뿐이겠습니까. 천하 사람의 마음이 성인의 마음과 다르지 않은 마음을 얻어서 리의(理義)를 즐길 수 있다면 이것이 어찌 사람의 마음이 모두 선하다는 것을 말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렇다면 제가 왜 심선의 의론에 공이 있다고 말했겠습니까? 사람이 물욕에 이끌려 용렬하고 악한 데로 돌아가려는 까닭은 자신의 심성이 선하다는 것을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일반사람들은 성인 보기를 마치 연못과 하늘의 차이와 같아 스스로 그 경지에 미칠 수 없다고 생각하여 '일반사람과 성인은 그 성이 원래 같지 않다'고 말합니다. 그러니 만약 어떤 사람이 '너의 성은 요순처럼 선하다'고 알려준다면 어찌 기뻐 날뛰면서 그 욕심을 다스려 선을 회복하려고 생각하지 않겠습니까. 일반사람들은 성인을 보면, 또 성이 비록 (성인들처럼) 선하다할지라도 성은 능동적으로 하지 않고 능동적으로 할 수 있는 것은 모두 심에 있기 때문에 성인과 보통사람의 마음은 본래부터 같지 않으니 내가 어떻게 성인에게 미치겠는가라고 생각합니다. 만약 어떤 사람이 '내 마음의 선도 성인과 같다'고 알려주면 어찌 크게 기뻐 날뛰면서 더욱 저 악을 다스려 선으로 돌아가려 하지 않겠습니까. 이것을 일러 맹자의 공이 또한 심선을 논함에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비록 그러할지라도 성선과 심선은 둘로 나누어 구별할 할 수 없으니, 이는 무엇 때문입니까? 심이 비록 선하다고 할지라도 선하게 되는 까닭은 지선한 성을 갖추고 있기 때문입니다. 심이 만약 이 성에 근원하지 않는다면 어디로부터 선을 얻겠습니까? 이것으로써 성선은 심선의 근본이고, 심선은 성선이 증험되는 곳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성선과 심선은 또 나란히 하여 똑같다고 할 수는 없으니, 이는 무엇 때문입니까? 심이 이 성을 갖추고 있으므로 그 근본은 선하지만, 무엇을 하는 것은 기에 속한 것이기 때문에 말단의 경우 간혹 악이 발생하기도 합니다. 이 때문에 심이 본래 선하다고 하는 것은 괜찮지만, 심이 순선(純善)하다고 한다면 이는 크게 잘못된 것입니다. 맹자 또한 이미 '리와 의는 마음을 기쁘게 한다'고 했으니, 마음이 곧바로 이 리가 아니라는 것을 분명하게 알 수 있습니다. 요컨대 노주(老洲) 오희상(吳熙常)이 말한 '성은 순선하고 마음은 본래 선하다'는 것은 리(理)와 기(氣)의 구분을 한 마디로 요약하여 완벽하게 표현한 것이니, 스승의 본뜻은 삼가 아마 이와 같을 뿐일 것입니다. 잘 모르겠지만, 어른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澤述, 湖南鄙生也. 一被容接, 已榮登龍, 重之以耑垂寵牘, 出於拔例殊愛, 曲材之從大匠繩, 頑鐵之入良冶爐, 固澤述之幸也. 但因此而俾談者疑其有失厚之, 累於門下, 則澤述亦有罪焉.昔孔孟之教人, 自無言之教․不屑之誨, 有爲而發以外, 未嘗見言語之或舍也. 所謂諄諄善誘․難疑答問者是已. 窃觀近世大人長德, 或嚴嚴凝立, 或淵淵黙坐, 進請者趑趄而不敢, 質疑者囁嚅而自止, 使其平生發願千里杖策之志, 薾然沮喪於席間片餉之頃, 恐非所以振起皷舞之道也.至門下之接人則異於是. 藹然之辭若芝蘭之其香, 盎然之和如醇醪之是醉, 何其忠烈勁節? 霜竹雪柏之中, 又濟之以陽春光輝之德, 厚仁愛若是兼且備也. 此所以邦內士類樂趍門墙, 心悅而誠服, 澤述之蒙騃, 亦知飽仁充義, 而不欲遽離於曩日拜退之日也. 其爲感幸, 實關世道, 非直爲己私也.下喻鄒聖大功在於性善而不在於心善. 向稟於師席, 而時值忽忽辭退, 未承究論定案. 但於竅啟, 有所畧揣師意者, 故敢先布白求教.夫孟子大功之在性善, 固千古已定之公言也, 有不待言而知者. 但以人皆徒知性善之論之爲大功 而不知心善之論之亦爲大功. 故正欲表而出之, 使人知之也. 孟子心善之論, 惡乎在〈富歲子弟多賴〉章所謂聖人先得我心之所同然者是已? 天下之心, 既得與聖人之心無不同悅理義, 則此豈非人心皆善之謂乎? 胡爲而云, 心善之論有功? 夫人之所以甘徇物欲而歸於庸惡者, 由不知己心性之善故也. 凡人之視聖人, 若淵之於天, 自以爲不可及, 而曰'凡之於聖, 其性固自不同.' 如有告之者曰'爾性之善, 與堯舜同,' 豈不歡欣踊躍, 思欲制其欲, 而復其善乎? 凡之視聖, 又以爲性雖善矣, 性則無爲, 有爲之能, 都在於心, 而聖凡之心, 應自不同, 我何以及聖人乎? 如又有告之者曰'爾心之善, 亦與聖人同,' 豈不大歡欣大踊躍, 尢欲治其惡, 而反其善乎? 夫是之謂孟子之功, 亦在於心善之論也.雖然性善心善, 不可分而二之也, 何也? 心雖曰善, 其所以善者, 爲其具至善之性也. 心若不原於此性, 何自而有善乎? 是知性善也者, 心善之所本也; 心善也者, 性善之所驗也. 性善心善, 又不可比而同之也, 何也? 心具此性也, 故其本則善, 有爲而屬氣也, 故末或有惡. 是故謂心爲本善則可也, 謂心爲純善則大害也. 孟子亦既曰, 理義悅心, 則心之非直是理, 斷可知已. 要之老洲所謂'性純善而心本善', 理與氣之分, 一語約而盡之矣. 師席本意, 窃恐如是而已. 未知尊意以爲如何? 무언지교(無言之教) 공자가 "나는 말을 하지 않으려 한다.〔予欲無言〕"라고 하자, 자공(子貢)이 "말씀을 하지 않으시면 저희가 어떻게 도를 전하겠습니까"라고 하니, 공자가 "하늘이 무슨 말을 하던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시는 운행하고 만물은 자라난다.〔天何言哉 四時行焉 百物生焉〕"라고 대답한다. 《논어(論語)》 〈양화(陽貨)〉 불설지회(不屑之誨) 상대방을 탐탁지 않게 여겨 멀리함으로써 그의 마음을 경각(警覺)시키는 가르침을 말한다. 맹자(孟子)는 "사람을 가르치는 데도 방도가 많으니, 내가 탐탁지 않게 여기는 가르침도 이 또한 가르침일 뿐이다〔敎亦多術矣, 予不屑之敎誨也者, 是亦敎誨而已矣〕"라고 하였다. 《맹자(孟子)》 〈고자 하(告子下)〉 성인은……알았다 맹자는 "사람들이 마음속으로 똑같이 옳다고 여기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리이고 의이다. 성인은 사람들이 마음속으로 똑같이 옳다고 여기는 것을 먼저 알았다. 때문에 리와 의가 우리의 마음을 즐겁게 하는 것은 마치 맛있는 고기 음식이 우리의 입을 즐겁게 하는 것과 같다〔心之所同然者, 何也? 謂理也義也. 聖人先得我心之所同然耳. 故理義之悅我心, 猶芻豢之悅我口〕"라고 하였다. 《맹자(孟子)》 〈고자 상(告子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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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종형 김만당희현에게 답함 갑신년(1944) 答外從兄金晚棠熺鉉 ○甲申 이전 편지에 답장을 올리지 못한 무례함에 대해서는 책망을 받아야 마땅한데도 불구하고 책망하지 않으시고 더구나 다시 은혜로운 편지를 매우 은근하고 돈독하게 내려주셨습니다. 형님께서 저를 깊이 사랑하시니, 새해의 즐거움 중에 이보다 더한 것이 없습니다. 또한 생각해보니 본가에는 친종형이 없고 이성(異姓)으로 종형이 몇 명 계시지만, 오로지 형님만이 80세가 되었는데도 불구하고 저를 돈독하게 사랑하심이 더욱 깊으니 늘그막에 이보다 더 큰 위로가 어디 있겠습니까?제 나이가 회갑이 되었다고 말씀하신 부분에 이르러서는 그 말씀을 듣자 마음이 처량하여 말씀하신 까닭을 살피지 못했습니다. 부친과 조부 이상 4대는 장수한 사람이 없으니 이는 형님께서 아시는 바이고, 5세조는 66세까지 사셨고, 9세조까지는 족보에 생졸년이 기록되어 있지 않으니, 만약 장수하셨다면 이치상 어찌 기록하지 않았겠습니까? 10세조는 장수하여 70세까지 사셨습니다. 그렇다면 우리 집안에서 회갑을 지낸 사람은 10세조 이후에 처음으로 있는 일이니, 어찌 애통하고 이상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니 지금 형님이 저를 축하하는 것이 오히려 저를 힘들게 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생각이 여기까지 이르니 차라리 말하지 않을지언정 무슨 말로 사랑해주신 것에 대해 보답하겠습니까. 다만 기억하건대 선군께서 임종 시에 저의 손을 잡고 "너의 증조는 32세까지 살았고, 너의 조부는 43세까지 살았으며, 나는 지금 51세이니 이미 차례로 10년씩 더해졌다. 이를 가지고 이후를 추론해본다면 너는 마땅히 60세를 넘길 것이고, 너의 아들은 70세를 넘길 것이며, 너의 손자는 80세를 넘길 것이다"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이 몹시 비통하여 읊조리고자 해도 차마 읊조릴 수 없고, 들려주려 해도 차마 들려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제 제 나이가 이미 증험되었으니 자손들도 역시 장차 차례로 이를 따를 것입니다. 형님께서 외가가 침체되지 않기를 바라는 뜻이 혹시라도 여기에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생일이 아직 멀었는데 마침 형님의 편지를 받으니 심기가 촉발되어 부모님 봉양을 다하지 못한 아픔을 절로 견딜 수가 없습니다. 또 내일 아침은 선군의 휘신(諱辰)13)입니다. 시절의 변화를 느끼며 자신을 돌이켜보니 어떻게 마음을 가눌 수 있겠습니까. 이 때문에 저도 모르게 이렇게까지 감정을 쏟아냈습니다. 삼가 생각하건대 묵묵히 이해하시고 불쌍히 여겨주실 것입니다. 前書闕覆, 無禮可誅, 尚矣無誅, 矧復惠教, 殷切周摯甚矣. 兄丈愛我之深也, 新年喜樂, 無過於此. 且念本無親從, 有異姓從若而人, 而惟兄丈親愛, 八耋愈篤, 勝於親從, 暮年慰幸, 亦何加此?至於賤年回甲之云, 聞之戚戚, 莫省所喻. 父祖以上四世無壽, 兄丈所知, 五世祖六十六世, 至九世譜無生卒, 如得其壽, 理豈不錄? 惟十世祖壽至七十, 然則吾家囬甲, 十世後初有, 豈不痛且怪焉? 今兄丈所以祝我者, 無乃反爲病我也耶? 念到于此, 寧欲無言, 將何辭以答見愛也? 但記先君臨終, 執不肖手有言曰 : "汝曾祖壽三十二, 汝祖四十三, 吾今五十一, 既遞加十年矣. 推此以往 汝當逾六十, 汝子逾七十, 汝孫逾八十." 此言絕悲, 誦不忍誦, 聞不忍聞. 然今賤年已見驗, 則子孫亦將次第準此, 而兄丈之希望外家不替者, 其或在斯歟?弧日尚遠, 適奉尊書, 觸發心機, 匪莪之痛, 自不能住. 且明晨即先君諱辰, 感時撫躳, 何以爲心? 茲不覺罄情至此. 伏想有以默會而憐之也. 휘신(諱辰) 기일(忌日)이다. 《능엄경(楞嚴經)》에서 나온 말인데 본래는 재일(齋日)이란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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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양오신윤에게 보냄 신사년(1941) 與姜良五 信倫 ○辛巳 일전에 저는 존형의 동생이 편지로 물은 것에 대하여 답장을 보냈습니다. 지금 《유현연원록(儒賢淵源錄)》을 발간했는데, (그곳에) 기재된 존형의 친척 중 모씨는 존형이 은혜를 입은 죽헌공(竹軒公)이라는 것을 저의 아들에게 들어 알았습니다. 좀 더 일찍 그러한 사실을 알지 못하고는 타당하지 못한 점이 있는 사실을 편지로 보낸 것을 한스러워했습니다. 마음에 매우 미안합니다만, 이런 일이 다른 사람에게 있지 않고 존형의 집안에 있었기 때문에 존형의 형제가 끝내 도의로 판단하여 별일이 없게 되면 다행이라 생각했습니다.우리 고조는 단지 평생토록 집안에서 의를 실천하셨기 때문에 일찍이 같은 시대의 유문(儒門)에게 문인이라 일컬어진 적이 없습니다. 이는 이미 온 고을이 다 아는 사실입니다. 존형의 집안과 왕래한 일은 마땅히 고조가 강씨와 재혼한 뒤라야 합니다. 죽헌공이 정조 기미년에 돌아가셨다 들었으니, 재혼한 때는 10여 년 뒤에 있었습니다. 또한 우리 고조는 정조 계묘생이니 죽헌공이 죽었을 때는 17세였으므로 그 문하에 출입한 때가 재혼한 후에 시작되지 않고 반드시 일찍 아이 때부터라는 것은 믿기 어렵습니다. 이런 저런 것을 따져보면 죽헌공의 문인이라는 것은 사실이 아님을 알 수 있는데, 사실이 아닌데 억지로 문인이라고 명명한다면 거짓을 저지르게 되니, 선조를 예로 섬기는 것이 아닙니다."요즘 허위의 풍조가 성행하여 이를 말하며 통탄하고 있는데 우리들이 설사 금지시킬 수는 없을망정 차마 그것을 돕겠는가?" 이것은 존형께서, 존형의 동생에게 준 저의 편지를 보고 저의 아들에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즉시 발췌하여 개정하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 존형이 이미 이와 같은데 동생이 다시 무슨 말을 하겠습니까? 다만 오히려 억지로 핑계꺼리를 만들어 "동생의 병이 회복되길 기다렸다가 발간소로 보내겠다"라고 말했습니다. 만약 이미 책을 만들었다면 편리대로 하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이것은 사적인 이해와 편리로 인하여 통쾌하게 의를 행하지 못함을 면치 못하는 것입니다. 우리들은 지금 늙었습니다. 오직 정대(正大)하게 마음을 세우고 공명정대하게 일을 행하여 우러러 하늘에 부끄럼이 없고 굽어 다른 사람에게 부끄러움이 없어서 지하에 계시는 선성(先聖)과 선조(先祖)에게 돌아가 인사드리는 것을 책무로 삼아야 할 뿐이니, 어찌 터럭만큼의 사적인 뜻을 그 사이에 용납하겠습니까? 일이 중대하니 바라건대 반드시 존형이 당일로 늙은 몸을 부축하여 직접 가서 분명히 올바르게 바로잡은 이후에 답장해주셔야 합니다. 간절한 마음으로 공손히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日前鄙與令弟書中所問. 今刊《儒賢淵源錄》所載貴族中某位, 聞諸家兒, 知其爲尊兄所蒙祖竹軒公, 恨不早知其然, 以致書不妥當. 心甚未安, 猶以事不在他, 而在兄家, 諒兄伯仲終以道義裁定, 而至於無事爲幸也. 盖鄙高祖平生, 只是居家行義, 未嘗稱門人於并世儒門, 既一鄉之所共知. 至與尊門往來, 則宜在再卺姜氏之後. 而聞竹軒公沒在正廟已未, 則再卺之日在十餘年後矣. 且鄙高祖正廟癸卯生, 而竹軒沒時, 爲十七歲, 則難信出入尊門, 不始在卺後, 而必早自成童時矣. 以此以彼, 竹軒門人, 可知非實, 非實而強名之, 則其不涉於虛僞, 而事先不以禮乎. 近日虛僞風盛, 言之痛歎, 吾儕縱不能禁, 忍助之乎? 此尊兄所以見鄙與令弟書, 對家兒言. 然則即爲拔出改正爲可者也. 兄既如此, 弟復何言? 但猶有靳托底意, 曰: "待弟病復常後送刊所." 曰若已結冊, 則難便. 是不免利害便否之私, 而行義之未快也. 吾儕今老矣. 惟以立心正大行事光明, 仰不愧天俯不怍人, 歸拜先聖先祖於地下爲務而已, 豈容一毫私意於其間哉? 事係重大, 望須尊兄即日扶老親往, 明白歸正後, 回示之, 千萬拱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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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정로 종원에게 답함 을축년(1925) 答林貞老 鍾元 乙丑 편지를 받고 탁월한 의리와 빛나는 문장으로 나처럼 음성인의 간담을 도끼로 깨트리고자 하는 뜻을 볼 수 있었습니다. 그대의 의리는 이미 우러러보았지만 문장이 이렇게 빛나는 것은 오늘 이후 처음 보았습니다. 예전에 우리 정로(貞老)를 깊이 알지 못했던 일이 부끄럽습니다. 이 의리와 문장을 확충시켜 나간다면 우레처럼 날카롭고 바람처럼 빠르게 앞길로 나아가 산악처럼 우뚝하고 햇살처럼 환한 목표를 향해 사특함을 변별하고 정도(正道)를 지켜서 성인을 이어 태평시대를 열 사람이 바로 그대일세. 그런데도 무엇을 돌아보며 다른 것을 구하시는가? 선사(先師)의 도를 밝히고 춘추(春秋)의 대의를 세우는 것은 나 자신부터 주장하는 것이니, 어찌 다른 사람을 의지하겠습니까? 나 같은 사람은 인품이 낮고 학문이 얕아 족히 경중이 될 수 없음에도 갑자기 사문의 망극한 변을 만나 음기가 홀로 높고 여섯 양기가 막혀있는데, 세상에 확연히 양묵(楊墨)을 물리쳤던 맹자 같은 사람이 없어서, 불초한 내가 나서지 않으려 해도 그럴 수 있었겠습니까? 그리하여 스스로를 헤아리지 않고 힘을 다해 분별하여 성토하다가 큰 화를 입게 되었는데 후회는 없습니다. 그대가 편지에서 "의를 밝히고 세상을 선하게 했다."라는 말씀은 어찌 감히 그렇다고 하겠습니까만, 스승을 잊고 적에게 아부했다는 것만큼은 두려워하고 면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대는 또 실질 없는 명성과 공(功)이 없는 포상을 장황하게 선양하여 심지어는 "귀의하여 의지하고 우러러 보겠습니다. 그리고 이는 결코 선생님께 아부하는 말이 아닙니다."라고 했는데 이는 무엇 때문입니까? 아마도 세풍에 구속되지 않아서 끝내 모른 체하기 어렵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 아니겠는지요? 아니면 윤리 강상이 끊어지고 무너져서 스승을 무함(誣陷)하고 도적에게 붙은 자들이 도도하게 횡행하는데 여전히 몇 사람이 그 흐름에서 벗어난 것이 세도의 다행이요, 뜻을 숭상하는 동지라 여겨 희비(喜悲)가 교차하는 중에 부지불식간에 나에게 경도된 것이 아닌지요? 그렇다면 그대의 정(情) 또한 슬프다 할 수 있겠습니다. 보낸 편지 가운데 지나치게 칭송하고 지나치게 겸손한 말은 나의 뜻에 마땅치 않습니다. 오직 옛사람에게 스스로 기약할만하지 못하지만 차마 세속의 흐름에 자포자기 못한다는 그 절실함이 실로 마음에 와 닿았기 때문에 뚜렷이 내 귀에 들어와 처연하게 마음을 감동시켰습니다. 그리고 하나같이 내가 평일에 기대했던 것과 서로 부합하니 얼마나 다행입니까? 아! 속(俗)이라는 한 글자가 사람을 함정에 빠뜨린 것이 오래되었습니다. 속이 무엇인가요? 무릇 도의(道義)를 헤아리지 않고 시절을 따라 스스로 편한 것이 곧 그것입니다. 오직 스스로 편한 것이 그 소재이기 때문에 쉽게 빠져들고 나오기가 어렵습니다. 그리고 도를 헤아리지 않기 때문에 천만 악과 사특함이 모두 여기에서 발생합니다. 요사이 음성 오진영 일파의 무함(誣陷)질과 패악이 세상의 재앙이 된 것은 결국 스스로 편함을 헤아린 것도 아니면서 크게 제멋대로 한 것이니 심히 두려운 일입니다. 진실로 마음으로 세속의 생각을 끊고 몸으로 세속의 습속을 끊는다면 말과 행동이 닦아져 시절에 따르지 않고 옛것을 본받으며, 스스로 편하지 않고 옛것을 쫓아 오로지 도의로 나아갈 수 있으니, 또한 어찌 고인(古人)을 기약할 수 없겠습니까? 이것이 나와 그대가 함께 힘써야 할 것이니 원컨대 서로 힘써서 일생을 마칩시다. 그대가 편지에서 말한 "상화(相火)가 병의 빌미가 되었다."56)라는 것은 아마도 학동들을 가르치다가 속이 답답해 그렇게 된 듯합니다. 그대처럼 견해가 밝은 사람이 그러한 병이 있을 줄 생각지 못했습니다. 대저 청년시절에 씩씩하게 도모할 것은 마음껏 유람하고 널리 배우며 천하의 좋은 인물들을 두루 사귀는 것입니다. 그렇게 견문을 넓히고 천하의 좋은 산수를 마음껏 보면서 문장을 계발시키는 것이 어찌 지극한 바람이 아니겠습니까? 다만 사람 사는 일에는 달고 쓰고 권면하거나 나태한 차이가 있습니다. 때문에 옛사람이 몸소 농사짓거나 품팔이하면서도 경전을 놓지 않은 자가 있었고, 오래도록 병을 앓으면서도 학업을 성취한 자가 있었습니다. 하물며 학동을 가르치는 일은 구속되는 일이긴 하지만 밝은 창 앞에 편안히 앉아 날마다 서책을 가까이하는 일이니, 농사짓고 품팔이하며 여러 해 병을 앓는 사람과 비교해보면 어찌 여력이 없겠습니까? 비록 자신보다 나은 이는 없다 할지라도 가르치면서 학업의 반은 얻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어찌하여 고뇌하고 마음을 태우면서 상화가 빌미가 되는 데에 이르렀단 말입니까? 소강절(邵康節 소옹)선생은 "분수에 편안하면 치욕이 없다."라고 하였고, 정자(程子)께서는 "이치를 따르면 넉넉하다."라고 했는데, 비록 그대는 "학문을 근심함이 절실하고 이욕에는 관여하지 않는다."라고 했지만 그 편안하고 순종하지 못한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그리하여 나는 "안분순리(安分順理)" 4글자가 그대의 화를 내리는 좋은 약재라고 말합니다. 의가(醫家)에서 말하는 독서를 금하고 생각을 끊는 것이 그대의 병을 치료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부디 유의하십시오. 다시 바라노니 여행이 편안하고 덕이 진보하여 안으로는 마음이 넉넉하고 밖으로는 몸이 건강하여 제 마음의 기도에 부응해 주기를 바랍니다. 辱書, 有以見卓然者義, 燁然者文, 斧破陰膽之同聲.義固已仰, 文之燁然, 今而後始見.愧夫前此猶不深知吾貞老也.充此之義之文而進, 雷厲風迅之前途, 嶽喬日朗之究境, 辨邪衛正繼聖開平, 卽其人焉, 何待乎環顧求覓? 明先師之道, 立春秋之義, 卽自我主之, 何待乎賴人? 至於此漢, 豈足爲有無, 陋劣膚淺, 猝當師門罔極之變, 一陰獨尊, 六陽壹鬱, 世無鄒聖拳踢之廓如也, 則顧此無似, 雖欲不爲能言之徒而得哉? 竊不自量, 竭力辨討, 至被大禍而不悔.明義淑世, 豈敢云然, 忘師附賊, 是懼是免.高明乃以無實之名, 非功之褒, 張皇鋪揚, 至有歸有依仰不阿所好等語, 何哉? 無乃不囿世風, 終難坐在裏許而不之覺耶? 抑以綱絶倫斁, 陷師黨賊, 滔滔皆是, 而尙有幾箇人拔出其流, 爲世道之幸, 志尙之同, 故悲喜交極而不覺傾倒歟? 然則高明之情, 亦可謂戚矣.盖來書中, 若溢美退托之屬, 無有以當鄙意者, 惟雖未能自期於古人, 亦不忍自棄於流俗之言, 爲切實由中, 螢然入耳, 戚然動心.而一與此漢之平日自待者相符, 何其幸歟? 噫! 俗之一字, 爲陷人穽也久矣.俗者何也? 凡不揆道義徇時自便者是己.惟其自便所在, 故易入而難出.不揆諸道, 故千惡萬慝, 皆從此生.至於近日陰震一隊之誣悖禍世, 究亦不揆自便之大肆也, 甚可畏也.苟能心絶俗念, 身絶俗習, 則發言制行, 將見不徇時而傚古, 不自便而從古, 粹然一出於道義, 亦何古人之未能期哉? 此吾與子之所共勉者, 願與交勖而終身焉.喩及相火作祟, 似因訓蒙鬱墊致然.不意吾賢昭明見解之有此也.夫在靑年壯圖, 縱遊博學, 交盡天下好人物.而恢斥聞見, 觀盡天下好山水, 而助發文章, 豈不是至願? 但人事有甘苦勸逸之殊.故古之人, 有躬耕行傭而帶經者, 積年善病而成業者.矧此訓蒙, 雖云絆縶, 安坐明窓, 日親簡編, 其視耕傭積病者, 豈無餘力乎? 雖云勝己則無, 又不有學半之益乎, 又何至於惱惱煎煎相火之作祟乎? 邵子曰安分無辱, 程子曰順理則裕, 雖切於憂學而非關利欲, 其不安且順則均矣.吾故曰安分順理四字, 是降火之良劑.醫家所云禁讀絶思, 非所以治美愼者也? 幸試留意.更祈旅安德進, 內腴外睟, 慰此心禱. 상화(相火)가……되었다. 심(心)은 화(火)에 속하는데, 심은 몸에서 가장 주요한 역할을 하는 장기(臟器)이므로 군주지관(君主之官)이라 하고 심화를 군화라고 한다. 상화는 군화와 상대되는 말로, 간(肝), 담(膽), 신(腎), 삼초(三焦)의 화를 통틀어 가리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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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재준에게 답함 병인년(1926) 答蘇 在準 丙寅 나는 졸렬하고 견해가 얕아 백에 한 가지도 잘하는 것이 없어서 본래 남의 본보기 될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도 스스로를 헤아리지 않고 음성의 적들을 주토(誅討)하여 첩첩 깊은 재앙의 그물에 빠져들었습니다. 그리하여 친척이나 지인들도 두려워서 피하며 감히 가까이하지 않는데, 고명한 그대께서 일찍이 교분이 없었는데도 먼저 편지를 주시니 참으로 정성스러움이 지극합니다. 게다가 "의를 높여서 굽히지 않고 바른 깃발을 높이 세우셨다."라고 찬탄하시고 "성인 공자께서도 광(匡)땅에서 경계하는 마음을 두시고 진(陳)땅에서 곤액을 당하셨다."라고 위로해 주셨습니다. 돌아보건대 비록 이를 감당하지 못하겠지만 그대의 높은 풍모는 실로 오늘날 처음 보는 바입니다. 또 오진영의 죄를 논하면서 "도깨비 같은 놈이 스승을 무함(誣陷)하고 도리어 주인을 물어서 양기를 사라지게 했다."라고 판단하시고, 저에게는 "형벌을 받더라도 웃음을 머금고 만년의 절개를 성취하기 바란다."라고 힘을 실어주셨습니다. 이것이 곧 옛날에 이른바 "인자(仁者)만이 사람을 미워하고, 군자(君子)만이 사람을 사랑할 수 있다."라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우러러 공경하고 굽어서 사례하는 것이 단지 높은 풍모가 사람을 감동시키기 때문만은 아닙니다. 그대는 나이가 아직 젊은데도 견해와 덕이 이와 같으니, 훗날 마침내 선사의 도를 전하고 7일의 우레 소리를 울릴 자가 두류산(頭流山) 아래 용성군(龍城君) 보절방(寶節坊)57)의 소재준(蘇在準)이 아니겠습니까? 그대의 편지 가운데 "기질을 바로잡기 어려워 사욕이 틈을 타고 일어나며, 깊은 분노가 절로 가득차서 전전긍긍하며 편치 못합니다." 등의 말이 있습니다. 이는 편지가 왕래하는 가운데 저절로 나오는 의례적인 말이 아니고, 실제 애써 공부하고 맹렬히 성찰한 깊은 체험에서 나왔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한 마음과 능력으로도 먼저 어렵게 여기는 것이 이와 같기 때문에 그대의 견해와 덕이 그처럼 클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을 확충해보면 전면의 성취를 헤아릴 수 있습니다. 그 때문에 내가 "끝내 선사의 도를 전할 수 있는 사람이 바로 그대이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아! 세간의 영재가 적은 것은 아니지만 시대의 풍조를 초탈하여 이 도에 뜻을 둔 자는 드뭅니다. 도에 뜻을 둔 자는 있지만 탁연히 독립하여 시종일관 절개를 지킨 자는 더욱 드뭅니다. 이 때문에 천하 사람들이 똑같은 길로 도도히 흘러서 그 파란을 돌이키고 그 역류하는 물길을 막는 이가 없습니다. 그대는 재주와 뜻이 모두 우뚝하여 이러한 사실을 개탄한지 오래되었을 것입니다. 그리하여 세상의 타락한 풍속을 일으키고 도탄에 빠진 천하를 구제하고자 생각했을 것입니다. 나는 장차 우뚝 솟은 두류산의 빼어난 경치를 그대의 흔들리지 않고 꺾이지 않는 덕과 비교해 보겠습니다. 오직 그대는 더욱 힘쓰시기 바랍니다. 편지에서 이르길 "여러 사람들이 모인 가운데 내 얼굴을 한 번 보았다."라고 했는데 나는 그대의 눈길에 화답조차 못했습니다. 또한 서로가 먼 거리에 있기 때문에 서로 강학하는 것도 기약할 수 없으니 어찌 답답한 마음을 가눌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글은 마음의 소리이고 글씨는 마음의 획이며, 마음은 내면이고 얼굴은 외면입니다. 이미 그 마음을 얻었으니 얼굴을 못 본들 무엇이 슬프겠습니까? 하물며 그 마음의 소리와 마음의 획으로 구해본다면 그대의 모습과 풍채를 오히려 상상할 수 있습니다. 그것으로 나 스스로를 위로할 따름입니다. 走陋拙踈淺, 百無一能, 本不足爲人取.竊不自量, 誅討陰賊, 深入重重禍網.人之親知, 亦且畏避不敢近, 乃高明先施於未曾通款之地, 極其殷摯.至以抗義不屈赤幟一竪贊之, 孔聖之畏匡困陳慰之.顧雖不敢當, 高明之高風, 實今之初睹也.且其所論震罪者, 直以鬼魊誣師反噬滅陽斷之, 所勗賤子者, 終以含笑斧鑊成就晩節望焉.是則古所謂仁者之惡人君子之愛人非耶? 仰欽俯謝, 又非但以高風之動人也.高明年尙少, 而之見之德也, 已如此, 他日卒傳先師之道, 轟雷聲於七日者, 非頭流山下龍城郡寶節坊蘇在準乎? 乃知書中氣質難矯, 私欲闖發, 深自憤懣, 兢惕不寧等語.非往復間自道例談, 實出眞地苦工猛省深體之餘.惟其之心之力, 先難之若是也, 故有之見之德之斯大也.充此而進, 前頭所就, 其可量乎.吾故曰卒傳先師之道者, 乃高明也.噫! 世間英才, 不爲少矣.能超脫時風, 而志乎斯道者鮮矣, 志乎道者有矣.能卓然獨立終始一節者, 尤鮮矣.此所以滔滔一轍, 回瀾障川之無其人也.高明才志俱卓, 慨歎乎此者蓋久.而思欲以起末俗之衰, 濟天下之溺也.吾將以屹屹頭流之秀色, 較看於高明撓不動摧不折之德也.惟高明加勉焉.來書謂一面陋顔於衆中, 而鄙於英眄, 和此亦無.遠地盍簪, 未易前期, 曷勝於邑? 然文心聲也, 筆心畫也, 心內也面外也.旣得其心, 未面何傷? 况持此心聲心畵而求之, 其風儀顔采, 猶有可想者乎.用是自慰而已. 용성군(龍城君) 보절방(寶節坊) 일제 강점기 때의 행정구역 명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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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옥범 진에게 답함 병인년(1926) 答房玉範珍 丙寅 대상(大喪)58)의 졸곡(卒哭)은 7개월 뒤에 지내야 하니59) 지금 법식을 따르지 않는 것이 지극히 옳고 지극히 옳습니다. 그러나 졸곡은 공적인 상(喪)이나 사적인 상을 막론하고 애통한 마음을 줄이는 일입니다. 더구나 예월(禮月)에 날을 점쳐서 따로 기일을 안배하는 경우가 아니라면 이는 곧 부장(報葬)하면서 졸곡의 기일을 기다리는 것이니 상순(上旬)이나 중순(中旬)을 써서 길일을 급하게 잡는다는 혐의에 가까워서는 안 되고 하순(下旬)을 써야 아마도 인정과 예의를 다할 듯합니다.선사께서는 무오년(1919년, 고종의 승하) 대상에 다음해 6월 18일을 졸곡의 기일로 삼으셨는데, 이는 월초부터 9번 우제(虞祭)60)를 지내는 달을 계산하여 그러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저의 주제넘은 소견에는 "부장한 경우 서둘러 우제를 지내고, 졸곡제는 예월을 반드시 기다려야 한다.61)"라고 예경(禮經)에 드러난 이상, 졸곡을 지낼 달에서 우제를 지낼 날짜를 뒤미처 계산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감히 이번 9월 하순 중 강일(剛日)을 골라 모여서 망곡례(望哭禮)를 지내겠습니다. 평소 선사께 미처 여쭈어 질정하지 못한 것이 절로 안타깝습니다. 大喪卒哭之宜用七月, 而不從今式, 極是極是. 而卒哭, 無論公私喪, 是奪情之事. 況非禮月筮日之自有排期者, 乃是報葬而俟期者, 則不宜用上旬中旬以近渴吉之嫌, 當用下旬, 恐盡於人情禮意. 先師於戊午大喪, 以翼年六月十八日爲卒哭之期, 此則自月初計九虞月子而然. 然區區妄見以爲: "'報葬、報虞, 卒哭必俟禮月.' 旣著禮經, 則不必追計虞祭日子於卒哭之月也." 故敢於今番擇九月下旬中剛日, 相聚望哭. 自恨未及稟質於先師平日也. 대상 이해 4월 26일 순종 황제가 창덕궁에서 승하하였다. 임금의……하니 사(士)는 3개월에 장례하고 그 달에 졸곡제를 지내며, 대부(大夫)는 3개월에 장례를 하고 5개월에 졸곡제를 지내며, 제후(諸侯)는 5개월에 장례를 지내고 7개월에 졸곡제를 지낸다. 《禮記 雜記下》 김택술은 조선을 여전히 중국의 제후국으로 여긴 것이다. 9번 우제 이는 황제가 지내는 우제(虞祭)의 횟수를 가리킨다. 서둘러……한다 서둘러 장사 지낸 경우[報葬]에는 서둘러 우제를 지내고[報虞], 석 달이 지난 뒤에 졸곡제를 지낸다. 《禮記 喪服小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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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옥범에게 답함 병인년(1926) 答房玉範 丙寅 강론에 동참할 수 없다는 말씀은 비록 안타깝지만 그곳이나 이곳이나 모두 성현의 책이 있고 시비(是非)를 가리는 천성을 함께 갖추고 있습니다. 그러니 밝은 본심에 돌이켜 구하고 이치가 지극한 가르침에 질정한다면, 사람의 마음은 똑같이 옳다고 여기고,62) 선철(先哲)의 말씀은 나를 속이지 않아63) 가는 곳마다 환히 아는 것64)이 곧 여기에 있을 것입니다. 이는 믿을만 하니 멀리서 권면할 따름입니다.저더러 간옹[艮翁, 간재(艮齋) 전우(田愚)]의 진짜 제자라는 말씀은, 아, 이 무슨 말입니까. 선사께서 헤아릴 수 없는 함정에 빠진 것을 눈으로 보고도 분변(分辨)하고 토죄(討罪)하여 구제하지 못하였으니 함정에 빠트린 자만 패악한 제자일 뿐만 아니라 구제하지 않은 자도 패악한 제자임을 면치 못합니다. 제가 무함(誣陷)을 토죄한 것은 화를 당하여도 후회가 없으니, 패악한 제자임을 면하기만 해도 다행일 것입니다. 어찌 진짜 제자임을 감히 바라겠습니까. 未由同榻講貫之喩, 雖則可恨, 彼此皆有聖賢之書, 亦同具是非之性, 苟能反求本心之明, 質之理到之訓, 則人心之所同然, 先哲之不我欺, 觸處洞然, 卽此而在矣. 此可以相恃而遙勉爾. 艮翁眞弟之云, 烏是何言? 目見先師之陷於不測, 而不辨討而救之, 不惟陷之者之爲悖弟, 亦不救者之不免爲悖弟. 吾之討誣, 遭禍而無悔, 僅免爲悖弟卽幸矣. 安敢望眞弟也? 사람의……여기고 "사람들이 마음속으로 똑같이 옳다고 여기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즉 의리이다. 성인은 사람들이 마음속으로 똑같이 옳다고 여기는 것을 먼저 알았다. 따라서 의리가 우리의 마음을 즐겁게 하는 것은 마치 고기가 우리의 입을 즐겁게 하는 것과 같다고 할 것이다."라는 구절에서 인용하였다. 《孟子 告子上》 선철의……않아 맹자가 "공명의는 '주공이 문왕은 나의 스승이라고 했으니, 주공이 어찌 나를 속이리오.'라고 하였다."라고 한 구절에서 인용하였다. 《孟子 滕文公上》 가는……것 《논어(論語)》 〈위정(爲政)〉에 공자께서 "내가 안회(顔回)와 종일토록 이야기해 보니, 내 말을 어기지 않는 것이 어리석은 사람인 것 같았다.그러나 물러간 뒤에 그의 사생활을 살펴보니, 내가 말한 바의 이치를 충분히 드러내 밝히니, 안회는 어리석지 않구나!"라고 하신 경문(經文)에 "안자(顔子)는 자품이 침착하고 순수하여, 성인에 대해서 체단(體段)을 이미 갖추었다. 공자의 말씀을 들으면 묵묵히 이해되고 마음으로 깨달아 닿는 곳마다 환하여, 스스로 조리가 있었다."라고 주자가 주석을 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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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정 임장상학에게 보냄 갑자년(1924) 與碧亭林丈相鶴 ○甲子 근세에 상례의 강기[喪紀]가 다 파괴된 것은 단지 고려말엽과 같을 뿐만이 아닙니다. 그런데 유독 애장(哀丈)11)께서는 하얗게 백발이 된 연세에 수척하게 산에서 여막을 지키면서, 3년 동안 채소와 고기를 끊고 백년간의 부모님 은혜에 보답하여 오랑캐의 풍속으로 물든 세상에서 멀리 포은선생의 고행(高行)을 좇으니 보고 듣는 자들이 누군들 감탄하지 않겠습니까? 생각건대 훗날 예교를 주창하고 밝힘에 있어 시초가 되지 않음이 없을 것이니, 애장께서는 얼마나 다행이십니까?이로 인하여 생각해보건대, 부모를 예로써 섬기는 것은 한 가지 일의 효도이고, 도를 밝히고 덕을 이루는 것은 전체의 효도입니다. 오직 바라건대 예서(禮書)를 읽는 여가에 성현의 심법에 관한 글을 궁구하여 이른바 원대한 것을 구하여 몸으로써 그것을 체득하고 다른 사람에게 미루어 전수하며, 글로 써서 후배들을 깨우치시면 아득하고 은미한 실마리를 실추시키지 않을 수 있을 것이니, 이렇게 하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애장의 행실과 문망(文望)은 일찍이 흠모하며 우러러보던 바이고, '추운 겨울날의 송백[寒松]'과 '거센 물결 가운데의 지주(砥柱)' 같다 한 것은 또한 지난날 애장께서 평소 품으신 뜻을 우러러 헤아린 점이 있어서입니다. 그러므로 애장께서 한 가지 일의 효도가 이미 훌륭하다는 것으로 만족하는데 그치게 하고 싶지 않아서 감히 '전체의 효'를 제시하여 애장께서 더욱더 힘쓸 수 있는 바탕으로 삼게 하고자 합니다. 구구하게 스스로 선친과의 교분에 의지했으니, 살펴주시고 꾸짖지 마시길 바랍니다. 近世喪紀之壞盡, 不啻若麗氏之末葉也. 獨哀丈以皓然白首, 欒欒然守山廬, 絕菜肉於三霜, 報草心於百年, 遠追圃老高行於腥羶世界, 瞻聆攸暨, 孰不感歎? 意者異日禮教倡明, 未始不權輿乎, 哀丈也, 何其幸歟?因念事親以禮, 一事之孝也; 明道成德, 全體之孝也. 惟願讀禮之暇, 究觀聖賢心法之書, 以求所謂遠者大者, 體之身而推諸人, 著之書而牖諸後, 俾茫茫微緒, 得有以不墜, 如何? 哀丈之行治文望, 曾所欽仰, 寒松砥柱, 向又有仰揣雅志者. 故不欲以一事之孝已能者, 爲哀丈足, 敢以全體之孝, 贊哀丈加勉之資. 區區自附於先交之誼, 幸蒙鑑不讁. 애장(哀丈) 상중(喪中)에 있는 어른을 가리키는 말이다. '애(哀)'는 상을 치르는 자를 가리키는 말이며, '장(丈)'은 어른을 뜻하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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